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퀴나스

2005. 11. 28. 00:22신학자료/2.신학자료2(인물중심)

Thomas Aquinas (1224/5-1274)

 

 

(가) 시대적 배경: 대학과 스콜라주의의 정착

1. 중세를 특징지우는 본격적인 스콜라적 신학, 즉 이성론적 기독교의 발달은 서구가 고대의 철학적 이성의 재발견으로 인해서 다시금 전격적으로 도전을 받은 13세기에 이르러 새로운 양상을 띄며 활달해졌다. 물론 중세의 기독교는 이런 학자들의 기독교와 서민의 의식적이고 사뭇 미신적인 신앙간의 상당한 괴리가 있던 것도 초대교회와 상당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이 시기에 유럽은 이전에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고대 철학적 이성에 의해 영향과 도전을 받는 일이 생긴다. 이는 주로 잊혀졌던 고전의 재발견과 아라비아로 부터의 유입을 인한 지적 자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9세기 운동이 시작이요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던 반면, 이 시기의 지성운동은 심화되고 강한 영향을 불러일으킨다.

3. 여기에는 13세기에 이탈리아 (볼로나), 파리 (솔본), 영국 (옥스포드, 켐브리지), 독일 (쾰른)등 발전하기 시작한 대학과 그곳을 중심해서 발전한 학문인 스콜라 철학의 기여가 컸다.

4. 토마스 아퀴나스 (아퀴노의 토마스)는 이 시대를 살고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유럽의 기독교 지성인이다. 그를 이해함이 이 시대에 있어 고전철학과 기독교 신앙이 어떠한 형식으로 종합되었는지를 이해함에 필수적이다. 또 그를 이해함에는 그 시대의 대학과 그곳의 학문적 분위기를 이해함이 중요하다.

5. 토마스 아퀴나스는 소년기에 몬테카시노 (Monte Cassino)의 베네딕트 수도원에 맡겨진 이후 Naples의 대학에 입학하고 후일 가족들의 바램과 달리 새로 생긴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갔다. 그는 Cologne과 당시에 최고의 기독교 학문 중심지인 Paris에서 수학하고 59년 이후 이탈리아에서 가르치다 69년 파리에 와 가르친 후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 74년 49세로 죽었다.
 
6. 그의 삶에는 처음 형성된 대학이 큰 역활을 하였다. 1200년대는  볼로나, 파리, 옥스포드의 대학이 생기던 시대로  대학은 당시 산업이나 상업처럼 길드를 이루어 magistrorum et scholarium (masters and students)의 결합으로 universitas (본래 대학에 국한되기 보다 집단의 공동적 명칭이었다)를 이루었다. (oxford, cambrige, Tornto's University College, St. Michael College) 이는 학문도 하나의 직업화 함을 보여준다.  Alexander of Roes (c. 1280)의 지적처럼 당시는 유럽의 사회와 문화는 sacerdotium, imperium, studium의 세기관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대학이 교회와 왕궁과 더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7. 당시의 대학의 교육은 magister의 두가지 역활, 즉 講讀과 爭論 (legere et disputare)으로서 강독에는 정관(statutes)에 따라 정해진 권위를 가진 것으로 받아진 텍스트 (auctoritates)를 읽고 설명하는 것이어서 자연히 "주석"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논쟁은 주석적 읽음에서 자연히 수반되는 질문들을 다룸에서 발전하였다. 권위적 문헌으로 부터 야기된 논쟁과 반론의 변증법은 생각이 가능한 모든 선택여지를 저울질하는 일에 있어 근본적으로 열린마음 (개방성)과 함께 조직적 해결에 이르기 위해 한계까지 밀어붙여진 이성의 엄밀한 적용 둘다를 요구하였다. 여기에서 schoolmaster or 'of school'을 뜻하는 scholasticus로 부터 중세철학과 거의 동의어라 할 수 있는 scholasticism이 유래하였다. (종이자르기의 예)
 
