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개신교 선교 (AD 1750-)
2014. 9. 11. 22:33ㆍ선교자료/5.선교자료
V. 개신교 선교 (AD 1750-) | |
![]() |
윌리엄 케리 (William Carey, 1761-1834) 가난하기 짝이 없는 영국의 구두수선공 출신의 윌리엄 케리는 “근대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 이상하게도 그에게 선교에 대한 관심이 생긴 동기는 “쿡 선장의 마지막 항해”라는 책을 접하고 부터였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탐독하였고 독학으로 수개국어를 습득한 노력파였다. 1792년 87페이지에 달하는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기독교인들의 강구해야 할 수단들을 찾아”라는 책을 출간하였는데 이것은 선교에 관해 저술된 어떤 책보다도 가장 확신에 찬 선교적 호소를 하고 있다. 이 책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으며 후대 교회사에 끼친 영향을 생각한다면 마틴 루터의 95개 조항과 나란히 설 수 있을만큼 귀하다. 선교운동을 위한 여러역경을 거친후 1793년 인도로 들어가 40년간 선교사역에 힘썼다. 유럽과 미국에 케리의 노고와 편지를 통해 많은 선교기관이 설립되었는데 그중에는 런던선교회(1795), 스코트랜드와 글라스고우 선교회(1796), 네덜란드선교회(1797), 교회선교회(1799), 영국해외성서공회(1804), 미국해외선교위원회(1810), 미국침례선교협회(1814), 미국성서공회(1816) 등이 있다. 19세기에 있어서 선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윌리엄 케리라고 해도 결코 과장은 아닐 것이다. |
![]() |
헨리 노트 (Henry Nott, 1774-1844) 다른 지역과는 달리 태평양 지역에는 한번에 많은 수의 선교사들이 파송되었다. 1796년 런던선교회는 30명의 선교사들을 타이티로 파송했지만 선교사역은 선교사들이 원주민과 동화되고 낙심하고 병에 걸려 고생하는 등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던 벽돌공 헨리 노트 같은 이가 꿋꿋하게 16년을 아무런 성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도 견뎌내지 못했더라면 타이티 섬의 선교사역은 실패했을 것이었다. 1819년 포매어 왕의 세례식이 거행되었고 (비록 포매어 왕은 곧 옛생활로 돌아가 버렸지만) 타이티 원주민들 사이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곳을 방문했던 한 러시아 귀족은 유아살해, 식인축제, 전쟁 등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유럽 선교사들의 사역의 결과였던 것이다. |
![]() |
헨리 마틴 (Henry Martyn, 1781-1812) 그 당시 말썽없이 인도에 선교사로 들어가는 길은 동인도회사의 전속목사가 되어 들어가는 것 뿐이었다. 이렇게 동인도회사의 전속목사로 커다란 선교업적을 이룬 사람이 영국 콘월 태생의 헨리 마틴인데 그는 1806년 인도에 도착하여 짧은 기간 동안 사역했으나 중앙아시아에서 활동한 선교사 중 최고의 성경번역가였다. 4년동안 그는 군대에 종군하면서 유럽인들과 인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학교들을 세우는 등의 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신약성경을 힌두어, 페르시아어, 아랍어 등으로 번역했다. |
아도니람 저드슨 (Adoniram Judson,
1788-1850) 1812년 인도에 들어간 아도니람 저드슨 부부와 다른 6명의 선교사들은 미국 최초의 해외선교사라는 영예를 안았다.
앤도버신학교의 소수의 학생들의 선교에 대한 높은 관심은 미국선교사파송위원회 결성의 촉진제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미국 해외선교의 소박한 시작이
되었다. 저드슨은 동인도회사의 방해공작으로 인도를 터나 미얀마로 들어가 일생동안 배타적이고 마음의 문이 굳게 닫힌 그들에게 온갖 어려움을
무릎쓰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충실하였고 저드슨은 미얀마어로 성경을 번역하였다. |
![]() |
![]() |
히람 빙햄 (Hiram Bingham) 하와이(당시 샌드위치섬)의 경우는 어떻게
적은 수의 미국 선교사들이 낯선 문화 속에서 수십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사회의 각 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독특한 것이다.
