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페르시아의 네스토리안 교회

2012. 2. 25. 15:05교회사자료/1.기독교회사

고대 페르시아의 네스토리안 교회

 


   - 집필 : 이인식 목사(시카고 동양선교문화연구원장)

 

 


1. 들어가는 말

일찍이 누가 말했던가? ‘세계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그렇다. 세계사는 확실히 하나의 커다란 전쟁의 역사이다. 성서적으로 말해서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 자손들의 투쟁의 역사이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기원전에는 아프리카의 이집트 제국과 아시아의 바벨론 왕국 간의 대립 사이에서 세계는 두고 두고 투쟁해 왔으며, 기원 이후에는 유럽의 로마제국과 아시아의 페르시아제국과의 대립 사이에서 세계는 계속 투쟁 해왔다. 이런 가운데서 함의 후손인 고대 이집트는 3천년간이나 아프리카 땅에서 제국의 역사를 만들어 왔고 야벳의 자손인 그리스 로마도 2천년 이상의 제국의 역사를 유럽 땅에서 이끌어 왔다.


페르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셈의 자손인 범 아랍, 즉 바벨론과 시리아와 함께 페르시아는 로마와 대립하며 아시아 땅에서 2천년 이상의 역사를 유지해 왔다. 구약에 나타나는 다리우스 왕과 고레스 왕 시대의 페르시아 제국은 그리스 아테네를 지배하여 아테네의 의사들을 모두 다리우스 왕의 주치의로 고용하고 있었다.그런데 알렉산더 대왕시대에 와서는 그 반대로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점령하여 페르시아제국을 페허시켰다. 사산왕조시대에는 페르시아가 다시 로마제국과 대립하여 투쟁해 왔고 사라센 제국시대에도 로마와 대립했으며 오스만 투르크의 이슬람 제국시대에 와서 페르시아는 로마제국과 여러 차례 충돌하며 대립해 왔다.


이와 같은 대립과 투쟁의 역사 속에서 소위 로마제국의 국교로 성장한 기독교가 과연 그 적대국인 페르시아 판도 안에서 그 동안 어떻게 존재해 왔으며 또 어떻게 거기서 전파되고 있었던가? 바로 그 페르시아 땅에서 영고성쇠했던 네스토리안 교회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2. 페르시아의 역사와 종교


(1) 역사


이슬람시대 이전의 페르시아의 역사를 시대에 따라 왕조별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메데 왕조


메데 왕조는 고레스가 아스티아게스 왕가를 전복시키기(주전 550) 이전 키약사레스(625-585)와 아스티야게스(585-550) 시대를 말하는데, 구약에서는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바벨론의 느브가네살 왕(605-562) 시대에 해당된다.


아케메니아 왕조(주전 6세기 중엽 주전 330)
아케메니아 왕조(BC 550-330)는 바벨로니아 왕국을 멸망시킨 고레스 왕(550-530) 과 캄비세스(530-522) 다리우스1세(522-486)에서부터 다리우스3세(336-331)까지 해당되는 기간을 말한다. 이 시기가 바로 성서에서는 바벨론 포로 귀환시대가 되며 학개와 스가리야, 오바디야, 말라기, 느헤미야, 에스라 등의 활동시대가 된다. 다리우스 왕의 비문에 나타난 세금목록에 보면 삼십여 개의 행정단위가 있었음을 보여 주는데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메디아, 엘람, 파르티아, 아리아, 박트리아, 소그디아나, 코라스미아, 아라코시아, 사타지디아, 간다다라, 신드, 하우마바르가, 사카스(뽀죽모자, 즉 삿갓을 쓴),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아라비아, 이집트, 아르메니아, 갑바도기아, 사르디스, 이오니아, 사카스(바다 건너편에 있는), 스쿠드라, 페타소를 입고 있는 이고니아인들, 리비아인들, 이디오피아인들, 말카인들, 카리아인들 등등. 이것을 보면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 범위가 얼마나 크고 광대했음을 짐작케 한다.


