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화 가운데서 (아 6:1-3)
2006. 1. 26. 11:35ㆍ목양자료/3.강해설교
백합화 가운데서 (아 6:1-3)
= 임재의식 회복 =
요 약
정상적인 영적 생활이란 적극적인 기도생활에서 비롯된다. 적극적이지 않으면 세상에 묶이는 생활일 뿐이다. 또 말씀 안에서의 생활이다. 말씀을 떠나는 것은 주님을 떠나는 것과 같다.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생활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 할 때 진정한 만족이 온다. 또 인격적으로 연합된 신앙생활이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성화적인 신앙생활이다. 그 때만이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아간다.
설 명
1. 배 경
⇒ 술람미가 문제의 원인을 깨닫고 회복되는 장면이다.
2. 적 용
(진단) 다른 이성에게 성적인 충동을 느끼시나요?
(해결) 이는 신앙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만족한 부부생활이라면
그 위험성은 크게 줄어듭니다.
3. 정상적인 영적 생활
1) 적극적인 신앙생활
4절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 남편의 훌륭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상사병이든
왕후에게 역시 유별난 여자라는 뜻이다.
2) 말씀 안에서 신앙생활
4절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 너와 함께 찾으리라”
: 그러나 남자를 알지 못한 시녀들은
문제점을 찾지 못한다.
3) 하나님 영광의 신앙생활
2절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 자신의 불성실을 깨달음으로 자신은 물론
남편까지 만족하게 할 수 있었다.
4) 순종하는 연합된 신앙생활
3절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 속하였다”
: 흡족한 정사를 통해서 비로소 서로 간에
자신을 다 줄 수 있었다.
5) 거룩한 신앙생활
3절 하“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시는도다”
: 이제부터는 남편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늘 경험하게 된 것이다.
아가 6:1-3
1 (예루살렘 여자들)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이켰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2 (술람미)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3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
원 문
1 הנא 아나(어디로) ךלה 할라크(갔는가)
ךדוד 도데크(네 사랑하는 자가) הפיה 하야파(가장 어여쁘도다)
םישׁנב 반나쉼(여인들 중에서) הנא 아나(어디로) הנפ 파나(돌이켰는가)
ךדוד 도데크(네 사랑하는 자가)
ונשׁקבנו 우네바크쉔누(우리가 그를 찾을 것이라)
ךמע 임마크(너와 함께)
2 דרי ידוד 도디 야라드(내 사랑하는 자가 내려갔도다)
ונגל 레간도(그의 동산으로)
םשׂבה תוגורעל 라아루고트 합보셈(향기로운 침대(꽃밭)으로 가서)
תוערל 리르오트(풀을 뜯으며) םינגב 박간님(동산에서)
שקללו 웨리르고트(거둬들이는도다) םינשׁושׁ 쇼솬님(백합화를)
3 ידודל ינא 아니 레도디(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יל ידודו 웨도디 리(내 사랑하는 자는 나에게 (속하였도다)
הערה 하로에(그가(그의 양을) 먹이는도다)
םינשׁושׁב 밧쇼솬님(백합화 가운데서)
스 토 리
술람미의 남편 자랑에
시녀들은 술람미의 남편이
그토록 인격적이고 그토록 다정하며
그토록 젊음과 테크닉이 넘치는 미남이라는 사실에 또 다시 놀랐다.
그러한 남편인데도 왕후가 사랑의 병이 들었다면
역시 유별난 여자라고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감동된 나머지 남자를 모르는 시녀들이지만
어떻게 하든지 왕후를 돕고자 했다.
그런데 남편을 자랑하던 술람미에게
번개같은 깨달음이 있었다.
그것은 자기가 자랑한 대로
그러한 남자라면 문제가 남편에게 있지 않고
자기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술람미의 추측은 들어맞았다.
그래서 술람미는 깨닫고 고쳤다.
그래서 술람미는 비로소 자신을 다 줄 수 있었고
솔로몬 역시 다 줄 수 있는 늘 흡족한 정사를 나눌 수 있었다.