1819년 7쌍의 부부가 앤도버신학교를 졸업한 히람 빙햄을 지도자로 하여 하와이를 향해 떠났다. 그들이 선교를 시작한 지 10년이 겨우 지났을
때 선교사들은 섬의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으며 빙햄은 지극히 존경을 받았는데 여러 추장들은 그를 단순한 영적 지도자 이상으로 극진히 모셨다.
도덕성과 물질주의로 인한 문제점들, 선교부 임원들의 마찰에도 불구하고 복음사역은 계속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
알렉산더 더프 (Alexander Duff) 인도에서 사역한 선교사들 중 가장
혁신적인 사람이 1830년 그의 아내와 함께 캘커타에 도착했던 스코트랜드 교회의 첫 번째 해외 선교사였던 알렉산더 더프였다. 더프는 인도의
개종자들은 대부분 하류층에서 나왔고 이들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기 때문에 인도선교는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상류층을 대상으로 학교를 개교하여
서구의 과학지식을 전해주면서 선교하였는데 호응이 대단하였다. 해외선교에 끼친 그의 공헌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의 영향력 때문에 수백명의 선교사
자원자들이 헌신을 하였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선교사업의 후원자가 되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약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교육사업과 복음사업을 연결한
그의 선교방법은 세계 도처에서 실행되었다. |
![]() |
죤 반더켐프 (John T. Vanderkemp, -1811) 최초로 남아프리카에 선교사로 온 사람은
홀랜드 출신의 의사였던 죤 반더켐프였다. 네덜란드 개혁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50세의 나이로 1799년 케이프 식민지에 도착하여 주로
호텐토트족 사이에서 사역하며 몇 번의 좌절을 이겨내고 수백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그는 매일 노예무역을 목격하며 대단히 마음아파하다가 노예를
해방시켜 주려고 수천 달러를 썼는데 그 중 17세의 나이로 그와 결혼했던 말라가시 여인도 있었다. 그는 선교사역을 시작한 지 12년만에
운명하였지만 런던선교회의 가장 훌륭한 개척자였다. |
로버트 모리슨 (Robert Morrison, 1782-1834) 로버트 모리슨은
19세기의 초엽 외국인게 적대적인 중국땅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모습으로 사역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저를 어려움이
제일 많은 곳으로 보내주시고 가장 축복하기 어려운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게 해주소서”라는 것이었다. 그의 기도가 응답되어 중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25년 동안 인내하며 사역하였지만 10여명의 개종자밖에 얻지 못하였고 그가 죽을 즈음에는 전 중국을 통틀어 3명의 중국인 신자가 남았을
뿐이었다. |
![]() |
![]() |
로버트 모팻 (Robert Moffat, 1795-1883)
남아프리카선교회의 창시자로 50년 이상 이 지역 선교에 큰 영향을 끼친 스코트랜드 출신의 로버트 모팻은 아프리카 선교에 있어 그보다 더욱
유명해진 사위 때문에 오히려 “데이빗 리빙스턴의 장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모팻은 리빙스턴보다 더 훌륭한 선교사였다. 그는
복음전파자, 번역가, 교육자, 외교관, 탐험가였는데 이러한 역할들을 잘 조화시켜 선교함으로써 아프리카 선교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다.
