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2011. 3. 18. 22:31교회사자료/1.기독교회사

교회사 서 론

- 교회사 공부에 앞 서“예수를 잘 믿으려면 교회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라고 순교하신 어느 목사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실로 우리는 주님이 피 흘려 사신 主의 敎會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와 같은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며, 그 가운데  목숨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며 진리를 보수하다가 간 앞 선 성도들의 모습에서  말할 수 없는 감격과 함께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고, 또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시대 따라 사람 따라 타락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경각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또 사람은 바뀌고 시대와 상황은 바뀌어도 그 속에 흐르는 원리는 같으니, 인간사(人間事)의 여러 타락, 개혁, 부흥의 원리를 배워 놓으면 시대(時代)를 보는 안목(眼目)이 생겨져서 오늘을 진단하고 앞을 대비하는 준비하는 신앙생활이 되어 큰 유익이 될 수 있고,  또 그것을 오늘을 사는 우리와 접목시킬 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반성과 도전의식이 형성되어 신앙에 큰 힘이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사를 통하여 수많은 신학을 접할 수 있습니다. 또 수많은 이단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많은 열심있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게되고, 교권주의로 타락하고 빠지는 모습도 보게 됩니다. 교회가 어떤 때 부흥하며 어떤 때에 타락하는 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2년여에 걸쳐 만들어졌다 하나 여전히 많은 부분이 부족하고, 또 Touch하지 않고 지나가는 부분이 있는 것을 자인합니다.  그것은 교재를 가능하면 인물(Persons)중심과 그 시대를 정평정가하며, 오늘과 대조를 시도함으로써 가능하면 신앙의 실리(實利)위주로 나가려는 욕심이 앞서다 보니 그렇게 된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비록 크게 만족할 만한 교재는 못되지만, 그런대로 유익한 공부가 될 것입니다. 이 교회사 공부를 통하여 자기를 돌아보고 시대를 돌아보는 동기부여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길 기원합니다.          

 

.차 례 특별부록 : 신구약 중간사서론 -  교회사 공부에 앞 서

제 1 장 . 초대교회 (초기)      

1. 초대교회의 배경 - 국가적배경및 문화종교적배경,바리새파, 열심당원,  사두개파, 엣세네파, 시나고게, 디아스포라, 산헤드린어      

2. 초대교회의 시작      

3. 초대교회의 특징      

4. 로마제국의 박해와 순교자들


2 장 . 초대교회 (후기)      

 1. 속사도 교부      

2. 니케아 이전 교부 - 변증가,헬라교부,라틴교부      

3. 니케아 이후 교부      

4. 이단연구 - 영지주의, 에비온주의, 말시온파, 신플라톤주의              

   참고 - 이방종교 (조로아스터교, 미트라교, 마니교)      

 5. 콘스탄틴 대제와 기독교의 공인      

6. 초대교회의 변질과 분파주의


제 3 장 . 로마제국교회      

1. 니케야 회의      

2. 수도원 운동      

3.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4. 교황제도 - 이시도리안 교령집      

5. 동서교회분리      

6. 이슬람교


제 4 장 . 중세교회      

1. 기독교의 유럽전파      

2. 샤를레망 대제와 신성로마제국      

3. 교황과 황제 (1)      

4. 교황과 황제 (2)      

5. 교황권의 타락      

6. 십자군      

7. 중세기의 미신신앙      

8. 신약교회 고수주의자들      

9. 중세 교회의 두기둥


제 5 장 . 종교개혁      

1. 종교개혁전의 선구자들      

2. 루터의 종교개혁      

3. 칼빈의 종교개혁      

4. 칼빈주의 VS 알미니안주의      

5. 영국의 개혁      

6. 프랑스와 네델란드의 종교개혁      

7. 재세례파와 예수회


제 5 장 . 근대의 기독교      

1. 청교도 운동, 웨스트민스트회의      

2. 기독교의 미국전파      

3. 경건주의와 모라비아교도      

4. 감리교의 큰 별들 (1)      

5. 감리교의 큰 별들 (2)      

6. 19 세기의 미국교회      

7. 19 세기의 영국교회


제 6 장 . 한국의 기독교      

1. 초기의 선교      

2. 한국교회 급성장과 부흥      

3. 한국교회의 수난      

4. 장로교의 분리      

5. 신흥종교의 난립


참고서적

시드니 휴턴 著    「基督敎 敎會史」 성서교재간행사 「성서백과대사전」윌리스턴 워커 著  「世界 기독교 교회사」     베이커 著      「신학사전」정수영 著         「새 敎會史」 삼성출판사     「大 世界의 歷史」박광성 著         「敎會史」 정성구 著      「실천신학 개론」박광성 著         「한국 교회사」            손봉호 著      「사도신경 講解」모이어 著  「人物中心의 교회사」      신성종 著     「엠마오 성경연구」신구약 중간사


●차 례

1. 전 마카비 시대(1)바사 (Perssian Empire)에 속한 시대  

1)앗수르(Assyrian Empire)의 멸망  

2) 페르샤 제국의 등장과 주변국 멸망  

3)페르샤의 멸망(2)헬라에 속한 시대 (B.C 330-285년)

(3)애굽에 속국된 시대(B.C285-204년)(4)수리아에 속국된 시대(B.C 204-168년)2. 마카비 시대  (B.C 168-63년)3. 후 마카비 시대 (B.C 63- A.D 70 년)(1)안티파터(2)헤 롯(3)가이샤라 대소동과 예루살렘 함락참고 - 역대 로마 황제들서 론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유다 멸망 이후부터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어버린 A.D 70년 상간의 공백기간일 것이다. 즉 바벨론에 멸망을 당했는데, 신약에 와 보니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궁금함을 풀고자 중에서 쉽게 간추린 내용을 공부코저 한다. 신구약 중간기인 유다 멸망 년도인 B.C 596년에서 예루살렘 멸망인 A.D 70년까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1. 전 마카비 시대① 바사에 속한 시대 (B.C 536-330년)② 헬라에 속한 시대 (B.C 330-285년)③ 애굽에 속한 시대 (B.C 285-245년)④ 수리아에 속한시대(B.C 204-168년)2. 마카비 시대  (B.C 168-63년)3. 후 마카비 시대 (B.C 63- A.D 70 년)제1장.전 마카비시대(1)바사 (Perssian Empire)에 속한 시대1)앗수르(Assyrian Empire)의 멸망①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져 있을 무렵 성경의 중심지인 메소포타미아에는우리가 잘 아는 앗수르라는 대 제국이 있었고, 그 위로는 메디아(Media), 옆으로는 리디아(Lidia), 그리고 아프리카에는 애굽(Egypt) 등의 큰 나라들이 있었고, 작은 나라로는 유다, 이스라엘, 시돈, 엘람 등이 있었다.② 그 중에서 가장 강대국은 앗수르였다.  이 앗수르가 B.C 724년 살만엣셀 5세때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호세아 왕을 포로로 잡고 이스라엘을 3년간 공격 끝에 멸망을 시키고 말았다. (사르곤 2세때, B.C 721년) ③ 이 강대한 제국도 앗슈르바니팔 (B.C 688-627년) 말년에는 스키타이인의 침입과 내부 반란 사건, 그리고  B.C 626년 갈데아 장군 <나보폴라살>의 신 바벨론 제국을 세움으로 인하여 대 제국은 점차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그가 죽은 후, 아들들의 상속 싸움으로 인하여 제국의 기능은 완전히 마비되고 말았다.  이런 가운데 신바벨론 제국의 나보폴라살의 공격과  메소포타미아를 엿보던 메디아(메대)의 칵사레스의  연합군은 마침내 B.C 612년 여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두달 동안 포위 끝에 아주 철저히 파괴하여 흔적조차 남지 않게 해 버렸다. 앗시리아의 왕은 살해되었고, 거리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수 세기를 걸쳐 고대 오리엔트 전역을 압도했던 거대한 제국 앗수르는 흔적도 없이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2) 페르샤 제국의 등장과 주변국 멸망① 앗수르의 멸망 후, 오리엔트는 한 동안 갈데아(신바벨론 제국), 메디아, 리디아, 애굽 등으로 나누어져 분립하는 시기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바벨론(Babylonian Empire)은 느부갓네살(B.C 605-562년) 때에는 황금의 전성기를 이루었다.② 그는 B.C 586년에 유다를 멸망시켰으며, 애굽과 싸워서 이겨 가나안과 페니키아(Poenecia) 전역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의 죽음 (B.C 562년) 이후, 바벨론은 급격히 쇠퇴해 가게 된다.③ 이러한 때에 고대 오리엔트의 종막의 주역을 하게 되는 페르시야 제국(Perssian Empire)이 성장하고 있었다.④ 폐르샤 왕조의 가계(家系)           시조(始祖): 아카이 메네스(B.C 7세기 초)                             ꠐ                       데이스 페스 (B.C 660년 전후)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ꠍ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ꠈ        ꠐ        ꠐ장남 아리아람네스(B.C620전후)   차남 키로스 1세(B.C 620전후)       (파 르 사 왕)                   ( 르마슈와 안샨 총독)                ꠐ                                    ꠐ     아들 아르사메스                      아들 캄비세스 1세     (B.C 580 전후)                         (B.C 600-559년)                                                     ꠐ                                             아들 키로스 2세⑤ 여기서 캄비세스 1세가 사촌인 아르사메스를 쫒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메디아의 아스티아게스의 딸 만다게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고 여기서 난 것이 성경에서 바사왕 고레스로 불리우는 키루스2세(CyrusII)인 것이다.  고레스 2세는 오리엔트 4 강국중 메디아, 리디아, 바벨론 3국을 차례로 멸망을 시켰다.㉠ 메디아의 멸망하란을 빼앗으려는 메디아 왕을 견제하기 위하여 바벨론의 나보니도스 왕은 젊은 야심가인 고레스 2세와 동맹을 맺는다.  이에 불만인 아스티아게스는 외손자인 고레스 2세와 전쟁을 벌리게 되나 여기서 고레스2세는 대 승리를 하여 메디아 왕 아스티아게스를 포로로 잡고 메디아를 멸망시키게 되는 것이다.㉡ 리디아 멸망고레스 2세는 에게해 쪽으로 칼을 돌려 리디아 왕 크로에수스에게 항복을 권하였으나 불응하자 할리스 강 유역에서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승리가 없는 가운데 겨울이 되어 봄에 다시 싸우기로 기약하고 돌아간 크로에수스에게 고레스 2세는 봄을 기다리지도 않고 수도 사르디스(사데)로 진격하여 리디아를 멸망시켰다. (B.C 546년)㉢ 동방으로그후 고레스 2세는 동방의 이란 고원을 차례로 함락하여 점령하였으며, 이어 중앙 아시아인 아크사르테스(시르)강 - 아랄해에서 천산산맥 쪽으로 흐르는강- 까지 수비대를 두었다.㉣ 바벨론의 멸망이어 그는 쇠퇴해진 바벨론을 힘들이지 않고 멸망시켰던 것이다. (B.C 538년) 이때 섭정 왕자 벨사살이 저항을 하였으나 곧 멸망당하고 말았다.㉤ 유대인의 본국 송환그후 그는 B.C 536년에 유대의 왕자 세스바살을 위시하여 스룹바벨, 예수아, 느헤미야, 스라야 등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폐허된 예루살렘의 성전을 건축케 하였던 것이다.3) 페르샤의 멸망고레스 2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 : 성경의 아닥사스다 (B.C 530-522년 재위)는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중지시키고 애굽을 공격하여 멤피스를 함락시키고 애굽을 식민지로 삼게 된다. 캄비세스 2세가 죽자, 그가 아들이 없는 관계로 그의 사촌인 다리우스1세 (B.C 522-486년)가 왕 위에 오르게 되고, 예루살렘 성전 건축은 완성이 된다.  이 왕 때 영토는 인도까지 병합하게 된다. 그러나 폐르샤 제국은 B.C 498년 아테네와의 제 2 차 페르시야 전쟁 - 일명 마라톤 전쟁  아테네가 이김 마라톤의 기원- 과  제 3 차 페르시야 전쟁( 일명 살라미스 해전)과  그후에 도 계속 마케토니야와 전쟁을 하는 가운데 국운은 점차 기울어 지게 된다. 그러다가 B.C 336년 알렉산더가 마케도냐 왕으로 즉위하여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와 전쟁에서 이겨, 이란 고원까지 함락시키게되니, 이리하여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하게 되고, 유다는 헬라의 통치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B.C 330년)(2)헬라에 속한 시대 (B.C 330-285년)알렉산더는 바사를 정복하고, 이어서 애굽을 정복하였으며, 동방으로 인도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그는 B.C 323년 바벨론에서 열병으로 인하여 32세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만다.  그가 죽자 헬라 제국은 네 장군이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① 애굽 - 프틀레미 (Ptolemy)② 마케도냐, 그리이스 - 안티파터 (Antipath)③ 동북부 트리키아 - 리시마쿠스 (Lysimachus)④ 수리아 - 셀루커스 (Seleucus)유다는 처음에는 프톨레미와 셀루커스의 경합지 였으나 마침내 프톨레미의 통치에 들어가고 말았다. (B.C 285년)(3)애굽에 속국된 시대(B.C285-204년)이 때 주목할 만한 일은 프톨레미 2세의 명령에 의하여 알렉산드리아에서 구약 성경 70인역(LXX)이 헬라어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70인경은 히브리어를 모르는 헬라어권 문화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유대교를 전하는 큰 공헌을 하였으며 신약에 인용된 구약 성경이 모두 70인경에서 왔다는 사실로도 그것이 신약 시대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4)수리아에 속국된 시대(B.C 204-168년)① 애굽과 수리아와  싸움에서  수리아가 이겨 유다는 수리아의 속국이 되었다.  이 때 수리아 왕 안티오커스는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인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Antiochus Epiphanes)가 왕이 되었다.  그는 로마에 12년 동안 볼모로 잡혀 있다가 온 자로서, 모세 율법에 충실한 모든 유대인들을 개종시키지 아니하면 다 죽여 버릴려고 하였다.② 그리하여 안식일을 지키는 자, 할례를 행하는 자, 히브리어 성경을 가진 사람은 다 사형에 처하였으며, 곳곳에 이방 신상을 세웠다.  더우기 예루살렘 성전 가운데 쥬피터(Jupiter)의 신상을 세우고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돼지의 피로 제단을 적시었다. 이것이 마카비의 혁명을 가져오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이다.제2장. 마카비 시대(B.C 167-63)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의 유대교 말살 정책에 , 모딘(Modin)의 늙은 제사장 마타디아스(Mattathias)가 그의 다섯 아들과 함께 수리아의 관원을 죽이고 대항함으로써 본격적인 독립운동으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계속 실패하였으나 결국은 예루살렘을 해방시켰다. 그리고 마타디아스의 큰 아들 유다스 마카비가 주피터의 우상 숭배로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케 한 후,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11월 25일을 하누카 (빛의 절기)라 하여 지켜오게 되는 것이다. 이 때 부터 이스라엘은 하스몬 (마타디아스의 고조 할아버지)家의 통치시대가 계속되어 그런대로 명맥이나마 독립을 유지 하였던 것이다.하스몬 가계(家系)                         마타디아스                             ꠐ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ꠇ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ꠇ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ꠈ        ꠐ              ꠐ               ꠐ        ꠐ유다스마카비    요나단       시  몬        ꠐ                          요한 힐카누스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ꠍ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ꠈ      알렉산더 얀네우스                  아리스토 불루스         (B.C 102-76)동생 미망인과 결혼하여 국민의 반감을 삼        ꠆ꠏꠏꠏꠏꠏꠏꠏꠏꠍ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ꠈ        ꠐ        ꠐ힐카누스2세             아리스토불루스2세 (B.C 66-63)대제사장                알렉산드라가 죽은 후 형을 물리치고아내 알렉산드라는 王            왕이 됨.이렇게 되니, 시몬의 손자 힐카누스 2세는 왕위를 찾기 위하여 당시 시리아에 와 있던 로마 장군 품페이우스에게 당시 에돔 총독인 안디파터 (마태1장의 헤롯 아버지)를 통하여 중재를 의뢰하였다. 이에 품페이우스는 예루살렘을 삼 개월 간 포위 공격하여 아리스토불루스 2셀르 잡아 로마로 데려가고 힐카누스2세 역시 왕이 되질 못하였다. (B.C 63년) 이리하여 마카비 시대는 끝이 나고 로마의 속국시대가 시작되어 헤롯 가문의 통치가 시작되는 것이다.제3장. 후 마카비시대(B.C62-AD70)(1)안티파터① 후 마카비 시대란 한 마디로 로마의 통치시대를 말한다. 이 때 부터 유대 역사에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은 안티파터와 그의 둘째 아들인 헤롯이다.  안티파터는 처음 품페이우스(Pompeius)를 지지하였으나 품페이우스가 케사르와의 권력투쟁에서  몰락하였기에 케사르쪽으로 기울어졌다.당시의 애굽의 왕은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그의 누이 클레오파트라 이렇게 두 사람이었는데, 그들은 또한 부부였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 불화가 생겨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에 쫒겨 나 있었다. 이때 케사르에게 클레오파트라는 단신으로 보호를 요청하며 숨어 들어왔다.  22세의 나이로 그는 케사르의 마음을 사로 잡았고, 케사르는 클레오파트라가 왕위에 오르게 하기 위하여 프톨레미 13세와 싸우게 되었는데, 이때 안티파터가 케사르에게 3,000명의 군사를 보내 도와 주었다.그러나 안티파터는 나중에 힐카누스 2세 파에 의해 독살되고 말았다.그러나 그의 둘째 아들 헤롯은 로마로 가서 안토니우스의 환심을 사서 그의 추천으로 원로원에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케사르가 황제가 될려다 부르투스 등에게 암살을 당한 뒤, 2차로 출범한 삼두정치의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 안토니우스 중 한 사람이었다.(2)헤 롯헤롯 (재위기간 B.C 37 - 4년)은 헬라화 정책을 급진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는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행동을 하였다. 그는 정치가로서, 건축가로서는 유능하였지만 가정생활은 대단히 불행하였다. 남을 믿지 못하는 그의 성격은 10명의 아내 중 2명을 죽였고, 처남 하나와 아리스토불루스 등 아들 셋과 장모까지 죽였다.  더우기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하여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 아이를 모두 죽인 것을 우리는 마2:16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 헤롯이 B.C 4년 70세의 나이로 죽은 후,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영토는 세 아들에게 나누어 졌다.아켈라오 - 팔레스틴 남쪽 부분 ( 마 2:22)빌    립 - 팔레스틴 북동쪽    (눅3:1, 막6:17)헤롯 안디바 - 갈리리와 베뢰아 (눅3:1)이 중 아켈라오와 안디바는 친형제이며 빌립은 이복(異腹) 형제였다. 아켈라오는 분봉왕 9년 동안 백성들을 너무 압제적으로 다스려 A.D 6년 당시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가 그를 면직시켜 지금의 프랑스 지방인 갈리아로 유형을 보내 버렸다. 빌립은 요단 동쪽 지역에 도시를 만들어 황제를 존경하는 뜻으로 그 이름을 가이샤라 빌립보 (마16:13)라 하였다.안디바(재위 B.c 4-A.D39년)는 헤롯의 아들 중에 가장 유능하였다.  그러나 그는 로마로 여행하는 도중에    그의 이복 동생 빌립의 아내인 헤롯1세에게 죽은 아리스토불르스의 딸 헤로디아에게 반하여 청혼을 하고, 헤로디아는 헤롯의 현 부인 나바테아 왕 아레타스의 공주인 아레타를 물리칠 것을 조건으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마 14:4과 막 6:18에 있듯이 세례 요한의 책망을 받게 되었고, 나중에 그는 세례 요한을 죽이고 말았던 것이다. (마 14:10)A.D 39년 헤롯 안디바는 현 본봉왕 지위보다 더 높아지기 위하여 로마에 간 사이에 헤롯1세의 아들인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먼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눅3:1의 디베료)에게 고발하여 헤롯 안디바를 쫒아내고 그 자리에 자기가 앉았다. 이 헤롯 아그립바 1세 (재위 A.D 37-44년)가 행12:1-3에 있듯이 사도 야고보를 죽였고, 베드로를 체포했으며 초대 교회의 여러 지도자들을 괴롭힌 사람이다.  그는 A.D 44년에 죽었고, 그후 행25:13에 나오는 즉 사도 바울의 변론을 듣던 헤롯 아그립바 2세가 즉위하였다.헤롯의 가계 (家系)                      안티파터        ꠐ                        헤 롯- 아들인 아리스토불루스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ꠇ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ꠈ        ꠐ        ꠐ        ꠐ        ꠐ        ꠐ        ꠐ        ꠐ        ꠐ아켈라오      빌 립   헤롯안디바   아리스토불루스1세(마2:22)     (눅3:1)   (눅3:1)     아버지인 헤롯1세                      세례요한을      에게 죽음                      죽임(마14:10)        ꠐ        ꠐ                                    헤롯 아그립바1세                                   (행12:1에 나오는 헤롯)        ꠐ                                    헤롯 아그립바2세                                  (행25:13에 나오는 헤롯)(3)가이샤라 대소동과 예루살렘 함락① 이렇게 하여 계속 로마의 통치를 받아 오던 중 A.D 66년에 유대인들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그것은 헬라인들은 유대인의 시민권이 없음을 주장하였는데, 로마의 관리들은 헬라인들에게 유대의 시민권을 줘 버렸던 것이다. 이에 유대인들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② 이에 로마는 A.D 70년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황제 때, 황제의 아들 디도 장군은 정예의 4군단을 이끌고 4월 부터 9월 까지 격심한 공격을 하여 예루살렘은 함락이 되고 여호와의 성전도 성벽도 도시도, 다 폐허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전사한 자가 110만명, 포로가 97,000여명이라 전해진다.③ 이어 A.D 132-135년에 걸쳐 또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역시 전멸하고 말았다. 이후 부터는 유대인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만 1년에 한 번씩 예루살렘 함락 기념일에만 폐허된 여호와의 성전 벽에 매달려 잃어버린 가족과 나라를 생각하며 통곡의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허가될 뿐이었다. 이것이 지금도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통곡의 벽」이다.④ 이리하여 그들은 나라 잃은 백성이 되어 세계 각처로 뿔뿔히 흩어져 유랑하며 갖은 핍박과 설움을 겪으며 약 2,000여년 간을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일찌기 예수님이 마24:1-2에서 말씀하셨듯이 성전의 돌 위의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무너뜨리게 된다는 예언과 마27:25에 있듯이 포악한 군중들이 빌라도를 둘러싸고 큰 소리로 외치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 달고 대신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하던 그 날의 스스로 자원했던 저주가 그로 부터 얼마 후에 분명히 이루어졌던 것이다.참고 - 역대 로마 황제들Julius Caesar (B.C 46-44) - Augustus : 옥타비아누스(B.C31-A.D14) 예수님탄생 - Tiberius(A.D12-37) 예수님처형 - Caligula (37-41) - Cladius (41-54) - Nero(54-68) 바울처형 - Galba(68-69) - Otho (69) - Vitelius(69) - Vespasian(69-79)예루살렘 멸망 - Titus (78-81) - Domitian(81-96)그리스도인 박해, 사도요한 유배 - Hadrian(117-138) - Antonius Pius(138-161) - Marcus Aulelius(161-180) - ----  Constantine(306-337) - Jullian(361-363)다시 이교신앙회복 - Jovian (363-364) 기독교신앙 재수립 - Theodosius(378-395) 기독교 국교 선언                        1981년 1월 30일 완성참고서적신성종 著  엠마오 성경연구   배제민 著  구약역사개론오 할레이 著 성서핸드북   삼성출판사  전집 대세계의 역사             ① 극동의 여명            ② 그리이스, 헬라             ③ 대로마 제국제1장. 초대교회(초기)제 1-1장. 초대교회의 배경1. 정치적 사회적 배경초대교회는 유대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 이때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그리고 당시 유대에는 헬라인, 로마인, 그리고 여러 타민족들도 있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정치적, 사회적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 신구약 중간사 참고 (1) 애굽시대 (BC 1600-1200) - 출애굽과 해방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야곱때 애굽으로 내려가서 430년 동안 거대한 민족을 이루었다. 후에 모세의 지도로 가나안에 돌아와 4-500년동안 강대한 왕국을 세운다. 후에 솔로몬의 말년에 나라는 남북으로 분열된다. 북쪽의 10지파는 ‘이스라엘’이라고 하였으며 이 나라는 BC 721년 앗수르(Assyria)에게 멸망되고, 남쪽의 두 지파는 ‘유대’라 하여 BC 586년에 바벨론(Babylonian Empire)에 의해 멸망된다.(2) 바벨론 시대 (BC606-536) - 나라의 멸망과 포로BC 586년 완전 멸망되기 이전에 (BC 606) 포로되어 갔던 이 민족은 포로생활 70여년을 보낸다. 그 후 BC 536년 포로들이 본국에 돌아와 성전 재건과 함께 국민생활을 하게 된다.(3) 메대.바사시대 (BC 536-330) - 포로의 석방과 귀환이스라엘은 포로에서 풀려 고국으로 귀환해서 성전재건과 신앙운동을 회복하려고 진력한다. 이 무렵에 구약성경이 모두 완성된다.(4) 헬라시대 (BC 330-167) - 헬라문화와 언어생활알레산더 대왕이 BC 336년 20세의 나이로 애굽, 앗수르, 바벨론, 바사의 지배아래 있던 동쪽 나라를 모두 정복한다. BC 332년 팔레스틴을 침략하여 유대인들을 알렉산드리아에 거주케 하고, 자기가 정복한 영토마다 헬라 성읍을 건설한다. 그리고 헬라문화와 헬라어를 보급한다. 알렉산더가 BC 323년에 죽자 제국은 넷으로 분열된다. 동쪽인 시리아는 Selecus가, 애굽은 Ptolemy가 차지한다. 팔레스틴은 애굽에 속하여 BC 301-198년까지 애굽의 지배를 받는다. 이 무렵 유대인들은 대체로 평화롭게 살았고, 알렉산드리아는 유대교의 중심지가 된다. BC 198년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대왕이 다시 팔레스틴을 정복하여 수리아 왕조 지배로 들어간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Antiochus Epiphanes:BC 175-164)는 유대교 말살정책을 썼다. 성전을 더럽혀 돼지를 바치고, Jupiter제단을 만들고, 할례를 금하고, 성경을 가진 자를 살해하고 하였는데, 이가 마카비 혁명을 가져오게 된다. 이리하여 BC 165년부터 100여년 간은 유대가 독립하여 마카비 가문에서 다스리게 된다. 이 시대를 마카비 시대 (Maccabee)라 한다.(5) 로마시대 (BC 63-AD 476) - 정치적 예속BC 63년에 유대는 로마의 품페이 장군에 의해 정복된다. 로마는 팔레스틴을 에돔(에서의 후예) 자손인 안티파텔에게 통치를 맡기고, 안티파텔은 자기의 아들인 헤롯에게 유다의 왕위를 계승시킨다. 이 헤롯은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보이려고 성전을 재건한다. 그는 잔인하여 예수님의 탄생시 베들레헴 어린이들을 살해하였으며 부인을 10명이나 두어 그의 많은 아들과 자손들이 신약교회시대에 활약한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유대교의 회당인 ‘시나고게’가 생겨지고, ‘디아스포라’ 또 바리새파, 서기관, 사두개파, 엣세네파, 열심당원, 산헤드린어 등이 생겨졌다.2. 문화적 종교적 배경(1) 회당 (Synagoge)유대인의 회당제도는 바벨론 포로기간 중에 생겨났다. 유대인들이 고국에서 정상적으로 살 때는 성전에서 제사행위로 예배를 드렸으나, 바벨론에 의해 성전은 파괴되었고, 민족은 각처로 흩어져서 제사가 불가능하였다. 이 무렵 포로중인 유대인들이 성전 대신 회당에 모려서 율법을 강론하였고, 시편을 낭독하였다. 이 무렵이 유대교의 틀을 갖추는 시기이며, 포로 후 환국해서도 성전과 함께 회당제도가 각 동리마다 보편화된다.  이 회당제도가 생긴 후에 새로이 생긴 직제가 있다. 그것은 소위 ‘서기관(Scribe)’ 또는 ‘율법사’라는 랍비들이다.  이들이 처음에는 성경을 복사하는 일을 하였으나, 차차 성경 연구와 해석을 하는 일까지 하게 되었다.(2) 디아스포라 (Diaspora)유대인들이 포로 귀환 때  다 돌아오지를 않았다. 그들은 바벨론, 앗수르, 시리아, 베니게, 소아시아, 헬라, 애굽, 알렉산드리아, 로마 등 각처에서 흩어져 살게 된다. 이들은 각 나라에 살면서 회당을 중심한 종교생활을 했는데 그것이 바울의 세계 선교의 디딤돌이 된다.(3) 공회 (Sanhedrin)BC 3세기에 시작된 유대인 최고의 기관이다. 구성은 71명으로 제사장, 사도개인, 바리새인, 서기관, 장로 등으로 구성되었고, 대제사장이 사회를 하였다. 산헤드린의 기능은 종교적, 도덕적, 또는 정치적 일까지 하였다. 종교기능으로는 유대인 전체를 관리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사법권으로 사형을 선고할 수 있되, 로마 정부의 비준을 얻어야만 집행할 수 있었다. 산헤드린의 행정기능으로는 세금 받는 일이 포함되었다. 로마제국은 황제 아래 각 식민지 국가들 위에 총독들을 두었고, 이 총독들은 지방관이나 성읍의 원로들에게 세금징수를 위임하였다. 이렇게 되자 총독의 위임을 받은 산헤드린은 그 일을 세금 청부인인 세리에게 맡겼다. 따라서 세리는 로마 정부의 세금을 직접 걷어내는 임무 수행상 백성들로부터 많은 원성을 받았다.(4) 바리새인들 (PHARISSES)예수님이 태어나기 약 130여년 전에는, 마카비(Maccabees)라는 가문에서 유다를 통치하였는데, 이 때 권력잡은 사람들은 점차 헬라주의(헬레니즘)와 세상권력 욕망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당시 통치자 요한 힐카누스는 제사장 가문들과 동조하여 사두개파(Sadducees)를 형성하였는데, 이들은 종교적 확신을 갖지 못한 세속적(世俗的)종파였다. 이들은 율법의 깊은 뜻도 모른채 의식만을 주장했으며, 부활이나 인간의 영혼의 불멸(不滅)등을 부인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정치적으로는 영향력이 있었으나 국민들에게는 인기를 얻지 못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속주의와 헬라주의를 거부하는 쪽이었고, 신앙의 순수성과 율법의 말씀을 지킬려는 입장이었다.  이때 이런 백성들의 입장을 잘 대표하는 무리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들 이었다.  바리새라는 뜻은 “분리자”(Separate)를 뜻하는 것이다. 이들은  정치적 종파가 아니었기에 소수였다. 이들은 부활과 내세를 믿었으며 사탄과 천사의 교리도 가지고 있었다. 또 메시야에 대한 희망도 가지고 있었다. 바리새파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사도중 가장 학식있는 바울은 스스로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고 하였다.  이들의 시작은 좋았으나 나중에는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것은, 이들이 나중에 중심은 없고 외식으로 흘러 버린데 있었다.(5) 열심당원 (Zealots)열심당원은 바리새파에서 파생된 무리들로서, 로마에 반항 운동을 일으킨  급진적이고 호전적인 유대인 반란단체를 말한다.  이 운동은 B.C 6년경 갈릴리 사람 유다에서 시작이 되어 주후 66년 가이샤라 사태를 일으켜 이스라엘을 잠시 독립까지 시켰으나 주후 74년 마사다(Masada)요새의 사수자들의 자살로 끝을 맺게 된다. 신앙적으로 그들은 참된 신이신  하나님외는 누구도 이스라엘의 <왕>이나 주(主)>로 예배할 수 없고 따라서 어느 이방인도 이스라엘을 지배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로마 황제에 세금을 바치는 것은 외국의 지배를 인정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우상숭배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의 순수성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군사력을 사용하였다. 예수님의 제자중에도 열심당원인 셀롯인 시몬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열심당원의 모습을 나타내었다.(6) 사두개인 (SADDUCEES)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바리새인들과 에센파와 더불어 유대에서 많은 영향력을 끼친 무리들이다. 이들은 B.C 88년경에는 정권을 장악하여 바리새인들을 박해하였다. 예수님 당시에 사두개인들은 소수의 귀족 가문들과 화합하여 성전을 관할하였으며, 또 산헤드린 회원들의 대다수가 사두개인들이었다.  그들은 로마인들 편에 서서 그들을 도왔으며 일반 백성들과 가난한 제사장 (가난한 제사장 대부분이 바리새인이었다) 과는 멀리했다. 그들은 초대교회를 조직적으로 박해를 했으며 (사도행전4-5장) 율법을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여겼으나 선지서들은 다른 성경보다 못한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혁신(革新)을 싫어했으며 따라서 육체의 부활을 부인했으며,(눅20:27-33) 또 사후(死後)의 상급과 형벌을 부인했다.  그들은 메시야적 소망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으며 애국심이나 종교적인 열심 따위를 멸시하였다.(7) 에세네파 (ESSENEES)에세네파의 기원은 마카비 전쟁 약 50여년 전부터 시작된다. 이때는 헬라제국이 한참 전성기 때였다. 헬라문화로 인하여 유대종교가 쇠퇴할 때에 외래문화에 반기를 들고 사해 근처의 ‘엔게디’에 모여 공동생활을 하며 지낸, 유대인의 금욕주의적인 한 종교집단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노동하며 자원해서 가난한 생활을 하고, 사유재산을 부인하고, 소박한 단벌 옷으로 만족하였다.  이들은 신학적이고 도덕적인 교훈에 헌신하며, 집단적으로 예배하는 가운데 안식일을 엄숙히 지켰다.  모세 숭배가 극심했고 육식 거절, 그리고 결혼은 이 집단의 일체성을 파괴하는 것이라 하여 배척하였으며 맹세를 중히 여기고 영생을 믿었다. 세례 요한도 아마 여기 출신인 듯 하다. 이 에세네파에 정식으로 가입을 위해서는 3년 간의 예비기간을 두는데, 그때에 정결하게 되는 의식을 갖고, 또 그들의 내부 문헌에 대한 비밀의 엄수성 등에 대하여 교육을 받는다. 에세네파 사람들은 주로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많았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예물을 보냈으나 그들은 일반 제사장들을 참된 제사장으로 인정치 않았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지는 않았다. 에세네파 사람들은 구약성경을 자세히 연구하여 앞날을 예언하는 것으로도 유명하였다.  역사가 요셉푸스는 에세네파의 숫자를 약 4,000명으로 추산했다.  쿰란 동굴의 발굴물들이 이 에세네파의 유물이라는데는 많은 학자들이 동감하고 있다.  이 에세네파는 2세기에 기독교와 유대교로 흡수되어 없어진다.제 1-2장. 초대교회의 시작(1) 교회의 설립과 조직●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시작이 되었다.   초대교회는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예루살렘 교인들은 성전출입에   충실하였으며 말씀을 순수히 지켜 나갔다.● 조직은 단순하였으며 초기는 베드로가, 그리고 후기는 ‘주의 형제’로   불리우는 야고보가 주도(主導)를 하였다.● 스테반의 순교후,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가 감옥에 갇히고, 야고보는   목베임의 순교를 당하는 등의 혹독한 박해를 받고 흩어지게 되었으나   이것이 도리어 복음을 유대 밖으로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초대교회의 선교의 중심지는 안디옥교회(시리아의 수도)였다.   여기서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워졌다.(2) 초대교회의 주요교리구약성경과 예수님의 교훈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승천 등을 주로 전하였다. 최대특징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는 케리그마(Κηρυγμα)였다.


(3) 예배● 기독교는 유대교의 배경에서 새롭게 탄생되었기 때문에 처음 3세기 까지는   유대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안식일과 주일 양일에   지내다가 차차 주일에만 지냈다.

● 장소 - 예루살렘 성전과 회당, 개인의 집, 초기에 있어서는 성전과 회당에서  거행되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일반 집이나 또는 적당한 공공장소에서          예배를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오래지 않아 특별히 예배만을 보기 위한           예배당을 세우게 되었다.

● 순서 - 기도와 말씀증거, 그리고 성만찬

● 내용 -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초점으로 ,특히 부활을 기뻐하는 일에 초점.


(4) 초대교회의 생활

● 사회생활로는, 신자들끼리는 가능한 인접하여 살려고 하였다. 그리고 극장,곡예장,   검투, 종교제전 등에 참여하지 않았고, 우상과 관계된 일에는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 또 전쟁과 사형을 반대하였다.

● 종교훈련으로는 주일예배 외에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오후 3시까지 금식하였다.   매일 기도하는 것, 밤에 기도하는 것, 어려운 사람을 돕는 자선행위등을 하였다.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대개 3년동안 교육을 시켰다. 이 기간에는 기독교 교리에   관한 교훈을 받았으며 자기들의 신앙을 생활 속에 증명해야만 하였다.