8. 인문학부 facultas artium (faculty of arts)는 중세대학의 4개 학부중 하나로서 오늘날 (영어권의) 문학사, 석사에 해당하며 신학, 법학, 의학부의 예비단계로서 어거스틴의 De doctrina christiana에서 결정해놓은 세속적 지식의 전부를 포괄하는 전통적 체계를 가리킨다. De doctrina christiana는 성경연구에 중점을 둔 "기독교 학문체계" (Christian scholarship)에 인문학부가 종속되어야 한다는 사상을 기본으로 한 것으로 13세기까지도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 책의 정신은 과학은 그 자체가 목적을 가지고 있을 수 없고 그 의미와 연계 (meaning and coherence)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연관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9. 시간이 가면서 인문학부는 점차 "서구에 아리스토텔레스 전체가 소개 (the introduction of the complete Aristotle in the West)됨" 이라 불리우는 중대사건으로 말미암아 변화를 맞게된다. 이 때까지 만 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적 저술만이 알려져 있었으나 12세기 중반에 Physica, De anima, Metaphysica, Ethica가 번역되었다. 사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아리스토텔레스 (the Stagirite 그 마케도니아의 스테지라 사람) 뿐 아니라 그에 대한 희랍 주석서들 방대한 희랍-아라비안 문헌이 도입되었고 신플라톤주의 문헌과 심지어는 유대인 사상가들의 문헌도 라틴어로 번역 소개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시대에는 다양한 영역들에서 고대문화로 부터의 방대한 내용들이 채용되었던 것이다.

10. 이와 동시에 많은 이들은 이 비기독교적인 고전문화와 중세문화 사이의 대립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 좋은 예로 Absalo of St. Victors는 "그리스도의 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이 지배하는 곳에선 지배하지 않는다" (The spirit of Christ does not rule where the spirit of Aristotle reigns)라고 했다. 고대문화를 채용함과 배격의 두 입장은 결코 온전히 조화되지 못한채 양극으로 남아있었다.
 
11. 이것은 13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응에서 또 한번 표출된다. 초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 강독에 교회가 크게 반발하여 1210년에는 막 설립된 파리대학에서 그의 자연철학 저술의 강독은 파문으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수수께끼처럼 그의 강독은 번져나갔고 1255년 결국 공식적으로 허용되어 이제는 반드시 대학 학과목에 그의 저술에 대한 강독이 들어있어야 했었다. 이렇게 해서 인문학부 (facultas aritum)은 사실상 철학부가 되었고 모든 학생들을 위한 예비단계였던 인문학부는 이교적 철학에 푹젖게 되었다. 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부르듯 "그 철학자" (the Philosopher)가 되어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견해를 받아들임은 실재에 대한 전통적 견해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요, Ferdinand Sassen의 말처럼 "중세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속에서 자신에 대해서와 그들이 가진 자연적 능력들에 대해 의식하게 되었다."  down-to-earth philosopher.
참고 (1) 플라톤적 영성의 고대철학과 기독교 신앙, (2) 아리스토텔레스적 사변적인 자연철학과 기독교신앙, (3)기계론적/ 유물론적 과학기술, 계몽사상과 기독교 신앙, (4)포스트모더니즘과 기독교사상의 패라다임 변천
 
12. 신학부, 성경연구와 수도회: 신학부 교수도 역시 강독과 논쟁을 중심으로 가르쳤으나 여기서 주된 권위적 문헌은 물론 성경이고 그 강독이 중심과제였다. 13세기는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의 중흥 뿐 아니라 성경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이 일어난 시대였다. 스콜라적 방법이 성경연구에 확대된 결과 그 연구도 학문의 일부가 되어 아퀴나스의 Summa theologiae에서 처럼 최초로 조직화되어 theo-logy (loci system)로 발전되었다.

