전도에 대하여

2006. 6. 9. 22:49선교자료/1.글로벌선교회

 

              

                                        전도에 대하여


1. 무엇이 전도인가?

  전도란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인의 첫째가는 의무이다.(마가 16:15)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기쁜 소식(복음, Good News)을 전하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로마 4:25)


  굳이 하나님을 믿으라 전도한다면 무신론자에서 유신론자는 될 수 있을지 모르나(Church Goer) Christian 이 될 수는 없으며 그 자체가 복음은 아닌 것이다.  바울이 다마섹 도상에서 변화되기 전에는(행 9장) 하나님을 믿지 아니했는가?  사실 그는 그 전에도 하나님을 잘 믿는, 율법의 의로는 흠 없는, 골수분자(?)였던 것이다.  ‘회개'의 개념을 몰랐기 때문에 마치 “태평양을 헤엄쳐 건너 갈려는 무모함이었다”고 자기 자신을 평한 분도 있었다.

  한국어에 있는 모태신앙이란 말은 신약적인 말은 아니며, 우리는 예수님과 인격적이고 구체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중생을 강조하는(재침례파) 침례교인에게는 더구나 불합리한 말이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4-27).


  왜 죽을 고생을 하며 수륙 몇만리를 30년이나 다녔는가?  이는 곧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구약의 내용은 한마디로 말하면, ‘Coming Christ!'라 할 수 있으며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야가 왔다는 것을 전하려는 것이었다.(요한 3:16, 딤전 2:5)

  복음적(Evangelical)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인본주의(자유주의)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에 오래, 또 여러군데를 다녀도 복음을 들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2. 전도준비

  신앙은 논쟁의 대상이 안된다며 Christianity에 관한 변론을 세상에서 가장 미련하다고 비웃는 대학원 학생들을 여러 사람 보았는데, 이는 천만의 말씀, 바울도 아테네에서 에비구레오 학파와 스토아 학파등 당대의 석학들과 대토론을 전개하였다.(행 17:17-18)  또 그전에는 다마섹 도상에서 회심 후 3년간 아라비아에서 준비가 있었다.(갈 1:17)

  먼저 전도자 자신이 거듭난(Born Again) 체험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도 성령을 받고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행 3:6)  18세기 영국, 휫필드(1714-1770)의 능력 있는 설교는 그 자신이 먼저 성령으로 신생의 경험을 얻었으며 성령이 그의 속에서 역사하시는 결과였던 것이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1703-1791)가 Methodist 라는 별명을 듣기는 실로 26세 부터(목사 안수는 1725년)였고, 미국 조지아주에도 선교사로 왔었으나(1736년) 실패하였다.  1738년 올더스게잇 거리에서 중생의 체험을 얻은 그는(5월 24일, 밤 8시 45분) 비로소 능력있는 설교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1738년 6월 11일 옥스포드 대학, 설교제목: “너희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전도자는 성경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에 근거한 교회사, 조직신학은 말할 것도 없고 현대의 각 신학 사조와 여기에 대한 각각의 문제점, 그리고 여러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학적 최고수준에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는 특히 지식층에 있는 사람에게 전도할 때에 필요하다.  신학서적만도 보수 정통의 것을 골라 최소로 잡아도 200권 이상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 월간지도 최소 5종 이상은 계속 읽어 교계 소식에도 밝아야 한다.  그리고 세상신문과 잡지도 10여가지를 한꺼번에 매월 구독하고 기타 세상의 종교라는 것을 비롯한 일반계시(자연신학)도 충분히 알고 즉시 체계적인 답변을 할 수 있어야 한다.  6년 넘게 개근하다시피 성경공부한 평신도들이 불가항력적 은혜(Irrestible Grace)가 무어냐? 고 물어 평신도들의 성경공부 문제점을 통감한 적이 있다.  평신도들이 일반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점들이 있는데 이것은 다음 기회에 한꺼번에 따로 정리 하기로 한다.

  여러해 전, 아주 좋은 인상을 가지고 Christianity 에 대해서 무엇이든지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몇 분 있었는데 당시 말씀에 대한 조직적 이해(행 18:26)가 부족하여 사회봉사 활동(?)만 실컷(?) 한 경우가 있었다.  이것을 쉽게  “스스로 고기 잡을 수 있도록 고기 잡는 방법은 안 가르쳐 주고 고기만 계속 공급해 주는 것”이라고 비유한다.  이것이 자유주의자들이 “교회의 목적은 사회봉사(Community Service)이다."라고 주장하는데에 있어서의 문제점이다.  또한 빈민촌 선교 10여년의 경험을 가진 목사님도 ”빈민의 문제는 경제적인데 보다 정신적, 영적인데 있다.“고 말한바 있다.  덧붙여, 도울 때에는 성경의 말씀대로 믿는 자를 더욱 도와야 한다.(갈 6:10)