|
존 클라우 (John Clough) 알렉산더 더프는 상류층 사람들을 복음화 하는데 주력했지만 그의
뒤를 이은 많은 선교사들은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낮은 카스트 계급들을 위해 일하였다. 1865년 미국 침례교선교회 출신의 죤 클라우 박사 부부는 인도 옹골에 있는 로운스타선교회에서 사역하며 천민계급들 사이에서 큰 부흥을이룩하였다. 부흥은 꾸준히 지속되어 1878년 여름에는 하루에만 2,222명에게 침례를 준 일도 있었다. |
죤 윌리암스 (John Williams, 1796-1839) 태평양 군도에서 일했던 선교사 중 가장 혁신적이고 먼 미래를 바라보고 일했던 사람은 영국 태생의 죤 윌리암스였다. 이 지역에 폭넓게 끼친 그의 영향 때문에 “태평양의 사도” 혹은 “폴리네시아의 사도”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는 원주민 사역자들을 훈련시켜 여러 섬들에 파송하고 자신은 규칙적으로 그들을 방문하여 선교사역을 지도하는 방식을 사용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섬들 을 찾아 에로망고 섬에 도착하였다가 원주민들에게 습격을 당해 창에 찔려 숨을 거두었다. |
![]() |
![]() |
칼 구츨라프 (Karl F.A. Gutzlaff, 1803-1851) 칼 구츨라프를 언급하지 않고는 동양선교를 논할 수 없다. 독일태생으로 20대 초반에 네덜란드선교회에 의해 인도네시아로 파송되었는데 그곳에서 선교회 승인 없이 중국 피난민들을 위해 일하다가 후에 독립 선교사가 되어 홍콩에 거처를 정하고 한 세대 내에 중국을 복음화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15년이 못되어 300명이 넘는 중국인 사역자들을 훈련하여 파송했는데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수천 권의 신약성경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신앙서적과 소책자들이 배포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역들이 정직하지 못한 중국인 사역자들이 꾸며 낸 속임수였고 그의 명성은 훼손되었다. 그의 선교적 노력에 의해 중국복음화선교회가 조직되었으며 이 선교회는 1853년 허드슨 테일러를 중국에 파송하게 되는데 사실 구츨라프는 젊은 테일러가 선교의 방법과 목표를 설정하는 데 다른 누구보다도 더 큰 영향을 주었으며 후에 테일러는 그를 “중국내륙선교의 조부”라고 불렀다. |
데이빗 리빙스턴 (David Livingstone, 1817-1873) 선교역사에
있어 빠뜨려서는 안되는 이가 바로 데이빗 리빙스턴이다. 그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가 꼭 필요로 했던 영웅이었으며 아프리카선교에 불을 당긴
사람이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힐 정도로 확고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20세기 중반까지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를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여겼다. 1세기 이상 그는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최고의 영웅이었으며 헌신과 충성의 화신으로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도전을 주었다. 그가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가장 큰 공헌을 했다는 점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으나 선교사역 자체에 얼만큼의 결실을 맺었는가에 대해서는 비판할 점이 없지
않다. 리빙스턴은 사실 그의 많은 전기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위대한 성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소심한데다가 변덕이 심한
사람이었으며 이런 점 때문에 선교사역에 많은 곤란을 겪었다. 그러나 이런 약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아프리카 선교에
집중시킨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신 사람이었다. 리빙스턴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심적 충격을 주었고 선교의 열풍이 온 나라를 휩쓸기
시작했으며 선교에 대한 희생의 대가가 무엇이든간에 헌신하겠다는 젊은 남녀의 무리가 줄을 이었다. |
![]() |
![]() |
죤 게디 (John Geddie, 1815-1872) ‘태평양의 사도’라고 불리웠던 죤 윌리암스의 비극적인 죽음 후 수십명의 청년들이 그의 뒤를 잇겠다고 헌신하였다. 그중에서 ‘완고하고 유머가 전혀 없으며 단순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용감한 선교사’로 표현되는 게디는 노바 스코티아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면서부터 당시 인기를 얻었던 남태평양 선교에 대한 헌신의 마음을 가졌다. 1848년 그는 아내와 함께 뉴헤브리드즈의 섬들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안네이티움섬으로 가서 성경을 번역하고 복음을 전하며 원주민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했다. 그는 사역에 아주 뛰어났기 때문에 그 섬 주민 거의 전체가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의 비석에는 ‘그가 1848년 첫발을 내디뎠을 때 이 섬에는 단 한 사람의 기독교인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1872년 이 섬을 떠날 때에는 단 한 사람의 불신자도 없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죤 패튼 (John G. Paton, 1824-1906) 스코트랜드 태생인 죤