13. 13세기의 수도원의 새로운 발전은 후랜시스와 도미니칸 수도회의 신학 발전으로 1250년이후 대부분의 주요 신학자는 수도승이었다는 점에 있다. 이들은 이전의 수도회와 달리 도시적 분위기에 적대적이지 않고 설교와 선교에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활동의 관점에서 학문연구에 강조를 두게된다. 도미니칸은 ordo studentium이라 할 만큼 수도원 생활의 핵심적 일부로서 연구를 둔 첫 수도회였다. 이 수도회가 당시 세워지던 유럽의 대학들에서 주요 교수직을 차지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1. A의 철학개요: 이시대 사상과 대학의 좌표를 정한 原典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일 것이다. "만인은 본능적으로 앎을 원한다." 그것은 감각에서 취하는 기쁨에 의해 입증되는데, 그것은 효용성과 상관없이  사랑을 받는다. 봄 (특히 the disinterested appreciation of seeing)은 앎의 최선의 길로 여겨진다. 봄과 앎은 theoria, Idea, visio등과 같은 용어에서 보듯이 언어적으로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2. 이는 100 쪽의 각주 16 하이데가의 말처럼 독특한 헬라적 사상이다.  "바라봄에 속한 순수한 지각속에서 그 자체를 드러내는 존재, 그리고 오로지 그와 같은 봄에 의해서만 존재는 발견된다. 근원적이요 참된 진리가 순수한 봄에 위치한다. 이 주장은 그 이후 계속해서 서양철학의 기초로 존속해왔다. '봄'에 관한 희랍적 우선성이 오늘날 자주 '기독교의 헬라화'와 관련지워지며  그렇게 하여 구약에 나오는 실재에 대한 결정적 경험에 대립된다." 
Being is that which shows itself in the pure perception which belongs to beholding, and only by such seeing does Being get discovered. Primordial and genuine truth lies in pure beholding. This thesis has remained the foundation of western philosophy ever since. This Greek priority for 'seeing' is today often brought into connection with the theme of the 'Hellenization of Christianity' and is then opposed to the decisive experience of reality in the Old Testatment." 희랍인들은 청각보다 시각적 접근을 중시하고 셈족의 경우 보다 청각적 접근에 강조점 둔다. seeing and listening  A. J. van der Aalst
 
3. 아리스토텔레스의 앎은 플라톤이 원하는 가지계/예지의 세계에 대한 추상적인 (신비에 가까운 통찰)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적인/지상적인 일들에 대한 논리적/분석적 앎이다.  이런 앎의 본능은 어떤 일의 원인 (causa)를 파악하는 지식 (scientia)에서 채워진다.  앎의 충동은 보는 것의 숨은 원인에 대한 경이 (wonder)에서 비롯되고 1. 뭔가가 존재하는가 (whether something is), 2. 그 본질이 무엇인가 (what something is)의 두 질문으로 나아간다.

4. 토마스의 채용: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본능적 앎의 욕구라는 논제에서 "본능적으로" 를 강조적으로 취하여 만물은 자체의 가능성의 완성을 추구하며 그것이 善 (bonum)이라는 유기적 목적론을 주목한다. 즉 인간의 알고자 하는 동기는 만물이 자연히 완성 (perfection, 존재론적으로 구원?)을 추구하듯, '인간으로 인간답게' 완성한다는 것과 만물이 자신의 고유한 기능 (열은 뎁히고 무거운것 떨어지듯)을 발현하는 '인간의 특수한 활동'의 완성이다. 즉 인간의 영혼은 백지(tabula rasa)요, 이성은 하나의 가능성이어서 실제적 앎을 통해서 실재를 파악함으로서 자체의 완성을 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연적이고 본질적 활동은 이해 (to understand, intellegere)이다. 여기서 'omnis scientia bona est. 모든 과학 (학문, 앎)은 선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앎 (학문)은 인간의 완성이고 그의 자연/본질적 욕구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5. 어거스틴의 전통과 마찰: 모든 앎을 정당화하는 A와 달리 어거스틴은 호기심, curiositas" 즉 '덕스럽지 못한 (unvirtuous)' 앎의 욕구에 대한 정죄한다. 고백록 10권은 요일 2:16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는 말씀에 근거한 논박한다. 35장은 안목의 정욕을 호기심과 동일시한다. 호기심이란 학문의 외투로 위장된 지식의 헛된 욕구이다. 특히 안목의 정욕이라 한것은 바울도 희랍인들이 지식추구에 있어 봄에 우선권을 부여함을 알기 때문이는 것이다.

6. 아리스토텔레스는 봄의 기쁨을 본능적 지식욕구의 증거로, 어거스틴은 그것이 세상에 굴복하는 징표로 이해한다. 호기심의 "유혹"은 지식을 위한 지식을 위해 만물을 시험하도록 꼬인다. 호기심은 어거스틴의 근본적 구별인 사용 (uti, using)과 즐김 (frui, enjoying)의 구분을 토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의 De doctrina christiana에 있어 과학의 개념도 이 구분에 기초한다. 그는 지식은 반드시 인류 구원에 봉사할 수 있는 것 (uti)이어야 한다. 하나님 만이 안식을 주고 즐거워할 우리의 모든 갈구의 궁극적 목적이다. 사람들은 즐거워할 것을 신을 사용하기 원하고, 사용하여야 할 지식을 관조의 theoria 운운하며 최고의 목적으로 즐기는 反轉으로 이 관계를 왜곡한다. 사실 어거스틴은 서구에 이미 싹트기 시작한 이성주의적 성향을 잘 간파한 것이다.

