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06. 1. 11. 00:52목양자료/1.기독교자료

   요한복음

 

기도: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희들에게 귀한 시간을 허락하셔서 한 자리에 모여서 사도 요한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귀중한 주님의 생애와 가르침들을 살필 수 있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성령님께서 영감을 주어서 기록한 글을 성령님께서 오셔서 저희들을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하셔서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의 목적이 이 공부를 통해서 더 잘 살아나게 하시고 그 동안 저희들이 읽고 배우고 또 교회에서 가르침 받던 많은 부분들을 다시 복습하며 다시 정리하여 우리에게 귀중한 계시의 말씀으로 살아나게 하시고 또 우리가 이 말씀을 깨달음으로 인해서 저자가 기록할 때 가졌던 목적처럼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그리스도로 확실하게 고백할 수 있는 귀중한 공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성령님께서 주장하시고 역사하셔서 귀중한 교훈을 서로가 함께 받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기를 간구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서론>

저자: 요한 복음은 주후 85년에서 90년 사이에 사도 요한이 기록한 성경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주장한다. 최근에 신학자들이 성경에 관한 많은 연구를 활발히 하고 있다. 그 많은 연구 중에서 특별히 이 성경의 기록에 관한 것과 성경의 내용에 대한 것들과 같은 부분을 많이 연구하고 있다.(참고도서: '요한신학' 풍만출판사)

 

기록목적:(20:30-31)

요한복음은 요한 사도가 성령님의 영감에 의해서 자기가 무엇을 설명하기 위한 목적에 맞도록 일부분만 발췌해서 편집한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저술이라기 보다는 편집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이 책은 사도 요한이 생각난데로 쓴 것이 아니고 많은 자료를 놓고 자기가 그 중에서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논리정연하게 편집했기 때문에 저자가 우리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중심사상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요한신학이란 말을 쓴다. 마가신학, 누가신학, 마태신학이라 말하는 것은 네 저자가 자기 나름대로 예수님을 소개하고 싶은 어떤 사상을 정리해놓고 성령님의 영감에 의해서 정리된 부분을 다시 글로 편집해서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편집 배열이 저자의 의도에 맞게 배열되기 때문에 네 복음서의 배열이 서로 다른 것이다. 또한 배열 할 때 목적이 있다. 이 요한복음의 목적은

 1)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는 것과

 2)우리가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것이 믿어질 만큼 증명을 해야 되는 것과 그것을 믿어서 생명을 얻어야 한다는 영생에 관한 이 두가지를 큰 목적으로 정하고 요한 사도가 요한복음을 기록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표적들을 발췌해서 편집했다. 하면서 중간 중간에 요한 사도가 comment한 부분이 나오는데 이 때는 저자의 의도를 잘 읽어야 한다. 왜 이렇게 했는가를 글의 문맥과 편집에 따라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19세기까지는 성경에 여기 저기 나오는 자료들을 임의로 새로 편집하여 신학체계를 만들었다. 이것을 조직신학이라 한다. 신약에 나오는 수많은 책과 구약에 나오는 수많은 책을 다 놓고 신론, 인간론, 구원론, 기독론, 구원론, 종말론, 교회론 등과 같은 제목을 만들고 이 제목에 필요한 구절을 뽑아서 다시 신학자들이 자기가 의도하는대로 체계화한 것을 신학이라 한다. 20세기에 와서는 이러한 방법을 잘못되었다고 하는 비판이 일어났다. 원래 성경 저자가 의도를 맞추어 잘 편집해 두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다시 신학자가 새롭게 발췌하고 편집해서 주제별로 교재를 만드는 것은 원저자의 의도가 묵살되어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저자가 의도한 대로 우리가 그것을 인용하지 않고 학자가 인용한 대로 그것을 인용해버리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목적을 벗어나게 되는 문제를 갖게 된다. 이렇게 됨으로 성경이 원뜻대로 전달되지 않고 잘못 전달되어서 오답이 많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래서 주제별 공부가 시중에 지금도 유행하고 있고 대부분의 성경 공부가 다 주제별 공부인데 주제별 공부는 성경을 많이 인용을 했지만 그 성경이 원래 그 자리에서 의도하는 대로 인용되지 않고 그 교재를 만드는 사람의 의도대로 끌고 가버렸기 때문에 잘못되었다는 것이 지금의 이론이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주제별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본문 공부를 많이 하다보면 주제별 공부가 얼마나 엉터리인지 알 수 있다. 우리 평신도들이 피해를 굉장히 많이 보고 있다. 그 대부분 시중에 돌아다니는 교재들이 신학을 많이 연구한 좋은 학자들이 만든 것이 아니고 비전문가이거나, 학자들이 아닌 사람들이 자기 단체에 필요해서 만든 교재들이 많이 있는데 이런 교재들이 요즘 와서는 상당히 비판을 많이 받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배워왔던 것을 털어버리고 새로 배워야 될 어려움이 있다. 집을 수리하는 정도가 아니라 집의 기초부터 새로 지어야 하는 심각한 문제가 대두되어 있다.

 

구성:

1)머리말(1:1-51)

2)표적들(2:1-12:50)

3)영광(13:1-17:26)

4)수난과 부활(18:1-20:29)

5)맺음말(20:30-21:25)

 

표적: 요한복음에서는 표적이 긍정적으로 다루어 지고 있다.(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표적이란 말은 기적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똑같은 말이다. 기적이지만 평범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기 위한 기적인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기적에는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요즘 우리 주위에서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놀라운 기적이 있을지라도 그 기적은 표적이 아니다. 그 기적은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한 기적이 아니다. 물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있다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그 기적이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또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표적들은 그 사실이 갖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 의미를 찾아서 연구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일곱 가지 표적:

1)물로 포도주를 만드심.(2:1-12)

2)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4:46-52)

3)삼십 팔 년 된 병자를 고치심.(5:1-18)

4)오천명을 먹이심.(6:1-15)

5)나면서 소경된 자를 고치심.(9:1-42)

6)죽은 나사로를 살리심.(11:1-57)

7)수많은 고기를 잡게하심.(21:1-14)

 

앞의 여섯 개의 표적은 제자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설명하기 위한 표적이며, 마지막 일곱 번째의 표적은 전체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제자들만을 위한 표적이었다. 어쨌든 이 일곱 개의 표적이 요한복음에 골격을 이루고 있다. 전반부는 여섯 개의 표적들이 여섯  문단으로 나누어지고 있으며 후반부에는 다락방에서 강설하신 부분이 한 문단이고 수난과 부활이 한 문단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전체가 8개의 커다란 문단으로 나누어져 있고 앞의 서문과 뒤의 맺는말이 나오는 것이 요한복음의 구조이다.

 

두번째 이 요한복음의 중요한 구조는 "나는 *** 이다"라는 설명이다.

네째 문단: "내가 생명의 떡이다."

다섯째 문단: "나는 세상의 빛이다."

여섯째 문단: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예수님의 표적들과 "나는 *** 이다."라는 직설적인 설명이 요한복음에는 특별한 표현들이면서 요한복음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처음에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내용에서 시작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내용으로 끝이 난다.

 

대게 우리가 4복음서를 다룰 때에 전통적인 견해는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왕으로 소개하고 있고, 마가복음은 종으로, 누가복음은 인자로,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다고 본다.

 

<본론>

 

1장

요한복음 1장 1-18절 말씀은 요한복음 전체의 서문격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모든 주제들이 이 1장에 거의 다 나온다.

1-3:

첫번째 주제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말씀이다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아담, 하와 때부터 우리 인간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말씀이라는 것은 의사 전달을 하는 것이고 자기 뜻을 내 보이는 것이고 계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아담 때부터 계시하실 때에 말씀으로, 목소리로 하셨다. 하나님은 보이시는 분이 아니셨다. 모세는 하나님의 목소리는 계속 들었지만 하나님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 목소리는 나타내셨지만 모습은 보이시지 않으셨다. 이것이 쭉 진행되어 왔다. 진행되어 오다가 드디어 요한복음에 와서, 신약시대에 와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인간으로 보내시면서 비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보여주셨다. 구약에 나타났던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들도 예수님과 관계가 있다.

 

히 1장

1-3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지탱하고 계시고, 그리고 우리들을 정결케 하시고 왕위에 앉으신 분이시다. 이 예수님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신 말씀이시다.

 

요일 1장

1-3:

두번째 주제는 창조이다.

창세기 1장에 창조된 그 모든 창조를 예수님이 함께 하신 것으로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4-5:

세번째 주제는 생명이다.

4-5절에서는 세번째 주제인 생명이란 주제와 빛이라는 주제가 등장하고 있다. 이 생명이란 말은 두번째 주제인 창조의 개념에 보완되는 중요한 주제이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이 예수님이 생명이다라는 말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첫창조 때 주어진 육체의 생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요한복음에서는 영적인 생명을 말한다.) 중생하는, 죽은 자를 다시 부활시키는, 지금 영적으로 부활하는, 눈에 보이는 육체의 생명만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생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육체적인 생명의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영적인 영생의 창조주이시란 사실을 이 본문은 가르치고 있다.

 

네번째 주제는 이다.

빛이란 말은 생명이란 말과 같이 다루어진다.(4-5) 영적인 생명을 빛이라 말하고 영적인 생명이 아닌 죽음을 어두움이라고 말하고 있는 부분을 주의해야 한다. 생명과 어두움이 요한복음에서는 영생과 죽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이해되지 않으면 영생을 얻었다는 말의 의미를 바로 깨닫지 못하게 된다. 영생은 물건이 아니다. 영생은 빛이기 때문에, 어두움과 빛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내가 영생을 얻었다면 빛 가운데 살아야 하고, 내가 어두움 가운데 살면 영생이 아니란 부분을 이해해야 한다.

 

3장

16-21:

어두움에 있는 사람이 빛으로 오지 않고 어두움에 여전히 있으면 영생을 얻지 못하며, 빛으로 와야만 영생을 얻는다. 내가 현재 어두움의 일을 싫어서 버리고 밝은 빛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와서 영생을 얻었다라고 말하면 문제가 없는데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었다라고 말하면서 여전히 어두운데 내가 살고 여전히 어두움을 좋아하고 때로는 빛 가운데로도 다니면서 왔다 갔다 하고, 교회에서 나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지 않고 숨기고 있고(하나님 앞에서) 어두움을 정리하지 않고 어두운 삶을 일부 살면서 영생과 구원을 말하는 사람은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개념들을 본문을 보고 잘 이해하지 않고 이러한 본문들을 다 빼먹고 영생을 이해하면 오해할 소지가 크다.

 

6-10:

다섯번째 주제는 증인들이다.

요한복음에는 많은 증인들이 등장한다. 세례 요한이 첫번째 증인이고 그 후에 안드레, 빌립, 사마리아 여인, 38년된 병자, 마리아, 니고데모, 소경, 나사로 등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뒤에 가다보면 분명히 말씀하신다. "나는 사람들의 증언을 신뢰하지 않는다." "필요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증언은 완전히 믿을 수 없다. 나를 가장 많이 증거하시는 분은 아버지시다."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기록하신 성경이 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하시는 일들, 표적들이 나를 증거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요한복음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것은 나중에 정리하도록 한다.

 

10-12:

여섯번째 주제는 영접이다.

영접한다는 것이 요한복음에는 상당히 큰 주제이다. 이것은 믿는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이 영접이란 말과 믿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개념이다. 또한 이것은 혈육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13) 11절에서 말하는 것을 볼 때에 왕이 자기 백성에게 찾아온 배경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한다는 주제이기 때문에 영접이란 말을 막연하게 이해하면 안된다. 왕으로 영접해야 한다. 이것이 여섯번째 주제이다.

 

14:

일곱번째 주제는 성육신과 우리 가운데 거하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지 않은지를 도저히 알 수 없었는데 자기 아들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셔서 드디어 우리와 함께 주무시고 먹고 생활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와 계셨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팔레스타인에 사셨던 것만을 말하지 않고 뒤에 가면(13-16장)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는 처소 이야기로 발전하게 된다. 실제로 예수님이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 지방에 와계셨던 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고 실제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하신 하나님이 내 안에 현재 와 계시고, 성령님도 내 안에 와 계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예수님도 현재 내 안에 와 계신 것을 의미한다. 또한 반대로 내가 예수님 안에, 성령님 안에,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이 요한복음의 중요한 주제이다.

 

여덟번째 주제는 영광이다.

영광이란 말은 하반부의 전체 주제를 이룰 만큼 중요한 주제이다. 구약시대 때 하나님이 나타나시는데 이 나타나시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구름으로 대신 등장했다. 백성들이 하나님이 계신 것을 궁금하게 여겼을 때에 하나님은 성막을 짓게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성막 안에만 있지 않고 너희 전체 위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성막은 하나님이 쉬실 집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암시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게 임재하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구름 기둥이 성막에 머물곤 했다. 이 모습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설명했다. 그래서 영광이란 말은 하나님의 실존하시는 존재 자체를 설명할 때 쓰는 표현이기도 하다.

아홉번째 주제는 진리이다.

열번째 주제는 독생자이다.

제일 많이 나오는 열두번째 주제는 그리스도이다.

17: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이 그리스도가 요한복음에서는 가장 큰 주제이다.

 

1장 1절에서부터 18절까지 이미 주제가 다 다루어졌다.

 

1장 19절-51절

19-23:

세례 요한이 자신이 누구냐는 질문에 아주 명백하게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대답하였다. 자신은 선지자 이사야의 말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요한에게 왜 "네가 엘리야냐?"라는 질문을 했는가?

 

말라기 4:4-6

이 본문은 구약의 마지막 본문인데 여기에 엘리야가 올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엘리야를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라고 해석을 하셨다. 엘리야가 하는 일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시킬 것을 말하는데 그 이야기는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된다."라고 외친 것을 말한다. 여기에 주의해야 될 부분이 한 두 가지가 있다.

 

1) 5절에 나타난 '크고 두려운 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약에 나타난 이러한 부분은 재림이 아닌 초림을 의미한다. 구약 성경에서 재림에 대해서 초림을 빼고 설명한 일은 거의 없다. 거의가 초림을 연결해서 설명하고 있고, 메시야가 오시면 크고 두려운 날이 있을 것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즉, 초림부터 재림사이의 긴 기간을 한꺼번에 묶어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구약을 읽을 때에 먼저 예수님의 초림에 촛점을 맞추고 모든 구약의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읽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세대주의라 한다. 이 세대주의는 신약시대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메시야가 오시자마자 유대인들이 바로 메시야를 영접했어야 하는데 메시야를 영접하지 않고 거절해버렸기 때문에 메시야 시대가 2000년 동안 뒤로 밀렸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까지 연기되었다. 이스라엘이 독립하면서부터 드디어 구약 시대의 예언들이 지금 성취되어 가고 있다."고 그들은 해석한다. 이것은 구약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들이 우리 한국 교회에 매우 인기가 있다. 예를 들어서 느브갓네살 왕이 꾼 꿈에서 금신상이 나온다. 머리는 바벨론이고 그 다음은 메데와 바사이고 헬라, 로마제국 그 다음 열 발가락에 뜨인 돌이 치므로 다 재가 되어버리고 드디어 이 돌이 태산을 이루어서 온 세계에 가득차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을 재림이라고 늘 해석하는 것은 세대주의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초림으로 해석해야 한다. 뜨인 돌이 이 세상에 있는 사탄의 왕국을 치고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운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연결되어져야 하며, 이 뜨인 돌이 점점 점점 커져서 태산을 이룬다는 말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와 왕국이 확장되어 가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재림으로 설명해 버리면 재림 후에도 하나님 나라가 커져 가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님 나라는 현재 확장되어 간다. 따라서 초림에서부터 재림까지 연결하되 초림에 촛점을 맞추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본문에서 '크고 두려운 날'이라 한 까닭은 메시야가 오시면 심판이 함께 나타날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말라기 4:1-2

1절에서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란 그리스도의 초림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를 심판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

 

말 3:1-3

3장과 4장은 똑같은 주제이다.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를 하신 것들이 말라기의 내용이다. 즉 "메시야가 오시면 너희들의 이 모든 잘못된 것들을 다 불로 태워서 정결케 할 것이다. 모든 불의를 다 불태워버릴 것이다." 그래서 제련소에서 찌꺼기는 다 빠지고 순금만 걸러내는 것처럼 메시야가 오시면 자기 백성, 구원받을 백성들의 죄를 다 제거하시고 우리를 순금처럼 순수하게 만들어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과 반대로 심판받을 악의 세력들을 다 심판하는 양면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초림은 구원과 심판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며 엘리야가 임한다는 부분도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구약의 엘리야가 사역을 할 아합 왕때도 바알 선지자들을 다 진멸하는 무서운 사건이 있었다.

 

요 1:24-28

25절을 살펴보면 세례는 메시야가 주는 것인가? 세례는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그 당시의 세례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가?

 

요 3:22

요 4:1-2

실제로는 예수님이 세례를 주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준 것처럼 알고 있었다. 실제로 예수님은 물세례는 주시지 않으셨던 것 같고 제자들이 물세례 주는 것을 허용하시면서 자신이 주실 세례를 암시하셨던 것 같다. 예수님이 주실 세례는 성령으로 주는 세례이다.

 

요 1:29-31

여기서 세례의 의미는,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다. 세례 요한이 물세례를 주는 것이 어떻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 되는가?

