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산 (창22:1-19)
2006. 1. 27. 23:50ㆍ목양자료/3.강해설교
모리아산 (창22:1-19)
초점:대속론, 믿음론
요 약
모리아산에 아들을 번제로 드리려던 아브라함의 모습은 장차 만 백성을 위해 자기 아들을 대속의 제물로 내어주실 하나님의 예표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곳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발견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대화하였다. 이처럼 믿음이란 기도하는 삶이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절대 확신하였다. 이처럼 믿음이란 말씀에 서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현실보다 신앙의 눈으로 보고 말하였다. 이처럼 믿음이란 하나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였다. 이처럼 믿음이란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모리아산"입니다. 성경은 산을 중심한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산이 많이 나타납니다. 여기 모리아산도 우리에게 여러 가지 귀한 진리를 교훈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이라면 모리아산이라는 장소가 예수님께서 장차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죽으실 예루살렘이라는 점과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자를 번제로 드리려고 했듯이 하나님께서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죄인들을 위해서 주신 귀한 모형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이 부분은 우선 놔두고 모리아산을 중심으로 한 아브라함의 절정에 달한 믿음을 통해서
믿음이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1-2절에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셨습니다.
즉 믿음이란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아브라함은 듣고 그런데 창 15:1 이하를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고 아브라함이 여쭙고 다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고 다시 아브라함이 여쭙고 또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정상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믿음이 깊어지면 이렇게 하나님과 교통이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언제나 하나님께 여쭙고 기다릴 줄 아는 기도의 습관을 가지면 이 교통을 경험하게 되어집니다. 인간끼리의 대화도 언제나 남의 말을 들어주면서 대화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남의 말할 기회를 주지 아니하면 다시는 대화하기를 꺼려하게 됩니다.
성경에 나타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과 교통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에도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하나님의 음성을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성경 외에 다른 성경이 없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중단된 것이 아닙니다. 사58:9에 "네가 부를 때에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께서도 이렇게 아브라함처럼 깊은 교제 나눌 수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2.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히11:17-19에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 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근거로 부활을 믿는 믿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이삭을 약속의 아들이라고 하셨는데, 그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 하시니까 종합해 볼 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주신다는 말씀이로구나 깨달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살려 주시지 아니하시면 약속하신대로 후대를 이을 아들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는 부활을 모를 때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인 확신을 가졌습니다.
여러분 번제가 무엇입니까?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태우면 재 밖에는 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다면 그 일도 얼마든지 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물 위를 걸으려는 베드로의 믿음 역시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절정에 달한 정상적인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절대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적이 없다고 해도 성경의 모든 말씀이 내게 주어진 말씀임을 믿고 그 말씀에 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고 하시니까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성경 말씀 한 절 한 절이 다 믿어지고 구체적으로 나에게 적용되어지는 믿음 이것이 장성한 자의 믿음입니다.
3. 언제나 하나님을 시인함으로 나타납니다.
7-8절에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아브라함이 대답을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삭이 물을 때 바로 네가 제물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말하기 곤란하니까 즉 결코 본질을 회피하는 피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곧 아브라함의 신앙이었습니다.
우리도 매사에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 같아도 아버지께서 허락치 아니하시면 결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벧전4:11에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생각에나 말에나 행함에나 신앙이 아주 배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약4:15-16절에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전에 우리 나라에 오신 외국 선교사들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요청하면 "예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돕지요" 라는 대답을 잘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한국 사람들은 도와준다고 했다고 오해를 했는데 그러나 본 의도는 하나님께서 도울 수 있는 길을 주신다면 이란 뜻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대답 속에서 얼마나 자신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믿음이 배여 있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4. 믿음이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12절을 보면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때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셨습니다. 한 사람을 부를 때 이름 말고도 세 번의 수식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을 그만큼 사랑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이니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더구나 순종하는 아들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것이 없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가족도 친척도 나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악과 세상은 조금도 사랑해서는 안됩니다. 요일2:15-16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했습니다. 이 세상 사랑은 성도를 놓아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공로와 성령을 힘입어서 주의 이름으로 끊어야 합니다. 롯의 아내처럼 미련 두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을 사랑치 않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리아산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희생을 봅니다. 그리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훌륭한 믿음을 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될만큼 아름다운 믿음을 가져보십시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믿음, 하나님의말씀이라면 절대로 확신하는 믿음, 언어와 행동 속에서 배고 배인 믿음, 그리고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믿음을 가져 보십시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칭찬하시고 복주심과 같이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초점:대속론, 믿음론
요 약
모리아산에 아들을 번제로 드리려던 아브라함의 모습은 장차 만 백성을 위해 자기 아들을 대속의 제물로 내어주실 하나님의 예표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곳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발견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대화하였다. 이처럼 믿음이란 기도하는 삶이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절대 확신하였다. 이처럼 믿음이란 말씀에 서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현실보다 신앙의 눈으로 보고 말하였다. 이처럼 믿음이란 하나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였다. 이처럼 믿음이란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모리아산"입니다. 성경은 산을 중심한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산이 많이 나타납니다. 여기 모리아산도 우리에게 여러 가지 귀한 진리를 교훈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이라면 모리아산이라는 장소가 예수님께서 장차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죽으실 예루살렘이라는 점과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자를 번제로 드리려고 했듯이 하나님께서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죄인들을 위해서 주신 귀한 모형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이 부분은 우선 놔두고 모리아산을 중심으로 한 아브라함의 절정에 달한 믿음을 통해서
믿음이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1-2절에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셨습니다.
