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맥추감사절 설교 5편 - 1

2014. 6. 23. 21:54목양자료/5.절기자료

1.  맥추감사절의 교훈
    출23:16-19 
    대전중앙교회 /최병남목사



이스라엘 민족이 430년 동안의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40년동안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어려운 것은 양식을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셨으나 매일 하루 분량만 주시기 때문에 내일 먹을 것이 없으니 불안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소원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자기 손으로 농사하며 내일 먹을 것을 저장하여 놓고 안정된 가운데 편안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만큼 그들에는 참된 안식이 그리웠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40년 광야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에 들어가 지파별로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둘 시기가 되어 보리와 밀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자기들을 구원하여 안식을 누리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첫 열매를 드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맥추절입니다.

맥추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Ⅰ. 맥추절은 과거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였으나 과거 애굽에서의 노예생활과 광야생활중의 어려움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어려운 과정을 헤쳐 나왔어도 현재의 생활이 풍족하면 지난 일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정착에 만족하지 말고 과거의 어려움을 거울 삼아 더욱 열심히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6장 12절을 보게 되면 "맥추절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아울러 애굽 땅에서 노예생활하던 때를 기억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과거에 우리가 어떠한 생활을 했다는 것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혜로운 삶은 과거를 기억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현재를 바르게 의롭게 겸손하게 살아가는 삶, 이것이 맥추절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입니다.


Ⅱ. 과거에 받은 은혜, 현재에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데 있습니다.


신명기 8장 12절 이하의 말씀을 보게 되면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잘 살게 되고 여유 있게 됐다고 자부하게 될 때에 바로 그때에 자칫 잘못하면 내가 잘나서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교만해지게 되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죄악된 본성입니다. 사실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면 내가 똑똑해서 살아온 것 아닙니다. 지난날 돌이켜 보면 수 없는 환란 속에서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건져주시고 지켜주셨던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이와 같이 우리를 이끌어주시고 인도해 주셨다고 하면 우리의 장례도 나는 비록 부족하고 연약해도 우리 하나님의 은혜가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Ⅲ. 맥추감사절의 영적인 교훈입니다.


맥추절을 다른 말로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구약의 맥추절인 오순절에 가나안에서 첫 양식을 먹게 되었던 것처럼 신약에 맥추절인 오순절에는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성령께서 임하시므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께서 영원히 우리 속에 계시게 된 축복의 날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구약 맥추절에는 첫 열매를 거두어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신약의 맥추절에는 지금까지 모든 사람에게 내리지 아니하던 성령의 역사가 누구에게나 쏟아져 내리게 됩니다.

여기에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보잘 것 없고 적은 것 같아도 그것을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큰 은혜와 축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약의 오순절에 인간을 영원히 주리지 않게 하시려고 오신 성령님도 그날에 오셔서 계속하여 우리 안에 거하시며 지속적인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맥추절의 영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에 성령의 충만함을 주신 것에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감화를 통해서 중생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제부터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사탄의 공격에 싸워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맥추절을 맞이해서 맥추절의 세 가지 의미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1. 지난날의 어려운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날의 어려운 때를 기억할 때에 교만해지지 않고 인생을 의미 있고 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는 감사를 부르고, 불평은 불평을 부릅니다.
누가 감사하지 못합니까? 교만한 사람은 감사하지 못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늘 불평하게 되고, 원망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오늘 우리들이 감사생활을 통해서 날마다 겸손해지고 낮아져야 합니다. 감사생활은 우리에게 겸손을 가져오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가져오게 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들이 감사가 있을 때에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감사는 믿음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하게 될 때에 우리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어 주님을 닮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맥추절의 영적인 의미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중앙교회 교우여러분들이여! 이제부터 우리는 잃어버린 감사를 다시 찾으십시다. 멀어진 감사를 다시 가까이 합시다. 그리고 우리 생활 속에서 원망과 불평을 내버리고 기뻐하며 감사하며 험난한 인생 길에서 날마다 승리하는 복된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맥추감사절에 감사합시다
   본문 신16:9-12
   강남중앙침례교회 /김충기목사



오늘은 7월 첫 주일입니다. 6개월 동안도 하나님의 은혜로 평강 가운데 거하게 하시고 무더운 계절에 들어서도 영적으로 무장하는 달이 되게 하시고 오늘 맥추감사절에 몸과 마음을 바쳐 감사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절에 감사합시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맥추감사절이라 할 때 이것은 구약의 3대절기인 '유월절(뮤교절)', '맥추절(칠칠절)', '초막절'에 속합니다. 신명기 16:16절에서는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절기가 4월에 부활절, 7월에 맥추감사절, 11월에 추수감사절, 12월에 성탄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맥추감사절의 의의를 알아야 합니다.