3. 전도 대상과 실행

  전도 대상자는 일단 말씀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마태 7:6)  영적 갈증의 상태(마태 5:3,4)는 겉으로는 알아 차리기 힘들어 훈련이 필요하다.  사과쥬스, 오렌지쥬스를 실컷 마신 사람에게 물 한 컵을 또 권할 때에는 “너나 마셔(너나 잘 믿어!)!”라는 소리를 듣기 쉽다.  또 몇 해 전 추수 감사절에 교회에서 예배 후 친교 만찬이 있어서 교회 안 다니는 어떤 사람에게 동참하기를 섣불리 권유했다가 “이사람, 교회는 성경책 들고 가는데지, 뭐 먹으려고 가고 그러는 데가 아니야!”하며 책망을 해서 오히려 무안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전도하고 싶은 상대라 말씀을 자꾸 전하고 싶은데 그러지도 못하고 두어번에 그쳤는데 나중에 놀랍게 변화된 경우도 몇번 있었다.(고전 2:14, C. I. Scofield Reference Bible, John 3장 주석 참조, 영적소경과 중생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죄인 됨을 알고 회개하는 데에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자가 된다는 것은세상적으로 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가치관의 일대 변혁이요, 삶의 양태에 대한 방향 수정이므로 타협하고 설득해서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교회내(?) 전도도 필요하다.  교회는 나오되, 회개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Personal Savior)로 고백한 경험이 없는 이른바 Church Goer 가 그 대상이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닌 모태신앙인이라면서도 스스로의 입으로 위의 경험이 없음을 시인하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다.  여기에 대해서는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현대신서 39, 대한기독교서회, 특히 page 79-81, 247, 248과 8장 요한 웨슬레의 신생)을 읽어 보시면 뼈에 사무치도록 이해가 될 것이다.  위 모든 경우에 대한 설명은 성경에 너무나도 잘 되어 있으니 주야로 성경을 가까이 두어 읽고 묵상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딤후 15:15-17, 시편 1:2)

  전도는 자기의 의를 전하는게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전할 때 때로는 거리낌을 당하고 미련스럽다는 말도 듣게 된다.(고전 1:23)  또 때로는 신중을 기하다 보면 오히려 여러 사람으로 부터 수차례에 걸쳐 자기에게는 왜 전도 안 하느냐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하는 것이다.(딤후 4:21)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 길에서 떠나게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찿으리라.”(에스겔 33:8) 또한 전도는 “빵조각을 발견한 거지가 이 기쁜 소식을 동료 거지에게도 알려주는 것”이라고 비유한 전도인도 있는데 “너는 배추뿌리나 먹어라!” “나는 인삼을 먹으련다.”는 식의 태도는 옳지 못하다.  태만의 과실을 범하는 것이다.(마태 25:26)  S 신학대학 교수인 그 경멸인이 다니는 교회의 Constitution 에 보니 Aggressive Testimony(적극적 전도)를 믿는 자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었다.  옳은 말씀이다.  성령이 역사하시면 수줍은 사람이라도 담대히 노방전도도 할 수 있는 것이다.(로마 1:16)

  문서선교 또한 지극히 중요하다.  문서운동(초대량)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난 2년여 동안 여기에 전력한 바 있는데 큰 효과를 얻었다.  보수 신앙인이-물론 잘 하는 사람도 있지만-대체로, 이 문서운동과 교회 행정에 약한 것이 큰 문제이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평신도인 스튜어트 형제의 헌금에 의한 문서운동은(300만부) 미국신학의 판도를 일시 바꾸어 놓기까지 하였다.  경험에 의하면 반응은 15% 정도이다.  그래서 100명에게 전도지 등을 우송하여 18명이 어떤 반응을 보이면 18% 성공이 아니라 120%(18/15) 성공이라고 보는 것이다.  85%는 Junk Mail 로 간주되어 버려질 각오를 하고 많이 뿌려야 한다.(누가 8:5-15)  문서운동에 과감한 투자를 하여야만 한다.

  전도에 무슨 별다른 요령(?)이라도 있는 줄을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은 부지런히 많은 씨를 뿌리는 것이다.  여기에 가장 모범적이었던 분이 “예수!, 천당!”의 권능 최봉석 목사님(1869-1944, 옥중순교)이시다.  문서운동에 덧붙여 그 내용이 충실하면 더 할 나위가 없겠다.  많은 공부를 꾸준히 계속하여 문서운동의 내용을 충실히 하여야 한다.  서점에 주문하여 50여 종류의 전도지를 받아 내용을 점검하여 보니 쓸만한 것이 단 한 종류(고전 1:21-25를 그대로 쓴 것) 밖에 없어 크게 실망하였다.

  개인전도, 문서운동, 전화선교, TV, 벽보(세탁소), 신문광고등 선교방법을 입체적으로 다양화해야 한다.  당장 눈에 띄는 결과를 기대하기 보다 꾸준히 씨를 뿌려야 한다.  (누가 8:5-15)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한다.(딤후 2:5)  하나님의 방법이란 자유주의자와 협력하여 전도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근거: 에베소 5:6,7, 로마 12:2, 16:17, 디도 3:9-11, 고전 7:14, 요한 일 4:1, 요한이 10, 11, 고후 6:14, 데후 3:14, 딤후 3:5)  여기에 대한 말씀에 근거한 충분한 설명이 'Biblical Separation Defended'(Gary G. Cohen 지음,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Michigan, $ 1.75, 주문처 (616)957-3110)에 되어 있다.  “원칙은 그러하나...”라며 토를 다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는 하나님의 방법 그 이상의 나은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양떼들에게 혼동을 주어서는 안된다.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고전 8:9-11)”를 우리 모두 늘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How to Know Man?


  To Know Man is vital to a worker.  When someone comes to us, we must discern his spiritual     condition, his nature, and the extent of his spiritual progress.  We must determine whether he has said what  is really in his heart and how much he has left unsaid. Further, we should perceive his characteristics-whether he is hard or humble, whether his humility is true or  false.  Our effectiveness in service is closely related to our discernment of man's spiritual condition.  If   God's Spirit enables us through our spirit to know the condition of the person before us, we can then impart  the appropriate word.

  In the Gospels we find that whenever men came to our Lord, He always had the right word.  This is a marvelo-us thing.  The Lord did not talk to the Samaritan woman about new birth, nor did he tell Nicodemus of living   water.  The truth of the new birth was for Nicodemus,  while the truth of the living water was for the Samari-tan woman.  How appropriate they w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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