(강 해)
이 시간에는 “백합화 가운데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은 술람미가 남편을 찾은 내용입니다. 그 동안 술람미는 남편으로 인해 방황하다가 심지어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하소연했었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여자들은 남편이 있는 여자가 상사병을 호소하는 술람미의 말에 놀라서 대체 당신의 남편은 어떻게 뛰어난 남편이기에 그럴 수 있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러자 술람미는 서슴없이 남편을 12가지로 자랑했습니다. 이 자랑을 들은 예루살렘 여자들은 술람미의 남편이 그토록 인격적이고 그토록 다정하며 그토록 젊음과 테크닉이 있는 남자라는 사실에 또 다시 놀랍니다. 그리고 감동된 나머지 술람미를 도와 왕을 찾아 나섭니다. 술람미에게 있어서 남편을 찾는다란 부부생활의 만족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남자를 모르는 시녀들에게 왕비의 하소연이었으니 얼마나 불만 가운데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술람미에게 번개같이 떠오르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훌륭한 나의 남편이라면 문제가 남편이 아닌 자기에게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남편의 불만족은 물론 자신의 불만족이 모두 자신의 무지에서 있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술람미의 추측은 들어맞았습니다. 그러므로 다음절에 부부의 화목과 만족한 정사의 장면을 볼 때 술람미가 자기의 잘못을 고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비로소 술람미가 새로운 경험 속에서 외친 말이 3절입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 즉 술람미는 비로소 자신을 남편에게 만족스럽게 다 줄 수 있었고 남편 역시 자신을 아내에게 다 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부부생활이란 일방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고 서로의 배려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일방은 물론이고 양방이 모두 이 부분에 무지하여 만족을 모르고 일생을 마치거나 잘못된 길을 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자신을 인내하며 아내를 위해 배려해야 하고 아내는 자기의 감각이 살아나지 않았을지라도 노력은 물론 남편을 위한 테크닉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명분상의 한 몸이 아니라 리듬에 있어서도 하나되는 좀 더 진정한 연합을 경험함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가정의 화목과 영적으로도 신랑 되신 예수님을 찾아 만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부분에서 정상적인 신앙생활의 진리를 발견합니다.
1. 적극적인 신앙생활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1절에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했습니다.
여기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라는 칭찬은 앞의 5:9에도 나타나 있지만 그 의미는 다릅니다. 앞의 칭찬이 남편을 두고도 상사병이 난 술람미를 두고 놀라서 한 말이라면 여기 칭찬은 술람미의 남편에 대한 자랑을 듣고 남편의 훌륭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상사병이든 왕후에게 역시 유별난 여자라는 뜻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술람미에게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묘사한 것이요, 여자이면서도 여자의 생리조차 모르는 시녀들의 무지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아직도 자신의 리듬의 때를 기다리며 남편에게 자신을 방치하는 아내가 있다면 고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가정의 행복을 찾기 바랍니다. 이 여성의 리듬의 차이와 여성의 테크닉을 결혼한 술람미조차 몰랐으니 시녀들이 알 리가 없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이론적으로 아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체험적으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체험을 했다해도 이사야처럼 바울처럼 주님의 깊은 심정까지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은 더욱 많지 않습니다. 그 믿음 좋다는 욥도 처음에는 하나님을 말로만 들었지 보지 못했습니다. 히브리어의 안다는 말은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과의 연합은 추상이 아니며 실재요 그 실재에는 반드시 체험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임재를 모름이 일상이 된 사람들은 그것이 오히려 정상인 줄 아는데 부부가 서로 느낌 없이 사는 것을 정상으로 아는 사람과 같은 모순된 주장입니다. 물론 느낌보다 말씀을 의지해야 하나 그렇다고 임재 의식의 일상성을 부인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에 의지하여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잠8:17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했습니다. 이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반드시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2. 말씀 안에서 신앙생활이어야 정상적입니다.