一. 맥추절의 의의를 알자. (신명기 16:9-10절, 12절)
맥추절은 무교절(유월절)이 지난 다음 일곱 번째 주일 다음날을 하나님께 지키는 것입니다. 신명기 16:9-10절에서는 "칠 주를 계수할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칠 주를 계수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맥추절의 의의는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동안 애굽에 종살이를 하면서 마지막에 먹을 것도 못먹고 입을 것도 못입고 아들나면 죽고, 이와같은 죽음에 공포에 싸여있었는데 하나님의 역사로 양의 피로 문설주에 발라 하나님의 기적으로 그들을 출애굽하게 하셨고, 광야로 와서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으로 왔는데, 이 맥추절은 애굽에서 종되었던 것을 생각하고 구속하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16:12절에서는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택한 백성을 하나님의 은혜로 살리시고 구속하신 것을 생각하여 감사하는 절기, 그것이 바로 맥추절입니다.
오늘 우리는 기쁘고 감사한 일이 많습니다. 8.15기념일을 앞두고 남북한의 이산가족이 만난다는 사실에 기쁘고 가슴 부풉니다. 그러나 애굽 땅에서 구속하여 주셔서 살아난 것을 생각할 때 더욱 감사한 것처럼, 우리가 죄악된 세상에서 구속되어 택정하시고 나를 구원하시고 천국가는 축복을 허락하신 것을 감사하는 것으로 맥추절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된 것을 감사합시다. 우리 찬송합시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늘 찬송하게 하소서. 아버지 아버지 나를 구하신 아버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영광 받아 주옵소서" 맥추절의 의의는 참으로 귀합니다.

二. 맥추절은 첫 열매로 감사하자. (신명기 16:9-10절, 출애굽기 23:16절)
맥추절은 첫 열매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16:9-10절에서는 "칠 주를 계수할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칠 주를 계수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40년 지내는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와 생수를 먹고,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자기 손으로 농사해서 첫 열매를 거두는 것이 맥추절입니다. 우리 나라 곡식의 첫 열매는 보리이고 과일의 첫 열매는 살구이듯이 가나안 땅에서 첫 소출인 보리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출애굽기 23:16절에는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에서는 맥추절은 곡식중에 첫 소산을 자기 힘대로, 믿음대로 자원함으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三. 맥추절의 영적인 뜻을 알자 (사도행전 2:1절)
맥추절의 영적인 뜻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순절이요, 성령강림주일이요, 교회의 시작임을 말합니다.
맥추절의 영적 뜻의 첫째가 오순절인 것은 유월절 이후에 주일을 일곱 번 지난 후 즉, 7x7=49일 다음날(50일)이기에 오순(50)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 오순절이 사도행전2:1절에서 말씀하듯이 성령이 오신 날이기에 성령강림주일로 따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성령강림주일은 바로 교회의 시작입니다. 성령오시고 나서 교회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오심에 의해서 전도도 하고 기도도 하고 교회로 모이게 된 것입니다.

오늘 맥추절은 막혀있던 전도와 기도, 중심으로 하는 감사도 다시금 시작되는 오순절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애굽같은 세상에서 구원해주셔서 가나안의 축복을 허락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오순절 성령 충만하여 전도하고 전심으로 주께 헌신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구원해주신 것 감사드리며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자원함으로 힘대로 하는 감사되게 하옵소서!