● 영적인 능력이 풍성하였다. -병고침, 귀신쫒음, 활발한 전도 등

● 그리스도의 재림을 확신하였다

● 사랑의 생활 - 평등, 자선사업, 봉사, 여성의 지위향상

● 순결 - 일부일처제, 음란, 음주 방지

● 징계: 개인적인 충고 - 공중앞 징계 - 교회추방 - 회중은 그와 사교단절교회의 규율은 상당히 엄격하였다. 초기의 교회는 그들이 믿는 그리스도의 지상생활과 직접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시대에 있었으며, 주님의 재림이 임박하였다고 생각하였고, 또한 교회에 대한 심한 핍박을 견디어야 하며, 적의(敵意)가 찬 이교주의에 대항하여 교회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는 규율이 엄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단자, 배교자 또는 큰 죄를 지은 자는 교회에서 쫒아 내었다. 교회는 마땅히 순결한 생활을 유지해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실 교훈을 받은 다음에야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제1-3장. 초대교회 특징신약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초대교회의 특징은 아주 중요하다. 그것은 신약교회 이후에 생겨진 교회들은 많은 부분에서 왜곡되고 굴절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교가 아무리 자기들이 교회의 모델이라 하여도 그들은 너무 성경과는 멀리 떨어져 갔고, 오늘날 수많은 개혁교회 역시 성경에서 나타나고 있는 초대교회와는 거리가 있다. 이같은 전제하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신약교회의 틀을 살펴보아 오늘을 돌아보고 내일을 조명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하겠다.(1) 성경만을 최고의 권위로 삼는 교회지상에서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삼지 않는 교회가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실제 그렇지 않는 교회가 대부분이다.① 로마 카톨릭신앙과 행위의 근거 규범으로 세 가지의 근거를 갖고 있다. 성경과 전통(Isdorian교령집에 비롯된 각종 교회의 회의결정, 교황들의 지시문서, 성자들의 가르침)을 믿는다. 또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의 지시를 성경과 동등시한다. 그러기에 성경만이 유일의 권위일 수 없다. 어떤 면에서 성경은 전체 신앙중 30%의 영향력을 가질 뿐이다.② 개혁교회성경을 믿는다고 하지만 성경에 없는 규약, 회칙, 헌법 등이 자꾸 만들어지고 있다.  다양한 의견들의 난립을 억제하고 질서 유지상 필요한 면도 있지만, 간사한 인간들의 심성은 현실적으로 필요 이상으로 자기를 유리하게 하고 상대방을 공격하려고 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③ 신약교회가 성경만을 최고의 권위로 삼는 실례행 13:1-3의 안디옥 교회의 회무처리행 15:6-29의 예루살렘 교회의 안건처리마 19:15-17의 교회에서의 문제처리(2) 믿는 자의 만민 제사장권의 보장벧전 2:9에서 ‘왕같은 제사장인 성도들은 왕이며 또 제사장’이라 했고, 히 13:11-15에서 ‘찬미의 제사로 우리도 제사를 드릴 수 있다’고 했다. 이같은 성경적 근거 위에서 믿는 성도가 다같은 평등의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초대교회는 실행하였으나, 지금은 그러하질 못하다. 로마카톨릭은 신부과 신과 인간과의 중간존재로 서열이 정해져 있고, 개혁교회도 목회자는 성직자이며 목회만이 성직으로 고집하는 것도 그러하다. 초대교회는 목사이든 신자이든 모두가 다 동일한 평등성을 실천하였다.(3) 독립 개교회 중심의 행정정치신약교회는 예루살렘교회 (행 2장), 사마리아교회 (행 8장), 안디옥교회 (행 13장) 빌립보교회, 데살로니가교회, 고린도교회, 에베소교회등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교회들은 개 교회가 독립해서 자치적으로 행정을 해나가는 독립교회였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교회가 사마리아교회의 일에 협조를 하나 간섭을 하지 않았고, 안디옥교회가 母교회라고 다른 支교회를 다스리지 않았다. 오늘날 카톨릭을 비롯한 어떤 교단에서는 각종 제도적 간섭 기관들이 있다. 그래서는 안된다. 협조를 하고 협력을 할 수는 있지만 상급기관의 입장에서 다스리는 입장이 되어서는 안된다.(4) 핍박받는 교회신약교회 성도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한결같이 핍박을 당한다. 우선 예수님 자신도 핍박을 받으셨고, 사도들도 다 핍박으로 순교를 당하였다. 신약성경 전체를 펼쳐볼 때 고난당하지 않은 성도가 없으며, 핍박당하지 않는 제자가 없다. 현대교회중 기독교 신앙에서 십자가의 고난과 제자들의 핍박의 길을 빼버리고 번영과 축복만 강조하는 것은 교회의 심각한 변질화이다. 신약교회는 역사 속에서 각기 다른 양상으로 핍박을 받아왔다. AD 63-313년까지는 세속 정치인 로마 정부의 관권으로부터 핍박을 받아왔고, AD 313-1500년대까지는 교권 정치인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수많은 핍박과 죽음을 당해왔다. 그후 1600년대에는 영국 국교회가 순수교회를 핍박하였고, 현대에는 사회복음과 신학이 복합된 단체들과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을 빼버린 번영위주의 신학자들, 또 편파적 성령운동가들이 순수교회들을 핍박하고 있다. 순수한 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핍박이 계속되고 있다.(5) 선교와 복음이 팽창되는 교회신약교회의 처음 시작은 120여명 정도였다. (행 2장)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후 숫자는 3천명으로 늘어났고(행2:41), 그후 예루살렘 교회가 계속 성장하여 남자만 5천명 이상이 되었다. (행 4:4)  그후 안디옥교회 때에는 사람 숫자가 너무 많아서 수를 헤아리지 않고 그냥 ‘큰 무리’라고 하였다. (행 5:14) 사도시대 말경에 교인의 총수는 약 50만명이 되었으리라 예측된다.  이렇게 번져가는 무리들은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또 안디옥,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 에베소, 로마, 서반아 등 계속 팽창되어졌다. 신약의 초대교회는 그토록 무서운 박해와 핍박과 순교가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수로 팽창되어 갔다. 아울러 오늘날에도 순수한 교회는 반드시 지역적으로나 수적으로도 팽창되어 가야 한다.(6) 형제애로 다져지는 교회신약교회 어디서든지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다. 예루살렘 교회(행2:43-47)도 그러했고, 사마리아교회도 빌립의 전도를 받고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는 교회모습으로 나타난다. (행 8:8) 안디옥교회도 그러했고 (행13:48) 빌립보교회(행 16:11-40)도 고난 중에 개척되었으나 그 교회의 성격을 보면 기쁨이 넘치는 교회였다. 데살로니가교회도 큰 기쁨의 좋은 소문이 퍼져나간 교회였고(살전1:8), 가장 문제많은 교회였던 고린도교회 마져도 “그리스도의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교회”(고전 1:2)라고 하였다. 신약교회는 어느 교회든간에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다.  계시록에 나오는 아시아 7교회중 가장 모범적인 교회인 빌라델비아교회는 그 말의 뜻이 ‘형제의 사랑’이란 뜻이다. 왜 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책망을 받지 않았던가 ? 그 간단한 대답은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는 서로 다른 입장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메말라 있다. 보수 교회들은 ‘진리’는 있을지 모르나 ‘은혜’는 약하고, 자유주의 교회는 ‘진리’도 ‘은혜’도 다 약하다. 우리 교회 역시 신약의 초대교회의 모습을 되찾으려면 진리만 아닌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은혜운동도 회복해야 한다.(7) 제자를 양육하는 교회신약성경 안에 ‘제자’라는 단어가 무려 250여회 반복되고 있다. 신약교회는 예수님이 12제자를 양육하여 그 제자들이 초대교회를 이룩하였다. 그런데 12제자는 다시 더 많은 제자들을 양육한다. 12제자에서 120여명의 핵심제자들이 나오고 이들의 영향으로 500여 형제(고전 1:15)로 번져갔고, 그 다음에는 3,000명으로 늘어났다. (행 2:41) 그리고 이 숫자는 계속 늘어난다.  여기에 대해 네비게이토의 창시자인 Dawson Trotman은 예수님의 초기 관심은 대중이었으나 대중은 지속적으로 부흥하게 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일이 필요했었고 하였다. 제자로 양육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고 또 함께 생활하면서 많은 투자를 해야 하는 희생이 따라야 한다. 그래서 성급한 사람은 하기 어렵고 또 희생을 즐거운 마음으로 헌신하는 사람이 아니면 성취하기 어려운 일이다. 예수님이 이 땅위에서 예배당 지은 일도 없고, 써놓은 책 한 권도 없었지만 3년 동안에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시면서 그들을 훈련시킨 일 뿐이다. 그런데 그 제자들이 전 세계를 뒤집어 놓고 말았다. 베드로는 마가를 길렀고, 바울은 디모데를 길렀고, 요한은 폴리갑을 길렀고, 폴리갑은 익나티우스를 길렀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부터 비롯된 ‘제자양육’의 길은 농도와 형태가 다른 뿐 기독교 2천년사에 계속되어 온 것을 보게 된다. 현대교회가 너무 수적인 물량주의적 사고방식 때문에 더디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제자양육의 모범을 기피한다면 교회는 주인의식이 없는 구경꾼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8) 종교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교회예수님은 로마 황제 가이사가 살던 시절에 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분명한 기준이 있었다. (마22:21) 또 예수님은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에 말씀하시면서 또 “내가 왕이라”(요 18:37)에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로마제국의 식민지하에 살고 있던 유대사람이었으나 유대 사람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유대나 로마를 초월한 우주의 왕으로 자기를 드러내셨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활동하셨지만 이 세상속에 파묻혀서 살지 않으셨다. 이같은 삶의 자세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초대교회는 세상과는 분리되어 세상을 초월하되 세상에 영향을 주는 교회였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가 너무 타 종교와의 대화라는 명분으로 종교화 되어가는 것은 교회의 변질을 의미한다. 오히려 초대교회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향한 관심에 대해 그 진의를 찾으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예루살렘 전 시민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안디옥교회는 그리스도를 많이 닮은 ‘그리스도쟁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었다. (행 11;26) 에베소교회는 복음으로 인해 우상장사들이 문을 닫는 역사가 나타났다. (행 19:27) 또 바울이 로마에 갔을 때 군인들이 변화되는 역사가 나타났다. 신약교회는 종교성을 탈피하고 세상으로 부터서도 분리되는 교회였다. 이 원리는 오늘날도 지켜져야 한다.제 1-4 장. 초대교회의 박해와 순교자들처음 얼마 동안은 로마정부는 기독교를 법적 보호아래에 있던 유대교의 한 분파(分派)로 생각했으나 나중에 다른 것을 알고 혹독한 핍박을 하기 시작하였다. 로마의 정책은 종교의 자유를 부여하여 식민지 족속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신을 예배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한 편 로마 황제를 존경하며 그를 경배해야 되며 로마 제국의 모든 법률을 복종한다는 국가정책에 순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러질 않았다. 오직 하나님외에 예배할 수 없었다. 이들은 황제가 제정한 법률을 지켜야 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라야 가능했다. 이래서 이들은 결국 로마 황제와 정부로 하여금 적의를 품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가장 선한 황제들도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다. 그러나 신전(神殿)에서 제사를 드리거나, 기독교신앙을 포기하면 처벌하지 않았으나 신실한 기독교 신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시련은 순교(殉敎)로 끝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AD 64-313년까지 길고도 긴 세월 동안 황제들이 계속하여 기독교도들에 대한 핍박을 멈추지 않았던 원인은 무엇인가 ?(1) 핍박의 원인● 무신론으로 인정받았다.로마제국은 헬라, 로마신화에 나오는 많은 신들을 믿고 있는데, 기독교는 모든 신을 다 거부하고 오직 유일신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저들은 그들을 볼 때 무신론자라고 하였다.● 사회생활의 부조화가 나쁜 여론을 조성했다.즉 로마제국의 검투와 무용술로 강인한 군인정신을 영웅시하였다. 그래서 검투나 싸움이 사람과만이 아니라 맹수까지라도 싸웠는데, 그러나 기독교 복음이 들어간 곳에는 싸움으로 영광을 얻을려고 하지 않고 사랑으로 상대에게 감화를 주려고 하였다. 이런 정신이 그 당시 사회와 조화가 되질 않았다.● 자신과 돈에 무관심하였다.로마인은 모든 목표가 출세지향적이었고, 그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기독교는 자신의 출세보다는 이웃에 관한 관심을 강조했고 또 돈같은 것에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이같은 사상은 로마의 시민정신에 마약같은 존재였다.● 가정에 충실하고 자기 부정의 미덕이 용납되지 않았다.잦은 이혼과 노예제도 등이 로마의 가정생활이었으나 기독교는 그러질 않았다.● 무지와 오해기독교도들은 옛날은 물로 심판하였으나 이제는 불로 심판한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라고 했다. 또 지기들끼리 만나면 ‘주의 살과 피를 마신다’고 하는 식인종같은 교리를 갖고 있고, 또 누구든지 형제와 자매라 하여 근친상간의 혼음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상상하였다.(2) 대표적인 박해데시우스황제와 디오클레레티안 황제때는 제국 전반에 걸쳐서 기독교를 아예 없앨려고 하였다.  이 기간에 교회는 쓰라린 경험을 당했다. 대부분의 박해는 사회에서 추방, 직업과 사업방해, 고문과 처형 등이고, 단 기독교를 부인하면 과거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당한 고난은, 이 시기의 통치자와 관리들이 기독교를 말살하기 위하여 가장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방법을 거리낌없이 사용하였다. 초기의 수많은 성도들이 그들의 신앙을 죽음으로 사수하였다. 그들은 참수 당하였으며, 화형에 처해졌으며, 맹수에게 갈기갈기 찢겼으며, 끓는 기름에 던져졌다. 그들의 사지(四肢)는 절단되었으며, 또한 그들의 신앙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고안해낸 갖가지 방법에 의해 고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그들의 박해자 앞에 섰을 때도 보석과 같이 빛났다.이 박해시대에는 교회는 지하에서 비밀히 예배를 드렸고, 또 때로는 갖은 고난과 순교까지 당해가면서 신앙생활을 지속하였다. 그리고 박해가 그치면 드러내 놓고 교회가 성장하고 번창하였다. 그러나 박해가 그친 때라고 하더라도 또 언제 새로운 박해가 일어날지 모르는 위협을 느껴 가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 박해 시대는 이름만의 그리스도인들을 숙청하며 단련시키는 기간이었다. 이 박해시대에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순교한 사람이 많았다. 반면에 박해 시대에 신앙을 저버렸다가 박해가 끝나면 곧 교회에 돌아와 실권을 회복하는 사람들도 많았다.이로 인하여 교회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다. 신앙을 지킨 사람들은 교회를 순결하게 보존하기를 원했으나 이런 변절했던 교인들이 다시 교회에 들어와 교회가 약하고 불순해질 수 밖에 없었다. 이처럼 박해가 심해질 때 순교자가 생기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로마는 강압적인 군사를 가지고 있었고, 기독교인은 진리와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화형장이나 십자가 앞이라도 기꺼이 나갈 수 있는 증인들 이었다.이 시기는 참으로 교회사에 있어서 영웅적인 시기였다. 육신적인 무기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교회가 그저 십자가와 사랑으로 대로마제국을 상대하였던 것이다. 이들이 당한 고통은 전율한 만한 것이었지만, 우리를 감탄케 하는 것은 그들이 당한 고통의 분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그 고통을 감당한 신앙에 있는 것이다. 모든 계급의 남녀 곧 고귀한 원로(元老)와 유식한 감독, 무식한 직공들과 불쌍한 노예들, 사랑스럽고 얌전한 부인들과 처녀들, 백발이 성성한 정신적 지도자들과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이 다 고통을 감당하되 무정하고 냉정한 성품이나 완고한 반항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고요한 침착성과 겸손한 인내와 믿음, 그리고 승리의 소망을 가지고 감당하였다. 이처럼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생명을 바친 고상한 성자들의 충성심에 감사한 나머지 교회에서는 성자(聖者)들의 유물이나 신성한 유언을 존중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며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여러 해를 지나는 동안에 이 존경심은 차츰 성자와 성자들의 유물을 경배하는 경향으로 흐르는 폐단을 낳게 되었다.no로마황제박해이유박해방법발생사태1Nero(64-68)로마시 방황생일연에 촛불대신 태워죽임. 짐승에게 던짐.십자가. 목벰        베드로, 바울 순교2Domitian(81-96)황제예배불복,국가내 별도국가형성        재산몰수, 추방, 살해사도요한 유배, 카타콤 시작3Trajan        97-117)        비밀결사, 사회생활부조화 (성도들의 완고함)집회불허, 처형황제예배 참여시             처형않음        익나티우스 순교4MarcusAulelius(161-180)질병과 흉년을 기독교인에게 전가불에 단군 쇠로 고문,죄로 고문폴리갑, 져스틴 순교5SeptimiusSeverus(193-211)왕후가 태양신사제의 딸, 황실은신의 집,황제는 해기독교 입교 금지칙령이레니우스 순교6Dicius249-251)기독교 때문에  빈곤해 진다재산몰수,악형,국가와신들 앞에 절하고제육 먹고 증명서 받기오리겐 중형, 키프리안 도피7Vaverian(253-260)병과 흉년이 기독교인 때문에 신이노함으로재산몰수,예배금지,어기면 사형, 신사참배,어기면 사형키프리안 순교8Dioclel-  etian(284-305)급격히 성장하는기독교를 꺾고국가제사부흥위해교회파괴, 처형,성경몰수, 성직자 체포고문,제사강요        니코메디아교회파괴,수많은순교        □ 참 고 : 순교자들성경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반역한 천사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대하여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것을 배운다. 보통 악령은 이 전쟁을 수행해 나감에 있어 인간 대리자를 통하여 역사한다.  거짓된 종교들과 보통 국가의 권력층들을 이용하기도 한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당한 고난은, 이 시기의 통치자와 관리들이 기독교를 말살하기 위하여 가장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방법을 거리낌없이 사용하였다. 초기의 수많은 성도들이 그들의 신앙을 죽음으로 사수하였다. 그들은 참수 당하였으며, 화형에 처해졌으며, 맹수에게 갈기갈기 찢겼으며, 끓는 기름에 던져졌다. 그들의 사지(四肢)는 절단되었으며, 또한 그들의 신앙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고안해낸 갖가지 방법에 의해 고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그들의 박해자 앞에 섰을 때도 보석과 같이 빛났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터툴리안-□ 참고: 카타콤 (CATACOMB)카타콤이란, 초대교회 성도들이 죽은 자들을 장례지내는 지하묘지를 말하는데, 여러 곳에 있으나 대표적인 것은 로마에 있다.  카타콤은 부드러운 바위(석회질)를 파서 만들었으며, 로마에 있는 것은, 폭은 2.4 m - 3 m, 높이는 1.2 m - 1.8 m, 총 길이가 560 KM 이상 연장되어 도시를 둘러싸고 있으며 그 면적은 약 250정보가 된다. 카타콤은 거미줄 같이 복잡하여서 안내자가 없으면 곧 길을 잃게 되고 다시는 지상으로 나오지 못하게 된다.  카타콤은 최초에는 돈 많은 기독교인들이 동족과 사환들을 위하여 묘실을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내부의 구조는 지하복도와 묘실로 되어 있다. 벽은 관같이 우묵한 방들이 계속 줄지어 있으며 방 속에는 시체를 1 - 4 구까지 안장할 수 있다. 이 카타콤에 묻힌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 로마의 카타콤에서만 175-400만 명에 이른다.  초대교회의 박해가 심해지자 그리스도인들은 카타콤으로 피난하였다. 카타콤의 광대함, 소름이 끼칠 만한 어둠, 착잡한 신비성, 꾸밈이 없는 비문(碑文), 회화, 조각, 유물, 예배의 흔적 등은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뒤로부터 콘스탄틴 대제 때까지 이르는 동안의 그리스도인들이 박해 기간 중에 가졌던 사회생활과 가정생활, 그들의 빈곤하면서도 경건한 생활, 헌신적 정신, 그들이 받은 시련과 고통, 그들이 가졌던 신앙과 소망을 생생하고도 감명 깊게 보여주고 있다. 이 카타콤의 생활에서는 약한 사람이나 병자 등은 얼마 살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습기와 햇빛을 보지 못하는 것 등 건강을 유지하기에는 너무 좋지 못한 조건이었기 때문이었다.(3) 핍박의 결과1) 좋은 결과● 순교를 두려워 하지 않는 신앙유발 핍박이 아무리 거세게 밀어닥친다 해도 주의 이름으로 순교당하면 최고의 면류관을 받는다는 영적영웅주의가 크게 대두되었다.● 교회의 팽창 핍박으로 인하여 교회가 약화되지 않고 도리어 더 크게 팽창하고 넓게 번져갔다. 예루살렘교회가 자신들만으로 안주할 때 문제만 생겼으나 핍박으로 인해 퍼져나갈 때 교회는 더 크게 되었다.● 교회의 정화 교회 성도들은 언제 어떤 핍박으로 어떤 운명이 될지 모르는 초긴장의 상태에서 삶으로 그의 생활은 깨끗하고 청결함이 되어졌다. 이같은 교회의 정화는 핍박이 계속되는 한 유지되었으나 교회가 안정되고 평온할 때부터는 분쟁과 함께 부패가 시작되었다.● 교리(敎理)의 형성밖으로부터 공격해오는 이단사상과 적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믿는 기독교에 대하여 핵심교리를 구성해서 방어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사도신경을 위시한 교리가 구성되었다.2) 나쁜 결과● 기독교를 변증하려다 세상 철학이 도입되었다.기독교 자체의 순수한 복음과 생활의 모범으로 저들에게 인정을 받기 보다는 세상의 유명한 철학자의 말이나 용어들을 기독교 용어로 번안하여 사용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것이 후에 신학으로 연결되기도 하였다.● 교회의 의식이 성례화 되어갔다.주의 만찬이나 세례식은 의식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런 의식이 무슨 신령한 효력을 나타내는 것처럼 되어져 갔다. 결국 그것은 의례적인 의식으로 타락되어갔다.● 지도자의 손실핍박으로 유능한 지도자들을 많이 잃게 되었다.● 지나친 성직자 존중제도지도자가 귀하다 보니 지도자를 크게 추앙하는 제도가 생겨졌다.● 금욕주의핍박이 멈추자 믿는 사람들 마음에 영웅적인 순교의 길을 택한 선배들에 비해 너무 안일한 생활을 한다고 느껴 심적 부담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 몸을 자학함으로 선배들의 신앙과 견주어 보려는 금욕주의가 생겨진다. 그 결과 금식행위, 수도원생활, 독신생활, 기부금제도 등이 갖가지 금욕주의가 생겨난다.□ 참고 : 예루살렘 멸망(1) 멸망 이전의 상태● 예수님께서 친히 예루살렘의 함락을 예언하셨다. (마 23:37-39)● 로마 관리들이 부패할 대로 부패하였다. (행 24:26)● 대제사장의 타락 (행 4:6)   당시 대제사장은 로마 정부에 충성하는 자들에게 로마 정부가 임명하였다.   따라서 당시 종교계의 타락이 얼마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인민들의 폭동    행 5:36에 나오는 ‘드다’의 폭동   행 5:37에 나오는 ‘갈릴리 유다’의 난   행 21:38의 난을 일으켜 4천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를 가던 애굽인(2) 직접적인 원인  ● 가이사랴의 소란로마 정부는 유대인에 대한 식민정책으로 예루살렘에는 천부장이 파견근무를 하였고, 총독은 그의 새 근무지로 지중해 연안의 가이사랴에 새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런데 로마가 이 가이사랴에 신도시를 건설하면서 본토인인 유대인들에게는 전혀 특혜를 주지 않고 헬라인들만 우대하였다. 심지어 유대인들이 극력 반대하는 헬라인의 유대인 시민권마져 주었다. 이에 분개한 유대인들이 반항하자 로마 군대는 유대인들을 수만 명을 처형하였다. 이로써 유대인들의 반항은 전 국민적 공감대로 확산되었다.● 수리아 총독의 개입유대인의 반항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유대 총독의 힘이 모자라 수리아 총독에게 원정을 요청하다. 수리아 총독은 네로 황제에게 건의하여 로마로부터 원군을 요청받게 되는데 그때의 장군이 Vespasianus였다. Vespasianus는 AD 68년에 예루살렘까지 접근해 왔다. 그런데 로마에서 네로의 자살로 인하여 네 장군들이 왕위 쟁탈전을 벌리게 된다. 이것을 안 Vespasianus는 본국으로 회군하여 자신이 황제가 된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Titus에게 유대정벌을 명한다.● Titus 장군의 예루살렘 함락Titus 장군은 부친의 사업을 완성하려고 69년 후반기에 발군하여 70년 유월절경에 예루살렘에 도착한다. 당시 유대인들은 조국의 위기를 깨닫고 전국에서 200만 이상이 예루살렘에 운집해 기도운동을 펼친다.  Titus는 70년 4월부터 7월까지 예루살렘 성벽의 외곽을 포위하고 밖에서의 모든 공급로를 차단한다. 성안의 200만 이상의 유대인들은 식량부족, 식수부족으로 아사상태에 이르게 된다. 성안의 주민들은 땅굴로 탈줄 작전을 시도하다가 실패로 끝난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은 굶주리고 지쳐서 로마군에게 함락되고 만다.(3) 함락의 결과함락의 결과로 엄청난 결과들이 뒤따랐다.● 인명피해가 100만명 이상이 참살 당하고 10만명 이상이 포로가 되었다.● 예루살렘의 성벽은 다윗왕 때 수축되어 전래해오는 것이 3면이 다 파괴되고   유일하게 서쪽 벽 하나만 남게된다. 이 벽을 「통곡의 벽」이라 한다.● 예루살렘이 정치, 종교의 힘을 상실하게 된다.   교회도 母 교회의 기능을 상실하고 안디옥 교회가 크게 부상한다.제2장. 초대교회(후기)신약교회가 맨 처음 시작된 곳은 예루살렘교회였다. 그 다음에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로는 안디옥교회가 중심지가 되었고, 그 다음으로 교회의 중심지는 알렉산드리아가 된다. 여기서 구약성경이 헬라어로 번역(BC 150년경 70인역)되기도 한다. 그리고 로마교회가 또 교회의 중심지가 되어 중세교회까지 지속한다. 이렇게 기독교가 전 세계로 확산되어 나갈 때 이들 교회의 지도자들이 누구였는가 ? 그들이 바로 ‘교부’(Church Father)들이었다. 교부란 사도들 뒤를 이어 교회 건설과 교리 발달에 크게 활약하여 후세에 중요한 영향력을 남긴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 교부들은 시대에 따라서 사도적교부(속사도교부), 니케아회의 이전교부, 니케아회의 이후의 교부로 나눈다.제 2-1장. 사도적교부 (속사도교부)이들을 속사도교부 ( 續使徒敎父 : Apostoic Fathers ) 또는 사도적 교부라고 부르는 것은, 저들이 사도들과 교분이 있었던 교부라는 뜻이다.  또 이들이 교부들 중에 가장 오래된 교부라는 뜻이다. 속사도들은 거의 사도들로 부터 직접 기독교신앙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은 훌륭한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외부의 무서운 세력으로  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그들의 수족(手足)이 짤리우고, 생명을 잃어가면서 교회를 지켰던 사람들이었다.  이들 「속사도교부」들의 피흘림 후에 「교부」들이 출현하게 되었다.1. 로마의 클레멘트 (AD 92-101, Clement of Rome)이 사람의 신원은 잘 알 수 없으나 빌 4:3에 나오는 클레멘트가 아닌가 추측한다. 이 사람이 AD 92-101년 까지 로마교회의 장로였다고 한다. 이 사람이 고린도 교회에 남긴 두 통의 편지가 전해져 오고 있다. 그 내용은 교회의 분쟁을 치료하는 길은 사랑과 겸손으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지도자(장로,집사)에게 순종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감독, 장로는 구약의 제사장과 같이 평신도와는 다르다는 것을 말하였다.  이것은 지극히 작은 문제라고 할지 모르나 이런 주장은 나중에 엄청나게 더 큰 문제를 야기하는 동기부여가 되어진다.2. 익나티우스 (Ignatius)당시 최대의 교회인 안디옥교회의 감독으로 트라얀 황제때 순교당한다.(AD125년) 그는 순교당하기 전에 일곱 통의 편지를 남기는데, 편지에 나타난 그의 사상을 보면,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마땅히 해야 할 것으로 교회에 대한 충성, 이단경계 및 증오, 감독의 권위에 대한 순복, 순교자의 영광 등을 강조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자랑스러워 하고 사자의 이빨에 찢겨짐으로서 그리스도에게 드려지는 순수한 빵이 되기를 갈망하였다고, 또 “나는 온 세상을 다스리기 보다는 차라리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겠다.”라고 하였다.  그는 영지주의를 맹비난하였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가현성이고 허울이라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육체적으로 당하는 자신과 수많은 사람의 순교도 비현실적이라 인정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하였다. 또 그는 박해를 이기기 위해 교회가 단결해야 하며, 또 교회의 정통성을 나타내는 뜻으로 ‘Catholic Church’란 말을 최초로 사용하였다. 또 그는 감독의 권위에 대한 순복을 강조하기 위해 감독직을 너무 고조하였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감독이 한다. 고로 감독의 마음은 하나님과 같고 장로의 마음은 사도와 같다.”라고 하며, 최초로 감독직과 장로직이 약간 다른 것같은 암시를 한다. 이것이 다음 단계에 가서 감독과 장로가 완전히 달라지게 된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장로보다는 감독이 더 높은 직급으로 통용되는 시대의 서장을 열게 된 것이다. 그는 세례를 기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바래서 “세례는 거룩하게 하는 효력을 지닌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엉뚱하게 세례로 중생이 가능하다는 「세례중생론」으로 비약하게 된다. 우리는 익나티우스의 정열적 순교의 미담과 함께 그로 인해 뒤따라 생겨진 단점들을 보게 된다. 즉 순교를 너무 지나치게 찬양함으로 평범한 삶에서 신앙을 구현하는 생활 속의 신앙을 과소평가하는 비교의식을 심었고, 감독직을 도를 넘어서서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었고, 의식을 과도하게 주장함으로 ‘성례주의’의 기초를 닦게 되는 것을 본다. 익나티우스는 주님 보시기에 영광스런 순교를 하였다. 그러나 그가 남긴 7통의 편지들은 간사한 인간들이 선용하기 보다는 악용하는 나쁜 선례를 남겨놓았다.3. 폴리갑 (Polcarp, AD 69-155)아시아 7교회중 하나인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사도 요한의 제자이며 익나티우스의 친구이며 이레니우스의 선생이다. 영지주의에 대항한 정통주의적 사도신앙의 계승자이며 당시에 가장 뛰어난 기독교 지도자이다. 그가 빌립보 교회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이단에 대하여 아주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의 친구 익나티우스는 이교도들을 대항하고 증오하는 편이었으나, 폴리갑은 원수의 박해와 핍박에도 사랑과 겸손과 인내로 그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말하였다. 폴리갑의 순교장면은 매우 감동적이다. 그는 Antonius Pius황제때 군인들에게 시골농장에서 체포되었을 때 전세계 교회와 사람들을 위해 두 시간이나 기도하였다. 투기장에서 서머나의 지사는 그리스도를 욕하면 벙면하겠다고 권유하였으나 폴리갑은 “내가 86년 동안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하였으나 그는 나를 해롭게 한 일이 없거늘 어찌 내가 나의 왕 나의 주를 모독하겠느냐”고 거절하였다. 지사는 그에게 화형의 무서움을 말하니 그는 “금세의 일시적인 불보다는 내세의 영원한 불이 더 두려우니 지체말고 시행하라”고 하였다.4. 헬마스 (Hermas AD 97-140)이 사람의 신원은 잘 알 수 없으나 롬 16:14에 나오는 ‘허메’가 아닌가 한다. 그래서 ‘헬마스’는 바울의 연하 친구이며, 로마의 파피어스 감독의 형제라고 전해온다. 이 사람의 과거는 불행한 가정 출신으로 한 때 노예로서 고생하다가 로마의 기독교인의 집안에 팔려왔다가 복음을 듣고 개종한 듯하다. 헬마스가 쓴 「목양자」(Shepherd)라는 책이 내려온다. 내용에는 5개의 환상과 12계명, 10비유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의 사상을 보면, 다니엘서부터 계시록까지 말세에 대한 설명과 함께 도덕적인 계율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율법주의적으로 공로의 신앙을 강조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믿음보다는 교회의 의무준수와 도덕적으로 금욕적인 생활을 강조했다. 특히 10비유중에는 천국과 지옥 사이에 중간지대가 존재하는 것처럼 설명함으로 훗날에 ‘연옥’의 교리를 만드는 기초를 놓게 하였다.5. 바나바 (Barnabas AD 70-130)이 바나바는 바울의 동역자인 바나바는 아니다. 이 사람의 편지가 전해져 오는데 그 내용은 유대주의적 기독교 신앙의 잘못됨을 강력하게 반대한다. 즉 안식일 준수나 할례 시행이나 율법 준수 등으로 기독교 신앙에 혼란이 되는 것에 대해 철저하게 반격한다. 그리고 주의 날, 즉 주일을 지켜야 되는 점과 그리스도에 대한 참 신앙은 주님이 곧 오실 것을 믿는 천년왕국을 기대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바나바가 누구였는지는 모르나 반 유대적 성격이 강한 점과 사상이 히브리서의 저자와 비슷하다고 해서 히브리서의 저자가 아닌가 하고 추측한다.제 2-2장. 니케아 이전의 교부들1. 변증가(辨證家)교회에 대한 조직적이고 세계적인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계속 발전해졌다. 그런데 교회를 핍박하는 주체는 로마의 황제들이었고, 또 시민들의 여론을 조성하는 이들은 철학가나 이교도들이었다. 이같은 공격에 맞서 기독교를 이론적으로 변호하고 반격하는 사람들을 변증가라 한다.  변증가는 두 가지로 나타났다. 하나는 변증의 글을 써서 황제나 고위 관리에게 바침으로 기독교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오해가 풀리기를 바라는 동기에서 쓴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 사상을 비방하는 이교도와 철학자들에게 기독교를 이교철학과 비교함으로써 기독교의 우월성을 증명하려는 글이었다.(1) 져스틴 (Justinus AD 114-165)① 125년 사마리아의 수가 세겜에서 출생하였다. 처음에는 스토아철학을 배우가 나중에 플라톤철학을 배우게 된다. 스스로 철학연구의 극치에 이르렀다고 자부할 무렵 바닷가에서 노인을 만나 노인으로부터 구약에 약속된 것과 신약에서 성취된 것을 설명해줌으로써 기독교를 믿게 된다. 이후 성경을 연구하며 철학자의 복장으로 각처를 돌아다니며 죽는 날까지 지성인들에게 전도하며 생애를 보낸다.② 저서 - 대변증서(기독교란 어떤 것인가? 밝힘) Antonius Pius황제께 보내는글          소변증서 (로마 원로원에게 보내는 글)          트리포와의 대화 (유대인불신자로서 당시에 가장 뛰어난 인물)③ 153년경 황제 안토니우스 피우스와 그의 양아들 들에게 변증서를 보내어 정부의 적대감정으로 부터 기독교를 변호.  신자들이 억울하고 불공평한 재판을 받는 것을 변호함. “기독교인을 처벌하려면 분명한 증거를 가진 범죄사실에 근거를 두고 처벌해야지 실제 인물됨을 알아 보지도 않고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름만으로 처벌해서는 안된다. 기독교인은 무신론자가 아니다. 참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다.”라고 함.④ 져스틴은 기독교를 가장 알기 쉽게 설명하려고 그 당시 철학의 옷을 입혀 기독교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변증을 목적으로 성경보다는 플라톤의 사상을 더 이용함으로 결국에는 기독교와 철학이 유사한 것처럼 기독교를 격하시키고 말았다.(2) 오리겐 - 헬라교부에서 논함.2. 헬라 교부변증가의 시대가 끝나고 신학을 건설하는 시대가 접어든다. 이 무렵에는 지역과 언어의 차이로 헬라 교부들, 라틴 교부들로 분리된다. 헬라 교부는 두 파로 나뉘어 진다.●소 아시아파 - 사도 요한의 뒤를 이은 사람들로 성경주의를 표방하며 사색이나              철학보다는 성경대로의 단순한 신앙을 강조한다.              대표자로는 이레니우스와 히폴리투스 등이 있다.●알렉산드리아파 - 헬라의 영향을 많이 받아 고전(古典)과 철학을 이용하여 신학을                 연구하려 했다.대표자로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겐                 등이 있다.소 아시아파1. 이레네우스 (Irenaeus AD 115-202)발전도상 초대교회의 최대의 신학적 지도자. 사도요한의 직계제자인 폴리갑에게서 배웠으며, 헬라 고전과 신구약 성경에 능하였다. 프랑스 Gaul지방 (리용)의 감독으로 지낸다.  영지주의를 막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영지주의와 이단들에 대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성격은 관대하고 온유하였으며  신앙은 성경에 입각한 정통신앙이었음. 구속문제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졌음. 119년 순교알렉산드리아파1. 클레멘트 (Flavius Clement)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철학과 고전에 있어서 소양이 풍부하다. 클레멘트는 아덴에서 출생하여 (AD 160년경) 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독교로 개종한다. 그는 스승인 판테누스가 세운 교리학교에서 스승을 이어 12년간 가르쳤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알렉산드이아의 장로로써 무리없이 철학과 기독교의 혼합(?)이라 할만큼의 이 운동을 무리없이 추진했던 핵심인물이다. 그는 가르치기를 진정한 철학의 목적은 선한 것이지만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철학은 무용한 것이라고 가르쳤으며, 철학이 그 소원하는 목표에 도달하려면 그리스도를 통하여야만 되며, 만일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는다면 만족할 만한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말하기를 기독교는 모든 철학이 가질 수 있는 선보다도 더 많은 선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오류는 하나님을 철학으로 기독교를 해석하여 교리의 뼈대를 세울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지상생활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고, 대신 상당한 영지주의의 개념을 가지고 예수님의 가현적 개념에 파고 들었다. 그러나 그는 완벽한 신학체계를 세우지는 못했고 그 바톤을 유명한 오리겐에게로 넘어갔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하여 활동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이름이다. 알렉산드리아는 BC 332년 알렉산더 대제에 의해 설립된 도시로서 600년 이상 고대 로마 제국의 제 2 도성으로 군림했다. 무역과 학문의 도시였기에 많은 헬라인들과 유대인들이 모여 들었고 학문의 도시답게 이 도시의 도서관은 로마제국에서 가장 유명하였다. 이 도시에서 그 유명한 70인역 구약 성경이 번역되었다. AD 3세기 경에 신플라톤주의 (Neo Platonism)도 여기서 발흥하였고, 유명한 영지주의자 바실리데스(Basilides)가 여기서 가르쳤다. 유대주의, 플라톤주의, 헬라철학, 동방의 신비스런 종교들도 여기로 모여들었고, 기독교 역시 AD 185년경 스토아 철학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판테누스(Pantenus) 지도 아래 교리학교가 설립되었고, 그의 제자인 그 유명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Flavius Clement)때에 와서 더욱 더 체계가 서게 된다. ●알렉산드리아의 종교발전은 서방교회와 달랐다. 서방교회는 영지주의와의 투쟁으로 인하여 철학에 대한 강한 불신감이 조성되어서, 터툴리안 같은 교부는 철학과 기독교 사이에서는 어떤 연관도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래서 서방교회는 영지주의와 투쟁을 겪으면서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과 사도의 교훈에 의지하는 보수주의로 나아갔고, 더불어 조직도 공고히 해 나갔으나, 알렉산드리아는 그러질 못했다. 알렉산드리아의 교부들은 알렉산드리아에 들어와 있는 철학을 교육받았으며 그들의 영향을 받으며 살 뿐 아니라 그들을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이끌려고 하였다. 그러다보니 기독교는 당시에 가장 우수했던 철학체계인 플라톤주의와 스토아 철학을 결합해서 철학과 기독교가 거의 혼합되었다 할 만큼 친밀한 유대관계로 되어 있었다. 결과로 여기서 기독교 영지주의가 발생하였다.2.오리겐 (Origen AD 185-254)1) 생애그는 185년경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 부터 성경을 배웠고, 또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배워서 당대 최고의 신플라톤주의 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Septimius Severus의 박해로 스승인 클레멘트가 추방되자 A.D 203년 18세의 어린 나이로 클레멘트의 교리학교에서 가르치게 된다. 또 당시 신 플라톤 철학의 거두인 암모니어서 삭카 (Ammonus Saccas)에게도 배운다. 그의 생활은 극단적인 금욕주의여서 그에게는 많은 추종자들이 있었다. 69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극한 가난과 금욕주의로 살아간다. 그는 맨발에 두 벌 옷이 전부였과, 잠은 맨바닥에서 잔 세월이 더 많았다. 그의 행동은 그의 교훈과 다름이 없었으며 그의 교훈은 그의 행동처럼 성결했다. 그는 끓임없는 학문과 신앙에 심취하였고, 수 없는 박해와 고문과 추방의 연속속에서 지내다 결국 250년 데시우스(Decius) 황제의 박해로 251년에 순교하였다.2) 그의 학문과 신학고대 교회에서 오리겐만큼 순결한 신앙인은 별로 없엇다. 그는 다방면에서 학문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특히 성경의 원문비평과 주석에 뛰어났다. 특히 246년-248년 사이에 쓰여진 「켈수스를 반박함」은 이교도들의 기독교 비판에 대한 답변서로 고대세계가 내놓은 기독교 신앙의 변론서중 가장 확신에 찬 저서이다. 그의 신학은 그 역시 신플라톤주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때론 이것이 장점이 되어 켈수스 등에 의한 철학의 기독교 공격을 막아내었으나, 그러나 이것이 그에게 단점으로도 역사하여서 그의 신학의 주류는, 성경의 해석을 철학적 개념으로 해석하고 조화시키려고 하여서 학문의 시험대위에 기독교를 올려놓는 그런 일을 하였다.3) 그의 주요 신학 내용● 한 하나님을 믿었다.  구약과 신약의 동일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보다 먼저 성부에서 태어나 인간이 되셨다. 그리스도의 위치   는 제 2의 하나님이나 피조물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체   계 안에서 Nous(정신,사상)으로 이해를 하였다. 여기서 만물은 창조되었고 그는   피조물 중에 최상위의 존재이다.● 성령에 대하여서는 교회의 전통에 얽매여 인정을 하였으나 그의 사상 세계 안에서   별 비중을 두질 않았다. “성령은 그 명예나 권위에 있어서 성부, 성자와 동일한    존재이다.”● 부활과 내세의 상급을 믿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었다.● 악마와 천사존재를 믿었다.● 세상은 유한하고 결국 죄악으로 망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졌다.● 그의 우주관은 다분히 플라톤적이었다.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와 그뒤 정신세계가   있는데 정신세계가 실제 세계이다.● 구원은 Logos(말씀)가 인간이 되시고, 죄 지은 일이 없는 인간의 영혼이 순수한   육체와 결합으로 이루어졌으나, 부활후 승천시에 그리스도의 인성이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으로 흡수되었고, 그후 인간을 완전히 벗어나 신이 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도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행할 때 되어진다. 그래서 구원은 그리   스도의 제자는 죽을 때, 악인은 지옥에 가나 나중에 구원을 받는다. 심지어 마귀   와 인간전체가 다 구원을 받는다.●영혼 선재설을 믿었다.4) 그의 영향력●그의 사상, 그의 신학체계는 동방교회에 깊은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기독교를 변호하고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높이는데 공로를 세웠지만, 유감스럽게도 신앙과 지식과를 혼동하여 유식한 그리스도인은 보통 믿음만 가진 그리스도인보다 높은 자리에 있다는 사상을 남겨놓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 풍조가 알렉산드리아 사상계를 지배하였다.  또 그의 성경해석법은 히브리 원어, 헬라어, 그리고 다른 번역판을 대조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식음도 전폐하며 정력적으로 책을 썼지만, 그런데 문자 한 글자 한 글자에서 신령한 뜻을 찾는 우화적 해석방법은 성경전체에 흐르고 있는 맥락을 놓치고 만 경향이 있어, 특정한 부분에서 그의 과도한 집착이 성경 전체를 잃고 좁은 골짜기에서 평생을 방황한 그런 면도 있다.●그는 많은 부분에서 성경과는 다른 다분히 플라톤적인 그의 사상은 결국 정통파에서 이단으로 간주되기까지 하였다. A.D 399년 알렉산드리아 종교회의에서,  AD 544년 유스티안 황제 때,  AD 553년 제 5차 공의회에서 그는 각각 이단으로 판정받았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특히 그가 죽은 후 50여년이 지나서  그 유명한 니케아 종교회를 있게 만든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Arius)와 콘스탄틴 황제와 절친한 관계를 가졌던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오 등 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철학적 사조에 입각한 성경해석 및 對 그리스도관을 가지고 신앙세계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이러한 사조의 신학흐름은 오늘까지 여러 모양으로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유감스럽게도 ‘여호와의 증인’들의 교리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리겐의 인격에 있어서는 파랄은 말하기를 “초대 교회사에 있어서 오리겐처럼 고상하고 탁월한 인물은 없었다. 그처럼 교회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어릴 때 부터 늙기까지 꾸준히 활동하고 또한 조금도 책잡힐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쳤다.□ 참고 - 켈수스와 오리겐의 격론켈수스(Clesus)는 2세기 후반의 가장 흉악한 철학자이다. 플라톤의 철학에 능하고, 스토익학파의 기질을 가진 자였는데, 기독교를 대항하기 위하여 「참 말씀」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의 내용은 전적으로 기독교를 비방한 것이었는데, 이에 대하여 오리겐이 공박하였다.●켈수스는 복음의 단순성에 대하여 비판하기를“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선하고 참되다고 하는 것은 플라톤이나 그 밖의 어떤 헬라 철학자들이 이미 말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더 우수하였다.”●오리겐 - “복음의 단순성은 하나님이 모든 민족에게 베푸시는 긍휼의 사신으로서 가장 적합하다. 플라톤의 화려한 문장은 소수의 사람에게 유익을 주었을 뿐이지만, 보다 단순한 문체로 쓰여진 책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때문이다.”●켈수스 - 기독교는 「믿음」에다 탁월한 지위를 둔다고 비난하였다. 그저 모든 면에서 이유를 묻지말고 믿어라, 질문을 바라지 말고 믿어라 한다고 비난하였다.●오리겐 - 기독교는 질문을 등한시하거나 참된 진리를 멸시하지 않는다. 기독교에 있어서 믿음을 중요시하는 것은 그원리에 적당한 탁월성을 돌리는 것 뿐이다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이 철학을 연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철학을 연구할 재능도 여가도 가지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런 사람들이 철학을 몰라도 믿음으로 죄에서 의로 전환된다는 것은 확실히 좋은 일이라고 하였다.● 기타 - 성육신 반대3. 라틴 교부1. 터툴리안 (Tertullianus AD 150-220)고대 교회에서 가장 개성적이고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카르타고의 유복한 이교도 가정에서 태어난 (150-155년) 그는 법율을 공부하였고, 특히 철학과 역사를 공부하였다. 190-195년경 그의 나이 40세에 개종을 하여 예수를 믿게 된다. 타고난 청교도 주의적 기질을 가진 보수신앙의 개혁자였다. 후에 세속화되어 가며 힘을 잃는 무기력한 교회에 각성운동을 일으킨 몬타니즘 분파에 가담하여 엄격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의 문체는 선명하고 풍자적이었으며 읽기가 쉬웠었다. 그는 라틴 신학에 불멸의 공적을 남겼다.神 學 - 이레네우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기독교와 철학을 분명히 차별하였다.즉 기독교의 진리는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최고의 철학적 지혜를 능가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철학체계로서는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아덴이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냐 ?」라는 글에서 철학자는 말을 만들어 내는 자이고 그리스도인은 행위를 만들어내는 자로 완전히 다른 것을 역설하였다. 그는 헬라철학을 맹렬히 공격하고 기독교는 일체의 공상적 사변을 정죄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를 알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실제로 무엇을 이루셨는가를 알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순되는 고로 나는 믿는다’ (Credo puia absurdumn est.)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실로 하나님의 道는 인간의 合理가 아니다. 비합리의 합리성이 기독교이다.  철학은 사람을 파고 들어 가는 것이고, 신앙은 하나님을 향해 가는 것.●원죄의 교리를 가짐“어떤 의미에서 본질적인 죄라 할 수 있는 것이 인간 영혼의 부패한 근원에서 부터 생겨났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은 이러한 죄의 본질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진다.” 또 인간이 죄를 범하면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이 되고 이 노여운 하나님의 진노는 회개로서 만족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삼위일체 교리의 창시자“성부, 성자, 성신, 이 모두가 하나이며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이러한 섭리의 신비는 일체(一體)를 삼위(三位)로 구분하여 성부, 성자, 성신으로 정위(定位)한다고 해서 손상되는 것이다. 아니다. 이 셋은 본질에 있어서가 아니라, 양식상의 구분이며 능력에 있어서가 아니라 형태상의 구분이다. 성부, 성자, 성신으로 표현되는 이러한 위계, 존재형식, 체제는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으로써 그 본질과 능력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바른 구분“우리는 신과 인간이 서로 혼합됨이 없이 예수라는 한 인격안에서 공존하는 이중상태를 보게 된다.”● 그는 2-3세기에 교회를 그토록 괴롭혔던 영지주의에 대하여 대부분의 교부들은 영지주의나 이단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기독교의 우수성을 주장했었으나 터툴리안은 그러지 않았다. 터툴리안은 이단들에게 성경을 펴놓고 반론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단들은 성경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자기 멋대로 해석함으로 그들에게는 돼지 앞의 진주를 던지는 격으로 보았다.결론 : 우리는 속사도, 변증가, 교부들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것은 이들이 생명을 걸고 복음과 교회를 잘 지켰다. 그러나 이들의 세대에 와서는 조금씩 교회가 변질되고 지도자들이 성경을 떠나서 자기의 주장과 잘못된 가르침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핍박이 가져온 결과가 컸다.황제들이 조직력과 권력의 힘으로 교회를 핍박하니 지도자들은 우선 자기에게 닥친 현실문제 수습에 급급하다 보니 성경의 뜻보다는 부년 상황 적응에 임기응변이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주님이 전해준 의식을 기피하려는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고 의식 자체가 큰 힘이 있는 것처럼 성례전 신학을 만들게 되었다.  또 지도자들이 계속 희생되다 보니 지도력의 결핍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니 정도이상의 성직자 존중제도등이 그것이다.● 교부들 시대에는 아직 신약성경이 정경으로 완성되어 있지 않고 구약만 존재하였으므로 성경의 원리대로 따르지 못하는 한계점이 있었다. (신약성경의 정경화는 AD 397년 완성● 초기 교부들의 작품들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즉 Hermas가 중간지대인 연옥개념을 말한 것이나 Origen의 우화적 해석등은 성경에 없는 주장인데도 저들이 지도자였다는 것 때문에 그 영향이 컸다.●철학이 교회 안에 자리 잡게 되었다. 기독교를 세인들에게 변증하기 위해 세인들이 아는 철학을 인용하다 보니 성경은 멀어지고 철학이 교회에 자리잡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 각종 파벌들의 난립으로 불필요한 힘을 낭비케 만들고 진리수호보다는 곁길에 정력을 낭비하게 되었다.제2-3장. 니케아 이후의 교부1.동방교부1) 가이샤라의 유세비오(260-339)팔레스틴에서 출생. 315년에 가이샤라의 감독이 됨.저서 - 교회사, 콘스탄틴 대제전(大帝傳), 복음의 준비, 복음의 증명 등2) 아다나시어스 (Athanasius 328-373)시종일관 정통을 고수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니케아회의에서 아리우스의 학설을 깨뜨림.  다섯차례에 걸쳐 추방과 유배에도 신앙양보를 않음.* 저서 - 로고스의 성육신, 아리우스를 반격하는 서한 등328년에 28살의 젊은 나이로 동방교회의 최고의 권위인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46년간 감독직에 있으면서 끈기 있게 아리우스 주의와 대항하여 싸웠다. 그는 다섯 번이나 교회로부터 추방당했는데 4번은 아리우스주의의 치리자에게 당했고, 한 번은 배교자 쥴리안에게 당하여 총 20년간을 귀양살이 하였다. 그러나 다섯 번이나 교회로 다시 돌아와 감독의 직분을 다하였다. 말년에 이르로 평화스럽게 살았으나 열심으로 이단을 반박하는 글을 쓰는 날들을 보냈다. 그가 일생 동안 걱정하고 목적한 바는 그리스도의 神性을 입증하려던 것으로서, 그는 이 그리스도의 신성이야 말로 그리스도교 신앙 체계의 머릿돌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아리우스주의는 그리스도교의 참다운 신앙에 대한 가장 위험한 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많은 핍박을 당하였지만 상대편을 핍박하지는 않았다. 그는 정통은 믿음을 권고는 할지언정 억지로 믿게 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원리를 그대로 지켰던 사람이었다.3) 크리소스톰 (Chrysostom) 345-407원래 이름은 존(John). 그가 죽은후 후세인에 의해 “황금의 입을 가진 사람”이란 의미를 가진 크리소스톰으로 불리웠다. 381년 집사, 386년 안디옥 주교직을 맡음. 안디옥교회 큰 부흥. 탁월한 설교자. 주로 기독교 생활윤리를 다루었다. 나중에 여자의 사치스런 옷차림을 비난한 것이 왕후 유독시아(Eudoxia)에게 오해를 받게 되고, 결국 정죄, 면직, 유배되어 407년에 죽고 말았다.존 크리소스톰은 ‘황금의 입’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존은 법률가로 안디옥에서 태어났다.  23세에 세례를 받은후 법률가의 길을 가지 않고 수도사의 길을 가려고 시리아 산악지대의 수도사들과 합류하여 4년동안 수도생활의 규율을 배운 후 다시 2년 동안 혼자서 금욕생활을 한다. 이같은 6년간의 은둔생활 후 고향 안디옥에 돌아왔을 때 그는 집사가 되고 곧 감독이 된다. 그런데 그의 명 설교의 소문이 전 세계로 퍼진다. 그리하여 398년에는 황제가 있는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된다. 콘스탄티노플은 사치와 향락에 젖은 도시로 온갖 음모술수가 난무하는곳이었다. 이에 크리소스톰은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되어 성직자들의 생활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독신이던 일부 사제들이 소위 ‘영적자매’를 두는 일이나 성직자들이 부와 재산을 축적하는 일이나, 교회 재정이 공개되지 않고 사용되는 일을 개혁하였다. 이같은 개혁은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게 되고 일부 소수에게는 증오를 유발시켰다.크리소스톰은 개혁의 운동을 성직자들에게만 아니라 일반 평신도들에게도 촉구하였다. 이렇게 되자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교회당은 이 청교도적인 예언자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 들었다. 당시 시민들은 크리소스톰을 존경하고 따랐으나 유력자들은 이 목소리에 견딜 수가 없었다. 여기서 황제의 아내 ‘유독시아’가 크리소스톰 제거 음모를 꾸며 도시를 떠나도록한다. 그러자 군중들이 폭동을 일으켜 교회를 점령한다. 크리소스톰은 조그만 시골 ‘쿠쿠수스’에 정배되어가서 거기서 글로써 세계를 감동시킨다. 이리되자 크리소스톰은 더 시골인 흑해의 해변으로 귀양을 간다. 그는 귀양가는 도중에 중병에 걸려 죽게 된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모든 일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라는 말이었다.2. 서방교부1) 암부로시어스 (Ambrosius)● 서방제일의 성직자. 독일에서 출생. 374년 북부 이태리의 지방장관이 되나, 곧 재산과 권력을 포기하고 신학을 공부하여 밀라노의 감독이 되었다.● 성품은 온화하나 대적자에게는 단호하였음. 그리스도인인 데오도시우스(Theodosius)황제가 데살로니가인 7,000명을 학살하였을때, 성찬식 참여에서 쫒아냄. 나중에 황제가 죄를 회개하고 8개월 후에 성찬에 참여시킨 확실한 신앙의 지도자.● 니케야 신앙에 철저히 서서, 추호도 아리우스파와 타협을 않했다.로마제국의 몰락에서 오는 충격 속에서 교회가 힘차게 살아남는데 없어서는 안 될 당대 최고의 인물이었다. 어거스틴에게 세례를 주었다.  397년에 사망하였다.■제 4세기의 위대한 지도자 중 하나가 암부로시어스이다. AD 373년 이태리 북부의 가장 큰 도시인 밀라노교회의 감독이 사망하였다. 그런데 그의 후임자를 놓고 도시 안에서는 큰 폭동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왜냐면 밀라노의 감독의 위치가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알기에 당시의 교회 (아리우스파와 정통파)는 서로 자기들 편 사람을 주교로 선출하려고 필사적으로 경쟁을 벌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 격렬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감독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때 밀라노 도시의 총독으로 있던 ‘암부로시어스’는 유능하고 공정한 행정가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었다.  암부로시어스는 선거 현장에 나가 시민들이 질서를 지켜줄 것을 호소하는 뛰어난 연설을 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어린 아이 하나가 “암부로시어스를 감독으로”라고 외쳤다. 군중들은 이에 호응하여 암부로시어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암부로시어스 자신은 감독직을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곧 고위관직으로 임명될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군중들을 설득하고 회유시키다 못해 그 도시를 탈출할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암브로시어가 감독으로 선출된 것을 황제가 기뻐하였고, 이를 어기면 황제의 분노를 살 가능성이 있었다. 이리하여 373년 12월 1일에 밀라노감독이 되었다.■감독이 된 후 사제의 도움을 받아 신학을 공부한다. 원래 뛰어난 지성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방교회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가 된다. 암부로시어가 감독이 된 후 얼마 안 되어 야만족인 고트(Gots)족이 밀라노를 쳐 들어와 많은 시민들을 포로로 잡아간 후 몸값을 요구하였다. 이에 암부로시어스는 교회 소유의 금은 기명과 장식품을 녹여 피난민들과 포로들의 몸값을 마련하였다. 이때 그의 약점을 노리던 아리우스파들은 감독이 신성모독을 하였다고 비난하였는데, 이 때 암부로시어스는 “주님을 위해 황금보다는 영혼들을 보존하는 것이 더 낫다--- 교회는 저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필요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황금을 소유하고 있다.--- 금그릇보다는 살아있는 질그릇이 더 소중하다.”고 하였다. 암부로시어스의 뛰어난 설교가 전 세계적으로 소문이 퍼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밀라노를 찾아왔다. 그중에 어거스틴도 있었다. 그리하여 암부로시어스의 설교를 듣고 그에게 세례를 받는다.■그는 황제와도 미묘한 관계를 유지한 때가 많았다. 당시 서로마제국의 황제는 ‘발렌티니안 2세’(Valentinian II)였는데, 그 황후가 아리우스파라 아리우스적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암브로시어스에게 강요하였다. 그러나 암부로시어스는 교회가 오염되는 것을 용납않았다. 그러자 황후와 오랜 세월 동안 대결을 하게 되었다. 한 번은 암부로시어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황제의 병사들에 의해 예배당에서 포위된 채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병사들은 무기를 휘두르며 감독을 위협하였으나 그는 찬송가를 부르며 조금도 굴하지 않았었다. 또 정통신앙을 가진 데오도시우스 황제 때  데살로니가시의 폭동으로 그곳 경비 사령관이 군중들에게 살해되었다. ■이에 분노한 황제는 데살로니가 시민 7천명을 살해하였다. 그 후 황제가 교회로 들어 가려고 할 때 암부로시어스는 황제를 가로막고 “그 자리에 멈추어라. 양 손에는 불의의 피가 가독한 자, 죄로 더럽혀진 너같은 사람은 회개하기 전에는 성찬에 참여하기 위하여 거룩한 성소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막았다.  이때 경호원들이 칼을 뽑아 들고 암부로시어스에게 대들었다. 그러나 암부로시어스의 인격과 권위 앞에 황제는 진리를 발견하고 그 앞에서 공개적으로 회개하였다. 위대한 밀라노의 감독이며 신학자요, 성자였던 암부로시어스는 397년 4월 6일 부활절 주일날 숨을 거두었다.■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같은 시기에 황제에 대항하여 승리한 암부로시어스가 일한 서방교회는 그 후로 라틴어 사용과 함께 크게 강성해갔고, 심약한 황제에 순응하여 지위를 박탈당하고 유배의 길을 따른 크리소스톰의 동방교회는 그 뒤로 계속 약화되고 말았다는 것이다.제 2-4장. 초대교회 이단연구1.영지주의(Gnosticism)● 영지주의란 2세기 초엽 소아시아 지방을 중심으로 성행한 집합적 종교현상을 가르키는 말이다.  영지주의는 동양적 신비주의, 헬라의 철학,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사상, 유대교 및 기독교의 구원사상 등의 광범위한 사상의 집합으로 그 기원은 그리스도 이전에도 있었던 것으로서 몇 사람의 유대인 철학자들이 이교국(異敎國)으로부터 그 나라의 종교와 문화적인 요소를 들여온 데서 시작하여 그리스도시대를 거쳐서 영지주의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최대 영향력을 가진 때는 주후 135-160년 사이이다. 영지주의란, 초대교회를 뿌리부터 흔들만큼 아주 위험한 이단(異端)이었다.  주후 2세기에 홍수와 같이 교회에 밀려 들어 왔다.  그리하여 3세기 초에는 로마제국의 거의 모든 교회가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영지주의에 오염이 되었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그 무서운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이들의 무서운 영향력은 기독교의 근본 자체를 뒤집을 만큼 위협적이었으며 이로 인해 교회는 형성이후 가장 심각한 위협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 사상이 만연될 수 있었던 것은 초대교회의 상황이 조직면에서 허술한데다 무엇보다 교리가 확립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단발생요인) 그런 만큼 피해는 컸고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결국 이 위기를 극복했고 이 시험을 통하여 보다 치밀한 조직과 「사도신경」등의 교리와 신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초대교회의 다소 은사중심의 성격과는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영지주의는 “지식”(그노시스)에 근거한다고 자처하였다. 그들이 말하는 지식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지식이라는 말과는 아주 다른 의미의 초자연적 의미의 초자연적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말하는 지식은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지혜”를 말한다. 그래서 이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우주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게 되고 악한 물질세계로 부터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류는 무지와 망상 가운데 살고 있지만 “영지”를 통하여 영적인 해방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神性과 자신의 일체성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영지는 사도들이 아주 절친한 그의 제자들에게만 전수하는 비밀의 가르침으로써 완전한 사람에게만 내려지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이라 해서 이 “영지”를 다 소유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들의 근본관념은 현상세계를 전적 악한 것으로 보고, 인간이 항상 돌아갈려는 선한 세계로 구분하였는데, 이것은 페르샤의 이원론과 플라톤의 이데아(Idea)세계와 현상세계로 구분짓는 것에 영향받은 것이다.● 영지주의는 본도의 마르키온파와 발렌티누스파와 바실리데스파 등이 있고 가장 영지주의에 대하여 많은 대항을 하면 신학으로 논박한 사람은 이레네우스를 들 수 있다.● 영지주의 사상은 알렉산드리아를 그 온상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알렉산드리아는 헬라인, 유대인, 애굽인, 로마인, 동양인들이 모이는 국제도시로서 이들이 만나서 자기들의 철학과 문화를 서로 교환하며 또한 융합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작하여 각지에 있는 기독교교회에 이 이상한 교훈이 들어가게 되었다.● 이들이 주로 사용한 성경은 요한복음과 바울서신이다. 초기 영지주의의 상당한 부분이 이원론적 성격이 강한 마니교로 대체되어 버렸다.  이래서 이 두 세력은 다 신화적인 우주론을 지니고 있다. 기독교 신학은 영지주의를 꺾을 수 있을 만큼 교리가 확립되고 신학이 발전되었을 때 비로소 영지주의의 위협은 끝나게 되었다.● 영지주의(靈知主義)는, 요일2:22, 4:2-3에 분명히 언급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였다. 그들은 말하기를, “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이었다.”라고 주장을 하였다. 또 모든 물질은 근본적으로 온전히 악하다고 하였다.  그것은 이 세상이 나쁘게 창조(創造)되었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은 최고의 존재가 아니라 데미우르고스(Demiurgos)라 불리우는 열등(劣等)한 신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고의 존재는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는, 알려지지도 않는 분이시고 그는 세상에서 무한히 떨어져 있는 신령한 빛 가운데 거하시는 부토스(βυθοσ:Butos)라고 주장을 하였다. 이들의 논리근거는 성경이 아니라 헬라와 애굽, 페르샤, 인도 등의 신화와 철학 등에서 끌어 왔었다. 그리하여 기독교를 자기들 나름대로 곡해(曲解)하고 성경의 해석을 고치어 심지어 이방 종교의 가르침까지 관련시켰다.● 기독교의 전승(傳承)에 의하면, 기독교 영지주의의 창시자는사도행전 8:9-24에 나오는  시몬 마그너스(Simon Magnus)라고 한다.  사도신경은 이 영지주의로 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만들어 진 것이다.영지주의 교리1) 이원론 사상모든 것의 기원을 두 개로 본다. 하나님도 악한 하나님과 선한 하나님이 있는데, 악한 하나님이 물질계를 지배하고, 선한 하나님이 정신계를 지배한다.2) 유출설영지주의자들에 의하면 (Valentinus의 이론) 천지개벽 후에 하나님에게서 많은 신들이 떨어져 유출되었다. 최초 최고의 선한 하나님이 긴 세대(아이온)을 거치는 동안 신이 떨어져나와 또 다른 신이 되고, 그 신은 또 긴 세대 후에 또 떨어져 나간다. 이렇게 거듭된 유출에 의해 맨 마지막 신은 맨 처음 신보다 저급한 신이 된다. 그리하여 맨 마지막 신의 이름은 ‘데미우르고스’이다. 이 신이 구약에서 말하는 여호와이다. 이 여호와는 조물주와 같고, 창조주보다 못한 신이다. 이 데미우르고스는 물질계를 지배하고, 창조주는 정신계를 지배한다. 따라서 신령한 정신계를 지배하는 창조주 하나님이 저속한 물질에 불과한 인간의 몸으로 성육신했다는 것은 전혀 틀린 말이라고 한다.3) 가현설(假顯設)절대적 존재인 하나님이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될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은 것은 그가 진짜 인간이 아니고 그는 하나님으로서 다만 인간처럼 보였다가 사라진 것뿐이다.4) 구원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특별한 지식, 즉 「특별한 비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영적계급에 속한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완전한 멸망으로 간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속에 있는 영적 원리를 신령한 지식으로 터특하게 되면 스스로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장점은 그가 세상에 오셔서 자기 스스로 완전한 해탈을 통하여 인간 스스로 구원이 가능한 것을 보여 주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래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신령한 지식을 얻어야 하고, 또 신령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신령한 것과 반대되는 물질적 요소인 육욕을 될 수 있는 대로 학대하고 괴롭혀야 했다. 이리하여 극단적인 금욕주의가 따랐다. 또 정반대로 인간이 구원을 받는 것은 육체가 아니고 영이니, 따라서 육체는 이러나 저러나 소멸된 것이므로 아무렇게나 사용해도 괜찮다는 극단적인 쾌락주의도 생겼다. 영지주의는 초대교회 이후 여러 면에서 잘못된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영지주의를 반대하기 위해 교회가 철학을 사용하다보니 성경보다 철학이 더 우위에 오르게 되는 점과 영지주의자들의 금욕사상이 중세기까지 금욕주의로 영향을 주었다.① 구약 성경중 유대교적 요소를 거부.② 예수님의 육체적 고난, 부활 등의 실재성을 거부.③ 금욕과 방랑생활④ 우주는 구약에 나오는 하급신(下級神)이 창조한 것이기에 모든 것이   불완전하고 악하다.⑤ 그리스도는 최고 아이온이며, 유령과 같은 상태의 가현했다고 주장.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 예수라는 사람안에 일시적으로 깃든 것이라고 주장.⑥ 속죄는 영지(靈知)를 통해서 되어진다.⑦ 인류는 물질적 인간과 정신적 인간으로 나누어진다.□ 참고 - 사도신경(使徒信經)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배 시간에 신앙고백으로 사용하는 사도신경은 초대교회의 귀한 신앙유산이다.   사도신경은 증거나 설명을 곁들이지 않고, 간단하고 적극적인 믿음의 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성은 주로 세례식에서 관례적으로 행하여져 온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순서에 따라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사도신경은 이름과는 달리 사도(使徒)들에게서 유래(由來)된 것은 아니다.  물론 사도들에게서 유래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그 전설에 의하면 사도신경의 열 두 마디는, 12 사도들이 각 한 마디씩 말한 것을 베드로가 모아서 로마로 가져 간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사도신경이 형성되기는, 초대교회(初代敎會)에 「영지주의」(靈知主義)라는 무서운 이단(異端)이 교회에 강력히 들어오면서 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성도에 대한 신조(信條)와 교리(敎理)의 가르침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초대교회의 교리와 신조가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의 시초가 「사도신경」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믿음의 규칙”이라고 불리워 졌는데, 이것을 가지고 이단이냐, 아니냐를 판가름 하였다.내용은, 처음에는 세례식의 고백에서, “ 예수는 주(主)십니다. ” 라는 간략한 것이었으나, 주후 170-235년경의 히폴리투스 시대에 이르러 신조는 확대되어 다음과 같은 세가지 질문이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에게 주어졌고 이를 확인한 후에라야 세례를 주었다.첫째 질문 :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      답  : 내가 믿습니다.둘째 질문 :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신과 성모 마리아로 부터 나셨으며 본디오 빌라            도의 치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사 죽으셨으며 사흘만에 죽은 자들 가운            데서 살아나셨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오른 편에 않으셨으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답  : 내가 믿습니다.셋째 질문 : 성령과 거룩한 교회와 육체의 부활을 믿습니까 ?      답  : 내가 믿습니다.이렇게 질문하고 “내가 믿습니다.” 하던 문답형의 신조는 점차로 하나로 연결되어, 끓어짐없이 “내가 믿사오니-”라는 우리에게 낯익은 귀절로 시작되는 선언형으로  바뀌어 졌다. 이때가 대략 341년경이다. 그 후 주후 850년경 샤를마뉴 궁정을 통하여 유럽에 본격적으로 전파되었고, 12세기에 이르러 서방 교회 어디를 가나 세례시에는 사도신경의 골격으로 세례문답을 하고 예배시에도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2. 에비온주의 (Ebionism)에비온주의는 유대주의적 기독교 일파를 말한다. 이 에비온주의자들은 대체로 AD 67경에 발생하여 79년경에는 요르단 동쪽에서 번성했다고 한다. 이들이 믿는 바는 예수를 믿되, 영지주의적 요소인 그리스도의 신성을 배격하고 인간 예수를 믿는 점과 유대교적 요소인 율법의 필요성을 믿는다는 점이다. 즉 이들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도 부인하고 메시야적 사명도 부정하였다.그래서 예수는 단순한 인간에 지나지 않으며 그가 행한 일들은 예언자중 하나와 같은 일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예수가 행한 기적들도 과거에 예언자나 선지자가 행한 기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교훈이 엄격했기 때문에 율법이 필요하다. 율법의 제도는 불필요하나 (희생제도 등) 그 대신 정결한 생활, 금욕, 절제가 율법처럼 지켜져야 한다. 이렇게 하여 율법을 성취하는 자는 모두가 그리스도가 될수 있다. 이같은 에비온주의자들의 영향은 5세기에 이르러서야 사라진다. 그러나 초대교회 구성원들의 거의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 많았으므로 그들이 전에 믿던 유대교적 요소를 쉽게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에 많은 혼란과 지장을 준 것이 에비온주의였다. 에비온주의자들이 이같은 공격 때문에 교회는 올바른 기독론을 수립 형성하는데 촉진제가 되었다.3. 말시온파 (Marcionism)말시온은 소아시아 본도(Pontus)지방의 시노페(Sinope)감독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하여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교리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유대교와 물질세계에 대한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뜻을 발전시키고자 144년경 대도시 로마로 진출한다. 그러나 로마교회로부터 배척을 받게 된다. 그러자 말시온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따로 교회를 세워서 종파운동을 시작한다.말시온의 주장은 독특한 면이 있다. 그는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성부 하나님과 구약 여호와 하나님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구약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인류들 가운데 특별히 한 민족만을선택하였던 독선적인 하나님이었다. 자기에게 불순종하는 자들은 반드시 복수하고마는 독한 하나님이었다. 구약의 하나님이 독선적이고 보복적이고 정의만 내 세우는 심판의 하나님인 반면에, 신약의 하나님은 복수심이 전혀 없는 자애로우신 하나님이고 구원을 포함한 모든 것을 값없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신약의 성부 하나님은 오직 영적인 세계만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독선적인 구약의 하나님은 이 세계와 물질계와 그리고 인간들을 만드셨다. 그런데 인간들이 이 물질세계와 여호와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시달림을 당하고 있을 때 신약의 선하신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구원코자 하셨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마리아에게서 나신 인간이 아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면 그는 성부 하나님이 보낸 분이 아니라 구약 여호와 하나님이 보낸 분이 되기 때문이다.이와 같은 전제하에 말시온은 구약의 성경을 부인하였다.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을 주신 좋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열등한 여호와가 준 말씀이므로 교회에서 읽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적 냄새가 나는 유대적 요소들은 되도록 피하였다. 심지어 신약에서도 누가복음과 바울서신만 참된 경전이라 하였다. 이같은 움직임은 초대교회가 구약성경을 너무 중시하여 율법주의가 득세하기 때문에 온 반동이었다. 말시온은 철학과 율법을 동시에 배격하고 오로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만을 주장하였다. 또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은 사상이해나 율법제도에 익숙한 것이 아니라 철저한 금욕생활의 실천에서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말시온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오직 영적인 것으로만 이해하려 했기 때문에 믿는자의 부활도 영적 부활로만 믿게 되었다.말시온은 영지주의보다 더 큰 위험을 교회에 가져왔다. 왜냐면 앞서 말한 대로 구약의 창조설을 다르게 설명했고, 성육신 교리도 부정해야만 했으며, 부활도 영적인 것으로만 이해하는 등 너무 극단적인 쪽으로 해석을 했기 때이다. 이리하여 자기들 주장이 일반교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교회에서 분리하여 독자적 교회와 독자적 성경을 갖는 교회를 세웠다. 이같은 운동은 수세기 동안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교회는 이같은 말시온의 영향으로 정경을 조속히 매듭짓는 데 커다란 자극을 받게 되었다. 우리가 여기서 꼭 이해하고 넘어갈 것은 말시온이 활약할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정경(正經)으로 채택되지 않은 때였다.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약성경 27권이 정경으로 채택된 때는 39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였다.4. 네오 플라톤주의 (Neo Platonism)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의 사상을 신비주의적으로 해석하는 일종의 범신론(汎神論)이다. 발생원인은 기독교로 인하여 로마종교가 없어질까하여 생겼다.  개조는 암모니어스 삭카 (Ammonius Saccas) 이다. 유명한 학자는 삭카의 제자인 플로티7누스 (Plotinus)로서,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과 우주 안에 있는 하나님과 조화에 힘을 썼다.  신은 절대적 존재이며 완전하여 그로 부터 모든 하위존재가 나온다는 것이다.로고스 ⇒누스 (νοψ s) ⇒ 세계혼(World Soul) : 물질세계 ⇒ 개인영혼특색은 재래식 철학사상에 종교적 요소를 가미하였다. 도덕은 금욕적이며, 구원관은 신비한 사색을 통하여 영혼이 하나님께로 상승하여 일치한다는 것이다. 신플라톤주의는 기독교신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오리겐, 어거스틴의 신학에서 특히 그러하였다.□ 참고 - 플라톤의 사상플라톤의 사상은 13세기까지 기독교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면 플라톤의 사상이 무엇이길래 그토록 영향을 많이 미쳤는가?  플라톤은 아테네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BC 427-347) 플라톤은 소크라테의 제자였다가 스승이 별세하자 (BC 399) 그의 후계자가 된다. 그는 BC387년에 아테네에다 아카데미 학원을 창설하여 20여년 동안 가르치는 일과 저술활동을 한다. 이 플라톤의 사상은 13세기까지 기독교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13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스콜라철학)으로 바뀌어질 때까지 플라톤의 사상은 기독교 교부나 지도자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나 오리겐은 물론이고 어거스틴의 신학사상에는 플라톤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다.그러면 그의 사상은 무엇인가 ?  그것은 플라톤의 사상 중 2원적 세계관과 영혼불멸 사상이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와 현상세계가 있다고 했다. 이데아의 세계는 선한 것이고, 그것의 정점은 곧 하나님이며 하나님이 모든 사물의 근원이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은 선재적이다. 여기에 아이디어를 얻은 어거스틴은 영혼의 기원을 선재설로 주장하였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은 선재적(先在的)인데, 범죄로 인하여 현상세계인 육체와 결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영혼 자체는 본래 이데아의 선한 것이므로 그것은 영원히 멸할 수가 없고, 그것은 비물질적이며 생명력을 가진 영원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육체는 죽어 소멸되지만 영혼은 없어지지 않고 영원한 이데아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이같은 플라톤의 사상과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혼의 구원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  여기에 대해 초대교회는 많은 혼동을 가져왔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보이지 않는 영혼”(눅 24:39참조)만이 구원된다고 믿지 않고 영과 함께 부활되는 육체(영체)가 구원받을 것을 믿는 全人的 구원을 믿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이와 같이 유대교적 배경을 가진 에비온주의와 반 유대주의적 배경을 가진 말시온주의와 헬라철학의 배경을 가진 네오 플라톤주의와 모든 것을 섞어 혼합하려는 영지주의 등으로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시련 속에서도 당신이 피 흘려 사신 교회를 쓰러지지 않게 붙드셨고, 자라게 하셨다. 이는 교회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5. 조로아스트교(Zoroaster)B.C 7세기 경에 일어나, 페르샤에 있었다는 Zarathustra를 예언자, 교조로 하는 종교이다. 고레스 2세도 믿었다. 고대 제국에서 중세 사산조(Sasan朝)까지 때때로 페르샤 국교가 되었으나, 이슬람교에 의하여 거의 멸망하고 지금의 인도의 파르시 (Parsee)라고 불리우는 수 만명의 신자가 있을 뿐이다. 주신(主神)인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h)의 이름에 의하여 마즈다교, 의례(儀禮)에 의하여 배화교(拜火敎)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승직(僧職)은 마기(Magi)라 한다. 미트라교는 이 종교에서 파생되었다. “전지의 주, 아후라 마즈다는 태양신적인 빛의 신으로 어둠속에 있는 악신 앙그라마인유(Angramainyu)와 싸우는 선한 신이다. 인간은 선신(善神)의 축복을 받아 그 보호 밑에서 악과 싸워야 하며 최후의 심판에서 상벌이 있다고 한다. 불을 신성히 여겨서, 불의 근원은 하늘에 있고 불은 주신(主神)의 영, 상징이라는 신화로 특히 존중된다.  사원이나 가정에서도 성화(聖火)를 간직하고 그 앞에서 기도한다.6. 미트라교(Mithra)고대 페르샤의 종교. 신앙 대상은 불멸의 태양 미트라 신이며, 미트라는 원래는 이란과 인도 민족에서 하늘을 맡은 신으로 숭배되었다. 점차 태양신, 광명의 신으로써 인류에게 모든 착한 것을 주고 풍요의 신으로써 천 개의 이목(耳目)을 가지고 있다. B.C 3세기 경 이미 많은 신중의 유력한 신으로 우상화 되었다. 특히 로마의 군대와 군 출신의 황제에 의하여 비호되었다. 교리의 내용은 조로아스터교에서 나온 것 같으며, 후에 파생한 마니교(Mani)교의 모태였다.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부활에 이르고 현세의 죄업과 고난을 초탈(超脫:淨化)하여 도달하는 내세의 존재를 믿는다. 의식은 기독교와 비슷하여 한 때 세계 종교로 번창할 기세도 보였으니 기독교의 출현으로 쇠퇴하였다.7. 마니교 (Manicheism)(1) 교조 : 마니 (Mani) 216 - 277년당시 로마 제국의 동방인 페르샤 지방의 바벨론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인도와 중국까지 여행을 하고 돌아와 마니교를 세웠다. 그는 석가모니, 예수, 조로아스터와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최고의 마지막 계시자라고 하였다. 마니교의 신자들은 북아프리카에서부터 중국까지 퍼져 있었다 당시의 페르샤의 사산왕조는 그를 우대했으나 조로아스터교의 승려들의 미움을 받아 십자가에 달려 가죽이 벗겨 죽임을 당하였다.(2) 교리 (敎理)① 마니교는 영지주의만큼 잡다하게 많은 종교들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페르샤의 토속종교, 조로아스터교, 헬라철학, 과학, 불교, 힌두교, 바라문교, 유대교, 기독교 등의 절충주의였다.② 그래서 이들의 교리에는 윤회사상도 나타나고, 빛과 어두움의 이원성, 보혜사와 예수의 중요한 역활 등 여러가지가 나온다.③ 주요교리는 페르샤의 이원론에 근거하였다. 즉 태초에 두가지 적대적 본질이 존재했는데, 선과 악, 빛과 어둠, 하나님과 물질이 그것이었다고 한다. 선은 광명, 악은 암흑이다. 인류는 어둠의 세력(악마)이 빛의 세계에 침임함으로 반작용으로 생겨졌다. 그러므로 인류가 돌아갈 곳은 빛의 세계(해탈)이다. 구원은 이원론적 본질을 이해하게 될 때 되어지며, 해탈하기 위해서는 금욕생활을 해야 한다.(3) 조직마니 - 12사도 - 70인 감독 - 교사 - 행자□ 참고 -  이원론(二元論)이원론이란 특정한 상황이나 영역을 두 개의 상반되는 요인이나 원리들로써 설명하는 해석상의 한 이론이다. 일반적으로 이원론은 어떠한 중간매체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는 것이다. 이원론에 의하면 세상에는 상호 적대적인 두 세력 - 그 하나는 모든 선의 근원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악의 근원임 - 이 있다고 한다.  가장 뚜렷한 종교적 이원론은 고대 이란의 조로아스터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로아스터교에 있어서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와 아리만(Ahriman)은 서로 각각 우주의 근원적 존재들인데, 전자는 선한 세력을 대표하고, 후자는 악한 세력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 우주는 이 양대 세력의 투쟁장이며 각각 빛과 어두움으로도 표현된다. 대부분의 이방 종교 들마다 온건한 형태의 이원론이 내재해 있다. 예컨대 이것들은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구분되거나 혹은 중국 철학에서처럼 실테가 양(陽) 과 음(陰)으로 구분되는 것 등이다. 기독교 신학에서도 수정된 이원론이 나타나 있다. 즉, 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신 분이시고 사단은 타락한 피조물로서 어느 곳에나 악을 침투시키는 존재로 간주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 의미의 이원론은 아니다. 왜나면 기독교 신학에서는 사단이 궁극적이며 근원적인 존재로 간주되지 않으며 또한 사단은 궁극적으로 이 우주에서 배제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제2-5장. 콘스탄틴 대제와 기독교공인1.콘스탄틴 대제 (大帝)① 교회에 대한 박해는 A.D 313년 끝나게 되었다. 그것이 콘스탄틴이라는 로마황제로 인해서 였는데, 그는 기독교의 마지막 박해자인 갈레리우스 황제가 죽은 후 황제의 자리를 두고 권력투쟁에 있었다. 여기서 콘스탄틴은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5명의 경쟁자를 물리쳐야 하고, 특히 막센티우스라는 강한 상대를 물리쳐야 했었다.② 312년 로마근교의 밀비안(Milvian)다리에서 그는 그의 군대와 함께 하늘에서 십자가와 “그대여 이것으로써 싸워 이기라”라는 큰 글을 보았다.  그 날 밤 중에 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십자가를 창과 방패에 달도록 명하심. 그후 그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대승리를 하고 황제가 되었다.③ 이후 그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고 교회에 대하여 신앙의 자유를 선포한다.    이로써 기독교 박해의 종식을 고하게 된다.④ 업적- 국비로 교회건축.  주일휴업.  교직자 세금과 병역의무 면제 등,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여 종교자유를 선언(기독교공인). 후에 기독교제국의 수도를          만들기 위해 비잔틴땅에 새수도 만듬(콘스탄티노풀)2. 콘스탄틴이 기독교에 끼친 공헌콘스탄틴 자신은 기독교에 대한 보호자로 자인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인 황제였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자기의 정치적 야망과 국론통일 등을 위하여 기독교를 이용한 그런 사람이었다. 콘스탄틴은 황제로서의 장래의 성공은 옛날의 퇴폐적인 이교보다도 그리스도교에 달렸다고 생각하고, 그는 공공연하게 교회에 대하여 호의를 가지고 보호하였다.그의 정책도 교회를 중심삼아 세우게 되었다. 눈치 빠른 정치가이고, 인간성을 지혜롭게 파악했던 콘스탄틴은 기독교의 위대한 잠재 세력이 로마제국을 다스려 나가는 데 얼마나 유용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그는 기독교를 좋아하면서도 콘스탄틴 자신은 평생동안 태양신을 섬기고 로마제국의 수장으로서 이교도의 대사제로서 칭호인 폰티펙스 막씨무스 (Pontifex Maximus)라는 이름을 그대로 갖고 있었으며, 또 그 임무를 다 한 것을 보면 그가 꼭 기독교 신자만은 아닌 것 같다. 자기의 사후를 계승할 세 아들에게도 로마의 이교의 신의 이름으로 호칭을 받게 한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는 평생동안 세례를 받지 않다가 죽기 직전에 화급한 나머지 세례를 받게 된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하나님으로부터 전쟁에서 도움을 받고자 하는 기대를 갖고 기독교에 상당한 호의를 베푼 것은 사실이다.  콘스탄틴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12월 25일의 태양신의 예배일인 사투날리아로 정했다. 그 이전에는 주현절로 1월 6일을 지키던 것을 이교도의 축하일로 옮기자 이교도들 역시 반대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콘스탄틴은 우리가 본받거나 감화를 받을 만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기억할 만하고 인간성을 깊이 연구해 볼 만한 인물이다.3. 기독교 공인콘스탄틴 대제 이후의 황제중 어떤 사람은 잠시 기독교를 멀리하고 다시 우상숭배로 돌아갔으나, 다시금 기독교로 회귀하였고, 데오도시우스 황제 때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4. 그 후의 변화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특권이요 영광이 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제국의 가장 훌륭하고 높은 지위들이 주어졌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곳에서나 지도자가 되었다. 많은 이교도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들이 전심으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돌아온 것이 아니라 높은 지위를 얻고 출세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아마 이런 사람들을 향해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말하자면 세상적인 유익을 얻기 위하여 주님을 따른다는 의미이다.  세속적인 사람들이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분명히 바람직 하지 못하다. 기독교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 느껴진 것은 황제 자신이 교회를 다스리기로 결정했던 때였다. 主 에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교회의 왕이 되시므로 세상의 어떤 권세라도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영적인 영역에서 그리스도는 최고의 통치권을 가지신다. 그러나 콘스탄틴 대제는 감독들의 회의와 교회 대표자들의 모임을 소집할 뿐 아니라 이러한 모임들을 자신의 이름으로 주재(主宰)하였다.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으로 향하여 마음껏 예배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였으나 그의 통치가 가져다준 혜택은 양면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즉 좋은 측면도 있었고 나쁜 측면도 있었다.  교회안에 평화가 찾아 왔을 때 세속적인 물결도 휩쓰려 들어왔다. 회심의 체험도 없고 마음 속에 성령의 역사(役事)도 느끼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양적인 요소가 질적인 요소를 희생시켰다. 박해의 불길은 교회의 순결을 지켜 주었다.제2-6장. 초대교회의 변질과 분파주의1. 신약교회가 타락하게 되는 원인① 혹독한 박해 때문이었다.AD 64년 네로가 로마시의 화재의 원인을 기독교도들에게 전가시키면서 가혹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뒤 계속하여 300년까지 200여년이 넘게 혹독한 박해는 멈추지 않았다.  신약교회의 성도들은 현실보다 신앙적 이상이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그 이상을 지키고 따르기 위해서 현실적으로 많은 저항이 오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다 당하였다. 그러나 교부들은 자기들이 당면한 현실 타개가 이상보다 더한 급선무였다. 이같이 박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회의 변질을 가져왔다.② 이교사상과 철학의 영향이 컸다.기독교는 처음 수세기 동안을 이교도들을 개종시켜야 했다. 유대교, 헬라의 철학, 동양의 각종 종교, 헬라, 로마에 뿌리를 둔 이방 종교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켜야만 했다.  그렇지만 이방 종교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기독교는 타 종교에서 시행하고 있는 타 종교의식과 비슷한 것처럼 혼용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세례는 동방종교에서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오해되기도 하였고, 헬라의 각종 신들의 예배가 카톨릭에서는 각종 천사들의 숭배로 발전되기도 하였고, 또 페르샤나 가나안에 있었던 여성신 사상은 성모 마리아 사상으로 대치되기도 하였다. 기독교는 타 종교로부터 영향을 받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들에게 영향을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지 않는 요소가 있었다. 이같은 점들이 기독교를 본질에서 떠나 부패하게 만들었다.③ 의식의 남용이 교회를 부패시켰다.신약교회 당시 의식은 한낮 의식일 뿐이다. 그러나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부터는 이교도에서 개종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기독교적인 것과 이교적인 것을 혼합시켜 놓았다.  그중에 몇 가지 실례를 들어보면, ‘세례’가 무슨 마술적인 것처럼 남용되었다. Justin이나 이레네우스는 세례가 신비한 효력이 있는 것처럼 말을 하여 ‘세례중생론’으로 나아갔다. 그뿐 아니라 익나티우스는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영혼의 자양분을 준다’고 순수한 의미로 말을 하였지만, 그것이 나중에 화체설로 발전한다. 이렇게 평범한 의식이었던 것이 차츰 발전하여 ‘성례’(Sacrament)가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성례전의 신앙은 가지수가 점점 늘어나서 중세 때에 카톨릭은 30여가지까지 제정되었다가 현재는 7개로 한정되었다. 그런데 이런 많은 성례가 바로 교회를 타락시켰다.④ 교회 행정상의 난맥이 교회를 부패시켰다.초대교회의 평범하고 동등했던 직분이 2세기로 옮겨지면서 감독직이 다른 직보다 더 크게 부상한다. 이렇게 하여 감독직이 장로직보다 우위에 오르기 시작했다. 초대교회는 감독이나 장로가 다 똑같은 직분이었다. 그런데 장도들 중에서 보다 뛰어나고 강력한 지도자에게 교회 운영관리를 맡기며 그를 ‘목자장’(벧전 5:4)으로 전문직 행정사인 감독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머지 비전문적인 장로들을 감독과 분리하여 그냥 ‘장로’라고 불렀다. 이렇게 발전하여  3세기에는 수 많은 장로들 중 하나를 감독으로 뽑아 감독은 지역의 책임자이고 장로들은 그냥 개교회의 지도자로 구분하였다. 나중에 4세기 때 세 곳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은 대교구 감독이 되었고 나머지는 각 지방의  소감독이 되었다. 이같은 발전이 드디어 전체 교회의 감독자인 교황제도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교회에 많은 직분이 있는 것이 좋은 일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성경에 없는 교회 행정제도는 자동적으로 교회의  부패를 가져온다. 오늘날도 교회에서 성경에 없는 여러 행정 직분의 남발은 유익보다는 교회의 부패를 가져올 확률이 크다. 우리는 이같은 과거를 보고 현재를 반성하고 미래를 설계해야 할 것이다.⑤ 교회와 국가의 연합이 교회의 부패를 가져왔다.예수님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마 22:21)라고 하셨던 말씀에 의하면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분명히 하였고, 또 초대교회는 이것을 분명히 지켰다. 그런데 콘스탄틴 황제 이후 국가와 교회는 연합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황제들이 친히 교회의 회의를 소집했고, 교회의 결정을 황제가 인정하느냐 부정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 교회의 흐름이 달라졌다. 교회 지도자들도 영적 힘으로 지도자 역할을 다하려 하지 않고 정치 권력자들과 결탁하여 자기 세력 진출을 기하였다. 이렇게 되자 신앙적으로 경건하고 영력있는 지도자의 도움을 얻을 수 없었다. - 이런 사람들은 그런 정치적인 술수를 쓰는 사람들에게 밀릴 수 밖에 없으니까 - 또 지리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서 전체 회의에서 결정된 것을 권위로 인정하는 관행이 만들어졌다. 어디서나 다수가 모인 회의에는 술수좋고 재능있고 재치있는 자가 회의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게 마련이다. 교회의 힘은 다수가 결정하는 전체 회의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참고 단계요, 실제 교회의 힘은 진리가 힘이요, 영감이 교회의 힘인데, 교회 회의를 통한 결정이 곧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갖게 되면서 교회의 부패는 점점 더 커진다. 교회 회의주의는 교권의 경쟁, 비진리가 정치적으로 승리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⑥ 이 외에도 기독교인의 예배와 생활을 변화기키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계속 작용한다. 즉 극단적인 금용생활로 그리스도께 충성을 증명하려고 한다든지, 모든 성도가 다 같은 형제요 자매라는 일체감을 빼 버리고 성직자와 평신도간의 사이가 점점 벌어졌다. 이같은 대세의 물결에 아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그냥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2. 분파주의자들그러나 그 같은 대세 속에서도  무언가 저항을 하고 반대운동을 하는 소수의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을 이름하여 ‘분파주의자’들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들은 왜 대세의 물결 속에서 반항을 하고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던가 ?  후세의 사가들은 이들을 그저 도매금으로 이단 또는 분파주의자라고 몰아 부쳤으나, 우리는 이들이 과연 신앙이 없고 이교도들과 같은 이단들이었는가 아닌가를 논하기에 앞서 그들의 주장이 무엇이기에 그런 평을 받게 되었는가를 사실 그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1) 몬타너스파 (Montanists)1) 몬타너스(Montanus)는 소아시아 브루기아지방에서 출생하였다. 156년경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그후 얼마 되지 않아서 자기 스스로 성령의 대변자로 자처하였다. 그리고 자기를 보혜사 성령께서 사용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자처하였다. 성령께서는 자기를 황홀한 지경에 사로 잡히게 한 다음에 말씀을 주시는데, 그때의 자기 말은 개인의 말이 아니라 보혜사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이같은 몬타너스의 활동은 소아시아를 중심한 여러 교회는 물론 서방교회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되자 이들을 마귀의 집단으로 거부하는 층과 또 하나님이 보낸 시대적 개혁운동으로 보는 상반된 반응이 일어났다. 이에 브루기아 지방의 주교들이 172년경 회의를 열고 이들을 유죄로 판결하자, 몬타너스는 이 결정이 사탄의 결정이라고 서방교회에 자기들의 입장을 호소한다. 그러나 서방교회의 ‘이레니우스’(Irenaeus)는 동방교회의 화평을 생각하여 몬타너스의 호소를 묵살한다. 이렇게 되자 몬타너스는 모든 교회로부터 완전 분리하여 독립교회를 세운다. 몬타너스의 후계자인 ‘데오토투스’는 보다 철저한 조직을 강화한다. 그리고 자기 종파에 속한 이는 ‘프뉴마티코이’(영적인 자들)이라 하고, 일반교회의 추종자로 성령을 이해하지 못한 이들은 ‘프쉬키코이’(육적인 자들)라고 부르면서 자기들 스스로 우월감을 가졌다.2) 몬타너스파의 주장① 정 통몬타너스주의자들은 정통 기독교의 가르침과 사도들 신앙의 근본 진리에 대하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믿었다. 그런데 교회가 사람들이 모여 제정한 교리나 계율 등은 믿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리나 계율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도가 구원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② 이적의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몬타너스주의의 오류는 이적의 은사 특히 예언의 은사를 몹시 강조한 것이었다.③ 주의 영인 성령을 받은 자는 다 똑같은 제사장이다.교회의결정은 다수의 주교들에 의해 이루어져서는 안 되고, 오히려 신령한 성령의 사람들이 다 동일한 제사장적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활동을 일정한 형식 안에서만 활동하는 것처럼 제한해서는 안된다.④ 사죄의 권한은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 있다.⑤ 임박한 주님의 재림을 믿었다.⑥ 금욕주의몬타너스 파는 금욕주의와 교회의 규율을 지킴에 있어서 광신적으로 엄격하였다. 이것은 기성교회의 규율이 점점 해이해지는 경향, 특히 박해 기간에 교회에서 떠나갔던 사람과 변절하고 죄에 빠졌던 사람들을 교회에서 도로 받는데 엄정하지 않던 경향에 대한 강력한 항거의 표시였다. 또 금욕주의를 강조하여 여자의 사치스로운 의복을 금하고 금식과 극단의 고행을 장려하고 재혼을 금하였다. 또 박해 때에 숨는다든지 도망하는 것을 정죄하고, 변절했던 사람이 교회에 다시 들어 오는 것을 금하였다.⑦ 신앙생활의 근본에 대하여는, 기성 교회주의자들은 교회의 제도나 교리에 익숙한 것을 말하나 몬타너스주의자들은 경건한 삶이 곧 신앙이라고 하였다.3) 몬타너스파의 영향이들의 운동은 교회가 무미건조한 의식주의로 흘러가는 데 반항하여 엄격하고 청순한 신앙운동을 회복하려던 청교도적 개혁운동이었다. 그래서 교부들 중 박학다능한 터툴리안 (Tertullian)도 그의 마지막에는 이 운동에 가담했으므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들은 2세기 후반부터 6세기까지 소아시아는 물론이고 동.서방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들의 강한 주장 중 하나가 기성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바람에 많은 정치적 박해까지 받게 되었다. 이 몬타너스파는 3세기의 노바티안파와 4세기에 도나터파로 이어진다.4) 몬타너스파에 대한 평가① 비판적인 시각a. 사도의 계시가 단회적인데 자기들에게 계속 주어진다고 한 것은 특수계시와   일반계시를 구분하지 못한 점이다.b. 참된 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성령의 무리라고 하여 스스로 영적 엘리트   의식에 도취되었다.c. 성도가 박해 때는 순교로, 평화 때는 금욕적 생활로 성도의 미덕을 보여야 한다고   하여 지나친 금욕주의적 신앙으로 기울어 졌다.d. 지나친 말세사상의 강조로 현세의 의미와 사명을 강조하는데 소흘히 하였다.② 긍정적 시각a. 몬타너스의 운동은 이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기독교 안에서 교회의 개혁과   성도의 경건생활을 찾으려는 운동이었다. 이같이 교회내에 갱신운동을 같은 교회   의 직분을 가진 자들이 저들을 정죄하오 파문한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b. 오늘날도 개 교회마다 보면 성령에 사로잡힌 능력을 구하기보다는 제도와 조직의   힘 안에서 그 능력을 의지하려는 경향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최초의 의로   운 길을 나름대로 찾으려고 한 성도들이다.c. 따라서 오늘날 몬타너스파의 부분적 요소만 가지고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다. 우리는 양면을 다 보면서 어찌하여 이런 사람들이 생겨났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몬타너스파를 영지주의나 그 밖의 여러가지 이교주의의 영향을 받아 교회가 변질되어 가는 것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 몬타너스 파는 신앙보다도 지식을 강조하는 사상을 반대했으며, 교회의 규율의 문란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이 문란해짐을 막으려 했으며, 교회가 세속화되어 감을 제지하려 하였고, 교회 안에 계급제도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려 하였으며, 또한 당시에 일어나는 특별한 섭리와 계시를 믿지 않을려는 사상을 막으려는 운동이었다. 몬타너스파는 고의적인 분열자들이 아니라, 2세기에 있어서 한 개의 중요한 청교도적 분파 운동이었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개혁하기를 원하였지만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들을 분파주의자로 몰았던 것이다.(2) 노바티안파 (Novatians)1) 노바티안의 기원노바티아누스(Nopvatianus)는 소아시아 브루기아 출생으로 전해진다. 개종하기 전에는 철학자였다. 개종한 후 회개의 삶은 현저한 모범적 생활이었다. 후에 로마교회의 장로가 된다. 여기에 못마땅하게 여기는 적수가 있었으니 ‘코넬리우스’이다.  이 무렵 데시우스 황제 (AD 250-251)의 심한 박해로 인하여 순교자들과 변절자들이 많이 생겼다. 이 박해로 인하여 로마 감독인 파비아누스가 순교한다. (AD 250) 이때 기회를 노리던 코넬리우스는 변절자로 소문난 ‘제프리누스’(Zephyrinus)의 도움으로 주교에 취임한다. 그런데 문제는 과거의 박해 때 변절했던 자들이 다시 교회로 들어 오려고 할 때 그를 용납해야 하느냐, 아니면 벌을 내려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심각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코넬리우스는 관용론의 입장이었고, 노바티아누스는 책벌론자였다. 그러다가 코넬리우스가 로마의 감독이 되자 노바티아누스는 묵과할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서 노바티아누스의 입장을 지지하는 카르타고의 ‘노바투스’(Novatus)가 이탈리아 교회의 새 감독의 추천으로 또 다른 로마교회 감독으로 노바티아누스를 세운다. 이리되니 로마교회의 감독이 두 사람이 되었다. 이무렵 노바티아누스는 스스로 교회 정화를 표방하고 과거에 변절한 자들이 다시 교회에 들어오려면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에 맞선 코넬리우스는 60여명의 주교회의를 열고 노바티아누스를 정식으로 정죄하였다. 그러자 노바티아누스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반대운동을 전개해 나간가. 이들 노바티안들은 몬타너스 운동과 합세하여 7세기까지 존재하다가 사라진다.2) 노바티안의 주장표면적으로는 로마 교회의 감독직을 놓고 경쟁한 것 같으나 실은 주장은 다르다.① 코넬리우스 주장a. 교회는 교회가 필요한 관례를 제정할 수 있다. (마18:18참조)b.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모든 이를 교회 안으로 소속시켜야 한다.c. 교회는 믿음으로만 아닌 ‘랩시’ (Lapsi : 죄를 용서한다는 대속의 속전)에 의해서   라도 잃은 자를 되찾아 놓아야 할 책임이 있다.② 노바티아누스의 주장a. 교회는 성도들이 교제하는 곳이다.b. 교회회의는 참작할 필요가 있으나 교회회의가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질 수는   없다. 참된 권위는 성령의 지도에만 따라야 한다.c. 사람이 지은 죄가 ‘랩시’에 의해 도움이 된다고 하면 그것은 물질로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우상숭배와 같은 사상이다.노바티안의 강경론이 안디옥교회에서는 환영을 받았고, 서방교회와 특히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의 키프리안은 노바티안의 주장을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면 노바티안은 왜 그런 주장을 하였을까 ?  그의 입장에서는 교회가 배교한 자와 같이 더럽혀진 자들을 아무 조건없이 다시 받아들임으로 합법적인 성직의 수임기구를 타락하게 하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거룩을 때 묻히는 것이라 보았다.  또 교회는 죄를 해결하도록 위임받은 기관인데 죄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무조건 용납하는 것은 저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죄를 나누어 갖게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3) 노바티안의 영향이들 노바티안은 신앙의 정절을 대단히 중요시하였다. 그래서 자기들 주장과 맞지 않게 행동을 하는 이들과는 교제를 멀리했다. (재건파와 비슷) 이같은 이들의 진의는 다른 이들에게 이해되지 못하였다.  카톨릭교회는 이들을 자기 세력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강요하였으나 끝내 고집하면서 독자적인 신앙노선을 펼쳐 나갔다. 이들은 6세기 또는 7세기까지 유지되다가 자체 내 몰락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러면 그들은 왜 그토록 많은 어려움을 당하면서 그토록 어려운 신앙생활을 하였을까 ? 이것을 단지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한번 쯤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들은 분파주의자이며 이단자라는 이름을 벗어날 수 없겠지만, 그러나 그들이 이런 오명을 쓰게 된 것은 그의 신학상의 성격보다도 대부분의 이유는 그가 처해있던 환경 때문이었다.  그의 교리관은 몬타너스나 터툴리안의 것과 마찬가지로 주로 정통적이었다.(3) 도나터스파 (Donatists)1) 도나티스트의 기원도나티스파는 ‘디오클레티안’의 박해가 끝날 무렵에 시작되었다. 이 파 역시 일찌기 몬타너스 파와 노바티안 파가 지니고 있던 퓨리턴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도 역시 교회의 순결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교회의 계율문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이들이 생긴 직접적인 원인은,  교회는 극심한 박해가 있을 때마다 많은 변절자들이 생겼다. 변절자들은 비단 신자들뿐만 아니라 감독들 중에도 있었다. 그 중에 ‘펠릭스’(Felix)라는 북아프리카 주교가 있었다. 펠릭스는 박해 때  성경을 버리고 성물들을 부숴버림으로 노골적인 변절자로 알려졌다. 박해가 끝났을 때 감독 중 중요한 자리인 카르타고의 감독이었던 ‘멘수리우스’(Mensurius)가 죽자 (311년) 그 후임으로 ‘카에킬리아누스’(Caecilianus)를 선정한다. 그런데 이 카에킬리아누스를 감독으로 안수한 안수위원중 한 사람이 변절자로 소문난 펠릭스였다. 카르타고의 감독은 변절자들을 엄호하고 도리어 엄격한 신자들을 탄압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엄격파들은 카에킬리아누스의 임직이 무효라고 선언하고 ‘마조리누스’(Majorinus)를 따로 선출하였다. 그런데 마조리누스가 선출된 후 곧 사망하지 그의 후임으로 ‘도나투스’(Donatus)가 선출되었다. 이렇게 되자 카르타고 교회 안에 카에킬리아누스와 도나투스라는 두 감독이 존재하였다. 이때 다른 교회들은 어느 감독을 인정하느냐 하는 어려움이 생겼다. 그런데 로마교회의 감독은 카에킬리아누스를 지지하였다. 여기에 콘스탄틴황제까지 합세하였다. 즉 제국의 통일을 위해 교회의 통일을 바랐던 황제는 다수 감독의 의견을 따랐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도나티스트들은 “황제가 교회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항하고 나섰다. 