알렉산더 시대의 셀류코스 왕조(주전 330-323)
셀류코스 왕조시대(BC 330-323)는 알렉산더 대제의 장군의 하나인 헬라인 셀류코스의 아들들이 시리아 지역을 지배하던 시대를 말 하는데 이때에 팔레스틴은 이집트 지역을 통치하던 알렉산더 대제의 다른 장군인 헬라인 프톨레마우스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전 200년에 셀류코스 왕가가 팔레스티나를 정복함으로 유대인들은 다시 시리아의 셀류코스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주전 168년 12월에는 안티오쿠스4세인 에피파네스가 성전을 모독한 사건으로 인하여 유대인 반란이 일어났고 이때에 유대 마카베오스가 독립투쟁을 계속하여 유다는 로마에게 정복 당하기 전까지 한때 마카베오 왕조(167-143)를 이룩하기도 하였다.


파르티아 왕조(주전 3세기 주후 223)


파르티아 왕조(BC 3세기-AD 223)는 다리우스 왕 때만 해도 대 페르시아제국의 한 지방 행정 단위의 속국이었다. 그러나 주전 223년 경에 파르티아를 침략하여 속국으로 만든 파르니족이 동부 이란어를 토착적 파르티아어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그들이 아르사케스 왕조를 만들어 이란에 나머지 지역을 모두 점령하고 바그다드 근처인 크테시폰에 수도를 만들었다(주전 171-138, 미트리다테스1세). 주전 40년 경 파르티아는 근동의 로마 속국들을 침략하여 시리아를 정복했는데 이때 파르티아는 유대인들에게는 해방자로 환영을 받기도 했다. 로마황제 트라야누스(AD 97-117)와 하드리아누스(117-) 치하에서 유대인들은 파르티아와 연합하여 로마에 항거한 것이다. 그러나 131년 하드리아누스는 기어코 예루살렘을 로마의 식민도시로 변형시켜 이름을 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라고 하기도 했다.


사산왕조(주후 223-651)
사산왕조(AD 223-651)는 사산의 후손인 아르다쉬르가 223년에 파르티아 왕조를 무너뜨림으로 이루어진 왕조인데 그는 15년 안에 이란의 국력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후계자인 그의 아들 샤푸르1세(239-270)는 에뎃사에서 로마황제 발레리아누스를 패배시켜 생포함으로써(260) 서북 인도와 북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에 걸처 있던 쿠산제국의 일부를 병합했다. 이 시기의 이란은 그들의 적국임에도 불구하고 로마제국과 비잔틴제국, 중국, 인도 등 다른 문명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이 사산왕조 시대의 종교적 상황을 보면 공식적인 페르시아 국가종교인 조로아스터교를 제외하고는 모든 종교, 즉 유대교, 불교, 힌두교, 마니교 및 기독교가 다 박해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3세기 후반에 새겨진 당시 사산교회의 대 사제의 비문에 의하면 기독교 공동체는 이 페르시아 영토에서 1세기부터 이미 설립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항상 이들의 적대국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관계로 로마종교로 인식되고 있던 기독교는 박해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페르시아에서 교회가 국가에 의해 정식으로 공인을 받게 된 것은 468년 네스토리우스파에 의해서였다. 왜냐하면 많은 유대인교도들로 구성된 네스토리우스파들이 비잔틴교회로부터 이단으로 규정을 받은 사실이 당국에 의해 비로서 인지되었던 까닭이다.


이슬람 칼리프 시대(632-1924)
이슬람 시대에 와서는 왕조는 아니지만 이슬람 종교의 최고 지도자요, 이슬람국가의 최고 권력자인 칼리프들이 나라를 다스려 왔지만 그 칼리프도 세습화되어 왔기 때문에 거의 왕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런 칼리프가 마호메트 이후 1300년 동안 지속되다가 1924년 터키 혁명으로 이 칼리프 제도는 소멸되고 만 것이다.


 


(2) 종교


상고시대로부터 이란에는 많은 신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미트라 신 : 인도-이란의 신들 중에 그 이름이 언급된 가장 오래된 문서는 1907년에 발견 된 비문에 나타난 조약문, 즉 히타이트의 왕 숩빌룰리우마와 주전 14세기부터 미탄니의 후리족 국가의 왕이었던 마티우아자 사이에 맺었던 조약이다. 이 조약문에 신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미트라(해), 바루나(달), 인드라, 그리고 쌍둥이 신 나사티아 등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다. 고대의 제국들은 국가 간이나 봉신국 간에 계약을 체결할 때에는 반드시 그들이 믿고 있는 신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미트라 신은 마치 구약성서에 나오는 여호와 신처럼 계약의 신으로 등장하며 가장 대표적인 신으로 나타난 것이다.


