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8. 12. 10:00ㆍ선교자료/5.선교자료
아르세니예프향토박물관을 나와 우리는 어제 안개가 끼어 가지 못했던 독수리전망대로 갔다. 블라디보스톡에서 가장 높은 산 오들리노예 그네즈도산이 독수리 둥지차람 생겨 독수리둥지라고 불렀는데 이 곳의 전망이 좋다보니 독수리전망대로 더 알려져 있다고 한다. 때 마침 날씨가 개어 금각대교가 잘 보인다. 금각대교 교각의 V자는 블라디보스톡을 뜻한다고 한다. 전망대에는 러시아어인 키릴문자를 만든 키릴형제동상이 서 있다. 계단을 내려와 지하도를 통과하여 건너편으로 나오니 푸니쿨라를 타는 승강장이 나왔다. 이 푸니쿨라를 타고 내려가면 푸쉬킨극장이 나온다. 지금은 극동종합기술대학 부속건물로 사용되고 있으나 1917년 4월에 이동휘를 비롯한 우리 한인 약 100여명과 러시아인, 중국인, 일본인 등 약 600여명이 모여 기독교전도대회를 개최했다. 이로 말미암아 4월 16일 이동휘는 신한촌 하바로브스카야 거리 김낙선 집에서 러시아헌병대에 체포되었다. 그 집회장소 옆에 세워진 푸쉬킨의 동상은 어딘가 모르게 고뇌에 빠진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조금 이른 저녁을 먹으러 레스토랑으로 이동하였다. 오늘의 메뉴는 러시아의 전통음식 시스락이다. 샐러드와 빵 소스, 시스락(돼지고기꼬치구이) 산딸기쥬스, 홍차가 나왔다. 시스락은 돼지고기나 닭고기, 양고기 들을 긴쇠꼬챙이에 끼워 바베큐를 하여 먹는 꼬치구이이다. 우리의 꼬치는 돼지고기이다. 맛있게 저녁을 먹고 산책삼아 신한촌으로 갔다. 신한촌은 개척리에서 전염병을 핑계로 7KM정도 떨어진 이 곳으로 이주시켜 새로이 정착한 곳이라 신한촌으로 불린다. 지금은 그 당시의 모습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이동휘선생이 거주했다는 집은 지금은 아레나상점으로 변해있고 한민학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언덕길을 따라 서울스카야(서울거리)가 남아 있다. 시간이 허락했다면 서울스카야거리를 걸으며 그때의 흔적을 하나라도 찾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신한촌기념비를 본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겠다. 다시 우리는 버스에 탑승하여 우수리스크로 갔다.
독수리전망대에서 바라 본 금각만대교
2012년 APEC 정상회담 개최를 앞두고 4년에 걸쳐 만든 다리로
현재 블라디보스토크의 랜드마크가 됐다.
바다에 비친 모습이 ‘금색의 뿔’같다고 해서 금각교란 이름이 붙여졌으며
V의 모양의 주탑이 특징이다. V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첫 글자에서 따왔다.
금각교를 보기에는 독수리 전망대가 가장 좋다
독수리전망대
블라디보스톡에는 도시의 전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이 있다.
독수리 둥지라 불리는 오들리노예 그네즈도(Orlinoye Gnezdo) 산이 그 곳이다.
Orlinoye Gnezdo 산은 블라디보스톡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정상의 높이가 214미터이다.
오들리노예 그네즈도(Orlinoye Gnezdo) 산에서는 골든 혼(Golden Horn)과
아무스키(Amursky), 우슬리스키 만(Ussuriisky Bays) 그리고 러시안 섬(Russian Island)
까지 한눈에 보여 아름다운 파노라마를 관광객들에게 선사한다.
블라디보스톡은 낮에도 흥미롭지만 밤의 야경이 아름답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블라디보스톡의 야경을 보러
Orlinoye Gnezdo 산을 찾고 있다.
독수리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잘 보이는 다리가 금각만대교이다.
2012년 APEC 회담을 기념하여 건설한 블라디보스톡의 랜드마크이다.
9세기 키릴 신부 형제는 희랍정교회 파송으로 러시아에 선교하러 왔다.
그당시에는 러시아에 문자가 없어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번역하기위해
문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문자를 키릴문자라고 한다.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 불라디보스톡에서 제일 높은 산
군인초소인 독수리 둥지에 그들의 동상을 세워 기리고 있다.
건너편에 보이는 건물이 우리가 타러가는 푸니쿨라 승강장이 있는 곳이다.