7. 어거스틴에 있어 무사한 관조 theoria로서의 세속적 지식에 연연하지 않고 기독교 학문적 지식은 도구적 의미를 가짐을 역설함이 그의 호기심 정의에 두드러진다. 즉 그의 학문적 관심은 하나님을 앎과 그로 인해 즐거워함이라는 종교적 목적에의 부합하느냐 여부에 의해 정해진다. 어거스틴은 하나님과 영혼을 알기를 원한다. 그외에? "전혀 아무것도. (Anything else?Absolutely nothing else)" (독백 1,2,7) 기원을 아는 지식과 연관된 자기을 아는 지식, 이 둘 만이 가치있는 지식이다. 이런 맥락에서 어거스틴은 자연과학을 본능적인 무엇이 아니라 "앎 자체를 위해 알고자 하는" 호기심의 맥락에 넣는다.
 
8. 토마스의 절충: 토마스는 앎을 자연본능적 욕구로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호기심을 왜곡된 욕구로 보는 이 둘 사이를 어떻게 조화시키고 있는가? 토마스는 신학대전 II-II, 166ff 에서 원죄에 대한 논의 직후 호기심에 대해 언급하면서 "진리 자체에 대한 지식과 진리를 알고자 진력하고 연구하는 것을 분리해서 판단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 구분은 어거스틴에게서 거리를 둠을 의미한다. 이 구분의 목적은 다름아니라 지식 그자체는 선한 것으로 보고 거기에는 왜곡된 호기심이 깃들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그가 지식 달성이 인간의 완성이요 자연적 욕구인 지식소유가 완성되는 것으로 봄과 연관된다. 토마스는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 "철학연구는 그 자체에 있어 적법적이고 찬양할 만하다고 보았다. (신학대전 II-II, 167, 3) 토마스는 이처럼 만일 과학이 인간의 완성이라면 지식의 어떤 영역 (특히 theoria)를 구별하거나 배제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가진다.

9. 토마스는 지식의 추구가 잘못될 수는 있음을 인정한다. 잘못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식추구를 꺼리는 육체의 욕구와 영의 지식욕구 사이의 조화가 죄로 인해 깨어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추구를 통제해야 하는데 여기서도 토마스는 중용 mesotes, 德, 즉 "right mean" between two extremes 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의 핵심개념에 의존한다. 호기심은 앎의 욕구에 나타날 수 있는 극단으로, 절제 (temperantia, temperance)인 학구열 studiositas (zeal for learning)의 덕에 의해 합리적인 통로로 유도되어야 한다. 즉 어거스틴의 악덕인 호기심은 아리스토텔레스적 덕의 지배에 들어와야 한다.

10. 토마스의 해결의 핵심: 토마스는 A의 문제점을 지식추구가 그것의 바른 목적인 하나님을 앎에 관계됨 없이 피조물에 대한 진리를 추구 하는데로 나가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즉 이런 지식추구는 존재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탐구하지 않고 자연현상에 대한 지식에 만족하는 과학에서 드러나는 악이다. 이리하여 T는 A가 말하는 인간의 본질로서의 지식추구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을 앎에 연관시켜야 할 것을 말한다. 그는 이 작업을 하되 A의 지식추구를 하나님을 앎의 하위개념으로 두고자 한다. 즉 어거스틴이 말하는 바 호기심의 (악한) 종교적 동기가 이론적 고찰의 위계 (상하관계)로 바뀐다. (Augustine's religious motivation of the curiositas is transposed into the hierarchy of the theoretical consideration.) 이러한 토마스의 해결은 이미 자연과 은총의 이층구조를 함축한다. 
 
