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교회 창시자 최대용의 생애와 비교회 이해

2010. 10. 14. 22:44신학자료/2.신학자료2(인물중심)

한국인자신의교회’창시자 최태용의 생애와 비(非)교회이해

 

Ⅰ. 서론

Ⅱ. 본론

1. 최태용의 생애와 신앙

1-1 최태용의 생애

1-2. 1920-30년대의 시대적 상황과 교회상황의 이해

1-3 최태용의 신앙

2. 무교회의 영향과 김교신과의 관계

2-1. 내촌감삼의 무교회의 비판적인 수용과 최태용의 교회이해

2-2. 김교신의 무(non)교회와 최태용의 비(anti)교회

3. 민족교회로서 복음교회의 표어

Ⅲ.결론

Ⅳ. 참고문헌

 

 

Ⅰ. 들어가며

 

최태용 목사(1894-1950)는 토착적 조선교회 설립운동에 앞장선 한국기독교 교회사에서 주목할 만한 주체적 신학자이며, 선구자적 목회자 중의 하나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의 신앙적 회심과 조선인으로서의 주체적인 생명신앙과 교회관은 오늘날 기독교대한복음교회의 중추적인 역활을 한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최태용의 신앙과 신학운동은 한국신학사와 교회사 속에서 많이 연구되지 못하였다. 1995년 복음교회 창립60주년을 통하여 다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에 위안을 삼고 그의 삶과 신앙을 내촌의 무교회주의 영향과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의 입장차이를 고려하면서 서술해 나가도록 하겠다.

 

Ⅱ. 본 론

1. 최태용의 생애와 신앙

1-1. 최태용의 생애

‧최태용의 생애. 1897년 12월 18일(음 11월 25일), 함경남도 영흥군 인흥면 동일리에서 비교적 여유 있는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최태용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의 가문 배경이나 성장 환경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서 ‘입신출세(立身出世)’에 대한 반복적인 훈시를 들으며 자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13년 그가 열 여섯 되었을 때에 수원 농림학교(현 서울농대 농과대학의 전신)생활은 그의 평생의 친구인 장면, 김성실과 1년 후배로 복음교회 감독을 역임한 이덕봉 등을 만나게 되는 기회가 되었고, 또한 그가 기독교인이 되어 어머니의 기대와는 다르게 전도자로서 길을 가게 되었다. 기숙사를 같이 쓰던 김성실과 그 외 몇몇 학우들이 모여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던 모습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고 그 모임에 합류하게 되었다. 새벽기도회, 성경 읽기에서 출발하여 수원의 감리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열심 있는 교인이 되었다. 18세 되던 1916년 늦가을 수요예배를 마치고 기숙사에 돌아와 밤기도를 끝내려 할 때 홀연히 광명한 빛에 싸여 “복음을 위하여 네 몸을 바치라”는 소리를 듣고 3‧4일 동안 기쁨에 취하여 지낸 황홀한 체험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수원 농림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농업기술을 가르치며 영흥장로교회에서 복음전도를 하였다. 이때에 3‧1운동을 맞았으며, 1919년부터 2년 동안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농과 농업실습 지도원으로 근무하였다. 이즈음에 최태용은 전도자의 길로 갈 것을 확고히 하고 본격적인 신학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일본 동경영어학교에 다니며 신학서적들을 탐독하는 한편, 신학교 입학을 준비하던 중 내촌감삼(內村鑑三) 을 만나 신앙지도를 받게 되었다. 이때 김교신, 함석현, 유석동, 송두용 등 국내 무교회주의자들을 만났으며, 일생을 동지로서 같은 길을 가며 최태용을 섬긴 백남용을 만났던 것이다. 최태용은 내촌감삼의 신앙과 사상에 심취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음성, 태도, 걸음까지도 닮아 “제2의 내촌(內村)”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였고, 내촌감삼도 최태용에게 많은 기대를 한 것으로 보인다.

