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생활의 갈등 (아5:2-5)
2006. 1. 26. 11:31ㆍ목양자료/3.강해설교
신혼생활의 갈등 (아5:2-5) = 깊은 영적 교제 = 요 약 깊은 영적 교제 안의 감격을 누림에 실패한다면 어디에 잘못이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깊은 교제에 쉽게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평소 경외하는 삶의 부족으로 성령의 감동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영적 세계로 부르시는 주님의 심정을 이해하여 뜻을 정하여 기도하되 내외의 방해의 요인을 이기고 적극적으로 기도할 것이다. 그래서 나타나는 성령의 감동의 기도 줄을 놓치지 말고 붙잡아야 한다. 이 성령 감동에 충실하지 않을 때 그 감동은 쉽게 사라지고 말 것이다. 설 명 1. 배 경 ⇒ 신혼기의 술람미의 부부생활의 실수를 담고 있다. 2. 적 용 (진단) 부부생활의 만족을 느끼지 못하나요? (해결) 남편의 테크닉과 아내의 적극성이 필요합니다. 3. 깊은 영적 교제의 실패 1) 평소 성령 감동 속에 있지 못할 때 2절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 여성은 초기 신체 리듬이 남성보다 느리다. 2) 기도에 무관심할 때 1절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 문 열어 다고” : 아내를 위해서 점진적인 테크닉이 필요하다. 3) 주님의 소원을 품지 않을 때 2절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 무관심과 거절은 문전박대를 받는 비참한 심정을 준다. 3) 뜻을 정함이 없을 때(단1:8) 3절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 : 신체 리듬의 때를 기다리다가 실패함이다. 4) 소극적인 신앙 생활 4-5절 “내 마음이 동하여서 일어나서 - 문을 열 때” : 남편의 절정기에 비로소 응하는 아내의 모습이다. 5) 성령의 감동 없이 할 때 5절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 늦게 응했을 때는 남편의 상황은 끝나고 말았다. 아가 5:2-5 2 (술람미)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4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5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 원 문 2 הנשׁי ינא 아니 예쉐나(나는 자고 있었다) רע יבלו 웨립비 에르(그러나 내 마음은 깨어있다) לוק 콜(소리가) קפוד ידוד 도디 도페크(내 사랑하는 자가 문을 두드리고 있는) יל־יתהפ 피테히 리(나에게 열어주오) יתחא 아호티(내 누이) יתיער 라야티(내 사랑) יתנꖻ 요나티(내 비둘기) יתמת 탐마티(내 완전한 자여) ישׁארשׁ 쉐로쉬(내 머리에는) לש־אלמנ 니믈라 탈(이슬이 가득 찼도다) יתוצוק 케유초타이(내 자물쇠에는) הליל יסיסר 레시세 라일라(밤의 이슬로) 3 יתששׁפ 파솨트티(내가 벗었도다) יתנתכ־תא 엩 쿹타네티(내 의복을) הככיא 에카카(어떻게) הנשׁבלא 엘바쉔나(내가 그것을 입을 것인가) יתצחר 라하츠티(내가 씻었도다) ילגר־תא 엩 라글라이(내 발을) הככיא 에카카(어떻게) םפנשא 아타느펨(내가 그것(발)을 더럽힐 수 있으랴) 4 ידוד 도디(내 사랑하는 자가) ודי חלשׁ 솰라흐 야도(그의 손을 내밀었도다) רחה־ןמ 민 하홀(빗장으로) יעמו 우메아이(그리고 내 마음이) וילע ומה 하무 알라우(그것으로 동하였도다) 5 ינא יתמק 카무티 아니(내가 일어났도다) חתפל 리페토아흐(문을 열려고) ידודל 레도디(내 사랑하는 자에게) ידיו 웨야다이(그때 내 손이) רומ־ופשנ 나테푸 모르(몰약이 떨어졌도다) יתעבצאו 웨에츠베오타이(그리고 내 손가락이) רבע רומ 모르 오베르(몰약의 액체가 (흘렀도다) לוענמה תופכ לע 알 캎포트 함마네울(문빗장(손잡이)으로) 스 토 리 술람미의 신혼생활은 시작되었다. 신혼초야와 같이 남편을 위해 배려하고 희생하고자 하는 그녀의 현숙한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술람미는 남편의 다정하고 성실한 테크닉에도 불구하고 매 번 남편에게 만족을 주지 못함은 물론 자기 또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였다. 언제든지 남편의 요구에 거절한 적은 없고 다만 몸은 아직 나설 수 있는 때가 되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에 늘 내 맡기는 상태였다. 그 때마다 남편은 초라하고 비참한 그러나 간곡한 심정으로 술람미의 도움을 구하지만 막상 도우려고 나섰을 때는 이미 남편의 상황은 끝나고 만 때였다. (강 해) 오늘은 “신혼생활의 갈등”이라는 제목입니다. 신혼생활은 남녀간의 서로 다른 여러 가지로 인해 서로 갈등하기 쉬운 때입니다. 그러므로 혼인하기 전에 생리적이거나 사고방식이나 기타 남녀간의 여러 차이점을 충분히 인식함이 그 갈등을 줄일 수 있는 지혜입니다. 본문은 술람미의 노래로 신혼생활 중 성생활의 갈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본문은 성생활의 리듬 차이에서 오는 갈등을 보여줍니다. 본문에 대한 견해가 분분한데 그 중에는 상징적 (강병도, 그랜드종합주석), 혹은 꿈(Gerleman, Delitzsch, Lang, Jack S, Wycliffe, James Smith, 박윤선), 혹은 현실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Siegfried, Haller, Glickman, G. Loyyd Carr). 