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에 대한 연구

2010. 9. 22. 15:02신학자료/2.신학자료2(인물중심)

자유의지에 대한 연구

 

 인간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질문이 있다. 바로 인간이 그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가, 아니면 이미 결정된 삶을 그냥 살아가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만약 스스로 결정한다면 그 결정의 능력이 정말로 있는지,또 그 관계는 어느 정도이고,결정의 책임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한편, 이미 결정된 삶을 산다면 누가,왜 결정했으며 이에 대해 인간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오늘날에 대두된 문제는 아니다. 옛날 인류역사에서 끊임없이 제기되고 논쟁되었던 것이다. 동양에서는 운명론으로, 서양에서는 자유의지 논쟁으로 나눠질 수 있는데 여기서는 자유의지 논쟁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자유의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신앙의 측면으로 그 질문과 답이 요청된다.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인격적인 자유이다. 신자는 예수님때문에 죄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졌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능력 주심으로 말미암아 최상의 결과에 이를 수 있다.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독립에서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기를 스스로 선택하는데에서 발견된다.성경에 있는 자유의 약속은 우리를 고무해 주는 긍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즉 우리는 그리스도께 순종함으로써 참으로 의롭고도 선한 일을 행함을 통해 인간의 잠재력을 완전하게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1)

  그러나 자유의지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한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바로 사람이 자신의 구원에 얼마나,어떻게 참여하는가 하는 것이다.자유의지 논쟁이란 ,첫째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고,둘째는 이 자유의지가 인간의 범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문제이다.마지막은 자유의지가 인간의 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규명하는 논쟁이다.1)

  자유의지 논쟁은 5C경의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대립된 교리에서 시작되었다.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책임과 자유의지를 강조한 나머지 자력구원으로 내닫게 되었고2) 어거스틴은 기독교의 불변하는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얻는 것임을 강조하였다.3) 하지만 이 논쟁은 교리적인 측면에서 취급되었기에 실제로 인간의 자유의지 자체에 대한 깊이있고 조직적인 탐구가 결여되어 있다.그후에 16C 루터와 에라스무스가 자유의지 문제 자체로 논쟁함으로써 학문적인 정립에 기여하였다.4)

  이제 이들의 논쟁을 중심으로 자유의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쟁

 
  이는 자유의지에 관한 최초의 논쟁으로써 412년 이후부터 계속되었다.이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인정했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타락 전에 아담과 하와에게는 완전한 자유의지가 있었다는 것이다.문제는 바로 타락후의 자유의지에 대한 존재 여부였다.

 
(1)어거스틴의 은총론

 어거스틴의 인간론에 의하면 인간은 태초에 무로부터 창조되었다.홀로 자유하시며 최상의 선을 지니신 하나님의 자유하신 뜻에 따라 그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이다.즉 선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이다.하지만 “선은 피조자의 선이요 한정된 선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변할 수 밖에 없다.그리고 어느 정도의 선이 그 존재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남아 있지 않으면 안된다.”5)고 하면서 선의 존재는 남아있음을 강조하였다.다시 말해서 타락 후에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자유의지 자체를 잃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의 본래적 기능인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실제적 능력이 상실된 것이며,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을 택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 변한 것이다.타락때문에 자유의지라는 선물을 잃어버림으로써 더이상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선을 행할 수도 없으며 구원을 받을 수도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어거스틴의 인간론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고  말한다.그 자유의지는 타락 이전에는 선을 택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으며,타락후에는 항상 악만 택하게 되었고,구원 후에는 선만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결국 어거스틴은 자유의지를 지녔기 때문에 인간이 자유한 것이 아니라,자유의지를 갖고서 하나님을 섬겼던 인류 최초 상태와 타락된 자유의지가 회복되어서 하나님을 섬길 때의 구원받은 상태만이 인간에게 진정하고 완전한 자유개념이 있다는 것이다.타락후부터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인간들은 자유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자유롭게 산다고 하지만 이것은 결국 죄짓는 데에만 자유롭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6)

  이러한 어거스틴의 자유개념은 그의 철저한 타락과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에 영향을 받고 있다.생애 초기에는 마니교의 숙명론에 대항하여 인간의 자유를 강조했으나 자기의 회심을 생각할 때 구원에 이른 것이 자기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기인한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7)

  인간의지가 죄에 예속화됨에 따라,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된다고 한다.그리고 이 은총은 세례로부터 출발하며 유아도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8) 즉,하나님의 은총이란 죄된 인간의지에 미치는 감화력으로 인간의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다.