승강장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다음번 푸니쿨라에 탑승한다
드디어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푸니쿨라에 탑승했다.
푸니쿨라가 내려가는 길
푸니쿨라의 천정모습
아래에서 올라오는 푸니쿨라
상 하행성 쿠니쿨라가 서로 교행하다
드디어 도착 불과 1분 20초 탑승
쿠니쿨라를 타고 내려온 이유는 푸쉬킨극장을 보러가기 위해서다
푸쉬킨극장 옆에 세워진 푸시킨동상
푸쉬킨극장(이동휘 등이 참여한 집회장소) :
블라디보스토크 푸쉬킨 거리 10번
1917년 4월초 블라디보스토크 푸쉬킨극장에서 러시아인 우시니크의 사회로 러시아인, 한인, 중국인, 일본인 기독교도 6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기독교전도회가 개최되었다.
한인 약 100명, 일본인 30명, 중국인 10명이 참가하였다.
이때 김학준은 한인대표로 연설을 하였고 윤능효는 창가대를 이끌었다.
이동휘는 신도들을 선도하며 조직적인 행동을 보여 주었다.
이 집회에 참가한 얼마후인 1917년 4월 16일 이동휘는 신한촌 하바로브스카야 거리
김낙선 집에서 러시아헌병대에 체포되었다.
현재는 극동종합기술대학교 부속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오늘의 저녁은 특식으로 러시아의 대표음식 시스락(러시아식 전통꼬치바베큐)을 먹는다
시스락을 들고 건배를 하다
신한촌기념비
1863년 연해주에 한인들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신한촌이 형성되었고,
신한촌은 일제 치하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면서
신한촌도 사라지게 되었고,
1999년 8월 한민족 연구소가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이곳을 기리기 위해
‘신한촌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기념비는 3개의 큰 기둥과 8개의 작은 돌로 이루어져 있다.
기념비에는 ‘민족의 최고가치는 자주와 독립이며, 이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은 민족적 정신이며.. 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아파트건물이 예전에 한민학교자리라고 하는데 확실한 고증을 찾기가 어렵다고 한다
1911년 창립된 권업회는 민족주의 교육을 고취하기 위해 먼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있던 한인 학교인 계동 학교를 확대ㆍ개편하여 한민학교를 설립하고
민족주의 교육의 중추기관으로 삼았다.
이 학교는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 위치한 오랜 한인 거주 구역인 개척리에 있었으나,
개척리를 러시아 당국이 페스트 유행 등의 위생문제를 구실로 시 북쪽 변두리 지역인
아무르만이 내려다보이는 구릉지대에 있는 신한촌으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신한촌을 러시아식 이름으로 '카레이스카야 스라보카'라 호칭하고
교사(校舍)를 양옥 대건물로 건립하였다.
교사는 권업회 교육부에서 한민회와 공동으로
1912년 3월 신한촌에 크게 신축한 것으로 240명을 수용하는 규모였다.
현관, 정문과 각 실내에는 태극 문양을 새겨 넣어 민족주의 교육이념을 상징하였다.
예산은 총 4,698루블로 이 중 2천 루블은 권업회 부회장인 이종호(李鍾浩)와 일제강점 직후 순국한 이범진(李範晉)이 유언으로 각기 1천 루블씩 기증한 것이었다.
이 학교는 1백 데샤진(약 100일경)이나 되는 개간 경작토지까지 대부받아
그 수익으로 학교경비를 충당하였다.
민족의식 고취는 한민학교에서 특히 역점을 둔 교과내용으로 학생들이 배우고 부르던
창가도 「보국가(報國歌」ㆍ「대한혼(大韓魂)」ㆍ「국기가(國旗歌)」ㆍ「운동가」ㆍ「국민가」ㆍ
「소년건국가」ㆍ「한반도가」 등으로 모두 이러한 취지에 따라 불렸다.
러시아혁명 내전 기간 자료들이 불타 없어져 1910년대의 주소를 파악하기 어렵다.
학교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며 현재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고려인 거주지 증거'가 사라지는 순간을 목격하게 되었다. '울 세울스카야' 즉 '서울 거리 2A'라는 주소 표지판이 철거되고 있었던 것. 현대의 주인을 만나 버려지는 표지판을 줄 수 있느냐 물으니, '값 나가는 줄로 착각했는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것마저 사라진다면, 어디서 고려인의 자취를 찾을 것인가?ㅠㅠ
출처 : 카카오스토리 글쓴이 ChoKyu 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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