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신랑 (아 3:1-5)

2006. 1. 26. 11:25목양자료/3.강해설교

잃어버린 신랑 (아 3:1-5)
= 자만과 안일처리 =

요 약
주님의 임재 의식의 상실은 우리의 잘못된 신앙을 돌아보게 한다. 그 때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깨닫고 회개해야 한다.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께서도 자신의 사랑을 주시지 않을 리 없다. 혹시 언약적 큰사랑을 남용하여 육신의 기회로 삼아 자만하거나 방심하고 안일하면 커다란 실수이다. 우리가 주님을 냉대하게 되면 우리에게 임한 행복감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우리는 더욱 친밀함과 적극적인 신앙으로 목숨을 걸고 주님을 섬기자. 그 때 주님께서 만족하시고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허락하여 주신다.

설 명

1. 배 경
⇒ 술람미가 꿈속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방황하는 장면이다.

2. 적 용
(진단) 배우자가 사랑해 주지 않습니까?
(해결) 그럼 먼저 사랑하시기 바랍니다(마7:12).

3. 임재의식 상실
1절 “내가 밤에 침상에서 ‥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임재감은 사랑의 표현(롬5:5).

<상실 원인>
① 믿음의 훈련을 위하여(마14:31)
② 말씀대로 행치 않을 때(빌4:9)
③ 속히 회개하지 않을 때(엡4:26)
④ 타인을 용서하지 않을 때(마18:35)
⑤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 때(요일4:16)
⑥ 경외하는 생활이 부족할 때(시22:3)
⑦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못할 때(요8:29)
⑧ 주님을 냉대할 때(마7:12) 등


4. 문제의 발단
큰사랑을 받을 때 나타나는 일종의 자만 때문(아 3:17)
주의 언약을 육신의 기회로 삼고 방심한다면 회개하라.


5. 연인을 다시 찾음
2-4절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밖에서 찾음 (술람미 불러내기 성공) - 적극적 신앙 암시


6. 자기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감
4절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목숨을 걸고 사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


7. 술람미의 당부
5절 “예루살렘 여자들아 ‥ 깨우지 말지니라”
신랑의 만족을 시사한다.


아가 3:1-5

1 (술람미)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2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3 성중의 행순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4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5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원 문

1 יבכשׁמ־לע 알 미슄카비(내 침상 위에서) תולילב 발레로트(밤에)
יתשׁקב 빜카쉐티(내가 찾았도다) הבהאשׁ תא 엩 쉐아하바(사랑하는 자를)
ישׁפנ 나프쉬(내 마음(영혼)이)) ויתשׁקב 빜카쉐티우(내가 그를 찾았으나)
ויתאצמ אלו 웨로 메차티우(그를 발견하지 못하였도다)
2 אנ המוקא 아쿠마 나(내가 이제 일어나서) הבבוסאו 와아소베바(돌아다니며)
ריעב 바이르(성에서) םיקושׁב 밧쉐와킴(거리와) תובחרבו 우바르호보트(사거리에서)
השׁקבא 아바케솨(내가 찾으리라) הבהאשׁ 쉐아하바(사랑하는 자를)
ישׁפנ 나프쉬(내 영혼이) ויתשׁקב 빜카쉐티우(내가 그를 찾았으나)
ויתאצמ אלו 웨로 메차티우(그를 발견하지 못하였도다)
3 ינואצמ 메차우니(나를 만나서) םירמשׁה 핫쇼메림(지키는 자들이)
םיבבסה 핫소베빔(사방을) ריעב 바이르(그 성의)
הבהאשׁ תא 엩 쉐아하바(사랑하는 그를(그녀를)
ישׁפנ 나프쉬(내 영혼이) םתיאר 레이템(너희가 보았는가)
4 שעמכ 키므아트(아니하였도다)
םהמ יתרבעשׁ 쉐아바르티 메헴(내가 그들을 지나자마자)
יתאצמשׁ דע 아드 쉠마쵸티(그때 내가 발견하여)
הבהאשׁ תא 엩 쉐아하바(사랑하는 자를) ישׁפנ 나프쉬(내 영혼이)
ויתזהא 아하즈티우(내가 그를 손으로 붙잡았다)
ונפרא אלו 웨로 아르펜누(내가 그를 떠나게 하지 않으리라)
ויתאיבהשׁ־דע 아드 쉐하베티우(내가 그를 데리고 들어갈 때까지)
ימא תיב־לא 엘 베트 임미(내 어머니의 집으로)
רדח־לאו 웨엘 헤데르(그리고 방으로) יתרוה 호라티(나를 잉태한)
5 םכתא יתעבשׁה 힛쉐바티 에테켐(내가 너희에게 맹세케 한다)
םלשׁורי תונב 베노트 예루솰라임(예루살렘 딸들아) תואבצב 비체바오트(노루)
הדשׂה תוליאב וא 오 베아옐로트 핫사데(혹은 들의 사슴 같은)
וריעת־םא 임 타이루(너희는 자극하지 말라)
וררועת־םאו 웨임 테오레루(그리고 깨우지도 말라)
הבהאה־תא 엩 하아하바(사랑하는 자를)
צפחתשׁ דע 아드 쉐테흐파츠(그녀가 기뻐할 때까지)