1절에 시녀들이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이켰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했습니다.
여기 예루살렘 여자들 즉 시녀들은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한 처녀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음적으로는 왕을 흠모하지만 술람미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왕을 찾아주겠다는 의욕은 이해하지만 그들은 남자를 알지 못합니다. 그 증거로 “어디로 갔는가 어디로 돌이켰는가”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은 어디로 갔거나 돌이킨 것이 아니기에 찾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앞에서 술람미가 남편을 자랑한대로 솔로몬은 남자로서 애정으로나 젊음으로나 다른 면에서 손색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솔로몬이 아내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한 말이나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 라는 말들을 종합해 볼 때 그는 아내를 육체적 정신적으로 서서히 감동시키는 부부생활의 테크닉까지도 넉넉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남편에 대한 자랑을 기회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영적 생활에도 진정한 앎이 필요합니다. 이 진정한 앎은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사람들이 신앙훈련을 받으면서도 주님께서 나에게 왜 실재를 주시지 않느냐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여자들은 문제가 솔로몬에게 있는 줄만 알고 그를 찾으러 나서듯 자기에게 문제가 있는 줄 알지 못합니다. 이 원인이 말씀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면 어찌 문제를 하나님에게서 찾겠습니까? 성경을 통해서 보면 주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내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이 경건함이 느껴지도록 믿으십시오. 이 함께 하심을 기초로 경건하게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그 임재가 느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주님은 성도를 사랑하시며 성도를 위해서 성경에 언약하신 약속을 성실히 계속하고 계십니다. 이 믿음 없는 나 자신을 책망하십시오. 또한 교회를 주셔서 예배의 순서를 통하여 감동시키십니다. 그리고 늘 성령의 충만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하여 문제를 나에게서 찾아 바른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3. 하나님 영광을 위한 신앙생활이 정상적인 것입니다.
2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했습니다.
여기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한 것을 보아 술람미의 말입니다. 예루살렘 여지들이 솔로몬을 찾겠다고 했지만 그들은 찾지 못하고 술람미가 찾았습니다. 그것은 술람미의 깨달음 때문이었습니다. 즉 남편을 자랑하던 술람미에게 번개같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그것은 그토록 완전한 남성이라면 문제가 자기에게 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이처럼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서 임재 의식이나 능력만 기다리는 분은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항상 문제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아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을 놀라게 한 일은 아주 달라진 아내의 모습 때문입니다. 여기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에서 자기 동산이란 술람미의 품안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당연한 말인데도 자기라고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전에 아내를 취함에 있어서 어떤 장애가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내 것을 취하는 그 자유로움과 만족함이 있도록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향기로운 꽃밭”이란 결국 아내를 취함을 묘사함인데 그냥 꽃밭이 아니라 향기로운 꽃밭이라 했습니다. 이 용어 속에서 술람미가 이제는 전과는 아주 달라졌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아내들이 늘 하는 오해가 자기를 마음껏 취하라고 하면서 피동적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는데 이것은 마음껏 취하도록 함이 아닙니다. 전에 술람미가 그러했고 그래서 남편에게 만족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실 남편이 신혼초야에 내가 만족히 먹고 마셨다고 한 것은 어디까지나 신랑이 신부의 고통을 알아서 배려함이었지 진정한 만족은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술람미에게는 아내가 가져야 할 테크닉이 없고 몸만 맡길 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부부생활에 발전이 없는 아내로 말미암아 남편의 느낌은 늘 머리에 이슬이 흠뻑 젖도록 방치한 추운 밖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남편이 만족할 향기로운 꽃밭입니다.
