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개신교 선교 (AD 1750-)

2014. 9. 11. 22:33선교자료/5.선교자료

 

V. 개신교 선교 (AD 1750-)
윌리엄 케리 (William Carey, 1761-1834) 가난하기 짝이 없는 영국의 구두수선공 출신의 윌리엄 케리는 “근대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 이상하게도 그에게 선교에 대한 관심이 생긴 동기는 “쿡 선장의 마지막 항해”라는 책을 접하고 부터였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탐독하였고 독학으로 수개국어를 습득한 노력파였다. 1792년 87페이지에 달하는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기독교인들의 강구해야 할 수단들을 찾아”라는 책을 출간하였는데 이것은 선교에 관해 저술된 어떤 책보다도 가장 확신에 찬 선교적 호소를 하고 있다. 이 책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으며 후대 교회사에 끼친 영향을 생각한다면 마틴 루터의 95개 조항과 나란히 설 수 있을만큼 귀하다. 선교운동을 위한 여러역경을 거친후 1793년 인도로 들어가 40년간 선교사역에 힘썼다. 유럽과 미국에 케리의 노고와 편지를 통해 많은 선교기관이 설립되었는데 그중에는 런던선교회(1795), 스코트랜드와 글라스고우 선교회(1796), 네덜란드선교회(1797), 교회선교회(1799), 영국해외성서공회(1804), 미국해외선교위원회(1810), 미국침례선교협회(1814), 미국성서공회(1816) 등이 있다. 19세기에 있어서 선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윌리엄 케리라고 해도 결코 과장은 아닐 것이다.



헨리 노트
(Henry Nott, 1774-1844) 다른 지역과는 달리 태평양 지역에는 한번에 많은 수의 선교사들이 파송되었다. 1796년 런던선교회는 30명의 선교사들을 타이티로 파송했지만 선교사역은 선교사들이 원주민과 동화되고 낙심하고 병에 걸려 고생하는 등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던 벽돌공 헨리 노트 같은 이가 꿋꿋하게 16년을 아무런 성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도 견뎌내지 못했더라면 타이티 섬의 선교사역은 실패했을 것이었다. 1819년 포매어 왕의 세례식이 거행되었고 (비록 포매어 왕은 곧 옛생활로 돌아가 버렸지만) 타이티 원주민들 사이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곳을 방문했던 한 러시아 귀족은 유아살해, 식인축제, 전쟁 등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유럽 선교사들의 사역의 결과였던 것이다.
헨리 마틴 (Henry Martyn, 1781-1812) 그 당시 말썽없이 인도에 선교사로 들어가는 길은 동인도회사의 전속목사가 되어 들어가는 것 뿐이었다. 이렇게 동인도회사의 전속목사로 커다란 선교업적을 이룬 사람이 영국 콘월 태생의 헨리 마틴인데 그는 1806년 인도에 도착하여 짧은 기간 동안 사역했으나 중앙아시아에서 활동한 선교사 중 최고의 성경번역가였다. 4년동안 그는 군대에 종군하면서 유럽인들과 인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학교들을 세우는 등의 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신약성경을 힌두어, 페르시아어, 아랍어 등으로 번역했다.


아도니람 저드슨 (Adoniram Judson, 1788-1850) 1812년 인도에 들어간 아도니람 저드슨 부부와 다른 6명의 선교사들은 미국 최초의 해외선교사라는 영예를 안았다. 앤도버신학교의 소수의 학생들의 선교에 대한 높은 관심은 미국선교사파송위원회 결성의 촉진제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미국 해외선교의 소박한 시작이 되었다. 저드슨은 동인도회사의 방해공작으로 인도를 터나 미얀마로 들어가 일생동안 배타적이고 마음의 문이 굳게 닫힌 그들에게 온갖 어려움을 무릎쓰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충실하였고 저드슨은 미얀마어로 성경을 번역하였다.



히람 빙햄 (Hiram Bingham) 하와이(당시 샌드위치섬)의 경우는 어떻게 적은 수의 미국 선교사들이 낯선 문화 속에서 수십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사회의 각 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독특한 것이다. 1819년 7쌍의 부부가 앤도버신학교를 졸업한 히람 빙햄을 지도자로 하여 하와이를 향해 떠났다. 그들이 선교를 시작한 지 10년이 겨우 지났을 때 선교사들은 섬의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으며 빙햄은 지극히 존경을 받았는데 여러 추장들은 그를 단순한 영적 지도자 이상으로 극진히 모셨다. 도덕성과 물질주의로 인한 문제점들, 선교부 임원들의 마찰에도 불구하고 복음사역은 계속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알렉산더 더프 (Alexander Duff) 인도에서 사역한 선교사들 중 가장 혁신적인 사람이 1830년 그의 아내와 함께 캘커타에 도착했던 스코트랜드 교회의 첫 번째 해외 선교사였던 알렉산더 더프였다. 더프는 인도의 개종자들은 대부분 하류층에서 나왔고 이들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기 때문에 인도선교는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상류층을 대상으로 학교를 개교하여 서구의 과학지식을 전해주면서 선교하였는데 호응이 대단하였다. 해외선교에 끼친 그의 공헌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의 영향력 때문에 수백명의 선교사 자원자들이 헌신을 하였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선교사업의 후원자가 되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약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교육사업과 복음사업을 연결한 그의 선교방법은 세계 도처에서 실행되었다.



죤 반더켐프 (John T. Vanderkemp, -1811) 최초로 남아프리카에 선교사로 온 사람은 홀랜드 출신의 의사였던 죤 반더켐프였다. 네덜란드 개혁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50세의 나이로 1799년 케이프 식민지에 도착하여 주로 호텐토트족 사이에서 사역하며 몇 번의 좌절을 이겨내고 수백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그는 매일 노예무역을 목격하며 대단히 마음아파하다가 노예를 해방시켜 주려고 수천 달러를 썼는데 그 중 17세의 나이로 그와 결혼했던 말라가시 여인도 있었다. 그는 선교사역을 시작한 지 12년만에 운명하였지만 런던선교회의 가장 훌륭한 개척자였다.



로버트 모리슨 (Robert Morrison, 1782-1834) 로버트 모리슨은 19세기의 초엽 외국인게 적대적인 중국땅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모습으로 사역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저를 어려움이 제일 많은 곳으로 보내주시고 가장 축복하기 어려운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게 해주소서”라는 것이었다. 그의 기도가 응답되어 중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25년 동안 인내하며 사역하였지만 10여명의 개종자밖에 얻지 못하였고 그가 죽을 즈음에는 전 중국을 통틀어 3명의 중국인 신자가 남았을 뿐이었다.




로버트 모팻 (Robert Moffat, 1795-1883) 남아프리카선교회의 창시자로 50년 이상 이 지역 선교에 큰 영향을 끼친 스코트랜드 출신의 로버트 모팻은 아프리카 선교에 있어 그보다 더욱 유명해진 사위 때문에 오히려 “데이빗 리빙스턴의 장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모팻은 리빙스턴보다 더 훌륭한 선교사였다. 그는 복음전파자, 번역가, 교육자, 외교관, 탐험가였는데 이러한 역할들을 잘 조화시켜 선교함으로써 아프리카 선교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다.



존 클라우 (John Clough) 알렉산더 더프는 상류층 사람들을 복음화 하는데 주력했지만 그의 뒤를 이은 많은 선교사들은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낮은 카스트 계급들을 위해 일하였다.
1865년 미국 침례교선교회 출신의 죤 클라우 박사 부부는 인도 옹골에 있는 로운스타선교회에서 사역하며 천민계급들 사이에서 큰 부흥을이룩하였다. 부흥은 꾸준히 지속되어 1878년 여름에는 하루에만 2,222명에게 침례를 준 일도 있었다.





죤 윌리암스 (John Williams, 1796-1839) 태평양 군도에서 일했던 선교사 중 가장 혁신적이고 먼 미래를 바라보고 일했던 사람은 영국 태생의 죤 윌리암스였다. 이 지역에 폭넓게 끼친 그의 영향 때문에 “태평양의 사도” 혹은 “폴리네시아의 사도”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는 원주민 사역자들을 훈련시켜 여러 섬들에 파송하고 자신은 규칙적으로 그들을 방문하여 선교사역을 지도하는 방식을 사용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섬들 을 찾아 에로망고 섬에 도착하였다가 원주민들에게 습격을 당해 창에 찔려 숨을 거두었다.








