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모리슨 중국선교 연구 (린즈핑)

2013. 5. 7. 12:41선교자료/2.중국선교자료

선교란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

선교란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 
 이 글은 ‘미션 차이나 2007’에서 린즈핑 교수가 “모리슨 중국 선교 연구”(馬禮遜中國宣敎硏究)라는 주제로 강의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모리슨 선교사가 중국에 입국한 1807년으로부터 정확히 200년이 되는 올해, 모리슨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가 중국과 세계 도처에서 열리고 있다. 중국 선교사였던 모리슨은 한국교회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최초로 한국에 들어와 선교 탐험을 했던 분이 독일의 선교사 칼 구츨라프이다. 그는 1832년 조선에 입국하였고 조선 사람들에게 중국어로 된 성경을 배부하였다. 그런데 구츨라프에게 조선에서의 선교 활동을 권유했던 사람이 바로 모리슨이었다.

굳게 닫힌 중국 선교의 문

모리슨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떠난 시대에는 서양인이 중국에 가는 것 자체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 당시 중국 정부는 기독교를 금교로 정하였기 때문이다. 초기 천주교 신도들이 중국에서 전도를 할 때에는 적지 않은 열매가 있었다. 그러나 로마 교황이 중국 신도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고, 이에 분노한 황제는 기독교 금교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모리슨이 활동할 때는 가경황제가 중국을 통치하고 있었는데, 특별히 그 시기에는 외국 선교사들의 활동을 더욱 엄격하게 금지시키고 있었다. 중국 정부는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외국인 선교사들이 중국에 입국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당시 영국에서 아시아 국가로 가기 위해서는 동인도회사의 배를 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동인도회사는 선교사들의 승선을 반대했으므로, 원칙적으로 선교사가 중국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리슨은 중국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난 후,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한다. 그는 1807년 트라이던트(Trident) 호를 타고 미국을 거쳐 중국으로 갔던 것이다.

모리슨의 마음에 중국 선교에 대한 감동이 일어났을 때는 중국어로 번역된 성경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먼저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할 계획을 세운다. 그의 계획에 대해서 영국의 많은 전문가들이 “중국말이 어떤 건지 알기나 해?”라고 비꼬며 그 계획에 반대했다. 그들에게 중국어란 영원히 배워도 끝이 없는 언어로 여겨졌다. 어떤 사람은 중국어를 배우려면 딱딱한 나무로 만든 머리가 되어야 가능하다고, 손과 팔이 철로 만든 단단한 손과 팔이 되어야 한다고, 독수리와 같은 눈을 가져야 한다고, 사도와 같은 뜨거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중국어를 배운다는 건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의미였다.

모리슨은 중국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중국어로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으로 향하는 배에는 많은 중국 장사꾼들이 함께 타고 있었을 것이다. 모리슨이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 중국에 들어간다는 소리를 듣고 그들이 얼마나 모리슨을 비웃었겠는가? ‘이 젊은이가 자기의 힘만 믿고, 이렇게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비웃었다. 모리슨은 한마디도 못하고 머리를 숙이며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불가능해. 그러나 하나님은 능치 못할 것이 없다.’

선교란 무엇인가? 인간의 이성과 총명과 지혜와 경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 당시의 상황을 보면 중국에서 선교하고, 성경을 번역한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할 것이 없다. 우리는 갈 수 있는 곳, 전도가 가능한 곳으로 떠나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선교가 아니다. 선교는 자기의 능력과 지혜로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능력이 완전히 나타나는 것이다. 선교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선교의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모리슨의 중국 선교에 대한 헌신

모리슨은 1782년 1월 5일 영국의 북부 농촌 마을 나텀버랜드(Nathumberland)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경제가 발전하고 있었다. 탄광이 발전하고 공장이 세워졌다. 시골에 있던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왔고, 모리슨의 부모도 농사일을 버리고 영국 뉴캐슬로 이사하여 공장에서 일을 하였다. 모리슨도 그곳에서 구두 만드는 일을 하였다. 10대 초반의 어린이가 하루 종일 구두 만드는 일을 한 것이다. 낮에 일을 하면서 창밖을 내다보면 거리에서 돌아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보였을 것이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술과 향락을 찾아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모리슨은 그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삶을 동경한다. 그리고 공장의 일을 멈추고 집을 나간다. 그는 이때 교회도 멀리했다.