그리고 “양떼를 먹이고 백합화를 꺾는다”는 것은 남편이 아내를 취하는 행동을 묘사함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전처럼 그냥 먹이는 것이 아니고 이번에는 백합화를 꺾음입니다. 이것은 남편이 아내를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취하는 만족감과 아울러 아내를 만족시키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본문에서 아내의 만족을 남편이 백합화를 꺾는 것으로 묘사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남편은 아내가 만족하기까지는 진정한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편의 만족을 위해서라도 아내는 만족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서로가 만족하는 방법입니다. 드디어 술람미는 부부생활의 문제를 극복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주님의 향기로운 꽃밭이 될 때 주님이 기뻐하시고 우리도 행복한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고전10:31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했고, 빌1:20-21에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려는 칼빈주의를 대표할 성경 구절은 롬11:36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이 구절은 처음 시작과 과정과 결과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심령에 하나님께서는 늘 기쁨으로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십니다.
4. 주님의 삶에 연합됨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입니다.
3절에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했습니다.
이 고백에서 솔로몬 부부의 연합의 진전도를 봅니다. 이와 유사한 고백이 아가서에 2:16, 6:3, 7:10 등 세 번 나옵니다. 즉 2:16에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했고, 6:3에서는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 했으며, 7:10에서는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했습니다. 그 특징은 자기 중심적인 술람미의 고백이 점점 남편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각각의 고백마다 그 의미가 다릅니다. 2:16은 확고한 정혼의 서약을 했으므로 상황이 어찌하든지 솔로몬은 다름 아닌 자신의 소유라는 만용에 가까운 소유적 관념이 강합니다. 그러나 6:3은 흡족한 정사 즉 남편이 백합화를 꺾듯이 술람미는 이 일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을 다 줄 수 있었고 솔로몬 역시 자신을 아내에게 다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7:10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술람미가 비로소 성에 눈이 열려 당신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의미에서 한 고백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믿음도 여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인 6:3의 연합은 자연적인 연합이 아니라 서로의 배려에 의한 만족과 연합입니다. 이처럼 서로를 위해서 많은 희생과 배려가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진전된 것입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교훈은 주님의 삶에 더 깊이 연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11:29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하셨습니다. 그 때 참된 영혼의 만족을 얻습니다. 주님과 우리는 이제 남이 아니라 영적인 부부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부부생활만이 아니라 국사에 바쁜 왕으로 인해 왕후의 생활이 늘 고독한 것처럼 주님이 남기신 사명에도 함께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골1:24). 그 때 성도는 주님과 삶의 연합을 이루고 그 왕권으로서 움직이는 왕후로서의 영광을 누립니다.
5. 정상적인 신앙생활은 성화가 중시되는 것입니다.
3절 하반절에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시는도다”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백합화라는 용어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여기 백합화 가운데 양떼를 먹인다는 표현은 남편이 아내의 품을 취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아무 때나 아내를 취하는 것이 아니오 백합화와 같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이 백합화는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신령한 의미에서는 백합화는 말씀 혹은 순결 혹은 겸손 혹은 박해를 받음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백합화는 나팔로서의 말씀의 상징입니다. 이처럼 바른 말씀을 가져야 그리스도를 바로 모십니다. 요이1:9에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했습니다.
다음은 백합화는 순결 즉 선한 양심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선한 양심이 되지 못하면 주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딤전1:19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했고, 딤전3:9에는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고 했으며, 벧전3:21에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양심이 아니면 주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백합화는 2:1에 나타나듯이 겸손의 상징입니다. 이 백합화는 크기가 작은 백합화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께서 겸손한 영혼에게 함께 하십니다. 사57:15에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백합화는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고 핍박받는 자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곳에 주님의 임재가 더욱 나타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5:10-11)고 했고 벧전4:14에도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했습니다. 주님의 임재는 고난받고 박해받는 곳에 더욱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이 빛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리어 고난을 기뻐해야 합니다. 이러한 백합화의 심령이 되어질 때 주님의 임재를 경험함은 희귀한 일이 아니라 일상적인 일이 됩니다.