3.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23:1-6
    예중교회/김철현 목사

온 지구를 뜨겁게 하던 월드컵이 끝났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대한민국을 새롭게 인식하고
우리스스로는 높아진 국가 위상에 기뻐하며 나름대로 성공한 월드컵을 자축하기도합니다.
분명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온 국민을 하나로 묶어 주는 큰 역할을 월
드컵이 해냈습니다. 그 가운데 긍정적인 하나의 변화가 있는데 그것은 한국축구의 4강 신화
를 이룬 장본인인 <거스 히딩크(Guus Hidink)>감독의 조국 <네덜란드>에 대한 관심과 국
가적 관계입니다. 그래서 꼭 가보고 싶은 외국 여행 희망지 중에 단연 네덜란드를 손꼽는다
고 합니다. 이것을 계기로 해서 양국 간에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진다면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네덜란드에 가 본적이 없습니다 마는 옛날부터 네덜란드하면 가장 대표적
으로 떠오르는 유명한 풍물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바로 [풍차(風車 :
windmill)]입니다. 풍차가 무엇인지는 다 아실 것입니다. 정확한 사전적 의미는 "바람의 힘
을 이용해서 동력을 얻는 기계"라고 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날개들이 돌아가며 힘을 만들어
내고 그 힘이 물을 뿜어 올리기도 하고 방아도 찧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 거대한 풍차를
돌리는 것이 바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람이 불어 주지 않으면 이 풍차는 무용지물(無用之
物)입니다. 만약 사람의 힘으로 그 풍차를 돌린다고 생각해 보면 그것이 가능할까요? 절대
로 안될 것입니다.
믿음의 삶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 나름대로는 날마다 잘 해 보려고 발버둥쳐 보지만
쉽게 실패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마음을 굳게 먹어 보기도 합니다. 의지를 다져 보기도 합
니다. 결심을 새롭게 해봅니다. 하지만 소용없습니다. 또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너무도 쉽게 우리를 절망하게 합니다.
<신앙 생활>이라고 하는 우리의 날개가 쉼 없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것을 돌릴 바람이 있
어야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돌려 나갈 수 없는 믿음이라는 풍차를 돌릴 수 있는 그
바람은 무엇이며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 하시나니 소년이라
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29-31)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힘입니다. 그런데 아
무리 바람이 불어도 풍차가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언제이겠습니까? 풍차의 방향
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풍차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바람을 향해서 서있어야 합니다. 방향
만 바람 쪽으로 향해 있다면 가만히 있어도 풍차는 힘차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의 마음과 행위가 하나님을 향해서만 있다면 그래서 하나
님이 주시는 힘으로 산다면 우리의 삶은 강한 힘을 받아서 힘차게 돌아갈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평가하며 살아갑니다. 자기만의 평가에 의해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자기평가에 의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런데 가
만히 살펴보면 대부분이 세 단계의 평가 기준을 거칩니다. 즉 과거, 현재, 미래의 삶에 의해
자기를 평가합니다.
먼저는,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과거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이 과거를 참 중요하게 여깁
니다. 묻어 두었던 옛이야기 보따리를 꺼내어 하나씩 풀어놓기를 좋아하는 습성들이 이 때
문입니다. 그 과거가 절망이었든지, 아픔이었든지, 실패였든지, 그래서 때로는 지우고 싶은
과거일지라도 소중히 여깁니다. 그 내면에는 오늘의 내가 있기에 그 과거는 소중한 것입니
다. 그래서 그 옛날을 돌아보며 나를 평가합니다.
또 하나는 <어떻게 살고 있느냐 하는 현재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인 현
재란 각기 다릅니다. 어떤 이는 가정이 있어 즐겁습니다. 가족이 있어 인생의 참 의미를 느
낍니다. 자식이 있어 소망이 있습니다. 고로 "나는 행복하다" 합니다. 반면에 불행하다 생각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에겐 모든 것이 늘 부족합니다.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현재보다 좀 더 나은 미래가 있기를 조
급하게 기다립니다. 얼른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이렇듯 현재 자기가 처해 있는 삶의
평가에 행, 불행의 기준을 둡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미래의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한층 더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넘어선 또 다른 세계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욕망이라는
것이 따라옵니다. 과거보다는 말할 나위 없이 나은 미래여야하고 현재보다도 더더욱 나아야
할 것입니다. 바라는 만큼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피곤합니다. 성취하는 길만
이 내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라 여기기에 그 미래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
니다. 때로는 인격이 무너지고, 인간관계가 파괴되고, 윤리와 도덕이 무시되는 <총체적 인간
성 상실>을 가져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나를 인정 받고자합니다. 무서운 세상입니다. 다
좋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기준으로 나를 평가하여 인정 받고자 하는 열성은 대단한 것
이라 합시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진정으로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있으니 이게 문
제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감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불평
과 원망은 잘하지만 감사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불평과 감사는 할수록 커집니다.
내 과거의 삶을 돌아 보건대 정말 감사한 일 뿐입니다. 그 과거에 매여 있었다면 아무짝에
도 쓸모 없을 나 같은 못난 인간이 이렇게 까지 왔다는 사실이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닙니다.
현재의 내 삶이란 더욱 눈물로 감사할 일입니다. 이렇게 좋은 세상을 만날 줄 누가 알았겠
습니까?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리라고 꿈속에서나 상상해 보았습니까? 여러분, 미워하
지 마십시오. 탓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밉다해도 가만 생각해보면 이 보다 좋은 사람
들이 없습니다. 특히 이 세상에는 내 남편보다 좋은 남자는 없습니다. 내 아내보다 좋은 여
자는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사람끼리 짝지어 놓으셨기 때문입
니다. 비단 인간관계뿐이겠습니까? 우리는 불만이 너무 많습니다. 요구가 너무 많아요. 원망
이 지나칩니다.
미국 <콜로라도 주의 덴버(Denver)>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두 남녀가 자동차 안
에서 졸도해 있는 것이 발견됐습니다. 자동차 가스인 일산화탄소가 차 속으로 스며드는 것
을 모르고 문을 잠그고 잠든 채 있다가 두 사람이 함께 졸도한 것입니다. 달려온 구조대는
잠겨진 차안에서 두 사람을 구해내기 위하여 결국 자동차의 유리창을 깨뜨리고 사람을 꺼내
어 인공호흡을 시키고 응급조치를 하였습니다. 구조대의 재빠른 조치로 두 사람은 죽음을
간신히 면하고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기가 막힌 일이 발생했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난 청년이 경찰서에 들어오더니 청구서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그 청구서는 다름이 아