그러나 이는 부부생활의 갈등을 묘사하는 점에서 상징도 꿈도 아니고 다만 현실을 그렇게 완곡하게 묘사했을 뿐입니다. 즉 여기 밤중은 때아닌 깊은 밤이라기보다 은밀한 부부의 시간을 그렇게 묘사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2:17, 4:6). 즉 신혼초야의 부부생활은 예절에 의해서 이루어진 극히 신사적인 것이었지만 이제 안정된 가정생활 속에서 부부생활은 서로의 만족을 추구하는 상황에 온 것입니다. 이 때 부부생활의 갈등은 오기 쉽습니다. 그것은 성생활에 있어서 신체 리듬의 차이로 초기에는 남편의 적극성에 비해 아내는 소극적이요 사정이 끝난 후에는 남편이 소극적임에 비해 아내의 적극성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서로는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서로 상처를 경험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은 깊은 영적 교제 안에 들어감에 실패한다면 어디에 잘못이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깊은 영적인 교제야말로 영적으로 가장 행복한 경험입니다. 그러나 이런 깊은 영적 교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깊은 영적 교제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 평소에 성령 감동 속에 있지 못할 때입니다. 2절에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했습니다. 이 부분은 술람미가 남편의 요구 사항을 접수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여기 “잘지라도” 라는 문구는 단순한 잠이라기보다 부부생활을 위한 그녀의 신체적인 리듬이 깨어 있지 못한 상태를 암시합니다. 그녀는 분명 마음은 깨어 있었습니다. 여기 정신이라고 하지 않고 마음이라고 한 점을 주시해야 합니다. 즉 남편의 요구를 언제든지 응해 줄려는 마음의 너그러움입니다. 그러니까 신혼 초야의 자기 몸을 허락했던 그 마음 그대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신체적인 감각은 전혀 그럴 마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남편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어야 함을 알면서도 쉽게 들어줄 수 없는 마음상태라는 이중 구조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남자와 여자의 신체적인 리듬의 차이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리듬의 차이만이 아닙니다. 신혼의 아내에게 있어서는 신체적인 고통이 수반합니다. 이 시기의 여성에 있어서 성생활은 단지 하나의 큰 고통일 뿐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남편을 만나는 밤이 두렵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부부생활에 쉽게 흥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술람미의 마음이 깨었다는 것은 그로서는 최선의 배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남편들의 요구는 특정한 시기가 없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초기의 고통스런 아내와는 달리 초기 성생활에 있어서도 만족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를 추구하지만 서로의 신체적인 리듬과 상태의 차이로 갈등으로 나가기 쉽습니다. 그런데 2절에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했던 대로 남편의 갈망 상태란 만족의 측면이라기보다 마치 처절한 고통을 해소하려는 측면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남편이 육체적인 본능을 억제함이란 고통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은 억제로 말미암는 고독과 환난의 기간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술람미는 남편의 요구를 때아닌 상황으로만 이해하여 맞아들일 자세를 취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영적 상황이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깊은 밤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26:38) 분부하실 때 제자들은 눈이 피곤하여 잠에 빠졌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1) 라는 말씀으로 책망하셨습니다. 이 부분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교훈은 평소에 성령 감동 속에 살라는 것입니다. 평소에 늘 육신을 드려서 하나님을 섬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아내의 신체적 특징과 같습니다. 그래서 처음 하나님과의 교통이 사막의 모래밭과도 같은 고통처럼 느껴질지라도 계속해 나가면 고통은 사라지고 영적인 기쁨을 누릴 때가 옵니다. 