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7. 15:29ㆍ목양자료/5.절기자료
효도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
본문 - 요한복음 19:25-27
여러분, '며느리밥풀꽃'이라는 꽃을 아십니까? 그 꽃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산골에 마음씨 착한 아들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습니다. 이 아들은 어머니에게 아주 효성스러웠고, 어머니의 말씀은 반드시 순종하는 착한 아들이었습니다.
어느덧 아들이 장성해서 장가를 들게 되었습니다. 그 집에 시집 온 며느리도 시어머니를 아주 정성을 다하여 받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신랑은 이웃 마을로 머슴살이를 하러 떠나게 되었습니다.
착한 며느리와 시어머니만 남게 되자,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빨래터에 가서 빨래를 하고 돌아오면 “그 동안 누구와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왔느냐?”고 다그치기 일쑤였고, 빨래를 깨끗하게 빨아 와도 “빨았다는 빨래가 왜 이렇게 더럽냐?”며 빨래를 마당에 내동댕이치며 밟아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로부터 그렇게 구박을 받으면서도 며느리는 군소리 한 번 하지 않고 열심히 시어머니를 섬기면서 자기 할 일을 충실히 다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지 며느리를 쫓아낼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며느리가 평소와 같이 저녁밥을 짓기 위해서 불을 때고 있었습니다. 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자 며느리는 밥이 제대로 잘 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솥뚜껑을 열고는 밥알 몇 개를 집어서 입에 물고 씹어보았습니다. 그 때 방에 있던 시어머니는 솥뚜껑 여는 소리를 듣자마자, 이 때다 싶어 몽둥이를 들고 부엌으로 달려가서 “어른이 먹기도 전에 먼저 밥을 먹느냐”며 다짜고짜 며느리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변명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입에 밥알을 문 채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며칠을 앓더니 며느리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들이 단숨에 달려와서 통곡하며 죽은 아내를 얼싸안고 울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을 앞에 있는 솔밭이 우거진 길가에 아내를 묻어주었습니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다음 해 따뜻한 봄볕이 내리쬐자, 며느리의 무덤가에 이름 모를 풀들이 많이 자라났는데, 여름이 되자 하얀 밥알을 입에 물고 있는 듯한 꽃이 피었습니다. 그 무덤가에 피어 있는 꽃들 모두가 하얀 밥알을 입에 물고 있는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착한 며느리가 밥알을 씹어보다 죽었기 때문에, 무덤가에 이런 꽃이 되어 피어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꽃도 며느리의 입술처럼 붉은 데다, 마치 하얀 밥알을 물고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 꽃을 “며느리밥풀꽃”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짠- 해오는 느낌을 가지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 어르신들 중에는 ‘내 이야기야, 우리는 옛날에 다 그렇게 살았지’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또 젊은이들 중에는 ‘남편도 없이 시집살이 하면서 시어머니 아래서 그런 구박을 받는다면 어떻게 살까? 그건 전설에나 있는 이야기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그런 결혼생활을 하라고 한다면 아무도 견뎌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을 최고의 예의로 생각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나라 전통적인 문화에서 강조하는 효와 우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효를 비교할 때에 어느 것이 더 ‘효’를 중요시 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 가운데 들어 있는 아주 중요한 계명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바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위해 주신 계명 가운데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부모를 공경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신 5:16)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바꾸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버린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더 무서운 말씀이 있습니다. 신명기 21:18-21절에 보면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를 돌로 쳐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돌로 쳐서 죽여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효를 강조하셨는가를 말씀하고 있는 한 구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처럼, 부모님을 공경하는 대신 그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모든 것이 용납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리새인들은 그랬습니다. 부모님을 섬길 것으로 하나님께 드릴 고르반이라고 하면 부모님을 섬기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막 7:10절 이하)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는도다.”(막 7:9) 그러기에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목으로 부모님을 섬기지 않거나 마땅히 베풀어야 할 효를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예수님께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33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사셨지만,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위해서 집을 떠나 3년 동안이나 공생애를 사셔야 하셨지만, 그렇다고 어머님을 향한 효성을 외면하시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바로 직전에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마지막 효도를 하셨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그 골고다 언덕 위에는 여러 명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예수님의 이모, 그리고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그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십자가 위에서 처절한 모습으로 매달려 있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들 중에 가장 마음이 아팠던 사람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였을 것입니다. 우리 옛말에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먼저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자식을 먼저 보내야 하는 부모님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가르쳐준 말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 때문에 얼마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습니까?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였고, 예수님을 낳았습니다. 마리아에게는 남들이 다 느껴보는 행복한 신혼 - 그런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가진 이후에 마리아는 늘 마음이 조마조마하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가졌다고 하는 것은 당시 풍습에 따르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할 큰 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씨 좋은 남편 요셉의 이해와 신앙 때문에 죽음을 면하고 예수님을 낳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때 마리아에게 큰 힘이 되었던 것은 남편 요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요셉도 일찍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12살 되던 해 아버지 요셉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아 가셨습니다. 그것으로 요셉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예수님께서 30세가 되어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후 성경 어느 곳에도 아버지 요셉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그걸 보면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예수님께서 12살 되셨을 때부터 30세가 되실 때 그 사이에 돌아가신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걸 마리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다. 힘들 때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남편 요셉을 일찍 먼저 보내고, 이제 자신의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은 장자 예수 밖에 없었습니다. 남편 없이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큰아들 예수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그 아들마저도 서른 살이 되면서 집을 떠나갔습니다. 그리고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한답시고 3년 동안 집에 한 번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보고 싶어 찾아갔지만, 너무 바쁜 아들 예수님의 얼굴 한 번 제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늘 큰 아들 예수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던 차에 아들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 소식은 참으로 가슴 아픈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다.’는 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소식을 들은 마리아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들이 애국자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자랑스럽게 죽은 것도 아닙니다. 당시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예수님은 민란을 조장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죽어야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종교적으로는 이단자로, 국가적으로는 역적으로 몰려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 역적이요 이단자로 몰려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마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는 그 사형 형장까지 여동생과 다른 여인들과 함께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신음하고 고통당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미 예루살렘에서 골고다 언덕까지 당신의 아들이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피와 땀방울이 범벅이 되면서 십자가를 지고 힘겹게 올라온 것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양손과 양발에 대못이 박히고, 옆구리는 창으로 찔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도 보아야 했습니다.