아후라마즈다 신 : 그리고 그 후 8세기가 지난 주전 6세기 경에 와서는 그때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한 짜라투쉬트라의 설교집인 아베스타경에 아후라마즈다의 일신론이 나타나는데, 여기서 진리와 거짓이 짝을 이루는 윤리적 이원론이 나타나고 있다. 그 이원론은 진리를 의미하는 아사(Asa, arta) 대 거짓을 의미하는 드럭(Drug, drauga), 증대 시키는 영인 스판타 마뉴(Spanta Mainyu) 대 사악한 영인 앙그라 마뉴(Angra Mainyu)의 대립에서 잘 나타난다.


그런데 증대의 영과 사악한 영은 쌍둥이이고 또 증대의 영과 아후라마즈다는 부자관계이다. 증대의 영 다음으로 아후라마즈다는 다음 여섯 개 실체의 창조자인데, 즉 선(Vohu Manah)·진리(Asa)·능력(Xsatra)·헌신(Armaiti)과 완전(Haurvatat)·불멸(Amaratat)이다. 이 실체들이 모두 합하여 증대시키는 영들로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스펀타(아버지 신)와 마즈다(아들 신)에 의해 입증되고 있는 일신론의 개념은 진리대 거짓이라는 이원적 개념과 짝을 이루고 있으며 양자는 자유의지(영의 신)라는 개념의 도입에 의하여 통합되고 있다. 이것이 여기서 중요한 이유는 이 싸라투쉬트라의 이데올로기가 성서의 개념과 너무나 가까워 신학에서 많이 토론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케메니아 왕조에서는 선한 신으로 알려진 아후라마즈다 신을 숭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서에 나오는 고레스 왕(유대민족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켜준 왕)은 물론 다리우스와 다리우스의 아버지 비쉬타스파가 짜라투쉬트라의 보호자요 지원자였다. 그러므로 이 왕가가 모두 정통 조로아스터 교도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파르티아 왕조에 와서는 미트라 신을 숭배하였다. 이시기에 미트라 숭배가 부활되어 그 영향이 아르메니아에서 스페인까지, 리비아에서 스코틀랜드까지, 주전 4세기 이후로는 로마제국 내에서 대대적으로 전파되고 있었다. 그래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때에는 이 미트라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가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에 와서야 비로소국교의 위치에서 기독교에게 밀려나게 되었다. 그래서 기독교 초기에 로마에서 가장 대립했던 종교가 바로 이 미트라 종교였던 것이다(크리스마스가 12월 25일로 정해진 것도 바로 이 미트라 신의 생일과 일치시켜 미트라교 신자들을 기독교로 포섭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트라 신이 로마에서 환영을 받았던 큰 이유는 그가 계약의 신이요, 무적의 태양신이며, 전쟁의 신이고 승리의 신이였던 관계로 로마의 장군들과 관리들이 가장 좋아했으며 팽창하는 로마제국의 사상과도 그것이 일치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더 일찍이 이집트의 무적의 신 바로와 대결해야 했던 이스라엘 민족이 그때 미디안 광야 민족의 그 무적의 신이요, 계약의 신이었던 야훼를 만나 자기들의 민족신으로 삼았던 것과 같았다. 야훼는 본래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종족인 미디안족의 신이었다(출 3:1, 6:3).


사산왕조 때에 와서는 로마와의 전쟁이 너무나 잦았으므로 동방과 서방의 정치적 대립투쟁 속에서 조로아스터교의 선악의 대립원리가 이때에 와서 비로소 완전한 체계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산왕조가 이슬람에게 정복되자 이 조로아스터 교는 페르시아에서 종막을 거두게 되고 말았다. 그래서 페르시아는 이슬람 종교의 다른 한 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로마제국의 영원한 앙숙이며 적대국이었던 페르시아 제국의 그 장구한 역사 속에서 그들에게는 완전한 외래종교였던 기독교가 어떻게 그들과 공존했으며 또 그 땅에서 생존했었던 것인가?