 

1923년 동경에 대지진이 일어나 한국인들이 수없이 살육을 당하는 것을 본 그는 일본의 야만적인 행동을 책망하고 1924년 귀국하였다. 이 당시의 국내에서는 사회주의 운동과 교회에 대한 비판이 본격적으로 대두되던 시기였다. 그는 교회의 개척과 생명신앙을 심기 위해 1924년 9월부터 새로운 학풍의 「신생명」이라는 잡지에 18편의 신앙개혁의 내용을 담은 글을 투고하였다. 최태용은 드디어 1925년 12월 16일(일요일), 서울 YMCA 대강당에서 신앙의 혁명을 위한 선언을 하였다. 한국교회가 올바른 신앙을 갖지 못하고 선교사들에 의해 주어진 신조와 교리에 매달려 있는 상태를 비판하고 영과 진리에 충실한 신앙인이 될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1926년 6월 10일에는 「천래지성(天來之聲)」이라는 개인잡지를 발간하여 무교회적인 문서 선교를 하였다. 그러나 경제적 곤란으로 인해 1927년 5월, 총 24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하고 말았다. 「천래지성(天來之聲)」을 폐간하고 고향에서 침묵생활을 하던 그는 1928년 8월 일본 신학을 정립한 고창덕태랑이 교장으로 있는 명치학원 신학부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신학수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신학부의 학생으로 있으면서 1929년 2월 6일 「영(靈)과진리(眞理)」라는 개인잡지를 일본에서 발간하여 문서선교를 재개하였다.

일본 신학교를 졸업한 최태용은 조선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조선의 현실에 맞는 조선신학을 형성하기 위한 지도자 양성을 계획하고 “조선신학숙”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냉랭한 교계의 반응과 경제적 조건‧실제적 설립을 위한 준비부족으로 실망과 좌절만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신앙동지들을 내적으로 규합하고 그들의 신앙운동을 소개‧확산시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독립전도자로서 용서받지 못할 이단자로서 질시와 정죄를 받으며 이어가는 전도생활 속에서 그와 그의 동지들은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 이에 교회 형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35년 10월 백남용과 박지철을 방문하여 신앙의 동지들을 모으고, 교회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리하여 “기독교조선복음교회”라는 이름을 정하고 12월에는 서울 중구 소격동에 주택 겸 교회당으로 쓸 작은 한옥을 마련하였다. 동월 22일에 기독교조선복음교회를 정식으로 창설하여 그 자신이 감독 겸 당회장이 되었다.

해방 후에는 국민계몽운동에도 노력을 많이 하였다. 1947년 1월에 그는 “신국가 건설단”을 조직하여 종로2가 한청 빌딩을 빌어서 매주 토요일마다 강좌를 하였는데, 국민회 조직을 통하여 지방 국민운동 지도자들을 불러 한 회에 20명씩 3개월 주기로 교육을 시켰다. 이때도 그는 “국가를 찾자, 국가를 생각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신국가론”을 역설하였다. 그 후 1950년 내전(內戰)때, 그는 전쟁 전에 반공운동을 했던 혐의로 교인의 집에 숨어 있다가 붙잡히게 되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순교의 길로 이 땅을 떠나게 되었다.

 

1-2. 1920-30년대의 시대적 상황과 교회상황의 이해

어떤 사상이 시대적 배경 없이 형성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즉 사상의 형성은 시대 속에서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물 연구에 있어서 그 사람이 어떤 시대에 살았는가 하는 것은 그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인물의 삶의 정황이 달랐다던가, 다른 시대에 그 인물이 태어났다면 그 인물의 사상과 삶의 자세도 달라졌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최태용이 왕성하게 활동했던 1920-30년대의 시대상황은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 3‧1운동 이후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무단정치’에서 기만적인 ‘문화정치’로의 그 정책을 위장 대체하게 되었고, 또한 만주 침략(1931)을 계기로 한국을 아시아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화 하면서 강압적 통치 정책을 펴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9년 3‧1운동 이후, 한국기독교의 모습은 교회가 보수화 되면서 교회에 대한 신망은 급속히 떨어졌고, 그러한 결과로 많은 젊은이들과 의식 있는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이 당시에 접어들면서 한국 기독교는 교회 공동체와 민중의 삶에 생동감을 불어넣을 수 있는 힘을 점차 잃어 가고 있었고, 민족 종교의 하나로 인식되어 졌던 한국 기독교가 사회현실 문제, 즉 농업‧농업문제, 구조적인 경제의 모순 문제 등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교회 내‧외적으로 수많은 비판의 소리와 각성의 소리가 드높아지게 되었다.