11. 토마스가 종교적 동기를 이론적 고려의 순서로 바꿈은 제3논증에서 더 두드러진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완성을 이루는 원리와 연합되고자 욕구한다"는 이 논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외에도 Proclus, Pseudo-Dionysius와 같은 신플라톤적 순환교리 circulation motif의 채용으로 말미암는다. 신플라톤주의는 모든 실재가 두개의 상반된 동시적 운동, 즉 유출과 회기 (emanation and return, a turning around, conversio, from the first principle, the one or the Good)의 역학관계로 본다. 유출된 모든 것이 근원으로 돌아가기 원함은 거기에 완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회기는 물질적-감각적인 것으로 부터 순수하게 영적이고 신적인 존재로 됨을 말한다.

12. 토마스는 인간이성 (human intellect)의 원리를 비물질적 본질 (incorporeal substances, substantiae separatae)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인간영혼, 천사, 하나님의 불멸적 존재를 부르는 통칭이다. 앎이란 아는자와 대상의 합일인데 인간의 최고 목표는 최고의 원리를 앎으로 그에 합일되는 것이다. 여기서 산출 (exitus, procession)과 회기(reditus, return)의 신플라톤주의 원리가 엿보인다. 또 창조교리와 다른 유출의 교리마저 수용된다. 토마스는 자연에 의해 강제된 단계적 유출은 부정하고 하나님 만이 모든 것의 창출적 근원으로서 궁극적 목적이 되신다고 한다. 그리하여 토마스도 어거스틴 처럼 오직 하나님에게서 만이 인간의 참된 안식이 있다는 고백으로 귀결한다.

13. 철학의 고민과 "거리": 그러나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의 원인들을 알고자 이성의 욕구는 안식이 없다. 이것이 바로 이성에게 안식없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철학의 고민이 있다. 토마스는 신학자나 철학자 공히 인간 이성과 신적 본질 사이의 "거리"의 문제에 봉착한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대답하지 않고 남겨두었다고 본 이 문제를 토마스는 인간 지식의 위상과 관해 부정적으로 대답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즉 학문은 단지 감각이 달하는 곳에 유효하므로 비물질적 본질들에 대해 알 수 없고 따라서 인간의 궁극적 행복은 본질적으로 추상적 과학들을 철학적 이론으로 고려함에 있지않다. 본능적 앎의 욕구는 사색적 과학에서의 완성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최종적 목적을 초월하며 철학은 완전한 행복을 이루지 못하고 단지 불완전한 행복을 유추할 뿐이다. 철학자들이 얻을 수 있는 가장 높은 하나님 지식은 그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가 어떠한 분이라는 것은 알 수 없다. 

14. 그러나 본능적 앎의 욕구가 거기에 만족할 수 없다. 토마스는 인간의 완전한 행복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명상인 the visio Dei (the contemplation of God's essence)에만 연관된다고 했다. 여기서 theoria와 흡사한 언어사용을 본다. 이 하나님의 명상은 철학적 탐구의 질서에 상충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연구는 결국 궁극적 원인인 하나님의 본질을 알지못하므로 앎의 욕구와 성취 사이의 괴리를 이루어 인생의 초험적 성취를 이룰 수 없다. A의 해결은 철학의 고민과 낙망을 말하고 포기, 체념 (resignation)을 해결로 제시한다. 그는 인간의 행복이 제한된 것이고 미완성과 불완전에 머물 뿐이라고 믿었다.
 
15. 그러나 토마스는 만일 앎의 자연적 욕구가 채워질 수 없다면 완전한 행복이란 영원히 달성할 수 없는 것이나 인생이 무의미하고 목적이 없을 수 없으므로 그것은 불합리하다고 주장한다. 즉 "이성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아는 것이 가능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자연신학의 발상) 왜냐하면 visio Dei의 불가능성은 신앙과도 상치하기 때문이다.

16. 하나님에 대한 즉시적 명상은 성경에 약속되어 있고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다. 성경의 권위를 통해서 철학의 고민으로 부터 해방된다. 그것은 인류에 구원에 관하여는 철학 다음에 신적계시를 통한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신적계시는 철학을 초월하나 철학의 이상 즉 인간의 본질인 이성적 앎의 완성을 성취하는 이성적인 성격을 가진 무엇으로 이해되고 있다.