 


3. 네스토리우스와 그의 신학



(1) 네스토리우스의 생애


네스토리우스는 4세기 말(375-399)에 시리아 땅 유프라덴시스 지방에서 한 페르시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안디옥에서 교육을 받고 거기서 장로로 서품을 받았는데 그는 아마도 몹수에스티아의 주교였던 데오도로스의 제자였을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자리를 놓고 쟁탈전이 심했던 그 때 자랑스럽게도 네스토리우스는 428년 4월 10일 황제 데오도시우스2세의 초청으로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틴노플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22일 그의 전속사제였던 아나스타시우스가 그의 설교를 통해 마리아에게 ‘테오도코스’, 즉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부정했던 일로 인하여 사람들을 격분시켰다. 그 해 성탄절에 네스토리우스는 아나스타시우스를 역성드는 가운데서 분명히 마리아는 데오도코스가 아니라는 설교를 했다. 그래서 네스토리우스는 그 때문에 사람들에게 이단자 아리우스와 같은 자라는 오해를 받게 되었다. 4세기 초에 아리우스는 주장하기를 예수는 하나의 피조물에 불과하며 기껏해야 반신(半神)적인 존재라고 했던 것이다. 아리우스는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보는 종속적 진리를 보전하고자 했던 자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은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네스토리우스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요, 그리스도는 단지 사람에 불과한데 하나님이 그를 아들로 택하셨다고 가르치는 자라고 오해를 받게 되었다. 바로 그 무렵, 즉 412-444년까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재직했던 키릴루스가 교권적 야심을 품고 이 사건에 개입하여 결국은 그가 네스토리우스를 몰락 시키고 말았다. 그의 반격은 429년 부활절에 시작했으며 429년 여름에는 네스토리우스에게 그의 오류를 시인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가 아무 응답을 하지 않자 그는 음모를 꾸며 로마주교 코일레누스로 하여금 430년 8월 교회 회의를 열고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게 했다. 그리고 또 황제로 하여금 431년 성령강림절에 에베소공의회를 열게 하여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고 파면시켜 추방했다. 그러나 그는 추방생활 중에서 자기의 가르침의 반동작용으로 일어난 유티케스 논쟁, 즉 그리스도의 인성이 그리스도의 신성에게 완전히 흡수되어 그리스도의 인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유티케스의 주장과 그로 인한 논쟁을 다 지켜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콘스탄트노플의 주교와 로마의 주교가 네스토리우스를 다시 찾게 되었고 황제 마르키아누스도 네스토리우스를 본국으로 다시 소환하려 했으나 그 때는 이미 네스토리우스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네스토리우스의 사망 시기는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사망일인 450년 7월 28일 이후부터 451년에 개최한 칼케톤회의 이전에 어느 날이 될 것이다.


(2) 네스토리우스의 신학(그를 양성론자로 보는 것은 그의 논적인 기릴루스로부터 비롯된 오해)