칼 구츨라프
(Karl F.A. Gutzlaff, 1803-1851) 칼 구츨라프를 언급하지 않고는 동양선교를 논할 수 없다. 독일태생으로 20대 초반에 네덜란드선교회에 의해 인도네시아로 파송되었는데 그곳에서 선교회 승인 없이 중국 피난민들을 위해 일하다가 후에 독립 선교사가 되어 홍콩에 거처를 정하고 한 세대 내에 중국을 복음화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15년이 못되어 300명이 넘는 중국인 사역자들을 훈련하여 파송했는데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수천 권의 신약성경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신앙서적과 소책자들이 배포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역들이 정직하지 못한 중국인 사역자들이 꾸며 낸 속임수였고 그의 명성은 훼손되었다. 그의 선교적 노력에 의해 중국복음화선교회가 조직되었으며 이 선교회는 1853년 허드슨 테일러를 중국에 파송하게 되는데 사실 구츨라프는 젊은 테일러가 선교의 방법과 목표를 설정하는 데 다른 누구보다도 더 큰 영향을 주었으며 후에 테일러는 그를 “중국내륙선교의 조부”라고 불렀다.




데이빗 리빙스턴 (David Livingstone, 1817-1873) 선교역사에 있어 빠뜨려서는 안되는 이가 바로 데이빗 리빙스턴이다. 그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가 꼭 필요로 했던 영웅이었으며 아프리카선교에 불을 당긴 사람이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힐 정도로 확고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20세기 중반까지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를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여겼다. 1세기 이상 그는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최고의 영웅이었으며 헌신과 충성의 화신으로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도전을 주었다. 그가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가장 큰 공헌을 했다는 점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으나 선교사역 자체에 얼만큼의 결실을 맺었는가에 대해서는 비판할 점이 없지 않다. 리빙스턴은 사실 그의 많은 전기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위대한 성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소심한데다가 변덕이 심한 사람이었으며 이런 점 때문에 선교사역에 많은 곤란을 겪었다. 그러나 이런 약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아프리카 선교에 집중시킨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신 사람이었다. 리빙스턴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심적 충격을 주었고 선교의 열풍이 온 나라를 휩쓸기 시작했으며 선교에 대한 희생의 대가가 무엇이든간에 헌신하겠다는 젊은 남녀의 무리가 줄을 이었다.






죤 게디
(John Geddie, 1815-1872) ‘태평양의 사도’라고 불리웠던 죤 윌리암스의 비극적인 죽음 후 수십명의 청년들이 그의 뒤를 잇겠다고 헌신하였다. 그중에서 ‘완고하고 유머가 전혀 없으며 단순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용감한 선교사’로 표현되는 게디는 노바 스코티아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면서부터 당시 인기를 얻었던 남태평양 선교에 대한 헌신의 마음을 가졌다. 1848년 그는 아내와 함께 뉴헤브리드즈의 섬들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안네이티움섬으로 가서 성경을 번역하고 복음을 전하며 원주민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했다. 그는 사역에 아주 뛰어났기 때문에 그 섬 주민 거의 전체가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의 비석에는 ‘그가 1848년 첫발을 내디뎠을 때 이 섬에는 단 한 사람의 기독교인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1872년 이 섬을 떠날 때에는 단 한 사람의 불신자도 없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죤 패튼 (John G. Paton, 1824-1906) 스코트랜드 태생인 죤 패튼은 남태평양에서 사역하였다. 뉴헤브리디즈의 아니와라는 작은 섬에서 두 번째 사역에서 많은 원주민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으며 원주민 기독교인들의 도움을 받아 2개의 고아원과 부흥이 계속되는 교회 및 여러 학교들을 세웠다. 개종한 추장의 후원으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패튼은 청교도적인 엄격한 법률을 만들어 섬 주민 모두가 이를 따르게 했다. 패튼은 말년에 선교지도자로서 호주, 영국, 미국을m방문하여 자금을 조달하고 뉴헤브리디즈에서 필요한 선교사를 헌신시키는 일을 주로 하였다. 그래서 19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30명 정도를 제외한 모든 주민들이 복음을 받아들였고 원주민 사역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학교가 세워져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부하였으며 24명의 선교사가 그들의 아내들과 더불어 봉사하였다.





죤 콜러릿지 패터슨 (John Coleridge Patterson, 1827-1871) 죤 콜러릿지 패터슨은 멜라네시아 최초의 성공회 주교였고 영국의 유명한 시인인 사무엘 테일러 콜러릿지의 조카로 영국의 명문집안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였다. 멜라네시아 주교직을 제수받고 그는 선교선을 타고 여러 섬을 돌며 자원하는 소년들을 모아 뉴질랜드로 데려와 훈련시켜 고향에 돌려보내 독자적으로 복음사역을 하게 하였다. 동시에 그는 여러 섬의 주민들과 추장들과 우호관계를 맺어 그들의 신뢰를 받았다. 하지만 노예상인들의 출현으로 그의 사역은 타격을 입고 결국 노예상으로 오인되어 화살을 맞고 숨졌다. 패터슨의 죽음의 소식은 노예상들의 비열한 행위에 세상의 주위를 끌게되어 마침내 노예밀매는 근절되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남태평양의 선교에 헌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허드슨 테일러 (Hudson Taylor, 1832-1905) 사도 바울 이후 19세기 선교사들 중 큰 비젼을 갖고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방대한 지역을 복음화시킨 사람으로 영국출신의 허드슨 테일러는 능가하는 인물은 없다. 중국내륙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는 그가 독창적으로 만들었으며 그의 생전에만도 800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사역하였고 훗날 후원자 없는 독립선교(Faith Mission)의 모형이 되었다. 1853년 21세의 나이로 중국복음화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중국 상해로 머물다가 사치스런 선교사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개신교 선교사들이 가본 적 없는 내륙으로 들어가 사역하기 시작하였고 1865년 그의 선교경험과 성격이 반영되어진 중국내륙선교회가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테일러는 지식인들과 정식목회자들로서는 중국복음화가 요원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영국의 노동자들 중 헌신된 남녀일군들을 모집하였다. 그것을 통해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른 선교단체들과 쓸데없는 경쟁을 피하고 선교노력을 극대화 할 수 있었다. 재정지원과 개인후원의 문제에서 선교회는 정규적인 봉급을 약속하지 않고 자신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만 의지하게 하였다. 허드슨 테일러가 기독교 선교에 끼친 공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의 통찰력과 비젼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날 기독교 선교가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 의문이다.



샬롯(로티) 딕스 문 (Charlotte Lottie Diggs Moon, 1840-1912) 침례교선교의 “수호성인”이라고 불리는 로티는 해외 선교사로 헌신한 첫 번째의 여성은 아니었지만 여자로서 큰 성공을 거둔 첫 번째 여성선교사였다. 버지니아 태생의 로티는 동생을 따라 중국 선교사로 떠났가 동생 귀환 후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여성선교사들에게 하찮은 일만 맡기는 선교풍토에 반기를 들고 핑투라는 지역에서 개척사역을 시작하였다 어려움 중 교회는 꾸준히 성장, 20년 내에 중국인 목사에 의해 천명 이상이 침례를 받았으며 핑투는 중국전역에서 남침례교 최대의 선교중심지가 되었다. 로티는 저술과 본국에서의 설교등을 통해 미국 남부의 많은 침례교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또 여성들에 의해서만 선교자금으로 쓰여질 크리스마스 특별헌금을 기획하였고 남자 선교사들이 사직함에 따라 비게 된 자리를 맡기 위한 여성들을 모집하였는데 그 결과는 엄청난 호응이었다. 로티의 사후에도 계속 로티 문 크리스마스 헌금은 증가하였고 그녀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여러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플로렌스 영 (Florence Young)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의 토박이인 플로렌스는 남태평양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영적복지를 위해 일하겠다고 표명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플리머스형제단((Plymough Brethren)에 속한 그녀는 하루 12시간 이상씩 사탕수수를 베는 살인적인 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여 농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사역이 커져갔다. 1890년 중국선교의 소명을 느끼고 10년간 중국에서 사역하다 돌아오자 노예매매와 강제노동이 금지되어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플로렌스와 그의 동역자들은 귀향하는 노동자들을 따라가 솔로몬 제도의 각 섬에서 귀향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웠다. 1907년 선교회는 남태평양복음선교회로 명칭을 바꾸고 그녀의 친척들과 솔로몬 제도를 위한 선교사역에 헌신하여 생동감있는 복음주의 교회가 뿌리를 내리게 되어 지금도 계속 부흥하고 있다.