17. 그 한 증거로서 토마스는 계시와 신앙을 통한 철학의 고민으로 부터의 해결이 얼마나 "합리적 (reasonable)" 한 것인지에 대해 수차례 강조한다. 그는 심지어 마5:8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볼 것이라 함의 원문를 이성으로 (God is seen by the heart, that is, by the intellect) 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석의 놀라운 점은 기독교 신앙의 종말론이 앎의 자연적 욕구의 궁극성 (the finality of the natural desire to know)과 조화 (종합)시키고 있는 점이다. 이처럼 토마스는 신적 계시가 이성을 초월하나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16. 그 반대로 계시는 이성을 '완성'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인간이 이성적 존재로서의 그의 궁극적 목적에 도달하는데 불가결한 진리가 계시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에 대한 명상은 하나님 본질에 대한 명상으로  (visio Dei = vision per essentiam) 해석되어 철학적 사색의 지평을 초월하는 것으로 되어있으나 본질적으로 theoria의 (이성주의적) 인 무엇으로 이해된다.
 
(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신학

1. 토마스에게 있어 신학은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실을 이론적으로 반성하는 학문의 체계를 말한다. 반면 철학은 이성의 확인절차를 거친 지식과 경험에서 출발한 思考(reasoning)로서 새 지식에 이르는 길 (the way of discovery)이다. 이것의 특성은 경험적 판단들을 원리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재검하여 (the way of reducing) 이성적 확인의 절차를 거치는 것이다. 철학은 일상적 경험의 의미를 이해하기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진 자연적 형태의 지식이다.

2. 즉 신학과 철학은 그것이 다르는 대상에 의해서 구분되지 않고 접근방법의 차이에 의해 구분된다. 같은 진리를 신학자는 계시에서 출발하고 철학자는 이성적 추론의 결과로 안다. 예를 들어 신의 존재는 신학자는 계시를 통해 받은 전제이고 사고를 통해 그 내용을 더 잘알고자 하지만 철학자에게는 증명의 대상이다. 

3.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이 철학을 신앙에 의해 받아들인 지식에 대한 영적 진보의 수단으로 여겨진 것과 차이를 보인다.  또 철학을 신앙의 예비단계 또는 준비였다고 말한 져스틴이나 클레멘트와도 다르다. 이들은 헬라와 히브리, 이방과 구약적 선민전통을 구분하고, 철학이 어떻게 헬라인들로 하여금 복음에 다가서게 했는가를 설명하고자 했다. 반면 아퀴나스는 철학의 일반적 정당성과 그것의 자연적 요소를 강조함으로서 초자연적 성격이 강조된 신앙과 구분하고 있다. 

4. 그는 철학자 (헬라철학자들 뿐 아니라 라틴 (세네카), 이슬람, 유대의 현인, 문인등도 자주 인용한다)를 성자 (the saints, Augustine, Ambrose 등)과 엄격히 구분한다. 또 그는 신학이라는 말 대신에 sacra doctrina "성스러운 교리" 라는 말을 선호한다. 이런 자세는 신학을 철학과 구분하려는 생각과 더불어 철학의 자율성을 보장하려는 생각을 함축하고 있어 문제이다. 그 역시 기독교적 기초에서 특이한 철학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점에 있어서는 초대교부들과 다르지 않았다.

5. 물론 철학과 신학은 그 성격상 당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철학이 신학으로 부터 구분된다고 해서 종교적 신앙으로 부터도 독립되어 자율적인 학문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이 철학은 신앙으로 부터 독립될 수 없다. 아퀴나스의 잘못은 철학을 신학과 구분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학으로 부터의 구분이 철학을 신앙으로 부터도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간주한 점이다. 그는 철학을 자연적인 것으로 보고 이것은 이성이 있는 인간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것이요, 자연적인 것이므로 철학의 영역에서는 기독교인이나 이교도가 공통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이 영역에서는 이교도 철학의 사용을 주저하지 않았다.

6. 아퀴나스는 이성과 신앙을 예리하게 구별했다. 신학은 계시에 의존하며 철학은 이성에 속한다. 그러나 이성의 권위는 철학의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고 신학에도 미친다. 신학의 분야라도 이성으로 이해되는 것은 이성의 힘으로 탐구한다. 즉 "자연신학 (natural theology)"란 바로 계시없이 경험적 이성에 의존한 사고를 통해서 신학의 주제들에 접근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그는 신존재와 성격에 대한 문제를 다룸에 있어 철학적 접근을 마지 않았다. 참고로 철학에서 자연신학이란 이성적 논증에 의하여 종교적 진리를 정립하려는 기획이다. 일반적으로 자연신학의 두 중심주제는 신존재 증명과 영혼의 불멸성 논증이다.  

