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병 (아 2:4-7)

2006. 1. 26. 11:23목양자료/3.강해설교

사랑의 병 (아 2:4-7)
= 은혜의 잔치 =

요 약

양의 진정한 행복은 목자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 따라 살아가면 은혜의 잔치를 만난다. 하나님의 인도에는 성경적 섭리적 은사적 생명적 인도 등이 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주님의 은혜를 크게 경험하며, 주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며, 주님의 능력을 강하게 경험하고, 성령의 열심을 갖게 되며, 특별한 안위와 보호가 있다. 그러나 조심할 것은 체험의 도취는 비정상적인 신앙을 유발하기 쉽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시종일관 말씀의 인도를 경홀히 해서는 안 된다.

설 명

1. 배 경

⇒ 신랑의 인도로 풍성한 잔치집을 경험하는 내용이다.
시 23편을 연상시킨다.


2. 적 용
(진단) 나의 중심이 전달되지 않습니까?
(해결) 적절한 분위기와 시간을 갖으십시오.

☆ 주님의 인도하심
① 성경의 인도 (시73:24, 사48:18) ② 섭리적인 인도 (잠16:9)
③ 은사적인 인도 (요16:13) ④ 생명적인 인도 (계7:17) 등

3. 주님의 인도하심의 구체적인 결과
1) 주님의 은혜를 크게 경험한다.
4절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 집에 들어갔으니”

2) 주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한다.
4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

3) 주님의 능력을 강하게 경험한다.
5절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4) 성령의 열심을 갖게 된다.
5절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

5) 특별한 안위와 보호가 있다.
6절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 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4. 체험도취와 그 위험성
7절 “예루살렘의 여자들아 -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처음에는 궁중의 예법을 모르듯 은혜의 체험에 빠질 때
범하기 쉬운 실수가 암시되어 있다.


아가 2:4-7

4 (술람미)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 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
5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
6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7 (솔로몬)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원 문

4 ינאיבה 헤비아니(그가 나를 데리고 들어갔도다)
ןייה תיב־לא 엘 베트 하야인(잔치집으로)
ולגדו 웨디겔로(그리고 그의 깃발은)
ילע 알라이(내 위에 있는) הבהא 아하바(사랑이로다)
5 ינוכמס 삼메쿠니(너희는 내 기운을 돋우라)
תושׁישׁאב 바아쉬쇼트(건포도로)
ינודפר 랖페두니(나를 시원하게 하라)
םיחופתב 밭타푸힘(사과들을 가지고)
תלוח־יכ 키 홀라트(왜냐하면 병들었기 때문이다)
הבהא 아하바(사랑함으로) ינא 아니(내가)
6 ולאמשׂ 세모로(그의 왼손이) ישׁארל תחת 타하트 레로쉬(내 머리 아래 있고)
ונימיו 위미노(그의 오른팔이) ינקבחת 테합베케니(나를 안았도다)
7 םכתא יתעבשׁה 힛쉐바티 에테켐(내가 너희들에게 맡긴다)
םלשׁורי תונב 베노트 예루솰라임(예루살렘의 딸들아)
תואבצב 비체바오트(가젤) תוליאב וא 오 베아옐로트(혹은 암사슴으로)
הדשׂה 핫사데(그 들판의) וריעת־םא 임 타이루(만약 너희가 주시하지 않으면)
וררועת־םאו 웨임 테오레루(혹은 깨우지 않으면)
הבהאה־תא 엩 하아하바(내 사랑을)
צפחתשׁ 쉐테흐파츠(기뻐할 때까지)

스 토 리

솔로몬이 술람미를
특별히 마련된 잔치 집으로 인도하였다.
이 잔치의 성격은 신부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보이기 위한 것으로
잔치에서 신부를 향한 신랑의 준비와 환대는 지극했었고
신랑은 열린 마음으로 자기의 사랑을 다 고백하며
자신의 반려자가 되어 줄 것을 당부하였다.
이 사랑 앞에 신부의 마음은
활화산처럼 타오르지만
아직은 혼인을 약속한 사이였기에
그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어
그녀에게 고통스런 사랑의 병이 되고 만다.
취하여 잠든 술람미는 신랑이 자기의 머리를 베개하고
안는 잠꼬대에 빠지지만 왕은 시녀들에게 신부를 간섭하지
말고 그녀가 원하기 전에는 깨우지 말라는 특별한 명령이 내려졌다.


오늘은 “사랑의 병”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본문은 솔로몬이 술람미를 잔치 집으로 인도하는 내용입니다. 이 잔치는 신랑의 사랑과 아울러 신부의 개인적인 만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노래자를 구분하면 4-6절까지는 술람미의 노래이고 7절은 솔로몬의 노래입니다.