제임스 찰머스 (James Chalmers, 1841-1901) 뉴기니아에서 사역했던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선교사 중 하나가 제임스 찰머스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출신으로 1866년 부인 제인과 함께 런던선교사 파송으로 남태평양의 라로통가에서 10동안 사역하였지만 만족치 못하고 뉴기니아로 들어가 원주민들과 함께하면서 실천하는 사랑으로 효과적인 선교사역을 하였다. 그가 그 섬에 들어간지 5년이 지났을 때 사람을 잡아먹는 일도, 축제나 살인도 사람 해골을 가지고자 하는 욕망도 모두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원주민은 진실함을 가지고 일하는 챨머스를 사랑했으며 그에 대한 소문을 널리 퍼뜨렸다. 복음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열정으로 그는 젊은 동역자와 사나운 식인종 지역으로 알려진 플라이강 유역을 탐사하다 창에 찔려 숨지고 갈기갈기 찢겨 식인종에게 잡혀 먹었다는 소식을 남긴 채 실종되었다.


헨리 스탠리 (Henry M. Stanley, 1841) 사생아로 태어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뉴욕 헤럴드지의 기자가 되어 1871년 데이빗 리빙스턴을 찾기 위해 아프리카로 급파된 헨리 스탠리는 그곳에서 4개월을 지내고 와 “나는 리빙스턴을 어떻게 찾았는가”라는 책을 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리빙스턴이 죽은 지 1년 후 그는 아프리카 탐험을 떠났는데 스탠리는 자신을 탐험가이자 무소속 선교사로 생각했다. 선교에 대한 그의 가장 큰 공헌은 데일리 텔레그라프지에 게재한 한 편지로써 그것을 통하여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일생동안 했던 것보다 더 많은 선교일꾼을 헌신하게 만들었다. 몸바사로부터 콩고강 어귀까지 아프리카를 횡단하는 999일간의 탐험은 전세계를 자극하여 검은 대륙에 선교사를 보내는 촉진제가 되었다.

A.B. 심슨 (A.B. Simpson, 1843-1919) 국제적 선교사단체인 기독교인-선교사연합회(Christian and Missioanry Alliance: C&MA)의 창설자인 심슨은 실제 선교사로 활약한 적은 없지만 선교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 선교회들은 그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설교에 탁월한 목회자로 사역하던 슨은 환상속에 선교사의 부르심을 받고 몇 달동안 선교의 문이 열리도록 노력했으나 그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가 선교사로 헌신하는데 최대의 장애는 아내 마가렛과 6명의 아이들이었다. 교회를 사임한 그는 세계선교에 전적으로 헌신된 교회를 만드는 목표로 뉴욕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1887년 선교에 관심이 많은 신앙인들의 힘을 한곳으로 모으기 위한 기독교인연합(Christian Alliance)를 조직했고, 그 연합회가 더욱 발전하여 새로운 선교회인 복음주의선교사연합회가 창립되었다. 이 두 단체는 10년 후 1897년 기독교인-선교사연합회(C&MA)로 통합되었다. 심슨이 세상을 떠날때쯤에는 모든 대륙에서 C&MA 선교사들이 활약하였고 1919년 그가 세운 선교사학교가 뉴욕 나약에 기반을 잡았다. 그가 세운 선교사훈련학교를 본받아 북미 각처에 성경학교 붐이 일어났으며 이러한 학교들은 그 후 수십년 동안 독립적인 믿음선교회를 형성하는 주된 원천이 되었다.



메리 슬레서 (Mary Slessor, 1848-1915) 리빙스턴과 스탠리의 탐험과 선교사역은 많은 사람에게 도전을 주어 수십명의 선교사들이 아프리카고 떠났다. 당시 탐험이나 개척사역은 결코 여성 독신 선교사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 최소한 메리 슬레서가 아프리카 선교에 헌신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스코트랜드 태생으로 가난과 가정불화로 얼룩진 어린시절을 보낸 그녀는 27세의 나이로 현재 나이지리아에 위치한 갤러바로 떠났다. 50년간 어떤 백인도 살아남지 못했던 오지 오코용 부족들 사이에 살면서 그들을 가르치고 치료하였으며 부족간의 분쟁을 해결해 주었다. 그녀가 중재자로서 뛰어나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메리는 그 지역의 전체 재판관과 같은 임무를 수행하였다. 1892년 그녀는 오코용의 첫 부영사로 임명되어 대영제국 최초로 여성 부영사가 되는 영예를 누렸다.


죠지 그렌펠 (George Grenfell, 1849-1906) 죠지 그렌펠은 리빙스턴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의 사후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헌신했던 많은 영국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헨리 스탠리가 999일간의 탐험중에 발견했던 콩고강 유역에서 개척사역을 하였다. 그렌펠의 탐험가적인 개척사역은 여러 가지 성공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는 콩고에서 20년 동안 침례교 선교를 감독하면서 자신의 선교지역인 볼로보(Bolobo)에 큰 영적부흥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렌펠은 비록 서부로부터 동부를 잇는 선교기지를 건설하겠다는 애초의 그의 비젼을 벨기에 당국의 방해로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열병으로 소천하기까지 그의 개척사역을 성공적으로 계속해 나갔다.



알렉산더 멕케이 (Alexander Mackay, 1850-1890) 그렌펠과 침례교선교사들이 아프리카의 서부로부터 대륙으로 들어오는 동안 교회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 영국 국교회의 한 단체)는 대륙전체를 기독교 선교회의 기지들로 망을 짜놓겠다는 스탠리의 계획을 동부로부터 수행해 가고 있었다. 교회선교회가 아프리카 동부해안에 파송한 가장 유명한 선교사는 알렉산더 멕케이였다. 그는 1876년에 아프리카에 도착했는데 그 해는 그렌펠이 서부해안에 도착한 지 1년 반쯤 지난 때였다. 멕케이는 고등교육을 받은 스코트랜드인으로 본래 직업은 엔지니어였는데 특히 언어학과 신학에 해박한 만물박사였다. 그는 1876년 스탠리가 우간다 왕 므테사(Mtesa)가 선교사 파송을 요구한다는 강력한 선교적 도전을 주었을 때, 이에 대한 응답으로 교회선교회가 보낸 선교사 8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우간다에 도착한 그는 이후 우간다 교회성장의 초석을 놓았다.


죠나단 고포드 (Jonathan Goforth, 1859-1936)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 태어난 죠나단 고포드는 중국에서 주로 활동하며 한국과 만주에서도 사역하였고 가는 곳마다 놀라운 영적 부흥을 일으켰다. 중국에서의 사역 초기부터 고포드는 능력있는 전도자로 알려졌다. 중국인과 접촉하기 위한 고포드의 방식은 그 당시 선교사들의 방법과는 판이한 것으로 그는 기꺼이 사생활을 포기하고 가정을 개방하여 지역 주민들과 접촉하고 친구를 사귀는 수단으로 활용하자 몇 십리 밖에서도 손님들이 찾아왔으며 어떤 날에는 하루에 2,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몰려오기도 하였다. 20세기 초에 시작했던 고포드의 순회전도사역은 그가 1907년 한국을 방문하여 당시 온 한국교회를 휩쓸고 있던 부흥의 물결에 깊은 감동을 받고 나서부터였는데 그 후 계속된 부흥의 주춧돌이 되었다.