니라 구조대가 그들이 목숨을 살려내기 위하여 자동차의 유리창을 깨뜨린 것을 수리하고 가
지고 온 청구서였다는 것입니다.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하나님은 한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용서함으로 구원을 얻게 하셨
습니다. 그런데 그 값진 구원을 거저 받은 우리들이 또 다른 요구들로 하나님을 괴롭힙니다.
말이나 됩니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제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하나님을
믿으면서 무엇이 불만입니까? 복중의 복인 죄 용서함 받고 구원의 복을 주었으면 감사할 것
이지 그렇지 못합니다. 언제나 우리의 마음과 입술에는 깨알같이 적힌 <불만목록서>와 <청
구서>가 들려져 있습니다. 무슨 불만을 터뜨릴까를 잠들기 전까지 생각하다가 잠이 들고 눈
만 뜨면 자동판매기처럼 쏟아냅니다. 하나님께 청구하려고 하는 것과 불만이 정말 가한 것
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교회가 너무 적어서 기분 나빠 못 다니겠습니다. 큰 교회에
가서 좀 폼 나게 예수 믿어 볼랍니다"."하나님, 사람들이 이 위대한 나를 알아주지 않아서
불만입니다."."하나님, 대박 한번 터져서 벼락부자나 만들어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예수 한
번 진하게 믿어 보겠습니다."혹여 이 정도의 유치한 불만과 어리석은 청구가 아닌지 모르겠
습니다. 성경은 이런 우리들에게 한 마디로 정신차리게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 뜻이니라"(살
전 5:16-18)
여러분 언제나 감사가 먼저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고 깨달음에 있습니다. 깨
달음만이 아니라 좀 더 나아가서는 고맙게 여기는 마음 곧 감사하는 마음에 행복이 있습니
다. 사람이 어떠한 여건에 있든지 고마운 마음을 가지면 그는 그만큼 행복할 수 있는 것입
니다.
영국의 설교가요 성서학자인 <메튜헨리(Matthew Henry)>는 어느 날 평소에 자기가 지나
는 골목길에서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매를 맞아 많은 피를 흘리며 겨우 집
에 도착을 했습니다. 놀란 가족들을 안심시키고 자신의 서재로 들어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는 10여 년 동안 똑같은 골목길을 지나면서 아무 사고가 없었던 사실에 대한 감
사가 없었습니다. 그저 무사히 집에 돌아온다는 것을 당연한 일이라 여겼기에 감사가 없었
습니다. 주님, 저의 무지를 용서하여 주시고 이제부터는 그 골목길을 지나 무사히 집으로 들
어올 때마다 감사하는 여생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지루함을 느
낄 정도의 자신의 평범한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요, 기적이라는 깨달음이 바로
감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범죄 심리학자인 <소퍼(Soper)>박사는 교도소에 있는 복역수와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의 차
이를 이렇게 말합니다. "교도소에 갇힌 사람들은 하루 종일 불평과 요구만을 말한다. 그러나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는 하루 종일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똑같이 울타리에 갇
힌 사람들이지만 어떤 사람은 감사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불평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감사란 <깨달음>과 <겸손>에서 오는 것이고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흔히 감사의 차원을 셋으로 생각합니다. 첫째는 <물리적인 감사>입니다. 다른 말
로는 <조건적인 감사>혹은<반사적인 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먹을 것을 주셔서 감사하
고 건강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일반적인 감사입니다. 둘째 감사는 <철학적 감사>가 있습니
다. 이것은 가난하다가 부해져서 하는 감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에서 깨달음이 깊어진 것
입니다. 전에는 은혜인 줄 몰랐는데 깨닫고 보니까 은혜요, 전에는 복인 줄 몰랐는데 깨닫고
보니 복이란 말입니다. 전에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줄 알았는데 깨닫고 보니 제
일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감사가 있고 셋째는 <신학적 감사>입니다. 이 감사는 예수께
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내 죄를 속량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이 은혜요, 기쁨이요, 복
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감사>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가치가 있는 감사가 있다면 바로 이
세 번째 감사일 것입니다. 이 감사를 배워야합니다.
우리가 읽었던 시23편은 너무나 유명한 다윗의 감사의 노래입니다. 이 시에서 다윗은 총체
적인 감사를 보여줍니다. 그의 과거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요, 현재의 삶
에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노래며, 장래 자신에게 베푸실 놀라운 하나
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과거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보다 마땅히 감사할 만한 일이 있었습니까? 8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형들의 시기와 질투 속에 목동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블레셋]의 전사
인 <골리앗>을 죽이고 그 포상으로 <사울>의 딸을 얻은 후 <사울>의 시기 대상이 되어
이곳 저곳으로 도망 다녀야 하는 어려운 시절을 겪게 됩니다. 더군다나 잠시 흐트러졌던 그
의 생활이 <밧세바>를 범하게 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계획적으로 살인하는 죄에 이르
게 합니다. 우리와 다를 바가 없는 그의 삶에 무엇이 감사 할만하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의
위대함은 이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잊지 아니했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이 신앙은 그 하나님께 감사하는데 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 감사의 극치가 오늘 그의
노래에 담겨져 있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은 다윗의 감사의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 주시는 총체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이 보다 더 어
떻게 표현하겠습니까?
인간은 누구나 이런 빈 잔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심령 속에 깃들
여 있는 이 빈 잔은 영원한 가치가 아니면 채워 질 수 없는 잔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이
세상의 어떤 것들로도 채워 질 수 없는 잔입니다. 여러분은 영혼의 잔을 무엇으로 채우려합
니까? 무엇으로 인하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감사 할 수 있습니까? 이 [맥추 감사주
일]에 여러분의 영혼의 빈 잔이 여전히 비어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가치 없는 잡
동사니들로 가득 차서 감사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보다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영혼의 빈 잔에 가득 찬 시기와 질투와 허영심, 그리고 미워하는 마음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들, 하나님께 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불 신앙적인 자기 자신의 벽들을 허물
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마땅히 채워야 할 영원한 가치들을 채우지 못하여 허기진 영
혼의 빈 잔을 감사의 조건들로 가득 채워서 오늘 다윗 같은 찬양을 끊임없이 드릴 수 있기
를 바랍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4.  감사치 않은 자의 변명 (맥추절)
    눅17:11-19
    예은교회/김학현목사