스 토 리

술람미의 자만은
결국 일을 불러오고 말았다.
연인은 다시 그녀에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술람미는 연인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성중에도 거리와 큰길에서도 만나지 못했고
야경꾼들에게 물음도 허사였다.
실망한 그녀는 마음의 상처를 안고 쓸쓸히 한적한 곳을 거닐고 있었다.
그런데 그토록 찾던 연인은 어두운 밤 인적조차 없는 광야에서 밤이슬에 함빡
젖어 외롭고 슬픈 모습으로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술람미는 놓칠 새라 달려가 그를 붙잡고 그를 부축하며
자기를 낳아준 따뜻한 어머니의 방으로 안내하였다.
모든 것이 자기의 잘못임을 뉘우치며 따르겠다는
그녀의 약속을 들으며 님은 깊은 잠에 떨어졌다.
이번에는 술람미가 시녀들에게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결코 깨우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그런데 깨어보니 꿈이었다.



오늘은 “잃어버린 신랑”이라는 제목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우리 성도들의 현주소는 높이 되신 그리스도 안으로서 그 안의 삶이 얼마나 안전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가를 배웠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영원히 변치 않을 진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자기의 택한 자를 영원히 책임지십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하나라도 버리지 않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 만큼 성도는 완전한 보장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기회주의적이고 안일한 속성은 이러한 놀라운 은총의 기회를 도리어 악용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관계에 커다란 장애물이 됩니다. 마치 부부간에도 혼인이 무르익어 자녀도 낳고 이제는 결혼을 해약할 수 없을 만큼의 안주점에 오면 상대방에게 아무렇게나 대하는 그런 경향과 같습니다. 그래서 전처럼 자신을 가꾸지도 않고 혹은 전처럼 사랑으로 아껴주지도 않으며 더구나 자녀까지 낳았으니 도망칠 리도 없고 반대로 쫓아낼 리도 만무하니 긴장이 풀린 것입니다. 사랑에는 너무 긴장이 풀리면 안됩니다. 혹은 한 편의 사랑이 지극할 때 그러한 습성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바로 앞 절인 아2:16-17의 술람미가 그 상태였습니다. 거기 보면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 했습니다. 이 구절을 알기 쉽게 풀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그는 내 님이고 나도 그의 것이 확실하다. 실제로 그는 나에게 입을 맞추고 있지 않는가? 이제 그가 나의 사랑의 포로가 된 이상 그는 나를 영원히 떠나지 못할 것이며 다시 돌아오고야 말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실수를 불러왔습니다. 말을 듣지 않는 고집 센 술람미 앞에서 솔로몬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귀한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육신의 안일과 나태의 기회로 삼는 인간의 악한 속성 때문에 사랑의 적신호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가 오늘 본문의 사건의 발단입니다. 그래서 완고했던 술람미가 결국 신랑을 잃고 애 타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임재 자체는 불변이지만 그의 임재의 경험은 놓칠 수 있습니다.