C.T. 스터드 (C.T. Studd, 1860-1931) 학생자원자 중에서 가장 명성이 높았던 사람은 아마 스터드일 것이다. 그는 모든 부와 특권을 기꺼이 포기하고 세계복음화의 과업 앞에 용기있게 마주서서 철저히 헌신한 학생 자원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캠브리지 대학생들, 이른바 “캠브리지 7인”이 중국내륙선교회의 선교사로 중국에 건너가 헌신한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당혹해 하였으며 한 신문기자는 ‘선교역사상 이렇게 머리 좋은 학생들이 한꺼번에 해외선교사로 나간 일은 없었다’고 쓰기도 하였다. 중국에서 10년정도 사역한 스터드는 그 후 학생자원운동(SVM)을 대표하여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강사로 활약하였는데 수천명의 학생들이 그의 집회에 모여들었고 수백명의 학생들이 해외선교사로 자원하였다. 그는 50세에 다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벨기에령 콩고에 들어가 18년간 선교사역을 하였다. 하지만 말년에 이르러 선교사들에 대한 엄격한 요구와 아프리카 기독교인들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시각, 그리고 그가 쓴 ‘D.C.D(Don’t Care a Damn : 비난에 개의치 말라)’라는 소책자가 큰 물의를 일으켰고 모르핀에 중독되었다는 소식 등으로 인해 면직처분을 받게 되었다. 갓 태어난 WEC은 스터드의 사후 사위 노만 그럽의 탁월한 지도력 하에 꾸준히 성장하여 수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있다.





윌프레드 그렌펠
(Wilfred Grenfell, 1865-1940) 영국 체스터 태생으로 바다를 동경하며 자란 그렌펠은 런던에서 의학공부 중 무디의 부흥회에서 C.T. 스터드와 J.E.K. 스터드의 간증을 듣고 회심하였다. 왕립원양선교회에 소속되어 북미 라브라도 해안을 여행하며 생존을 위해 거친 환경과 싸우며 희망없이 살고 있는 그곳 주민들의 육적, 영적 갈급함에 도전을 받고 선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사역을 시작하였다. 헐값으로 주민들을 착취하는 상행위에 분개하여 협동조합을 만드는 등 지역사회에 깊이 간여함으로 상인들과 선교회간에 반목이 조성되었다. 라브라도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위해 미국을 돌면서 설교하면서 그의 명성은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많은 젊은 남녀들이 그의 희생정신에 감동하여 라브라도 선교사역에 투신하였다. 라브라도의 빈민들에게 그는 성인 이상이었다. 그를 존경하는 한 사람은 “윌프레드 그렌펠이 문의 역할을 했다면 그 문을 통해 예수께서 오셨다고 생각합니다”
고 하였다.









죤 모트 (John R. Mott, 1865-1955) 죤 모트는 평신도였고 엄격한 실제 선교사로 일했던 적은 없지만 선교사역에 그가 미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무디의 후원으로 헐몬산에서 열렸던 첫 번째 기독학생수련회에서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면 어느 곳이든 선교사로 가겠다’는 프린스턴서약에 서명한 헐몬산의 100인중 하나가 되었고 후에 이 모임은 학생자원운동(SVM)으로 발전되었고 모트는 30년 이상 이 모임을 이끌었다. 그는 또한 YWMC에서 40년간 활동하면서 전세계의 선교사와 각국의 학생들과 함께 사역하였다. 모트의 가장 큰 공적은 그가 제창하고 주도하여 1910년에 열린 에딘버그선교대회로 이 10일간의 회의는 1,355명의 대표들이 참석한 최초의 초교파적이고 국제적인 선교사 연합회였으며 그 뒤 수십년동안 교회연합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에이미 카마이클 (Amy Carmichael, 1867-1951) 인도에서 55년간 사역하며 활동사항들을 자세하게 적어놓은 35권의 저서를 남긴 에이미 카마이클은 영국의 모든 개신교 여선교사를 대표할 만한 인물이었다. 케직운동의 열매인 그녀는 24세의 나이로 일본으로 떠났다가 후에 남인도에 정착하였다. 인도 도나버에서 사원의 창녀로 팔려간 아동들을 위한 사역에 일생동안 헌신하였는데 이 아동들의 존재는 선교사들까지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폐습을 타파하려는 인도의 개혁자들의 도움도 받으면서 에이미는 고집스레 이 사역을 계속해 그 후 수십 년 동안 수백명의 아이들이 구출되어 도나버에서 양육받았다. 그녀가 만들었다고 알려진 도나버공동체는 모든 사역자들이 인도 옷을 입고 인도식으로 이름을 지었으며 외국에서 온 사역자들과 인도의 사역자들은 모두 모여 공동생활을 하였다.




사무엘 즈윔머 (Samuel Zwemer, 1867-1952) 13세기의 레이몬드 룰 이후 회교권은 보다 열매를 쉽게 맺을 수 있는 지역 때문에 무시되어왔다. 영국성공회가 1860년대에 이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할 때 교단의 도움 없이 선교를 시작한 이가 학생자원자인 사무엘 즈윔머였다. 그는 호프대학 재학중 헐몬산의 100인을 감동시킨 로버트 윌더의 설교를 듣고 선교사로 자원하였다. 회교지역으로의 파송을 희망했지만 선교부로부터 거절당한 즈윔머는 친구 제임스 켄틴과 함께 미국아랍선교회을 조직하여 아라비아선교를 시작하였다. 카이로에서 열린 회교권선교사총회의 초대의장이었고 미국에서는 학자원운동의 순회강사 사역을 통해 많은 학생들이 해외선교에 헌신하게 하였다. 비록 그의 사역으로 인한 개종자는 적었지만 회교권 사람들에게 꼭 복음을 전해야만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새롭게 일깨웠다.





로버트 스피어 (Robert E. Speer, 1867-1947) ‘학생자원운동(SVM) 정신의 구현자’라고
불렸던 로버트 스피어는 역시 SVM의 중추였던 죤 모트와 일생 내내 두터운 우정을 유지하
였고 모트처럼 평신도로서 해외선교운동에 헌신하였다. 프린스턴을 졸업한 그는 SVM의 순회서기가 되어 1년동안 천명 이상의 해외선교자원자들을 모집하였다. 선교사로 나가려고 준비하는 중 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선교부의 최고 행정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해왔다. 수많은 학생들을 선교사로 보내고 자신은 본국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아 번민했지만 핵심자리에서 해외선교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 수락하여 70세까지 46년간 사역하였다. 은퇴후에도 여러 대학과 집회에서 강연하며 해외선교를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아이다 스커더 (Ida Scudder, 1870-1952)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의료선교사 가문인 스커더 집안의 첫째 선교사였던 죤 스커더의 막내아들인 죤의 딸이 아이다 스커더로 그녀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인도에서 사역하였고 그녀도 인도에서 태어났다. 미국에 와서 코넬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마지못해 가문의 전통을 따라 인도의 의료선교사가 된 아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커더 가문 누구보다도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처음 조그만 방에서 몇 명 안되는 환자들을 데리고 시작하여 100명의 의사에 484개의 병상을 갖춘 종합병원과 60개의 병상을 갖춘 안과병원을 가진 현대적 의료단지를 이룩해 내었다. 또한 많은 이동진료소에서 20만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하며 매년 200명의 학생들을 배출하였다. 그녀가 얼마나 유명했던지 겉봉에 ‘인도, 아이다박사’라고만 써도 그녀에게 정확히 편지가 전달되었다.



롤랜드 빙햄
(Roland Bingham, 1872-1942) 젊은 캐나다 청년인 월터 고원즈(Walter Gowans)에 의해 설립된 수단내륙선교회(Sudan Inland Mission: SIM)를 이어 받은 롤랜드 빙햄의 끈질긴 집념으로 SIM은 기독교 역사상 아프리카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선교회가 되었다. 빙햄은 수차례 아프리카를 향해 떠났으나 말라리아로 인해 사역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고 동역한 사역자들도 죽거나 병으로 사역을 중단하였다. 굴하지 않고 빙햄은 세 번째 시도로 아프리카의 파티키에 본부를 두고 꾸준히 사역하였고 특히 나병퇴치사역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SIM의 사역범위는 넓어져 이디오피아에 교회를 세우게 됨으로 아프리카에 헌신한 그의 삶은 절정을 이루었다.