네스토리우스의 신학을 말하기 전에 먼저 기독교의 삼위일체교리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고 지내가는 것이 좋겠다. 삼위일체 교리는 한 마디로 그리스도를 최초로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였던 야벳의 자손 그리스 로마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신격화시켜 셈족의 신 여호와와 동등한 신으로 만들어 예수가 기독교의 유일신이 되게 했던 가장 성공적인 종교적 작품이었다. 그러므로 이 교리가 완성되기까지 수많은 셈족과 함족들의 사상적 특징인 종적 개념은 모두 이단으로 배척되고 야벳족들의 사상적 특징인 횡적 개념, 즉 평등개념이 주장되어 구축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야벳의 자손 그리스 로마인들이 저 셈의 자손인 유대인들의 그 유일신과 동등한 (자기들의) 유일신을 만들어 낼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성서 속에서 삼위일체라는 말은 나오지 않고 있다. 다만 마태복음 28:19에 성령을 포함한 삼위의 이름이 나오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당시 구약적 유일신 신앙이 강했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당시 교회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임재로 깊이 체험을 하고 있었는지는 수수께끼 중에 수수께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원시 기독교 초기의 저자들은 세례의식 문에 나타난 삼위일체적 표현에 대하여 삼위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보았다. 따라서 아버지에게 돌아 갈 수 있는 모든 속성을 아들에게도 부여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성령은 고린도후서 3:17에 나타나는 대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간주했을 뿐 그들에게 있어서 성자와 성령은 동등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아버지와 아들의 종속관계를 어떻게 평등 관계로 매듭짖느냐 하는 문제였다. 초기 소아시아지방의 교부들 중에 독재론자(Monarchianist)들은 삼위일체 신앙이 잘못하다가는 삼신론에 빠지게 될 것을 우려하여 하나님의 단일성, 즉 유일신 신앙을 보전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결코 평등관계로 보지 않고 어디까지나 종속관계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의 사상을 따른 오리게네스가 독재론적 종속론을 반대하고 요한복음의 로고스 신앙을 들어 그의 희랍적 로고스론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래서 로고스되신 성자는 창조 이전부터 성부로부터 나온 자로 피조되지 않은 독립된 존재였다고 했다. 마침내 325년 니케아 종교회에서 아리우스의 종속론은 처단되고 그의 논적이었던 아다나시우스의 주장대로 아들은 아버지와 처음부터 완전히 동등한 자였다는 평등관계로 매듭을 짖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여호와가 유대인들의 유일신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유일신이 되어 이 기독교가 바로 지금까지 야벳의 자손들인 그리스 로마인들의 독점 종교가 되어 온 것이다. 이렇게 삼위일체 교리가 성립되는 데 일등공신은 오리게네스의 로고스 교리였다. 그는 이 그리스적 개념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한 자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 삼위일체 교리가 완성되어가는 과정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여전히 하나님의 피조자로 보았던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와 또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는 인성과 신성의 격체가 따로 있다고 함으로써 양성론자로 몰리게 되었던 페르시아의 네스토리우스는 이들의 이단자가 되어 때를 잘못 타고 난 희생양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아리우스를 희생시킴으로 그리스도가 곧 기독교의 하나님이라고 확정되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그러나 그리스도는 또한 참 인간이라고 확정이 되었으며, 431년 에베소 종교회의에서는 네스토리우스를 역시 희생시킴으로 그리스도의 인격이 하나라는 것을 또 확정했다. 끝으로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는 그리스도의 본성이 둘이라는 것을 최종적으로 결정했다.그런데 이런 결정의 모든 주도권은 서방 로마교회와 그 황실이 모두 움켜잡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의 교회의 패권은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와 로마로 대립이 되어 있었으며 신학적 패권 역시 아시아의 안디옥과 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와 유럽의 로마로 대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의 신학은 무엇이었던가? 솔직히 말해서 네스토리우스는 자신의 어떤 신학도 만든 자는 아니었기에 그에게는 어떤 신학도 있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대적한 자들이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만들어 냈을 뿐이다. 네스토리우스의 사상은 아폴로나리우스 주의를 반대하여 우리 주님의 인간 됨의 실재를 강조하기 위하여 성육을 예수 자신 안에서 두 위격들, 즉 로고스와 인간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네스토리우스는 사모사타의 파울루스나 포티누스(Photinus)의 사상과 동일하다는 오해를 받게 되었다. 3세기 중반 안디옥의 주교였던 파울루스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사람에 불과하며,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기 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마리아의 몸에서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또 앙키라의 마르킬루스의 제자였던 포티누스도 4세기에 이와 비슷한 교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은 결코 아니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여러 곳에서 누차 인간 마리아가 영원한 로고스를 잉태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네스토리우스를 오해하게 만들었고 또 그가 하나님과 성육하신 아기에 대하여 언급할 때 오해 살 만한 말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즉 그가 431년 제3차 공의회가 열리던 에베소에서 회의 참석시간이 늦어졌던 안디옥 주교들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는 말하기를 “나는 태어난 지 두 달 또는 세 달 된 분에게 하나님이라 부르지 않겠다.”(교회사가 쏘크라데스가 전하는 말)고 했던 것이다. 이 말이 후에 발견된 네스토리우스의 글(Heraclides) 속에는 “하나님이 태어나신 지 두 달 되었다 혹은 세 달 되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로 기록되었고, 그를 이단으로 파문시켰던 에베소 종교회의의 회의록에는 이 말이 “하나님에 관하여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다. 혹은 동정녀 품 안의 젖먹이였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네스토리우스가 한 그 말에 대해서 여러 곳에서 모두 다르게 표현되고 있지만 여기서 그가 한 말의 뜻은 태어난 지 두 달 혹은 세 달밖에 안 된 아기에게 나는 하나님이라고 부르지도 않겠거니와 경배할 수도 없겠다는 뜻이었다. 예수에게는 로고스적인 영원한 신성이 있지만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 인성도 동시에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죽어야 했던 것인데,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의 죽음은 곧 하나님의 죽음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마리아를 가리켜 하나님의 어머니 혹은 하나님을 낳은 자(Theotokos)라고 하는 말에 대해서 강력히 거부를 하고 그 대신에 인간(주님을)을 낳은 자라는 뜻으로 안스로포토코스(Anthropotokos)라는 말을 대용하자고 했다. 이 때문에 당시 마리아를 신모로 숭배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분노를 사게 되었다. 또한 당시 수도인 콘스탄티노풀의 주교였던 이 네스토리우스에 대해서 항상 자기의 경쟁자로 대립하고 있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키릴루스가 들고 일어나 이 사건에 깊이 개입함으로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몰아세워 마침내 그를 희생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일찍이 이 에베소 종교회의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서 환멸을 표명했고 19세기 말 교회사가였던 하르나크도 키릴루스에 대해 대단히 못마땅한 평가를 내렸다.