7. 아퀴나스도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철학적으로 알 수는 없어도 그의 존재는 논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의 존재에 대한 안셈의 본체론적 증명을 버리고 경험계의 사실을 통해 귀납적으로 또는 목적론적으로 논증했다.

8.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원리를 이용한 자연신학은 신존재 증명의 "다섯가지의 길"에 핵심이 담겨있다. (1. 우주론적 신존재 증명의 변형; 만물의 궁극적 원인으로서의 unmoved mover, the first cause, 순수한 형상, 완전한 존재, 2. 우연성-필연성 논증; 우연적 존재는 필연적 존재에 의해 궁극적으로 설명될 때 비로서 평안이 있다, 3. 완전자의 존재의 필요를 말하는 완전성 논증, 화살이 과녁을 지향하듯 우리의 의식도 완전한 존재인 하나님을 목적해야 한다는 목적성 논증)

9. 부정의 방법: 하나님의 신의 속성에 관한 논의가 자연신학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해서 그것은 불가지론은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1) 부정의 방법 (via negativa)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Contra Gent. I 14, "하나님의 실체는 그 무한함으로 인해 우리 지성이 지니는 모든 형상을 초월해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인지를 아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실체를 이해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실체에 대한 모종의 지식을 갖는다"고 했다. 이는 소거의 방법 (via remotionis)라고도 한다. 즉 하나님은 책상이 아니고 (고로 인격이요) 사람이 아니요 (고로 불변하며) 이런식으로 무한대로 나가면 상당한 지식을 얻는다.

10. 유비의 방법 類推, 類比 (doctrine of analogy): 자연신학의  중대부분으로서 어떤 특수경우에서 다른 특수경우를 미루어 짐작하는 것 (동물 수컷의 성격에서 남자의 성격 짐작하기) 이는 하나님을 알되 그가 계신 그 모습대로 알지 못하나 단지 그가 어떤 분이셔야만 한다는 논증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만물의 창조주로서 초월하신 분이므로 세상의 무엇을 통해 알려고 할 때에 반드시 본질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반틸은 이것을 꺼꾸로 뒤집어 우리의 지식은 하나님 지식의 유사라 하였다.)

11. 계시신학의 필요성: 그러나 그는 인간 이성에 의한 철학 연구 외에도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지식이 인간 구원에 불가결하다고 강조하였다. 즉 기독교의 기본교리, 즉 삼위일체, 성육신, 육체의 부활등 이성영역의 밖에 속한 교리는 이성과 상충하지는 않더라도, 그것을 초월한 것으로 성경과 교부들의 전통에 의해 전달된다. 이것을 계시신학이라 한다. 

12.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의 관계는 신에 대한 지식에서 잘 드러난다. 첫째, 신의 본질은 인간의 유한한 이성으로 인식될 수 없으나 신의 존재, 영원성, 창조적 능력, 섭리등은 계시를 떠나서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다. 이성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만물의 제일원인 이며 그 피조물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보았다. 이성은 길을 인도할 수 있으나 그것의 목적인 하나님을 앎을 완성하는 것은 계시뿐이다. 그리하여 철학은 신학 또는 교회의 종 (ancilla ecclesiae)라고 보았고, 이 역활을 담당할 때에만 온전하다. 

13. 프로테스탄트 신학에 이르러 일반계시와 특수계시로 나누는 생각과 바르트와 부른너의 자연신학, 일반은총논쟁, 그리고 카이퍼와 스킬더의 일반은총 논쟁과 화란 기독교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의 관계성에 대한 논의는 모두가 아퀴나스의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의 논제와 흡사하다. 예를 들어 부르너는 창조 가운데는 하나님의 진리 계시가 있으나 유효한 자연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와는 무관한 하나님의 접촉교리라고 정의한다. 이들은 일반계시를 자연신학으로 연관시키지 않고 자연적인 것에 관하나 신학으로 이해한다.

(라) 자연과 초자연

1. 13세기의 인식론의 핵심은 희랍적 이성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관계였다. 토마스는 이 문제를 자연과 초자연의 구분으로 대답한다. "은총의 선물들이 자연의 선물들 위에 더해지되 후자를 파괴치 않고 오히려 완성하는 방식으로 더해졌다." (신앙의 빛이 이성의 빛을 파괴하지 않는다). Gratia no tollit naturam, sed perficit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완성한다.) 하나님이 이 둘의 근원이시고 조화를 보증하신다. 이 조화론에도 유출 (앎의 욕구)과 회기 (앎의 완성으로서의 계시, 은총) 라는 순환주제가 엿보인다.