그리고 저들은 ‘세상의 군주와 간음을 범한 교회’ 또는 ‘황제의 조직망 확대에 가련하게 고용된 고위성직자’라고 비난하고 교회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리하여 330년경에는 270여명의 주교들이 모임을 갖는 등 세력이 확장되었다.2) 도나티스트의 주장① 교회와 국가의 분리성경에서 가르치는 바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맞다.(마 22;21, 롬 13:7, 고후 6;15-16) 그러나 분리를 실제적으로 적용하는데 있어서 보다 성경적인 태도를 지켜야 할 것이다. 그런데 도나티스트들은 자기들의 순수성만을 주장하고 남들과의 대화를 거부한 채 독선적인 길을 걸어갔다. 그래서 정부로 부터 간섭받는 것도 싫어하고, 정부의 지시에도 거절하는 일을 큰 영예처럼 여겼다. 이렇게 되닌 국가로 부터 불필요한 탄압을 자초하게 되어 결국에는 역사 속에 사라지고 만다.② 신자의 생활에 관한 문제a. 엄격한 교회 훈련에 의한 신앙생활b. 개인 신앙 양심의 보장c. 회중정치의 교회d. 유아세례 반대e. 선교하는 교회 등을 강조하였다.이들의 주장과 신앙은 성경에 있는 주장이었다. 이들의 삶 역시 특색있는 삶을 살아갔다. 그러나 저들의 단점은 자기들과 맞지 않으면 상대방을 공격하고 그리고 분리하는 분파적 기질이 강했던 점이다. 이같은 분파적 기질은 현대교회 안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이 처음 출발할 땐 배교했던 주교의 안수는 효력이 없다는 교회의 규율문제로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자기들에게 불리하게 편을 드는 국가와 황제에 대해 거부하며 싸우는 것으로 확대된다. 이들이 처음에는 국가의 반대를 피하다가 나중에는 반 정부운동으로 과격하게 확산된다. 이리되니 황제가 앞장서서 핍박함은 물론이고, 이들을 반대하는 세력도 함께 가세하여 괴롭히게 된다. 이들은 자기들만이 참 교회라는 영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혀 살다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당한다. 도나터스 파는 대체로 전의 2세기 동안에 있었던 몬타너스 파와 노바티안 파와 마찬가지로 교리와 조직에 있어서는 정통이었다. 이들이 바란 것은 순결한 생활을 하며, 교회의 규율을 보다 엄격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분파를 이룰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들은 당시의 교회에 있어서 청교도들이었다. 이 운동은 이단으로 규정되었지만 그들의 교훈과 법규의 대부분은 기성교회에서 채용되어 그중의 어떤 것은 교회의 정통신조가 되었다. 몬타너스 파, 노바티안 파 및 도나터스 파가 주장하고 또한 이로 인하여 박해를 당하던 교리와 대부분의 주장들은 교회에서 채용되어 수도원주의와 수도원의 계규로 삼게 되었다. 만일 몬타너스, 노바티안, 도나터스 같은 위대한 인물들이 판단을 명철하게 하여 너무 광신주의로 흐르지 않았다면 이들 지도자들과 그들의 운동은 기독교 사상의 발전과 기독교 생활의 정화에 있어서 훨씬 더 유익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만일 그랬다면 이 분파들은 당시로부터 오늘날까지 비난의 대상이 되기보다도 교회를 정화키고 부흥시킴에 있어서 큰 공로자가 되었을 것이다.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1 교회사교재 : 「내 주의 나라와」 P제3장. 로마제국교회제 3-1 장. 니케야 회의1.제 1 차 니케야 회의 (Nicaia)(1) 소집자 : 콘스탄틴황제(2) 시기 : 325년 5-6월(3) 장소 : 콘스탄티노플(4) 방법 : 각 감독은 장로 2명 수행원 3명 대동(5) 동기 : ① 부활절 지키는 문제 - 동방은 유월절, 서방은 주일중시              결론은 춘분지나고(3/21)만월(滿月)지나고 그후 오는 주일           ② 아리어스 학설로 인하여 교회가 분열위기를 맞음.(6) 아리어스학설 논쟁① 아리어스는 리비아사람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성경해석에 통달한   일류학자였음. 열정적이고 금욕적인 생활로 인하여 추종자가 많았다.② 그의 학설 - 그리스도는 피조물이다. 신성(神性)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니다.③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인 알렉산더에게 반박. 이에 동방의 많은 교회들에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아리어스의 학설이 유포됨.  교회가 일대혼란에 빠짐.(7) 회원의 파벌① 아리어스 파 - 소수② 알렉산더 파 - 소수③ 중립파 - 가이사라의 유세비오 (다수)(8) 결과 - 아리어스의 성경해석이 잘못됨을 확인.           예수님의 신성(神性)확인. 니케아 신경 반포. 아아리어스 추방그후 교회의 문제가 있을시 마다 세계기독교대회가 개최 (8차까지:879년)니케야 회의는 기독교 세계대회의 효시가 된다. 이 대회는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분기점이 되는 대회이다. 그러면 니케야 회의는 왜 열리게 되었는가 ? 그것은 교회 안에서 교리적 논쟁이 크게 확대되어서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 열리게 되었다. 문제는 기독론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의 안디옥에서 사모사타의 바울은 예수가 다른 선지자보다 강력하게 작용하여 로고스가 되었다고 보고 예수가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한 다음에야 하나님은 그에게 신성을 부여하였다고 하였는데, 안디옥교회는 이것을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인 ‘아리우스’(Arius)는 이 사모사타 바울의 영향을 받은대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이 주장을 답습하였다.아리우스는 키가 육척이 되고 설교가 명쾌하며 논리가 정연하였고, 또 정열적인데다가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으므로 그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 아리우스는 예수의 인성만을 강조하였다. 즉, 예수는 본래 신의 본질로 처음부터 있는 분은 아니고 창조함을 받은 장자이므로 영원치 못하며 그 본질에 있어서도 아버지는 시작도 없으나 아들은 시작이 있음으로 그리스도는 신이 아니고 제2의 신이라고 하였다. 또한 예수는 인간의 육체를 가졌으나 인간의 영혼은 갖지 않았다. 예수는 인간들의 영혼이 아닌 로고스를 가졌다. 따라서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도 아니고 완전한 인간도 아닌 중간적 존재라고 하였다.이같은 아리우스의 주장은 알렉산드리아 교회 감독인 ‘알렉산더’(Alexander)가 회의를 주장하여 아리우스의 이단설을 정죄하였다. 그리고 아리우스를 따르는 자들을 파문하였다. 그렇지만 아리우스와 같은 안디옥 학교 동문인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동방교회에서 막강한 힘으로 아리우스를 지원하였다. 이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틴 황제의 측근으로서 그 세력이 대단하였다. 여기에 힘입은 아리우스는 계속 책과 대중노래로서 자기의 주장을 보급하였다. 그러다 보니 정통 신앙을 주장하는 알렉산드리아의 교회와 자유로운 새 사상을 주장하는 안디옥 교회 출신자들 사이에 심한 논쟁과 함께 반목이 증폭되어 갔다.교회가 이렇게 대립되어 가는 것을 콘스탄틴 황제가 크게 염려하여 국가통일의 성업을 위해서 국론이 하나되어야 한다고 믿고 두 파벌간의 분쟁을 종식하려고 노 감독 ‘호시우스’(Hoius)로 하여금 조정을 시도했으나 사태는 해결되지 않았다. 큰스탄틴 황제는 최후 수단으로 전 로마제국 안에 있는 모든 감독회의를 개최하여 세계교회가 하나라는 모습을 나타낼려 하였다. 그리하여 소아시아의 니케야에서 AD 325년 5월 20일에 전 로마제국 안의 감독회의가 황제에 의해서 소집되었다. 이때 모인 감독의 수는 약 300명 정도였고, 서방교회에서는 겨우 6명만 왔다. 그 이유는 먼 길에다 헬라어를 몰랐고, 또 박해 때 불구가 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때 로마교회는 감독이 연로하여 장로2명만이 왔다.회의 결과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세 종류의 서로 다른 주장을 하였다.① 알렉산드리아 교회파의 감독 약 20명중 수석책임자는 알렉산더 감독이고   수행자 대표는 아다나시어스였다.② 아리우스파 감독 약 20명 중 수석 책임자는 니코메디아의 감독 유세비우스   수행자 대표는 아리우스였다.③ 거의 대다수였던 중간파 중 수석 책임자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로 유명한   역사가였고, 어용신학자로 혹평받던 자였다.개회날 콘스탄틴 황제가 개회사를 하였고, 진행은 호시우스와 유세비우스가 하였다. 먼저 아리우스파에 속하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18인의 감독과 함께 기초한 그들의 주장을 제출하였다. 그 내용은 ‘그리스도는 피조물로서 다만 최고의 존재일 뿐 영원성은 없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그 본질이 비슷할 뿐(Homo ousios = like substance) 본질이 동일한 것(Homo ousin = like substance)은 아니다’고 하였다.이같은 아리우스의 주장은 즉각 반대에 부딪히고 회의가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절충안을 내었다. 유세비우스는 교회가 분쟁으로 싸우기 보다는 서로 양보하고 평화를 유지하자고 제의하고 절충안을 내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는 지음을 받은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시니 아버지와 비슷한 본질을 가졌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회의가 한창일 무렵 정통신학의 수호자인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후계자인 ‘아다나시어스’가 책임을 승계하여 ‘아버지와 아들은 동질이며, 아들도 아버지와 같이 영원하신 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관심사는 만일 아들이 피조물이라면 아들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신과 인간이 결합되는 ‘성육신’(Incarnation)한 분이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같은 아다나시어스의 주장이 회의의 대세를 판정하였다. 결국 아다나시어스의 종질론이 다수의 지지를 얻어 가결되었다. 그 결과 유세비우스가 제출한 것을 수정하여 「니케야 신조」가 채택되었다. 이 신조에 참석한 회원들이 전부 서명하였는데 아리우스와 애굽의 두 감독이 서명을 거부함으로 그들은 일루기아 지방으로 유형판결을 받는다.□ 참고 : 아다나시어스 (Athanasius)295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하였다. 아리우스 논쟁 초기에는 그는 집사였으며, 개인 비서로서 알렉산더 감독을 수행하였다. 328년 알렉산더가 사망하자 알렉산드리아 감독에 선임되어 잇단 공격과 5차례에 걸친 추방에도 불구하고 373년 서거할 때 까지 그 지위를 고수하였다. 그는 한 마디로 큰 신앙의 인물이었다. 그는 구원론이 논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인간의 죄로 인한 죽음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다시 살리심과 참되신 신성(神性)이 그리스도안에서 온전한 인성(人性)과 하나 되심으로써만 인간에서 신에로의 변화가 이루어 질 수 있고, 이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에게도 성화(聖化)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그는(그리스도) 우리 인간이 신이 되게 하기 위하여 그 자신은 인간이 되셨다.” 그의 주장은 아리우스 주의의 가장 큰 결점은 주님의 신성을 무시하여 참 구원의 기초를 마련하지 못하는게 있다고 하였다. 그는 아리우스주의 자들과 양보없는 투쟁으로 인하여 그의 생애에 5번이나 추방을 당하였다. 주로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오 등에 의하여. 373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존경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참고 : 니케아 (Nicaea) 신경 (주후 325년 : 318교부들의 신경)우리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창조자이신 한 분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그리고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아버지로부터 나셨으며, 즉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독생하셨으며 참 하나님으로부터 온 참 하나님이시며, 빛으로부터 온 빛이시며, 태어나셨으나 창조되지는 않았으며, 아버지와 똑같은 본질이시며, 그를 통하여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이 존재케 되었으며, 그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 오셔서 성육신하시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는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시어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장차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을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았다거나, 그의 시대 이전에는 계시지 않았다거나, 또는 그가 無로부터 존재케 되었다거나, 또는 하나님의 아들 그는 다른 실재 혹은 본질을 가지고 계신다거나, 또는 그는 피조물이라거나 가변적이라거나, 변덕스럽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보편적 사도 교회가 저주합니다.2. 니케야시대(313년 - 590년)의 대체적인 신앙적 모습① 그리스도의 그림과 동상숭배 - 회당과 각 가정② 성자숭배(聖者崇拜) - 순교자묘소에 모여 예배,                        묘소에 성전건축 (성베드로성당)③ 유물예배(遺物禮拜)- 의복, 형기구가 고가(高價)에 매매됨.(병낫는다고)④ 성모숭배(聖母崇拜) - 영구처녀설 주장⑤ 천사숭배(天使崇拜)⑥ 예배는 설교보다 의식을 치중. 의식이 기독교의 권위를 더 해주는 것이 아님⑦ 성탄절 - 12월 25일 지키는 것으로 확정          기원은 로마의 12월에 삼대절기가 있는 것과 융합        * Satunalia : 12-24일 지킴        * Sigillia  : 어린이에게 인형선물을 줌        * Barumaria : 동지제제 3-2 장. 수도원 운동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고나서 기독교 안에는 엄청난 변화들이 일어났다. 즉, 초대교회 신자들로부터 시작해 근 300여년 동안 모든 기독교 신자들은 로마 관리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느냐, 아니면 기독교를 배교하고 이방종교를 따르느냐 하는 선택을 해야만 하였다. 그런데 기독교가 로마국교가 되고나서 핍박이 사라졌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이며, 새로운 경륜이라고 경하해마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편에서는 기독교가 변질되고 타락되는 위기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세상을 비판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가 국교가 된 후부터 권력의 보호 아래 세속화 되어가는 모습으로 판단했다. 과거의 교회는 너무 좁은 문에다가 찾는 이가 적었다. 그러나 국교화 된 후의 교회는 너무 넓은 문에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드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감독들은 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경쟁을 하고 있었고, 교회 내에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보다는 부유하고 권력있는 사람들의 모임처가 되었다.교회가 이렇게 변화되어 가는 가운데 뜻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같은 상황 속에서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교회가 세상정치와 야합해야 되는가 ? 교인들도 세상과 마찬가지로 사치와 허영을 용납해야 하는가 ?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사치스런 저택에서 호의호식하는 것과 과거 신앙선배들의 수난의 삶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 이같은 당면한 현실 앞에 차츰 새로운 각성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교회 안에서는 결혼하지 않는 이들이 주님을 보다 자유롭게 섬길 수 있다는(고전 7:8) 바울의 말씀에 근거하여 금욕주의 현상이 나타났다. 또 독신주의에 대한 충동은 주의 임박한 재림에 관한 기대감으로 더 크게 작용하였다.그리고 밖으로부터 영지주의나 스토아학파의 영향도 컸다. 저들은 육체야말로 영혼의 감옥이므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려고 하면 정욕을 다스려야 한다고 믿었다. 이와 같은 내.외부적 영향으로 박해 중에 순교가 미덕이던 것처럼 평화시에는 순교 대신 금욕주의가 크게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영향으로 독신생활은 물론이고 금식과 금욕을 예찬하는 수도원 운동이 새로운 영적 유토피아로 등장하게 된다. 그래서 독신 성직자들, 결혼을 멀리하는 구별된 처녀들, 인가가 멀리 떨어진 깊은 산 속에서 은둔자의 생활을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수도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monk' 즉 고독을 의미하는 ‘모나코스’에서 유래하였다. 처음 수도사들은 인간들을 떠나 고독을 찾았다. 그 후에 혼자 거주하는 수도사로 ‘은자’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도망자’ 혹은 ‘피신한 사람’ 등을 의미한다.1. 안토니 (Anthony)최초의 수도사 또는 은자가 누구였을까 ?  여기에 대해서는 제롬이 쓴 「폴」이라는 사람의 전기와 아타나시우스가 쓴 「안토니」 전기가 있다. 안토니는 250년경에 애굽의 나일강변 작은 촌락에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그의 부모가 일찍 죽으면서 남겨 논 유산을 가지고 평생 살 수가 있었다. 그는 교회에서 복음서 강해를 듣는 중에 “만약 완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마19:21)는 말씀대로 안토니는 자기 재산을 다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그의 여동생을 위하여 약간을 남겨 두었다. 그런데 그 후에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마 6:34) 말씀을 듣고 여동생 몫의 재산도 처분해 버리고 그녀를 교회에다 맡긴 후 사막을 향해 떠났다. 안토니의 초기 생활은 동리를 떠나 수도생활을 하는 노인과 함께 생활하다가 다음에는 무덤에서 생활을 한다. 이 무렵 그는 처분한 재산과 옛날의 쾌락을 즐기는 마음 때문에 악마의 환상에 많이 시달렸다고 한다. 그는 다시  깊은 사막의 버려진 성채에서 생활하며 기도와 명상, 그리고 지혜를 구하는 생활을 한다. 그런데 그에게서 수도생활에 관한 지식과 획심으로 그를 찾는 방문객들이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방문객에게 시달리지 않을려고 여러 번 거처를 옮겼으나 방문객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안토니는 두 차례 대도시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하여 신자들을 격려한다. 그는 결국 356년 106세의 장수를 누리고 자기 매장지를 비밀로 한 채 세상을 떠난다. 이 안토니의 전기에 의하면 이 무렵 사막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많은 수의 남녀였다. 저들은 바구니와 명석을 짜서 빵과 기름을 바꾸어 생활해 나갔다. 이들의 재산은 최소한의 의복과 깔고 잘 거적에 불과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교만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서적의 소유를 배격하였다. 이들은 기억에만 의존하여 성경을 가르쳤다.2. 기둥성자 시므온 (Symeon)고행을 하며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양상은 여러 가지로 다양하였다. 그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들에서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서 일생을 사는 주상성자들이 있었다. 시므온은 수리아 사람이었다. 그가 원래는 목동이었으나 수도사들의 전기를 읽고 감동을 받아 수도사가 될 것을 결심한다. 그는 수도원에서 40일 금식기도를 여러번 시도하다가 건강을 해친다. 그의 극단적인 금욕생활은 단체생활에 지장에 주었기 때문에 수도원에서 추방을 당한다. 시므온은 산 속 깊숙이 가서 쇠줄로 발을 묶고 고행을 계속하였다. 그것으로 만족을 못 얻은 그는 423년부터 안디옥 동쪽 16마일에 있는 들에서 개둥을 세우고 그 위에서 30년간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는 짐승가죽으로 옷을 삼고 쇠줄로 목을 감았다. 제자들이 올려주는 음식으로 연명을 하며 날마다 순교적 각오로 고행을 계속하였다. 그가 기둥가에 울타리를 만들어 그 안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듣고 그를 구경하러 찾아가서 보고 그의 초인적인 금욕생활을 감탄하였다. 시므온이 올라선 기둥의 높이가 처음에는 한 자 남짓 되는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여섯 자 이상의 높은 기둥 위에서 살았다. 이같은 시므온의 고행에 감동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기독교를 전혀 오해하여 동방의 고행 종교와 유사한 것처럼 여긴 변형된 이기적 영웅주의였다.3. 베네딕트 (Benedict)서방교회 안에서 수도원을 개척한 사람은 베네딕트(AD 480-543)이다. 그는 480년경 중부 이태리에 있는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일찌기 그는 로마에 진출하여 공부하는 중에 로마 시민의 타락상을 보고 크게 실망한다. 그는 로마 동쪽에 있는 ‘수비아코’(Subiaco)라는 고산동굴에 들어가 3년간 고생과 명상에 힘썼다. 그러나 단독 수양의 많은 어려운 점을 깨닫고 수도원 건설에 뜻을 두게 된다. 베네딕트는 자기를 따르는 동지들을 모아 아폴로 사원의 옛 터인 ‘몬테 캇시노’(Monte Cassino) 언덕에다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이 외에도 12개의 수도원을 세운다. 그런데 베네딕트의 수도원의 규칙은 이전의 다른 사람들에 비해 특이하였다. 즉 이전에 수도사들은 주로 자기의 개인적 수도와 경건생활에 주력하는 것이 그 주된 목표였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자기 자신을 위해 경건생활을 철저하게 함은 물론이고 그 외에도 가난한 자를 돕고 병든 자를 고치고 이웃들에게 전도하는 일을 힘쓰게 한 것이 그 특징이었다. 베네딕트가 실시한 수도원 규칙은 여러가지로 특이하였다. 즉 수도원의 모든 운영은 원틱적으로 민주적 방법으로 운영하였다. 그리고 수도사들의 생활은 자기 스스로 생활을 해결해 나가도록 자신이 책임진다는 것과 또 수도사들에게 고행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들은 사회봉사, 교육활동, 선교사업 등에도 여력을 쏟도록 했기 때문에 이같은 수도원 제도는 중세 로마 사회의 정신적 요람지로 발전한다. 이 수도원에서 목사, 감독, 선교사, 교황은 물론, 학자 저술가, 성자, 예술가, 추기경 등이 배출된다.제 3-3 장. 어거스틴과 페라기우스1. 페라기우스 논쟁동방교회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냐, 피조물이냐로 논쟁할 때, 서방교회는 죄와 구원문제를 논하였다.(1) 페라기우스 (Pelagius)① 영국의 수도승(修道僧) 명성과 학식이 뛰어난 사람으로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   였음. 도덕적 성결로 인하여 많은 존경을 받았음. A.D 400년경 노령의 나이로   로마에 정착하였다.② 그의 사상 - 인간의 자유의지 존중. 원죄부정③ 이런 학설이 그가 에베소 장로가 되어서는 크게 유포되었다.④ A.D 420년경 사망. 그후 그의 학설은 431년에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러나 그 후   로도 꾸준히 그의 학설은 오늘까지 교회내에서 한 경향을 차지하고 있다.페라기우스 (250-445, Pelagius)는 영국(Britain) 출신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평신도였으나 라틴어, 성경, 교부 등에 관해 교육을 받았고, 희랍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페라기우스는 로마에서 20여년 동안 머물면서 법률을 연구하며 법학도도 인정을 받게 된다. 그는 교황 ‘다마수스 1세’에게 세례를 받고 세상 학문을 그만둔다. 그 후 페라기우스는 삼위일체론을 포함하여 많은 바울서신 주석을 낸다. 그는 인간성의 본질 문제와 자유의지에 대한 새로운 주장을 하게 된다.  그는 로마가 고트(Gots)족에 의해 침략당했을 때 (410년) 위험을 느끼고 그의 법률학 제작인 ‘셀레티우스’를 대동하고 북아프리카로 간다. 페라기우스는 아프리카의 어거스틴을 만나려고 하였으나 만나지 못하고 편지만 남겨놓고 팔레스틴으로 간다. 한편 페라기우스의 제자인 세레티우스는 카르타고에 남아서 교회의 장로가 되려고 하여 그의 의견을 발표할 때에 문제성있는 의견을 진술하였다. 그것은,① 아담은 완전하게 창조되었다.② 아담이 타락한 것은 오직 그에게만 적용된다.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영향을 미   치지 않는다.③ 새로 출생하는 신생아는 아담의 최초의 상태, 즉 무죄와 같은 상태로 출생한다.④ 인류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멸망당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부활   하심으로 이미 영생의 길을 해결해 놓으셨기 때문이다.이런 주장을 펼쳐서 그는 위험한 사상가라고 경원당하자 에베소로 가서 장로가 된다.  한편 예루살렘으로 간 페라기우스는 그곳에서 장로가 되어 제자인 세레티우스와 비슷한 주장을 한다. 페라기우스는 성격이 온순하고 품행이 엄정했으며 지력이 명석한 자였으므로 그를 따르는 자도 많았기 때문에 논쟁으로 시비를 가리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생긴 것이 어거스틴과 페라기우스의 논쟁이다.(2) 어거스틴 (Aurelius Augustinus)서방교회가 동방교회에 비하여 우월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어거스틴의 영향때문이다. 중세 카톨릭교회가 가지는 특색은 대부분 어거스틴으로 부터 비롯된 것이었다.① 354년 알제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기도의 사람인 모니카(Monica)였다. 젊은   시절에는 마니교도 였고, 방탕과 방종에 빠졌다.② 밀라노에서 암부르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고, 그후 386년에   회심을 하게 된다. 387년에 암부르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음.③ 아프리카의 고향에 돌아가서 금식과 기도, 자선사업을 하며 지냄.④ 저서 - 참회록(하나님이 어떻게 죄와 의심속에서 자기를 구해 진리와 은                 혜가운데로 인도하였는지를 소개)          神의 나라 (이교도들에 대한 기독교 변호)- 그의 최대의 저서⑤ 430년 8월 27일 77세의 나이로 소천⑥ 그의 신학 - 신비주의적 경건, 삼위일체교리 확고히 함,           그리스도의 성육신 강조. 택자와 불택자의 구분 예정교리 정립.2. 어거스틴의 출현(1) 어거스틴의 회개어거스틴은 사도 이후 고대교회에서 종교적으로 최고의 절정에 이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서방교회의 탁월한 지도자로서 서방교회가 동방교회보다도 더 크게 발전하는 데 공헌을 한 사람이다. 그는 중세 로마교회의 아버지이고 근대 종교와 신학의 조상이 되었다.① 그의 출생그는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아 힙포(Hippo) 근체에 있는 ‘타가스테’라는 곳에서 354년에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로마제국의 하급 관리로서 전형적인 이교신자였다. 그러나 그의 모친 ‘모니카’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어거스틴을 회개하게 함은 물론이고, 그의 남편을 말년에 기독교 신자로 변화시킨 신앙의 사람이었다. 어거스틴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성격은 열성적있고, 민감하였으며, 고상함을 탐구하는 면이 있었다. 이래서 이것을 알아차린 그의 부모는 그를 최고의 교육을 시키려고 하였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인 대도시 카르타고에 유학을 시킨 것이 그의 나이 17세 때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대도시에서 열심히 공부하면서 또한 도시가 제공하는 각종 쾌락도 추구하였다. 그래서 어머니의 신앙심보다는 도회지풍에 물들어 품행이 단정하여 못하였다. 그 결과 18세에 노예 신분의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 그는 당시 법률가나 혹은 고급관리가 되고자 웅변학을 배웠다. 당시 웅변술을 배우는 중에 고대 로마의 유명한 웅변가인 ‘키케로’(Cicero)를 배우게 되었다. 키케로는 언어 구사에 뛰어난 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또한 철학자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어거스틴은 웅변술은 언변 스타일뿐 아니라 그 속에 진리를 알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② 마니교인 시절어거스틴은 진리탐구를 위한 목적으로 마니교를 찾게 된다. 마니교는 이원론적인 종교였다. 마니교는 빛과 어둠이란 이 두가지 요소로 혼합된 것이 현재의 인간의 상황인데, 따라서 구원이란 이 두 가지 요소를 다시 분리시켜 인간의 영혼이 순수한 빛의 광명의 영역으로 귀환하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혼합되어서 혼란스러운 것도 악한 것인데 그것을 알면서도 다시 혼합시키려는 행위는 더 악한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자라면 양 극단의 혼합을 피해야 한다. 그래서 남녀의 겨혼도 악한 행위이고 그 사이에서 낳은 자식 또한 악의 계승 산물이다.  마니교는 이처럼 철두철미한 금욕주의에 기초했다. 삼봉이라 하여 입을 금하고 손을 봉하고, 가슴을 봉하는 것을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진리를 탐구할 목적으로 마니교에 들어갔으나 자기의 가정생활과 마니교의 교리와 상반된 생활 속에서 갈등을 느끼며 9년간의 고뇌의 생활을 보낸다. 그래도 어거스틴이 마니교를 못 떠나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어거스틴이 가지고 있었던 기독교에 관한 두 가지 문제를 마니교에서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두가지란 첫째, 성경 전체에는 세련되지 못한 문체와 표현으로 가독차 있다고 보았는데 마니교는 논리가 정연하였다. 또 한가지는 악의 근원에 관한 문제였다. 어거스틴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배운 바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신, 하나님밖에 없고 그 분은 선하신 분이다. 그런데 현실 세상은 악이 충만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 악의 기원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  여기에 대해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고 있으나  마니교는 분명하게 선의 기원과 악의 기원이 따로 있다고 설명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진리추구에 마니교는 명확한 해답을 제시해주지 못하였기에 그는 다시 마니교를 떠나 신 플라톤주의 철학으로 자리를 옮긴다.③ 신 플라톤 철학도의 생활어거스틴은 마니교에서 떠나 새로운 사상에 접하기 위해 아프리카를 떠나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자리를 옮긴다. (384년) 그는 여기서 그가 가르칠 수 있는 웅변술 교사로 있다가 새 철학인 신 플라톤 주의에 심취한다. 당시 한창 유행하던 신플라톤주의 철학은 종교적 색채가 강한 철학이었다. 신플라톤주의 철학에서는 모든 존재의 원칙이 하나만 존재한다. 그것은 잔잔한 호수가에 돌맹이 하나가 던져지면 한 가운데서 무수한 동심원을 그려 나가듯이 모든 존재의 근원은 하나인데 계속 퍼져 나온 것들이 오늘의 현상들 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심원에 보다 가까울수록 궁극적 존재에 가까운 실재들이고 보다 우수한 것들이다. 그리고 근원에서 멀리 떨어진 것일수록 열등한 것이며, 악이란 것도 사실은 궁극적 존재에서부터 멀리 벗어난 존재들이다. 도덕적 악이란 것도 궁극적 존재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보다 잡다하고 열등한 것들에 사로 잡혔을 때 생기는 힘이다. 이렇게 볼 때 악이라는 것은 비록 실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물이 아니라 궁극적 존재의 선으로부터 어긋나버린 하나의 방향이다.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궁극적 실재에 접할 수 있는가 ?  여기에 대해 신 플라톤주의에서는 많은 연구와 훈련과 신비적 명상을 통하여 인간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자에게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④ 밀라노에서의 갈등의 생활어거스틴이 밀라노에서 수사학 교수로 생활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의 회개를 위해 평생을 기도해 온 절호의 기회로 여겨 아들을 찾아 온다. 모니카는 아들을 밀라노의 대 설교가 ‘암부로시어스’의 설교를 듣도록 권면한다. 이에 어거스틴은 암부로시어스의 설교를 듣게 되고, 듣는 중에 웅변술 교사로서의 관찰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자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과거 어거스틴이 성경에 관해 이해할 수 없었던 많은 귀절들이 암부로시어스의 풍유적 해석으로 이해가 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그가 성경의 모든 의심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미지근한 신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전 생애를 헌신하여 결국은 웅변술 교수로서의 직업을 버려야만  하였다. 그뿐 아니라 육체의 정욕과 야망도 끊어야만 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갈등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 안토니의 생애」라는 책을 읽고 감동을 받게 된다.⑤ 탕자의 회개어거스틴은 암부로시어스가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라는 설교와 함께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감화력있는 설교로 그의 인생을 부끄럽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어거스틴은 아무 것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도 수도생활을 통해 성경의 진리를 안 사실에 대해 자신이 몹시 부끄움을 깨닫고 정원으로 뛰어 나간다. 이때 옆집 아이들이 담 넘어서 노래부르는 “책을 들고 읽어라, 책을 들고 읽어라”라는 노래를 들었다. 그는 즉시 성경을 펼쳐 들고 찾아 읽었는데 그 부분이 로마서 13:13이었다. 즉“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시기와 쟁투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였다. 어린아이들의 노래 소리를 통해 펼쳐 읽은 성경말씀은 마치 사도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체험과 같은 감동을 어거스틴에게 주었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즉시 기독교 신자가 될 것을 결심했고, 자기 아들과 함께 387년 부활절, 즉 34세 되던 해에 암부로시어스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그는 웅변학 교수를 그만두고 어머니와 아들과 함께 밀라노를  떠나 고향으로 간다.(2) 어거스틴의 사역어거스틴의 사역중 가장 오랫동안 일을 한 것은 ‘힙포’(Hippo)에서의 목회사역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391년에서부터 430년가지 무려 35년동안 한 교회를 봉사하였다.① 힙포의 감독어거스틴은 391년에 힙포의 장로로 있다가 395년에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여기서 그는 신약시대 이후 전체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방교회에서는 가장 영향력있는 저술활동과 행정가와 목회자로 활약한다.② 마니교를 반박하는 초기 저술활동자기 자신의 인도로 마니교에 빠진 친구들을 위해서 마니교의 잘못을 지적해 줘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그는 성경의 권위, 악의 근원, 자유의지 문제등을 취급한다.③ 도나티스트에 대항하는 각종 논문어거스틴이 목회하고 있던 북아프리카가 도나티스트가 발생한 지역이었으므로 어거스틴은 그의 전 생애 동안 이 도나티스트와 대항한 논문들을 쓰게 된다. 이대  그는 성례전의 효과가 의식 집전자의 인격과 상관없이 예식 자체로 효력있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이것이 서방교회의 입장이 된다.④ 어거스틴의 참회록 이는 하나님께 대한 기도문 형식으로 쓰여진 영적 자서전이다. 여기서 그의 심오한 심리적, 지성적 통찰력을 증언해 주고 있다.⑤ 하나님의 도성 (The  City of God) 이 작품은 413년에 시작하여 426년에 완성되었다. 여기서 그는 새로운 역사 철학을 제시하였다.⑥ 삼위일체론 어거스틴 때 와서 완전하고 온전한 신론으로 귀결된다.3. 어거스틴과 페라기우스의 논쟁(1) 페라기우스의 주장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창 1:26)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란 그의 자유의지까지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뜻이다. 아담은 이 자유의지로 죄를 선택하였다. 아담이 타락한 후에도 그에게 자유의지는 계속 있었으며, 그에게는 죄의 경향성만이 남아있을 뿐 원죄는 없다. 아담의 후손들에게도 죄의 경향은 있으나 죄의 유전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아담의 후손들은 그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다.(2) 어거스틴의 주장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을 때는 죄와 상관없는 완전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가 자유의지로 죄를 선택한 후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아담의 후손들은 출생부터 부패된 존재이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만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성취할 수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선택된 사람만이 하나님을 찾는 의욕을 갖게 되고, 하나님을 찾는 능력도 하나님이 주셔야만 가능하다.□ 어거스틴과 페라기우스의 차이점어거스틴펠라기우스죄의 벌로 사망이 옴아담의 죽음은 인류의 例에 불과함원죄는 유전(遺傳)유전을 부인인간의 선택상실자유선택 가능하나님의 절대예정절대적인 예정은 없다유아세례유아는 무죄로 구원과는 상관없다신본신학, 칼빈주의의 기초인본신학, 알미니안 주의의 기초(3) 어거스틴과 페라기우스의 차이점논쟁점어거스틴펠라기우스영혼의 기원유전설창조설인간의 본질인간의 본성은 부도덕하다.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는경향이 있어 부단히 하나님께복종하면 죄를 범하지 않을능력이 있으나 본성은 악하다.인간의 본성은 도덕적이다.인간의 타락정신적, 육체적 죽음은 모두가 아담의 타락으로 얻은 것이며, 전 인류는 그 유전에 의하여 타락된 존재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모든 인간에게는 악의 기질과 버릇이 있을 뿐이다. 정신적인 죽음은 아담이 준 것이로되 인류에게 그것은 대표적인 例일 뿐이다.타락후의 인류모든 인간은 부정한 죄의 성질 을 가진 채 유전되어 나왔으므 로 진정으로 고결함은 불가능 하다.모든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전ꠐ과 같이 무죄한 존재요,자유인으로 태어났으나 후에 죄를 배워 타락하였다.        인간의 의지타락 전의 자유의지는 타락 후ꠐ의지와 전혀 다르다. 인간은 타락후 자유의지는 상실되었고죄의 종이 되었다.        인간의 의지는 늘 자유롭다. 인간은 타락 전이나 후나 언제든지 선악을 자유롭게 선택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죄의 유전죄는 유전이어서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본성 중에 죄를 가지고 태어난다.        아담의 죄는 유전될 수 없다.인간 개개인은 유전된 죄가없으므로 자기가 지은 죄에대해서만 책임이 있을 뿐이다.은혜, 구원에 대하여 인간의 은혜는 신의 진리와 성령의 활동이다. 이 은혜가 인간에게 예정의 움직임이다.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사람에게만 은혜        로 주어진다.        인간은 의지,지혜 등에 의하여 각 개인에게 자연스럽게 부여되어 왔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스스로 은혜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예정에 대하여 하나님의 예정은 개인적이어서ꠐ 영원 또는 절대적이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예정이란 있을 수 없다.이렇게 두 사람의 견해는 완전히 달랐다.  페라기우스는 자기의 주장을 관철할려고 하였으나 어거스틴과의 논쟁 후로는 그의 주장이 계속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431년 에베소대회에서는 페라기우스 주장이 이단으로 판정을 받고 만다.□ 참고 : 반 페라기우스설반 페라기우스설은 서방의 중심 수도원을 건설한 ‘파우스투스’라는 감독이 주장하였다. 그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신의 은혜에 대한 인간은 자기 의사대로 거부할 수도 있고 수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주장도 529년에 같이 거부되었다.□ 참고 : 어거스틴에 관한 평① 긍정적인 면에서 그는 삼위일체를 비롯한 몇 가지 신학적 결론은 과거 교부들의 모호함을 종식시킨 큰 공헌을 하였다.② 그는 중세기 전체를 통하여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자주 인용됨으로 인해서 카톨릭 교회의 위대한 박사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16세기 개혁자들조차도 그의 이상을 뛰어넘지 못하였다.③ 어거스틴의 신학은 헬라의 신 플라톤 철학에 영향을 입은 바가 크다.④ 그는 교회관에 있어서 실수를 하였다. 그것은 보이는 교회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신령한 하늘나라의 소망에 등한시 되었다.제3-4장. 교황제도-이시도리안 교령집하나님 나라의 큰 율법 중 하나는, 가장 잘 섬기는 자가 가장 큰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섬기는 자로 무리 중에 계셨고, 주님을 바르게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갔다.  그러나 그런 모범과 교훈과는 달리 교만과 이기적인 것이 싹트서 교회의 많은 직분자들이 “큰자”로 대접받기를 원하였고, 그리하여 마침내 교황제도가 생겨졌다. 오늘날 로마 카톨릭에서는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교 교회의 머리를 로마 교황으로 알고 그를 그리스도의 대리지로 섬기고 있다. 그러면 이 교황의 호칭은 언제부터 생겨났으며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되었는가 ?(1) 로마 카톨릭의 주장① 마태 16:18에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절에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 --”라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서 분명히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준다고 했고, 또 베드로의 반석 위에다 교회를 세운다고 하였다. 따라서 사도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건설 권한을 부여 받았으므로 사도 베드로가 세운 로마교회가 모든 교회의 근원이라는 것이다.② 행 12:17에 보면 베드로가 옥에서 풀려나와 “떠나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하였는데, 그 다른 곳이 바로 로마라고 한다. 그래서 베드로는 A.D 42년부터 67년까지 로마 교회를 건설하고 제 1대 교황으로 지내다가 네로 황제 박해 때 순교를 당했다고 한다.③ 벧전 5:13에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라는 말씀은, 이 베드로 전서를 기록한 베드로가 바벨론교회에서 문안을 전했는데 이 바벨론 교회가 바로 로마교회를 뜻한다고 한다.(2) 성경에 의한 증명성경에는 베드로가 로마에 간 일이 없다. 사도 행전 12:17에 ‘다른 장소’를 로마로 단정짓는다는 것은 비약된 감이 있다. 또 갈라디아서 2:7-11을 보면 그 당시 ‘게바’는 안디옥에 있었는데, 이때가 A.D 50-55년 어간으로 카톨릭이 주장하는 A.D 42-67년에 로마에 있었다는 주장과는 다르다. 교황권의 기초자를 우리가 살펴보자. 먼저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이 후에 교회 지도자들은 각인각색으로 그들의 주장이 달랐다. 그들 중에는 감독직의 우위를 주장하는 익나티우스같은 사람도 있었고, 로마 교회의 우월성을 주장한 키프리안같은 사람도 있었다. 특히 키프리안(AD 195-258)은 감독이 다스리는 교회는 다 같지만 그중에도 로마의 교회만은 베드로에 의해 세워졌으므로 로마 교회는 모든 교회의 어머니 교회요 뿌리라고 하였다. 이 이후부터 로마교회의 감독들은 키프리안의 주장을 뒷받침하여 로마교회의 우위성을 주장하려 하였으나 다른 교회들의 반발로 수용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태가 묘하게 발전되었는데, 그것은 콘스탄틴 황제가 AD 330년에 로마제국의 수도를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그리이스의 콘스탄티노플로 옮겼다. 이렇게 되자 정치와 경제, 군사적으로 새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중심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반면 황제가 수백년 정착해 있던 로마는 황제가 없으므로 해서 정치적으로는 약화되었으나 그대신 종교적 중심지로 더 건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AD 325년에 니케아 회의 때에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교회는 다른 지역의 감독들보다는 좀 더 놓은 ‘대감독’이라는 칭호가 주어졌다.1. 레오1세 (440-461년재위)-자칭 45대설교자, 문학가에다 정치적인 수완이 뛰어난 로마의 주교였음. 모든 사도중에 신앙과 행정면에서 베드로의 우위성(優位性)을 주장하고, 그것은 로마주교가 계승한다고 주장. 그리하여 황제인 발렌티니안 3세로 부터 모든 교회는 로마교회 주교께 복종하는 것을 명하는 칙령(勅令)을 얻어내었다. 이에 많은 교회가 반발을 하였다. 앞서 말한대로 330년 로마 황제궁이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천도된 이후 로마시에는 정치적 공백 및 약화가 생겼다. 이 무렵 서 로마는 계속 외적들의 침략에 시달리게 되었다.  410년에 고트(Gots)족의 침락이 있었는데, 그 후에도 훈(Hun)족과 반달(Vandal)족의 침입이 있었다. (455년)  이같은 민족들의 침략이 있을 때 마다 동로마의 황제들은 군사적으로 서 로마제국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그럴때 마다 서로마제국은 실패하였다. 이무렵 로마의 감독 ‘레오’는 북아프리카의 ‘아틸라’의 반항을 무마시키고, 또 ‘가이스릭’의 불만도 외교적 설득으로 무마시켰다. 이렇게 되자 동 로마의 황제들 입장에서 보면 레오 감독이야 말로 로마를 건재하게 한 구국공신이었다. 이리하여 레오는 정치적으로 황제들의 신임을 얻었고,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얻는데다 교회적으로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 레오가 로마교회는 수사도 베드로가 세운 으뜸 교회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주장하였다. 이때 대부분의 교회들은 레오의 주장을 따르지 않았으나 황제들은 레오의 공로로 보아 그같은 주장쯤은 능히 할 수 있는 것으로 추인하였다. 이것이 로마교회가 베드로 수사도를 계승한 교회라는 주장을 하게 된 공식적인 시발이다.2. 그레고리1세 (일명, 大고레고리 Gregory I 590-604)① A.D 540년 로마의 원로원 의원의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 지방장관이 되나   수도원 생활에 매력을 느껴서 재산을 수도원에 기부하고 수도자가 됨.② 590년에 교황으로 선출. 거절하고 변장하여 도망치다가 잡혀서 교황됨.③ 업적은 교회의 중요한 지위에 청렴한 수도자 채용          교직매매(Simony)를 금지.  교직자의 결혼금지,          영국의 전도를 위해 어거스틴 파송.          서구를 통일하여 교황권을 장악. 실제 권한은 황제보다 우위.롬바르트족의 이태리 침입시 이태리를 방어하는데 주도적인 역활을 하였다.(황제는 콘스탄티노플 거주) 이후 로마 주교는 영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에같이 큰 영향을 갖게 되었다.(1) 그레고리의 배경레오 1세가 로마교회가 수사도의 계승교회라는 주장을 한 다음, 그레고리 1세는 로마교회 감독은 곧 교황이며,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이론을 수립한다. 그래서 그레고리는 마지막 교부요, 최초의 교황이 된다. 그레고리는 540년경 로마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원로원의 의전관이었고, 모친은 돈독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다. 전 가족이 성자 호칭을 받을 정도로 좋은 신앙의 집안이었다. 그레고리는 573년에 로마의 지사 물망에 오를 정도로 출세의 길이 보였으나 그는 정치적 출세보다 종교적 헌신을 택한다. 그리하여 574년에 수도사가 되고 나중에 586년에 로마로 돌아와 성안드레 수도원 원장이 되었다가 교황의 비서가 된다. 교황 펠라기오 2세가 죽자 그 뒤를 이어 교황이 되니 590년 9월 이었다. 그로부터 604년까지 눈부신 활동을 한다.(2) 그레고리의 활동그레고리는 극심한 고행을 즐겼다. 그의 성격은 야심이 많았고, 의협심이 대단했다. 그는 하나님 외에는 어떤 인간에게도 겸손하지 않았다. 그의 신앙관은 첫째, 로마교회 감독은 베드로의 후계자이고, 또한 베드로의 후계자는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사제는 반드시 독신으로 지내야 한다고 믿었는데, 이것이 1139년에 사제의 독신법으로 제정된다.(3) 그레고리의 공적① 교회의 우선순위 중에서 로마교회를 제1위로 올려 놓았다.② 로마교회 감독은 모든 감독 중 으뜸이 되는 대사교로서   팰륨(Pallium:양털로 짠 흰 떡)을 띄어야 한다.③ 정치 지도력을 확장했다.   그레고리는 롬 바르트족과 협상하여 이탈리아는 물론 남부 프랑스와 북부 아프   리카까지 교회령을 넓혔다. 또 영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영국을 그의 영향권   안으로 끌어 들였다.④ 저작으로 「욥기 해설」 「목회자의 임무」 「이탈리아 교부들의 생애와 기적」 및 설교   집이 있다.⑤ 성례전 신학을 수립하였다.   인간은 회개하고 세례받을 때 구원받고, 세례 후에 지은 죄는 회개와 함께 보상을   치뤄야 한다. 세례 후에 지은 죄를 없애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보상과 함께 성찬   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로써 성찬은 주님의 희생의 반복이라는 화체설 수립의   기초를 닦았다.⑥ 예배모범과 교회 음악을 개혁하는 데 공헌하였다.   이전까지는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예배의식이 행해졌었다. 그레고리는 예배의식   을 일반화시켰고, 성가와 시편송을 만들어 교회음악을 증진시켰다. 그레고리가   만든 성가는 지금까지도 서방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다.⑦가장 큰 공헌은 그 자신이 교황 (Universal Father)이라고 하였다.그후, 신성로마제국의 샤를레망 황제의 대관식을 교황이 한 후로는 세상의 군주(君主)도 교황이 마음대로 세우거나 폐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여 하인리히 4세와 「카놋사의 굴욕」사건을 만들면서 까지 교황권이 올라감.일단 부패와 타락의 길로 접어들면 빠른 속도로 기울게 된다.  이후 교황은 점점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우리는 교황들이 어떻게 그 권세를 주장하고 행사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들은 자신이 관할하는 양떼들에 대한 모범이 아니라 주인으로 행사하였으며 세속적인 임금과 다름없는 권세를 누렸다. 교황들의 무분별한 욕심으로 인하여 교회는 어두운 범죄의 소굴이 되었다. 어떤 교황은 위험이 닥치면 재빨리 그 자리를 타인에게 넘겨 주기도 했으나 어떤 교황은 자리를 빼앗기기도 하였고 또 어떤 교황은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요한 12세( 955-963)같은 교황은 술을 너무 마셔 건강을 망쳤으며, 이방신들을 부르고 주사위를 던지면서 모든 귀신들을 불렀다고 전해 내려온다.  교황들이 이러할 때에 그 밑의 성직자들의 상태는 어떠하겠는가 ?오늘날의 교황권 제도는 이렇게 하여 발전이 되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 자신은 과연 오늘날과 같은 교황권 사용의 기초 인물이 되기를 바랐을까 ? 아무리 생각해도 사도 베드로는 오늘날 카톨릭의 교황과 같은 부패와 변질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후대인들은 베드로와 아무 상관없는 역사를 꾸며 놓았고, 베드로가 바라지도 않는 독선적 제도를 만들어 놓았다. 분명 교황제도는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다. 그런데도 교회가 변천되어 오는 역사 발전의 과정 속에서 인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기의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베드로도 이용하고 성경도 이용하고, 역사가들의 말도 이용하여 오늘의 결과를 가져 온 것이다. 오늘 큰 산처럼 버티고 서 있는 저 엄청난 제도적 세력 앞에서 그 누가 올바른 증언을 할 것인가 ? 역사의 흐름은 항상 진리의 편에서 웅변적으로 증언하고 있다.제3-5장. 동서교회분리(東西敎會分離)1. 일반적 원인① 정치적으로 800년에 교황 레오3세가 샤를레망에게 왕관을 수여함으로 로마교회는   동(東)로마제국에 의지하지 않고 프랑크 왕국에 의지함으로 분리의 싹이 틈.② 국민성이 달랐다. : 서방 - 게르만족 침입으로 혈통이 혼합된 라틴인                      동방 -  헬라인③ 교리상의 차이 (성령론 관계)   동방 : 성령은 성부에게서 유출   서방 :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유출④ 예배의식에 사용언어가 다름   동방 : 헬라어   서방 : 라틴어2. 직접적 원인①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익나티우스를 동로마 황제가 파면하면서.② 로마의 교황은 익나티우스의 대주교를 그대로 인정.③ 이에 동방은 콘스탄틴주교 포티우스 중심으로 로마 교황을 정죄하고 부인(867년)   안디옥,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주교들이 합세함.④ 그후 계속 감정이 악화되어 오던중 1054년 콘스탄틴의 대주교 케라루리어스   (Cerularius)가 서방계통 성전을 폐쇄, 수도자 추방, 교황의 오류를 정죄하니,   교황이 그를 파문함⑤ 1054년 7월 16일 동, 서 교회로 완전분리⑥ 15세기 터어키에게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되자, 성 소피아 대주교가 러시아로 피난.   거기서 애굽,시리아 등 14개국 교회연합체 만듬. 러시아 정교회로 불림.오늘날 로마 카톨릭교회와 희랍정교회로 분리된 것은 두 개의 로마제국이 분리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제 동서교회의 분리과정을 살펴보자.①  정치적으로 멀리 395년에 동서 로마제국이 분리되어 힘을 잃다가 드디어 476년에    서 로마제국의 멸망으로 동서간의 관련성이 희박하게 되었다.②  800년에 교황이 프랑코 왕에게 왕관을 수여함으로 교황청과 동 로마제국과는   정치적으로 무관함을 선언하는 계기가 되었다.③ 제국간의 전쟁으로 인종들의 이동이 심해 인간성의 차이들에서 오는 정치적, 문화   적 차이가 한 요인이 되었다. 즉 헬라어를 사용하는 동방교회는 철학적이어서   계속하여 많은 논쟁이 쉴사이 없이 벌어졌다. 그에 반해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방   교회는 실제적이어서 실제 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니케아신조에 ‘성   령이 아들로부터 나왔다’는 산출적 로고스 조항 때문에 동서교회가 계속 불만을   갖고 있었다.④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와의 교권 쟁탈싸움 때문   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대감독 익나티우스가 동로마황제 미가엘 3세의 외숙의 불륜함을 들어 교회 성찬식 참여를 금지시키는 일이 있었다. 이에 황제가 진노하여 익나티우스를 반역자로 몰아 투옥시키고 ‘포티우스’라는 호위대장을 대감독으로 앉혔다. 이러자 국민들이 반대를 하자.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지방회의를 열었는데,  로마 교황 니콜라1세는 익나티우스는 면직하고 포티우스를 인정하였다. 그러자 익나티우스는 자기의 억울함을 콘스탄티노플에서의 회의가 아니라 서쪽 로마대회에서 재실할 것을 로마 교황에게 신청한다. 이에 교황 니콜라 1세는 다시 로마에서 지방대회를 열어 익나티우가 옳고 그만이 대감독이며, 포티우스가 감독으로 있는 상태에서 그를 파면하도록 가결했다.  만일 불응시는 출교하기로 결정했다. 포티우스는 다시 콘스탄티노플의 지방대회를 소집하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은 대등한 교회임으로 로마교회의 결의를 수용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포티우스는 구 번에 걸쳐 대감독이 된다.(850-867, 878-886) 그는 재임 중 동방교회가 서방교회와의 독립을 강력히 추진한다. 그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의 대감독들과 함께 로마 교황을 비난하였다. 그리고 교황의 비리와 신학적 잘못들을 지적하여 교황의 면직과 출교를 선언하였다. 이리하여 동서방교회의 반목은 여러 해를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11세기에 와서 다시 투쟁이 시작되었다. 즉, 콘스탄티노플의 대 감독장인 미카엘 세루라리우스(1043-1058)가 콘스탄티노플 안에 있는 교회들 중에서 서 로마식을 따르는 라틴풍의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폐쇄하고 수도사들을 축출하였다. 여기에 불가리아 대감독들도 호응하여 이탈리아 교회들의 오류를 지적하고 라틴교회의 부정을 폭로하였다. 로마교회 교황 레오 9세는 이를 반박하였고 ‘훔벌트’라는 사람으로 사태수습 사절단을 보내지만 이 중재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이리하여 ‘훔벌트’는1054년 7월 16일 동방교회의 대표적 교회인 소피아 교회의 상제단 위에 교황의 이름으로 파문을 던지고 만다. 이에 격분한 세루라리우스 역시 로마 교황에게 파문장을 보냄으로 응수하였다. 이렇게 하여 동서교회는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오늘까지 분열의 상태에서 서로 제 갈길을 가고 있다. 그후 1274년 리용에서 1439년 플로렌스에서 동서교회가 다시 합치려 했으나 효과를 얻지 못하였고,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에게 함락된 이후부터는 양 교회는 아무 노력도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하여 동방의 희랍정교회와 서 로마 카톨릭교회는 결국 서로가 자기 권위를 세우고 상대방을 지배하려는 인간 욕구의 결과를 생겨진 유산물이 되고 말았다. 신약교회 성도들은 서로 상대방을 섬기고 봉사하려고 하였다. 지도자들인 베드로나 요한이나 바울에게서는 전혀 이같은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을 섬기기보다는 남을 지배하려는 욕구가 온갖 종교적 술어로 가리워진 채 오늘까지 그 모습이 진행되고 있다. 오늘날의 교회에도 소위 교회 정치가들의 이같은 모습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는 것을 볼 줄 알아야 된다.제 3-6 장. 이슬람교(모하멛교)마호메트교 (자기네들은 마호메트교라는 호칭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 그들은 오히려 이슬람교라는 것을 좋아한다.)는 종교가 시작되기 시작한 이래 100여년만에 과거 로마제국의 전 영토는 말할 것도 없고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그리고 프랑스 일부까지 세력을 펼쳤다. 로마제국이 기독교가 국교였는 데도 마호메트교가 이렇게 급속히 번져갈 수 있었다는 사실은 기독교의 국교가 어떤 상태였는가를 집작하게 해 준다. 그뿐만 아니라 마호메트교의 세계 팽창화는 전 세계 종교 중에서 단연 1위를 차재하고 있다. 기독교의 분포가 유럽과 남북 아메리카에 집중되어 있다고 하면, 마호메트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많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석유 경제를 앞 세워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이슬람이란 무엇인가 ?이슬람이란 아랍어로 ‘복종, 순종, 귀의’등의 뜻을 의미한다. 따라서 저들은 자기들의 신인 알라에게 절대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이슬람이란 말은 SILM(‘시름’이라고 발음)과 ISLAMA라는 어원에서 왔다. 이 말의 의미는 항복한다는 뜻으로 ‘자기의 주장을 알라에게 맡긴다’ 또는 ‘자신을 신의 의사에 맡긴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들을 이슬람교로 부르고, 모하메트교라고 불리우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왜냐면 이슬람교는 알라신을 신봉하는 종교이지, 예언자 모하메트를 신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슬람교도가 되는 절차는 간단하다. 저들은 2명 이상의 기성 이슬람 신자 앞에서 아랍어로 된 ‘가리마’라는 일종의 선서만 하면 이슬람 신자가 된다.(1) 기원모하메드(Mohammed)가 개교한 종교로 처음에는 아랍인의 인민종교의 혁신에 있었으나 나중에 세계를 정복하는 종교수립을 계획함. 이를 위해 검을 사용함.(2) 모하메드 (Mohammed)① 마호멧(Mahomet) 또는 무하마드(Muhamad)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모하메드는   A.D 570년 아리비아의 메카(Mecca)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병약 간질병으로 고생.② 삼촌(아부탈립)을 따라 시리아로 여행을 가서 유대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만나서    많은 인상을 받았다. 25세에 돈 많은 과부 카디야 (Kadija)의 집에 일꾼으로    들어가 14세 연상인 카디야와 결혼을 하게 된다.    카디야와 사이에서 2남 4녀를 낳으나 모두 일찍 죽고 딸 파티마만 남는다. 사위    알리는 시아파 교주가 된다.  619년에 카디야가 죽자 9살된 ‘아예사’등 12명의    아내를 거느린다.③ 하나님의 유일성을 깊이 생각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사자(使者)라는 생각하고   백성들에게 우상을 버리고 ꡔ알라ꡕ라는 한 분이신 하나님을 예배해야 된다고 경고   하였다.  자기의 새로운 종교를 “순종” 또는 “헌신”이라는 의미를 가진 ꡔ이슬람ꡕ   이라고 불렀다.그는 40세에 ‘히라’산에서 천사 가브리엘을 만나 환상으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예언자로 자처하며 3년동안 포교활동을 하여 40여명의 개종자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의 포교는 강한 반대와 핍박을 받게 되어 그는 아라비아의 메카에서 메디나로 피신을 하게 된다. (622년 월 15일) 이 날이 이슬람의 원년으로 ‘히즈라’라고 한다. (영어로는 Hegira) 메디나에서 624년 열광적인 305명의 추종자를 얻게 된다. 그는 예언자로 환영을 받게 되고 추종자들을 군대로 조직하여 아랍의 이교도들을 쳐부순다. 이때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자와 가족들에게 별을 만들어 우대한다. 630년에 600여명의 무장된 부하 신자가 유대교와 기독교 정벌을 내걸고 메카로 다시 돌아온다. 메카로 돌아온 마호메트는 300여종류릐 온갖 우상들을 제거하는 전쟁을 벌인다. 여기서 승리한 그는 메카를 자기의 포교의 본거지로 삼는다. 그는 계속하여 중앙 및 서부 아랍권의 전 지역을 무력을 갖고 진출하더니 그의 말년에는 시리아와 이라크에 이르는 북동방까지 군사적 공격으로 확산시킨다. 그리하여 632년 그가 죽은 해에 모든 아랍 제국들로 하여금 그를 예언자로 추대하도록 한다.④ 632년 63세의 일기로 아들을 남기지 못한채 파티마(Fatima)라는 외동딸을   남기고 죽었다. 메디나에 묻힘.(3) 교리 (敎理)① 일신교(一神敎)로서 참 신인 “알라”외에 일체의 우상을 배격함② “알라”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모세와 예수를 선지자로 보냈고, 자기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주장. (예수님의 동정녀탄생, 부활, 승천부인)    20만명의 예언자를 믿음. 그중 대표적인 예언자 6명이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마호메트라고 한다.③ 모든 일은 절대적 운명으로 예정된 것임. 선한 사람은 상 받고, 악한 사람은 벌   받음.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은 부정.④ 이슬람교를 위하여 싸운자는 이기든지 지든지 극락간다.⑤ 하루에 다섯차례 메카를 향하여 기도⑥ 누구든지 일생에 한 번은 메카로 순례할 것(4) 도덕(道德)① 구제에 힘쓸 것② 금식, 돼지고기를 금함(금식: 라마단 월, 이슬람 월력 9월은 성월이다. 이 한 달 동안은 단식해야 한다. 그것은 동틀 때에 시작되어 해질 때에 끝이 난다. 낮에는 먹고 마시고 흡연하는 것이 금지된다. 저들은 이렇게 금식함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공급하며 베풀 수 있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또 결단력과 의지와 인내심을 길러서 유혹의 희생물이 되지 않게 해 준다고 한다.③ 일부 다처제 허용남자가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밀회하거나 또는 이혼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내를 더 맞아들이는 것이 나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구약의 족장들의 경우를 예를 들어서 이 교리의 합리성을 주장한다. 코란 4:3에서 “만약 너희가 전쟁 고아들을 공평하게 돌볼 수 없다면 너희들의 선택에 따라 4명까지의 여인을 아내로 삼아 그들을 돌보게 할지어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여러 아내에게 공평하게 대할 능력이 없다면 오직 한 명의 아내만을 둘 것이다.” 저들은 아내가 불임여성일 경우, 아내가 성병이 있는 경우, 아내가 남편의 성적 욕구를 해결할 수 없을 때 가장 타당한 해결책은 이 제도밖에 없다고 주장한다.④ 노예 허락의복과 옷차림 : 인간이 옷을 입는 이유는 신체의 특수부분을 감추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여자들의 경우 돌출부분이 드러나는 옷은 모두 금지된다.(5) 경전(經典)코란. 코란은 114장으로 모하메드의 언행록(言行錄)이며, 23년간 하늘에서 자기에게  들려준 계시들로 이루어졌다고 주장.  종교, 정치, 만사의 원리를 정하는 무상(無上)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코란은 모하멛의 사후, 20년이 지나, 제자인 아부베이커(Abubeker)와 서기 자이드(Zaid)가 집성하였다.코란이라는 그들의 경전 21:107에는, 신약성경에서 보혜사가 오신다고 했는데 그 보혜사가 곧 마호메트라는 것이다. 코란이란 말은 reading(독서)라는 뜻이다. 전체 114장 6,225절로 되어있다. 코란은 마호메트가 히라 산 위에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계시받은 내용들을 한 데 묶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마호메트 자신은 글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죽은 후 편집이 되었다.(6) 포교 (布敎)632년 모하멛을 계승한 지도자들을 칼리프(Caliphs)라고 부르는데, 이들이 모슬렘 제국을 창설하였다. 이 제국은 인도에서 대서양까지,그 판도는 로마제국보다 넓었다.  칼리프 오마르(Omar)는 637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예루살렘의 성전 자리에 지금도 있는 오마르 사원을 세웠다. 그리고 코란 외에 다른 책들은 필요없다고 하여 유명한 도서관의 책과 초기 성경의 많은 사본등 자료들을 불 태웠다. 이들은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주위 나라를 정복하고 이슬람을 전하였다.(7) 모하멛교의 분열① 원인  - 교리투쟁과 세력다툼② 분파 - Sunnites - 온건파, 정통파 95 % (수니파)          Shites   - 강경파          5 % (시아파)          sufiism  - 신비적종파, 극소수1-3대 칼리프까는 다 비 마호메트 혈통이었다. 그래서 4대 칼리프는 마호멛의 조카요 사위인 알리로 세웠다. 그러나 알리는 수니파와의 전쟁에서 죽는다. 수니파는 이슬람의 최대 종파이다. 수니라는 뜻은 ‘많은 사람이 찾는 길’이라는 뜻이다. 주로 아랍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시아파는 4대 칼리프인 알리를 교주로 한다. 알리가 어려서 마호메트가 죽자 ‘아부베커’가 1대 칼리프가 되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어서 정통성이 결여되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알리가 있는 시아파와 수니파와의 전쟁이 일어나 알리는 전사를 한다. 그후 알리의 아들인 후세인이 아버지를 따라 수니파와 전쟁을 벌이다 역시 전사를 한다. 결과 시아파의 수니파에 대한 분노와 적대감이 오늘까지 이르고 있다. 시아파의 현재의 신도수는 약 4천만명으로 주로 이란에 있다. 이란의 국교이다.이슬람에 대한 비판① 코란에는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적이 내용이 없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   르지도 않을 뿐더러 모든 것을 정복하도록 하는 군사적 종교이다.② 성경을 부정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것도 부정한다.③ 그리스도의 사역을 부정한다.④ 구속의 개념이 없고 구원에 관한 설명이 없다.⑤ 천국을 말하나 모조리 쾌락적인 곳이다.⑥ 기도를 하긴 하나 가슴에서 우러난 기도가 아닌, 제도적 관습적인 기도이다.⑦ 죄가 무엇인가, 그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⑧ 일부 다처주의의 교리는 음란한 종교성을 말한다.⑨ 기독교, 유대교를 원수 종교로 간주하여 강한 분노를 유발시킨다.⑩ 기독교의 교리를 모방하여 자기들 멋대로 조정해서 재사용한다.한국에도 1982년 9월에 이슬람대학이 완공되었다.이슬람 교도를 개종시킨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슬람권의 선교사 중 하나인 Samuel M.Zwemer는 그가 얼마나 힘들었던지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나 얻은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눅 5:5)라는 말씀으로 그의 선교보고를 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같은 세력을 존재케 하셨을까 ? 우리가 깊이 알아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이제가지 교회사를 공부해 오면서 깨달을 수 있듯이 신약교회 때 사도들은 그토록 많은 핍박과 환란 속에서도 희생을 무릅쓰고 복음을 지키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생명을 바쳤다. 그러나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어떠했는가 ?  교회는 정치와 야합을 해서 교회의 제 기능을 감당하지 못하고 권력과 안일에 빠져 부패와 타락을 거듭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교회의 부패와 변질을 그냥 묵과해버리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책임져야 할 자들이 책임을 유기할 때 저들을 깨우치기 위한 방법으로 큰 채찍의 심판을 사용하신다. 마호메트, 그는 중세교회가 타락할 때 보여주신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심판의 도구였다.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1 교회사교재 : 「내 주의 나라와」 P제 4 장. 중세교회(中世敎會)제4-1장. 기독교의 유럽전파1. 개관(槪觀)기독교가 언제 남부 영국(Southern Britain)에 처음으로 전파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군인들이 A.D 60-410년 어간에 영국에 주둔하고 있은 그 때에 전도 받은 것 같다.2. 아일랜드, 스코들랜드, 웨일즈의 기독교 전파(1) 아일랜드아일랜드의 전도는 아일랜드의 사도로 불리우는 패드릭(Patrick:396-403)으로 시작된다. 그는 스코틀랜드 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30세 부터 아일랜드 사람에게 복음 을 전하였다.  일반 민중과 귀족들의 신망이 두터웠고, 각처에 수도원을 섭립하였다.(2) 스코틀랜드콜롬바(Columba : 521-597) 등이 전도하였다.(3) 웨일즈웨일즈의 기독교 전파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601년에 사망한 데이비드(David)에 의한 선교라고 본다.3. 외래민족 - 앵글, 주트, 색슨족의 전도외래 민족인 앵글족, 주트족, 색슨족 등이 5세기 경에 브리튼을 침입하여 그 대부분을 점령하였을 때 브리튼 사람들은 서부 웨일즈로 피신하였으나 이들은 결코 정복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앵글랜드 (Angle-land)는 다른 경로를 통하여 되어졌다. 베네딕트파 수도승인 어거스틴(성 어거스틴이 아님)과 수행원 40여명이 597년 교황 그레고리1세에 의해 파송이 되었다. 이들 40명은 에델버트(Ethelbert)가 왕으로 있던 캔트(Kent)에 처음 발을 디뎠다. 이들은 큰 환영을 받았고, 켄트베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중심지가 되었고, 교황 그레고리는 어거스틴을 영국의 감독으로 임명하였다.1. 프랑스 전도(1) 전도자들① 이레네우스가 처음으로 전도하였다.② 말틴(Martin : 316-400)   그는 군인임으로 군대식으로 전국을 돌며 우상의 전각을 헐고   강제로 믿게 하였다.(2) 공헌한 왕 (프랑크왕)① 클로비스(Clovis) - 496년에 예수를 믿고 기독교를 장려하였다.② 찰스 마르텔 (Charles Martel:715-741)   클로비스의 서자(庶子)로서, 회교도들의 유럽 진격을 피레네 산맥에서 막아내고   선교사들을 지원하였다.  그의 치하에서 대부분의 서부독일까지 기독교화가   되었다.2. 화란의 전도화란의 사도로 불리우는 윌리부로드(Willibrord)로 말미암았다. 658년 영국 노덤브리아에서 태어나서, 20세에 아일랜드에 가서 대학입학하여 교육을 받고, 31세에 선교사들을 대동하고 유럽으로 건너갔다. 주로 네델란드, 덴마아크 지역에서 선교를 하였다.3. 독일의 전도「독일의 사도」로 불리우는 보니페이스(Boniface : 680-754) 역시 영국에서 태어났다.  716년에 윌리브로드와 합류하여 선교하다가 후에 독일 지역으로 가서 전도하였다.  20년에 걸쳐 10만명에게 세례를 주고 75세에 순교하였다.제4-2장. 샤를레망 대제와 신성 로마제국1. 샤를레망 대제(大帝)(1) 왕위 계승과 대관식① 모하벧 군을 격파한 찰스 마르텔의 손자로 부왕(父王)인 피핀(Pipin)에게 왕위   (王位)를 물려받음② 그의 영토는 오늘의 프랑스, 벨기에, 네델란드,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태리와   독일의 절반이상, 그리고  스페인 동부까지 미쳤다.② 기독교의 확장에 헌신적인 열심을 보여, 그의 치하에서 게르만 족이 개종(改宗)을   하였다.③ 이에 교황 레오3세가 800년 성탄절에 성 베드로 성당에서 샤를레망에게 금관을 씌   우며 그를 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뒤를 이은 후계자로 로마황제의 칭호를 수여   했다.  또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동로마 황제 레오5세도 그를 인정하였다.(2) 그의 이상① 건국정신 -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을 애독하여 건국정신이 됨② 즉위 즉시 궁정학교를 세워 고전과 성경연구의 르네상스를 일으킴.③ 프랑크푸르트 회의(A.D 794년)에서 화상(畵像)숭배 승인을 거부함□ 참고 : 어거스틴의 「神의 都城」어거스틴의 최대의 저작, 알라릭(Alaric)에 의해 로마가 함락된 후의 음울한 시기인 412년에 시작되어 426년경 완료된 책이다. 이는 어거스틴의 역사철학인 동시에 로마를 성장시킨 옛 신들을 무시한 것이 로마의 멸망의 원인이었다고 주장하는 이교도들에 대하여 기독교를 변호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첫번째 반역이후 두 가지 사랑을 기초로 한 두 왕국이 형성되었는데,① 자기사랑, 내지는 하나님에 대한 모욕에 의한 지상적(地上的) 사랑과② 하나님에 대한 사랑 내지는 자기 모욕에 의한 하늘의 사랑이다.이 두 사랑의 대표자는 가인과 아벨이다. 이 세상에서 그 자신이 나그네와 순례자임을 고백하는 자는 누구나 다 神의 都城에 속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영혼을 가진 땅의 도성 중 가장 뛰어난 대표적 존재는 異敎都市인 바벨론과 로마이다. 그러나 이 땅의 도시들도 비교적 선할 수는 있다. 평화와 정치적 질서가 이곳에서도 이루어진다. 비록 自己愛를 으뜸으로 하면서도 무질서를 억압하고 각자의 소유를 안전하게 지킨다.그러나 이 땅의 도성은 신의 도성이 커짐에 따라 사라져야 한다. 신의 도성을 이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구원에로 선택하신 선민(選民)이다. 비록 교회 안에 있다고 하여 다 선민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보이는 선민은 교회 안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지금의 이 교회도 그리스도의 왕국이며 신의 도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교회가 점차로 세상을 통치하게 되어야 한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 어거스틴의 생각은 교회와 기독교 국가와 긴밀한 연관을 가져야 했다. 따라서 국가는 예배를 장려해야 하며, 교회와 이상(理想)국가 사이에 서로 의존하고, 책임지는 관계가 존재해야 한다.우리는 여기서 신정국(神政國)의 중세 이상이 있음을 볼 수 있게 된다.2. 신성(神聖)로마제국(1) 대제국의 분활① 샤를레망이 죽은 후, 그의 아들 루이(814-840)가 즉위를 하였으나 그는   능력이 모자란 사람이었다.② 루이가 죽은 후, 나라는 그의 세 아들에 의하여 분리되었다.   이것이 독일과 프랑스를 갈라놓은 분깃점이 된다.③ 그후, 나라는 혼란에 빠져든다. 삼형제는 연락도 끓어지고, 봉건제도는   급격히 발달된다.(2) 신성로마제국건설① 옷토(Otto)1세가 동프랑크(독일)의 3대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제후들을 자기에게 복속시키고,샤를레망 대제의 유업을 계승하여 기독교의   사상을 나타내었다.② 그후 이태리에게 관심을 가져서 이태리를 침략하였다. 962년 2월 2일 교황 요한   12세는 그에게 신성로마제국 황제라는 황제의 관을 씌웠다.  이 나라는 1806년   나풀레옹에게 멸망하기까지 계속되었다.③ 이때부터 독일 국왕은 이태리 왕을 겸하는 것이 되었다.제4-3장. 교황과 황제(1)1. 개관(槪觀)교황은 교회의 머리로서 영적 권세를 대표하고, 황제는 제국의 머리로서 세상의 권세를 대표한다. 이 두 권세의 상호관계(相互關係)에 관하여서 당시의 상황은 그러질 못 하였다. 교황은 교회의 머리로서 권세를 대표하고, 황제는 제국의 머리로서 세상의 권세를 대표한다. 이 두 가지 권세의 상호 관계에 있어서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그중 한가지는 ① 하나님께서 황제와 교황에게 각각 상호 독립적인 사명을 주셨다는 것이다. 즉 교황은 인간의 영혼을 다스리고 황제는 인간의 육신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지배할 수 없으며 오직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② 또 다른 하나의 이론은 황제가 세속적인 일에 있어서는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한다. ③ 또 교황 측에서 주장하는 세 번째 이론은 두 세력의 관계는 하나님께서 세속적인 일들까지도 영적인 권위에 복종하도록 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황과 그 지지자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두 개의 빛, 곧 해와 달을 두셨듯이 땅위에서도 두 개의 권세, 즉 영적인 권세와 세속적인 권세를 두셨다고 한다. 그러나 달이 태양보다 열등하며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 반사하는 것과 같이 황제는 교황보다 열등하고 교황으로부터 모든 권세를 부여받는다고 한다.2. 당시의 교회의 모습① 독일(프랑크) 황제는 로마가 자기 나라 안이라고 하여 로마교회의내정(內政)을 간섭하고, 교황 및 감독의 임,면(任免)을 좌우할려 하였다.② 독일 국내는 대 제후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교회는 영주(領主)들의   수중(手中)에서 좌우되었다.③ 로마 교회의 내부는 부패하여 썩을 대로 썩음④ 이러한 때 교황권 확립과 로마 교회 구원 운동의 지도자가 나타났으니  그가 힐데브란드(Hildebread)인데, 교황이 된 후 그레고리 7세로 불리운다.3. 그레고리 7세(1) 그의 생애① 1051년 이태리의 사오나(Saona)에서 목수의 가정에서 출생   외모는 보잘 것 없었으나 의지가 강하며 활달한 기상과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가진 사람으로 교회와 기독교 세계를 개조하기를 원함.  그의 목표는 교회에 대한  교황의 절대 우위권을 확립하고 또 국가에 대한 교회의 우위권을 확립하는 것이었다.② 레오9세가 교황일 때, 비서장으로 있으면서 교회 권력을 장악③ 1073년 교황으로 즉위, 1085년 이태리의 사레루노(Salerno)에서 사망(2) 그의 업적① 교직매매(敎職賣買:Simony) 제도 금지② 교직의 임면권과 재산감독권은 교황권한에 둠③ 교황은 국왕을 지배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④ 신부의 독신제도를 장려□ 참고 : Simony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돈으로 성령을 사려했던 마술사 시몬의 이름에서 비롯된 말로서 교회의 직분을 돈으로 사고 파는 것을 말한다. 당시에는 글을 쓰지도 읽지도 못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것은 직분에 걸 맞는 준비가 전혀 없이 돈을 주고 그 직분을 샀기 때문이다.제 4-4 장. 교황과 황제 (2)1. 하인리히(Henry)4세 VS 그레고리7세 충돌(1) 문제의 발단독일에 있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헨리4세는 교황을 반대하였다.   (교회재산감독권과 교직자 임면권을 교황이 주장함으로)서임식이란, 주교와 수도원장을 임명할 수 있는 왕이나 통치자의 권리에 대한 문제이다. 힐데브란드는 교회의 직분자 가운데서 누구든지 평신도, 즉 교회 직분자로 임직되지 않은 사람에게서 직분을 받은 사람은 범죄한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왕과 통치자들은 교회가 막대한 재산을 차지하고 있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토지의 절반 가랑이 주교들과 수도원의 수중에 있었다. 만일 왕이 서임식을 통하여 토지에 관한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다면 세금을 거두거나 군대를 모집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기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주교들이나 수도원장들이 교회의 권세 아래 있는가 아니면 왕의 권세 아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2) 전개① 헨리4세는 교황의 반대파와 결탁② 교황은 황제를 파문하고 로마로 소환③ 황제는 불복하고 교황 폐위를 선언 (1076년)④ 교황은 황제를 출교, 폐위 선언.   황제의  신하에게도 「성사수여금지령」내림힐데브란드가 그레고리7세가 되자마자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하여, 그 결과 독일에서 자기 마음대로 성직과 그 권리를 팔아목던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4세와 충돌하게 되었다. 교황은 황제에게 파문을 선고하였다. 이것은 그가 교회에서 쫒겨 났다는 말이다. 그리고 황제를 로마로 소환하였다. 황제는 격노하였다. 황제는 교황 폐위를 선언하였다. 동시에 교황은 황제의 폐위를 선언하였다. 동시에 하인리히의 신복들에게도 성사수여 금지령을 내렸다. 이것은 교회의 모든 예배와 의식에 참여할 수 없음을 의미하였다. 교회의 영적인 무기는 날카롭고 무서웠다.□ 참고 - 성사수여금지령그 금령이 선포된 지역에서 파문과 같은 효력이 내림.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하고 종을 울릴 수 없으며 결혼식도 못하고, 장례식도 못함. 예배도 중지됨. 그 지역은 영적으로 죽은 지역이 된다.  교회에서 파문당한 사람은 자기 동료들과 모든 관계마져 단절당한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친절과 사랑을 베풀거나 음식이나 거처할 곳을 제공하는 사람은 교회의 진노를 사게 된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마치 전염병 환자처럼 사람들이 그를 피해 다니고 죽으면 짐승처럼 묻히게 된다.⑤ 모든 국민은 국왕의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없음을 선언(2) 카놋사(Canossa)의 굴욕① 독일의 제후들이 국왕에게 교황에게 사죄하라고 압력을 가함② 하인리히 4세는 사죄의 뜻으로 알프스의 카놋사 성에 가서   한 겨울에  맨발로 눈오는 성의 마당에서 사죄.③ 그후 넷째 날 교황은 그를 만나 성사수여금지령을 해제함그러나 이러한 화해는 이 두 사람 어느 쪽에도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그의 화해는 진실한 것도 아니었고 오래 가지고 못했다. 이 두 사람의 정신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낮아지심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소위 교황이 주장하는 대표권은 오만과 교만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뉘우치는 척했던 황제는 마음속으로 복수와 분노의 칼을 갈고 있었다.  하인리히는 7년 후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가 마침내 그레고리 7세를 나풀리 남쪽에 있는 살레르노에 유배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교황은 거기서 1085년에 죽었는데 ,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죄악을 미워하고 정의를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유배당하여 죽는다”」(3) 하인리히 4세의 복수① 하인리히 4세는 세력을 키움② 1077년 독일에서 내전발생.   교황은 국왕의 반대자를 지원하고 국왕을 재차  파문함③ 하인리히4세  로마로 진격하여 그레고리4세를 사레르노에 유배시킴④ 1085년 교황 그레고리4세 죽음2. 알렉산더 3세 VS 프레드릭 2세의 싸움① 로마의 교황이 교회의 일 외에 국가의 정치적인 일에도 수장권(首長權)을   행사할려고 하였다.② 황제 반발함.③ 그후 황제와 교황은 20년간 불화함. 황제는 5회에 걸쳐 로마로 출병하였으나   교황은 롬발트인의 도움으로 견딤.④ 후에 1177년 성 마가 성당에서 화해. 교황권은 전성기로 들어감.이때는 교황권의 전성기이다. 그가 처음 로마를 방문하였을 때 교황의 등잔를 붙잡는 것 (교황에게 경의를 표하는 상징적인 행위임)을 거부했으나 교황의 황제 대관식 집례 거부에 대한 위협으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교황은 로마에서 교회의 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정치적인 일에 있어서도 수장권을 행사하려고 하였다. 프레드릭은 이런 교황의 간섭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의 임명으로 로마의 황제로 부르심을 받았다. 만일 로마 시에 대한 통제가 나의 손에서 벗어난다면 나는 단지 명목상의 통치자에 불과할 것이다.” 이 두 사람의 화해는 베니스 총독이 중재자로 나섰다. 성 마가 성당에서 회담이 열렸다.3. 교황 인노센트 3세 VS 영국 존왕① 교황이 자신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왕의 왕인 까닭에 세상 왕을   심판할 수 있다고 주장.② 영국의 존왕은 교황이 임명한 캔트베리 대감독을 승인않음.③ 교황은 존왕을 파문함. 영국에 「성사수여금지령」을 내리고, 프랑스 왕에게 영국을   차지 할수 있도록 함.④ 영국왕 굴복. 교황에게 나라를 바치고, 존왕은 신하가 되어, 교황에게 조공을 바침.제3-6장. 십자군(十字軍)1. 원인①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이 성지(聖地)로 여기는 예루살렘을 회교도가 점령하고   (A.D 1071년) 그곳을 순례하는 기독교도에게 모하메드교도가 될 것을 강요하고   기독교를 학대, 약탈하므로.② 당시 황제인 우르반2세가 “십자가를 위한 전쟁”을 역설한 후, 십자군을 조직함.③ 십자군의 싸움에 종사하는 사람은 그들의 죄가 용서된다는 약속이 주어짐.④ 몇 주일 지나지 않아서 기독교 세계가 십자군의 열기로 들끓음. 왕, 왕자, 귀족,   기사, 지주, 심지어 부녀자, 아이까지.십자군 전쟁은 유럽 전 국가들이 호응하여 신흥세력인 아랍인을 저지하려고 일어난 세계적인 전쟁이다. 이 십자군 전쟁에 전 유럽이 공동으로 같은 보조를 취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정치적으로 볼 때 십자군 전쟁이 발발한 11세기 유럽 각 나라들은 봉건주의로 대표되는 몇몇 왕국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형태는 나라라고 하지만 완전한 국가 형태로 조직된 것이 아니고 큰 가문의 제후였던 봉주들이 크게 부각되고 있었다. 국가가 이루어지면 사유재산은 어떻게 관리를 해야 하느냐라는 문제들이 있었다.이같은 국가적 진로에 대한 모호함 속에서 불안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위안을 주는 대안이 곧 성지 순례라는 것이었다. 성지순례는 이미 4세기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주후 638년에 이슬람교의 제2대 칼리프인 ‘오마르’에게 예루살렘이 정복된 후 성지가 많이 파괴되고 변형되었다. 그렇지만 성지순례는 큰 지장이 없었다. 그러다가 1075년 터키군이 성지를 점령하고서부터는 순례자에 대한 방해와 잔혹한 취급이 따랐다. 여기에다 동방의 비잔틴 제국은 더욱 심각한 위협을 당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슬람에게 1085년 시리아의 안디옥이 그들 손에 넘어갔고, 1092년에는 니케아가 역시 터키에게 점령당하였다. 여기에 비잔틴 제국의 위협을 느낀 황제 ‘알렉시우스 콤비누스’는 서방 국가들에게 원조를 청하였다.이 무렵 서방 국가들은 다년간 흉작과 터키인의 순례 방해로 인하여 동서양의 무역이 단절됨으로 막심한 경제적 손실을 당하고 있는 터이었다. 이때 교황청에서는 동방의 형제 기독교를 도움으로 동서교회가 재 연합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고, 성지를 재 탈활하는 하는 것은 기독교인 사회의 자체방어를 위한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으며, 전쟁을 통해 평화가 정착된다고 하면 그것은 기독교가 해야 할 과제라고 믿게 되었다. 이같은 요인들이 작용하여 최초로 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교황 우르반 2세였다. 교황은 회의를 소집하였고, 동방의 기독교인들을 도우려고 나선 사람들에게 대 특사교령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군중들에게 거룩한 전쟁에 자원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리되니 군중들은 그리스도의 병사로 이교도에 대한 전쟁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로 간주되어 많은 호응을 하였다. 귀족들과 농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흉악범들도 전쟁에 지원한다면 모든 죄가 용서된다고 하여 자원하였다. 이렇게 하여 성지 탈환을 위한 거룩한 전쟁이라는 美名하에 세기적으로 온갖 화제를 남긴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2. 경과(經過)(1) 제1차 원정 (1096-1099년)독일, 영국, 프랑스 등 30만명이 진격하였으나, 니케야에서 세주크  터어키(Seljuk Turks)에게 참패, 그후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 점령, 약 50년간 예루살렘 왕국을 세움. 1097년 6월 19일에 ‘니케아’가 회복되었다. 1098년 6월 3일에 안디옥도 회복되었다. 1098년 8월에 예루살렘도 회복되었다. 그런데 1099년 이집트의 군대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공격해 왔으나 이를 물리쳤다. 이렇게 하여 십자군 원정이 시작된 지 3년 만에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예루살렘을 탈환한 후 저들은 계속하여 예루살렘을 보전하기 위하여 정복된 곳의 통치를 위해서 기독교 국가를 세웠다. 대부분의 십자군들은 각기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고 소수의 군사들에 의해 예루살렘은 유지되었다.  십자군 전쟁이 처음에는 성지탈환이 주 목적이었다. 그런데 성지를 탈환한 후에는 성지를 맡은 이들이 스스로 왕이 되어서 백성들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이에 북방의 ‘에뎃사’가 또다시 마호메트 교도들에게 장악되게 된다. 그로 인하여 또다시 제2의 십자군 전쟁이 일어난다.(2) 제2차 원정 (1147-1149년)원인은 예루살렘이 회교도에게 위협을 받음으로 독일과 프랑스가 출병하였으나 다메섹에서 실패하고 돌아옴.  그뒤 살라딘(Saladin)이 1187년 10월 3일에 예루살렘을 함락시킴.(3) 재3차 원정 (1189-1192년)1187년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영국,독일, 프랑스가 연합하여 진격하다가 독일과 프랑스가 중도에서 귀국하고 영국만 진격하다가 엠마오에서 살라딘과 협상함. 성지순례자에게 세금을 물리지 않으며 괴롭히지 않기로 함.(4) 제 5차 어린이 십자가 운동 (1212-1221년)프랑스 목동 스테팡(Stephen)과 독일 소년 니콜라스(Nicholas)가 소년 소녀 3만으로 진격. 이유는 하나님이 성지회복을 어린이들에게 맡겼다고 하여서.  많은 어린이가 알프스 산맥을 넘다가 죽음. 또 많은 수의 어린이들이 이슬람 교도들에게 종으로 팔림.(5) 그후 6-8차 까지 2세기에 걸쳐서 진행되어 약 5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3. 십자가 운동의 실패의 원인① 십자가 운동이 실패로 끝난 원인은, 그 운동이 전체적인 신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미신과 감상주의에 근거한 것이었다.② 십자군은 중견이 될 만한 교황에게 군사적 통솔권이 없었다.③ 출전한 왕과 기사들 간에 서로 전쟁 목적이나 이해가 일치되지 못하였다④ 최초의 목적인 종교열기는 식고 동방의 재물을 약탈고져 하는 불순한 동기가   목적이 되었다.4. 결과유럽제국의 단결을 고취. 기독교국의 의식고취, 상공업의 발달로 봉건제도가 무너짐.(1) 긍정적 요소① 교황의 세력이 현저하게 강화되었다. 이미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십자군 전쟁은   교황의 호소와 주장에 의해 시작되었다. 교황의 호소는 나중에 교황의 명령으로   바뀌어 각 나라는 교황의 명령에 따라 자의반 타의반으로 십자군 원정에 출정하게    되었다.② 교회의 재산이 증대되었다. 십자군에 출정하는 이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떠남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던 부동산을 교회나 수도원에 저렴한 가격으로 팔거나 위탁을   하고 떠났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있어서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군인들의 재산   은 자연히 교회의 재산이 되었다. 이로써 교회나 수도원은 엄청난 재산 소유자가   되었다.③ 서방 세계의 민족과 국가들이 하나의 기독교국이라는 인식을 향상시켜 주었다.④ 마호메트의 서방 진출을 저지하는 데 큰 몫을 하였다. 만일 십자군 전쟁이 없었다   면 이슬람교의 서방진출이 훨씬 더 강화되었을 것이다.⑤ 오랜 가문 중심의 봉건제도가 위력을 상실하고 오히려 소시민들로 구성된 중상   층의 다수가 더 큰 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봉건주의 시대의 몰락과   새로운 군주 중심의 국가 형태로 옮겨지는 계기가 되었다.(2) 부정적 요소① 십자군 전쟁 과정 중에 보여준 서방교회의 동방교회에 대한 태도는 동서교회의   골격을 더욱 넓혀 주었다.② 십자군 전쟁은 선교사업을 위한 도덕신학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즉 무력으로 평화   를 지키기 위해 전쟁이 합법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가 라는 문제를 놓고 역사 속에   대표적 선례로 사용하는 계기가 되었다.③ 십자군 전쟁이 성지를 회복한다는 신앙적 동기에서 출발하였으나 전쟁에 참여한   군사들은 비신앙적 행동을 하는 자가 많았다. 그래서 저들이 지나간 곳은 송충이   가 나무들을 좀먹고 지나간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마호메트 교도들의 비웃음을   살 정도로 무질서한 오합지졸들은 가는 곳마다 민폐를 일으켜 원성이 드높았다.④ 십자군 전쟁은 각 나라마다 도덕적, 윤리적 부패를 가져왔다. 저 유명한 ‘정조대’   가 이 무렵에 생겨져서 후대인들의 비웃음거리가 되는 나쁜 결과를 낳고 말았다.제4-7장. 중세기의 미신신앙중세기에 미신이 있었는가?  여기서 말하는 미신이란 기독교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전혀 납득할 수 없는 모호한 것들을 말한다. 미신이란 전혀 황당무계한 것이 아니다. 그럴듯 하기도 하고 비슷하기도 하며 어느 한 면으로는 납득이 가는 요소를 포함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현재도 시행되고 있는 것들도 있으므로 관심있게 살펴보도록 하자.1. 천사예배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써 하나님 이외에 다른 대상을 향해서 예배가 가능한가 ?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우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세 카톨릭 교회는 천사에게 예배할 것을 전체 종교회의에서 결정하여 실시하였다. 어떻게 해서 이 일이 가능하게 되었는가 ? 오리겐의 주석에 보면 신명기 32:8에 근거하여 모든 국가에는 그들의 수호 영이 있다고 했다. 국가뿐 아니라 각 개인도 수호 천사를 갖고 있다. 신자가 세례를 받고 교회에 들어갈 때에 신자의 영은 천사에게 맡겨진다. 이때부터 그 수호 천사는 마귀의 힘으로부터 그를 보호한다. 그러나 타락하게 되면 천사의 보호는 약해지고 악한 천사의 지배아래 놓이게된다. 천사들은 신실한 기도자 들에게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고, 그들의 진보를 기뻐하며, 그들의 잘못을 교정해주고 하나님 보좌 앞에서 그들을 위해 중재를 해준다. 하지만 그 천사들은 숭배를 받거나 기도를 받아서는 안 된다. 여기 분명히 천사가 예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들이 속사도 교부들로 시작해서 5세기 중엽까지는 천사 예배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콘스탄틴 이후에 미가엘 천사장에게 교회를 봉헌하면서 천사들의 서열이나 數가 언급되기 시작한다.① 그리하여 칼케돈 회의(451년)으로부터 800년대까지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천사숭배와 천사에게 드리는 주문(기도문)이 발전되고, 영들의 서열에 관하여 아주 정교하고 체계적인 교리가 생겨진다. 그리하여 가장 높은 층의 천사가 하나님에게는 가장 가깝고, 아래로 내려 올수록 인간에게 가깝다는 것이다.첫 계층 : 드로노이, 케루빔, 세라핌둘째 계층 : 퀴리오테테스 -지배, 엑수시아이-권력, 뒤나메이스-전능셋째 계층 : 아르카이-수장, 아르캉겔로이-수천사, 앙켈로이 - 일반천사이런 것은 아주 주관적이고 사색적인 기묘한 주장일 뿐이다. 앞서 초기 교부들은 천사숭배는 우상숭배라고 정죄하였다. 그런데 콘스탄틴이 콘스탄티노플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천사장 미가엘에게 봉헌하였다. 그 까닭은 그곳에 천사장 미가엘이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근원이 되어 서방교회에서는 9월 29일을 성 미가엘 기념축제행사로 정하고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다. 천사 예배에 대한 결정은 제 2차 니케아 공희회 (787년)에서 제정이 된다. 이 회의에서 천사들을 묘사하고 그들의 형상을 숭배하는 풍습을 허용했다.② 800년부터 종교개혁까지중세시대의 스콜라 학자들 간에는 이전의 천사들에 관한 여러 교부들의 주장과 견해를 계속 연구하고 발전시켜 나갔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선한 영과 악한 영을 믿는 정도로 국한하고 그들에게 기도드리는 것이나 예배 등은 금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성공회에서는 9월 29일을 모든 천사들의 축일로 지키고 있고, 카톨릭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것은, 저들의 천사숭배의 기원을 성경이 아닌 僞 디오니시우스의 책에 언급된 구절을 갖고 그것을 믿고 따른다는 애기다. 신앙도 이쯤 되고 보면 생각해 봐야 할 점이 너무 많다.2. 성모예배일반적으로 천주교라 일컫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특징은 성모 마리아를 예배한다고들 알고 있다. 사실 천주교의 특징이 마리아 예배는 아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이같은 사실에 대해 좀 더 자상하고 확실하게 알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마리아에 대한 언급은 몇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 예수님의 어머니가 있었다.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고도의 존경과 영예로운 이정을 받았다. 또 사람들로부터도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그 다음에는 이 마리아가 교회 역사 속에서 이상스럽게 발전되어 간다.① 초기 3세기까지이 시대에는 마리아에 대하여 신약성경과 똑같은 입장을 취한다. 그래서 마리아는 주님의 어머니요 그분이 존경의 대상이 되기는 하지만 마리아 예배에 관한 어떤 암시도 없다.② 니케아 회의에서부터 (325년) 서로마제국 멸망기(476년) 까지교회 내에서 마리아에 대한 예배를 직접 다룬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인 ‘시릴’(376-440년)이다. 이 시릴은 콘스탄티노플 감독인 ‘네스토리우스’가 예수는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우리와 별개의 존재인 구세주일 뿐이라고 하자 반대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시릴이 이런 말을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해 있는 그 몸은 인간의 몸이 아니다. 그는 우리와 다른 몸이다. 이런 예수를 낳은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해야 한다. 마리아의 숭배는 피조물에 대한 예배가 아니다. 또 마리아의 숭배는 그녀가 중보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마리아의 숭배사상은 그리스도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된 하나님이시며 마리아만이 우리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한 분이라는 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같은 시릴의 주장은 당시 많은 감독들이 반대를 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르게 된다.③ 중세기 (1500년까지)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하는 탈선은 계속해서 더 많은 변질과 탈선을 가져온다. 이같은 움직임은 동서방교회가 다 마찬가지이다. 주상 성자로 알려진 시므온은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여 기도를 받아 주소서”라고 마리아에게 기도를 하였다.  여하튼 동방교회의 여러 교회들이 마리아에 대한 숭배로 나아간다. 이렇게 마리아에 대한 숭배는 점진적으로 발전을 거듭한다. 그래서 초기에는 마리아 경배를 엄하게 금지하고 이단으로 다스리던 것을 후대에는 마리아에 대한 예배가 공식 교리로 굳어진다. 그리하여 마리아에 대한 여러 의식들이 생겨난다.A. 성모 마리아 동정녀 봉헌 축일 : 11월 21일B. 성모 마리아 탄생제 : 9월 8일C. 성모 마리아 정혼 축일 : 1월 23일 - 요셉과 결혼 기념일D. 마리아 성심 축일 : 8월 22일 - 순결한 마음을 기념하는 일E.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축제- 9월 9일F. 마리아의 승천설 : 마리아가 지상생활을 마친 후에 그가 죽지 않고 산 채로                     하늘로 영광 중에 승천했다고 하는 교리.이리하여  마리아의 숭배는 걷잡을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하여 이제 로마 카톨릭에서는 마리아 예배가 공식화되고 말았다.3. 성자들 예배로마 카톨릭교회와 동방교회에서는 다 함께 성인들을 예배하는 것이 하나의 전통적 교리로 전래되어 오고 있다. 그러면 과연 신앙의 위대한 성인들을 공경하고 예배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① 신약성경에서의 가르침신약성경에서는 위대한 신앙의 위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 바울이 구약의 위대한 인물을 대하는 태도 가운데는 결코 예배의 모습이 없다. 베드로나 요한, 그리고 모든 사도들이 신앙의 위인들을 대하는 태도도 보면 결코 예배하는 것과 같은 자세가 없다.② 교회 역사 속에서의 발전2세기경 서머나교회 등이 순교자들을 소중히 여기고, 그 뼈들을 보석보다 귀중하고 정금보다 아름다운 곳에 안치한 것을 말하였다. 여기서는 순교자들의 유해에 대한 제사와 그를 위해 해마다 추념 행사를 할 것이 암시되었다. 당시 희랍인과 로마인은 생전에 유명한 사람들을 기념하는 기념 행사를 그들의 생일날에 실시하였었다. 그러나 기독교 순교자들에게는 그들의 순교일이 기념일이었다. 5세기에는 순교자 숭배가 급속하게 확산된다. 그 이유는 순교자들의 성골(聖骨)이나 유물들을 나누어 자기들 가까운 곳으로 이장하면서 수많은 묘당과 성인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 무렵에는 성인들의 성골과 유물들을 숭배하는 관습이 차츰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성인숭배와 유물예배의 관습을 본격적으로 체계회시킨 사람이 그레고리 1세이다. 이제 성자를 위한 예배는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라 성자들의 유물이나 성골을 옮겨서 이전을 하면 기적을 일으키는 효능이 있다는 전설까지 덧붙이게 되었다. (기적 -카롤 베이커 : 스페인 수녀원 ) 그래서 성자 예배는 비정상적으로 급속하게 발전되었다.③ 현재의 동방교회저들에게 성자들의 수효는 무려 수만명에 이르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김대건신부를 비롯한 100여명의 성자들이 있다. 카톨릭에서는 성자가 되면 성자의 이름으로 기도가 가능하다. 우리나라 100여명의 성자들도 전세계 카톨릭 교인들의 기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과연 성자들 이름으로 기도를 하는 것이 올바른 기도일까 ?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느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성자를 향한 경배와 우상숭배와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이 가능할까 ? 실로 저들의 신앙 행위를 알 때 가슴이 무거워진다.4. 성화, 성물예배그림을 그려놓고 거기 절하고 예배를 드린다. 또 이상한 물건을 조형해 만든 성상들을 앞에 걸어놓고 거기에다 절하고 예배를 드린다. 아무리 생각해보다 언뜻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런데 동방교회에서는 성상에 대한 예배가 극에 달하고 있다. 사실 4세기 초 이전까지는 성상에 대한 숭배사상이란 생각해 볼 수 없는 이교적인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림이나 조각물에 대한 예배는 계속 발전되었다. 그래서 338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성상 사용을 하지 못하도록 결정을 하였다. 그러나 성상 예배는 가속화되었다. 교회 회의에서 금지명령을 내렸는데도 어찌하여 성상 예배가 가속화 되었을까 ? 그것은 헬라인들이 예술을 사랑하고 그림을 즐겨하며 장식품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썼기 때문이다. 753년 콘스탄티누스 5세 (741-775년)는 세계적 규모의 공의회를 소집하여 성상숭배를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여기에 참석한  340명의 주교들이 성상은 금지된 우상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 6세 (780-797년)는 성상 파괴 법률을 철폐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787년 여름 7차 공의회에서 300명의 주교들이 참석하여 로마 카톨릭과 희랍 정교회는 성상 사용하는 것이 합법적이라고 선언하였다. 이와 같은 우여곡절로 반대와 찬성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성상예배는 이제 하나의 완전한 현실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현재 동서방 교회에서는 예배당 안에 각종 현란한 그림과 조각들이 설치되어 있고, 또 각 가정에서도 이같은 형태는 연결되고 있는 실정이다. 성상과 성화에 대한 예배, 이것 역시 미신 신앙의 유물이다.5. 성례전 중 미신신앙성례전이라 부르는 세례와 성찬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의식일 뿐 그 자체가 무슨 효력을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주님의 주신 뜻을 그대로 따른다면 세례와 주의 만찬이라고 해야 되고, ‘성례전’이나 ‘성만찬’이라는 용어는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  왜 우리가 성례전에 관한 문제를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해야만 하는가 ? 그것은 성례전이 거룩한 이름 아래 수백년동안 순진한 영혼들의 고혈을 짜내는 악한 도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분명히 확신하는 것은 성경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고, 분부하신 의식은 세례와 주의 만찬 뿐이다. 그런데 중세교회는 각종 의식들을 자기 멋대로 제정하여 수십가지의 성례들로 온갖 돈을 각출해내는 이용물이 되었다. 이리하여 12세기에는 성례전이 무려 30여가지가 되었다. 그래서 중세기 대학운동이 일어나면서 많은 지성인들이 성례전이 순수하지 않고 미신성을 띤 것과 악용되는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하게 되니 로마 카톨릭과 희랍 정교회에는 더 이상 많은 성례전을 유지할 수 없어 1574년 프로렌스에서 성례전을 7가지로 줄이게 된다.세례 / 견진 / 성체 미사  / 신품 / 고백 / 결혼  / 종부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교회사 : 내주의 나라와 제5장. 종교개혁 (宗敎改革)제 5-1 장. 종교개혁 전의 선구자들자연계에서도 동이 트기 전이 가장 어두운 것처럼, 교회의 역사에서도 종교개혁전이 가장 어두웠었다. 겉은 풍성하였으나 형식 뿐이었다.  설교는 소리나는 구리였고, 대부분의 사제들은 세상쾌락 쪽으로 기울었고, 백성은 무지와 미신에 사로 잡혀 있었다.   굶주린 영혼들에게 먹여 줄 양식은 없었다. 성경 부터 없었다. 잘못된 가르침과 성인숭배,형상숭배, 유물숭배 등의 각종 쓸데없는 의식만이 가득했다. 이런 암흑의 세계는 곧 종교개혁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 종교개혁을 가져오는 선구자들이 있었으니,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이라고 할 때 그 폭은 대단히 넓다고 할 수 있다. 신비주의 운동으로 개혁에 공헌한 토마스 아 캠피스나 엑카르트 등이 있고, 로마교회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왈도파, 알비파들도 있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로마교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개혁자는 위클리프, 후스, 그리고 사보나로라 등이 있다.1. 존 위클립 (John Wycliffe) 1324-1384(1) 생애① 1324년 태어나서 옥스포드 대학 졸업. 교수가 됨② 수도승의 나태와 사주 행위, 종교적 진리 왜곡,형상숭배,   유물숭배 등을 비판하여 주교들의 혹독한 비판을 받음③ 1382년 세계 최초로 영어성경 번역④ 화체설 배격 등으로 이단자 취급받음 . 1384년 사망⑤ 1401년 교회에서 이단으로 정죄하여 무덤파고 유해를 불로 화형                   “그가 죽은 지 오랜 후에                    비록 뼈가 무덤에서 나와                    산산조각으로 뜯겼지만                    그의 외침은 나팔 소리처럼                    모든 세대에 울려 퍼지도다.”(2) 그의 신학① 오직 성경만을 신앙의 표준으로 삼음② 교황의 속죄권을 부정. 면죄부 판매 부정③ 화체설 배격     ④ 교황정치 불필요를 역설위클리프는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서 특대 교비 연구생으로 공부하여 모교에서 강의와 목회를 하였다. 그는 유창한 화술과 엄격한 논리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다가 1371년 교수직을 떠나 처음에는 외교가로, 후에는 논쟁가로 왕실에 봉사를 하였다. 그 당시 영국 왕실은 교황청 아비뇽의 통치 및 지배를 벗어나고자 했기 때문에 이론가요 논쟁가인 위클리프를 환영하였다. 위클리프는 이 당시 모든 합법적인 통치권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지상에서의 통치 성격도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긱 위해 오셨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만일 피지배자를 위한 것이 아니고 지배자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는 일체의 통치 형태는 진정한 통치가 아니고 오히려 반역이라고 하였다.위클리프가 개혁운동에 나선 것은, 로마교회에 대해 실제적으로 권력남용에 관한문제를 가지고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1365년 교황 이노센트 3세가 영국에 부과한 종교세가 너무 크다고 그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위클리프는 당시 사제들이 국민들의 혈세에 의해서 사치하고 향락하는 잘못을 공격하고 또 교황이 신령한 문제보다는 온갖 이권개입에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을 비난하였다. 또 문서운동을 전개하여 교황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이때 그의 두드러진 주장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이었다. 위클리프의 주장에 의하면, 모든 소유권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사람들이 잠시 소유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것을 선용하게 사용할 것을 전제로 하여 허락하신 것뿐이라고 하였다.그다음에 교회론에 관한 논문은 더욱 극단적이다. 그 당시 교황은 그리스도의 교회는 교황의 지도를 받는 유형적 카톨릭 교회만이 참된 교회라고 주장하였었다. 여기에 대해 위클리프는 어거스틴의 예정론적 교회관을 주장하였다. 참 교회란 하나님의 예정을 입은 자들인에, 이는 누가 예정되었는지 확실히 알기는 어렵고 가가자의 신앙생활에서 맺어지는 열매들을 통하여서 이를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기에 교황이라 할지라도 누가 예정된 자인가를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이 직분을 이용하여 교인들을 마음대로 축출한다는 것은 전혀 잘못된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교황 자신도 예정함을 입지 못한 자로 구원을 얻지 못한 자 중에 포함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성경에 관한 주장도 독특하였다. 성경은 예정함을 입은 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해석될 수 있도록 그들의 손에 들어가야 한다. 이같은 확신에 의하여 최초로 위클리프는 라틴어 전용 성경을 영어성경으로 번역한다. 그래서 시편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성경을 정열적으로 번역한다. 물론 그의 생전에 성경 전체를 다 번역하지 못하고 그의 추종자들이 완결한다. 그리고 이들은 번역된 성경을 보급하고 전도하기 위하여 전도자들을 모았다. 여기 모여진 전도자들은 당시 호사한 신부들과는 너무 대조적인 가난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가난한 신부들’ 혹은 ‘순행 설교자’라고 하였다. 이들은 당시 신부들이 성자들의 이야기나 이적담이나 의식에 호소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성경을 설명해부며 말씀의 참 뜻을 전파하는데 주력하였다. 이들은 두 벌 옷도 없이 순전히 나그네처럼 전도여행을 다녔는데 주로 가난한 젊은 사람들이었다.이렇게 위클리프의 전도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을 ‘롤라드’(Lollards)라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직접 죄를 고백하는 것이 더 성경적이라고 하였으며, 성자숭배나 유물숭배 등을 미신행위라고 배격하였고, 특히 화체설을 부인하였다. 