그러므로 오늘날 저 삼위일체 교리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를 이루고 있는 격체의 개념은 바로 네스토리우스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현대 신학이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일찍이 동방의 네스토리우스는 기독교의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한 본질의 두 격체를 주장했는데, 서방의 기독교는 그와 정 반대로 세 본질의 한 격체로 그 교리를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이것은 근대 기독교 교리사의 저자인 니브(J. L. Neve)가 말한 것처럼 네스토리우스의 이단론은 동방(안디옥)과 서방(로마)의 차이일 뿐 실제로 그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할 것이다.

 


4. 페르시아에서의 네스토리우스 교회

초기 기독교가 진출한 동방의 국가들 특히 파르티아왕국과 그 뒤를 이은 사산왕조(주후 226-651)는 주전 330년에 페르시아제국을 멸망시킨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더의 정복으로 말미암아 한때 헬라문화의 영향이 조금은 있었으나 본래 옛부터 바빌론과 앗시리아적 오리엔트 전통은 그들에게서 흔들림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로마적 유럽문화와는 혼합될 수 없는 것이었다. 페르시아 지역으로 그리스도교가 본격적으로 전파된 것은 사산왕조 시대이다. 이 왕조는 이슬람제국이 나타날 때까지(주후 651년) 옛 페르시아 영토를 그대로 다 장악하고 있었다.
유대인 포로들을 해방시켜 준 고레스 왕은 주전 546년에 왕위에 올라 열국을 정복하고 나서 일대 대제국을 창건한 자이다. 주전 546년에 페르시아 왕이라는 호칭을 취하고 메디아 대국을 병합시켰다. 이때에 페르시아인들이 신봉하고 있던 신은 아후라마쯔다라는 선신이었는데, 이 신의 가르침이 곧 페르시아제국의 정치윤리가 되고 사회 도덕의 기초가 된 것이다. 그래서 페르시아제국은 모든 속국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해 주고 민족의 고유문화를 인정해 주었다. 유대인들의 해방은 바로 이런 페르시아 정신의 덕분이었던 것이다.