[17,1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
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이 예수님
의 말씀 속에는 10명이 모두 돌아와 감사할 줄 알았는데 의외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주님
은 한 명만 감사하러 온 것에 대하여 실망하셨고 놀라셨습니다. 당연히 감사해야 하는데 감
사하지 않으면 주님은 실망하십니다. 주님께서 실망하신 데서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은 모두
가 감사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한 감사의 기대가 있습니다. 10명의 문둥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으니 1명처
럼 돌아와 감사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그 기대가 무너지자 놀라고 실망하십니다. 그것도
당연히 감사할 줄 알았던 유대인들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감사할 줄 알았던 이들
은 안하고, 감사치 않을 줄 알았던 사마리아인은 와 감사하니 놀라실 수밖에요. 오늘날도 직
분에 걸맞지 않고, 믿음에 걸맞지 않은 감사생활을 하는 신앙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끔 저는 성도들의 감사생활을 보며 기대치 않은 사람에게 놀라고, 기대한 사람에게 놀랍
니다. 10여 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집사님이 아주 큰 돈을 벌었습니다. 한 달 후 추수
감사절을 저는 은근히 기대했습니다. 그 어떤 분보다 많은 추수감사헌금을 할 줄 알았습니
다. 그러나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예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액수 5만원이 그의
추수감사헌금의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감사를 기대하고 계시다는 걸 잊지 마
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는 같은 본문을 통하여 감사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생각하며 은혜를 나눴습
니다. 감사는 어려운 것이어서 그 스코어가 9대1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9대1이란 감사치 않
은 사람과 감사한 사람의 비율입니다. 오늘 9라는 스코어를 가지고 있는 다수, 감사치 않은
사람들의 변명을 들어보고자 합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듯, 감사치 않은 9명도 그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본문은 그것에 대하여 침묵합니다. 그러나 분명 그들은 이렇게 변명했을 것
입니다.

