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발 산 (신27:1-26)

2006. 1. 27. 23:55목양자료/3.강해설교

에 발 산 (신27:1-26)
초점:축복과 저주


요 약
에발산은 여호와의 율법이 명백히 나타난 산이며 이스라엘이 율법을 조목 조목 저주로서 맹세한 언약의 산이다. 이렇게 한 것은 가나안은 새로운 언약의 땅이요 하나님의 율법이 시행되어야 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머물 수 없는 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우리 삶에서 명백히 드러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그런데 율법의 신약적 의미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성령충만 받아 이 신령한 법을 소유한 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누릴 자격자가 되는 것이다.

(* 내용을 요약처럼 보완할 것)
오늘은 에발산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 지시하시기를 장차 가나안에 건너가거든 그리심산과 에발산에서 축복과 저주를 각각 선포하라고 하신 말씀이 본문입니다. 이 두 산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둥그렇게 나란히 서 있는 산입니다. 에발산은 '벌거벗은' 이라는 뜻입니다. 신기한 일은 이름 그대로 축복의 그리심산은 숲으로 울창한데 저주의 에발산은 무슨 일인지 수천년 동안 나무 한그루 보기 힘든 벌거숭이 산입니다. 바로 그런 배경을 통해서 여호와께서는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리심산과 에발산은 신령한 의미로는 우리의 심령동산을 예표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그리심산처럼 축복의 동산이 되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에발산과 같이 황폐하게 되어진다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왜 에발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저주로 맹세케 하셨을까요? 그것은 절대로 저주 받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절대로 저주받지 말고 축복만 받으라는 강조형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지옥을 소개함은 지옥 가라는 의미일까요? 절대로 가선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또한 잘못하면 저주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럼 우리 심령이 저주받지 않고 축복의 동산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 마디로 축복과 저주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나타납니다. 시편 1편도 그렇고 신명기 28장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저주의 산인 에발산에 하나님의 말씀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이 산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되 모두 나타난 산입니다.

1절에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명령을 너희는 다 지킬지니라" 했고 3절에 "이미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하셨습니다.
많은 주경학자들이 이 부분을 613까지 율법을 다 기록하라는 명령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도 빼놓지 말고 다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말씀의 일부분이라도 가감해서는 안된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계22:18-19에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하셨습니다.
마5:18-19에도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셨습니다.

2. 이 산은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드러나되 명백히 드러난 산입니다.

2, 4절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는 말씀이 있고 8절에도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명백히 기록할지니라"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돌들 위에 석회를 바르게 하신 것은 글씨가 명백히 보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모든 말씀을 기록하되 명백히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신령한 의미에서 볼 때 성경을 잘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지만 그 뜻이 희미해서는 안됩니다. 유대인들이 축복을 받지 못하고 저주를 받은 이유는 성경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그 속에 담겨 있는 복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하고 편견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막12:24) 하셨고, 요5:39-40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셨으며, 고후3:13-16에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했습니다. 그들은 완고하여 이렇게 성경을 명백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3. 이 산은 인간의 손길을 용납하지 아니한 산입니다.

5-6절에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대지 말지니라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을 쌓고" 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철기로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세워서 그 위에 말씀을 기록케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배경에 결코 인간의 손길을 용납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을 인간의 생각대로 맘대로 고쳐서는 안된다는 교훈입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는 저주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근대에 와서 신신학의 등장으로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지 않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도 그의 말씀도 이적도 부인하고 하나님조차도 변형시켰습니다. 예를 들면 여성신학자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은 가부장적인 시대의 산물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은 잘못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단지 문화적 산물로 보는 모순된 것이며 이렇게 성경을 맘대로 인간의 칼날로 손질하면 많은 영혼을 파멸로 이끄는 큰 죄가 됩니다.
어느 자유주의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에게 이런 신신학을 가르쳤는데 어느 학생이 그런 하나님이라면 신학교 다니지 않을 뿐 아니라 나 이제부터 하나님도 믿지 않겠다고 봇짐을 싸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교수가 그 학생에게 사과를 하고 아무리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18:6-7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라고 경고하십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한 영혼을 잘못 인도하면 그 인도자의 죄는 실로 큰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밖의 거짓선지자도 문제이지만 자기 안의 인간의 생각이라는 거짓선지자가 더 문제입니다. 이 인간의 생각은 거머리처럼 매일 매시 성경 말씀을 의심하고 왜곡시키고 진리의 말씀에 얼마나 인간의 손길을 대는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심령이 복받지 못합니다. 진리에 서지 못해 당하는 영적 방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8:20-22에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 그 주릴 때에 번조하여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 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 하셨습니다.