 

32-34:

예수님에게 성령님이 임하셨다. 하나님은 세례 요한을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셨고 성령이 위에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임을 알라고 세례 요한에게 말씀하셨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던 어느 날 예수님이란 분에게 세례를 줄 때에 성령이 임하셨다. 비로서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그를 증거하게 되었다. 따라서 세례의 의미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 핵심이고 세례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이 분을 증거하기 위해서 물세례를 주면서 "바로 이 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다."라고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물세례는 예수님이 주실 참세례인 성령세례를 증명하기 위해 행해졌던, 길을 예비하는 자가 행하던 일과 같은 것이었다. 즉 요한의 세례는 예수님의 성령세례를 의식하고 있는 세례임이 분명하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것 분명한데 먼저 예수님에게 성령님이 임하셨으니까 예수님도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예수님은 우리를 대표해서 우리 때문에 세례를 받으셨다. 자신이 성령 세례를 받으셨고 우리에게 성령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는 말이 세례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즉 성령 세례는 우리의 죄를 예수님이 지고 가실 것을 전제하고 행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35-39:

요한복음에는 시간에 약간 문제가 있다. 아직도 많은 학자들은 다른 공관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제 십 시를 오후 네 시로 해석하고 있지만 일부학자들, 특히 헨드릭슨은 "요한복음은 우리 시대와 똑같은 시간 계산법을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요한복음을 기록할 때는 다른 공관복음서를 기록할 때와는 달리 연대기가 양력을 따라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스몰리) 구약 성경과 성경에 나오는 모든 것이 음력(성력)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살아있을 당시 주후 1세기의 쿰란 공동체는 제2유대력(양력)을 사용했다는 자료가 있다. 대게 로마시대에 들어오면서 음력에서 양력으로 바뀌었다. 양력으로 바뀌면서 시간 계산법도 바뀌었다고 본다. 다른 공관복음은 아침 6시, 해뜰 때부터 시작해서 1시, 2시 ....로 계산한다. 반면에 요한복음은 우리와 똑같이 계산했을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본문의 열 시를 오전 열 시로 해석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두 제자는

40:

안드레이고 또 다른 한 제자는 이 글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다. 이 두 제자가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

 

41-50: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에 주의해야 될 부분이 있다. 잘 확인해보고 믿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증거하실 때에 한가지만을 보고 자신을 믿으라 하지 않고 수많은 일들과 많은 표적을 보여주시고 자신을 믿게 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자세히 배우고 많은 표적을 다 보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할 때 예수님에 대해서 충분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51:

 

2장

2장에는 가나 혼인 잔치 이야기가 나온다. 혼인 잔치에 가셨는데 포도주가 떨어졌다. 그래서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다. 이것이 첫번째 표적이다.(11절) 이 표적에 의미는 전혀 설명이 되지 않고 딱 한마디만 나온다.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이 표적은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영광이란 말은 하나님의 모습이나 존재를 말한다. 이 표적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두번째 부분을 보도록 하자. 13절에서 22절까지는 성전을 청결케한 이야기가 나온다. 성전에 가셔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을 다 내어 쫓는 이야기 나온다.

 

16-17:

예수님께서 성전을 너무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화가 나셨나보다라고 제자들은 이해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아직도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했기 때문이다.

 

18-22:

부활 후에야 비로서 깨달았다. 주제는 분명해진다. 성전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성전이란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사는 곳에 하나님이 같이 계시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무리 가운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막을 지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에 임재해 계시다는 의도가 성전의 개념이다. 성전의 원래 개념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재해 계시다는 것이다. 내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말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에게 임재하시는가? 아무에게나 임재하시는가? 구약시대의 성전에는 죄인이 제사를 드리고 죄를 용서받아야만 법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셨다. 성막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에 임하셨지만 그 중에서도 성막 안, 지성소에 있는 법궤 위의 두 그룹 사이에 임하셨다. 왜 그곳에만 임하셨는가? 여기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다.

 

1)죄사함

죄사함이란 무엇인가? 법궤 안에는 율법, 즉 십계명이 들어 있다. 십계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계약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통보하신 약속, 즉 언약이다. 그런데 이 언약을 어기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가 깨진다. 그래서 이것을 어겼을 때는 법궤 앞에 와서 용서를 빌고 다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이 이 법궤 위에 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받아들여야 되고, 하나님과의 계약을 지켜야 하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계약이란 말이 구약에서는 중요하고 그 계약은 항상 율법, 언약, 증거막, 증거궤, 법궤, 언야궤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 다스림을 설명하기 위한 아이디어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성전에 임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고 십계명을 지킬 때에 가능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성전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 죄를 정결케 하시고 다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끔 해주시는 그 부분이 성전의 개념 속에 들어 있다.

 

2)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예수님 안에서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이것은 14장에 가면 자세히 나온다.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을 설명하는 상징물에 불과했다. 구약 때부터 하나님이 성막과 성전을 짓게 허락하신 것은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죄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려면 먼저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이 성전이 되신다는 말이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깨달은 사실이다. 그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에게 임재하시기 때문에 나도 성전이 되는 것이다. 신약에서 개인을 두고 성령님의 전이라는 말도 나오지만 교회를 두고 하나님의 성전이란 말도 나오기 때문에 개인적인 것만이 성전이 아니고 교회라는 공동체 집단이 성전이라는 것을 동시에 이해해야 한다.

 

23: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과 성전을 깨끗케 하신 것은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물을 좋은 포도주로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포도주에 비유한 것이다. 그 영광이 뒷 부분의 성전을 청결케 한 부분에서는 가짜(그림자) 성전을 헐어버리고 참 성전인 그리스도를 도입시킨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성전이고, 그 성전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 안에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 다른 복음서에는 성전을 청결케 한 사건이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데 이 요한복음에서는 앞부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과 같이 나온다. 왜 요한이 이 부분을 앞에 기록했을까? 이것은 물로 포도주 만든 사건과 성전을 청결케 한 사건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성전을 청결케 한 사건은 죄인들을 정결케 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는 사건이며,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사건은 물과 같은 우리들을 재창조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사건인 것이다. 따라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예수님이 우리들을 재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는 존재로 구속하시는 사건을 암시하는 표적이다.

 

정리: 1장에서 여러 가지 주제를 공부했다. 그 후에 1장, 2장에서 다루어질 또 하나의 부수적인 설명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은 창조하신 말씀이었고 빛이셨는데 다시 생명을 주는 재창조주로 등장하시면서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새로운 창조 사역을 하신다는 것이다. 새로운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 요한복음의 주제이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사건도 우리들로 하여금 혈연관계를 떠나서 영적인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는 재창조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며, 참성전의 의미와 참스승의 의미와 참세례의 의미와 참백성과 참이스라엘의 의미가 1-2장에서 잘 암시되어 있다. 따라서 1장, 2장에서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새롭게 재창조 되고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어질 모든 것에 대한 암시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현세적인 혈육적인 지금의 스승, 지금의 세례, 지금의 어떤 신앙 차원을 넘어서서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포도주의 수준으로 바뀌는, 새로운 재창조와 재질서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될 것을 상당히 깊이 첫표적에서 암시하고 있다. 이 첫표적에서 새롭게 되는, 재창조 되는 영광을 보여주고 이것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성전을 헐고 새로 짓는, 예수 그리스도를 참성전으로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를 통해서 그 재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을 동시에 보여주기 위해서 두 개의 사건을 붙여서 소개하고 있다.

 

24-25: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만 아직은 믿을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의 믿음이 아직은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열 두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예수님이 부활할 때까지는 완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했다. 아직 모든 사람들이 다 믿을만한 존재가 못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다시 새롭게 영적으로 부활하고 새로워져야만 참믿음에 거하게 되고 참된 증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구속의 행위가 내게 실현되어서 내가 온전히 구속되기 전에는 나를 온전히 믿을 수도 없고 내가 온전한 증인이 될 수도 없다.

 

기도: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고 말씀만 하셨지만 마침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게 하시고 그의 영광을 포기하셔서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게 하셨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또한 체험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이 요한복음을 계속 살펴가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참된 영광스러운 임재를 저희들이 보고 깨닫게 하여주시옵소서. 많은 사람들이 표적을 보고 믿었던 것처럼 저희들도 이 말씀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고,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 안에 오셔서 계실 수 있는 지를 배워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으로 그리스도의 재창조의 사역으로 어두움 가운데 있는 우리들에게 빛을 비추셔서 영생을 얻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고 참 이스라엘이 되게 하시는 이 놀라운 구원의 사역과 재창조의 사역을 저희들이 훨씬 더 깊이 배워가면서 나 자신이 그 혜택을 누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 재창조의 복음을 정확하게 소개하고 설명하는 증인들이 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장

1:

니고데모라는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찾아 왔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으로 훌륭한 분이었다. 이 분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예수님을 믿게 되는 변화를 갖게 된다.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는 내용들이 3장의 예수님과 이 사람과의 대화 속에서 나온다.

 

2-3:

'거듭난다'라는 말은 '위로부터 난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2절의 '하나님께로서 오신'이란 말과 '거듭난다'라는 말이 같은 주제로 연결되고 있다. 위로부터(above)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위로부터 오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는 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다.

 

4-5:

성령으로 난다라는 것은 모태에 다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땅에서 나는 것도 아니다. 위에서부터 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으로 태어난다라는 말은 이 세상의 출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성령으로 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영'으로 번역해야 맞다.  

 

'물'은 무엇인가? 하나는 말씀이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고, 또 하나는 세례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흔히 말씀과 세례 이 두 가지로 해석한다. 글의 흐름을 보아서는 둘 다 가능하다. 앞에 세례가 주제로 나왔는데 이 세례는 물과 관계가 있다.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고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다. 따라서 물과 성령이란 말은 둘 다 세례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로마서 6장에서는 옛사람이 죽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세례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 세례를 물을 통해서 주는 것은 가시적인 의식이고 실제로 필요한 참세례는 성령 세례이다. 따라서 물은 세례를 의미한다. 이 세례를 받는다는 말과 다시 태어난다는 말 사이에는 관계가 있다.

 

* 중생에 대하여 *

약 1:18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 따라서 물을 말씀으로도 해석한다.

 

벧전 1:3

부활로 거듭나게 하신다. 물로, 성령으로, 부활로 거듭나게 하신다. 그래서 중생은 신비로운 성령님의 사역이라고 간단하게만 말할 수 없고, 여러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

 

벧전 1:23

여기서는 말씀으로 거듭난다고 말하고 있다. 벧전 1:22 말씀에는 '진리를 순종함으로'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진리로 순종한다는 말과 말씀으로 거듭난다는 말은 서로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거듭난다는 말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로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그 중에 한 두 가지만을 가지고 이해하기보다는 좀더 포괄적으로 이해하면서 요한복음 3장을 공부해야 할 것이다.

 

딛 3:5

중생은 씻음이란 말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에 세례의 개념과 관계가 있다. 중생에는 씻음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래서 세례로 옛사람이 죽어버리고 새사람이 되는 것을 중생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씻음이라 말해도 좋고, 세례라고 말해도 좋다. 성경의 어려움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설명할 때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이해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사는 것은 생물학적인 표현인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우리는 숙고해야 할 것이다.

 

엡 2:1-6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이것은 앞으로 살아날 것을 말하지 않고 이미 살아난 것을 말한다. 이 본문에서는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었고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말하고 있는데 실제로 우리는 죽은 일도 없고 살아난 일도 없다. 이런 죽었다, 살았다라는 것을 쓴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라고 그런 표현을 하는 것이지 실제로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이 본문에서는 세상 풍속을 좇고, 마귀를 따라 다니고,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을 그가 살아서 움짐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죽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죽었다는 말이 무의식 상태에 빠져 가만히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풍속을 좇고 마귀를 따르며 욕심을 따라 열심히 일하는 그 살아 있는 사람을 죽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에 대한 관계를 끊어버리고,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고, 하나님을 전혀 따라다니지 않고 다른 것을 따라다니는 것을 하나님 편에서는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잘못 따라다니는 엉뚱한 것들을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로 다시 오는 것을 살았다라고 말한다. 죽었다, 살았다 했을 때 생물학적으로만 생각하는 오해를 갖지 말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말씀으로 거듭난다'라는 말은 마귀의 말을 듣고, 세상의 말을 듣고 그것들을 따라다녔는데 그것을 청산하고 내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엡 4:17-24  

이것을 우리는 중생이라고 말한다. 에베소서에는 중생이라고 표현하고 있지 않고 부활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지고 자기가 원하는 세상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 하나님이 들려 주시는, 그리스도에게서 듣고 배운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세상을 따라 다니던 일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것을 중생이라고 말하고 부활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말씀으로 중생한다는 말이 가능한 것이다.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되는, 즉 옛생활을 버리고 새생활을 한다는 의미에서 다시 태어난다라고 말할 수 있고 거듭난다라는 말이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거듭난다는 말은 옛생활하던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새생명을 얻는다는 말이다. 옛생활하던 삶은 육을 좇아 사는 삶이고, 새생활하는 삶은 영을 따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인 것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란 말은 인간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 가는 사람은 육적 인간이란 말이다. 그 삶을 버리고 성령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나를 이끌어 가셔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하나님을 향해서 새로운 사고와 가치관을 가지고 살면 위에서 태어난 자이고 영에 속한 자이다. 이것을 중생이라 한다. 그래서 중생을 신비롭거나 막연하다고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중생은 확실해야 한다. 내가 지금 어떤 가치관과 사고를 가지고 사는가? 나는 지금 성령님의 지배를 받고 있는가? 아니면 자기 욕심의 지배를 받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 사람들의 사고에 따라가는가에 따라서 새사람과 옛사람이 분리되어진다. 중생한 사람은 말씀을 듣고 배우고 그 가르침에 의해서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고 받아들여서 새로운 생활을 해야만 중생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중생했는가, 안했는가가 확실해야되지 잘 모른다고 하면 안된다. 자신이 교회에 출석하고, 교회에서 봉사한 것으로 중생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세상을 향하던 삶이 멈추지 않으면 중생이 아니고 구원받은 자가 아니다.

 

6:

원문대로 번역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이다. 즉 육과 영을 대조하고 있다. 이 대조를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성령으로 번역했다, 영으로 번역했다 하더라도 같은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경에서는 재창조 되지 않은, 새로 태어나지 않은 존재를 육이라고 말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존재를 영이라 말한다. 이것을 위에서 부터 났다라고도 말한다.

 

7-8:

1)전통적인 해석: 중생이란 것은, 성령님으로 태어나는 것은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중생했는지는 모르는 것이다. 다만 중생은 이후에 나타난 결과, 즉 교회에 가  고 싶은 생각, 성경을 배우려 하고, 예수님을 믿으려 하는 생각이 듦을 통하여 이미 자기 안에 성령님이 내적으로 오셔서 무엇인가를 해놓은 것을 알 수 있다. 어린 아이가 처음에는 자신이 출생했는지 안했는지 모르지만 나중에 철이 들고 나서 자신이 태어난 것을 인식하는 것처럼 중생은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본문 말씀처럼 중생은 감을 잡을 수 없는, 파악할 수 없는,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2)바른 해석: 이 본문에서 바람이란 말은 원문에서 영이란 낱말과 똑같은 낱말이다.(Pneuma) 따라서 직역을 하면 '영이 임의로 불매'라고 해야 한다. 마치 영과 똑같은 낱말을 가지 바람이 임의로 불기 때문에 소리는 듣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중생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고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다는 것이다. 성령님을 모시고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을 육에 속한 사람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왜 저사람은 저렇게 살까?" "저사람의 살아가는 목적은 무엇일까?" "왜 저사람은 돈도, 집도, 명예도 좋아하지 않고 싫어할까?" "저사람의 사는 보람과 가치는 무엇일까?"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을 육에 속한 자들이 볼 때에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중생이 어떻게 되는 지 모른다는 말이 아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중생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셨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고 육으로 태어난 자가 영에 속한 자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분명히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9-11: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다. 이스라엘의 선생과 진짜 랍비인 예수님과는 대조적으로 등장한다. 이 이스라엘의 선생인 니고데모는 참 스승인 예수님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알쏭달쏭한 것을 말하지 않고 아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막연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본 것을 증거할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중생을 참으로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중생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중생을 한 사람은 자신이 중생한 것을 확실히 확인해야 한다. 알고 있어야 한다. 잘 모르겠다라고 하면 중생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12:

땅의 일과 하늘의 일을 대조적으로 말하고 있다. 태어나는 이야기를 니고데모는 땅의 일로 들었기에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늘의 일은 땅에 속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다.

 

13:

예수님은 하늘에 계셨던 분이고, 하늘에서 오셨던 분이고, 언제든지 하늘에 속한 분으로서 하나님과 교통하고 계시는 분이다.

 

14:

여기에 들린다는 말은 위로 올라간다는 뜻이다. 십자가 나무에 들리는 것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일차적으로 포함하면서 실제적인 의미는 하늘에 속한, 영의 세계로 올라갈 것을 말하는 의미가 있다.

 

15: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에게 연합된 사람은 함께 들려서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아버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산다. 이것을 영생이라 한다.

 

요일 2:29

그에게서 난 사람은 의를 행하는 자이다. 전에는 욕심을 따라, 마귀를 따라, 세상 풍속을 따라 살았는데 이제는 의를 행하는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난 자이고 성령으로 난 자이다. 중생한 사람은 삶이 바뀐다.

 

요일 3:9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말이 거짓말도 한번도 안하는 그런 완벽한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항상 자기가 원하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고, 세상 풍속을 따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바로 의를 행하는 것이고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서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데 하나님이 바라시는 만큼 살지 못하는 문제는 있지만 적어도 과거에 다른 허망한 것을 좇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으로 옮겨와야 되는데 이것을 위에서 난자고 말하고 중생이라고 말하며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요한일서에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을 단순하게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아무도 해당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일서에는 죄를 짓는 사람과 안짓는 사람과를 명확하게 선을 그어놓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갈라놓고 말하고 있다.

 

요일 4:7-8

이 본문에서는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는 자라 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성도들과 나누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고 중생한 자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에 미움이 있다면은 나는 중생한 사람이 아니다.

