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러간 나의 사랑 (아 5:6-7)

2006. 1. 26. 11:33목양자료/3.강해설교

물러간 나의 사랑 (아 5:6-7)
= 영적 방황의 원인 =

요 약

적극적인 기도 생활이 없을 때 영적인 방황이 온다. 구체적으로 이 영적 생활의 방황은 성령의 감동을 소멸 할 때요, 성령의 생명적 흐름을 놓칠 때요, 사단의 참소로 양심의 가책을 당할 때요, 성령의 인격적인 열매를 맺지 못할 때이다. 기도 생활이 부족하면 성령 충만치 못하고 성령 충만치 못하면 이와 같은 현상이 온다. 욥의 환난도 하나님을 체험할 때 해결되었듯이 항상 성령 충만하도록 힘써야 한다.

설 명

1. 배 경
⇒ 뒤늦게 응답하다가 수치를 당하는 아내의 모습이다.


2. 적 용
(진단) 성 기능 장애라고 생각하시나요?
(해결) 치료가 가능하며 그러나 대부분은 서로의 미숙함 때문입니다.


3. 영적인 방황

1) 성령의 감동을 소멸 할 때
6절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 설정 후의 남편의 무력감을 가리킨다.

2) 성령의 생명적 흐름을 놓칠 때
6절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 뒤늦게 노력하나 이미 늦었다.

3) 참소로 양심의 가책을 당할 때
7절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 아내를 거절하는 남편의 생리적인 속성을 묘사한다.

4)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할 때
7절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 거절을 당한 아내의 수치심을 묘사한다.


아가 5:6-7

6 (술람미)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7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원 문

6 ינא יתחתפ 파타흐티 아니(내가 문을 열었도다)
ידודל 레도디(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ידודו 웨도디(그러나 내 사랑하는 자가)
קמח 하마크(돌아서서) רבע 아바르(지나갔도다)
האצי ישׁפנ 나프쉬 야츠아(내 혼이 나갔도다) ורבדב 베답베로(그가 말할 때에)
והיתשׁקב 빜카쉬티후(내가 그를 찾았으나)
והיתאצמ אלו 웨로 메차티후(그를 만나지 못했도다)
ויתארק 케라티우(내가 그를 불렀으나)
יננע ולו 웨로 아나니(나에게 대답하지 않았도다)
7 ינאצמ 메차우니(나를 만나서는) םירמשׁה 핫쇼메림(지키는 자들이)
םיבבסה 핫쇼브빔(둘러서 있는) ריעב 바이르(그 성을) ינוכה 힠쿠니(나를 때렸고)
ינועצפ 페차우니(내게 상처를 냈도다) ואשׂנ 나세우(가져갔도다)
ידידר־תא 엩 레디디(내 겉옷(망투)을) ילעמ 메알라이(내게서)
תומחה ירמשׁ 쇼메레 하호모트(그 성벽의 파숫꾼들이)


스 토 리

이제 남편의 고독과
갈망의 몸부림도 끝났다.
그제야 술람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비로소 응하려 하지만
남편의 그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늦게나마 적극성을 가지고
온갖 노력을 시도하지만
남편의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었고
도리어 침범을 용납치 않는
뿌리치는 남편의 경계와 차가운 냉대 앞에
그녀는 접근조차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 무슨 조화인지
이제야 술람미에게 강렬한 갈망이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냉대 받는 뒤늦은 갈망은 부끄러움만 증가할 뿐이었다.


(강 해)
오늘은 “물러간 나의 사랑”이라는 제목입니다. 본문은 문전 박대 당하던 남편이 사라진 후 남편을 찾아 방황하는 술람미의 모습입니다. 이 부분의 스토리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남편의 고독과 갈망의 몸부림도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제야 술람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비로소 응하려 하지만 남편의 그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늦게나마 적극성을 가지고 온갖 노력을 시도하지만 남편의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었고 도리어 침범을 용납치 않는 뿌리치는 남편의 경계와 차가운 냉대 앞에 그녀는 접근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무슨 일인지 이제야 술람미에게 강렬한 갈망이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냉대 받는 뒤늦은 갈망은 부끄러움만 증가할 뿐이었습니다.” 여기 남편의 사라짐은 다름 아닌 남편이 설정한 후에 오는 급격한 무력감을 묘사함입니다. 그제야 아내가 적극성을 보이고 갈망은 시작되었지만 모든 상황은 다 끝나고 말았기에 남편의 싫음을 당하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설정 후의 남자는 아내의 접근을 달갑지 않게 여기고 힘겨워 하며 배척하는 생리적 심리적 특징이 있습니다. 이렇게 남녀는 여러 면에서 큰 차이점을 가집니다.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사랑 안에서 서로를 향한 배려 외에는 없습니다. 이 사실을 신령한 관점에서 보면 마음으로는 주님을 사랑하지만 영적으로 방황하는 경우가 이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 때는 무언가 부족해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럼, 영적 방황의 원인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1. 기도의 부족으로 성령의 감동을 잃을 때입니다.