카톨릭에서는 사제의 축복 후 떡이 신비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된다고 하였지만 그 주장은 성경과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외에도 면죄부 판매와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등을 비난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이론들은 당시 교회의 공식적 교리에 어긋남으로 세속 당국들로부터 경원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단이라는 비난도 받게 된다. 이리하여 1384년 위클리프가 뇌일혈로 사망할 무렵 그에 대한 보복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406년에는 위클리프 운동을 반대하는 법안이 통과되었고, 1409년에는 위클리프의 교리를 정죄하고 1415년 콘스탄스 회의에서 위클리프를 260개의 종목의 죄목을 지목하고 그를 정죄한 후 모든 저서를 불태웠다. 그리고 1428년 교황의 명령으로 위클리프의 유해를 파내어 불 태워 가지고 그 재를 강에다 뿌렸다. 위클리프 운동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한 세기 전의 종교개혁의 선구자적인 운동이었다.2. 요한 후스 (John Huss) 1369-1415① 보헤미아 사람으로 위클립의 강한 영향을 받아 교회를 정화시키고   신약 성경의 교훈으로 돌아가게 하려는 열정을 가짐.② 34세에 프라하 대학의 총장이 됨③ 프라하의 베들레헴 예배당에서 미신 숭배와 성직자의 죄를 폭로④ 교황은 후스를 파문함. 프라하시에 「성사수여금지령」을 선포함⑤ 1414년 체포되어 지하감옥에 갇힘. 신성모독죄를 걸어서 화형시킴.                   “나는 복음과 말씀전파를 위하여                    이처럼 무섭고 수치스럽고 잔인한                    죽음을 달게 받겠다.”후스는 오늘날의 체코슬로바키아 지방인 보헤미아 지방에서 태어났다. 보헤미아에서 영국으로 유학을 갔던 유학생들이 돌아오면서 위클리프의 저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로써 보헤미아 지방의 ‘프라하 대학교’에서는 위클리프의 작품이 큰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이 당시 후스는 프라하대학 철학교수로 있으면서 ‘베들레헴’성당의 설교자로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1402년 총장 자리까지 오른다. 이때 그는 마치 온 세계를 정복한 듯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가 그의 학문적 명성에 만족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주님만이 아시는 죄 때문에 끊임없이 스스로 겸손하였다. 그는 죤 위클리프의 저서를 읽는 중 두 가지의 그림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중의 하나는 주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교황은 금 면류관과 값비싼 자주색 비단옷을 입고 있는 그림이었다. 두 번째의 그림은 예수께서 여인에게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 뒷편에는 교황이 백성들에게 면죄부를 파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 그림들이 보여 주는 진리는 후스의 눈을 열어 교회의 비참한 상태를 밝히 보게 하였다.후스는 프라하에 있는 베들레헴 교회의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이 교회에서 놀랍게도 라틴어가 아니라 모국어로 설교를 하였고, 또 놀랍도록 진지하게  미신숭배와 성직자들의 죄를 폭로하고 굶주린 자들에게 생명의 떡을 먹였다. 이 깡마르고 진지한 표정의 후스를 본 사람들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참된 사자로 생각하였다. 이 당시 프라하의 대 주교는 교황의 명령을 받아서 위클리프의 저술을 금지하고 그의 작품을 읽지 말도록 하는 교황 칙령을 받아내고 아울러 설교는 성당과 교회, 그리고 수도원 내에서만 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때 후스는 오랜 숙고 끝에 그같은 교황의 칙령에 순종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렇게 말하였다.“교황의 명령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치하기만 한다면 그렇게 하겠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순될 경우에는 내 몸을 불태운다 해도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자유롭게 학교에서, 강의실에서도 설교를 하였다. 그러자 교황은 1410년 후스가 교황의 명령에 불복종한다고 로마로 소환 명령을 내렸다. 후스는 교황의 소환에 응하지 않자 교황은 1411년에 파문을 선포하고 프라하에 성사수여금지령을 선포한다. 그러나 보헤미아 국왕과 국민들이 후스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함으로 교황의 파문은 아무 효과가 없었다. 이때부터 후스는 교황과 본격적인 대결을 해 간다. 그가 첫번째 한 일은, 자격이 없는 교황에게는 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하였다. 아무리 교황이 회의에 의해서 합법적으로 교황이 되었다 할지라도 교황이 교회를 위하여 일하지 않고 자기의 사익을 위해 행동한다면 그는 교황으로서 권위를 지킬 수 있겠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성경이야 말로 교황을 포함한 모든 기독교 신자들의 궁극적 귄위라고 주장하였다. 그러기에 성경에 순종하지 않는 교황에게는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그리고 교황 요한 23게가 전쟁 비용에 쓸 목적으로 면죄부를 판매하는 행위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죄의 용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인데 그 같은 면죄에 관한 신성한 것을 매매하는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같은 후스의 반대 주장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교황청의 착취행위에 대하여 공개시위를 벌였다. 이 무렵 콘스탄스 회의가 소집된다. 이 회의는 독일황제 지기스문트와 교황 요한 23세의 합의에 의하여 열렸는데, 황제는 후스의 신변보호를 보장할테니 참석하라고 하였다. 이에 후스가 콘스탄스에 도착하자마자 요한 23세는 회의와 상관없이 후스를 잡아서 처소에서 이단사상을 철회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그러나 후스는 회의 앞에 쇠사슬로 결박당한 채 서 있으면서 자기가 이단 사상을 철회한다고 하면 자기가 과거 이단이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결과가 됨으로 이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회의주의자들 앞에서 공정한 판결을 받을 길이 없음을 알고 후스는 담담하게 이렇게 선언하였다.“나는 전능하실 뿐 아니라 완전히 공의로우시며 유일한 심판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항소하리라. 나는 그분의 손에 처분을 맡긴다. 왜냐하면 그는 거짓증인들이나 오류에 가득 찬 회의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진리와 공의 위에서 모든 개인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 이리하여 그는 몸에 사제복을 입혔다가 관리들이 사정없이 찢어놓았다. 그리고 그의 머리는 삭발시키고 그 머리에다 악마의 그림을 그린 종이관을 뒤집어 씌웠다. 그리고 그의 이마에는 “이 사람은 이단의 괴수이다”라는 글자가 씌여졌다.  그는 사형장으로 끌려 가는 도중에 자기 저작들이 불에 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시편을 낭송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그의 마지막 기도는 “주 예수님 바로 당신을 위하여 이처럼 잔인한 죽음을 아무런 불평없이 감당합니다. 부디 나의 적들에게 자비를 내려 주소서.”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후스는 1515년 소위 콘스탄스 종교회의 운동자들에 의해 장작더미 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사형집행관들은 그의 재를 모아 호수에 뿌려버림으로서 그의 흔적을 남기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의 개혁운동은 전 보헤미아 국민들을 똘똘 뭉치게 하여 커다란 개혁열기를 일으켰다.  이 열풍이 종교개혁과 모라비안 형제단으로 계승한다.3.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Girolamo Savonarola) 1452-1498사보나롤라는 1452년에 이탈리아의 ‘펠라라’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청년시절에 귀족의 딸과 연애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세상의 허무를 깨닫고 도미니크 수도원에 들어간다. 여기서 그는 세상 생각을 잊고 성경과 어거스틴 연구로 그의 사상적 기초를 연마한다. 사보나롤라는 그의 생애의 대부분을 학문연구와 명상에 바친다. 1482년 ‘플로렌스’에서 설교하는 것으로 그의 대중활동은 시작한다. 그 당시 플로렌스 시민들은 사치와 허영에 심취하여 있었으므로 사보나롤라의 준엄한 설교는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사보나롤라는 대중들의 불호응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예언자같은 심정으로 열성을 다해 설교 하였다. 그러니까 플로렌스에서 뜻있는 사람들이 차츰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의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경청하였다. 사보나롤라는 계속적으로 도시에 만연되어있는 폐풍들을 가차없이 공격하였다. 사보나롤라는 설교를 통해 당시 사회악에 대한 비판, 그리고 기독인으로서의 향락에 찬 사치생활 등을 비판하였다. 이것이 곧 시의 유력자들에게 비위를 거슬리게 되었다.사보나롤라는 마가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자, 수도원의 재산 대부분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준다. 또 수도원 내의 생활을 대대적으로 개혁하여 시민들이 볼 때 수도사들의 경건한 봉사의 모습을 봄으로 수도원에 대한 이미지를 쇄신시켰다. 그렇게 되자 다른 수도원들도 그의 개혁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의 부유한 자들이 추구하는 사치와 향락은 허영임은 물론이고 물질을 탐하는 탐욕은 모든 죄악의 근원이라고 부르짖었다. 그래서 사보나롤라는 ‘허영의 화형식’이라는 화형식을 정기적으로 실시하였다.  이 허영의 화형식은 시 중앙 광장에다 나무로 만든 피라미드가 지어지고 그 아래에는 화약이 섞인 짚단과 장작이 쌓여진다. 그리고 시민들은 자기들이 갖고 있던 사치스러운 의복, 보석, 가발, 그리고 고가의 가구 등을 피라미드 계단 위에다 갖다 버린다. 그 후에 찬양하며 주변을 행진한다. 이 때 그 물건들을 불태우며 허영을 저주하고 소리를 외친다. 이렇게 하여 카니발 대신에 불꽃놀이를 함으로 탐욕을 화형시켜 버린다고 하였다. 이같은 행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하여 시민들의 경각심을 일깨우고 탐욕 갖는 것을 예방하도록 하였다.이러다 보니 부유층에 있는 사람들은 사보나롤라로 인한 각종 불이익 때문에 반대가 일었고, 다른 한편으로 서민층에서는 사보나롤라가 미래를 예언할 수 있는 예언자요 이적을 행할 수 있는 자라고 하며 그에게 이적과 예언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사보나롤라가 그들의 요구에 만족을 주지 못하게 되자 마침내 폭도들이 마가 수도원에 침입하였다. 이때 사보나롤라는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에게 자기 보호를 위해서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폭도들에게 결박을 당하고 폭행을 당한 후 세속 당국자들에게로 인도되었다. 며칠간의 참혹한 고문 끝에 만들어 낸 죄목은 그에게 미래를 예언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을  ‘이단이요 분파주의자들’이라는 막연한 죄목을 뒤집어 씌웠다. 그리하여 1498년 5월 23일에 화형당하였으며, 그 재를 아르노 강물에 뿌렸다.이렇게 하여 의롭게 살아갔던 깨끗한 수도사 사보나롤라도 한 시대의 정치와 교황권의 독선에 의하여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는 중세기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갖가지 면에서의 한계점을 보게 되었다. 교황청의 지나친 권위주의에 식상하여 개혁의 불만을 표현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 교황의 횡포에 대하여 자기 몸이 불태워 죽고 자기 저작들이 이단서적으로 참형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죽음으로 개혁을 주장하며 맞서 싸운 사람들도 있었다. 이와 같은 모든 양상은 곧 성경에 의하지 않는 로마 카톨릭의 독재와 독선과 독주는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는 개혁에 관한 열망이었다.  이와 같은 개혁의 열망이 드디어 루터로 말미암아 가시화되게 되고 그는 전 유럽의 열망을 한 데 묶어 종교개혁으로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4. 왈도파(1) 유래① 12세기 초 프랑스 론 골짜기(Rhone Valley)의 도시 리용(Lyons)에   피터 왈도(Peter Waldo)라는 상인으로 부터 시작됨.② 사제나 주교, 교황일지라도 인간의 말은 믿음의 토대가 되지 못하고   오직 성경만이 믿음의 토대가 된다고 깨달음.③ 중보자도 오직 예수 한 분 뿐이며, 성인은 경배의 대상이 못됨을 깨달음④ 바른 진리를 전파하기 위하여 1177년 남녀회원으로 단체를   조직하니 이를 왈도파(Waldeness)라고 한다.(2) 활동① 둘 씩 짝을 지어서 다님. 행상처럼 가장하여  장식구를   팔면서 반드시 “값비싼 진주” 즉 복음을 소개하였다.② 잘 못된 가르침을 공공연히 비판,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과 번역된   성경을 보급하였다.③ 교회에서는 처음에는 관대하였으나 나중에는 혹독한 핍박을 함   종교재판과 고문, 수 천명을 죽임(1) 왈도파의 기원왈도파로 불리우는 이 파의 기원은 1160년경 프랑스이 리용 사람인 피터 왈도에서 시작되었다. 이 왈도는 상업으로 성공하여 큰 자본가로 성공하였다. 그는 어느날 자기 집에서 베푼 연회장에서 손님으로 온 사람이 갑자기 죽는 것을 보고 구원에 관한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왈도는 성경에 관심이 높아 1170년경 사복음서와 성경의 일부 책들을 라틴어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하기 위하여 한 사제를 고용하였다. 그는 또 자기 재산을 다 정리하여 마태복은 19:21의 “네가 완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는 말씀을 따르기로 결단한다.  왈도는 재산의 일부를 그 아내에게 주고 나머지는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173년) 그리고 성경 연구에만 몰두하다가 전도하는 일에 자신을 헌신한다.(1180년) 그러자 이 왈도를 가리켜 ‘리용의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소문이 나게 된다.왈도는 오직 성경만이 믿음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사제나 주교 또는 교황의 말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말은 믿음의 토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또 한 분 중보자가 계실 뿐이며, 성인들은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또 성례에는 오직 두 가지 세례와 성찬만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왈도는 이러한 진리와 이밖에 여러 가지 진리들을 받아 이를 전파하고자 하는 회원들을 모아서 단체를 만들었다. (1177년) 이 단체의 회원들을 흔히들 ‘왈도파’라고 한다.그들은 둘씩 짝을 지어 각 동네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왈도파 사람들은 행상처럼 가장하여 각 지방을 다니면서 자질구레한 장신구들을 팔았다. 그러나 방문하는 집집마다 반드시 “값비싼 진주”(복음)를 소개하였다. 그들은 교회의 전통과 사제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공공연하게 공격하였다. 그리고 열린 귀를 만날 때 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였다. 처음에 교회 당국에서는 이들에 대하여 관대하였으나 그 운동이 자기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것을 알고는 왈도파를 법으로 금지시켰다. 1229년 발렌시아 회의에서는 사제가 아닌 사람들은 성경을 읽어서는 안 된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성경 그 자체가 금서(禁書)가 되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다.그리고 왈도파에 대한 핍박이 시작되었다. 온갖 박해가 따랐다. 1184년 교황은 왈도파에 대해서 어떤 억압이든 해도 좋다는 권한을 정부에게 부여하고, 1194년에는 왈도파에게 사형과 신체절단의 형벌 외에는 어떤 형벌이라도 내릴 수 있다고 하였다. 1197년에는 왈도파에게 화형을 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와 같은 칙령에 의하여 수 천명의 사람이 불에 타 순교를 하였다. 수천 명이 죽임을 당하고 잔인한 고문을 당하였다. 심지어 임산부를 돌에 깔아 죽이기도 하였다. 왈도파가 숨어있는 동굴 안에 불을 질러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태리로, 또 스페인 등지로 피난을 하였다. 그러나 잔인한 원수들도 왈도파 사람들의 순결한 도덕과 그들의 확신의 진실성을 부인할 수 없었다. 세상은 그들을 감당치 못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육신의 생명을 도모하지 않았다. 그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겼다. 우리는 환난의 시대에도 진리의 증거를 굳게 잡은 이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로마의 카톨릭은 사람이 피를 흘리고 불에 타 죽이는 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차원으로 온갖 살육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핍박은 1848년까지 계속되었다.(2) 현재의 왈도파프랑스 피에몽 계곡은 왈도파의 본거지이다. 여기에는 왈도파 자녀들을 위한 교육기관이 있고 대학도 있다. 종합병원과 고아원, 양로원 등도 있다. 여기에는 수 십명의 목사들, 그리고 수 천명의 교인들이 있다.(3) 왈도파의 주장과 사상왈도파는 철저한 성경중심의 신앙과 엄격한 도덕주의 생활을 두드러지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신학적인 체계는 약하였다.① 이들은 로마 카톨릭이 인위적 힘으로 제정한 모든 요소들을 거부하였다. 성경에도 없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교황제도, 교회 성직자들이 세상 권력으로부터 특혜조치를 받는 특권과 특전, 교황 이하 성경에 없는 각종 사제들의 계급과 직제, 교회 및 수도원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소유, 공의회라는 이름 아래 다수에 의해 제정된 각종 탈 성경적 결정, 성직자의 독신생활 의무화, 카톨릭의 미신적 성례전 등의 모든 요소들을 다 거부하였다. 그래서 1240년부터는 카톨릭이야말로 계시록 13:11-15에 나오는 적그리스도라고 하였다.② 14세기부터 카톨릭이 실시하는 종교 교육제도, 성경에 대한 신비적 해석, 그리고 카톨릭의 각종 의식들을 반대하였다. 부활절, 성탄절, 승천축일, 성령강림절, 사도들의 축일, 금식일 등을 반대하였으며, 예배시 양초를 사용하는 것과 라틴어로 사용하는 예배문, 마리아 상 숭배, 성자들의 성골 및 유물숭배등을 전부 배격하였다.③ 카톨릭의 교리적인 것도 반대하였다. 유아세례, 견진성사, 종부성사, 연옥의 교리,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교리 등을 배격하였다.④ 왈도파의 특징은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가난한 생활’을 강조하였다. 왈도파 회원이 되려면 세상을 포기하고 사도처럼 가난하게 살면서 사도적 소명을 다 하겠다는 공식 서원을 해야 하고, 그 다음에 그와 같은 외적 상징으로 사도복 이라는 특수한 옷을 입어야 했는데, 남녀가 다 같이 입어야 했다.⑤ 회원이 된 자의 생활 처우문제눅 10:1의 말씀대로 항상 나이든 사람과 젊은 사람들이 둘씩 짝을 지어 방랑하는 설교가들로 도시에서 도시로 다닌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를 위한 생계비를 버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생활은 친구나 또는 설교 후 감독자들이 제공하는 음식과 생활품을 공급받았다.⑥ 금식을 장려하였다.이들은 금욕으로 정죄의 요소를 막기 위하여 금식을 소중히 여겼다./ 그래서 일주일에 월, 수, 금 삼일을 금식하도록 권장하였다.⑦ 경건생활을 권장하였다.경건생활을 소중히 여겨 하루에 기도를 7회씩 하도록 의무화하였다.⑧ 평화를 원하였다.모든 형태의 맹세를 거부하고 거짓말을 죽음처럼 싫어하고, 피흘리는 전쟁, 또는 사형 등 모든 것을 반대하였다. 그리고 신앙문제에 있어서 무력을 사용하거나 그들을 대결하기 위해 사회법적으로 대처하는 것 등도 반대하였다. 이들은 부당하게 얻은 이득도 원치 않았고, 모든 사람들과 화평하게 살기 위해 기도와 자선의 삶을 살도록 하였다.⑨ 설교하는 것을 대표적 의무로 삼았다.왈도파는 남녀 모두가 설교를 하였다. 평신도가 설교해야 되는 의무사항으로 약4:17, 계22:17, 막9:38-39, 빌1:15, 민11:29 등을 인용하였으며, 이들의 설교내용은 지극히 간단하고 단순하였다.(4) 왈도파의 영향이들 왈도파의 신앙은 재세례교도, 모라비안, 유그노 등은 물론이고 최초로 종교개혁에 앞장선 루터 역시 왈도파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종교적, 신앙적 영향은 물론이고 피에몽 계곡에서 오랜 세월 격리생활을 하는 중에 자생적으로 발달된 가내수공업의 원시 형태의 산업혁명의 기초가 되는 공헌을 하였다.제5-2장.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1. 그의 생애 (1483-1546)① 1483년 11월 10일 북부독일에서 광부의 아들로 출생② 18세에 에풀트(Erfurt)대학에서 스콜라철학과 라틴어를 공부③ 수도원에 들어가면 영혼이 구원을 얻는다 하여 수도원에 들어감. 수도원의 온갖   규칙을 다 지켰으나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함. 후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음을 깨달음(롬 1:17)④ 위텐베르그 대학의 논리학, 물리학 교수를 거쳐서 신학교수가 됨⑤ 1511년 로마로 여행하며 카톨릭의 온갖 허위와 더러운 부패를 알게 됨⑥ 부패한 종교개혁을 위하여 선봉적 역활을 감당함마르틴 루터는 독일의 삭소니에 있는 농사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루터는 가정이나 학교에서 단순하지만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라났다. 한 번은 그의 어머니가 마르틴이 개암열매를 훔쳤다는 이류로 피가 나도록 때였다. 18세가 되던 해 루터는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하여 학문에 있어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에르푸르트에 공부하고 있던 어느 날 루터는 성경 한 권을 얻었다.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성경을 본 일이 없었으나 성경을 읽자 깊은 감동을 받게 되었다. 한나와 사무엘의 기사, 특히 사무엘이 소명받는 대목은 깊은 인상을 주었다.22세가 되던 해에 루터는 대학의 전과정을 수료하고 오래지 않아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 한 명이 학생들끼리의 싸움으로 죽었다. 루터는 “만일 내 친구 대신에 내가 죽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또 다른 경우에 있어서 무서운 벼락이 그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땅바닥에 엎드러져서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나는 수도승이 되겠나이다”라고 소리쳤다.루터는 자기의 서원을 지켰다. 그는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입문하기를 원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루터가 법조계에서 높은 지위를 얻기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매우 화를 내었다.  루터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원하고 그것을 갈망하였다. 그는 이 세상은 자기 마음의 소원을 충족시켜 줄 수 없음을 깨닫고 수도원에서 평안을 찾고자 하였다. 루터는 참으로 그것을 얻기 위하여 최선을 다 하였다. 그는 수도원의 규칙을 철저하게 지켰으며 노동 봉사에도 충실하였고 수도원을 위한 시주에도 열심을 내었다. 그는 인간의 노력을 통하여 구원을 얻으려고 했던 성실한 수도승이었다. 구원을 얻기 위하여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감내하였다. 기도와 금식, 참회 등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도 충실하였다. 그는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문자 그대로 자기의 몸을 학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평안을 얻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는 구원에 대하여 거의 낙심하게 되었고 육체의 힘도 쇠약해졌다. 그의 동료들도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도 영적인 소경이어서 루터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무려 21명의 성인들에게 기도하였다. 한 번은 꼬박 보름 동안을 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평안을 얻지 못했다.이처럼 고통을 당하는 루터에게 도움과 위로를 준 한 사람이 있었는데, 독일의 어거스틴 수도원 지도자인 스타우피츠였다. 그는 루터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사실을 잊지 말게나”라고 하였다. 다른 때는 그리스도를 생각만 하여도 루터는 두려웠다. 왜냐면 주님은 무엇보다도 죄를 심판하고 벌을 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스타피우츠는 루터에게 말하기를 “자네의 생각은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니네. 그리스도는 우리를 무섭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위로하시는 분이라네. 그리스도의 상처를 보게나. 거기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보이지 않는가.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네.”라고 하였다. 이러한 말은 루터의 마음속에 새겨졌다. 점점 루터의 마음속에 진리의 빛이 밝아 왔다. 루터는 그가 구원을 받는 것은 인간의 선한 행위로써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진리의 빛이 밝게 비추었으며 그의 심령 속에 이러한 구원이 찾아 왔다.  루터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바울의 말이 낙원의 문을 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이 위대한 진리는 종교개혁의 기초적인 진리가 되었다.루터는 이제 자기를 어두움 가운데서 빛으로 인도할 구원의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기를 원하였다. 그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를 널리 전파하고 싶었다. 그는 점차로 자기 앞에 놓여있는 거대한 사명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난제가 산적해 있었으나 사도 바울 처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앞 날이 어두웠지만 또한 동시에 밝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2. 실제 투쟁① 면죄부(免罪符) 판매를 반대하여 설교로 공격함② 위텐베르그 교회 정문에 95개조의 항의서를 붙임   ( 1517년 10월 31일 : 종교개혁기념일)③ 2주 만에 전 유럽으로 파급됨④ 지지자 - 멜랑톤⑤ 1521년 삭소니아 제후의 도움으로 바르트부르크 산성에서 은거하며 신약성경번역이제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그때까지 수도원에서 살고 있었다. 1510년에 어거스틴파 수도회의 일로 그는 로마에 가게 되었다. 그는 이때까지만 해도 로마 카톨릭 교회가 참된 교회이며 교황은 땅 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대리자이고 ‘영원한 도성’인 로마는 거룩한 보좌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거룩한 도성에 가까와질수록 그 도시 사방에 널려 있는 죄악들을 목도하게 되었다. 로마에 있는 동안 그는 교황의 비행과 그 밖의 다른 고위 성직자들의 타락상에 대하고 보고 듣게 되었다.뿐만 아니라 루터는 여러 수도원을 다니면서 사제들이 너무나 무식하고 터무니없는 미신에 빠져 있으며 심지어 그 중의 일부는 불신자들이며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들까지 끼어 있음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로마에 4주간을 있었다. 루터는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심문받기 위하여 끌려 나오실 때 빌라도가 서 있었다는 빌라도의 계단이 기적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옮겨져 왔으며 누구든지 맨무릎으로 그 계단을 오르면 죄사함을 받는다고 주장하여 루터도 자기의 할아버지를 연옥에서 건져내려고 한 계단을 오를 때 마다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빌라도의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나 그가 꼭대기에 올라갔을 때 ‘그것이 정말일까?’하는 생각이 떠 올랐다. 로마 방문은 루터에게 있어서 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로마에 대하여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지옥이 있다면 바로 로마가 그 위에 세워져 있다”고 서슴없이 말하였다. 비텐베르크에 돌아온 루터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515년 교회에서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하던 사제들과는 다른 설교를 하였다. 기독교의 진리를 분명히 설명해 주었다.이런 가운데 교황은 로마에 성 베드로 성당을 재건하기로 하였다. 그 막대한 경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각 지역에서  들어온 기부금과 특별한 면죄부를 판매하여 그 수익금을 성당 건축에 쓴다는 계획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어떤 독일인들은 비록 그 당시에는 죄를 범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연옥에서 보낼 기간을 탕감받기 위하여 면죄부를 사기도 하였고, 이미 죽은 사랑하는 자들의 영혼을 연옥의 고통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면죄부를 사야 한다고 믿었다. 신부들은 “돈이 헌금함 속에 ‘땡그랑’하고 떨어지는 순간 영혼이 연옥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말하였다. 또 직분을 팔아서 기름을 마련하였다. 이에 루터의 분노는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면죄부를 맹렬하게 공격하면서 면죄부의 죄악상을 간결하게 열거한 95 개조의 항의문을  1517년 10월 31일 정오에 비텐베르크에 있는 「성곽교회」의 문에다 붙였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루터의 항의문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읽고 복사해서 온 독일에 퍼뜨렸으며 얼마 되지 않아서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많은 사람들이 루터의 용기를 찬양하였으며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였다. 처음에 교황은 이런 문제를 가볍게 취급하였으나 그것이 자기의 권위와 교회의 교리를 심각하게 위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태도를 바꾸었다. 그는 루터에게 항의문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고 로마로 소환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자기가 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라고 대답하였고, 또 자기의 교리적 원칙을 포기할 수 없다고 분명히 하였다. 이리하여 교황은 루터를 파문시켰다.  1520년 6월 15일자로 루터를 정죄하고 그의 저술들을 불태우라는 로마의 교서가 발송되었다.루터는 많은 군중들과 학생들과 교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황의 교서를 불태움으로써 교황권을 부정한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그는 교서를 불태우면서 “당신(교황)이 여호와의 거룩한 자(그리스도)를 괴롭힌 것처럼 영원한 불이 당신을 괴롭힐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이어서 루터는 자기의 글을 통하여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규정하였다. 이리하여 종교개혁은 본 궤도도 진입하게 되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핍박을 받고 있을 때, 다윗에게 큰 도움을 준 진정한 친구 요나단이 있었다. 이와 같이 루터가 투쟁과 박해의 시대에 루터의 친구인 필립 멜랑톤은 루터의 귀한 도움이 되어 주었다. 멜랑톤은 매우 조심성이 있는 사람이었으나 루터처럼 용기나 담대함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뛰어난 학식과 논리를 통하여 루터에게 큰 도움이 되어 주었다.놀라운 재능, 해박한 지식, 높은 학문성, 풍부한 교양 때문에 멜랑톤은 「독일의 스승」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멜랑톤은 루터의 열심과 정열이 한도를 넘어 과격해지지 않고 지혜롭고 온건하게 발휘되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이제 교황의 서신을 불에 태워버린 루터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들어섰다. 승리가 아니면 패배뿐이었다. 당시 최대의 군주 카알 5세는 19세의 나이로 1519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는 로마 카톨릭의 충실한 신자였으므로 루터에게 보름서 회의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루터의 친구들은 한 세기 전에 요한 후스에게 약속되었던 안전이 지켜지지 않아서 후스가 화형 당한 것을 상기시키면서 가지 말라고 만류하였으나, 루터는 “보름스에 있는 집들의 지붕 위에 있는 기와장 만큼 많은 수의 마귀가 있다할 지라도 나는 가겠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보름스로 가면서 그 유명한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짓는다.1521년  4월 16일 루터는 보름스에 도착하였다.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마귀의 화신으로 생각되었던 루터의 모습을 구경하려고 하였다. 역사적인 사건이었던만큼 창문과 지붕까지도 구경꾼들로 가득찼다. 루터가 회의장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 앞에는 황제와 귀족들 또 제국의 제후들 등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이 서 있었으며 30명의 대주교들, 주교들과 수도원장들, 교황 대사들, 그리고 자유시 대표자들 등 206명이 있었다. 사회자인 엑크는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루터의 저서가 루터의 것인지 물었으며, 또 교회가 승인하지 않은 책들 속에 포함된 그의 교리들을 취소할 용의는 없는지 물었다. 이에 루터는 그 책들은 자기가 쓴 책이며, 그리고 교리의 문제는 잠시 시간을 달라고 하였다. 회의는 하루 연기되었고 루터는 밤새 기도하였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다고 그의 친구가 내용을 전한다.“오 ! 나의 하나님이여, 나와 함께 하시며 세상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나를 지켜 주소서. 오직 주님만이 나를 보호하실 수 있나이다. 나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이번 일은 나의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예가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나는 헛된 인간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합니다. 오 하나님이여, 나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주님의 얼굴을 숨기지 마옵소서. 주님께서 나를 부르셨으므로 이제 나의 곁에 오소서.  나의 보호자시요 방패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 합니다.” 다음 날 루터는 온 세상을 흔들 만한 연설을 하였다. 처음에는 라틴어로 다음에는 독일어로 했으며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나는 성경과 정상적인 이성에 의하여 정죄 되지 않는 한 내가 말한 어느 것도 철회하지 않겠다. 그것은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를 하는 교황이나 교회 회의들의 주장을 내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바 되었고 내가 인용한 성경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 양심을 거스리며 어떤 일을 하는 것은 불안하고 위험스러운 일이다. 나는 여기에 선다. 나는 달리 어찌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이처럼 비타협적인 자세로 말미암아 회의는 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웅성거리고 사회자 엑크 박사는 루터에게 경고하기를 교회 회의가 개인 양심보다 더 안전하게 진리로 인도한다고 하였다. 황제도 용납 못하였고, 신하들에게 “어떻게 일개 수도승이 옳고 천년 동안 내려온 기독교의 증거가 잘못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황제가 신변보장을 해 주었으므로 루터는 호위를 받는 가운데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 나중에 루터는 보름스를 떠나 비텐베르크로 향하였다. 그후 루터는 제국의 파문령을 받았다. 그는 범법자로 선고되었으므로 누구든지 루터에게 숙소를 제공하거나 음식을 주는 사람은 황제에 대하여 반역을 시도하는 혐의를 받게 되는 것이다. 보름스를 떠난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가는 길에서 중무장한 군인들에게 납치를 당한다. 그리하여 그는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가게 되는데, 이 일은 루터의 친구들과 선제후 프레테릭이 도모한 일이었다. 그들은 루터를 소란스럽고 대적들이 많은 세상으로부터 잠시 데려와 그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안전한 곳에 피신시킨 것이다. 루터는 여기서 약 1년 동안 은신하여 있으면서 주로 성경을 연구하면서 보냈다. 특히 그는 여기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데 주력하였다.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한 루터는 11주만에 독일어 신약성경의 초고를 완성하였다. 그리하여 1522 년부터는 독일 서점에서 목수나 노동자들의 일 주일 품삯 정도의 가격으로 루터의 성경이 날개돋힌 듯이 팔리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에는 구약성경이 1534년에 완성이 되었다. 루터는 죽는 날까지 바쁘게 지냈다. 그는 약 25년 동안 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오늘날 번역으로 우리가 구입할 수 있는 것만도 약 55권이 된다. 루터는 1546년 그가 태어났던 아이슬레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는 비텐베르크에 있는 교회의 묘지에 묻혔다. 그곳은 29 년 전에 그 교회의 문에다 유명한 95 개조의 항의문을 붙였던 곳이다.3. 개혁원리① 이신득의(以神得義)- 믿음으로 구원얻는다. 선행이 아니다.② 만민제사장(萬民祭司長)- 신자는 누구나 바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다.③ 오직 성경으로 - 전통과 교황교서를 배격제5-3장. 존 칼빈의 종교개혁1. 그의 생애 (1509-1564)① 1507년 7월 10일 프랑스 노욘에서 출생② 부친은 법율가며 감독서기, 모친은 경건한 신앙인③ 교육 - 14세 때 프랑스로 유학 신학과 법학공부④ 올네안 대학교수로 있으면서 헬라성경과 독일 개혁저서를 연구함⑤ 1533년 복음주의 연설을 기초하다 박해를 받아, 스위스의 바젤로 피난함   여기서 「기독교강요」을 저술⑥ 제네바에서 개혁을 하면서 종생을 바침 (1564년 5월 24일 55세 일기)파리에서 칼빈은 고대 로마 시대의 저술가인 세네카가 쓴 책에 대한 주석을 집필하여 최초의 작품을 저술하였다. 이 때에 칼빈은 독일 개혁자들의 교리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었고, 그들은 칼빈의 마음에 강한 충격을 주었다. 칼빈은 빛나는 눈을 가진 창백한 얼굴의 젊은이였다. 그는 나이에 비해 침착하고 진지한 성품을 가졌다. 칼빈은 책을 읽을 때 가장 즐거웠다. 그의 판단은 거의 정확했으며 결코 흥분이나 과장된 기분에 휩싸이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감정보다는 지성에 순종하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는 심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개혁자들 중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칼빈 처럼 그렇게 큰 유익을 끼친 사람이 없었다. 또 아무도 칼빈 처럼 기도를 통하여 성경을 그렇게 깊이 파헤쳐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진리의 금광을 캐낸 사람은 없었다. 오를레안 교수로 있으면서 국가적으로 멸시받고 박해받는 파리의 개신교도들 편에 섰다. 칼빈은 그들을 방문하여 위로하였다. 그의 친구 니콜라스 콥이 파리 대학의 총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칼빈은 그를 도와서 총장 취임 연설 때 로마 카톨릭을 공격하고 개혁자들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도록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국왕 프란시스1세는 그들을 체포하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칼빈은 스위스의 바젤로 피신을 하게 된다. 당시에 칼빈은 두 가지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다. 먼저 그는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로버트라는 사람을 돕는 일과 하나는 나중에 ꡔ기독교 강요ꡕ라고 불리우진 책을 저술하고 있었다. 그 책은 1535년 바젤에서 출판되었다. 그 책은 시간이 갈수록 증보되어 출판되었으며 마침내 성경을 제외하고는 기독교 신앙에 관해 인쇄된 책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책이 되었다.2. 제네바에서 그의 활동① 파렐(Farel)의 요청으로 제네바로 가서 개혁에 종사함② 그의 지위는 제네바의 평의회의 목사의원이자 성경해석자로   특별지위를 가짐③ 파렐과 함께 신정일치(神政一致)의 이상도시 건설을 주장하여   풍속개량 및 규율엄정에 힘씀④ 시민들이 견디지를 못하여 반항이 일어나 칼빈과 파렐은 국외로 추방됨⑤ 스트라스버그에 피난하여 3년간 칼빈주석을 작성⑥ 1541년 다시 제네바의 초청으로 23년간 개혁에 성공함⑦ 대학을 설립하고 학장이 됨바젤에서 1 년 남짓 보낸 후 피신을 가는 도중 제네바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하였다. 당시 제네바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던 프랑스의 개혁자 파렐은 칼빈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27세의 칼빈에게 설득하였다. 칼빈은 거절하였으나 파렝은 불같이 칼빈을 설득하였다. 사실 칼빈은 내성적이었고 수줍어하는 성격이었으며 어떤 특별한 직무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였으나 파렐이 심지어 자기의 부탁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칼빈의 앞 길을 저주하실 것이라고 하는 바람에 결국 칼빈은 여행을 포기하고 말았다.파렐과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의 강력한 전파자 들이었으므로 청중들도 많았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청중들이 단지 듣기만 하는 것으로 만족치 않고 그들이 말씀을 행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였다. 이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그들은 엄격한 권징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이런 권징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결국 이들에 의하여 이 두 사람은 제네바에 쫒겨나게 되었다. 이제 종교개혁이 비참한 실패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에 와서 약 3 년 동안 살았다. 그 동안에 로마 교회는 제네바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칼빈의 친구들이 제네바 의회의 주도권을 잡아 다시 칼빈을 제네바로 초청하였다. 칼빈은 망설였다. 자존심 문제 때문이 아니라, 과여 자신이 제네바에서 요구하는 사역에 합당한 사람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1541 년 그는 제네바로 돌아왔다. 그는 대단한 환영을 받았으며 제네바 시민들의 사회 생활과 종교 생활을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대로 지도하는 사역을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인구 13,000명의 인구가 사는 도시에서 일주일에 17 번의 설교가 행하여졌다. 칼빈은 주일에 두 번씩 설교를 하였고, 거의 매일 설교를 하였다.그러나 모든 시민들이 세상적인 정욕을 버리고 성경이 요구하는 대로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칼빈은 그런 사람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사람들을 주님의 길로 인도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젊은이들을 교육하는데 큰 힘을 쏟았다. 젊은이들의 교육을 위하여 모든 것들을 고려한 철저한 계획을 세웠다. 나이가 어린 학생들에게는 요리문답을 가르치고 교회에서는 공과를 가르쳤다. 그 다음에는 학교로 진학시켜 읽기, 쓰기, 셈하기뿐만 아니라 라틴어와 헬라어와 수사학과 논리학도 배우게 하였다. 물론 규칙적으로 성경을 가르쳤다. 이리하여 칼빈 당시와 그 후 수 년 동안에 제네바에서 뛰어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수십 명 나왔다.제네바에서 칼빈이 활동할 때, 1546년 루터가 죽은 후 로마 카톨릭의 오류를 깨달은 많은 사람들이 칼빈을 찾아와 가르침과 지도를 받으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제네바는 종교개혁 지도자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제네바는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피난처로 문호를 개방하였기에 박해를 피해 피난하는 자들의 집결처처럼 되었다. 피신한 사람들 중에는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도 있었다.3. 유럽에서의 칼빈의 세력① 프랑스 - 휴거노파② 영 국  - 청교도③ 스코틀란드 - 죤 낙스⑤ 네델란드, 독일의 프리드리히 3세 등4. 칼빈주의 발전이유① 신학이 통일적이기에② 교회기치가 선명하여 세계 각국에 적용되기 쉬움③ 기독교 생활훈련에 중점을 둠④ 훌륭한 후계자 「베자」가 있었음5. 칼빈의 신학① 하나님의 주권, 섭리 주장② 예정설③ 속죄설 - 죄의 벌할 필요를 인정, 형벌대수설④ 성찬 - 기념설을 주장. 영적은혜에 치중⑤ 칼빈주의 5대강령   a. 인간의 전적타락   b. 무조건 선택   c. 제한속죄   d. 불가항력적인 은혜   e. 성도의 절대보호칼빈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계획인 예정론을 바르게 가르쳤으며,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그대로 믿고, 또 선포하였다.  그는 사도시대 이래로 가장 위대한 기독교 교사였다. 그는 병약함에도 불구하고 잦은 금식과 수많은 연구와 설교, 주석집필, 그리고 그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유럽의 수많은 신교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 등으로 얼마 살지를 못하였다.  그는 54세로 죽을 때도 그의 추종자들이 새로운 종파를 만들까 염려하여 자기의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못하도록 공동묘지에 안장하도록 하였다. 그의 논문과 수많은 설교와 주석, 그리고 빛나는 기독교강요는 그의 영원한 기념비이고, 세상에 전투적인 교회가 존재하고, 성경의 영원한 진리를 붙잡으려는 사람이 있는 한, 칼빈의 개혁되어질 것이다.칼빈은 아주 병약했는데, 금식과 연구 때문에 몸이 약하여졌다. 칼빈은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낮에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칼빈의 업적은 건강한 사람일지라도 힘겨운 것이었다. 특히 자주 앓아 눕고 몸이 약했던 칼빈에게는 더 벅찼다. 그러나 칼빈은 자기 앞에 놓인 수많은 과업 앞에서 머뭇거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설교하지 않을 때는 주석을 쓰고 주석을 쓰지 않을 때는 많은 사람들의 상담에 답하며 용기를 주는 편지를 썼다. 종교개혁의 시발이 휘클리프, 후스, 사보나롤라 등이라면 루터는 튼튼한 기초를 세웠고, 칼빈은 이 거대한 사역을 완성시킨 사람이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칼빈을 비난하면서 칼빈이 가르친 교리가 예정론 이외에 무엇이 있느냐고 말하지만, 그 사람은 칼빈을 도무지 모르는 사람이다. 더욱 서구 문명사에서 칼빈을 제외한다는 것은 “마치 한쪽 눈을 감고 역사를 읽는 것과 같다.”라는 표현은 참으로 합당한 지적이다. 종교개혁의 역사가 전개되어 갈수록 이 표현의 진리는 계속되어 질 것이다.♠ 참고 -  칼빈의 설교기독교는 처음부터 설교를 중시(重視)하는 종교이다.  예수님을 비롯하여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 그리고 초대 교부들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카톨릭의 부패와 함께 없어져 버렸으나,  종교개혁을 통하여 다시 회복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의 설교는 언제나 성경이 기초가 되었다.  세상윤리, 사회개혁, 문자적 비평 등의 설교는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 할 지라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주지 못하고 영혼의 갈증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설교자로서 칼빈의 활동은 스트라스버그(Strasburg)에서의 3년간(1538-1541년)과 다시 제네바(Geneva)에서 약 20년간이었다.  칼빈의 설교는 속기사인 프랑스 사람 Denis Raguenier이 속기한 1549-1560년 11월 3일 까지의 설교가 남아있다.  더러는 빠진 것도 있지만 약 2,000편의 설교가 문서화되어 있다.일반적으로 칼빈은 주일에 두 번 설교를 하였다.  평일에도 월,수,금요일에 설교를 하였다.  설교시간은 약 한 시간 정도였다. 말은 비교적 빠른 편이었고,연속적 성경강해인데, 깊은 명상과 기도로 준비하고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설교를 하였다.  그는 자기가 생각했던 것을 노트하지 않고 놀라운 암기력을 발휘해서 의도했던 내용을 전하곤 하였다. 그는 청중들에게 퍽 엄격한 편이었다.  그는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는 주위를 산만하게 한다고 책망하였으며, 설교시간에 조는 사람이나 설교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은 엄히 책망을 하였다.  칼빈은 주장하기를 설교자가 성경의 해석만을 하고 청중의 감화를 치중하지 않는 다면 그런 설교는 죽은 설교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설교를 하면서  청중들의 의지에 많은 호소를 하였다.  자기가 전하는 설교가 단순한 성경 지식만을 전하는 것이라면 하나의 냉담한 이론 밖에 안될 것이라고 하였다.그러나 칼빈의 설교가 꼭 청중들에게 환영만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공개적으로 그의 설교를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설교의 결과가 자기가 바라는 대로 잘 되어지질 않을 때, 그는 낙심을 하였다. 심지어 자신의 설교에 대한 감격이 점차 적어지자 그는 하나님이 허락만 한다면 죽고 싶다고 탄식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낙심을 않고 기침과 몸의 고통을 당해가면서 끝까지 설교에 진력(盡力)을 다 하였다. 그는 자신을 “말씀의 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교인들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다고 생각되는 것, 즉 복음을 증거하였지 회중의 변덕스런 기분에 맞추기 위해서 설교하지는 아니 하였다.  또 자신을 교인의 우두머리로 생각지도 아니했다. 이것이 칼빈의 설교자로서의 자세였다.그리고 교인들에게  “우리는 단순히 알지 못하는 무엇을 듣기 위하여 설교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할 것을 자극받기 위하여 오는 것이다”하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설교를 통하여 교인들에게 찾아오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설교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청중들에게 적용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 하였다.   그래서 그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설교할 자료를 얻기 위함이 아니고, 자신을 통하여 교회에 전파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엇다. 그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성경 구절에 대하여서는 솔직히 모른다고 하였고, 또 교인들에게 성경을 읽을 것과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가를 알아보도록 권면하였다.칼빈의 설교의 최대의 특징은 회개에 강조를 두었다.  그는 성경적 설교의 목적은 단순한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회개에 있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확신 아래서 그는 해박한 지식을 과시하거나 설교에 기교를 부리지 아니하였다. 칼빈은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고 (Soli Deo Gloria) 인간의 가치에 대하여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오직 인간은 성령님의 도구임을 역설하였다.  그래서 칼빈은 설교자의 임무가 인간의 어떤 기호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말씀하신 바”를 증거하고 전파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칼빈의 설교는 하나님께서 앞에 계시는 것처럼 설교를 하였으며, 서기가 임금 앞에서 말하듯 하며, 천지의 대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도구로서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다는 입장에서 설교를 하였다.그는 과격한 말을 가끔 사용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언어가 소박하고 강직한 때문도 있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에 퍼부은 악담이 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살았고, 또 그렇게 설교를 하였고, 하나님은 그의 친구였으며 그에게 말씀의 깨달음과 행동을 주셨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역사하셨다.  칼빈의 설교 가운데는 성경의 어느 부분을 해석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보고 있는 것이 또 다른 최대의 특징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제5-4장. 칼빈주의 VS 알미니안주의칼빈주의의 엄격한 경건에 대한 반동(反動)은 인본주의(人本主義)의 전통이 소멸되지 않은 네델란드에서 일어났다.  야곱 헤르만이라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택자와 불택자를 정하신 후, 그 뜻을 수행시키는 수단으로 타락을 허락하셨다는 주장에 대하여 반론(反論)을 제기하였다. 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베풀어 주실 때 죄인에게 그 구원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자유의지도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가 헛되이 죽으신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1. 알미니안 (Arminius)① 알미니우스라고 불리우는 야곱 헤르만은 1560년 암스테르담에서 출생함② 제네바에 유학하고 1588년 암스테르담 목사가 됨③ 학식과 웅변이 뛰어나고 성품이 온화함④ 1603년 라이덴 대학의 신학교수가 됨.  1609년 사망⑤ 인간의 행위에 의한 구원을 설파함.⑥ 그는 1609년에 사망하였으나, 그의 추종자들로 인하여 네델란드의   신교에서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간에 큰 충돌이 일어났다.2.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다른점구분알미니안 주의칼빈주의 예정(豫定)예지예정(豫知豫定)예지없는 예정속죄(贖罪)그리스도의 구원은 만민을 위해택자를 위해(制限贖罪)은총(恩寵)神恩에 대하여 항거할 수 있음항거할 수 없음사람의성질반선반악하여 자유의지가 잔존전적으로 타락하였음3. 돌트(Dort)회의① 1618년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상이점(相異點)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종교회의를 돌트에서 개최함.② 1618년 11월 13일 - 1619년 5월 9일의 9개월에 걸쳐서   145회의 회의를 함③ 회의 도중 알미니안 파가 회의 결정을 불복결의하여 축출함④ 문서로 토론함⑤ 5월 6일 칼빈주의 신조공포.   결의 : 하나님의 선택은 멸망할 자 중에 구원얻을 자를 선택함⑥ 300여명의 알미니안주의 자들이 공직 박탈의 처분을 받고 국외로  추방을 당했다.그러나 가슴을 뜨겁게하는 그의 경건은 영국에 큰 영향을 미쳐서 후에 존 훼슬리(John Wesley)의 감리교로 이어졌다.제5-5장. 영국의 개혁(改革)1. 헨리(Henry)8세  1509-1547① 죽을 때까지 개혁신앙의 원수로 지냈다.   교황 레오10세(LeoX)로 부터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까지 받았다.② 그의 이혼사건으로 인하여 교황과 사이가 벌어짐.♠ 참고 : 이혼사건헨리8세는 죽은 동생 아더(Ather)의  부인인 카타리나(Catherine)와 결혼 을 을 억지를 부려 교황의 승락을 받아 하였으나, 15년 후에 아들이 없다고 트집을 부려, 이 결혼이 무효임을 선언해 달라고 교황에게 요청하였으나 당시의 교황인 클레멘트 7세는 거절함.② 후에 궁녀 앤 보렌(An Boleyn)과 결혼(엘리자베스1세 여왕의 生母)   교황은 이것을 반대함③ 교황과 단절, 신교도인 캔트베리 대주교인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의 승인을 받아 결혼함.영국국교 창설.교회수장령(敎會首長令)발포함 (1535년)2. 에드와드6세① 헨리8세 셋째 왕후 쟌 스모울(Jane Seymour)의 출생으로   9세에 즉위하여 7년간 재위함. 개신교도인 크램머가 섭정함.② 대륙으로부터 개혁파들을 받아들임.  칼빈과 자주 연락함③ 교회 내의 우상제거3. 메리여왕 즉위① 모후인 앤 보렌의 결혼이 불법화된 후 사생아 취급받아 20년 규중생활을   하다  1553년 37세의 나이로 즉위② 즉위 즉시 로마교에 복귀함③ 수많은 신교도를 죽임. 300여명 화형시킴. 크램머도 화형으로 순교   개신교도들은 유럽으로 피신함.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은혜로                   영국에서 결코 꺼지지 않는                양초가 되어 불타게 될 것입니다.”④ 민심을 잃은 후, 1558년 실의의 일생을 마침4. 엘리자베스 여왕① 1558년 26세로 즉위하여 46년간 재위, 결혼않음.② 정치를 잘 하였으나, 신구교 양교도를 철저히 탄압하고, 영국 국교회에의   복종을 강요함.③ 교회수장령을 국회에서 통과시킴 (1559년)④ 이때에 청교도 운동이 일어남5. 죤 낙스(John Knox)의 스코틀랜드의 개혁스코틀랜드의 개혁의 기수는 누구보다 담대하였던 죤 낙스를 통하여 되어졌다.  그는 스코틀랜드에 개신교 교리의 체계를 세워주고 예배 방식을 확립하였다.  메리 여왕의 박해시 그는 독일과 프랑스로 피신을 하였다. 칼빈이 있는 제네바에서 4년간 머물면서 “사도 시대 이후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부러워하였다. 존 낙스의 영향력으로 스코틀랜드에 장로교의 정치체계가 들어왔다. 1559년 스코틀랜드에 귀국하여 우상 숭배를 강력하게 배척하고 담대히 진리를 선포하였다.  “나는 검은 것은 검다 흰 것은 희다는 식으로 악에 대하여 담대하게 지적하기를 배웠다”고 말하며 진리에 대하여서는 조금의 양보도 하질 않았다. “나에게 만 명의 무장한 적군이 우리 영토에 침략해 들어오는 것보다 한 번의 미사가 더 두렵다”고 역설하였다.  이런 낙스에게 메리 여왕은 큰 대적이 되었다.  1572년 낙스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무덤에는 「여기 결코 인간의 얼굴을 두려워 하지 않은 이가 잠들어 있노라」라고 적혀있다.제5-6장. 프랑스와 네델란드의 종교개혁1. 프랑스의 위그노(1) 프랑스의 환경종교개혁의 가르침이 전파될 당시의 프랑스 왕은 프란시스1세 였다. 그는 개신교도들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1545년까지 수천 명이 그의 치하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를 당하였다. 1547년 프란시스1세의 사망으로 그의 아들 앙리2세 (Henry II)는 더 혹독하게 핍박을 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제네바로 피신을 하였다.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을 위그노(Huguenots)라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하위귀족, 상인, 전문직업인 등으로 구성되었다.(2) 바돌로매 대학살과 낭트칙령① 당시 프랑스왕 샤를르 9세의 누이이며 카톨릭 교도인 마가렛 (Margaret)과   개신교도인 나르바 왕국(스페인 국경 근처의 소왕국)의 왕인 앙리(Henry)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② 이 날은 1572년 8월 24일로 「聖 바돌로매의 날」이었는데, 이 날 밤에 “사악한   이세벨”인 샤를르9세의 모친인 카트린느(Catherine) 은 자기 아들인 왕에게   찾아가서 “위그노들이 왕족과 카톨릭 지도자들을 살할려고 한다”고 말하며 모든   개신교도들을 죽일 것을 서명 요구하였다.③ 8월 24일 자정을 기하여 모든 개신교도들을 대학살하기 시작함. 개신교도 지도자   인  꼴리니 제독의 목을 자르고, 손과 몸뚱이를 3일간 파리 시내에 끌고 다닌후   교황에게 보냄. 무서운 대학살은 3일간 계속되고 수만명이 죽음.④ 교황은 축포를 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함.⑤ 후에 샤를르 9세는 발작증세를 일으켜 24세의 나이로 죽음.⑥ 후에 프랑스의 왕이 된 바르바의 앙리4세가 ꡔ낭트칙령ꡕ   (Edict of Nantes)을 반포하여 위그노의 권리보장과 예배자유를 선포함.2. 네델란드의 종교개혁네델란드에도 개신교의 신앙이 독일로부터 먼저 들어왔다.  그후 칼빈의 명쾌한 교리의 영향이 나타나면서 칼빈에게로 많이 기울어졌다.  당시 황제인 칼 5세 (Charles V)는 개신교를 증오한 사람이었다.  1523-1555년까지 종교재판을 통하여 5,000명 이상의 사람이 고문을 당하고, 화형과 교수형, 그리고 생매장을 당하며 순교를 하였다. 그러나 종교 개혁의 사상은 더욱 확산되어 갔다.그후 그의 아들인 필립 2세(영국의 메리여왕의 남편)는 더 심하게 박해를 하였다.  이 박해에 반기를 든 사람은 오렌지의 윌리엄공 (William of Orange)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루터 교도가 되었다가 나중에 칼빈주의자가 되었다.  화란의 공화국 창시자로서도 유명하다. 1609년 마침내 네델란드는 스페인과 교황의 멍에로 부터 벗어나서 종교의 자유를 갖게 되었다.제5-7장. 재세례파와 예수회1. 재세례파(1) 기원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된 운동이다.  쯔윙글리의 성경관이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생각한 그레벨, 만즈,후프마이어등이 결성하여서 1525년 부터 행동을 취하였다.(2) 조직주요 비평은 유아세례에 대한 성경적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이다.그리하여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다시 세례를 주었다.이리하여 「재세례교도」라는 별명을 얻었다.(3)결과카톨릭과 개신교 모두에게 이단으로 취급을 받았다.  그리하여 혹독한 핍박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거나 죽었다.   그러나 모라비아, 독일, 스위스, 화란 등지의 서민층 들에게 급속하게 번져 나갔다.(4) 그들의 신앙① 초대 교회 신앙과 생활과 행위 모방에 힘씀② 유아세례 반대③ 예정론을 반대하여 자력을 중히 여김2. 예수회(1) 개관① 1534년 스페인 사람 익나티우스 로욜라 (Ignatius Loyola)가 창설한  카톨릭 단체이다.② 주된 목적은 개신교를 완전히 박멸하는데 있었다.③ 오직 교황에 대하여서만 책임을 지고 다른 모든 법들에 대하여서는   제재를 받지 않았다.④ 귀족 자제들의 교육을 통하여 침투한 그들의 영향력은 거대한 것이었다.⑤ 예수회의 가장 악명높은 원리는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카톨릭 교회에 유익이 된다면 살인도 서슴치 않았다. 개신교를 위하여 낭트칙령을   반포한 앙리4세가 이들의 손에 의하여 암살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2) 예수회의 금지와 부활① 예수회의 타락㉠ 유명한 지도자가 나오질 않았으며㉡ 부(富)을 탐내어 안일을 구하였으며㉢ 각종 음모들이 드러나 약점이 노출되었으며㉣ 중국에서 돌아온 선교사들이  중국 풍속 습관에 영합하여 기독교   본질을 망각하는 행동이 나타남② 로마교 제국에서 추방됨㉠ 파라과이에서 토인을 훈련시켜 스페인과 포루투갈에게 저항한 사건이   일어났음㉡ 포루투갈 국왕 요셉 1세를 암살할려는 음모가 예수회의 계획으로 몰림㉢ 1759년 포르투갈과 그 영지에서 추방되고 재산은 몰수됨㉣ 프랑스와 스페인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타남㉤ 1773년 교황 클레멘트 14세는 예수수회의 금지를 명함③ 1814년 교황 비오7세가 다시 예수회의 재건을 허락함.   지금은 무서운 세력으로 자라고 있음.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교회사 : 내주의 나라와제6장. 근대의 기독교제6-1장. 청교도운동, 웨스트민스트회의1.청교도 운동(1)청교도의 생성엘리자벳 영왕이 즉위하니 대륙으로 피난갔던 개혁교도 800여명이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제네바풍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로서 로마교 개혁하려 하기 때문에 이들을 청교도라고 하였다. 엘리자벳 여왕은 종교통일령으로 이들을 핍박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성경적 근거가 없는 예배는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모독으로 생각하였으며 성경으로 증명할 수 없는 복장과 의식에 대하여도 반대하였다.(2)지도자와 학자들● 토마스 카트라잇 (Thomas Cartright) 1535-1603신학교수로 박학 웅변에 능하였으며 성경에 합한 정치는 장로정치라고 주장하였다.● 존 번연 (Bunyan John) 1628-1688● 밀턴 (Milton John) 1608-1674□ 엘리자베드 치세하의 영국 청교도17세기에 들어와서 영국에서 청교도 운동으로 시작된 것은 엘리자베드 여왕의 치세 때이다. 청교도 신앙은 영국 국교회 안에서 급속히 대단히 막강한 세력이 되었다. 엘리자베드의 교회 정책은 두 개의 의회 법령에 근거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여왕을 영국 국교회의 최고 통치자로 선언하는 「수장령」(Act of Supremacy)과 「통일령」(Act of Uniformity)이다.  이 통일령에 의하여 다른 기도서를 사용하는 것은 위법이고, 주일이나 성일(聖日)에 교회 의식에 한 번 불참하면 1실링씩의 벌금을 물게 하였는데, 이는 노동자의 일주일 임금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영국은 전반적으로 이러한 것을 받아들였으나 「청교도」(Puritan)들은 한층 더 과감한 변화를 요구하였다. 청교도들이 처음으로 개입하게 된 분쟁은 예복에 대한 것이었다. 예복이란 성직자들이 입도록 교회에서 제정한 것을 말한다. 일부 청교도들에게는 성직자의 예복이 “적그리스도의 옷”이었으며 또한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과 같이 간주되었다. 여왕은 자기의 정책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혹독한 탄압을 가하였다. 여왕은 청교도들을 뿌리 뽑을 뿐만 아니라 그 옹호자들까지도 제거하려고 하였다.1603년 엘리자베드 여왕이 죽고 스코들랜드의 메리 여왕과 그녀의 두번째 남편 단리(Darnley)경 사이에 낳은 아들 제임스 1세(James I)가 왕위에 오르자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제임스 1세는 장로교인으로 교육을 받았으나 영국으로 오자 영국 국교회의 원리들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청교도 목사들은 국왕에게 「교황의 누더기」로 불리우는 요소들을 제거하기를 요구하였다. 「교황의 누더기」란 종교개혁 이후에도 계속 남아있던 로마 교회의 의식들을 말한다. 왕은 그 청원서를 별로 달갑게 생각 않았지만 1604년 햄프턴 궁에서 회의를 소집하였다. 여기서 회의는 결렬되고 말았지만, 한 가지 좋은 결과는 왕이 성경의 새로운 번역을 제안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611년 ꡔ흠정역ꡕ(the Authorized Version)이 출판되었다. 흠정역은 일반적인 평가에 있어서 영어로 나온 역본 중에 가장 휼륭한 것으로 인정받았다. 유식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 똑같이 즐겨 읽었으며 많은 관용구와 표현들을 만들어 내어 영어의 발전에 이바지 하였다.2.웨스트민스트 회의 (1643. 7. 1)(1) 회의 동기● 찰스 1세가 즉위하여 왕권신수설을 강조하고 알미니안파를 우대하며 칼빈파에   동정적인 국회를 탄압하여 국회를 소집치 않음.● 세금과 종교적인 문제로 반항하는 스코틀랜드와 전쟁하기 위하여 1640년   국회를 소집하니 칼빈파에 동정적인 하원에서 비협조적으로 나옴.● 의회는 감독정치를 폐지하고 웨스트민스트 신학 시회의를 소집하여 영국의   교리와 신조와 정치, 의식을 새로 제정코자 함.● 회원 :  목사 121명  귀족 18명  하원의원 20명● 결의 :  신앙고백서 (1648년 통과)  대,소요리문답 (1647년 통과)  예배 모범서□ 초기 스튜어트 왕조하의 청교도 신앙17세기 초반에는 청교도들이 영국에서 꾸준하고도 급속한 진전을 보였다. 이러한 사실은 많은 수는 아닐지라도 하원(下院)에서 그들을 지지하는 의원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캠브리지 시에서는 청교도들이 크게 번성하였다.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찰스1세(Charles I)가 즉위하였다. 찰스는 카톨릭 교도인 프랑스의 앙리에타 마리아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개신교 세력이 주도적인 의회의 강한 불만을 사게 되었다. 찰스는 즉위 초 5년 동안 정치적인 문제 외에도 항상 의회와 충돌하였다. 이리하여 1629년 왕은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통치하기로 결정하였으며 11년 동안 그렇게 하였다. 그후 왕은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치루기 위하여 군대를 양성코져 하였으나 재정난에 부딪쳐 군대를 양성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의회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막상 의회가 열리자 의회는 왕에게 독재혐의를 들어 기소하였으며 의회의 뜻이 모든 것을 지배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리하여 1642년에 이르러 왕과 의회 사이의 반목은 아주 깊어져 전쟁은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두 번에 걸친 내란(1642-1648년)에서 의회의 군대가 승리하였으며 1649년 찰스 1세는 처형되고 말았다. 의회와 왕 사이에는 1642년 전쟁이 벌어졌으며 그 결과 의회 지도자요 청교도였던 죤 핌은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어 스코틀랜드의 군대가 참전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643년 동맹과 맹약이 성립되어 스코틀랜드의 군대가 참전하였다. 이 조약시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교리, 예배 의식, 치리, 그리고 교회 정치 등을 하나님의 말씀과 개혁교회의 가장 모범에 따라 스스로 개혁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이리하여 영국과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교회에서는 가능한 신앙의 일치를 이루기 위한 작업을 수행하였다. (여기는 신앙고백과 교회의 정치형태, 예배 모범, 요리문답 등이 포합되어 있다.)이리하여 이 작업을 하기 위하여 회의를 열었는데, 그 장소는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내에 있는 큰 방이었다. 그러므로 이 모임이 「웨스트민스터 회의」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모임에서 대.소요리문답과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작성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영어를 사용하는 교회와 장로교인들 뿐만 아니라 다른 교파의 신도들에게도 큰 영향력을 미쳤다. 미국의 신앙고백서들도 이 웨스트민스터 희의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교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우리 나라의 모든 장로교회도 다 이것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토마스 카알라일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이제 나이가 들어 죽음을 목전에 두게 될수록 어렸을 때 배웠던 소요리문답의 첫번째 질문이 한층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마음에 다가온다. 그 질문은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였으며 그 대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기는 것」이었다. 전쟁후 영국은 올리버 크롬웰의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후기 스튜어트 왕조하의 영국의 청교도 신앙스튜어트 왕조의 회복은 1660년에 이루어졌다. 찰스2세는 모든 신민(臣民)들에게 양심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약속하엿지만, 얼마 안 가 청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박해를 합법화하기 위하여 법률을 제정하였는데, 그중 한 가지가 1662년에 제정된 「통일령」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모든 성직자들로 하여금 공중 기도서에 있는 모든 내용에 전폭적으로 동의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었다. 양심상 이렇게 할 수 없었던 근 이천 명의 성직자들이 「비국교도」라는 이름으로 생계와 생활의 터전을 빼았겼다. 또 1665년에는 「5 마일 법」 (The Five Miles Act)라는 법이 제정되었다. 이것은 비국교도 성직자들이 도시나 자치 마을의 5마일 이내에 들어오는 것을 금하였다. 이 5 마일법은 비국교도 성직자들의 생계 유지를 봉쇄하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 졌다.찰스 2세의 치하에서 신앙양심의 문제로 고통을 당했던 많은 사람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존 번연(John Buyyan)이다.  그는 영국교회의 성직자는 아니었으나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를 위해서 부르신 「베드포드의 땜장이」였다. 그가 설교하지 않겠노라고 약속하지 않으면 감옥에 넣겠다고 지방 행정장관이 위협하였으나 번연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하지 못하기 보다는 눈꺼풀에 이끼가 끼도록 감옥에 남아 있겠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당신은 아내와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인가?”라고 물었을 때, 번연은 “나는 참으로 그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하여 그는 12 년 동안을 감옥 속에서 지냈으며 가죽 장화의 끈을 만드는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시켜 나갔다. 번연은 비록 정식 교육의 거의 받지 못하였으나 뛰어난 창작력과 통찰력을 통하여 모두 68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ss)이다. 거기에는 「장망성」 (the City of Destruction)에 살던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늘의 도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가 되었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아마도 이 천로역정은 모든 기독교 서적 가운데 성경을 제외하고는 가장 유명한 책일 것이다.1685년에 찰스 2세가 죽자 그의 동생 제임스 2세가 왕위를 물려 받았다. 제임스 2세는 자기가 로마 카톨릭 교도인 사실을 숨기지 않았으며 영국과 스코틀랜드에 카톨릭을 회복시키는 것이 그의 소망이었다. 그는 자기형 찰스 2세처럼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동맹을 맺었다.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위그노를 박해한 장본인이다. 이런 가운데 영국의 정치가들은 오렌지의 윌리엄과 접촉하였다. 그는 영국 왕실과 관계가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찰스 1세의 딸이요, 아내는 제임스 2세의 맏 딸이었다. 윌리엄(후에 윌리엄 3세)은 자기를 영국왕으로 추대하지 응하였다. 이리하여 1688년 화란의 군대를 이끌고 영국에 상륙하지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로마 카톨릭으로 복귀되지 않았다. 1689년의 법은 모든 개신교도들에게 종교적 관용을 베풀었으며 영국의 왕은 개신교여야 할 것을 규정하였다. 교회와 국가 양쪽의 보장을 얻기 위하여 1689년의 「권리장전」이 선포되고 교황주의자는 영원히 영국의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규정하였다. 청교도 지도자인 리차드 백스터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도 시대 이래 돌트 회의와 웨스트민스터 회의보다 더 거룩한 회의는 없었다.”(2) 국왕과 전쟁국회와 국왕이 개전하자 크롬웰이 국회를 도움. 국왕은 패전하고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는 공화정을 선포함.제 6-2 장 . 기독교의 미국전파1. 청교도의 피난과 식민지 건설● 종교의 핍박을 피하여 시작됨.● 1620년 180톤 범선 메이 플라워 호를 타고 120여명의 청교도들이   뉴 잉글랜드에 도착함. 지도자 - 존 로빈슨 등● 1630년 살렘(Salem)에 900여명의 청교도들이 찰스 1세의 국교신봉정책이  더 강경   해 짐으로 청교도들의 정치적, 종교적 픽박을 피해 옴.● 1640년까지 약 2만 여명의 청교도들이 이민 옴.1619년 필그림(순례자)들이 대서양을 건너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들은 새로운 고향으로 실어갈 두 척의 배를 전세 내였다. 1620년 8월 그들은 사우댐프턴 항을 출발하였다. 그러나 두 척의 배 가운데 작은 배 스피드 웰 (Speedwell)에서 물이 새어 들어 30명 가운데 18명이 다시 런던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12 명이 종원이 초과된 메이플라워호(Mayflower)호를 타고 이주하였다. 이 배에는 남자들과 여인들과 아이들을 포함하여 90명의 필그림들이 승선해 있었다. 갑판 아래의 환기 장치는 날씨가 좋았을 때에도 형편없었다. 그들은 비참한 여건 속에서 오직 누워서 신음으로 기도할 뿐이었다. 두 달에 걸친 향해 끝에 「뉴 잉글랜드」에 왔었다. 때는 11월 중순이었고 겨울이 닥쳐오고 있었다. 필그림들이 사용할 수 있는 물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되돌아 갈 수는 없었다. 6개월 동안 절반 이상의 사람이 죽어갔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생존자들은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자 도합 이만 명이 넘는 청교도들이 그들과 합류하였다.“그들이 무엇을 찾아 이처럼 멀리 왔던가? 광산의 빛나는 보석이었던가 ? 바다의 보물, 아니면 전리품이었던가? 그들은 순수한 믿음의 제단을 찾아 헤맸던 것이다. 그렇다. 이곳을 거룩한 땅이라 부르자. 그들이 찾은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자유였다.”                - 펠리시아 헤만스 -“오늘날에는 종교적 항의의 행위로 이주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쾌락을 좋아하고 진지한 사고를 싫어하며 고생을 피하려는 이 세대는 뉴 잉글랜드에 처음으로 정착했던 그리스도인들이 가졌던 용기와 인내, 겪어야 했던 시련과 난관을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삶의 책임을 피하기 위하여, 즉 마귀를 섬기기 위하여 모든 것을 감수하고 문명의 사슬에 결박당하고자 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은 자신의 번영을 생각하지 않는 단호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                                - 존 마세필드 -2. 대학건설1636년 Harbard1700년 Yale1746년 Prinston, Columbia1754년 Brawn1636년 매사추세츠의 캠브리지에 하바드 대학이 세워지면서 매우 중대한 발전이 있었다. 하바드 대학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육기관으로 그 이름은 영국인 죤 하바드 (Havard :1607-1638)의 이름을 기념하여 붙인 것이다. 하바드는 1638년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슬하에 자녀가 없었으므로 재산의 절반과 장서 320권을 자기의 이름으로 세워지는 대학에 기증하였다.3. 초기 기독교 지도자● 요나단 에드워드 (Johnatan Edward)칼빈신학의 교조 - 예일대학 교수, 프린스턴대 총장● 죠지 훳필드 (George Whitefield)영국의 부흥사, 1740년 미국에 이주 활동* 감리교의 큰 별들을 참고하라.제 6-3 장. 경건파와 모라비아 교도1. 경건주의(1)경건주의 (Pietism)독일에서 부흥한 루터교는 스콜라적 엄격한 교리적 해석을 전헤로 하여 누구나가 다 여기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성례에 참가할 것을 요청하면서 이것이 마치 기독교 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기에 이르고 있었다. 이들은 평신도의 소임이 수동적인데 끝나도록 만들고 있었다.  경건주의는 이러한 스콜라적 경향에서 나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험과 감정의 중요성을 고려하고 평신도들 역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건설해 나가는데 적극적인 관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루터는 이렇게 말하였다.“하나님의 말씀이 어느 한 곳에서 20년 또는 길어야 40년 이상 그 순수성을 유지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타성에 젖어버린 사람들이 사랑이 식어지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무관심하게 다루게 된다.” 많은 지역에서 영적인 생활이 아주 저급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아직도 겉모양이나마 신앙을 지키고 있는 많은 사람들도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회개가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세상의 유혹과 세상 친구들의 행동이 너무나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축복의 시기가 지난 후에 많은 사람들이 좁은 길을 떠나 넓은 길로 합류하여 하나님을 등지는 경우가 많이 생겨났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구약의 선지자와 같은 종들을 보내셔서 타락한 성도들에게 경고하시고 그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촉구하신다. 이러한 종들 중에 한 사람이 필립 야곱 스페너이다.(2)중심적인 인물● 쉬패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051666년 프랑크푸르트 교회의 목사가 된 그는 당시 교회의 고갈된 심령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개혁을 기도하였으나 교권을 잡은 사람들의 압력때문에 할 수 없이 같은 마음을 품은 몇 사람과 그의 집에 모여 성경과 기도, 설교를 위한 소집단의 종교모임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경건주의의 시작이다.스페너는 교회의 피폐상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으며 성경의 교훈들이 무시되는 것을 보고 매우 슬퍼하였다. 그는 자기의 주변에 젊은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그 젊은이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들에게 성경과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하여 가르쳤다 .당시 악과 형식주의 보람없는 성직자들의 생활, 평신도들의 타락을 벗어나기 위하여 교회에도 소집단을 두고 함께 성경을 읽으며 피차의 신앙을 시찰하여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더우기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지적인 지식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인 까닭에 참 삶의 경건성과 훈련을 형성시켜 줄 수 있는 설교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그러나 모든 경건주의자들이 스페너와 같은 열심과 소박한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신약의 바리새인들처럼 종교적 교만과 경건에 대한 자랑이 그들 가운데서도 나타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의를 강조하여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좁은 길보다 “더 좁은 길”을 강조하였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산책이나 웃음 마져도 금하였다.● 프랑케 (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1687년 라이프지히 대학 강사때 학생들과 성경 연구때 성령의 신비로운 경험을 함. 쉬패너와 몇 달 지내는 동안 경건주의 신앙을 받아들임. 할레 대학의 교수로 지내며 목회까지 함. 고아원 빈고아동을 위한 위탁학교등을 세움. 모든 일을 무일푼으로 시작하여 다만 하나님의 은총만을 기도로써 간구하여 이룩함. 뛰어난 인품으로 그의 신앙은 경건주의 신앙의 한 표본이 됨.프랑케는 아주 부지런한 목사로서 믿음이 충만하고 선한 사업에 열심이었다. 그는 자기의 문 앞에서 가난한 자들을 만날 때마다 결코 빈 손으로 보내지 않았다. 프랑케는 그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의 신령한 일에 대하여 전혀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을 자기 집으로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프랑케의 가장 큰 사역은 고아원을 세워 운영한 것이다. 죤 웨슬레나 죠지 휫필드등이 프랑케의 모범을 보고 고아를 돌보는 사업을 시작했다.♠ 참고 : 경건주의의 본거지 - 할레 대학유명한 점은 독특한 선교열에 있다. 프로테스탄트가 아직 선교사명에 눈을 뜨지 못하고 있을 때 이 사명을 경건주의가 감당하였다. 18세기에 60여명의 외국 선교사들이 할레대학 출신자들이었다.♠ 경건주의의 영향독일,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까지 파급되었다. 대중들의 종교적 기상을 순수와 경건으로 일깨워 청순한 국민생활의 진흥에 큰 공헌을 남겼다. 선교의 질적인 향상, 목회자의 영적능력 향상, 청년들에 대한 기독교 훈련의 실천, 평신도의 교회 생활 참여 등 경건주의가 끼친 영향은 실로 크다.2. 모라비아 교도경건주의가 불러 일으킨 결과로 진젠드로프 백작의 모라비아 형제단(Moravian Brethren)을 말한다.1) 진젠돌프 백작(1700-1760)1700년 출생하였다. 쉬패너와 막연한 친구로서 어릴 때 경건한 할머니 캐더린에게 양육을 받았다. 할레에 있는 경건주의의 거두 프랑케가 세운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0-17세) 그의 신앙은 경건주의의 신앙이 됨. 보헤미아(Bohemia)의 후스(Huss)교회가 30년 전쟁이후 박해와 피해를 받아 모라비아에서 숨어 살다가 1722년경 독일의 작센지방으로 피신하였다. 진젠돌프는 이들에게 촌락을 만들어 안주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그의 신앙이상에 따라 엄격한 훈련으로 지도하여 모라비아 형제단을 1727년에 결성하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훈련받은 사람이야 말로 국내외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온 몸을 바칠 수 있는 선택된 무리라고 생각하였다.   어디서든지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서 가겠노라고 하는 모라비아 교인들의 열심은 선교로 연결되었다. 프로테스탄트교 치고 이들만큼 선교에 대한 사명감으로 불탄 교회가 없었다. 미국, 서인도, 그린랜드, 실론, 알제리, 아시아, 수리남, 기아나(Guiana), 이집트, 남아프리카, 바브라도 등 온 세계를 향하였다.제 6-4 장. 감리교의 큰 별들 (1)1. 당시의 영국모습17세기 말부터 영국 교회나 분리주의자들의 교회에 참식하기 시작한 영적 고갈은 심각하였다. 합리주의가 모든 종교 사상가들을 좌우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라야 기껏 하나님의 재가를 받은 도덕 체계로 밖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18세기 초반의 영국은 “청교도 정신은 죽었다.”라는 말에 합당하였다. 대부분의 설교는 도덕적 미덕의 산문만 넘치고 있었고, 목사들의 주된 관심은 스포츠, 정치,그리고 오락이었다.  전도는 아예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퇴폐하였고 오락은 갈 데까지 간 인상이었으며 음주량은 영국 역사상 최고의 기록을 세우고 있었다. 이런 영국의 교회생활에 커다란 전환기가 왔다. 복음주의의 부흥이 그것이다. 이것은 존 웨슬리, 찰스 웨슬리의 형제와 화이트필드 이 세사람으로 이루어졌다.2. 웨슬레 형제의 Holy Club●웨슬레 형제의 아버지는 성공회의 신부였고 어머니 수산나는 기도의 사람으로 경건한 사람이었다. 존은 19명의 자녀중 열 다섯째, 찰스는 열 여덟째였다. 존은 1703년, 찰스는 1707년 태어났다. 존은 1728년 성공회의 신부로 안수 받아 옥스포드를 떠난 사이에 찰스는 그곳에 남아 동료 학생들과 함께 성경 연구와 기도생활에 힘쓰는 한 작은  클럽을 조직하였다. 이 클럽은 “Holy Club” 이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성경벌레」라고 불렀다.   나중에 “Methodists”라는 명칭을 받게 되었는데 여기서 「감리교도」 직역하면 ‘규율주의자’즉 “짜여진 계획에 따라 생활해 나가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신성회합」의 회합의 회원들은 순수한 은혜의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구원이 적어도 어느 정도는 자신들의 꾸준한 노력과 거룩한 생활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무엇인가 공헌하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단독 사역임을 이해하지 못했다.3.죠지 휫필드 (Whitedfield) 1714-1770●이 클럽에 장차 이 운동을 빛나게 할 한 인물이 들어왔는데 그가 화이트필드이다. 그는 존 보다 열 한 살이나 아래였으나 타고난 웅변술과 종교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명 설교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설교는 소박하였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부활하신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과 부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을 때의 평화, 거기서 비롯되는 즐거운 생활과 봉사, 그것이 전부였다. 그의 설교를 듣는 청중들은 압도적인 감화를 받았다. 그의 설교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서 더 많이 울려 퍼졌다. 미국의 교회는 교파를 떠나서 그의 음성을 듣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휫필드는 영국의 브리스톨에서 설교를 하다 미국으로 갔다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거칠고 무지한 깅스우드의 광부들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교회 강단이 나를 몰아내고 있었고 나는 가련한 광부들이 무지로 망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 200여명이 설교를 듣다가 나중에 만 여명 까지 모여들었다. 광부들 설교를 들은 후 갱 밖으로 나올 때 탄가루로 검어진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려 눈과 양 볼에 눈물자국이 허였게 드러났다. ●가장 큰 부흥은 스코틀랜드에 휠필드의 설교로 일어났다. 휫필드는 놀라운 재능과 겸손을 가졌었고, 또한 넓은 마음을 가졌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따뜻하게 포용하였다. 그가 웨슬레와 다르다면 휫필드의 신학은 칼빈주의적인데 비해 웨슬레는 알미니우스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으므로 결국 이 두 사람은 갈라지고 만다. 웨슬리와 휘필드는 그 신조에 있어서 일찌기 서로 달랐는데 휘필드는 예정교리에 있어서 칼빈주의적 관점을 견지한 반면, 웨슬리는 이에 강하게 반발했다. ●1741년 휘필드가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보편구원론”을 공공연히 반박하면서 예정론을 설교했다. 영국에 있는 감리교 단체들은 웨슬리파였으나 웨일즈에 있는 사람들은 칼빈주의자였다. 그러나 이런한 견해차가 웨슬리와 휘필드의 개인적인 친분을 해치지는 못했으며, 보다 중요한 것은 죄인들의 회심에 있어서 이신칭의의 복음이 양쪽에서 모두 능력있게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설교의 스타일 역시 두 인물이 전적으로 달랐지만 같은 진리를 선포했고, 동일한 결과가 나타났다. ●휘필드의 설교는 웅장하고 정열에 넘쳤는데, 매우 극적이었으며, 때때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깊이 굶주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에 반해 웨슬리는 분명하고 논리적이었다. 그의 설교는 대부분이 강해식이었지만 거칠고 투박한 청중들을 사로 잡았다.●1770년 55세의 일기로 세상을 화이트필드는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이렇게 말하였다. “주 예수여 나는 피곤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역에 싫증이 난 것은 아닙니다. 만일 나의 갈 길을 아직 끝마치니 않았다면 한 번 더 밖에 나가 주님을 위하여 외치게 하옵소서. 그리고 와서 숨지게 하소서.” 그후 그는 밖으로 나가 2시간 설교를 하였는데, ●그 설교는 “좋다. 일을 하라. 행위(일)를 통하여 하늘나라에 가려는 자여, 그것은 모래로 새끼를 꼬아 그 줄을 타고 달에 가려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내가 살아서 그리스도를 전파하기를 얼마나 원했든가 ? 그러나 그 분과 함께 있기 워하여 죽는 것이다.”라고 설교 한 후 돌아와 육신의 장막을 벗어나 하늘의 자유를 얻었다. 이렇게 하여 근대의 가장 위대한 전도자가 세상을 떠났다.제 6-5 장. 감리교의 큰 별들 (2)4. 웨슬레 형제의 회심●웨슬레 형제는 선교사로 임명받아 1735년 미국의 조지아로 떠나게 되었다. 향해 도중에 니취만이 이끄는 26명의 모라비아 교인들이 폭풍우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에 크게 감화를 받아 스스로에게 그런 용기가 없음을 한탄하였다. 사바나에 닿아서 쉬팡켄베르크를 만났을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당황해서 “그 분이 세상의 구주임을 알고 있다.”고 대답한 일이 있었다. 이에 다시 “그러나 그 분이 당신을 구원하신 것을 알고 있소?”라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미국에서 웨슬레 형제는 뼈가 휘도록 애를 썼으나 동생은 병 때문에 귀국하였고 형 역시 홉키라는 여인때문에 실의에 차 1738년 귀향을 하였다. 그후 런던에서 모라비아 교인인 뷜러(Peter Bohler)를 만나 완전 굴복의 신앙과 참 회심을 배울 수 있었다. 이들 형제에게 놀라운 회심의 역사가 찾아 온 것은 동생은 1738년 5월 21일, 형은 5월 24일이었다.  웨슬리 형제는 런던 주변에서 기회 있는 대로 설교를 하였다. 그의 설교는 화이트 필드만큼의 박력은 없었으나 성실과 그 실제적 신앙에 대한 호소때문에 커다란 감화를 줄 수 있었다.5. 감리교회의 성립과정존 웨슬리는 1739년 브리스톨에 감리교 “회단”(Society)창설하였다. 그리고 그해 5월 12일에 최초의 교회를 세웠다. 처음에 웨슬리는 영국교회에 그대로 남아있기를 바래서 교회를 따라 섭립하지 않았으나 주교들이나 성직자들로부터 아주 냉혹하고 적대적인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감리교는 점점 부흥하여 존 웨슬리가 세상을 떠난지 4년 후 1795년에 결국 성공회로 부터 독립하고 말았다.6. 감리교의 특징● 웨슬리는 “Society Tickets”란 것을 창안해 냈다. 이것은 성도들의 신앙의 진실성을 보증한다는 의미와 신앙에서 떨어져 나간 이들을 걸너내는 방안으로 고안된 제도였으나 오래 적용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실효를 보았다.● “속”(Class)라는 것이다.이것은 신도들은 12명 단위로 묶어 그 “속장”(Class-Leader)이 매주 다다 한 교인에게 1페니씩 갹출하여 교회 건축 때 진 빚을 갚고자 하였는데 후에 이것이 영적 발전에 도움이 된 “속”- 구역-제도가 되었다.  이 집단의 직원으로서 웨슬리는 평신도 설교자, 권사, 유사를 두었다.● 존 웨슬레의 사역은 끝이 없었다. 그는 세계를 자기의  교구로 삼아 무려 40만 KM를 복음을 전하는 전도여행을 하였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강단을 맡겨주지 않았기에 수년 동안 그는 옥외에서  설교를 하였다. 그는 통상 40,000여회의 설교를 하였다. 그는 수많은 박해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반대자들을 이겨 나갔다.● 신학은 알미니안의 입장에 서서 칼빈주의를 적대하였다. 예정론에서는 도덕이 마비된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지인 화이트필드는 칼빈주의자였다. 이에 서로 헤어지게 되었고 결국 웨슬리의 감리교에는 알미니안주의가 정통 신학으로 들어앉게 되었다.● 존 웨슬리는 1791년 3월 2일 런던에서 마지막까지 복음의 기사로 싸우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영국의 중류나 하류의 종교적 조건을 혁신시킨 공헌과 미국에 끼친 영향은 길이 기억될 것이다.● 영국 국교회에 찬송가를 도입한 것이다. 종교개혁 시기부터 18세기 까지는 운문으로 번역한 시편을 노래하였는데 이것은 청교도의 전통이며 칼빈으로 유래된 습관이었다. 그러나 아이작 와츠(Isaac Watts)는 시편위주의 찬송가는 신약의 부분이 결여되었다고 보완을 주장하며 수 많은 찬송가를 지었고 찰스 웨슬레 역시 많은 찬송가를 지어 현대적인  찬송가를 보급하였다.제 6-6 장 19세기의 미국의 기독교1. 19세기의 부흥전쟁은 하나님의 교회에 좋은 결과를 가져 오지 않는다. 전쟁은 공중도덕을 훼손하며 주일을 무시하게 만든다. 미국의 독립전쟁도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미국 교회의 영적생활이 18세기 말엽에 이르러 많이 쇠퇴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의를 먼저 구하지 않고 현실의 유익을 추구하였다.  1782년 프린스턴 대학에 오직 두 사람만이 크리스챤임을 스스로 고백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780년 후반 힘프든 시드니 대학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일어난 부흥운동이 캔터키주로, 뉴잉글랜드로 연결되어 19세기 초에는 이런 각성운동이 계속되었다. 특히 티모시 드와이트(Timothy Dwight)는 1795년부터 1817년 세상 떠날 때 까지 Yale대 총장으로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단에서 증거하며 불신앙의 학생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였고, 이 강의가 학생들에게 미친 영향은 충격적이었다.  그가 지은 찬송가 「내 主의 나라와」는 19세기에 가장 사랑 받는 찬송가가 되었다.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내 주의 교회는 천성과 같아서                   눈동자같이 아끼사 늘 보호하시네.                   이 교회 위하여 눈물과 기도로                   내 생명 다하기 까지 늘 봉사합니다.”2. 다양한 이단발생● 1792년 스웨텐의 이단 임마누엘 스웨덴보그 (Emanuel Swedenborg)의 추종자들이 「새예루살렘 교회」를 세움. 삼위일체부인, 속죄, 복음의 전반적 메세지 부인.● 몰몬교 발생 - 1820년 죠셉 스미스 (Joseph Smith)● 안식교 - 1830년 윌리엄 밀러 (William Miller)라는 농부로부터 시작.            1843년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의 멸망을 예언.            그후 엘렌 화이트여사가 창시.● 크리스챤 사이언스 (Christian Scientists)● 여호와의 증인3. 주일학교의 큰 부흥주일학교는 지역 교회의 필수적인 하나의 기관이 됨.4. 19세기 위대한 신학자와 전도자 배출● 신학자 : 찰스 핫지 (Charles Hodge)와 그의 아들            알렉산더 핫지(A.A.Hodge)가 조직신학의 기초를 세움.● 전도자 : 드와이트 무디 (Dwight Moody)            보스턴과 시카고에서 점원 출신. 중년부터 생키(Sankey)와 함께            전도여행을 하여 대 부흥을 일으킴. Gospel Song 도입.5. 세계각지로 선교1890년 미국인구 62,622,000명중 57,000.000명이 그리스도인이었고, 복음 사역자는 111,000명이었으며 143개 교파와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19세기를 마감하면서 미국의 교회는 많은 일꾼들을 세계로 보내었다. 열심 있고 활동력 있는 남녀가 동원되었다. 부강해진 나라의 성도로서 세계적인 선교기관에 많은 액수의 돈을 지원하였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24:14)제7장. 한국교회사제 7-1 장. 초기의 선교1. 초기의 선교(1) 토마스 목사의 전도와 순교① 1840년 영국 웨일즈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63년 목사되어 중국에 선교사로 옴.② 상해에서 천주교도 金子平을 만나 조선의 사정을 듣고 전도결심.③ 1865년 9월 중국인 어선을 타고 옹진방면 순회, 백령도에서 두 달 전도④ 샤만호 내한 때 전도차 편승하여 목 잘림의 순교당함 (1866.9.2 27세)(2) 로쓰목사의 고려문 전도① 스코틀랜드의 목사로서 친구인 토마스목사의 순교지인 한국과 가까운   우장에서 활동. 고구려 古都인 즙안현에서 전도.② 돌아오는 길에 조선인이 많이 사는 고려문에서 전도.③ 네 명의 청년 믿음 - 백홍준, 이성하, 이응찬, 김진기④ 백홍준 - 최초로 세례를 받음(언더우드에게) 초대조사, 후일 장로.(3) 최초의 교회 - 소래교회① 서경조, 서상륜 형제가 우장에서 백홍준 통해 예수 믿은 후② 의주에 와서 10명이 예배 드림.③ 황해도 소래에 교회를 세움.2.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1) 알렌의 내한① 1858년 미국 오하이오주 출생의 의사. 선교사로 중국에 옴.② 1884년 상해에서 조선으로 옴.③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 근위대장 민영익의 중상을 3개월만에 완치시킴.④ 국왕의 시의가 되고 참판벼슬을 받음.⑤ 1885년 2월 광혜원 개설⑥ 1901년 주한 미국 대사가 됨(2) 최초의 선교사언더우드(장로교)와 아펜셀러(감리교)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인천에 도착함.● 언더우드1859년 영국 런던태생, 1884년 미국에서 신학졸업 후 1885년 인천에 옴.알렌의 병원에서 병자구호. 1887년 새문안교회 설립. 1901년 경신학교세움.Y.M.C.A를 통하여 고등교육 (연세대전신) 1916년 별세. 그의 아들, 손자에 걸쳐 계속하여 한국에서 선교하고 있음.● 아펜셀러1858년 미국 루터교 가정에서 출생. 1902년 목포에서 성경번역위원회 참석차 배 편으로 가다 사고로 소천. 딸이 이화대학, 배재학당 등 세우며 전도.3. 교회의 부흥(1) 선교의 견인차 - 네비어스 선교정책네비어스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였는데, 한국에 초정되어 와서 그의 선교정책을 강의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선교의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1893년)① 선교사 각자의 광범위한 순회전도② 자립전도 - 한 사람을 전도하였으면 그 사람을 성경교사가 되게 한다③ 자립운영 - 모든 신자들을 선교사를 의지하게 말고 교회의 운영과 기구조직을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감당케 하여 자립하는 교회가 되도록 한다④ 자립전도 - 모든 교회건축시 조선인 그들 자신의 힘으로 건축하도록 한다⑤ 체계적인 성경연구⑥ 성경교훈에 따라 엄격한 생활적용과 권징⑦ 성경번역 진행과 보급에 노력 (유료판매)(2) 초기 전도의 삼대 방법① 문서 전도② 의료전도 - 광혜원, 세브란스병원, 나병원 등 수 십개의 교회세움③ 교육전도 - 배재, 경신, 이화, 정신, 숭실, 계성 등 수 십개 학교세움(3) 조선 독노회 창설①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최초의 목사 7명 - 서경조, 길선주, 이기풍, 양전백, 한석진, 송인서, 방기창  제주도 선교사 파송제 7-2 장. 한국교회의 부흥운동1. 평양 부흥회① 1907년  1월 6일 장대현교회에서 10일간 계속② 낮에는 성경공부, 밤에는 부흥회③ 1.14 방위량목사, 이길함목사 인도시 성령이 강하게 임함   회개와 통성기도소리가 폭포수소리 같음. 새벽 2시까지 계속④ 이 성령의 불길이 전국 각처로 퍼짐.2. 한국인 부흥사의 활동(1) 김익두 목사황해도 신천출생. 청년시 불량배. 일자 무식군.목사가 된후 전국 각지에 다니며 부흥회 인도. 신유로 부흥일으킴.교향에서 새벽기도 드리다 공산군 총에 맞아 순교.(2) 길선주 목사① 1869년 평남 안주에서 출생② 29세 때 예수믿고 1901년 장대현 교회의 장로가 됨. 1907년 목사③ 1927년 순회전도로 나섬.④ 구약 300독, 신약 1,000독,  계시록 10,000 讀을 한 성경박사   신학은 보수적, 계시록 강해는 탁월함.⑤ 40년 목회생활 중 설교 10,070회, 설교들은 사람 약 500만명   60여개의 교회를 세움.3. 불건전한 신비주의(1)황국주황해도 출신으로 백일기도를 통하여 특별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함. 자신의 목은 잘리우고 예수의 목이 붙었으며 머리도 피도 마음도 다 예수化 되었기에 자기를 예수라고 하였다. 소문듣고 예수의 化身을 볼려고 수많은 인파가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피가름실시, 남여혼숙을 하였다.(2)이용도① 1901년 황해도 금천군 출생. 몸은 허약하였으나 성격은 다정다감함.② 삼일운동에 가담. 1933년 33세 때 폐병으로 세상을 떠남.③ 신앙은 온 몸을 바쳐 주님위해 헌신한 사람임. 주님께 미친 사람이라하여   “聖狂”이라는 는 별명을 얻음.④ 기도를 하면 침식을 전폐하고 몇 날이 가는지도 모르고 기도함.⑤ 설교는 2-6시간 정도하며 격식에 매이지 않음.   설교의 내용은 사랑, 위로도 있으나 부정, 불의, 미지근한 신앙,   세속화된 교역자들에게는 맹렬히 공격함.⑥ 잘못그가 예수를 사랑하고 온 몸 던져 헌신한 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였지만 그 자신을 고난당한 예수님과 동일시 한 것이라든지, 예수와 사랑의 융합을 통하여 혈연적 결연(피가름)을 한다고 믿은 것 등은 잘못된 것이었다.⑦ 1933년 장로교에서 이단으로 단죄함.제 6-3장. 한국교회의 수난1.신사참배(神社參拜)(1)신사참배 가결① 일본은 신도(神道)를 통하여 국민정신 통일과 군력증진을 꾀함.②  1계명에 위배되기에 기독교 지도자들이 반대함.③  1937년 기독교 학교들이 폐교 당함. 선교사들이 쫒겨가고,    1941년 선교사 42명이 투옥됨.④ 1938년 조선장로교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는 죄가 아님을 결의   회장 - 홍택기 목사   부회장 - 김길창 목사⑤ 방위량, 한부선 선교사 발언못하고 축출당함.⑥ 교회 지도자 70여명 구속. 20여명이 6-7년의 감옥생활 후 해방으로 출옥   이들을 출옥성도라 한다. - 한상동, 주남선, 손양원, 이기선, 이인재목사 등(2)신사참배에 반대한 지도자들●주기철 목사1897년 경남 창원출생. 1926년 평양신학교 졸업. 초량교회, 마산문창교회, 평양산정현교회 시무. 목회는 설교중심의 목회, 잘못이 있으면 가차없이 책망하였으며 불의를 보고 못참는 성격. 1938년 구속 7년 옥고후 평양감옥에서 순교.●최봉석(최권능) 목사1869년 평양출생. 1913년 평양신학교 5회 졸업.  밤에는 기도 낮에는 “예수천당”을 외치며 전도. 전도않는 목사는 벙어리 목사라고 함. 1939년  신사참배거부로 투옥. 6년 동안 감옥생활. 1944. 3. 1 - 4. 10까지 40일 금식기도후 병원에서 별세. 75세.●손양원 목사1902년 경남 함안 출생. 1938년 평양신학교 졸업. 나환자교회인 여수 애양원교회 시무. 언행일치의 목사. 1940년 구속후 5년간 옥고를 치루고 해방으로 석방. 여순반란 사건 때 두 아들이 순교. 1950. 9. 28 공산군에서 순교당함.●박관준 장로1875년 평북 영변에서 출생. 30세에 예수를 믿고 의학공부하여 의사가 되어 구제와 전도에 힘씀. 총독에게 신사참배의 부당성 경고. 일본 국회에 진정서를 투척. 1941년 평양 감옥에 구속. 1945년 1월 1일 부터 70일간 금식 기도후 별세.●주남선 목사“살아있는 순교자”라고 부름. 1888년 경남 거창출생. 1919년 거창교회 장로. 1930년 평양신학교 졸업. 거창읍 교회에서 목사로 22년간 시무. 신사참배로 7년간 옥고를 치룸. 1946년 고려신학교(現 고신대학)설립. 1951년 64세로 별세.●한상동 목사부산태생. 1937년 평양신학교 졸업. 초량교회, 마산문창교회, 평양산정현 교회, 부산삼일교회 시무. 신사참배반대로 1940년 구속. 해방후 출옥. 주님선 목사와 고려신학교(現 고신대학)설립. 고려파 설립.♠ 참고 : 신도(神道)일본국민과 황족은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직계자손이며 특히 천황은 현인신(顯人神)이어서 일본 천황은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 신사(神社)를 세우고 온 국민으로 하여금 경배를 강요하였다. 역대 천황과 왕후의 혼령과 무사들의 영혼을 섬기도록 함.2. 해방후 북한 교회① 38선 이북에 소련과 북한 공산정부는 종교말살정책을 펼침.   헌법에 「종교자유」가 있음과 동시에 “반대할 자유”도 있다고 함.② 1946. 11. 3 총선을 주일에 실시.③ 김일성 외숙 강양욱 목사를 통하여 기독교연맹 결성 (어용단체)④ 목사, 장로에게 2-3명의 노동당원을 배치하여 위협과 설득.⑤ 6.25 직전 예비검속과 학살.⑥ 9.28 수복시 대량학살.제 6-4 장. 장로교의 분리1. 고려파의 분리(1)분리①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고를 치룬 옥중성도들이 교회의 정화(淨化)를 건의   신사참배에 가담한 목사, 장로는 2개월간 자숙후 시무투표를 통하여 진퇴   결정토록.② 이 제안이 노회와 총회에서거부됨.③ 1946. 9. 20 고려신학교 설립(現 고신대학).   한상동, 주남선, 박윤선 목사 등 주축. 교장 - 박형룡 박사④ 1948년 경남노회에서 고려신학교에 학생추천을 않을 것을 결의.   한상동 목사 노회 탈퇴선언. 68개 교회가 동조. 노회가 사과.⑤ 1948년 경남노회가 고려신학교 인정을 취소.   1949년 35차 총회에서 고려신학교 거부.   고려신학교측 인사 총회참석못하게 함.⑥ 이에 고려신학교 측 옥중성도를 중심으로 총노회(경남법통노회)조직.   고려파 출발.- 한상동, 주남선, 손양원, 이인재, 오종덕 목사등  주축.♠ 참고 : 경남법통노회의 선포문1.선포문① 우리는 총회를 사랑한다.   우리는 총회를 향하여 충고, 경고, 항의로 반성과 시정을 요구하였다.   이는 총회가 싫다든지 미워서가 아니라 장중의 보옥과 같이 사랑하기   때문이다.② 총회의 강경한 태도   반성과 시정요구에 격분과 증오감으로 반답하고, 주종의 순서를 모르고   옥석의 분간을 못하고 오히려 우리를 이교파적이라고 하여 분리단안을   내림.③ 여호와의 지시를 기다려 행동함.   우리는 앞날의 서광을 전망하고 은인자중 하였다.   신학사상과 신학노선에 따라 교회 행정이 갈라지게 되었음.2. 조직취지   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본 장로회 정신을 떠나서 이교파적으로 흐름으   로 이를 바로 잡아 참된 예수교 장로회를 계승키 위하여 총노회를 조직한다.3. 조직① 총회장 - 이약신 목사② 부회장 - 한상동 목사③ 서 기  - 홍순학 목사④ 회록서기 - 오병세2. 기독교 장로회의 분리① 자유주의 신학의 기수인 김재준목사가 조선신학교 설립(現 한신대학)하여   성경유오설과 신신학을 가르침. 축자영감설부인, 모세오경저작 부인 등② 이에 1952년 4월 37회 총회에서 김재준교수를 면직시킴.③ 여기에 경기노회는 총회에 시정을 요구④ 1953년 6월 10일 한신대 강당에서 분리 총회3. 합동과 통합의 분리(1)원인① W.C.C.문제   박형룡박사는 W.C.C가 용공(容共)이며 신신학(新神學)이며   에큐메니칼 운동이라고 비난하고 탈퇴를 주장.② 경기노회의 총대 문제(2)분리① 44회 총회가 1959. 9. 24 대전중앙교회에서 열림.   4일간 공전(空轉)하며 개회도 못하고 깨짐.② 연동총회 (統合) 9. 29 연동에서 속개. W.C.C와 관계 현상유지③ 승동총회 (合同) W.C.C 탈퇴. 에큐메니칼 반대제 6-5 장. 신흥종교의 난립1.원인사회적 혼란과 전몰장병유족, 전쟁후 미망인, 고아, 이산가족, 실업자 증가, 경제적 불안, 정치적 혼란 가중에다 교회 분열 까지 겹쳐서 신자들에게 ‘말세가 되었으니 잘 믿어야 겠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교회가 세속화되는 경향이 있으니 금욕생활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2. 신흥종교의 주장① 현실교회 비판 - 기성교회는 썩었고 타락했기에 은혜받을 수 없다② 독선주의 - 전도관은 “신앙촌에 입주하는 144,000명만 구원받을 수 있다”하여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팔아 다투어 입주함.③ 교주숭배 - 통일교의 문선명은 재림주로 무죄성을 주장.              전도관의 박태선은 동방의 의인, 감람나무, 영모(靈母)로 불리움.④ 신비체험을 지나치게 주장⑤ 샤마니즘 - 신흥종교는 샤마니즘을 핵으로 한 온갖 민간신앙과 혼합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⑥ 재림사상 - 재림이 임박했다고 시한부 종말론을 강조⑦ 선민사상 - 한국에 재림예수가 온다. 한국은 새이스라엘이다⑧ 기 타3. 신흥종교의 종류요약(1)용문산 기도원① 설립자 : 나운몽   1914년 평북출생, 일본 와세다대 전문부 중퇴. 1947년 용문산에 와 「애향숙」  을 재건. 6.25 당시 신비체험을 하였다고 함. 기도원 설립후 전국 각지에 집회② 주장 - “공자, 석가도 神이 보내신 동방의 선지자이다. 복음이 전파되기 전          사람은 유교나 불교를 통해서도 구원을 받았다. 진리는 形에 있지          않고 質에 있으니 진리이면 유교나 불교나 기독교나 하나가 된다.”③기도단 조직 - 1960년. 한 사람이 두 사람 위해 기도하고 그 두 사람이       또 각각 두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제도, 기하급수적으로 확대가 됨.④ 교회는 이단으로 정죄. 41회 장로회 총회시 박태선, 나운몽, 노광공 등(2)통일교① 창설자 : 문선명② 1920년 평북 정주출생, 와세다대학 전기부 중퇴. 1946년 신비주의 운동을 함.   1949년 간음혐의로 수감. 3번 결혼.③ 1954년 유효원의 도움으로 통일교 창설④ 기본교리 - 원리강론   포교대상 - 기성 교회에 불만가진 지식층 젊은 사람들(3)전도관① 창설자 : 박태선② 1915년 평북 영변출생. 동경공업학교졸업. 남대문교회 장로 역임.③ 부흥운동 - 1955. 3. 26 부터 10일간 남산 천막집회시 헌금으로 금반지 만석              되가 나옴. 헌금은 부지기수. 목사 100여명이 안수기도 받음.              전국을 누비며 대중집회를 가짐.④ 칼빈의 예정설 부인, 살인자라고 욕함.   기성교회는 마귀의 전당이니 구원이 없다고 함.⑤ 천년왕국으로 신앙촌 세움   제 1 신앙촌 - 1957년 소사 (100만평 규모)   제 2 신앙촌 - 1962년 덕소 (50만평 규모)   제 3 신앙촌 - 경남 기장 (100만평 규모)⑥ 주장 - 자신이 감람나무, 동방의인, 생명수, 피가름 교리