<결론>
영적인 생활이란 유별난 어떤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신앙생활에서 비롯됩니다. 그러기 위해 열심을 내십시다. 말씀 안에 서십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삽시다. 주님의 삶에 기쁨으로 동참하십시다. 그리고 주의 은혜로 거룩한 삶을 사십시다. 그래서 진정으로 행복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 임재의식 회복 =
요 약
정상적인 영적 생활이란 적극적인 기도생활에서 비롯된다. 적극적이지 않으면 세상에 묶이는 생활일 뿐이다. 또 말씀 안에서의 생활이다. 말씀을 떠나는 것은 주님을 떠나는 것과 같다.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생활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 할 때 진정한 만족이 온다. 또 인격적으로 연합된 신앙생활이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성화적인 신앙생활이다. 그 때만이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아간다.
설 명
1. 배 경
⇒ 술람미가 문제의 원인을 깨닫고 회복되는 장면이다.
2. 적 용
(진단) 다른 이성에게 성적인 충동을 느끼시나요?
(해결) 이는 신앙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만족한 부부생활이라면
그 위험성은 크게 줄어듭니다.
3. 정상적인 영적 생활
1) 적극적인 신앙생활
4절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 남편의 훌륭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상사병이든
왕후에게 역시 유별난 여자라는 뜻이다.
2) 말씀 안에서 신앙생활
4절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 너와 함께 찾으리라”
: 그러나 남자를 알지 못한 시녀들은
문제점을 찾지 못한다.
3) 하나님 영광의 신앙생활
2절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 자신의 불성실을 깨달음으로 자신은 물론
남편까지 만족하게 할 수 있었다.
4) 순종하는 연합된 신앙생활
3절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 속하였다”
: 흡족한 정사를 통해서 비로소 서로 간에
자신을 다 줄 수 있었다.
5) 거룩한 신앙생활
3절 하“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시는도다”
: 이제부터는 남편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늘 경험하게 된 것이다.
아가 6:1-3
1 (예루살렘 여자들)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이켰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2 (술람미)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3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
원 문
1 הנא 아나(어디로) ךלה 할라크(갔는가)
ךדוד 도데크(네 사랑하는 자가) הפיה 하야파(가장 어여쁘도다)
םישׁנב 반나쉼(여인들 중에서) הנא 아나(어디로) הנפ 파나(돌이켰는가)
ךדוד 도데크(네 사랑하는 자가)
ונשׁקבנו 우네바크쉔누(우리가 그를 찾을 것이라)
ךמע 임마크(너와 함께)
2 דרי ידוד 도디 야라드(내 사랑하는 자가 내려갔도다)
ונגל 레간도(그의 동산으로)
םשׂבה תוגורעל 라아루고트 합보셈(향기로운 침대(꽃밭)으로 가서)
תוערל 리르오트(풀을 뜯으며) םינגב 박간님(동산에서)
שקללו 웨리르고트(거둬들이는도다) םינשׁושׁ 쇼솬님(백합화를)
3 ידודל ינא 아니 레도디(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יל ידודו 웨도디 리(내 사랑하는 자는 나에게 (속하였도다)
הערה 하로에(그가(그의 양을) 먹이는도다)
םינשׁושׁב 밧쇼솬님(백합화 가운데서)
스 토 리
술람미의 남편 자랑에
시녀들은 술람미의 남편이
그토록 인격적이고 그토록 다정하며
그토록 젊음과 테크닉이 넘치는 미남이라는 사실에 또 다시 놀랐다.
그러한 남편인데도 왕후가 사랑의 병이 들었다면
역시 유별난 여자라고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감동된 나머지 남자를 모르는 시녀들이지만
어떻게 하든지 왕후를 돕고자 했다.
그런데 남편을 자랑하던 술람미에게
번개같은 깨달음이 있었다.
그것은 자기가 자랑한 대로
그러한 남자라면 문제가 남편에게 있지 않고
자기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술람미의 추측은 들어맞았다.
그래서 술람미는 깨닫고 고쳤다.
그래서 술람미는 비로소 자신을 다 줄 수 있었고
솔로몬 역시 다 줄 수 있는 늘 흡족한 정사를 나눌 수 있었다.