머드 캐리 (Maude Cary, 1878-0000) 20세기 초는 여성 선교사들의 수가 남성과 비슷하거나 많게 되었으며 어떤 지역에서는 여성 선교사가 없었더라면 선교사역이 사실상 와해될 뻔하였다. 그런 실례가 모로코에서 활동한 복음선교사연합(Gospel Missionary Union)에서 있었다. 복음선교사연합은 모로코에서 사역하고 있는 5개 선교단체 중 하나였는데 1894년 이래 회교도들에게 복음으로 접근하기 위해 분투중이었다. 그러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교의 높은 벽을 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졌으며 낙심된 마음과 풍토병이 선교사역에 손상을 가져왔다. 선교기지를 폐쇄하고 다른 곳에 집중하자는 사실 논리적인 해결방안이었다. 오직 그중에서 머드 캐리라는 독신 여성 선교사만이 끝까지 남아 아무리 두드려도 반응이 없는 그 암울한 기간 동안 좀처럼 보기 힘든 탁월한 능력으로 사역하였다.

스탠리 죤스
(E. Stanley Jones, 1884-1973) 애즈베리대학 재학중 학생자원자가 된 스탠리 죤스는 감리교선교부로부터 인도로 파송받아 인도의 지식인들을 위해 일하는 선교사 중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그의 설교 초점은 그리스도였지 기독교가 아니었다. 서구선교사들이 인도에 들여온 것 역시 기독교였지 그리스도가 아니였으며 죤스는 만약 인도의 지식인들이 서구문명의 옷이 제거된 그리스도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리라고 믿었다. 복음전도자와 기독교 지도자로서 죤스의 명성이 높아져 인도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존경을 받았고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도 그의 친구였는데 비록 기독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지극히 존경하였다. 세계복음화에 대한 죤스의 사상은 그의 저서 ‘인도로 향하는 길의 그리스도(The Christ of the Indian Road)’라는 책에 잘 나와있다. 그 책은 20세기 선교사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


죠안나 빈스트라 (Johanna Veenstra, 1894-1933) 미국 뉴저지 패터슨 태생의 죠안나 빈스트라는 여러 가지 점에서 20세기에 자신의 몸을 드려 선교사로 헌신했던 수많은 독신 여성 선교사들을 대표한 표본이었다. 수단연합선교회(Sudan United Mission)에 지원하여 루페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청년들을 복음전도자로 훈련시키는 기숙사가 학교를 세워 많은 학생을 배출하였고 틈틈히 시간을 내어 복음사역과 의료봉사를 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녀의 기숙사 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특권으로 여겼고 특히 그녀의 의료사역은 큰 인기를 끌었다.




윌리암 캐머론 타운센드 (William Cameron Townsend, 1896-1982) 20세기 성경번역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이는 WBT/SIL의 설립자 윌라암 캐머론 타운센드로 빌리 그래함은 그를 “우리 시대 최고의 선교사”라고 극찬하였고, 미국선교센터의 랠프 윈터는 그가 지난 2세기 동안 윌리엄 캐리나 허드슨 테일러와 견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3인의 선교사 중의 한 사람이라고 찬양하였다. 캠은 로스앤젤스에 있는 옥시덴탈대학 2학년대 SVM(학생자원운동)에 가입하고 후에 죤 모트의 설교에 도전을 받고 선교사로 헌신할 결심을 굳혔다. 1917년 과테말라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한 캠은 그가 맡고 있던 지역의 칵키퀼 인디언들이 그들의 언어로 된 성경이 없다는 것과 한 인디언이 ‘당신네 신이 그렇게 똑똑하다면서 우리말도 모릅니까?’라는 말에 큰 도전을 받고 성경번역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후 캠은 알칸사스에서 위클리프캠프를 설립하였고 곧 개신교 선교회 중에서 두각을 나타나게 되었다. 그 후 캠은 성경번역사역에 온 일생을 투신하였는데 그것은 어떤 것보다도 성경에 대한 확신과 믿음 때문이었다. “가장 훌륭한 선교사는 선교지 원주민의 언어로 쓰여진 성경이다. 성경은 선교사들처럼 안식년도 필요없고 외국인이라고 배척받는 일도 없다.”

클래런스 죤스 (Clarence W. Jones, 1900) 다른 전문 직업선교와 마찬가지로 방송선교 역시 그 필요성을 인정받기까지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였다. 아마 클래런스 죤스같은 선견지명을 가진 지도자가 없었더라면 방송선교는 오늘날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죤스는 복음을 위해 ‘악마의 도구’인 방송을 활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국내에 수신 장비가 6대 밖에 없을 때 외국에 나가 방송국을 세우겠다고 해서 ‘바보같은 죤’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는 세계복음화를 위해서는 통신분야에서 선교사들이 선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실패와 역경 끝에 에콰도르 퀴토에 세운 HCJB (Heralding Christ Jesus’ Blessisngs)는 1931년 역사적인 첫 방송을 내었다. 그후 몇 달 내에 세계라디오선교회가 공식 결성되었다. 출력은 계속 강화되 방송을 청취한 사람들의 편지가 뉴질랜드, 일본, 인도, 소련 등지에서도 쇄도하게 되었다. 세계라디오선교회는 반세기를 넘게 사역해 오며 단순한 방송국 이상이 되어 병원, 이동진료소, 출판사, 컬러TV 방송국등을 운영하고 있다.

글래디스 아일워드 (Gladys Aylward, 1904-1970) 런던의 노동자의 딸로 태어나 하녀로 살며 향락에 빠진 생활을 하던 글래디스는 회심 후 선교사로 헌신하려 중국내지선교회의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내지선교회의 훈련을 마치지 못하고 탈락한 후에도 선교사의 꿈을 잃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중국으로 보내주실 것을 확신하고 기차삯을 모았고 중국에 대한 책을 읽고 조사하였다. 그러다 지니 로슨(Jeannie awson)이라는 중국 선교사 과부 할머니가 누군가 와서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알고 중국으로의 힘겨운 여행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로슨이 경영하는 양쳉의 여인숙에서 일하다가 로슨이 사망한 후 양쳉의 지사로부터 시골 여자들의 발을 조사해달라는 요청을 받아 여러 곳을 다니며 선교사역이 꽃피우기 시작했다. 일본과의 전쟁기간동안 그녀는 중국을 위해 구호품 조달과 스파이의 역할을 감당하기도 하다가 1940년 100명이 넘는 입양한 전쟁고아를 데리고 산을 넘고 황하를 건너 태국 국경을 넘어 안전지대로 피난하였다. 그녀는 전기, 영화, 방송등에 의해 국제적인 명사가 되었고 후에 대만에서 계속 사역을 하며 세계 각처를 여행하며 강연과 활동을 하였다.


죤 브로져
(John Broger) 2차대전이 끝나자 극동지역에서 방송으로 선교를 하려 했던 세 사람은 그 꿈을 실현시키기 시작했다. 태평양 제38기동함대 장교였던 죤 브로져는 방송선교의 강력한 꿈을 안고 귀국하였고 그의 친구였던 로버트 보우만(Robert owman - LA에서 기독교 방송국을 운영하고 있었다)과 윌리엄 로버츠(William Roberts - 목사로 LA에서 라디오 프로에 출연하고 있었다)가 그의 꿈을 지지하고 협력하였다. 브로저는 상해로 가 그곳에 중계소를 세우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필리핀에 극동방송국 Far East Broadcasting Company)를 설립하였다. FEBC의 가청범위가 넓어지면서 청취자들의 편지가 쏟아졌고 많은 이들이 성경통신학교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 시작한지 채 2년이 안되어 12,000명이 원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구소련과 중국에서의 청취율도 대단했다. 14년간 사역한 죤 브로져는 미 합참의장의 요청으로 군대로 돌아가 고문관으로 사역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사장이 된 로버트 보우만의 지도하에 FEBC는 더욱 크게 발전하였다.


