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를 토하는 나도 (아 1:12-14)

2006. 1. 26. 11:20목양자료/3.강해설교

향기를 토하는 나도 (아 1:12-14)
= 자아처리론 =

요 약

율법에 약혼은 결혼으로 간주하듯 약혼이 주는 의미는 실로 귀하다. 즉 결혼이란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는 것으로 나를 깨뜨리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 방법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고 순복함이다. 또 결혼은 배우자와의 약속으로 주님 외엔 다른 것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 나를 위한 고난의 사랑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신부의 꽃을 달고 예수님을 나의 사랑으로 자랑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넘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아를 아주 잊고 주님만을 사랑하는 합당한 신부로 준비되어지는 것이다.

설 명

1. 배 경
⇒ 솔로몬과 술람미의 약혼식의 장면이다.

2. 적 용
(진단) 좁혀질 수 없는 심한 차이로 갈등하십니까?
(해결) 나를 죽이고 맞추어 사는 자아처리 훈련입니다.

3. 약혼 신앙이란?

1) 나를 아낌없이 깨뜨림이다.
12절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결혼은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는 것으로 나를 깨뜨리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 방법은 본문처럼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고 순복함이다.

2) 주님 외엔 다른 사랑이 없다.
13절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몰약은 고난의 예표로서 주님의 고난의 사랑을 깨닫는 자는
더 이상 세상 것을 사랑할 수 없다.

3) 나를 주님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
14절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이제는 신부의 꽃을 달고 예수의 신부임을 보여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나의 행복 나의 전부로 삼자.
주님을 사랑함으로 나를 잊음이 자아처리의 절정이다.

4) 주의할 점
가룟 유다 경우 (요12:4-5) :
그는 주님을 위한 사랑 아닌 실용주의의 표상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딤후2:11-12).


아가 1:12-14
12 (술람미)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13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원 문
12 ךלמהשׁ־דע 아드 쉐함멜레크(왕이 있을 때에)
ובסמב 비메십보(그의 침대에) ידרנ 니르디(내 기름이)
ןתנ 나탄(내었도다) וחיר 레호(그것의 향기를)
13 רמה רורצ 체로르 함모르(몰약 가방이다)
יל ידוד 도디 리(내게 속한 나의 사랑하는 자는)
ידשׁ ןיב 벤 솨다이(내 가슴 사이에) ןילי 얄린(머물러 있는)
14 רפכה לכשׁא 에쉐콜 핰코페르(헤나(henna) 송이로다)
יל ידוד 도디리(내게 속한 나의 사랑하는 자는) ימרכב 베카르메(포도원에 있는)
ידג ןיע 엔 게디(엔게디의)

스 토 리

그리하여 술람미는
솔로몬왕과 약혼을 하게 되었다.
이 약혼식에서 술람미는 그녀가 일평생 혼인을 위하여 준비한
귀한 나도 향유를 깨뜨려 솔로몬에게 부었고 그 향내는 온 집에 가득하였다.
이 의식은 일편단심 한 남자만을 사랑하겠다는
신부의 헌신의 상징으로
당시 풍습에 따른 것이었다.
솔로몬과 약혼한 그녀는
전보다 솔로몬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한층 달라졌다.
마치 그 시대의 규수들이
목에 걸어 품 가운데 소유하던 귀한 몰약 향낭처럼 그리고
신부의 꽃으로 약혼한 여자들이 옷깃에 차고 다니던
귀한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처럼
솔로몬은 이제 그녀에게 있어서
참으로 보배롭고 기쁘고
자랑스러운 존재였다.

본문은 솔로몬과 술람미의 약혼식 장면입니다. 본문을 보면 왕의 선택을 받은 술람미가 혼인을 위해 준비한 나드향의 옥합을 깨뜨려 신랑에게 붓습니다. 이는 당시의 약혼 풍습으로 헌신과 서약의 표시였습니다. 이 후부터 술람미는 오직 솔로몬의 여자요 오직 그만을 사모하는 여자로 바뀝니다. 우리 성도들도 명분만이 아니라 신랑 되신 주님을 향한 이러한 약혼자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 그럼, 약혼자의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자아처리를 통하여 더 깊이 인격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경험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1. 나를 아낌없이 깨뜨려야 합니다.