(강 해)
이 시간에는 “백합화 가운데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은 술람미가 남편을 찾은 내용입니다. 그 동안 술람미는 남편으로 인해 방황하다가 심지어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하소연했었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여자들은 남편이 있는 여자가 상사병을 호소하는 술람미의 말에 놀라서 대체 당신의 남편은 어떻게 뛰어난 남편이기에 그럴 수 있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러자 술람미는 서슴없이 남편을 12가지로 자랑했습니다. 이 자랑을 들은 예루살렘 여자들은 술람미의 남편이 그토록 인격적이고 그토록 다정하며 그토록 젊음과 테크닉이 있는 남자라는 사실에 또 다시 놀랍니다. 그리고 감동된 나머지 술람미를 도와 왕을 찾아 나섭니다. 술람미에게 있어서 남편을 찾는다란 부부생활의 만족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남자를 모르는 시녀들에게 왕비의 하소연이었으니 얼마나 불만 가운데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술람미에게 번개같이 떠오르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훌륭한 나의 남편이라면 문제가 남편이 아닌 자기에게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남편의 불만족은 물론 자신의 불만족이 모두 자신의 무지에서 있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술람미의 추측은 들어맞았습니다. 그러므로 다음절에 부부의 화목과 만족한 정사의 장면을 볼 때 술람미가 자기의 잘못을 고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비로소 술람미가 새로운 경험 속에서 외친 말이 3절입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 즉 술람미는 비로소 자신을 남편에게 만족스럽게 다 줄 수 있었고 남편 역시 자신을 아내에게 다 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부부생활이란 일방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고 서로의 배려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일방은 물론이고 양방이 모두 이 부분에 무지하여 만족을 모르고 일생을 마치거나 잘못된 길을 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자신을 인내하며 아내를 위해 배려해야 하고 아내는 자기의 감각이 살아나지 않았을지라도 노력은 물론 남편을 위한 테크닉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명분상의 한 몸이 아니라 리듬에 있어서도 하나되는 좀 더 진정한 연합을 경험함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가정의 화목과 영적으로도 신랑 되신 예수님을 찾아 만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부분에서 정상적인 신앙생활의 진리를 발견합니다.
1. 적극적인 신앙생활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1절에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했습니다.
여기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라는 칭찬은 앞의 5:9에도 나타나 있지만 그 의미는 다릅니다. 앞의 칭찬이 남편을 두고도 상사병이 난 술람미를 두고 놀라서 한 말이라면 여기 칭찬은 술람미의 남편에 대한 자랑을 듣고 남편의 훌륭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상사병이든 왕후에게 역시 유별난 여자라는 뜻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술람미에게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묘사한 것이요, 여자이면서도 여자의 생리조차 모르는 시녀들의 무지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아직도 자신의 리듬의 때를 기다리며 남편에게 자신을 방치하는 아내가 있다면 고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가정의 행복을 찾기 바랍니다. 이 여성의 리듬의 차이와 여성의 테크닉을 결혼한 술람미조차 몰랐으니 시녀들이 알 리가 없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이론적으로 아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체험적으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체험을 했다해도 이사야처럼 바울처럼 주님의 깊은 심정까지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은 더욱 많지 않습니다. 그 믿음 좋다는 욥도 처음에는 하나님을 말로만 들었지 보지 못했습니다. 히브리어의 안다는 말은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과의 연합은 추상이 아니며 실재요 그 실재에는 반드시 체험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임재를 모름이 일상이 된 사람들은 그것이 오히려 정상인 줄 아는데 부부가 서로 느낌 없이 사는 것을 정상으로 아는 사람과 같은 모순된 주장입니다. 물론 느낌보다 말씀을 의지해야 하나 그렇다고 임재 의식의 일상성을 부인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에 의지하여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잠8:17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했습니다. 이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반드시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2. 말씀 안에서 신앙생활이어야 정상적입니다.
1절에 시녀들이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이켰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했습니다.