이 시기는 조선의 개신교회가 복음전래 초창기의 창조적 소수자로서의 생명력과 역동성을 잃어버리고, 일반적으로 신앙은 교조적으로 경직화되고, 주체적으로 살아있는 신앙을 억압하는 시기였고, 교회는 식민통치라는 역사적 현실을 능동적으로 극복할 민족교회로서의 역사의식이나 정치의식을 스스로 포기하고 탈 역사적 비정치적 신비주의 운동단체로 전락하여 타계주의적인 신비주의 운동으로 들어가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선교사들의 신학사상통제와 일본의 식민정책은 그 가혹성이 점점 더해 가는 역사의 위기시대였다. 이러한 참담한 조선의 현실상황 속에서 그대로 주저앉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복음 안에서 주체적 산 신앙과 신학운동을 일으키려는 20-30대 청년신학자 및 평신도들의 새로운 희망이 자라나고 있었으니, 유영모, 최태용, 김교신, 송창근, 김재준, 정경옥, 함석현 등은 그러한 산 혼들의 예증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최태용은 그 당시 한국 교회 전반이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경제적 측면에서나 신앙적, 신학적 측면에서 결정적으로 받고 있었던 시기에 주체적 조선신학과 조선교회의 복음운동을 일으켰다. 그의 신학운동과 교회갱신운동의 의의는 한국교회사와 신학사의 더 큰 주목과 역사적 평가를 재고해야 할 것이다.

 

1-3. 최태용의 신앙관

「천래지성(天來之聲)」 제3호에서 최태용은 “조선의 구원”이라는 제목으로 탄식하기를 ,

“아! 하나님이여 , 조선을 구원하옵소서, 당신의 권능있는 복음으로 이 백성을 돌보시옵 소서, 아-저희는 썩었습니다. 육도 망하고 영도 죽었습니다”.

 

나라도 망하고 정신마저 망해 가는 민족의 희망은 오직 복음의 생명적 운동에 있음을 그는 역설하였다. 우리 민족이 외적에 의하여 강토를 유린당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역사라 할지라도 다시 나라를 찾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일은 우리의 의지의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니, 이 일을 위한 교회의 사명은 중차대한 것이고 따라서 복음의 생명운동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태용의 신앙운동은 곧 민족구원운동의 승화된 현상이었다. 그런데 그는 “금일의 조선 교회와 그리스도와는 아주 별물”이라 하며 현재의 민족사 앞에 죽어버린 교회를 바라보면서 슬퍼하였다.

 

최태용은 다음 글에서 의지할 곳은 하나님뿐임을 확신하게 된다.

나는 다만 기도한다. 하나님이여, 이 백성을 기억하소서, 저희를 긍휼히 여기옵소서, 저 희를 소생시킬 진리의 바람을 부시옵소서, 일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나이다”.

 

마치 민족이 파괴될 역사를 바라보면서 통탄하는 예레미야처럼 하나님께 의지하고 기도하는 중에 그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하고 그의 머리는 고통으로 터질 듯이 괴로웠다. 누가 임 민족을 구할 것인가. 그런데 현재의 교회로서는 오히려 망해 가는 속도만 가속시킬 뿐 전혀 기대할 수 없으니 어찌 할 것인가. 그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신 사명을 마치 자신이 사명으로 삼고 있는 것 같다.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예레미야 1:10).

‧민족구원의 신앙. “너희는 신앙하고 신앙의 여력을 써서 산업을 하라. 신앙과 산업 이것이 네 조선이 구원을 얻을 대방침이니라.” “조선민족의 흥망은 피등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태도에 의하여 정한다. 그리스도를 받느냐 그리하면 흥하리라. 그리스도의 영력은 망국 혼을 깨끗하게 한다.”최태용에 있어서 신앙은 항상 민족의 구원을 동반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가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한 깊은 인식을 동반한 것이었다. 민족의 현실은 참으로 암담한 것이었다. 세계적인 정세와 그에 대항해야 할 한국의 교회는 갖추어야 할 기본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좌절하고 포기 할 수는 없었다. 끊임없이 실망하면서도, 「천래지성(天來之聲)」 전24권의 내용은 그 제목의 여하를 막론하고 대부분 신앙에 대한 가르침과 민족의 구원으로 일관하고 있다. 진실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민족 구원의 근본 요건 이었다. 그래서 진실하지 못한 교회를 비판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무교회주의 사상은 이러한 현실을 비판하고 개혁하는 방법론이었다. 그는 신앙의 출발부터 민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신앙이 깊어감에 따라 민족구원의 신앙도 함께 깊어간 것이었다.

 

 

2. 무교회의 영향과 김교신과의 관계

 

2-1. 내촌감삼의 무교회의 비판적인 수용과 최태용의 교회이해 (신학사상 88집 217)

최태용은 “교회밖에 구원이 있다”는 내촌의 주장이 비록 타락한 현실적인 교회에 대한 공격에서 비롯된 구호라 할지라도 ,그것이 잘못된 말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영이 순연한 영대로 있어서는 인간계에 교섭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영이 인간에게 교섭을 가지기 위하여는 역시 약간의 형식을 취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제도화되어 그 본래적인 의미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지만, “그것이 역사에 처하기 위하여 취하는 형식”으로서의 교회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교회의 본래적 사명은 기독교의 진리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데 있는 것이지, 구체적인 교회를 부인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런즉 우리는 차라리 무교회주의적 기독교를 가지고 교회에 들어가 교회를 교회 이상의 진리로서 살려야 할 것이다.”고 하는 것이다.