모리슨은 2~3년 동안 세상의 향락을 쫓아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쾌락이 없다는 것을 느꼈고, 그는 결국 다시 가정과 교회로 돌아왔다. 주일학교 교사들이 교회로 돌아온 모리슨을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모리슨, 하나님은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우리도 너를 사랑한다.” 모리슨은 다시 구두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가 옛날 일터에 다시 앉았을 때 하나님은 그의 생활환경을 변화시키지 않았지만, 모리슨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셨다. 예전에는 구두 만드는 일을 불평과 짜증으로 하였지만, 이제는 망치를 두드리며 경배와 찬양을 하였다.

모리슨은 일터에 성경과 선교 잡지를 비롯하여 많은 책을 갖다 놓았다. 일을 하면서 그 책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선교 잡지에서 아직 중국엔 선교사가 없다는 기사를 보았다. 중국은 큰 나라라고 들었는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의 마음에 거룩한 부담이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모리슨의 마음에 ‘내가 너에게 기쁨과 평안을 주지 않았니? 너에게 망치질만을 하게 하려는 게 아니야’라는 감동을 주셨다. 모리슨은 그때까지 중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하나님! 만약 당신이 나를 불러 중국으로 보내시기를 원한다면 제가 중국으로 떠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때부터 모리슨에게는 인생에 분명한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며 중국에서 선교를 하는 것이다. 모리슨은 그때부터 중국을 알기 위해 노력했다. 대형 도서관에서 중국 서적들을 빌려 오고, 신부들이 성경의 일부를 중국어로 번역한 책을 보면서 중국어를 배웠다.

모리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중국으로 보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중국 선교를 마음에 품으면 품을수록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점을 깊이 느꼈다. 중국 선교는 분명한 그의 사명이 되었지만, 중국어를 배우는 것은 너무도 힘들었다. 참고할 서적들도 없고, 중국어를 가르쳐 줄 교사도 없었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 중국어를 공부한 그는 중국어 학습을 위한 참고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모리슨은 두 번째 결심, 곧 중국어 사전을 발행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자신의 뒤를 이어 중국에서 선교하려는 사람들이 그 사전으로 중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모리슨의 입국과 성경 번역

모리슨은 1807년 9월 중국에 도착했으나, 곧 중국에 입국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홍콩이 개방되기 이전에 중국에 들어오는 모든 외국인들은 마카오에만 거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리슨은 마카오조차 들어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마카오를 관리하는 포르투갈은 천주교 국가로서, 개신교 선교사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에 입국할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중 모리슨은 동인도회사의 통역관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 때문에 모리슨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기도 한다. 모리슨이 선교사로 중국에 온 것이 아니라, 동인도회사에서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 왔다고 비난한다.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경제 침략을 하는 동인도회사를 도왔다는 비판이다. 이러한 비판과 비난은 지금까지도 많은 학자들에게서 계속된다.

모리슨의 일기장을 보면 그 자신도 이 때문에 많이 괴로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리슨도 동인도회사의 통역관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중국에 머무르겠다고 결심하였고, 중국에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은 통역관이 되는 한 가지뿐이었다. 당시 중국에는 선교사가 모리슨 한 사람 뿐이었다. 그의 편지를 읽어보면 그의 고독하고 적막한 마음이 많이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동역자를 보내 달라고 기도했고, 기도의 응답으로 밀렌 선교사가 중국에 도착한다.

밀렌이 중국에 도착하였을 때, 그 역시 모리슨과 동일한 어려움을 겪는다. 포르투갈 정부는 밀렌에게 18일 이내에 마카오를 떠나라고 통보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밀렌은 마카오로부터 멀리 떨어진 말라카에 선교지를 마련하였다. 마카오와 말라카는 당시 배로 7개월이 걸리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선교 사역을 위하여 친밀하게 동역하였다.

모리슨은 농사꾼의 아들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길거리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16세가 되어서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이었다. 20세 때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그 외에 어떠한 학력도 발견되지 않는다. 밀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욱이 당시에는 중국어를 배울 수 있는 자료를 찾기 매우 어려운 시대였다. 당시에는 중국인이 외국인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거나 중국어로 된 책을 판매하면 목숨을 잃거나 멀리 유배를 떠났다.