여기 예루살렘 여자들 즉 시녀들은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한 처녀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음적으로는 왕을 흠모하지만 술람미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왕을 찾아주겠다는 의욕은 이해하지만 그들은 남자를 알지 못합니다. 그 증거로 “어디로 갔는가 어디로 돌이켰는가”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은 어디로 갔거나 돌이킨 것이 아니기에 찾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앞에서 술람미가 남편을 자랑한대로 솔로몬은 남자로서 애정으로나 젊음으로나 다른 면에서 손색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솔로몬이 아내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한 말이나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 라는 말들을 종합해 볼 때 그는 아내를 육체적 정신적으로 서서히 감동시키는 부부생활의 테크닉까지도 넉넉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남편에 대한 자랑을 기회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영적 생활에도 진정한 앎이 필요합니다. 이 진정한 앎은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사람들이 신앙훈련을 받으면서도 주님께서 나에게 왜 실재를 주시지 않느냐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여자들은 문제가 솔로몬에게 있는 줄만 알고 그를 찾으러 나서듯 자기에게 문제가 있는 줄 알지 못합니다. 이 원인이 말씀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면 어찌 문제를 하나님에게서 찾겠습니까? 성경을 통해서 보면 주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내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이 경건함이 느껴지도록 믿으십시오. 이 함께 하심을 기초로 경건하게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그 임재가 느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주님은 성도를 사랑하시며 성도를 위해서 성경에 언약하신 약속을 성실히 계속하고 계십니다. 이 믿음 없는 나 자신을 책망하십시오. 또한 교회를 주셔서 예배의 순서를 통하여 감동시키십니다. 그리고 늘 성령의 충만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하여 문제를 나에게서 찾아 바른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3. 하나님 영광을 위한 신앙생활이 정상적인 것입니다.
2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했습니다.
여기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한 것을 보아 술람미의 말입니다. 예루살렘 여지들이 솔로몬을 찾겠다고 했지만 그들은 찾지 못하고 술람미가 찾았습니다. 그것은 술람미의 깨달음 때문이었습니다. 즉 남편을 자랑하던 술람미에게 번개같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그것은 그토록 완전한 남성이라면 문제가 자기에게 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이처럼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서 임재 의식이나 능력만 기다리는 분은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항상 문제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아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을 놀라게 한 일은 아주 달라진 아내의 모습 때문입니다. 여기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에서 자기 동산이란 술람미의 품안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당연한 말인데도 자기라고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전에 아내를 취함에 있어서 어떤 장애가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내 것을 취하는 그 자유로움과 만족함이 있도록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향기로운 꽃밭”이란 결국 아내를 취함을 묘사함인데 그냥 꽃밭이 아니라 향기로운 꽃밭이라 했습니다. 이 용어 속에서 술람미가 이제는 전과는 아주 달라졌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아내들이 늘 하는 오해가 자기를 마음껏 취하라고 하면서 피동적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는데 이것은 마음껏 취하도록 함이 아닙니다. 전에 술람미가 그러했고 그래서 남편에게 만족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실 남편이 신혼초야에 내가 만족히 먹고 마셨다고 한 것은 어디까지나 신랑이 신부의 고통을 알아서 배려함이었지 진정한 만족은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술람미에게는 아내가 가져야 할 테크닉이 없고 몸만 맡길 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부부생활에 발전이 없는 아내로 말미암아 남편의 느낌은 늘 머리에 이슬이 흠뻑 젖도록 방치한 추운 밖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남편이 만족할 향기로운 꽃밭입니다.