 

요일 5:1

처음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이 중생한 사람이고, 두번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중생한 사람이고 세번째는 그에게서 난 자들,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는 자가 중생한 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구원하신,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에게서 나지 않은 세상에 속한 자들은 사랑하지 않는다. 이 말은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고 전도하는 그런 사랑을 못한다는 말이 아니다. 중생하지 못한 세상에 속한 사람을 가까이 하고 친구로 어울리는 것을 버리라는 것이다. 세상 친구가 항상 여전히 즐거운 사람은 중생에 대해서 점검을 받아야 한다. 내 삶이 바뀌고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옛날 안믿는 세상 친구를 만나도 즐겁지 않아야 한다. 옛날과는 달라져야 한다. 서서히 서서히 친구의 정이 없어져야 한다. 교인하고 만나는 것이 오히려 더 지겹고 고리타분하고 꽉 막혔다고 생각되며 세상 친구를 만나야 더 통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신자가 꽉 막힌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꽉 막혀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중생하지 못한, 구원받지 못한 세속적인 사람이다. 교회 다닌다고 구원받은 것으로 착각하면 안된다. 이러한 삶이 바뀌지 않으면 중생한 사람이 아니다.

 

요일 5:4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세상을 주먹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미혹들을,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다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극복되지 않으면 중생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아니다.

 

요일 5:18

예수님이 우리를 지키시기 때문에 악한 자인 사탄이 우리를 만지지도 못하고 우리는 범죄치 아니한다. 보호를 받고 있다. 적어도 요한 사도의 설명에 의하면은 중생이란 말은 확실해야 하고, 자기 소속이 분명해야 되고, 자기 가치관이 분명해야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확실하고, 세상과의 관계가 차단되어 있는 것이 드러나야 한다. 이러한 것 없이 중생은 신비롭게 내 안에서 시작된 것이다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또한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중생했다라고 말할 수 없다. 자신의 삶이 변화되지 않고는 자신이 중생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면 예수를 믿고 변화되지 않은 사람도 있는가? 중생되지 않고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해서 독생자를 주셨다. 왜냐하면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여기의 주제는 영생이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인데 그것을 이번에는 영생이란 말로 바꾸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17:

심판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심판 하에 있기 때문에 심판 할 필요가 없다. 이미 심판을 선고 받고 있기 때문에 심판을 위해서는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다.

 

18: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 구원하는 대상이 누구인가? 악을 행하지 않은 선을 행하는 사람, 또는 선도 악도 행하지 않고 중성으로 있는 사람이 아니고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완전히 정죄 하에 있는 사람을 선택해서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나는 아무리 예수를 믿으려 했지만 선택받지 못해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선택이란 말은 하나님께로 오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다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가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미 다 정죄해 놓으시고 심판을 다 선고해 놓으시고, 멸망시키기로 다 정해 놓고 다시 선택해서 구원해 오시는 것이기 때문에 선택은 정죄받은 것을 전제로 하고 다시 불러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택해서 구원해 오는 사람은 그가 자꾸만 하나님을 떠나려 하는데 하나님이 찾아서 챙겨오는 것이고, 하나님이 선택해서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계속해서 반대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믿고 싶은 쪽으로 오지 않는다. 따라서 "내가 아무리 믿으려 해도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지 않으셨다면 나는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말이 안된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모두가 다 멸망받고 심판을 받아야 되는데 그 중에 구원받을 사람을 구원하러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심판하러 오시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심판은 이미 집행되고 있는 것이다.

 

19-21:

예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시고, 죽음에 있는 사람들을 생명으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러나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이 오기를 싫어 했다. 예수님을 믿기 싫어 했다. "나는 믿고 싶은데 ...."라고 말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믿고 싶은데 .... 이 친구와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버릴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세상 친구와 둘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도 좋고, 세상의 친구나 세상의 것들이 좋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둘을 사랑할 수 없다. 그래서 악을 행하는 사람이 빛이신 예수를 보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와야지 돌아오지 않고 계속 그곳에 있으면서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어두움에 속한 것들을 버리지 않고 교회에 다니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 죽어서 지옥 갈 것이 걱정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상도 좋고, 또한 천국에도 가고 싶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 신앙이다. 예수를 믿고 구원얻는다는 말은 자기의 악한 행위, 어두움의 행위를 버리고 선한 행위를 좋아해야 되며 선한 행위 쪽으로 와야 하는 것이다. 선한 행위를 좋아하는데 잘 안되거나, 선한 행위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해서 악을 행하는 것이 따라다닌다면 그 부분만 잘 검토해보고 성화되어 가면 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내 마음 속에서 선도 좋아하고, 악도 좋아하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둘 중에 하나 밖에 사랑할 수 없다. 따라서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은 한마디로 어두운 생활을 버리고 빛으로 오라는 말이다. 믿는다는 말은 과거를 버리고 빛 쪽으로 들어오는 것을 말한다. 어두움을 버리지 않고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빛을 받아 들이고, 빛으로 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의 어두운 행위가 들어날까 두려워서 빛으로 나오지 못하는 자는 믿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어두운 행위를 하면서 빛이신 예수님께 와서 믿는 척 하는 것은 거짓이며 실제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숨기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은 물론 영생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요한복음 3장 16절을 뒷부분까지 읽지 않고

암송한다면은 항상 오해가 일어난다.

 

22절에서 4장 2절까지의 주제는 세례이다.

22-4:2

 

23-30:

여기까지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대조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세례 요한은 물세례만 주는 자이고, 참세례를 주는 자가 아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하늘에서 주신 바 된 참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신랑이고 세례 요한은 신랑의 음성을 듣고 기뻐하는 친구이다.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고 세례 요한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 세례의 주체가 세례 요한이 아니라 예수님이신 것을 설명하고 있다.

 

31-36:

예수님은 위에서부터 오시는 분이시고 만물 위에 계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의 증거는 참된 증거이다. 또한 예수님은 성령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 이 36절에서는 믿는다는 말과 순종한다는 말을 서로 같이 쓰고 있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믿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다. 순종하지 않는 것은 불신앙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은 그 말씀하신 분을 신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종을 하지 않는 사람이 믿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다. 순종을 하지 않으면서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특별히, 스스로 착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착각을 하도록 만드는데 문제가 있다. "어떻게 우리가 순종하고 행하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는가? 순종을 못하니까, 행함이 없으니까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행함이 필요없고, 순종이 필요없고 믿기만 하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믿는다는 말 한마디로 구원을 얻었다고 인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우리는 아들을 순종해야만 하고 아들을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는다. 어둠에 있는 사람이 빛의 비추임을 받고 예수님께로 와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순종해야 되는데 순종하지 않고 예수님께 오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어두운 삶을 좋아하기 때문이고 빛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 하에 있는 것이다. 생활이 변화되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말이다.

 

4장

1-2:

실제로는 예수님이 참세례를 주시는 분이시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신데 세례 요한은 이 참세례를 주시는 예수님의 그림자로, 소개하기 위하여 온 증인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고 예수님께 와야 되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오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를 비교하려 했다. 비교하려 하는 것은 착각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땅에 있는 그 누구와를 비교하려 하는 것은 착각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땅에 있는 사람은 세례 요한처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는 고백을 하여야 한다. 예수님을 소개한다고 다 말하면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을 따라오게 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4장 3절에서 끝절까지 사마리아 여인의 주제가 나온다. 2장-3장이 첫번째 문단이었고 4장 한 장이 두번째 문단이다.

 

3-6:

제 육시는 낮 열 두시로 보통 해석하지만 아침 여섯 시이거나 저녁 여섯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침 여섯 시일 가능성은 없고 저녁 여섯 시일 가능성이 더 크다. 저녁 여섯 시가 물길러 오는 시간이다. 만일 낮 열 두 시이면 창피해서 아무도 물길러 오지 않는 시간에 사마리아 여인이 물길러 왔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을 오후 여섯 시로 해석하면 물 길을 시간이 되어서 물길러 왔다고 해석할 수 있다.

 

7-8:

8절에서 먹을 것을 사러 갔다는 것은 사람들이 잠 자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12시는 낮잠을 자는 시간이다.

 

9-12:

고대 사회에서는 우물이 굉장히 중요했다. 이 우물물로 목축업도 하고, 생활도 하고 살았기 때문에 비가 잘 오지 않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우물물이 굉장히 중요했다. 그래서 이 우물을 예수님이 끌어들여서 영적인 생수를 소개하는데에 교보재로 사용하고 있다.

 

13-18:

야곱의 우물과 대조되는 영생의 우물이 나오고, 아무리 갈아치워도 시원치 않은 남편과 참남편인 그리스도와를 대조하고 있다.

 

19-21:

장소에 대한 질문을 했는데 장소로 대답하시지 않고 때로 대답하신 것을 주의해야 한다.

 

22:

여기서 사마리아인과 대조로 나오는 유대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참생수를 주시는 분이시고, 참된 남편이시기도 하고, 유대인이기도 하고 참예배와 관계되는 분이시다.

 

23 상:

'신령'이란 말은 '영'과 '성령'으로 해석되어 질 수 있다. 지금까지는 성령 예배를 드린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림자로 성전에서 짐승을 가지고 그림자 예배를 드렸다. 진짜 예배는 성령님을 통해서 드린다. 이 영적인 예배를 드릴 시기가 드디어 온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23 하-24: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 될 때 비로서 드디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주일 날 예배드릴 때 목사님께서 "자,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마음을 가다듬으십시요."라고 말하곤 하는데 우리의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 신령과 진정이 아닌 것이다. 마음을 가다듬는 것은 구약 시대 때도 가능한 것이고 다른 종교에서도 가능한 것이다. 이 본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에 속한 사람으로, 위에 속한 사람으로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어둠에서 떠난 사람들, 중생된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가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인 것이다.

 

25-30:

만일 사람들이 이 여자를 매우 천시했으면 안따라왔을 것이다. 그래서 설령 이 여자가 남편을 네명씩이나 갈아치웠더라도 동네 사람으로부터 챙피해서 숨어서 사는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 여자도 선지자에게 관심이 있는 여자였고, 메시야에게 관심이 있는 여자였다. 따라서 이 여자를 평범한 여자로 보아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물에 대한 갈증도 있었고, 남편에 대한 갈증도 있었고, 예배에 대한 갈증도 있었으며, 메시야에 대한 갈증도 있는 사마리아의 한 여자였다. 이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는 구원에 대해서 잘 모르는, 유대보다 더 어둠 속에 있는 한 여인을 등장시켜서 사마리아 여인처럼 어두움에 있고, 갈증을 갖고 있고, 항상 만족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찾아가는 것을 소개해주기 위한 그런 좋은 예인 것이다.

 

31-32:

여기에도 두 가지 양식이 등장한다. 앞에서 야곱의 우물의 물과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가 대조를 이루었듯이 제자들이 가게에서 사온 양식이 있고 예수님이 잡수시는 양식이 있다.

 

33-34:

예수님의 양식은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 하셨다. 그렇다면 보내신 그의 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늘에 속한, 영에 속한 내용들이다. 그것은 중생시키는 일이다. 예수님은 이일을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다.

 

35:

맥추절은 대략 5월 쯤 된다. 3월 말이나 4월 초에 유월절을 보내고 50일 지나면 오순절이 되는데 오순절은 수확이 끝난 때이다. 따라서 이 본문의 시기는 12월 혹은 1월일 가능성이 있다.

 

35-38:

하나님 나라는 팀사역을 한다. 한 사람은 물을 주고, 한 사람은 김을 매고, 한 사람은 수확을 한다. 심는 사람도 있고 수확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꼭 내가 심고, 내가 수확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물론 이 본문은 구약 시대 때에 하나님이 많은 씨를 심어 주셨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드디어 영적인 수확을 할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심은 것을 제자들에게 거두러 가라는 말씀이 가장 중요한 의미이다.

 

39:

여자의 증거를 듣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아졌는데

 

40-42:

전도는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이틀 동안 보충교육을 받고 믿음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전도에는 여러번의 반복된 가르침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간증을 들었지만 진짜 배우는 것은 성경에서 직접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을 때이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할 때에 반드시 복음서를 읽혀서 예수님의 설명을 듣게 하는 것이 좋다. 바르게 읽고 바르게 깨달아서 믿음에 이르러야 한다. 사람들의 설명이 동기부여도 되고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핵심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성경에서 직접 듣는 것이다. 성경을 직접 배우지 않고 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그 복음이 불충분하게 전해졌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지금 이 요한복음에는 세례 요한, 안드레, 빌립, 사마리아 여인 등과 같은 많은 증인들이 나오는데 이 증인들은 다 온전한 증인들이 아니다. 진짜 참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성경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의 증거가 필요없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증거가 다 필요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온전한 증인이 아니고 온전한 증인은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경인 것을 날마다 확인해야 할 것이다.

 

43-45:

사마리아 여인도 문제가 있었고, 유대인들도 문제가 있었고, 갈릴리 사람들도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수를 맛보게 되고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게 되었다. 유대인들이 1차적으로 혜택을 받고 있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방인들이 더 큰 혜택을 받는 부분이 등장하고 있다. 중생하고 구원얻는 것은 땅에 속한 모든 신분, 교회에 오래 다닌 것, 집안이 기독교적인 것과는 관계가 없다.

 

46-48:

표적이 주제로 다시 등장한다. 이 표적은 두번째 표적이다.(54절)

 

49-54:

이 표적이 무엇인가를 정리하고자 한다. 여기서의 표적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표적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표적과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표적은 서로 같은 성격의 표적이다. 이 4장에 나오는 생수, 양식, 죽은 자를 살리는 것 이 모든 것은 영생과 관계되는 주제이다. 요한 사도는 같은 주제들을 나열하여 같은 주제들을 계속해서 파악하도록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3장에서 중생에 대한 주제를 다루었다. 중생에 대한 주제가 4장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3장에서는 육에 속한 자가 영에 속한 자로 태어나는 것, 위로부터 나는 것을 중생이라 했다. 4장에서는 영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 땅에 양식이 아닌 위의 양식 즉,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옛생활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너무 기뻐서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 사람들에게 가서 말했다. 동네 사람들이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고 이틀을 더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가 중생과 관계가 되는 것이다. 중생은 예수님을 만나고 새생명을 얻는 것이다. 갈증이 해소되는 시원함을 얻는 것이다. 아주 만족스러워져야 한다. 이 여인은 바로 이런 것을 체험하였다. 중생의 결과는 뚜렷하게 변화되는 모습이 있다. 영적으로 거의 죽어가는 여인이 새롭게 되살아 난것과 거의 죽어가는 아이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물이 포도주로 변화는 것이 모두가 서로 연관이 있는 것이다.

 

 

5장

1-15절까지는 38년된 병자를 고치는 이야기가 나온다.

1:

5장부터는 해가 바뀌어 1차년도 전도 사역은 1-4장까지이다. 1-4장까지의 내용은 공관복음서에서는 나오지 않고 요한복음에만 나온다. 공관복음서에서는 바로 제자들을 부르시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것은 공생애 2차년도의 사건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이 없으면 예수님의 생애가 3년 반이 아니라 2년 반 밖에 되지 않는다.

 

베데스다 못가에 많은 환자들이 모여서 병이 낫기를 위해 물이 동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 38년된 병자가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고치심으로 또 하나의 새로운 표적을 보여 주셨다.

 

9-21: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이다. 예수님이나 하나님이나 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일을 하신다. 영생을 주는 일이고 중생시키는 일이다.

 

24:

이것을 중생이라고도 말하고, 구원이라고도 말하고, 영생이라고도 말한다.

 

25: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살아날 때가 있는데 바로 지금이라는 말이다. 재림 때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다. 지금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말씀을 듣고 살아난다. 이는 앞에서 공부한 말씀으로 거듭난다는 의미와 같다. 아들에게서 듣고 배운대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야만 중생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말씀을 순종할 때 중생이 되는 것이지 순종하지 않으면 중생이 되는 것이 아니다.

 

26-29:

지금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 사람이 마지막 날에 생명의 부활을 받는 것이지, 지금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지 않는 사람은, 중생하지 않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게 된다. 그래서 최후의 부활은 현재 내가 영적으로 중생된, 영적으로 부활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부활 사상은 1차적으로는 영적인 부활을 의미한다. 이것이 먼저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을 중생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이 중생을 현재 내가 실제로 체험하고 누리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따라가는 것이다. 24절에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믿어야 영생을 얻는다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때에 내 죄가 십자가에서 사라진 것만 받아들이고 믿을 것이 아니고 그 근원자이신 하나님을 배우고 믿어야 하기 때문에 나의 믿음의 대상이 성부 하나님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30-36: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시는 일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37-39: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속에 나타난다. 세례 요한이나 다른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증거는 불충분하다. 참 증거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직접 증거하시는 것인데 그것은 성경이다.(구약성경) 따라서 우리는 구약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구약에 이미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상당히 많이 언급을 했고 구약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증거가 충분하기 때문에 성경을 상고하면 그 누구의 증거보다 더 확고한 증거를 받을 수 있다.

 

40-47:

성경의 가르침, 성경에서 하나님이 직접하신 말씀, 신약에서 예수님이 직접하신 말씀, 사도들이 보충해서 잘 설명한 말씀들을 우리가 잘 듣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설명을 직접 들으면서 확고한 신앙에 이르는 것이 제일 안전하고 확실하고 완벽한데, 사람들은 성경을 읽어서는 깨닫지 못하고, 믿음이 생기지 않고 설교를 듣거나 강의를 듣거나 간증을 들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이렇게 해서 생긴 믿음은 가짜일 가능성이 있다.

 

 

6장

6장에는 네번째 표적이 나온다. 네번째 표적은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사건이다.