(1) 페르시아 선교


교회사가 하르낙은 2세기 경 페르시아에는 360개의 교회가 있었다고 진술했다. 이때의 페르시아는 사산왕조시대 이었으며 이때에 들어간 기독교는 바로 에뎃사 교회로부터였다.페르시아 선교에 대한 원시적 전설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리아 행전(Acta Mari)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이 책은 시리아어로 된 6세기 작품으로서 아다이의 교리를 토대로 하고 있다. 내용은 아다이가 마리(Marys)를 니시비스로 파송했다는 것이며, 마리는 그곳에 가서 이교의 신전을 부수고 교회와 수도원을 많이 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 티그리스 강 하류로 내려가 페르시아의 수도인 쌍둥이 도시 셀류키아 크테시폰(Seleucia-Cteciphon)에서 복음을 전하고 파아스(Fars)까지 갔으며, 거기서 그는 사도 도마스의 체취를 맡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죽기 전에 바 하가이(Bar_Aggai)를 사제로 안수를 했는데 이 바 하가이는 3세기의 실제적 인물이었다. 일찍이 파르티아 왕조 때 페르시아 땅에는 유대인들의 식민지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오순절 기사에는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파르티아(바대)와 메대와 엘람과 메소포타미아 등에서 왔다고 했다(행 2:9).
페르시아 선교에 대한 두 번째 전설(학설)은 네스토리우스파의 선교이다. 로마제국의 국경 넘어에 있는 자압(Zab)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는 저 유명한 에뎃사가 있었고 또 그 에뎃사로부터 동남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곳에 니시비스가 있었다. 이곳이 바로 에뎃사 다음으로 동양교회의 중심지가 된 곳이다. 일찍이 에뎃사가 로마에게 점령되었을 때 그곳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해 페르시아에 속했던 땅 니시비스로 모두 이동했다. 그래서 이 지역에는 일찍부터 교회가 많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후 네스토리우스파가 다시 들어와 신학교를 세우고 수도원과 병원 등을 세워 이 니시비스를 동양 선교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이들이 동양선교를 전개했는데 사산왕국의 사푸르2세(303-370)의 박해가 오기 전까지는 여기서 평화로운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2) 사산왕조의 기독교 박해


사푸르2세의 치세는 온통 로마제국과의 전쟁 투성이 역사였다. 이 때 국경지대에서의 영토분쟁은 7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결국 사푸르2세가 콘스탄틴 황제의 군대를 대파하여 축출시켰고 율리우스 황제(361-363)를 메소포타미아에서 축출했다. 이와 같이 동방과 서방의 두 세력 간의 대립투쟁과 기나긴 정치적 전쟁역사 속에서 페르시아의 국가종교인 조로아스터교는 그 중심교리대로 선악 간의 대립원리가 바로 이때에 체계화되고 있었다. 반면 그들의 대 적국인 바로 로마제국의 국교인 그리스도교가 그 시기에 페르시아 땅에서 결코 평안할 수가 없었다. 그때 사푸르2세는 그리스도인들을 전쟁 스파이로 의심하여 감시를 강화했고 탄압하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그때 사푸르2세 치하에서 순교를 당한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1600명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 후 399년 야쯔다 기르드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기독교 신앙에 공적 자유가 비로소 얼마 동안 인정되었다. 그래서 페르시아교회는 410년 셀류키아에서 모인 대회에서 니케아 신앙고백을 정식으로 받아들일 것을 결의했던 것이고 야쯔다 기르드2세에게는 스스로 세례를 받게 했으나 신하들의 적극적인 만류로 개종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말년에는 그가 다시 또 기독교 박해를 허용하고 말았다.


그의 아들 바라암은 그가 즉위하자마자 기독교를 계속 박해했다. 그래서 야쯔다 키르드2세(438-457)때에 처형된 신자의 숫자는 무려 153,000명이나 되었던 것이다.


(3) 네스토리안들의 동양교회 설립


네스토리우스가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자 그를 쫓는 자들이 모두 로마국경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시리아 영토로 와서 선교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보다 일찍이 421년에 서방 로마교회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던 시리아 동양교회와 합류하여 이들이 시리아 교회의 교권을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그래서 동양교회의 아시아 선교는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네스토리우스 주의자들이 사산왕국의 영토로 넘어 온 것은 450년 경이었다. 이때에는 벌써 로마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 받은 유티케스파인 단성론자들도 그곳에 와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네스토리우스파는 동쪽 에뎃사를 중심으로 그리고 단성론자들은 서쪽에 안디옥과 북쪽에 콘스탄티노풀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489년 동로마의 제노황제가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하여 박해를 가하며 에뎃사에 있던 신학교와 수도원과 병원 등을 파괴하고 페쇠하자 그들은 다시 또 로마영토를 떠나 페르시아 땅인 니시비스와 셀류키아로 이동했다. 이렇게 페르시아지역으로 이주한 네스토리우스파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과 안디옥 및 알렉산드리아 교회들과 모두 관계를 끊었다. 당시 사산왕국의 당국으로부터 로마제국의 스파이라는 의심을 풀게 해주었다. 그리고 496년 네스토리우스파 총회에서는 서방로마교회로부터의 독립을 결의하고 498년에는 또 명실공히 동양교회(The Church of East)를 설립했다.


