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가산 (신34:1-12)

2006. 1. 27. 23:58목양자료/3.강해설교

비스가산 (신34:1-12)
초점:소망

요 약
비스가산은 간절한 두 종류의 소망이 서려 있는 산이다. 하나는 모압왕 발락이 발람을 통하여 수 없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시도했던 좋지 않은 소망이다. 적용해 보면 이것은 자기 심령을 저주하는 죄악의 소망이다. 사람들이 제제를 뿌리치고 탐욕의 열망으로 자기 심령을 죽이고 있다. 다른 하나는 꿈에도 그리며 사모하던 모세의 가나안을 향한 소망이다. 이처럼 성도는 가나안 단계의 심령 천국을 갈망해야 하고 나아가 궁극적인 천국을 소망해야 한다. 즉 두 종류의 소망이란 사는 소망과 죽는 소망인 것이다.


이 시간에는 비스가산입니다. 비스가산은 사해 동쪽 여리고 맞은 편 모압고원에 우뚝 솟아 있는 해발 700미터의 산입니다. 이 산은 느보산을 올라가 이 비스가산 꼭데기로 올라간 것을 보아 느보산의 한 봉우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산은 모압 나라의 산입니다. 이 산은 모세가 최후로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죽은 산으로 유명합니다. 이 시간에는 이 비스가산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이 산은 소망의 산입니다. 이 산은 전망이 좋아 내려다 보기 아주 좋다고 합니다. 본문 2-3절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것을 보면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남방과 종려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이 산에서 여리고까지는 27km인데 그 이상으로 보였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이 산에 올라가면 이스라엘 전체가 보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산에서는 두 종류의 간절한 소망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 저주받아 망했으면 하는 모압왕의 소원이요, 다른 하나는 모세가 가나안땅을 바라보며 들어가지 못해 가나안에 들어갔으면 하고 소망하고 소망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도 두 종류의 소망이 있는데 비스가산에 나타난 두 종류의 소망이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좋지 않는 소망입니다.

민22:41에 "아침에 발락이 발람과 함께 하고 그를 인도하여 바알의 산당에 오르매 발람이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까지 보니라" 했습니다.
무엇을 하려고 이 산에 올라갔습니까?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 민수기의 사건은 모압왕 발락이 발람선지자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애쓴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압왕 발락은 이스라엘이 아모리를 멸한 사건을 접하고 이스라엘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민족이기 때문에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이므로 이스라엘을 이기려면 그들을 저주하는 수밖에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멀리 메소포다미아 지방의 브돌에 사는 발람선지자를 많은 예물로 초청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저주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이 사실을 볼 때 그들의 잘못된 소망이 얼마나 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발람이 이 산에 오도록 두 번이나 사신이 값진 예물을 보내어 설득하고 또 여호와께서 저주하지 말라고 세 번이나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또 나귀가 입을 열어 발람을 책망하기까지 했습니다. 산에 올라와서도 두 번이나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나타나셔서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복잡한 과정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심에 대한 교훈을 보여줍니다. 나아가 이 과정은 모압왕 발락이 여호와께서 그토록 막으시고 막으시는 대도 얼마나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싶었는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모압왕의 저주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계2:14을 보면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발람이 차마 저주는 못하고 그 대신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미혹시켜 우상을 섬기게 하고 모압여인들을 통해 행음토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을 구태여 손대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반드시 멸망시키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민 25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싯딤에서 모압여인들과 행음하기 시작하여 채찍맞아 염병으로 죽은 자가 2만 사천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토록 소망하던 모압왕 발락의 소망이 발람을 통해서 부분적으로나마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잘못하면 범할 수 있는 잘못된 소망입니다. 그 소망은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는 탐욕의 소망입니다. 이 육신적 탐욕의 소망이야 말로 영혼이 저주받으라고 하는 잘못된 소망입니다. 그러나 모압이나 암몬은 롯의 후예로서 이스라엘과 가까운 친척입니다. 이들은 동편 요단에 거하면서 목축을 하며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멸하지 말라고 하신 민족입니다.
이 모압은 영적으로 보면 우리 육체의 상징입니다. 육체는 영혼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육신적인 것은 멸할지라도 육체 자체를 멸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육체는 건강하게 잘 보존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압의 소망은 결코 들어 주어서는 안되듯이 육체가 추구하는 탐욕의 죄악의 소욕은 들어주어서는 안됩니다. 발락이라는 의미가 '파괴자'라는 뜻이듯이 탐욕은 우리 심령을 파괴하고 죽이는 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성숙해지면 육체도 우리 신앙생활에 좋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죄악의 미혹에 넘어갈 수 있는 위험 속에 있기 때문에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엡2:3에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라고 했습니다. 즉 불신앙의 때에 잘못된 소망인 죄인들의 육신적인 마음의 탐욕을 잘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소망이 육신적인 탐욕의 소망이어서는 안된다는 교훈입니다. 바로 비스가산이 이런 잘못된 간절한 소망이 서린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막으심으로 저주는 못하고 축복만 했지만 발람은 이스라엘을 죄악으로 타락시켜 멸망시킬 방법을 모압왕에게 가르쳐 주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미혹되어 범죄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열병의 채찍에 맞아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세상의 탐욕 때문에 얼마나 마음의 열병에 들어 심령이 죽어가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열병으로 말미암아 열병의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성경은 요일2:15-17에서 이렇게 교훈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2. 우리가 가져야 할 소망은 좋은 소망이어야 합니다.