2. 이 둘 사이에는 조화가 있다. "만약 철학자들의 가르침 가운데 신앙에 상치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본래 철학이라기 보다 이성의 불완전성에 기인하는 철학의 오용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여기서 보듯 토마스에게는 이성의 자충족성에 대한 본질적 비판이 없다. 그 예로서 철학의 오용은 이성 그자체에 의해 밝히 보여질 수 있다고 본다.   

3. 자연 위의 초자연적 목적: "자연적 원리들 위에 하나님에 의하여 사람에게 운행의 초자연적 원리들이 주입되어야만 이것이 가능하다." 이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은총이다. 여기서 은총은 사죄와 교제회복으로 이해되지 않고 최종적 목적을 위해 인간성의 초자연적 완성 (the supernatural perfection of humanity for the final goal)이다.

4. 여기서 gratia perficit naturam의 주제가 나온다. 기독교 삶은 자연적 질서의 완성이다. gratia prae-supponit naturam (grace presuppose nature). 자연은 은총의 prae-ambula이다. 이러한 이유로 토마스는 자연과 초자연적 목표를 말한다.

5. 이와같이 토마스는 자연이 은총에 이르는 독립적인 디딤돌이요 기독교적 상부구조의 하부구조였다. 그는 성경의 하나님을 제일원인으로, 그리고 자연의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했다.

6. 그러나 그의 종합적 사고에는 (A) 희랍철학의 자연 개념에 따라 무질서, 혼돈, 순환적인 질료의 세계인 자연 속에서 움직이는 생성, 성장, 성숙의 목적론적 원리인 형상을 통해 (내재적인) 일원론적 통일을 시도한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자연과 구별되는 은총을 다시금 도입하므로서 (B) 그의 종합은 사실상 자연을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고 그 독립성을 부여한 면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요소와 그러나 그것을 다시금 은총이라는 초월적 영역의 하부구조로 위치시킨 점에 있어서는 플라톤적 이원론의 모습을 가진 세계관을 도입했다.

7. 이런 세계관에 대한 대표적 비판이 중세말 프란체스코파 수도사인 William of Ockham (1280-1349)에게서 일어난다. 오캄은 토미즘 체계가 자연과 초자연 사이의 관계가 토마스 생각처럼 상하위 관계로 연결될 수 없는 독립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즉 은총이 자연에 대해 갖는 내재적 가치를 박탈하고 오히려 자연에 대립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대립의 전통은 마틴 루터 (1483-1546)과 멜랑흐톤 (1497-1560) 으로 이어지고 다시 칼 바르트나 부르너, 고가르텐 등의 신정통 신학으로 이어진다. 

(마) 정리

1. 카토릭과 종교개혁의 근본적 차이는 자연과 은혜의 관계에 대한 상이한 견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이야기되곤 한다. 개혁자들에게 있어 은총은 인간 본성의 高揚이 아니라 회복이요 해방이다. 즉 방향성에 관한 문제도 언급된다. 인간의 본성은 관계적 relational이라고 본다. 그러나 토마스는 자연의 개념에 사물 그자체들의 존재론적 일관성에 대한 표현이 나타난다.

2. 물론 토마스에게 있어 자연이 피조물로 하나님께 대한 (의존적) 관계임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 관계성을 (비본질적인, 우연한) 범주 (the accidental categories)의 하나로 본다. 즉 논리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모두 본질 이후에 나오는 비본질적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세계의 관계가 피조물의 본질에 후속한다는 문제를 낳으므로 여기에 새로운 관계, 즉 범주적 관계가 아닌 초월적 관계 (not catagorical but transcendental)를 필요로 한다.
 
3. 토미즘의 또 다른 문제는 그것이 인류를 두종류의 목적으로 갈라놓는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화란 철학자 쉴레벡스가 말한대로 토마스는 이원론으로 삶을 나누기보다 오히려 그의 가장 깊은 의도는 인간의 삶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삶, 하나의 마지막에 예정된 바, 근원과의 관계 속에서 움직이고 존재함을 보이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