그리고 “양떼를 먹이고 백합화를 꺾는다”는 것은 남편이 아내를 취하는 행동을 묘사함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전처럼 그냥 먹이는 것이 아니고 이번에는 백합화를 꺾음입니다. 이것은 남편이 아내를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취하는 만족감과 아울러 아내를 만족시키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본문에서 아내의 만족을 남편이 백합화를 꺾는 것으로 묘사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남편은 아내가 만족하기까지는 진정한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편의 만족을 위해서라도 아내는 만족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서로가 만족하는 방법입니다. 드디어 술람미는 부부생활의 문제를 극복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주님의 향기로운 꽃밭이 될 때 주님이 기뻐하시고 우리도 행복한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고전10:31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했고, 빌1:20-21에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려는 칼빈주의를 대표할 성경 구절은 롬11:36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이 구절은 처음 시작과 과정과 결과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심령에 하나님께서는 늘 기쁨으로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십니다.
4. 주님의 삶에 연합됨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입니다.
3절에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했습니다.
이 고백에서 솔로몬 부부의 연합의 진전도를 봅니다. 이와 유사한 고백이 아가서에 2:16, 6:3, 7:10 등 세 번 나옵니다. 즉 2:16에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했고, 6:3에서는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 했으며, 7:10에서는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했습니다. 그 특징은 자기 중심적인 술람미의 고백이 점점 남편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각각의 고백마다 그 의미가 다릅니다. 2:16은 확고한 정혼의 서약을 했으므로 상황이 어찌하든지 솔로몬은 다름 아닌 자신의 소유라는 만용에 가까운 소유적 관념이 강합니다. 그러나 6:3은 흡족한 정사 즉 남편이 백합화를 꺾듯이 술람미는 이 일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을 다 줄 수 있었고 솔로몬 역시 자신을 아내에게 다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7:10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술람미가 비로소 성에 눈이 열려 당신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의미에서 한 고백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믿음도 여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인 6:3의 연합은 자연적인 연합이 아니라 서로의 배려에 의한 만족과 연합입니다. 이처럼 서로를 위해서 많은 희생과 배려가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진전된 것입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교훈은 주님의 삶에 더 깊이 연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11:29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하셨습니다. 그 때 참된 영혼의 만족을 얻습니다. 주님과 우리는 이제 남이 아니라 영적인 부부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부부생활만이 아니라 국사에 바쁜 왕으로 인해 왕후의 생활이 늘 고독한 것처럼 주님이 남기신 사명에도 함께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골1:24). 그 때 성도는 주님과 삶의 연합을 이루고 그 왕권으로서 움직이는 왕후로서의 영광을 누립니다.
5. 정상적인 신앙생활은 성화가 중시되는 것입니다.
3절 하반절에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시는도다”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백합화라는 용어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여기 백합화 가운데 양떼를 먹인다는 표현은 남편이 아내의 품을 취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아무 때나 아내를 취하는 것이 아니오 백합화와 같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이 백합화는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신령한 의미에서는 백합화는 말씀 혹은 순결 혹은 겸손 혹은 박해를 받음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백합화는 나팔로서의 말씀의 상징입니다. 이처럼 바른 말씀을 가져야 그리스도를 바로 모십니다. 요이1:9에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했습니다.
다음은 백합화는 순결 즉 선한 양심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선한 양심이 되지 못하면 주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딤전1:19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했고, 딤전3:9에는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고 했으며, 벧전3:21에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양심이 아니면 주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백합화는 2:1에 나타나듯이 겸손의 상징입니다. 이 백합화는 크기가 작은 백합화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께서 겸손한 영혼에게 함께 하십니다. 사57:15에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백합화는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고 핍박받는 자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곳에 주님의 임재가 더욱 나타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5:10-11)고 했고 벧전4:14에도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했습니다. 주님의 임재는 고난받고 박해받는 곳에 더욱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이 빛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리어 고난을 기뻐해야 합니다. 이러한 백합화의 심령이 되어질 때 주님의 임재를 경험함은 희귀한 일이 아니라 일상적인 일이 됩니다.
<결론>
영적인 생활이란 유별난 어떤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신앙생활에서 비롯됩니다. 그러기 위해 열심을 내십시다. 말씀 안에 서십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삽시다. 주님의 삶에 기쁨으로 동참하십시다. 그리고 주의 은혜로 거룩한 삶을 사십시다. 그래서 진정으로 행복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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