 

14:

'그 선지자'란 모세가 말한 '나와 같은 선지자'를 말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 표적을 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저분이 참으로 세상에 오실 메시야다."라고 고백을 했다.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해서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아직도 땅에 속한 사람으로, 중생되지 못한 사람으로 신앙 고백을 많이 할 수 있다.

 

15-26:

오천명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 할 때 예수님은 피하셨다. 26절 말씀은 예수를 믿고 경제 성장하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따라오지 말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우리 나라의 통일을 위해서나 경제성장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 제목이 아니다. 우리는 자꾸만 땅에 속한 어떤 일이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과 관계 된다고 자꾸만 생각한다. 물론 하나님이 다 지배하신다. 우리의 경제도 지배하시고, 남북통일도 지배하신다. 모든 정치계를 다 지배하시는 것은 분명하지만 문제는 그 지배한다는 말이 우리가 바라는 쪽으로 가도록 하나님이 해주셔야 되고, 우리가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고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지상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야 된다는 것에 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오천명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따라다니면 안되고 썩는 양식이 아닌 썩지 아니할, 영생할 양식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 다녀야 한다. 영생할 양식을 못누린 사람이 자꾸만 지상에 있는 썩을 양식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 다닌다. 다만 우리가 영생할 양식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것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먹을 것, 입을 것도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주된 이유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세상의 것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서도 안된다.

 

27-29:

믿음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30-40:

이 본문의 말씀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오는 자들을 하나도 내어 쫓지 않고 다 받아 줄 뿐 아니라,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다 살리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나의 구원은 확실한 것 아닌가?" 물론 확실하다. 이 말은 너무나 확실한 말이다. 나의 구원을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해주시겠다는 것은 분명한데 문제는 내가 거기에 해당되는가에 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구원하는 것은 너무나 확실한데 문제는 내가 거기에 끼여 있느냐, 아니냐에 있다. 교회에 다니고, 믿는다고 고백한다 할지라도 이 오천명처럼 땅에 속한 생각을 가지고 땅에 속한 것을 목적으로 살아가면서 예수를 믿는다면, 그리고 또한 자신은 예수께 왔다고 착각을 한다면은 그는 아닌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떡을 얻어 먹는 생각이 분명해야 되고 내 가치관이 바뀌지 않으면 나는 이 구절과 상관이 없는 것이다.

 

41-42:

여전히 땅의 것으로 자꾸 계산한다. 예수님께서 자신은 하늘에서 왔다,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아 왔다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시는데도 사람들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았다. 안믿는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교회 안에서도 예수님을 위대한 성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을 지상의 어떤 분으로 설명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48-51: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신 분임이 이해되어져야 한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신 것을 단순히 육체의 병을 고치신 신유의 은사를 가지신 분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과 관계가 없다. 이것은 표적에 불과한다. 이 표적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의 질병을 치료해주고 참생명을 주시는 것을 소개하기 위한 표시에 불과하다. 예수님께서 병도 고쳐 주시고, 오천명을 먹이시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 모든 것은 지상에 있었던 어떤 일들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와서 우리의 죄를 처리하시고 생명을 주는, 육에 속한 자가 영에 속한 자가 되는 중생의 사역을 하는 표적들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을 이해하지 못한 체 예수님을 단지 기적을 행하는 분으로만 이해한다면 이것은 구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예수님은 증명을 해서 믿어지는 분이 아니시다.

 

52-63:

구원이란 첫창조되어 땅에 속해 사는 육에 속한 사람들이 하늘의 영에 속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66-69:

제자들이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신 영생의 떡인 것을 아직 이해한 것은 아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땅에 속한 왕으로 계속 이해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들은 다 뿔뿔히 흩어졌다. 어떻게 보면 구원에 이르는 길이 쉽지가 않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한다. 어떤 면에서 중생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중생할 때 가르침을 잘 듣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땅의 것이 아님을 차원을 높여서 잘 이해해야 한다. 들려줄 때 귀를 열고 들어야 한다. 가르침을 잘 받아야 한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들어야 한다.(요 5:24) 그리고 연합해야 되는 부분이 있다. 예수님을 먹어야 된다는 말은 나의 모든 것을 빼내고 예수님을 모셔들여서 예수님과 나와 하나가 되는 변화를 의도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의 어두운 부분, 나의 인간적이고 육적인 부분을 버리고 영적인 하나님에게서 오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예수님 안에서 선을 행하는, 지금까지 모든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던 것을 버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삶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영생과 하늘에 속한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그 쪽에 속한 것을 해보면서 배워진다. 이 세상에 속한 것을 버리고 하늘에 속한 영적인 부를 조금씩 누려 갈 때에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이 별 것이 아닌 것을 체험하게 된다. 예수님에게서 주어지는 것이 영원한 것임을 터득하기 시작해야만 서서히 서서히 버릴 것을 다 버리게 된다.

 

 

7장

7장은 초막절의 이야기이다. 초막절은 3대 절기 중 마지막 절기로서 가장 즐거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으며, 시월 초쯤에 지켰다. 초막절이란 말과 장막절이란 말과 수장절이란 말은 같은 절기를 말한다. 초막절은 한 해의 추수를 마친 것과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오는 동안 내려 주신 보살핌에 대해서 감사하는 절기였다. 사람들은 8일 동안 거리에서 혹은 지붕 위에서 짚으로 만든 오두막을 짓고 지냈다.

 

3-5:

형제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땅에 속한 생각을 한 것이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6-10:

이것이 동문서답하는 중요한 내용 중에 하나이다. 어머니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씀할 때에 예수님은 아직은 내 때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시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 어머니가 요청하는 것과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일하는 것과 관계를 끊어버리는 의미가 있고, 어머니가 요청하는 이유와 예수님 자신이 이 일을 하시는 이유와는 목적이 다르다는 의미가 있다. 마치 6장에서 무리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하는데 예수님은 실제로 왕이 되실 분이지만 피하셨다. 왜냐하면 무리들이 생각하고 추구하는 왕과 예수님이 자신이 장차 왕이 되신다는 개념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무리들의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왕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무리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때에 자신들이 원하는 방법으로 왕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워주실 때에 십자가를 지고 부활하고 승천해서 왕이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무리들이 추대하는 것과 아무 관계가 없었고 무리들이 바라는 왕도 아니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갈 필요가 없었다. 다른 이유로 올라가지만 동생들이 바라는 이유로는 올라가지 않는다는 것이 본문의 의미이다.

 

14-15:

공부를 많이 한다고 성경을 더 잘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공부를 많이 하지 않고도 성경을 잘 알 수가 있다. 물론 공부를 많이 해서 성경을 더 잘 연구하는데 도움을 받으면 좋다. 그런데 너무 세상 공부를 많이 하면 성경을 잘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때도 많다. 하나님의 말씀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이해하도록 되어 있지는 않다. 단순한 사람이 더 잘 이해하도록 되어 있다. 저자가 쓴 데로 그대로 따라가면 이해가 되는데 공부를 많이 해서 세상적인 학문의 원리에 따라서 이 본문을 분석하기 시작하면 항상 불신앙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학자들 중에, 박사들 중에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많다. 신학 박사들 중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세상 공부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데 도움이 되는 것만이 아니라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6-17:

말씀을 우리가 잘 듣고 배우고 할 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읽고 배우면 이해도 잘되고 맞는지 아닌지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닫고 가르침을 받으면 올바른 가르침인지 아닌지 분별이 안된다. 그는 항상 자신의 귀에 편안하게 들리는 말을 즐겨 듣는다.

 

18: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사람이 불의가 없고 깨끗하다. 자기 영광도 추구하면 혼잡하게 되고 변질되고 불의가 개입된다.

 

19-24: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친 것을 유대인들이 미워한 까닭은 그들 속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교훈,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은 없고 자기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굳이 안식일날 고치신 이유는 무엇인가? 전신을 건전케 하는 것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병의 억눌려서 신음하는 사람을 병에서 놓여나게 하는 것이 안식일이다. 애굽의 바로에게 억눌려서 고통 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끌어내서 가나안에 와서 안식을 누리게 하는 것이 안식일이다.(신 5:15) 안식일은 엿새동안 첫창조된 그 세계를 재창조하는, 범죄함으로 죄 아래서 신음하는 첫창조된 인간을 건져내는 영적인 구원과 영적인 치료를 해주는 것이 안식일이다. 그래서 안식일은 영적인 안식을 주는 날이다. 하나님은 항상 그 일을 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모든 날들이 안식일인 것이다.

 

25-39:

성령님을 받으면 너희가 목마르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의식에 빠지지 말고 참된 생수를 받아 마셔야 된다. 우리가 교회 생활하면서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 우리가 예배드리거나 교회 생활할 때 인간이기 때문에 어떤 의식이 따라오기도 한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그 의식이 핵심이 아니고, 그 의식은 아무리 해도 의미가 없고 실제로 그 의식은 내면적인 것을 더 잘 하기 위한 외적인 행동에 불과하기 때문에 내면적인 것이 따라오지 않으면 그 의식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내면적인 것이 없어질 수록 의식을 많이 만들어 간다. 내면적인 것이 풍성하면 의식이 별로 없어도 된다. 무엇인가 허전하고 잘 안되면은 그것을 의식으로 채우려 한다. 한국 교회가 생동력이 있을 때에는 의식이 거의 없었다. 점점 점점 교회가 타락하면 천주교처럼 되어 간다. 의식이 많아진다. 이것은 내면적인 것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의식이 많아지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진짜 성령을 받아야 하고, 진짜 생수의 강이 넘쳐야 된다.

 

40-44: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이런 것을 가지고 시비할 필요가 없다. 이런 것들이 다 참 그리스도를 모를 때의 이야기이다. '다윗의 씨'도 단순히 족보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참 왕으로 오신다는 뜻이다.

 

53절-8장 11절까지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가 나오고 12절부터 9장 끝까지는 빛이라는 주제가 나온다.

 

12:

예수님을 모셔드리고 빛을 받은 사람은 그 밝은 빛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즉, 영에 속한 하늘 백성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자체는 어두움에서 나와서 빛가운데서 사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19-47:

 

30-32: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설명하신 것이다. 자기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진리를 제대로 알 수 없다. 지금 너희들이 내 말을 듣고 마음에 수긍하고 동의하고 따라오는 그 부분에서 그 다음 내가 설명하는데까지 따라와서 진리를 더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진리는 한가지 만이 아니고, 진리는 한 번 설명해서 다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설명해주시고 싶은 데까지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설명을 반복해서 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진리를 아는 부분에 있어서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다.' '나는 이미 자유를 누리고 있다.'라고 생각하는데는 약간의 무리가 있다. 실제로 어떤 부분에서는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자유를 못누리고 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이미 과거에 지은 죄에 관하여서는 용서받고 자유함을 누릴 지는 모르지만 현재 내가 아직도 많은 부분과 싸우고 있고 갈등을 느끼고 아직도 헤어나지 못한 부분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는 더 많은 자유가 필요하다.

 

33- :

예수님의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말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에 거부감을 나타내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마귀의 자식이라고까지 말씀하시게 되었다.(44)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30,31) 따라서 아무리 어느 정도 믿고 따라왔다더라도 거기에서 바로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는 육에 속한 어린 아이같은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을 쓴다. 예수를 믿겠다고 신앙고백하고 들어오지만 아직은 어린 아이 상태에 있고, 아직은 육에 속한 상태에 있고, 아직도 육에 속한 버릴 것을 다 버리지 못한 상태에 있는데 거기에서 더 진리를 배워서 영에 속한, 참으로 성령님을 좇아 사는 삶까지 따라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계속해서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고 그 성령님의 뜻을 알고 좇아가야 한다. 여기까지 오지 못한 자는 여전히 육에 속한 자이고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지 못하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44:

마귀의 특징은 욕심과 거짓됨이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욕심, 하나님 앞에서 순수하지 못한 거짓됨이 빨리 정리가 되어야만 나는 참 자유함을 누릴 수 있다. 이 욕심과 거짓에 있어서 완전히 세상적인 욕심과 거짓도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범위 내에서도 인간적인 욕심이 있고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거짓된 가르침에 미혹을 받기도 한다. 그 이유는 아직도 진리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이다.

 

 

9장

9장에는 다섯번째 표적이 나온다. 날 때부터 소경이 된 사람을 고치시는 표적이 나온다.

 

2:

장애인이라든지, 특별히 가난한 사람이든지, 특별히 문제가 있고 어려운 사람이라면은 의례히 죄와 관계가 있다라고 착각을 한다. 물론 죄와 관계될 수도 있지만

 

3:

날 때부터 소경이 된 이 사람은 부모의 죄도 아니고, 자신의 죄도 아니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이 소경을 고치시는 일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의 빛이 된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함인 것이다. 이러한 역경 속에 있는 사람들을 무조건 나쁘게만 보지 말고 하나님은 아주 불행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그를 통해서 일하기도 하신다. 하나님은 항상 훌륭한 사람만을 통해서 일하시지는 않는다. 우리 모두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관이 정립이 덜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요한복음을 쭉 읽어 오면서 가장 큰 죄인은 바로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이었다. 물론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나 사마리아 여인에게 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범한 죄(십계명을 어긴 죄)보다 훨씬 더 큰 죄는 기득권자가 되어서 잘못된 가치관으로 잘못된 권세를 누리며, 다른 사람에게 자신들의 잘못을 노출시키지 않고 자기들은 올바른 것처럼 보이면서 다른 사람들이 올바르게 가는 것을 계속 가로막는 것이다.

 

4-5:

예수님에게도 일을 할 수 없을 때가 온다는 말이다. 잡혀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면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일단 끝나게 된다. 우리에게도 항상 낮과 같은 때가 주어지고 있고 어느 순간이 지나면 일할 수 없는 밤이 온다. 환란의 때가 온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세상의 빛이심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

 

6-7:

여기에서 '씻는다'는 말과 '밝은 눈으로 왔다'라는 말은 두 개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주제와 연결된다. '씻는다'는 말은 세례와 관련이 있고, '밝은 눈'은 빛과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빛이신데 이 빛을 보기 위해서 내 안의 부정한 부분이 씻김을 받아야 한다.

 

13:

교회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한 것이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트집을 잡으려 했다. 용케도 트집 잡을 일이 생겼다.

 

14-16:

안식일에 관한 주제가 이 요한복음에는 여러번 나온다. 안식일은 죄인을 정결케 씻어주시고 어두움에 있는 사람에게 밝은 빛을 보게 하는 사건과 관계가 있다. 우리가 주일을 늘 지키면서 주일마다 내 안에 있는 부정한 것을 발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씻음을 받으며 또한 내가 그리스도를 매일 만나므로 나의 어두운 부분이 밝아지고 거기에서 나와서 빛가운데로 점점 더 가까이 가고 있으면 나는 안식일을 정상적으로 지키는 사람이다. 주일 날 늘 예배에는 참석하지만 그러한 변화와 발전이 내게 없다면은 그 안식일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안식일인 것이다. 몸만 쉰다고 안식일을 잘 지키는 것은 아니다. 안식일에 내 눈이 열려야 되고 빛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만큼 나는 빛가운데 더 가까이 가야 하고 나의 어두운 부분이 물러가는 변화가 있어야만 한다. 이 빛은 천국을 상징하며 어두움은 지옥을 상징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떠나있던 상태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지도자들이 소경되었다가 눈을 뜬 사람의 부모에게 가서 물었을 때 부모들은 출교 당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대답을 회피하였다. 그러나 이 소경은 아주 분명하게 대답을 하였다. 이 소경되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을 추적해보고자 한다.

 

10-11: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 보게 되었노라."

17:

"선지자니이다."

24-25:

"그가 죄인인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26-27: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 예수의 제자와 모세의 제자(28-29)

우리가 성경을 공부할 때 성경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 핵심이다. 성경은 모두가 성부 하나님의 말씀이요, 성자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라고 말하지 않고 "어느 학자가 말하기를 ...." 이래야만 권위가 선다. 모두가 모세의 제자이다. 물론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성경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고 성경대로 잘 생활하기에 모세의 제자들로 자처했다. 그러나 모세는 예수님을 잘 설명한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잘 모르고 예수님은 잘 따라다니지 않으면서 모세의 제자라고 그들은 말한 것이다. 즉 성경은 많이 연구하고, 성경을 잘 알고, 성경대로 믿고 있다고 말하면서 성경에 주체가 되시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과 예수님은 안믿은 상태에서 자신을 신학자로, 목사로 말한다. 그런데 이 소경되었던 사람은 그들이 어떻게 말하건 정정당당하게 믿었다.

 

29-33: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게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35-38:

"주여 내가 믿나이다."

 

예수님에게서 설명을 들으면서 점점 그에 대한 지식이 자라면서 믿음도 자라고 있다. 교회 지도자들이 반대하고 박해하고 몰아부칠 수록 후퇴하지 않고 더 예수님께로 가까이 가까이 발전해 가고 있다. 그래서 영생에 이를 사람은 환경이 나쁘거나 박해가 있거나 외로우면 외로울 수록 점점 더 하나님 쪽으로 자라간다.

 

39-41:

예수님은 처음의 질문(9:2)과 정반대되는 결론을 내린다. 소경보다는 눈뜬 사람이, 어린 아이보다는 어른이, 비천한 사람보다는 높은 사람이, 가난한 사람보다는 부자가, 못배운 사람보다는 배운 사람이 훨씬 더 죄를 많이 범한다. 사실 지도자는 굉장히 조심을 많이 해야 한다. 지도자는 자기 앞을 잘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누가 과연 소경이고, 누가 과연 죄인인가? 성경을 많이 알고 모세의 제자라고 자처하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예수님에 대해서 소경이요, 죄인인 것이다. 그러나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게 되고 예수님을 점점 깨달아 가고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게 된다.

