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여우를 잡으라 (아 2:14-17)

2006. 1. 26. 11:24목양자료/3.강해설교

작은 여우를 잡으라 (아 2:14-17)
= 사고와 생활의 변화 =

요 약

성도는 지상을 사나 높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천상의 삶을 살아가는 특수한 존재이다. 우리의 영적 주소는 승천하신 그리스도 안이다. 이 천성에 속한 삶은 아름답지 않는 것은 조금도 없다. 그러므로 이제는 지상의 사고가 아니라 천상의 사고로 바뀌어야 한다. 이 옛 사고가 우리의 영적 생활을 파괴하는 것이다. 물론 순종하지 않을지라도 주님과의 연합의 진리는 변치 않는다. 그러나 불변 언약과 여호와의 열심을 이용한 불순종과 안일함의 만용은 사랑의 발전에 큰 장애가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설 명

1. 배 경
술람미의 꿈속에서 되어진 일로 솔로몬이 왕궁 가기를
주저하는 신부를 여러 방향에서 설득하고 회유하는 내용이다.


2. 적 용
(진단) 부부생활에 불충실과 불성실이 존재합니까?
(해결) 언약과 사랑과 자녀출산 등으로 자만하지 않는지요.


2. 신령한 의미
높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의 복됨이 계시되어 있다.

1) 성도의 영적 주소
14절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바위’는 그리스도의 상징이다(고전10:4).
그런데 높은 바위틈이니 높이 되신 그리스도 안을 가리킨다(골3:1-3).

2) 천상에 속한 것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14절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 신부의 응답을 얻어내려는 솔로몬의 회유적인 설득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모습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고후5:17).


3. 주의 할 점

1) 옛 사고와 관념
15절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여우는 거짓선지자나(겔13:2, 4), 의심과 불신앙을 상징한다.

2) 언약적 자만의 안일함
16절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 양떼를 먹이는구나”
: 이제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일종의 자만의 뜻이다.

3) 열심 함에 무관심
17절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
: 사랑의 포로된 연인은 다시 내 품으로 돌아오고 말 것이다.


아가 2:14-17

14 (솔로몬)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15 (술람미)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16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17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

원 문

14 יתנוי 요나티(오 나의 비둘기여) עלסה יוגחב 베하게웨 핫셀라(바위 틈)
הגרדמה רתסב 베세테르 함마데레가(낭떠러지(절벽) 은밀한 곳에 있는)
יניארה 하레이니(내가 보게 하라) ךיארמ־תא 에트 마르아이크(너의 얼굴을)
יניעימשׁה 하쉐미이니(내가 듣게 하라) ךלוק־תא 엩 콜레크(네 목소리를)
ךלוק־יכ 키 콜레크(왜냐하면 네 목소리가) ברע 아렙(달콤하고)
ךיארמו 우마르에크(네 얼굴은) הואנ 나웨(아름답도다)
15 ונל־וזחא 에헤주 라누(우리를 위해 너희는 잡으라)
םילעושׁ 슈알림(여우들을)
םינשק םילעושׁ 슈알림 케탄님(작은 여우들을) םילבחמ 메합벨림(고통을 주는)
םימרכ 케라밈(포도원에) ונימרכו 우케라메누(왜냐하면 우리 포도원에)
רדמס 세마다르(꽃이 피어있기 때문이다)
16 יל ידוד 도디 리(내 사랑하는 자가 내게 속하였고)
ול ינאו 와아니 로(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הערה 하로에(그가 양떼를 먹이고 있구나) םינשׁושׁב 밧쇼솬님(백합화 가운데서)
17 חופישׁ דע 아드 쉐야푸아흐(숨을 쉬며(저물며))
םויה 하욤(날이) וסנו 웨나수(도망갈 때) םיללצה 핯첼랄림(그림자가)
בס 소브(너는 돌아가라) ךל־המד 데메 레카(-와 같이)
ידוד 도디(내 사랑하는 자여) יבצל 리체비(가젤)
םיליאה רפעל וא 오 레오페르 하아얄림(혹은 어린 사슴과 같이)
רתב ירה־לע 알 하레 바테르(베데르 산에 있는)

