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르앗산 (창31:17-29)

2006. 1. 27. 23:51목양자료/3.강해설교

길르앗산 (창31:17-29)
초점:은혜

요 약
산이 좋은 의미로 쓰일 때는 대개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한다. 길르앗산이 그렇다. 그럼 성도의 은혜 받은 결과는 무엇인가? 악인 라반이 이 산에서 마음을 바꾸듯 은혜를 받으면 마음이 변화된다. 또 이 산에 서로 불가침의 돌무더기를 쌓아 언약하듯 은혜를 받으면 타락의 선을 넘지 않으려는 성향을 가진다. 또 이 산은 목축하기 좋은 비옥한 곳이듯 은혜를 받으면 심령이 살고 마음에 성령 강수가 넘쳐 흐른다. 그리고 이 곳은 변방으로서 대항의 역사였듯이 은혜를 받으면 죄악에 대하여 강한 저항력을 가진다.


오늘은 길르앗산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길르앗산은 요단강 동편에 있는 한 산입니다. 이 산을 길르앗산이라고 부른 동기는 야곱과 라반이 이 곳에서 이 경계를 넘어 서로 해하지 않기로 맹세하고 돌무더기를 쌓은 데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그래서 길르앗이란 "돌들의 기념물"이라는 뜻입니다. 역사적으로 길르앗산은 치열한 접전지역이었습니다. 이 시간에는 이 길르앗산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신령한 의미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이 산은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나타난 산입니다.

24절에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가라사대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했습니다.
라반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야곱의 외삼촌으로 아주 간사하고 완악하며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야곱이 이렇게 도망을 쳐서 나온 것은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거부가 되자 라반의 얼굴색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라반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지독한 사람인지 두 딸 주면서 14년이나 부려먹고 주야로 충성했지만 보답도 없을 뿐더러 너무나 인색하여 양 한 마리를 잃어도 용납해 주지 않을 뿐 아니라 품삯을 열번이나 속여 먹고도 모자라 하나님의 명령으로 야곱이 자기 곁을 떠나니까 그것마저 빼앗기 위해 야곱을 죽이려고 좇아온 것입니다.
야곱을 죽이고자 한 명분은 자기 딸들을 데리고 몰래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그를 떠난 것이고 자기 재산에 자기 아내들 그러니까 잘 못한 것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명분일 뿐이고 실재로 야곱을 죽이고자 한 것은 재산을 빼앗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의 꿈 속에 나타나셔서 말씀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라반은 야곱을 죽이지 못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완악한 심령에도 성령께서 나타나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면 심령의 문제는 해결이 됩니다. 우리 죄인의 심령의 완악함이란 라반과 같이 구제불능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는 뜻으로 예수 이름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사울도 예수가 나타나자 바울로 변했습니다. 어떤 죄인도 성령 하나님이 부어질 때 변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변화받는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길르앗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 이 곳은 서로 불가침의 맹세를 한 돌무더기를 세운 곳입니다.

