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산 (신2:1-9)

2006. 1. 27. 23:54목양자료/3.강해설교

세일산 (신2:1-9)
초점:지상생활론

요 약
에돔땅을 지날 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여러 수칙은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영적 지침을 예표한다. 즉 두루 행하라 하심은 인생의 교훈을 깊이 깨달으라 하심이요, 돌이켜 가나안으로 가라는 목표를 주심은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라 하심이요, 지나가라 하심은 나그네의 심정으로 세상을 살라 하심이요, 그들을 접촉시 조심하라 하심은 세상에 마음 빼앗기지 말라 하심이요, 받은바 축복을 생각하며 양식과 물을 사서 마시라 하심은 세상에서 살되 주의 은혜를 기억하며 봉사하며 살라는 교훈이시다.


이 시간에는 세일산이라는 제목으로 세일산에 담긴 교훈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세일산은 이스라엘이 광야 여정 중에서 비교적 오래 머물렀던 장소입니다. 이 땅은 야곱의 형 에서가 살았고 그리고 그의 후손인 에돔 나라가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다른 곳과는 달리 이 세일산을 지날 때 지켜야 할 수칙을 몇 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에돔 땅을 지나가는 수칙은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영적수칙에 대한 예표입니다.

그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어떤 수칙을 말씀하셨을까요?
1. 이 땅을 두루 행하라는 수칙이었습니다.

1-3절에 "우리가 회정하여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홍해 길로 광야에 들어가서 여러날 동안 세일 산을 두루 행하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고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산을 두루 행한지 오래니" 라고 했습니다.
여기 두루 행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렇게 인도하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나타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행하는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두루 행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방랑생활을 뜻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성도를 세상에 두신 목적은 이 세상의 만고풍성을 다 겪어 보면서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소년기도 겪어보게 하시고 청년기도 겪어보게 하시고 노년기도 겪어보게 하시고 기쁨과 슬픔과 행복과 고통을 다 겪어보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영생준비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생의 희노애락을 아는 자만이 영생의 기쁨을 진실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생길은 내가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사 경험케 하시는 길입니다. 그래서 욥은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생길의 인도자라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욥5:7에 "인생은 고난을 위해서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과 같으니라" 했습니다. 그것은 영생을 누리기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도 이러한 인생의 온갖 것을 경험하시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가난한 집에 나셔서 가난도 아시고 금식을 통해서 배고픔을 아시고 질고도 아시고 우리의 체질도 아시고 핍박의 고통도 아시고 죽음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하심이 바로 인생의 방랑의 삶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첫째의 수칙처럼 우리 인생이란 무엇인가 깊이 깨닫는 성도되시기를 바랍니다.

2. 여기서 돌이켜 북쪽 즉 가나안을 향해서 가라는 수칙이었습니다.

3절 하반절에 "돌이켜 북으로 나아가라" 했습니다.
여기 북쪽이라 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앞 길을 북쪽에 있는 에돔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에돔을 돌이켜서 가나안을 향해서 나아가라는 명령입니다.
이처럼 지상을 살아가는 성도는 항상 본향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게 인생을 살았습니다. 히11:13-16절에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했습니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살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바울도 지상을 살면서도 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간증한 고백이 무엇이었습니까? 빌1:21-24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이것이 바울의 간증이었습니다. 이 땅을 사는 성도의 두 번째 수칙은 저 본향 천국을 바라보면서 그리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는 동안 천국 찬송을 많이 부르며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천국에 대한 간증집을 여러 권 사다 놓고 어려울 때마다 읽었습니다. 그 때 지상에서의 고통을 이기는 새 힘을 얻게 됩니다.

3. 이 땅을 머무는 곳이 아니라 지나가는 곳이라는 수칙입니다.