  결국,어거스틴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이 소유해야 될 영적인 자유는 하나로 될 수 있으며,이 길은 은혜를 통해서만이 자유에 도달할 수 있다는 독특한 사상인 것이다.9)

 
(2)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론

  펠라기우스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를 지녔다고 보았다.이것은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안에 있을 경우에만 자유하다는 어거스틴의 사상과도 매우 다른 입장임을 알 수 있다.그의 사상은 제자인 켈레스티우스에 의해 명확하게 정리되어 북아프리카 교회에 전파되었고 어거스틴의 숙명론에 대항하여 자유의지를 강조하게 되었다.

  그 당시 라틴 교회에는 어거스틴의 영향 아래에서 하나님의 독력설을 주장하여 중생의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 자유 그 자체는 은혜의 결과라고 보았다.그런데 펠라기우스가 나타나면서 인간의 독력설을 주장하여 중생을 일으키는 모든 공로가 인간 자신에게 있으며 은혜는 단순한 외부적 부가물에 지나지 않음을 주장하였다.결국 어거스틴과 펄라기우스의 논쟁은 인간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인가 혹은 인간의 일인가 하는 질문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10)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범죄 이후에도 아담의 자유의지나 그 후손의 자유의지는 손상되지 않고 보존되고 있다고 말한다.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본능의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펠라기우스에게 있어서 자유의지란 인간이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선과 악을 선택하여 행할 수 있는 자연적 능력을 말한다.그리고 어린아이는 원죄에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례없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11)

  이와 같이 원죄의 부인과 세례의 필요성 부인,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인간의지 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펠라기우스주의는,412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제자 켈레스티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되고,펠라기우스는 416년 밀레브대회,카르고대회와 431년 에베소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자우의지를 지닌 인간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자유를 통하여 선을 택하며 구원을 이루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주장하는 자들이었다.그들은 비록 교회안에서 한 분파를 만들지는 못했지만,이후로 계속해서 인간의 능력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소홀히 하는 자들이 나타날 수 있도록 준비한 선각자들이었다.그러므로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은혜가 대립되는 교회 역사의 원류는 조금씩 유형을 달리 했더라도 바로 펠라기우스 논쟁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12)

 
(3)반(半)펠라기우스주의

  펠라기우스의 정죄 후에 어거스틴이 주장하던 절대적 예정론은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에게까지 반감을 일으키고 있었다.어거스틴의 예정교리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나친 낙관주의를 심어주는 한편 다른 사람들에게는 심한 좌절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그리하여 레린스의 빈센트를 통하여 반(半)펠라기우스주의라는 새로운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이들은 예정은 하나님의 예지 즉 예견된 신앙과 순종에 근거한 것으로 이해하고,그리스도의 죽음은 만인을 위한 것이며 이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일반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13)

  반(半)펠라기우스주의가 말하는 자유의지론은 타락이후 인간의 의지는 약화되었고 아담의 죄는 그 후손에게 유전병과 같이 전해진다고 하는 것이다.인간의지가 타락으로 약화되었으므로 스스로를 자유케 할 수는 없으나 아직도 자유의 요소를 간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인간은 이 의지의 자유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의 도움을 받아 구원으로의 첫 발걸음을 내디딜수 있다고 한다.또한 인간은 소유하고 있는 자유의지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거절할 수도 있다고 한다.14)

  이 주장은 529년 오렌지 회의에서 배격되었으며,오렌지회의를 통해 인간의지는 전적으로 무능력하며 하나님의 은총이 선행함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결정했다.

 
2.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 논쟁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쟁이 1,000년이나 지난 뒤에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와 종교개혁의 기수인 루터 사이에서 다시 일어났다.두사람 모두 교회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고 두사람의 주장역시 교회의 평화와 인간의 구원을 염두에 둔 선한 것이었으나 인간의 책임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심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하지만 끝내 접촉점을 발견하지는 못하였다.그것은 이 논쟁의 시작에 있어서 시각이 달랐기 때문이다.에라스무스는 인문주의의 제왕답게 인간을 출발점으로 삼았고,그 인간을 변호한 반면,루터는 하나님을 출발점으로 삼아,그 하나님의 시각에서 인간의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이다.물론 에라스무스가 중도적인 관점을 제시하면서 하나님에게 설 자리를 양보하였을지라도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담보로 한 것이었기에 시각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15)

 
(1)루터의 노예의지론

  루터는 자유의지의 개념에서 자유는 “하나님에 관한 용어이고 하나님의 권능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한다.만일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신성도 부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신성 모독적인 발상이라고 반박한다.

