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오는 노루 사슴 (아 2:8-10)

2006. 1. 26. 11:24목양자료/3.강해설교

달려오는 노루 사슴 (아 2:8-10)
= 관점의 차이 =

요 약

은혜의 초심자들은 흔히 기도에서만이 주님을 경험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신 부활의 주님으로 충만하면 어떤 환경에서도 승리하고 만족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더 적극적으로 성령 충만한 열심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 주님을 사랑하여 날마다 기도하면 어떤 싸늘한 환경도 아랑곳 하지 않고 전천후의 은혜 생활이 가능하다. 우리가 성령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면 부활과 승천에도 연합한 자가 되어 하늘에 속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설 명

1. 배 경
⇒ 꿈속에서 솔로몬이 혼인을 위해 가자고 술람미를 부른다.

2. 적 용
(진단) 성격 체온 습관 등의 차이가 심하십니까?
(해결) 성령의 은혜와 식이요법 등으로 격차를 줄이십시오.

2. 술람미의 꿈
1) 꿈꾼 장소 - 왕궁의 잔치집
2) 꿈의 배경 - 레바논의 수넴 술람미의 집
3) 성경적 범위 - 2:6-3:5

3. 솔로몬의 부름에서 나타난 교훈

1) 부활의 주님
8절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 왕궁의 혼인날을 받아오는 신랑의 기쁜 모습이다.
산들을 넘어 달려옴은 문제를 이기신 부활의 주님을 상징한다.

2) 사실과 체감의 차이
9절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 두 사람의 계절 감각의 차이를 보여준다.
성도들이 느끼는 감각은 영적 겨울이지만
주님은 자기 안에서 이미 부활의 봄이 왔다고 말씀하신다.

3) 연합의 아름다움
10절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 삶에서 연합될 때 더욱 아름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하여 예수님이 나타날 때 더욱 아름답다.

4. 주님과 동행함
10절 “일어나서 함께 가자”
: 신랑이 신부를 데려오는 이스라엘 풍습이 반영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등 구속과정의 연합을 경험케 하신다.


아가 2:8-10

8 (술람미)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9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원 문

8 ידוד לוק 콜 도디(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אב הז־הנה 힌네 제 바(보라 그가 오는도다) גלדמ 메달레그(뛰면서)
םירהה־לע 알 헤하림(그 산 위를) צפקמ 메캎페츠(뛰는도다)
תועבגה־לע 알 학게바오트(언덕들 위를)
9 המוד 도메(같도다) ידוד 도디(내 사랑하는 자는) יבצל 리체비(가젤)
םיליאה רפעל וא 오 레오페르 하아얄림(혹은 어린 수사슴 같도다)
דמוע הז־הנה 힌네 제 오메드(보라 거기에 그가 서 있으면서)
ונלתכ רחא 아하르 카텔레누(우리 벽 뒤에서)
חיגשׁמ 마쉭기하흐(엿보고 있구나) תונלחה־ןמ 민 하할로노트(창문으로)
ציצמ 메치츠(보고있도다) םיכרחה־ןמ 민 하하랔킴(창틀을 통해)
10 ידוד הנע 아나 도디(내 사랑하는 자가 말하며)
יל רמאו 웨아마르 리(내게 이르기를)
ךל ימוק 쿠미 라크(당신을 위해 일어나소서) יתיער 라야티(내 사랑하는 자여)
יתפי 야파티(나의 어여쁜 자여) ךל־יכלו 우레키 라크(갈지라)

스 토 리

잠에 빠진 술람미는 꿈을 꾸었다.
꿈속의 장소는 첩첩 산중 자기의 집,
사랑하는 자가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아
창 밖을 내다보는 것은 그녀의 습관처럼 되었다.
아니나 다를 새라 솔로몬이 멀리서 술람미를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신부를 보고 싶어서 일까? 대궐의 좋은 소식이 있어서 일까?
그가 산들을 달리는 모습은 기쁨을 감추지 못해 뛰는
가젤의 모습과도 흡사하였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도망치기를 잘하는 노루와 힘없는 어린 사슴과도 같이
주위만 맴돌면서 창 너머로 엿 볼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
싸늘한 바람 소리에 술람미는 문조차 열지 못하였지만
솔로몬은 봄바람보다 더 포근하고 아름다운 소리로
자기의 약혼자를 불러내고 있었다.