나중에 감사하려고 했습니다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한 명은 가족이나 친지에게 보이기보다 예수님께 감사하는 게 우선
이라 생각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러나 아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간 소외되
고 천대받던 문둥병에서 놓임 받은 것을 자랑하고 떳떳한 시민이 되었음을 이웃에게 알리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우선순위에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아홉은 “너무 그러
지 마십시오. 나중에 감사하려고 했습니다.”라고 외치고 싶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주 중요한 문제임에도 우선순위를 잘못 설정함으로 실패하기 쉽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신앙은 그 무엇보다 우선순위를 잘 정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실패한 이유를 아십니까? [삼상2:29]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
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의 것이어
야 합니다. 그러나 엘리와 그 두 아들은 자신들의 배 채우는 것에 가장 좋은 것을 사용하였
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중히 여긴 것이요, 우선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불신입니다.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 이 말씀
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부모자식간에 미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우선순위를 말씀하심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감사도 다를 수 없습니다.

그 무엇보다 먼저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다윗은 다윗성에 언약궤를 무사히 옮기고 나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려 감사드립니다. [대상16:7,8] “그 날에 다윗이 아삽과 그 형제를 세워
위선 여호와께 감사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다윗의 신앙이 위대한 점이 여기 있습니다. 그는 그
무엇보다 먼저 여호와께 감사합니다. 아홉이 실패한 것은 감사를 나중으로 미뤘기 때문입니
다. 여러분, 감사를 내일로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감사한 마음이야 왜 없겠습니까?

아홉은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감사한 마음이야 왜 없겠습니까? 제 가슴에는 주님
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가득하답니다.” 10명 모두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감사하지 않다면
인간이 아니죠. 그런데 문제는 감사를 마음으로만 담고 있는 사람과 감사를 행동으로 표현
한 사람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마음에서 나지만 행동화할 때 인정됩니다.

오늘 성경에서 10 사람 모두 감사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만 그
마음을 행동화하였습니다. [15,16절]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
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사
마리아인의 감사의 행동화는 “큰 소리”와 “돌아와”, “엎드려”라는 세 단어로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두 감사를 행동으로 표현한 것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아홉과 이 한 사람이
다르다면 감사한 마음이 다른 게 아니라 감사의 행동화에 실패했느냐 성공했느냐의 차이입
니다.