12절에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했습니다.
이 구절은 술람미가 일생 준비한 귀한 향유를 신랑에게 붓는 장면입니다. 여기 “왕”에 관해서 참고적으로 알 것은 본서에서 왕(1:12, 3:9, 3:11…) 혹은 “솔로몬”이란(1:1, 5, 3:7, 9, 11, 8:11, 12…) 용어가 쓰일 때는 언제나 공식 행사를 뜻합니다. 그리고 여기 “상에 앉았을 때” 란 역시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원문의 “상” (בסמꔎ메사브)는 둘러앉는 상으로서 보통 상이 아니고 연회석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시23:5). 그리고 “상에” 는 원문에 ‘그의 침대에’ 의 뜻인데 그러나 이는 당시 이스라엘의 기대어 누워 식사하는 풍습을 묘사하는 말이므로 왕이 상에 앉았다는 것은 공식적인 약혼식을 뜻합니다.

이 때 약혼자인 술람미가 어떻게 했습니까? 여기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했습니다. 이 나도 향은 이스라엘에서 처녀가 결혼을 위해 일생에 걸쳐 준비하는 귀한 물품입니다. 막14:5에 “삼 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란 말로 보아 그 이하로는 팔 수 없는 약 일년의 품삯에 해당하는 값진 것이었습니다. 이 “나도 기름”(דרנ 네르드)은 마타리과의 방향성 식물인 나르드(spikenard) 나무의 뿌리나 줄기에서 향을 채집하여 목이 긴 옥돌로 만든 병에 담아 보존하다가 목을 끊고 이 향유를 신랑에게 붓게 됩니다. 당시 사회에서 옥합을 깨뜨리고 배우자에게 향유를 붓는 풍습의 의미는 나를 다 바치는 헌신과 서약의 상징이었습니다. 이것은 일생에 단 한 번밖에 두 번 깨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 옥합은 그 뜻 자체로도 곧 나를 깨뜨리는 것이요, 신령한 의미에서도 우리의 자아입니다. 그러니까 일생을 거쳐 옥합을 준비하여 깨뜨리듯 일생을 통하여 형성된 자기의 주관 역시 깨드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 옥합을 왜 결혼식이 아닌 약혼식에서 깨뜨릴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에서는 약혼을 혼인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약혼자는 부부생활은 허락되지 않지만 소유적인 개념에서는 법적으로 하나로 인정됩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약혼자가 간음을 하게 되면 돌로 치는 중한 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아직 공중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우리들을 신부로 보시고 사랑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생활에 있어서도 이 원리를 잘 알아야 합니다. 부부는 서로 이 자아의 깨뜨림이 없이는 부부로서 합당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부부는 일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고전7:3-4에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했습니다. 이처럼 이제는 과거 혼자일 때처럼 내가 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부란 공동 자아이지 내 자아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모르고 결혼하기 때문에 다투고 싸우고 갈등하는 것입니다. 이 현상은 자아가 강한 사람들일수록 더 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신 자아처리의 훈련소는 바로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 주권에 선 사람으로 훈련시키시기 위하여 먼저 가정에서 갈등함을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아무리 싸워도 고쳐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고치려고 하면 일생 싸울 뿐입니다. 화목한 부부들을 보면 고쳐져서가 아니라 이미 지쳤기 때문에 포기하고 살다보니 화목을 이룬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장차 포기할 것 일찍 포기하시고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도 서로 용납하고 죽어지시기 바랍니다. 내가 옳기 때문에 반드시 내 뜻을 따라야 한다는 논리도 없어야 합니다.

이 사랑만이 가정의 특수한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에 문제가 있다면 먼저 주관적인 자아부터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신랑을 따라 신부가 되기를 원한다면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8:34)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도 고집이 센 자아의 성도들을 결코 원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다투려고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주님의 약혼자들이 자아의 옥합을 아직도 아끼고 있다면 그것은 커다란 수치입니다. 그러므로 일생 내 방식대로 살아오면서 형성된 자아의 옥합을 미련 없이 깨뜨리시기 바랍니다.