초기의 영적 생활에서 기도한다고 엎드렸다가 자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마음은 기도해야지 하면서도 육신은 잠을 자고 있습니다. 어쩌면 모래알을 씹은 듯 껄끄럽고 피곤하며 힘이든지 모릅니다. 이 과정은 어렵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과정을 인내로서 극복한 성도들에게 영적 교통처럼 기쁘고 즐거운 시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 찬송합니다. 마치 보화를 깨내는 시간과도 같습니다. 이 기쁨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릅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러한 영적 극치의 기쁨으로 이끄시기를 마치 의무처럼 여기십니다. 그래서 아7:9절에 가면 이러한 술람미가 부부생활에 만족함을 누리는 성숙한 아내로 발전합니다. 정상적인 부부생활의 만족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입니다. 그러기까지 아내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인내해야 합니다. 2. 기도가 부족하거나 무관심할 때 실패합니다. 1절에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했습니다. 여기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라는 4중의 애칭이 나타납니다. 이 애칭은 모두 자신을 감싸줄 수 있는 뛰어난 애칭입니다. 그러니까 남편은 아내에게 무언가 더 온전한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애칭은 남편의 오르가즘을 향한 점진적인 심리상태를 암시합니다. 이 과정은 약 4단계가 있을 보여줍니다. 먼저 부부생활은 누이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누이 같은 아내란 가장 친근하고 다정한 부부 사이를 암시하는 당시의 호칭입니다. 이 상황이 시작을 위해서는 가장 이상적입니다. 남편의 지나친 서둘음이 실패의 요인이 됩니다. 그래서 서로 다정한 말을 통해 심리적으로 안정시키고 친근해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평소에 화목한 부부일 때 이 과정은 단축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포도주의 집에서 솔로몬의 다정한 말이 술람미를 얼마나 감동시켰는가를 보았습니다. 남편이든 아내든 작은 한 마디가 이렇게 큰 위로와 용기를 주고 사랑의 마음을 열게 합니다. 다시 부탁드리지만 침실에서 거북한 단점 지적이나 걱정이 되는 일은 언급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는 나의 사랑의 단계 즉 포옹을 통한 애무의 단계로 가게 됩니다. 이 때 역시 서서히 시작해야 합니다. 이 때 여성은 서서히 심리적 생리적으로 준비되어지는 과정을 밟습니다. 그래서 점차 뜨거워지면 비둘기의 단계가 옵니다. 비둘기란 떨어지지 않고 머리를 비벼대는 짝에 충실한 새입니다. 이 단계가 결합의 단계입니다. 그리고 나의 완전한 자의 단계에 도달하는데 이 단계는 절정의 단계입니다. 그런데 이 단계의 아내를 왜 완전한 자에 비유했을까? 거기서는 서로를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밀착된 고조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 테크닉의 부족으로 일방적으로 끝나게 될 때 그 실망감은 완전한 자에게 당하는 실망과 같습니다. 끝맺음을 잘하려면 아내가 오르가즘을 조금 먼저 경험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그래야 아내가 포옹을 요구하는 시기에 남편이 포옹으로서 마감이 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남편은 생리구조상 오르가즘을 경험하고 나면 모든 것의 끝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교훈하는 바는 영적 생활이란 반드시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야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숨에 깊은 영적인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깊이 인도 받기도 전에 무성의하게 기도를 중단해 버립니다. 문제는 무지하고 완악하여 영적 생활에 흔쾌히 순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날마다 기도하라고 외치건만 왜 그토록 기도생활을 하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성경 곳곳에서 기도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만큼 기도하기 싫어하는 인간의 습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적인 욕망을 위한 기도는 작정해 놓고 대범하게들 잘합니다. 그러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가장 중요한 기도는 그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도에 불순종하므로 기도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강제로 나오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또한 이 부분에서 주님께서는 과정을 통해 서서히 취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영광을 취하시는 것을 예로 들어보면 처음부터 큰 헌신적인 기도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묵도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성가대의 찬양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그리고 절정에 달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것이 설교를 통한 신앙의 고조와 아울러 그 후의 합심기도시간입니다. 