 

9장에서는 세상에 빛이신 예수님이 등장했는데 이 빛은 씻음을 받고 볼 수 있는 빛이고, 자신은 눈을 뜨고 있다, 나는 훌륭한 사람이다, 나는 회개할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수록 볼 수 없는 빛인 것이다. 요한복음 처음부터 나오는 주제인 이 빛은 밝게 비추이므로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것 같지만 좀처럼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빛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두움 가운데 행하고 있고 성경을 들고 있고 성경을 배우고 있으면서 이 빛을 좀처럼 보지 못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숨겨져 있는 빛이기도 하다.

 

 

10장

10장에는 주제가 양과 목자와의 관계로 등장한다. 이것은 교회와 연관되는 주제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동체적이다. 그래서 나 개인만 아니고 넓은 하나님의 나라, 교회를 생각하면서 이 본문을 읽어야 할 것이다.

 

1-6:

목자이신 예수님을 설명한다. 예수님께서는 목자이시고 자신의 양을 알고, 자신의 양을 하나 하나 불러서 인도하시고,  앞서가신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나의 목자이시고 나는 그분의 양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예수님과 나와 항상 1:1로 만남이 있어야 되고, 항상 예수님이 나를 알고 있어야 되고, 나를 부르시고 나는 그 부름을 듣고 따라갈 수 있어야 된다. 우리 모두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시지만 예수님은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을 하나 하나 개별적으로 부르시고 인도하신다. 이것을 체험해야 된다. 무리 중에 앉아서 한꺼번에 휩쓸려 다니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있으면서도 나 하나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늘 들어야 한다. 이것이 모태 신앙을 가졌거나 교회 생활을 오래하다보면 그런 것을 잘 모르는 채로 체험없이 그냥 교회에 다니고 앉아 있을 수 있다. 나 자신을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침에 성경묵상시간이라든지, 기도시간이라든지, 매일 매일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나에게만 특별히 개별적으로 나의 문제점을 지적해 주시고, 나의 필요한 부분도 알려 주시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만에게 필요한 말씀이 전달되고 이해되어야만 한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부분이 내 생활 속에 잘 드러나면 나는 그의 양이지만, 나를 특별히 부르시는 지 잘 모르고, 내 삶을 개별적으로 인도하시는 지를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개별적인 접촉을 위한 훈련도 받아야 되고, 귀를 열어서 듣고자 하는 양이 되어야 할 것이다.

 

4-5:

예수님이 나를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하나 중요한 것은 아무 목소리는 듣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 목자인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를 부르는 음성을 잘 들으면 그런 일이 없는데 예수님이 직접 개별적으로 부르시는 음성을 듣는 훈련이 안되면 사람들에 의해서 사방으로 돌아다니게 된다. 이 집회도 가보고, 저 집회도 가보고 아무데나 다 다니면서 모두가 다 하나님의 목자인 것처럼 착각하고 방황하게 된다. 타인의 음성을 듣고 도망하여야 함에도 하지 못한다. 타인의 음성을 구별하지 못한다. 구별을 잘해야 한다. 처음에는 힘들지 모르지만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을 통해서 주님과 교제가 이루어졌으면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를 들으면서도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아니다라는 구분이 있어야 한다. 물론 지도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해가다가 때로는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하기도 하고, 때로는 잘못 설명하는 부분도 있다. 이 부분을 잘 구분해야 한다. 그런데 설교할 때마다 성경과 관계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이야기만 계속해서 하는 지도자는 내가 따라가야할 목자가 아닌 것이다. 도망을 쳐야 한다.(5절) 타인의 음성은 듣지 말고 도망을 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나를 지도하는 지도자가 성경 말씀을 늘 잘 가르치기 때문에 아주 좋은 지도자라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렇지만 사람이기 때문에 가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소리를 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런 말만 잘 걸러서 들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말만 하는 지도자라면 대책을 세워야 한다. 지도자를 바꾸든지, 내가 옮기든지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  

 

7:

이 교회의 문이 있는데 이 문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교회의 member로 들어갈 수 있다.

 

8-9: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는데 사람들은 많은 문으로 들어가려 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서만 이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야 된다고 함에도 사람들은 다른 문들을 찾아본다. 구원의 길은 여럿이 아니다. 요즘 한국에 유행하는 다원주의라는 잘못된 이론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어떤 길로 가든, 어떤 종교로 가든 구원의 길은 마찬가지이다."라는 말은 거짓이다. 문은 하나 밖에 없다.

 

10-15:

앞에서는 양과 목자라는 관계만 설명했는데 이번에는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와 구별해서 설명하고 있다. 삯군 목자는 어려운 일이 생기면 도망친다. 그러나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선한 분이시다.

 

14-15: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만큼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친밀해야 되고 서로 깊이 알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모르고 믿으면 우리의 믿음에 혼란이 온다. 잘 알고 믿어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예수님의 성품이나 예수님께서 좋아하는 것이나 예수님의 뜻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님이 어떤 방법으로 나를 인도해 가시고, 예수님이 목회하시는 교회는 어떤 형태의 교회라야 되는 지 이러한 여러가지 대해서 상당히 잘 알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갖고 성경을 상고하면 잘 알게 되어 있다. 이런 부분을 잘 모르면 삯군에게 끌려다닐 위험이 있다. 참목자되시고 선한 목자이신 주님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삯군은 도적질 하고 자기 이익을 챙기는 사람으로 설명하고 있다. 자기 이익이 있으면 일하고 자기 이익이 없으면 일하지 않는다. 자기의 세속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사람이 삯군이다. 목회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양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자기를 위해서인가? 양을 잘 보살피기 위해서 목회하시는 분은 좋은 목자이고 양을 착취하고 양에게서 자신의 이윤을 챙기고자 하는 사람은 삯군이다. 항상 교회를 위해서 양을 위해서 자기가 희생하고, 양보하고 교인들을 잘 양육시키는 분들은 좋은 지도자이다. 실수가 있고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별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참목자인지 아닌지는 분명해야 된다. 그리고 참목자는 진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방법대로 자신이 예수님을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의 뜻을 잘 알고 예수님의 방법대로 목회를 한다.

 

16:

지금 이미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아닌, 아직도 이 우리에 들어오지 않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전도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 일을 예수님이 행하신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에 대한 기쁨이 있어야 한다. 잃은 양 하나를 찾아오는 기쁨이 있어야 하는데 전도를 열심히 하면서도 실제로 양으로 들어와야 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도하는 것이 아니고 마치 삯군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 목회하는 것처럼 자기 이익을 위해서 전도해서는 안된다. 또한 전도한 사람이 성숙하여 교회에서 주체가 되는 것을 배아파해서도 안된다. 이렇게 자기 위치와 이익에 몹시 민감한 사람은 삯군 목자와 마찬가지로 삯군 양이다.

 

17-18: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스스로 내놓는 분이시다. 목숨을 내놓고 우리를 돌보시는 목자이시다. 그런데 이 목숨을 힘이 없어서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이 목숨을 보존할 권세와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기 목숨을 내놓으면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계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목숨을 내어놓고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길을 걸으면서 우리의 목자 노릇을 하신 분이시다. 우리도 이 계명을 받아서 따라야 한다.

 

여기서부터 죽음의 이야기가 주제로 등장한다. 10장에 와서 선한 목자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주제가 쭉 나온다. 그리고 11장, 12장에 가서도 이 죽음에 대한 주제가 계속해서 나온다. 앞에서 나왔던 생수, 생명의 떡, 영생이라는 그 주제가 죽음이라는 것과 연결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함께 다시 나에게 새로운 의미로 등장하기 때문에 잘 조화해서 규형있게 이해해야 한다.

 

22:

수전절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절기가 아니고 중간시대에 있었던 절기이다. 수전절은 수리아 왕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유대인들의 종교를 말살하려는 의도로 성전을 크게 더럽힌 사건이 있은 수 BC 165년 성전을 다시 회복하여 봉헌한 일을 기념하는 절기였다.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을 공격했을 때 약 8만 명의 유대인들이 죽었고, 성전 안 제단에서는 돼지를 잡아서 이방인들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다고 전해진다. 그 뒤 유다 마카비우스가 침략자들을 몰아냈는데, 이 일을 기념하여 절기가 제정된 것이다.

 

 

24-25:

실제로 마음을 열고 말씀을 들으면 아무리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라도 이해가 가능한데 기본적으로 마음이 열려 있지 않고 기본적으로 동기가 잘못되어 있으면 들리지 않는다. 교회에 나오면서 계속해서 지상에서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아무리 들어도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가 귀에 잘 들리지 않는다.                                                                               

 

26: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확실하게 더 깊이 배우지 않기 때문에 내 믿음이 확고하지 않고 내 삶이 확실히 변화되지 않는 것이다.

 

27-29:

자기 양에게만 영생을 준다. 그리고 그 구원은 아무도 빼앗지 못한다.

 

30-42:

 

 

11장

11장에는 여섯번째 표적이 나온다. 여섯번째 표적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표적이다.

 

1-2:

이 마리아는 12장에 나오는데 친절하게도 미리 저자가 설명을 하고 있다.

 

3-4: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과 비슷하게 이 나사로가 병든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5-7:

 

8-10:

아직은 예수님이 일할 시기인 낮이기에 아직은 예수님이 해침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11-12:

이런 구절들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잠드는가, 깨어 있는가 하는 논쟁을 신학자들이 많이 한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논쟁은 별 의미가 없다. 이 본문에서 '잠들었다'라는 말은 사실 잠들었던 것처럼 깨어날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실제로 영혼이 지금 잠을 자고 있는가, 깨어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고 깨어날 사람이라는 의미로 '잠들었다'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이다.  

 

13-16:

도마는 아직도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17-18:

 

20-21:

마르다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병자를 고치는 정도까지는 충분히 이해했는데 죽은 자를 살리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더 배우고, 더 배워야 하고 배운만큼 내 믿음이 더 커져가야 한다.

 

22:

지금이라도 예수님께서 살리실 수 있다는 고백은 아니다.

 

23-24:

 

 

25-26:

일차적으로는 이다음 부활이 아닌 현재의 부활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다음에 부활할 것을 신앙적으로 고백한다. 그러나 지금 살아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중생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미 새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이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이다음에 부활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생명을 누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본문을 마지막 날의 부활과 현재의 부활을 같이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27-31:

 

32:

마리아도 마르다와 똑같이 말한다. 이것이 보편적인 그들의 신앙수준이었다. 그러나 우리도 그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은 문제가 있다.

 

33-38:

여기서 주의할 점은 예수님께서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눈물을 흘리시더라'라는 말을 오해하면 안된다. 이 말씀들을 앞뒤 문맥을 잘 보지 않고 "예수님도 우리의 그러한 딱한 일들을 보면 눈물을 흘리신다. 예수님도 감정이 있으시고 예수님도 눈물이 많으신 분이시다."라고 해석을 한다. 물론 예수님도 그런 감정이 있으시고 동정심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닌 이유는 지금 예수님이 일부러 늦게 오셨고, 일부러 죽게 기다리셨다 죽은 지 나흘 만에 오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살려주기 위해서이다. 죽은 후에 뒤살려 주기 위해서 그래서 자신이 생명을 주는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서 일부러 늦게 오셨는데 왜 통분히 여기시고, 왜 눈물을 흘렸겠는가? 나사로가 죽어있는 것을 보고 기회를 놓쳐서 우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왜 울었는가?

 

33:

1) 아직도 생명과 부활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잘 온전히 믿지 못하는 그들을 보시고

2) 죽음 앞에 놓여 있는 초라한 슬픔에 잠기는 사람들이 딱해 보여서

결국은 제자들의, 무리들의 믿음에 대한 답답함과 예수님 자신을 무리들이 잘 모르는 답답함과 죽음 앞에 놓여 있는 이 사람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통분히 여겼을 것이다.

 

39-41:

예수님은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42:

예수님도 자기 아버지를 체험하시면서 아버지와 교제를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아버지 하나님을 우리의 기도 생활 속에서 체험해가야 한다. 부활은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43-44: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일부러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죽은 후에 오셔서 살리시면서 "나는 영생을 주러 왔다." "나는 생명의 빛이다." "나는 생명을 주는 선한 목자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와 같은 많은 말씀들을 실물 교훈을 통해서 생생하게 보여주시고 계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직접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성경의 정확한 기록을 통해서 현장에서 본 것 이상으로 확신을 가져야 한다.(20:31)

 

45:

물론 이 믿음도 점진적으로 자라가야 할 믿음인 것이다.

 

46:

반대로 고발하는 사람도 있었다.

 

47-48:  

"예수님을 이대로 가만히 두면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러면 로마 나라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 예수를 처형해야만 로마 나라가 지금 처럼 가만히 있을 것이다."

 

49-50:

"예수님을 바로 처형하면 간단하게 처리될 일이다." 이 발언으로 말미암아

 

53: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51-52:

자기는 자기식으로 말했지만 그 말은 예수님이 죽어서 많은 사람이,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예언한 것 밖에 되지 않았다. 원수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인기가 있던 예수님을 처형하면 끝나는 것으로 십자가 사건을 이해한 반면에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서 반대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한다.

 

 

54-57:

* 유월절의 의미

유월절은 출애굽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 분명한데 그러나 이 본문에는 '자기를 성결케 하기 위하여'라는 말이 나온다. 따라서 유월절은 성결케 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대하 30:17

백성들 중에서 성결케 하지 못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레위 사람들이 부정한 사람들을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았다.

 

고전 5:7-8

유월절은 음력으로 1월 14일인데 15일부터 일주일 동안은 누룩 넣지 않는 떡을 먹는 무교절을 지킨다. 이 무교절과 유월절은 밀착되어 있다. 무교절은 순결함을 설명하고 있다.

 

눅 22:14-18

유월절과 성찬식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성찬식은 희생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한다. 유월절에는 식탁에 온가족이 둘러 앉아 아버지가 축사하고 떡을 나누어 주었다. 마찬가지로 성찬식에서는 아버지 대신 예수님이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떡을 나누어 준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되심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성찬식은 고난주간의 유월절에 행하신 것이지만 그 다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성찬식을 하게 된다. 매주 안식후 첫 날인 부활하신 날에 성도들이 모이면 떡을 떼었다. 성찬식의 첫번째 의미는 죽음이지만 두번째 의미는 부활이다. 또한 영원한 하늘 나라의 잔치에 비유된다. 유월절은 성결케 하는 의식이고 성결케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2장

1-6:

 

7-8: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드린 이 사건을 예수님의 장사를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죽음의 주제가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부활장인 11장에서부터 시작해서 가야바의 말을 거쳐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장면까지 계속 한 사람 즉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주제가 흘러나온다. 이미 나사로를 부활시키면서 이 죽음은 살아날, 부활을 전제로 한 죽음임을 앞에서부터 미리 보여주셨던 것이다. 그런데 12절 이하 오면 명절에 온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는 장면이 나온다.

 

17-18:

무리들이 예수님을 환영함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표적 때문이었다.

 

19:

 

20-22:

 

23:

이 '영광'은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의미한다.

 

24:

이것이 11장에서부터 흘러왔던 중요한 주제이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죽어야 하는 것이다. 24절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갖는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부활의, 구원의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다.

 

25-26:

예수님께서 자기의 죽으심을 이야기하면서 이 죽으심을 우리에게까지 발전시키고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원래 한 알의 밀알은 우리가 아닌 예수님을 가리킨다. 그래서 "우리가 한 알의 밀알이 되자."라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 내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5절에 적용이 나온다. 구속사적인 해석과 함께 구속사적인 적용을 해야 한다. 24절의 말씀은 분명히 구속사적인 사건인데 25절 말씀은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와서 자기 생명을 내놓아야 한다는 말이다. 자기 생명을 예수님 앞에 내어놓고 예수님이 주시는 새생명을 받아야 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보고 한 알의 밀알이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되지만 그러나 한 알의 밀알이신 예수님을 소개하고 한 알의 밀알이신 예수님의 부활의 혜택을 다른 사람들이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때로는 우리의 생명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복음을 전하면서 순교할 수도 있어야 한다. 25절 말씀은 24절 말씀을 내게 적용하는 말씀인데 주의해야 할 것은 내가 예수님과 같은 대속주가 되거나 구세주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한 알의 밀알이란 말을 쓸 때 상당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27-30:

사도 요한은 겟세마네의 기도를 짧게 27절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민망한 고민을, 마음의 어려움을 잘 극복하시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신다. 이 기도 앞에 한 알의 밀알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셨다. 그래서 11장, 12장에서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자기를 부활시키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스스로 고백하시고 자신은 모든 사람을 위한 죽음의 길을 가신다. 아무리 하나님께 다시 부활시키실 것을 보증받았더라도 십자가의 길은 너무나 어려운 길이었다. 이 죽음은 단순한 생물학적인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영적인 죽음이었다.

 

31-32: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위로 다시 올라가는 부활의 고백을 하신다. 또한 우리의 부활과 승천을 약속하신다.

 

34-36:

지금 나를 믿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지금 복음을 들을 때에 믿음에 이르러야 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숨으셨다.

 

37:

표적을 보고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38-40:

"하나님께서 못보게 하셨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에 믿음에 이르지 못한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믿고 싶은 사람들의 길을 막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사야서를 다 읽기 전에 위와같이 말해서는 안된다. 이 구절을 인용할 때는 이사야서를 다 읽고 이해한 유대인들에게 한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사야서를 이해해야 한다. 이 구절은 이사야서 6장에 나온다(8-11).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실 때 한 말씀이다. 일반적 이사야서 6장을 전도의 사명으로 자주 인용한다. 우리가 소명을 말할 때 이사야서 6장을 읽으면서 착각하는 부분은 부르신 분이 말하라는 대로 전해야 하는데 부름은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말하면서 말은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름을 받을 때에 부르시는 분이 무엇이라고 말하면서 부르시는지, 어디로 가라고 하시는 지 잘 알아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백성들로 못듣게 하라고 말씀하셨는가?