그럼 어떻게 나의 자아를 죽일 수 있을까요? 자아를 죽일 가장 큰 원동력은 사랑입니다. 진실로 사랑할 때 나를 잊어버리고 그 대상을 위해 살게 됩니다. 비유한다면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가 만나 하나되어 사는 것이 결혼입니다. 이 처음부터 이론상으로는 불가능한 연합이지만 이 둘을 하나로 연합시키는 힘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는 그 깨달음에서 자라갈 뿐 아니라 그 사랑을 받고 우리도 주님을 사랑함에 자라가야 합니다(엡4:15). 그러므로 우리 주님을 향한 사랑이 성숙하면 12절의 술람미처럼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듯 모두 쏟게 됩니다. 마치 베다니에 사는 주님을 사랑한 마리아가 향유를 남기지 않고 다 부은 것처럼 해야 합니다(마16:7). 그러나 그것을 본 몇 제자들은 계산적으로 아깝게만 생각했지만 주님은 도리어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이처럼 나를 온전히 깨뜨려 순복하시기 바랍니다.

2. 마음을 주님 중심으로 개편해야 합니다.

13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했습니다.
여기 몰약 향낭은 당시 귀부인들이 몸에 소지하고 다녔던 귀한 향수 주머니였습니다. 몰약은 아라비아나 인도 그리고 에디오피아 등지에서 생산되는 향수로서 관유 제조 시(출30:22-25) 향유로(잠7:17) 방부제로(요19:39) 귀한 예물로(마2:11) 그리고 당시 근동 지역의 여인들이 가장 많이 애용하던 화장품이었습니다(에2:12). 여인들은 몰약을 침상이나(잠7:17) 옷(시45:8) 등에 뿌려 향기를 내었습니다. 이 몰약 향낭은 “내 품 가운데” 라고 말한 것처럼 귀부인들이 몰약을 조그만 곽이나 주머니에 담아 목에 걸어 그 품에(에2:12, 시45:8) 소지하고 다녔습니다. 이처럼 술람미에게 있어서 솔로몬이 가장 귀하고 소중하며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은유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 부부생활에서도 이 신혼의 첫 사랑을 찾아야 합니다. 흔히 첫 사랑 회복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여기는데 신자들까지 그렇게 생각한다면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가나 혼인집의 포도주는 곧 동나고 말았지만 예수님께서 더 좋은 포도주를 많이 제공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분신이요 동역자인 배우자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하고 계십니까? 나는 배우자로서 합당하게 할 능력이 없으니 은혜를 달라고 늘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은 신혼의 첫 사랑을 능가하는 깊은 사랑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여기서 몰약의 방부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몰약은 고난의 상징으로서 주님의 고난의 사랑을 깨닫는 자는 더 이상 세상 것을 사랑할 수 없음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몰약 향낭의 위치성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나의 중심이 되는 삶이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여기 옥합을 깨뜨림에 있어서 왕이라는 명칭이 함께 나오는 것에 유의하셔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생명 걸고 왕이신 하나님을 나의 중심에 모시고 그 하나님 중심으로 모든 질서를 재편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포기됨과 아울러 그 주권에 순복하고 사랑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3. 나를 주님의 것으로 여기는 삶입니다.

14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했습니다.
여기 고벨화란 그냥 꽃이 아닙니다. 신부들이 차고 다니는 신부의 꽃입니다. 이 꽃은 향기가 진한 황색으로 당시 여자들이 옷깃에 달고 다녔습니다. 마치 약혼반지를 끼듯이 나는 이제 임자가 있는 몸으로 신랑에게 속한 존재라고 공포하고 다닌 것입니다. 그 때 세상이 나를 넘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신자는 물론 불신자들까지도 알게 받음이 좋습니다. 이렇게 기독교인이 됨과 주님께 속한 자가 됨을 선언함으로 세상의 미혹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여기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란 참으로 귀하고 귀한 꽃을 가리킵니다. 엔게디는 ‘새끼염소의 우물’이라는 뜻으로 사해 서편광야 지역에 있는 유다 지파의 오아시스 촌락으로(수15:62) 주변은 다윗이 피신했고(삼상23:29)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는 험한 요새지입니다. 이 곳에 솔로몬의 계단식 포도원이 있었는데 그 삭막한 곳에 이러한 포도원이 있고 그 곳에서 고벨화를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감동적인 일입니다. 그 만큼 신랑을 자랑스런 존재로 알며 이 신랑에게 속한 것을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와 같이 예수님을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나의 자랑 나의 행복 나의 사랑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이 나를 잊고 주님만을 생각하는 참된 예수님의 약혼자의 모습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심정 때문에 온전히 나를 망각해야 연합된 삶이 가능합니다. 오늘날 사랑 없이 이기적인 마음으로 결혼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불평하며 다투다가 갈라서는 일이 많은데 진정한 사랑만이 나를 위해 살지 않고 배우자를 위해 사는 자아처리의 절정이요 극치가 됩니다. 여기 자아처리란 자기 주관을 내려놓음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참으로 내가 죽어질 때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보다 더 깊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경험토록 하십니다.