스 토 리

그러나 솔로몬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술람미는 산비둘기처럼 자기 은신처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녀가 자신의 비둘기임을 확신시키며
응답만 해 준다면 그것이 자기에게
가장 부드러운 음성이요
가장 아름다운 표정이 아닐 수 없으니
속히 응답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럼에도 술람미는 우리의 관계를 허는
시기의 세력들을 제거해 달라고만 고집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제 우린 약혼했으니
그는 내 님이고 나도 그의 님이 확실하며
그가 나에게 뜨거운 입맞춤을 계속하고 있으며
그가 나의 사랑의 포로가 되었을 진데
그는 나를 영원히 떠나지 못할 것이라고
잠꼬대를 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작은 여우를 잡으라”는 제목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신랑이 왕궁으로 가기를 주저하는 신부를 여러 방향에서 설득하여 그 마음을 돌려보려고 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이 사건은 술람미의 꿈속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그러니까 술람미는 지금 잔치 집에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매일 은혜의 잔치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으로 보면 본 사건은 하나님께로 높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의 축복을 교훈함입니다. 그러니까 앞 절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면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승천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부르심 속에는 이런 귀한 내용이 있습니다.

본문은 여기에 대하여 약 네 가지의 원리를 나타내 줍니다.

1. 성도의 영적인 주소를 가르쳐 줍니다.

14절에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했습니다.
이 구절의 상징적인 의미는 왕궁 가기에 냉담한 술람미의 완고한 마음의 상태를 뜻합니다. 이것은 술람미의 가슴에 아직 치료되지 못한 과거의 마음의 상처를 암시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수 없이 넘어진 실패의식이나 항상 죄의식 때문에 주님 따라 가기에 부적격자로 여기는 경향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마음이 심히 산란해도 믿음에 서서 “주여 나를 예수 안에서 구원하셨음을 감사합니다” 해 보세요. 이렇게 믿고 시인할 때 그 산란한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바위’의 좀 더 다른 의미를 살펴보면 원문에 (עלס ‘쎌라’)로서 이 쎌라 바위는 보통 바위가 아닙니다. 여기 쎌라는 일반적인 바위를 뜻하는 (רוצ ‘추르’)와 대조적으로 틈이 있는 바위로서 바위나 절벽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물론 추르도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사31:3). 그런데 여기 바위는 쎌라입니다. 이 바위는 모세가 두 번 쳐서 생수가 터져 나온 그 바위입니다(민20:8). 그렇다면 이 바위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높이 되셔서 지금도 성령을 강수처럼 부어주고 계신 아버지 우편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고전10:4에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했습니다.

그런데 비둘기가 이 쎌라 바위 낭떠러지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비록 몸은 잔치 집에서 자듯 지상에 있어도 주님은 우리에게 너는 하늘에 속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엡2:6에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 말씀이 곧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높고, 가장 강하고, 가장 안전하고, 가장 은밀한 장소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영적 주소가 하나님 우편까지 높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가장 높고 가장 안전하고 가장 은밀한 곳입니다. 이 곳은 세상의 그 어떤 죄악의 세력도 어둠의 그 어떤 사단의 세력도 음부의 권세도 미치지 못하는 안전한 곳입니다. 그래서 골3:1-3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했습니다. 여기 감취어 있다는 사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 성도를 비둘기로 표현했습니다. 비둘기는 평화나 소식이나 애정이나 짝과 관련된 동물이지만 아주 약한 짐승입니다. 그래서 렘31:11에 비둘기는 힘이 없어 자신을 지키지 못한다, 호7:11에는 비둘기는 지혜도 없다고 했습니다. 비둘기는 독수리 같은 강한 부리나 강한 발톱이나 강한 날개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비둘기는 반드시 그 둥지를 안전한데 틀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는 가장 안전한 곳에 우리의 거처를 정해야 합니다. 그럼 가장 안전한 곳이 어디이겠습니까? 세상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만이 안전합니다. 이곳에 피하면 그 무엇도 우리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귀한 진리를 꿈속의 사건에 담아서 나타내셨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높이 되신 그리스도의 안의 축복은 믿음의 눈으로만 이해되는 영적인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모든 것이 다 변했다고 말하는데도 술람미는 여전히 딴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성도들은 믿음이냐 현실이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갈등하지 마시고 하늘 높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높이 되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 하늘에 속한 자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교훈입니다.