오늘은 “달려오는 노루사슴”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본문은 술람미의 꿈입니다. 술람미의 꿈은 2장 6절에서 3장 5절까지입니다. 꿈의 배경은 레바논 수넴 술람미의 고향집이고 꿈의 내용은 연인인 솔로몬이 술람미를 찾아와서 이제 봄이 됐으니 속히 혼인을 위해 예루살렘 왕궁까지 가자고 신부를 부르는 내용입니다.

10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이 얼마나 다정하고 아름다운 소리입니까? 이렇게 꿈이란 현실을 초월해서 사람의 심정을 잘 드러내거나 그 내용을 극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신비한 특성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지상에서 사나 세상을 이기고 하늘에 속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교훈합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몇 가지의 중요한 사항이 있습니다.

1. 주님은 부활의 주님이시란 사실입니다.

8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했습니다.
본문의 문자적인 의미는 술람미의 꿈속에서 신랑이 신부를 찾아 험한 크고 작은 산들을 노루와 사슴처럼 달리고 달려서 넘어온다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신부를 속히 예루살렘 왕궁으로 데려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현실이 아니라 꿈속에서나 있을 수 있는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한 나라의 왕인 솔로몬이 그러한 모습으로 신부의 집에 찾아 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술람미의 꿈속에서 이와 같은 꿈이 꾸어진 이유는 앞의 잔치 집에서 그 만큼 신랑의 사랑을 확신했었기 때문입니다. 1:4절을 참고할 때 전에는 자신이 솔로몬을 향해서 달려가는 꿈을 수없이 꾸었지만 이제 자기를 향한 솔로몬의 사랑을 알고서는 신랑이 자기를 향해 달려오는 꿈을 꾼 것입니다. 그리고 꿈의 배경은 술람미의 고향집 레바논의 첩첩 산중입니다.

이 구절이 상징하듯 여기 수많은 산들을 넘어 달려오는 신랑의 모습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또 여기 “산”은 성경의 개념으로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상징합니다. 그럼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와 사망과 저주의 문제나 사단의 시험이나 세상의 온갖 악한 문제들입니다. 그리고 달리기를 잘하는 사슴은 가젤 사슴을 가리킵니다. 이 가젤 사슴의 산들을 넘는 그 모습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동물 연구가들의 관찰에 의하면 가젤 사슴이 앞다리를 뻗고 하늘로 치솟기를 반복하는 특이한 몸 동작은 동료들에게 위험을 알리는 신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 치솟는 이 신호를 사실적이 아닌 문학적 관점에서 신부를 사랑하여 달리는 환호적인 신랑의 모습 혹은 왕궁의 혼인날을 받아 달려오는 기쁜 소식을 가진 솔로몬의 모습으로 바꾸어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세상 권세를 이기는 능력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나타남이며 따라서 놀라운 복음의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다 이기신 주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이유는 환경이 두려워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이미 예수와 함께 부활한 자입니다. 롬6:5에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임재를 잃어버릴까 환경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2. 그러나 육신적으로 느끼는 느낌은 그것과 다르다는 점입니다.

9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했습니다.
여기 솔로몬과 술람미의 차이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지금 술람미는 방안에 있고 솔로몬은 밖에 있습니다. 그토록 신부를 향해 달려왔으면 들어와야 정상이 아닙니까? 그런데 솔로몬은 도무지 들어오려고 하지 않고 창으로 들여다보다가 노루와 사슴처럼 자꾸만 밖으로 달아나려는 모습을 반복합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은 창과 창살 틈으로 기웃 기웃 엿보면서 신부가 나오기만 기다리고 술람미는 속히 신랑이 안으로만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두 사람의 서로 다른 계절 감각의 차이를 엿봅니다. 술람미에게는 이 계절이 아직은 매섭게 추운 겨울입니다. 그래서 벽안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벽은 원문에 ‘카텔’로서 담 벽이나 방의 칸막이가 아니라 집 자체의 벽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계절은 화창하고 완연히 무르익은 봄입니다. 그래서 신부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하면서 불러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면 산촌인 레바논과 예루살렘과는 계절적인 큰 차이가 있습니다. 레바논은 거대한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고 세계적인 고산이 여러 개 치솟아 있는데 그 중에 헤르몬 산은 높이가 2,814미터나 됩니다. 그래서 연중 눈이 덮여 있는 기간이 긴 곳입니다. 그래서 산 정상은 겨울이요 중턱은 봄이요 아래는 여름입니다. 거기다 그곳은 예루살렘보다 북방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봄이 왔어도 안티레바논의 술람미의 고향 수넴 마을은 아직 겨울입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이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한다고 한 그 시기는 양력으로 6월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니까 봄도 아주 무르익다 못해 초여름인 셈입니다. 그런데 신부는 아직 겨울이라고 방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나오지 않는 이 무례한 자세는 현실이 아닌 꿈속에서 있을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에게 교훈 하는 바는 세상에 대하여 주님의 관점과 우리가 육신적으로 느끼는 느낌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세상이란 마냥 우리를 시험 들게 하고 상처 주고 힘들게 하고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생활이란 세상 속에서는 불가능함을 느낍니다. 우리가 느끼는 세상은 신앙인이 안심하며 살 합당한 영적 환경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육신적으로 느끼는 세상은 매서운 영적 겨울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 때의 신앙이란 세상 환경의 지배를 크게 받습니다.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의 시간을 제외하고서는 삶의 현장에서 실패하는 쓰디쓴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삶에서는 곧잘 주님의 임재를 잃어버립니다.