또한 본문을 좀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통한 자아처리의 방법입니다.

먼저, 자아 처리를 위해 십자가의 은총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다시 13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했습니다.
여기 몰약 항낭은 향기만 좋은 것이 아니라 몸의 나쁜 채취까지도 없애는 역할을 합니다. 이처럼 십자가 은총의 경험은 우리의 자아마저도 깨뜨리게 하십니다. 자아처리란 정상적인 마음의 기능을 죽인다는 뜻이 아니고 내 주권을 내려놓고 하나님 주권에 순복하는 겸손과 순종을 가리킵니다. 자아처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은총은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갈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중심에 모실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몰약 향낭이 되셔서 모든 죄와 악을 소멸하여 주십니다.

시편 127편을 보면 잠의 신학이 나타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여기서 세 번이나 나타나는 1절의 “여호와께서” 라는 용어와, 2절에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이 두 말씀이 본문의 주요 핵심입니다. 즉 여기 “여호와께서”란 하나님의 주권성을 의미하고 “잠”은 자아처리의 원리입니다. 그리고 “그러므로” 라는 부사가 이 시편 해석의 중요한 열쇠입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에 선 사람은 잠 즉 신령한 의미에서 자아를 내려놓고 안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잠이란 죽음의 상징으로 우리는 매일 같이 죽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면 하나님께서 날마다 죽는 연습을 시키실까요? 그러나 여기 연습의 죽음은 육신의 죽음보다 자아처리의 내가 죽는 죽음입니다. 잠이란 심령 정리를 위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모릅니다. 종일 염려하며 혹은 다투고 사우고 혹은 내 계획으로 가득하고 혹은 하나님 앞에서 설치고 다니며 내려놓지 못하다가도 잠이 들면 누가 내려놓으란 말이 없어도 다 내려놓습니다. 마치 아이가 장난감을 쥐고 놓지 않으려 다가도 잠이 들면 다 놓아버림과 같습니다. 그래서 잠은 안식의 상징이요 안식은 창조가 마친 7일째로서 창조의 최고봉입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면 그 염려 그 미움 그 설침 다시 붙드니까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밤이든 생시이든 잠을 자듯이 완전히 문제를 맡기고 내려놓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주권자가 아니기에 염려하거나 미워하거나 괴로워 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그러므로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은 시편 기자의 말대로 하나님의 큰사랑입니다. 이제 하나님께 맡기며 사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성도에게 시편 기자가 노래한 대로 기업 열매 상급 능력 승리 부끄럽지 않음 등으로 표시되는 자식의 축복 즉 성령의 큰 열매와 능력을 입혀주십니다. 이처럼 몰약 향낭 되신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자아를 처리 받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아 처리를 위해 부활과 승천을 경험케 하십니다.

14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했습니다.
여기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는 광야보다 더 삭막한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부활과 승천과 복락과 영광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몰약 향낭이 주님의 죽으심의 공로라면 고벨화 송이는 부활과 승천의 공로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할 때 주님은 나의 몰약 항낭이실 뿐 아니라 나에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가 되었듯이 내가 죽어질 때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나타나 나의 죽으심이 될 뿐 아니라 나의 부활과 승천이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깨뜨리는 약혼자의 신앙을 가진 자에게 주시는 놀라운 그리스도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자아의 나도 기름병을 깨뜨려 주님께 붓는 것을 아까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룟 유다처럼 이것을 아까워 한다면 그 만큼 손해가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2:11-12).

<결론>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약혼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옥합을 갖고 있지 마시고 옥합을 깨뜨려 아낌없이 주님께 부어드려야겠습니다. 나의 자아를 깨뜨려 주님 중심의 삶을 구현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나를 잊어버릴 때 주님께서는 우리 중심에 나타나사 주님이 나의 거룩이 되고 주님이 나의 부활이 되시고 나의 영광과 복락이 되어 주십니다. 더 이상 자아를 아깝게 생각하거나 미루지 마시고 깨뜨리는 작업에 착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온전히 나타나 주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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