내 몸으로 난 내 자식이 그런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덤덤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어머니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찢어질 것만 같은 가슴을 주체하지 못해서 아들이 달려 있는 십자가 아래서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십자가 아래서 찢어지듯 아픈 마음을 참지 못해 흐느끼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를 보셨습니다. 사실 주님은 어머니 마리아 못지않게, 아니 마리아보다 훨씬 더 큰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군병들의 채찍에 맞아 온 몸은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오느라 힘이 다 빠져버렸습니다.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셨기에 얼굴에도 피 범벅이 되었습니다. 손과 발에 못을 박아 십자가에 달리셨기에 찢어질 듯 아픕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은 어머니의 아픔을 생각했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자신이 부모가 되어보지 않는 이상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은 어머니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남편도 일찍 떠나보냈지요, 이제 큰 아들까지 역적이요 이단자라는 판결을 받고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마리아의 앞길에 뭐가 보이겠습니다. 정말 막막했을 것입니다. 세상 살아갈 맛이 안 나고, 세상 살아갈 희망이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당신의 아들입니다.” ‘어머니, 제가 당신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렇게 죽어가고 있는 제가 어머니의 못난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에 어머니께 효도해 드리지 못한 못난 아들입니다. 어머니! 이제 어머니 곂에 있는 요한이 제 대신 어머니의 아들이 되어줄 것입니다. 제가 못한 효도 요한이 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는 요한에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요한아! 이 분을 이제부터는 네 어머니로 모셔다오.”
예수님께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서 자기 어머니처럼 모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그 부탁을 평생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늘 자기 어머니처럼 마리아를 모셨습니다. 요한이 목회자가 되어 에베소에 머물 때에도 요한은 마리아를 그곳에 모시고 가서 정성으로 어머니처럼 봉양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효성에서 우리는 두 가지 효도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첫 번째로 효도는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건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진리 아닙니까? 예수님에게는 어머니를 남겨두고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하는 자신을 보면 불효 같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자신을 보면서 언젠가 어머니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한 것입니다.
마리아에게는 예수님 말고도 다른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2:46절 이하에 보면, 마리아가 다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사실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께는 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를 동생들에게 부탁하지 않고 요한에게 부탁하셨을까요?
아마도 사도 요한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이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마나 큰 구원사역을 이루신 것이었나를 보여주고 싶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은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땅 끝까지 이르러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모습을 보면 마리아가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지금의 이 비참한 죽음은 어머니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것 같은 슬픔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림으로 궁극적으로 어머님께 기쁨을 드리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님을 부탁했던 것입니다.
저는 지난 어버이날에 세계일주 여행권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제 딸 예나에게 말입니다. 어버이날 제 딸애가 지 엄마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 주었습니다.