그 때 울며불며 주님께 자신을 다 쏟아내며 헌신을 다짐합니다. 그리고 축복을 통해서 재차 강한 붙드심을 경험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고 모든 일이 마찬가지입니다. 서서히 성령의 감동 속에서 진행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우리의 신앙생활에 감격이 없다면 무엇이 문제점이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3. 주님의 소원을 품지 않을 때 실패합니다. 다시 1절에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했습니다. 본 절에는 아내를 향한 남편의 애절한 요구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 4중의 애칭은 그 만큼 사모하는 남편의 심정을 묘사합니다. 그리고 요구를 거절하고 얼마나 문밖에 세워 두었으면 머리털에 밤이슬이 젖었겠습니까? 그러나 남편이 밖에서 이런 상태로 오래 있었던 것을 아내는 몰랐습니다. 자신의 느낌과 같이 그저 원한다는 것 정도 알뿐입니다. 남편의 그 갈망을 아내가 안다면 이렇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머리털에 밤이슬이 젖는 것은 잠시 짐승의 마음을 가졌던 느브갓네살의 모습과도 같이 비참함의 상징입니다. 솔로몬이 아내에게 성적인 거절을 당하는 모습을 문전 박대하는 이 비참한 모습에 비유했을까요? 그것은 아내에게 성적인 거절을 당한 남편의 심정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서로간에 성적인 무관심이나 거절을 삼가야 합니다. 그래서 고전7:3-5에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 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교훈했습니다. 부부생활에 대한 아내의 무관심이나 성 거절은 늘 가정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주실 때 옷을 입혀서 주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벌거벗고 살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 말씀은 부부에 관한 좋은 교훈을 제공합니다. 혹시 부부생활에 있어서 옷이 지장을 주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십시오. 혹은 그 방해물이 자녀들 때로는 대가족 제도에서는 어른들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남편과 아내를 서로 분리시키는 요소가 있다면 철회되어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서로의 분리는 남편은 물론 아내의 비참함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영적 생활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있다면 처리해야 합니다. 나는 공부 때문에 나는 사업 때문에 나는 아이들 때문에 나는 늦게 자서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핑계대지 마십시다. 왜냐하면 이보다 더 귀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질고 가운데 있을지라도 영적 교제를 멀리하는 것을 용납치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 일을 하다가 피곤했다고 해도 결코 면제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했으니 따로 기도시간이 필요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 역시 용납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교훈합니다. 이것을 주님에게 적용했을 때 영적 교통의 불성실은 우리의 영적인 비참함을 불러올 뿐입니다. 본문의 남편의 비참한 모습에 대한 묘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주님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함께 기도로서 깨어 있기를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한시 동안도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도 밤하늘의 이슬로 젖으신 고난의 모습으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과연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그 기도의 삶과도 연합되어 있습니까? 