그 소망을 이제는 모압의 소망이 아니라 모세의 소망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 비스가산에서 저 건너편 가나안을 바라보고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산은 모세가 이곳에서 최후로 가나안을 바라보며 죽은 산으로 유명합니다. 이 싯점에서 신33:29의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한 그의 말이 귀에 쟁쟁합니다. 가나안이 어떤 곳입니까?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모세가 그토록 사모하고 사모하던 곳이 아닙니까? 얼마나 소원이었으면 여호와께서 이곳으로 그를 인도하여 그 곳을 바라다라도 보게 하셨을까요? 그 때 들어가지 못하는 모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이처럼 성도는 이 지상을 살면서 모세와 같이 저 하나님 나라를 간절히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저 비스가산의 모세의 육신처럼 이 땅에 묻히게 될지라도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저 소망의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먼저는 신앙의 가나안 단계를 항상 소망하며 사십시다. 우리는 마음의 천국을 위해서 항상 노력해야 합니다. 신앙을 이스라엘의 구속사에 비유해 본다면 애굽단계가 있고 광야단계가 있고 가나안단계가 있습니다. 이것을 모른 사람들은 무슨 애굽 광야 가나안 단계가 있느냐 하지만 바울도 홍해를 중생사건에 연결시키므로 이스라엘의 구속사와 우리 구원의 서정과의 밀접한 관계를 교훈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나안은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장차 갈 천국을 예표합니다. 그러나 가나안의 31왕과 칠족속을 멸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 가나안은 죄도 사단도 없는 천국의 예표라기보다는 오히려 이 지상을 살아가면서 마음의 죄의 속성을 죽이고 마음 속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성화적 관점에서의 교훈의 성격이 더 강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이것을 실현된 종말론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어 천국이라는 궁극적 계념과 아울러 살아서 이루어야 할 성령 안에서의 천국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일을 마치 모세가 그토록 소망했듯이 소망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나아가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도 그렇게 소망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 것인가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어야 합니다. 또한 이 소망은 부할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죽는 그 순간까지도 모세는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잃지 않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볼 때 얼마나 신비합니까? 지난 번 그리심산을 통해서는 축복의 원리가 있었는데 그리심산에서는 소망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마음의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짜맞출려고 해도 성경이 그렇게 흘러가 주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 속에는 이 두 종류의 소망이 존재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모압왕 발락의 소망과 이스라엘의 모세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이제 죽고 없어질 탐욕된 죄악의 모압의 소망은 사라지고 대신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모세의 영광된 소망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소망은 곧 타인의 소망이 아니라 곧 우리 속에 나타나는 소망의 예표입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소망하며 살고 있습니까? 죽고 없어질 죄악의 세상적인 탐욕의 소망입니까? 아니면 쇠하지 않고 영원한 신령한 소망입니까? 우리 모두 죄악의 소망은 사라지고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소망으로만 충만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양자료 > 3.강해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브론산 (수15:1-12)  (0) 2006.01.28
할례산 (수5:2-9)  (0) 2006.01.27
에 발 산 (신27:1-26)  (0) 2006.01.27
세일산 (신2:1-9)  (0) 2006.01.27
호렙산 (출3:1-12)  (0) 2006.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