그런데 왜 잔치 집 사건 후에 이러한 부르심이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깊은 은혜를 경험한 성도에게는 부활의 능력이 그 만큼 나타나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복음과 성령 안에서 이기는 은혜에 있지만 문제는 사고가 변치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 안에서 이미 이긴 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 여부를 떠나서 신자는 이미 이긴 자라는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더구나 성령의 은혜로 이기는 생명 상태에 있으면서 사고의 변화가 없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주장하여 생명의 성령 흐름 따라 살 수 있게 되어지면 율법의 요구도 이루어지고 어떤 육신적인 죄악도 다 이겨짐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롬8:4에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고, 갈5:16에는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부활의 봄이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도들을 격리의 벽이 아니라 삶의 현장인 세상으로 불러내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막16:7)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사람들의 핍박이 두려워서 방문을 닫아걸고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밖에는 그들의 생명을 찾는 헤롯왕과 종교지도자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느끼는 방문 밖이란 싸늘한 겨울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가면 죽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험적인 순종으로 갈릴리로 나가보니 굳게 닫힌 골방에 찾아 오셨던 그 부활의 주님께서 그 곳에 계셨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즉 삶과 사명의 현장에 주님은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시다 하면서 물로 뛰어들어 주님께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요16:33에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요일5:4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입니다. 이 부활 생명이 우리 안에 나타날 때 성도들도 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 변화되지 못한 성도들의 고정관념입니다. 그래서 삶에서의 승리할 은혜를 구하지 않고 환경의 변화만을 간구합니다. 그러나 그토록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 환경을 해결하여 주시지 않으셨다면 이기라고 하심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을 보세요? 그들의 환경은 참으로 혹독한 겨울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박해와 시련과 멸시와 매 맞음과 빼앗김과 투옥이 예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의 능력으로 그것을 다 이기고 앉으나 서나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우리에게 부활 생명 안에 살면 어려운 환경에서 도리어 은혜가 풍성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환경보다 믿음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 성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될 때 더욱 아름답습니다.

10절에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했습니다.
이 말은 꿈속에서 솔로몬이 술람미를 부르는 호칭입니다. 이 이중적이고 아름다운 애칭에 그녀를 극진히 사랑하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혹은 나오지 않으려는 술람미의 마음을 알고 간곡히 회유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진실로 아름다우니 속히 왕궁으로 가서 혼인을 하자는 권유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성도에게 부활의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이 부활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령의 권능이요 열매입니다. 이 아름다움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얻은 것이지만(고후5:17) 성령이 충만할 때 풍성히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이미 이긴 자임을 감사하되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함으로 성령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나타나십니다(요14:21).

4. 내 힘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힘으로 가능합니다.

10절 하 반절에 “일어나서 함께 가자”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함께 하실 때만이 거친 환경을 살아갈 수 있음을 봅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함께 하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풀무불에서도 머리카락 하나 그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성도를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롬8:9). 그런데 갈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25절에 성령으로 살았으면 성령으로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진정 주님이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죄악의 거친 세상이라도 넉넉히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에 부활의 봄이 왔는지 살펴보십시오. 우리가 사는 세상의 환경은 여전히 죄악과 시험의 겨울이지만 우리와 연합되신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힘입어 겨울을 봄과 같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부활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 부활의 능력으로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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