44-55의 내용인데 51-52절만 보면 "라반이 또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너와 나 사이에 둔 이 무더기를 보라 또 이 기둥을 보라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 속에도 성령이 임하시면 견고한 신앙의 의지가 생겨납니다. 여기 돌무더기가 세워지기 전과 후는 아주 다릅니다. 야곱이 맹세하기 전에는 이 길르앗을 마음대로 넘어갔다가 다시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돌무더기를 세운 후부터는 이 경계선을 넘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50절에 나타난 대로 이 돌무더기를 쌓기 전에는 야곱이 당시 풍습대로 아내를 더 얻을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더 얻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이제 하나님 앞에서 라반과 맹세했기 때문입니다.
여기 맹세라는 말이 나오는데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교훈대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맹세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불완전한 인간의 맹세란 오만이요 기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맹세는 신약에서 성도들의 마음을 붙잡아 주시는 성령의 견고한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야 마음 속에서 흔들리지 않게 주장해 주시는 하나님의 붙드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돌무더기란 성령의 증거를 상징합니다. 전에 요단강 안팎에 세운 증거의 돌 열두개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었지만 우리에게도 구원의 객관 및 주관적 증거가 있습니다. 객관적인 증거는 죽으셨으나 다시 사신 하나님 앞의 예수 그리스도요, 주관적 증거는 우리 심령속에 임재하시는 성령의 인침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은혜받기 전에는 신자는 야곱처럼 마음의 신앙의 경계선을 넘어 범죄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후부터 달라지는 것은 마음을 지킨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아직은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이 범죄하지 않을 원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만은 온전한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은혜로서 굳게 함이 아름답다고 한 것입니다. 이 돌무더기의 놀라운 효과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도 이제 성령의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이 증거가 무엇입니까?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 속의 은혜의 척도가 바로 신앙의 척도입니다. 그래서 소성강의 환상에서 보여준 대로 성령의 은혜가 발등에 찬 사람은 교회만 열심히 나오는 사람입니다. 무릎에 찬 사람은 이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허리에 찬 사람은 이제 겸손하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머리 이상으로 넘친 사람은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나 깨나 그 환상과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받은바 은혜만큼 변화되는 것입니다.

3. 이 곳은 풍성한 물로 인해 비옥한 땅이요 목축하기 좋은 장소입니다.

민32:1에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 떼가 있었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 곳은 가축에 적당한 곳인지라" 했습니다.
또 이 산은 목축하기 좋은 비옥한 곳이듯 은혜를 받으면 심령이 살고 마음에 성령 강수가 넘쳐 흐른다.
아가서에도 "길르앗산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라는 구절에서도 그 비옥함이 잘 나타납니다. 이 부근에는 얍복강도 있고 아르논강 야르묵강도 있고 요단강도 있습니다. 삼하 17장을 보면 압살롬과 전쟁했던 산림지대인 에브라임 수풀도 있습니다. 또 이곳에는 향료가 많이 나서 렘8장이나 46장을 보면 길르앗의 향료라는 유명한 향료의 소산지였습니다.
이처럼 성령이 임하시면 인간의 메마른 심령도 축복의 기름진 낙원으로 변합니다. 사35:1-2절에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한 말씀이나 사43:19-20절에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 한 말씀도 궁극적으로는 미래에 임할 완전한 신천신지의 예언이지만 가깝게는 성령받은 심령동산을 예언한 말씀인 것입니다. 심령이 사막처럼 메말랐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강수를 우리 심령에 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가 하면 길르앗은 이스라엘의 동쪽 최고의 변방입니다.

그리고 이 곳은 변방으로서 이 땅의 역사는 대항의 역사였듯이 은혜를 받으면 죄악에 대하여 강한 저항력을 가진다. 그래서 모압이나 암몬이나 여러 주변 나라들이 이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 침략해 왔기 때문에 이 곳은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치열한 격전지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곳을 지키는 것이 이스라엘의 안보에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이 곳은 빼앗겼다 다시 찾았다를 반복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사기에도 얼마나 이 곳을 침범한 기사가 많습니까? 또 암1:3을 보면 다메섹이 길르앗을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이 압박했다고 했습니다. 혹은 암몬이 자기 지경을 넓히고자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다고 했습니다. 왕하 15:29을 보면 이곳 주민들이 앗수르에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도 이곳은 늘 외세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우리의 신앙이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항상 깨여서 신앙생활하지 않으면 넘어지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4:7) 했고 또 다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벧전5:8-9) 당부하고 있습니다.
의와 악의 차이는 백지 한 장의 차이도 안됩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칭찬을 받다가도 어느 순간에 사단의 도구가 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세상의 영적 형편이란 점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성도들의 심령은 길르앗산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으면 축복의 땅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치열한 영적 격전지가 됩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 받으면 완악한 마음은 변화됩니다. 은혜를 받으면 세상의 경계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생명강수가 넘쳐납니다. 은혜를 받으면 길르앗의 향료처럼 아름다운 삶이 있습니다. 야곱이 길르앗산을 목표로 전진했듯 우리 모두 은혜의 길르앗을 향해 전진하는 성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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