4-5절에 "너는 또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세일에 거하는 너희 동족 에서의 자손의 지경으로 지날진대" 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일산을 지날 때는 장막을 견고히 쳐서는 안됩니다. 세일산은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일'이란 의미가 '털이 많은' '수목으로 뒤덮힌' 이란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이름은 한 때 이 지역을 뒤덮었던 울창한 산림에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황량한 사막에서 이런 숲을 만나는 것은 천국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서에 천국을 표현하기를 시내가 흐르고 강이 있고 꽃이 피고 나무가 열매 맺고 새가 노래하고 짐승들이 뛰어노는 것 등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 땅을 조금도 허락치 않으시고 이 곳은 지나가는 곳이라고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보다 더 아름다운 젖과 꿀의 가나안 복지가 준비되었기 때문입니다.
행7:15절을 보면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발붙일 만큼도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 땅을 자손에게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저 본향만 사모하고 살라고 그러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에게는 저 영생의 나라가 있기 때문에 이 땅에 소망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주셔도 때가 되면 다 놔두고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쌓는 사람은 나중에 그 허망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느낌은 롯의 처가 미련의 소돔 성을 빠져 나올 때와 같이 허무할 것입니다. 그 동안 쌓아 놓은 모든 것들을 불태워 버릴 때 얼마나 허탈하겠습니까? 그래서 금기사항인 뒷을 돌아 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은 지나가는 곳일 뿐입니다. 그런데 눅 16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이 세상의 것으로 영혼의 만족을 삼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2:16-21) 하셨습니다. 이 곳은 잠시 지나가는 곳입니다.

다음, 그들과 접촉할 때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4-5절까지 보면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리니 너희는 깊이 스스로 삼가고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
여기 에서가 누굽니까? 야곱의 형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스라엘과는 형제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4절에 동족 에서의 자손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형제국 이스라엘을 돕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이스라엘의 진로를 막고 방해했습니다. 아무리 해치지 않겠으며 조금도 부담을 주지 않겠노라고 했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은 우리 육체가 난 나라요 우리 생명의 시작인 나라가 틀림 없지만 이 세상은 우리의 영적생활을 돕지 않고 도리어 가로막고 미혹하고 방해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 하므로 조심하라는 것은 언제 그들이 급습할지 모른다는 내용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항상 세속의 미혹에 조심해야 합니다. 조그만 방심하면 죄악의 성난 물결이 성도를 삼켜 버립니다. 야곱의 딸 디나처럼 세상에 관심 가지면 영적인 겁탈 당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제서야 자신의 잘못인줄 깨닫고 환난날 여호와께 서원하였던 대로 벧엘로 올라가서 제단을 쌓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이 인생길에 가장 안전한 삶임을 교훈합니다. 이 생활만 충실하다면 영적 겁탈은 결코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깊이 스스로 삼가라는 말씀처럼 항상 근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다투지 말라는 말씀처럼 죄악을 상관하지 않아야 합니다. 로마서의 교훈대로 의에 대해서는 산자요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라는 입장을 견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않는다는 말씀처럼 이 세상에 살기는 살지만 조금이라도 미련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다음에 성도는 세상에서 피해가 아니라 은혜를 끼치며 살 책임이 있습니다.

6-7절에 "너희는 돈으로 그들에게서 양식을 사서 먹으며 돈으로 그들에게서 물을 사서 마시라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행함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가 이 사십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였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셨다 하라 하시기로" 했습니다.
여기서 돈으로 양식과 물을 사서 마시라는 것은 조금도 피해를 끼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서 마시라는 이유가 7절에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40년 광야생활 동안에 하나님께서 네게 부족함이 없도록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사먹을 수 있는 힘을 주셨다는 의미와 함께 은혜를 많이 받았으니까 이제는 은혜를 베풀라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즉 이렇게 하나님께 받은바 은혜를 생각하며 그들에게 넉넉히 내고 사서 마심은 좀 더 나아가 형제의 나라를 돕고 그들을 부하게 만들라는 적극적인 뜻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었지만 에서를 속이고 장자의 명분과 축복을 빼앗은 야곱을 생각해서라도 복을 베풀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으면 이제 세상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 성도의 지상 사명이 나타납니다. 이 세상은 모두 아담 후손으로서 모두 한 형제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영원히 함께 살지 못할 백성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들에게 피해를 끼쳐서는 안되며 그들에게 항상 은혜를 끼쳐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지상 생활의 삶의 수칙입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세상살이는 마치 이스라엘이 에돔의 세일산에 잠시 머물렀던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내신 이 세상살이의 수칙을 잘 지키십시다. 세상은 영원한 거처가 아닙니다. 우리는 나그네요 방랑자요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마음 두지 말고 저 천국을 소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자들이므로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은혜를 크게 끼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지혜로운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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