4. 이 산에서 말씀에 복종하기로 조목 조목 맹약했습니다.

10절에는 복종하라는 말씀이 있고 14절부터는 큰 소리로 조목 조목 말하는 레위 사람들 앞에서 백성들이 그 조목마다 아멘으로 화답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6절에서는 결론적으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아멘으로 맹세하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복종하고 지켜야 합니다. 이 말씀대로 지키지 않으면 저주가 임합니다. 여기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5절에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실재 우상이나 탐욕의 우상을 섬겨보면 심령부터 저주가 임해 괴롭기 그지 없습니다.
또 16절에 부모를 경홀히 여겨도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 부모는 육신의 부모도 되거니와 하나님 아버지와 어머니로 비유되는 교회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경홀히 여김은 물론이고 어머니와 같은 교회를 가볍게 여겨서는 영적으로 잘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영혼은 교회 떠나거나 경홀히 여겨서는 축복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바쳐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17절에서는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했습니다. 지계표란 땅 경계 표시를 가리킵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영적인 지계표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각인에게 주신 믿음의 분수대로 각각 지혜롭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지체를 존중하고 인정하라는 것인데 만약 나만 옳고 제일이고 필요한 존재라 생각해서 남의 위치와 달란트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영적 지계표를 옮기는 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나라에 유익을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단일성과 함께 다양성이 있으며 서로가 인정하고 협력할 때 축복의 동산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또 18절에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면 저주를 받는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즉 육적인 소경에 대한 교훈으로 영적인 교훈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적인 소경을 실족케 해도 죄악이거니와 영적인 소경을 잘못 인도해도 큰 죄가 됨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악인들이 얼마나 피를 빨며 교주노릇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신령한 해석은 바울에게서도 뚜렸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신25:4) 구약의 교훈은 곧 주의 일군들에 대한 교훈이지 어찌 하나님께서 소를 염려하심이냐(고전9:9) 바울은 반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나간 율법을 왜 들먹이느냐고 하지 마시고 율법에 대한 신령한 해석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또 19절에는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즉 약자라고 재판을 굽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객처럼 유리방황하고 고아와 과부처럼 외롭고 약한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이들은 은혜 받지 못해 아직 영적으로 어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재판에서 불리한 것처럼 영적 판단력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우리 속의 재판장이 더 문제입니다. 영적으로 어리면 판단하는 능력이 약하여 잘못된 결정을 내립니다. 그래서 내 영혼이 곤란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속의 재판부터 잘해야 심령은 축복의 동산이 될 수 있습니다.
또 20-23절까지는 계모나 짐승이나 자매나 딸이나 장모 등 비윤리적인 근친상간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실재로 있어서는 안되는 경악스런 일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넘어서는 안될 선이 있습니다. 신성불가침라인이 있습니다. 구약에는 기름을 발라서 모든 물건들을 거룩하게 했습니다. 이 기름은 성령의 상징으로 성령 기름이 발라진 것들은 다루는 예법대로 다루어야지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됩니다. 함부로 다루면 저주의 에발산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4-25절에는 살인에 대한 경고가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남을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디서나 남을 사회적 교권적 명예적 정치적 어떤 면으로든지 죽이는 편에는 서서는 안됩니다. 거짓말이 아니라 사실만 이용하여 죽인다고 해도 그 목적이 악하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남의 앞길 막으면 하나님께서는 내 앞길을 막으십니다. 남을 축복하면 내가 축복받고 남을 저주하면 내가 저주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이해해 볼 때도 그렇습니다. 에발산에 하나님의 말씀이 명백히 나타났듯 예수 그리스도가 성도들에게 명확히 나타날 때 그 자체가 완전한 복입니다. 우리 안에 찾아오신 예수님이 이제는 우리 인격 전체를 지배하실 수 있도록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죽어지고 예수로 주인 삼고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때 가능합니다. 예수가 있는 자는 복있는 자요 없는 자는 버리운 자입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에발산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교훈입니다. 에발산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타났습니다. 가장 복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사모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행하는 자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사울처럼 말씀을 버리다가 저주를 받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지키므로 복을 받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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