  루터는 이르기를 “인간은 은총없이는 선을 의지할 수 없고,결국 그 자유를 상실한 채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악한 욕구와 악한 노력만이 남게된다”고 한다.즉 인간의지의 전적 무능력을 주장한다.결국 성령과 그리스도,하나님 없이는 자유의지가 악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이 현존하지 아니하고 우리들 안에서 역사하지 않을 경우 우리들이 행하는 모든 것은 악하고 구원에 대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본다.또 인간 자신의 의지는 그 자체가 악을 행할 수 밖에 없음을  얘기한다.“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영을 받고 있지 않을 때,그는 마치 목덜미를 붙잡혀 어쩔 수 없이 행위하듯이 그의 의지에 거슬려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발적으로 채비를 갖춘 의지를 가지고 악을 행하는 것이다.그런데 이러한 행위의 채비 또는 의지를 그는 자신의 힘으로는 없애버리거나 규제하거나 변경시킬 수가 없다”고 한다.이처럼 루터에게는 이난의 자유의지가 하나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된다.16) 다시 말해서 루터는 인간이 타락한 후 인간의 의지도 타락하여 자유의지라는 말은 이름만 남아있고 오직 죄를 짓는 경향성만 있어서 필연적으로 죄를 짓게 되니 스스로 구원에 이르게 될 아무런 능력도 없다고 한다.따라서 인간의 자유의지란 의를 이루는 일에나 구원을 얻는데 가장 큰 적이 될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17)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구원하시고 무슨 일을 행하실 것인가에 대해 미리 아시고 그일이 그렇게 이루어지도록 예정하신다.하나님의 예지가 예정의 기초이지만 이는 어떤 조건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며 무오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되어질 뿐이라고 한다.이런 의미에서 하나님만이 자유의지를 소유하시는 것이라 한다.18)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은 바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인 것이다.

  정리해 보면 루터가 본 인간의 자유의지는 일상적 세상 삶,곧 자연적인 법과 자연적인 덕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자유스러우나 신의 뜻을 따르거나 구원을 이루는 데는 전혀 소용이 없고 하나님이 주인이 되느냐 혹은 사탄이 주인이 되느냐에 따라 인간의 의지가 결정될 뿐이다.19)

 
(2)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

  에라스무스는 인간의지의 자유를 주장한다.그는 루터의 노예의지론을 반대하며 타락으로 인해 인간의 자유의지가 약해졌지만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먼저 그는 모든 원인에 대한 찬양과 영광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지만,인간의 의지를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다시 한 번 되풀이한 뒤,기도와 감사를 인간의 할 일로서 제시하고 있다.20)

  에라스무스는 자유의지를 정의하기를 영원한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협동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인간의지의 능력이라고 한다.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주동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나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은혜에 협동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구원을 위한 인간의 노력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지만,선행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협동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없이 구원에 이를 수도 없다고 말한다.21) 즉 하나님을 존중하면서도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함께 협력한다는 중도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여기서 에라스무스의 신인 협동설이 나오는데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1차적 요소이고 2차적 요소인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적으로 함께 역사해야 한다는 것이다.22) 이 신인협동설은 후에 존 웨슬리의 구원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3.기타 여러 자유의지론

 
(1)칼빈의 예정론

  칼빈도 역시 어거스틴의 입장에  동조하여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했다.즉 모든 사람이 동일한 목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어떤 이는 영생으로,어떤 이는 영벌에 이르도록 미리 정해져 있다고 하는 예정론을 주장한다.그리고 이 예정은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불변적인 의지에 따라 결정되었기에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에 따라 변경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23)

  이같은 칼빈의 사상은 인간의 약함,무력,비참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바로 하나님의 은총의 승리를 세우기 위함인 것이다.결국 칼빈의 관심은 인간의 피조성이나 타락 그 자체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께 대한 찬양에 이르게 하는 데 있는 것이었다.24)

 
(2)웨슬리의 자유의지론

  웨슬리는 인간 구원에 있어서 무조건적인 선택의 교리가 틀렸다고 칼빈의 예정론을 비판한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선행은총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는 초자연적으로 회복된 자유의지가 있음을 주장한다.비록 부분적으로나마 회복된 자유의지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에 대해 응답할 수 있을 만큼 분별의 능력과 선택의 자유를 가진다고 한다.비록 하나님께서 인간구원의 주도적 역할을 하시지만,주신바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고 인간의 책임이며,구원에 이르렀다 해도 그것이 인간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웨슬리의 주장이다.다시 말해서,구원이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지만 제시되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기에 구원의 성취는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이 협동함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25) 이것이 웨슬리가 말하는 신인협동설이다.

 
(3)칸트의 자유의지

  자유라는 개념은 칸트철학의 출발점이다.