믿음을 오해하는 사람들은 관념론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관념론이 아닙니다. 주
님은 행동하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는 말씀도 그것을 말씀하심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성경에
서 여실히 증명됩니다. [19절]의 선언을 보십시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
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정말 감사를 행동화하였을 때 구원을 선물로 받습니다.

본문의 아홉과 하나는 그 믿음이 다릅니다. 아홉은 병 고치는 믿음의 소유자들이고, 하나는
구원 받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병을 고치고 기적을 보고 환상을 보는 종교적 엑스타시에 만
족하는 성도들이기 보다, 하늘나라 시민이 되길 바랍니다. [벧전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
의 구원을 받음이라” 감사의 행동화에 실패할 것인지, 성공할 것인지 여러분이 선택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도 다 나와 같은데요

아마 아홉은 다른 사람을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간 사람은 오직 한 사람입니다. 자신
의 옆을 봐도 앞을 봐도 다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위안을 삼으며 집으로, 친구에게
로 갔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다 집으로 가네요.” 그들이 외쳤을 법한 말입니다. 잘못
된 비교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아홉은 모두 유대인입니다. 율법을 너무도 잘 알고 지키고 있는 유대인
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감사를 방해했다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서로 유대인이기 때문에 따
라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야 종교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사람이니까요. 여러분, 오늘
날에도 이런 사태는 너무 잘 나타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 이제 시작하는 사람
보다 낫겠지 뭐.’, ‘권사님이니까 따라해야지.’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믿음 없고 인색
한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을 따라하지 마세요.

실은 신앙도 일종의 배움입니다. 감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따라하려면 제대로 된 사
람을 따라해야 합니다. 제 아들은 늘 자신은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반에서 2등하고
학년에서 15-20등정도 합니다. 그는 늘 말합니다. “이만하면 잘하잖아요!” 그런데 제 엄마
는 늘 못한답니다. “그렇게 해선 안 돼. 내신 등급 1등급은 받아야 돼.” 왜 이 말을 할까
요? 아들은 자신 보다 못하는 아이들과 비교하고 엄마는 잘하는 아이와 비교하기 때문입니
다.

어디다 비교하느냐는 중요합니다. 아홉 명은 서로에 비교하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모두가 병
은 고쳤지만, 구원하고는 거리가 먼 걸 어찌합니까? [마20장]의 포도원 품꾼 비유가 바로 이
런 내용입니다. 오후 1시에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자 먼저 온 사람들이 많이 받을 줄
알았다가 한 데나리온을 주자 불평합니다. 자신에게 약속된 게 한 데나리온이면 비교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잘못된 비교는 불평을 낳고 감사를 잃게 만듭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큰아
들의 불평도 비교에 기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에 실패하고 변명해도 소용없습니다. 감사에 성공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결과는
엄청납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 감사를 먼저 하십시오. 마음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감사를 행
동화하십시오. 잘못된 비교는 금물입니다. 다른 사람이 지옥 간다고 우리가 지옥 갈 수는 없
습니다. 감사하지 않은 자는 변명이 있겠지만, 그 변명은 하나님을 설득시킬 수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5.   하나님이 원하시는 맥추절
      출 23 :14 - 17

서론 : 오늘은 보리 농사를 지어 첫 수확한 곡물을 하나님께 바치며 감사로 영광을 드리는 날입니다. 하나님은 첫 열매, 첫새끼, 등 처음 수확한 것이나, 처음으로 태어난 것을 매우 좋아하시며 즐겨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처음 추수한 밀과 보리를 드리는 맥추 감사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농경 사회가 밀려나고 산업 사회가 발달되여 보리를 볼 수 없는 지금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실까요 ?

1. 모든 성도의 처음 신앙을 회복해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무엇이든지 처음 것을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진정으로원하시는 것은 농촌에서 추수한 첫 곡식단이 아니라 맨 처음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목숨바쳐 충성했던 처음 신앙을 찾아 드리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본래 맥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 유랑 세월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한 후 보리와 밀농사를 한 후 추수해 첫 것을 하나님께 드린 감사의 절기입니다. 보리와 밀 농사는 늦가을에 씨앗을 뿌린 후 그 이듬해의 초여름에 추수를 하게 되었는데 해가 바뀐 후 처음으로 얻은 곡식이라 맥추절을 초실절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말씀 한마디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모든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그렇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쉬워 우리들에게 처음 수확한 곡단을 바치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받고져 하시는 것은 최상품 밀과 보리가 아니라
우리의 순수하고 아름답고 열정적인 처음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맥추 감사 예배는 물불 안가리고 목숨바쳐 충성하던 처음 신앙 시절을 다시 찾아 남은 한해의 기간을 주님 위해 살 것을 결단하는 시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이 예수님의 사랑을 처음 깨닫고 충성할 때 하나님께 드렸던 예배를 받고져 원하십니다.