그러나 놀랍게도 모리슨은 1807년에 중국에 도착해서 1823년에 중국어로 된 신구약 성경을 인쇄, 출판했다. 당시 성경을 인쇄하기 위해서는 활자판에 성경의 글자를 일일이 새겨야 했다. 모리슨은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했고, 그것을 한 글자 한 글자 새겼고, 그 과정을 거쳐 중국어 성경책이 인쇄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인 1823년, 그는 무려 4,500페이지나 되는 화영 사전도 출판·인쇄했다.

모리슨 선교의 열매

모리슨이 중국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 외국인이 중국어로 된 도서를 구입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지만 그는 다양한 방법으로 중국어로 된 많은 책을 구입했고, 그것으로 중국어를 공부했다. 그가 구입한 중국어 책이 약 1만여 권이나 되는데, 이 책들이 지금 런던대학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중국 문자를 이해하고 배우기 위해 모리슨은 붓글씨를 연습하기도 하였다.

중국어 성경과 화영 사전을 출판한 1823년, 그는 중국어 성경과 화영 사전 그리고 1만여 권의 책을 싣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영국에서 중국어 반을 열었다. 아마도 서양에서 처음으로 열린 중국어 반이었을 것이다. 모리슨은 휴가 기간조차도 영국에 들어가 선교활동을 한 것이다. 중국어 반에서 모리슨에게 중국어를 배운 학생들이 이후 중국 선교사로 많이 나가게 되었다. 그 학생들 중 유명한 한 사람이 새뮤얼 다이어인데, 그 유명한 허드슨 테일러의 장인이다.

모리슨은 중국인을 위한 전도지도 많이 썼다. 그가 쓴 전도지는 말라카에서 인쇄되어 중국으로 보내졌다. 중국의 첫 개신교 목사가 누군지 아는가? ‘양발’이란 사람이다. 그는 말라카에서 가져온 모리슨의 전도지를 가지고, 광저우에서 전도하였다. 말라카와 광저우가 얼마나 먼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았고, 모리슨이 쓴 전도지를 가지고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분명히 불법 행위였다. 양발이 법정에 붙잡혀 들어간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중국에는 이런 말이 있다. “법정에 들어오면 정당한 이유가 있어도 체벌을 받는다.” 양발이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며칠 동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모리슨은 문서 선교뿐만 아니라, 중국 최초의 근대식 신문 <찰세속매월통기전>(察世俗每月統記傳)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말라카에서는 중국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영화서원(英華書院)’도 세웠다. 학교 설립에 필요한 재정은 모리슨이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얻은 수입으로 충당하였다. 그리고 이 학교에서 공부한 사람 중에 ‘양발’, ‘취앙’, ‘왕연성’과 같은 초기 중국 기독교 지도자들이 나왔다.

모리슨이 죽자 모리슨을 기념하여 졸업생들이 기금을 마련하여 또 다른 학교를 세웠다. 예일대학을 졸업한 브라운(Rev. S. B. Brown) 목사가 이 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그 학교 학생들 중에서 세 명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이들이 중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유학한 사람들이다. 이후에도 브라운은 중국인이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그들 중에서 중국의 국무총리, 엔지니어의 아버지라 불리는 중국 최초의 철도 설계사 등이 나온다. 모리슨의 생활은 매우 힘들었다. 부인은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부인은 치료를 받기 위해 자주 영국에 다녀오곤 했다. 당시 중국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서 영국까지 갔다 오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겠는가? 모리슨의 부인은 한 번 갔다 오면,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치료를 받기 위해 또 영국으로 떠나곤 했다. 모리슨 자신도 어려서부터 두통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모리슨의 아내와 자녀들은 마카오에서 죽었는데, 모리슨에게는 그의 가족을 묻을 수 있는 땅조차 없었다. 당시 중국은 외국인을 중국 땅에 묻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중국에 남기 위해 결심하였고, 1834년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중국에서 27년 동안 선교 활동을 하였다.

1842년 아편전쟁이 일어나고, 남경조약이 체결된 후 중국 선교의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단 한 순간도 중국에서 기독교 선교가 중단되었던 적이 없었다. 그의 선교 업적을 돌이켜 보면, 그는 중국 선교의 단단한 기초를 형성한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선교는 힘들다. 위험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헌신할 때, 모리슨 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시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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