대략적인 스토리를 말씀하면 솔로몬이 술람미를 특별히 마련된 잔치 집으로 인도합니다. 이 잔치에서 신랑은 지극한 준비와 환대로서 신부에 대한 큰사랑을 나타내 줍니다. 이 신랑의 사랑 앞에 신부의 마음은 뜨겁게 달아오르지만 아직은 약혼자의 사이였기에 그 감정은 그에게 사랑의 병이 되고 맙니다. 이 잔치에서 취하여 잠든 술람미는 신랑이 안아주는 잠꼬대에 빠집니다. 이러한 술람미의 모습은 궁중의 법도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시녀들에게 신부가 원하기 전에는 깨우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성도의 복락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발견합니다. 이 본문의 배경은 시편 23편입니다. 1:16절에서 푸른 초장이 나오더니 2:4에서 잔치 집이 나오는 것은 성경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는 4절의 인도라는 낱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기만 한다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풍성한 은혜 가운데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래서 원수의 목전에서 이처럼 풍성한 잔치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사모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럼, 주님의 인도를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요?

먼저, 성경의 인도가 있습니다.

시73:24에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믿으라 하면 믿고, 버리라 하면 버리고, 취하라 하면 취하고, 힘쓰라 하면 힘쓰고, 성경이 지시하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술람미가 감탄하고 감탄한 것처럼 놀라운 은혜와 평강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사48:17-19에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이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네 자손이 모래 같았겠고 네 몸의 소생이 모래 알갱이 같아서 그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리라 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성경은 여러 가지 귀한 진리를 조명합니다. 먼저는 복음 이해를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밝히 알게 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들을 조명하여 주셔서 이 예수님의 복음으로 구체적으로 치료받게 하십니다. 그래서 히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님도 전하지만 우리 인간이 죄인임을 가르쳐 주고 양심을 비롯해 여러 가지 심리 상태나 행실들을 가르쳐주기 때문에 그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다음에, 주님의 인도에는 섭리적인 인도가 있습니다.

잠16:9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했습니다.
이 섭리적 인도는 마치 요셉을 애굽으로 인도하심에서 나타나듯이 이 인도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이기에 처음에는 인도 받은 자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인도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시고 일방적인 뜻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인도하심은 누구에게나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을 이루어주시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주석함도 필요하지만 자기 삶도 주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방법은 처한 환경을 보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약1:5).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매사에 주님의 뜻이 이해되든 안되듯 우리에게 주신 환경에서 요셉처럼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자만하면서 그 귀한 섭리적인 인도를 소홀히 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이 섭리의 훈련소에서 훈련을 잘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요셉처럼 영의 총리대신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감격된 날이 있게 됩니다.

다음에, 성령의 은사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요16:13에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할 일은 늘 기도하면서 은사의 도움을 받는 일입니다. 이 은사에는 객관적인 은사와 주관적인 은사가 있습니다. 객관적인 은사는 교회에 주신 주의 사역자들을 가리키고 주관적인 은사는 성령의 아홉 가지의 은사를 비롯한 신령한 은사를 뜻합니다. 객관적인 은사는 말씀을 종합적으로 지도하는 반면 기도를 통한 은사는 부분적인 지도입니다(고전13:9-10).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그래야 전체를 알고 세부를 알면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종합이든 한 마디든 나에게 꼭 필요 적절한 말씀으로 지도하여 주신다는 점입니다. 우리에게 많은 신령한 지식도 필요하지만 한 마디라도 붙잡고 온전히 내 신앙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또 다른 말씀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 인도를 계속 받아 그 말씀대로 신앙을 훈련하면 나중에는 아름답고 거대한 신앙의 집이 건축됩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성경이 없었고 필요할 때마다 한 걸음씩 인도해 주셨고 그 인도를 받다보니 약속하신 땅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결론은 언제나 감격스러운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명적인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계7:17에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니라” 하셨습니다.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성령의 인도이지만 앞의 것은 외적인 은사적인 인도라면 이것은 내적인 생명적인 인도입니다. 생명적인 인도란 우리 속의 그리스도의 생명의 흐름을 따라서 사는 삶을 가리킵니다.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깊이 연합되면 어린양 예수님의 생명적인 인도하심이 마치 강물이 흐르듯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 생명의 흐름 따라 살면 좋은 일에도 은혜, 매를 맞아도 은혜, 모든 것이 생명으로 바꾸어져서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이겨지는 이기는 생명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생명 따라서 살면 내적 치유가 일어나면서 영적 권세와 함께 심령에서 생명수가 터져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나무의 법입니다. 이 법은 선악과의 법보다 우선하는 법입니다. 선악과는 범치만 않으면 되지만 생명과는 만족히 먹어야 합니다. 이 생명나무는 성도로 하여금 천국시민에 합당한 자로 준비시키고 만국을 소성시킵니다(계22:2, 14). 여기 만국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와 영적권세를 입어 나라가 된 우리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생명 안에서 진정한 내적인 치유와 권능과 만족과 승리를 누립니다. 이것이 계17:17의 약속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이 강은 심령을 소성하기에 소성강이라 하는데 나아갈수록 더욱 넓고 깊어집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인도 따라서 살면 솔로몬의 잔치 집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상 몇 가지의 인도가 바로 주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목자 되신 주님의 양으로서 그 인도만 잘 따르면 은혜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무엇을 염려하십니까? 우리가 아는 말씀 대로만이라도 힘써 순종합시다. 무엇보다 주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 때 하인들의 순종으로 풍성한 잔치 집으로 변한 가나 혼인집처럼 풍성한 은혜의 잔치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럼, 주님의 인도를 받으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결과가 올까요?