패튼은 남태평양에서 사역하였다. 뉴헤브리디즈의 아니와라는 작은 섬에서 두 번째 사역에서 많은 원주민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으며 원주민
기독교인들의 도움을 받아 2개의 고아원과 부흥이 계속되는 교회 및 여러 학교들을 세웠다. 개종한 추장의 후원으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패튼은 청교도적인 엄격한 법률을 만들어 섬 주민 모두가 이를 따르게 했다. 패튼은 말년에 선교지도자로서 호주, 영국, 미국을m방문하여 자금을
조달하고 뉴헤브리디즈에서 필요한 선교사를 헌신시키는 일을 주로 하였다. 그래서 19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30명 정도를 제외한 모든 주민들이
복음을 받아들였고 원주민 사역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학교가 세워져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부하였으며 24명의 선교사가 그들의 아내들과 더불어
봉사하였다. |
![]() |
![]() |
죤 콜러릿지 패터슨 (John Coleridge Patterson, 1827-1871) 죤 콜러릿지 패터슨은 멜라네시아 최초의 성공회 주교였고 영국의 유명한 시인인 사무엘 테일러 콜러릿지의 조카로 영국의 명문집안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였다. 멜라네시아 주교직을 제수받고 그는 선교선을 타고 여러 섬을 돌며 자원하는 소년들을 모아 뉴질랜드로 데려와 훈련시켜 고향에 돌려보내 독자적으로 복음사역을 하게 하였다. 동시에 그는 여러 섬의 주민들과 추장들과 우호관계를 맺어 그들의 신뢰를 받았다. 하지만 노예상인들의 출현으로 그의 사역은 타격을 입고 결국 노예상으로 오인되어 화살을 맞고 숨졌다. 패터슨의 죽음의 소식은 노예상들의 비열한 행위에 세상의 주위를 끌게되어 마침내 노예밀매는 근절되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남태평양의 선교에 헌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
![]() |
허드슨 테일러 (Hudson Taylor, 1832-1905) 사도 바울 이후 19세기 선교사들 중 큰 비젼을 갖고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방대한 지역을 복음화시킨 사람으로 영국출신의 허드슨 테일러는 능가하는 인물은 없다. 중국내륙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는 그가 독창적으로 만들었으며 그의 생전에만도 800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사역하였고 훗날 후원자 없는 독립선교(Faith Mission)의 모형이 되었다. 1853년 21세의 나이로 중국복음화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중국 상해로 머물다가 사치스런 선교사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개신교 선교사들이 가본 적 없는 내륙으로 들어가 사역하기 시작하였고 1865년 그의 선교경험과 성격이 반영되어진 중국내륙선교회가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테일러는 지식인들과 정식목회자들로서는 중국복음화가 요원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영국의 노동자들 중 헌신된 남녀일군들을 모집하였다. 그것을 통해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른 선교단체들과 쓸데없는 경쟁을 피하고 선교노력을 극대화 할 수 있었다. 재정지원과 개인후원의 문제에서 선교회는 정규적인 봉급을 약속하지 않고 자신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만 의지하게 하였다. 허드슨 테일러가 기독교 선교에 끼친 공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의 통찰력과 비젼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날 기독교 선교가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 의문이다. |
샬롯(로티) 딕스 문 (Charlotte Lottie Diggs Moon,
1840-1912) 침례교선교의 “수호성인”이라고 불리는 로티는 해외 선교사로 헌신한 첫 번째의 여성은 아니었지만 여자로서 큰 성공을 거둔 첫
번째 여성선교사였다. 버지니아 태생의 로티는 동생을 따라 중국 선교사로 떠났가 동생 귀환 후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여성선교사들에게
하찮은 일만 맡기는 선교풍토에 반기를 들고 핑투라는 지역에서 개척사역을 시작하였다 어려움 중 교회는 꾸준히 성장, 20년 내에 중국인 목사에
의해 천명 이상이 침례를 받았으며 핑투는 중국전역에서 남침례교 최대의 선교중심지가 되었다. 로티는 저술과 본국에서의 설교등을 통해 미국 남부의
많은 침례교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또 여성들에 의해서만 선교자금으로 쓰여질 크리스마스 특별헌금을 기획하였고 남자 선교사들이 사직함에 따라