이렇게 하여 에뎃사를 떠나 니시비스에서 자리를 잡은 네스토리우스파의 동양교회는 서남쪽의 셀류키아와 크테시폰 도시(수도)에서 더 왕성한 선교활동을 펼쳤다. 그래서 거기서 특수종교공동체인 멜레트(Melet)로 인정받아 일정한 사회적·종교적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5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동안 네스토리우스교회가 점령한 선교영토는 유프라데스 강의 동쪽에서부터 시작하여 서쪽으로 이집트·시리아·아라비아·소코토라·메소포타미아·갈라디아·페르시아·메디아·박트리아·힐카니아 및 인도까지 포함되었다. 635년 당조 초기에 중국으로 전래된 경교도 바로 이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였던 것이다.


그러나 6세기에 접어 들면서 사산왕조의 코스로에스1세(590-628)가 비잔틴 로마군대와 교전하기 시작하면서 기독교는 다시 핍박을 받게 되고, 그는 에뎃사 안디옥 그리고 615년에는 예루살렘까지 정복하여 거기서 로마세력을 모두 몰아내었다. 651년 이슬람교의 아랍군대가 침략하게 되자 사산조는 무너지고 페르시아의 역사는 영원히 종막을 내리게 되고 만 것이다.

(4) 이슬람 치하에서의 그리스도교 - 생략 -

 


5. 맺는 말

페르시아와 로마제국은 2000년 이상 이 땅에서 서로 앙숙이 되어 대립해 온 경쟁국가였다. 만일 우리 기독교가 애초부터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에 이슬람교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기독교가 아시아 땅에서 그처럼 수난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가 발생했던 땅은 분명히 아시아 땅이었다. 그런데 어찌해서 그 기독교가 헬라세계와 유럽 땅에서 성장되어 아시아에서는 외래종교로 취급되고 배척을 받게 되었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다. 일찍이 로마교회가 이단자로 처단했던 네스토리우스주의는 바로 이런 모순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그 모순을 만든 로마카톨릭에 대한 하나의 프로테스탄트적인 항거였다.


아폴로 나리우스주의는 이단자 아리우스주의의 반동으로 생긴 하나의 극단적인 이념이었다. 그런데 네스토리우스도 이 아폴로나리우스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또 하나의 극단주의였다. 그리고 유티케스주의는 다시 이 네스토리우스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또 하나의 이단이었다. 이와 같이 두 발짝 앞서가는 극단적 반동은 언제나 그 시대의 이단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네스토리우스가 당대에는 이단자로 처단을 받았었지만 한 세대가 채 지나기 전에 그는 다시 선각자로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를 이단자로 처단했던 로마의 주교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그리고 황제 마르키아누스가 네스토리우스를 다시 찾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그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때 네스토리우스가 남보다 두 발짝 앞서가지 말고 한 발짝만 앞섰더라면 그가 당대에 어떤 평가를 받은 인물이 되었을까?


그러나 일찍이 유일하게도 동양 땅에서 두루 퍼져 물 속에 녹아 든 소금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가 된 이 네스토리안들의 동양교회! 그것은 지금까지 수백 년을 두고 역사의 안중에서 종적을 찾을 수 없는 그믐달이 되어 왔다. 그런데 이 시대에 누가 이 동양교회를 다시 찾고 이 시대에 재평가하여 우리들의 교회로 보름달 되게 그 정체를 세워줄 수 있을 것인가?

 

 



자료제공 : 대한기독교교육협회, 월간[기독교교육] 2004년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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