여기 “밤에”(תולילב 발레일로트)는 복수형으로 ‘밤마다’ 혹은 ‘밤들에’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계속적인 신랑의 부재를 의미한다. 그리고 “마음에 사랑하는 자” 라는 이 호칭은 본서에서 1:7, 3:1, 2, 3, 4 에 나타나고 있는데 이 호칭은 술람미가 솔로몬과 이별 상태일 때만 쓰는 호칭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본문의 배경이 어떠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술람미가 크나큰 신랑의 사랑만을 너무 믿고 방심했다가 신랑을 잃고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랑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침상에서도 예루살렘 성중에서도 번화한 거리에서도 사람이 많이 다니는 큰길에서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행순하는 야경꾼들에게 물었겠습니까? 그러나 신랑을 찾지 못합니다. 그 밤중에 찾고 찾으며 방황하는 신부의 상태는 바로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아직 영적인 밤 상태에 있는 성도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좋으신 주님께서 왜 자신을 숨기시겠습니까? 그것은 무언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방적인 사랑이 있고, 신랑과 신부로서 사랑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구원적인 사랑은 내가 거절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지만 신랑과 신부로서의 사랑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짝 사랑이란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 동안 얼마나 주님 홀로 짝 사랑시켰습니까? 여기에는 서로 사랑해야 사랑이 성립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서 주님은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의 안주함에서 벗어나서 부활의 능력을 받아 지상의 어떤 환경에도 영향받지 않는 저 천국에 속한 신앙생활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주님을 사랑하는 열심 있는 신앙생활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지상에는 아직 어둠의 방해 세력이 있어 그 세력을 이길만한 강력한 신앙생활이 아니고는 영적인 충만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천상의 주님과 함께 있고 싶어하는 사랑에서 발로된 헌신적인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상성도가 천상의 삶을 유지하려면 그 만큼의 지속적인 에너지를 투자해야 합니다. 제트비행기가 지상을 벗어나 하늘로 비행하려면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함과 같습니다. 만약 천상의 삶을 유지하다가 안일의 덫에 걸리면 다시 땅에 떨어지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의 이미와 성령 안에서 누리며 재림으로 다가오는 아직이라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안일을 깨뜨리고 주와 함께 있고자 자기를 드리는 희생은 필수불가결입니다.

이 부분에서 신앙의 지체됨이 많고 많은 연단을 통한 징계적 깨달음과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일생 형성된 잘못된 신앙의 습관과 틀을 깨고 지속적으로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는 사랑의 에너지가 아니고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더욱 주님의 사랑을 깨달음에서 장성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성도가 누리는 초기 임재의식은 순종함이 부족해도 허락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성장하면 주님은 성도에게 더 높은 사랑을 요구하시고 불순종할 때 느끼지 못하게 하십니다. 천국에서는 이런 악의 영향력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그냥 믿기만 하면 다 내 것이 되어지고 완성되어집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지상에서처럼 이런 애통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지상에서는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혹시 복음 진리에 서지만 안 된다면 성령의 충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많은 성도들이 이 시점에서 술람미처럼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 믿었으니 천국 가고 그렇지 않아도 자녀이니 주님이 버리실 리 없는데 그렇게 애 쓰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보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 안주함은 주님을 사랑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안일한 자세로는 정상적인 영적 삶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복음의 진리에만 견고히 서면 다 되는 줄 알지만 마음을 다하여 경외하며 주님을 사랑하는 면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잘못된 신앙의 틀을 과감히 바꾸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성령의 은혜는 불과 같습니다. 불은 같은 불이어도 연료에 따라 산소 공급이나 환경에 따라 온도가 다르고 타기도 하고 꺼지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바울이 믿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요, 베드로가 믿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요, 아브라함 엘리야의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시지만 믿는 자의 신앙에 따라서 나타나심은 다릅니다. 그러므로 꽉 막힌 침체된 신앙자세를 과감히 바꾸어야 합니다. 지금 술람미가 너무 보장됨에 안주하여 말을 듣지 않고 고집 부리다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술람미는 신랑을 잃고 방황하며 신랑을 찾고 찾다가 겨우 만납니다. 여기 찾고 찾음이란 업그레이드한 신앙의 열심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잠8:17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했고, 렘29:12에는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했으며, 아모스도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5:4) 했습니다.

