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비둘기 (아 1:15-17)

2006. 1. 26. 11:21목양자료/3.강해설교

내 사랑 비둘기 (아 1:15-17)
= 말씀 안에서 교제함 =

요 약

진정한 신앙은 교회 중심 말씀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온다. 전처럼 더 이상 근심하거나 방황하지 않고 예배 중에 들려지는 말씀 안에서 성도들은 주의 사랑의 음성을 들으며 성도들 또한 주님께 사랑함을 고백한다. 이제 육신적인 욕심은 사라지고 다만 만세 전부터 택하여 주심을 감사하면서 주님의 관점을 나의 관점 삼고 순종하기에 열심이다. 이 때 성도는 진리 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 은혜와 진리의 그리스도, 내 생명이신 그리스도, 대속의 사랑과 잔잔하신 돌보시는 사랑의 그리스도를 경험하며 살아간다.

설 명

1. 배 경
약혼한 후에 천생연분임을 확인하며 서로 칭찬하는 내용이다.


2. 적 용
(진단) 아내의 관심을 끌지 못합니까?
(해결) 잔잔하고 자상한 사랑은 그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습니다.

2. 장소적 배경
16절 “우리 침상은 푸르고”
푸른 초장의 연애의 장소로 목장인 교회를 시사한다.
즉 예배 중에 들려지는 말씀 안에서 성도들은 주의 사랑의 음성을 듣고
또한 성도들은 주님 사랑함을 고백한다.


3. 천생연분 확신
15절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만세 전부터 정해진 그의 베필임을 기뻐함이다.


4. 솔로몬의 신부 칭찬
1)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 (고후5:17)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15절)

2) 생겨진 영적 통찰력과 정절성 (고전2:10, 16)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15절)
진리를 알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도


5. 술람미의 신랑 칭찬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 침상은 푸르고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16절)
1) 말씀이 육신이 되신 완전하신 그리스도
2) 은혜로우신 그리스도(요1:14)
3) 내 생명 자체이신 그리스도
4) 대속의 크신 사랑 주신 그리스도
5) 돌보시는 잔잔하신 사랑의 그리스도


아가 1:15-17
15 (솔로몬)내 사랑아
너는 어어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16 (술람미)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 침상은 푸르고
17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원 문

15 ךנה 힌나크(보라! 너는)
הפי 야파(아름답구나)
יתיער 라야티(내 사랑아) ךנה 힌나크(보라! 너는)
הפי 야파(아름답도다) ךיניע 에나이크(네 눈은)
םינוי 요님(비둘기로다) 16 ךנה 힌네카(보라! 너는) הפי 야페(아름답도다)
ידוד 도디(내 사랑하는 자야)
םיענ ףא 아프 나임(참으로 사랑스럽도다)
ונשׂרע־ףא 아프 아르세누(우리의 침상은)
הננער 라아나나(푸르도다)
17 וניתנ תירק 코로트 밭테누(우리 집의 들보는) םיזרא 아라짐(백향목이요) ונשיחר 라히테누(우리 석가래는) םיתורב 베로팀(소나무로다)

스 토 리

솔로몬은 사랑스런 그녀를 바라보며
짝지어 주신 자기 배필임을 실감하였다.
술람미의 눈은 솔로몬을 향한 애정으로 가득했고
솔로몬의 인품과 잘 생긴 매력에 그녀의 마음은
온통 화창한 봄 동산으로 변하고 말았다.
두 사람은 목장에서 자주 만났다.
그래서 그들의 보금자리는 푸른 초원이었고
우람한 백향목과 잣나무의 잔잔한 그늘이
그들의 집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 시간 “내 사랑 비둘기”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은 약혼한 두 사람이 하나님께서 맺어 주신 천생연분을 생각하며 서로 칭찬하는 모습입니다. 구체적으로 15절은 솔로몬의 말이고 16-17절은 술람미의 말입니다. 여기서 솔로몬은 술람미를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비둘기와 같은 자기 베필임을 노래합니다. 그러자 술람미도 역시 솔로몬의 모습과 그 아름다운 인품을 노래로서 화답합니다. 그리고 이어 목장을 배경으로 한 그들의 첫사랑의 행복을 노래합니다. 이처럼 서로 사랑하면서 좋은 점을 발견하여 칭찬할 때 부부관계는 더욱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먼저, 솔로몬이 술람미를 칭찬합니다.