즉 믿음이란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아브라함은 듣고 그런데 창 15:1 이하를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고 아브라함이 여쭙고 다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고 다시 아브라함이 여쭙고 또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정상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믿음이 깊어지면 이렇게 하나님과 교통이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언제나 하나님께 여쭙고 기다릴 줄 아는 기도의 습관을 가지면 이 교통을 경험하게 되어집니다. 인간끼리의 대화도 언제나 남의 말을 들어주면서 대화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남의 말할 기회를 주지 아니하면 다시는 대화하기를 꺼려하게 됩니다.
성경에 나타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과 교통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에도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하나님의 음성을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성경 외에 다른 성경이 없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중단된 것이 아닙니다. 사58:9에 "네가 부를 때에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께서도 이렇게 아브라함처럼 깊은 교제 나눌 수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2.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히11:17-19에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 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근거로 부활을 믿는 믿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이삭을 약속의 아들이라고 하셨는데, 그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 하시니까 종합해 볼 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주신다는 말씀이로구나 깨달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살려 주시지 아니하시면 약속하신대로 후대를 이을 아들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는 부활을 모를 때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인 확신을 가졌습니다.
여러분 번제가 무엇입니까?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태우면 재 밖에는 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다면 그 일도 얼마든지 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물 위를 걸으려는 베드로의 믿음 역시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절정에 달한 정상적인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절대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적이 없다고 해도 성경의 모든 말씀이 내게 주어진 말씀임을 믿고 그 말씀에 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고 하시니까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성경 말씀 한 절 한 절이 다 믿어지고 구체적으로 나에게 적용되어지는 믿음 이것이 장성한 자의 믿음입니다.
3. 언제나 하나님을 시인함으로 나타납니다.
7-8절에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아브라함이 대답을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삭이 물을 때 바로 네가 제물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말하기 곤란하니까 즉 결코 본질을 회피하는 피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곧 아브라함의 신앙이었습니다.
우리도 매사에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 같아도 아버지께서 허락치 아니하시면 결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벧전4:11에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생각에나 말에나 행함에나 신앙이 아주 배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약4:15-16절에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전에 우리 나라에 오신 외국 선교사들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요청하면 "예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돕지요" 라는 대답을 잘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한국 사람들은 도와준다고 했다고 오해를 했는데 그러나 본 의도는 하나님께서 도울 수 있는 길을 주신다면 이란 뜻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대답 속에서 얼마나 자신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믿음이 배여 있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4. 믿음이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12절을 보면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때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셨습니다. 한 사람을 부를 때 이름 말고도 세 번의 수식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을 그만큼 사랑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이니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더구나 순종하는 아들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것이 없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가족도 친척도 나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악과 세상은 조금도 사랑해서는 안됩니다. 요일2:15-16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했습니다. 이 세상 사랑은 성도를 놓아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공로와 성령을 힘입어서 주의 이름으로 끊어야 합니다. 롯의 아내처럼 미련 두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을 사랑치 않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리아산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희생을 봅니다. 그리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훌륭한 믿음을 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될만큼 아름다운 믿음을 가져보십시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믿음, 하나님의말씀이라면 절대로 확신하는 믿음, 언어와 행동 속에서 배고 배인 믿음, 그리고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믿음을 가져 보십시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칭찬하시고 복주심과 같이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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