그런데 술람미가 성중이나 거리에나 큰길에서 찾고 행순자에게 물었으나 찾을 수 없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솔로몬이 사람이 있는 곳에는 없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또 4절에 “그들을 떠나자말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란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간절히 찾는 자에게 속히 만나주신다는 의미도 있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사람 사는 곳에서는 만날 수 없었으니 즉 술람미를 고독으로 징계한 솔로몬도 역시 아무도 없는 외진 쓸쓸한 곳에서 함께 고독 속에서 슬퍼하며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을 기록한 솔로몬은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21:19) 했습니다. 잠21:9에는 그 장소를 좀 더 구체적으로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했습니다. 이것을 결부시켜 볼 때 솔로몬은 술람미와 더 이상 다툴 수 없어서 광야의 어느 움막에서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술람미 꿈속에서 된 일이지만 이 내용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즉 성도를 외롭게 놓아두신 주님께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시며 부르짖으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탄식하시며 부르짖으십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기도하실까요?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기를 이길 때까지 보좌에게 기도하십니다. 즉 우리가 온전케 될 때까지입니다. 여기서 안일의 완고함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를 뼈저리게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사랑하시기에 고독의 징계로 안일과 완고함을 깨뜨리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아는 자는 희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연단의 의미를 모르고 우연으로 돌리고 깨달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2:5) 하셨고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계3:3) 하셨으며, 야고보도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약1:5)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주님은 우리 인격과 삶에 나타나십니다. 신랑과 신부의 사랑이란 숨지 않고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의 부어지기 때문에(롬5:5) 그 임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일4:13에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하는 것은 주님의 임재는 떠날 수 없으며 다만 그 의식만이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임재의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을 이러한 임재의식으로서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의 경험이란 얼마나 행복한 경험인지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그리스도의 임재의식을 상실하는 경우가 여러 유형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먼저는 말씀대로 행치 않을 때입니다. 그래서 빌4:9에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했습니다. 혹은 범죄한 후 속히 회개하지 않을 때입니다. 그래서 엡4:26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했습니다. 혹은 용서하지 않거나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 때입니다. 그래서 마18:35에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하셨습니다. 또 요일4:16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했습니다. 혹은 경외하는 생활이 부족할 때입니다. 그래서 시22:3에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라고 했으며, 예수님께서도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4절에 “그를 붙잡고”(ויתזהא 아하즈티우)라는 문구에는 술람미를 피해 다시 도망치려는 솔로몬의 모습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술람미는 다시는 헤어지지 않기 위해 강하게 붙잡습니다. 그런데 술람미가 신랑을 붙잡고 그의 어미 집 자기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문자적으로는 밀애의 장소(창24:67, 룻1:8), 간호의 장소(아5:2), 언약의 장소 등의 의미가 있지만 어머니의 생명 건 해산의 수고와 뜨거운 모성애와 같이 이제는 정말로 헌신적인 새로운 마음으로 그리고 새 출발의 마음으로 사랑하겠다는 결심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임재 의식의 상실이 가져다 준 교훈이었습니다. 즉 이제는 온 나라가 나를 미워해도 가겠다, 온 궁궐이 나를 비웃어도 가겠다, 태후가 나에게 얼굴을 돌리고 비빈들이 나를 격하하고 시녀들이 시기해도 당신의 말이라면 나는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바로 다음절에 이어지는 술람미의 결혼행렬이 그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결심이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중요합니다. 주님을 사랑함에 생명을 거는 희생이 있을 때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오벧에돔이 복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목숨걸고 법궤에 계신 하나님을 모셨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의 여러 지방을 죽으로 치던 그 두려운 법궤가 아닙니까? 원수들은 그렇다 치고 이 법궤는 들어다보았다고 자기 백성 70인을 죽이고 제사장 웃사까지 죽였으니 그 누가 법궤를 맡으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벧에돔이 자기 집에 둠을 허락했다는 것은 목숨 내건 희생정신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생명의 역사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목숨걸고 믿는 열심의 업그레이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적극성이 없는 신앙생활은 천상의 지고한 복락을 경험하지 못하고 지상의 영역에 머물 뿐입니다.

그리고 5절의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한 이 말은 2:7, 3:5, 8:4에 세 번 나오는데 비교해 보면 “사랑하는 자” 라는 호칭으로 보아 여기서는 술람미의 말입니다. 이 번에는 위로자가 솔로몬이 아니라 술람미로 바뀝니다. 그녀는 시녀들에게 왕을 노루와 들 사슴처럼 조심스럽게 대접하여 놀라지 않도록 간섭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이러한 당부 속에는 자신 또한 남편을 거스르지 않기를 맹세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이 구절이 교훈하는 바는 영적인 방황은 성도들이 주님을 냉대한 잘못으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항상 함께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8:29에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구절을 대인관계에만 적용하는데 문맥의 전후를 보면 주님을 대접해야 한다는 의미가 먼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말씀하셨습니다.

<결론>
혹시 주님의 완전하신 사랑과 변치 않는 그 언약을 육신의 기회로 삼고 신앙생활에 방심하고 있다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임재로 말미암은 그 행복감을 잃었다면 이제 마음을 바쳐 찾고 찾으십시오.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열심을 내십시오. 자신의 잘못된 신앙의 틀을 깨뜨리십시오. 주님을 최고로 대접하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은 더 이상 숨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그 임재를 나타나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주님의 사랑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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