15절에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아름답습니다. 이 단계는 앞에 나타난 대로 이미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나타남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 구체적인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1.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아름다움입니다.

15절에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했습니다.
여기 “어여쁘고 어여쁘다” 는 원문에 ‘보라 너는 아름답구나 보라 너는 어여쁘구나’ 라는 뜻으로 이러한 반복적 용법은 어떤 사실을 강조할 때 쓰이는 강조형입니다. 그러니까 참으로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조그만 불만도 없음을 뜻합니다. 남녀가 사랑할 때 무엇이 불만이 있겠습니까? 그 때는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보일 뿐입니다. 이 사랑이 식어질 때 문제가 옵니다. 하루 최하 10분 이상씩 배우자를 위해서 기도를 빼지 말라는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참된 사랑을 공급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여쁘다” 라는 말과 원문에 “보라” 라는 말이 각각 반복됨과 아울러 비둘기의 눈으로 묘사함을 보아 신랑은 신부를 마주 보면서 매우 사랑스러워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너무 좋아서 견딜 수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 민요의 이리 보아도 내 사랑 저리 보아도 내 사랑이라는 가사와 같은 대목입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영적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이와 같이 아름답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후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 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했습니다. 본문의 원어에 ‘보라’가 나왔는데 여기서도 ‘보라’가 나왔습니다. 이 같은 감탄사가 항상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만 있으면 어떤 악인도 어떤 부족한 사람도 인격의 어느 부분도 그 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 안에”란 체험적으로는 곧 성령 안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을 경험함으로서 비로소 그리스도 안이 경험되어지고 또 성령 충만한 만큼 그리스도 안이 경험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복된 경험은 주님을 진실로 사랑할 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14:20-21)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입혀지는 이 아름다움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갈5:22).

2.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참된 짝이 될 수 있습니다.