14절에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했습니다.
이 구절은 신부의 응답을 얻어내려는 솔로몬의 회유적인 설득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보여주는 교훈적인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얼굴은 원문에서 보면 (ףא 아프) 인격 전체를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다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높이 되신 예수님이시니 이 아름다움은 천상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계21:2에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했습니다. 이 계시록에 묘사된 그리스도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소리가 아름답다란 어서 나를 따라 가겠다고 말하라는 술람미의 응답을 고대하는 솔로몬의 심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처럼 천국에는 온통 긍정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그곳에는 부정이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성의 영역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항상 진리에 서서 긍정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믿음대로 생각대로 되어지는 완전 자동적인 곳입니다. 물론 아버지의 뜻 안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천성에 속한 우리들은 우리의 인격과 언어까지도 온전히 천국 시민에 합당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옛 사고와 관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5절에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했습니다.
이 구절을 누구의 말로 보느냐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술람미의 말로 볼 경우 우리의 관계를 시기하는 세력들을 제거해 달라는 의미가 되고, 솔로몬의 말로 볼 경우에는 너의 잘못된 인간의 생각을 제거하라(겔13:3)는 경고가 됩니다. 이 두 주장은 의미상 막상막하여서 어느 것을 택할지 어렵습니다. 그러나 두 주장은 그 의미상 흡사한 면이 있다는 점이 퍽 다행스럽습니다. 그런데 원문의 ‘너희는 잡으라’(וזחא 에헤주)가 2인칭 남성 복수 명령형임을 참고할 때 이는 남자에게 부탁하는 것으로 대화자가 술람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큰 여우가 아니라 작은 여우라고 했습니다. 큰 여우는 이미 솔로몬이 잡았지만 작은 여우는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즉 솔로몬의 설득으로 왕궁의 인식은 급변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술람미는 속으로 이 혼인을 시기하는 세력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아직 때가 덜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조금이라도 이 시기하는 세력이 존재한다면 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교회 임지를 옮길 때 한 사람이라도 반대한 사람이 있다면 가기 싫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와 흡사합니다.

그리고 “허는”(םילבחמ 메합벨림)의 원문은 피엘형 현재분사로서 여우들이 지금 헐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여기 ‘여우’(לעושׁ 슈알)는 작은 팔레스틴의 여우로 봄에 포도원에 굴을 파고 살면서 포도나무의 뿌리와 줄기와 싹과 꽃 등을 갉아먹어 포도 농사를 망치는 주범입니다. 성경에서 여우는 간교한 동물이요(눅13:32), 무가치한 동물이요(느4:3, 겔13:4) 거짓선지자들을 뜻하는 다른 이름입니다(겔13:2, 4).

그러니까 이 여우는 의심과 불신앙을 상징합니다. 이것을 술람미가 하는 말이라면 ‘나는 아직 주님의 은혜가 더 필요합니다. 내 속에는 은혜가 부족하여 아직도 영적인 삶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내 속에는 아직도 나를 넘어뜨리는 여러 세력들이 존재합니다. 은혜를 더 주시지 않으면 자는 불가능합니다’ 하는 우리 성도들이 흔히 하는 투정입니다.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큰 은혜 가운데 있으면서도 나는 은혜를 흡족하게 받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는 것이 항상 은혜타령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믿어지는 것도 믿음이지만 생명 걸고 진리에 대해 믿음에 서는 것도 믿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처럼 신앙의 정절 지키며 기도하며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도 믿음입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실족치 않는다는 것을 왜 모르는지 모르겠습니다(눅17:1-6).