제시와 레오 핼리웰 (Jessie and Leo Halliwell) 아마존 강 유역을 따라 18,000Km를 오르내리고, 정글을 따라 1,600Km를 여행하며 밀림에 둘러싸인 벨렘(Belem)과 마나우스(Manaus)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의료사역을 펼친 핼리웰 부부는 결혼 직후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결정하고 안식일교회의 선교부에 자원하여 브라질에서 사역하다 의료사역의 필요성을 깨닫고 안식년중에 의학공부를 하고 조직을 확대하였다. 1956년 아마존 인디언들 사이에서 25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핼리웰 부부는 은퇴하고 리오데자네이로에서 남미의 안식일교회의 의료선교를 총괄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들의 헌신적인 봉사를 통해 아마존강은 이동병원선으로 붐비게 되었으며 이로써 그들의 개척사역은 종결되었다.



칼 벡커
(Carl Becker) 다른 어느 지역보다 아프리카는 항상 의료선교사들의 흥미를 끌어왔고 또 의료선교사들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아프리카의 복음화는 크게 진전되었다. 수많은 유명한 이들중 아프리카인들의 생명을 구하고 건강을 돌보는데 특별히 헌신된 의료선교사를 한 명 뽑는다면 콩고의 위대한 문강가(Munganga)인 칼 벡커를 따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필라델피아에서 의사로 개업한 그는 아프리카내륙선교회의 의료선교사를 구한다는 편지를 받고 옛 서약을 기억하고 고민 끝에 콩고로 떠났다. 오이카에서의 의료사역은 빠른 속도로 확대되는 중 그의 첫 번째 목표였던 복음화를 위한 영적사역에 헌신치 못함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는 의료사역이 영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였듯이 의료선교는 복음전파의 밑거룸이었다. 그의 대하여 한 아프리카 의대생은 “많은 선교사들이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고 많은 선교사들이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나는 문강가(벡커 박사)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다”고 그를 찬사하였다.





케네스 파이크 (Kenneth Pike) 기독교계나 학문계를 통틀어 20세기에 가장 뛰어난 언어학자는 SIL(Summer Institute of Linguistics)의 원장을 수년간 역임했던 케네스 파이크였다. 그는 중국내륙선교회에서 선교사로 적합지 못하다고 파송을 받지 못하였고 여러 선교회에 지원했으나 거절당하다가 위클리프캠프에 입교가 허락되었다. 그후 멕시코에 가서 미즈텍부족의 언어공부에 두드러진 진보를 보여 여름 위클리프 캠프에 교사로 초빙되게 되었다. 캐머론 타운센드의 조카딸로 번역 선교사로 멕시코에서 사였하기 위해 준비하던 UCLA를 졸업한 수재인 에블린 그리셋(Evelyn Griset)과 결혼하여 최상의 번역 선교사 부부가 되었다. 미즈텍어 신약성경의 번역을 10년만에 완료하자 파이크는 언어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번역선교사들을 돕는 일에 전력하였다. 그는 미시간 대학교와 SIL에서 강의와 연구를 계속하면서 음성학 이외의 언어학의 다른 분야로도 연구를 확대하였고 그의 연구는 전세계에 흩어져 일하는 성경번역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시카고대학의 에릭 햄프교수는 파이크의 첫 저서인 ‘음성학’은 ‘그 분야에서 가히 혁명적인 것이다’라고 하였고 덧붙여 지난 25년간 언어학자들이 관심을 갖지 않던 생소한 언어들로부터 만들어진 자료의 거의 절반은 전적으로 케네스 파이크의 연구와 노력, 가르침의 결실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결코 과장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헬렌 로즈비어 (Helen Roseveare, 1925-) 영국의 지체높고 존경받던 콘월(Cornwall) 가문에서 태어나 캠브리지 대학 1학년때 회심, 숙부들과 이모가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선교사로 헌신한 헬렌 로즈비어는 1953년 세계복음화십자군(Worldwide Evangelization Crusade: WEC)의 선교사가 되어 콩고로 건너갔다. 의료선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그녀는 동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병원 및 훈련학교를 개설하여 성공하였다.
후에 네보봉고로 발령되어 그곳에서 병원을 손수 세웠으나 후에 젊은 영국인 의사인 죤 해리스에게 그 책임자직을 넘겨주어야만 했고 이것은 그녀에게 무척 힘든 일이었다. 1964년 반군들로 인해 콩고는 유혈내전사태에 빠졌고 헬렌은 반군들에게 잡혀 고문과 강간을 당했다. 안정된 후에 콩고에 다시 들어갔지만 흑인 민족주의에 영향을 받은 학생들은 그녀의 권위에 공공연히 도전하였고 심지어 동료들까지 그녀의 지도력에 회의를 표시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결국 20년 동안 이끌었던 학교를 사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후 더 큰 사역을 할 수 있게 하셨는데 그것은 기독교선교의 시급함과 필요성을 외치는 국제적인 강연자의 사역이었고 그것을 통해 더 큰 일을 감당하였다.



폴 프리드
(Paul Freed) 방송선교회 중에서 가장 크고 세계전역에 흩어져 있는 것이 트랜스 월드 라디오(Trans World Radio)이다. 1954년에 설립된 TWR은 오늘날 모두 합쳐 500만 와트 이상을 내보내고 있으며 전세계 인구의 80%가 가청대상이다. 이렇게 강력하고 훌륭한 방송 선교회가 설립되기까지는 랄프(Ralph)와 폴 프리드 부자의 헌신과 희생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TWR의 설립자인 폴 프리드는 선교사의 아들로 중동에서 자랐다. 휘튼대학과 나약선교사대학을 졸업한 폴은 유럽을 방문했을 때 스페인선교의 사명을 느꼈고 방송선교가 적합하다는 생각에 방송선교의 계획을 세웠다. 지브롤터 해협 건너편 모로코의 탕헤르(Tangier)에 아버지 랄프의 도움으로 어려움 끝에 “탕헤르의 목소리”가 유럽과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 철의 장막을 뚫고 동유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모로코의 독립으로 몬테카를로스로 옮긴 TWR은 그 이후 세계적으로 그 방송망을 확대하였다. 헌신적이고 유능한 직원들, 기적적인 재정의 해결, 매월 선교부에 쇄도하는 수백 통의 편지들이 모두 TWR의 성공을 대변해 주고 있다.


로버트 스피어 (Robert E. Speer, 1867-1947) ‘학생자원운동(SVM) 정신의 구현자’라고
불렸던 로버트 스피어는 역시 SVM의 중추였던 죤 모트와 일생 내내 두터운 우정을 유지하
였고 모트처럼 평신도로서 해외선교운동에 헌신하였다. 프린스턴을 졸업한 그는 SVM의 순회서기가 되어 1년동안 천명 이상의 해외선교자원자들을 모집하였다. 선교사로 나가려고 준비하는 중 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선교부의 최고 행정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해왔다. 수많은 학생들을 선교사로 보내고 자신은 본국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아 번민했지만 핵심자리에서 해외선교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 수락하여 70세까지 46년간 사역하였다. 은퇴후에도 여러 대학과 집회에서 강연하며 해외선교를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피터 데이네카
(Peter Deyneka) 피터 데이네카의 슬라브복음선교회(Slav Gospel Association)은 자체적으로 방송국을 소유하지는 않았지만 방송을 복음전파의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 여겨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전세계 선교방송국을 통해 방송하였다. 1914년 16세의 나이로 러시아에서 미국에 온 피터는 회심 후 러시아를 오가며 복음을 전하다 정치적 상황이 급변하여 1930년 이후로는 여행도 복음도 전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동유럽선교에 열정을 가지고 그는 비슷한 비젼을 가진 이들과 슬라브복음선교회를 조직하였다. 클래런스 죤스의 주선으로 HCJB의 단파로 소련에 방송을 시작하였고 폴 프리드가 탕헤르에 TWR 방송국을 세우자 피터는 이를 활용하여 더 많은 프로그램을 슬라브 국가에 보냈다. 극동방송국과 다른 방송선교회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1960년대에는 소련에만 매달 600개 이상의 SGA 프로그램이 방송되었고 피터는 소련을 다니면서 SGA의 방송 프로그램에 대해 고마워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SGA는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지만 방송선교가 역시 주된 사역
이었다.