1장 3-5절:

하나님께서 수없이, 수없이 손을 벌리셨지만 백성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듣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여러 번, 여러 번 자기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믿으라고 말씀하시고 표적들을 보여주셨지만 그래도 이들이 안믿는 이유는 마음이 딴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화가 나셔서 다시는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지 않겠다고 하셨다. 이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못알아보도록 하셨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고 처음에는 계속 기회를 주시고 계속 복음을 들려 주시는데 딴 욕심 때문에 딴 생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거역하면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손을 거두시고 기회를 빼앗아 가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신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로마서에서도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는 의미와 같은 의미이다. 바로에게 하나님이 기회를 여러 번 주셨다. 열 재앙을 통해서 계속해서 기회를 주셨지만 말을 듣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

 

41: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은 보지만 눈이 먼 사람은 보지 못한다. 눈이 멀다는 말은 마귀의 자식이기 때문에 세상 욕심에, 거짓된 욕심에 미혹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다.

 

42:

그러나 예수님을 죽이려는 무리 중에 믿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이들의 믿음은 아직도 상당히 어렸다. 그들은 드러나게 말하지 못했다.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43:

아직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다. 그 자리에 계속해서 있으면 구원이 아니다. 빨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믿음을 노출시켜야 한다.

 

44-50:

 

기도: 한 알의 밀알이 되셔서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버리시고 아버지의 명령을 순종하셔서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던 주님! 그 주님의 희생 때문에 저희들이 생명을 누리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외치신 주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하면서 저희들도 그 생명을 받아 누리기를 원합니다. 이미 우리 안에 부활의 은총을 주셨고 새생명을 주신 주님! 우리의 이 새생명이 영원히 보존되면 자라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지금까지 따라왔으며 계속해서 진리의 말씀을 듣고 빛가운데 인도받고 있는 것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저희들에게 계속해서 깨달음을 주시고 마음을 열어 주시고 우리의 귀와 눈을 뜨게 하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주님의 길을 따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도 내 목숨을 사랑하지 않고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주님의 길을 함께 걷는 저희들이 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영생의 부활의 생명을 주셨사오니 땅의 것에 집착하지 않고 연연해 하지 않고 저희들로 하여금 내 목숨까지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데까지 내 믿음이 자라게 하시고 더욱 더 빛가운데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게 하시옵소서. 사람의 영광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봄으로 용감하고 담대하게 믿음을 고백하고 주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13장에서 17장까지의 내용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나오지 않고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13장

1:

유월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하루 전날이다.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박히셨는데 목요일이 유월절이었다. 이 유월절은 유대 성력으로 1월 14일이다. 양력을 사용함으로 원래 사용하던 음력에서 약 3개월 정도가 뒤로 밀려났다. 영어의 March(3월)라는 달은 원래 1월이었다. October는 본래 8월인데 10월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1월 14일이 양력으로 바뀌면서 3월 내지 4월 초로 밀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유월절은 1월 14일이기 때문에 만월 전날이었다. 만월 전날 유월절을 지키고 만월 되던 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다음날 무덤에 계시다가 주일날 부활하셨다. 공생애 기간 중 네번째 유월절을 맞으신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이어서 성찬식을 거행하시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여러가지 교훈을 주신 내용이 나온다.

 

하루 후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하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자기 제자들을 챙기셔야되는, 보호하셔야 되는 긴박한 사정에 놓였다. 그것은 바로 2절에 나온 것처럼 마귀는 마귀대로 최후 발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로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기 때문에 사탄이 긴장했다. 빨리 이것을 수습하지 않으면 자기의 모든 권한을 빼길 것 같아 서둘러서 예수님을 처리하려고 예수님의 12 제자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를 유혹했다. 그 유혹에 가룟 유다가 넘어가서 예수님을 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가룟 유다가 평상시에도 돈에 대한 관심이 너무 많이 있었고 회계를 맡으면서도 돈을 항상 유용하고, 훔쳐서 사용하기도 하는 그런 약점을 갖고 있었는데 사탄이 그 약점을 이용함으로 돈에 대한 욕심을 이용해서 유다가 예수님을 팔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팔게되는 그런 기회를 잘 포착하는 나쁜 습관을 갖기 쉽다. 정상적으로 살아야 하는데 정상적이 아니고 잠간 사이에 큰 돈을 번다든지 잠간 사이에 누구의 도움으로 진급을 한다든지, 잠간 사이에 특이한 혜택을 받으려는 기회를 잘 포착하는 것이 기회인 것처럼 착각을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여유있게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때에 마치 야곱처럼 어머니와 짜고 자기에게 돌아올 기업이 형에게로 돌아갈 것이라는 위기 의식을 갖고 꾀를 부리는 그런 꾀를 부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가룟 유다가 마귀의 유혹을 받고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갖고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하는데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자기 제자들을 보호하셔야 될 긴박한 생각을 예수님은 하셨다. 예수님과 사탄과의 대결 장면이 나타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이런 내용이 13장 끝까지 흘러간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을 다 알고 계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포기하셨다. 포기하는 이유는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가룟 유다를 구원하라는 지시를 받은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17:11-12)

 

예수님의 강력한 사랑의 의지가 우리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6:37) 예수님의 강력한 사랑의 의지와 주권적인 사역이 우리를 구원한 것이다. 우리를 불러 내는 것만이 아니고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책임지시고 처리하시는 부분이 13장 1절에서 잘 드러나 있다. 그러한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지속성(구원의 내구성)의 다른 면에는 사탄의 맹렬한 공작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내가 내 구원을 이루어가기 위해서 예수님의 특별한 보살핌이 없으면 내 구원은 확보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되고, 바로 이 예수님의 사랑과 노력 때문에 나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의 확신이란 말을 쓸 때 바로 이러한 끝까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그런 예수님의 사랑의 행동이 내 구원의 보장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그의 손에 달린 것이지 내가 결심을 잘 한다고 해서 내 믿음이 좋다고 해서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문제는 예수님이 나를 끝까지 사랑하시는가 아니냐, 즉 내가 가룟 유다 쪽이냐 아니냐가 심각하게 남아있는 문제인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보장은 분명한데 내가 거기에 해당되는가 아닌가 하는 아무도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실제로 예수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는 모습을 보고 느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을 체험해야 되고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 때문에 내가 변화되어 가고 있고 내가 확보되어 가고 있는 것을 늘 내 삶 속에서 내가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저녁을 잡수시다가 일어나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했다.(4-5) 그 때에 시몬 베드로가 황송하여 사양했다.(6)

 

7:

제자들은 아직까지 예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나, 유다가 마귀에게 유혹받고 있다는 사실이나, 자신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나간 일이기 때문에 알지만 그 때 제자들은 알 지 못했다. 또 예수님이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딴 생각을 늘 했기 때문에 그 예수님이 민감하게 말씀하시고 처리하시는 행동을 잘 파악하지 못했다.(겟세마네에서 잠든 제자들)

 

8-10:

수십 년 전 우리 한국에 자유주의 신신학이 처음 들어 올 때에 꽤 많은 목사님이나 신학자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였다. 그 내용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우리의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과연 믿을 수 있는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 때부터 예수님의 부활은 실제로 부활한 것으로 말하지 않고 예수님이 죽은 후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살았을 때의 모습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부활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그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제자들이 늦게나마 본받고 실천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부활이다라고 그들은 말했다. 한국의 신학교 안에는 이러한 것을 부활로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이 세력이 상당히 크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안믿는 사람들이 좋아한다. 또한 믿어도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엉터리 신자들이 이러한 설명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이 아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이 들어오자 일반 교회에서는 긴장하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시거나 삶만 보여주시고 돌아가신 분이 아니다라고 반박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시지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두가지의 견해 때문에 13장에 대한 해석이 두 갈래로 완전히 나누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씻는다' '목욕한다'라는 말은 우리의 죄를 씻는다는 말이고 우리가 구속을 받는다는 뜻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그러나

 

12-15:

본을 보였다는 말씀이 분명히 나온다. 이 해석, 예수님이 직접 설명해주신 설명 때문에 자유주의자들의 말에 맞는 부분도 있다. 이 해석을 예수님께서 직접 하셨기 때문에 이 해석을 거절하면 안된다. 그러나 자유주의 자들은 이 부분을 강조하고 예수님의 구속을 무시함으로 두 개의 진영이 지금까지 서로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10: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해석): 원죄를 씻음 받았다는 뜻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의 근본되는 문제를, 죄의 핵심되는 부분을 다 제거하셨다. 근본적으로 나의 원죄는 없어지고 나는 죄사함을 받았다. 그 후에는 내가 살아가면서 짓는 사소한 죄들이 있는데 마치 발에 먼지가 올라오듯이, 그것은 바로 그때 그때 발을 씻으면 되는 것이다. 그때 그때 회개하고 용서받으면 되는 것이고 근본적인 죄사함은 십자가 사건에서 목욕하듯이 씻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위와 같이 해석하기로 단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왜냐하면 아직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역을 이루시기 전인데 '이미 목욕한 자'를 죄사함 받은 자로 단정지을 수 있겠는가? 언제 목욕을 했는가? 언제 예수님이 우리의 원죄를 사했는가? 성경 어디에서도 십자가 사건은 원죄만을 처리하고 그 나머지 죄는 회개하면서 용서받아야 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본문을 잘 읽어보면 그런 뜻이 아니고 "나와 네가 관계가 있으므로 너를 챙기는 것이다. 나는 너를 지금 보호해야 되고, 나는 너를 끝까지 사랑해서 마귀의 미혹을 받지 않게 해야 된다. 너는 나를 끝까지 따라와야 한다. 그래서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네 발을 씻기고 있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물론 이 구절은 구속사건과도 관계가 있다.('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이 발을 씻기는 것은 결례의식이다. 이 결례의식은 11장의 유월절과 관계가 있다. 유월절은 성결케 하는 의식이다. 이것은 물과 성령으로 우리가 씻음받고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주제의 연속인 것이다. 요한복음의 중요한 주제인 결례의식이 13장에서는 발을 씻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죄를 사함받고 씻김을 받는다는 말은 내 마음의 생각과 자세가 바뀌는 것이다. 내 안에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죄를 나와 분리시켜서 이해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래서 이 발을 씻기는 결례의식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될 것은  

 

1) 죄 문제를 별도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고 내 자신이, 내 마음 자체가 내 자아가 근본적으로 치유되고 변화되는, 내 안에 있는 생각 자체가 바로잡히는, 내 안에 있는 모든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 올바르게 하나님 중심적으로 바뀌는 이러한 가치관의 변화를 씻김이라고 하고 결례의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2) 12절 이하에 나왔던 '본을 보이라'는 부분을 주의해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이 설명하는 설명 자체에는 문제가 있지만 그러나 성경에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서 서로 발을 씻겨야 된다. 서로 발을 씻기지 않으면 나는 주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발을 씻김도 받아야 되지만 나도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야 된다. 이 13장 끝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34-35) 발을 씻기는 사랑의 행동이 내게 나타나지 않으면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제자는 누구인가? 제자는 지도자 훈련을 받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제자는 배우는 사람이다. 예수님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을 제자라 하지 남을 가르치는 사람을 제자라 하지 않는다. 물론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남을 가르쳐야 되고,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따르는 자가 제자인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다. 제자라는 말은 신자라는 말이고 제자가 아니라는 말은 신자가 아니라는 의미인 것이다. 신자는 보편적인 의미이고 제자는 특별한 의미가 아닌 것이다. 모든 신자를 성경에서는 제자라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가 못된다는 것은 구원을 못받는다는 뜻이 된다.

 

* 요일 3:13-14

 

결론: 13장의 내용은 구속사역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데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을 받고 그리스도에게서 발씻김을 받는 관계를 가진 나는 그리스도를 따라서 남의 발을 씻어야 되고 만일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는 구원받을 수 없다라고 이해해야 한다. "나는 예수님을 믿지만 다른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구원받을 수 없다. 물론 믿음에다 사랑을 더해야만 구원얻는 것은 아니다. 믿음도 반쪽이고 사랑도 반쪽이다라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는다는 말은 예수님 안에 들어와서 내가 구원받으면서 동시에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형제들과 서로 사랑을 나누어야 된다는 말이다. 다르게 말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은 그 죄가 사함받고 마음이 바뀌는 것이다. 마음이 바뀐다는 것은 남을 미워하고 경쟁하던 이기적인 생각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남을 사랑하도록 되어 있지 않으면 믿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도 있고 사랑도 있어야 된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 자체는 바로 사랑이 포함된 것이다. 이 둘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은 이 가룟 유다가 자기를 팔 자인 줄 아셨다. 그래서 18절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도 제자들이 못 알아들었기 때문에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셨다.(21)

 

22-30:

 

31:

12장까지는 여섯 개의 표적이 중심이 된 많은 설명들이 나오고 13장 부터는 영광이라는 큰 주제가 등장한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라는 이 표현 중에서 우리가 놓치지 않고 기억해야 할 부분은 적어도 이 13장에서만은, 이 요한복음에서만은 바로 십자가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죽으심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어떻게 십자가가 영광인가? 하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타락하고 범죄해서 내 마음대로 사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와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을 죄라고 말하고 타락이라고 말한다.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은 자아를 죽이고, 자아를 부정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자기를 부정하고 순종하는 것에 절정이 십자가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실제로 십자가를 지시면서 아버지에게 전폭적으로 순종하셨고, 순종함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우리보고 그 순종함을 따라오라고 하셨다. 바로 그 십자가라는 순종이 하나님께는 가장 기쁜 부분이었다. "아, 이제야 네가 네 자신을 부정하고 나에게 순종하는구나. 이제야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는구나" 하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 자체는 하나님 나라 형성에 있어서, 구원 사역에 있어서 핵심되는 부분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께는 어떻게 십자가가 영광인 것인가?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복종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면서 동시에 예수를 믿고 따라올 하나님을 거역했던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자기를 부정하고 아버지께로 순종하며 돌아오는 행동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으로서는 매우 영광스러운 사건인 것이다. 즉 우리 모두가 예수님께 복종하는 행동이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담겨져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는 십자가가 영광인 것이다. 그래서 이 십자가와 영광은 반대되는 개념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같이 얽혀있는 부분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착각을 한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이 어려운 고비를 지나가게 해 주십시요. 하나님, 이 고난이 지나가고 밝은 날을 주십시요.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해 주십시요."라고 착각한다. 고난 자체가 좋지 않은 것처럼 이해하려 한다. 평화로워지는 것이 영광인 것처럼 생각한다. 또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면 우리 모두가 다 왕이 되는데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이 예수님처럼 섬기는 자가 되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왕이 되면 섬김을 받는 것으로 잘못 이해한다. 서로를 섬겨주는 왕의 모습이 천국에서의 왕의 모습이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광이란 부분은 내가 나를 부정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와서 순종하는 것에 이 영광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영광스러운 나의 모습이고, 영광스러운 신부의 모습이며, 영광스러운 교회의 모습이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 사건을 굉장히 영광스러운 사건으로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내가 짓밟히고, 내가 치이고, 내가 미움받고, 박해받으면서 자아가 깨어지고 자아가 없어지는 그래서 하나님이 내 안에 강하게 거대하게 영광스럽게 등장하는 것이 바로 나에게는 굉장한 영광이라고 인식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만 높아지려하고 자꾸만 세상적인 영광을 기대하기 위해서 참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욕심이 많아지고 또 경쟁해야 되고 또 다른 사람과 다투게 되는 것이다.

 

32-33:

 

34-35:

영광이란 주제에서 사랑이란 주제로 넘어간다. 이 사랑과 영광과의 관계는 밀착되어 있다. 자기 부정이 있고, 순종이 있을 때에 사랑이 가능해진다.

 

36-38:

 

 

14장

2:

14장의 주제는 '하나님의 처소'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어서 하나님의 집이 마련될 때에 한 가족이 되어서 한 분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한 분 예수님이 우리의 남편도 되시고 형님도 되신다. 그래서 우리가 다 한 가족이 되어서 산다. 같이 함께 살아야지 각자가 자기 문패를 걸고 자기가 호주가 되어 살지는 않는다. 천국 가는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 만나러, 하나님과 함께 살러 가는 것이지 지상에서의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다. 천국에서도 끼리 끼리 살지는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족관계를 없애버리셨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내 가족을 다시 만나서 살지 않는다.(그것이 섭섭한 사람은 천국에 오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 나라의 가족은 하나님이 아버지시고 우리 모두가 가족이다. 모두가 한 가족이다. 세상에서는 서로 싸우거나 마음이 맞지 않아 분가해서 산다. 서로의 가치관이 다르고, 서로의 생각이 달라서 서로 떨어져 살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모두가 한 가족이 된다. 완성된 천국에서는 내 집 울타리도 없고 벽도 없다. 하나님 나라에서 집이란 아무 의미가 없다. 현재적인 집의 개념은 필요가 없다. 내 아버지의 집은 거할 곳이 많기에 수 백만의 구원받은 백성들이 다 거해도 좁지 않다.

 

3:

집이 모자라서 집을 새로 짓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4-6: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은데 문제는 가야할 길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길이 되어 주기 전에는 아버지의 집에 갈 수가 없다.

 

7-9:

 

10:

 

16-17:

 

18-20:

앞에서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말은 바로 성령님이 내 안에 오시게 하고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23:

3분 하나님이 내게 오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자신의 처소로 만드시고 싶은데 내 처소가, 하나님을 모실 내가 하나님을 모실 처소가 못되고 있다. 예수님께서 구속사역을 통해서 나를 정결케 하셔서 하나님이 내 안에 오실 수 있게 하고 내가 하나님 안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일을 준비하러 가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십자가를 지고 우리들의 죄를 정결케 하러 간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전체의 주제인데 주의해서 읽을 구절이 몇 군데 있다.