1. 주님의 은혜를 크게 경험합니다.

4절에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 집에 들어갔으니” 했습니다.
여기 “잔치 집”(ןייה תיב ‘베이트 하야인’)은 ‘포도주의 집’으로 번역될 수 있는 용어입니다. 그리고 “잔치”(ןיי ‘야인’)는 ‘wine’(포도주)를 뜻합니다. 이렇게 성경에 포도주의 잔치 집이 등장함은 무언가 귀한 의미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즉 주님의 인도를 받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임한다는 사실을 교훈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인도를 받는 성도들에게 포도주와 같은 사랑을 부어주십니다(롬5:5). 그런데 이 포도주에는 삼위일체의 사랑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이와 같은 포도주의 사랑이 가능한 이유는 먼저 포도주와 같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의 보혈이 흘려졌기 때문입니다. 이 보혈의 공로로 포도주와 같은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보혈은 참된 영생의 음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포도주와 같이 부어지는 사랑은 곧 아버지의 사랑으로 주어졌다는 점에서 삼위일체의 사랑의 함축입니다.

2. 주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합니다.

역시 4절에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기”(לגד 데겔)는 창끝에 매어 다는 군대의 깃발로(민1:52, 시20:6) 집결 또는 소속과 위치 그리고 전의를 북 돋우거나 그 부대의 특성을 상징하는 높고 자랑스런 상징물입니다. 그런데 술람미 위에서 나부끼는 이 사랑의 깃발은 그 곳에서의 모든 행사가 오직 술람미를 위한 것임을 상징합니다. 즉 이 잔치는 왕을 위한 것도 아니오 신하들을 위한 것도 아니오 백성들을 위한 것도 아니오 꽃 한 송이 촛불 하나 음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신부인 오직 술람미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신부에 대한 신랑의 사랑과 예우가 대단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순종하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예비하셨구나 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고전3:21-23에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했습니다. 그 어떤 것 하나라도 다 나를 위한 것임이 느껴지기 때문에 내 위에 하나님의 사랑의 깃발이 펄럭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로와 성령의 포도주와 같은 사랑이 곧 나를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모든 언약의 축복이 곧 나를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를 사랑하라 혹은 하나님을 중심에 왕으로 모시라는 말씀도 다 나를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한 사람들의 경험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면 하나님을 오해하여 ‘하나님은 참 이상하시다. 자기만 사랑하라 하시고 너무 이기주의 아니신가?’ 하지만 그 인도대로 행해 본 사람은 그 말씀이 하나님을 위함이라기 보다 결국은 나에게 놀라운 생명과 사랑이 왕 노릇하는 엄청난 복임을 체험하게 됩니다.

3. 주님의 인도를 받으면 강한 능력을 받습니다.

5절에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했습니다.
여기에 시녀들의 도움을 요청하는 신부의 호소가 나타납니다. 왜 이런 호소를 할까요? 두 가지의 의미가 복합된 건데 그것은 포도주에 취함과 사랑의 병의 현상입니다. 이 두 가지는 현상이 비슷합니다. 술람미가 이 두 가지의 복합적인 현상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여기 술람미는 표면으로 드러내지는 않았겠지만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고 열이 나며 마치 폐인처럼 헛소리하며 연인을 부르고 있습니다. 어쩌면 술취함과 상사병의 증세가 비슷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포도주에 취함을 정당화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것은 당시의 문화적인 배경을 통하여 어떤 귀한 진리를 나타내 보여주려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의 병을 속칭 상사병이라고 하는데 이 병에 대한 백과사전에 “남녀 사이에 못 잊어 그리워하며 고민하는 나머지 생기는 병이다” 했습니다.