2. 범사에 감사하기를 원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살전5:18)했습니다. 범사란 우리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행할 때 자기 자신이 계획을 잘하고, 자기의 능력이 뛰어나 남보다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우리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 아래서 이루워 진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성도들은 범사에 감사해야 하며 우리가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할 때에 우리들이 생각지 못한 은헤의 복을 충만하게 받는 것입니다.
오늘 맥추절을 맞이한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감사의 정신을 승화시키도록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자가 이 세상 모든 사람같이 느껴지지만 실상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일상 생활에서 감사의 자세가 생활화되어 행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 구약 성경에 나오는 기도의 사람 다니엘은 하루 세 번씩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쪽 창문을 열어놓고 무릎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는데 너무 총명하고 지혜있어 바벨론 나라 느브갓네살왕이 그를 등용하여 정치가로 삼았습니다. 각 도마다 방백들을 세웠는데, 방백들이 120명이고 그
120명 위에 세 명의 총리가 있었습니다. 세명의 총리위에 다시 한 사람을 세우는데 그 사람을 다니엘로 왕이 세우려하자 많은 사람이 시기하고 질투해 다니엘을 잡으려고 다니엘의 약점인기도를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30일 동안 왕 외에 절을 하거나 무엇을 구하는 자가 있으면 사자 굴에 집어 넣겠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다니엘은 일상 생활 하든대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자굴에 들어갔지만 하나님의 손길로 그는 구원되고 그를 죽이려는 자들이 모두 죽고 다니엘은 최상의 사람이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감사는 어느날 갑자기 되는게 아니라 오랜 기간동안 행할 때 이루워지는 것입니다.
같은 행위가 반복되면 그것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오래 가면 성품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일상생활 중에서 감사하기를 원하십니다.
힘들고 어려워 불만과 불평이 머리를 감쌀 때 감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 이르려 있습니까 ?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 지나온 삶이 어떤 삶이었든지 범사에 감사한다면 하나님께서 합력해서 새 일을 이루워 주실 것입니다.

3. 전심으로 드리는 감사의 예배를 받으시기 원하십니다.
시편 138:1-2절 말씀을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높게 하셨음이라"
형식적인 의무적 감사 예배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러 나와 기쁨과 즐거움으로 드리는 감사의 예배를 받으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 아브라함의 첫 아들 이삭을 받으시기를 원하신 하나님은 아들을 드리는 아브라함에게 최상의 축복을 해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첫 아들을 바칠 때 기쁨과 즐거움을 머금고 감사한 자세로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드리라고 명했지만 아브라함이 억지로나 형식적으로 드렸다면 하나님은 받지도 않으시고 그에게 축복도 해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전심을 다하여 기쁘고 감사함으로 처음 아들을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도 전심을 다해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생각지 못한 비밀한 축복을 이루워 주실 것입니다.

4. 하나님이 원하시는 맥추 감사 예배를 드린 성도는 ?
본문 25절을 보면
1)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려주신다 했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것이라하면 양식과 물이지요 이 모든 것을 허럭해 주
신다고 하였습니다.
2) 너희 중에 병을 제하여주신다.
건강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가정에 있는 질병을 제하고 내속에 있는 질병을 제하고 언제나 강한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3) 잉태치 못하는 자가 없도록 축복해 주신다.
아기를 소원해도 얻지못한 이들에게 잉태의 축복을 주신다는 말씀이지만 일반적으로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강하게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결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형식적인 맥추절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맥추 감사 예배를 드림으로서 남은 한해에도 놀라운 축복이 넘치시길 바랍니다



출처 : 예꼬누리의 주일학교 자료실
글쓴이 : 예꼬누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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