또 15절에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했습니다.
여기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라는 칭찬은 솔로몬이 신부의 애정 어린 눈을 칭찬한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는 성도의 영적 통찰력에 대한 칭찬입니다. 비둘기의 시야는 그리 넓진 못합니다. 그러나 비둘기 눈의 구조는 무엇을 꿰뚫어 보는 돋보기와 같은 통찰력이 있습니다. 이처럼 신부의 수준에 이른 성도들은 주님의 진리와 마음을 이해하는 영적 능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성도의 마음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성령께서 안에 계시면 주님의 마음을 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고전2:10에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했고 16절에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한 것입니다. 비둘기 역시 성령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 있으면 이렇게 영의 비둘기의 눈이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주님의 마음이 되어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마음이 되어 이웃을 섬기면서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미국의 유명한 여류 부흥사 캐드린 쿨만이 사람들 앞에서 눈에 눈물이 가득한 가운데 한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제 안에 계신 성령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께 진정 부탁합니다. 그 분의 마음을 슬프게 하지 마세요. 그 분은 저의 생명입니다” 그것은 쿨만의 마음속에 성령의 마음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령 안에 있으면 그 때는 내 마음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이 마음의 단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주님의 합당한 짝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신부는 아직 어린 코흘리개여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성숙한 신부는 십자가에서 만들어집니다. 하와를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셔서 그 갈빗대로 만드실 때 아이로 만드시지 않고 성인으로 만드시지 않았습니까? 그 옆구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예표요 그 십자가의 진리를 생명적 인격적으로 경험해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짝으로 합당하게 됩니다. 칭의의 옷은 모두 입었겠지만 과연 행실의 세마포로 단장된 성도는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행실의 세마포 단장이란 성결을 가리킵니다(계3:4, 7:14).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잘 믿는 것 같아도 아직도 속으로는 온갖 죄악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변화되어 주님의 비둘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이 비둘기를 연구해 보면 먼저 비둘기는 강한 회귀 본능이 있다. 그래서 사60:8에 “저 구름같이 비둘기가 그 보금자리로 날아오는 것같이 날아오는 자들이 누구뇨” 했습니다. 이처럼 성령을 받은 성도는 비둘기 같이 주님의 품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비둘기는 슬피 우는 특징이 있습니다. 겔7:16에 “다 각기 자기 죄악 까닭에 골짜기 비둘기처럼 슬피 울 것이며” 그래서 비둘기는 회개의 상징이요(호11:11), 눈물의 상징입니다(사38:14).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모두가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집니다. 그리고 남의 잘못을 봐도 마음이 아프면서 눈물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비둘기는 순결한 동물입니다. 그래서 마10:16에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령을 받으면 아주 거룩하게 살아집니다. 또 비둘기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정결한 제물입니다(레1:14). 이와 같이 성령 받으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합니다. 바울처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0-21) 하는 뜨거운 신앙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또 비둘기는 짝에 대한 정절이 강한 동물입니다. 비둘기는 평생 자기의 짝 외에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짝이 죽으면 자기도 따라서 죽고 맙니다. 이처럼 성령의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사랑하게 됩니다. 또 비둘기는 괴롭히면 떠납니다. 물론 성령은 우리에게서 영원히 거주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리면 약화되고 소멸됩니다. 달리 적용하면 성령을 받으면 그 성령의 속성대로 남에게 져주고 양보합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경우에 따라서는 피를 흘리기까지 잔인하게 싸우기도 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다른 비둘기가 자기 짝을 차지하려고 할 때입니다. 아무리 순한 비둘기도 그 때는 양보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사단과 세상과 죄악에 대하여 피 흘리기까지 싸웁니다. 순교도 불사합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은 성도를 아름답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여기 솔로몬이 신부를 비둘기로 표현한 것처럼 진실로 내가 죽어지고 성령으로 살아날 때 우리도 주님의 사랑 받는 예수님의 비둘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신부가 신랑을 칭찬합니다.

16-17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 침상은 푸르고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했습니다. 이 칭찬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푸른 초장 즉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경험하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타납니다. 고전2:9에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한 바와 같습니다.

그럼 하나님 말씀 안에서 경험되어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1. 그리스도가 진리이심을 경험합니다.

16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했습니다.
여기 “나의 사랑하는 자야”의 “‥야”는 감탄사로 어떤 놀라움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신랑을 역시 반복적으로 칭찬하므로 그 사랑스러움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술람미는 먼저 첫 칭찬으로 어여쁘다고 말하는데 여기 “어여쁘고”(הפי 야페)의 원문의 뜻은 ‘아름답도다’로 이는 외모에 대한 칭찬을 가리킵니다. 추측인데 본문에 의하면 솔로몬이 상당히 미남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술람미의 주관적 칭찬으로 사랑하면 이렇게 아름답게 보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봅니다. 어떤 부분도 모자람이 없는 솔로몬의 반듯한 외모는 영적으로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여러분 주님의 외모는 풍채와 흠모할만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사53:2). 그러나 주님만큼 아름다우신 분이 어디 있습니까? 즉 사랑하면 그리스도는 사랑 자체이시고 공의하면 그리스도가 바로 공의 자체이시며 평안하면 그리스도가 평안 자체이십니다. 거짓이란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십니다. 성경 66권에 기록한 말씀의 기준에 맞는 분은 누구일까요?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만큼 반듯하고 위대하고 찬란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만큼 멋있고 아름다운 분은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성경말씀을 떠올리며 감탄을 연발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가 은혜이심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화창하다”(םיענ 나임)고 칭찬했습니다.
이 말은 ‘좋은’ ‘은혜로운’의 뜻으로 여러 성경에서 ‘황홀케 하는’(NEB) ‘즐겁게 하는’(NIV) ‘매력적인’(JB) 등의 용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즉 이것은 술람미가 솔로몬의 은혜로운 인품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의 신부에 대한 매너가 대단한 모양입니다. 남편 되신 분들은 이 말씀 잘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여자들이 이런 매너에 약해서 소위 제비족들에게 잘 넘어간다는데 그 거짓에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의 매너는 연애시절 그토록 진실하고 깍듯할 수 없었는데 웨딩마치 울리고 나면 끝나기가 일 수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으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야말로 모든 면에서 가장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요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했고 1:16-17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했습니다. 여기 은혜와 율법이 서로 대치구조로 나타나 있는데 율법은 사실 은혜가 없습니다. 항상 잘못했다 따지고 구박만 줍니다. 그러니까 재미도 없고 은혜가 없습니다. 혹시 이런 율법부부가 있다면 빨리 은혜로운 부부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근심하는 우리에게 대신 담당해 주시고 살아있는 영원한 생명의 법인 성령을 마음에 주셔서 자동으로 행해지게 만드십니다. 이런 좋은 신랑은 이 세상 영원한 세상에서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는 성숙한 신부가 되시기 바랍니다.