 

 

 

 

 

 

 

 

 

 

 

 

 

■ 초대 교회사                             상식문답                        서론1.기독교 역사관이 세속역사관과 어떻게 다른가?기독교 역사관은 시작에서 끝이 있는 선적(線的)역사관 (linear view) 이며 (엡 1:10,  단 4:25)세속역사관은 인도인이나 희랍인들의 역사관인데 윤회적 역사관이다. (circular view) 그 역사적 과정은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모든 사건들과 인간들의 활동은 여기에 종속된다.2. 교회사(the history of the church)란 무엇인가?기독교회의 역사인데 하나님께서 세상의 사람을 창조하신 다음부터 시작하여 세상의 종말과 함께 지상 교회 역사는 끝나고, 하나님의 교회는 무궁세계로 들어간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역사의 시작이며, 그 이전을 구약교회사 그 이후를 신약교회사로 구분하나 편의상 신약교회사 만을 가리켜 교회사라 부른다.     연구의 대상은 교회의 발전(온전)인데세속역사관은 시간과 공간적으로 보이는 부분만 나타낸 반면에기독교 역사관은 시간과 공간적으로 보이는 그 역사의 이면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와 그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0)  하나님과 교회의 관계에서 (현재 교회사 교재에서는 이 부분이 누락되어 있음) (1)  교회와 교리의 관계에서(2)  교회와 이단 교리의 관계에서(3)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서 역사적으로 고찰한다.3.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1)하나님이 소유한 언약의 백성 (벧전2:9-10  The covenant people of God)(2)메시야의 성회 (엡2:11-22  The messianic assembly)(3)성령의 친교 (요16:3 The fellowship of the spirit) 이며교회는 그 속성으로 보아(1) 사도성(使徒性) (엡2:20, 마16:18-19, 갈1:9-12 apostolicity)(2) 성결(聖潔)성 (고후6:14-7:-1), 벧전2:9-10 holiness)(3) 정통에 근거한 보편성 요4:23, 행10:34, 35 (catholicity)를 가지고 교회는 외형적 표징으로 보아(1) 말 씀 (The word)(2) 성례 (The sacraments)(3) 권징 (discipline) 이 있는 모임이다.4. 교회사를 시대적으로 어떻게 대분 하는가?종교개혁 이후부터 교회사를 3대분 하여 초대, 중세 현대로 나누었으나, 개신교회 (경정교회 protestant) 의 출발을 가능케 한 종교 개혁사를 더 첨가하여 4대분 한다.(1) 초대교회사 (1 - 500 )(2) 중세교회사 (500 - 1500 )(3) 종교개혁사 (1500 - 1700 )(4) 현대교회사 (1700 - 2000 )5. 세계교회는 그 대종별 계열은 어떠한가?  (1) 첫 500년까지는 고대 보편교회 (The ancient catholic church) 시대이며  (2)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5c) 동로마 제국 경내에는 동방정교회가 계속 되었고      (The Estern orthodox church)  (3) 1589년 이후 러시아 정교회(正敎會) 가 그 전통을 이어 오늘에까지 이른다.       (The Russian orthodox church)  (4) 서로마제국이 망한 이후 게르만민족의 교화로 로마 카토릭교회가 (The roman catholic            church) 16c 종교 개혁 시까지 주도권을 가졌고, 개혁이후 지금까지 이르고 있으며  (5) 로마교회에서 개혁을 부르짖은 후 1517년 이후 개신교회가 발견했다       (The protestan churches)                  ■ 신약 교회사*초대교회시대[AD 30-590 ]사도시대 [AD 30-100 ]대박해시대 [AD 60-313 ]네로,도미티아누스,디오클레아티누스황제기독교 발전시대[AD 313-590 ]기독교 공인-콘스탄티누스[313]  기독교가 로마의국교-데오도시우스황제[392]*중세교회시대[AD 590-1517 ]로마교회의 과도시대[AD 590-800 ]그레고리우스 1세의 교황권강화, 서유럽에의 선교, 로마제국의 약화, 이슬람교의 태동로마교회의 성장시대[AD 800-1073 ]기독교 옹호사상을 내건 신성로마제국의 등장으로 기독교가 동부 유럽으로 전파,크게 성장.이시기에 동서로마교회가 교리의 알력때문에 갈라짐로마교회의전성시대[AD 1073-1303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독일국왕 하인리히 4세를굴복시킴-카놋사의 굴욕교황의 주도로 십자군운동이 일어남로마교회의 쇠퇴[AD 1303-1517 ]십자군운동의 실패로 교황권 약화. 르네상스운동이 일어남.  성직매매. 면죄부판매. *종교개혁시대[AD 1517-1688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     독일에서는 신.구교간에 30년 종교전쟁이 일어나 신교도들에게 종교의 자유가 허락됨.  쯔빙글리,칼빈,죤낙스, 후스등에 의해 각국에서 종교개혁이 일러남 천주교에서는 로욜라의 예수회를 중심으로 자체 개혁이 일어남청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북미주로 이주하여 기독교 전파.  영국에서는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이일어남(1642-1649).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고. 개신교가 성공적으로 전세계에 퍼지게됨.*근대교회시대[AD 1688-1860 ]*현대교회시대[AD 1860-현재 ] 유럽과 미국의 각 교파들이 교리와 조직을 확립하고, 세계선교로 나감교통과 통신과 산업이 발달되어 세계가 축소되어 복음이 대륙의 오지 절해의 고도까지 전파됨성경사+교회사예수 탄생시 죽일려  하던 왕= 헤롯[마 2:16]세례요한 죽인 왕=헤롯 안디바[마 14:10]야고보를 죽인 왕=헤롯 아그립바 1세 [행 12:2]바울을 심문한 왕 =헤롯 아그립바 2세[행 2523]AD 337-콘스탄티누스황제 세례 받음 .그해 죽음AD 63-베드로 로마 도착(55-60 마가와 같이 방문) AD 60-2월, 바울이 죄수로서 로마에 도착 (행 28:15-16)*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하나님의 은총이냐 자유의지*종교개혁의 원인 1-교회가 타락[교황은 가시적인 복음일만이 복음의 일로 생각하여 장엄한 성당건축을 하니 물질이 필요하여 ,금전수입을 증가 시키기 위해, 필수적인 노력을 기울이다 보니,  교회는 탐욕의 화신으로 변모함-예, (면죄부)다]  2-교리의 혼란성경에 용납할수 없는 교리를 채택[불의의 교권 수호을 위해, 일을 목적해서]*14세기말에서 15세기에 걸쳐마리아 숭배가 급격히 증가-인문주의자들의 후원하에 마리아 無染始胎교리를 주창, 수세기후에 카톨릭의                             공식 교리가 됨*15세기에서 종교개혁 이전까지성자숭배사상이 만연-자기들을 후원하는 성인들을 지정함군인들은 -성 마아틴,  포수들에게는 -성바바라,  백정들에게는-성바돌로매*교회가 가장 번성할때  각종 종교적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 돈이 가장 딸리는 기간이다그래서 교황 레오 10세 때는 성직매매가 사상최고에 달했다*종교 개혁 전야시에, 교회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고위 성직자들은 부요하게 살았고, .정반대로 다수의 지방의 성직자들은 극빈자의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이런 지방의 일반 성직자들이 종교 개혁시 수천명씩 복음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느 한 곳에서 20년 또는 길어야 40년 이상 그 순수성을 유지하기가 참으로 어려운것이다. 타성에 젖어버린 사람들이 사랑이 식어지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무관심하게 다루게 된다.*루터신학-믿음으로 구원 얻음*루터가 비판한 내용1.성자숭배, 2.연옥설, 3.화체설 4. 만인 제사장설*루터의 관심의 초점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인 하나님앞에 인간의 칭의문제였다[인간 능동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는 수동이라는 것-로마 1:16-17 ]*칼빈신학-하나님의 주권 *칼빈주의 5대 강령 [TULIP]1.전적타락[Total Depravity] 2.무조건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이중예정, 3.제한구속[Limited Atonement, 4.저항 할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 5.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df the saints]칼빈의 신학은 하나님의 주권에서 출발칼빈의 주된 관심은 그리스도안에서 인간들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능력과 그은혜의 영광을 선포하는데 있었다*  성찬에 대한 각 교파의 교리 상징설쯔윙글리기념설칼빈임재설루터화체설천주교*찬송에 대한 견해쯔윙글리는 악기 없이 육성으로 회중 찬송(제창)칼빈은 악기 사용은 하되 멜로디 만으로 회중 찬송(제창)천주교는 악기를 사용하고-찬송은 신부(사제)들이 하되 몇부로 하고, 여자 목소리를 얻기 위하여, 남자들                            을 돈주어 사서 고자를 만들어 합창하게 하였음. 회중 찬송 없음.*청교도들- 은혜계약과 행위계약을 구분*종교개혁가들은 모두 교육을 담당하여 남을 가르치는 사명이, 남을 사랑하는 기독교 교리를 실천하는것이라는데 의견을 같이 하여 교육에 힘을 씀 * 15612-1572사이 프랑스 칼빈주의자들은 교회조직을 장로제냐, 회중제냐로 격론이 있었음총공회는 회중제와 비슷* 1572년 프랑스 ,성 바돌로매 학살사건을 계기로하여  그후 군주주권의 한계와 국왕에 대한 저항권에 관한 이론이 성숙되어감-삼권분립-민주주의 이론의 싹*영국교회*16세기: 종교개혁운동17세기: 청교도운동18세기: 감리교운동19세기: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는시기하버드>프린스톤>예일>웨스트민스트>*남부 러시아의 고대 명칭=스구디아(골3:11*러시아황제 알렉산더 1세- 성경적 신앙에 귀의[1816-파리 강화회의 참석시  파리의 크뤼데네르 부인의 신약성경연구 모임에서]-그후 러시아에 성경 보급*러시아황제 알렉산더 2세- 1861-성서공회 활동 재개, 러시아의 농노 해방령.*18세기-理性主義 시대*18세기-이신론,무신론, 합리론이 영국 전체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이결과로  교회는  침체와 퇴락의 길로 내닫고 있었다 또 과격한 알미니안 주의는 일위파로 나가게 된다-대속 없이도 행위로 구원 얻을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1717년 미국의 스코틀란드 장로교 안에서 반율법주의[은혜강조]:신율법주의[행함강조]의 투쟁이 생김 1654-파스칼, 잔센파와 접촉후 완전 개심. 프로방스서간집을 써서 카톨릭 비판-믿음으로만 하나님을       알수있지 人間理性으로는 알수 없다함볼테르[1694-1778 理神論者. 계몽주의자-인간의 이성과 경험에근거],루소[1712-78, 사회계약론:1762. 자연,낭만주의. 그의 종교는 자연이었다.], 의 영향으로 성경적 신앙이 배척을 받고 조소의 대상이 됨  칸트의 ‘실천이성비판’-기독교 도덕주의-기독교를 지적인 문제로 보는 이성주의 비판18세기후반-헤겔, 변증법,理性은 思考 과정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라 주장기독교를 절대의 종교로 확신, 종교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과 인간사이 관계인데, 그 관계의 절정이 聖肉身 교리라 주장    1862-영국의 고등비평가 콜렌조와 그 추종자들이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으로서의 眞正性을 거부,배척함고등비평의 理性主義를 기독교를 대체할수 있는 실상의 새로운 종교와 같이 생각1927-독일의 바르트 ‘기독교 교의학’ 1권 출판, 그는 신학이란 결국은 인간의 작업에 불과하다하여  신학과 하나님의 말씀을 혼동하지 않음.-성경본문으로 돌아가야 한다함-신정통주의**그러므로 성경에 대하여 우리가 알것은초대교회시에 성경으로, 성경에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구원에 대하여 바로 알고 바로 믿을수 있었는데  미신과, 철학과, 인간욕심의 불의의교권으로 성경을 멀리하여 교회가 타락되었고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는 종교개혁이 일어나 구원론이 확립되었고이때 인쇄술을 발명케하여 성경을 사람들이 접하기 쉽도록 해주셨고인제 성경을 쉽게 읽고 연구할수 있게되니 성경을 읽어도 바로 깨달을수 없게, 여러가지 미혹이 오게되었다. 그래서그후에는  이성주의,합리주의,또 그후에는 자연주의또 그후에는 도덕주의또 그후에는 과학주의[과학에 근거한 성경본문의 고등 비평]로 성경에서 멀리하게 하던지, 성경을 보는 각도를 삐뚤어지게 하여서 구원을 방해 하였습니다앞의 주의들이 역사의 과정을 통하여 허구인 것을 경험하여 알고[특히 20세기에서], 현대에는 성경의 권위를 다시 발견하고 성경으로 다시 돌아가야 될 필요성을  심각히 느껴 교회들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지금의 우리는 구름같이 지나간 증인들의 성경관에 대한 잘못과 바른길을 살펴서 , 그 잘못을 광음같이 지나가는 세상에서  다시 반복지 말고 성경에서 증거하는 대로의 성경관을 가져서 하나님 다음으로 성경에다가 권위를 두고 성경중심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헤겔 성경에 대해서 우주론적 관점에서 보았기에 신학의세계가 좁다고 여겨서 타학문을 같이 공부했음구원론적 관점에서 보아야함 [아다나시우스,어거스틴,루터, 칼빈, 백영희  구원론적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신앙생활을 하였음] *독일의 바르트주의와 한국의 바르트주의는 다르다자유주의 신학이 만영되어 있는 독일에선 바르트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였으나, 정통신학이 자리잡은  한국교회에선 보수주의 신학에 대항하는 자유주의 신학이 되어있다*나치하에 굴종한 독일의 교역자들은 교회의 주도권을 나치에 굴종하지 않은 교역자들에게 이양하였으나한국은 일제에 굴종하여 신앙절개를 판 교역자들이 기존 교권을 그대로 유지할려 함으로 교회 분열이 시작됨                               1. 초 대 교 회6. 초대교회사는 어떻게 세분되는가?  초대교회 500년은 다음과 같이 편의상 구분할 수 있다  (1) 사도시대( 1-100 ) (The apostolic age)  (2) 속사도 시대( 100-200) (The post apostolic age)  (3) 교부시대( 200-300) (The ante-nicene-fathers)  (4) 세계공의회 시대( 300-500) (The post, nicene-fathers) (The age of ecuumanical councils)  7. 초대교회의 지리적 배경은 어떠한가?  희랍문화권과 로마의 정치권이 미치는 전지역이나 특히 동부 지중해 연안지역이 중심이 되었다.          8. 기독교회 발생 시 시대적 배경은 어떠하였는가?  기독교회의 출발배경에는  (1) 로마의 정치, 희랍의 문화로 이루어진 이방사회 (the Graeco - Roman World)  (2) 전통적 유대교가 있었다. (Judaism)9. 로마 - 희랍세계의 특성은 무엇인가?   초대교회가 활동한 로마 - 희랍 정치문화권은  (1) 자연적으로 동으로 유브라데 강 유역으로부터 서로 영국까지 북으로 라인강과 도나우 강으        로 부터 남으로 에티오피아와 북아프리카까지 였으며  (2) 복수민족들의 복합문화가 점차 로마 - 희랍문화로 통일되었다.  (3) 로마제국의 정치권이 “로마의 평화” (pax Romana)를 유지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자유로운        지중해 해상교통과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4) 처음에 코이네 희랍어 (Koine Greek) 다음에 Latin 어가 국제통용어가 되었다  (5) 복수종교가 활발하였고, 특히 황제숭배 (Emperor Worship) 와 민간신앙으로 신비종교     (the mysteries) 가 성행하였다.  (6) 철학으로는 스토아 철학 (stoicism) , 쾌락주의 (Epicureanism) ,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      플라톤 철학 , 신플라톤주의 (Aristoteles, Platon, neo Platonism) 등이 유행하였다.10. 유대교적 배경은 어떠하였는가?    유대인들은 흩어진 유대인 (the Jews of diaspora) 과 팔레스틴의 유대인으로 구별하는데  (1) 흩어진 유대인들은 주로 소아시아와 지중해 각지의 도시들에 정착하여 상업에 종사하였다.     로마로부터 종교적 특권을 부여받아 각지에 회당을 지었다. 그리고 각성에서 모세를 전하였       으며(행15:21) 많은 이방인들 중에서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하여 활동하였고 희랍철학의       영향을 받아 유대교를 발전시켰다.  (2) 팔레스틴 유대인들은 매우 보수적이었고 정치적으로는 로마에 예속되었으나 종교적으로는        자유를 누렸으며 희랍 영향을 배제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이들 중에는 묵시문학이 성하고       과격한 메시야 사상이 성행하였다.11. 중간사란 무엇인가? (lnter- testamental period)   히브리 정경인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가 쓰여진 주전 5c (BC 450)부터 신약이 쓰여질 때 까          지 약500년간의 유대인의 역사를 말한다.  (1) 수많은 묵시문학과 메시아 대망의 기운이 일어났다.     (apocalyptic literature) (messianic movement)  (2) 수많은 외경(外經 apocrypha) 5권과 가경(假經 pseudepigrapha) 이 쓰여졌다.  (3) 유대지방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열심당원, 그리고 헤롯당원, 금욕적(禁慾的)인 에쎄네파들       이 생겼다.  에쎄네 (the Essenes) 파는 신약성경에 언급이 없음으로 예수님 승천 후 생겨난       단체일지 확실치 않다.12. 헬라파 유대인들은 누구인가? (행6:1)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으로서 헬라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알렉산드리아의 휘로 (philo) 가 대표자이며 구약을 헬라말로 번역하였다. (BC 3C 소위 70인역    the septuajint)                                  Ⅱ   사 도 시 대 (1-100년)14. 초대교회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   예루살렘교회의 설립부터이다. 주후29년 첫 오순절 성령강림과 더불어 12사도를 중심으로 초대   교회가 시작되었으며 고대 카토릭교회 이전까지를 가르킨다. 전술한바와 같이 첫 500년을 가르   키기도 한다.15. 예루살렘교회의 형편은 어떠하였는가?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 (행 15:13, 21:18, 갈 2:9) 가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였으며 대부분 갈릴     리 출신의 유대인 신자들로 구성되었고 여전히 성전에서 예배하고 유대인의 습관을 쫓았다.   조직은 사도들 (ϑποϬτολος)과 장로들(  ) 일곱 집사(  )들이 있었다.                          사도들은 주로 전도여행에 나섰고 집사들이 성도를 공궤하였고 장로인 야고보 등이 지도자로   일하였다.   이 초대교회는 단순히 믿는 이들 (        행5:13) 형제들 (     ),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 (       )성도들(    )이라 불리어졌다.   이들은 하나의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복음을 전파하고 성령으로 교제하고 물건을 통용하며 하     나님을 예배하였다. (벧전2:9-10, 엡2:11-22, 행2:37-47)16. 안디옥 교회의 형편은 어떠하였는가?   안디옥 교회 (The church of Antioch of Syria) 는 스데반의 순교 (주후35년경) 후에 흩어진      성도들이 로마제국의 제3도시인 시리아의 안디옥에 복음을 전하여 이방에 설립된 첫 교회이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어졌다(행11:26)   초대교회의 이곳의 지도자는 바나바와 사울이였고 여기를 거점으로 이방전도가 처음으로 시      작 되었다.17. 바울의 전도여행을 기술하라.   (1) 제 1차 여행 (행13:-14:27)     안디옥 ㅡ> 실루기아ㅡ> 살라미ㅡ> 바보ㅡ> 버가ㅡ> 비시디아ㅡ> 안디옥 ㅡ> 이고니온 ㅡ      >루스드라ㅡ> 더베ㅡ> 루스드라ㅡ> 이고니온 ㅡ>비시디아안디옥ㅡ> 버가ㅡ> 앗탈리아ㅡ>    안디옥     (2) 제 2차 여행 (행15:36-18:22)    안디옥 ㅡ> 다소ㅡ>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바시디아안디옥 ㅡ> 드로아 사모드라게ㅡ>    네압볼리ㅡ> 빌립보ㅡ> 압비볼리ㅡ> 아볼로니아ㅡ> 데살로니가ㅡ> 베뢰아ㅡ> 아덴 ㅡ>    고린도ㅡ> 에베소ㅡ> 가이샤라 -------------(안디옥)        *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 전, 후서를 썼다.     (3) 제 3차 여행 (행18:23- 21:17)    안디옥 ㅡ>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 ㅡ> 에베소ㅡ> 마게도니아ㅡ> 헬라, 고린도,       빌립보,드로아 ㅡ> 밀레도ㅡ> 바다라ㅡ> 가이샤라.        * 에베소에서 2년 머무는 동안 골로새,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히에라 폴리스를 세웠고 고          린도 전서를 썼다.      * 마게도니아에서 고린도후서를 썼다.      * 고린도에서 57년경 로마서를 썼다.      * 로마옥중에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골로새서, 에베소서를 썼다.18.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의 전도에 대해서 설명하라.  (1) 동반자가 있었음 1차는 바나바, 2차는 실라와 디모데, 3차는 여러 일행들이 있었다.  (2)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함  (3) 유대인의 회당에서 먼저 복음을 전함.  (4) 교회를 세우고 장로들을 세움.  (5) 세워진 교회에 편지를 보내어 권면 함.19. “유대주의자” (Judaizer, Judaist) 란 누구를 가르키는가?   유대인 기독교인으로서 구약의 제사법, 결례법, 율례가 이방기독교 인들에게도 유효한 하나님     의 법이라고 주장하여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강권하고 초대교회의 전도에 큰 장애물이 되었     다. (행15:1- )20.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The Jerusalem council 주후 49년경) 무엇이 결정되었나?    이방인 전도자로 바울과 바나바를 공식으로 인정하고 복음을 받은 이방인들에게 이방인의 멍      에를 풀어주고 다만 각 성에서 모세의 율법을 전하는 이가 있었음으로   (1) 우상의 더러운 것   (2) 음행   (3) 목메어 죽인겻   (4) 피를 멀리하기만을 전함 (행15:)21. 사도시대에 복음이 어디까지 전파되었나?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지중해 연안의 각 도시에 사는 유대인들과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그 외에도 유대인들이 흩어져 사는 모든 지방과 유대교를 따르는 경건한 이방인 (God-fearer)   들에게 전하여 졌으니 곧 행 2:9-13 에 보인바와 같다, 바대, 메대, 엘람, 갑바도기아, 본도, 브     루기아, 애굽, 리비아, 아라비아,22. 다른 사도들의 활동은 어떠하였는가?     (1) 요한(행8:14 참고)    사마리아 전도, 전승(傳承)에 의하면 에베소에서 일하고 밧모섬에서 계시록을 쓰고 다시 에베      소에 돌아와서 요한복음, 요한1,2,3서를 씀.      (2) 베드로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실 외에 제2세기의 교부(敎父) 이레네우스는 베드로가 바울과 함께 로마      교회를 세웠다 하고 제4세기의 유세비우스 사기(史記)에 의하면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함  (주후 68년경)       (3) 야고보 (세베대의 아들)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 순교함 주후 44년경(행12:2)      (4) 야고보 (알패오의 아들) --------잘 알려지지 않음.      (5) 안드레 -----유세비우스 사기(史記)에 의하면 스구디아에서 전도하였다 함,                     다늅강 이북(以北)      (6) 빌립  ------잘 알려지지 않음.      (7) 바돌로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인도에서 전도하였다고 함.     (8) 도마  ----- 유세비우스 사기에 의하면 인도에 전도하여 말라바 기독교회를 세우고 순교                     하였다고 함.       (9) 마태 ------전승에 의하면 히브리인들에 전도하였다 함.      (10)다대오 ----요 14:22의 유다라는 설도 있음, 활동은 알려지지 않음.      (11)시몬 -----외경(外經)에 의하면 페르샤에서 순교함.      (12)맛디아 ----외경에 의하면 에티오피아에서 순교함.23. 사도시대의 교회 핍박의 원인은 무엇인가?   (1) 유대인들과 유대의 위정자들에 의하여 핍박을 받음       (원인은 이단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때문에)   (2) 거짓 형제들 특히 유대주의자에 의하여 핍박을 받음 그 원인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음         으로   (3) 이방인들에 의하여 핍박을 받음, 그 원인은 무신론이라 핍박을 받고 종교간의 갈등.   (4) 로마의 위정자들에 의하여 핍박을 받음.       로마의 위정자들은 기독교를 유대교회의 한 분파로 간주하였으며 각지방 위정자의 특수한         형편에 따라 핍박을 함.    24. 핍박과 기독교회의 설립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초대교회 즉 사도들의 교회는 처음에 유대교의 한 분파로 간주되었으나 수많은 순교자를 통하     여 기독교 신앙의 통일성이 나타나게 되었고 하나의 독립된 신앙으로 간주되게 되었다.   25. 로마 위정자에 의한 사도시대의 핍박은 어떠하였느가?   네로 황제 (Nero 37-68) 는 주후 54년-68년 황제 위에 있었는데 주후 64년 로마 대 화재의 방     화죄를 돌리고 인류를 혐오한다는 괴목으로 기독교인을 박해하였다.   전승은 베드로와 바울이 그의 통치 만년에 순교하였다한다.26 예루살렘의 멸망은 어떤 의미를 가졌느가? (주후 70년)   (1)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의 성취   (2) 성전중심의 신앙과 예배의 종색   (3) 예루살렘 교회는 산헤드린 공회에 의하여 지도자인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가 주후 62년 순        교하고 또 일설에 주님의 사촌인 그로바의 아들 시므온의 영도 하에 예루살렘 함락 후에         일시요단강 건너편 펠라(Pella)로 옮겨갔다.       (4) 이방교회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5) 유대인이 세계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27. 사도시대 말기에 나타난 나시렛파 (the nazarenes) 와 에비온파 (the Ebionites) 란 무엇      인가?   (1) 나사렛파는 예수님을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의 가르침이 모세와 선지자들의 가        르침 보다 우월함을 믿었으나 유대 기독교인들은 계속 할례와 안식일 성수와 정결한 음식        을 먹어야한다고 주장한 유대인 기독교인들이었다. (유대주의)      (2) 에비온파는 예수님은 단순히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이며 그가 세례를 받을 때에 그리스도께        서 비둘기의 형체로 그 위에 임하여 하나님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지 않음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에 벌써 떠나버렸다.      이러한 신앙을 가지고 히브리어로 된 마태복음을 사용하고 바울은 율법을 떠난 배교자로         보았다.  (인성주의) 28. 사도시대 교회의 예배는 어떠하였는가?    (1) 주일을 지키고  (계1:10)    (2) 예배시 성만찬과 세례  (고전11:)    (3)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화답  (엡5:19)    (4) 사도들의 가르침, 예언, 방언  (고전12:)       구약교회의 예배 형식이 일부분 계속되었다. (구약교회와 신약교회의 연속성  continuity)       기도 후 아멘하거나 또는 트리스 하기온 (trisagion)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           6:3)“를 사용하였다.29. 사도시대교회의 신앙과 생활의 표준은 무엇인가?  구역성경과 사도들의 저작들이었다. (복음서와 서한들)  주후 98년경 저작된 계시록을 마지막으로 신약정경인 사도들의 저작이 끝났다.  사도들의 저작들은 영감과 권위를 구약정경과 같이 가지고 있으며 신약교회의 정경으로 받아드    렸다. (벧후 3:15-16, 요 16:13, 고전 2:13, 살후 2:15 고전 14:37, 엡 2:20, 엡 3:5)                           Ⅲ. 속사도 시대 ( The Post-apostolic)30. 제2시기 속사도 시대의 특성은 무엇인가?   (1) 심한 핍박가운데서 교회가 성장할 시기이다.   (2) 속사도 교부들이 활동하고 수많은 저작들이 나타났다.    (3) 교회의 조직과 교리를 정비하기 시작하고.   (4) 특히 제2세기 후반에는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는 변증가들이 배출되었다.31. 속사도시대의 핍박의 성질과 원인에 대해서 말하라.   (1) 제2단계 핍박이 시작되었는데 로마 위정자들에게 이미 기독교는 로마제국내의 독자적 종교         로서 인정되었으며 박해는 아직 조직적은 아니었고 다만 국법을 어김에 대하여 각지방별         로 법적 제재를 가하였다.    (2) 그 원인은 ?       a. 기독교 신앙이 로마의 전통신앙을 파괴하며 로마제국의 재난을 초래하고        b. 예수님 한 분만을 주로(kuplos) 받아들임으로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기존정치 사회질서            를 파괴하며        c. 기독교 신앙이 비도덕적, 반사회적 활동을 한다고 의심하였기 때문이다.           (음란, 식육, 비밀결사)       d. 유대인들이 시기로 밀고해서32. 제 2세기 로마황제들의 핍박에 대해서 설명하라.    (1) 트라잔 (Trajan 98-117) : 안티오 감독 익나티우스 순교 (110-115)    (2) 하드리안 (Hadrian 117-138) : 123년경 소아세아 박해 의법 처단              (3) 안토니우스, 피우스 (Antonius, Pius 138-161) : 로마교회 박해,                                                    서머나에서 감독 폴리갑 순교(156)     (4) 마커스, 오텔리우스 (Marcus, Aurelius 161-180) : 자스틴이 순교, 핍박 심하다(165)                                                      소아시아, 리옹에서 (불란서)    (5) 코모더스 (Commodus 180-192)     (6) 세베르스 (Severus 193-211) : 북아프리카, 애굽,  알렉산드리아에서 오리겐의 아버지 순                                       교   33.제2세기 기독교 신앙의 전파는 어디까지 이르렀나?   제2세기말 (180년)은 지중해 연안 각 지역에 기독교가 성하였고 제국의 경계를 넘어 변경지방     과 그 밖에도 교회가 생겨났다.   예를 들면 불란서 지방에는 소아시아의 상업로를 통하여 리봉 그리고 비엔느(vienne) 지방에      교회가 서고 서머나 출신 이레니우스가 감독으로 활약하였다.  희랍어가 통용되는 전지역에 복     음이  퍼졌다.    1세기는 도시, 2세기는 시골에 전파되었다.34. 속사도시대 교부들은 누구를 가르치는가?    속사도시대 교부들이란 “사도적교부” (the apostolic fathers)라 부르기도 하는데 제2세기초             (100~150년) 각지방교회의 지도자들이었고 (대부분 감독) 여러 가지 저작들을 남겼다.      (1) 로마의 클레멘트 (Clement of Rome) ---- 로마 감독이며 고린도교회에 보낸 목회 서한이                                                 었다(96년경).  초대교회의 귀증한 자료다.      (2) 로마의 헤르마스  (Hermas of Rome 115 - 140) ----“목양가” (The shepherd) 의 저자 그                                                          리스도인의 도덕적 생물에 대해 전면  (3) 안디옥의 익나티우스 (Ignatius of Antioch 35 - 117)                         익나티우스의 7편지 로마로 순교하러 가던도중 소아시아 7교회에 보낸                           편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 교회 탄압 강조, 이단(유대주의, 가현설)                            반박, 그리스도의신성, 인성강조, 자기의 순교를 막지말라고 당부, 최초                           의 휼륭한 교부.  (4) 스머나의 폴리갑  (Polycarp of Smyrna 69 -156년)                        빌립보에 보낸 편지, 의나티우스를 만난 기록이 있다. 이단 마릿온 파에                          대해 정통보수 이레네우스에 의하면 요한과 예수님을 만난 여러 사람과                          권면이 있다.  2세기 후반 변증가의 교량  (5) 파피아스 (Papias 60-130)---- 소아시아 히에라포리스 감독 요한의 제자, 플리갑 친구, 주님                                     의 말씀에 대한 주해를 쓰다. 유세비우스의 저자 속에 마가,                                     마태가 히브리어로 썼다고 증거.  (6) 이레네우스 (Ireneaus)---- 리옹의 감독, 2세기 후반 서머나 출신, 소년 시 폴리갑 설교 듣                                  다. 소아시아 전통을 가지고 서방교회에서 일. 모든 이단에 대                                  한 반박론, 영지주의, 천년왕국 비판, 최초의 정통신학자 (정경                                  론, 3위 1체론, 성육 신교록, 교회론)      35. 제 2세기초에 나타난 외경들은 어떠하였는가?    (1) 복음서 외경    a. 히브리인의 복음서     b. 애굽인의 복음서    c. 베드로 복음서    d. 로마의 복음서      (2) 계시록 외경     a. 베드로 계시록    b.사도의 편지   (3) 사도행정 외경    a. 바울 행전    b. 요한 행전    c. 도마 행전    d. 안드레 행전      이러한 외경의 저작들은 정경과 함께 신자들 사이에 유행하였으나 대부분 전설과 이단들의       저작들이다. 영지주의 가현설이 많다.36. 제 2세기말에 나타난 희랍 변증가 (Greek apologist)  주로 150-200년에 활발한 기독교 변증가들로서   (1) 대외적으로 유대교와 이교와 희랍철학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을 철학적으로 변증하        고 로마 위정자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도덕성을 변호하였다.   (2) 대내적으로 이단들에 대하여 정통신앙을 고수하고 기독교 정통신학 정립과 올바른 교회질서        를 확립하는데 공헌하였다.  a. 아리스티데스 (Aristicles 2세기 후반)---- 아덴사람 하드리안 황제에게 하나님의 존재, 영원                                               성 변호,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며 그의 계명에                                                쫓아 이웃을 사랑하라 하였다.  b. 저스틴 마터 (Justin martyr 100-165)---- 사마리아 출신, 이방 그리스도인, 가장 중요.                 제일 변증서 (Apology)---- 로마황제에게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 도덕성 변증     c. 타시안 (Tatian 160 년경)---- 시리아 출신 희랍 문화를 공격하고 기독교 순수성을 변증.  d. 아테나고라스 (Athenagoras 2세기인)---- 마커스 오렐리어스 황제에게 기독교 변증 무시론                                               자의  대해서 반박.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선 저                                               술, 처음으로 3위 1체 교리에 대한 철학적 변증을                                               하려함.  e. 안디옥의 데오필러스 (Theophilus of Antioch 2세기 후반)---- 기독교 창조 교리가 이방의                                                                    신화보다 우수함을 변증.37. 셀러스의 “참된 말씀” (True discourse of Cersus) 이란?   기독교의 대한 최초의 철학적, 종교적 공격이 기록된 현존하는 책.38. 속사도 시대의 교회의 조직은 어떠하였는가?대체로 감독중심의 교회가 되기 시작하고 제 3세기 고대 카토릭교회의 형태가 발생되기 시작하다.소아시아의 의나티우스는 자신이 감독의 자격으로 여러 지방에 권면하는 권면을 썼다. 이 편지에 의하면 각 지방의 감독이 있고 그 밑에 여러 교회들이 있었다. 세례와 예찬은 감독이 주재하였고, 성찬은 감독이나 그의 위임받은 사람이 행하였다. 소아시아 지방은 여전히 감독, 장로, 집사들의 직분이 구별되어 있다. 감독은 하나님 아버지를 대리하고 장로들은 사도들의 총회, 하나님의 공회 (Sanhedrin of god) 로 생각되었다.서방교회의 사정은 로마의 클레멘트가 쓴 편지의 의하면 사도들의 의하여 감독들과 집사들이 임명되었다고 하며 “교훈” 이라는 책에는 장로들에 대한 언급이 없고 다만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순종하기를 명하였다.제 2세기에는 감독(  ) 과 장로는 서로 직분으로 나타났다. (디도서 1:5 1:7, 딤전 3:1-7)39. 로마교회의 등장은 어떠하였는가?로마교회는 베드로와 바울 이전에 이미 로마에 설립되어 있으며 제2세기말에 이르러 벌써 서방교회의 중요한 교회로 등장하였다. 이레네우스가 모든 일을 로마의 감독에게 문의하라 하고, 또 그 권위를 인정하라 하였다.로마는 제국의 정치, 교통, 문화, 상업, 군사의 중심지로 인하여 자연히 수위의 교회가 되었고 또 발전하였다. 두 사도와 수많은 순교자의 피로 세워진 교회이다. 40. 속사도 시대의 예배는 어떠하였는가?(1) 제 2세기의 이르러 성찬과 애찬이 분명히 분리되었어도 점차 성찬 중심이 되었다.(2) 기독교인의 절기가 생겨났다. (유대인의 절기에 상응)(3) 시리아의 바르, 다이산 (Bar - Daisan)은 제2세기말 제3세기초에 찬송시 155편 (시리아어)를      편집하였다. 그러나 영지주의와 운명론적 색채가 짙은 찬송이었다. (4) “교혼” 에는 성찬예배의 모범과 기도법이 적혀있다. 제2세기에는 주기도문을 회중과 개인이      사용하고 예배는 해뜰 무렵과 해질 무렵에 모여 찬송과 기도하였고 하루중 세 차례 (오전9시      정오12시 오후3시) 기도하였다.41. 속사도시대에 일어난 이단들은 무엇인가?  (1) 영지주의 (零知 Gnosticism)  (2) 말시온파 (marcionites)  (3) 몬타너스 주의 (montanism)42. 영지주의란 무엇인가?  (1) 아마도 기원전부터 소아시아와 지중해연안 희랍문화권에 널리 퍼져 있었던 종교사상으로서       페르샤의 동방종교사상과 희랍철학의 혼합사상이며 일정한 종교단체를 구성하지 않았고 그       사상체계도 다양하다.   (2) 이 사상의 주 원리는 영지 (γνωσισ,Gnosis) 인데 영지는 철학적 사고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        고 계시를 통하여 소수에게 주어지며 이 영지를 가진 사람은 물질과 육체의 속박에서 정신        또는 영혼의 해방을 가져 올 수 있다고 믿었다.      항상 물질과 정신 육체와 영은 대립되며 물질과 육체를 악하고 정신이 영혼은 선하다고 보        는 이원론을 가지며 구원은 정신이 물질에서 해방되어 순수성을 찾고 아버지의 충만에 이        르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3) 이러한 이교사상이 기독교 신비성과 혼합되어 신약성경 때부터 (요일 4:11-13) 시작하여 제        2세기에 이르러 가장 무서운 이단사상으로 등장하였다.            보이는 세계의 창조자 (데미어지 Demiurge)는 구약의 신이며 악신이고 그리스도는 육체를        입지 않고 사람처럼 나타났으며 (dokeo,δοκεω (도케오) 나타나다) 순수한 영으로서 육체에        갇힌 인간의 영을 해방하고 물질에 오염된 영을 깨끗하게 한 구주라고 믿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을 부정하고 금욕생활을 주장한 이단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적 영지주의는 기독교 신앙의 역사성을 부정하거나 극소화시키고 당시의 시대적 사조에 영        합하였다.43. 제2세기 기독교회 내에 영지주의적 요소를 지닌 사람은 누구인가?    일설에 의하면 사마리아 성에서 돈으로 성령을 부여하는 권세를 사려한 마술사 시몬(Simon       magus 행 3:9-24)이, 이 사상의 시초이며 제2세기의 에뎃사와 알랙산드리아 지역의 기독교는      영지주의적 색채를 띠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바실리테스(Basilides)와 발렌티누스(Valentinus)      는 대표적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이다.44. 가현설 (Docetism, δοκεω) 이란 무엇인가?    영지주의자들 가운데 가현설을 따르는 이가 많다.    가현설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과 육체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부정하거나 또는      그것이 마귀를 속이려는 계책이 있을 뿐이거나 또는 가롯 유다나 구레네 시몬이 실상 대신       죽고 예수님은 죽음을 피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가현설은 체계 있는 종교사상이 아니고 이      러한 영지주의적 경향을 띤 제설을 가리킨다.45. 이 영지주의와 가현설에 대항하여 싸운 이들이 누구인가?   주로 소아시아 계통의 교부들로서 제2세기의 익나티우스, 이레네우스, 저스틴등이며 제3세기의     서방교회의 터틀리안과 히폴리투스이다. 이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하여 정통적     (성경적) 입장을 변증하였다.    46. 말시온파 (marcion) 란?   말시온 (100-?)은 소아시아 본도 사람으로 주후 138-139년경 로마에서 이단교리를 가르치다가     출교 당하고 자파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는 수세기 동안 계속되었다가 나중에는 마니교           (monichaeism)에 흡수되었다.   그의 주요 가르침은 구약의 하나님은 율법의 신으로서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 즉 사랑의 신      과 다른 분이며 구약은 유대인의 책이라 하여 버리고 바울의 열 서한만 정경으로 사용하였다.     다른 12사도들은 유대적 영향으로 인하여 신령한 눈이 어두워 졌다고 하였다. 그는 순수한 바     울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신약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하며 교회개혁을 부르짖었다. 말시온파는     속사도 시대의 교회들에게 정경이 확립될 필요성을 일깨워주고 신구약간의 연속성을 전통의      기간(基幹)으로 삼도록 일깨워주었다. 47. 속사도 시대 후반에 나타난 몬타너스(montanism) 주의란 무엇인가?   몬타너스는 2세기 소아시아 브리기아 사람으로 과격한 성령파 운동의 시조이다. 그 주 원리는     성령께서 신약시대에도 계속하여 권위 있는 새로운 계시를 주시고 신비한 체험을 하게 하신다     고 주장한다 (방언, 예안, 환상) 임박한 예수님의 재림과 엄격한 신앙생활 (금욕, 금식, 순교)을     강조하고 새 예루살렘 이상 세계의 도래를 기다렸다. 천년왕국설의 시초이다.    이 운동은 교회정화를 부르짖고 교회개혁을 원하는 제3세기의 터틀리안도 후년에 이 운동에      가담하였다.48. 속사도시대 말에 일어난 이러한 분리주의 운동과 이단들은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1) 사도들의 가르침이 무엇인가 정의하여 사도들의 저작으로   (2) 사도들로부터 이어지는 간단 명료한 신조로 고백하는 일을 하게 함      따라서 제3세기 정통카톨릭교회(보편교회)의 성립을 촉진하였다.                                                   교부시대 (200-300)                     니케아공의회 이전 (Ante-Nicene Fathers)49.제3세기 교회사적 시대구분과 그 특성에 대해서 설명하라.   이 시대는 고대 카톨릭교회 (The ancient catholic church) 시대에 해당하는 주후 170-325년 기    간에 속하며 또는 니케아공의회 이전 교부들의 시대라 한다.  이 시대의 특성은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방교회가 성장하여 세계교회의 주도권을  쥐게되고   (1) 사도직 계승에 의한 감독제도의 확정  (2) 신앙의 표준  (3) 정경이 확립되었다.       활발한 신학활동이 있었고 초기의 일시적 평화가 있었으나 말기에 로마 정부의 박해는 최고조    에 이르렀다.  50. 이 시대의 기독교 전파는 어떠하였는가?   전 지중해 연안과 제국변방에 강력한 교회와 신앙생활이 일어났고 신앙의 중심은 소아시아, 알     렉산드리아 지방이었으며 서방은 북아프리카와 칼타코가 중심이 되었다. 외방으로는 불란서,      스페인, 아르메니아, 페르샤, 흑해지방에 교회가 성하였다. 51. 제3세기 교회와 로마정부와의 관계는 어떠하였는가?(1) 제3단계 박해가 이 시대에 일어났고 그것은 로마정부에 의한 조직적이며 계획된 기독교 박멸      운동이었다. 로마제국 전 영역에 정책적으로 박해가 가해졌다. 그 이유는 기독교가 로마제국      의 존립에 큰 위협이 되는 세력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 박해는 주후 313년 가독교가 콘스탄틴 황제 대제에 의하여(Constantine the great) 황제때      에 대 박해가 시작되었다. (2) 제3세기초 약 50년 동안은 평화가 계속되었으나 중엽에 이르러 테시우스 (Decius 249-251) 황     제 때에 대 박해가 있었고 이때에는 제국 때에 교회감독들을 지명하며 이방신들에게 절하게      하고 집회를 금하고 순교자 묘지방문도 금하였다.  258년에는 감독, 신부, 집사들을 죽이게 하     고 재산을 몰수하여 또는 추방하여 노예로 팔기로 하였다. 이 박해는 로마제국 전 지역에 미쳤     으며 칼타코의 감독 키프리안 (yprian)  순교 하였다.   마지막 그리고 최악의 박해는 주후303년에 디오클레티안 황제 (Diocletian 284-305) 때에 있었     는데 이때는 교회 건물을 파괴하고 책들을 소각하고 모든 기독교인들의 지위를 박탈하고 기독     교인들의 사환들을 종으로 삼았다. 이 박해는 영국에서부터 소아시아까지 파급되었다.52. 니케아 공의회 이전 교부들은?  제3세기에 이르러 각지방별로 독특한 신학경향과 교회의 관습이 들어 나게 되었다. 크게 나누어    세 학파를 나눌 수 있는데   (1) 소아시아 학파: 이레네우스, 히포리투스(Hippolytus 173 - 236)  (2) 서방교회 또는 북아프리카 학파: 터들리안 (Tertullian 150 - 225) 키프리안 (Cyprian 275          -258)  (3) 알렉산드리아 학파: 클레멘트 (Clement of Alexandria - 216 ?)53 교부들의 중심과제는 무엇이었는가?  삼위일체론과 예수그리스도의 신인양성 일위의 문제.54 소아시아 학파의 성격과 신학자들을 말하라,  이레네우스의 신학을 통하여 소아시아 학파의 정량을 알 수 있다.  기독교신앙의 역사성 (Historical character)을 강조하며 철저하게 성서신앙 목적이며 역사적 전    통적 기독교신앙을 고수하려 하였다. 그의 신학방법은 기독교의 중심사상을 근거로 하여 통일     신학체계를 정립하려 하였다. 이메비우스는 의나티우스의 교훈을 따라,  (1) 영지주의에 반대하여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 주 하나님은 동일한 분임을 강조하고  (2) 하나님께서 인간 되심으로 인간의 성품이 신의 성품에 참여 할 수 있게되며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통하여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케 된다고 가르쳤다. (회복설)    (Reacapitulation) 최초의 정통신학자로 간주된다.55. 서방교회의 산학적 경향과 신학자들에 관하여 설명하라.   이들은 안렉산드리아 학파가 철학적 편견을 가지고 사변적임에 반하여 현실적이고 실천   신학경향을 가졌다.    따라서 법적 정의의 방법을 (zegal definition)도입하여 여러 가지 신학적 개념을 저의 하려 하     였다.   그리고 교회를 하나의 법적 존재로 보고 사도들의 전승과 교회법을 강조하며 그리스도인의 실     생활에서 성결을 하였다. 철학을 부정하고 신앙을 강조하였다.  (1) 터틀리안 : 칼타고의 감독으로 대표적 서방교회 신학자 라틴교부로 수많은 러틴어 저작을                    남겼다.      a.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한 저작 : 회개론, 여성의 의복에 대해서, 순결을 원함, 금식.      b. 반영지주의 저작들 : 말시온 반박론, 그리스도의 몸에 관하여, 이단 방지론.      c. 영혼론 세례론등이 있다.             라틴신학의 시조로서 3위 1체 (Trinitas) 본질(substantia) 원죄 (pitivm originalis)      성례 (sacramentum) 등의 신학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그는 삼위일체를 설명하고 그리스도의 양성일위를 정의하였다.         (one sudstance three persons, one person twnatues)   (2) 키프리안 : 칼타고의 감독으로 교회일치론, 배교자의 회개 성례등 교회론에 관한 저작을 남                   겼다. “ 교회밖에 구원 없다.56.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경향과 교부들에 관하여    신학경향은 사변적이며, 철학적 편견을 가졌고, 거짓 영지에 대하여 참된 기독교적 영지를 발      견 하여 영지주의적 영향이 깊게 뿌리 박혀 있었다.           철학을 복음의 길잡이로 생각하여 신학의 도구로 사용하였으며 희랍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      다.    비유젹 성경해석법을 사용하였다. (서방은 법적, 소아시아는 문자적, 성경해석법이 있다.)   (1) 알렉산드리아의 크레멘트 : 영지주의와 신 플라톤주의 등을 이용하여 기독교신앙을 철학적       으로 표현할려고 하였다.     저작들로는     프로트렙티코스(Protrepticos) : 이교인들에게 기독교인 되기를 권함.     선생(Paidagogos) : 기독교인의 행위에 관하여       잡론 (stromateis) : 여러 가지 가르침.  (2) 오리겐 : 이파의 가장위대한 신학자.              팔레스틴의 가이사랴에서 일함.  저자들로는 재일 원리론(De principlis), 셀서스 반                박론(cantra celum), 구약성경의 역본들을 비교한 헥사플라(Hexapla) 3위 일체론으                로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원 출생설(Eternal generation)을 주장하였다. 성경해석법                으로는 문자적 해석. 도덕적 해석, 비유적 해석 등으로 구분하고 비유적 해석의 우                월성을 주장하였다.              잘못된 가르침으로는 만인 구원설, 인간 영혼 선재설 등이 있다.              그의 사후 주후 5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일도 있다.57. 제3시기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이단설은 무엇인가?   히플리루스, 터틀리안이 정통적 삼위일체론의 기초를 쌓았다.        그러나 제2세기말부터 모나키즘(monarchism, adoptionism = 독재론) 이 발생하여 유대인으로     부터 가신론의 비난 면하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을 강조하여 그 주권에 의한 단일성     을 주장하였다.  그중에      (1) 양자설(養子說, dynamic monarchism, adoptionism)  예수는 단순한 인간이었으나 세례(洗         禮)를 받을 때에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이단설, 데오더터스(Theodtus) 와 사        모사타의 바울 (Paul of Samosata)  (2) 양식설(樣式說, modalistic)     서머나의 노예트스(Noetus)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하여 그 양태(樣態 modes)       만 달리 나타났을 뿐 이라고함 즉 아버지가 아들로 세상에 태어  나서죽고 부활하였으며 따       라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고난이라고 성부(聖父) 수난설을 말함. 3세기        중엽에 사벨리우스(Sabellius) 주의라고도 함. 하나님 신성은 단자(monad)와 같고 그것의 3       가지 활동을 말하였다.58. 제3세기 기독교는 교회론으로 볼 때 어떤 관계에 이르렀는가?   제3세기는 고대 카토릭교회의 시작이다.59. 사도신경의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 (I believe in the holy catholic church) 란 말 가      운데  공회란  무엇인가?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를 가르치는 말인데 카토릭이란 말은 제2세기  익나티우스 감독이 서머나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처음 쓴, 말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은 어디나 카토릭교회”(공     회) 라 하였다. 제3세기에 와서 이 말은 “보편” 교회를 가르키고 분리주의와 이단교회에 대하     여 “정통” 교회의 뜻으로 쓰여졌다. (Orthodox)60. 제3세기 교회는 이단과 분리주의자에 대항하여 보편 정통교회의 표징으로서 무엇을 강조      하였는가?   (1) 감독 직의 사도적 계승 (The Apostolic succession of the Episcopate) = Catholic church    (2) 신약의 정경 = Catholic of the  New Testament.   (3) 신조(信條, 사도신경) = Catholic faith  61.감독적 사도적 계승이란 무엇인가?  이레네우스 당시의 거짓된 교훈을 막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참된 교훈이 사도들에 의하여 감독    으로 계승되어 내려왔다고 말하였다. 이 사도적 계승에 의한 교훈이 바른 신앙과 생활표준이며    감독들은 이러한 교훈의 수호자라고 생각하였다.   예컨데 로마의 감독들은 베드로-라이너스(Linus).....순으로 계승되어 내려왔다고 한다.62. 제3세기 교회에서 감독의 위치는 어떠하였는가?  교회의 조직 강화와 이단설 방지를 위하여 각지방도시에 감독들의 교권이 강화되었다. 감독들은    신앙생활의 전 영역을 감독하게 되었으며 점차 사도적 계승을 이은 감독들이 정통교회 특징이    되었다.63. 신약의 정경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특히 말시온이 정경론의 이단설을 주장함에 따라 처음부터 교회에서 그 우위성이 인정되어오     던 정경 27권을 더 강조하게 되었다. 제2세기 말경에 신약27권의 정경성이 보편교회에 인정되     었고 제3세기에 확립되었다. 지금 우리가 가진 신약27권의 권명이 완전히 기록된 문서적 증거     는 제4세기(376) 아다나시우스의 편지이다.(참고: 397년 제3회 칼타코 공회. 정경27권)    정경의 기준은?   (1)사도와 사도들의 영향을 직접 받아쓴 저작  (2)제외된 책은 영지주의 색채와 몬타너스파에 거짓선지자들의 저작들이었으며  (3)오랜 시간의 교회생활의 경험으로 구약의 계시가 신약에서 최고절정에 달한 구속사의 연관성       에 부합되는 저작 여기에서 클레멘트의 고린도 1서와 허메스의 독양자, 교훈, 베드로서의 계       시록등이 제외되었다.  64. 사도신경은 어떻게 사용되었는가?     제3세기의 영지주의자들과 분리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사도적 신앙고백을 강조하여 사용하게 되     었다.   사도들이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신앙고백을 한 이후 이러한 신앙고백 (마16:16)은 마28:19에도      나타나 보인다.   그러나 현재의 사도신경과 같은 형태는 주후450년경 남부 골(Gaul) 지방에서 사용된 것이 기     록된 최고의 증거물이다. 로마교회에서는 제2세기부터 제4세기에 이르기까지 세례 문답 시에      사용한 로마 신조(Roman Symbol) 또는(creed) 가 있었다. 그것은 지금의 사도신경에서 “거룩     한 공회”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영원히 사는 것” 이 빠져있다.65. 데시한 박해후 교회안에 일어난 분리운동은?   노바시안(Novatian)은 제3세기 로마교회의 장로로 정통적 신학자이다.  주후250-260 까지의 대     박해 시에 신앙을 양보하거나 배반한 성도들이 박해가 지난 다음에 회개하고 다시 성찬에 참     여하고자 할 때 에 당시의 로마의 감독 코넬리우스(Cornelius) 가 그들을 복권시킴에 대하여      강력히 반대하자 노바시안은 로마교회 감독에 대립하여 또 다른 로마의 감독으로 선출되고 교     회를 분리하였다. 그는 로마교회에서 새 교회로 전입하는 자에게 재 세례를 요구하였다.   이 운동은 전제국에 일부는 몬타너스 운동과 합세하였다.   제4세기초에 디오클레리안 박해 때에도 북아프리카 칼타코에서도 이런 일이 있어 도나터스 운     동이라 불리어졌다   리벨라티치(libellatici) : 제사지낸 암표를 사서  형을 모면한자.   싸크라휘카티(Sacraficati) : 실제 제사지낸 자.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의 문제가 있었다.66. 카프리안의 교회관은 어떠하였는가?    키프리안은 노바시안을 교회밖에 있는 이단으로 단정하였다.     회개한 범과인(The lapsed 타락인, 떨어진이) 은 다시 엄격한 회개와 심사를 거쳐 다시 성찬      에 참여시킴으로서 노바시안과 코넬리우스 분쟁에서 로마의 감독 편에 들였다.    그러나 회개의 엄격한 규정을 두어 중재를 모색하였다.     초기 터툴리안 주장을 따라(그의 제자이다) 교회는 법인체이며 사도들의 교훈을 가지고 사도      들을 계승한 감독들이 다스린다고 하였다.  그는 교회의 단일성을 감독 중심에 두고 교인의       자격은 감독에게 복종하는 것이라 하였다.    감독을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반대하는 것이라 하고 이런 뜻에서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      다” 고 주장하다. (Salus extra ecclesiam non est)67. 일반적인 로마교회의 형편은 어떠하였는가?   로마의 감독 칼리스투스(Canistus)는 회개치 못할 죄가 없다 하고 진실한 회개와 속죄행위        (repentance and penance)를 통하여 타락한자가 복권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교회는 쭉정이와 알곡(마13:23-30)이 함께 있는 곳이라 하였고 회개한 자에게 재 세례     를 요구하지 않았다.  터툴리안과 히폴리투스는 교회의 타락을 염려하고 칼리스투스에게 반대     하였다.68. 제3세기 세례관은 어떠하였는가?   안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세례 받을 때 중생 한다고 생각하였다.   터툴리안은 세례받은 사람이 범죄 하였을 때 단 두 번의 기회밖에 회개할 기회가 없다고 하였     다.    교부들은 세례와 더불어 완전히 죄를 씻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69. 제3세기의 성만찬관은 어떠하였는가?   키프리안이 성찬은 “희생”이라는 설을 주장하여 지금 로마 카토릭교회의 교리가 되었다.          (Priest 신부) Priest는 본래 어원이 장로인의 준말로서 제2세기말 제3세기초에 이르러 키프리     안이 사제의 뜻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감독들에게 제사직분이 있었으나 차츰 교회가 커지면서 지방의 장로들이 사제직을      수행하여 프리스트로 바뀌었다.   .                               V. 세계공의회 시대 (300 - 500)                        (Post Nicene Fathers 또는 the Age of Ecumanical Councils) 70. 공의회 시대의 시대적 특성을 말하라   공의회시대는 주후 312-313년 콘스탄틴 대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되어 신교의 자유를 얻은     다음부터 로마황제들의 보호 하에 공의회를 통하여 제국내의 기독교의 교리와 행정에 있어 통     일된 활동을 하려한 제4세기-제5세기를 말한다.    주후 383년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The state church 또는 The established church)     이 시대는 보편교회의 정통교리가 공의회를 통하여 확정 선포되었으며 이를 위한 신학적 논쟁     이 격렬하게 일어나고 교회의 분열도 있었다.  특히 3위1체 교리와 예수님의 신인양성 결합문     제가 주 관심이었다.    그리고 수도원 운동이 일어나고 신비주의 운동도 일어났다.   교회전체로는 급격히 신자들이 늘어나고 교회가 외형적 체제와 권력 면에서 비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동서로 분리되고 서 로마제국은 제5세기말 (476년)에      북방 야만인들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계속하여 중세기로 들어가게 된다.    동로마제국은 15세기까지 계속되며 제국내의 교회는 황제를 교회의 수반으로 하여 국교로서      계속한다.71. 세계 공의회란 무엇인가? (Ecumanical council)   Ecumanical은 희랍어에서 나온 말인데 인류가 거주하는 온 세계(The whole inhavited world)     을 가르키는 말이다. 온 세계의 기독교의 대표들과 감독들이 회집 하여 교리, 예배, 권징 등에     대해서 의결하고 그 결정은 전세계 기독교인들에게 교회법적 구속력을 지니게 된다. 이런 범세     계적 교회회의를 공의회라 한다.    이것은 주후49년경 예루살렘 공의회의 선례를 따름이다. 그리고 각지방에서는 소규모 공의회를     열어서 여러 가지 문제들을 결정하였다.   동서교회가 같이 인정하는 세계 공의회는 다음과 같다.      제1차 니케아(Nicea325) : 아리우스주의 정죄   제2차 제1콘스 탄티노플(constantinople 381) : 아폴로나리스주의 정죄   제3차 에베소(Ephesus 431) : 네스토리우스 정죄   제4차 칼세돈(Chalcedon 451) : 유리키스주의 정죄   제5차 제2차 콘스탄티노플(            553)   제6차 제3차 콘스탄티노플(            680-681) :   제7차 제2니케아(            787)   로마카토릭 교회에서는 제21차 제2 바티칸 공의회까지 잡으나 동방교회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다.    개신교회에서는 대체로 제4차 공의회까지를 인정한다.   W.C.C (world Council of churched)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는 제네바에 상설기구를 가진 교회협의체이다.   세계 공의회와는 별개이다.72. 공의회시대 즉 4세기-5세기에는 기독교 전파가 어디까지 되었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언하고 주일을 공휴일로 하며 많은 교회들을 세우기 시작하여 급    격히 신자들이 늘어났다. 이때부터 순수한 종교적 동기 외에 세상젹 유익을 바라고 교회를 찿는    이가 많았다.  383년 국교가 된 후에 5세기말에는 로마제국의 다수종교가 되었다.  대내외적으로 황제들이 이    교 숭배를 금하고 이교사제에게 중과세를 부과하고, 감독들은 만중들을 교화시키는데 힘썼다(국    가와 교회의 연합에 의한 전도) 대외적으로는 다늄강과 게르만 족속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    (1) 410년에 로마를 침입한 고르족(Goths)에는 특히 울필라(Ulfilas 311-380)가 전도를 시작하여        5세기에는 모두 아리우스파의 기독교인이 되었다.  (2) 비스코트족은 4세기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Visgoths)  (3) 5세기에 불란서의 프랑크족(Franks)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4) 영국의 원주민인 브리톤족(Britons)에게 3세기에 복음이 들어가서 4세기초에는 디오클레티안       박해 때에 많은 순교자를 내었다.(Alban 최초의 영국순교)     5세기초의 유명한 펠라기우스도 영국출신이다.  (5) 5세기에 아일랜드에 복음이 전파되었다.(Ireland st.Patric)  (6) 그리고 소아시아, 아르메니아, 죠오지아, 페르시아, 인도, 세일론 등에 교회가 성장하였다. 73. 공의회 시대에 기독교에 대립하는 이교도들은 무엇인가?   아직도 제국 내에는 이교의  민간신앙 사원들이 있었고 로마시민들이 명목상 기독교인이 되었     으면서 이교의 습관을 많이 쫓았다. 신플라톤주의가 성향하고 동방의 마니교가 많은 신자를 가     지고 있었다.74. 콘스탄틴 황제의 교회사적 의의를 말하라.   콘스탄틴 황제 (Constantine the great 288-337)는 312년 “신의 도움”으로 대적 막센티우스        (maxentius)의 군대를 말비안(Milvian) 다리에서 완파하고 주후 313년 리시니우스 (Lisinius)황     제와 함께 밀란 칙령(The Edict of Miran)을 공포하여 기독교와 모든 종교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고 정부에 몰수된 정부재산을 반환해 주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기독교 사제에게 면세특권을 부여하고 주일을 공휴일로 하여 기독교인의 축     제일을 존중히 하도록 지방장관에게 명령하였다.   교회를 짓고 이교사원을 증축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향정권으로 교회를 장악하려 하였다.   니케아 회의를 직접 주재하였다.   정교분리를 과격하게 주장하는 종교개혁시의 재 세례파 신자들은 콘스탄틴 황제이후 기독교가     타락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75. 공의회 시대의 교부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반 교부인들은 누구인가?   교부들      (1)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그 (Athanasius 296-373)   (2) 갑바도기아 형제들 (Cappadocion brothers)      바실 대감독 (Basil the great of Caesarea 330-379)      니사의 그레고리 (Gregory of Nyssa 335-395)      나지언저스의 그레고리 (Gregory of Nazianzas 330-390)   (3) 어거스틴 (Augustine 354-430)     반 교부들   (1) 아리우스(Arius 250-336))   (2) 네스토리우스(Nestcrius 381경-451)   (3) 아폴로나리이스(Appolonariis 310-390)   (4) 펠라기우스(Pelagius 355-?)76. 아리우스주의 (Arianism) 란 무엇인가?  아리우스는 3위 1체론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한 이단설을 주장하였다.  “아들은 시작이 있고 아버지는 시작이 없다.” 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그 이전에 알렉산드리    아의 디오니시우스(Diomysius)의 주장과 비슷하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창조하셨음으로(피조물:κ    τισμα)아들이 없었든 때가 있었고 그러므로 아들은아버지에게종속된다.(종속설Subordinationism)77. 니케아 회의의 결정은 무엇인가?  325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와 장로 아리우스 사이에 분쟁이 있었는데 콘스탄틴 황제    가 공의회를 열어 중재하려 하였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를 정죄하고 니케아 신조를 결    의하였다.  (The Nicene Creed)  니케아 신조 중 일부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이렇게 정의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아버지의 독생자이시다.  따라서 그는 아버지의    본체를 가지시고 (Substance of Father)/ 하나님에서 낳으신 하나님(God from God)/ 빛에서 낳    으신 빛(light from light)/ 참 하나님에서 낳으신 참 하나님(true God from true God)/ 출생 하    였으나 창조되지 않았고(begotten but not made)/ 아버지와 동일 본체를 가지셨다(of the same    substance with Father)/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ꡒ사람이 되시고ꡓ(made man)이라고 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신 점은 역사적 시작이 있음을 천명하였다.    아리우스파 : Homoi ousion (             ) similiar   아타나시우스파 : Homo ousion (            ) one and the same "i" 한마디로 싸웠다.78. 아다나시우스의 활동에 대하여 말하라.    아다나시우스는 젊을 때 집사로서 감독 알렉산더와 함께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 주의를     물리쳤다. 그 후에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되어 끝까지 니케아 정통노선을 고수하여 정통 삼위     일체 교리를 확립하는데 위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의 주관심은 구원론에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사람이며 참 하나님이 되어야만 구주     가 되심을 성경을 통하여 믿게 되었다. 그는 이 정통입장을 취하기 위하여 로마황제에게 네 번     이나 추방을 당하였다.   그는 아폴리나리스 주의와 그리스도의 양성 일위를 견지하였다.79. 기독론 즉 그리스도의 양성에 대한 논의의 두 경향를 말하라.   니케아 신조를 받아들이면서도 이제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문제에 대하여 여러 가     지 이론이 생겼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신적 요소를 강조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인적 역     사적 요소를 강조하는 안디옥 학파간의 신학적 차이가 현저하게 작용하였다.80. 아폴리 나리우스 주의란 무엇인가?   아폴리 나리우스는 라오디게아의 감독으로 철저하게 아리우스를 반재하였다. 그는 기독론의 첫     이단설을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 몸과 마음에 있어서는 온전한 사람이나 그 영은 하나님의 신으로 대치     되어 있다고 주장하여 그리스도의 완전 인성을 부정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안디옥 학파의 갑바도기아 신학자들 중에 나지언즈스의 그레고리는 예수 그리     스도 안에는 신인양성이 온전하다고 주장하였다. 이 아폴리나리우스 주의는 381년 콘스탄티노     플 공의회에서 정죄하였다.   81. 네스토리우스 주의란 무엇인가? (nestorianism)   안디옥 학파에서 아리우스 주의를 반박하였으나 그리스도의 양성의 독립을 과도히 주장하다가     그리스도의 1위성(person)을 약화시키는 잘못을 가졌다.  즉 마치 두 인격체가 결합되어 있는     것 같이 생각하였다.    그는 두 성질의 연합(hypostatic union)을 반대하고 두 성질의 연결(conjunction of two           notures)을 주장하였다. 시설은 테오더커스(theoddkus = mother of God)란 말은 성모 마리아에     게 사용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씨필(cyril)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어머니” (mother of          christ)라고 써야 옳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런 논의가 발단 되였다.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정죄 되었다.82. 5세기(451) 칼세돈 공의회는 무엇을 결정하였는가?   유티커스(Eutycus 유두고)는 cyril의 주장을 따라서 성 육신한 그리스도의 두 성질의 일위성을     과도히 주장하다가 단성론(單性論) 으로 빠지고 말았다.    즉 성육(成肉)은 그리스도에게는 신성만 있다고 하여 양성의 혼합을 말함   칼세돈 공의회에서 이것은 정죄 하고 양성일위를 밝힘   (The person of incarnate christ with two natures)   “예수그리스도는 독생하시고 (only begotten) 서로 혼합할 수 없고(inconfusedly),변화할 수 없고(immutably), 나뉠 수 없고 (indivisibly), 분리할 수 없는(inseparately) 두 성질을 가지고 있다. 두 성질의 구별은 결합(Union)으로 인하여 결코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각각 그 속성을 보존하고 두 성질은 한 인격(person)과 한 본체(substance) 안에서 일치하며 결코 두 인격으로 나뉘거나 분리 되지 않는 하나이며 동일한 성자로서 독생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83. 교부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투쟁에 대하여 말하라.    서방교회는 인론과 구원론에 앞서고 있었다.    특별히 인간성과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과의 관계를 중요시하고 어거스틴은 원죄와 하나님의      은총의 승리를 천명하였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원죄를 부인하고 자유 의지성을 주장하였다.84. 어거스틴의 저작들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의 도성 또는 신국론 : 기독교 역사관이 잘 나타났고 영적 현실(Spiritual Reality) 즉         신앙의 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2) 고백론(confession) : 회개한 경험을 기록하고 있다.    (3) 3위 1체론     (4) 어거스틴 밝힌 중요교리들 : 예정론, 타락과 원죄, 하나님의 은혜, 성례와 은혜,                                  3위 1체론, 교회론. 85. 어거스틴의 일생에 대하여 말하라   북아프리카 히포의 감독 어거스틴은 주후354년에 출생하여 믿는 어머니 모나카에 의하여 기독    교육을 받았다. 대학에서 수사학 공부를 하고 법률사가 되려하였다.  일찍 첩을 취하고 373년 이후에는 일시철학과 마니교의 가르킴을 따랐다, 로마에서 수사학 학교    를 개설하고 학생을 가르치던 중 학생들의 불량한 행동에 실망하였다.  이때에 신 플라톤 주의 철학을 다웠다 밀란으로 건너가 유명한 암보로스 감독의 영향을 입고     어느날 어린아이들이 놀면서 하 는말 “펴서 읽어보아라” 는 말을 듣고 롬13 : 13이하를 펴서 읽    어본 다음에 회개하였다. (385년)  387년 부활절에 세례를 받고 다음해에 고향 히포로 돌아갔다.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 396년 히포 감독이 되었고 430년 세상을 떠났다. 86. 제 4, 5세기의 교회의 조직은 어떠하였는가?  341년 안디옥 공의회의 결정을 보면 감독들 중에서 지방수도의 감독이 대주교로 불리워 지고     또는 사교(metroplican)라 불리워졌다.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 시    골의 사제들에게 성찬을 베풀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로마감독의 지위가 높아졌다. 특히 레오1세 교황(pope)때는 로마감독의 권한은 커졌다.  교황이란 말은 papa에서 나온 말인데 서방교회에서는 감독들을 부를 때 쓴말이며 10세기 이후    에는 로마감독에 한해서 pope라 쓰게 되었다.    87. 교회예배와 생활은 어떠하였는가?      예배는  성찬 중심이었고(미사) 이 성찬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 구속, 영생을 주요내용으      로 하여 베풀어졌다. 제4-5세기에는 순교자들을 숭배하고 그들의 유물을 숭상하며 그들의 묘      지를 순례하였다.     이방신들에 대한 숭배가 성자숭배의 악습으로 바뀌어진 경우도 있다.        동정녀 마리아를 숭배하는 운동도 일어나고 교회 내에 많은 미신이 생겨났다.88. 제5세기 수도원운동의 발생은 어떠하였는가?      (1) 교회의 분열과 함께 교회생활이 나태해지고 따라서 수도원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제 5세기에 이르러 수도원 생활은 벌써 보편교회의 특성이 되었다.  서방교회의 감독들은         대부분 수도원 출신들이었고 주후 385년에는 로마의 감독(pope siricius)는 모든 사제들에게        독신을 명하였다.  이 수도원 운동을 통하여 정통교회에서 배격한 이단 사상들이 교회에 침        투하게 되었다. 에비온파의 율법주의나 영자주의의 금욕사상, 그리고 불건전한 신비 사상등        이다. 그러나 훌륭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든 이단사상을 배격하고 올바른 수도생활로 영력        을 길렸다.       수도원 운동은 3세기 애굽에서 일어났다. 알렉산드리아를 중심한 애굽지역은 금욕주의자들        과 수도생활을 하는 자들이 많았다. 특히 오리겐은 그의 경건한 생활로 본을 보였다.        아다나시우스의 전기에 의하면 안토니 (Antony 250-356)가 수도생활의 시조이다.  그는 개        별적 수도생활의 형태를 취하였고 그의 후배 파코미우스 (Pachomius 285-346)는 수도원 공        동체의 창시자이다.      수도원 규율이 정하여 지고 수도사들이 공동생활을 하였다. 이를 본 따서 수녀원도 생겼다.        소아시아의 동방교회 지역에서는 독자적으로 수도원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가이사랴 바실         대감독, 나지언즈스의 그레고리 등이 그 출신이다.             바실은 유명한 수도원 계율을 만들고       (1) 기도와 일      (2) 간소한 음식      (3) 복종 등의 계율을 가르쳤다.      이 수도원 운동은 중세 서방교회의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서방교회에서는 고올 지방에서 투울(Tours)의 마틴(martin)이 (345-397) 수도원을 시작하였        다.      서방교회의 유명한 지도자들도 수도원 출신이다.      (1) 예 룸 (Jerome 342-420) :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성서학자 “the vulgate"      (2) 암브로스 (Ambrose 339-397) : 밀란의 감독.  골 지방장관의 아들.  레오도시우스 황제                                          를 파문하는 용기를 가졌다. (인민 학살죄)      (3) 요한 크리소스톰 (John chrysostom 347-407) : 콘스탄티 노플의 대사교.  유명한 설교                                                         가.  거룩한 생애.      (4) 유세비우스 (Eusebius of caesarea 260-340) : 유명한 교회사가 콘스탄틴 황제 때에 기                                                       독교 역사를 씀.85. 제 5세기 신비주의의 발생은 어떠한가?   (1)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비주의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2) 주요 교리는      a. 하나님과 사랑의 영혼의 긴밀한 연합      b. 사람의 점진적 변화 (deification)dlaun rm 방법으로서 자기의 감각과 지능의 작용을 부정          하고 신의 조명을 받아 신과 합일된다고 한다.     이 세 단계를 정화→조명→연합         (3) 이러한 신비주의는 다음 기독교의 교리에 배치된다.      a. 하나님의 천지를 창조하신 교리     b. 인간성의 타락이 하나님을 배반한 역사적 타락 때문임     c. 구원은 전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와 성령의 중생으로 됨       따라서 주관적 노력과 신비적 경험으로 신과 합일하려한 잘못된 신비주의다.