그래서 술람미는 시녀들에게 건포도로 힘을 돕고 사과로 시원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여기 “건포도”(תוֹשׁיꚄꔣ 에쉬쇼트)는 ‘포도 떡’으로 이 떡은 포도당이 진하게 농축되어 영양가가 높을 뿐 아니라 포도당은 그 특징상 먹으면 소화기관을 거치지 않고 장에서 직접 혈액으로 흡수되기 때문에 신속한 피로회복과 원기를 북돋아 주는 좋은 식품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병원에서 혈관에 포도당 주사를 놓아줍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강력하신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면 몸에 힘이 빠지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아주 역설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나 이미 영계에서 예수님을 만난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공통된 체험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능력의 손이 안수하여 주시기에 다시 정상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느낌일 뿐 강한 성령의 능력 아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때 일시적으로 죽음의 현상과 아울러 간혹 신비의 세계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인도를 받은 자가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4. 주님의 인도를 받으면 성령의 열심을 갖게 됩니다.

다시 5절에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 했습니다.
여기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는 것은 술람미의 뜨거운 마음을 시문학적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 “사과”(沙果) 역시 수분이 많고 특수한 영양소가 많아 소화를 촉진시키고 장을 튼튼하게 하며 혈압을 낮추어 안정시켜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몸을 시원하게 도와줍니다. 그런데 술람미가 이 시점에서 사랑의 병이 났다는 말은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병이란 짝사랑일 때 가능한 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의 배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아직 약혼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아직 결혼관계가 아닌데 사랑은 깊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에 대한 사모의 정이 너무나 깊어서 마침내 사랑의 열병에 빠지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시문학적인 표현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상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모습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의 인도를 받아서 살 때 사랑의 병이 들만큼 주님의 큰사랑을 경험하지만 이 지상에서 우리의 사랑을 다 표현하기에는 늘 제한이 있습니다. 우리의 무식이 그 놀라운 사랑을 다 노래로서 표현하지 못하며 우리 육체는 그 사랑에 보답하기에는 늘 한계가 있습니다. 만 입이 있어도 그 입으로 어찌 그 사랑을 다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도는 주님을 위해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이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는 아주 귀한 것입니다.

5. 주님의 인도 속에는 특별하신 안위와 보호가 있습니다.

6절에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 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했습니다.
우리는 이 문구는 실재적이라기보다 술람미가 취하여 의식이 몽롱한 가운데 잠꼬대함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아직은 혼인단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보여주는 비유적인 교훈은 우리가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면 그곳에 진정한 안위와 보호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왼팔로 베개 하여 주시고 주님께서 강한 오른팔로 안아 주신다면 두려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시 23편에도 “주의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우리를 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목자의 인도만 떠나지 않는다면 푸른 초장의 잔치와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주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조금도 불안해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은 성도의 비정상적인 신앙일지라도 잠시 동안 묵인하신다는 점입니다.
7절에 “예루살렘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했습니다.
이 구절은 솔로몬이 시녀들에게 당부하는 말입니다. 본래 시녀들은 궁중의 법도를 따라 왕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일거수 일투족까지 시중을 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주 법도에 능하고 잘 도우며 간섭을 잘합니다. 그 대상이 비록 왕이나 왕후일지라도 실수를 범치 않도록 매사에 간섭합니다. 그러므로 포도주의 집에서 술람미의 이 우스꽝스럽고 왕의 위신과 관계 있는 잠꼬대와 같은 소리를 그냥 내버려둘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왕은 시녀들에게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이 말씀 속에는 은혜의 도취할 때 많은 실수의 위험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여기 “노루와 들 사슴으로” 란 술람미를 지칭한 듯하지만 그보다 부탁의 방법과 강도를 의미합니다. 즉 놀라기를 잘하는 노루와 들사슴을 다루듯 술람미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그 시기는 내 사랑이 원하기까지입니다.

이것은 이 영적인 경험 단계에서 범하기 쉬운 실수와 아울러 그래도 주님께서 넓은 아량으로 허용하시는 범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영적 단계에서 은혜의 도취는 자기 만족으로 발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풍성하고 나은 삶이 기다림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2:8 이하에서 다루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크신 사랑하심을 오해하여 자기 중심적인 시험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보다 그 은혜에 더 관심을 갖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 어린 영적 단계이기 때문에 그것을 잠시 허용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단계에서 너무 차원 높은 신앙을 요구하시게 되면 성도들이 흥미를 잃고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신자들이 마치 이방 종교식으로 하나님께 간구해도 들어주시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 현상을 어디까지나 그렇게 받아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되었는데 머지않아 안 되는 날이 옵니다.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실망하고 낙심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육신적인 형통과 은혜의 풍성함도 좋지만 무엇보다 영적인 바른 신앙을 세워나감이 중요합니다. 그 때 더욱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내 사랑이 원하기 전의 뜻입니다.

<결론>
이처럼 주님의 인도를 받는 성도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인도하신 말씀 따라 사십시다. 그래서 결코 부족함이 없는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