3. 그리스도가 생명이심을 경험합니다.

다시 16절 하반절에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그랬습니다.
여기 침상을 푸른 초장으로 보는 견해와(Delitzsch) 연회장의 뜰에 있는 휴식을 위한 긴 나무의자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그랜드종합주석) 문자적인 해석을 취한 전자가 더 자연스럽습니다. 여기 “푸르고”(ןנער 라아난)란 좋은 환경 속에서 신선하고 생기 있게 자라는 풀들을 뜻합니다. 또 침상이 나오는데 침상은 눕는 곳으로 이 대목은 마치 목자가 양들을 푸른 초장에 누이는 것을 암시합니다. 즉 꽃 피는 초원에서 단란하고 아기자기한 한 연인간의 사랑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혼전관계로 해석할 수는 없다는 것이 학자들의 지배적인 견해입니다. 왜냐하면 신혼의 초야는 아4:6-7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영적인 의미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성도들은 영생합니다. 그리고 사는 동안에도 심령 속에 생명이 강물처럼 흘러 넘칩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나타날 때 우리는 ‘아 예수님은 바로 내 안에서 생명 자체이시구나’ 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생명을 경험할 때 율법은 자동으로 지켜집니다. 그래서 롬8:1-4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이 단계에서 이 지켜지고 이겨지는 생명의 놀라움을 경험하면서 술람미가 신랑을 감탄하듯이 감탄하는 것입니다.

4. 그리스도가 온전히 사랑이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의 의미입니다.
이 문구는 백향목과 잣나무가 어우러진 나무 그늘 아래를 시사합니다. 역시 약혼한 후 연애시절을 암시합니다. 이 두 재목의 등장은 누웠을 때 비로소 그 나무들이 들보와 석가래로 느껴지게 된다는 점에서 그들이 나란히 쉬고 있는 자세를 암시합니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라는 문구가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단지 누웠을 뿐입니다.

대개 성경에 나무는 인성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자기 인성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에도 약 두 가지가 나타납니다. 하나는 백향목 들보와 같은 큰사랑입니다. 이것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큰 사랑을 가리킵니다. 그런가 하면 잣나무 석가래와 같은 잔잔한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범사를 돌보아 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 남자들도 아내에게 이 두 가지의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돈 벌어다 주는데 무슨 불만이야’ 하지 말고 작은 것에도 신경을 써서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배우면 가정에서도 잘 할 수 있습니다.

<결론>

이처럼 주님을 사모하시고 사랑 안에서 은혜의 교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은혜 받아 예수님이 기뻐하실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과 주님의 사랑 받는 아름다운 비둘기가 되십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할 때 내가 죽어지고 주님께 순복하며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나타납니다. 그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 체험적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진실로 이 그리스도의 첫 사랑 안에 살아가시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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