죠이 리더호프
(Joy Ridderhof) 방송선교가 세계복음화를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한편 그 한계점이 있었다. 그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언어를 쓰는 부족들은 그 혜택에서 제외되어 있으며 설령 언어가 알려져 있다 할지라도 사용인구가 적으면 그들을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 프로그램을 제작하거나 방송할 수 없었다. 성경번역은 부족을 언어를 배운다는 것도 쉽지 않았고 또 그 언어를 문자화해서 부족들을 공부시켜 성경을 읽게 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죠이 리더호프가 이런 문제점들을 위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는데 그녀는 온두라스의 작은 부족을 위한 녹음선교의 길을 개척했던 것이다. 1930년대 초에 죠이는 독신선교사로 온두라스에 갔는데 6년 뒤 건강을 헤쳐 고향 로스 엔젤스로 돌아왔다. 거기서 두고온 선교지 사람들을 생각하고 녹음을 통한 선교를 고안해 내었다. 그 이후 원주민의 목소리로 복음의 내용과 음악을 녹음하여 선교하는 녹음선교회(Gospel Recording)가 1941년 정식으로 조직되었다. 멕시코와 중미를 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35개의 새로운 언어와 방언을 녹음하였고, 알래스카, 필리핀 그렇게 녹음선교의 사역이 펼쳐졌다. 현재까지도 녹음선교회는 그 사역을 계속해 오며 수많은 언어와 방언으로 녹음 테이프를 만들어 전세계에 배포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베티’ 그린
(Elizabeth ‘Betty’ Greene, 1920-1997) 항공선교는 묘하게도 여성에 의해 시작되었다. 베티 그리인을 MAF (Mission Aviation Fellowship)의 설립자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전문사역으로서의 항공선교의 개념을 처음 소개하고 항공선교 초기에 가장 큰 공헌을 했던 사람이었음에는 틀림없다. 그녀는 최초의 전임 사역자였으며 새로 탄생한 선교회의 최초의 조종사였다. 2차대전 초기에 공군에서 복무했던 뛰어난 조종사로 전쟁중에 기독학생회지에 항공선교의 필요성과 방향, 계획에 대한 논문을 썼고 그것을 읽은 해군 조종사 짐 트럭스톤(Jim Truxton)은 크게 공감을 하여 베티에게 항공선교회를 조직하는데 합류를 권하였다. 그리하여 MAF가 조직되었고 곧 위클리프선교회의 요청을 받고 베티는 멕시코 정글, 페루에서 사역하였고, 수단오지선교회의 요청으로 동부 아프리카에서 수단, 에티오피아, 우간다. 케냐, 콩고 등지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을 조력해 주었으며, 마지막 사역을 이리안 자야에서 수행하고 은퇴하여 본부에서 사역하며 항공선교를 홍보하고 조종사를 모집하는 일을 하였다.



도날드 맥가브란
(Donald McGvran, 1897) 맥가브란은 인도의 하다에서 선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콜롬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은 후 다시 20년 정도 더 인도에서 사역하면서 대중운동(Mass Movements)에 대해 연구하였다. 오래전부터 그는 현재와 같은 선교사들의 사역을 통해서는 세계복음화라는 목표의 달성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전략이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때부터 여러 기독교학교들에서 선교학에 대해 강의하였고 1961년에는 기독교 역사상 선교방법론에 대한 연구가 가장 활발했던 것으로 유명한 교회성장연구소(Institute of Church Growth)를 세웠다. 그에게 있어 개선책은 대중운동이었다. 즉 부족 전체나 혹은 동질성집단(Homogeneous Units) 전체를 기독교로 이끄는 것이다. 그런 집단-개인의 개종은 개별적인 회심보다 훨씬 더 안정되고 교회성장을 지속하게 해준다. 동질성집단의 원리라고 명명한 맥가브란의 대중운동 개념은 1974년 로잔회의에서 발표된 후 세계에 널리 퍼졌다. 그는 1955년 이전까지 모든 선교회를 지배하고 있던 전통적이고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선교방법을 뒤흔들어 놓았다. 맥가브란이 그처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몇몇 신학교에서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렀던 선교학을 전문적 연구 차원으로 부상시켰다는 데 있다.





케네스 스트래컨
(R. Kenneth Strachan) 라틴아메리카선교회(Latin American Mission)의 설립자인 캔 스트래건과 그의 아내 수잔 사이에서 태어나 라틴 아메리카에서 자란 케네스 스트래건은 20세기 선교전략에 있어 탁월한 식견을 보여주었다. 그가 개발한 심층복음화(Evangelism in Depth)는 그의 저서 「복음화를 위한 혁명」 보여주는 바와 같이 가히 혁명적인 것이다. 아버지 사후 원치 않았던 선교회를 떠맡게 되었고 점차 사명감을 가지고 사역하기 시작하였다. 대규모집회를 통한 전도활동들은 외적으로 성공을 거두어 왔으나 그런 방법으로는 라틴 아메리카 복음화를 이룰 수 없겠다는 회의가 일기 시작했고 결국 대규모 전도팀이 내방하는 것보다 교회가 중심이 되어 전도에 전도에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복음화를 위한 하나님의 중점적인 계획이라고 믿었다. 이로부터 교회의 총력동원(Total Mobilization of the church)이라는 전략을 개발해 내었다. 평신도를 훈련시켜 전도활동을 극대화한다는 취지의 심층복음화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고 선교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밥 피어스 (Bob Pierce, 1914-1978)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일에 나도 마음 아파하자”라는 좌우명을 가졌던 밥은 실로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의 친구였다. 미국 대공황의 어려움속에서 근근히 순회전도자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던 그는 청소년사역에 헌신하다가 중국에서 청소년집회를 인도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1947년 중국을 방문하였다. 두번째 중국에 갔을때 고아원을 방문했다. 뼈만 앙상하게 남고 감기에 걸려있는 어린 소녀를 보고 ‘이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느냐?’라고 보모에게 항의할때 이미 수용인원의 4배가 넘는 고아들을 돌보고 있던 그 고아원의 보모는 ‘그러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하며 그 아이를 그의 품에 안겨 주었다. 이것이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어 그 후로 밥은 기독교자선사업에 헌신하게 된다. 중국의 공산화로 그곳에서 사역할 수 없게 되자 1950년 전쟁으로 초토화된 한국을 방문하여 불쌍한 아이들의 고통을 보고 국제선명회(World Vision International)와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음식과 의복과 약을 제공하기 시작했고 몇 년이 안 되어 2,000명이 넘는 고아들을 돌보았고 수 년이 지나자 그 수는 100배 이상 늘어났다. 10여년간 그는 세계에서 여행을 가장 많이 하는 10인 중의 한 사람이 되었고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보낸 사자로서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동서를 횡단하며 기독교인들에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도와 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렇게 모금된 수십만 달러는 세계각처의 고아원, 병원, 복음전도집회소 건축을 비롯한 구호사역에 쓰여졌다.