 

20-21:

아버지 안에, 예수님 안에 들어가는 사람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랑한다는 말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자이다. 예수님과 관계가 있어서 예수님이 내 발을 씻기시고 내가 정결함을 받고 그래서 아버지가 내 안에 거하실 수 있는 그런 처소로 바뀐다는 말은 내가 이제 예수님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말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므로 서로의 발을 씻겨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아버지 안에 들어가게 되고 예수님이 그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안되면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실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정결함을 받는다는 말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과 계명을 지키고 서로 발을 씻긴다는 말은 바로 내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간다는 말이고, 하나님 안에 들어가고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신다는 뜻이다. 이 모든 것은 서로 얽혀있다. 얽혀있는 것을 따로 떼어서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이 일을 위해서 성령님을 보내주셨다.

 

17: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다.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뜻이다.

 

25-26:

 

27:

우리는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평안을 가져야 하며,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역경과 곤경과 어려움 속에서 불행해 보이는 속에서 사실은 행복해야 한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평안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전혀 세상 것으로는 누릴 수 없는 다른 차원의 평안이다. 이것을 못누리고 있다면 아직 나는 하늘에 속한 자가 아니고, 거듭난 자가 아니다. 대부분의 간증자들이 세상이 주는 평안을 간증한다.

 

28-30:

이것이 예수님이 갖고 있는 평안이다. 내일이면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붙잡혀 가시지만 평안이 있었다.

 

31:

 

13-15:

서로 사랑하면서 기도하는 기도는 들어주신다. "하나님! 우리 아이가 저 집 아이보다 공부를 더 잘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그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저 집 아이는 참 불쌍합니다. 공부라도 잘 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마음의 자세가 되지 않으면 나는 계명을 지키는 자가 아니고, 그렇지 않고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 자신은 계명을 하나도 지키지 않고 이기주의자가 되어서 열심히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다면 아무 의미없는 기도가 되는 것이다. 전후 문맥을 살피지 않고 13절 한 구절만 읽고 자기 뜻대로 기도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14장 전체는 내가 아버지 집에 거하고 아버지가 내 안에 거하는 상황에서 서로 사랑하면서 기도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거기에 성령님이 보혜사로 와 계시고 그때에 나에게 평안이 주어지는 것이지 그런 것이 아니면 평안도 없고, 기도응답도 없고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시지도 않는다. 이것을 하지 않는 존재는 가룟 유다와 같은 존재이다. 돈을 사랑하고 자기 실속을 챙기는 사랑의 계명을 어기는 존재이다.

 

 

 

15장

1:

15장의 주제는 포도나무 비유이다. 포도나무 비유는 14장에서 다루었던 처소의 주제가 연결되는 것이다. 이 포도나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의 배경을 살피고자 한다.

 

시 80:8-19

이스라엘 국가를 포도나무로 비유하고 있다. 이 포도나무에 문제가 생겼다. 이웃나라에 짓밟히고 결실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사 5:1-3

 

렘 2:21-22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나라를 포도나무로 항상 비유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땅에 포도나무가 주농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알기 쉬운 포도나무를 이스라엘에 비유하면서 계속 교훈해 가시는데 요한복음 15장에 와서는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하면서 주제가 구약에서보다 상당히 발전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나라를 포도나무라 했는데 여기서는 예수님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자로서 바로 이스라엘과 한 공동체가 되어서 한 운명을 가지시고 등장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라 하신다.

 

2:

일부는 잘라 내시고, 일부는 깨끗케 하신다.

 

3-5:

이 본문에서 몇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깨끗하게 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한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말씀으로 중생한다는 것과 말씀으로 정결케 한다는 것이었다.

* 엡 5:25-26

물로 씻는다는 말과 말씀으로 깨끗하게 한다는 말과 서로 붙어 있다. 물세례의 의미와 말씀으로 정결케 한다는 말씀중생의 의미가 함께 있다. 사실 이것은 같은 의미이다.

 

앞의 13장에서 물로 발을 씻겨주는 이야기나, 14장에 나오는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이야기나, 15장에 말로 깨끗하게 해서 열매를 많이 맺게 한다는 이야기나 모두가 같은 이야기이다. 같은 이야기인데 이렇게 설명하시고 저렇게 설명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좀더 입체적으로 충분히 이해하도록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 모든 이야기들이 같은 주제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말씀으로 깨끗하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이 주신 새계명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러한 변화는 내가 예수님 안에 붙어 있을 때에 가능하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을 때에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렇다면 열매는 무엇인가? 주제별로 공부하면 이 본문을 갑자기 벗어나서 세례 요한이 말한 회개의 열매, 사도 바울이 말한 성령의 열매, 전도의 열매 등으로 비약해 버린다. 물론 그런 것이 포함될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 이 글에서 설명하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7-14:

여기서 말하는 열매는 사랑이요,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은 앞의 14장에서 공부했던 내용과 동일하다. 사랑해야 되고, 계명을 지켜야 되고, 그 때에 누리는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이같은 설명이 15장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14장에서는 예수님이 하실 역할을 좀더 강조했는가 하면 15장에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더 강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같은 주제이다.

 

12-13: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것처럼 우리도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어야 참된 사랑이다. 부담스럽고 어려운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의 훈련을 받고 관계의 훈련을 받으면 가능해진다. 그러나 관계의 훈련을 잘못 받기 때문에 잘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릴 때부터 빨리 받을 수록 훨씬 쉬워진다. 어머니와 그의 자식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사랑의 관계를 맺고 지내왔기 때문에 어머니가 자식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가능한 이야기이다. 즉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잘 이루어지면 목숨도 내놓을 수 있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하다. 이 훈련은 사랑의 관계를 맺는 훈련이다.

 

18-19:

우리가 13장에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을 공부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사탄이 자기의 사람들을 빼앗아 가면 안되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는 이미 예수님께서 내놓은 사람이지만 그러나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은 범죄하고 도망치고 부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끝까지 따라가셔서, 갈릴리 바다까지 좇아가셔서 불러 오셨다. 그래서 11명을 다 건지셨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우리를 좋아한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입어 사망으로부터 나와서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면 도리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 세상에서 미움을 받지 않으면 나의 소속이 불투명한 것이다. 요즘은 기독교 시대이므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미움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굉장히 그리스도인들이 미움을 많이 받는 시대이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한다. 자기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와 같이 타협하지 않기 때문에 미워한다. 참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소속되면 안되고 나와서 구별되게 살아야 한다. 그 구별된 삶을 세상 사람들이 싫어하고 미워하며 또한 세속적인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참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한다. "왜 당신만 별스럽게 믿는가? 나도 교회에서 제직이다." 이러한 미움과 박해를 받아야만 내 소속이 분명하다. 물론 내가 나쁜 짓을 해서 미움을 받는 것과는 구별해야 한다. 내가 잘못을 해서 고난 받는 것과는 구별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도 따라가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불편하게 살아야 정상이다. 너무 세상 사람들의 눈치를 보아서는 안된다. 모든 것이 달라야 한다. 집을 갖고 사는 모습도 달라야 되고, 옷을 입는 것도 달라야 하고, 돈쓰는 것도 달라야 하고, 좋아하는 취미 생활도 달라야 하고, 친구 관계도 달라야 한다. 세상 친구들과 연결이 잘 안되고 그래서 세상 친구들이 날 보고 동창회 나오지 않는다고 뭐라고 하면서 싫어하고, 직장에서 모임에 참석하면 나만 항상 따돌림 당하고 "너는 왜 그렇게 별스럽냐? 그렇게 해서 어떻게 이세상을 살아갈 수 있느냐?"하는 말을 항상 듣는 것이 정상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대해서 상당히 비협조적이며 세상과 다르게 살고, 가치관이 다르고, 항상 의견대립이 있고, 항상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집에서 쉬라는 말은 아니다. 투쟁하면서 살아야 한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포도나무 비유에서 깨끗케 한다는 말과 관계가 있다. 세상과 타협하고 살 사람은 하나님이 잘라내시겠다는 말이다. 그 가지 때문에 포도나무에 문제가 생기고 열매가 제대로 맺지 못한다. 이것이 지금 한국 교회의 모습이다. 한국 교회는 지금 전지를 해야 하는데 이 전지를 다하고 나면 무엇이 남을 것인지 모를 만큼 잘못된 가지가 한국 교회에 널리 퍼져 있다.

 

20-22:

 

 

26-27:

성령님에 대해서 15장, 16장에 많이 나오는데 과연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성령님이 하시는 가장 주된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증거하시는 일이다. 자신이 성령을 받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훨씬 더 잘 아는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다. 아무리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며 성령을 받았다고 떠들어도 예수님을 잘 모르는 사람은 성령을 받았다고 쉽게 말할 수 없다.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16장

1-3: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제자들을 미워하며 박해하면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착각한다. 마치 아주 좁게 편협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을 이 세상에서 넓게 처신을 잘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편협되게 신앙생활 하는 신자를 보고 "독선적이다. 별스럽다. 분리주의자다. 이런 사람은 몰아내야 한다. 이것은 참교회가 아니다. 참교회는 세상에 공헌을 해야 되고 참교회는 세상을 도와야 되고 세상과 화목을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런 설명은 말이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맞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 사탄의 세력과 대결한 상태에서 설명하고 있고 자신의 백성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아야 된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지 않다. 교회는 세상에서 나와서 따로 있도록 세상을 피해서 세워진 것이 교회이지 세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따로 세워진 이후에 세상에 빛을 비추어 교회에 오도록 하는 일은 세상을 향해서 해야되는 일이지만 세상을 그대로 두고 그 세상을 돕기 위해서 교회가 세상 속으로 발벗고 들어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구제에 있어서도 전도해서 데려오기 위해서 구제를 해야지 전도와 아무 관계없는 구제는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헌금해서 무엇 때문에 세상을 도와야 하는가? 성경 어디에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있는가? 물론 이웃이 어려우면 도와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평범한 행동이지 의무적인 것은 아닌 것이다.

 

성령님께서 오셔서 진리에 대해서, 바른 길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미움을 받으시고 처형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신다.

 

7-8:

 

9: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증거해 주었는데 세상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된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10: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나라의 왕으로 오르시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을 성령께서 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 한다. 예수님을 왕으로 받아들이면 의가 되고 예수님을 거절하면 죄가 되는 것을 성령님이 밝히신다. 이것이 분명해지면 나는 성령님을 받은 사람이다. 이것이 분명하지 않으면서 은사를 받았다고 성령충만을 받았다고 말하면 그것은 착각이다. 별다른 은사는 없어도 이것이 확실하면 성령님을 참으로 받은 사람이다.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것이 가장 큰 은사이다.

 

11: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왕권을 가지시면 지금까지 자기가 왕인 것처럼 처신했던 사탄이 심판을 받는다.

 

12-13:

기본적인 것이 확실히 깨달아지고 믿음에 이르면 나는 성령을 받은 사람인 것이다. 성령을 받은 표는 아주 간단하다. 예수님을 참으로 주로 시인하면 성령을 받은 것이다. 말이 아닌 실제로 주로 시인해야 되고, 실제로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해야 되고, 실제로 세상의 왕을 따르지 않으면 성령을 받은 사람이다.

 

14- :

 

33:

예수님은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그대로 받으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면서 승리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마귀를 이기신 것은 물리적인, 무력적인 힘으로 이긴 것이 결코 아니다. 투표를 해서 이기는 것도 아니고 여론을 동원해서 이기는 것도 아니고 교회가 많아지고 교인이 많아져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여의도 대집회를 통해서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 교인 수가 많아지니까 한국 사회를 뒤집어엎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예수님은 전혀 그런 물리적인 행사를 하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다. 이것은 세상의 미혹을 전혀 받지 않고 세상과 전혀 야합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셨다는 말이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기 때문에 미움을 받고 세상에서 버림을 받고 세상에서 처형되는 것이 승리의 길이다. 세상에서 바보 취급받고, 때로는 직장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가족에게서 쫓겨나기도 하고, 이 세상에서 처신하기가 불편하게 되고 그래서 완전히 버림받은 사람처럼 되는 모습이 승리의 삶이다. 물론 이것은 내가 잘못하거나 내가 지혜롭지 못해서가 아니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 때문에,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고난이고 박해인 것이다.

 

 

17장

예수님의 기도의 가장 대표적인 기도가 바로 이 요한복음 17장이다. 우리가 늘 암송하고 있는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하라고 가르쳐주신 기도이고 이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스스로 하신 기도이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하셨던 일들과 또 예수님께서 원하는 소원의 내용을 정리하면 아마 요한복음의 주제가 더 잘 살아나리라 생각된다.

 

1:

여기서의 '때'는 영광을 누릴 때를 말하는 것이다. 이 영광은 십자가와 관계된다고 앞에서 살폈다.

 

2:

영생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아들에게 위임한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 아들에게 특별한 권한을 주셨다. 그것은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권위)이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은 결국 그들을 구원해서 영생하게 하는 권위이기도 하고, 그 영생을 주는 자체가 다스림이기도 하며, 또 다르게 말하면 순종하게 만든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영생이란 말과 다스린다라는 말은 아주 가까운 내용이다. 권세를 받아오신 예수님을 아버지를 섬기듯이 대하여 섬기는 것이 영생이다.

 

3:

그 예수님의, 아버지의 다스림을 받는, 아버지께 복종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잘 알아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 안다는 말은 신학자들이 말하듯이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도 보아야 되지만 꼭 그렇게까지 설명하지 않더라도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서 잘 알지 않고는 그 분을 신뢰하거나 따르거나 복종할 수 없고, 그 분을 따르고 복종할 때에 드디어 영생을 누리기 때문에 영생과 아는 것과는 긴밀한 관계가 있다. 내가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잘 모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잘 알면 확실해지고, 확실해지면 내가 자연히 따라가게 되는데 잘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은 아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요일 5:19-20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잘 알려 주셨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는 말씀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모르면 예수님이 소개하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배워가기 어렵다. 이 요한복음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보았을 때 제자들이 계속해서 확실한 믿음에 이르지 못하고 영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을 그들에게 확실하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이 아무리 설명해도 그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이면에는 예수님을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온전히 이해하게 된 후에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이 설명하신 아버지도 믿게 된다.

 

참된 앎을 통해서 올바른 관계와 교제가 이루어진다. 우리는 잘 알아야 하기 때문에 성경공부를 충실히 해야 되고, 성경공부가 아닌 다른 여러 가지로 아는 것은 확실한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서 확실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회의가 없어진다. 대게 일반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존재를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다른 여러 가지 논리가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은 정확하지가 않다. 끝에가면 또 함정이 있고 또 함정이 있다. 기독교 변증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정답을 주지 못한다. 가장 정확한 유일한 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적으로 계신 분이기 때문에 쉽게 믿을 수 있다. 예수님이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 지방에 사셨고 십자가에 처형되셨다는 것까지는 다 믿는다. 거기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까지를 확실하게 믿게 되면 그 분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기는 쉬워진다. 아들의 존재를 확실히 믿으면 그 분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믿는 것이 선결되어야만 아버지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생길 수 있다.

 

4-5: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하라고 하신 일을 다 이루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공부했던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이 구원하라고 맡기신 사람들을 구원해 가는, 영생을 주는 일을 행하셨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고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도 아들에게 영광을 주어 하나님 우편에서 하나님 나라의 왕위에 오르실 것을 기도하는 내용이다.

 

6:

원래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사람들인데 예수님에게 주셨고, 예수님이 그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을 잘 설명해서 그들이 아버지를 알게 되었고, 이제는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믿는 것과 순종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믿고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잘 아는 것과 관계가 있다. 아버지의 선택이 먼저 있고, 선택된 자를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아버지를 소개해서 아버지를 믿게 한다는 이야기이다.

 

7-8:

이제는 반대로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분인 줄을 믿게 한다는 내용이다.

 

9: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 아니고 선택받은 자들만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시지 않고 아버지께서 선택해서 맡긴 사람들만을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선택이 먼저 있는 것이다. 선택이란 말은 인간을 창조해놓고 무조건 어떤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도록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셨지만 사람들이 한 사람도 예외없이 모두가 다 하나님을 떠나 버렸기 때문에 떠나간 사람을 방치하면 모두가 구원받지 못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구원하기 위해서 구원사역을 행하셨다. 즉 구원이란 말은 이미 하나님을 떠난 것을 전제하고 있다. 떠나갔기 때문에 다시 데려오는 것을 구원이라 말한다. 떠나간 사람을 데려오는 구원사역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시지 않고 선별적으로, 선택해서 하셨다. 선택받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아버지가 싫어서 떠나갔기 때문에 선택받지 않은 것에 대해서 아무런 불평도 할 필요가 없고 또 사실 불평하지도 않는다. 자기 스스로 떠나갔기 때문에 선택되지 않은데 대해서, 구원받지 않은데 대해서 아무런 불평도 없다. 그래서 "나는 구원받고 싶고, 돌아오고 싶은데 선택이 안되어서 구원을 못받는다."라는 것은 거짓말이다. 어쨌든 선택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10:

결국 아버지께서 선택하신 사람이 예수님의 것이다.

 

11:

예수님 자신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돌아갈 때가 되었기에 세상에 그대로 남아있게 될 아버지의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보전하고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나라는 개별적인 것이 아니고 공동체적인 것이기 때문에 서로가 얽혀서 함께 살게 되므로 한마음이 되어야 한다. 한마음이 되지 않은 사람은 아직도 구원에 이르지 않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12:

 

13-14:

13절에서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갖는 기쁨을 우리도 충만히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이 기도의 배경이 14절에 나온다. 아버지의 말씀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우리는 아버지께 순종하며 살아야 되고 아버지께 소속되어야 한다. 그렇게 살다보면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고 세상과 소속이 다른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미워하기 때문에 세상의 미움을 받을 때에 아버지께서 주시는 그러한 기쁨을 충만히 갖게 해달라는 것이 예수님의 기도이다. 우리는 두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려야 하는데 이 기쁨은 세상이 미워하는 속에서의 기쁨인 것이다.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고 누리는 기쁨은 예수님이 주신 기쁨인지 아닌지 점검해야 할 문제가 있다.