“무교회주의적 기독교”란 내촌(內村)적인 진리 파악을 통한 제도적 교회의 부조리, 모순성, 타락 현상에 대한 예언자적 통찰과 회개를 촉구하는 신앙정신을 의미한다.

최태용의 관심사는 무엇이 실재(Real)이냐 하는 데 있다.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림자나 어떤 모형이 아닌 무엇이 실재적이냐 하는 실존적 질문을 가지고 사물을 보려고 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이 교회에 대하여 관념화하고 경건을 말할 때에 그는 과연 교회의 실재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다음 글에서 그의 논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 교회하고 그것에 경건을 만들며 거기에 경건을 집중하여 있는 교회, 그것이 어떠 한 정도로 그 실재와 교섭을 가지고 있느냐고 나는 묻는다. 그리하여 나의 보는 바로서 사람들의 교회관념, 교회경건은 그것이 허허(虛虛)-슬프거나 기막힌 일을 당할 때 웃는 소리-인 것이다. ...우리가 언제든지 하나님의 현존 앞에 있어 성령이 감동 중에서 하나님 을 향하여 가는 생활, 그 전체가 더 근본된 예배이요, 교회의식에서 더 중요한 예배를 생각한다면, 이역시 사람의 헛된 생각이요, 그 실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사람의 헛된 생각이요 경건인 한에 있어서는 그러한 교회는 헛된 것이라 부정한다. 이것이 나의 무교회주의인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헛것인 교회를 버리고 실재인 교회에 취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촌의 무교회주의로부터의 이탈은 그의 오랜 신앙동지인 김교신과의 관계를 서먹서먹하게 만들었고, 급기야는 서로 언성을 높이며 비판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김교신과의 결별은 복음교회의 창립이후에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1935년에 이르러 최태용은 다분히 교회의 입장을 옹호하면서 이렇게 밝혔다.

 

“이제 나는 교회 밖에 서서 교회를 호령하는 자 노릇하기를 그만두고 하나님의 교회의 일원으로 하나님의 교회에 봉사하고자 한다. 나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교회이요 교 회에 충만하여 나타나는 복음이다. ...이제는 벽이 없는 신자이고자 한다. 무교회주의자도 물론 아니다. 도리어 교회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2-2. 김교신의 무(non)교회주의와 최태용의 비(anti)교회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는 “신에 의해서만 구원받은 존재, 즉 인간적인 자격과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존재”라는 신앙적인 자각을 그리스도인의 전 생활의 영역에서 관철시키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전 생애를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의 교회롤 만들려는 것이었고, ‘생(生)=교회’를 통하여 기독교를 역사 안에서 증언하려고 하였다. 여기에는 신 앞에서의 자기의 책임자로서 홀로 서려는 ‘단독자’의 정신, 철저한 개인적 신앙 실천주의의 정신이 들어 있는 것이다. 김교신에게 있어서 무교회주의자의 생활은 개인적 영역에서는 철저한 금욕주의 자세를, 각자가 속해 있는 사회와 민족의 영역에서 사회 윤리에 입각한 민중의 양심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전존재 영역에서 ‘신절대중심주의’에 근거하여 살려고 하는 그의 ‘전적 기독교’로서의 무교회주의가 가지는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최태용의 비(anti)교회. 그는 정통이라 하는 근본주의 보수신앙과 신비적 열광주의 신앙에 대항하여 싸웠는데, 이때에 무기로 사용한 것이 무교회주의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실상 무교회주의자가 아니요 비교회주의자로서 남겨지기를 바랬다. 제도적 교회의 부조리를 밝히고, 그 곪고 썩은 부분을 도려내는 외과의사로서의 사명이었다. 또한 무교회주의란 어감에서 주는 비신앙적 의미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오해받기 쉬운, 잘못 인식되기 쉬운 일이기 때문에 그는 비교회주의란 용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내촌의 일본적 상황에서 일어난 일본적 신학이라 할 때 일본의 식민지 치하에 있는 역사적 상황과 그에 따른 고백이 다르기 때문에, 비록 내촌을 존경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사로운 일일 것이기에 무교회를 버렸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서구적 신학을 극복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순수한 “조선적 상황”과 고백으로 발아되는 “조선신학”, “조선교회”를 제창하기에 되었다. 그러므로 그가 변하는 과정에서 무교회주의로부터의 이탈은 자연스러운 순서였으며 순순한 민족 교회 설립에 그는 가슴 벅찬 기쁨과 기도와 노력을 경주하게 되었다.