브라더 앤드류와 오픈도어스 선교회 (Brother Andrew & Open Doors) 브라더 앤드류는 네덜란드의 평신도로 성경을 자유롭게 사거나 읽을 수 없는 지역에 성경을 밀입하여 배포하는데 헌신하였다. 오픈도어스 선교회는 반기독교정권과 정면대결하는 정책을 펴고 있어 국가의 법과 권위를 무시한다는 비난을 받으면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대답한다. 15년간 앤드류는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단 한번도 체포당하는 일 없이 성경을 철의 장막 안으로 반입했다. 그가 「하나님의 일군」책을 쓰기까지 그의 사역은 거의 비밀에 싸여있었다. 그 책이 출판디자 후원금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전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사역에의 참여를 희망해왔다. 동시에 공산국가들도 그의 사역을 알게 되어 그는 요시찰 인물이 되었으며 동구권 여행을 사실상 금지당했다. 오픈도어스의 유명하고 논란이 많았던 성경밀수작전은 1981년 “진주작전”이라고 불린 600만 달러를 들여 200백톤의 성경을 중국으로 반입했던 작전으로 타임스지는 ‘중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성경반입작전이었다’고 표현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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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윈터 (Ralph Winter, 1924-) 오늘날 혁신적이고 비젼에 가득 찬 선교의 지도자로 미국선교센터(U.S. Mission Center)의 랄프 윈터를 꼽을 수 있다. 캘리포니아 공대를 졸업하고 코넬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프린스톤 신학교까지 마친 그는 과테말라의 마야 인디언 가운데서 10년간 사역하다가 도날드 맥가브란의 요청을 받고 풀러신학교 세계선교원에 합류하였다. 그후 1976년 무일푼으로 미국세계선교센터를 건립하고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곳에 사는 1,700으로 추산되는, 20억이 넘는 미전도종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막중한 짐을 짊어졌다. 미국선교센터는 여러 교회와 학생단체들과 연계된, 수십개 선교회로부터 온 300명이나 되는 사역자들을 망라한 ‘벌집’이었다. 센터는 본질적으로 선교단체들이 협력하는 ‘전략창고(Think Tank)’의 역할을 감당했다. 랄프는 ‘전시생활(wartime lifestyle)’을 하였는데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전시생활은 보통 때보다 돈이 더 들 수도 있고, 덜 들 수도 있다. 만일 어떤 군인이 참호 밖에서 휴대용 식량을 먹고 있다면 그는 많은 돈을 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조종하는 전투기는 한달에 4만 달러를 유지비로 쓸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전시는 평상시와 모든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다. 선교를 위해 뛰는 사람은 그런 전시생활을 해야만 한다.’ 랄프가 선교에 끼친 최대 공헌은 많은 선교회들과 개인들이 그를 통하여 세계선교에 대한 계획과 비젼을 새롭게 하고 아이디어를 얻었으며 결심을 새롭게 했다는 데 있다



돈 리챠드슨 (Don Richardson) 오늘날 서구에서 가장 흥미를 자아내고 실제적인 선교이론가 중 한 사람이 돈 리챠드슨이다. 그의 책 「평화의 아이(Peach Child)」「대지의 주인들(Lords of the Earth)」은 타문화권 선교의 어려움을 평신도들에게 전해주었다. 그의 화해유비론(Redemptive Analogy: 영적진리를 토착민 풍습에 적용하는 원리)은 1973년 달라스 신학교의 한 세미나에서 발표된 후 많은 비판과 지지,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20세 청년이었던돈은 1955년 프레이리성경학교의 예배 때 뉴기니아 식인종에게 가겠다는 서약을 하고 1962년 첫 아이가 태어나길 기다렸다가 아내 캐롤과 함께 뉴기니아로 건너갔다. 그들에게 맡겨진 싸위(Sawi)족은 배반과 배신은 이상적인 규범이고 식인풍습과 해골사냥의 풍습이 복합된 문화를 가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부족이었다. 오히려 그의 사역때문에 가까이 오게된 부족들이 싸움만을 일삼자 그는 포기하고 떠나기로 하였다. 돈이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그들은 서로 화해하기로 결정하고 특유의 평화의식을 거행했다. 그것은 자기의 자식을 적에게 주고 대신 한 아이를 데려옴으로써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이것은 돈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희생하신 뜻을 싸위족들에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유비가 되었다. 돈의 가장 뛰어난 학문적 걸작은 기독교 개종운동을 다룬 그들 마음 속에 있는 영원(Eternity in Their Hearts)라는 책이다. 그가 다년간의 연구를 통해 얻은 결과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창조자를 인정하는 “어떤 위대한 정신(One Great Spirit)”이 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4장 16-17절의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을 증거하셨다는 말씀에 기초하여 돈은 선교사들에게 자신감을 갖고 사역하라고 권했다. 그는 연구를 통하여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창조의 신 개념을 기독교와 관련시키면 큰 성공을 거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선교사들은 이 엄연한 사실을 무시하고 무조건 열심만 내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아마 돈 리챠드슨 처럼 평신도나 학자들에게 똑같이 지지를 받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토마스 왕
(Thomas Wang) 중국 북경의 3대째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토마스 왕은 11살때 불타는 전도자 죤 성을 통해 회심하고 15세때 하나님의 사역에 전임으로 사역하기 시작하였다. 어바나선교대회에서 도전을 받고 1차 NACOCE(중국선교를 위한 북미대회)를 개최, 중국교회 지도자들이 380명 모임으로써 선교를 위한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1974년 스위스에서 열린 로쟌대회에서 중국교회 지도자들을 독려하여 CCCOWE (Chinese Coordination Center of World Evangelism - 세계선교를 위한 중국협력센터)를 창설하고 1976년 홍콩에서 중국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선교를 위한 선교대회를 개최하였다. 그 후 로쟌운동의 국제총무로 임명되어 1989년 마닐라에서 열린 2차 로쟌대회의 사무총장으로 운영을 담당하였다. 1989년 서기 2000년까지 대사명의 미완성과업달성을 목표로 미전도종족을 향한 교회와 선교세력들을 규합, 조정하는 기독교 21세기운동(AD 2000&Beyond Movement)을 주도하였다. 기독교 21세기운동의 여호수아작전2000은 세계종족의 제자화를 향한 기독교역사상 최대의 전략적 동원운동으로 이 운동을 위하여 여러 나라의 여러 교단과 선교기관들이 열정적으로 후원하였다. “2000년까지 모든 종족에게 교회를!”이었다. 그 비젼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우리는 교회가 없는 종족가운데의 교회개척사역에 헌신하는 움직임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음을 보고 있다.


패트릭 죤스톤
(Patrick Johnstone) 패트릭 존스톤은 20세기 선교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세계선교의 비젼에 관한 한 그는 윌리엄 캐리에 근접한 인물이며 어떤 면에서는 이 시대의 윌리엄 캐리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아프리카에서 선교사역을 하였고 현재는 WEC 국제본부 선교정보연구실 대표로 있는 그는 그의 책 「세계기도정보Operation World)」를 통해 20세기 교회의 선교사역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전세계의 각나라, 각 족속의 복음화상황이 손에 잡히게 들어옴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남은 과업을 바라보며 비젼에 불타게 했다. 선교정보 수집과 분석, 전략설정에 평생을 바치고 있는 선교전략의 세계적 권위자인 죤스톤의 두 번째 저서 「교회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큽니다」는 매우 광범위하며 현재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사건들에 선교적인 통찰력을 더해준다.



루이스 부시 (Luis Bush) 현대 세계적인 선교지도자인 아르헨티나에서 태생의 루이스 부시는 1989년 마닐라에서 열렸던 2차 로쟌대회에서 미전도종족이 집중되어 있는 위도 10-40도 지역을 표현한 “10/40창” 개념을 주창하여 이 지역의 복음화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 개념을 통해 1993년부터 시작된 “창을 통한 기도”운동은 3천5백만명의 중보기도군단을 동원하였다. 부시는 한국 서울에서 열렸던 GCOWE’95에서 전세계에서 최우선 미전도종족을 향한 교회개척운동인 여호수아작전 2000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현재까지 있어왔던 어느 것보다도 그 규모가 크고 널리 보급되어진 세계선교의 네트워크인 기독교 21세기운동(AD2000 & Beyond Movement)의 국제총무로 사역하였고 현재도 선교운동의 지도자로 선교동원과 강연에 힘쓰고 있다.



죤 럽
(John Robb) OMF의 선교사로 말레이시아에서 사역하였던 죤 럽은 그후 월드비젼에 속하여 100여개국을 돌며 선교사훈련 및 자문으로 일하였고 부탄, 캄보디아, 보스니아, 모로코 등지에서 초교파적 특별기도운동을 일으켰다. 기독교21세기운동(AD2000 & Beyond Movement)에서 미전도종족 국제총무로 사역하였고 현재 전세계의 선교 네트워크들 간에 연결점이 되어 협력사역을 조장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어진 대사명라운드테이블(GCR- Great Commission Roundtable)의 지도자로 협력선교의 선봉장으로 사역하고 있다. 저서로「종족선교개념의 힘」,「평화를 만드는 기도의 권능:발칸반도 등 분쟁지역 사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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