6절에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했습니다.
본문의 일반적인 의미는 술람미가 문을 열었지만 솔로몬이 몸을 피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이면에 있는 본래의 뜻은 남편의 설정 후의 급격한 무력감을 나타낸 말입니다. 그런데 뒤늦게 아내가 응하려고 하지만 때는 지나갔습니다. 그가 “벌써”라고 했듯이 이 무력감은 신속히 옵니다. 그래서 남편의 본래의 모습을 보려고 하지만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치 겟세마네 동산에서 깨여 있지 못하고 자다가 나중에야 비로소 깨어난 제자들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깨어 있을 기회는 지나갔고 주님은 산헤드린이 파송한 성전 수비대원들과 일부 로마 군병들에 의해 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고난에 마음이라도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도망쳤고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가지만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맙니다. 주님과 함께 한 시만이라도 깨여 있었다면 그와 같이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과의 영적 교제에 있어서 불순종하므로 성령의 감동을 소멸해서는 안됩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은 언제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베데스다의 연못처럼 동할 때 뛰어들 듯이 성령의 감동에 신속히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속에 일어나는 성령의 감동을 찾기가 힘듭니다. 즉 주님의 삶에 동참함이 없거나 그 감동하심에 늦어질 때 먼저 오는 징계가 바로 임재 의식의 상실이라는 교훈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임재 의식이야말로 가장 기쁘고 평안하고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방황하지 않도록 적극적인 기도 생활로 성령의 감동을 소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2. 기도의 부족으로 성령의 생명적 흐름을 놓칠 때입니다.

6절 하반절에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했습니다.
여기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라는 말은 그녀의 후회를 나타낸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남편에게 실수함에 대한 자책의 수준이 아닙니다. 여기 ‘부르다’(ארק 카라)는 ‘외치다, 부르다, 도움을 청하다’ 등의 의미로 도움을 요청하듯 큰 소리로 남편을 찾아 부른 것을 가리킵니다. 이 묘사가 암시하는 것은 지금 술람미가 뒤늦게 육체적으로 심히 갈급한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남편의 최선을 다한 테크닉도 아내의 소극적 대응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오르가즘이 끝나고 무력함을 가운데 있을 때 뒤늦게 아내의 갈망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술람미의 갈망은 이미 있어야 할 것이었기에 현재는 부적절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찾고 부르며 도움을 청하면서 남편을 찾지만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이 부분은 생리적인 무력증으로 응해 줄 수 없었던 남편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이 번에는 술람미가 고독과 방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기도의 부족으로 성령의 생명적 흐름을 놓칠 때 성도는 영적인 방황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갈5:16에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려면 먼저 성령 충만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성령으로 살아지는 것은 자동적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부족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적극적인 기도 생활만이 영적인 방황에서 끝낼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여호와의 법궤 위의 불과 구름기둥이 이스라엘을 인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기둥의 인도에 민감해야 했습니다. 이 두 기둥은 말씀과 성령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소홀하거나 기도에 소홀하면 그 인도하심을 놓쳐 방황합니다.

3. 기도 생활의 부족으로 사단의 참소를 당할 때 방황합니다.

7절에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했습니다.
여기 행순자들이 밤중에 남편을 찾아 헤매는 술람미를 만나매 쳐서 상하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 역시 왕과 왕후 사이에 되어진 일로 현실 속에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부부생활의 어떤 면을 극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행순자들은 경계하는 자들로서 설정 후에 아내를 거절하는 남편의 생리적이고 심리적인 속성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 때 남편은 무력감과 아울러 수면증이 몰려오는 시기입니다. 이 수면증을 행순자라는 야경군으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뒤늦게 아내의 갈망이 시작되었으니 접근을 용납치 않는 남편의 경계는 물론 차가운 냉대가 있을 것은 생리적으로 당연한 현상입니다. 그래서 그녀가 애를 쓰면 애를 쓸수록 그녀의 부끄러움만 증가할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행순자들에게 웃옷을 빼앗겼다는 말씀의 원 의미입니다.