 

결국, 최태용의 비교회주장은 일본적이라고 할 내촌의 무교회주의에 대한 한국적 신학을 수립하고자 하는 반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민족교회로서 복음교회의 표어(주재용 150)

 

1935년 12월 22일, “기독교조선복음교회”를 정식으로 출범하고 윤치병목사로 부터 목사 안수를 받고, 기도교조선복음교회의 감독 겸 경성교회의 당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이어서 최태용 감독으로부터 백남용의 장로 장립식이 있었다. 이때 김교신과 더불어 무교회주의 운동을 함께 하던 유석동이 들어와 세례식을 가졌다.

그러면 여기에서 순전한 민족교회로서의 교단의 성격과 그 탄생의 대의 명분을 뚜렷이 하기 위하여 복음교회의 “우리의 고백”과 “우리의 표어”의 내용을 살펴보자.

 

우리의 고백

1. 우리는 천지의 창조자, 홀로 하나이신 참하나님을 믿음.

2. 우리는 우리의 구주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

3. 우리는 성령의 사귐을 믿음.

4. 우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현전에서 죄인임을 믿음.

5.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써 구원 얻고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다시 나게 하며 우리를 거룩하게 하며 우리를 창조 하는 일을 믿음.

6.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자리요 믿는 자가 그 사귐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서로 덕을 세 우는 장소요 복음 전도의 기관인 교회를 믿음.

7.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나타날 하나님나라를 지망함.

 

 

우리의 표어

1. 신앙은 복음적이고 생명적이어라.

2. 신학은 충분히 학문적이어라.

3. 교회는 조선인 자신의 교회이어라

 

최태용의 “조선신학”은 역사 현실에서 겪는 생명 있는 신앙 경험을 논리로 표현하는 신학모형이다. 복음교회는 바로 이러한 조선신학위에 세워졌다. 복음교회 운동은 교회를 부정하지 않고 교리를 본래적인 교리로, 그리고 살아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려는 교회개혁 운동이었다. 따라서 이 운동은 한국교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선교사들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서구 신학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보다는 우리의 고유한 신앙 체험에서 주체적인 민족교회를 형성하려고 하였다.고 주재용은 평가하고 있다.

 

 

Ⅲ.결론

 

결론적으로 최태용의 복음교회는 그것 자체가 주는 메시지의 참신성과 신선한 충격은 한국적 상황 속에서의 제3의 교회 모델로서 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큰 공헌을 하고 있음에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말년에 보여주었던 친일적인 성향(창씨개명과 신사참배, 친일논설) 등으로 보여주었던 삶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실망을 안겨주었지만, 복음적으로는 당시 형식화되어가고 고목화 되어 가는 생명력을 상실한 신앙에 대하여 생명신앙, 생활신앙의 주장은 현실 역사 참여 신앙, 현실 참여적 신앙은 복음교회의 많은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타 교단 목회자들에게도 영향력을 주고 있다.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특히 신학을 하는 젊은 신학생들에게 신선한 도전을 주고 있는 것이다.

 

 

   

 

Ⅳ. 참고문헌

 

이동규. “1930년대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제3의 교회’모델 연구-최태용의 복음교회를 중심으로,

감리교신학대학교신학대학원, 1996, 석사학위논문.

강명숙. “‘한국인 자신의 교회’ 창시자 최태용 목사”. 「한국기독교사연구」 제 21호」 .

1988. 8월호.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총회 신학위원회 편. 「최태용의 생애와 신학」.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5.

주재용. “이용도의 신비주의의 시대적 배경과 그 평가.” 「기독교사상」. 1985, 7월호.

노치준. 「일제하 한국기독교 민족운동 연구」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3.

강동진. 「일제하 한국 침략 정책사」. 서울: 한길사. 1980.

주재용, 「한국그리스도교신학사」.(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권진관. “1920-30년대 급진주의 시대에 있어서의 민중과 교회.” 「기독교사상」 .1990. 11월호.

차성환. “1920-30년대 기독교신비주의 운동의 사회학적 의의.” 「기독교사상」. 1994. 3월호.

김경재. 「최태용의 주체적 조선인 교회론」-복음교회 표어 “교회는 조선인 자신의 것이어라”중심으로. 신학사상 88집. 천안 : 한국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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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해. “김교신과 무교회주의.” 기독교사상. 1994.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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