 

 

■ 중세 기독교사Ⅰ. 서론∶중세의 세계A. 중세는 이전의 역사가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창조적인 시기였다.1. 중세는 단지 암흑기라 불리우고 대체로 무시되는 경향이 있었다.2. 그러나 중세에는 이전에 역사가들이 생각하던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사건이 발생한 시대였다.B. 근세에 일어난 사건의 대부분은 중세기에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1. 초대 교회 문헌을 연구하는 학문의 부흥도 중세에 시작되었다.2. 오늘날까지 선진국으로 불리우는 민족국가들도 중세에 형성됨3. 대학의 설립도 12c와 13c에 시작되었다.4. 스콜라 철학도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5. 많은 새로운 기관과 사상 운동이 중세기에 형성되었다.6. 신대륙의 발견(미국)도 중세기에 이룩된 사건이다.C. 기독교는 중세사회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중세의 종합”(Medieval Synthesis)라는 표현을 쓴다.1. 중세는 사실상 삶의 모든 영역이 기독교신앙의 영향을 받았고, 기독교는 중세사회에 일치감(Unity)을 주었다. 특히 다음 네 가지 영역이 기독교신앙으로 일치되었다.a.예술 b.경제 c.정치 d.건축2. 중세기에 주의를 기울일 현상은 다음과 같다.a. 기독교신앙은 삶의 여러 영역으로 계속 확장되었다.b. 교회와 국가간의 갈등은 계속되었다.c. 동방 기독교와 서방 기독교간의 분열은 계속되었다. 십자군운동은 어떤 면에서 이 분열을 더 심화시켰다.d. 13세기는 서방 R.C의 “고전적 시기”(Classical Age)라고 할 수 있다. R.C의 중요한 기관과 인물들은 모두 이 시기에 배출되었다. 동시에 13c에는 새로운 사상운동이 일어나고, 새로운 집단(종단)들이 형성되었다.Ⅱ. 십자군운동(The Crusades)A. 십자군운동의 정의∶1095년부터 서방교회에 의해 시작된 일련의 “거룩한 전쟁(聖戰)”으로서 약 200년간 계속되었는데, 표면적인 목적은 성지를 회교도로부터 탈환한다는 것이었다.B. 십자군운동을 일으킨 원인은 비종교적인 원인도 많이 있었으나, 종교적인 원인은 다음 네 가지를 들 수 있다.1. 성지를 회교도로부터 탈환하여, 서방의 성지 순례자들이 성지 방문시 안전을 확보한다.2. 동방로마제국을 회교 세력에 의한 더 이상의 침략을 저지한다.3. 동. 서방이 하나의 신앙으로 다시 뭉침으로써 기독교의 일치를 꾀한다.4. (넷째 이유는 명백히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드러난 이유이다)외부로 관심을 돌리게 함으로써 서방과 서방교회의 평화와 일치를 추구한다.C. 십자군운동 개념의 출현1. 동로마의 황제 Alexius Comnenus (콘스탄티노플거주)는 거듭해서 서방으로부터 도움을 요청했으나, 대부분 무시당했다.2. 그러나 교황 Urban 2세는 이 요청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1095년에 남프랑스의 Clermont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고, 십자군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성공적 설교를 했다. 그 설교의 세 가지 요점이 다음과 같다.a. 그리스도인은 회교도에 대항하는 “성전”에 참여해야 한다.b.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는 자에게는 “완전면죄부”(Full Indulgencd)가 약속된다. 즉 그들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전쟁에서 사망하면 즉시 천국으로 들어간다.c. Urban 2세는 십자군운동은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역설했다.3. 따라서 제1차 십자군운동은 교황 자신이 동기를 부여했고, 봉건영주들을 가담시키고자 했다.a. Peter the Hermit 라는 대중 설교자도 십자군운동을 지지하여 많은 대중을 가담시켰다. 그들은 양식이나 무기도 없이 Constantinople을 향해 진격했다.b. 봉건영주들도 다른 세력을 규합하여 회교도들을 향해 일련의 공격을 개시했다.4. 결국 1099년에 예루살렘을 탈환했고, 많은 예루살렘 거주인을 학살했다.a. 봉건영주 중 한사람인 Godfrey는 예루살렘의 통치자로 등장했고, 스스로를 “성묘의 보호자”라고 불렀다.b. Godfrey의 아우가 계승했는데, 그는 겸손치 못한 자로서 “왕”이라는 칭호를 취했다.c. 그들은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봉건제도 형식으로 토지를 분배하고, 예루살렘의 대감독(Patriarch)으로 서방인을 세웠다.5. 1144년에 회교 세력은 다시 이 지역을 회복키 위해 공격을 시작했다.a. 회교 세력이 다시 탈환한 중요한 지역은 시리아지방의 중요도시인 Edessa였다.b. Edessa를 다시 빼앗긴 것이 제2차 십자군운동의 계기가 되었다.1) <제2차 십자군운동>의 동기를 부여한 사람은 Bernard of Clairvaux 였다.a) Bernard는 이 시기에 가장 활동적인 수도승이었다.b) Bernard는 12c에 남프랑스에 새로 생긴 Order 소속이었다.2) 제2차 십자군운동의 성과는 매우 미미했고, 대부분 실패였다.6. 회교도들도 자체내에 분열이 있었으나, Saladin의 지도하에 Egypt를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통일 세력을 형성했다.a. 결국 예루살렘도 1187년에 Saladin의 지도하에 재 침공한 회교 세력에 의해 재정복당했다.b. 이 사건이 <제3차 십자군운동>을 일으키게 된다.1) 제1차, 제2차 십자군운동은 주로 봉건영주들에 의해 주도되었다.2) 그러나 제3차 십자군은 주로 서방의 최고 통치자들이 관여했다.a) 신성로마제국의 황제b) 프랑스와 영국의 왕들도 직접 십자군에 가담했다.3) 황제는 도중에 익사했다.(70세 수영중) 프랑스와 영국의 왕들은 서로 견제하느라고 바쁜 나머지, 회교세력에 효율적인 공격을 하지 못했다.4) 따라서 제3차 십자군도 별로 성과가 없었다.7. 제4차 십자군은 중세기의 가장 강력한 교황인 Innocent 3세에 의해 주도되었다.a. Innocent 3세는 1201년부터 4차 십자군운동을 주도했다.b. 4차 십자군은 Venice 해운업자들이 운영하는 배를 이용하고자 했다.c. Venice의 해운업자들은 십자군을 권고해서, 먼저 Constantinople로 가서 정치적 분쟁을 해결해야 한다고 설득했다.d. 따라서 십자군은 Constantinople을 침공해서, 약탈하고, 서방인을 황제 자리에 앉히고, 서방인을 Constantinople의 대감독으로 임명했다.e. 동로마제국은 어쩔 수 없이 수도를 Bosporus 해협을 건너 Nicea로 옮겼다.1261년까지 Constantinople로 돌아오지 못했다.f. 제4차 십자군이 중요한 십자군의 마지막이다.8. 그 외에 <아동 십자군“(Children's Crusades)>을 포함한 몇 차례 작은 십자군이 있었다.a. 남프랑스의 한 아동은 하나님께서 큰 군대를 통해 못 이루신 일을 아동들을 통해서 이루신다고 확신하고, 아동군대 모집을 시작했다. Constantinople을 지나 Jerusalem으로 가서 적을 무찌르고 승리를 쟁취하자고 했다.b. 수천 명의 아동들이 집을 떠나 동방으로 향했다. 대부분의 아동들은 노예로 팔렸거나, 굶주림으로 죽었다. 십자군정신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고, 1291년에는 성지의 최후의 보루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E. 따라서 십자군의 주요 목적들은 성취되지 않았다.1. 성지는 여전히 회교 세력에 장악되었고.2. 동로마제국은 강화되기는커녕 도리어 약화되었고.3. 동방교회는 서방교회와 더 반목하고, 멀어지게 되었다.F. 십자군운동은 서방인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1. 서방인들은 동방의 높은 문화를 보았고, 이것이 문예부흥의 부분적 원인이 되었다.2. 서방교회는 동방에도 조금 정착했다. 십자군이후로 동방에는 라틴어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이 계속되었다.3. 서방교회는 많은 유골이나 종교적 작품들을 탈취했는데, 이런 유물을 제공하는 자에게 면죄부를 주었다.4. 회교를 대적하려는 십자군 정신은 방향을 바꾸어“이단”을 퇴치하는데 사용되었다.5. 순례자들의 성지순례를 돕기 위해 일어난 수도원 종단들은 십자군운동이 끝난 후에도 계속되고, 확장되었다.Ⅲ. 서방에 일어난 새로운 수도원 종단들(New Monastic Orders)A. 수도원제도는 동방에서 일어나 동방기독교의 중요한 세력이 되었다. 그후 서방으로 이전되어 서방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1. 서방으로 이전된 후 서방기독교 확장의 중심세력이 되었다.2. 이미 살펴본 바대로 아일랜드와 영국의 수도승들이 야만족 선교에 큰 공헌을 하였다.B. 그러나 동시에 수도원운동은 타락되는 면도 있었으므로 끊임없는 개혁이 요구되었다.1. 이미 살펴본대로 개혁 운동은 수도원 뿐만 아니라, 전교회를 개혁하려는 운동이 되었다.2. 그러나 Cluny운동 그 자체도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부와 세속성이 또다시 수도승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C. 이러한 수도원의 타락은 12c와 특히 13c에 신앙의 엄격성과 단순성 및 청빈을 강조하는 새로운 수도원 창설의 계기가 되었다.1. Cistercian Order는 12c남프랑스에서 일어났고, 그 대표자는 Bernard of Clairvaux 였다 (혹은 씨토단 Citeaux Order).a. Bernard와 30명의 동료들은 1112년에 남프랑스의 수도원에 들어갔다.b. 약 3년뒤에 Clairvaux에 다른 수도원을 창설했다.1) Bernard 자신은 적극적인 봉사 생활과 수도승의 금욕 생활을 강조하는 Cistercian Order의 대변인이 되었다.2) 음식에 관한 규율도 채택했고, 독특한 예배 방식도 개발했는데 종종 침묵 가운데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포함되었다.c. Bernard는 교회 생활에 활동적이었다. 제2차 십자군운동을 주장했으며, 교회의 정통 교리를 옹호했다.d. 그는 일종의 신비주의자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묵상을 강조했고, 찬송가도 작시했는데 일부는 지금까지 불리워진다.(145장,196장).e. 따라서 Cistercian 종단은 12c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Bernard와 그의 동료들의 활약이 컸다.2. 12c에 이와 같은 일부 개혁운동이 있었으나, 13c에 이르러 중요한 새로운 종단들이 형성되었다.D. 13세기에 일어난 네개의 주요 종단들은 특히 청빈(Poverty), 탁발(Begging) 및 세상에 대한 봉사(Service to the World)를 강조했다.1. 13c에 일어나서 계속된 종단은 다음과 같다.a. The Franciscans (프란시스단)∶회색 탁발승, 1210년b. The Dominicans (도미닠 단)∶검은색 탁발승 1215년c. The Carmelites (갈멜 단)∶흰색 탁발승 1229년d. The Augustinians (어거스틴 단)∶오스틴 탁발승 1256년2. 이 종단들은 13c에 번창하기 시작한 도시들에서 확산되었다.3. 이 종단들은 탁발 종단들(Mendicant Orders)이였다. 청빈 서원을 하고, 다른 사람들의 기부에 의존해서 생활했다.4. 이 종단들은 다음 세 가지를 실천했다.a. 청빈서원(Vow of Poverty)b. 순결서원(Vow of Chastity)c. 상급자에 복종서원(Obedience to Superiors)E. 프란시스단(The Franciscan)은 Francis of Assisi (1182~1226)의 생애와 사상으로부터 시작된다.1. Francis는 이태리 중부의 Assisi 지역에 살았던 한 부유한 옷장수의 아들로 태어났다.2. Francis 는 평범한 소년이었으나, 깊은 종교적 체험을 한 뒤 그의 생애를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으로 헌신했다(질병중 환상을 봄).3.낙후된 예배당들을 개축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그 목적을 위해 자기 아버지의 돈을 사용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결국 유산을 상속받지 못한다.4. Francis 는 로마로 여행하면서 많은 빈궁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한 번은 거지의 생활이 어떤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거지와 옷을 바꿔입고 거지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5. 1209년경에 그는 순회 설교자가 되어“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를 선포하며 예수의 삶을 본받고자 했다.6. 곧,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고, 둘이 짝을지어 단순한 옷을 입고 설교하며, 약자를 돕고, 탁발 생활을 하였다.7. 1210년에 교황은( Innocent III세)그들의 선교 사업을 가인준 해주었고, 곧 많은 사람들이 프란시스단에 가입하였다.8. 얼마후에, 이와 비슷한 여성 종단이 일어났고, 또 단순한 생활을 하기는 하되, 프란시스단에 완전히 가입하지 않은 다른 종단도 일어났다.(세번째 종단)=평신도의 반 수도생활9. 시간이 지나자 “세번째 종단”은 거대한 재산을 축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세번째 종단”은 청빈 선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0. Francis 자신은 언제나 단순한 생활을 고집했으므로, 권력, 학문연구, 부를 추구하는 경향을 저지했다.11. Francis 의 생애 중에는 많은 신비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a. 자연을 지극히 사랑해서 건강으로 인해 일시 산중에 은거할 때 일월성신.금수초목,산천계곡,기화어류를 형제라 부르고, 태양의 노래를 부르고, 산새들에게 설교했다고 한다.b. 그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깊이 묵상했다. 죽기2년중에, 그는 사실상“그리스도의 수난의 상처(Stigmata)”를 자기 몸에 받았다고 한다.(성혼)12. Francis 는 자기 자신을 아무 이기심없이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한 인물임이 분명하다. 말기 2년간 안질로 실명, 찬송가33장(온 천하 만물 우러러)를 작시해서 제자들에게 불리우고 1226년 10월3일 49세로 운명. 운명할 떄 종달새떼가 그 집을 둘러 노래했다고 한다. 그의 사후 2년만에 R.C.은 그를 “보호성자” (Patron Saint)로 선언했는데, 전례없는 일이었다.13. 그러나 Francis가 죽기전에 이미 Francis 단에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a. 학문연구(Scholarship)가 강조되기 시작.b. 집단적 재산이 형성되기 시작.c. 모직과 규율이 형성되고, 종단이 커지자 여러 번 개정되었다.14. Francis 의 이상을 실현코자 하는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사람들 사이에 분열이 있게 된다.a. 그러나 점차 후자가 지배적이 된다.b. 조만간에, 프란시스파는 교황의 상담자, 탁월한 학자들을 많이 배출하면서 Francis 의 초기 이상을 포기하게 된다.15. 프란시스단은 아직까지도 R.C.의 주요 종단으로 지속되고 있다.F. 도미닠단(The Dominican Monastic Order)은 Dominic (1170~1221)의 생애와 사상으로부터 시작된다.1.처음부터 Dominic 과 그의 추종자들은 설교, 교육, 훈련 등을 강조했다. 프란시스단이 처음에 주로 하류층을 끌었다고 한다면 도미닠단은 처음부터 상류층 사람들을 끌었다.2. Dominic 은 스페인 사람으로, 처음에는 스페인 자기 고향 교회에서 봉사했다. 남프랑스를 여행하던 중 R.C.으로부터 분리된“카다리파교(The Cathari = Pure ones)를 만났다.a. 비록“카다리파”는 일반적으로 이단으로 간주되었지만, 그들의 생활 방식은 R.C.신도들보다 훨씬 본받을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b. 이들을 바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설교와 삶의 모범을 보이는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3. 따라서 그는 남프랑스에 정착했고,1215년에 교황으로부터 그의 선교사역에 인준을 받게 된다.4. 3연후(1218)그는 Francis를 만나서 감명을 받고, 그의 종단도 탁발 종단이 된다.5. 도미닠은 마지막 몇 달을 로마에서 보내고 로마에서 사망한다. 이 당시에 도미닠단은 성장해서, 계속해서 제2종단, 제3종단을 형성했다(여성종단 및 청빈서원 하지 않는 평신도 종단).6. 도미닠파는 교육을 강조했다. 그들의 수도원은 학교의 기능도 행했다. 도미닉파 수도승 중에 저명한 학자들이 배출되었다.(토마스아퀴나스)G. 다른 두 종단1. 갈멜단(The Carmelites)∶이 종단은 그 기원을 선지자 엘리야에 두고 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 종단을 형성했다고 주장한다.a. 그러나 사실은 12c에 십자군운동중 몇 순례자들이 와서 갈멜산에 은둔자 마을을 형성 한데서 기원한다.b. 그들은 주로 침묵과 묵상의 생활을 했다.c. 일종의 탁발 종단이 되었다d. 1229년이 교황의 인준을 받았다.e. Palestine 이 회교도들에게 재점령 당했을 때, 갈멜단은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서 서방과 동방에 공동체를 형성했다.2. 어거스틴단(The Augustinians)∶이 종단은 그 기원을 Augustine of Hippo 의 생애와 사상에 두고 있다.a. 이 종단은 Italy 에서 시작됨b. Augustine of Hippo 의 규율을 따르기로 결정c. 설교와 학문을 강조함d. 1256년에 독립 종단으로 교황의 인준 받음H. 따라서 12c에는 많은 종단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1. 이 종단들은 중세 교회와 그 이후에도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2. 따라서 “수도원 종단”들이 번성하게 되었다.3. 수도원 종단의 수도승들은 종종 “재속성직자”(Seculer Clergy)와 마찰을 빚게 된다.a.원래 수도승들은 평신도였으나, 후에 대부분이 안수 받게 된다. 그들은 교구 성직자들이 행하던 사역을 행하게 된다1) 설교 2) 성만찬시행 3) 고해성사b. 따라서 “재속성직자”(Seculer Clergy)와 “정규성직자”(Regular Clergy)의 구별이 생기게 되었다.1) 정규성직자란 수도원의 규칙을 따르며, 수도원장 아래 있는 성직자를 가리킨다.2) 재속성지자란 교구에서 사역하는 사람들로, 감독 아래 있는 성직자를 가리킨다.Ⅳ. 중세기의 이단들(R.C.에 의해 이단이라 불리운 집단들)A. 중세기의 교회가 점점 부유해지고, 정치에 더욱 많이 관여하게 되면서 신자들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다.1. 일부는 수도승이 되어 수도원 종단에 가입했다.2. 다른 일부는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신학을 제창하며 분리된 집단을 형성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이단으로 간주되었다.a. 분리된 집단의 구성원들은 교회의 증가하는 부도덕성, 증대되는 세속성, 증대되는 세력, 증대되는 타락을 우려했다.b. 이 가운데 두 집단이 두드러지게 확산되었다.1) 카다리파(The Cathari=Pure ones)2) 왈도파 (The Waldenses)B. 카다리파와 왈도파는 북스페인, 남프랑스, 북이태리에서 업청나게 증가했다.1. 카다리파(The Cathari)a. 카다리파는 2원론자(dualist)들로서 십자군원정중 동방과의 접촉으로 인해 2원론을 도입했다.b. 두 영원한 세력(선한 세력과 악한 세력)이 대립된다고 밀었다.c. 영적인 질서는 선한 세력의 작용으로 보았고, 물질적인 질서는 악한 세력의 작용으로 보았다.d. 많은 사람들이 구약을 거부했고, 신약중 특히 요한 복음을 중시했다.e. 그들중 성직자를 안수할 때는 요한 복음을 머리위에 올려놓고, 안수자들의 손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이런 안수를 받은 후에는 “완전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1) 안수 받은 사람은 독신으로 살았다.2) 전쟁에 참여치도 않고, 재산을 소유하지도 않았다.3) 생식 죄의 산물인 우유, 고기 계란을 먹지 않았다.f. 그들은 엄격한 삶을 살았다.g. 그들중 다수는 죽을 때까지 이러한 서원을 지키려 하지는 않았다.h. 카다리파는 사실상 이단적인 요소도 많았다. 카다리파의 반대자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카다리파를 이단시했다.1)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을 부정했다2) 성모마리아가 그리스도의 모친이라는 사실을 부정했다.3) 인간의 몸이 장차 부활할 것을 부정했다.4) 그들은 R.C.교회에 강력히 반발했다.2. 왈도파(The Waldenses)a. Peter Waldo 는 남프랑스 리용(Lions)이라는 도시의 부유한 상인이었다.b. 마19∶21절에서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 이르신 말씀을 읽게 되었다.c. 1176년에 Waldo 는 이 말씀대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신약성서를 계속 공부해서,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를 닮고자 했다.d. 곧 다른 사람들도 Waldo를 따르기 시작했고, 여러 지방에 다니며 설교하고 복음을 전파했다(Poor in Spirit라 지칭).e. 그들은 교황의 인준을 요청했으나, Waldo가 무식한 평신도라는 이유로 인준을 거절했다.f. 그럼에도 불구하고 Waldo 는 사역을 계속했고, 왈도파는 증가했다.g. Waldo 파는 설교를 강조했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려 했으며,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섭리를 의존했다.h. 곧 그들은 R.C의 여러 가지 행습을 공격했다.1) 죽은자를 위한 미사 2) 연옥 개념 3) 라틴어 예배i. 그들은 여성과 평신도들도 설교하고, 고해를 듣고, 의식을 집행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j. 무엇보다도 왈도파는 성경과 성경의 권위를 강조했고, 성경을 자국어(Vernacular)로 번역했다.3. 카다리파와 왈도파는 그들이 정착한 지역에 많은 추종자를 얻게 되었고, 많은 지역에서는 R.C.신도 수를 앞질렀다.4. R.C은 이들을 다시 교회를 끌어들이려 했으나, 대부분 실패했다.5. 그러자 R.C.은 강력한 조치를 시행했다.1179년에는 교황에 주도하는 십자군이 소위“이단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a. 교황의 사신이 1208년 살해되자 교황 Innocent 3세는 십자군을 모집해서 “이단자”들을 발본색원했다.b. 여러해동안 개인적 정치적 종교적인 이유로 피 흘리는 파괴적 전쟁이 계속되었다. 1229년에 가서는 대부분의 이단자들이 제거되었다.c. 1229년에 남프랑스의 Toulouse 에서 종교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이 회의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1)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것을 금지한다.2) 평신도가 성경 사본을 소유하는 것을 금한다.3) 이단심문소(Inquisition)제도를 인준한다.(이단심문소란 무력을 사용해서 이단자들을 찾아내고, 박멸하는 방법이다.)a) 이단으로 인정된 평신도는 모든 재산을 박탈당한다.b) 이단으로 인정된 교역자는 모든 사례비를 교회에 반납한다.c) 봉건영주 가운데 그의 영토내에서 이단자를 제거하지 않는 사람은 감독이 파문한다.1년내로 이단자를 제거치 않으면 교황에게 넘겨서, 모든 영토를 박탈하여 교회 재산으로 한다.d) 특정 지역에서 이단 제거에 공헌한 사람에게는 면죄부가 발급된다.e) 감독들은 봉건영주 및 영토들을 방문하여 이단자들의 고발 정신을 고취한다.f) 이단심문소는 중세 기독교의 중요한 기관이 된다. 이상하게도 설교와 삶의 모범을 강조하며 일어난 도미닠단이 이단 심문자로 일한다.6. 이런 과정을 통해서 카다리파는 대부분 제거되었고, 왈도파는 북이태리의 산간 지방으로 밀려났다.7. 왈도파는 계속 존재하게 되었고, 종교개혁기에는 종교개혁 교리를 받아들였다. 왈도파는 오늘날도 그 지역에 존재한다.C. 14C에 일어난 이단들1. Lollards(롤라드파)는 영국에서 일었났고, 후스파(Hussites)는 보헤미아(현 체코)에서 일어났다.2. John Wycliffe 와 롤라드 운동 (Lollard Movement)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Oxford 에서 가르치면서 인기있는 교수요 설교자가 되었다(1328-1384).b. Wycliffe 는 Augustine을 연구해서, Augustine 의 신앙을 부흥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세 가지를 강조했다. 1)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도권2) 하나님의 주권(The Sovereignty of God)3) 예정설 등c. Wycliffe는 유럽으로 왕의 심부름을 하면서 왕자와 친구 되었다. 왕자는 여러 해동안 정치적으로 Wycliffe를 보호했다.d. 마지막 10년동안에 R.C.이 보기에 급진적인 사상을 제시했다.1) 1370년대 중반에 Wycliffe는 하나님의 지배권(On Divine Lordship)과 시민 지배권(On Civil Lordship )에 대해 쓰면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강조했다.a) 하나님이 모든것의 주인이시며, 인간은 청지기라는 점을 강조했다.b) 청지기가 그 임무를 다하지 못하면, 직분을 빼앗긴다고 하였다.c) 이 원리를 교회에 적용해서, 감독이나 직분자가 청지기 직분에 충실치못하면, 시민 정부 지도자에 의해 제거될 수도 있다고 했다.d) Wycliffe 는 또한 교황도 오류가 있다고 했다. 교황의 직분은 교회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했다. 따라서 무가치한 직분이면 제거될 수도 있다고 했다.2) Wycliffe는 「교회에 대하여]」(On the Church)라는 책을 써서, 교회를 “무형의 몸으로 예정된 자의 모임”이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가시적 교회와 그 직분 자들이 진정한 교회의 회원을 결정할 수 없다고 했다.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그리스도시며 교황도 선택받은 자가 아닐 수 있다고 했다.3) 또 다른 저서인 「성경의 진리」(Truth of Scripture)에서는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고, 성경만이 신앙과 행습의 원리라고 했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강조는 성경 번역 활동, 성경 연구, 성경의 자국의 이용등을 촉지했다.e. Wycliffe 는 화체설 교리를 공격했고, 모든 신자의 제사장직분을 강조하면서 면죄부행습을 반대했다.f. Wycliffe는 1374년에Oxford에서 은퇴해서, 작은마을 Lutterworth 라는 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왕자와의 친분이 없었더라면 이단으로 몰려 처형당했었을 것이다.g. Lollard운동은 Wycliffe사후에도 계속되었고, Wycliffe 의 추종자들은 R.C.의 행습을 공격했다.1)성직자 독신제도 2)화체설3)연옥설4)성지순례, 교황의 개념, 교회의 부h. 초기에는 Lollard 운동은 대부분 학문적이거나 정치적이었으나, 후기에는 점차 대중들을 끌어들이는 대중운동이 되었다.i. 롤라드파는 심한 핍박 중에도 영국에서 계속되었고, 종교개혁까지 지속되었다.3. John Hus와 후스파운동 (The Hussite Movement)a. 보헤미아의 프라하(Prague)근처에 유사한 운동이 일어났다. 많은 보헤미아 사람들이 영국에서 공부하고, Wycliffe의 가르침을 가지고 왔다.b. John Hus는Wycliffe 의 사상을 받아들여 Prague근처에서 전파했다.1) 후스는 프라하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에서 가르쳤다.2) 프라하의 Bethlehem Chapel 에서 설교도 했다. 후스는 라틴어 뿐아니라 모국어로도 설교도 했고, 교회의 악을 비난하며 개혁을 요구했다.3) 대부분 위클리프의 교회관을 받아들였고, 그 사상을 근거로 해서 개혁을 시도했다.4) Hus는 또한 애국자로서 외국 세력의 침입을 거부했다.c. 이 당시는 세명 내지 네명이 서로 교황이라고 주장하던 때였고, 유럽은 이문제로 분열상을 보였다.d. 1415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Sigismund)는 교황 분열 문제를 해결키위해 Constance(독일의 도시)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했다(Martin Ⅴ세가 교황이 됨).1) Hus는 이 회의에 참석하여 견해를 제시하라는 요구를 받음 안전보장을 해주겠다는 약속도 함께 받았다.2)그러나 Hus가 Constance에 나타나자 마자는 투옥되고 즉시 화형 당했다(변명은 이단자에게는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 Wycliffe의 뼈도 파내라 명령했고, Wycliffe는 1428년에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이 화형 당함e. 후스의 죽음은 보헤미아에 폭동을 일으켰고, 후스파는 급격히 증가되었으며, 모든 외세는 배척되었다.f. 후스파는 모든 외세를 대항하여 뭉쳤으나,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남1) The Utraquists (이종 배찬파)a) 성만찬에 포도주와 떡을 다 받는 사람들로서, 프라하를 중심으로 한 귀족들로 구성된 온건한 집단b) 자유로운 설교와 복음 전도, 사도적 청빈, 엄격한 성직생활, 평신도에 성만찬 시 잔을 주는 행습 등을 요구했다.c) 성서가 금지하는 의식만을 금지한다는 기본자세 유지.2) The Taborites(다볼파)a) 그들이 세력이 강했던 마을(Tabor)이름에서 유래b) 성경에 명시되지 않은 교리나 행습은 모두 거부하는 기본자세 유지.(과격한 민주주의파)c) 성경에서 가르치는 내용만을 받아들였다.g. 이들 집단간에 알력이 있었는데, R.C.은 양보를 해서 The Utraquists를 다시 교회로 끌어들였다.h.그러나 작은 집단은 교회밖에 계속 존재하면서, United Brethren이라는 평화적 집단을 형성했다. 이들중 일부가 독일로 이주해서 Moravian교도가 되었다.Ⅴ. 캐도릭의 스콜라주의(Catholic Scholasticism)A. Charlernagne(찰스대제)는 800년경에 학문과 교육을 장려. 모든 사원과 수도원에 학교를 세우도록 명령.1. 학문과 교육은 계속 발전했고, 계속 영향력을 미쳤다.2. 사원과 수도원의 학교들은 숫자와 영향력이 증대되었다.3. 학문은 특히 12c-13c 대학의 설립과 더불어 더욱 발전했다.B. 학자들은 이성과 논리를 이용하여 기독교 진리를 주의 깊게 체계화하기 시작했다 (학교와 대학을 중심으로 해서)1. 이와 같은 노력을 스콜라주의(Scholasticism)이라 한다.2. 스콜라주의는 이성, 논리, 철학 등을 이용하여 기독교 진리를 정확하게 정의해 보려는 R.C.내의 강한 세력이 되었다.C. 스콜라주의자들이 밝히고자 시도한 주제중 하나는 믿음과 이성의 관계이다.1. 이 관계에 대해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서로 모순되는 것이냐? 그렇다면 어느 것이 우선이냐? 이성으로 믿음의 내용을 결정할 수 있느냐? 믿음이 이성을 보조하느냐?2. 스콜라주의자들은 주로 희랍철학을 이용하여 믿음과 이성의 관계를 설명하여 했다.a. 스콜라주의자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철학은 Aristotle의 철학이다.1) 3-4c에는 Plato가 위대한 기독교 철학가로 추앙되었으나,13-14c에는 Aristotle이 추앙되었다.2) 스콜라주의자들은 이 연구를 위한 기초로서 Aristotle와 그의 작품들을 보기 시작했다. b. 초기에는 희랍어를 이해하는 학자들이 드물었다. 그들은 주로 라틴어를 쓰는 서방 학자들이었다. Aristotle는 번역 작품에 의존해서 이해했다.c. 번역된 Aristotle의 작품들은 주로 논리학에 관한 서적들이었다.1) Aristotle은 주로 논리학자였고, 스콜라주의자들의 그의 3단논법을 빌려서 이용했다.(1) 대전제(2) 소전제(3) 결론2) 후에 스콜라주의자들은 더 많은 Aristotle의 번역 작품을 접하게 되었고, 희랍어에 대한 지식을 늘려 갔다. 스콜라주의자들은 또한 유대교와 회교도들의 Aristotle에 대한 주석을 획득함으로 연구 범위와 연구 수단이 넓어졌다.d. Aristotle은 이렇게 해서 갑자기 기독교인, 유대인, 회교도들의 위대한 철학자가 되었다.3. 이 모든 논쟁의 배후에는, “보편”(universal)의 존재에 대한 신학적, 철학적 전제에 대한 논쟁이 깔려있었다.a. Plato는 물질계와 영계를 나누는 2원론자로서, 영계가 ‘실재’(real)의 세계라 했다.b. Aristotle은 Plato처럼 영계와 물질계를 강하게 구분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실체의 “실재"(real)를 주장했다.c.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universal)의 문제는 거듭 거듭 논의되었고, 교회 내에 분열을 조장하기에 이르렀다.d. 기본적으로, “보편‘에 관한 견해는 두 집단으로 나뉜다.1) 실재론자(Realists)∶Plato의 사상과 연관된 집단a) “보편”이 실제로 “실재”한다고 주장했다.b) 따라서 이 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에게는 실재하는 “보편”의 존재가 중요했다.2) 명목론자(Nominalists)∶“보편”이란 이름뿐이지 사실상“실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 집단D. 스콜라주의자들은 Aristotle의 철학을 이용해서 “실체”(Substance) 와 우연성 (Accident∶감각적 특성)을 구별했다. 이런 철학과 관련해서 첫 번째 논의된 문제가 “주의 만찬”에 대한 논쟁이었다.1. 실재론적 신학자들의 “주의 만찬” 개념∶“실체”와 “우연성”을 구별하여 주의 만찬시에 우연성은 불변하나 실체는 변한다고 주장.a. 따라서 만찬 참여자는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 맛, 색깔, 모양 등은 변함없는 떡과 포도주이지만, 떡의 실체와 포도주의 실체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이론이다.b. 따라서 이 이론이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의 근거이다. 사제가 봉헌 기도하며 “이것이 내몸이고, 이것이 내 피다”라고 선언할 때 실제론 이런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c. 1215년 4차 라테란 회의(The Fourth Lateran Council)에서 화체설은 R.C.의 공식 교리로 채택되었다.2. 이런 논쟁은 “주의 만찬”을 정확하게 정의해 보려는 시도에서 발생한 것이다.E. 첫 스콜라신학자는 Anselrn이었다.1. 1033년 북이태리 탄생. 1109년까지 살았다.2. 그는 종종 “스콜라신학의 교조”(The Father of Scholasticism)이라고 불리운다.3. Anselm은 신앙과 이성이 모순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모두 이성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했다.a. 그의 표어는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는 것이다.b. 그는 그리스도인은 이미 계시를 통해 알거나, 믿게 된 것을 이성을 이용하여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4. Anselm은 그의 신학에서 강력한 “실재론자”였고, “보편‘(universal)은 사실상 존재한다고 하였다.5. Anselm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Roscelin(로셀린)이라는 사람은 명목론을 신봉했고, 명목론적 철학을 3위1체 교리에 적용했다. 로셀린은 “유명론의 교조”라 불리운다.a. 여러 세기 동안 3위1체론은 실체의 일치 (unity of substance),다시 말해서 성부, 성자, 성령의 배후에는 실체의 일치가 존재한다는 사실로서 주장되어 왔다.b.로셀린(Roscelin)은 그러나 “구체적, 개별적 존재”(Pasticulas/Individual)만이 실재하는 것이지,“실체의 일치”와 같은 것은 존재치 않는다고 했다. 따라서 로셀린은 주장하기를 성부, 성자, 성령은 세 가지 인격일 뿐이지. “실체의 일치”가 없다고 했다.c. Anselm은 Roscelin의 이런 견해를 3신론이라고 공격했다. 1092년 Soissons(소이송)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했다.1) Anselm은 모든 명목론자를 이단이라고 선언했다.2) 이런 Anselm의 견해는 그후 2세기에 걸쳐서 지배적의견이 되었다.6. 생애의 후반기에 Anselm은 영국 Canterbury의 대주교로 봉사했다. 종종 논쟁에 휘말리기는 했으나, 죽을 때까지 그 직위를 지켰다.(1093-1109AD)7. 기독교 역사에 대한 Anslm의 공헌a. 명목론을 정죄하고, 실재론을 옹호함으로써, 여러 세기동안 R.C.의 신학적 골격을 형성했다.b.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존재론적 증명‘(Ontological proof)을 시도했다.1) 이성과 논리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이다.2) 3단 논법으로 다음과 같이 증명된다.a) 대전제∶이성은 아무것도 부족이 없는 완전한 존재가 있을 것을 요구한다.b) 소전제∶그런 완전한 존재는 사상 속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해야 한다.c) 결론∶따라서 완전한 존재이신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하신다.3) Anselm은 하나님이 존재치 않는다는 (nonexistence of God)생각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했다(inconceivable).4)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될 수 있다면, 그것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존재]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용어상 모순이 된다. 그러므로 분명히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한 존재]가 존재한다. 오! 우리 주 하나님이여, 당신이 바로 이 존재이십니다.” ( Proslogian 3장)5)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은 Anselm이 제시한 것으로 그 이후 신학자, 철학자, 및 논리학자들에 의해서 그 이후로 하나님 존재에 대한 고전적인 논증 방법이 되었다.c. Anselm은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해서 “만족설”(Satisfaction view)을 주장했다.1)그의 중요 작품은 1090년경에 쓰여진 Cur Deus Homo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는가?)하는 책인데, 속죄에 대한 최초의 전반적인 연구서 이다.2) Anselm은 주장하기를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욕을 끼쳤다. 하나님은 창조의 정점인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성은 인간이 그의 연약함과 죄성으로 갚을 능력이 없는, 죄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신다. 이 배상을 이행할 능력이 있으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었다.3)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죄에 대한 배상이 다 이루어지고, 죄에 대한 배상 요구가 만족되었다.F. 스콜라신학을 약간 수정한 학자로서 Peter Abelard를 들 수 있다 (1079-1142)1. 그의 표어는 “나는 믿기 위해서 이해한다”는 것이다.2. Abelard는 파리의 유명한 교사였는데, 끊임없는 개인적 고통과 적대감을 겪었다.3. 파리의 가장 전망 있는 지적 지도자로서 유명해 졌는데, 아름답고 재능 있는 Heloise와의 연애 사건이 그의 학문적 전망과 지적인 영향력을 철저히 깨뜨려 버렸다.a. 1115년 36세의 나이로 Abelard는 프랑스 파리에 있는 Notre Dame(노틀담)사원의 참사의원(canon)이었던 Fulbert(훌베르)의 십대 조카의 가정교사가 되었다.b. 스승-제자간의 관계가 너무 가까워짐으로 Astrolabe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게 되었다.1) 후에, 화난 삼촌의 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Abelard는 Heloise와 비밀리 결혼하기로 결정했다.2) Abelard는 군소 수도원 소속이었으므로 결혼의 가능성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Abelard의 위치에서는 사람들의 환영을 받기 어려웠다.c. 모든 경고에도 불구하고 좋지 못한 소문이 돌았다. Heloise는 자기 연인의 학문적 명성에 더 이상 치명타를 주지 않기 위해서 지방 수도원에 들어갔다.1) Fulbert는 이 사건을 Abelard가 책임을 면하기 위한 회피라고 생각하고, 악당들을 고용하여 어느 날 밤 Abelard의 방에 침입하게 하여 Abelard를 거세해 버렸다.2) 이런 모욕을 당한 후에 Abelard는 베네딕트 수도승이 되었다.4. Abelard는 문제 제기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Sic et Non (Yes and No)라는 대단히 중요한 작품을 썼다.a. 이 작품에서, 그는 교부들의 신앙을 검토하고 여러 가지 질문을 제기했다. 이 질문들에 대한 구들이 대답을 Yes 와 No로 표시했다.b. 그러나 그는 교부들간의 차이를 조화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각 교부들의 대답에 다양성이 있음을 보여 주려 했다.5. 이렇게 함으로써, Abelard는 종종 교회의 기독교 전통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모순들을 조화시키려는 노력 없이 다양한 차이들을 제시했다.6. 속죄의 문제에 대해서, Abelard는 만족설보다는 모범설에 기울었다.a. 그는 그리스도는 우리 죄의 만족을 위한 분이라기 보다는, 모범이 되시는 분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죄에 대해서도 다른 견해를 취했다.Augustine이 주장했던 원죄의 개념을 약화시켰다. 사람이 아담의 죄로 인해 죄인되고, 아담의 죄로 인해 죄책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b.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범이 되시므로, 사람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를 능력이 있다고 했다. 왜냐하면 사람이 아담의 죄로 인해 죄성과 죄책을 이어받지 않았기 때문이라 했다.c. Abelard는 죄를 “행위”라기 보다는 “의도‘라고 정의했다.7. Abelard를 기독교신앙의 큰 이단자로 보고 정죄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은 Bernard of Clairvaux였다.G. Peter Lombard (1100-1160 AD) 피터 롬바르드1. 피터 롬바르드는 북이태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공부하고, 파리의 Nothe Dame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후에는 파리의 감독이 되셨다.2. 롬바르드는 「네권의 命題集」(Four Books of Sentences)이라는 조직신학 책을 저술했다.a. 이책은 창조적인 서적은 아니지만, 교부들의 의견을 모아 조직적으로 제시한 책이다. Lombard은 이성과 논리를 이용하여 다양한 전통들을 조화시키고자 했다.b. 이 책에서 “성례전”이라는 부분에서 현재 R.C.의 성례전 체계와 똑같은 일곱 가지 성례전을 제시하고 있다.c. 이 작품은 근대부터 (1150) 종교개혁까지 중요한 조직신학 교재가 되었다.3. 이렇게 해서 새사람의 스콜라신학자 Anselm, Abelard,와 Lombard에 대한 개관을 하였다.H. 13C에 들어오면서, 스콜라신학은 다양하게 발전했다.1. Aristotle의 작품이 더 많이 번역되었다.2. 대학들이 설립되었다.a. 1200년경부터 학생들이 모여 학문적 협회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학생들과 선생들이 함께 모이면서, 학습 과정이 발달했다.b. 첫 번째 발전한 대학이 파리 대학이었다.c. 파리 대학을 model로해서 다른 대학들이 곧 설립 되었다.(영국Oxford대학, Cambridge대학 등) 3. 탁발 수도원 종단과 스콜라신학의 관계a.대부분의 후기 스콜라신학은 수도원 종단과 연관되어 있다.b.학자들간의 논쟁은 종종 수도원 종단간의 논쟁으로 발전했다.I. 스콜라신학 운동은 Thomas Aquinas (1225-1274)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게 된다.1. Aquinas는 이태리의 작은 마을 Aquino에서 탄생했다. Aquino는 로마와 나폴리(Naples)사이에 있었다2. 그의 부모는 꽤 부유한 귀족들로서, Thomas Aquinas가 수도승으로 도미닠단에 가담했을 때 기뻐하지 않았다.3. 이태리, 프랑스, 독일 등 여러 도시에서 공부했고, 또한 여러 도시에서 가르쳤다.4. Aquinas는 약 60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그중 두 작품을 대전 (Summa)이라고 한다.a. 대전의 제1권은 진정한 카도릭신앙의 요약 (The Summasy of the True Catholic Faith)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1권. Summa againt Gentiles. 1259-64)b. 그후에 나온 작품이 신학대전 (2권. Summa Theologica. 1265-73)라는 제목이 붙었는데 여러권으로 구성된 대규모 組織神學書이다.1) 이 작품은 그가 죽을 때까지도 완성되지 않았다.2) 근본 구조상 세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님, 인간, 그리스도)3) 1879년에 교황 Leo13세는 대전을 R.C.의 모든 신학 교육의 지침서로 선언했다. 4) Aquinas는 이 작품에서 이성과 계시 두 가지를 근거로한 2층 신학을 제시했다.a) 이성과 신학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포괄되는 하나의 진리가 있다.①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은 이성에 근거한다.② 계시신학(Revealed Theology)은 계시에 근거한다.b) 계시 신학은 자연신학을 보충해 주며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다른말로 하면, 이성으로도 신학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으나, 계시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5) Aquinas는 교부들의 작품과 매우 친숙했고, 여러 면에서 Auqustine을 의존했다.6) 그는 거의 모든 신학적 문제를 Aristotle의 철학 작품을 이용해서 설명했다.5. 교리에 대한 Aquinas의 견해a. Auqustine을 근거로 해서 인간론에 있어서 원죄의 사실을 강조했다.b. 속죄론에 있어서는 Anselm과 Abelard의 견해를 혼합했다.1) 그리스도는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우리를 위해 해주셨다.2) Aquinas는 주장하기를, 구속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이상의 선행을 행할 수 있고, 이러한 선행이 “업적의 보고”(Treasusy of Merit)에 쌓인다고 했다.속죄설1. The Socinian Theory∶The Atonement as Example(모범설)2. The Moral Influence Theory∶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예시 (도덕감화설)3. The Governmental Theory∶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통치설) 처벌로 retribution(보복)아니라 deterrence of further commission of  sins (Hugo Grotiuo) 하나님은 통치자로서 죄징계의 모범, 도덕 정부 수립.4.The Ransom Theory∶죄와 악에 대한 승리 (대속설)Origen/ Gregory of Nyssa 사탄에게 인간의 죄값을 치루셨다.비판. 그리스도의 줌이 하나님을 합한 것이 아니라 사탄 합한 것5. The Satisfaction Theory∶아버지에 대한 보상(만족설)Anselm속죄와 하나님을 향한(중세)상황 -- 죄-봉건영주에 대한 약속 파기.R.C.-Penitential system 발전 (보상제)죄∶하나님께 몫을 드리지 않고 honor돌리지 않은 것.처벌받거나/ 다른 배상 받아들이거나6. Penal-SubstitutionJ. 스콜라신학자들에 의해 제시된 7가지 성례전 체계1. 서론a. 스콜라신학자들은 7가지 성례전을 인정하고 다소 정확하게 정의했다.b.성례전은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라고 했다. 각 성례전은 모두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한다.(1) 물질적인 것 (2) 특정한 양식(언어형식) (3) 집행자c. 집행자가 교회의 가르침대로 성례전을 실시하고, 참여자가 자발적으로 참여코자 하면, 자동적으로 은혜의 효과가 나타난다(이 원리를 사효성 ex opere operato이라고 한다).d. 성례전(sacrament)이란? “성례전이란 거룩한 것의 상징(sign)이다. 그러나 성례전은 또한 ‘신성의 신비(sacrament of Deity)’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거룩한 신비(mystery)를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성례전은 거룩한 것에 대한 상징일 뿐아니라, 상징으로 표현되는 거룩한 것 자체이기도 하다”2. 일곱 가지 성례전 개관a. R.C은 일곱 성례전을 집행한다∶영세(Baptism), 견진(Confiomation), 성체미사(Mass or Eucharist), 고해(Penance), 종부성사(Extreme Unction), 신품(Ordination), 및 결혼(Matrimony).b. 이 일곱 가지는 “신법”이라고 하는데, “구법”과는 차이가 있다. 구법에서는 성례전 자체가 은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서 온다고 했다.c. “신법”에 따르면 일곱 성례전은 은혜를 내포하고 있으며, 성례전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수여한다.d. 앞의 5가지 성례는 신자 개개인의 영적인 완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고, 뒤의 2가지는 교회의 치리와 교인의 증가를 위한 것이다.1) 영세를 받으면 성령으로 거듭난다(죄사함).2) 견진을 받으면 은혜에서 자라가고 신앙이 강화된다(성령 받음).3) 영세로 거듭나고 견진으로 신앙이 강화된 후 미사의 영적 음식(신령체)을 먹음으로 양육된다.4) 그러나 죄로 인해 영혼에 병이 들면 고해성사로 치유된다.5) 종부성사를 통해 영혼과 육신이 치유되고, 영혼으로 하여금 사망을 준비하게 한다(죽기 바로 직전).6) 신품을 통해서 교회는 수적으로 증가된다.(안수)7) 결혼을 통해서 교회는 수적으로 증가된다.e. 성례전을 유효하게 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⑴ 재료 ⑵ 언어형식 ⑶ 집행자-이 세 가지 중에 어느 하나라도 결여되면 성례전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f. 세 가지 성례전 - 영세, 견진 및 신품 -은 다른 성례와는 달리 받는 영혼 속에 지울 수 없는 영적 징표를 남기므로 같은 사람이 두번 받을 수 없다.g. 나머지 네 가지 성례는 반복될 수 있다.3. 영세a. 영세는 모든 성례전 중의 으뜸이니 영적 생활의 관문이다. 영세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다.b. 영세의 재료는 진짜 천연수(Water)이다.c. 영세의 형식은“ 내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그대에게 영세를 베푸노라,” 3위 1체 형식이라고 알려져있다.d. 집행자는 원칙적으로 “사제”(Priest)이나 예외적으로 부제(Diacon),평신도, 여자 및 심지어는 이단자들도 교회의 가르침과 교회의 형식에 따르기만 하면 유표한 영세를 집행할 수 있다.e. 영세는 자범죄, 원죄를 포함한 모든 죄와 죄에 따른 죄책을 용서하는 은혜를 준다. 따라서 영세 받기 전의 조에 대해서는 보속(Satisfaction)을 요구치 않는다. 영세는 영세받기 까지의 죄만 사한다.f. 유아 영세는 R.C.이 일반적으로 실시하는 관행이기는 하지만, 초기부터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다.1) 초기에 많은 사람들이 유아 영세를 미룬 이유는, 영세 이후 지은 죄에 대해 사함 받는 제도적 장치가 없었기 때문이다.g. 영세의 형식1) 서방에서는 중세기에 이르러 세례식이나 관수례가 많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아직도 지역적으로는 침수례를 사용하기도 했다.2) 개혁기에 이르러서는 침수례가 거의 사라졌다.3) 동방교회에서는 전적으로 침수례를 사용한다4 견진.a. 견진의 재료는 양심의 순결을 상징하는 기름으로 만든 성유(기름+향유+연고)이다.b. 서방에서는 “감독만”이 집행할 수 있으나, 동방에서는 “교구사제”도 집행할 수 있다.c. 양식은 다음과 같다.“나는 십자가 성상으로 그대를 표시하며,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구원의 성유로 그대를 견진 하노라.d. 오순절날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담대히 예수의 이름을 증거한 것처럼, 견진으로 성령이 임하여 신앙이 강화된다.e. 원래 영세와 견진은 함께 시행되었으나, 여러 세기가 흐르면서 두 가지 성례로 구별되었다.f. 견진은 영세의 효력을 확인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을 강화하는 능력을 준다.5. 성체미사(Holy Eucharist=“Thanksgiving”=주의 만찬)a. 재료는 밀빵과 물 섞인 포도주이다.1) 교부들은 이 재료가 그리스도의 최후 만찬시 재료라고 생각했다.2) 주님의 수난을 생각나게 한다.b. 미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상징한다.c. 형식은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언어 그대로 이다. “이 것은 내몸이니”)d.집행자는 “사제”이다.e.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을 신봉한다.- 은혜증가, 경죄사함f. 미사는 희생제사 (Sacrifice)와 교제(Communion)의 두 가지 측면이 있다.1) 사제가 축성을 할 때 그리스도 자신이 새로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피없는 희생이 일어난다고 한다.2) 미사에 참여자는 그리스도와 교제속에 들어간다고 한다.g. 중세 말기에 이르러 평신도는 빵만 받았고, 사제는 포도주를 마셨다.1) 이런 형식은 평신도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빵은 별로 두려움 없이 대했으나, 포도주는 흘릴까 두려워했다.2) 따라서 이런 조절책이 일반적 관습이 되었다.h.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포함한다는 것이 신학적인 설명이다.6. 고해성사(Penance=Confession)a. 영세 이후의 죄를 사해 주는 성례이다.b. 영세의 재료는 세부분으로 나뉘는 고해 행위이다.1) 마음의 통회 (Contrition)∶지은 죄를 슬퍼하며, 더 이상 죄를 짓지 안으려는 결단이다.2) 고백(Confession)∶마음속에 생각하는 죄를 사제에게 모두 입술로 고해야 한다.3) 사면(Absolution)a) 사제가 고백자에게 “내가 그대를 사면하노라”고 선언할 때 발생한다.b) 그때 범한 죄의 사함을 받지만, 그래도 죄의 흔적(Stain of sin)이 지게 될 필요성은 남게 된다.① 이 흔적으로 인해 지옥 가지는 않는다.② 그러나 이 흔적을 처리하지 않으면 영속에서 일정 시간을 보내야 한다.c) 흔적을 제거하기 위해서 보속(Satisfaction)의 필요가 생겼다.① 죄의 경중에 따라서 따른 보속 행위가 할당된다.② 죄는 두 종류로 크게 나누인다.ⓐ 사망에 이르는 죄(Mortal sins)는 고해 하지 않으면 영원한 형벌을 받고 지옥간다.ⓑ 사소한 죄 (Venial sins)는 일시적 형벌을 초래하고, 이생에서 완전히 보속하지 않으면 연옥 간다③ 죄의 보속은 둘중 한가지 방법을 취할 수 있다.ⓐ 고해 행위를 수행함으로써ⓑ 면죄부 (indulgences)를 받음으로 면죄부라 일시적인 죄의 형벌을 다루는 비 성례전적 방법이다. 면죄부의 사용은 이 시기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여러 가지 보속 행위를 함으로써,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다. 면죄부 개념의 배후에는 그리스도 의의 및 성도들의의가 축적된“업적의 보고”라는 사상이 있다. 면죄부는 업적의 보고로 부터 공덕을 끌어내는 것이다.7. 종부성사a. 사망 바로 직전에 영혼이 사망을 준비하도록 실시하는 성례이다.b. 재료는 감독의 축복을 받은 올리브유이다.c. 원래는 사망을 두려워하는 병자들에게 시행되었다.d. 병자들은 눈, 코, 입, 및 신체의 모든 출구에 도유되었다.e. 종부성사의 양식은 다음과 같다.“이 거룩한 기름과 온유하신 긍휼에 의하여 주께서는 그대가 범한 무슨 죄든지 용서하시노라”f. 마음의 치료와 아울러 때로는 육신의 치료 효과도 있다.g.최근에는 종부성사에 변화가 일어났다. 더 이상 종부성사 (extreme unction)이라고 불리우지 않고, “병자성사”라고 불리운다(The anointing of the sick).1) 병자의 건강 회복을 위한 성례가 되었다.2) 도유도 모든 출구에 바르는 것이 아니라 손과 이마에 바른다.3) 이 변화는 교황 Paul VI가 실시했다.4) 시신의 도유는 거의 시행치 않는다. 참여자가 성례전의 은혜에 대한 적극적인 믿음을 가져야 함을 강조하기 때문이다.5) 올리브유가 아닌 다를 식물성 기름도 사용될 수 있다.8. 신품(혹은 안수)a. 직급제 마다 신품이 있다(부제, 사제, 감독).b. 사제부터 사도계승권을 가지므로 성례전을 집행할 권세를 갖는다.9. 거룩한 결혼(Holy Matrimony)a. 교회의 양적 성장의 효력이 있다.b. 이 성례로 인해 개인은 결혼의 기능들을 수행할 권리를 갖는다.c. “현장에서 구두로 표현된 상호간의 동의가 결혼의 효과를 준다.d. 결혼에는 다음 같은 특권이 수여된다.1) 자녀 출산과 주를 경외하는 가운데 양육함2) 남편과 아내가 상회 정절을 지킴3) 결혼의 해체 불가성∶왜냐하면 교회와 그리스도의 해체 할 수 없는 결합을 상징하므로4) 간음으로 인해 이혼이 허락되기는 하지만, 다른 사유로는 불가하다.Ⅵ. 교황권의 타락A. Innocent Ⅲ는 1198-1216년까지 교황으로, 중세기의 가장 강력한 교황이었다.1. Innocent Ⅲ는 로마 귀족 출신으로, 30세전에 추기경이 되었고,40세전에 교황이 되었다.2. 두 가지 열렬한 소원을 가졌는데, 교회를 개혁하는 것이고, 성지를 회복하는 것이었다.3. 4차 십자군을 일으킨 사람이 Innocent Ⅲ였다. 4차십자군은 일시 성공적이었으나 결국 실패했다.4. 정치에도 활발하게 간여했고, 교황 선출에도 영향력을 미쳤다.5. Innocent Ⅲ는 프랑스와 영국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6. 프란시스칸 종단과 도미니칸 종단을 인준해서, 교황의 자문기관과 지지자 역할을 하도록 했다.7. 1215년에 4차 라테란회의를 소집해서, 화체설을 공식 교리로 채택8. Innocent Ⅲ는 「달과 해」(The Moon and the Sun)라는 작품에서 교황권을 강조했다.a. 우주의 창조자는 창공에 두 광명을 두었다∶큰광명은 낮을 주관햐고, 작은 광명은 밤을 주관한다.b. 따라서 우주적교회 즉 천국(heaven)이라고 표현된 궁창에도 두 공명을 제정하셨는데, 큰 공명은 영혼을 다스리고, 작은 신체를 다스린다.c. 이 두 광명이란 교황권과 왕권을 가리킨다. 따라서 교황은 태양이요, 로마 황제들은 달이라 했다.d. 달이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들이고, 태양보다는 크기나 질이나 위지나 효과면에서 열등하다.e. 마찬가지로 왕권은 교황권으로부터 권위를 부여받는다. 교회는 지상에서 최상의 권세이며 왕들은 교황으로부터 권세를 받는다는 명백한 선언이다.9. 그러나 Innocent Ⅲ 사후부터 교황권은 기울기 시작했다.a. 민족국가들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b. 상업과 무역에 종사하는 강력한 중간 계층이 출현했다.c. 도시들의 성장은 교황권의 약화를 초래했다.d. 교황의 세속적인 목표가 교회의 관심과 일치되지 않는 일반적인 느낌이 있었다.10. 제국은 점차 약화되고, 프랑스는 점차 강화되었다.B. Bonifance Ⅷ는 1294-1303 까지 교황이었다.1. Boniface는 Innocent Ⅲ와 똑같은 주장을 했다.a.세속권은 영적권세에 복종해야 한다. 영적권세의 심판자는 교황이고, 교황은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는다.b.누구든지 구원받기 위해서는 로마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2. 곧 그는 영국왕 및 프랑스왕과 문제에 부딪쳤다.3. 결국 프랑스왕은 (Philip Ⅳ) 이태리를 침공하고, Boniface를 투옥시켰다. Boniface는 곧 사망했다.4. Martin Luther는 Boniface에 대해서 “그는 여우처럼와서, 사자처럼 통치하다가, 개처럼 죽었다”라고 말했다.C. 점차 교회는 프랑스의 지배아래 들어가게 되었다.1. 1305년에 Clement V (프랑스인)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a. 프랑스 리용(Lyons)에서 선출되고 서품 되었다.b. 그의 첫 행동은 12명의 프랑스인 추기경들을 임명한 것이었다.2. 프랑스왕이 프랑스로부터 이태리로 자금 유입을 불허하므로, Clement V는 1309년에 교황 본부를 로마로 부터 프랑스 아비뇽(Avignon)으로 옮겼다.a. 교황본부는 1309-1377까지 Avignon에 있게 되었다.b. Martin Luther와 다른 작가들은 이 시기를 “교회의 바벨론 유수기”(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라고 불렀다.3. 이 시기에 선출된 모든 교황은 프랑스인 이었다. 프랑스 Avignon에는 정교한 궁전이 건축되었다.4. 종교개혁의 원인이 된 대부분의 교화행정 비리는 이 시기에 발생되었다.a. 모금을 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예∶면죄부를 파는 일 등)b. 이 돈의 대부분은 이태리에서 교황 영지를 보호하고, 영지를 확대하려는 사소한 전쟁을 위해 쓰여졌다.5. 이 시기에는 교회에 대해서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Dante는 「신곡」(Divine Comedy)에서 교황 중 몇 명은 연옥에 있고, 최소 한 명은 지옥에 있다고 했다.6. 로마의 감독이 로마에 있지 않고 아비뇽에 있으며, 영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재정적 문제에만 관심을 보였다.7. 결국 로마로 돌아오라는 압력으로 인해 GregoryXI세는 로마로 돌아왔다.a. 1377년에 교황 본부를 로마로 옮김으로, 소위 “교회의 바벨론 유수지”는 끝이 나게 되었다.b. Gregory 11세는 1378년 사망c. 추기경들이 새 교황을 뽑고자 로마로 왔다.1) 이태리인을 선출하라는 압력에 의해,2) 결국 이태리인 Urban VI을 새 교황으로 선출했다.8. Urban 6세는 교회에 대한 프랑스 지배를 종식시키고, 온갖 수단을 다 썼는데,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분개했다. a. 추기경들은 로마를 처나 다른 모임을 갖고, Urban 6세를 폐위하고, Clement VII세를 교황으로 선출했다.b. 이 사건으로 대분열기(Great Schism)로 들어가는데, 1377부터 1415까지 지속되었다.c. 항상 가짜 교황은 있어 왔지만, 이제는 똑같은 추기경들이 선출한 두 진짜 교황이 하나는 로마에 하나는 아비뇽에 있게 되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D. 대분열기(The Great Schism)1377-14151. Urban 6세를 폐위하고, Clement 7세를 교황으로 선출한 추기경들의 행동 결과 사람들도 2분되었다. 일부는 로마를 진짜 교황이라 하고, 일부는 아비뇽 측을 진짜 교황이라 했다.2. 각 측은 서로 추기경단을 선출했고, 교황 사후에 각각 후임자를 선출했다.3. 분열을 치유하려는 노력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1409년에는 북이태리 Pisa에 모인 사람들은 양측 교황을 모두 폐위시키고, 또 새로운 교황을 선출했다.4. 결국 로마제국 황제 Sigismund는 주도권을 잡고 이 사건을 해결코자 1414년부터 시작된 독일 Constance종교회의를 소집했다.a. 이 회의는 Martin V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고, 난립된 세교황들을 모두 폐위시켰다.b. 나머지 세교황들은 모두 강제로 폐위되었다.5. 따라서 대분열은 Martin V의 선출로 끝을 맺었고, 이제 교회는 하나의 우두머리를 갖게 되었다.Ⅶ. 종교개혁 운동의 배경이 된 새로운 사상들A. 서론1. 이제 종교개혁의 배경으로, 종교개혁의 문을 열어 놓은 새로운 지적 사상들에 관심을 돌리고자 한다.2. 교황권의 행정 비리와 사분 오열은 교황의 영향력을 감퇴시켰다.3. 아울러 종교개혁으로 이끄는 새로운 지적 사상들이 출현했는데, 신비주의 (Mysticism), 명목주의(Nominalism)와 인문주의 (Humanism)이다.B. 어떤 의미에서 모든 종교인들은 신비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1. 신비주의는 긴 역사를 통해 그 체계를 발전시켰다.2. 교회의 주장(R.C.)은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의 성례전을 통해서 온다는 것이었다.a. 신비주의자들이 이런 교회의 가르침에 크게 도전한 것은 아니었다.b. 그러나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강조하면 할수록, 교회의 권위와 성례전의 필요성을 낮추는 경향이 있었다.3. 이전에는 개별적으로 신비주의자들이 존재했으나, 이제는 여러 신비주의적 집단이 강력한 대변인들을 두고 자기들의 견해를 제시했다.a. 이들 지도자들과 집단들은 평신도 뿐아니라 성직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b. 설교와 교육 뿐아니라 별개의 신비적 체험도 강조했다.c. 이들 중 많은 집단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삶을 그리스도인 삶의 모범으로 삼았다.4. 14C 초에 많은 영향을 끼친 신비가는 Meister Eckhart(1260-1327)이었다.a. Eckhart는 독일에서 태어나 도미니칸 수도원에 들어갔다.b. Paris에서 광범위하게 연구했고, 결국 독일로 돌아가 처음에는 Strassburg, 후에는 Cologne(콜로냐)에 정착했다.c. Eckhart는 대단히 인기 있는 설교자요 논쟁을 많이 일으켰다.d. 자기 견해를 피력하는 작품을 여러권 저술했다.1) Cologne의 대주교는 28개조항으로 Eckhart를 이단시했다.2) 아비뇽의 교황은 Eckhart를 정죄하고 대주교를 옹호했다.3) 그러나 이 정죄가 Eckhart의 인기를 감소시키지 못했다.e. Eckhart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도미니칸 종단과 스콜라신학의 영향을 받음과 아울러, 자신의 독특한 견해를 제시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f. 그의 저작을 보면 왜 Eckhart가 교회와 불화 했는지 알 수 있다.1) 교회의 역할을 절하시켰다.2) 그의 저작 중에는 “범신론”적인 귀절들이 있었다(예∶나에게는 모든 사물이 다름 아닌 하나님이다...).3) Eckhart는 종교의 외부적인 면보다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내적인 관계를 맺을 것을 강조했다.5. 이 시기의 다른 신비주의 지도자는 John Tauler(1300-1361)이다.a. Tauler는 도미니칸으로 Strassburg에서 봉사하던 중 Eckhart와 만나게 되었다.b. 매우 인기있는 설교자로서 Strassburg에 있는 수도원을 지도했다.c. 1348년경 도시에 페스트가 유행할 때, Tauler는 도시에 남아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d. Tauler는 신앙의 내적인 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 겸손, 하나님의 뜻에 복종함 등을 강조했다.e. Tauler는 일반 대중들의 영적인 건강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일반 대중의 언어로 가르쳤다.f. 그의 설교는 Martin Luther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1) 그의 설교중 하나는 막7∶32을 본문으로 하는 “영적인 귀먹음”이었다.2) 그 설교는 영혼 깊은 곳에 하나님을 바라는 “내면성”을 강조했다.6. 신비주의 집단으로 유명했던 두집단 중 먼저 생긴 집단이 “하나님의 친구들”(The Friends of God)이었다.a. 이 신비 집단은 독일에서 발생해서, 성서 연구와 아울러 하나님과 개인적 교제를 강조했다.b. 「독일 신학」(German Theology)이라는 작품은 이 집단에서 나온 책이다.1) 이 서적이 Martin Luther에 큰 영향을 주었다.2) 이 서적은 영적인 완성을 목표로 하고, 그것을 달성하는 구체적 방법 등을 다루고 있다.3) 전형적이고 신비적인 방법으로 영적 완성을 달성하는 3단계를 가르쳤다.a) 정화단계(Purification)는 시작 단계로서 세 가지 방법으로 구성된다.① 통회와 죄에 대한 슬픔② 완전하고 자유스러운 고백③ 완전한 고해b) 조명(Illumination)단계는 성장 단계로서 역시 세 가지 방법으로 구성된다.① 죄의 거부② 덕과 선행의 실천③ 역경과 환란에 대한 자발적인 인내c) 결합단계(Union)은 완전으로 도약하는 단계로서 세 가지 방법으로 구성된다.① 마음의 순수성과 단일성② 경건한 사랑③ 모든것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묵상7. 이 시기에 발생한 신비주의 집단 중 두 번째 집단은 “공동생활 형제회”(The Brethren of the Common Life)였다.a. 이 집단은 14세기 네덜란드에서 시작되어 학습을 강조하고, 여러 학교를 세웠다.b. 최대의 인문주의자 Erasmus는 이 학교중 하나에서 공부했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c. 이 집단에서 유명한 신비주의 서적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itation of Christ)가 나왔다.1) Thomas a'Kempis가 보통 이 작품의 저자로 간주된다.2) 신자가 그리스도를 본받고, 하나님과 일치를 달성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8. 요점은 이러한 신비주의 운동이 개신교 종교개혁에 꽤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C. 개신교 종교개혁으로 이끄는 두 번째 사상운동은 “명목론”(Nominalism)이다.1. Anselm은 이미 11세기에 명목론을 이단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14세기에 명목론은 다시 대두되기 시작했고, 이 견해의 대변인은 영국인 William of Occam이었다.2. William of Occam (1300-1349)a. 프랜시스칸으로서 Oxfard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에서 가르쳤다.1) 프랜시스칸 종단은 Francis의 사망직후 내분의 의기를 맞았다.2) Occam은 Francis의 사상을 추종하는 무리의 편을 들었는데, 이들은 좀더 엄격한 삶을 살고자 했다.b. Occam은 교황을 다소 과격하게 공격했고, 이로 인해 교황과 갈등을 겪었다.1) 1328년에 파문 당했고,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종단에서도 추방되었다.2) 그러나 Occam은 Bulvaria로 피신했고, 죽을 때까지 보호받았다.c. William of Occam은 14세기 명목론의 중요한 대변인이었다.1) 그는 개체만이 실재하는 것이지 보편(universal)이란 인간의 사고속에만 있는 것이고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2) 스콜라신학을 공격하여 사람은 이성으로 하나님의 존재나 하나님의 속성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했다. 단지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고 했다.3) Occam은 하나님의 신적의지 (divine will)가 모든것이 구원이며 하나님의 의지는 선하다고 했다.4) 신앙과 이성을 분리했다 궁극적인 존재를 다룰 때는 오로지 믿음과 계시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고 했다.5) William of Occam은 성경의 권위를 강조했다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면서 Occam은 교황의 권위를 하강시켰다.3. 이렇게해서 명목론은 실재론적인 사고에 바탕을 둔 스콜라신학의 권위를 떨어뜨리는데 기여했다.D. 종교개혁으로 이끄는 세번째 사상운동은 인문주의(Humanism)이었다.1. 서론a. 라틴 고전과 희랍 고전을 연구하여, 그들의 인생관을 제시하는 지적, 문화적 운동이었다. b. 로마의 고대 작품들을 되돌아보는 시각과 자연 세계를 내다보는 시각이 포함되었다. backward + outward look)c. 이 운동은 이태리에서 시작되어, 종교 자체에 회의적이며 비판적이었다.d. 그러나 이 운동이 독일로 전파되었을 때는 종교적인 운동이 되었고, 성경과 초대교부 연구를 자극시켰다.2. 인문주의 운동은 인생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지했다.a. 개인주의(individualism)가 출현하여 삶의 모든 영역에 침투했고, 중세 종합기의 모든 종교적 연관성을 파괴하기 시작했다.b. 이생(여기 그리고 지금)에 대한 새로운 강조.c. 삶의 환희로 표현되는 새로운 태도d. 인간의 위대함과 고귀함에 대한 새로운 강조3.동시에 고전 작품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고조되었다.a. 따라서 스콜라 신학자들이 인용한 내용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b. 원본 자체를 읽고 그들의 관점대로 평가했다c. 인문주의 학자들은 고대 문서들도 스스로 검토하기 시작했다.1) 예를 들면 Lorenzo Valla라는 인문주의자는 콘스탄틴이 직접 썼다고 하는 「콘스탄틴의 증여」 (The Donation of Constantine)라는 문서를 검토했다.a) 이 문서는 교황의 권위가 왕의 권위보다 우월하다는 내용이다.b) Valla는 비판적 연구를 통해서 이 문서는 콘스탄틴이 쓴 것이 아니라 날조된 것이라고 의심없이 밝혔다.2) 「사도 신경」(The Apostles'k Creed)도 같은 방법으로 검토했다.a) 전통에 따르면 사도신경은 12줄로 되었고, 12사도가 한 문장씩 기여했다는 것이다.b) 그러나 인문주의자들은 사도신경이 사도들에 의해 쓰인것이 아니라, 훨씬 후기에 나온 것임을 밝혔다.3) 인문주의자들은 Jerome의 Latin Vulgate를 검토했는데, 중세의 신학은 대부분 Vulgate를 근거로 했다. → Vulgate는 같은 단어를 다른 표현으로 번역한 사례가 많다고 주장했다.4) 교부들의 저작도 연구해서, 교부들의 의견이 여러 가지 영역에서 똑같이 않고 다양했다는 사실을 밝혀 놓았다.4. 독일에서는 Johann Reuchlin(로이힐린)이라는 학자가 언어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a. Reuchlin은 독일 인문주의자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b. 희랍어, 히브리어 연구에 헌신했다, 당시에는 극소수만 희랍어를 알았고, 히브리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c. Reuchlin은 유명한 히브리어 학자가 되었고, 히브리어 사전, 문법서 등을 편찬했다.d. 그 때에 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이 그 당시 이단의 대부분은 히브리어 서적으로 부터 왔으므로, 구약을 제외한 모든 히브리어 작품들은 파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 그는 이 견해를 이단심문소에 제출했고, 이단심문소는 그 유대인의 견해에 동조했다.2) 그러나 유명한 히브리어 학자인 Reuchlin은 이 문제에 반대하고, 히브리어 작품 파괴에 강력 반대했다.3) Reuchlin은 이단심문소에 끌려왔고, 당시 교황 Leo 10세는 결정을 연기했다.4) 독일의 인문주의 학자들은 Reuchlin을 변호했다.a) 그들은 Reuchlin의 품성과 학식을 변호했는데, 그 내용이 「저명인사들로부터의 편지」(Letters from Eminent Men)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b) 이 작품에서 인문주의 학자들은 이 문제로 인해 Reuchlin을 핍박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5) 곧 Reuchlin에 반대하는 「무명 인사들로부터의 편지」(Letters from Obscure Men)이라는 책이 나왔다.a) 이 작품은 매우 조잡하고 비논리적이며, 무식한 사람들이 쓴 것이 분명하였다.b) 이 작품은 한때 Reuchlin의 반대자들이 애용했으나, 후에는 이 사태를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쓴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e. 이 사건은 독일 인문주의자들을 단결시켰고, 단결된 인문주의자들은 교회의 미신, 무지, 세속성 등을 공격했다.5. 인문주의 학자 중 선봉장은 로털담의 에라스무스(Erasmus of Rotterdam)이었다.a. Erasmus는 1466년경 Rotterdam에서 출생b. 그의 부친은 사제였으므로, 그는 서자 출신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c. “공동생활 형제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녔고, 부모 사후에는 수도원에 들어감.1) Erasmus는 수도원 생활에 적합치 않았다.2) 그러나 수도원에서 Latin어를 공부했고, 결국 유명한 라틴어 학자가 됨d. 때가되어, 수도원을 떠나 감독의 비서가 되었고, 그후 파리에서 잠시 공부함e. Erasmus는 스콜라신학과 Aristotle의 철학을 매우 싫어했지만 학업은 계속했다.f. 영국에서 1499년경 시간을 보내고, 영국 인문주의 학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 학자들은 주로 성서 연구에 몰두했다.g. 헬라어를 배우기로 굳게 결심하고, 헬라어 능력 개발에 주력했다.h. 영국을 떠날 무렵, 그는 성서 연구와 교부 문헌 연구에 몰두하기로 결심i. Erasmus의 문헌적인 업적1) Erasmus는 교부들의 작품들을 새로이 편집함2) 신약성경 헬라어 판을 연구하고, 최초로 출판함.a) 이후 성경번역본은 Erasmus의 헬라어판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b) 예를들어,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할 때, 루터가 번역의 원본으로 사용한 것은 Erasmus의 신약성서 헬라어판이었다.3) 성경 각권에 대해서 주석서와 해설서 등을 발간함.4) 다른 유명한 작품 중에는 「우신예찬」(The Praise of Folly),「기독교 군사들의 입문서」(The Handbook of a Christian Soldier)등이 있다.j. Erasmus는 가장 유명한 인문주의 학자로서, 가장 큰 영향을 미쳤고, 중요한 종교개혁가들과 서신왕래를 하였다.k. Erasmus의 기본적 교리들1) 전형적인 인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스콜라신학자들이 제시한 기독교가 아니라, 신약성서와 초대 교부들이 제시하는 기독교로 돌아가자는 ‘원시 기독교의 회복’을 강조했다.2) 그는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강조했다.3) 그는 스콜라신학과 교회교의(church dogma)를 확인하고 정의하려는 시도를 멸시했다.a) 사실상, 그의 가장 좋아하는 성서상의 인물은 십자가 우편 강도였는데, 왜냐하면 신학 수업이 전혀 없이도 구원받았기 때문이다.b) 따라서 그는 스콜라신학자들처럼 기술적인 신학(technical theology)에는 관심이 없었다.4) 그는 그리스도인의 내적인 신앙을 강조했다∶의문보다 영의 우의성5) 그는 다른 견해를 관용할 것과, 여러 견해들을 검토할 것을 강조6) 그는 개혁이란 주로 학문연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확신했다.l. 종교 개혁에 대한 Erasmus의 태도1) 처음에 Erasmus는 Martin Luther를 지지했고, 루터의 견해 연구를 장려했다.2) 에라스무스는 교회(R.C.)의 타락을 인식하고, 개혁을 원했으나, 교회와 매우 밀접한 상태에 있었다.a) 교회의 타락과 무지와 미신을 강력히 비판했지만, 교회로부터 분리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다.b) 에라스무스는 단순히 교육, 학습 및 문서 연구를 통해서 교회개혁을 원했을 뿐이다.3) 에라스무스가 루터와 결별했을 때, 그 이유는 인문주의자와 종교 개혁가들의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 ‘인간론’에 대한 주제였다.a)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인문주의자들은 인간의 기본적인 선함과 고귀함을 강조했다.→ 종교개혁가들은 인간의 죄성과 유한성을 강조했다.b) 인간의 의지에 대해서→ 인문주의자들은 “의지의 자유”를 강조했고,→ 종교개혁가들은 “의지의 속박”을 강조했다.M. Erasmus의 작품들은 종교개혁가들의 연구에 좋은 바탕을 제공했다.   Ⅷ. 유럽에서 민족주의(Nationalism)의 발흥A. 이 당시 정치계의 중요 세력은 민족주의 세력이었다.B. 5국가가 이 당시 유럽의 대부분을 점유했다.∶스페인, 프랑스, 독일, 이태리, 영국1. 이중 세국가,(스페인, 프랑스, 영국)에는 상당한 정도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졌다.2. 이중 두국가 (독일과 이태리)는 작은 주들이 뭉쳐서 큰 국가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3. 국가의 중앙집권화 정도에 따라서, 종교개혁운동을 대하는 면에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예를 들어 독일은 중앙집권화가 약하고, 각주끼리 연결이 느슨함으로 인해 Martin Luther의 개혁을 다루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4. 이 국가들은 민족주의적인 면을 강조하기 시작했다.C. 영국의 민족주의의 상황1. “장미전쟁”은 중세 봉건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켰고, 따라서 왕Henry7세는 중앙집권적 국가의 강력한 지도자로 등극했다.a. Henry7세는 1485 - 1509통치b. 대외 정책에서 두 가지 목표를 수립했다.1) Scotland를 평화적 방법으로 확보하는 것2) Spain 과 동맹 관계를 맺는것2. Scotland를 평화적 방법으로 확보키 위해, 외교적 수단을 사용(주로 결혼관계를 통해서) a. Henry7세는 그의 딸을 Scotland 왕과 혼인b. 결과가 즉시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결국 Scotland 의 James 6세는 영국왕 James I 세가 되었다(1603).3. Spain과의 동맹을 확보하기 위해,Henry7세는 다음과 같은 행동과정을 취했다.a. 그의 아들 Arthur를 Spain 공주 Katherine(왕 Ferdinand와 왕후 Isabella의 딸)과 결혼시켰다. 그러나Arthur는 곧사망.b. 따라서 차자인 Henry를 Katherine 과 다시 결혼시켰다(교회의 특별한 허락에 의해).c. 1509년에, Henry와 Katherine은 영국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영국 종교개혁기의 왕이었던 Henry 8세가 이 사람이다.4. 따라서 영국은 Spain공주 Katherine과 결혼한 Henry8세 치하에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가 되었다.D. 프랑스 민족주의의 상황1. 프랑스에서는 중앙집권적 국가가 출현하고 있었다.2. 영국과의 잦은 전쟁으로 인해 국가의 군대모집, 세금부과, 중세봉건 영주 세력의 약화가 초래되었다.3. 따라서 Francis1세(1515-1557)는 강력한 나라의 왕이었다.4. 국가 뿐아니라 교회도 민족주의 영향을 받아서, 교황청의 강력한 통제로부터 분리하여, 개혁하려는 시도가 있었다.a. 로마로 흘러가는 많은 돈이 차단되었다.b. 결국 1516년에 Francis와 교황Leo 10세는 타협을 해서, 프랑스왕은 교직자 임명권을 갖고, 교황은 프랑스로부터 상당한 돈을 받도록 하였다.1) 이 타협으로 인해 Francis1세와 교황 Leo10세는 가까워짐2) 그러나 Francis 1세는 언제든지 교황이 자기를 조종하려 하면, 프랑스 단독 교회를 세우겠다고 위협했다5. 이 타협의 결과, 프랑스 국가는 대부분 종교개혁 운동 중에 로마 캐도릭과 결탁되었다.E. 스페인 민족주의의 상황1. 여러 세기 동안 Spain은 여러 지방으로 분할되었고, 국가는 통합되지 않았다. 남스페인 Granada는 아직도 화교 세력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2. 1469년에 강력한 지방의 두 지도자인 Ferdinand와 Isabella가 결혼했고, 그 결과 Spain통합이 시작되었다.a. 그들은 세력을 합하여, 다른 귀족이나 영주들을 정복했다.b. 1492년에 그들은 Granada에 남은 회교 세력을 격퇴했다. 이렇게 해서 Spain 최후 회교 세력의 거점이 파괴되었다.c. Spain의 감독하에 1492년에는 신대륙이 발견되었고, 따라서 Spain의 세력과 국제적 위치가 크게 강화되었다.d. 교회를 정치적 목적에 활용했다. 따라서 군주가 임명하는 “이단심문소”(inquisition)가 설치되었다.e. 그와 동시에 그들은 교회도 개혁코자 했다.1) 교역자들에게 좀더 낳은 훈련을 제공했다.2)교역자와 교회에 좀더 엄격한 감독을 했다.3)이 개혁운동을 추진키 위해 유명한 스페인사람 Ximenes를 임명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개혁을 추진했다.a)대학설립 b)학문장려 c)1515년에 희랍어 신약성서 출간4) 어떤 학자들은 다른 지역에서도 Spain과 같은 개혁이 추진되었으면, 종교개혁이 필요치 않을 수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분명 과장이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내부적 타락은 지속되었다.3. 1516년에 Ferdinand의 사후에 Spain의 권좌는 그의 손자인 Charles에게 넘어갔고, Charles는 이미 네델란드와 오스트리아로 계승받은 상태였다.a. 따라서 Charles는 스페인 왕인 동시에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b. 그러므로 Charles 5세는 개혁기에 유럽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人物이 되었다.F. 이태리와 독일 민족주의의 상황1. 이상 세나라와 이태리 및 독일의 두나라는 상황이 달랐다. 이태리, 독일에는 중앙집권적인 세력이 없었다.2.이태리의 상황a.지방과 제후에 따른 분열은 계속되었다. 또한 이 지방들간의 갈등도 계속되었다.b.교황도 영지의 제후로서, 자기 영토를 넓히려는 다른 봉건제후의 하나로 간주되었다.1) Julius 2세는 1503-1513까지 교황이었다.a) 자기 사병을 일으켜 전투에 참여했다.b) 그 결과 교황 영지를 약간 확대했다.2) 그의 후임자 Leo10세 (1513-1521)은 교회의 일보다는 농업, 예술, 건축, 도박등에 더 관심이 많았다.a) 그는 종종 “하나님이 내게 교황직을 주셨으니, 즐기자”라고 했다.b) Leo10세 재임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고, 그 영향이 시작되었다.c. 요점은 이태리는 권력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3. 독일의 상황a. 제국은 아직도 신성로마제국이라 불리웠고, 봉건영주들이 선출하는 황제가 통치했다.1) 여러해동안, 황제는 Hapsburg家 출신이었는데, 이들은 자기 가문 영토 확장에만 주력했다.2) 사실상 독일은 몇몇 귀족들이 지배하는 봉건영지로 분열되었는데, 그 영주들은 상당한 독립성이 있었다.a) 그들은 나름대로 군대를 모집했다.b) 따라서 황제 자신도 그들에게 큰 지배력을 행사치 못했다.b. Maximilian 1세는 1493-1519까지 황제였다.1) 그는 네델란드와 다른 영토를 유업으로 받은 공주와 결혼했다.2) 그들의 아들이 스페인 군주인 Ferdinand와Isabella의 딸과 결혼했다.a) 여기서 태어난 Charles 5세가 성장하면서, 스페인 ,네델란드, 오스트리아를 유업으로 받게 된 것이다.b) 1519년에 Charles 5세는 황제로 선출되었고, 유럽의 가장 강력한 통치자가 되었다.G. 1453년에 Constantinople은 결국 오토만터어키에 멸망당했고, 이로써 동로마제국도 멸망했다.1. 점차 오토만 터어키국(Ottoman Turks)들은 영토를 확장하려 했고, 따라서 서방을 위협했다.2. Charles 5세는 오토만터어키 침략을 방어하고, 다른 제후들 세력을 모아 방어에 협력토록 하는데, 많은 신경을 썼기 때문에, 사실상 종교개혁은 별로 주의를 기우릴 수 없었다.제 6 부 종교개혁기(1500-1650)서론∶종교개혁과 그 해석자A. Luther를 위시해서 개혁가들이 제도화된 질서에 반기를 든 운동을 무엇이라 하는가?1. 일반적으로, 16세기 Luther와 개혁가들의 운동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Protestant Reformation)이라고 불리운다.a. “개혁”이라는 용어는 훨씬 이전부터 사용되었다.1) 이 용어 배후의 역사a) 12세기 13세기경에 몇 저자들은 신세대 즉 “성령의 세대”(The Age of the Holy Spirit)가 교회 내에 발전된다고 했다.b) 다른 저자들이 이 사상을 “개혁”이라고 표현했다.2) 이 용어의 내포된 개념a) 일반적으로 개혁이라는 용어는 제도화된 질서에 문제가 있으니, 특별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b) 이런식으로,R.C.교회는 타락되었으니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b.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용어는 이 운동에서 직접 나온 용어이다.1) 1520년대, 개혁운동은 루터 지휘하에 독일 전역에 확산됨.a) 일부 봉건영주들은 루터를 지지했고, 결국 1526년에는 루터교회에 대한 일종의 인준을 받게 되었다.b) 그러나 3년뒤에 독일 정부는 증대되는 R.C.세력의 반발에 의해 이 인준을 철회했다. 따라서 그 봉건영주들은 “항의서”(Protest)를 작성했고, 그 결과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리게 되었다.2) 루터교 제후들을 가리키는 이 용어가 전개혁운동에 확산되었다.2. 많은 R.C.저자들은 “프로테스탄트 반동 (Protestant Revolt"라는 용어를 즐겨 쓴다. 이 용어는 진정한 기관을 대항해서 일부 집단이 반항했다는 의미가 포함되었다.3. 또 다른 용어로는 “프로테스탄트 혁명(Protestant Revolution)이라고도 불리운다. 이 용어는 세속적인 저자들이 산업혁명등 다른 혁명과 같은 분석 방법으로 개혁운동을 분석할 때 쓰는 세속적 용어이다.4. 이 세용어들이 다양하게 쓰이지만, 가장 일반적인 용어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Protestant Reformation)이다.B. 여러해 동안 개신교 저자들과 R.C.저자들은 종교개혁을 다양하게 해석해 왔다.1. R.C.의 해석자들은 이 운동의 지도자 Martin Luther를 “무식한자” “장가가고 싶어 환장한자” “세력을 잡고자 현혹된 자” 등으로 표현했다.2. 개신교 해석자들은 제도적교회 내부의 타락과 부패를 다소 강한 어조로 표현했다.3. 1940년부터 특히 Vatican 2차공회 부터 일부 R.C.해석자들은 종교개혁의 적극적인 면을 보기 시작했다.a. 이런 경향은 오늘날까지 계속된다.b. 개혁가들의 작품도 인용되고 있다.c. R.C.이나 개신교도들이나 최근에는 이 운동의 장점. 강점을 보기 시작했다.I. 루터와 루터교회A. 루터의 생애1. Martin Luther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 Saxony출생2. 부모는 농부였고, 여러 마을 전전하다가 구리광에 손을대서 꽤 부유케 됨a. 그들은 아들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b. 아들이 법관이 되어, 부유한 여자와 결혼해서, 노년기에 잘 봉양할 것을 기대했다.c. 그들은 매우 보수적, 종교적이었고, 그 당시 미신을 많이 시행했다. Luther는 이런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3. 루터의 초기교육a. 루터는 좋은 학생이었다.b. 1501년 Erfurt대학에 입학. 1502년에 학사 학위 받고, 3년뒤 석사 학위를 받았다.c. 루터는 학급에서 2등으로 졸업. (일부 저자들은 루터가 아주 둔한 학생이라고 악평하나 사실과 다르다)4. 루터의 종교성 발전a. 이런 교육을 받은 직후, 루터는 분명히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법률가가 되려는 소원을 거부하고, Erfurt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감.1) 여러 가지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데a) 어떤 사람은 가까운 친구의 죽음에 쇼크를 받았다고 하고,b) 또 어떤 사람은 번개치는 폭풍우속에서 너무 겁에 질려서 “성 안나(Anne)여 나를 도우소서, 내가 승려가 되겠나이다.”고 서원 했다고 한다.2)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부모들이 이것을 기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b. 1505년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루터는 수도원 원장이자, 그 지역 어거스틴 수도원 여럿을 지도하는 John Staupitz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1) Staupitz는 세심하게 돌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2) 그는 Luther에게서 많은 잠재성을 보았고, 루터가 수도원 생활을 통해서 사제가 되도록 격려했다.c. 루터는 1507년에 안수를 받았다. 그는 첫 번째 미사 인도 경험이 그에게는 매우 겁나는 일이었다고 했다.1) 피의 희생 제사를 시행한다고 생각할 때 공포감에 질렸다.2) 그의 아버지와 친구들이 동참했다는 사실이 공포감을 덜어 주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d. 루터는 이런 두려움에 대한 자구책으로 최선을 다해서 수도원생활에 임했다.1) 그는 엄격한 금욕주의 생활을 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육체를 처벌하는”의도를 가지고 금욕생활에 임했다.2) 그는 규정 이상의 철야와 금식을 하였다. 4순절이 부활절보다 더 위안이 되었다. 덮는 담요를 치워버리고 철야하다 얼어죽을 뻔도 했다3) 때로 그는 자랑스럽게 “나는 오늘 아무런 나쁜것도 안했다”고 말하다가도 “너는 충분한 금식을 했느냐?” “너는 얼마나 청빈한 생활을 하느냐?”하고 자문했다.4) 이런 금욕 생활이 Luther의 소화기관에 영구적인 손해를 입혔다.5) 루터는 이시기를 후에 회상하면서 “나는 좋은 수도승이었다. 규칙을 너무 엄격하게 지켰기 때문에, 수도원에서 천국갈 사람이 있다면 바로 나였다”고 했다.e. 1508년 루터는 잠시 Wittenberg에서 가르쳤다. 다시 Erfurt로 되돌아와서 Staupitz의 도움으로 계속 공부했다.f. 1510년에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원의 공무로 로마 여행을 했다.1) 로마로의 이 여행은 루터의 괴로운 심정에 평화를 주지 못했다.2) 도시에 간 시골사람처럼 루터는 그가 로마에서 본 많은 불경건으로 인해 몹시 고민에 빠졌다.3) “빌라도의 계단”과 같은 유적지들을 많이 방문했다.a) 이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 조상의 영혼이 연옥에서 해방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b) 루터는 자기 부모가 아직 살아 계시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면서, 할아버지 Hiny의 영혼을 해방시키기로 했다.5. 1511년 루터는 Wittenberg로 되돌아왔다.a. Saxony지방의 제후인 Frederick the Wise는 Wittenberg에 대학을 설립했다. Luther는 이 대학에서 가르치기 위해 Wittenberg에 왔다.b. 1512년에 Luther는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로 인해 루터는 신학을 가르칠 자격을 부여받았으나, 성경을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를 가르쳤다.c. 그는 정기적으로 설교했는데, 점차 Wittenberg대학과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영향력있는 人物이 되었다.6. 점차 루터는 Augustine을 연구해서, Augustine신학이 영향을 받게 되었다.a. 점차 루터는 그가 심하게 두려워했던 심판주, 정죄하는 하나님과는 다른 하나님 모습을 성경속에서 보기 시작했다.b. 점차 그는 교회의 가르침, 특히 구원론을 생각하며, 회의에 빠지기 시작했다.B. 개혁운동의 탄생1. 1516년 루터는 면죄부에 반대하는 세가지 설교를 했다. 그를 옹호하는 제후 Frederick the Wise와 루터가 설교하던 “성곽교회”(Castle Church)에서도 면죄부를 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그것을 비판하는 설교를 했다.2. 1517년 개혁은 루터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수로 일어나게 되었다.a. Albert of Brandenburg라는 사람은 청년의 나이에 이미 두개의 감독직분을 가지고 있었다.1) 그는 세번째 감독직분을 얻고자 했는데, 독일에서 가장 수지맞는 Mainz의 대주교 자리를 원했다.2) Albert는 자기 사신을 로마교황 Leo10세에게 보냈다. Leo는 그 자리를 12.000듀셋에 약속했다(12사도에 1,000ducets씩 쳐서 계산한 액수였다).a) Albert의 사신은 7.000듀셋을 제공하겠다고 했으니 7가지 사망에 이르는 죄에 1.000듀셋에 합의를 보았는데, 아마도 10계명에 1.000듀셋씩 곱한 것이었을 것이다.b) 그러나 문제는 Albert가 그만한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해결책이 제시되었다.-교황은 Albert의 영토에서 팔 수 있는 특수 면죄부를 주는데, 반은 로마에 성 베드로 성당 건축기금으로 가고(Julius 2세때 시작해서 Leo10세때 까지 계속됨)-그 나머지 반은 10.000듀셋의 빚을 갚는데 사용하기로 했다.-이 합의는 비밀리 이루어진 것이므로, 일체 공개되지 않았다.b. Albert는 이 면죄부를 팔기위해 도미닠 수도승인 Tetzel을 고용했다.1) Tetzel은 대단히 성공적이고, 다혈질적인 판매원이었다.2) 그는 매우 호소력있는 설교를 했다. “연옥에 있는 친척 친구의 호소를 들으라. 너는 우리들을 불꽃 속에 남겨 두려느냐?” 여러분의 동전이 이 통속에 떨어지는 순간, 그들의 영혼은 천국으로 올라간다.3) Tetzel은 면죄부를 오직 Albert의 영토에서만 팔도록 허락되었고, Saxony에서는 팔 수 없었다.a) Tetzel이 Saxony에서 팔지 못한 이유는, Saxony사람들이 면죄부를 믿지 아니했기 때문에 아니라, Saxony에서는 Frederick the Wise가 면죄부를 팔고 있었기 때문이다.b) Tetzel의 면죄부가 효력이 우수하다는 소문이 남으로, Saxony사람들도 Tetzel의 것을 사서 돌아왔다.c. “모든 성자의 날” 이브인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Wittenberg의 성곽교회(Castle Church)정문에 소위 “95개 조항”을 붙였다.1) 95개 조항은 Latin어로 기록되었고, 토론을 위해 주제가 기록되었다.2) 이 서류는 세 가지 요절을 포함했다.a) 독일돈이 로마로 가서 성 베드로 성당 짓는데 소요되는 것 반대, 그러나 루터는 이 돈이 Albert의 주교직을 위한 외상빚 갚는데 소요되는 것을 몰랐다.b) 교황이 연옥에 대해 권세를 쥐고 있다는 것 반대-아무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이상의 선행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업적의 보고”개념에 반대-교황이 연옥 관할권 가졌다는 주장에 반대-“그렇다면 왜 교황은 자비롭게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다 풀어 주지 않는가?”고 반문.c) 면죄부에 반대. 면죄부는 죄인들에게 잘못된 확신을 준다고 지적했다.3) 루터가 토론을 위해 붙인 95개 조항은 속히 사람들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기업적인 인쇄공들이 이 문서를 온 나라에 퍼뜨렸다.a) 단순한 토론을 위해 붙인 주제가 온 국가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토의주제가 되었다.b) 이 활동으로 인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C. 루터에 대한 R.C.의 경멸1. 이때부터 면죄부 공격으로 인해 루터는 많은 사람들의 비난대상이 됨.a. 그러나 점점, 교황의 권위와 교회의 권위가 공격대상이 되었다.b. 루터는 성서의 권위를 옹호했다. 그 근거로 교황과 교회회의는 오류가 있고 때로는 서로 상충되기도 한다고 했다.2. 루터가 그의 대적들과 몇 차례 회합을 가졌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1519년에 Leipzig에서 John Eck를 만난 사건이었다.a. 1519년에 황제가 사망했다. 황제 선출을 앞두고 정계는 혼란했으면 Frederick the Wise도 황제의 대상이 되었다.1) 황제는 제후들이 선출했다.2) 결국 Charles 5세가 새로운 황제로 선출되었다.b. 1519년에 Luther는 Leipzig에서 John Eck를 만났는데, Eck는 루터를 “색소니의 허스‘(The saxon Hus)라고 불렀다.1) 이상하게도 이 모임 이후에 루터는 국제적인 개혁가로 유명해졌다.2) 이 논쟁 후 루터의 작품들은 프랑스, 스페인, 영국 및 독일 이외의 지역에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루터의 작품들은 인문주의자들로부터 많은 후원을 받았다.D. 1520년 루터는 개혁운동의 핵심을 다루는 몇 가지 “주요 저작들”을 저술하였다.1. 이중 하나가 「독일 귀족에게 고함」 An Address to the German Nobility였다.a. 이 작품에서 루터는 R.C이 세 가지 벽을 건설했다고 주장했다.1) 교황의 세력을 높여서 시민 정부의 관할로부터 제외한 점.2) 교황만이 성서의 올바른 해석자라는 주장.3) 교황만이 교회회의를 소집할 수 있다는 주장b. 이 작품에서 루터는 전 교회회의 소집을 요구했고, 교회회의에서 논의할 제목들도 제시했다.2. 루터의 둘째 작품은 「교회의 바벨론 유수」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였다.a. 로마 감독이 아비뇽으로 옮긴 1309-1377까지 기간을 다루었다.b. 이 작품에서 루터는 R.C.의 성례전 체계를 논했다c. 이 작품은 라틴어로 쓰였으나, 곧 독일어로 번역되어 인쇄를 통해 해외로 퍼져 나갔다. 인쇄술의 발전 (15c중순)은 문헌 유포에 크게 기여했다.d. Erasmus는 이 작품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작품 발간 이후 교회에 일어난 분열은 치유될 수 없는 것이 되었다”고 했다.e. 이 작품에서 루터는 성례전을 7->2로 축소했다. 침례와 주의 만찬만 성례전으로 보았고, 견진도 받아들였으나 성례전이라고 보지는 않았다.1) 루터는 성례전에 새로운 정의를 내렸다.2) Baptisma) 루터는 유아 세례를 계속 옹호했다.b) 그는 침수례가 가장 성서적 침례 양식이라고 했다.3) 주의 만찬a) 주의 만찬에서는 빵과 포도주가 모두 평신도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b) 그는 화체설은 아니지만, 주의 만찬에 그리스도의 “실재임재”(Real Presence)교리를 옹호했다.-그의 견해는 비록 그가 사용한 용어는 아닐지라도, 공재설(Consubstantiation)이라고 한다.-이 견해에 따르면, 주의 만찬 참여자는 빵, 포도주와 함께 (with)그리스도의 진짜 살과 진짜 피를 받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빵, 포도주의 실체에 마술적인 변화는 없다고 한다.3. 세번째 주요 작품으로 교황에게 헌납된 작품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Concerning Christian Liberty)라는 것이었다.a. 이 작품에서 루터는 이신칭의 교리와, 모든 신자의 제사장 직분을 강조했다.b.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주인이자, 아무의 종도 아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의 종이자,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이다”라고 말했다. c. 이 작품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직업 소명을 말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자들이라고 했다.E. 루터에 대한 핍박1. 1520년에 루터는 교황으로부터 정죄 칙서를 받았다. 이 칙서의 제목은 Exsurge Domine로서 “일어나십시오, 오 주여”라는 의미다.a. 이 칙서에 따르면, 루터는 60일 동안 견해를 취소하도록 요구됨.b. 루터는 교황칙서, 교회법, 스콜라신학자들 서적등을 불태움으로 응답했다.2. 1521년 루터는 황제 Charles 5세가 주도하는 독일 보룸스 종교회의 Diet of Worms에 소환되었다.a. 거기서 Luther는 자기 저작물을 취소하지 않는다고 선언. 따라서 제국은 루터에게 추방령을 내림.b. 루터의 책들은 소각, 루터의 교리는 탄압, 잠시 후에는 누구든지 루터를 살해할 수 있다는 내용의 추방령이었다.F. 다른 개혁 지도자들1. Frederick the Wise는 바르트부르크성곽 (Wartburg Castle)에 루터의 피신처를 마련해 줌.a. 루터는 Wartburg성곽에 있는 동안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b. 이 번역판이 개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일반 신도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아울러 독일어도 크게 발전했다.2. 루터가 Wartburg성곽에 피신한 동안 개혁은 Wittenberg에서 Melanchton(멜랑크톤)과 Carlestadt(칼슈타트)에 의해 진척되었다.a. Melanchton은 젊은 인문주의 학자로 헬라어에 정통했고, 성서 및 교부 문헌을 연구했다.1) 그는 1521년에 「중요 요점들」(The Cardinal Points)라는 루터교의 조직신학 서를 펴냈다.a) Luther는 이 작품을 좋게 평가했다.b) 사실 Luther는 “이 작품이 성경 속에 포함되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였다.2) Melanchton은 개혁기 동안 중요한 저술가요 지도자로 활약b. Carlestadt는 좀더 나이가 많고, 좀더 급진적인 개혁가였다.1) 그는 이론에서 실천으로 옮기자고 했다. R.C.의 예배서와 행습을 제거코자 했다.2) 많은 우상, 형상, 등이 파괴되었고, 예배 의식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3. 몇몇 다른 급진적인 지도자들이 나타나서,.그리스도의 재림 및 유아세례 거부등을 포함한 신비주의 사상을 선포했다.4. Luther는 곧 Wittenberg로 돌아와, Carlestadt를 몰아냈다. Carlestadt는 좀더 급진적인 재침례고도들과 연합해서 계속 개혁가로 활동했다.G. Luther와 루터교에 대한 일부 집단의 단절1. 루터는 어느 의미에서 보수적인 개혁가였다.a. 개혁을 서서히 이루고, 너무 멀리 가지 말자고 했다.b. 따라서 루터는 제후들의 도움을 얻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일부 집단은 루터에 대한 지원을 단절했다.2. 인문주의자들이 먼저 루터와 단절했다.a. 인문주의자들은 교육으로 교회를 개선코자 했지, 교회 분열을 옹호하지는 않았다.b. Erasmus는 1524년 루터의 인간론에 반대하는 글을 썼다. Erasmus는 인간의 선함, 고귀함, 인간 의지의 자유등을 강조했다.3. 재침례교도를 포함한 급진적 개혁가들은 루터가 개혁을 충분히 시도하지 않는다고 하며 루터와 단절했다.4. 그러나 가장 심각한 것은 농민들로부터 지지를 상실한 것이었다.a. 루터 자신도 농부 출신으로 봉건제도와 R.C.에게 눌린 농부들의 기본권을 찾고자 했다.b. 일부 농민들은 이런 기본권을 행사코자 했다. 행정당국이 저지하자 “농민전쟁”이 발발했다.c. 농민전쟁(Peasant's Revolt)은 1525년 발발1) 루터는 농민들의 과격 행동을 심하게 비난함2) 따라서 루터는 농민들의 지지를 잃고, 점차 개혁을 위해 제후들을 의지함H. 1525년 루터는 Katherine Von Bora와 결혼I. 루터 종교개혁의 결과1. 1526년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루터교회는 법적 인준을 받게 됨.a. 그러나 3년뒤에 이 인준이 철회될 때 루터교 제후들은 항거하게 됨b. 1529년 루터는 Marburg(마북)에서 즈윙글리를 만남.1) 즈윙글리는 개혁가들이 연합하여, 연합군 사력을 구축하자 했으나, 루터가 반대함.2) 그들은 주의 만찬에 대한 이론과, 무력 사용에 대한 주제에 일치되지 못함.2. 1530년에 Augsburg에서 황제가 회의 소집 (교회연합위해)a. 이 모임을 위해 Melanchton은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작성하여 루터교 견해를 제시함.1) 이 작품은 루터교의 기본 신앙고백서가 됨 (1530)2) 1531년에 Melanchton은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변증서”를 작성하여 R.C.교리와 루터교 교리 차이를 제시3) 그러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R.C.교리와 루터교 교리의 공통점을 강조한 것.4)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변증서”는 둘 사이의 차이를 강조.(1535)3. 1546년 루터는 죽었어도, 종교개혁과 루터교, R.C.교간의 갈등은 계속되었다.4.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강화조약”(The Reace of Augsburg)이 작성되어, 각 지역 제후는 자기 지역의 종교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a. 제후가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합법적 종교는 R.C.과 루터교였다b. 일정 지역 내의 신민은 그 지역 제후의 종교를 받아들이거나 그 지역을 떠나거나 둘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5. 다음 세기에는 1618-1648까지 30년전쟁이 끝난 후 한가지 교파가 더 추가되었다.∶독일 개혁교.Ⅱ. 개혁교의 전통(The Reformed Tradition)A. 서론1. 개혁교는 스위스에서 시작되고, 급속히 프랑스, 영국, 화란, 및 여러 나라로 확산되었다.2. 스위스에서 큰 영향을 미친 두 지도자a. 즈윙글리(Ulrich Zwingli)∶북스위스 독일어권b. 캘빈(John Calvin)∶제네바 (Geneva)불어권3. 스위스는 이 당시 13개 지방 혹은 “캔톤”(Cantons)으로 분리되었다.4. 스위스는 여러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북쪽에서는 독일어, 남쪽에서는 불어, 일부 지역에서는 이태리어를 쓰고 있었다.B. 즈윙글리의 생애와 사상1. 1484년 출생 1531년 사망2. 스위스의 독일어권인 Zurich로부터 40마일 떨어진 지역에서 출생.3. 즈윙글리의 초기 교육a. 그의 초기 교육은 3촌의 감독 아래 이루어졌다.b. 어린 시절 및 청년기에 인문주의적 연구에 가담. 음악에 대한 강한 정렬을 보였다.c. 몇 개 대학에서 즈윙글리는 고전 연구에 몰두하고,Erasmus의 전통을 따라 인문주의적인 개혁운동에 가담했다.4. 즈윙글리의 종교성 발전a. 1506년에 즈윙글리는 Glarus라는 마을의 교구 사제가 되었고,10년간 봉사했다 (1506-1516)1) 이 교구는 크고 바쁜 교구였다.2) 즈윙글리는 10년간 성장을 경험했다.3) 스위스는 이 당시 용병제 도로 유명했는데,Glarus에 있는 동안 용병 제도를 비판했다.4) Glarus에 있는 동안, Zwingli는 서적을 계속 수집하여 개인 도서관을 만들고, 이후 개혁을 위한 연구의 기본 자료로 사용했다.b. 10년 Glarus 사제 생활 이후 즈윙글리는 Einsiedeln으로 옮겨 3년간 사제로 근무했다 (1516-1518)1) 그 마을은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오는 유명한 성묘가 있었다.2) 즈윙글리는 이러한 순례 행습과, 순례자들에게 면죄부를 수여하는 행습을 비판했다.c. 1519년에 즈윙글리는 Zurich의 교구 사제가 되었고, 1531년 그의 사망시까지 봉사했다.5. Zurich에서 즈윙글리의 개혁을 위한 노력a. 즈윙글리가 Zurich에 도착했을 때, 그는 교회의 형식적인 예배서 사용을 따르지 않기로 결심하고, 대신 Erasmus의 희랍어 신약 성경을 사용하여 마태복음부터 설교하기로 선택을 했다b. 즈윙글리는 부분적으로 인문주의자들의 노선을 따라 개혁을 시도했으나, 아울러 루터의 저작을 많이 읽고, 그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즈윙글리는 후에 그가 루터의 작품들을 별로 의존하지 않았다고 말하곤 했다.)c. 즈윙글리는 다른 어떤 권위보다 성경의 권리를 높이고자 했다.d. 1522년에 Zurich의 즈윙글리 교구에 속한 일부 집단이 4순절 금식을 준수하지 않았다.1) 즈윙글리는 성경을 권위로 사용하여 그들을 옹호했다2) 같은 해에, 즈윙글리는 사제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는 청원에 참여한다.e. 다른 개혁도 추진되었는데, 즈윙글리는 67개 조항의 고백서를 작성했는데,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화체설 부인 및 성경의 권위를 높이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즈윙글리는 이 신앙고백서를 쥬리히의 시의회(Town Council)에 제출했다.f. 즈윙글리는 개혁 초기부터 시의회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활동했고, 개혁활동에 대하여 시의회의 인준을 받고자 했다.1) 점차 미사, 성상, 유골 등을 배척하기 시작했다2) 심지어는 교회의 아름다운 오르간도 제거했다3) 개혁교와 루터교의 차이를 볼 수 있는데, 개혁교는 모든 종교행습에 있어서 좀더 엄격하다는 것이다.g. 많은 사제들이 결혼하기 시작했고, 즈윙글리 자신도 1524년에 결혼했다h. 이러한 개혁은 계속되었고, 즈윙글리는 성경 연구를 주도했으며, 신앙고백서 작성과, 개혁의 견해를 제시하는 작품들을 많이 저술했다6. 개혁교 전통에 대한 반대a. 자연적으로 이러한 개혁시도는 주변 “캔톤”의 R.C.에 의해 반발을 사게 되었고, 1529년에는 프로테스탄트와 R.C.간에 전쟁이 일어났다.1) 프로테스탄트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둠으로, 위협은 일시 중단되었다.2) 그러나 이것이 일시적이라는 것을 안 즈윙글리는 1529년에 루터와 회합을 가졌는데 이것이 소위 “마북대화”(Marburg Conversation)이다.a) 이 모임에서 즈윙글리는 다가오는 R.C.과의 전투에 대비하여 루터 및 독일 군대의 도움을 얻고자 했다.b) 그러나 루터는 무력의 사용에 동조치 않았고, 주의 만찬에 대한 즈윙글리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았다.-루터는 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임재(real Presence)를 강조했다(공체설)-그러나 즈윙글리는 상징설을 취했다. 만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상징이요 기념이라는 견해이다.b. 1525년에 즈윙글리는 침례 문제로 소위 “재침례교도”들의 반대를 받았다.1) 즈윙글리는 침례 의식이 중생을 주지않는다는 점에서 재침례교도와 의견을 같이 했다.2) 그러나 즈윙글리는 “유아침례”의 문제에 있어서 재침례교도와 견해차이를 보였다.a) 즈윙글리는 다른 개혁가들과 마찬가지로, “유아침례”를 그 중요 요소로 하는 “국가교회”(State church)를 옹호했다.b) 그러나 재침례교도들은 침례는 신앙고백한 신자들을 위한 것이요, 교회는 중생한 자들로 구성되야 한다고 주장했다.3) 결국 쥬리히의회는 교구내 모든 유아들이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조례를 발표했다(1525년 1월)7. 즈윙글리는 쥬리히로 돌아왔고, 그가 예상한대로 전쟁은 일어났다.a. 1531년 즈윙글리는 전투에서 사망했다(Kappel 전투)b. 이럼으로써, 개혁교의 첫 지도자는 일찍 사망했고, 2대 개혁가 John Calvin이 개혁교 전통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가 되었다.C. 스위스에서 종교개혁의 확산1. 쥬리히가 북스위스에서 가장 강한 지역이라면, 베른(Bern)은 남스위스에서 가장 강한 지역이었다2. 종교개혁은 독일어권인 북스위스 뿐아니라, 불어권인 남스위스에도 전파되었다.3. 처음에는 열심있는 프랑스인 Farel(화렐)에 의해 추진되었다.a. Farel은 프랑스에서 탄생하고 성장했다b. 그는 초기에는 인문주의적 개혁 노선을 따르다가, 곧 마틴 루터의 개혁 노선을 따라 좀더 철저한 개혁가가 되고자 했다c. Farel은 그의 개혁 견해를 남프랑스로 전파했고, 많은 동조자를 얻었다.d. 곧 이 지역들은 미사, 성상, 면죄부 등을 제거하기 시작했고, Farel은 Bern시 당국의 보호를 받았다.e. 1533년에 Farel은 Geneva(제네바)에 정착했는데, Geneva는 남프랑스 종교개혁의 본거지가 된다1) 곧 Geneva에도 개혁이 시작되었다.2) Farel은 다혈질적인 지도자를 일단 Geneva지역에 개혁의 불을 지르는데는 성공했으나, 자기의 능력의 한계도 알고 있었다. 이 지역 저지역으로 순회하며 개심자를 얻고자 했다.3) Farel은 Geneva를 잠시 여행중이던 한 젊은이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John Calvin이었다. Farel은 Calvin을 권고해서, Geneva에 남아 개혁을 도우라고 요청했다.D. John Calvin의 생애와 사상1. Calvin은 프랑스인으로 1509탄생, 1564 사망했다2. Calvin의 가족 배경과 초기 성자과정a. Calvin은 파리에서 60마일쯤 떨어진 노용(Noyon)이라는 프랑스 도시에서 탄생b. 그의 아버지는 Noyon시의 유력자로써 성당의 법률가요, 감독의 비서였다c. 캘빈이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는 캘빈의 교육에 필요한 자금을 교회에서 공급받을 수 있는 방책을 확보했다.d. 처음에 캘빈의 아버지는 캘빈이 신학 공부하기를 원했으나, 감독과 다툼으로 인해서 캘빈이 법률학 공부하기를 원했다e. 이로써 캘빈은 법률학 공부를 했고, 부친 사후에 고전 연구로 방향 전환했다 1) 1532년에 캘빈은 고전적 인물인 Seneca를 다루는 첫작품을 라틴어로 출간했다.2) 그후 캘빈은 스스로 “갑작스런 회심”(Sudden Conversion)이라고 묘사한 경험을 했는데, 아마도 인문주의 연구로부터 신학 연구로 이때부터 방향 전환한 것 같다.3) 이때부터 캘빈은 개혁운동에 헌신하게 되었다.3. 캘빈의 개혁운동a. 캘빈은 이때 파리에 머무르면서 Cop씨 가족과 친하게 지냈다1) 1533년에 Nicholas Cop은 파리 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하는 연설을 했다.2) 이 연설은 강력한 프로테스탄트 논조였으므로, 곧 그의 고별 연설이 되었다.3) 학자들에 따라서는 이 연설문을 캘빈이 썼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았다. 어쨌든 Nicholas와 캘빈은 이 연설의 결과로 인해 파리에서 추방당했다.b. 캘빈은 집에 잠시 돌아와, 교회 직분을 사임하고, 잠시 감옥에도 갇혔다가, 고향을 떠나 북쪽으로 여행을 했다. Geneva를 경과하다가 Farel을 만났다.c. Farel과 만나기 바로 직전인 1536년에 캘빈은 「기독교 강요」(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이라는 책을 저술했다1) 이 책은 개혁운동의 기본 조직신학서로서 역할을 했다.2) 이 책은 여러판을 거듭하고, 증보되다가 약 1559년경 최종판이 출간되었다.3) 이 책은 프랑스왕 Francis I세에게 봉헌되었는데, 프로테스탄트 개혁운동의 개혁사상과 교리를 소개한 것이다.4) 이 작품에서 캘빈의 기본사상은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a) 인간의 전적타락(The Total Depravity of Man)∶인간은 원죄로 인해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다 인간 의지도 타락된 본성의 노예 되었다.b) 무조건적 선택 혹은 예정 (Unconditional Election or Predestination)∶인류는 모두 똑같은 운명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일부는 영생을 얻기로 작정되었고, 일부는 유기 되기로 작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작정은 인간의 행위가 원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다(무조건적).c) 제한속죄설(Limited Atonement 혹은 Particular Atonement)∶그리스도는 “예외 없이 모든 사람”(all Without exception)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인종, 신분, 남녀 구별 없이 성부께서 “선택하신 모든 사람”(all without distinction)을 위해 죽으셨다.d)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불택자는 은혜를 거부하는 듯해도, 택자는 성령의 역사로 거듭나게 하는 은혜를 저항할 수 없다.e) 성도의 견인(The Perseverance of the Saints)∶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그 구원을 잃을 수 없다.5) 캘빈의 신학의 핵심은 R.C.의 업적 체계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주권”(The Sovereignty of God)개념이다.6) 캘빈은 강조하기를,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인간의 행위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구원을 강조하므로 “은혜의 교리”(The Doctrine of Grace)라고도 한다.7) 캘빈은 성경의 최종 권위를 강조했다. 전신학체계를 성경연구에 근거를 두고 건설했으며, 성경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를 지극히 강조했다.d. 이 작품은 즉시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고, Farel은 이 젊은 작가에게서 프로테스탄트 견해를 제시, 정의 및 확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았다.1) Farel은 캘빈이 Geneva를 지날 때, Geneva에 남아 개혁운동에 참여하라고 권면 했다. 처음에 Calvin은 주저했다2) 1536년에 Calvin은 Geneva에 정착해서 2년간 Geneva의 개혁을 추진하고, Geneva시민의 신앙생활을 엄격히 감독했다.e. 1538년에 정치적 변혁이 일어나 Calvin은 Geneva에서 쫓겨나서 Strassburg에 3년간 머물게 되었다. Stassburty의 프랑스인 교회의 목사로 봉사하게 된다. 이때 캘빈은 결혼했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4. 두 번째 Geneva에 온 Calvina. 1541년 다시 Calvin에게 유리한 정치적 변혁이 일어났고, Calvin은 자발적으로 Geneva에 돌아와 남은 생애를 보내게 된다b. Calvin은 Geneva를 교회와 국가가 일치된 이상적인 기독교사회로 만들고자 했다c. 1536년에 캘빈은 Geneva신앙고백서를 작성했는데, 1541년부터 이것을 Geneva에 적용하기 시작했다1) 이 고백서는 신앙의 규율과 행습으로 성경의 권위를 지극히 강조했다.2) 캘빈은 주의 만찬에 대해서 루터와 즈윙글리의 중간견해를 취했다. 소위 “영적임재설”(Spiritual Presence)이다.3) Baptism은 설교가 있는 날은 언제든지 시행했다4) 캘빈은 여러 가지 요리문답집을 작성해서, 아이들과 어른들의 신앙교육을 위해 사용했다5. 캘빈에 대한 반대a. Servetus는 3위 1체론을 반대하고, 3위 1체를 부인하는 많은 저작을 냈다. Servetus의 견해에 반대하는 캘빈과 서신 왕래를 했다.b. 결국,Servetus는 Geneva에 와서 체포되었고,1533년에 Servetus는 캘빈의 동의와 함께 Geneva에서 화형 당했다.6. 캘빈은 1559년에 학자들을 훈련하는 학교를 시작했다. 이 학교는 Geneva대학으로 발전했다.a. 캘빈의 영향력은 곧 여러 나라로 확산되었다.b. 그래서 캘빈만이 “국제적 개혁가”로 불리운다.c. 최근에 나온 캘빈에 대한 훌륭한 전기로서 T.H.L Parker가 저술한 John Calvin 이라는 책이 있다.E. 프랑스에서 개혁교 전통의 확산1. 개혁교 교리를 위한 프랑스인들을 위그노(Huguenots)라고 부른다.2. 인문주의 운동은 프랑스에서 강한 영향을 미쳤고, 개혁을 위한 강한 소원을 불러 일으켰다.3. 루터와 즈윙글리의 저작들이 프랑스에서 많이 회람되었다.4. 왕 Francis 1세의 정책은 이 당시에 가변적이었다.a. 비록 R.C 및 교황과 연결되어 있지만, 프로테스탄트 운동을 장려했고, 프랑스 캐도릭 교회를 위협했다.b.그의 사망시에 실질적으로 프랑스 전지역에 개신교도들이 있었다.5. John Calvin은 프랑스에 개신교를 확산시킨 주요인들 이었다.a.그의 저작물이 광범위하게 회람되었다.b.많은 설교자들이 Geneva에서 프랑스로 파송 되었다.6.1555년에 파리에 첫 개혁 교회가 조직되었고, 4년뒤에는 72교회들이 조직되었다. 그들은 전국적 모임을 갖고 신앙고백서와 교회훈현서를 채택했다.a. 이 고백서는 1559년에 갤리칸 신앙고백서(Gallican Confession)로 출간되었다.b. 이 고백서는 주로 캘빈의 저작으로서 개혁 교회 교리를 제시하는 신앙고백서로 왕에게 제출되었고, 종교적 관용을 요구했다.c. 1559년에 개신교 운동은 이처럼 신앙고백서를 공포할 정도로 강력했다.7. 프랑스 개혁교회 황산의 배후 역사a. 갤리칸 고백서가 나올 무렵 프랑스의 중요한 지도자들이 개혁교 신앙을 고백했다.b. Gasper de Coligny(콜리니)는 프랑스의 장군으로서 개신교 신앙을 고백했고, 위그노의 주요 대변인이 되었다.1) 콜리니는 새 젊은 왕 Charles 9서(1560년 등극)에 비교적 큰 영향을 미쳤다.2) 왕의 모친인 Katherine은 매우 강력한 캐도릭 신도였으므로 콜리니가 어린 왕에게 개신교적 영향을 미치는 것을 싫어했다.3) 그러나 프랑스는 나라의 분열을 원치 아니했으므로, 1572년에는 프랑스교회의 일치를 가져오고자 하는 의식적 노력이 있었다.c. 왕의 누이도 강력한 개신교 지도자인 Henry of Navarre(나바르의 헨리)와 결혼하고자 했다. 이 결혼식이 파리궁전에서 개최되기로 했으므로, 많은 R.C.지도자와 개신교 지도자들이 결혼식에 초청되었다.d. 왕의 모친인 Katherine은 콜리니의 생명을 취하고자 음모를 꾸몄으나, 그 시도는 실패했다.1) 그후 그녀는 다른 R.C.귀족들과 함께 콜리니를 포함한 5,000 내지 10,000명의 개신교도들을 학살코자 하는 계획을 세워 실현하고자 했다. 이 대학살은 1572년 8월 24일에 일어났는데, 성바돌로뮤일의 대학살(St,Bartholomew's Day Massacre)라고 한다.2) 젊은 왕 Charles 9세는 그 사건을 인준치 않았으나, 곧 죽고 말았다.e. Charles 9세 사후 왕위쟁탈전이 벌어졌다.1) 개신교 지도자인 Henry of Navarre가 왕위 계승 순위의 다음 차례였다.2) 그러나 R.C. 지도자들은 Henry를 제거코자 했다. 그래서 많은 전쟁이 일어났고, 결국 1589년에 Henry는 왕위를 차지했고 Henry 4세가 되었다.a) 개신교도가 프랑스를 성공적으로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했다. 이상하게도 Henry 4세는 캐도릭 신도가 되었다.b) 그러나 1598년에 Henry 4세는 낭트칙령(the Edict of Nante)을 발표하여 위그노들에게 종교적 관용을 베풀었다.-1685년까지 100년간 이 칙령은 위그노들을 법적으로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1685년에 이 칙령은 철폐되고 위그노들은 프랑스를 떠났다. 이로써 프랑스의 개신교는 고갈되었다. 대부분의 위그노 지도자들은 신대륙으로 떠났다.F. 스콧트랜드에 개혁교 전통의 전파1. 스콧트랜드에서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운동의 배후에 스콧트랜드교회가 있었다.2. 여러해 동안 개신교의 저작물들이 유포되었다.3. 스콧트랜드 개신교 개혁의 두 지도자들a. 가장 유명한 지도자였던 Wishart는 1546년에 R.C.추기경의 명령에 의해 화형 당했다.1) 그후 즉시 그 추기경은 개신교도들에 의해 살해되었다.2) 추기경 살해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성 앤드류성에 피신했고, 젊은 학교 선생이었던 John Knox가 이 무리에 가담했다.b. John Knox1) Knox는 추기경이 살해되던 무렵 개신교 지도자 중 한사람이었다.2) 곧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다.3) Knox는 Glasgow에서 잘 교육받은 사람이었고, 사제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이었는데 왜 사제가 되지 않았는지는 잘 모른다.4) 그는 강력한 프로테스탄트의 견해를 지녔다.5) 성 앤드류성은 프랑스 군대에 포위되었고, Knox는 약19달 가랑, 프랑스 선박의 노예로 일했다.6) 그러나 영국의 영향으로 해방되었고, 영국의 개신교 국왕 Edward 6세가 치리 하던 시절에 영국으로 건너갔다.a) 영국에서 1553년까지 여러개를 지냈는데, 1553년은 R.C.여왕이던 Mary(피의 메리)가 국왕의 보좌에 오른 해였다.b) 그래서 Knox는 대륙으로 건너갔다. Frankfurt에서 얼마간 지내다가, Geneva로 건너가 John Calvin의 영향을 받았다.4. 스콧트랜드 국교회 발전의 역사a. 스콧트랜드는 한편으로는 프랑스의 지배 위협과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의 지배 위협을 받았으나, 둘다 원치 않는 상태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했다.b. 스콧트랜드 여왕이던 Mary가 프랑스왕과 약혼하고 1548년에 프랑스로 건너갔다.1) Mary가 프랑스로 감으로 부재시에 모친이 섭정을 했다.2) Mary가 프랑스왕과 결혼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Scotland가 결국 프랑스에게 완전히 지배당할까 봐 두려워했다.c. Knox는 1555년 스콧트랜드에서 잠시 시간을 보냈는데, 스콧트랜드의 민족주의 독립운동 및 개신교 사상을 전파하는데 주력했다. 이 당시에 그는 여자의 지도자적 위치를 정죄 하는 강력한 서신을 썼는데, 이 서신은 영국의 “피의 Mary”와 스콧트랜드 여왕 “Mary"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후 즉시 스콧트랜드를 떠났다.d. Knox는 1559년에 다시 스콧트랜드로 돌아왔는데, 이때 그는 스콧트랜드를 개신교 신앙으로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다.e. 결국 1560년에 스콧트랜드는 개신교 신앙을 채택하여 스콧트랜드 국교회를 형성했다.1) 스콧트랜드 국교회는 캘빈주의적 신앙고백과 위에서부터 아래로 조직되는 캘빈주의적 교회관을 채택했다. 국가적 차원에서 총회(A General Assembly)가 조직되고, 국가는 교구별(Pariah)로 나뉘고, 교구는 교회별(Church)로 나뉘었다.2) 스콧트랜드 국교회는 스콧트랜드 여왕 Mary의 부재 사에 형성되었다.5. 스콧트랜드 국교회의 생존을 보존하려는 투쟁a. 프랑스왕인 Philip 2세가 죽자,Mary는 스콧트랜드로 되돌아 왔다.이점으로써, 그녀의 부재시에 개신교 국가가 된 스콧트랜드에 R.C.여왕이 돌아온 것이다.b. Mary여왕은 사생활의 난잡함으로 인해 스콧트랜드 국교회가 생존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1) Mary는 John Knox를 설득하여 개신교 신앙을 취소코자 했으나, 실패했다.2) Mary는 곧 영국귀족 Lord Darnley와 결혼함으로, 이제는 스콧트랜드와 영국이 가까워지게 되었다.a) 보좌 계승에 관해서, Mary가 영국 보좌를 계승할 순서였고, 그 다음 순위가∶Lord Darnley였다.b) 따라서 스콧트랜드의 문제는 프랑스에 의한 지배로부터, 영국에 의한 지배 위협으로 옮겨가게 되었다.c) Mary와 Darnley는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그가 스콧트랜드의 James 6세로서, 나중에 영국의 James 1세를 겸하게 된다.3) Mary의 난잡한 결혼 생활a) Mary는 곧 연애 사건에 휘말리고, 결국 그녀의 애인은 살해당한다.b) 또 다른 연애 사건에 연루되는데 이번에는 Lord Darnley가 살해되었다.c) Mary는 그녀의 애인과 결혼했으나, 스콧트랜드인들은 이 결혼을 받아 들이지 않음으로, 그녀는 1567년 보좌에서 쫓겨났다. Mary의 아들이 James 6세로 취임했다. John Knox가 대관식 설교를 했다. 이로써 스콧트랜드 국교회는 공고하게 설립되었다. 1603년에 스콧트랜드의 James 6세는 영국의 James 1세를 겸임하게 된다.4) Mary는 영국으로 피신하여 사실상 여왕이된 Elizabeth에 대항하여, 자신이 영국 국왕으로서 합법적인 계승자라고 계속 주장했다.a) 결국 Mary는 투옥되었다.b) 일부 R.C.교도들에 의해서 Elizabeth를 살해하고 Mary를 등극시키려는 음모가 발각되었다.c) 결국 스콧트랜드 여왕이던 Mary는 1587년 사형 집행되었다.6. 이로써, 스콧트랜드에는 John Knox를 지도자로 하는 캘빈주의적이며 장로 정책을 취하는 개혁교회가 국교회로 되었다.G. 화란(Netherlands)에서의 개혁교 전통의 전파1. 개혁교회는 네덜란드에서 화란 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로 국교화 되었다.2. 화란에서도 정치적, 종교적 분쟁이 작용했다.a. 스페인의 Charles 5세는 네덜란드를 유업으로 받았고, 네덜란드에서 인기 있는 통치자였다. 그러니 1555년에 계승한 그의 아들은 인기가 없었다.b. 곧 스페인의 군대가 네덜란드에 파송되었고, 네덜란드에서는 스페인의 파병에 대해 강력한 반대가 일어났다.c. William of Orange는 스페인 군대에 저항하는 세력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William은 개신교 신앙을 지닌 지도자로 강력한 군대를 지도했다.d.영국도 이 당시에는 개신교를 취했으므로, William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었다.3. 네덜란드는 결국 양분되어 북쪽은 개신교를 취했고, 남쪽은 R.C.을 취했다.(북쪽을 Holland, 남쪽을 Belgium이라 부른다). 이런 분리는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4. 결국 Holland에서는 화란 개혁교회가 국교화되었고, 강력한 개신교 국가가 되었다.a. Leyden대학(the University of Leyden)이 1575년 설립되었다.b.화란은 캘빈주의적 신앙고백서를 채택했다.5. Jacob Arminius와 알미니안 논쟁의 시작a. 알미니안 논쟁이 일어난 곳은 Leyden대학이었다.b. 이 논쟁은 Jacob Arminius의 생애와 사상에 그 기원이 있다.6. Arminius의 생애와 사상a. Arminius는 Leyden대학에서 교육받고 Geneva에서 Beza밑에서 잠시 동안 공부했다.b. 그후 Amsterdam으로 돌아와 목회를 하다가, 1603년에는 Leyden대학의 신학교수가 되었다.c. 그 당시에 캘빈주의 사상, 특별히 전택설(Supralapsarianism)에 회의를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택설이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계획을 세우실 때 선택과 유기를 논리적으로 먼저 예정하신 후에 타락을 예정하셨다는 이론이다.1) Arminius는 전택설을 이론적으로 옹호하는 사명을 맡았다.2) 그는 이 문제를 연구하다가 전택설 뿐만 아니라, 캘빈주의의 다른 이론도 의심하게 되었다.3) Arminius는 캘빈의 5대 교리 중에서 전적타락을 제거하고는 다른 부분은 수정하거나 거부했다. 성도의 견인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입장을 취하였다.a) 무조건적 예정설을 수정하여 예기 예정설을 주장했다.b) 제한속죄설을 부인하고, 일반속죄설을 옹호했다. 따라서 Arminius는 그리스도는 택자뿐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주장했다.c) Arminius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부인했다.d) Arminius의 추종자들은 후에 성도의 견인을 부인했다.d. Arminius는 1609년에 죽었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은 그의 견해를 계속 발전시켰고, 결국 ‘항론서’(Remonstrance)라는 서류를 제출했다.e. 알미니안 주의는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1618년에는 화란의 도시 Dort에서 종교회의가 개최되었다. 모든 캘빈주의교회대표들이 이 회의에 참석했다.1) Dort 회의는 알미니안주의를 이단으로 정죄 했다.(1618)2) Dort 칙령(Canons of Dort)을 발표했는데, 철저한 캘빈주의 신앙고백서이다.f. 알미니안 주의는 종종 핍박받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견해는 지속되었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H. 독일에서의 개혁교 전통의 확산1. 독일에서도 개혁교 신앙은 확산되었고, 독일 개혁교회가 탄생했다.2. 독일은 1618-1648 동안 30년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결국 Westphalia조약(1648)으로 끝나게 되었고, 1555년 Augsburg 종교회의로 인정된 종교외에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3. 결국 독일에는 세개의 합법적 종교가 인정되었다.a. R.C.b. 루터교c. 독일개혁교Ⅲ. 영국 국교회∶영국의 종교개혁A. 서론1. 영국 종교개혁의 핵심은 국왕의 우위권 확립을 위한 투쟁이다.a. 국왕의 권한이 다른 어느 세력보다 우월하다는 사상이다.b. 따라서 영국의 종교개혁은 다른 지역에서는 크게 나타나지 않은 정치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이 그 특징이다.2. 영국의 종교개혁은 실제로 안정권에 들어갈 때까지 150년의 세월이 걸리게 되었다.a. 이점이 독일의 종교개혁과 대조적인 점이다. 독일은 루터가 95개 조항을 게시한 후 불과 10여년만에 안정권에 들어갔다.b. 다른 개혁신앙을 취한 국가들도 독일과 비슷한 양상이었다.B. 영국 종교개혁 운동의 배경에는 이미 선행적인 운동들이 있었다. John Wycliffe로 부터 시작된 Lollard운동, 인문주의의 영향, Henry7세로 부터 시작되어 그의 아들 Henry 8세로 이어지는 민족주의 (nationalism)운동 등이 그것이다.1. Henry 7세는 Spain및 Scotland와 혼인으로 인한 연합을 시도했다.2. Henry 7세 이후로 영국은 상당히 중앙집권화된 국가가 되었다.C. Henry 8세는 1509년에 왕이 되어 1547년 사망시까지 통치했다.1. Henry 8세는 충실한 R.C.교도로서 처음에는 개신교를 반대했다.2. 1521년에 Henry 8세는 루터의 “교회의 바벨론유수”에 대항하여 일곱 가지 성례전을 옹호하는 책을 썼다. 이 책으로 인해 Henry 8세는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았다.3. 스페인 공주인 Katherine은 Henry 8세에게 아들을 낳아 주지 못했다.a. 많은 아이들이 出産時나 영아기에 죽었다.b. 딸 하나만(Mary) 생존하였다.c. Henry 8세는 딸이 영국을 통치할 수 없다고 믿었다. 아울러서 그는 형의 아내와 결혼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내렸다고 주장했다.4. 그럼으로 Henry 8세는 Katherine과 이혼하고,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왕비와 재혼코자 했다.a. Henry 8세는 Katherine과 결혼할 때도 교황의 특별한 재가를 얻었다.b. 따라서 이 결혼을 무효 선언하는 것도 교회의 권한이었다.c. 그러나 Katherine은 결혼 무효 선언을 원치 아니 했으므로, 그의 조카이자 강력한 황제이던 Charles 5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d. 따라서 교황은 결혼 무효 선언을 거절했다.5. 젊은 학자이던 Thomas Cramner는 이 문제는 신학적인 문제이므로, 유수 대학의 학자들의 의견을 들어 형의 부인과 결혼 문제의 유효성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a. Henry 8세는 이 의견을 좋게 생각했다. 또한 Cramner는 학자들로부터 형수와의 혼인은 비성서적이라는 답을 얻어냈다.b.이 사건으로 인해 Cramner는 즉시 저명인사가 되었다.c. 추기경이었던 Wolsey는 교황으로부터 혼인 무효 선언을 얻어 내지 못한 결과 Henry 8세로 부터 배역죄의 죄목을 쓰게 되었다. Wolsey는 자살했거나 아니면 사형 당했을 것이다.6. Henry 8세는 1533년에 Anne Boleyn과 결혼했다.a. 이 결혼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b. Cramner는 Canterbury의 대주교가 되었고(1533), 그는 Henry 8세의 첫 결혼은 “무효”라고 선언했다.c. 얼마 후, Anne Boleyn에서 딸 Elizabeth가 탄생했다.d. 그러나 Boleyn은 간음죄로 정죄되어 목베임 당했다.7. 일반적으로 영국 종교개혁은 1534년에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해 교황은 Henry 8세의 행동을 반대했고, 그를 파문했다.a. Henry 8세는 곧 자신이 영국 교회의 머리라고 주장했다. (수장령)b. 그의 의도는 교황이 더 이상 교회의 머리가 아니고, 왕이 머리라는 뜻이다.8.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Henry 8세는 재상 Thomas Cromwell을 시켜서 수도원들을 차압했고,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대륙의 개신교도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9. Anne Boleyn이 1536년 목베임 당한 후, Henry 8세는 Jane Seymour와 결혼했다.a. 이 결합으로부터 Henry 8세의 아들 Edward가 탄생했다.b. Seumour는 그러나 출산하다가 사망했다.10. 1530년대 후반부에 정치 정세는 급변하였다. Henry 8세는 독일 여자와 결혼함으로써 대륙의 개신교도들과 결합을 시도했다.a. Henry 8세는 그 독일 여자를 그림으로만 보았다.b. 독일 여자가 도착했을 때 Henry 8세는 실물을 보고 실망했다. 그는 그녀를 “독일 암소”라고 불렀다.c. 이 결합도 곧 끝나버리고, 그후 몇번 더 결혼이 있었으나, 별로 중요한 관계는 없었다.11. 이러는 동안에 영국에는 개신교 저작물들이 유포되었다.a. 성경이 영어로 번역되어 공부에 이용되었다.b. Cramner는 개신교를 확산시켰고, 영국은 개신교 신앙이 강조되었다.D. Henry 8세의 아들 Edward는 1547년 왕이 되었고, 1553년까지 6년동안 Edward 6세로서 치리 했다.1. Edward가 즉위할 때는 소년이었고, 섭정자는 대부분 개신교도들이었다.2. 영국은 Edward 6세 치하에서 개신교 국가로 변모되었다.3. Cramner는 1549년에 “공동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를 발간했는데 1552년에 개정되었다. 개정안은 좀 더 개신 교회 되었다.4. 신앙고백서인 “42개조항”이 채택되었다. Cramner가 썼는데 캘빈주의적인 고백서였다.5. 따라서 영국은 전반적으로 개혁교 신앙을 따랐다.6. 이 때는 John Knox가 영국에 머물던 시기였다.E. 1553년에 Edward 6세가 죽고나자 개신교도 계승자가 임명되었으나, 그 대신 Katherine의 딸인 Mary가 영국 여왕의 보좌에 올랐다.1. Mary는 5년간 치리 했는데, 강력한 R.C.교도였다. 왜냐하면 R.C.교회는 Mary의 모친 Katherine을 옹호했고, 만일 그 결혼이 무효라면, 자신의 왕위 계승도 불법이 되기 때문이었다.2. 그러므로 Mary는 영국을 R.C.교회로 돌리려고 하였다.a. 그녀는 추기경단의 대표 앞에 무릎을 꿇고, 영국이 저지른 잘못을 고백함으로써 영국을 R.C.신앙으로 되돌리려 했다.b. 그녀는 개신교도들을 핍박했고, Cramner를 포함한 개신교 지도자들을 사형시켰다.1) 약 200명의 개신교 지도자들을 처형했다.2) 이런 행동의 결과, 그녀는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이 붙었다.3. 수천 명의 개신교도들이 이 때 영국을 떠나, 개신교가 확립된 유럽으로 망명했다.a. 이 사람들은 Mary시대의 추방자들(Marian Exiles)라고 불리었다.b. "Marian Exiles"들은 Mary가 죽고나자 다시 귀국했는데, 만명전보다 더욱 강력한 개신교도들이 되었다.4. Mary는 1558년 사망하고 Elizabeth가 계승했다.F. 보좌에 올라서 1558-1603까지 통치했다.1. Elizabeth여왕 치하에서 영국 국교회는 더 견고히 확립되었다.2. Elizabeth치하의 개혁a. 그녀는 “중용정책”(Via Media)을 취했다. 모든 영국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포괄적인 교회를 세우고자 했다.b. 그녀는 “교회의 최고 여통치자”(The Supreme Governess of the Church)라는 칭호를 얻었다.c. 그녀는 “통일령(Act of Uniformity)을 발표하여, 모든 영국의 기독교인들이 영국 국교회의 신앙과 행습을 따르도록 했다. 통일령은 세 가지 내용을 포함한다.1) “공동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는 모든 영국 교회가 예배시 사용하는 표준 예배 서식으로 삼는다.a) 이 책은 Edward 6세가 펴낸 “공동 기도서” 두 번째 판이었다.b) 이 책을 통해 여왕은 그 시민들에게 예배에서 행동 지침을 주려는 것이었다.2) “39개 조항”(The Thirty Nine Articles)은 신앙고백서로 사용되었다.a) 39개조항은 기본적으로 Cramner가 만든 42개조항을 약간 개정한 것이었다. Cramner의 “42개조항”은 캘빈주의를 따랐다.b) Elizabeth의 ‘39개조항’은 Cramner의 ‘42개조항’에 나타난 캘빈주의를 좀 완화시켰다.c) ‘39개조항’에 의해 영국 여왕은 그 시민들의 신앙 내용을 제시하려는 것이었다.3) 감독정체(Episcopacy)는 영국 국교회의 정체로 채택되었다.a) 감독 정체란 감독에 의한 교회의 치리를 말한다.b) 이 정체를 통해 영국 여왕은 그 시민들이 여왕이 원하는 신앙과 행습을 따르고 있는지 감독하려는 것이었다.3. Elizabeth는 교회 문제 뿐아니라 정치 문제에서도 강력한 지도자였다.a. 1588년에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퇴한 후, 영국은 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했다.b. 교회와 국가가 Elizabeth치하에서 안정되었다.4. 결국 영국은 개신교 국가가 되었고, 다른 지방의 개신교 운동을 지원했다. 그러나 모두가 Elizabeth의 중용 정책에 만족한 것이 아니었다. Elizabeth의 “중용정책”을 반대하고 나온 두 집단을 주목할 만하다.a. 청교도들(The Puritans)∶영국 국교회 내에서 (within) “중용정책”이 반대하는 의도를 나타낸 사람들1)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회를 좀더 순수한 교회(Purify)로 만들고자 했던 사람들로서, “공동 기도서”에 잔재한 로마식 요소들을 제거코자 했다.2) 청교도들은 설교자들이 입는 특별한 가운 착용에 반대했다.3) 청교도들에게 핍박이 오자, 그들은 감독 정체와 영국 국왕의 교회 머리라는 개념까지 반대했다.4) 청교도들 중 일부는 장로 정체를 취하고자 했고, 일부는 회중 정체를 취하고자 했고, 또 일부는 좀 완화된 감독 정체를 취하고자 했다.a) 장로 정체는 교회의 최종 권위가 교회네 소수 집단에 있는 정체b) 회중 정체는 교회의 최종 권위가 전 회중에게 있는 정체c) 감독 정체는 교회의 최종 권위가 한사람에게 있는 정체5) Thomas Cartwright는 가장 유명한 청교도 지도자였다.a) 그는 캠브리지 대학의 학자요 교수였다.b) 모든 신자의 제사장직분, 감독정체의 폐지 및 장로정체 실시들을 주장하는 도발적인 발언으로 인해 그는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추방당했다.6) 캠브리지 대학은 청교도의 본산지가 되었고, 졸업생들은 청교도 교구 설교자나 강의자 및 채플인으로 진출해서 청교도 사상을 확산했다.7) 감독들의 청교도 운동에 대한 태도a) 처음에는 대주교와 주교들이 청교도 사상에 동정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도 추방자의 시절을 겪었기 때문이다.b) 그러나 여왕의 압력으로 인해 청교도 활동을 저지하기 시작했다.8) 청교도들은 많은 청원서를 화람했고, 특별한 모임도 많이 개최했으나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b. 분리주의자들(The Separatists)∶영국 국교회로부터 점차 분리되어, 국교회와는 별도의 분리된 순수교회를 세우려 했던 사람들1) 아주 작은 무리였다.2) 그들은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되어 “순수교회”를 세움으로써, 영국내에 개혁을 이루고자 하는 운동이었다.3) Robert Brown은 가장 유명한 분리주의 운동 지도자였다.a) 그는 Norwich로 가서 1580년경에 분리주의 교회를 세웠다.b) ‘더 이상 지체치 못할 개혁’(Reformation Without Tarrying for Any)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우리는 여왕을 기다렸다. 우리는 감독들을 기다렸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기다렸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리지 말자. 분리된 교회를 세우자. 순수한 교회를 세우자”c. John Greenwood나 Henry Barrow등을 지도자로 하는 다른 분리주의 교회들이 런던에 형성되었다.1) 따라서 분리주의 운동도 다소 확산되었다.2) 물론 이 집단들은 불법적이었다.3) 런던 분리주의 지도자들 (Greenwood와 Barrow포함)이 사형 당했다.4) 따라서 외부로부터 개혁을 시도한 분리주의 운동은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G. Elizabeth여왕은 1603년 사망했고, 스콧트랜드의 James 6세가 영국왕 James 1세로 승계 했다.(1603-1625)1. James 6세는 스콧트랜드 여왕 Mary의 이들로서 스콧트랜드 왕위에 있었다.a. 스콧트랜드는 James 6세 당시 이미 캘빈주의적, 장로정체 취하는 개신교 국가였다.b. James 6세는 영국 국왕의 위치도 차지하게 되었다.c. 그 결과 영국과 스콧트랜드는 같은 왕 치하에 두 종교를 가진 한나라로 합병되었다.1) Scotland∶장로정체 스콧트랜드 국교회2) England∶성공회 감독정체 영국 국교회2. James 1세가 즉위했을 때 청교도들은 그가 모종의 개혁을 이루리라 믿었다.a. James 1세가 Scotland에서 영국으로 가는 길에 청교도들은 James 1세를 만나 소위‘일천인의 청원서’(The Millenary Petition)를 제출했는데, 그들이 원하는 개혁 내용을 담은 청원서였다.1) 이 청원서는 일천명의 청교도들이 서명했다.2) 그들은 여러 가지 개혁을 요구했다.a) 예배 의식의 변화(예배와 ‘공동기도서’의 변경 요구)ㄱ) 십자가 표시의 중지 및 유아세례시 문답ㄴ) 여성의 세례식 주례 중지ㄷ) 성직자 가운 사용중지ㄹ) 설교가 시행됨과 아울러 세례식 시행할 것을 요청ㅁ) 결혼식에서 반지 사용금지(로마의식의 잔재로 보았다)ㅂ) 지나치게 긴 예배의식의 단축화b) 성직자들의 지위변화ㄱ) 성직자들의 합법적인 결혼허용ㄴ) 비주재 성직 제도의 금지c) 성직자들의 월급제도의 변화d) 교회 징계방식의 변화b. James 1세는 답변을 연기하면서, Hampton Court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였다.1) 이 종교회의에서 (청교도들은 거의 참석치 않음) James 1세는 사실상 모든 요구를 거절했다.2) 39개조항, 공중기도서 및 감독정체를 강화, 실시할 것이라 했다.3) 그러나 James 1세는 성경 새번역을 출간했다.a) 각 대학에서 선발된 50여명의 유능한 학자들이 이 번역에 참여했다.b) 이 번역판이 공인된 성경으로서 King James Version이 되었다.c) KJV은 1611년에 출판되었다.d) 처음에는 이 번역판이 대환영을 받지 못했지만, 점차 영어권의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애용되는 번역본이 되었다.5. James 1세에게 청원을 거부당한 청교도들은 영국을 떠나거나, 다른 지역에서 새로운 조직을 형성하거나 했다.a. 많은 청교도들은 신대륙으로 건너왔고, 신대륙 최초의 영국 식민지인 Jamestown식민지를 건설했다.1) 이 식민지는 1607년에 건설되었다.2) 청교도들은 청교도적인 요소가 섞인 영국 국교회를 Jamestown에 이식했다.3) Jamestown 식민지의 지도자들은 사실상 청교도적 신앙관을 지녔다.b. 청교도 중 두 번째 그룹은 영국국교회와 분리되어, John Smith의 지도아래 Gainsborough에서 Amsterdam으로 이주했다.1) 이 집단은 영국 분리주의자들 중 가장 주요한 집단이었다.2) 이 집단은 영국내의 증가되는 핍박으로 인해 화란 Amsterdam으로 이주했다.3) Amsterdam에서 그들의 회중으로부터 일반 침례교회가 발생했다.c. 청교도 중 세번째 그룹은 William Brewster와 John Robinson의 지도아래 Scrooby에서 조직된 집단이었다.1) 원래 이 집단은 Gainsborough그룹과 한 집단이었으나, 집단이 커지고 핍박이 증가하면서 분리되어 Scrooby로 갔다.2) 이들은 영국 (즉 Scrooby)에서 화란 Leyden으로 이주했다.3) 1620년에 이 Scrooby 집단은 신대륙에 와서 Plymouth에 정착하면서 미국땅에 최초의 회중교회를 형성했다.a) 이들이 Mayflower호를 타고 화란 Leuden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왔다.b) 이들이 Pilgrim fathers로서 pilgrim church를 구성했다.d. 요점은 청교도들과 분리주의자들은 순수한 교회에서 신앙의 자유를 행사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순수한 교회란 로마적요소가 없는 교회를 말한다.4. 1620년 후반부 James 1세를 계승한 Charles 1세 치하에서 문자 그대로 수천명의 청교도들이 신대륙을 향해 떠나갔다.a. 많은 청교도들은 뉴잉글랜드지방에 정착해서 회중교회를 세웠다.b. 이 현상을 “청교도들의 군집”이라고 부른다.5. 1616년에 영국에서 Henry Jacob은 London에 반분리주의교회(Semi-Separatist of Independent)를 세웠는데, 이로부터 특수 침례교회와 회중교회들이 탄생했다.H. James 1세의 후계자인 Charles 1세 치하의 영국(1625-1649)1. Charles 1세는 R.C.을 옹호했다. 그러나 그는 영국국교회를 인정하면서 청교도들과 분리주의자들을 강력하게 저지했다.2. 교회 문제에 대해서 Charles 1세의 고문은 William Laud였다.a. Laud는 Oxford의 St. John대학 졸업생으로, 여러해 동안 St. John 대학의 학장이었다.b. 그는 곧 Oxford 대학 총장이 되었다.c. 그는 결국 London 감독을 거쳐, 1633년에 Canterbury대주교가 되었다.d. Laud는 청교도들을 무시하고, 1620년 후반부터 1630년대에 핍박정책을 시작했다. 약20,000명의 청교도들이 신대륙으로 떠났다.3. Charles1세는 국회도 해산하고, 홀로 11년간 통치했다.a. 그는 스콧트랜드를 영국국교회를 따르도록하는 정책을 썼다.1) 스콧트랜드는 캘빈주의적 장로교회를 국교회로 하고 있었다.2) Laud의 고문을 받은 Charles 1세는 스콧트랜드를 영국과 완전히 합병된 한나라로 만들고자 하면서, 영국국교회를 강요했다.3) 스콧트랜드 사람들이 반발하면서 내란이 일어났다.b. Charles 1세는 필요한 전쟁자금을 동원하기 위해, 의회를 재소집했다.4. 이때 재 소집된 의회는 성공회보다는 청교도적이었다.a. 따라서 이때 의회 지도자들은 ‘엄숙한 동맹과 협약’(Solemn League and Covenant)라는 조약을 스콧트랜드와 체결했는데, 성공회를 폐지하고, 영국을 장로교회화 한다는 내용이었다.b. 내란은 Charles 1세의 군대와 스콧트랜드 및 의회의 연합군간에 벌어졌다.1) Laud는 1645년 투옥되어 사형집행 당했다.2) 결국 왕당파가 패하여 왕 자신도 1649년 목베임 당했다.3) 내란중에, 영국 Westminster에서 화합을 가진 교회 지도자들은 장로교적, 캘빈주의적 신학을 가진 정부를 세우고자 했다.I. Obiver Cromwell의 군사통치기 (1649-1659)1. Charles 1세 처형 후 영국 지도자는 Obiver Cromwell이었다.a. 영국 공화정치 (English Commonwealth)기간에 영국을 통지했다.b. Cromwell은 “왕국의 섭정자(Lord Protector)"라는 칭호가 붙었다.2. 많은 청교도들은 장로교회를 영국국교회로 삼고자 했고, 스콧트랜드 사람들도 이에 동조했다.3. 군대가 싸우고 있는 동안에, 한 무리의 성직자들이 이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서 Westminster에서 회합을 가졌다.a. 그들은 교회 규율, 교회 예배에서 및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서인 ‘Westminster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다.1) 이 고백서는 “언약 신학”을 포함한 캘빈주의적 고백서이다.2) 이 고백서는 장로교회와 회중교회의 신앙고백서가 되었고, 후에 약간의 수정을 거쳐 특수 침례교회의 신앙고백서가 되었다.b. Cromwell군대의 대부분은 침례교도의 회중 교도였다. 그들이 자유를 위해 투쟁할 때, 장로교인들은 국가교회를 세우고자 했다.4. Cromwell은 국가교회가 아니라, 광범위한 관용정책을 원했다.a. 따라서 의회에서는 장로교회를 국가교회로 원하는 사람들이 제거되었다.b. R.C.성공회 및 일부 과격집단을 제외한 나머지 교파에 대해서는 관용하는 관용정책이 결국 채택되었다.1) 그 결과 많은 종교집단들이 형성되었다.(퀘이커, 레벨러, 디거 등)2) 이 관용정책에 의해 일반 침례교회와 특수 침례교회는 이 시기에 번창하였다.5. Cromwell의 말기a. 그러나 크롬웰은 효과적인 국가 정책이나 교회 정책을 수립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계승자도 갖지 못했다.b. 그는 1659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이 1년간 통치했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왕정복고를 원하게 되었다.J. 영국왕 Charles 2세의 통치 (1660-1685)1. Charles 2세는 광범위한 관용정책을 약속했으니, 곧 국가교회를 회복하라는 압력을 받게 되었다. 영국국교회의 회복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극심한 핍박을 받게 되었다.2. 1662년에 2,000명의 성직자들이 해임되었는데, 이 사건을 “대축출”(The Great Ejection)이라고 한다.a. 이 성직자들은 장로교회와 회중교회를 구성하였는데, 따라서 장로교회와 회중교회는 국교회와 별도로 존속케 되었다.b. 이들은 대부분 청교도들로서 국교회내에 존속하면서 개혁을 원했던 사람들이었다.c. 그러나, 대축출 이후, 성공회를 국교회로 한 영국은 성공회 외에도 세 중요한 교파가 존재하게 되었다.(장로교, 회중교, 침례교)3. Charles 2세는 국교 반대자들에 대해 몇 가지 법령을 제정하고, 다수를 투옥했다. 이 핍박이 국교 반대자들을 더욱 가깝게 해 주었고, 그들은 대부분 약간 수정된 Westminster신앙고백서를 채택했다.4. 잠깐동안, 관용기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Charles2세가 R.C.을 관용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a. 사실상 Charles2세는 은밀한 R.C.교도였다.b. 임종시에 그는 R.C.신앙을 고백했다.c. 그러므로 잠깐동안의 관용정책에 대해 아무도 감사하지 않았는데, Charles2세의 숨은 동기를 알았기 때문이다.5. Charles 2세는 1685년 사망하고, James 2세가 계승했다.K. James 2세의 치리기 (1685-1688)1. James 2세는 공개적인 R.C.교도로서, R.C.국가와 공모하여 (프랑스, 아일랜드, 스페인 등)영국을 R.C.으로 돌리려고 하였다.2. 이로 인해 그는 “명예혁명”으로 축출되고, 그 딸 Mary와 사위 William of Orange가 영국의 공동 왕이 되었다.3. James 2세는 Ireland로 피신했다.L. Orange공 William과 Mary의 치리(1689부터)∶1689년에 William과 Mary는 신교 자유령을 반포하고, R.C.제외한 모든 집단을 관용했다.1. 신교 자유령은 완전한 종교 자유가 아니라 관용을 보장했다.2. 관용에는 많은 제한이 따랐다.(선거권 금지, 공무원 임용금지, 군대 입대금지, 대학 입학금지). 이 정책은 1830년까지 지속되었다.제 9 강 반동 종교개혁( The Catholic / Counter Reformation)1. R.C.은 개신교 종교개혁에 대하여 많은 우려를 하였다. 특히 Paul III(1534 - 1549)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있었다.a. Paul III는 측근 인물 가운데 개신교와 화합을 촉구하는 인물들도 소수 있었으나, 대부분은 강한 탄압정책을 권고하였다.b. Paul III는 탄압정책을 취하고자 결단하고 1542년에 이단심문소(Inquisition)를 우주적인 규모로 재조직하였다. 이단심문소는 이미 Spain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단심문소의 목적은 R.C.신앙에서 이탈했거나, 이탈할 우려가 있는 사람들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이단으로 정죄된 사람은 투옥되거나, 사형 당했고, 재산은 몰수되어 대중에게 경매되었다.2. 반동 종교개혁의 두 번째 측면은 Jesuits(The Society of Jesus 예수회)의 조직이었다.a. Jesuits는 반동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기관이 되었다.b. Ignatius Loyola는 스페인 귀족 출신으로 Jesuit의 중심 사제가 되었다.     Loyola는 군인이었으나, 1521년 부상을 입었다. 회복기에 그리스도의 삶. 성자들의 생애. 기독교 문헌 등을 읽으면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 자기의 삶을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c. 1520년대 후반부에 Loyola는 파리대학에 입학하여 추종자들을 모아 군대식으로 조직하였다. 이로써 Loyola는 Jesuit의 창시자가 된 것이다. 이 모임은 The Society of Jesus라고, 교황 Paul III에 의해서 1540년에 인준되었다.d. Jesuit는 절대 순종, 선교, 교육을 강조하면서 급속히 확산되었다. Jesuit는 또한 설교, 고해, 조직의 결성, 전 세계에 선교사 파송을 강조하였다.    Francis Xavier는 Jesuit초기 멤버로서 선교사로 파송되어 인도, 일본 등지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중국에 들어가려는 계획을 실현치 못하고 사망하였다. (목적이 정당하면 수단은 아무래도 좋다 ?? )e. Loyola는 영적 훈련(Spiritual Exercises)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모든 회원들에게 적용하였다. 예수회 가입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영적 훈련 과정을 겪어야 했다. 이 프로그램은   4주 동안에 4과정으로 구성되었다.   자신의 죄에 대한 묵상,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묵상,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묵상,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에 대한 묵상이 그것이다.f. 이 프로그램 안에는 교회라는 범주 안에서 사고하는 훈련도 포함되었다. 교회의 판단에는 절대 순종하며, 사적인 판단은 엄금되었다. 교회가 진리라고 선언한 것은 무조건 진리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되었다. “모든 면에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직급적인 교회(R.C.)가 검정색을 흰색이라고 정의를 내리면, 그것을 흰색으로 받아들일 만반의 태세를 항상 갖추고 있어야 한다.”g Jesuits는 즉시 교황과 교회의 오른팔로 간주되기 시작하였다.3. 반동 종교개혁의 세 번째 측면은 Trent종교회의의 소집이었다.a. Trent라는 이름은 이 종교회의가 개최된 Italy의 마을 이름이었다. 교회의 대분열기(1378-1415) 기간에 정기적으로 종교회의를 개최하자는 의견들이 제시된바 있었으나, 종교회의가 개최된 적은 없었다. 종교회의의 권위와 교황의 권위(Conciliarism vs. Curialism)간에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교황은 종교회의 개최를 주저했던 것이다.b. Paul III는 마지못해 Trent에서 종교회의(general council)를 개최하였고, 1545년에 시작되어 간헐적인 모임을 가지면서 1563년에 종결되었다. (교황 Pius4세).c. 투표권은 주교들이나, 수도원 종단의 대표들만이 가지고 있었고, 이태리인들이 회의들을 주도하였다. 이태리인들은 교리적인 문제를 논의하기 원했고, 스페인 사람들은 행정적인 개혁을 논의하기 원했다. 타협적인 방법으로 교리적인 문제와 행정적인 개혁을 번갈아 논의하기로 결정하였다.d. 모든 회의 결과들은 교황의 인준을 받도록 되어 있었고, Jesuit들은 종교회의마다 활동적으로 참여하였다.e. Trent종교회의의 최종 결정은 다음과 같다.  1) 교리적인 면   a) Trent는 전반적으로 중세 신학을 재확인하였다. (半 펠라기우스주의)   b) 성경과 전통은 진리의 원천으로서 동등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었다.(외경 포함)   c) 이신득의를 정의하되 선행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었다.   d) 7성례전은  고수하였다. (비록 더 상세히 정의되기는 하였어도...)   e) 결론적으로 개신교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하여는 전혀 실질적인 고려가 되지 못하였다.  2) 행정적인 개혁의 면   a) 교역자들의 훈련이 강화되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b) 성직 겸임제도가 제한되었다.   c) 성직자 독신 제도는 더욱 강화되었고, 교역자에 대한 도덕적 감독이 강화되었다.4. 반동 종교개혁의 4번째 측면은 금서목록(Index)을 작성하여 신도들의 독서를 지도하고자 한 것이다. Trent종교회의 때부터 제시되어 1571년에 확정되었고, 같은 해 禁書省(금서성, Congregation of the Index)이 조직되었다.a. 禁書省은 신도들이 읽거나, 출판할 수 있는 책들을 승인하는 교황청 산하 기관이었다. 승인된 책들은 주교의 축복을 받았으며, 교회를 비판하거나, R.C.교리와 다른 내용을 가르치는 책들은 금지되었다.b. 이 모든 과정은 개인의 독서를 통제하려는 시도였다.5. 이단심문소, Jesuits, Trent종교회의, 금서목록 등을 통하여 R.C.는 자신들의 교리를 더욱 공고히 하고, 행정적인 문제를 개선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토 확장을 꾀하기도 하였다.