대개 성적 거절은 남녀에 있어서 차이가 있습니다. 여자는 대개 초기에 거절 반응을 보입니다. 이 때 남편은 인내하며 최대한 배려로서 충분히 준비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남자는 교제 후에 강한 거절 반응을 보입니다. 아내는 성적으로 만족한 후에도 남편의 뜨거운 포옹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남편이 먼저 끝났을 경우는 그렇게 응해줄 심신의 여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고 멀리 떨어지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래서 전3:5에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할 때가 있으며”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내에게 큰 상처와 불만족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남녀간의 리듬의 차이를 알지 못하면 서로 만족을 주지 못하고 상처로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가서 후반부에 나오지만 아내는 아내로서의 테크닉을 배워 자신의 오르가즘 시기를 앞당기도록 함이 남편이 최종 마무리를 잘 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럼 무엇을 말씀하기 위해 이런 솔로몬 가정의 실패한 정사 장면이 나타날까요? 무엇을 교훈하려고 남편에게 배타적인 대접을 받는 소극적인 아내가 소개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도 생활이 부족하면 우리 심령에 사단의 참소라는 양심의 강한 거부반응이 옴을 교훈함입니다. 사단의 참소는 그 원인이 여러 가지이지만 기도론인 아가서 관점에서 보면 기도의 부족입니다. 사단이 주는 참소로 인해 우리 양심이 얼마나 방황합니까? 이 참소는 보혈과 회개로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이겨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도 생활의 부족으로 인한 성령 지원의 부족입니다.

의로운 욥이 사단의 참소를 받을 때 그는 비록 순전하기 그지없었으나 영적 상태는 하나님을 귀로만 듣는 수준이었습니다. 이 성령 충만치 못한 수준으로는 아무리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하고 그리스도의 예표인 번제를 드려 헌신과 칭의를 주장해도 사단의 참소에 속수무책입니다. 롬14:22에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했는데 예수의 복음을 믿는 자로서 항상 양심의 참소를 받는다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그가 친구들의 온갖 정죄를 당하지만 하나님을 눈으로 뵈옵는 즉 체험적인 그러니까 성령 충만한 수준에 이르자 이 모든 참소는 사라지고 회복하여 온전을 의미하는 갑절의 복을 받게 됩니다. 이토록 보혈 공로를 믿음에 있어서 성령 충만의 지원이 중요합니다. 이 지원이 부족하면 사단이 와서 자기의 감동을 전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곧 우리를 정죄하는 참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인 기도 생활만이 진리의 믿음을 지켜주어 방황치 않게 합니다.

그런데 문자 그대로 행순자들에게 봉변 당하는 과정을 생각해 봐도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술람미가 남편을 찾아 나서지만 행순하는 자들에게 검문을 받아 봉변을 당한 이유는 먼저 풍기 문란 혐의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7절의 웃옷(דידר 라디드)은 훤히 비치는 그물 같은 속옷으로(강병도) ‘너울’입니다(매튜헨리). 다음에 그들의 검문에 묵비권 내지는 횡설수설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러한 모습으로 자신의 신분을 어떻게 밝힐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그들의 의심과 오해와 분노를 불러오게 되었을 것이고 그들의 취조는 더욱 강화되었으며 그럴수록 계속되는 술람미의 묵비권은 더욱 그들을 조롱하는 것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격노하여 술람미를 쳐서 상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때리다’(הכנ 나카)를 원문으로 보면 ‘때리다, 치다, 박살내다, 관통하다, 학살하다, 맞다’ 등의 뜻입니다. 더구나 예루살렘은 왕도로서 밤에는 성문이 닫혀 통행이 금지되는 곳입니다. 그리고 3:1-4보다는 더 깊은 밤이므로 이 규칙은 더 엄히 적용되었으며 행순자들은 수도 경비를 담당한 엄한 부대의 소속이란 점입니다. 그들은 이 여자가 왕비인 줄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술람미를 심하게 때렸습니다. 그러나 정의로운 솔로몬 왕궁에 죄증도 없고 재판도 없이 밤에 여자를 심하게 칠 수는 없으므로 성생활의 부조화를 그러한 이야기를 빌어 묘사함입니다.

4. 기도 생활의 부족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할 때 방황합니다.