비게 된 자리를 맡기 위한 여성들을 모집하였는데 그 결과는 엄청난 호응이었다. 로티의 사후에도 계속 로티 문 크리스마스 헌금은 증가하였고 그녀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여러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
![]() |
![]() |
플로렌스 영 (Florence Young)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의 토박이인 플로렌스는 남태평양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영적복지를 위해 일하겠다고 표명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플리머스형제단((Plymough Brethren)에 속한 그녀는 하루 12시간 이상씩 사탕수수를 베는 살인적인 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여 농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사역이 커져갔다. 1890년 중국선교의 소명을 느끼고 10년간 중국에서 사역하다 돌아오자 노예매매와 강제노동이 금지되어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플로렌스와 그의 동역자들은 귀향하는 노동자들을 따라가 솔로몬 제도의 각 섬에서 귀향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웠다. 1907년 선교회는 남태평양복음선교회로 명칭을 바꾸고 그녀의 친척들과 솔로몬 제도를 위한 선교사역에 헌신하여 생동감있는 복음주의 교회가 뿌리를 내리게 되어 지금도 계속 부흥하고 있다. |
![]() |
제임스 찰머스 (James Chalmers, 1841-1901) 뉴기니아에서 사역했던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선교사 중 하나가 제임스 찰머스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출신으로 1866년 부인 제인과 함께 런던선교사 파송으로 남태평양의 라로통가에서 10동안 사역하였지만 만족치 못하고 뉴기니아로 들어가 원주민들과 함께하면서 실천하는 사랑으로 효과적인 선교사역을 하였다. 그가 그 섬에 들어간지 5년이 지났을 때 사람을 잡아먹는 일도, 축제나 살인도 사람 해골을 가지고자 하는 욕망도 모두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원주민은 진실함을 가지고 일하는 챨머스를 사랑했으며 그에 대한 소문을 널리 퍼뜨렸다. 복음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열정으로 그는 젊은 동역자와 사나운 식인종 지역으로 알려진 플라이강 유역을 탐사하다 창에 찔려 숨지고 갈기갈기 찢겨 식인종에게 잡혀 먹었다는 소식을 남긴 채 실종되었다. |
헨리 스탠리 (Henry M. Stanley, 1841) 사생아로 태어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뉴욕 헤럴드지의 기자가 되어 1871년 데이빗 리빙스턴을 찾기 위해 아프리카로 급파된 헨리 스탠리는 그곳에서 4개월을 지내고 와
“나는 리빙스턴을 어떻게 찾았는가”라는 책을 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리빙스턴이 죽은 지 1년 후 그는 아프리카 탐험을 떠났는데
스탠리는 자신을 탐험가이자 무소속 선교사로 생각했다. 선교에 대한 그의 가장 큰 공헌은 데일리 텔레그라프지에 게재한 한 편지로써 그것을 통하여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일생동안 했던 것보다 더 많은 선교일꾼을 헌신하게 만들었다. 몸바사로부터 콩고강 어귀까지 아프리카를 횡단하는 999일간의
탐험은 전세계를 자극하여 검은 대륙에 선교사를 보내는 촉진제가 되었다. |
![]() |
![]() |
A.B. 심슨 (A.B. Simpson, 1843-1919) 국제적 선교사단체인 기독교인-선교사연합회(Christian and Missioanry Alliance: C&MA)의 창설자인 심슨은 실제 선교사로 활약한 적은 없지만 선교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 선교회들은 그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설교에 탁월한 목회자로 사역하던 슨은 환상속에 선교사의 부르심을 받고 몇 달동안 선교의 문이 열리도록 노력했으나 그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가 선교사로 헌신하는데 최대의 장애는 아내 마가렛과 6명의 아이들이었다. 교회를 사임한 그는 세계선교에 전적으로 헌신된 교회를 만드는 목표로 뉴욕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1887년 선교에 관심이 많은 신앙인들의 힘을 한곳으로 모으기 위한 기독교인연합(Christian Alliance)를 조직했고, 그 연합회가 더욱 발전하여 새로운 선교회인 복음주의선교사연합회가 창립되었다. 이 두 단체는 10년 후 1897년 기독교인-선교사연합회(C&MA)로 통합되었다. 심슨이 세상을 떠날때쯤에는 모든 대륙에서 C&MA 선교사들이 활약하였고 1919년 그가 세운 선교사학교가 뉴욕 나약에 기반을 잡았다. 그가 세운 선교사훈련학교를 본받아 북미 각처에 성경학교 붐이 일어났으며 이러한 학교들은 그 후 수십년 동안 독립적인 믿음선교회를 형성하는 주된 원천이 되었다. |
|
|
'선교자료 > 5.선교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블라디보스톡을 다녀와서7(독수리전망대 푸니쿨라 신한촌) (0) | 2019.08.12 |
---|---|
[스크랩] 선교 영상 (0) | 2016.05.30 |
Tajikistan (0) | 2013.12.10 |
Turkmenistan (0) | 2013.12.10 |
Kyrgizstan (0) | 2013.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