 

■ 宗敎 改革史                  목사 : 서영호                목회자 양성원                종교개혁사문제집       1. 서      론1-1 종교개혁이란 무엇인가?종교개혁(the Reformation)이란 기독교 역사상 16-17세기간의 기독교회 개혁운동으로서,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해석, 새로운 교리의 출현, 교회체제의 변혁 등을 포함한 개혁운동이다. 이 개혁운동은 교회뿐 아니라 유럽사회구조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1-2 종교개혁사의 구분은 어떠한가?  (1) 종교개혁이전 선구자들 시대(1350-1500)  (2) 종교개혁시대(1500-1650) : 개신교의 출현  (3) 반동 종교개혁 또는 카톨릭 종교개혁(1500-1650)등으로 대별 할 수 있다.1-3 개신교의 종교개혁 운동을 대별하라  (1) 루터파 종교개혁(the Lutheran Reformation)  (2) 개혁파 종교개혁(the Reformed Churches)   (3) 재세례파 종교개혁(the Anabaptists)1-4 종교개혁을 지역별로 구분하라  (1) 독일 종교개혁  (2) 스위스 지방 종교 개혁  (3) 영국과 스코트랜드 종교개혁  (4) 기타 각국의 종교개혁운동    Ⅱ 종교개혁 선구자 시대 (the Age of Forerunners of the Reformation)Ⅱ-5 종교개혁 선구자 시대란? (제15세기)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루터(Luther)가 95개조를 윗텐베르크(Wittenberg) 교회 문에 붙인 날을 그 시발 일로 삼으나 루터의 종교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중세 암흑말기 즉 1350-1500년 사이에 걸쳐 서구 기독교 사회의 부패와 이를 개혁하려는 내적 열망의 결과로써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선구시대에 이미 종교개혁운동의 씨가 뿌려지고 점점 자라나고 있었다.   선구자시대는 대체로 르네상스 (문예부흥, Renaissance) 期와 일치하며 학자에 따라서는 이 시기를 종교개혁직전시대 또는 중세와 근세의 중간기라 칭하기도 한다.Ⅱ-6 이 시대의 특성은 무엇인가?    (1) 국민국가의 등장으로 중세의 보편적 세력의 하나인 황제권이 약화되었다.   (2) 또 다른 중심세력인 교황권이 “ 교회의 바벨론 포로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1309-1377)이후 약화되었다.   (3) 수도단의 몰락   (4) 지적인 고등 스콜라 철학이 쇠퇴하고 의지적이며 행동적인 후기 스콜라철학이 성하였             다.   (5) 파리대학을 중심으로 한 교회법(canon law)의 발달로 “ 공의회운동 " (the conciliar               movements)이 일어났다.   (6) 교회생활의 타락(면죄부 판매)   (7) 개혁운동이 일어남   (8) 과학의 발달       따라서 이 시대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새로운 종교생활의 요구 즉 개혁에 대한 열             망이 시대적 특징을 이루고 있다.  A  <교회의 타락과 신앙생활의 침체>Ⅱ-7 아비뇽(Avignon) 교황청의 상태는 여하?   (1) 교황 보니파스 8세(Boniface Ⅷ)가 불란서 왕 필립 4세(Philip Ⅳ)와 투쟁 끝에 살해당하고,         교황청이 지금의 불란서 아비뇽으로 옮겨온 후 교황 클레멘트 5세(Clement V) 이후 아비         뇽 교황들은 불란서 국왕에게 사실상 복속되었다.  교황은 정치세력으로서 무력함을 드러         내었다.   (2) 아비뇽 교황청의 교황들과 추기경들은 대체로 보편교회(Universal Church)의 지도자로써          합당치 않은 사치와 방종한 생활을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교회의 재정 상태는 악화되고         부재성직(absenteeism), 탐욕, 이권 투쟁 등 전반적 부패상을 나타내었다.   (3) 아비뇽 교황들은 정치세력이 약한 독일제국에 대하여 재정적, 정치적으로 손해를 끼치고          고자세를 취하였다.Ⅱ- 8 敎會稅의 가중에 대해서 말하라   배경 : 십자군 원정 이후 서유럽사회는 화폐경제시대로 발전하게 되었다.   교황청은 서구사회에서 최초로 금력을 저축하는 기관이 되었다. 로마의 교황 영지를 잃어          버린 아비뇽 교황청은 교묘한 교회세 징수제도를 고안해 내었다.       교황청의 수입원은?   (1) 교황 영지의 수입   (2) 피터스 페니(denarius S petri) : 영국 및 북구, 동구의 여러 나라 각 가정에서 일년에 한          페니를 교황청에 납부케 함.   (3) 수도원, 감독교구에서 받는 세   (4) 성직 임명세- (a)첫 수입세 (b)대주교 성의세(pallium money)   (5) 각 교구의 전리품 취득세.   (6) 각종 특혜에 대한 세금등 그 외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Ⅱ-9 수도단의 타락은 어떠하였는가?     대 수도승단인 베네딕트파 수도원(Benedictine order), 클루니 수도원(Cluny order)등은 치부       와 안일에 빠지고, 탁발수도승단(Mendican Friars)들도 침체에 빠진 채 특별한 활력을 보이       지 못하였다.     특별히 수도원, 수녀원들은 나태, 사치, 부정의 타락상을 보였는데 점차 세속권력가들이 자녀       들의 소일처, 은신처로 삼았고, 심지어는 왕들이 첩이나 첩의 소생들을 위해서 수도원과 수       녀원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 북구 화란에 공동생활 형제단(the Brethren of Common Life)의 새로       운 형태의 종교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Ⅱ- 10 성직자의 타락은 어떠하였는가?     성직자(聖職者)들의 축첩(蓄妾), 성직(聖職)매매(賣買)등이 성행하고, 대주교들은 성직은 돌보       지 않고 세속군주와 다름없이 행세하고, 수많은 사생아들이 교회의 직분을 맡아 호사로운 생       활을 하였다. 부재 성직자들이 교회직분을 몇 개씩 차지하여 그 수입만 취하고 직무는 하급       신부들이 대리하였다.Ⅱ-11 서방교회의 대분열(the Great Schism 1378-1415) 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아비뇽 교황의 마지막이 되는 그레고리 11세(Gregory XI)는 모든 기독교인의 소원대로           교황청을 로마로 옮겼다.(1377) 그러나 그의 사후 로마 군중들의 압력으로 이태리 출신의         교황 우르반 6세(Urban VI)를 선출하게 되자, 대다수의 불란서 출신 추기경들이 불만을 품        고 아비뇽으로 회귀하며 불란서인 클레멘트 7세(Clement Ⅶ)를 선출하였으며, 이리하여 서        방 교회에는 2명의 교황이 서로 대적하게 되었다.  이것을 각각 아비뇽교황, 로마교황이라        부른다. 이에 따라 불란서, 스페인, 스코트랜드, 독일 일부는 전자를 : 중북부 이태리, 영국,        대부분의 독일, 스칸디나비아, 보헤미아, 포르투갈 등은 로마교황을 지지하여 서유럽 교회와        국가들이 분열하였다.Ⅱ-12 공의회 운동이란 무엇인가?     제14세기 서방교회의 대분열로 인하여 정상적인 교회생활이 불가능하여지고, 교회와 사회의       죄악(罪惡)을 제거할 능력이 없어지자, 파리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자들(교회법학자)과 경건한       성도들이 공의회를 열어서 교회분열과 타락을 시정하려 하였다.     이미 1325년에 “평화수호” (Defensor pacis)란 논쟁서에서 “공의회가 교황위에 있음”을 천명       한 이후, 공의회 운동은 파리대학의 교수 피터 데일리(Peter d' Ailli 1350-1420)와 쟝 제르       송(Jean Gerson, 1363-1429)에 의하여 교회개혁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15세기에 열린 공의회는 (1)피사(the Council of Pisa, 1409) (2)콘스탄스(the             Council of Constance, 1414-1418) (3)바젤(Basel, 1431-1449) 등을 들 수 있다.Ⅱ-13 피사 공의회의 주요사항은 무엇인가?     피사 공의회는 1409년 수백명의 추기경, 대사교, 대주교, 주교, 수도원장, 신학자, 대학의 대       표자 및 왕과 군주들이 참석하였으며 현존 아비뇽교황과 로마교황을 폐위시키고 새교황을        선출하였다.     이 공의회의 주역은 파리대학교수인 피터 데일리와 쟝제르송이며 새교황으로 알렉산더 5세       (Alexander V)가 선출되었으나 곧 요한 23세가 그를 이어 교황이 되었다.  이것을 피사 교       황계통이라 부른다.  그러나 다른 두 교황이 사임을 하지 않으므로 그 당시 생존한 교황은 3       명이나 되었다.Ⅱ-14 콘스탄스 세계공의회의 주요사항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 공의회를 세계공의회(Ecumenical Council)로 간주한다.     독일왕 시기스문트(Sigismund)와 피사계통 교황 요한 23세(John XXⅢ)에 의하여     1414년 소집된 공의회로써     과제 : (1)교회분열해결 (2)위클리프(John Wycliffe)소요의 진정 (3)교회개혁이었다.     결정사항 : (1) 요한 23세 교황을 폐위시키고 로마교황과 아비뇽교황을 폐위시킨 다음 새로                      마르틴 5세(Martin V)를 교황으로 선출하여 대분열(1378-1415)을 종식 시                       킴                (2) 교회내의 여러 가지 악을 근절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성직매매, 교황청의 세                      금징수, 한 사람에게 수개의 승록(benefice)을 주는 일을 금하는 금령 발표                (3) 공의회 소집에 관한 결정 : 차기는, 5년후, 3차는 7년후, 4차는 10년후, 그 이                     후는, 매년마다 공의회를 소집. 공의회의 권한은 예수님에게서 직접 나오며,                      교황이라도 신앙과 분열과 교회개혁에 관한 제반사항의 결정에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함.                 (4) 1415년 요한 후스(John Huss, 1369 -1415)를 이단으로 정죄하여 화형 시킴.Ⅱ-15 바젤 세계공의회 결정 사항?(The Council of Basel 1431-1449)  로마카톨릭 교회에서 제17차 세계공의회로 인정하는 바젤공의회는 교황유진 4세(Eugene Ⅳ)가    1431년에 이 공의회의 소집이 합법적임을 선언하고  (1) 후스파의 온건파와의 타협  (2) 교회개혁으로써 성직매매를 금하고 성직자 독신강화 교회경내에서 오락을 금하였다  (3) 반(反)교황적 결정 : 교황의 고위 성직자, 임명권, 면죄부 발행권, 교황선출 및 추기경                         선출을 규제하려 함.                          그 결과 영국과 불란서는 자국내(自國內)교황의 세금 징수를 제한                        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Ⅱ-16 공의회 운동의 실패와 교황권의 회복에 대하여 말하시오      공의회 운동을 주장하는 과격한 이들이 1439년 바셀공의회  중에 공의회가 신앙문제에    대한 최고 권위임을 천명하는 교령을 발표하고, 또 다른 교령으로 교황 유진 4세를 폐    위시킨 후 펠릭스 5세(Felix V)를 새교황으로 선출하였다.      유진 4세는 1437년 이미 공의회의 소수를 이태리로 옮겨 1438년에 페라라(Ferrara)1439    년에는 플로렌스(Florence)에서 공의회를 소집하고 동방교회(희랍정교회)와 연합칙령을    선포하여 교황권의 위신을 세웠다.      펠릭스가 자진 사퇴하고, 유진 4세가 사망한 후, 바젤 공의회는 니콜라스 5세(Nicholas    V)를 정당한 교황으로 인정하였다.(1449)      다시 서방교회는 단일교황의 지도하에 들어가게 되고 교황권을 통제하려던 과격한 공    의회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따라서 무능한 교황권을 억제하고 공의회가 종교개혁의    주체로 기독교신앙 회복 운동을 일으키려던 시도는 실패가 된 셈이다.Ⅱ- 17 국본조칙(國本調勅, the Pragmatic Sanction of Bourges 1438)이란 무엇인가?    교황유진 4세가 바젤공의회를 이태리로 옮기려하자 불란서 국왕는 국본조칙을 발표하고 자국에서 (1)공의회의 우위성 (2)성직의 첫수입 헌납금지 (3)고위성직의 결원시 교황의 임명을 반대하고 선거에 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로 인하여 교황청은 불란서로부터 수입원이 줄어들고 교황권이 현저하게 약화되었으며 불란서 교회는 사실상 국민교회(National Church)를 지향하게 되었다.Ⅱ-18 제15세기 말 교황들의 타락상에 대해서 말하시오.    통일된 서방교회의 교황 니콜라스 5세(1449) 때부터 종교개혁 직전까지의 교황들은 대개가 세속적 인문주의(secular humanism)의 영향을 받았다.  복음의 이상과 전연 거리가 먼, 사치와 허영, 심지어 15세기 말에는 르네상스시대의 악풍에 물들어 도덕적 타락의 정도는 최악의 상태였다.  대체로 교황 식스터스 4세(Sixtus Ⅳ, 1471-1484)로부터 교황들은 로마에 새로운 건물, 거리를 꾸미고, 이교적 학문과 예술을 권장하고 세속문화 건설에 치중하였다. 이것을 인문주의 교황들이라 한다.(humanist popes)    도덕적으로 타락한 예는 인노선트 8세(Innocent Ⅷ, 1484-1492)의 경우 신부가 되기 전에 결혼하였고 사생아도 두 명이나 있었으며, 자금 충당을 위하여 성직을 매매하고 또 새로 신설하기도 하였다.  악명높은 알렉산더 6세(Alexander Ⅵ, 1492-1503)는 원명이 로드리고 보르기아(Rodrigo Borgia)인데 수많은 성직으로 호사한 생활을 하고, 세번이나 남의 아내가 되었던 여인을 첩으로 두어, 네 자녀를 낳고 또 다른 첩을 취하여 자녀를 두고, 그들에게 권세와 부를 주었으며, 그중 한 아들을 대주교, 추기경으로 만들었다. 그가 교황이 된 것도 추기경들에게 뇌물을 준 연고라 한다.    세속군주와 같이 정치에 전념하였고 친가의 이익만 도모하였다.Ⅱ-19 제15세기 세속 인문주의(secular humanism)이란 무엇인가?    인문주의는 르네상스期의 문화적 이념으로써, 교회의 전제로부터 인간의 독립을 주장하고 인간의 독자적 능력을 확신하고 모든 전통적 가치관을 비판하여 새로운 인간 중심의  문화 건설을 표방하였다.    인문주의자들은 “현세의 발견” “자연과 인간을 발견하여” 과학적 경험적 연구와 관찰을 중시하고, 금욕주의와 중세 스콜라철학을 반대하였다. 그들은 관능의 쾌락을 긍정하고(예 :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퇴폐풍조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기독교를 정면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모든 인간사에서 신을 배제하여 구속의 필요성, 성육신, 영생등을 부정하였다.    특별히 인문주의자들은 대학교수 정부의 고위 관리, 법률가, 외교관의 실무자계급이 되었으며 실용학자들로써 새시대의 역꾼이 되었으며, 대표자는 페트라르크(Petrarch, 1304 -1374), 보카치오(Bocaccio, Giovanni, 1313-1375)등이다. 모델을 고전(로마와 희랍)에 두고 인문과학을 연구하였으며 서구 문화의 근원(ad fontes = to the origins)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문화를 이루려 하였다.    이러한 인문주의의 발달의 원인은    (1)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등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2) 십자군 원정으로 산업 발전    (3) 교회와 사회의 침체    (4) 동방교회와 동방문화의 유입으로 고전연 구가 활발하였기 때문이다.B.<회복의 세력 : 신비주의자들>Ⅱ-20 14세기말-15세기 여(女)신비가들에 대해서 말해보시오.   (1) 시에나의 카다린(Catherine of Siena, 1347-1380) : 14세기말 이태리의 성녀로서, 자       기 부친 집에서 개인적 신앙생활을 하였다.       가난한 자와 병자를 돕고,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자타가 생각하였다.       우르반 6세와 프로렌스시(市)를 화해시키고 아비뇽에 있던 교황을 로마로 돌아오게 하     는데 공헌하는 등 활동가로써 정치 종교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침.       명상, 기도, 환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배에 주력함. 당대 신앙생활에 활력을 주게     되었다.   (2) 쟌 다크(Jeanne d' Arc 1412-1431)      전적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께 헌신하였다. 불란서 왕위 계승전(백년전쟁)에서 불란서    왕 챨스 7세(Charles Ⅶ)를 왕위에 올리는데 도움을 주고 오르레앙(Orelean)성의 포위    를 푸는데 공헌함.  나중에 영국군에게 잡혀 이단으로 화형 당함.      그도 침체한 시대에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었다.Ⅱ-21 실제적 신비가(Practical mystics)들은 누구인가?    (1) 피터 데일리 : 기도와 명상에 힘쓰고 이것에 관한 책들을 써서 영적 지도를 함.        파리대 총장, 신학자, 공의회 운동의  대표적 지도자.    (2) 쟝 제르송 : 데일리의 제자, 파리대 총장, 콘스탄스 공의회의 주역,       건전한 신비주의를 제창함. 부정적 신비주의(negative mysticism)에 반대하고 이성과     감정을 조화롭게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 남구 신비주의의 특색인 도덕적 성        격을 강조하였다.       북구의 라이스부룩(Ruysbroeck)을 범신적이라 비난하였다.    (3) 쿠사의 니코라스(Nicholas of Cusa, 1401-1464)       수도원 개혁 공의회 운동에 적극 참여 하였으며 주교 및 추기경이 되었다.       신(神) 경험은 필설로 경험할 수 없다하여 유명한 “docta ignoratia : 현명한 무지        (learned ignorance) 란 말을 남겼다.Ⅱ-22 독일신학(Theologia Germanica)이란 무슨 책인가 ?    독일신비주의는 에카르트(Eckhart 1260-1327), 수소(Suso, Henry 1295-1366) 하나님의 친구들(Friends of God)에 의해 점차 발전하였는데, 익명의 “하나님의 친구파”에 속한 사람에 의하여 “독일신학”이 저술되었으며 실제적 영적생활에 대한 문답식 지도서이다.    나중에 루터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Ⅱ-23 “신경건” (New Devotion)신앙 서적들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화란, 북불란서지방을 중심으로 신비주의자 라이스부룩(Ruysbroeck, 1293 -1381)의 영향으로  신경건 운동이 일어났다.    “공동생활 형제단” (the Brethren of the Common Life),    "공동생활 자매단“ (the Sisters of the Common Life) 그리고 “빈데샤임집단”(the Congregation of Windesheim)이 그 중추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환상적 신비주의를 배격하고, 명상과 기도를 위하여 성경과 기독교회의 위대한 저작들을 읽고 발췌하여 기도에 사용하였다. 여기서 많은 실제 신앙생활을 위한 경건서적이 나왔는데 그 중에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 Kempis)의 “그리스도를 본받아”(lmitation of Christ) 라는 책이 유명하다.Ⅱ-24 공동생활 형제단이란 무엇인가 ?    제라드 그로트(Gerard Groote / Gerard the Great 1340-1384)와 프로렌스 라드윈    (Florentius Radewijns 1350-1400)의 지도하에 생긴 평신도 신앙생활집단으로써 남녀가 나뉘어져 있으며   평신도로써 수도생활원리를 매일생활에 적용하여 공동생활을 하였다.    손으로 일하고 수입은 공동소유로 하였으며 매일 죄를 서로 고백하고 신앙서적을 읽고 전사(轉寫)하는데 힘썼다. 주로 독일과 네델란드등 북구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프로렌스 라드윈은 “빈데샤임 집단”을 창설하고 수도원 개혁운동을 하였다.  1419년에는 20개의 수도원이 이 집단에 속하였다. 이곳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후세 종교개혁에 영향을 미쳤다.Ⅱ-25 15세기 독일 신비주의 특색은 무엇인가 ?    음울하고 자기 부정적이며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을 갈구하고, 대체로 도덕적 문제에 무관심하였다. 이것은 엑카르트의 사상과 모본이 크게 영향을 준 것이다.    17세기의 야곱 베메(Jacob Bohme)가 그의 사상에 영향을 입었다.Ⅱ-26 북구의 기독교 인문주의(Christian Humanism)에 대해서 설명하라.    초기에 이태리 인문주의자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적대적이었고 이교적 사상에 젖었다.  로렌티우스 발라(Laurentius Valla 1405-1457)는 “콘스탄틴 황제의 하사” 문서(the Donation of Constantine)가 가짜임을 밝히고 사도신경이 12제자의 저작이 아님을 밝힘으로 교회를 비판하고 벌켓트역(Vulgate) 라틴성경에 오류가 많은 것을 지적하고 희랍, 히브리등 고전어 연구를 주장하였다.    한편 15세기 후반-16세기초의 북구의 기독교인들이 인문주의를 받아들였다. 이태리의 미란돌라(Mirandola 1463-1494), 불란서의 자크 레페브르(Jacques Lefevre d' Etaples C. 1455-1536), 독일의 아그리콜라(Rudolf Agricola 1443-1485), 로이클린(Johann Reuchlin 1455-1522), 영국의 콜레트(John Colet C. 1467-1519)와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 그리고 화란의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C. 1466-1536)가 대표자이다.    이들의 특색은    (1) 성경 연구에서 원천으로 돌아가자 (Ad fonte)    (2) 그리스도 사도들의 신앙을 찾으려  하였으나 윤리적 합리적 신앙에 역점을 두고 그리     스도를 도덕의 표본으로 삼았다. 이들은 성서원전을 연구하고 원어를 연구하여 순수한     복음, 순전한 신앙을 추구하였으나 실제 종교개혁과는 거리가 멀었다.    (3) 생활 개선에 힘썼다. (Emendatio Vitaes)Ⅱ-27 에라스무스의 종교 개혁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말하라.    기독교 인문주의자의 왕자로써 로텔담(Rotterdam)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잃고 데벤트(Deventer)에 있는 “공동 생활 형제단”에서 교육을 받았다. 위대한 학자는 아니나 라틴(Latin)문장에 능하여 서구 인문주의자의 총아가 되었다.     그러나 기존의 카톨릭 교회를 탈퇴하지 않고 합리적 방법으로 인지를 계발하여 교회 생활과 사회 생활을 향상시키려 하였다. (생활의 향상 Emendatio Vitae)     혹자는 에라스무스가 종교개혁이란 알을 낳고 루터가 그 알을 부화시켰다고 말한다. 그는 엔키리디온 (Enchiridion/Handbook of the Christion Soldier)이란 저서를 통하여 형식주의, 의식주의를 타파하고 도덕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생활 향상을 도모하려 하였다.     신약성경을 라틴어로 새로 번역하고, 희랍어 원전을 출판하여 서구의 성경 연구열을 고취(鼓吹)시켰다.* 1516 Novum Instrumentum omne       * 1519년의 제2판은 루터가 독일역 대본으로 사용함. 1524년 자유의지에 대하여 루터와     다투었고 그의 종교개혁에 대한 중립적 태도의 비극적 종말은 모든 기독교 인문주의     자들의 종말을 대변한 것이다.Ⅱ-28 위크리프(John Wycliffe 1329-1384)의 개혁운동에 대해서 설명하라.     (1) 위크리프는 영국사람으로 본래 실재론자(Realist)였으나 스코트스(Scotus, Duns             1264-1308)의 영향을 많이 받아 하나님의 의지의 절대성을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의          신학에 심취하고 주교 로버트 그로세스테스테(Robert Grossesteste)의 영향을 받았다.      (2) 중요 정치 원리 : ⓐ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것.                          ⓑ 충성을 조건으로 소유의 사용권을 주심”         이란 원리로 교황도 하나님께 충성치 않으면 세속군주가 폐위시킬 수 있다고 주장.       아비뇽 교황이 영국에 세금을 부과하자 여기에 반대하는 국민 여론이 대두. 이때에       국왕과 국민이 위클리프를 옹호함.      (3) 위클리프는 예정론을 주장하였고 선택받은 자로 구성되는 보이지 않는 교회의 원리       를 주장하고, 가견적 교회 지도자나 감독이 구원을 결정지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성물(聖物)숭배금지, 화체설(化體說)부정(否定), 면죄부(免罪符), 죽은 자를 위       한 미사를 반대했으나 연옥(煉獄)은 믿었다.      (4) 主활동 : ①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고 ② 성경을 가르치려고 설교자들을 전도 여행       에 내보내었다. (itinerant preachers)         그들은 길에서나 풀밭에서, 교회 마당에서 교회 안에서든 언제 어디서나 설교하           였다. 신약성경 말씀대로 행하기를 애썼으며 주기도문, 십계명,七罪를 가르쳤다.          위클리프의 전도 설교가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롤라드 (Lollards)”라 불렀다. 이        들은 1381년의 "농민반란"과는 무관하였으나 의심을 받기도 하였으며 그후 15세기        에 헨리 5세(Henry V. 1413-1422)에게 박해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헨리7세(1485-1509)때는 다시 이 운동이 크게 일어났으며 영국의 종교개혁에        큰 공헌을 하였다.      (5) 위클리프의 영향은 보헤미아의 요한 후스로 이어지고 독일의 루터에까지 파급되어 종       교개혁을 낳게 했다.         (종교개혁당시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요한 위클리프가 성냥불을 켜고, 후스가 촛불을       들고, 루터가 횃불을 들었다 하였다.)Ⅱ-29 요한 후스 (John Huss C. 1375-1415)의 개혁운동에 대해서 말하시오.      (1) 요한 후스는 평민 출신으로서 일찍 아버지를 잃고 프라하(Prague)대학에서 수학(修         學)후 30세 전후에 신부가 되었으며, 교회의 부패상을 보고 도덕개혁을 위해 노력하        였다. 보헤미아와 영국왕가의 결혼이 있은 후 많은 체코의 학생들이 옥스퍼드에 유학        했으며 이에 따라 위클리프의 저작이 보헤미아에 소개되어 후스도 이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후스의 주장 ⒜성경의 절대 권위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De ecclesia, 1413)교황중        에도 불택자가 있을 수 있다. ⒞교권은 세속 권세가 아니고 영적 권세임 ⒟속죄는 하        나님만 하실 수 있고, 신부는 그것을 선포할 뿐임(면죄부 판매 반대) ⒠교회 개혁          프라하 대학은 종교개혁과 민족운동의 중심이 되었으며 후스는 교황 요한 23세에 의       해 파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후스와 위클리프의 저작은 전 유럽에 파급되고 개혁의 소       리가 점차 높아지게 되었다.      (2) 콘스탄스 공의회에 독일황제 시기스문트의 신변보장을 약속받고 참석하였으나 체포되       었다. 공의회는 위클리프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의 저작을 금하였다. 이어서 후스를       이단으로 심문하였다. 심문을 받았을 때. “교황주교 고위 성직자라도 대죄를 지으면        교황주교 고위성직자가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천명한 사실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       을 때 “왕들도 그러하다”고 답했다.         오랫동안 연금되어 병들고 잘 자지 못했으나 끝까지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고 굽히지       아니하였다. 이단으로 정죄받아 신부직을 박탈당하고 지방관리들에 의해 화형당했을        때(1415년 7월6일) “주여, 당신의 손에 내 영혼을 맡기나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최        후를 마쳤다.      (3) 보헤미아의 국민영웅이였던 후스의 사후, 후스파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① 우트라키스트(Utraquists) : 성찬에 떡과 포도주를 사용하여 평신도에게도 포도주           를 나누어주었다. 복음의 자유로운 전파와 성경이 금하지 않는 것이면 카톨릭 습          관을 그대로 지키려 하였다.          ② 타보라이트(Taborites) : 주로 천인(賤人) 출신들로써 성경에서 분명히 명한 것이                                  아니면 어떠한 행습(行習)도 지킬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보헤미아에 그전부터 독립된 신앙운동이 일어났는데 소위 유니타스 프라             트룸(Unitas Fratrum, 형제일체회) 또는 “보헤미아 형제회”라 불리는 것으로 나중           에 후스의 영향을 받았으며 후에 모라비아파(the Moravians)의 모체가 되었다.Ⅱ-30 15세기말의 교회 개혁가들에 대해서 말하라    (1) 곡의 요한 푸퍼(John Pupper of Goch 1400-1475) :        네델란드 출신의 수도사로써 공동생활 형제회의 영향과 신학적으로는 어거스틴의 영향     을 받았다.  성경의 권위를 높여 교황과 교부들도 성경과 일치하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     라 단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였다.    (2) 베젤의 요한(John of Wesel c, 1410-1481) :        마인쯔(Mainz)와 보름스(Worms)의 명설교가(說敎家).        그의 신념은 성경에 위배되는 것은 설교도 안하고 글도 안 쓰겠다는 것이었다.        교황의 면죄권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교황권에 위배되는 처사에 대한 벌은 교황이      면해 줄 수 있어도 하나님의 법에 위배되는 것에 대해서는 교황이 아무권리도 없다 하      였다. 성자들의 공적도 하나님께서 나눠주실 수 있을지 모르나 교회가 나눠 줄 수는 없      다 하였다.    (3) 요한 웻셀(John Wessel 1420-1489) :        화란의 그로닝겐(Groningen)출신으로 공동생활 형제회에서 교육을 받았다.        후일에 “그리스도 외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성경론에서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신앙에 관하여 최종의 권위라 천명하       였다. 교회론에서는 교회는 성도의 교제(Communion of Saints)라 하였으며 성찬 자체      가 효력있는 은혜의 수단은 아니며 신부는 단지 하나님의 종일 뿐이지 성찬에 어떤 효      력도 부여할 수 없다 하였으며 면죄부를 전적 부정하였다.Ⅱ-31 사보나롤라(Savonarola 1452- 1498) 에 대해서 말하시오.    (1)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는 이태리 페라라(Ferrara)출신으로서 플로렌     스의 산말코(San Marco)수도원에서 설교가로 대성하였다.  1491년이후 플로레스와 여러     도시에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과 회개를 외치고 도미니칸 탁발수도회 지역장이 되었다.        수도원 개혁과 개인적 경건 생활에 힘썼다.    (2) 플로렌스시에 불란서군이 침입하여 그의 예언대로 점령 당하였으며, 불란서군이 풀로렌     스에서 물러간 후 그의 의견에 따라 플로렌스시는 도시 공화국 체제를 취하였으며, 그는     계속 플로렌스시(市)와 이태리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기를 권고하고 각인이 자기 소     용을 제외하고는 가난한 이들을 도우라고 권면하였다. 플로렌스시(市) 전체가 개혁되어      여인들은 사치를 버리고 은행가와 상인들은 부당한 이익을 돌려주고 대중들은 성경을      읽으며, 교회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가난한 이들을 동정하며 명문귀족들이 수도승이 되      었다. 1496년에는 연례행사인 소란한 카니발을 변화시켜 구제의 날로 삼고 아이들이 행      진하며 찬송가를 불렀다.  그 이듬해인 1497년에는 음란한 책들, 그림 축제가면 의상들      을 아이들이 모아다가  광장에서 불을 태우고 시민들이 둘러서서 찬송가를 불렀다.    (3) 로마교황 알렉산더4세와 투쟁 : 1495년 교황이 설교를 금하고 산마르코수도원을 교황직     속에 두려는데 대해 항거하였다.       투쟁의 발발 원인은 사보나롤라가 교황개인과 교회의 부패상을 공격했기 때문이며 정치     적으로는 플로렌스 도시 공화국이 불란서와 연합하여 로마가 속한 이태리 연맹과 대립     이 되었기 때문이다.  플로렌스시가 사보나롤라의 반대편에 서게 되자 역경을 만나고 교     황파에게 사로잡혀 화형을 당하였다. (1498년 5월 23일)    (4) 플로렌스시(市)는 다시 타락의 길로 돌아갔으나 소수의 추종자들이 해마다 그의 순교일     에 개혁운동을 기념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감명을 받아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     였다. 그중에 화가 보티첼리(Botticelli), 인문주의자 미란들라(Mirandola)화가 미켈란젤로     (Michaelangelo)도 끼어 있었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플로렌스는 다시 메디치(Medici)가(家)의 집권으로 대가문통치          (Patrician rule)로 회귀하였으나, 사보나롤라의 공화정치와 개혁운동은 위대한 교훈을       남겼다.       그 당시 플로렌스는 이태리의 꽃으로 개혁사상과 인문주의의 중심지였으며, 또한 교육의     중심지로써 북구의 수많은 유학생들이 그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단테의 활동지요 플      라톤 학교(Platonic Academy 기독교 인문주의 중심지)가 있었고, 미켈란젤로, 보디첼리     가 활약하고 사보나롤라의 공화주의와 마키아델리의 절대군주제의 사상이 병립된 문화     의 중심지였다.           <동방 정세 >Ⅱ-32 터키의 서방침공에 대해서    (1) 중세의 끝은 마지막 남은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1453년 오트만 터키(Ottman Turks)에 의해서 망하고 발칸반도와 오스트리아 일부까지 터키의 영토가 되므로 닥아온 것이다.    (2) 황제와 대사교와 귀족들이 소피아(Sophia)사원에서 최후의 성찬을 행하였으며, 1453년 5월 30일 터키왕 모하메드2세(Mohammed Ⅱ) 가 입성하여 소피아사원에는 모슬렘 승전예배가 드려지고 이로부터 모슬렘사원이 되어 버렸다.  터키는 근동, 중동지방 이집트, 이태리남부까지 점령하고, 동구라파에서는 헝가리를 거쳐 종교개혁 당시는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성문까지 밀어 닥쳤다.    (3) 이로 인하여 서구 기독교회는 서구의 종말을 예상하고 공포와 전율에 떨었다.     한편 교황들은 터키를 막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의 단결을 호소하였고 많은 동방교회학자들이 서방으로 피난하고 서책과 문물들이 서방으로 흘러들었다.    (4) 동방으로 가는 길이 막히게 되었다.Ⅱ-33 러시아 정교회의 발전에 대해서    1480년 모스크바 대공이 마지막 몽고통치를 물리치고 독립하여 대러시아의 시발을 이     루었다.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에 망한 다음 정교회의 전통을 모스크바가 계승하게 되었      다. 이후 러시아 혁명때까지 황제와 대사교가 협력하여 기독교 국가로 지내왔다. 그러나    터키의  세력 때문에 서방교회와는 연락이 끊어진 채 근세로 발전하게된다.                Ⅲ.  종  교  개  혁Ⅲ-1 16세기의 시대적 특징은? (제16세기)    (1) 지리적 발견의 시대라 할 수 있고 미대륙의 발견으로 새로운 세계가 열리었다.    (2) 과학의 시대였다.  베살리우스 (Vesalius, 1543) 의 해부학과 크페르니커스(Copernicus,      1473-1543)의 “천체회전”등이 등장    (3) 신앙의 시대    (4) 인문주의 시대    (5) 사회의 점전적변화의시대(시민사회의 등장)Ⅲ-2 16세기초 (1519) 서구의 정치적 형편은?    (1) 서유럽에 국민국가가 발전하여, 영국, 스페인, 불란서등은 군주국가로 성장하였으며, 독일, 이태리는 분열된 상태로 있었다. 독일은 수많은 제후들의 독립된 영지와 제국도시(Imperial Cities)와 교황영지로 나뉘었으며 다만 선제후에 의하여 선출되는 신성 로마황제에 의하여 외견적 통일만을 유지할 뿐이었고 이태리는 교황영지와 수많은 도시국가들과 제후들의 영지로 나뉘어 있었다.    (2) 찰스5세(Charles v 1519 -1556)가 신성로마제국황제로 선출되어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家)의 연혼에 의한 지배가 계속되었다. 그는 불란서를 견제하여 잃어져가는 제국의 이상을 회복하려하여 ①단일 카톨릭신앙 ②이슬람 세력 격퇴(스페인, 오스트리아, 헝가리) ③대제국유지를 목표로 정치하였다.Ⅲ-3 사회 경제적 형편은?    (1) 농업중심사회가 상업과 산업중심사회로 전이하기 시작    (2) 도시국가의 발달(예 : 프로렌스, 제네바, 스트라스붉등)    (3) 단순한 화폐경제의 발달(아구스부르그의 은행가 푸거스, Fuggers of Augsburg)    (4) 인문주의자들의 배출, 활약(새로운 직업)중산계급의 등장    (5) 하급귀족(도적기사 Robber Barons)과 농민계급의 동요Ⅲ-4 16세기초 카톨릭교회의 형편은 어떠하였는가?      레오 10세(Leo X, 1475-1521)는 플로렌스의 메디치가(家)출신으로서 “르네상스 교황”으     로 세속군주와 같이 세금 징수등 정치에 힘썼고 인문을 발전시키려 하였을 뿐 신앙의 지    도적 역할을 못하였다. 베드로성당 치장에만 힘쓰고 루터의 항거의 이유를 파악치 못했     다.  Ⅲ-5 종교개혁의 원인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도덕적, 사회적, 교리적 원인을 들지만 그 근본 원인은 교회의 부패에 대한 하         나님의 정화의 역사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교회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고 창조적 활동         을 할 수 있게 하려 하심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사회적 문제는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을 대변하지 못하기 때문에 파생         된 것들일 뿐이다.         A. <루터파 종교개혁>    Ⅲ-6 루터의 생애에 대해서 말하시오.       (1) 1483년 11월 10일 아이스레벤(Eisleben)生          아버지는 전형적인 독일농부 혈통(독립,근면,절약)으로 광산업에 종사, 어릴때부터 종교            교육을 받음 (하나님을 두려워함)            (2) 7세부터 공동생활 형제단계통의 선생에 의해 교육을 받기 시작. 1501년 에르푸르트              (Erfrut)대학에서 신 학문(Modernism)을 공부, 오캄의 신학방법을 터득함. (기독교의 진            리는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고 다만 성경과 교회의 권위에 따라 믿음으로 받아야 된다           고 함) 1505년 문학석사가 된 후 곧 법학공부를 시작 동년7월에 수도 생활에 헌신함(노           중벽력) 에르푸르트 소재의 엄격한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입소함.(3) 1507년 신부가 된후 첫 성례를 집전. 자기의 부족과 구원의 불확실 때문에 공포를 느             낌, 수도단장의 권유로 신학공부, 성경, 후기 스콜라 철학을 공부함.(오캄Occam                  빌Biel, 제르송, 데일리) 그후에 어거스틴과 신비주의의 저작을 읽게됨.             (4) “복음의 완전” (evangelical perfection)에 이르려는 노력은 오히려 깊은 “시험”                     (Anfechtung)에 빠지게 함. (※ Anfechtung=시험 야고보1:12절) “자비로운 하나님”               을 추구하였지만 자신의 섬세한 양심으로는 오히려 자기의 불완전함을 발견하고                 오히려 “두려운 하나님”만 만나게 되었음             (5)  1508년 뷧텐베르그 수도원으로 옮김.           1508-09 수도원장 스타우비츠(Johann von Staupitz)의 지도를 받음. 신학사(B.D)취득           1510:로마 방문           1512잠시 출타 후 돌아와서 신학박사(TH.D)를 취득 뷧텐베르그대 성경교수로 취임             (6) 1511/12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1513년부터 시편강의와 주석을 시작하고 1515년               로마서 강의와 주석을 시작 이때 이신득의(以信得義) 교리 발견(하나님의 의의 의미              를 깨달음)  “객관적의”와 “주관적 신뢰” (Confidence, Fiducia)의 의미를 발견. 1515년             에는 수도원의 신학연구 지도자로서 11개 수도원을 감독하는 지원장(district-vicar)이             되고 뷧텐베르그 시립교회 설교자가 됨.             (7) 1517년 10월 31일 뷧텐베르그 성곽 교회문에 면죄부의 효용에 대한 학술 토론을 촉구             하는 “95개조 논제”(the 95 theses)를 붙임. 루터는 1516년에 벌써 교황의 면죄권에 반            대하는 설교를 하였다. 즉, 교황은 연옥에 든 영혼을 해방시킬 아무런 힘도 없다는 것            이다. 이 95개조 논제는 곧 인쇄되어 온 유럽에 종교 개혁의 신호탄이 되었다.            (8) 아구스부르그 제국회의(the Diet of Augusburg)에서 추기경 카젠탄(cardinal Cagetan)             의 공격을 받다.          라이프찌히 논쟁(Leipzig Debate, 1519. 6. 27. 부터 7. 16.)          루터의 동조자와 엑크(Eok)를 비롯한 카톨릭 대표들간의 논쟁에서 루터는 부지중 자             기가 후스파임을 선언하고 사실상 로마 교회가 절연함. 교황과 공의회를 공격하고 성             경의 권위를 천명함.             (9) 1520년 다섯 논문을 저작하여 종교 개혁의 기본 입장을 밝힘.          ①선행에 관한 설교          ②로마 교황에 관하여          ③독일 귀족에게 고함          ④교회의 바벨론 포로          ⑤기독자의 자유          동년(1920) 12월 10일, 60일내에 순복하라는 교황이 보낸 교서(the Bull)를 불태우고 아            울러 교회 법령집을 불태움. 1521년 1월 교황이 루터를 파문하는 교서를 발표함.             (10) 1521년 보름스 제국 회의(the Diet of Worms)에서 루터가 로마 황제 앞에 서다. 루터             의 저작들을 쌓아두고 신문관이 루터 자신의 저작 여부를 물었고 자신의 주장을 변호             하려는가라고 물었을 때 유명한 대답을 함 : “성경과 이성이 정죄하지 않으면 나는 아             무 것도 취소할 수 없고 취소하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나는 서로 상반되는 교황이나             공의회를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양심을 거슬리는 것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안전하             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여 도우소서. 아멘.”           제국회의에서 신문한 죄목은 분열 정죄 반역이었으며 루터를 제국 금령(Ban of the              Empre)하에 두었다. 언제든지 제국 금령이 내리면 이어 교회 금령(church ban)이 내             려 하시라도 체포되면 화형을 받게 된다. 루터에게도 제국 전복죄가 적용된 것이다.              금령이 당장 집행되지는 않았으나 평생 이 금령하에 살게 되었다.              (11) 1521. 5. 4-1522. 3. 1. 선제후 프레데릭(Elector Frederic the Wise)의 주선으로 발트              부르그(Wartburg) 성에 10개월간 은거함.            이때에 3개월만에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              (12) 1522-  뷧텐베르그시 종교 개혁을 다시 지도하며 칼슈타트(Carlstadt)와 마찰.              (13) 1524, 25년 처음에 호의를 가졌던 농민 전쟁에 반대             (14) 1529 마르부르그 회의(Marburg Colloquy)에서 개혁파 지도자들과 성찬 문제로 토론              함. (루터, 멜랑톤, 부스, 쯔윙글리)              (15) 1530년 멜랑톤이 작성한 아구스부르크 고백서(the Augusburg Confession)를 루터가              인정하다.           (16) 1546년 루터 사망. 만년에 독일어 성경 개역 주석을 계속함.            1547년 황제에 의해 신교 제후들의 참패            1552년 신교군에 황제군의 참패            1555. 9. 25. 아구스부르그 평화안 체택(the peace of Augusburg) 독일의 종교적 분              할이 이루어짐.III-7 면죄부(Indulgence)란 무엇인가?   ⑴ 일종의 사면서(the letter indulgence, Ablassbrief)로써 교황이 연옥에 있는 영혼이나 산 사        람이 당하는 일시 형벌을 성자 성녀들의 여분의 공적을 힘입어 면해주는 것이다.      ⑵ 역사적으로 11, 12세기에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으며 처음에는 고해(고해성사, 참회)의 한         방편으로서 교회나 수도원에 선물(주로 헌금)하면 참회로서 해야 할 모든 고행을 면해 주었        다. 11세기 중엽부터 십자가 면죄(the cross indulgence)가 생겨 성전(십자군 전쟁)에 참석        한 신자들에게 일반 사면을 주었다. 그후 12세기에 헌금 면죄로서 십자군 전쟁에 헌금을 낸        사람이나 다른 선생을 한 자들에게 면죄를 해주었다. 1300년 희년 선포 이후 면죄는 교황청        의 중요 수입원이 되었다. 희년에 로마 순례(Pilgrimage, Wallfahrt mach Rom)를 하면 면        죄된다 하고 나중에는 돈을 내어도 되고 1393년 보니파스 9세 때는 고해성사 자체에까지         효력이 미치게 되어 지옥 형벌까지 면한다고 하였으며 1477년 식스터스 4세는 죽은 자에게        까지 효력이 미친다고 하였다.   ⑶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경적 근거로서 마태 16:19을 들어 교회가 일시적 형벌을 면해 줄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한다. 신학자들 특히 할르의 알렉산더, 아퀴나스들이 교회의 공적        보고(宝庫)(treasury of merits of the church)설을 주장하여 신학적 근거를 주었고 1343년        에는 교황 클레멘트 6세가 공식적으로 면죄 원리를 승인하였다.     ⑷ 종교 개혁 당시 독일의 경우 : 1506년에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II)는 베드로 성당 신축을        위해 희년 면죄를 선포하고 1514년에는 레오 10세(Loe X)가 다시 선포하였다. 대체적으로        독일은 교황청의 수탈정책으로 빈한하여 국민 감정이 좋지 않던 차에 섹슨가의 알버트가         독일내 교회 영지의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이미 할버슈터트(Halberstart)와 막데부르크           (Magdeburg)의 주교좌를 차지하였고 계속 공석인 마인즈(mainz) 주교직을 얻으려 교황청        과 교섭하였다. 교황청은 막대한 위임금(installation)을 요구하였다. 12 사도에 따라 12000두        캇트(ducats)를 요구하자 7죄(seven sins)에 따라 7000두캇트를 흥정하여 결국 10000두캇트        를 푸거家에서 빌려 지불하였다. 교황청에서 이 빛을 청산할 수 있도록 면죄부 판매권을 알        버트 마인즈 대주교에게 허락하고 그 수입의 ½은 알버트에게 ½은 교황청에 지불하에 하        였다. 이에 알버트는 면죄부는 형벌뿐 아니라 죄도 용서하며 면죄부를 산 후에 지은 죄는         자동적으로 용서받는다 하였다. 텟즐(Tetzel)은 도미니칸 탁발승으로 독일 지방 면죄부 판        매인이었다. “돈궤에 금전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자마자 연옥에 있는 영혼이 (천국으로) 올        라간다.” 하였다.  III-8 루터의 95개조 논제의 내용은 무엇인가?   ⑴ 제 5조에 교황은 자기가 내린 형벌이외에는 어떤 형벌도 면해 줄 수 없다.   ⑵ 제 8조 : 참회법은 산 사람에게 해당된다.   ⑶ 제 50조 : 교황이 부패한 면죄부 판매원의 가혹한 요구를 알기라도 한다면 베드로 성당이                   자기 양들의 가죽과 살과 뼈다귀로 건축되기보다는 잿더미가 되기를 원한 것이                  다.   ⑷ 제 56, 58조: 그리스도나 성자들의 공로는 교황이 사면을 허락하는 근거로서의 교회의 보물                    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와 성자들의 공로는 육신의 사람에게는 십자                     가와 죽음과 지옥의 고통을 주어도 속 사람에게는 교황이 없어도 은혜를 가져                    다준다 라고 함.   ⑸ 제 62조 : 교회의 보물은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스러운 거룩한 복음이다.   ⑹ 제 86조 : 왜 교황은 코로서스(Crosus)보다 더 부자이면서 자기 돈으로 베드로 성당을 짓지           않는가?         이같이 속죄의 공로는 그리스도의 공로뿐이며 누구나 속 사람으로 이 은혜를 받을 수            있으면 겉으로는 형벌과 십자가와 고난을 달게 받아야 할 것이라 주장.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III-9 루터의 사상에 대해서 설명하라.    ⑴ “선행에 관한 설교” 최고의 선행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 함. 공적을 쌓으려 함은 하나         님과 하나되지 못하고, 불안을 느끼는 까닭이라 함.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가진 자는 순례,         고백, 금식 성자를 부르는 행위 따위는 하지 말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매일 일에 정진하          라 하였다.    ⑵ “독일 귀족에게 고함” : 로마 교회가 부당하게 세운 세 가지 장벽을 지적함.       ① 교황과 성직자의 우위성에 반대함          만인 제사장설을 주장하고, 사람 사이의 차이는 직분 뿐이라 함. 하나님께서 국가에 주            신 직분을 행정가들은 정당히 행사해야 하며 신부도 예외는 아니라 함.       ② 교황의 성경 해석 전권에 반대함. 교황 중에도 불신자가 있었으며 교황만 전권을 가졌            다면 성경은 불태우고 교황만 믿자고 하였다. 믿는 자는 모두 제사장이므로 개인은 신            앙 문제에 대하여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한 능력을 가졌다 함.       ③ 교황의 공의회 소집권을 부정함. 그리고 주교들의 첫 수입을 로마에 바치는 것을 거부            하였다. 그 이유로서 말하기를 “교황이 출장할 때는 3~4천 노새가 뒤따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베드로는 그의 대리자(교황)가 이렇게 뽐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발로 걸            어 다녔다.”          독일 귀족들에게 한 실제적 제의 :            a. 민사건은 로마에 호소하지 말 것            b. 순례를 금함            c. 사제는 원하며 결혼하게 하라.            d. 축제절을 폐하고 주일만 지켜라.            e. 구걸 행각을 폐하라. 가난한 자는 시에서 책임져라.            f. 대학 개혁 및 학교에서 성경 공부 강조.   ⑶ “교회의 바빌론 포로” : 교리적으로 특히 성례에 있어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잘못을 신랄히        비난한 논문이다. 교황을 바빌론 왕국으로 보고 교회가 사로 잡혀 있다고 비유하였다.      로마 교회의 잘못된 속박은 다음과 같다고 하였다.       a. 성찬에서 잔을 평신도에게 주지 않는 속박       b. 화체설의 속박()       c. 미사가 희생이며 선행이라는 주장       d. 세례의 자동적 효과. 루터는 세례가 사람을 의롭게 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에 의한 뿐이며 평생 죄에 대해서는 죽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삶으로써 세            례의 의미를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 침례를 주장.       e. 그 외 카톨릭 교회의 다섯 성례도 속박이다.       f. 맹세와 서원 : 사회적 제도로서의 맹세를 비성경적이라 함(영원한 동정, 영원한 청빈, 순            종 등) “농부의 일이나 주부의 일이 성직자의 일에 못지 않게 하나님의 눈에는 귀하다            함”(노동관)   ⑷ “그리스도인의 자유” = “기독자는 완전한 자주자이며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동시에        기독자는 만인의 가장 충직한 충복이며, 누구에게나 종속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생활,        칭의 자유의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 문자적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에 대        한 믿음만이 자유케 한다고 하였다. 이 자유는 결코 방종을 의미하지 않고 선한 사람이 되        면 선한 행실을 하게 한다고 하였다.   ⑸ 중요 교리 : ①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                 ② 만인 제사장                 ③ 성경에 쓰인 말씀의 권위                 ④ 개 기독교인의 성경 해석 권리와 의무  III-10. 루터의 “성탑 경험(Tower Experience)이란 무엇인가?     루터의 신앙은 경험적이고 주관적인 요소가 많다. 첫 상례 집행 후부터 그의 내적인 투쟁은       가중하여졌다.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있는 자신이 되려고 수도승의 고행으로 육신의 몸을        죽이는데(mortification) 온 힘을 기울이었으나, 그리스도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더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내적인 확신과 평안은 오지 않고 불안과 우울은 더 하여 갔다.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발       견하고, 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에 자기를 맡겨버리게 되었다. 이때 믿음은 신뢰(Fiducia)       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전인적 호응이었다. 이때 소위 “중생의 경험”(Vivification)을 하게       되었다. 그는 로마서 1장 17절에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를 주석하면서, “여기에서 나는 완       전히 다시 태어나고 활짝 열린 문을 통하여 바로 낙원에 들어간 기분이었다.”라고 말하였다.  III-11. 루터와 색슨 과격파 개혁가들에 대해서 논하라.   ⑴ 루터는 1522년 봄 색슨 선제후의 만류를 뿌리치고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뷧덴베르그 성에         돌아와서 개혁 운동의 지도권을 잡았다. 주조는 질서와 온건이었다. 루터 부재중 칼슈타트        의 개혁 운동은 과격하였고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말세를 예언하였다.   ⑵ 칼슈타르(Andreas Carlstadt C. 1480-1541) : 색슨의 과격파 개혁주의자로서 뷧텐베르그 개        혁, 올라문데(Orlamunde) 개혁의 지도자였다. 그는       ① 교회내의 모든 성상을 파괴하고(십자가의 고난상까지)       ② 교회 음악 폐지       ③ 성찬을 상징이라 함. 유아 세례 반대       ④ 사회적 평들주의 제창      그는 신부들이 결혼하고 신부 옷을 벗고 “형제 안드레아스”라 부르고 자기 손으로 일하여       살도록 권함. 나중에 농민 전쟁 및 뮨쳐(Muntzer)의 연관 때문에 스위스로 도망하여 스위스       의 제세례파에 영향을 주었음.   ⑶ 토마스 뮌쳐(Tomas Muntzer, 1490-1525)      색슨 신부로서 한 때 루터의 제자였으나 중세 말의 요아킴(Joachim of Fiore)과 타울러           (Tauler) 계통의 과격한 신령파(Spiritualist)가 되었다. 직접 계시와 환상과 꿈을 믿고, 일종        의 자연 신론(Theologia Naturalis)을 신봉하였다. 쯔비카우(Zwickau)에서 과격한 신비주의        자의 영향을 받고 사회 개혁을 부르짖게 되었으며 무력으로 “새 예루살렘의 도래”를 준비        하려고 처음에 제후들에게 호소하다가 실패하자 마지막에는 농민 반란(the Peasant Revolt,        1524-1525)에 가담하여 처형당하였다. 1524년, 독일 제후에게 “경건치 못한 사람들을 진멸        하는데는 칼이 필요하다”라고 한 설교를 남기고 있다.   ⑷ 루터는 이들에 대하여 반박하는 글을 썼다. “하늘 선지자들을 반박함”(Against the                Heavenly Prophets..... 1525) 여기에서 칼슈타트의 과격성을 지적하였다.  III-12.   ⑴ 루터의 출생이전부터 농민들은 경제적 사회적 억압 때문에 한스 뵘(Hans bohm)같은 천년        왕국 설교가들의 자극을 받아 농민 결속(Bundschuh, 구두 동맹)을 이루었다. 수 차례의 소        규모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던 차에 루터의 저작과 개혁 운동에서 “해방적 요소”를 발        견하고 기대를 가졌으나, 루터는 “칼”에 대하여 반대하고 주된 관심을 교회 개혁에 그치려        하였다. 토마스 뮨쳐에게서 지도자를 발견하고 착취 계급인 대영주인 귀족들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⑵ 루터는 여기서 분명히 귀족편에 섰다. 평민에 대한 의심을 갖게되고 종교적 신념과 현실적        상황의 괴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루터의 개혁이 시대성을 넘지 못함을 알 수 있         다. “살인 강도 떼 농민들을 책함(Against the Murdrous and Thieving Hordes of                Peasants, 1525)에서 제후들에게 농민 반란을 진압하라고 하고, 현 체제를 유지해야 할 필        요성을 역설하였다. 그 다음의 팜플렛에서는 관용과 용서를 구하고 기독 제후들의 의무와         책임을 논하였다.  III-13. 루터의 교회와 정부론에 대해서   ⑴ 루터는 농민 전쟁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현실 정치 질서는 어떻게 해서        라도 유지되어야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무정부주의에 반대한 것이다.   ⑵ 두 왕국설(Two Kingdom Theory)을 주장하였다. 루터는 모든 인간의 제도나 조직에 개혁        을 기대할 수 없음을 더욱 느끼고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만이 새롭게 하는 능력        을 가졌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왕국(교회)과 세속 왕국은 엄연히 구별되며         교회사에 제후들이 간섭하지 않고 세속사에 교회가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⑶ 혁명을 반대하고 위정자의 개선을 원하고 하나님께서 처리하시기를 바라야 하며 기독교인        들은 수난을 받아야 할 것을 가르쳤으나 사실상 루터는 색슨 선제후 현자 프레레릭              (Frederick the wise)과 복음적 제후들의 지대한 도움을 통하여 교회 개혁 운동을 일으켰다.        특히 헷세의 필립(Philip of hesse)은 중요한 제후였다.  III-14. 1529년 스파이어 제국 회의(the Diet Speier)의 의의는 무엇인가?     1526년 스파이어 제국 회의에서 어느 정도 각 지역에 종교 자유가 허용되었으나 1528년 제       국 회의에서 루터파 영지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배는 허용하나 카톨릭 영지에서는 루터       파 예배를 불허한다는 결정이 로마 카톨릭 다수 제후들에 의하여 이루어지자 소수 루터파        제후들이 정식 “항의(protest)”를 제출하였다. 이때부터 “프로테스탄트”(Protestants)란 이름이       생겼다.  III-15. 마르부르그 종교 회의(Marburg Colloquy, 1529)의 성격과 의의에 대해서 말하시오.   ⑴ 헷세의 필립공이 주도하여 루터파(루터, 멜랑톤)와 스위스 개혁가들(Zwingli, Oeclampadius)        과 스트라스 부르그의 부서(Bucer) 사이의 교리적 차이를 조정하여 카톨릭 세력을 막으려        하였다.(정치적 목적)   ⑵ 주의제는 성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임재 양식(mode of Presence)이었다. 루터는 실재 임재        (Real Presence)를 주장하고 쯔윙글리는 상징적 임재(symbolic / memorial)를, 그리고 부서        는 영적 임재(Spiritual Presence)를 주장하였다. (종교적 목적)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루터는 개혁파에게 당신들은 “다른 영”을 가졌다고 선언하며 결별하다.  III-16. 아구스부르그의 신앙고백서(, 1530, 1531)란 무엇인가?   ⑴ 1530년 아구스부르그 제국 회의에 소수의 루터파 제후들이 황제에게 제출한 루터파의 교리        천명서이다. 첫 부분은 루터파의 교리가 교부들과 보편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음을 증        명하고 제 2부는 로마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⑵ 저자는 멜랑톤(Melanchton)이며, 루터가 즉시 승인하였다. 그러나 쯔윙글리와 부서는 서명        하지 않고 각기 다른 신앙 고백서를 제출하였다.   ⑶ 제국 회의에서는 다수의 카톨릭 세력에 의해서 양대 세력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루터        파 제후들에게 1531년 4월까지 승복을 명령하였다.  III-17. 필립 멜랑톤의 역할에 대해서 설명하라.   ⑴ 필립 멜랑톤(Philip Melanchton 1497-1560)은 위대한 인문주의자이며 히브리어 학자인 로이        크린(Reuchlin)의 조카 손자로서 일찍부터 독일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다. 로이클린의 추천        으로 약관 21세에 뷧덴베르그 대학의 희랍어 교수가 되고 (1518), 곧 루터의 영향으로 신학        공부를 하여 1519년 신학사(B.D)가 되고 평생 그의 동역 친구가 되었다.   ⑵ 1521년 루터가 불세출의 명저라 칭찬한 최초의 조직 신학인 “기본적 신학 논제”(Loci              Communes theologicarum)를 저술하였다. 루터의 가르침을 토대로 기본적인 기독교 진리         를 성경적 근거를 토대로 명료하고 논리적으로 기술하여 개신교의 신학의 내용이 무엇인         지를 분명하게 설명하였다.   ⑶ 아구스부르그 신앙 고백서는 그의 저작이며 계속 개작하였다. (1540, 1542) 아우그부르그 제        국회의에서 멜랑통은 최대한의 양보로 카톨릭과의 연합을 바랐으나 실패하여 과격한 루터        파의 비난을 사게 되었다. 그는 평화주의자요, 역사적 기독교 진리를 믿었으며 카톨릭이 오        류만 수정하면 자기의 의견에 동조할 줄로 알았다.   ⑷ 많은 오해를 받기도 하였으나 “독일의 선생”이란 칭호에 합당하게 루터를 이어 개혁 운동        에 힘썼고 기독교의 연합을 위하여 힘썼다. 나중에 루터파가 내부적으로 이분되자 온건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III-18. 아구스부르그 평화(the Peace of Augsburg, 1555)란 무엇인가?   ⑴ 1547년 개신교 연합군이 황제군에게 폐하고(Smalacaldian War) 황제의 강제로 “아구스부르        그 잠정서(Augsburg Interim)를 받아드리게 되었으나 재차 일어난 전쟁에서 황제군이 대패        하게 되었다.(1552)   ⑵ 1555년 아구스부르그 제국 회의에서 황제 찰스 5세는 드디어 각 영주에게 종교 자유를 허        락하여 유명한 “영주의 종교가 영지(領地)의 종교”란 종교 정책이 수립되었다. 이것이 지금        까지 독일교회는 각 지방 교회(Landes Kirchen)로 발전하게 된 동기이다.  III-19. 루터의 종교 개혁의 여타의 결과에 대해서?   ⑴ 독일어 성경   ⑵ 독일어 미사와 예배 규범   ⑶ 대학 교육의 개선   ⑷ 노동관(직업)   ⑸ 기독교 가정   ⑹ 정치와 교회   ⑺ 음악(회중)  III-20. 루터 교회의 “일치 신조”(Formula of Concord)란 무엇인가?   1580년에 루터파 교회는 멜랑톤의 “협력설”(Synergism) 논의에 대한 종결로서 1530년의 아구     스부르그 고백서와 변증서(1531)를 받아드리고 성찬에 대해서도 루터의 주장을 재확인하였다.     이것이 최종적 교리로서 받아지게 되었다.  III-21. 루터파 종교 개혁의 전파에 대해서 말하라   ⑴ 스칸디나비아 제국들,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스웨덴이 16세기말까지는 모두 루터         파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⑵ 중앙 유럽에서는 먼저 루터파가 전해졌으나 상주하는 독일인 외는 나중에 칼빈파 신앙과         재세례파 신앙을 받게 되었다.  B. <개혁파 종교 개혁 : 쯔윙글리와 츄리히 개혁>  III-22. 개혁파 종교 개혁이 일어난 곳은 어떠한 곳인가?   라틴 문화권의 변방으로서 독일과 이태리, 독일과 불란서 중간 지역들이었다. 따라서 스위스      일대와 라인강 유역 계곡을 따라 북쪽 네덜란드까지이고, 나중에는 영국과 스코틀랜드, 그리고     루터파 세력과 대치되고 있는 폴란드, 헝가리, 보헤미아 등이었다.  III-23. 스위스 종교 개혁의 배경은 어떠한가?   ⑴ 지역적 특색 : 1291년 8월 1일 루제른 호(湖)를 중심으로 우리(Uri), 스뷔츠(Schwyz), 니드        발덴(Nidwalden)의 세 마을이 “항구 계약(Perpetual Covenant)”을 맺어 외침 시 상호 방어        를 약속한 이후, 14세기말(1388)에는 오스트리아 세력을 방어하여 연방 체제를 굳혔다. 그러        나 정치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에 부속되어 오다가 13개 지방으로 늘어난 스위스 연방은          1493-1517년에 세금 문제로 제국과 관계를 끊게 되었다.   ⑵ 스위스의 특색은 중요한 도시 국가와 농경 지방으로 나누어지는데 예컨데 바젤(Basel), 베        른(Bern), 츄리히(Zurich) 그리고 제네바(Genewa)등은 구라파 전체에 비하여 일반적으로 문        화가 낙후하였으나 중세 말기부터 상업, 산업, 학교등의 발달로 일어서기 시작하는 신흥 세        력들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시의회를 중심으로한 대가문(Patrician Families) 정치를 통하여         공화 정치를 하고 자체의 군사적 실력으로 주위의 제 지방을 복속시켰다.   ⑶ 도시 국가들은 인문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아 생활 개선을 도모하였다. 비합리적 종교 행사        를 개혁하려는 시민 의식이 높아짐에 따라 종교 개혁도 시의회 즉 시민들이 주도가 되어         이루어지게 되었다. 스위스 내부에서도 도시 국가들은 종교 개혁을 받아들이고 농경 지방은        중세 체제를 그대로 유지, 카톨릭으로 남게 되었다.  III-24. 쯔윙글리(Hulbreich Zwingli, 1484-1531)의 일생에 대해서 말하라.   ⑴ 1484년 1월 1일 토겐부르그(Toggenbrug) 읍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업은 목축이었으나 친        척들 중에 수도사들이 있었다.   ⑵ 루터와 달리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성장, 비엔나 대학에서 공부하고        다시 바젤 대학에서 인문주의 학문(철학과 신학)을 배웠다.   ⑶ 1505년에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때 바젤 대학에서 토마스 뷧텐바흐(Thomas Wyttenbach)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미 면죄부 판매가 불법이며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속죄의 대가라는 혁명        적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문하에서 많은 개혁가가 태어났다. 또한 이태리의 인문주의자 미        란돌라의 영향도 입게 되었다.   ⑷ 1506년 글라루스(Glarus)교구 신부로 재직시 교구민들의 용병 전쟁(Mercenaries)에 종군 신        부로 참석하였으며, 1516년 부사교(Vicar)가 되고 이 해에 바젤에서 에라스무스를 회견하였        으며 희랍어 원문 성경을 읽고 개혁에 관심을 두게 되었으며 1518년 쥬리히 대사원의 시민        의 신부(People's Priest )로 부임하여 스위스 종교 개혁을 주도하였다.   ⑸ 1523년 쥬리히 종교 토론회(Zurich disputation)에 67개 논제(the 67 articles)를 제출하고 시        의회가 그것을 공적 승인을 하여 쥬리히시의 개혁이 이루어졌다. 동년 “하나님의 정의와 인        간의 정의에 관하여”(of Divine and Human Justice)를 저술하여 국교회(a state Church) 원        칙을 세우고 재세례파를 탄압하다.   ⑹ 1521-1523년 스위스의 여러 지방에 개혁 운동을 일으키고 1529년에는 바젤의 시의회가 개        혁파 신앙을 승인하고 1528년 베른 시의회에서 열린 공개 토론회에 부서(Bucer), 외클람페        디우스(Oeclampadius0, 쯔윙글리(Zwingli)가 참석하여 개혁파 신앙을 승인하게 하였다. 베른        의 개혁으로 1534년 제네바(Geneva) 개혁이 가능하게 되었다.   ⑺ 1529년, 마르부르그 종교회의 참석   ⑻ 1530년, 아구스부르그 제국 회의에 참석. 1531년 스위스의 카톨릭 지방과 전쟁 끝에 전사함.        “몸은 죽어도 영혼은 죽이지 못한다.”를 유언으로 남김.  III-25. 쯔윙글리의 교회 개혁의 성격에 대해서 말하시오.   ⑴ 쥬리히시 개혁은 성경 강해와 설교에서 시작되었다.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강해하여 가면서        성경에 맞지 않는 교회 행습을 제거하고 성경이 명령하는 대로 살기 시작하였다.      1520년, 자신의 연금을 교황청에 반납하였다.   ⑵ 그의 개혁은 실제 생활에서 시작되었다.      ①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식사법을 버렸다.(1522) 사순절(Lent)에 고기를 먹었으며      ② 1523년에는 로마 카톨릭 미사 폐지, 각종의 맹세, 신부의 독신, 연옥설, 미사의 희생적            성격등을 부정하고 믿음에 의한 구원 교리를 공표 했다.      ③ 1524년, 신부와 수녀들의 결혼, 쯔윙글리의 결혼      ④ 1525년, 성상, 성물, 교회 음악(Organ) 폐지함.(그는 여섯 개의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루터보다 나은 음악가였음) 원리는 “육체는 무익하니라(요 6:63)하심에 따른 것이었다.   ⑶ 교회 개혁의 수단으로서 경건한 행정가(civil magistrates)나 성경을 신봉하는 시의회(city         council)를 사용하였다. 성경적 진리에 근거한 시민들 자신의 개혁 운동을 주창하였으며 시        대적 형편으로 과격한 개인주의를 피하고 개혁라 교회의 신정 정치 원리(Reformed               Theocracy)를 가졌다. 말씀에 근거한 질서있는 시민 생활과 국가 생활을 이루려 하였다. 하        나님의 주권하에서 거룩한 나라(holy commonwealth)를 목표로 하였으며 시민 전체에 권징        (discipline)을 행하였다.      ※ 개혁파(the Reformed)란 말은 루터파에 대항하여 루터파의 잘못을 개혁하여 한 걸음 더           진전시키려 함에서 비롯된 말이다. 쯔윙글리의 개혁 운동이 루터의 영향은 받았으나 차           후는 독자적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루터한테서 그리스도에 관한           교훈을 하나도 배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배웠을 뿐이다.” 이미 믿은 바를 실천           에 옮길 용기만을 배웠다 한다. 이것은 루터의 개혁 운동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의미하           는 신호이다.  III-26. 쯔윙글리의 성찬론에 대해서 설명하라.   쯔윙글리는 성찬에서 기념설(memorial theory)을 주장하고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므로 성찬의 떡은 다만 주님의 죽음을 상징하고 기념하는 것 뿐이라 함.(여기서도 원리는     “육체는 무익함이니라.”) 신자들은 성찬을 통하여 그들의 주님께 충성을 다짐하고 성도들끼리     의 단합을 도모하려 함이라 함.   루터의 실재설은 로마 카톨릭의 잔재이며 미신적 성격을 띄었다고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마르     부루그 종교 회의에서 루터와 합의하지 못하였다.  III-27. 쯔윙글리의 후계자는 누구였는가?   ⑴ 쯔윙글리의 전사 후에 합스부르그家에서는 정치적, 종교적 적수가 사라짐으로 개혁 운동이        실패할 것을 예상하고 루터도 과격분자의 죽음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⑵ 그러나 스위스 개혁운동은 그의 사후 쥬리히의 정치적 세력의 약화와 더불어 주위로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으나 후계자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에 의하여 계        속되었다. 그는 44년간 강단을 지켜 쯔윙글리의 개혁 운동을 공고히하고 수많은 개혁 동지        들의 지도자로서 스위스 개혁운동의 연합 전선을 이루었으며 각종 개혁파 신앙고백서 작성        자로서 활약하였다. 즉 쥬리히 협의서(Zurich agreement, 1549)      제 2 헬베틱(스위스語) 신앙고백서(the second Helvetie Confession, 1566)를 통하여 독일어        를 쓰는 스위스가 1536년 뵛텐베르그 협정서(the Wittenberg Concord of 1536)를 근거로 한        루터파와의 연합을 끊고 불란서어를 쓰는 칼빈파 스위스와 연합하여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를 탄생케 하였다.      수많은 독일, 영국, 남부 독일의 개혁자들이 쥬리히에서 공부하였으며, 그들에 의하여 쯔윙        글리가 이루지 못한 개신교의 정치적 세력의 확장 대신에 신앙적 영역의 세계적 확대가 이        루어졌다.     <칼빈과 제네바 개혁>  III-28. 요한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일생에 대해서 말하라.   ⑴ 1509년 7월 10일 파리 동북방 58마일 지점 피카디 지방(Picardy) 노용(Noyon)에서 태어났        다. 조상 전래 가업은 요이즈(Oise)강의 뱃사람(boatmen)이었으나 아버지 제라르 꼬벵            (Gerard Cauvin)은 노력 끝에 사법서사가 되었으며 노용 주교의 법률 비서가 되었다. 따라        서 칼빈은 비록 세 살 때 친어머니는 잃었으나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자랐으며 귀족 자제        들과 함께 노용의 사립 학교에서 공부하고 나중에 파리 대학에 입학하였다.   ⑵ 1528년 신학 공부로 문학 석사 학위 받음(M.A).      파리 대학의 선생들 :      ① 라틴어학자 꼬르디에(Cordier)에게서 라틴어와 인문주의를 수학.      ② 텔테트(Temptete)에게서 엄한 규율을      ③ 베타(Beda)에게서 변증술(dialectics)을 배웠다.      ※ 교우 관계 : 먼 사촌 올리베땅(Olivetan), 왕실 의사 귀욤 부데(Guillaume Bude)의 자제           와 교우         파리 대학의 형편 : 개혁을 주장하는 레페브르(Lefevre)의 저작과 루터(Luther)의 저작이           영향을 끼침.   ⑶ 1528-1529, 아버지의 명령으로 오르레앙(Oreleans)에서 법률 공부 시작.      ※ 선생 레뜨왈(Letoile)과 볼마(Wolmar)         1529년 말에 부르쥬(Bourge)로 옮김, 그러나 법률보다 인문학에 취미를 가짐.         1531년, 부친 사망으로 1532년 다시 오르레앙에서 법률 수업을 끝내고 1533년 법률 관계           직책을 맡게 됨.         1532년, 첫 저작집을 냄 : “세네카의 관대한 조치에 대한 주해서”(Commentary on                Lucius Anneas Seneca's two books on Clemency)   ⑷ 1533년 또는 1534년경 “돌연한 회개” 경험하다. 그의 1557년판 시편 주석 서문에 간단한 회        개(Conversion)에 대한 기록이 나타남.      ① 교황의 미신에 젖은 완고한 마음(칼빈 자신의)을 하나님이 정복하심(Coeur)      ② 참된 경건을 맛본 뒤 불같은 결심으로 이 순수한 가르침을 좇게 되었다.      ③ 일년이 채 못되어서 많은 사람이 그에게서 이 교훈을 배우고자 해서 피하여 독일로 떠           남.   ⑸ 1534년, 로마교회와 완전 결별, 고향 노용 교구에 자기가 받아오던 승직록(benefice)을 반납.      친구인 파리대학 학장 니콜라스 콥과 함께 루터파로 몰려 파리를 탈출하여 앙굴렘               (Ahgouleme)시에서 레페브르를 만남. 카톨릭 교회 내부에서 개혁이 불가능함을 느낌. 고향        에 돌아왔을 때 형 살르(Charles)가 이단죄로 형벌을 받을 때 칼빈도 잠깐 감옥에 갇혔다.   ⑹ 1535년 국왕 프란시스 1세의 대박해로 독일의 메츠(Metz), 스트라스부르그, 스위스 바젤로         피난 감. 불란서왕이 개혁교도들을 핍박하면서 그들이 “재세례파”이며 “무정부주의자”라고        비난함에 대해서 기독교강요 출판 계획을 세움.   ⑺ 1536-1538(제 1제네바 교역) : 1536년 사면령으로 고향에 돌아가 가산을 정리하고 개신교         도시인 스트라스부르그에 가서 학자 생활을 하려 함. 그러나 전쟁으로 로렌(Lorraine)을 거        쳐 곧장 스트라스부르그로 가지 못하고 리용→제네바→바젤을 거쳐가려고 6월 마지막 주         어느 날 제네바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됨. 제네바 개혁운동을 하던 파렐(Farrel)이 그를         찾아내어 제네바 개혁에 동참케 함.      칼빈은 ① 나이가 너무 어리고 ② 성품이 강력하지 못하고 ③ 학문 연구에 관심이 더 많다        는 이유로 거절하였으나 파렐이 강권함. “우리와 함께 일하기로 헌신하지 아니하면.... 하나        님께서 너를 정죄하시리라.” 뒤이어 제네바 시의회에서 성경 교수(professor of Sacred            letters)로 채용함.      1537년에는 목사회(the Company of pastors)에 가입함, 칼빈이 임직성례(Ordinatian)를 받았        는가에 대한 논의가 있으나 이미 임직은 성례가 아니므로 노회(목사회)에서 안수 받았을 가        능성이 짙다.   ⑻ 1537년, 제네바 교회 개혁안을 소의회(행정)에 제출 요리 문답 작성(Catechism), 신앙고백서        작성(Confession of Faith)   ⑼ 1538년, 반대파(아뜨띠쇼드파)가 정권을 잡아 베른 예배의식을 도입하고 공개 성찬을 명령        하고 세 지도자(파렐, 칼빈, 꼬로오)를 추방시킴.      칼빈은 바젤에서 또 숨어 학구 생활을 하려 함. 이때 스트라스부르그의 불란서 피난민 교회        를 돌보라는 부서(Bucer)의 또 하나의 무서운 경고를 받고 9월에 스트라스부르그로 감.   ⑽ 1538-1541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목회(3년간) 부서(bucer)에게서 배움.      ① 학교 교수 ② 종교회의 참석 ③ 500 신도의 목회자      ④ 저작 생활 : 주석(로마서) 변증서 “사도레토 감독에게 답함”(Reply to Sadoleto) 그리고        기독교 강요 개정판(1539)   ⑾ 1541-1564 : 제 2 제네바 교역      1541년에 시의회의 초청을 받자 친구(Viret)에게 말하기를 “교수대에 가거나 감옥에서 신음        하는 편이 더 낫겠다. 내가 천하에 여기(제네바)보다 더 무서워하는 곳이 없다,”할 정도로         돌아오기가 싫었으나 다시 파렐의 엄명으로 제네바에 돌아왔다. 그의 문장(紋章)에 남긴 유        명한 말은 칼빈의 믿음의 성격을 잘 나타낸다.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줄 아는        고로 내 마음을 칼질하여 죽인 것처럼 주님께 희생으로 바친다.”(When I consider that I         am not in my own power, I offer heart a slain victim for a sacrfice to the Lord.) (Cor        meum velut mactatum Domino in sacrificium)      또 다른 문장에는 prompte et sincere in opere Domini(주님의 일에는 성실하게, 빨리)   ⑿ 1541년, 교회 정치 조례 작성, 시의회에서 통과 (교회 조직, 예배의 개혁) (Ordinance of the        Church)   ⒀ 1541-1555년 투쟁과 마찰의 시기      칼빈의 개혁 법안에 대한 반대 세력과 투쟁, 칼빈을 지지하는 시의회도 칼빈이 원하는 만큼        의 시자체의 권징권 포기와 교회의 파문권을 인정을 하지 않으므로 이들과도 다투어야 하        였다.      ※ 반대세력         ① 자유사상가(Libertines) : 정치적 자유와 독립에만 관심을 둠.         ② 반율법주의자들(Antinomian) : 심한 권징을 신학적인 이유에서 반대함.         ③ 이단자들 : 세베르투스(Severtus)   ⒁ 1555-1564년(칼빈의 승리의 시기) 자유주의 운동이 전복됨.      불란서 피난민이 몰려듬(1549-1559년 사이에 5017명 전체 인구가 17000명으로 늘어남)   ⒂ 1559년, 제네바 대학 설립(the Academy of Geneve), 베자(Theodord Beza, 1519-1605)가 학        장에 취임.      첫해 162명이었으며 1565년에는 1600명으로 늘어남. 개신교 신학 교육의 모델이며 기독교         국가의 전형이 됨(제네바시) 이 학교가 유럽 전역의 복음 전파 기지가 됨.      1559년, 기독교 강요 최종판 완간.   (16) 1564년 5월 27일 칼빈 소천.  III-29. 칼빈 이전의 불란서 인문주의자 레페브르에 대해서 말하라.   ⑴ 레페브르 데따브르(Lefevre d' Etaples)는 스타우 플렌시스(Stauplensis)또는 영어로 페이버        (Jacobus Faber)라 불린다. 기독교 인문주의자로서 칼빈과 같은 피카디 출신이며 불란서의        에라스무스라 할만큼 불란서 종교 개혁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⑵ 파리 대학을 거쳐 이태리의 미란돌라(Miranddola, 1463-1494)의 영향을 받았으며 파리 대학        에 신학문의 선풍을 일으켰다. 1512년 바울 서한의 라틴어 주석을 출판하여 로마 카톨릭 교        회의 화체설, 공적론 칭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발표, 1509년 시편 주석과 함께 루터에게        영향을 끼쳤다. 1523년에는 신약 성경을 불란서어로 번역 출간하였다.   ⑶ 그의 영향하에 모의 주교(Bishop of Meaux) 브리소네(Briconnet)는 불란서내 교회 개혁운        동을 일으켰고 나바레의 왕후 마가렛(Magaret Queen of Naarre)은 적극 이 운동에 동조하        였으며 이단으로 정죄받은 레페브르의 보호자가 되었다. 칼빈의 선도자인 파렐은 브리소네        의 열렬한 제자이었다.  III-30. 칼빈의 선배 동역자인 파렐에 대해서 말하라.   ⑴ 귀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 불란서 개혁 교회사에서 가장 정열적이고 투쟁적인        개혁가이었다. 키는 작으나 목소리가 크고 두려움이 없는 이 붉은 수염의 전도자는 도피네        지방 가(Gap of Dauphine) 출신으로서 레페브르의 영향으로 개혁파 설교자가 되었다. (그         당시는 루터파라 불리워 졌음) 1523년에 벌써 불란서에서 도망쳐서 이후 불란서어를 쓰는        스위스 지방 종교 개혁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⑵ 베른(Bern) 중심의 활동. 후년에 뇌샤뜰(Neuchatel)에서 목회하였다. 삐에르 비레(Pierre            Viret, 1511-1571)를 로잔느의 개혁가로 만들고 칼빈을 제네바에서 일하도록 권하고 올리         베땅(Olivetan)과 함께 불란서 성경 번역에 착수하고 또 왈도파와 접촉하여 개혁 신앙을          가지게 하였다.   ⑶ 저서 : 소책자로서 1524년 주기도문, 1525년 예배서, 1525년 신앙개요 등을 저술하여 비록                학적으로 깊은 저술은 아니나 개혁파 신앙의 기본(Fundamentals)을 제시하고 있다.  III-31. 스트라스부르그의 종교 개혁과 부서에 대해서...   ⑴ 마틴 부서 또는 부처(Martin Bucer / Butzer 1491-1551)는 카톨릭 신부로서 1518년 루터와        교신끝에 개신교 설교가가 되고 1522년 결혼하였으며 1523년 로마 교회에서 파문 당했다.   ⑵ 그는 기독교 인문주의자로서 스트라스부르그를 시장 야곱 스트름(Jacob Sturm)과 함께 모        범적 기독교 도시로 개혁하였다. 스트라스부르그시의 특수한 지정학적 위치(스위스와 독일        의 중간 지점에 있는 제국 자유 도시)때문에 부서는 쯔윙글리와 루터를 화해시키려는 노력        을 하였다. 스트라스부르그를 중심한 남쪽 독일과 북부 스위스의 위대한 개혁가요 교회 설        립자가 되었다.   ⑶ 부서의 이상은 나중에 칼빈에게 전해졌는바 그 내용은 이상적 기독교 사회(Respublica             Christiana : 교회나 사회뿐 아니라 인간 생활의 전영역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주장)의 건설이었다. 이것은 기독교의 재생(Renewal)을 의미하는 거대한 구상이었다. 그의         저서 “그리스도의 왕국론”(Regno Christi, 1550)에서 이러한 이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⑷ 부서는 성찬론에서 그리스도의 “영적 실재”(Spiritual real presence of Christ)를 주장하여         루터와 다른 입장에 섰다. 그의 성령론은 개혁파 교회의 중심 교리였으며 그의 예배 모범은        개혁파 교회의 원형이 되었다.   ⑸ 부서의 영향은 컸다. 칼빈의 제네바가 생겨나고 영국의 개혁운동, 나중에 미국 뉴잉글란드        의 신앙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1548년 찰스 5세의 “잠정서”를 반대하다가 영국으로        건너가 1551년 사망하였다.  III-32.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대해서 설명하라.   ⑴ 칼빈이 26세 때 쓰고 다음 해 1536년 3월 스위스 바젤에서 초판이 익명으로 출간되었다. 8        절판 520페이지의 라틴어 판이었고 목적은 ①변증과 ②교육이었다. 모두 6장으로 되었는데        ①법(십계명) ②사도신경 ③ 주기도문 ④성례(세례와 성찬) ⑤잘못된 5성례 ⑥그리스도인의        자유. 이 순서는 루터의 요리문답서를 닮았다. 이 책은 즉각적인 성공이었고 곧 매진되었다.        재판이 요구되자 개정판을 내기로 하였다. 이때 벌써 국제적 명망을 얻게 되었다.   ⑵ 1539년에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라틴어 개정판을 출간하였다. 모두 11장이었고 그 중에 “하나        님에 대한 지식”, “신구약 비교”, “예정과 섭리”, “그리스도인의 생활”등 세 장이 들어가고         여기 부서의 영향이 크게 보인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생활”장은 부서의 “영혼의 참된 치         유”(The True cure of Souls)의 영향을 입었다.   ⑶ 1541년 불란서어 판이 나오다. 불란서어 문장에 큰 영향을 끼침.   ⑷ 1543년에는 전 21장으로 증보함, 1545년 재간, 1550, 1553, 1554 수정판(1545, 1551 불란서어        판)   ⑸ 1559년 최종 라틴어판, 전 4권이며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랐다.      ①성부 ②성자 ③성령 ④거룩한 공회   ⑹ 성격 : 성경의 진리를 단순(Simplicity) 명료(Clarity) 조직(System)적으로 설명하려 하였          으며 여러 차례의 개정판을 내었으나 근본적 원리는 변치 않았다.      목적 : 신학생들에게 성경공부를 위한 준비를 시키려함.      (to prepare students of theology for the reading of the Divine Word) 이 책은 칼빈             자신의 친구보다 책을 통해 전세계에 더 많은 친구를 만들어 내었고 개신교의 신학 교과서        로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총론(Summa Theologica)에 비견되며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에서 100년간 신학 교과서로서 쓰였다.Ⅲ-33. 신학자 칼빈에 대해서 설명하라.   (1) 칼빈은 제2세대 종교개혁가로서 루터와 쯔윙글리가 발상한 신학적인 문제를 발전시키고 난         제를 해결하여 견고한 신학체계를 수립하였다.   (2)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한 외부로부터 공격을 신학적으로 방어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는 수         많은 소논문(tracts)을 저작하였다.       ①사도레토에 답함(Reply to Sadoleto)       ②니고데모당에 대한 변명(Calvin's Excuse to the Nicodemites...... 1544)       ③교회개혁의 필요성(Of the Necessity of Reforming the Church)       ④트렌트 공의회 행동록(Acts of Synod of Trent with the Antidote)       ⑤재세례파에 대한 반박(Against the Sect of the Anabaptists 1544)       ⑥세르베투스를 반박하는 논문등   (3) 칼빈의 적극적인 신앙사상       ① 칼빈의 기독교강요(1559)는 “이신득의” 교리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지식”으            로부터 시작한다.  사람은 자신의 구원보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에 더 관            심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은 그의 신학            의 중심 사상이 된다.  칼빈은 이중 예정교리(Double predestination)를 주장하였다. 영            원한 선택(election)과 영원한 유기(Reprobation)가 하나님의 “무서운 법령” (decretum             horrible)으로 정해졌으며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온전한 섭리(Whole Counsel of God)하에            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함.       ② 칼빈은 사상 최고의 성경신학자이었다. 성경의 권위와 충족성을 믿었다.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전 성경의 주석이 이를 증명하고 기독교 강요를 비롯 설교, 기타의 소책자들은            성경에 근거하여 논술하고 있다.  이를 칼빈의 성경주의(Biblicism)라 한다.          그는 구약에서 신약으로 이르는 점진적 계시(progressive revelation)를 믿었으며, 계시            의 발전에 있어서나 계시를 이해함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와 활동을 믿었다.  따라서 성            경과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인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두 가지             기관이라 믿었다.(Cum Verbum說)       ③ 칼빈신학의 특색 중 하나는 그의 성령론이다.  성령의 독자적 역사(독립성)를 강조하          여 그리스도의 공로를 우리에게 전달시켜주고, 적용시킬 뿐 아니라 계속 성화를 책임지            고 역사하신다.             그리스도의 공로------성   령-------나   :   결과 = 칭의 = 성화                                   믿   음          이로 인하여 우리 구원의 객관적 근거로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고 칭의 교리에 성화            교리를 첨가하여 설명할 수 있는 교리적 체계를 세웠다.       ④ 칼빈의 성찬론은 성령론으로 해석해야 한다.  성찬의 자동적호력(ex opere operato)을             주장하는 로마카톨릭 교회에 반대하고 성령의 역사를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성도들은 다만 성령으로 인하여 믿음으로 그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 하였다.          따라서 감사, 기념, 재림에 대한 기대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며 성도들의 영적 교제            를 의미하기도 한다.       ⑤ 칼빈의 교회론 : 택자로 구성됨. 그러나 가견적 교회는 불택자도 간혹 섞여 있다 함.          참교회의 세 표징(mark)은          a. 말씀을 올바로 선포하고 듣는 것   b. 예수께서 세운대로 성례를 행함.          c. 권징.  사도신경 중 “성도가 서로 교통하며”를 해석하기를 영적 유익을 서로 나눈다              고 하였으며 “거룩한 공회”를 회복하려 하였다. 칼빈에게서 교회론은 특히 중요한 교              리중의 하나이다.Ⅲ-34. 칼빈의 제네바시 개혁에 대해서......   (1) 제네바市의 형편 : 1530년대 제네바는 정치적 종교적 혁명기에 처해 있었다.      사보이家와 대주교의 통치를 번갈아 가며 받아 오던 중 1536년 1월에 베른市의 도움으로         독립市가 되었다.  1534년 베른시에서 보낸 개신교 설교가들이 나타났고 1535년에 성상을         버리고 카톨릭 미사를 중지하고 1536년 5월 21일 시민총회(General Assembly)에서 복음대        로 살 것을 가결하였다.  이어 그해 7월에 칼빈이 제네바로 부임하게 된다.   (2) 제네바시는 12,000명 시민의 대표기관으로서 시민총회, 200인회(the two Hundred), 60인회        (the sixty), 소의회는 시민 직선에 의한 4명의 신딕스(Syndics)와 재무(theasurer)와 200인        회가 선출한 16인이 모여서 일상의 행정을 맡았으며, 200인회는 직종별 대표기관이고 중요        사는 총회의 의결을 거쳐야 되었으며 그리고 소의회가 시민들의 도덕생활에 대한 권징도         맡았다.   (3) 칼빈의 제네바市 개혁은 스트라스부르그 피난시절(1539-1541)의 경험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후 무려 14년이 지나서야 제네바시는 칼빈에 의한 개혁이 완전히 이         루어지게 되었다.(1541-1555)       먼저 유명한 교회정치 조례(Ecclesiastical ordinances of the church of Geneva 1541)를 통         하여 교회와 제네바市 개혁의 기준을 세웠다.       ① 예배 : 시내에 3교구가 있었는데, 주일새벽예배를 베드로 교회에서, 9시 오전 예배는 세            교회에서, 오후 3시 예배는 두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으며 각 교회에서 정오에 어린이들            의 공부가 있었다.  주중에는 각 교회에서 월, 수, 금, 아침에 몇 시간씩 설교가 있었다.       ② 직분 : 목사, 선생, 장로, 집사.        ③ 치리회(the consistory of Geneva)는 목사들과 장로 12인으로 구성되어 신앙과 생활의            제악을 치리하고 중요한 범죄는 다시 소의회에서 다루게 하였다.       ④ 제네바시는 중세 때부터 도덕적 타락으로 유명한 음란한 도시였다 추한 오락을 금하고            통행금지를 실시하였다.  춤추는 것, 연극, 음란한 노래들도 금하였다.  치리회는 예배            불참석, 음주, 도박, 욕설, 가정불화, 아내구타, 간음등을 다스렸다.  치리회는 소위 “형            제적 교정” (Fraternal Correction)을 통하여 교정을 시도하였으며, 고하를 막론하고 수            많은 사람들이 책망을 받았고 나중에는 여기에 반대하는 세력이 커져서 칼빈에게 도전            하였다. 그러나 1555년경에는 영국감독 죤 베일(John Bale)이 “기적”이라 할만큼 제네            바시는 완전히 개혁이 되어 깨끗한 도시가 되었다.       ⑤ 칼빈은 교육 개혁(어린아이들과 시민에게 요리문답 공부를 시키고 목회자를 위한 제네            바 학교를 설립했다.) 생활개선(거리청소, 야경, 난간 설치) 경제발전 (실직자를 구제하            기 위해 직조 공장 건설, 정직한 상업등을 장려) 병원과 빈민 구호 등에도 힘썼다.  개            혁된 제네바시는 각국에서 수많은 피난민과 신학생들이 모여들어 개혁운동의 모본이             되었으며 특히 스코트랜드 종교개혁(낙스)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Ⅲ-35. 칼빈의 예배모범에 대해서 말하라.   (1) 칼빈이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작성한 예배모범(1540, 1545)은 부서(Bucer, 1491-1551)의 영향         이 크다. 초대교회의 예배형태를 회복하려 하였다.      ①기원(Invocation) : 예 (시편 95 : 1-3)sursum Corda      ②고백(Confession)      ③용서의 선언(Declaration of absolution)      ④십계명 송(1-4) “주여 긍휼히 여기소서” (Kyrie Eleison)      ⑤십계명 송(5-10) “긍휼히 여기소서”      ⑥설교(Sermon)      ⑦연보(collection of alms)-구제헌금      ⑧주기도문 해설(Lord‘s prayer)              < 성  찬>         ⓐ기도(consecration prayer)         ⓑ권면(exhortation) : 경계, 성찬의 의미        ⓒ분배(두 종류)......회중은 시편138편 노래        ⓓ기도      ⑨축도        칼빈은 매주 성찬을 하려 하였으나 시의회와 절충하여 일년에 4차례 하도록 정하였으            며 “제한 성찬” (close Communion)을 하였다.   (2) 칼빈은 예배에서 회중의 찬송(Congregational hymn)을 강조하였다.(로마카톨릭은 신부들이         하였음)       1562년에 제네바 시편 찬송가(Geneva psalter)가 완성되었다. 일찍부터(1539)불리어진 것으         로, 칼빈, 마로(Clement Marot)베자의 시에다 루이 부르조아(Louis Bourgeois-d 1561?)의         곡을 사용하였다.       이때에 칼빈은 멜로디만 사용하려 하였으나 부르조아는 4부를 주장하여 1557년 제네바를         떠나 파리에서 시편 100곡(1551)을 출간하였으며 종교개혁 시기의 최대의 찬송가 수확을          거두었다.Ⅲ-36. 개혁교회의 네 직분에 대해서 설명하라.   (1) 목사(pastor) : 특별히 개혁교회에서 목사를 지칭할 때 pastor란 말을 쓴다.  이것은 목양의         직분의 중요성을 가리킴이다.  목사는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권면하며 성찬을 집행하고         장로와 함께 형제적 교정(Fraternal corrections)의 성격을 가진 치리를 행한다.  특별히 성         도의 영혼에 대한 보살핌(Seelencur)을 강조하였다.  쯔윙글리는 “목사(pastor)" 라는 소책         자를 발간하였으며 목사의 직책 중에 상담과 심방이 포함되어 있다.       칼빈의 제네바에서는 매주 목사회가 모여서 교구의 문제를 의논하고 일년 4차례의 목사회         가 모여 상호 권징(mutual discipline)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년4차 모임을 “목사회” (the Venerable Company of pastors)라 불렀다.   (2) 선생(doctors) : 에베소서 4:11,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교리의 순수성 유지, 목사 양성         을 책임지게 하였다.   (3) 장로(Elders) : 1539년 기독교강요에 설교하는 일과 분리된 치리하는 장로(ruling elders)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도라 믿었다.  평신도 중에서 교인들의 지도와 권징을 위해 “덕망있         고 믿을 수 있는“사람을 택하였다.  처음에는 소의회가 추천하여 시의회 회원 중에서 12명         을 뽑았으며 나중에는 각구역 별로 뽑았다.  이들이 목사들과 협동하여 ”시민의 도덕생활,         교회의 치리를 맡았다.   (4) 집사 : ①재정집사 ②구제집사를 선출하였다.Ⅲ-37. 칼빈의 국가와 교회論에 대해서 설명하라.   (1) 칼빈은 국가와 교회의 유기적 관계를 주장한다.  1555년 이후 제네바시를 정복한 칼빈의          승리는 교권의 승리라 할 수 있다.  치리회가 영적 문제에 대해서 자율권을 행사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시의회 승인 없이도 수찬 정지(Excommunication)를 행할 수 있게 되었           음.)       후일의 “자유교회(free church independent from the state)의 가능성이 싹트게 되었다.   (2) 칼빈의 제네바는 성경통치(Bibliocracy)또는 신정(theocracy)이라 불리어졌다. 이는 국가의         통치권이 같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며 통치원리가 성경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성경적 원리로         정치, 사회, 문화, 생활을 하려하였다. 치리회는 국가의 도덕적 역할에 대해서 기준을 설정         하고, 국가로 하여금 교회와 협력하여 사회 질서 안녕을 유지케 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단         순한 자연권이나 다수결 원칙은 칼빈의 사상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3) 또 하나의 유기성의 근거는 한 시민이 교회와 국가의 일원이며 시민들이 기독교 사회     (Respublica Christiana)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 기독교 사회에 목사와 행정가들은 하나님  의 일꾼일 뿐이다.Ⅲ-38. 후계자 베자의 활동에 대해서 설명하라.   (1)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1519-1605)는 불란서 부르군디 지방, 베즐레(Vezelay)의 오랜 전통의 카톨릭 가문에서 태어났다. 개신교 학자인 볼마르(Wolmar)에게 배우고 나중에 오르레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1548년 카톨릭 신앙을 포기하고 제네바에서 결혼하였으며 1549년에 로잔느(Lausanne)에서 희랍어 교수가 되고 1556년 세베르투스 화형에 칼빈을 옹호하는 글을 쓰고 동년에 희랍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1559년 제네바 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564년 칼빈 사후 40년간 칼빈의 후계자로서 개혁운동을 지도하였다.   (2) 성경학자 : 1565년 희랍어 성경출간, 이것은 17개 사본과 스테파누스가 수집한 상이한 어   구(variant readings)와 1550년 스테파누스(R. Stephanus)의 희랍어 성경본을 참고하여    최초의 비평판(Critical edition)이 되었다.  여기에 불겟(vulgate)역과 베자의 라틴어역이   포함되었다.  1582년에는 유명한 베자 사본(Codex Bezae)을 참고하여 제2판을 출간하다.       신학은 칼빈의 신학을 계승하였으며 칼빈보다 더 엄격한 하나님의 예정을 믿었다.   (3) 불란서 교회 개혁가 : 1561년 불란서 포와시(Poissy)에서 불란서 내의 로마 카톨릭 교회와  개혁교회의 연합을 위한 종교회의(colloquy of Poissy)에 참석하였으며 이것이 실패한 후  불란서내 교회 개혁운동에 힘씀.  1571년에 라로셀에서 모인 전국 총회(National synod  of LaRocelle)를 주도하고 1580년에 “불란서 개혁교회사”를 편집하였다.  불란서 개혁교도  들(유그노 Hugenots)을 위한 국제 외교 활동도 주목할만 하다.Ⅲ-39. 개혁교회의 전파에 대해서 말하라   (1) 독일 개혁 교회(German Reformed Churches)      ① 스트라스 부르그를 중심으로 개혁파 신앙이 남부 독일 라인강 유역으로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1548년 “아구스부르그 잠정서”(Augsburg lnterim)이후 루터파와의 투쟁이 계속    되어 1591년에는 스트라스 부르그에 루터파 신앙이 승리하였다.      ② 헷세(Hesse)지방도 필립공의 지도하에 개혁파 신앙을 견지했으나 1555년 “아구스부르     그 평화” 이후 루터파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③ 독일 서북방 화란과의 접경 지역에 개혁신앙이 전파되었으며 독일 서남쪽 파라티네이트    지방(the Palatinate)이 1545-1620년까지 독일 개혁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선제후 프     레데릭 3세는 루터파 교회가 로마 카톨릭과 다름없이 타락하는 것을 보고 칼빈파 신앙     을 가지게 되었으며 독일 개혁파 교회의 선봉이 되었다.  1612년에는 동북방 프러시아     가 개혁파 신앙을 받아 들였다.      ④ 여기에서 유명한 하이델 베르그 요리문답서가 우르시누스(Ursinus)와 올레비아누스        (Caspar Olevasnus)에 의하여 작성되었다.  멜랑톤과 칼빈의 사상을 조화시킨 개혁교     회 고백서이다.      ⑤ 계약 신학의 발전 :  우르시누스와 요한 콕크(John Koch 1603-1669)      ⑥ 30년 종교전쟁(1618-1648)과 웨스트팔리아 평화(the Peace of Westphalia)로 개혁파 교    회는 로마카톨릭 교회와 루터파와 대등한 권리를 획득하였다.   (2) 불란서 개혁교회(the French Reformed Churches)      ① 1555년 최초의 개혁교회가 파리에 설립되고 1557년 최초의 불란서 개혁교회 총공회(the           French national Synod) 전국 공회(A national synod)      ② 1561-1598, 불란서 개혁교도(유그노, Huguenots)들이 프란시스 1세를 비롯 불란서 절대           군주에 대해 무력항쟁을 하다.  콘데 왕자(Prince Conde)와 수많은 남불의 나바레                (Navarre) 귀족들이 신흥시민 계급과 합세하여 정치적, 군사적으로 개혁운동을 하였다.           1572년 “성 바돌로메 축제일의 대학살”로 수많은 순교자를 내었으며 무력투쟁은 1589            년 개혁교도인 헨리 4세(Henry Ⅳ)가 불란서 왕위에 즉위함으로서 일단락이 났으나, 헨           리는 형식상 카톨릭 교도가 되고 1598년에 낭뜨 칙령(the Edict of Nantes)을 내려 개            혁 교도들에게 신교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한정된 지역 내에서만 활동하게 하였다.      ③ 1598-1685, 90여년간 발전하였으나 그 동안 수 차례의 국내 전쟁으로 수많은 희생을 내           었으며 재상 리실루 추기경(Cardinal Richelieu)에 의하여 차츰 시민권을 잃기 시작하여            루이 14세(Louis XⅣ)때에는 낭트 칙령이 철회되었다.(the Revocation of Nantes 1685)           이 때 거의 50만에 달하는 유능한 유그노들이 영국, 화란, 독일, 심지어 미국으로 피난가           서, 영국의 경우 다음 세대의 대영제국의 위세를 떨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들중 12000명의 군인, 9000명의 수부, 직조기술자, 인쇄기술자, 은행가, 상인들)   (3) 화란 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es)      ① 화란 개혁교회의 설립은 루터파, 재세례파 개혁운동이 실패한 그 후속으로 설립되었               다.          