주님의 그 기도는 장소만 다를 뿐 지금도 아버지 보좌 우편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함께 깨어 있어 그의 삶과도 연합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갈등의 단계를 통과한 술람미는 왕과 왕후들이 흠모하는 가장 총애 받는 왕후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진정한 부부는 몸과 마음이 하나로 연합될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모든 삶에 연합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4. 뜻을 정함이 없는 소극적인 기도생활이어서는 안됩니다. 4-5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그랬습니다. 본 절은 문자적으로는 솔로몬이 술람미가 문을 열어주지 않자 강제적으로 아내에게 들어오려고 문을 따려는 시도입니다. 물론 이 표현은 술람미를 취하려는 남편의 행위를 묘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문틈”(רחה־ןמ’ 민 하올)은 ‘빗장으로’ 혹은 ‘문구멍으로부터’를 의미합니다. 이 문틈은 집안에 아무도 없을 때 밖에서 문을 열 수 있게 걸쇠나 자물쇠에 닿도록 뚫어 놓은 문구멍입니다(Redford, KJV, NIV, RSV). 그러나 집안에 사람이 있으니 그 곳에 열쇠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그랜드종합주석). 그래서 솔로몬은 집안으로 들어오려고 손을 뻗쳐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술람미의 신체 리듬은 아직 열리지 않는 빗장을 건 상태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여는 것에 대해 성적 거절에서의 전환도 가능하지만 그보다는 술람미가 신체 리듬이 깨지 않아 소극적으로 일관하다가 이제 남편이 안타까워 적극성을 보이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여기 단단히 잠긴 문은 바로 깊은 영적 교제에 소극적인 성도들의 완악한 마음을 상징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요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길이며 풍성한 영적 생명이요 영광된 왕후로 나타나는 길이라고 해도 좀처럼 열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교통하면 좋은 줄 알면서도 불순종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제 강권적인 방법을 사용하셔서 기도하도록 만드십니다. 그래서 여기 문고리를 따려는 남편의 손은 하나님의 연단의 손길이거나 주님의 못 박힌 손을 암시합니다. 이 단계에서 강권이란 실재로 십자가의 환경과 흡사한 고난 속에 내어 버려 두시는 경험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맞고 낮춰지고 억울한 일 당하고 빼앗깁니다. 그 때야 우매한 성도들은 비로소 영적 교제로 들어가지만 그 교제 역시 주님의 의중을 읽지 못하고 문제만 해결해 달라는 기도이기 쉽습니다. 여기 “내 마음이 동하여서”의 ‘동하다’(המה 하마)는 ‘내 창자가 끓는다’ 는 의미로 어떤 일을 목격했을 때 마음속에 감정 특히 자비와 긍휼이 급격히 일어나는 것을 나타내는 히브리 문학 고유의 표현 양식입니다(사58:10, 욜3:12, 그랜드종합주석). 즉 아내는 남편의 고통 당하는 모습을 보고 동정심을 갖게 됩니다. 이 동정심을 신앙적인 용어로 고치면 감화 감동입니다. 그러므로 겟세마네와 골고다의 고난의 주님을 기억하며 감동되어야 합니다. 사52:14에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으므로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했습니다. 그런데 욥의 부인처럼 그 고난에 동참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아야 하겠습니다. 5. 성령 감동 없는 적극성으로는 영적 교제가 불가능합니다. 3-5절에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 내 마음이 동하여서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 했습니다. 이 부분을 스토리로 꾸며 보면 “술람미의 신혼생활은 시작되었습니다. 신혼초야와 같이 남편을 위해 배려하고 희생하고자 하는 그녀의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다정한 말과 애무에도 불구하고 매 번 술람미는 만족에서 실패하였습니다. 그녀는 마음은 언제든지 허락하지만 몸은 아직 나설 수 있는 때가 오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 때마다 남편은 거절을 당한 듯한 초라하고 비참한 그러나 간곡한 심정으로 술람미의 도움을 구하지만 도우려고 나섰을 때는 이미 남편은 끝나고 만 때였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3-5절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동정이 엿보이는데 거기에 숨겨져 있는 의미는 이렇습니다. 즉 맞으러 나갈 상태가 아니지만 그 강권함에 동정이 가서 문을 열어준다는 뜻입니다. 여기 옷을 벗었고 발을 씻었음은 이스라엘 풍습으로 보아 잠자리에 들었음을 뜻합니다. 마치 밤중에 떡을 빌리는 친구에게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함께 나와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눅11:7-8) 하심과 같습니다. 이 잠자리에 들었다는 것은 아직도 술람미의 신체적인 리듬이 깨지 않았다는 은유입니다. 