이제는 믿어짐과 아울러 용기 내어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에게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은혜를 주셨다고 믿으십시오. 왜냐하면 이 시점에서 가장 요구되고 있는 것은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의 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보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 것도 받은 것도 없습니다. 마치 니고데모에게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한 것처럼 인간의 눈으로는 복음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 일은 오직 영의 눈으로 볼 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문제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되었으며 또한 우리는 높이 되신 그 영광스런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많은 믿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각을 버리고 이 복음에 서라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사단 앞에서도 이겼음을 감사할 물러가는 역사를 경험합니다. 이 때 놀라운 약속이 우리에게 성취되고 승리와 영광의 천상의 삶이 이루어집니다.

다음은, 언약의 불변성의 안심이 신앙의 안일로 나타나서는 안됨입니다.

16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했습니다.
이 구절은 부부의 견고한 언약을 상기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현재도 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왕궁으로 가자는 솔로몬의 부탁에 소극적 내지는 거역함일지라도 이제 두 사람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일종의 자만의 뜻입니다.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그러기에 지금도 나에게 변함없이 입 맞추어 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은 꿈속에서의 일입니다.
이렇게 언약을 이용한 자만은 영적 생활에서 매우 해롭습니다. 내가 택한 백성이라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천국은 간다는 식의 생각이라면 언약의 믿음의 범위를 월권함입니다. 언약에 대한 안심이 신앙의 안일로 나타나서는 안됩니다. 어느 교단에서는 성령 세례 못 받으면 천국 못 간다 하니까 교인들이 목숨 내걸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기도해서 받는 성령이라면 엄밀한 의미에서 성령 충만이지 성령 세례는 아닙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은 성화와 관계가 있지 구원의 유무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주장이 좋은 각성이 되어 모두 기도에 열심함으로 그 교단은 성령 충만하기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우리 장로교 교리 교육을 받은 성도들 중에는 이신득의라는 귀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만용하여 예수 믿어 천국은 갈 것이니 염려 없다 하여 언약을 이용한 자만하는 자가 많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을 선택 사항 정도 생각하여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음 좋다고 하지 않습니다. 술람미의 말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 언약성에 비추어 영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하셨습니다. 그러나 언약의 불변성의 안심이 신앙의 안일로 나타나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아가서의 사랑 역시 여기서 멈추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공로이니 내 열심 없어도 될 것이라는 만용을 버려야 합니다.

17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 했습니다.
베데르산은 사방이 절벽으로 되어 있어서 여기 사는 짐승들은 갇힌 신세가 됩니다. 더구나 소심한 노루와 어린 사슴이니 이곳을 떠나가지 못합니다. 특히 이 노루와 사슴은 자기가 있던 장소를 멀리 벗어나지 못하는 짐승입니다. 그래서 청춘에 얻은 아내는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떠나지 않기에 암사슴과 암노루에 비유했습니다(잠5:19). 그러므로 이 구절을 쉽게 풀이하면 나의 사랑하는 자는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처럼 해가 져도 나를 너무 사랑하기에 마음 약한 님은 나에게로 반드시 돌아오고 말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 란 용어를 4:6의 신혼초야에서 다시 사용한 점을 보아 이는 신부의 품을 암시하는 고도의 시문학적인 표현입니다. 이처럼 신랑이 가봐야 결국은 신부의 품에 돌아오고 만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신랑이 사랑의 포로라는 것을 전제한 신부의 생각입니다. 내가 안 가면 가장 애가 탈 사람이 신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론 꿈속의 일이지만 일종의 신부의 자만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성화적 삶을 살게 하실 분이 하나님이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9:7에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하신 대로 이 구원 사역은 아무도 막지 못할 하나님의 열심히 되고 있습니다. 우리를 시기하시기까지 사모하시는 분이 성령 아니십니까?(약4:5). 이 말씀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신앙 생활에 소극적으로 임하면서 열심 내지 않는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칼빈주의 하나님 주권과 예정론이 잘못은 아니지만 이것을 남용한 결과 다 하나님의 뜻대로 될텐데 하며 열심 하지 않던 그런 부작용을 목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정론이 성도의 열심까지 막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리를 교묘히 이용하여 현실에 안주하는 것은 영적인 발전에 매우 해롭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견고한 언약의 확신에만 머물러 더 높은 곳에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거부하고 있다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열심 있는 신앙 생활하십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귀한 복음의 실재를 풍성히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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