“To 엄마, 아니 어머니. 엄마 드디어 어버이날이네요. 항상 하던 멘트 들어갑니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시고 입혀주시고 먹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맨날 제 맘대로 되지 않으면 삐쳐서 방으로 들어가 버리죠? 죄송해요. 앞으로는 이기적으로 살지 않을게요. 그리고 제가 커서 세계여행 시켜드릴게요. 말만 그러는 거 아니에요. 믿어주삼. 제가 커서 딴 말을 하면 이 편지 보여 주시면 돼요. 아셨죠? 항상 건강하시고요, 제가 도울 일 있으면 말씀하세요. 사랑해요.(으- 치킨살) 2006년 5월 예나 올림”
여러분, 그 편지 받고 제가 기뻤겠습니까? 안 기뻤겠습니까? 당연히 기쁘지요. 그런데 며칠 지난 후에 중학교 배정을 위해서 미리 어느 학교에 가고 싶은지 써 오라고 했습니다. 저와 아내는 신흥중학교에 갔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예나는 성심여중에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정확한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자기 친구들이 그 학교에 많이 가고 싶어 하고, 또 교복이 멋있고, 머리를 기를 수 있기 때문에 그 학교에 가고 싶어 한 모양입니다. 그 학교는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학교이니까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신흥학교에 가면 성경도 공부하고 예배도 드리고 더 좋다고 설득을 해도 끝까지 고집을 피우고 성심여중에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불과 며칠 전 어버이날 때에는 “이기적으로 살지 않을게요. 말씀 잘 들을게요.”라고 편지를 써놓고 불과 2-3일 사이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앞에서는 자기의 고집을 꺾지 않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나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효도는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인데, 끝까지 내 고집만을 내세우며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지 않았나 하고 말입니다.
효도만이 아닙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 뜻에 순종하겠습니다. 말씀대로 살겠습니다.”라고 기도하면서, 막상 하나님을 위해서 내 것을 포기해야 할 때에 끝까지 포기할 수 없노라고 고집을 피우고 산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여러분, 부모님을 섬기는 마음이나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은 다르지 않습니다.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효도가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라면, 신앙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효성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효도와 신앙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의 평생을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했습니다. “이 아들이 어머님을 모시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어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장래를 위해서 구체적으로 대책을 세워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이나 효도나 마찬가지입니다. 머리나 마음으로만 끝나서는 안 됩니다. 알고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구체적인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신앙뿐만 아니라 효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로만 부모님 사랑한다고 하면 안 됩니다.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이 있어야 합니다. 용돈이 필요한 부모님에게는 용돈을 드려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소득이 없는 부모님이 계신다면 자녀들이 부모님께 매달 최소한 30만 원 이상씩 용돈을 드려야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 복지 정책이 조금 나아져서 자녀가 없고 소득이 없는 어르신들에게 매달 30만 원 이상씩 돈이 나옵니다. 그런데 부모를 봉양할 자식이 있으면 안 나옵니다. 왜요?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이 없었다면 국가로부터 매달 30만 원 이상씩 받을 수 있는데, 자식이 있다는 것 때문 받지 못하시니까, 자식들이 그 이상으로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어느 딸이 시골에 홀로 계신 어머니가 너무 쓸쓸하실 것 같아서 ‘어떻게 하면 어머니가 쓸쓸하지 않게 보내실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누군가가 어머니의 말벗을 해 드리면 심심하거나 쓸쓸하지 않게 보내실 수 있겠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법 큰 앵무새를 비싸게 사다 말하는 훈련을 시켰습니다. 한 1년 정도 훈련을 시키니까 어머니와 말동무가 될 수 있을 만큼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제가 어머니에게 좋은 선물을 하나 보내드릴게요.”라고 말하고는 1년 정도 잘 훈련시킨 그 앵무새를 보내드렸습니다. 며칠 후에 딸이 궁금해서 어머니에게 전해를 했습니다. “어머니, 제가 보내준 선물 맘에 들어요?” 그러자 어머니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정말 맘에 들었다. 네가 보내준 그 예쁜 닭, 맛있게 잘 먹었다.”
시골에 계신 어머니는 그게 앵무새인줄도 모르고, 그냥 예쁘게 생긴 닭인 줄 알고 잡아서 잡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앵무새를 닭으로 알고 잡아 잡수셔도 괜찮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야 합니다. 그게 공경하는 것입니다. 공경하는 것은 말로만 그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에 작은 것이지만 예물을 가지고 와서 헌금을 하는 것은 그게 내 정성이고 하나님은 그 정성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드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건 가짜입니다. 예물을 드리든, 시간을 드리든, 몸을 드려 헌신하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드리든 뭔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아직 부모님이 살아계신 분은 부모님 살아계실 때에 효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버이날만 아니라 평소에 효도하시기 바랍니다. 돌아가신 후에 아무리 제사상을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리고 비석과 무덤을 엄청나게 화려한 것으로 만들어 드린다 하더라도 그건 아무 쓸모없습니다. 유교에서 말하는 효와 기독교에서 말하는 효의 차이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효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에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부모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 효성과 섬김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요한은 어떨 결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 어머니로 모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요한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일찍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순교당하지 않고 유일하게 늙어서 죽은 사람은 요한 밖에 없습니다. 왜 요한을 오래 살게 하셨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잘 섬겼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를 위해서라도 요한을 일찍 데려가실 수가 없었습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6) 그 말씀대로 복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도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까지 효도를 다하셨습니다. 그 고통 중에서도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부모님을 공경하고, 부모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효도할 부모님이 안 계십니까? 효도를 다 해드리지 못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주님을 더욱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교회 안에 있는 어르신들, 그리고 내 주변에 있는 어르신들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을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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