  칸트는 의지의 자유를 강조하여 말하기를 양심이 자유의지의 두가지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즉,첫째 증거는 인간의 범죄의식인데 그러한 범죄의식은 인간이 자기의 의무를 소홀히 한 일에 대하여 자책할 필요가 없다면 있을 수 없으며 둘째로 그는 인간은 의무의식에서 자유의지를 찾고 있다.즉 인간은 양심에 순응해야 하며 또 해야 하기 때문에 할 수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인간은 자유한 것인데 만일 실천이 불가능하면 부모가 자녀들에게 실천을 요구하겠는가 라고 반문하고 있다.26)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전의 자유의지에 대하여는 별다른 의견이 없다.하지만 문제는 타락 이후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과연 손상을 입었는가 하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열띤 논쟁이 있었고,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칼빈 신학과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웨슬레 신학은 아직도 이 문제로 대립하고 있다.

  신학자들이 제시하는 문제들에 대하여는 “옳고 그름”으로 나눌 수가 없으며,그 해결 또한 “옳고 그름”으로 나눠질 수 없다. 인간의 구원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되고 안되고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이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예정하신 구원의 놀라운 계획들을 성취해 나가신다. 인간 또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명령에 따라서 힘써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다.먼저 구원받았다고 해서 교만하거나 나태해하지 말고 더욱 열심히 주님의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 참 고 문 헌 *
1.김성태,「어거스틴의 인간론에 나타난 자유문제」,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석사논문,1988.

2.박대남,「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자유의지 논쟁에 관한 연구」,총신대학 신학대학원 석사논

  문,1991.

3.이려상,「칼빈의 인간이해」,한신대학 신학대학원 석사논문,1991.

4.이승호,「칸트와 루터의 인간이해와 구원」,장신대학 신학대학원 석사논문,1990.

5.목회와 신학,1992년 6,7,8,9 월호.

6.「그리스도교 대사전」,서울:대한기독교서회,1978.

7.Martin Luther,Henny Cole,The Bandage of the Will,Michigan:Baker Book House,1986.

8.어거스틴 저,김창식 역,「기독교 강요」,서울:세종문화사,1976.

9.G.I.윌리암슨 저,나용화 역,「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 강해」,서울:개혁주의 신행협회,

  1992.

10.헨리 채드윅 저,서영일 역,「초대교회사」,서울:생명의 말씀사,1983.

11.J.L.니이브 저,서남동 역,「기독교 교리사」,서울:대한기독교서회,1965.

12.래리 리차즈 저,김진우 역,「신학용어 해설사전」,서울:생명의 말씀사,1993.

13.루이스 벌콥 저,신복윤 역,「기독교 교리사」,서울:성광문화사,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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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래리 리차즈 저,김진우 역,「신학용어 해설사전」(서울:생명의 말씀사,1993),p.345.

1)성기호,“자유의지 논쟁”,「목회와 신학」,1992년 6월호,p.198.

2)헨리 채드윅 저,서영일 역,「초대 교회사」(서울:기독교 문서 선교회,1983),pp.283-285.

3)Ibid.,pp.290,291.

4)박대남,「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자유의지 논쟁에 관한 연구」(서울:총신대학원,1991),pp.2,3.

5)어거스틴 저,김항식 역,「기독교 강요」(서울:세종문화사,1976),p.26.

6)김성태,「어거스틴의 인간론에 나타난 자유문제」(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1988),p.20.

7)성기호,“자유의지 논쟁”,op.cit.,p.200.

8)J.L.니이브 저,서남동 역,「기독교 교리사」(서울:대한기독교서회,1965),p.232.

9)김성태,op.cit.,p.25.

10)Ibid.,p.34.

11)J.L.니이브,op.cit.,p.227.

 

12)김성태,op.cit.,p.41.

 

13)J.L.니이브,op.cit.,p.236.

 

14)성기호,“자유의지 논쟁”,op.cit.,pp.201,202.

 

15)박대남,op.cit.,pp.76,77.

 

16)이승호,「칸트와 루터의 인간 이해와 구원」(서울:장신대학원,1990),p.50.

 

17)성기호,“루터의 노예 의지론”,「목회와 신학」,1992년 8월호,p.266.

 

18)Ibid.

 

19)이승호,op.cit.,p.52.

 

20)박대남,op.cit.,p.67.

 

21)성기호,“자유의지논쟁(Ⅱ)”,「목회와 신학」,1992년 7월호,p.253.

 

22)Ibid.,p.254.

 

23)성기호,“칼빈의 예정론과 웨슬리의 자유의지론”,「목회와 신학」,1992년 9월호,p.234.

 

24)이려상,「칼빈의 인간이해」(한신대학원,1991),p.34.

 

25)성기호,“칼빈의 예정론과 웨슬리의 자유의지론”,op.cit.,pp.237,238.

 

26)그리스도교 대사전,(서울:대한기독교서회,1978),pp.890,8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