 

15:

세상이 미워하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데려가시면 참 좋겠는데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데려가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고 세상에는 그대로 있지만, 세상에 속해 살지만, 세상 안에서 살고 있지만 그러나 세상을 따라 가지 않고, 악에 빠지지 않고, 항상 구별되게 살도록 기도하셨다. 우리는 겉으로 보면 세상 안에서 사는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세상과 떨어져서 사는 것이고, 구별되게 사는 것이라는 점을 잘 이해해야 한다. 세상으로부터 나갈 수는 없지만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고방식에 휩쓸리지 않는,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전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16-17:

여기에 거룩하게 한다는 말은 구별한다, 성별한다라는 뜻이다. 즉 이세상에 살고는 있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세상에서 구별된 거룩한 자로 살아야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구별되어 사는 것인가?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진리의 말씀을 따라 가는 것이 진리를 따라오지 않는 세상과 구별되는 것이기 때문에 구별된다는 것은 말씀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성경 말씀을 잘 알지 못하면 구별되지 못한다. 성경의 가르침과 세상의 가르침이 비슷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은 세상과 구별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설교를 들을 때에 세상의 가치관과 완전히 다른 성경의 가르침을 잘 배워야지 비슷하게 배우면 세상에서 구별되지 않는 문제가 생긴다.

 

18:

일단 내가 진리로 구별된 이후에 다시 세상에 보냄을 받아야 하는데 구별되지 않은 사람이 자꾸만 세상에 보냄을 받으려 하면 안된다. "우리는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이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라고 말하는데 세상과 좀 다른 모습이 있어야 되지 않은가? 세상은 어두움이라면 나는 빛이어야 하지 않는가? 세상이 썩고 타락했다면 나는 소금이어야 하지 않는가? 세상과 나와 비슷하면서 자신을 빛이고 소금이라고 하니까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완전하게 진리로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 만이, 세상에 소속되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만이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라는 말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세상에 보냄을 받을 때에도 먼저 구별되고 성숙된 후에 세상으로 가는 것이 정상적이다. 따라서 초신자를 세상으로 보내는 것은, 사역자로 보내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19:

예수님 자신도 이세상에 와서 사셨지만 항상 구별되게 사셨고, 유대교 안에 사셨지만 유대교와는 구별되게 사셨고, 구별되게 가르치시고 구별되게 가르치셨다. 예수님과 그 당대의 교회들과 그 당대의 사람들과 무엇이 다르셨는가를 잘 배워야 한다.

 

20:

그 다음 세대를 위한 기도이다. 그 안에는 우리도 포함되어 있고 우리의 후손도 포함되어 있다.

 

21: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물리적으로 하나라고 이해지만 그것보다는 아버지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아버지 안에 계시며, 두 분의 마음이 한 마음이고, 두 분의 생각과 뜻이 같고, 서로 한 몸처럼 활동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우리도 다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끼리도 하나가 되어야 하고, 예수님과도 하나가 되어야 하고, 아버지와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하나가 된다라는 말은 꼭 삼위 하나님 사이에서만이 아닌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에서도 일어나는 부분이기 때문에 하나라는 말을 물리적이 아닌 사상적으로, 내용적으로, 마음적으로,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22: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그 영광이 있어야만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다. 그 영광이 없고 세상적인 영광이 있으면 자꾸만 싸운다. 서로가 무엇을 가지려고 하고 다투는 것은 세상적인 영광이다. 실제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툴 필요가 없다. 그 영광은 무엇인가? 요한복음에서 영광이란 주제는 말 그대로 영광스러운 것이면서 동시에 거기에는 십자가가 따라 있다는 것을 이미 공부했다. 십자가는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을 말하고 아버지에게 순종할 때에 영광이 주어지고, 아버지께 순종할 때에 모든 욕심이나 죄가 소멸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십자가 즉 순종과 영광은 항상 동시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23:

지금까지 한 모든 기도를 다시 종합해서 말씀하신다. 우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하나가 된다는 것에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랑이다.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이다. 마치 부부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듯이, 또 이 세상에서 교회나 또 다른 모임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이 있어야 하듯이.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강하게 중심이 됨을 알아야 한다.

 

24:

 

25-26:

지금 이 17장에서 설명했던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와 영광과 세상으로부터의 구별됨 등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인 것이다. 우리가 의로워진다, 칭의를 받는다라는 말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 세상과 구별되고,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을 잘 알야야 되고, 진리를 배우고 진리를 통해서 세상과 구별됨과 동시에 구별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하나가 되는, 사랑을 깨닫는 이 모든 부분을 가리킨다. 이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뜻이다.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구별되어야 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된다.

 

요일 3:21-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는다.'라는 말이 요한복음 14장에서부터 나왔는데 그 기도의 전제 조건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22절에 나온 것처럼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은 들어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내용이므로 우리 기도의 내용도 그것이 핵심이라야 한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책망받을 것이 없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게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런 내용의 기도를 하나님은 당연히 들어주신다. 또한 내가 그렇게 자라가면 자라가는 만큼 자라간 성도가 이 지상에서 필요한 부분을 요구할 때는(그 모든 기도의 내용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위해서 기도한 것들이기 때문에) 다 들어주신다. 그래서 기도의 응답은 기본적인 하나님의 의도, 뜻과 맞으면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23: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다.

 

24: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 그 관계는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고, 그렇게 할 때 성령님이 내 안에 와 계시고 성령충만을 받게 되고, 성령님이 내 안에서 내가 예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계속 알려 주시고 확인시켜 주신다.

 

 

18장

18장에서 마지막 장까지는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내용이다. 여기의 내용들은 익숙히 알고 있는 내용이므로 줄거리를 따라가면서 핵심되는 부분을 잘 살피고자 한다.

 

1-2: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제자들과의 긴 대화와 가르침을 다 마치시고 기드론 시내 저편, 감란산 쪽으로 건너가신다. 거기는 자주 가시는 곳이었고 자주 기도하셨던 곳이었다. 가룟 유다도 잘 알고 있었고 그 날 저녁에도 예수님께서 가실 것을 유다도 짐작하였던 것 같다.

 

3-11: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가실 수난의 길과 영광의 길을 잘 몰라서 이런 일을 행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것이 당연하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경우에 그리스도인들은 무력으로 대항해서는 안된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 무엇인가를 늘 잘 배우고 따라가야 한다.

 

12-14:

 

15-18: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오다가 예수님을 부인하다. 물론 이것은 겁이 났기 때문에 그렇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겁이 왜 나는 것인가? 사도행전에 가면 베드로가 겁이 나지 않고 아주 담대했던 것을 볼 수 있는데 왜 그 때는 겁이 나서 예수님을 세 번 씩이나 부인했을까?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는 아직도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 나라와 영광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깨달은 후에야만 우리는 죽음을 초월한 담대한 신앙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면은 자신의 믿음을 점검받아야 한다. 죽음이 올 때 자꾸만 두려워지고 죽는 것이 상당히 힘들어진다면은 자신의 신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19-23:

예수님의 비굴하시지 않고 당당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구절은 재판을 안받겠다거나, 십자가를 안지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실 말씀은 하시면서 재판을 받으시는 것이다. 잘못한 것은 없지만 그들의 재판에 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25-27:

 

28-32:

 

33-40:

 

19장

1-5:

 

6-11:

빌라도의 죄보다 유대인들의 죄가 훨씬 더 크다.

 

12-16:

 

17-22:

 

이 사건에서 지금까지 대제사장의 심문이나, 빌라도의 심문에서 서로 주고받았던 핵심 주제는 "네가 누구냐?"이다. 그리스도란 말을 쓰지 않고 왕이란 말을 썼다. 똑같은 말이다. 그리스도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를 가리킨다. 특별히 구약 성경의 후반부에 가면 거의 메시야란 뜻은 왕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왕이신 것이 주제로 나타나고 있다. 단, 예수님이 왕이시지만 세상 나라의 왕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요즘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하나님 나라는 이다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땅에 와 있다. 이미 그리스도가 왕으로 오셨고, 이미 그리스도가 왕국을 세우셨고, 이미 우리는 그나라 백성으로 다스림을 받고 있기 때문에 천국은 현재 이미 실현되어 가고 있다. 그런데 이 천국의 현재성을 강조하면서 "그러기에 우리는 이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세상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전도해야 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도록 하는 것은 당연한데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개념에 있어서 영적인, 예수님이 의도하시는, 세상 나라와 다른 하나님의 통치로 이해해야 되지 세상 나라와 유사한 성격의 통치로 이해하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닌 것이다. 예수님이 세우시는 하나님 나라는 세속적인 세상적인 통치와 국가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이세상 나라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만든다는 말은 반드시 복음을 전해서 영적인 그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23-24:

이 구절은 시편 22편을 인용한 구절이다. 시편 22편은 전체가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시 22편

1:

이것은 다윗의 기도인데 다윗인 자기가 곤경에 처했을 때 부르짖던 이 기도를 예수님은 자기에게 인용하셔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기도하셨다. 이 시편의 기도는 전체적으로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꼭 버림받은 사람인것처럼 어려웠을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내용인데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그런 많은 시련을 주셨다. 예수님도 다윗과 마찬가지로(다윗은 예수님의 그림자이다.) 미움을 받고, 미움을 받고 그렇게 해서 결국은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유대인들에게서 미움을 받는 것만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마저 버림받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다. 예수님이 유대인에게서와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고 처형되는 부분에서 우리도 거기에 연결되고 있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하시고 버리시는 내용이다.

 

18:

시편 22편 전체의 내용은 예수님이 아버지에게서 버림 받으시는 것을 밑바탕에 갈고 있으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버림을 받는 내용이 나온다. 그래서 옷을 다 빼앗기는 부분은 유대인들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김을 받는 것과 동시에 아버지 앞에서 모든 것을 다 빼앗기는 버림받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벌거벗은 채로 아무것도 가지신 것이 없이 예수님은 처형되셨다.

 

요한복음 19장

 

25-26:

예수님은 늘 자기 어머니에게 '여자여'라는 말을 썼다. 이 '여자여'라는 말이 나쁜 의도로 쓴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27:

그런데 왜 어머니를 자기 동생들에게 맡기시지 않고 사도 요한에게 맡기셨는가? 우리가 요한복음을 읽어온대로는 예수님과 어머니와의 관계가 혈통적인 관계에서 예수님이 어머니에게 순종하시고 받들어서 효도하시고 다 했지만 영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선을 그으셨다. 혈연적인 관계를 벗어나 영적인 관계에서 하나님 나라 안에서 모두가 한 가족이 되어야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 같아 보인다.

 

28-30:

여기에 '다 이루었다'라는 말이 요한복음에 나오는 중요한 설명이다. 다 이루신 내용 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우리가 살핀대로 예수님은 왕으로 보내심을 받았는데 왕으로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는 가이사의 충신입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배척했다. 배척을 받으신 예수님은 예수님을 배척한 예수님을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모든 사람(우리를 포함한)의 죄 때문에 동시에 하나님에게로서도 버림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그런 이중적인 고난의 십자가를 겪으셨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에서 다루어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그 사건으로서 무엇을 다 이루셨는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신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된다."는 이 언약은 구약성경의 배경에서는 반드시 목숨을 걸고 피를 흘리면서 체결하였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짐승을 잡아다가 절반을 쪼개서 놓고 그 사이를 지나게 했다. 그것은 목숨을 거는 것을 의미한다.

 

히 9:14-15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첫 언약이 있었는데 우리가 첫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죽어야만 했다. 우리의 죽음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셔서 그 약속을 성취하시고 언약을 새롭게 하셨다.

 

히 9:16-17 (유언(遺言): 언약(covenant)으로 번역해야 맞음)

이 말은 한 번 언약한 것을 어길 때에는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언약 관계에서 우리가 잘못을 범하여 우리가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인 것이다. 그 십자가 사건에는 언약을 파기한 후에 목숨을 내놓는 죽음이 거기에 들어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파기된 계약이 다시 회복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이 있어야만 이 약속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 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 이루었다'라는 말은 언약을 회복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동시에 '다 이루었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끝까지 순종하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중보자로서 죽으시는 그 십자가의 죽음까지 순종하셨기 때문에 순종을 끝까지 하신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된다. 또한 우리에게는 우리도 이 예수님처럼 끝까지, 죽음까지도 각오하고, 죽음에 까지 순종해가는 자기부정의 모습을 배우고 따라가야 하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이것을 믿음이라하고 구원이라고도 말한다.

 

동시에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런 점에서 '다 이루었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온전히 전달해주었고,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드러났고 또한 우리를 대표해서 중보자로서 죽음에 처하셨고, 왕으로 오셨다가 버림받으시고 왕권을 회복하는 것 등을 다 함축하고 있다.

 

31-42:

예수님께서 돌무덤에 장사지내게 된 것은 탄생 기사와 비교하면 상당히 대조적이다. 탄생하실 때에는 마굿간에 탄생하셨는데 운명하실 때에는 부자들만이 묻힐 수 있는 부자의 돌무덤에 장내지내게 되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준비하셨는가를 잘 알 수는 없지만 어쩌면 부활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는지도 모른다.

 

20장

1-23:

 

24-28:

예수님의 몸은 살아계실 때의 몸이 아닌 새로운 신령한 몸으로 부활했다. 우리도 장차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이다. 또한 내면적으로도 우리는 부활을 한다. 에베소서 2장에는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몸이 죽은 일도 없고 부활한 일도 없는데 에베소서에는 죽고 다시 살아났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것은 내적인 부활을 말한다. 내적인 부활이 먼저 있고 몸의 부활은 뒤에 따라오는 것이다. 내면적인 부활은 육적인 영혼이나 인간이 영적인 영혼이나 인간으로 부활하는 것을 말한다. 마치 육적인 몸이 영화로운 영적인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듯이 우리의 내면적인 존재도 육적인 존재에서 신령한 존재로 바뀌는 것을 영적인 부활이라 한다. 성경에는 육에 속했던 우리가 영에 속한 자로 바뀌는 것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물과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22절에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는 몸만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영의 세계를 새로 시작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으라'라는 말도 물리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성령님과 나와의 관계가 형성이 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이 관계가 형성이 되는 것을 내가 영에 속한 자가 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28:

예수님을 만져보고 믿는 것보다 예수님을 보지 못했더라도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더 복되다. 그러나 아직도 도마나 다른 제자들은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잘 믿지 못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에 가서 베드로는 구약 성경을 잘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잘 소개했다. 따라서 성경을 잘 배웠으면 제자들이 부활을 믿을 수 있었는데 성경을 잘 배우질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40일 동안 다시 성경을 풀어서 부활을 가르쳐 주셨다.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는 구약 성경만이 아니라 신약성경까지 있으므로 훨씬 더 확실하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을 수 있다. 따라서 28절의 말씀은 시각적으로 보고 확인하고 믿는 사람보다 성경을 통해서 믿는 사람이 훨씬 더 정상적인 믿음에 이르기 때문에 복이 있다는 말이다.

 

29-31: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표적을 행하셨는데 요한복음에는 여섯 가지 표적만 기록되어 있다. 이 여섯 가지 표적만 기록한 것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21장

 

 

요한일서

1장 1-4:

 

5장 1-21: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 사도는 자신이 예수님을 따라 다닐 때의 상황을 설명했다. 이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에 와서 굉장히 높은 수준에서 굉장히 강력하게 도전을 하고 있다. 이것은 요한이 요한일서를 기록할 때에 그만큼 변화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만큼 성화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도 가능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 속하면 된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안되는 것이다. 가치관이 바뀌지 않고, 그 영광을 체험하지 않고, 십자가의 길도 걷지 않고, 성령님에게도 속해 있지 않는 사람이 성화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안되는 것이다.(마치 변화되기 전에 율법을 온전히 지키려 했던 바울처럼)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부는지 알지 못하듯이 육에 속한은 중생한 사람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왜 그렇게 사는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그들은 알 지 못한다. 중생된 자만이 알 수 있다. 이 부분이 확실하다면 나는 영생을 소유하고 있고 이 영생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수 있는 사람이다.

 

 

기도:

하나님께서 저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잘 알게 해 주실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도 알게 해 주시고, 땅에 속해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따라 다시 태어나고 성령님을 따라 사는 자로 변화되게 하시고 이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뿐 아니라 육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영적인 자로 부활하시면서 우리에게도 영의 세계를 열어주시고 첫열매가 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주께서 수없이 가르치셨던 말씀들과 그 길을 저희들도 알고 따르게 하옵소서. 마치 제자들의 질문처럼 "주께서 가시는 길은 모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 아니라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잘 보고 배워서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가게 해주시옵소서. 주님이 가신 길은 세상이 걸어가는 길이 아니며, 세상에 속한 삶이 아니고, 세상과 구별된, 진리로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에게 속한 자의 길임을 우리에게 말씀하셨사오니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주님 안에서 그 길과 그 진리와 생명의 길을 따라가게 하시고 부활과 생명되신 주님이 내 안에 오셔서 제게도 내적인 부활과 내적인 새생명을 주시고 장차 저희들에게 부활을 주실 그때에 우리의 몸도 부활해서 이 온우주가 새롭게 되어질 그때에 우리가 새롭게 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살 것을 기대하면서 우리의 소망을 분명히 하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로 하여금 이세상에서 미혹을 받지 않고 이기는 자가 되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가 다시 세상에 나가서 이 복음을 전하고 빛을 비쳐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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