여성의 신체 리듬이 깨어나지 않는 이유는 보편적으로 여성의 신체 리듬이 남성보다 느리기 때문이거나 초기 여성의 성 경험은 오르가즘을 모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후 문맥을 볼 때 술람미의 경우는 오르가즘을 알지만 신체 리듬이 깨기만을 기다리는 소극적인 자세로 말미암아 남편의 테크닉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깨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설 때가 아니라는 은유입니다. 아직도 내 몸은 내 맘대로 안 된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남편에게 맡기고 피동적으로 일관한다면 두 사람 다 만족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몰약의 즙이 문빗장에 떨어진다는 것은 화장을 미처 하기도 전에 황급히 문을 여는 술람미의 손인가?(Keil and Delitzsch, Robinson, 공동번역, 현대인의성경, 강병도)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확실한 것은 술람미의 손에 몰약의 즙이 묻혀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가서의 은유법을 감안할 때 몰약이 고통의 산물이란 점에서 오르가즘을 향해 괴로워하던 남편의 설정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왜 쾌감이 아닌 고통을 암시하는 몰약으로 표현했을까요? 그것은 아내의 무성의로 말미암아 자신의 만족치 못함은 물론 아내를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남편은 자신은 물론 배우자를 만족시켜야 만이 만족을 갖는 정신적 만족이 있습니다. 흔히 남편만 만족하면 되지 하는 생각은 오해입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자신은 물론 남편을 위해서라도 소극적이어서는 안됩니다. 이처럼 남편의 강권을 그 때야 술람미가 남편을 맞아들이려 하지만 남편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이 말씀은 실재로 남편이 밖으로 사라졌다는 의미라기보다 설정 후의 남편의 급격한 무력기를 나타낸 말입니다. 이제야 달아오른 아내가 뒤늦게 서둘러 봐야 때는 늦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체 리듬의 때를 기다리며 처음부터 소극적인 아내는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편의 입장에서는 인내하기 힘들지라도 테크닉을 이용하여 서서히 진행해야 하는 반면 아내 편에서는 신체 리듬이 오지 않아 원치 않을지라도 적극성을 보여야 성공합니다. 이런 내용을 외설적이라고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교회에서는 가정생활세미나 등을 열어서 건강한 가정을 위해서 구체적인 사항까지도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부부들이 부부생활의 불만 때문에 원인 모를 불친절과 외도를 생각하거나 심지어는 이혼까지도 생각하는 심각한 수준입니다. 그러므로 이 공부를 통해서 부부생활까지 변화하여 불신 남편도 감동하여 교회로 나오는 역사가 있길 바랍니다. 그리고 완전한 연합을 이루게 되면 내 자식이 제일 귀한 것처럼 내 배우자 말고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뒤에 나오지만 솔로몬이 많은 왕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술람미만 제일로 사랑한 것과 같습니다. 이 신비한 수준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렇게 아가서는 남녀간의 사랑을 소재로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영적인 교제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적극적인 영적 교제에 순종하라는 교훈입니다. 아무리 주님께서 성령으로 도와주시지만 기도의 능력이 임하기까지 기다리게 되면 기도의 줄은 잡히지 않습니다. 혹시 기도의 줄이 잡혀진다고 해도 소극적인 기도 생활은 곧 기도 줄을 잃게 되고 맙니다. 이처럼 순종이 늦어질 때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감동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감동이 소멸된 후에는 아무리 찾고 찾아도 쉽게 만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도 떠올랐을 때 기록하지 않으면 불과 몇 초만에 사라져서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소멸치 말라”(살전5:19)고 교훈합니다. <결론> 이 대목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적극적인 기도생활을 권합니다. 하나님께서 능력 주셔서 기도 줄 잡아주실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기도다운 기도 한 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나를 위해 밤이슬을 맞으시며 기도하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그 기도에 동참하십시다. 그래서 주님과 교통하는 기쁨에 동참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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