7절 하반절에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했습니다.
이 본문을 문자대로 본다면 술람미를 취조한 행순자들은 그녀를 수상히 여겨 성을 지키는 파수하는 자들에게 넘겨서 된 일이 됩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방범대원들이 수상한 자를 경찰서에 넘긴 것입니다. 그런데 전문적인 취조자들인 파수자들 역시 술람미를 수상히 여깁니다. 그 이유는 옷으로 보나 맨발로 뛰어다닌 것으로 보나 찾는 미심쩍은 정체불명의 사람으로 보나 온 밤중 그 시간으로 보나 헝클어진 머리카락이며 몸가짐으로 보나 아무리 봐도 실연 당해 미친 여자로 보인 것입니다(강병도). 더구나 이런 여자가 왕궁의 귀빈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있으니 더욱 오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오해는 도둑질의 오해였습니다. 그러니까 미친 여자의 실없는 도둑질입니다. 그래서 파수자들은 그 옷마저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러나 술람미가 여기까지 온 것은 아마도 전에(3:4) 솔로몬을 다시 찾았던 장소가 그러한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외진 장소에 왔다가 이런 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 스토리는 한 나라의 왕후가 왕을 잃고 찾으러 다닌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기 때문에 역시 부부생활의 부조화를 이러한 이야기를 들어 묘사함입니다.

그러므로 성벽을 파수하는 자란 남편이 철저히 자기에게 접근함을 허락하지 않음을 묘사함입니다. 이미 남자의 설정 후의 무력감과 거부감에 대해 생리적 심리적인 현상에 대해 설명한바 있습니다. 물론 남편은 이것을 극복해서 아내를 마지막가지 포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틈으로 손을 들이미는 남편의 강압에 대한 표현은 남편이 오르가즘에 도달했을 때의 강렬함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 때야 미안해서 비로소 아내의 적극성이 시작되었고 경계와 냉대를 당하고 성벽을 파수하듯 강력히 배타하는 남편으로 인해 비로소 느끼기 시작한 술람미의 오르가즘 과정은 실현되지 못하였고 부끄러울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웃옷을 벗겨 취하였다는 표현은 찾아온 갈망감을 채우려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을 뿐 아니라 갈망할수록 남편에게 배척을 당하는 아내의 수치심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내에게 거절당한 남편의 심정을 비참함으로 묘사한다면 남편에게 거절당하는 아내의 모습을 부끄러움으로 묘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3:5의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할 때가 있다는 교훈대로 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기도 생활의 부족은 성령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갈5:22-23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열매이므로 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죄를 행하는 영적 방황을 암시합니다. 적극적인 기도생활이 이토록 중요합니다. 이처럼 아가서는 사랑의 깊은 영적 체험으로 안내합니다. 카나다의 리젠트 칼리지 교수인 유진 피터슨은 “아가서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기도의 비유이며 기도의 백미이다” 한 대로 기도의 신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에 순종하지 않았을 때 성도들이 받는 영적 방황은 심히 큽니다. 기도 생활은 시작하는 초기에는 적극적이기 어려우나 후기에 적극적이 됩니다. 한 번 불만 붙으면 좀처럼 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116:2에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했습니다. 문제는 기도의 불을 붙이는 문제입니다. 나중에 너무 적극적이다 보면 분수를 넘는 수가 많습니다. 이것이 술람미가 보여준 수치가 주는 교훈의 한 단면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주님의 깊은 부르심에 불순종한다면 그 결과는 십자가의 수치와 누명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욥을 정죄한 친구들처럼 주장으로나마 욥의 성화적인 옷을 빼앗으려 했듯 부끄러운 가운데 깨닫도록 버려 두십니다. 이러한 방치의 최고의 모델은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독함과 빌라도의 법정에서 억울하게 정죄를 받음과 로마 병정들에게 매맞고 조롱 당함과 십자가에서 벌거벗은 수치와 고난 당하심 등을 일부나마 경험케 하십니다. 즉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혹한 형벌을 주신다기보다 적극적인 기도생활이 부족한 자에게 오는 시단의 혹독한 시험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맞고 저기서 당하고 여기서 누명 쓰고 저기서 손해보고 혹은 더 큰 시련을 당해 몸과 마음이 평안할 날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막14:38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셨습니다. 베드로도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8-9)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진실로 사랑한다면 기도의 겟세마네와 아울러 인내의 골고다 언덕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계1:9). 그러나 주님과 함께 고난받기를 기뻐하는 요한에게 하늘의 신령한 영계가 열리는 복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결론>
오늘도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 신부된 성도들은 이 주님의 기도에도 연합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영적으로 방황하고 주님의 임재를 모르는 고독한 삶이라면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더 깊은 영적 세계에 들어오길 바라고 계십니다. 잡히실 줄 알면서도 용기 있게 겟세마네로 가신 것처럼 신령한 교제가 처음에는 힘들지라도 예수님을 기억하여 순종합시다. 그래서 최고의 행복을 풍성히 누리시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