처음 개혁파교회는 1548-1550년대는 카톨릭의 탄압으로 외지에서 피난민 교회로 시              작하였으나 화란내의 교회는 그들 스스로를 “십자가 밑의 교회”라 불렀고 교인들은              장로와 집사들이 다스리고 목사는 순회목사가 비밀리 다니면서 설교하였다. 1550-1560            에 지방 교회가 생겼다.      ② 1570년에 독일 엠덴(Emden)에서 최초의 화란 개혁 총공회가 모였다.(synod of Emden)           1571년에 속회를 열고 장로 정치 체제를 채택하고 노회(화란에서는 class라 부름)와 총           공회(National synod)는 개교회의 독립성을 깨뜨리지 않는 한도내에서 전체 교회사를 의           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신앙고백서로서 벨직 신앙고백서(the Belgic Confession, 1561)           와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을 채택하였다.      ③ 화란 개혁 교도들이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전쟁에 가담하여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드브           레(De Bres)화란의 개혁가로서 남쪽 화란에서 개혁운동을 일으키고 이것이 독립운동의           시발이 되었으며 오렌지공(the Prince of Orange)도 이에 가담하였다. 이때 화란 개혁교           도들에게 “혁명권”(the right to revolt)이 신학적 신앙적 난제이었다. 그들의 해답은 a.            합법적 기관을 통한 반란은 법적으로 간주한다. b. 폭군에 대하여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           기 위하여 위정자(magistrate)들의 항거는 용납되어야 한다. c. 참된 종교가 거짓 종교에           의하여 탄압을 받을 때는 항거도 가능하다. 화란의 독립전쟁은 오렌지공 윌리암이 화란           의 직접 통치자로서 안트웹(Duke of Antwep)의 공작으로서 폭군 스페인 왕으로부터 시           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벌린 의로운 투쟁이란 것이다. 이 전쟁은 북쪽 화란은 개혁파 신           앙을 받아들이므로 끝났으나 남쪽은 스페인에 의해 점령당하고 북쪽(지금의 화란)은              1648년 웨스트팔리아 조약으로 완전 독립하였다.      ④ 라이덴 대학 창설(Leyden university, 1575) 이 학교 교수인 알미니우스(Arminius,                 1560-1609)와 베자의 작정 신학 논쟁으로 1618-1619년에 도르트 공의회가 열려(the               synod of Dordt) 정통적 칼빈주의가 승리하였다. 고마러스(Francis Gomarus,                     1563-1641) 푸티어스(Gijsbert Voetius, 1589-1676)등의 정통신학자들이 도르트신경(the            Canons of Dordt, 1619)를 채택하고 칼빈주의 5대교리를 확정하다.          a. 이중 예정(선택과 유기 : Unconditinal election to grace)          b. 제한적 대속(Limted atonement)          c.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d.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e.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도르트공의회 이후 화란은 약 70년간 경제 문화적으로 최성기(Golden age)를 이루게             되나 18세기 이후 침체하게 된다.   ⑷ 그외 스코트랜드 장로교회, 영국 종교개혁들이 일어났으며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등에 개혁교회와 개혁파 신앙이 전파되었으며 지금도 체코, 헝가리, 개혁교회가 잔존하고         있다.C. <재세례파(Anabaptists)>Ⅲ-40. 재세례파의 종류에 대해서 말하라.   ⑴ 현대에 와서 제3 종교개혁파(the third Reformation) 또는 종교개혁 좌파(the left wing of          the Reformation)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재세례파는 그 당시에 이단 또는 과격한 종교         개혁가들이었다.(the Radical Reformation)   ⑵ 이 운동은 대개 그 성격상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① 복음적 재세례파(Evangelical Anabaptists) : 스위스 형제단(Swiss Brethren), 메노나이           트(the Menonites)등 복음적이며 독립교회주의(Free Church)자들을 가리키며, 주로 스위           스와 남부 독일 지방에서 일어난 교회운동이다.      ② 신령주의자(Spiritualists) : 주로 동부 독일을 근거로 한 이들로써 과격파와 온건파로 나           누인다.      ③ 합리주의자(Rationalists) : 합리주의, 인문주의자들로서 나중에 소시니안파 등이 이에 속           한다.Ⅲ-40. 복음적 재세례파의 활동과 성격에 대하여   ⑴ 스위스 형제단은 쯔윙글리의 종교개혁이 성경의 원리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더 철저        한 성경적 개혁을 요구함으로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주장은 개혁교회가 일어난 동        일한 환경에서 더 철저한 성경적 교회 형태와 신앙생활을 원하였다. 그들의 모토는 “초대교        회”로 돌아가자 함이었다.      ① 문자적 성경 해석      ② 신자들만의 교회(believers Church) / 국가교회 반대      ③ 권징으로서 출교(the Ban)      ④ 유아 세례 반대      ⑤ 정,교의 분리      ⑥ 전쟁 반대      ⑦ 도덕 생활 강조      ⑧ 전도 강조   ⑵ 쥬리히의 귀족 출신인 그레벨(Conrad Grebel C. 1498-1526)과 만쯔(Felix Manz)는 이미           1523년부터 쯔윙글리의 개혁이 너무 더디다고 헤어진 후 1524년에 유아세례를 반대하여          1525년에는 시의회와 마찰하게 되었으며 재세례를 베풀기 시작하였다.   ⑶ 1527년 시의회에 잡혀 만쯔가 익사를 당하고(재세례파의 첫 순교자) 몇 달 후 그레벨도 병        사하였다. 1528년에는 후브마이어(Balthasar Hubmaier)가 신부직을 버린 후 재세례를 받고        수천 명의 개신자를 배출한 후 오스트리아 대공에 의하여 화형당하였다.      1520년대에 스위스, 오스트리아, 남부 독일, 네덜란드까지 급속히 퍼져나갔다.      개혁교회, 루터파교회, 카톨릭에 쫓겨다니며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1648년 웨스트 팔리        아 종교 평화 이후에 신앙 자유를 얻게 되었다.Ⅲ-42. 메노파란 무엇인가?   ⑴ 메노나이트(Mennonites)파는 로마카톨릭 신부이었던 메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1561)의 설교와 전도로 이루어진 종교 집단이다. 그는 화란 출신으로서 신부가 된지         1년만에 미사의 효력을 의심하고 고향에서 재세례파의 순교를 보고 감동하여 성경을 연구         한 끝에 유아세례를 반대하게 되었고 재세례파가 되었다.(1536)   ⑵ 그는 과격한 정치적 세력으로 변한 과격주의를 피하고 온건파 노선을 취하였고 독일과 화        란 등지로 다니며 전도한 끝에 수많은 신자를 얻었다.      스위스 형제단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며 독립교회를 주장하였다. 높은 도덕적 생활을 주장하        고 그 방법으로 수찬금지를 행하고 파문당한 자와 교제를 금하였다.(Shun)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평화주의자이다.Ⅲ-43. 신령파란 무엇인가?(the Spiritualists)   ⑴ 성령론에 있어서 과격한 해석을 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① 쯔비카우 선지자들(Zwikau prophets)이라 불리어지는 일군의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성령의 직접적 계시를 받았다 하며 방언을 말하고 환상을 보며 임박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새 예루살렘 도래를 전파하였다.         토마스 뮌쳐(Muntzer)가 그들의 영향을 크게 입어 대표적 신령주의자가 되었다.      ② 멜키오르 호프만(Melchion Hoffman C. 1500-1543)이 스트라스부르그에 새 예루살렘이            선다고 하였으며 그가 감옥에 갇히자, 네덜란드의 문스터(Munster)에 새 예루살렘이 도           래한다고 하여 많은 재세례파가 모여들었다. 1534년에 시를 점령하고 요한 마타이스              (John Matthys)의 지도로 로마 카톨릭 세력과 싸웠다. 그가 전사하자 라이든의 요한             (Joth of Leyden)이 시의회를 해산하고 12장로와 함께 신정(theocracy)을 베풀었다. 성내           에서 모든 물건을 공유하고 일부다처제를 허용했으며 재림을 대망하였으나 1535년 루터           파와 카톨릭파의 군대에 의해 성이 함락되었다.   ⑵ 복음적 신령주의자(Evangelical Spiritualists)로는 슈펭펠트(Caspar Schwenckfeld,                  1489-1545)가 있다.      ① 모든 육체적인 것의 이면에 신령한 것이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과 성령께서 다스리는 영적 왕국이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도 “신령과 진           정”으로 해야 하며 기록된 성경 말씀과 제 2위인 “말씀”과의 차이를 주목하고 문자 배후           의 참된 뜻을 찾아야 된다고 하였다.         성찬론에 있어서 “영적 음식”이란 주장을 하고 합당하게 먹을 수 있을 때까지 성찬중지           (Standstill)를 권하였다. 또한 “영화된 그리스도의 육체”(Spiritualized flesh of Chist)설           을 주장하였다.      ② 슈펭펠트는 실레지아(Silesia)의 기사로서 궁전 관리이었으나 초기에는 루터의 종교개혁           에 동조하여 실레지아 개혁운동을 주도하였으나 카톨릭 반대파 때문에 지하에서 문서운           동과 설교를 통하여 일하였다. 수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루터와 칼빈에 의하여 이단으로           정죄 받기도 하였다.   ⑶ 평화적 신령주의자 세바스챤 프랑크(Sebastian Franck, 1499-1542)는 조직교회를 부정하고        극도의 개인주의적 신앙생활을 강조하였다. 영적교회(Ecclesia Spiritualis)를 주장하고 성령        께서 인간 내부에 하나님의 말씀을 조명하여 주며 성경의 문자적 기록은 무가치하다고 주        장하였다.Ⅲ-44. 합리주의자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가?   ⑴ 이들은 주로 반 삼위일체론자들로서(anti Trinitarian) 세르베투스(Servetus), 카스테리오           (Castellio) 나중에 소시니안파(Socinians)를 이루었다.   ⑵  파우스트 소시니(Fausto Sozzini, 1539-1604)는 메디치家의 비서로 있다가 바젤을 거쳐 폴         란드에서 반 삼위일체설을 주장하며 교회를 세웠다. 폴란드의 개혁교회가 이 주장으로 일         색이 되었다. 그의 주장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노를 다 풀어드리지 못하고 다만 어떻게         그 노를 풀어드릴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을 뿐이다. 성령도 인간의 마음         속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능력일 뿐이라 하였다.   ⑶ 합리주의자들은 이성에 호소하고 종교자유를 옹호하고 사상자유를 주장하였다. 따라서 기독        교 인문주의자들 중에 동조하는 이들이 많았으며 특히 개혁교도들 사이에 이 사상이 많이        퍼지게 되었다.Ⅲ-45. “신앙집단생활”파(Communitarian 또는 Christian Communism)란 무엇인가?   ⑴ 타이롤(Tyrol)의 재세례파 야곱 훗터(Jacob Hutter d, 1536)는 뮨스터 함락 이후 재세례파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자 타이롤의 재세례파를 규합하여 모라비아에 “신앙집단생활”을 시작하        였다.(1529-1536)   ⑵ 권위주의적 장로체제를 통하여 엄격한 집단생활을 하였으며 특히 파문(Excommunication)        과 접촉금지(Ban)가 강화되었으며 재산공유, 생산공유는 특색을 이룬다.      외부 사회와의 접촉을 끊고 하나님의 선택 받은 무리로써의 공동생활을 강조하고 스스로를        남은 자(the Remnanto)로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 하였다.   ⑶ 신학적으로는 “포기”(Gelassenheit)와 “고난”(Suffering)을 내면적 평화와 명정(clarity)을 이        룰 수 있는 방법으로 간주하여 중세 수도원의 신비적 요소를 엿보이기도 했다. 이 집단           (Gemeinschaft)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믿었다.   ⑷ 이들 외에 메노파, 아미시파(Amish)들도 공동생활을 하였다.D. <로마 카톨릭 종교 개혁>Ⅲ-46. 로마 카톨릭 종교개혁(Roman Catholic Reformation)이란 무엇인가?   ⑴ 일명 반동 종교개혁(the Counter-Reformation)이라 하는데 개신교의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카톨릭 자체의 신학과 신앙을 재정의하고 정비하려는 운동이었다. 종교개혁과 터키의 콘스        탄티노플 점령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카톨릭”적 성격을 잃어버리고 남구라파에 국한된        기독교의 일부가 되었다. 1500년 이후 교황은 이태리인에 국한되고 30년 전쟁 이후에는 로        마 카톨릭 지역이 한정되었다.   ⑵ 개혁운동은 ①개신교도들과 재연합하려는 운동과 ② 더 엄격한 카톨릭 노선을 주장하는 두        가지 운동으로 나타났다. 후자가 주도권을 잡은 카톨릭 개혁운동은 추기경 카라파(Cardinal        Caraffa 나중에 교황 바울 4세)의 주도하에 여러 개의 개혁 종단을 발생케 하였다.      프란시스파의 지파인 카푸친(the Capuchins)과 예수회(the Jesuits)가 개혁 기관으로서 중요        한 역할을 하였다.      교리적 재정비를 위해 트렌트 공의회(the Council of Trent, 1545-1563)를 열었다.Ⅲ-47. 로욜라의 개혁운동에 대해서 말하라   ⑴ 카톨릭 개혁운동의 주체는 스페인이었다. 이미 교회 내부에서 지메네스(Ximenes de               Cisneros)의 노력으로 성경 출간(최초로 인쇄된 희랍어 성경 : Complutensian polyglot,           1522), 도덕 향상, 알카라 대학(University of Alcala) 설립등으로 교육 향상을 가져왔다. 또         한 후앙 발데스(Juan Valdes)의 개혁 사상의 영향도 컸다.       전통적으로 스페인은 카톨릭 신앙에 전투적이었으며, 찰스 5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         하고 있어서 스페인 내의 종교적 통일을 이루어 놓았다. 한편 교황권에 대해서도 독립하여         독자적 교회로 발전하였으며 이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황을 옹호하기보다 전통적 카         톨릭 신앙을 옹호하려 하였다.   ⑵ 익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 C. 1491-1556)는 귀족 출신으로서 경험을 통하여 개혁        운동에 헌신하게 되었으며 강한 종교적 경험을 통하여 개혁운동에 헌신하게 되었으며 그의        “영적 수련”(Spiritual Exercises)이란 책에는 하나님과 교황에 대한 전투적 복종이 나타나         고 있다.      “오, 주여! 내가 가진 모든 것, 내 의지, 지능, 기억, 자유를 받아주소서. 당신이 내게 주셨으         니 당신께 돌려드리나이다. 모든 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전적 당신의 뜻대로 처분하시고          내게는 당신의 은혜만, 사랑만 주옵소서. 그것이면 만족하겠나이다.”       이런 정신으로 예수회(the Jesuit Order)를 창단하고 하나님과 교황과 교단 총수(general          of the order)에게 절대 충성하는 교회 기관이 되었다.   ⑶ 이들은 교육을 강조하고 개신교도들을 권면, 강권하여 다시 카톨릭으로 개종시키고 해외전        도로 교세를 펼치는데 힘을 썼다. 교육과 해외전도는 그들이 남긴 업적이다. 이들이 폴란드        를 다시 카톨릭으로 동구라파를 다시 카톨릭으로 되돌리었고 동양 선교, 아메리카 선교를         시작하였다.Ⅲ-48. 트렌트 종교회의(the Council of Trent)에 대해서 설명하라.   ⑴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카톨릭의 교리를 재정비할 필요에서 개최된 이 회의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제 19차 세계공의회라 인정하는 이        회의는 1545년 교황 바울 3세의 주제로 열렸다. 황제 찰스 5세는 루터파와 로마교와의 화해        를 바랐으나 교황은 자파 세력을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갔다. 1563년에 끝난 18년간        의 긴 회의였다.   ⑵ 루터의 “이신득의” 교리를 반대하고 겉으로는 “아구스부르그 고백서”와 비슷하나 가장 근본        이 되는 구원론에 있어서 신인 협동설과 믿음을 선행으로 보는 주장을 양보하지 않았다. 이        회의에서는 다름 교리를 재확인하였다.      ① 성경의 권위 : 구약, 신약, 외경.      ② 표준 성경 : 라틴 벌게트역(the Vulgate)      ③ 교회만 성경 해석권을 가짐.      ④ 7 성례의 집행은 안수 받은 신부만 할 수 있음.      ⑤ 만인 사제설 반대.      ⑥ 성례는 은혜의 힘을 가지고 있음. 자동적 효력.      ⑦ 화체설 인정.      ⑧ 미사는 희생이다.   ⑶ 교회 내의 부정을 근절하는 법률을 만들고 면죄부 판매를 강요치 않았다. 개혁 교황들이 나        올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 美國 敎會史             牧師 서영호       牧會者 養成院                     미국교회사 상식문제집0 . 서 론0 - 1. 미국교회사의 시대 구분을 하라.Ⅰ. 식민시대 (Colonial Age 1607-1775)Ⅱ. 서부개척시대 (Age of Expansion, 1776-1869)Ⅲ. 현대 (Modern Age 1870-1960)0 - 2.미국 교회사를 독립시켜 배우는 의의가 무엇인가?  1. 미국 교인들의 담당한 복음 운동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함.  2. 한국 교회의 성립과 발전을 이해하기 위함.  3. 앞으로 세계 교회의 진로를 예측하기 위함.0 - 3. 미국 교회사에 나타난 미국교회의 특색이 무엇인가?  1. 개신교 신앙의 경험 (Protestant Expeience). 정치․사회․경제․문화 전반에 걸친 미국 사회      의 제 영역에 기독교 신앙의 실험을 기도하였다. (소위 ‘거룩한 실험’(Holy experiment) )    "온 세계 국민들에게 성경에 나타난 모든 공의의 원리를 모본으로 보여 주기 의하여 미국은      기독교 나라로 시작하였다.” (우드로 윌슨)  2. 기본 구조상, 중심종족은 영국교인들(앵글로 색슨)이며, 신앙은 개혀가 신앙(Reformed faith)      이 기조를 이루고 있다.   3. 종교적 복수주의 (Religious pluralism)  4. 종교 행정산 자치의 원리.  5. 부흥운동(Revivalism)과 사회 구제(Benevolence) Ⅰ. 식민시대 (Colonial Period, 1607-1775)1-4. 식민시대의 구분은...... ?   A. 스페인과 불란서의 식민 활동   B. 식민지 13개주   C. 독립 전쟁 전후      A. 스페인과 불란서1-5. 식민지 이전 시대(pre-colomial age)의 미 대륙의 형편에 대해서 약술하라.  1. 미국 인디안들이 남 . 북 미대륙에 걸처 자체의 문화를 건설하고 살았다.   (예, 페루의 잉카 제국, 중앙 아메리카의 마야 제국)  2, 북미의 인디언들은 위대한 문명을 건설하지 못하고, 여러종족들이 광대한 지역에 산재하여        자기의 영토를 지키ㅗ 각기 호유의 언어와 풍습을 지니고 있었다.  정치는 강력한 추장 중심       제도이고,  여기에 종교와 생활의 지도자로서 “약성 (藥聖)” (medicine man)이 있었다.  생활       은 원시적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엿다.    3. 북미 식민지 경영은 9세기, 10세기 경에 바이킹족(the Vikings)이 생활공간(Lebensraum)를        찾아 해외 식민지를 개척할 때에 그린란드와 북미 대륙 동북 해안에 식민지를 개척한 일이       있다.  10세기 말애 라이브 에릭슨(Lief Ericson)이 그린란드를 개척하고 그 때에 교회를 세       웠으며 12세기에는 주교와 대 성당이 생겼다.  하나,  그 이 후의 소식은 전하지 않는다.  4. 1492-1607. 영국인이 제임스타운(Jamestown)을 건설하기 까지 약 100년간은 스페인의 독무       대가 되었다.            1-6. 북미에서 스페인의 선교 활동의 성격에 대해서 설명하라.  1. 정복자와 선교사(Conquistador and missionary) :     스페인의 선교의 특색은 정복자와 선교사가 언제나 동행하여, 멕시코와 페루를 정복하여 금을      빼앗고, 그 대신 인디언들에게 종교(세례를 베품)를 주고, 심한 경우에는 그들의 몸을 노예로      사로 잡아 금광에 취노시켰다.       상징적인 예 : 클럼부스가 서인도 제도에 도착하여 십자가와 스페인 국기를 꽂았으며, 국왕에                    게 편지하기를 원주민들은 “위에 하나님이 계시고, 또한 우리들이 하늘에서 왔                    다고 확신하고 있다. ”                  이들을 장 교화할 필요가 있으며, 많은 금을 얻게 될 것이라 하였다.    2. 북미에는 주로 플로리다(Florida)와 남 캘리포니아(South California)해안에 교역소를 설치하       여 북미 무역을 경영하였다.     이 지방에 주로 예수회(Jesuits)와 프란시스 파(Franciscans)선교사들이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방식은 선교 단지 (mission station)를 만들어 그들에게 식량 의복 교육 등을 제       공함으로 단지를 중심으로 인디언들을 정착하게 하고, 간단한 기슬과 농사법을 가르쳐 주었       다.     그 결과 인디언들에게 북음을 전하고 생활 개선을 시켰으나, 선교사들이 철수한 후에 인위적       사회는 무너지고 신앙이 계속되지 못하였다.  대체로 선교 정책은 강압적 대중전도(mass         conversion)와 토속신앙과 기독교신앙을 혼합시킨것이었다.  3. 폴로리다 성 어거스틴 요새를 세웠다(1565). 그러나 1588년 스페인의 무적 함대가 영국에 패       한 다음부터 사실상 북미에서  스페인 경영은 끝나기 시작하였다.     1647,1656년 수차례의 인디언들의 반항과. 1663년 이후 카롤라이나(Carolina)를 개척한 영국       인들의 남하정책으로 1702년 조지아(Goergia)식민지가 건설 되었다.1-7. 불란서의 식민지와 선교 활동에 대해서 설명하라.1.불란서의 식민지는 영국 식민지의 서부와 북부에 있었다.    북으로 세인트 로렌스 강(St . Lawrence)과 5대호에서, 남으로 미 대륙의 중부를 거쳐 미시시     피계곡(the Miss issippi Valley)으로 뻗혀 있었다.  이것이 항상 영국 개신교도들에게 위협이     되었다.  2. 1646년 불란서 선교사 이삭 쪼끄(Issac Jocques, 1607-46)가 모호크 족(the Mohawks)에 전도      하다가 도끼에 맞아 순교하였다.  1687년 5대호 동남쪽 지금의 뉴욕주에서 불란서인들이 영국      사람에게 패하여 카나다 궤벡으로 후퇴하였다.  3. 1754-63년 불란서는 인디언과 연합하여 영국 식민지와 싸워 패하였으므로(소위 불란서-인디       안 연합전, French-Indian War)서부의 모든 토지와 카나다 전부를 영국에게 양도하여 북미       는 사실상 영국 개신교도들의 새 영지(("nova terra")가 되었다.    B . 식민지 13개 주(Thirteen Colonies)1-8. 초기 영국 식민지의 종교적 중심세력은 어떠하였는가?   1 . 버지니아 주(Virginia, 1609) : 영국 성공회   2 . 메릴랜드 주((Marylans, 1636) : 로마 카토릭   3 .  펜실바니아 주(Pennsylvanin,) :퀘이커 교도   4 .  뉴욕. 뉴저지(Now York, New Jersey) : 장노교인과 화란 개혁교회   5 .  코넥티컷트 주(Connecticut)와 마사추세츠 주(Massachussets 1629) : 회중 교회   6 .  로드 아일랜드(Rhlde Island : 침례 교회 1-9. 버지니아 식민지의 개척과 영국 성공회의 설립에 대해서 설명하라.   1. 1607년에 식민자(Colonists) 105명이 제임타차운에 정착하여 1609년에는 500명이상의 거주         자가 있었다한다.  이들은 처음부터 신 대륙에서 개척할 것을 목표로 건너온 사람들 이었         다.  차차 담배농사를 짓고, 원자재를 본국으로 보내는 사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2. 초기의 식민지 경영은 청교도 세력이 중심이 된 버지나아 식민 회사(the Virginia Company,        1607-1624)의 수중에 있었으며,  그 결과 청교도 신앙을 가진 교역자들이 식민자들의 신앙        생활을 지도하고 인디언들에게도  전도하였다.  예컨데 휫타커(Alexander Whitaker,              1585-1617)같은 목사는 청교도로서 신 대륙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인디언들을 교화        시키려 하였다.      3. 버지나아 식민주에는 1611년 데일법령(Dale's law)를 공포하고      ①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명령하였으며      ②삼위일체 부정, 하나님의 이름 모독, 설교자 조롱등 범법자에게 각기 사형, 군법회의 회           부, 대형을 가하였으며,      ③주일 성수와 매일 아침 저녁 예배 참석을 의무화하고      ④목사의 권징권을 강화하였다.      4. 인디언들에 대한 선교 :휫타커의 노역으로 인디안 공주 토커혼타스(Pocahontas)가 기독교인       이 되었으며,  그녀는 1614년 영국인과 결혼하여 영국을 방문하고 크게 인디언 전도영열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1622년 적대적인 다른 파의 인디언들이 영국인 정착촌을 습격하여 347       명 전원을 물살한 사건을 계기로 이 지방의 선교 활동은 끝났다.      5. 1624년 이후 버지니아 회사가 해체되고 왕실 직영 식민지가 되자,  완전히 영국 국교 세력        이 뿌리를 박고, 성공회 예배의식. 성복착용이 강요되었다.      1642년에 뉴 잉글랜드 청교들이 버니니아에 정착하여 장노교 목사를 청빙하자 주 의회는         비 국교도들을 추방시켰다.  이후로 1776년 독립전쟁때까지 친 영국 로선을 취하였다,   6. 1693년 윌리엄과 메리 대학(William and Mary College)설립.1-10. 메릴랜드 주 개척에 대하여......   1, 매릴랜드는 대 토지 소유주인 볼티모어 경(Lord Baltimore)이 로마 카토릭 교도의 신대륙        식민주로서 1636년에 개척한 곳이다.  카토릭 교도 외에도 많은 신교인을 정착시키고, 종교       간의 반묵을 해소하기 휘하여 1649년에는 종교 관용령을 내렸다.      2. 메릴랜드 주에서는 영국 예수회 신부들이 전도하였다ㅓ.      3. 차츰 메릴랜드 주는 신교인들이 많아지고 제 4대 볼티모어 경이 신교인이 되자 영국 성공회        가 국교가 되었다.1-11. 뉴욕주의 화란 개혁교회의 시발에 대하여 설명하라.   1. 1621년 화란 서인도 식민회사가 식민지 개설 면장(a charter)을 얻어 1624년에 뉴 암스테르       담(New Amsterdam지금 뉴욕시)에 정착하였다.  1628년에 화란 개혁교회 목사 미타엘리우       스(Michaelius 1584 - ? )가 첫 교회를 설립하였다.  첫 예배에 50명의 성도들이 참석하였으       며, 화란 개혁교회는 국교회로 설립되고 모든 타 교파는 가정예배만 허락되었다.  여기서도,       우상숭배 금지(카토릭), 신성 모독을 국법을 위반한 범죄로 다스리었다.      2. 뉴잉글랜드의 장로 교인들이 뉴욕근처에 정착하였으며, 이들에게는 자유스러운 예배를 인정       하였다.      3. 1655년에 화란인들이 델라웨어에 살고 있던 스웨덴 정착민을 정복하여 화란 영지로 삼았다.        뉴저지와 펜실바니아에도 화란 정착민들의 교회가 섰다.   4. 1644년 영국이 뉴 네렐란드(즉 뉴안스테르담등 화란영지)를 무력으로 강점하여, 뉴 암스테르        담은 뉴욕으로 개명이 되고 영국 식민주가 되었다.  이후로 화란 거주민들은 영국 군대에         항복하는 대신 종교자유를 보장받았다.  많은 교인들이 영국 국교회 교인이 되기도 하였다.   5. 지금 미국 개혁교회(the Reformed Chrrch in America)는 그 후예들이 350년간 계속 교회활        동을 한 결과이다.1-12. 초기 뉴 잉글랜드(New England)식민지와 종교생활의 특성은 무엇인가 ?   1. 뉴 잉글랜드 식민주들은 버지니아 식민지(1607)다음으로 1620년에 미국에 설립된 식민주이        다.   2. 대부분 청교도들이 식민지를 건설하고 정착하였으며, 처음부터 종교지도자를 중심으로 신정       (神政, 소위 puritan theocracy)를 실시하였으며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es)가 국교가       되었다.   3. 종교문제는 극단적인 노선을 피하고 소위 “청교도 中道魯線” (puritan Middle way)를 택하       였다.  특히 개혁파 신앙을 가짐에 있어서도 엄격한 장로주의를 취하지 않고 합리적이며 온       건한 노선을 취하고 개교회 주의를 택하였다.1-13. 뉴 잉글랜드 식민지의 설립에 대해서 설명하라.   1.플리머스 식민주(Plymeuth colony, 1620) (나중에 1691년에 매사추세츠                        베어 식민주에 통합됨) : 소위 “필그림 조부들” (Pilgrim fathers)이 1620년에 건설한 식민주로      서 미국 역사의 신기원을 세웠다.       목사 존 로빈슨(John Robinsonj, 1575-1625)의 지도로 스크루비 분리주의자(Scrppby              searatosts)    들이 종교적. 경제적 이상향을 찾아서 당시에 관대한 화란 정부의 보호를 바라      고 1608년 화란 라이든(Leyden, 처음에는 아스테르담)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화란에 12년간      거주하는 동안, 그 곳이 적당한 정착지가 되지 못함을 알고 (1) 경제생활이 쉬운 곳 (2) 국민      적 특성 유지  (3) 아이들의 신앙교육을 잘 할 수 있는 새 땅을 찾던 끝에 제3자를 통한 어려      운 협상을 거처 미국 버지니아 주에 정착 허가를 얻었다.  1620년에 120톤의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65일 만인 11월 11일 뉴 잉글랜드의 케이프 코드(Cape Cod)에 도착하였다.  향로 착오      와 역경 등으로 허가 없는 곳에 상륙하였다.  항해자는 102명이었으나 대부분 영국 상인들이      데리고 온 용역부들이고 라이든 교인은 41명에 불과하였다.  이들 중에 외인들(stranger)이 원      망과 불평을 가지고 상륙 즉시 개별 행동을 취하려 하였으나, 상호 “메이플라워 제약(the         Mayflower compact)”를 맺고 정교일치의 식민지를 건설하기로 약속하였다.      (1) 그해 지사 선출  (2) 공동 창고 건립  (3)  거주 처소 마련  (4) 법(행정과 군사)의 제정       을 위한 전체 회의 등을 결정하였다.    다음해 1월과 2월의 추운 겨울에 추위와 고생으로 약 반수가 사망하였으며 어떤 때에는 하루      에 2 , 3명씩 죽어가고 성한 사람들이 6 , 7명밖에 없었을 때도 있었다.   2. 마사추세츠 베이 식민지(Massachusetts Bay Colony, 1630) : 존 윈쓰롭(John Winthrop, 1588     -1649)일행이 영국의 종교적 하락을 보고 근심하던 중 1629년 11멍의 청교도들과 협약을 맺고     마사추세츠 식민지 개척을 도모하였다.  1630년 4월에 출발하여 마사추세츠 만에 도착하였고      뉴 잉글랜드의 최대의 식민지가 되었다. (보스턴이 중심지)3. 뉴 헤이븐 식민지(New Haven Colony, 1638) : 목사 존 데분포트(John Davenport, 1597           -1669)는 찰스 일세의 고교회 정책에 반대하여 미국으로 도망쳐와서 1638년, 뉴 헤이븐(New      Haven0을 개척하였다.  1639년 교회를 “모으고” (gathered), 교회의 청빙에 따라 교역자가 되      었다.    뉴 헤이븐은 1664년 코넥티컷트 식민지와 연합하였다.4. 코넥티컷트 식민지 개척(Connecticut Colony, 1638) : 마사추세스의 독재정치를 피하여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목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정착지를 마련하였으며, 1638년 마사추세츠로      부터 독립한 후 하트포드(Hartford)를 건설하였다.1-14. 뉴 잉글랜드 식민지 설립 동기에 대해서 설명하라.1. 마사츠세츠식민주 지사 윈쓰롭(John Winthrop, 1588 - 1649)의 유명한 글, “기독교 사랑의 모      본” (A Model of christian charity, 1630)에 보면, 주된 동기가 영국의 중교적 타락을 개탄하고     신대륙에 이상적인 그리스도인 사회, 즉 하나님이 거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새 이스라엘”을 건     설하기 위한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1) 공의(Justice)와 자비(mercy)의 원리,  (2) 그리스도안     에서 중생의 원리,  (3) 공동 운명체 = 새 이스라엘의 원리,  (4) “산위에 세운 동네” 로서 만     국에 모본이 됨.  이러한 원리에 기초를 둔 새 세계의 건설이었다.   새 시도의 파국을 막기 위해서 제시한 처방은 선지자 미가의 충고이다.    “공의를 행하고, 자비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라” (to Doe Justly, to Love mercy,     to walke humbly with our God).2.분리주의(Separatism)가동기가되지 않았다. 식민자들은 대부분 비분리주의자(Non-separatist)청    교도들이었다. 심지어 플리머스 식민지의 존 로빈슨도 화란 체재시에 “영국 국교회 분리의 정당    성” (Justification of Separation from the Church of England, 1610)을 저술하였으나 그 후 비    분리주의 청교도들인 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 헨리 제이콥(Henry Jacob)의 영향으로 그    입장을 완화하였으며, 1618년에는 영국 국교회 교인들도 자기교회 교인으로 받아 드렸다.  1620    년에 버지니아 식민회사에 제출한 “7개신조” (the Seven Articles)에 보면 영국 교회를 인정하    고 있다.  마사추세츠의 교인들은 더욱 “사랑하는 어머니” 라고 옛 고국인 영국을 호칭하였으며 “길러준     젖이 싫어서 떠나는 ”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다만 비 분리주의자들은 영국 교회의 철저한 개혁을 주장하고(개교회 형태로 개혁을 바람 ) 개    교회를 실제로 유지하다가 어려움을 당하자, 미국으로 건너와서 그 이상을 실현하려 하였다.1-15. 뉴 잉글랜드 회중교회의 특성에 대하여 설명하라.1. 개 지방교회 중심 : 핸리 제이콥의 교회론이 기초2. 윌리엄 제임스(William Ames, 1578 -1633)의 “신학 진수” (The Marrow of Sacred Divinity,      1642)에 보이는 “온건한 칼빈주의” 신학을 가짐.3. 정부와 협조함.1-16. 케임브릿지 강령(Cambridge Platform, 1646)이란 무엇인가?1. 1646 - 1648년간에 마사추셋츠 베이 식민지 최고 법원(General Court)의 명령으로 4개 식민지    의 대표,  즉 장로(목사)와 대의원(Messenger, 평신도)들이 모여, 뉴 잉글랜드의 회중교회가 장    로교회와 어떻게 다르며, 국단적인 분리주의자(Separatists 즉 Baptists)와 다른 점을 규정하였     다.  여기에서 회중ㅇ교회 “정치 모범” (a model of church Governmont)를 채택하고 케임브릿    지 강령이라하였.  또한 이 회의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6)를 회중 교회 신앙고백으로 채택하였다.2. “정치 모범” 의 내용  ①교회는 “회중 교회” 라 불러야 한다.    ②회중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가견적 전투 교회의 일부이다(a part of the Militant           Visible Church).  부르심을 받은 성도의 무리들로 구성되며, 성약으로 한 단체로 연합하고,       주 예수와 교제함으로서, 하나님을 공적으로 예배하고 상호교육함을 목적으로 삼는다.  ③개 교회의 성립은 상호계약에 의함, “모인” 교회(a "gathered" Church)  ④직분은 장로(목사, 교사, 치리, 장로)와 집사직  ⑤선출 원칙과 청빙 제도(a call)  ⑥행정부와 교회의 협조  ⑦권징 강조  ⑧공회 제도 : 사도행전 15장의 성격대로 공회를 인정함.  소집권은 행정수반(magistrate)이 가지며,  공회는 신앙과 양심의 문제에 대해서 토론하며, 예배    모범과 치리에 대하여 결정하고,  특정 개 교회의 교리적, 행정적 잘못을 공회앞에 보고하여(증    거하여) 교정하게 하지만, 개 교회를 징계하지 못한다.3. 케임브릿지 강령이 마사추셋츠 교회의 표준이 되었으며, 콘넥티컷트 교회는 1708년에 세이부룩    (Saybrook Platform)강령을 새로 작성하여 사용하였다.1-17. 뉴 잉글랜드 교회의 헛찬슨 부인 사건(Controversy over Mrs. Hutchinson)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 1. 헛찬슨 부인은 1634년 영국에서 보스턴으로 이민와서 보스턴 교회의 존 콧턴(John Cotton)목사     의 은혜 계약을 즐겨 듣고, 자기 주위에 사람들을 모으고 보스턴의 여러교회 목사들의 설교를     비판하며  특히 행위 계약사상을 비난하였다.2. 이 비범한 여인의 주장에 콧턴 목사, 새로 선출된 베인지사(Govenor Vane)등 많은 시민이 동    조하였으며, 드디어 1637년 보스턴시는 반대파인 전지사 윈쓰롭 중심 세력과 서로 큰 대립을 겪    게 되었다.  윈쓰럽이 다시 지사에 선출되자 헛친슨 부인과 동조자를 최고 법정에 고소하여 정    죄하였고 “광야로 추방” 하였다.33. 지적된 중요한 잘못 : (1) 성령께서 칭의받은 성도의 심령에 거하심(*설명 참조)(2) 성화는 칭의의 증거가 아니다.  이것은 결국 성경에 나타난 계시외에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계시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잘못과, 성령에 의한 내적 확신을 강조하는 나머지 반율법주의      (Antinomianism)또는 정숙주의(Quietism)의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4. 헛친슨 부인은 먼저 로드 아일랜드로 피난하였다가 1643년 뉴욕에 간후 곧 한 명의 자녀만 남    기고 6명의 자녀와 함께 인디언들에게 살해 당하였다.5. 이 사건의 의의 : 퓨리턴 율법주의(Puritan legalism)에 대한 반발이다. 성령께서 개인의 심령에     역사하심과 개인의 양심생활이 억압을 당고 있었음에 댕한 항거이며, 동시에 은혜 주의, 양     심 주의를 고취하여 율법주의의 부당성을 지적, 시정코져 한 것이었다.1-18.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 1603 - 83)와 로드아일랜드 식민지 설립의 의의를 설        명하라.1. 마사추셋츠 식민지는 퓨리턴 신정을 펴고 있었으므로, 종교적 과격파를 용납치 아니하였다.  헛    친슨 부인을 추방한 동일한 사회분위기에서,  그 보다 먼저 로저 윌리엄스가 추방되었다.  그는 1631년 영국에서 찰스 일세의 등극으로 청교도들에게 미친 압박 때문에 보스턴으로 이민    왔었으나 과격한 분리주의 사상 때문에 추방되어 광야로 나왔으며, 인디언들에게 돈을 주고 땅    을 사서 1636년 프로비던스(Providence)를 개척하고, 1644년에는 로드 아일랜드 식민지 개척 면    장을 얻었다.2. 1639년 윌리엄스는 침례교인들이 프로비던스에 도착하여 최초의 침례 교회를 세울때에 협조하    고 자신도 재 세례를 받고 침례 교인이 되었다.  그러나 곧 땅위에 온전한 교회가 없는 것을 깨    닫고 “추구자” (Seekere)에 가담하였다.  이후로도 고드 아일랜드를 “양심으로 인해 박해를 받는 사람들” 의 피난처로 제공하였으며, 장    로교인, 궤이커 교도들의 피난처가 되었다.3. 로저 윌리엄스는 “종교 자유(Religious Iiberty) " 의 최초의 주장자이었으며, 위대한 정치 사상    가 이었다.  그가 부스턴 교회와 마찰된 것은 그의 과격한 정교 분리 사상과 민권 사상이 당시    로서는 사회 질서 유지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보스턴 재판 시에(a)영국 왕이 인디언들 땅에 대한 아무런 재산권이 없으며 면장을 발부할 권리도 없다.(b)불신자에게 맹세를 강요할 수 없다. (c)세속 정부는 종교 문제를 세속 권력으로 강요할 수 없다고 주장 하였다.  1644년 영국 체재 시에 쓴 유명한 논문 “양심 박해의 살인적 교리” (Bloudy Tenent of            persecution for Cause of Conscience)을 통해서 양심 박해를 금하고 종교 자유를 주장하였다.(a)종교와 국가의 영합은 파멸 초래, (b)종교 문제에 있어 강요(Coersion)는 절대 예정 교리와 이신 득의 교리에 위배, (c)양심 자유 인정(d) 칼을 가진 정부는 죄인의 회개를 기다려야지, 종교 문제에 칼을 쓰면 안 된다.4. 정치 사상가로서 민주주의 사상의 시발자이었다.  다른 뉴잉글랜드 식민주가 세례 교인들에게    참정권을 주는 데에 반하여, 처음으로 로드 아일랜드에서는 종교적 태도 여하에 불구하고 시민    권을 보장하였다.5. 시대에 앞서 미국 정치와 미국 교회의 진로를 설정한 셈이다.1-19. 하버드 대학의 설립 경위와 목적에 대하여...... ,1. 1636년 다사추셋츠 최고 재판소의 명령으로 “무교육” 목회자가 신대륙에 목회하는 일이 없도      록 설립을 명령하였다.  1638년 하버드 목사의 유언에 따라 그의 장서와 재산의 일부를 주 기      금과 함께 사용하여 설립하였다.2. 목적은 목회를 위한 준비 교육이었으며, 실제로 제2세대의 뉴 잉글렌드 교역자들은 대부분 이    곳 출신 이었다.1-20. 뉴 잉글랜드 제 이 세대의 특성은 어떠한가 ? 1. 1630, 1640년대의 대 이민(The Great Migration, 1640년대까지 약 20,000명이 영국에서 건너왔      다)  이후, 첫 세대의 믿음의 조부들은 세상을 떠나고, 제 이세들이 주격이 되었는데 이들은       현지 풀신이요 하버드 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이들이다.  대표자들은 밋첼(Jonathan Mitchell       1624 - 68),  솔로몬 스타더드(Solomon Stoddard, 1643-1729), 인크리스 메더(Increase            Mather, 1639-1723),  사무엘 윌러드(Samuel Willard, 1640-1707).2. 제 이세들의 시대는 모험시대를 이미 지난 신 대륙 개척시대로서, 일반적으로 신앙의 열기가     식어지고, 각기 자기생업에 분주하였다.  그리하여, 제 이세 목회자들은 소위 “개탄 설교”         (Jeremiads)를 통하여 일세 조부들의 신앙과 생활 모본을 찬양하고, 이세들의 종교 하락을 개탄    하곤 하였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충만으로 이 광야(미국)가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여 주실 것    을 계속 기다리자, ”하며(토마스 후커 : 1677년 코넥티컷 지사 선거일 설교) 신앙생활의 재 부훙    을 기도하였다.3. 또 제 이세들은 청교혁명(1642-1649)과 크롬웰의 공화정(1649-16558)이 끝나고, 왕정복고(1660)    로 인하여 뉴 잉글랜드의 자치와 회중 교회의 존립에까지 위협을 당하였다.  이 휘협은 명예 혁    명(1688)후까지 계속 되었다.  1691년 새 헌법이 주어 지고 영국왕의 간접통치를 받는 새질서가    생겼다.  이러한 불안한 분위기에 다시 1662년의 대 기근 : 1675 - 6의 인디안 전쟁(소위“King"    Philip's war) : 1676년의 보스톤 화재가 겹쳐, 뉴 잉글랜드는 사회적 히스테리에 빠질 정도 이    었다.  여기에, 1660대부터 목사들이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를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1-21. 반 계약(半契約 Half-way Covenant)논의란 무엇인가 ?1. 회중 교회의 정식 교인이 되며, 또한 특히 마사추셋츠 식민지에서 관리가 될 수 있는 시민권을   얻는 데에는, “중생의 체험(또는 증거)을 공중(교회)앞에서” 제시할 수 있어야 했다.  이것은 “계    약 원리(Covenanting)" dp 의한 것으로 중생한 성도가 하나님과 다른 성도와의 계약에 의항여    하나의 순정 교회가 성립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2. 제 이 세대 교인들은 대부분 중생의 체험이 있는 정식 계약저의 아들, 딸이었지만, 교회법이 요    구하는 대로(켕임브릿지 강령) 성년이 되어 공중앞에서 개인의 신앙고백을 하지 못한 경우가 많    이 생겼다.  이런 이세들을 “반 계약자”(Half Way Covenanters)라 불렀다.  문제의 발생은 이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제 삼 세들이 출생하여, 이드의 유아 세례와 입교     문제가 발생하였다.  공중 앞에서 개인의 중생의 체험과 신앙 고백을 못한 이들의 자녀에게 세    례를 베풀 수 있느냐 ? 3. 1662년 보스턴에서 열린 공회에서 반 계약자의 자녀에게 세례를 허락하도록 결정하였다.  이는     자유주의파의 승리이었으며,  이어서 큰 논쟁이 일어났다.  보수파에서는 이것이 교회의 타락     이며 회중교회 원리에서 이탈한 것이라고 공격하였다.1-22. 뉴 잉글랜드 교회와 사회의 개혁운동에 대하여 설명하라.1679년 인크리스 메더(Increase Mather)의  주동으로 “개혁 공회” (Reforming Synod)가 보스턴에 모여, (전일에 지방의 온 교회가 금식을 선포 하였다) 개혁 방안을 연구하여 공포하였다.주조는 “하나님께서 백성과 다투심” 이란 측면에서 먼저 죄를 찾았고, 다음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새로운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죄는 (1) 선생들이 하나님을 떠남  (2) 영적 교만  (3) 성도의 교제에 불법이 있음  (4) 하나님의 이름 모독  (5) 주일 어김  (6) 가정 예베화 치리의 불실  (7) 격정  (8) 무 절제  (9) 거짓말  (10) 세상을 사랑함(토지에 대한 욕심, 상인들의 부당이득)(11) 교회 개혁 반대  (12) 공중 도의 결여  (13) 관리들이 느헤미아의 정신이 없음  (14) 북음에 반대하고, 회개치 않음 등이다.1-23. “무당 색출” (a witch hynt)에 대하여......1. 1660년부터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를 설교하기 시작하였고, 거듭되는 재난에 겹쳐 1692년에 마     사추셋츠 살렘 촌(Salem Village)에 “마귀 떼가” 출몰하였다는 풍문에 의거하여 혐의자를 색출     하여 20명을 교수형에 처하였다.  그 중에는 목사도 끼여 있었고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였다 한     다.2. 잉크리스 메더가 무당의 교수형에 반대하였고, 아들 콧턴 메더가 무당재판에 동의한 것을 회개    하였음으로 그 이후로 “무당 색출”이 금지되었다.  1697년 재판소의 배심원들은 불충분한 증      거로 교수형에 처한 것을 회개하고, 동석한 판사는 금식일 주일에 교회 의자에서 일어서서 공개    회개하였다.1-24. 솔로몬 스타더드(Solomin Stoddard 1643-1729)의 성찬 참석자의 자격론에 대해서 그        의의를 설명하라.1. 솔로문 스타더드는 노스엠턴(Northampton)고회에서 60년간 목회하여 큰 영향을 끼친 분이며,      1679년의 “개혁 공회” 의 발기인 중의 한 분이었다.  특히 부흥운동의 선구자로서 5차례나 분     교회의 전도운동을 일으키고 1687년 유명한전도론, “심판일 안전 출드” (The Safety of           Appearing at the Day of Judgment, in the righteousness of Chrest, 1687)를 썼다.2. 한 혁명적 조처를 취하였고, 많은 반대를 불러일으킨 일이 발생하였다.  모든 “外見的 聖徒      (Visible saints)" 로서 흠이 없고, ”자기를 심사할 줄 알고 주의 몸을 분별할 수 있는 “ 사람이    면, 비록 중생의 확실한 경험을 말할 수 없다 할지라도 성찬에 참예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외견적 성도에는 “신앙 고백” 하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후손을 다 포함 시켰으며,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게 그들을 버린 것이 외관상으로 나타날 때에만 규제하게 하였다.    신학적 근거로서, 그는 주장하기를 모든 약속의 자녀는 잠재한 은혜의 유아(恩惠의 幼兒, a       germ of grace)가 있어서, 성찬에 참예 함으로 싹이 나게 된다.  그러므로 주의 몸을 분별할 나    이만 되면 성찬에 참예케 해야 한다고 하였다.3. 먆은 사람이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는데, 대체로 djadrur한 신앙 생활을 소홀히 하는 폐단도 발     생하였다.1-25. 세이부룩 信祭(the Saybrook Articles, 1708)란 무엇인가 ?1. 1701년 예일 대학(Yale College)의 설립 : 처음에는 코넥티컷트 식민주 세이부룩에 세워졌으나    1716년 뉴 헤이븐(New Haven)으로 옮겼으며 1718년 예일 대학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설    립의 동기는 하버드 대학이 자유주의 경향을 띄게 됨에 따라 보수적이며, 또 가까운 지방 대학    의 설립을 원하게 되었다.2. 1708년 코넥티컷트 회중교회 총회(General Assembly)에서 영국 회중교회의 “사보이 선언문”     (the Savoy Declaration, 1658)을 정식 채택하였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칼빈주의를 재확인 한 셈이 된다.3. 1691년 영국 런던과 근교의 장로교 목사들과 회중교회 목사들의 연합 안,  즉 소위 “同意首題”  (Heads of Agreement, 1691)를 코넥티컷트 총회에서 채택하였다.4. “세이부룩 新祭”를 작성하였다.  이 신조는 회중교회 정치 원리를 규정하였느데,  특색은 과격    한 개 교회 주의를 떠나 “중앙통제” 적 성격을 띈 제도를 창안하였다.  그 목적은 교회 치리(     Church disciplin)이었다.    그 내용을 보면  ① “지방회” 창설 의무화 : (regional Consociation) : 여러 인법한 군(郡)내의 교회 연합회아며,       개 고회에서 치리 할 수 없는 문제들을 대회(Council)을 열어 해결하게함.  ② “목사회” (Association) : 각 군이나, 도시에는 하나 또는 여러개의 목사회를 조직하여 목사       를 고시하여 임직에 협조하게 하였다.  이것은 코넥티컷트 회중교회가 장로교회 정치 체계릎       원용하려는 시도이었으며, 나중에 1801년 장로교회와 “연합 계획” (Plan of Union)의 기초가       되었다.X X X X X 1-26. 식민지 시대의 미국 중부 식민지(the Middle Colonies, 뉴욕, 뉴저지, 델라웨어, 펜실바        니아)의 종교적 특색에 대하여 설명하라.1. 다양성 : 장로교, 개혁교, 독일, 개혁교회등 칼빈파들 교회와 ; 스웨덴루터파와 독일 루터파 교     회 : 그리고 과격파 교회들 즉 메노파(the Mennonites), 슈벵크펠트파(the Schwenekfelts), 덩     커즈(Dunkers, 형제교회)모라비아(Moravians), 침례교와 퀘이커교도들이 종교 자유를 누리며      발전하였다.2. 종교 자유3. 종교적 이상주의 : 이상 사회 건설 시도.1-27. 초기 미국 퀘이커 고도(American Quakers)의 신앙 생활 역사에 대해서...... .(1) 이들의 정식 명칭은 “친우회(親友會 Society of Friends)이다.  1646년 영국에서 창설자 조지      팍스(George Fox, 1624-1619)가 내적 광명을 (Divine Light)받고 각인은 이러한 내적 광명을      개발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형제“ (Friends)를 모았다.  봉급을 받는 목사제도를 인정하지 않     으므로 평신도들이 설교하며, 특히 ”공적 형제“ 들이(Public Friends) 순회전도를 담당하였다.2. 1640-1690년대에 영국에서 큰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며, 이들 중 일부가 1656년 처음 미국에 건     너와 전도하다가 뉴 잉글랜드의 청교도들과 정면 충돌을 하였다.  특히 윌리엄 로빈슨(William     Robinson)은 1659년 보스턴에서 주 행정청(최고 재판소)의 명령을 어기고 전도하다가 참수형을     당하였으며 이듬해에 동역자 여성도가 사형을 받았다.  이것이 미국과 영국에 큰 충격을 주었     다.3. 1672년 팍스의 미국 방문이후, 미국 퀘이커들은 조직과 제도를 정비하여 교단적 종교 생활을     시작하였다.  신학적 근거로 “내적 광명의 일체성” (Unity of the Light)을 강조하였다.  그 구    체적 결과로(a) "초일 집회“ (初日集會, First Day Meeting),(b) “월례회“ (Monthly Meeting) : 사업 및 징계(c) “년회 (Yearly Meeting) : 해당 지방 집회(Meeting)의 최고 권위기관, 이 년회는 매 지방마다      독립된 기관이었으나.  런던의 ”년회“에 복종하게 하였다.4. 1681년 펜실바니아 식민지의 성립과 함께 여기에서 영주처를 마련하였다.  주로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미국 초기의 상업에 공헌하고 여러 마을을 개척하였다.1-28. 윌리엄 펜(William Penn, 1644-1718)의 거룩한 실험(Holy Experiment)에 대해서...... .(1) 궤이커 지도자인 윌리엄 펜은 그 부친(영국 해군 제독)에게 국왕 찰스 이세가 진 빚의 대가로     펜실바니아 식민지를 받았다.  이 광대한 영역에 자기의 종교적, 정치적 기독교 이상을 실험     허여 하면서 이것을 “거룩한 실험” 이라 하였다.(2)1681년 펜 주를 정식 개설하고, 처음에 영국과 웨일스의 궤이커 교도들, 다음으로 독일계 제 종    파들 스카치 아일랜드의 장로교인들이 도착하였으며 18세기에는  루터파 들이 도착하였다.  이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단, 무신론자들은 배격하였다)  이상적인 기독교 정부를 구성    하려 하였다.    그의 정부론 : ①인간 내부에 있는 내적 광명을 믿었기 때문에 그것을 개발하면 훌륭한 정부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으며,  ②정부는 그 자체가 종교의 일부이며, 시작에서 끝까지 “신성한     것” (a thing Sacred)이다.  ③법치주의, 인민의 자유 정부 설립을 자장하고 실천하였다.    그 결과  교파를 막론하고 시민권이 평등하게 행사되었으며 개신교 또는 유대인과 천주교인 까    지 포함한 소위 “미국적 사회”(American Society)형성에 절대적 영향을 끼쳤다.  즉 복주주의 + 민주주의 + 협동적 기독교 이상(Common Christian Ideal) + 실용주의 사회 건설    이다.1-29. 초기의 독일계 이민의 종교적 성분과 성격에 대하여...... .1. 지금도 미국에서 소위 “펜실바니아 덧취” (Pennsylvanis Dutch)라 불리워지는 사람들은 초기의    독일 개신교도 들의 후예들이다.  선착자들은 퀘이커 교도로 개종한 메노파 사람들로서 1683년    필라델피아 교외에 저먼타운(Germantiwn)을 건설하고 개척하였다.  1688년에는 메노나이트들의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이들은 평화주의자(Pacifist)요, 국법에 순종하고 성실, 근면한 사람들로서    수많은 마을을 개척하고 농사를 일으키고 학교를 세워 자녀들을 길렀다.2. 덩커즈(Dunkers 또는 Taufer, 1908년이후에는 “형제 교회”, the Church of Brothren) : 이들은     1719 - 20년 사이에 도착하였으며,  독일 침례교인이라 불리워 지며, 역시 평화주의를 주장하     였다.3. 슈벵크펠드 교회(Sohwenckfelds) : 1733 - 34사이에 도착 중생과 새생활을 강조하는 북음주의    교회아나, 대륙에서 이단으로 핍박을 받았다.4. 모라비아 교회(the moravians) : 이들은 “형제 일치회” (Unitas Fratrum)라 불리어지며 일찍 조    지아 주에서 살다가,  1740년 펜 주로 옮겨와서 여러 도시를 건설하였으며 1741년 진젠도르프     가 펜 주를 방문하여 교회를 통일 . 정비시키고, 유명한 베들레헴 마을을 건설하였다.  이상에 열거한 종파들은 대륙에서는 제 삼 세력이라 하여 배척받은 집단들이지만, 펜 주에서 훌    륭한 교회를 세웠다.  대부분 신앙적으로 초대교회(Primitive Christianity)를 모본으로 삼고, 철    저한 문자적 성경주의를 믿고, 세속 문명을 멀리 하였다.  정직 . 근면 . 성실 . 청결 . 권위에     대한 순종등,  그리스도인의 덕성을 힘쓰고 공동 생활내지 준 공동 생활을 하였다.  1-30. 독일 개혁교회의 서립에 대해서...... .  1719년 필라델피아의 저먼타운에서 처음 교회가 설립되었다.  독일 개혁파 교회는 화란 암스테    르담 노회에서 목사파송을 받았으며 자연히 미주 내 화란 개혁파 교회와 긴밀한 협조관계를 가    지게 되었다.  유명한 지도자는 슐레터(Michael Schlatter)이었으며 그는 1744년 필라델피아에서    제 일회 총회(Coetus)를 결성하였다.1-31. 루터파 교회의 설립에 대해서...... .1. 루터파 교회는 1703년부터 산발적으로 미국안에서 활동하다가, 1742년 뮬렌버그(Henry            Melchior Muhlen Berg, 1711 - 87)가 할례 경건주의자의 파송을 받아 필라델피아에 도착하여     조직 . 정비 되었다.  1748년 루터파 대회(Ministerium)를 조직하였다. 1-32. 초기의 침례교회 역사를 설명하라.1. 뉴 잉글랜드에서 시작 : 1639년 로드 아일랜드주의 프로비던스(Particular Baptists)교회였으나,   1652년 이후 일반 침례파(Grneral Baptists)로 성분이 바뀌고 이어 1670년 침례회 연맹이 결성    됨. 특별 침례교는 1641년 분립하여 뉴 포트(New Port)를 개척하였음.2. 중부 식민지 : 1684년 특별 침례고회가 서고, 1698년에 필라델피아 교회가 섰으며, 1707년 특별    침례교 연맹(소위 Philadelphia Asseciation)이 필라델피아에서 결성되고, 독립전쟁때 까지 미국    침례교회의 중심이 되었다.1-33. 미국 장로교회의 시작에 대하여...... .1. 1706년 필라델피아에서 7인의 장로교회 목사들이 회집하여 첫 노회(Presbytery)를 열므로 미국    장로교회가 성립되었다.  이것은 처음부터 구 대륙의 장로교회와 별도로 독립된 노회를 결성한    것이다. 2. 지도자는 북 아일랜드에서 이민온 프랜시스 멕케미(Francis Makemie, 1658 ? -1708)목사어였으    며, 많은 곳에 교회를 설립하였고 한 때는 뉴욕에서 지사의 허가없이 복음을 전하다가 구금되기    도 하였다.  멕케미의 전도 활동의 결과는 미국 장로교인 특색의 한나인 “종교 자유” 사상을 가    지게 한 것이다.  스콧트랜드와 달리, 미국적 형편을 고려하여 “국교회주의”를 버렸다.    이것이 급속한 성장요인의 하나다 되었다.  178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제23장을 수정하    여 채택하였다.      C . 독립전쟁 전후1-34. 미국 독립 전쟁 이전의 종ㅇ교사상의 두기지 큰 조류는 무엇인가 ?1. 대 부흥 운동(the Great Awakening 1730, 1740년대)으로 나타난 부흥운동(revivalism)2. 합리적 기독교(rational Christianity) : 계몽사상의 기독교적 적용.1-35. 대 부흥운동의 시발에 대하여 설명하라.1. 북미의 대 부흥운동의 기운을 일으킨 이는 화란 개혁파 교회의 목사인 프렐링하이젠(Theodore     J . Frelinghuysen, 1691-1748)이다.  1720년 그가 뉴저지의 뉴 부른스위크(New Brunswick)에     정착한 화란 개척자들의 교회를 담임하면서 부흥운동이 일기 시작하였다.  시발은 성찬에 참여    하는 이들이 아무런 준비 없이 참여하여 성찬을 더럽힘을 보고, 진정한 회개를 강조하였다.  교    회 치리를 실시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그리스인의 내적 투쟁(inner struggle)을 설교하고, 개인의    경건 생활을 지도하였다.  그의 설교는 감정이 고조된 설교이었다.2. 프렐링하이젠의 영향을 받은 장로교 목사 길버트 테난트(Gilbert Tennent, 1703 - 64)도 곧 부    흥운동가가 되어 영적 무감각 상태에 빠진 교회를 부흥시켰다.  그의 부친 윌리엄 테난트(1673-1746)는 1728년 네샤미니(Neshaminy)에 “통나무 접대학” ( "Log    College")을 세워 15명이상의 전도자를 배출시켜 모두 이 부흥운동의 중심 인물이 되게 하였다.  그 결과 ① 뉴저지 장로교회 일원에 부흥운동이 일어나 점점 북상하여 뉴 잉글랜드 출신장로교    인들이 정착한 곳으로 퍼져 나갔으며,  ② 펜실바니아의 뉴 란던데리(팩스 마노아 Faggs Manor)에 큰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학교를 세    워 목사들을 길렀다.  장로교 목사들의 부흥회 방식은 교리 설교와 회개의 촉구이었으며, 구체    적으로 기도의 계속, 사설 신학교 설립, 은혜없는 교회를 떠날 것 , 등을 요구하였다.  이 때문에, 장로교회 안에는 부흥운동 반대파가 생겨났고, 부흥운동을 지지하는 파는 1738년     “뉴 브룬스위크 노회”를 조직 하였다.  1741년 반대파( “OId Sids" 라 부름)는 신파("New Side")    를  축출하였으며, 신파는 1748년 뉴욕 대회(Synod of New York)로 확장하고 1758까지 분열이    계속되었다.  이 동안 부흥운동을 지지하는 파는 급속히 성장하였으나, 필라델피아 대회는 답보    상태이었다.1-36. 1730년대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 1703 - 58)의 “대 부흥 운동” 에 대해        서 설명하라.1. 1734년 마사츠셋츠 노스엠턴(Northampton)교회에 대 부흥운동이 일어 났다.  시발은 뉴 잉글랜드에 알미니안 주의가 크게 기세를 떨치고 교회가 힘을 잃어 감을 보고, 목사    에드워드가 “하나님의 주권” 과 하나님께서 죄인을 회개시키는 강력한 역사를 증거하였다. 그     결과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6개월만에 300명이 회개하고 교인이 되었다.2. 에드워드의 설교는 필기 설교이었으며, 그는 하루에 13시간씩이나 서제에 파묻히어 있는 학자    이었지만, 놀라운 부흥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는 부흥운동의 변증가이었으며, 특히 그의    유명한 저서 “종교감정론” (Treatise on the Roligious Affcctions)(1746년 보스턴에서 출판됨)은    부흥운동에 수반되는 종교적 감정을 옹호한 책이다.  그 내용 : (1) 종교에 감정이 엇으면 참된 종교가 아니다.            (2) 종교적 감정에 따라 일어나는 신체적 변화는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은혜로운                   감정”이다.             (3) 일반적 감정과 그종류가 다른 “참으로 새롭고도 거룩한 감정” 이 있다.                이것은 “새로운 내적 지각” (a new inward perception)인데 일종의 “특별한 맛”                  (a sort of special "Taste")이라 하였다.              (4) 이러한 경험으로 말미암아 영적 실재가 참된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영적 실재                 (Spiritual reality)로 말미암아 이러한 경험이 발생하며,  결코 상상에 의해서, 또                 는 이전의 감각적 경험의 잔재를 마음이 재 조작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악령이 거짓된 유사한 감정을 조작할 수는 있다.3. 에드워드는 외할아버지 스타더드가 목회하는 동안 성찬 참석을 자유스럽게 한 것을 잘못으로      알고, 다시 엄격한 표준을 세웠다.  중생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반드시 따르     며, 은혜의 표가 없는 이들은 회개하기를 외쳤다. 새로운 은혜의 경험을 가진 이에게만 성찬에     참예하게 하였다.   1734-1735년의 내 부흥의 뒤를 이어 1740년 휫필드의 부흥 운동이 뉴 잉글랜드를 휩쓸어, 부흥     의 불길이 계속 되었다.  1742년에 에드워드는 노스엠턴 교회 회중과 “성약”(Covenant)를 맺      고, 온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악과 가증한 일을 버리고 하나님을 찾으며, 그만 섬기기로 약속     하고 다음과 같은 결정을 하였다.  (1) 이웃에게 공의, 정직, 방정을 힘쓴다.  (2) 젊은이들은 기도에 힘쓰고, 음란을 버린다.  (3) 의무와 책임  (4) 전 생애를 신앙으로 산다. 신앙 사업이 최고의 사업이다(The business of religion is the greatest business) 그 결교 노스앰턴은 밤늦게 유혹하는 버릇을 버리고, 사람들이 영원한 세계와 종교의회에는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4. 에드워드의 영향은 지대하였다.  뉴 잉글랜드 전역에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또 새로운 복음 신학이 발전   되었다.  이것이 보스턴 중심의 합리주의 신학과 대립하게 되었다. 1-37. 휫필드의 전도여행의 성과에 대하여 설명하라.1. 휫필드(George Whitfield, 1714 - 70)는 도합 5차례나 미국을 방문하였다.  1738년 조지아 고아    원 설립을 위해 방문하였고, 길버트 테난드의 설교를 듣기도 하고 필라델피아에서 큰 부흥을 일    으켰다.  제일 중요한 사건은 1740년 재차 방문하여 뉴 잉글랜드에 큰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이때에 에드워드와 그 제자들과 합세하여 곳곳에 다니면서 전도하였고 수많은 외적 증거들이     나타났다. 그 결과 뉴 잉글랜드에 25,000여명의 결신자가 생겼고(30만 인구중에서) 사횡; 일어난    도덕적 변화는 지대하였다.2. 그러나 하버드 대학을 중샘으로 반대 운동이 일어 나, 합리주의 기독교가 강하게 등장하게 되    었다.  비난의 이유는 (1) 부흥운동이 너무 비판적이고(2) 열광주의 이고(3) 사람을 속여 기부금을 빼앗아 내고(4)즉흥 설교와 전도 여행 등이다3. 성과 : ①한 사람의 노렬그로서 미국 성도들를 일깨워 독립적인 신앙과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개인적 “자의식”을 개발시켰고(정신면), 또한 산발적인 부흥 운동을 하나의 통일된               복음운동으로 발전시키므로, 처음으로 식민지 13개 주를 통일된 운동으로 연결시켜               하나의 “동동체 의실”를 심어 주었다. 이것이 미국 독립을 가능하게 한 요인이 되었              다.          ②합리주의 기독교에 대항할 수 있는 복음주의 기독교를 강화하였다.  1-38. 대 부흥 운동이 남부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 설명하라.1. 대 부흥운동은 남부 조지아에서 북부 뉴 잉글랜드에 미친 거국적 운동이었다.  그러나 남부에     서는 줘로 서쪽 변방에서 크게 일어났으며,  특히 펜실바니아에서 남하한 스카치-아이리쉬 장     로 교인들과 새로 일어 나는 침례교회 감리교인 사이에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2. 장로 교회 : 사무엘 데이비스(Samuel Davies, 1723-61)   목사는 “통나무 대학” -> “뉴 란던데리 학교” 계통의 부흥 운동의 소산이며, 1748년 버지니아     식민지 하노버(Hanover)에서 장로 교회를 시무하면서 열심과 웅변으로 장로 교회를 급진적으     로 성장시켰으며,  종교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인디언들의 변경 침입과 약탈에 대하여 애국     적인 설교로 지원병을 일으켜 식민 정착지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이것이 바로 미국 독립 전쟁과 연결이 되었다.  1755넌 하노버 노회가 조직되고, 나중에 남 장     로교회(Southern Presbyterians)의 모체가 되었다.3. 침례교회 : 설교가 슈발 스터언즈(Shubal Stearns, 1706-71)는 1755년 뉴 잉글랜드 대 부흥운동     에 회개하고 잠시 분리의 교회에 속하였다가 1751년 분리주의 침례교인(Separate Baptist)이      되었다.   1755년에 몇 명의 교인과 함께 노스 카롤라이나의 샌디 크릭(Sandy Creek)에 정착     하여 침례교회를 설립하였다.  이 교회는 목사의 독특한 부흥 설교로 인하여 급속히 성장하여     곧 “샌디 크릭 침례교 협의회 ”(Sandy Creek Association)을 조직하였다.   스터언즈의 설교 방법은 과도한 감정주의이어서, 독특한 몸짓, 뚫어지듯 응시하는 시선, 특수한     음조를 사용하였다.  (“거룩한 신음” holy whine).  청중들은 울고, 부르짖고 또는 기쁨의 환      성으로 응답하였다.  1788년 분리주의 침례 교인들이 특별 침례교인과 연합하였으며, 이것이      남 침례교의 시발이 되었다.  남부의 특별 침례 교인들은, 이전에는 일반 침례교인이었으나, 대     부흥운동의 결과 엄격한 칼빈주의 신학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두 파의 연합은 칼     빈주의 신학 + 감정적 따뜻함이 합하여 남 침례 교회를 대 교단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4. 감리교회 : 대 부흥 운동의 결과로 많은 성도들을 감리교회로 조직하였다.1-39. 미국 독립 전후에 등장한 계몽 종교(Enlightened religion)에 대하여 설명하라.1. 미국의 17세기는 정통시대이었으나,  18세기초에 자유주의 경향이 은밀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종교적으로는 알미니안 주의의 형태로 나타났는데,  청교도주의의 합리적 요소가 그것에 영합하    였다.  1742년 찰스 찬시(Charles Chauney, 1705-87)가 휫필드의 복음운동을 “열관적”이라 반대    하였으며 1744년에는 하버드 대학이 그에게 합세하였다.2. 하버드 대학에 자연신론(Deism)에 입각한 신학이 유행하였다.  신론 : 우주의 절대자 한 분을    상정하였다.  일위론적 경향이다.  인론 : 인간의 능력 긍정, 구원론 : 보편 구원셜을 주장 하였    다 자연과학적 종교관을 가졌다.3.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h, 1706-90),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등    은 자연신론(Deists)를 신봉하였다.  프랭클린은 미국적 실용주의의 원조이다.  과학과 종교를     실용적인 면에서 그 가치를 추구하여, 많은 실용적 발명(피뢰침, 열 난로, 등), 많은 공공이익의    제도(도서관, 소방대, 대학), 그리고 실용적 도덕주의를 창조하였다.  그의 도덕주의는 소위 선행    주의(Dogoodism)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에 선행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많은 금언을 수집하였다.  (부지런은 행복의 어머니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운다.  일    찍 자고 일찍 일어나면 건강하고, 부유하고 현명하게 된다.)4. 계몽 종교는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저조를 가져 왔다.  대 부흥운동은 이것에 대한 기독교 신앙     의 활력을 반증하는 운동이었다.1-40. 불란서 인디언 연합절(French Indian War of 1754-63)의 의의에 대해서 설명하라.1. 불란서가 영국 식민지의 북부와 서부에서 큰 위협이 되었다.  정치적 의미에서 뿐 아니라, 불란    서 카톨릭세력이란 점에서 종교적 위협을 겸하였던 것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거룩한    경험”을 실천할 수 있는 개신교의 승리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승인으로도 간주될 수 있다. 2. 영토적으로 남부의 스페인을 몰아내어 플로리다 대신 불령 뉴 올린스와 루이지이나를 스페인에    게 양도하고 서북부와 미시시피 동부 전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것이 독립 전쟁 후 서    부 변방으로 개척 이동하게된 동기를 부여하였다.3. 불란서와 인디안 연합군을 대항하기 위하여 식민지 군대가 각지에서 조직. 훈련되고 실전에 참    여하여 승리를 맛보았다.  이러한 무력이 독립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이 되었다.  1-41. 독립 전쟁의 발단과 결과에 대하여 설명하라.1. 식민지의 정치적. 종교적 자유 추구가 전쟁의 동기이다.2. 영국 정부가 인디안 전쟁의 경배를 충당하기 위하여 식민지 쥐의회의 결의를 거치지 않고 영국    의회가(Parliament)임의로 인지세(Stamo Act. 1765)를 부과하자, 식민지의 세금반란(Tsx          Revclt)이 일어났다.  이것이 영국상픔 불매운동을 일으키어 1773년 보스턴 홍차소요(Boston      Tea Party of 1773)을 발생시켰다.  일련의 반영 사태가 계속 일어나자 1774년 식민지들은 대륙    회의(Continental Congress)를 소집하고 사태를 논의한 끝에,  1776년 독립선언을 하게 되었다.    1776년 연방 헌장(Articles of Confederation)을 작성하였고,  1781년에 정식 채택되었으며, 이해    에 전쟁이 끝났으며 1783년 파리 조약으로 영국과 강화하였다ㅣ.  1789년 미국 연방헌법이 채택    되었다.             Ⅱ .  서 부 개 척 시 대Ⅱ-42. 독립 전쟁이 교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말하시오.1. 1786년 버지니아주가 “종교자유형”(An Act for Extablishing Religious Freedom0을 공포하였     다.  버지니아 하노버 노회(장노교회)가 1776년 의회에 청원하였고 제퍼슨이 1779년에 의회에     제출한 법안의 통과로 인한 결과 이었다.2. 성공회의 재편 : 영국교회(the Church of Engoand)가 “개신교 감독교회” (Protestant Episcopal     Church)로 미국의 한 독립교단이 되었다.3. 감리교 독립 : 1784년 웨슬레 권고에 따라 영국 모교회에서 독립한 “감리교회(Methodist          Episeopal Church)가 탄생하였다.  첫 감독들로서 토마스 콕크(Thomas Coke )와 프란시스 애     슈베리(Francis Ashbury)를 선출하였다.Ⅱ-43. 독일전쟁후 장로교홰의 발전에 대해서 설명하라.1. 1788년 장로교회는 정식 총회를 구성하에 되었다. (The Presbytre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a) 신앙고백서는 웨스트민스터 고백서에 부분적으로 수정을 하여 교회 헌법으로 채택하였다.(b) 총회는 총대제도를 택하고, 최종 권한(Ultimate power)을 노회에 두었다.   이 점이 스콧트란드 장로교회와 다른 점이다.  (거기서는 총회 결의가 최종적이다.)(c) 미국 장로 교회의 총회 제도는 미국 연방의회 제도를 원용한 것이다.Ⅱ-44. 독립후 뉴 잉굴랜드 교회의 발전에 대해서 설명하라.1. 뉴 잉글랜드 회중교회에는 세 파가 뚜렷이 부각되었다.   (a) 하버드 중심의 자유주의자(liberals)  (b) 예일 중심의 홉킨스 파(Bopkinsians)  (c) 옛 칼빈주의자(Old Calvinists)2. 자유주의 : 찰스 찬시(Charles Chauncy)의 자유주의(알미니안주의)와 윌리엄 채닝(William         Channing)의 합리적 기독교가 뉴 잉글랜드 지식층을 사로잡았다.  여기에 대항하여 에드워드     와 그외 제자 사무엘 홉킨스(Samuel Hepkins, 1721-1803)등이 신학 투쟁을 벌렸다.  여기에 보    수파 칼빈주의자들이 합세하여 하버드 대학과 자유주의자를 “일위론자”(Unjitariams)이라고 공    격하였다.  그 결과 1825년 자유주의자들이 “미국 유니테리안 협의회(American Unitarian Association)을     구성하고 회중 교회에서 분리해 나갔다. 메사추셋츠 동부는 거의 전부 일위파 교회가 되었으며,    서부를 중심으로 25교회를 빼고 나머지 125교회가 유니테리안이 되어버렸다.Ⅱ-45. 홉킨스 신학 (Hopkinsianism)이란 무엇인가 ? 1. 사무엘 홉킨스(Samuel Hopkins, 1721-1803)는 예일 출신이며 조나단 에드워드의 수제자로서      에드워드의 신학을 집대성하여 1793년 “고리 체제” (System of Coctrines)를 저술하였다.  그     는 에드워드의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많이 완화시켜, 인간의지의 자유를 좀 더 많이 허용하     였으며, 하나님의 사랑, 죄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당조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변론할 때에,    하나님의 그러한 측면을 부정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본래의 개혁파 교리에서 조금 이탈하     게 되었다.2. 그는 기독교인의 덕성을 말할 때에 “사욕없는 사랑”(disinterested benevolence)를 최고라고 한    다.  도덕적 타락 또는 죄는 “자기 사랑”(Self love)이며, 여기에 반대되는 것이 “사욕없는 사      랑” 이라 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19세기에 많은 사회개혁협회의 조직, 해외 및 국내전도, 사회    사업을 일으키는 동기가 되었다.3. 예일대학의 신학이 되었으며, 온건한 복음주의(Evangelicalism)를 만들어 내었다Ⅱ-46. 초기 서부 개척과 교회의 역할에 대여 설명하라.1. 독립 후에, 인디안 전쟁으로 얻게된 광대한 미시시피 이동의 영역으로 서부 개척 “붐”이 일어    났다.  초기의 서부 개척(지금의 中部)은 주로 1790-1820사이에 동부 해안의 초기 식민지에서     서부로 이동한 것이다.  그 결과 1729년 켄터기 주 성립, 1796년 테네시 주,  1803년 오하이오,    1816년 인디아나가 합중국에 가입하고: 남부에서는 1803루이지아나를 매입한 후 1812년 루이지    아나. 1817 미시시피, 1818일리노이, 1819알라바마 1821년 미주리주가 설립되어, 1821년 합중국    의 수가 25개에 달하였다.  계속하여 미국은 1846 오레곤 조약, 1848 멕시코 분할로 태평양까지    이르러 제2차 서부 이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2. 이동의 양상은 동부의 뉴 잉글랜드는 북부로 중간 주는 중부로, 남부는 남부로 각기 평행하게    서부로 이동하였다. 그 결과 각기 정치. 사회. 종교적 특색이 그대로 서부에 이식되었다.  이것    은 후기 즉 19세기 중엽의 서부 개척 때에도 마찬가지이었다.3. 이러한 급속한 사회적 변화에 교회는 신속히 변경 개척민의 사회적. 종교적 요구에 부옹하여  개척교회 설립과 전도 활동을 강력하게 폈다.  이 시기의 특색있는 종교 활동으로는 “천막 집회” (Camp meeting)를 들 수 있다.  교파별 교회    가 설립되기 이전에, 초교파적으로(대부분 개신교) 넓은 곳을 정리하여 부흥회를 열고, 산재한     개척민들이 천막을 치고 며칠씩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았으며 성한 때에는 교파별로 나누    어 집행하였다.  이러한 천막 집회에 나타난 강렬한 부흥 운동의 표징들로써는 넘어지고, 구르    고, 고함치고, 몸을 비틀고, 또는 웃어대는 등의 과격한 현상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이러한 부흥 집회가 변경의 도덕적 수준을 높였고,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결    과를 낳았다.  주로 변경지대에 침례교와 감리교가 크게 활동하였으며, 그 결과 급격한 교세의    성장을 가져 왔다.Ⅱ-47. 장로교와 회중교회의 “연합 계획” (Plan of Union)의 설립 동기와 그 내용에 대해서         설명하라.1. 동기: 1801년 장로교 총회에서 코넥티컷트 회중교회 협의회와 합의하여, 서북면 개척지에서 교          회 설립과 전도에 협조할 것을 결의하였다.  1804-1830년 사이에 뉴 잉글랜드의 다른 협          의회(Consociation)도 이 계획에 가담하였다.2. 내용: 어느 교회에서든지, 어느 개척지에 먼저 교회를 세우면 양 교파에서 그 교회를 안정하며.          그 개 교회는 어느 교파에서나 목사를 청방할 수 있으되, 그 묵사는 자기 소속 노회나 연          합회에서 치리를 받데 한다는 것이다.  개교회는 세례교인 수에 따라 어느 교파에 든지           소속할 수  있고, 문제가 생긴면 서로 협의하여 해결하게 하였다.        1808년에 장노교회 총회는 “조절 案” (Accomodationplan)를 채택하고, 회중교회 지방 연          합회(regional Consociation)를 장노교회 대회(Synod)의 회원으로 받아 드리고, 그 개교회          의 행정과 이름은 회중교회 명칭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그 결과 많은 회중교          회가 장로교회에 속하게 되었다.  이런 교회를 “장로-회중교회” (Presbygational Church)          라 불렀다.  나중에 회중교회의 장로교 유입은 장로교회 분열의 씨가 되기도 하였다.Ⅱ-48. 제이차 부흥운동의 발생의 경위와 결과에 대해서 설명하라.1. 독립 후에, 특히 1780년대에 신앙이 저조하고, 신학은 자유주의 노선을 취하고 교회는 침체하     였다.  거기에 일차 서부 개척시대가 도래하여 영적 세력의 발흥이 크게 기대되고 있었다.  이    런 차에 다시 미국 동부 지역에 제이차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그것이 바로 변경으로 연결되어     개척지 부흥의 불길을 일으켰다.2. 제이차 부흥운동은 남부의 여러 대학에서 먼저 일어났으며, 이것이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의     부흥운동을 연쇄적으로 일으켰다.  뉴 잉글랜드에서는 1792년 매사추셋츠의 리(Lee)마을에서 부    흥 운동이 일기 시작하여,  1802년 예일대학에 부흥의 불이 붙었다.  예일대학의 교장 드와이트(Timothy Dwight, 1752-1817)는 에드워드의 손자로서 이신론(Deism)    과 합리적 기독교를 “불신” (Infidelity)으로 규정하고, 예일대학에서 4년간 정통교리 설교를 하    여, 학생들에게 바른 교훈을 깨우치고, 특히 성경의 권위와 확실성을 변증하였다.  그 시대에 참    기독교화 불신을 예리하게 대립시키어, 참된 도리를 구별하여 세상에 제시하였다.  그 결과       1802년에는 학생 (3분의 1)이 회개하고, “대학은 작은 성전이 되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찬    양과 기도는 큰 즐거움이 되었다.”  예일의 부흥은 곧 다른 대학들에도 번져 가서 다터머스       (Dartmouth), 윌리엄스(Williams)앰허스트(Amherst)에 부흥이 일어났다.3. 결과 : (1) 분리 운동: 대표적인 예가 유니테리안과 회중교회의 분리(1825). 컴벌란드 장노교회                          분립등.          (2) 신학교설립: 예, 하버드에 대항하여 안도버 신학교 설립(Ando ver Theological                               Seminary, 1808) 프린스턴 신학교(1812)등         (3) 계속적 부흥운동: 1830년대 찰스 피니(Charles Finney, 1792-1875), 1850년대 무디                                 등.          (4) 대 선교운동: 초 교파적 선교단체 구성.         (5) 각종 협회 발달: 미국 교육 협회(1815) 성서공회(1816), 식민협회1816), 주일학교 연                               맹(1817-24), 노예제도반대협회(1833)등.         (6)감리교와 침례교의 부흥Ⅱ-49. 선교운동의 발달에 대해서......1. 제이 부흥운동의 결과로 선교 열이 고조되었다.  1810년, “미국 해외 선교 위원회”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가 설립되고 많은 안도버 신학생들이 선교사가     되었다.  1822년 첫 선교사를 인도에 파송하였다.2. 각 교파 별로 해외 선교부가 설립되었다.  1814침례교 선교부, 1817에 장로교, 1818년 감리교에   선교부가 설치되고, 영국교회와 함께 19세기를 “위대한 선교의 세기”로 만들었다.Ⅱ-50. 변경에서 성공한 감리교와 침례교회의 성공의 비결은 무엇인가 ?1. 침례교의 경우: 소위 영국 개신교의 주류교파(Main line)들인 회중교회, 감독교회(성공회), 장로     교회가 대 교회로서의 조직과 신앙생활의 제도 때문에 급변하는 변경의 종교적 요구에 신속히     응하지 못한 반면에, 침례교회는 개 교회의 독립성, 평신도를 쉽게 교역자고 기용할 수 있음,      기본적인 정통교리의 설교, 감정적 요소 등으로 쉽게 변방민(frontiers man)들 사이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①천막 집회  ②개 교회 설립  ③ “겸손한 설교가” (a humble Baptist          Preacher)=일하면서 설교함, 교육의 부족을 메꾸기 위하여 겸손과 열심히 교역함.2. 감리교의 경우 : 고도의 조직을 유지하나 서민에 친근한 교회 생활을 인도하였다.  특히 순회     전도인(Circuit rider)제도는 변경민들에게 튼 위로가 되었으며, 곳곳에 교회를 심을 수 있었다.  그 대표자는 애슈베리 감독(Francis Ashbury, 1745-1816)인데 일 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남.     북. 동 .서 미국 대륙을 순회하면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교회를 심었다. Ⅱ-51. 변경지방 부흥운동으로 생긴 새로운 교회들에 대해서 설명하라.1. 컴벌랜드 장로교회의 분립(Cumberland Presbyterian Church 1810)= 캔터기 주의 노회가 분립    함.  이유는 부흥운동의 열기 속에서 컴벌랜드 조회가 교육적으로 자격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강    도사 허락을 해 주였기 때문에 켄터기 대회의 징계를 받자 독립한 것이다.  100년의 성장 후에    1906년 미국 장로교회(북장로교회)와 연합하였다.2. 장로교 켄터기 대회에서 1803년 스론(Barton W, Stone, 1722-1814)이 신앙고백서 보다 성경 중    심을 부르짖고 독립노회를 구성하였다.  이것이 발전하여, 성경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인의 통일    을 구상하면서 “그리스도인 교회”(Christian Church)라 불렀다.  나중에 침수례가 성경적이라고    받아드렸다.3. 변경지방에서 활약한 켐벨 부자(아버지Thomas Campbell 과 아들 Alexander Campbell)들은 본    래 스콧트란드의 장로교 일파 출신인데 역시 스톤처럼 장로교회서 탈회하고 성경을 유일한 기    초로 삼고 좁은 신조주의를 배격하였다.  이들도 나중에 침수례를 받아들이고,  침례교인을 많    이 제자로 얻게 되었다.  이들은 “제자교회” (Disciples)라 불리어진다.  1832년에 이들이 “그리스도인 교회” 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제자” 교회(the Disciples of        Christ)를 이루었다.4. “셰이커” 협회(Shaker Society, 1787)= "어머니“ 앤리(Mother Ann Lee, 1736-84)가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와서 결성한 단체이며 교리 : ⓐ 세상에서 격리.  ⓑ 독신주의.  ⓒ 완전주의.       ⓓ 영모 앤을 예수의 재현, 성령의 재현으로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여성적 요소가 나타났으     며, 예수의 사역을 계속한다.  ⓔ공동생활. 이들도 주로 켄터기 오하이오 등 변경 지방에 출현     하였다. 1830년까지 크게 성장하여 한때에 6,000여명에 이르렀고, 그후에 성장이 멈추고 어떤      것은 20세기까지 지속되는 공동체가 있다.Ⅱ-52. 1830년대 피니(Charles Finney, 1729-1875)의 부흥운동에 대하여 설명하라.1. 피니는 장로교 목사로서(1836이후 장로교회를 떠남)1820년대에 서북 뉴욕주에 큰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1830-31년 로체스터 집회후 동부에서도 크게 성공하였으며,  라이먼 비처(Lyman      Beecher)와 연합하여 금주운동(Temperance movement)에 힘썼다.  후기에 금주운동=부흥운동     의 등식을 세우는 데에 공헌하였다.  자선운동(Benevolent movement)에도 힘을 썼다.2. 피니의 부흥회 인도의 “새 방법”(New measures) : (a)집회를 정규예배 시간이 아닌 특수한 시    간에 열고, 어떤 때에는 하루 종일 설교함.  (b)감정적이며 교훈적인 공중기도를 함.  (c)여성의    공중기도 인도,  (d)설교시 꾸짖고, 사투리를 사용하고, 욕설등을 함.  (e)설교나 기도시에 개인    을 지명하여 꾸짖어 회개하도록 압력을 가함.  (f)집호를 개인별로 또는 작은 모임을 갖고 질문    에 답함. 개인지도,  (g)강단 앞자리(Anxious bench) 미국 부흥사의 특색을 이루게 하였다. Ⅱ-53. 오벨린 완전주의(Oberlin Perfectionism)에 대해서 설명하라.1. 온건한 완전주의를 피니와 메헨(Asa Mahan)이 1830년대에 강조하였다.  피니가 오벨린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였기 때문에, 오벨린을 중심으로 부흥운동과 완전주의 사상    이 보급되었다.2. 이것은 성화교리인데, 기독자가 완전 성결에 이를 수 있다함이 아니고 완전을 향하여 성장할     것을 말함이다.  “몸과 생활 전체가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전적 일치” 할 수 있지만, 완전의 최    고봉에 도달하면 높은 세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고 하였다.3. 온건한 완전주의라 할지라도 감리교의 성결 교리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메헨은 성화는 이 세상에서 가능하다고 했다.  기독자가 세상에 사는 동안 끊임없는 평안과 죄     의식을 가지지 않고 살 수 있다고 하였다.Ⅱ-54 과격한 완전주의에 대해서......1. 완전 성결(Perfect holiness)를 주장하여, 한 율법 주의(Antinomianism), 심하게는 성적 문란에     까지 이르게 되는 경우가 발생하였다.2. 존 노이즈(John F, Noyes, 1811-86)은 1848년 오네이다(Oneida)공동체를 설립하여 공동생횔을     하였으며, 완전 성결 원리에 의하여 복수 결혼(Plural marriage)제도를 제정하였다.   그는 완전 성결에 이른 이는 죄을 벌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1879년 이 제도를 폐지하고     동동 작업으로 생사제조기. 철기류 등을 제작 판매하여 경제적으로 성공하였다.   1831년에 공동체가 주식회사 형태를 취하여 은 식기 제품을 생산하였다.Ⅱ-55 래프의 공동체 개발에 대하여 설명하라.1. 조지 래프(George Rapp, 1757-1847)는 독일 태생으로1803미국으로 이민와서 인디아니에 뉴 하    모니(New Harmony) 공동 사회를 창설하였다.  공동 노동으로 농산물을 생산하고 모직공장, 제    분 공장 등 산업을 일으키었으며, 훌륭한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들은 1824년 핏츠버그 근처에 에코노미(Economy)라는 공동체를 설립하고 공동 생활을 하였    다.2. 래프파는 그 공동체의 이상으로서, “단순” “사랑” “희생” 기도와 예배, 그리고 노동을 힘썼으며,    전원이 독신생활을 하였다.  이 아름다운 사회도 1827년 522명이 공동생활하였는데 1844년에      385명, 그후 얼마 안되어서 불과 3명으로 줄어들어서 타인에게 매각되었다.Ⅱ-56 몰몬교 발생에 대하여......1. 1830년 조셉 스미스(Joseph Smith, 1805 - 44)가 몰몬교를 설립하고, 1834년 “말일성도 예수 그    리스도의 교회”(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라 불렀다.2. 스미스는 피니의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뉴욕주 북부에서 부흥의 열기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반발로 “절대적인 영적 권위”를 찾아 고민하던 중, 1822년 신의 계시를 받아 세로    운 교회를 시작하였다고 자술하였다.3. 몰몬교의 특색 ; (a)권위 주의 : 만인에게 신의 절대적 계시가 계속적으로 임한다고 하다가, 나    중에는 대관장(Presidant)만이 절대적 계시 기관이 된다고 하였다.  (b)중앙통제  (c)특수한 신정  (theocratic tendency) 신도들의 전 생활을 교회가 통제함.4. 경전 : (a)교리와 성약(Doctrines and Covenants)  (b)신 구약  (c)몰몬경(the Book of Mormon         (d)값진 진주(Pearl of Great Price)5. 교리 : (a)계속적 계시  (b)일부 다처(2대 교수 브링검 영은 25명의 처와 56명의 자녀를 가졌음.         1890년에 금함)  (c)삼위 삼체론  (d)원죄 부정  (e)침수 침례  (f)몰몬경  (g)미국에 시           온 건설 등이다.Ⅱ-57 19세기초반 보수주의의 반발에 대하여 설명하라.1.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반에 이르는 부흥운동과 서부 개척의 사회적 종교적 변화에 따라, 반동    적으로 교회 내에는 보수적 경향이 짙게 일어났다.  객관적이며, 권위적이며, 전통적인 교회 생    활를 하려하였다.  그 결과 교회 중심의 신앙공동체생활 강조(개인주의에 대립하여), 교리와 신    조를 강조하였고 교회제도를 도입하는 경향이 생겨났다.Ⅱ-58 머스버그 신학(Mercerberg theology)이란 무엇인가 ?1. 피니의 미국적 부흥 운동에 대한 반발이 먼저 독일 개혁교회 내에서 발생하였으며 기독교를 천    박하게 만든다는 비난을 가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고 교회성(high Church)과 역사성 전통성을    강조하게 되었다.2. 머스버그 신학교는 독일 개혁파 신학교인데, 여기에 대륙에서 교육받은 본격적인 신학자들이     교수로 일하게 되었다.  [특히 교장 라우크(F.A.Rauch, 1781 - 1873), 유명한 교회사 학자 필립    샤프(philip Schaff, 1819 - 93),그리고 대표적 신학자 네빈(John W. Nevin, 1803 - 86) ]  존 네빈은 1846년 대작 " 신비한 임재” (Mystical Presence)를 통하여 교회론과 성찬론을 전개    하였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 (Living Christ)께서 항상 교회와 함께 하심을 중심 사상으로 삼    고 있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계속적 임재의 표시이며, 동시에 영적이며 실재적 임재(spiritual      real Existence of Christ)라고 하였다.3. 이 신학 운동은 독일의 슬라이어막허와 네안더 등의 영향이 최초로 미국에 나타난 것이며, 개    신교 스콜라신학(Protestant Scholasticism)에 대한 공격의 시발이 되었다.  여기에 대하여 프린스톤의 찰스 핫지(Charles Hodge)가 답하고 나섰다.Ⅱ-59 남 침례회(Southern Baptist Convention)의 성립에 대해서......1. 변경 지방의 부흥운동으로 숫 적으로 급격하게 불어난 침례 교회를 하나의 대 교단으로 묶고,   “교회적 성격”을 부여하려는 교회적 경향이 1840년대에 일어났다.2. 1845년 남 침례회 연맹(the Sorthern Baptist Convention)을 결성하고 교단 이시가을 높였다.     침례교회 만이 참된 사도적계승(Apostolie Succession)을 잇고 있다.  유아세례를 부정하여 유아 세례를 베푸는 교회와 강단 교류를 금하고, 침례교회정치 제도를 확    정하였다.Ⅱ-60 1837년 장로교 분열에 대하여......1. 분열의 원인: (a) 장로교회내의 두 조류: (1) 뉴 잉글랜드의 청교주의적 전통을 가진 요소 (이들은 부흥운동의지                               지 자이며, 예일신학을 따름)                         (2) 스카치-아이리쉬(Scotch-Irish)장로교회 요소 (이들은 고 교회적이                               며, 전통적이었다)(b) 연합계획(Plan of Union)......교회내 치리와 권징이 약하여지고, 교회내에 회중교회 영향이 커       짐.(c) 뉴 헤이븐 신학..... 나다나엘 테일러의 신학이 정통에서 이탈(인간의 능력, 하나님의 사랑, 자선     사업 및 사회사업)(d) 1836년 유니온 신학고 설립(독립신학교 자유주의)(e) 노예문제(f) 자유 협회 문제(특히 기독교 교육협회와 내지 선교회(Home Missionary Society)2. 발단: 1836년 필라델피아 노회에서 알버트 바안즈(Albert Barnes, 1798 - 1870)를 자유주의         이단이라고 정죄 처분함.  그러나 총회에서 번복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서부 지방의 지도          자들인 윌슨(Joshua Wilson)과 브랙큰릿지(R.J Breckinridge)는 1837년 총회가 모이기 전          에 구 학파(Old school)의 사진 집회를 통하여 교회 분립을 결정하고 총회 개회시 다스를          이용하여 연합계획(Plan of Union)철폐, 자유 협회에서 분리를 가결하고 곧 총회 직영의          선교부와 교육부를 인준하였다.        1837년 기숩을 당한 신 학파(New School)는 “오우번 선언문” (the Auburn Declaration,           1837)을 통해서 신학적 정통성을 재 천면하고, 연합 계획을 계속 실시할 것을 선언하였           다. 1838년 신 학파 교회들이 총회에 신임장을 제출하자 거절되고, 교회는 분열이 확정           되었다. 거의 반반으로 나뉘어 졌는데, 주로 동부와 북부는 신학파, 서부와 남부는 구학파          세력이 우세하였다.3. 의 의: 프린스톤 신학교는 구학파의 신학교가 되었고, 예일과 뉴욕의 유니언 신학교는 신학파           의 신학적 요세가 되었다.  이 분열은 동북부의 신학파 생활이 자유주의화 되는 데에 대          한 남 서부 장로교인들이 신학적 보수성을 유지하려는 운동의 결과이다.  이 분열은 조합          교회내의 유니테리안 분립(1825)과 함께, 신학적 교회적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격심한           대립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Ⅱ-61 “오우번 선언” (Auburn Declaration 1837)이란 무엇인가?1. 1837년 8월 17일 신학파(New School)장로 교인들이 오우번 대회를 열고 신학적 입장을 밝혔      다.2. 그 내용은 부흥운동의 열기 속에 은연중 침투한 알미니안적 요소를 제거하고 바른 교리를 견     지 하려하였다.  1729년의 채택령(the Adopting Act)에 명시된 교리를 보수한다고 선언하였다.  (a)하나님의 주권적, 도덕적 행정  (b)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c)원죄  (d)원죄의 전가             (imputation)  (e)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과 죽음  (f)인간의 무능  (g)그리스도의 대언의 기도     가 중생전후에 있음  (h)중생은 성령에 의허여 일어난 심령의 근본적 변화(aradical change       klof hesrt)  (i)사람. 사람의 차이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 등16개 조목을 인정하였다.3. 이 선언문을 근거로 1869년 재 합동(Reunion of 1869)을 할 수 있게 되었다.Ⅱ-62 찰스 핫지(Charles Hodge 1797 - 1878)의 위치와 미국 신학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설명하라. 1. 1811년 프린스톤 신학교가 설립된후, 장로교 내부에서 뿐아니라, 모든 보수적 개신교 교회의 대     표적 조직신학자가 되었다. 2. 프린스톤 신학교를 졸업하고 독일에 유학하여 톨룩(Tholuck), 행스텐버그(Hengstenberg), 네안     더(Neander)등에게 배웠으며 귀국하여 프린스톤 신학교의 교수(1822-78)가 되었다.   1825년 신학 잡지(Biblical Repertory and princeton Review)를 발간하여 전통적 칼빈주의 신학     과 칼빈주의를 널리 폈다. 명저 “조직신학” (Systematic Theology, 1871 -72)은 20세기 초까지     신학교재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정통신학의 대명사처럼 쓰였다.   신학적 방법은 전통적 개신교 스콜라 방법을 따랐으며, 유럽에서 끓어진 제네바의 투레틴         (Franz Turretin, 1623 - 1687)의 개혁파 신학을 미국에서 재흥시켰다.3. 신.구학파 장로교인들의 분열 시데 구학파에 속항였고, 1869의 재 합동 때에 재 합동을 반대하    였고, 장로교회의 교회적 입장을 취하였으나 동시에 복음 운동에 열심이었다.Ⅱ-63. 서부 개척 시대에 장로교회의 활동은?1. 1849년 소위 “황금 럿시”(Gold Rush)로 캘리포니아 개척이 크게 일어났을 때에 장로교의 두 파    는 각기 경쟁적으로 교회를 설립하고 전도하였다2. 출판사업 : 1840년 출판국을 설치하고 종교서적을 보급함 권서제도(Colpoteur)'3. 1847년에 장로교 교구학교(Parochial school)를 설립하기로 가결함.  1853년 통계에 의하면 101개의 국민학교, 46개 중고등학교(Academy)가 있었으며, 그 목적은   (a)세속화 방지  (b)목사 공급,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1870년 이후 중단되었다.  공립학교의 등장 이 원인이었으며, 대개의 공립하교는 개신교 교육을 시켰다.4. 대학 설립                  <  노  예  문  제  >Ⅱ-64. 1850-1860년대 미국내 흑인 노예제도의 형편에 대해서 설명하라.1. 1792년 조면기(Cotton gin)의 발명 이후, 미국 남부 제주는 주요한 면화 산지가되었고, 미국 남    북전쟁시 흑인 노예 약400만명 중에 그 4분의 3이 면화 재배에 노역 하고있었다.  예컨데 미시    시피 주에는 백인주인 30,943명에 흑노 898,831명이 되었다.   이들 흑인들은 벌써 1619부터 미 대륙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그때는 불과 20명이 이곳 저곳    에 흩어져 있었을 뿐이었다.  1710년에 50,000명, 1770년대에는 50만명이 되었고, 이것이 남북전쟁시에 400만명으로 증가하였    던 것이다.2. 흑인 노예들에 대한 세례문제 : 1667년 버지니아에서는 세례가 “법적(legalentity)" 또는 ”법적    “(legal person)이 되게 하는가의 찬반으로 논란이 있었으나 결론적으로 세례는 불신자를 기독교    인 化하는 신령한 변화는 생기나, 사회제도상의 신분 변화는 보장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따라    서 특히 남부에서는 노예제도가 사회의 인정되는 제도가 되었으며, 심지어는 목사와 종교단체에    도 수많은 가노(house slave)를 소유하고 있었다.  예컨데 1844년 200명의 감리교 순회 전도자    들에게 1000여명의 노예가 있었으며, 지방목사들에게는 10,000여명의 흑    노가 있었다 한다. 3. 대체 흑노들은 주인의 종교인 개신교를 잘 받아드렸으며, 선량한 주인을 만났을 경우에 상당히   좋은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대 부분은 그 사회  적 지위 때문에 온전한 인격생활 가정생    활 사회생활이 불가 하였다.  그러나 자유인(freeman)들은 (특히 북부에서) 독립된 흑인 교회를    창설하는 데 성공하였다.  필라델피아에서 리차드 앨렌(Richard Allen)은 1816년 유명한 “아프리    카 감독교회” (African Methodkst Episcopal Church소위 AME)을 세웠고, 거기서 분리하여 시    온 교회(African Methodist Episcopal Zion Chnrch)가 생겼다.Ⅱ-65. 노예문제 해결을 위한 미국 교회의 노력에 대해서 설명하라.1. 미국 노예 제도 철폐 운동의 선구자들은 궤이커 교도들이다.  만민 평등원리를 교리로 삼고 있    었으므로, 일찍부터 노예제도의 악을 제거하는 데에 힘을 기울이었다.  1743년 이후에는 특히     울만(John Woolman, 1720 -72)과 베네제(Anthony Benezet, 1714 - 84)의 노력이 컸으며, 1775    년 “필라델피아 연회”에서는 노예소유자를 형제 회(Society of Freinds)에서 사실상 출회할 것을    결의하였다.  1800년에는 전 교인들이 노예를 해방시켰다. 2. 18세기 말 미국교회는 대체적으로 노예제도의 악을 인정하고 점진적으로 제거하기를 원하였다.  1789년 버지니아 침례교 연맹의 결의와 1818년 장로교총회의 결의에 분명히 나타나 보이고 있    다.. 그러나 1850년 전후하여 각 교파는 노예제 찬반으로 분리의 길을 걷게 되었다.3. 미국 식민 협회 조직(American Colonization Society, 1817)...... 초 교파적으로 설립된 이 기관    은 부흥운동의 소산이며, 설립 목적은 자유를 얻은 흑인들을 그들의 동의를 얻어 아프리카의 리    베리아에 재 정착시키는 것이었다.  1865년까지 겨우12,000명 정도밖에 결실을 거두지 못 하였    으며,  극도의 노예제도 반대 운동가들에 의하여 “사탄의 술책” 이란 비난을 받았다.4. 이러한 소극적 방법에 반대하여 1833년 필라델피아에서 “미국 노예제도 반대 협회” (American    Anti-Slavery Society 1833)가 결성되었다.  “선언문”을 채택하였으며 “즉시 해방” (Immediate    emaneipation)과 “보편해방” (General emaneipation)을 목표로 삼았다.  1835년 이후에 전국적으    로 노예제도 반대 협회의 지부가 설립되었다.   이 운동의 중요 지도자들은 (a)윌리엄 게리슨(William Garrison, 1805 - 79)......1831년 신문 “해방자” (Liberator)를 발간하였     으며,  1833년 노예제도 반대 협회 창설의 중심 인물이었다.(b)탑반 형제들(Arthur Tappan, Louis Tappan)...뉴욕의 상인으로서 19세기초 “자선운동”            (Benevolent movements)의 중심 인물들로서, 노예 운동의 자금 지원을 하였다.(c)웰드(Theodore Dwight Weld, 1803-95)... 피니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으며 영국의 노예제도      폐지 운동에 공감하였다.     레인 신학교(Lano Seminary)를 노예제도 반대 운동의 온상으로 바꾸었으며, 1837년 “오늘의      노예제도” (Slavery As It Is)등 소책자를 저작하여 강력한 운동을 폈다.Ⅱ-66 노예제도 옹호자들의 입장에 대해서 설명하라.1. 강력히 노예제도를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이와, 온건한 이들의 두 종류로 나뉘어진다.2. 특히 1840년에 남부에서 로데릭듀(Roderock Dew, 1802-1846)는 대학의 정치학 교수로서 노예     제도의 합법성과 도덕성을 역설하여 남부인들의 사상적 무기가 되었다. 그 내용은 노예제도는(a) 문명 발전의 중요한 수단(b) 백인간의 평등 유지(c) 노예 즉시 해방은 비현실적 (d)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도 등이다.3. 남부의 유명한 정치가 존 칼훈(John Calhoun, 1782-1850), 유명한 목사 팔머(Benjawin Robert    Palmer)등이 정치 종교적으로 남부의 분리를 획책하였다.4. 남부의 성직자들은 대체적으로 노예제도를 하나의 사회제도로 간주하였으며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예컨데 남부의 신학자 쏜웰(Henley Thornwell) 대브니(Robert Lewis Dabney). 찰스 핫지는 온     건한 입장에서 점진적인 해결을 원하였다.Ⅱ-67. 남과 북의 분열의 원인과 남북 전쟁의 시발에 대해서1. 남북의 분열의 원인은 비단 노예문제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 경제적 측면의 한 표출에 불    과하였다.  남북의 분열이 있기 전에 먼저 교회의 분열이 일어났다.1844년 감리교의 양분. 1845년 침례교의 양분.1857년 신학파 장노교회의 분리.1861년 구학파 장노교회의 분리.2. 남부에서는 북부를 비성경적, 자유주의 "불신“ 이라고(Anti-biblical liberal infidelity) 보았으며, 북부에서는 남부를 비도덕적 “노예주인” (Slave holder)으로서 기독교의 정신을 타락시킨다고 보았다.  따라서 도덕문제(moral problem)가 큰 원인이 되었다.3. 1860년 사우스 카롤라이나(South Carolina)주가 합중국에서 분리를 선언하고 이어 남부 10개주    가 합세하여 “미국 연방” (the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를 결성하고 1861년 북부와 전쟁    상태에 들어갔다.  전쟁의 결과로 1864년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Ⅱ-68. 남북 장로교회의 분열(1861)에 대해서 설명하라.1. 남장로교회와 북장로교회의 분리는 우선적으로 두 정부에 대한 “충성” (Loyalty)이 문제가 되었    으며, 노예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다.2. 1816년 구학파 장로교회 총회에서 가디너 스프링 결의한(Gardiner Spring R  solutions)을 통과    시켰다.  이것은 장로교회가 북부의 합중국(Federal Government)에 충성를 결의 한 것이다.  물    론 이 결의에 찰스 핫지는 세속정치 문제라고 반대하였다.    그 결과 남부의 대표자들은 어쩔 수없이 항의한 후에 철수하여 1861년 12월 4일 남부의 42개     노회 대표들이 모여 조지아 주 어거스타에서 소위 남장로교회라 불리우는 교회를 세웠다.  (The General Assmbly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지    금은 The Presbyterian Church in U. S)분립의 이유 (a) 북 장로교회(구학파)가 세속정치 문제    를 결의한 점 (b) 새로 조직된 남부 연맹에 대한 종교적 사회적 봉사의 필요성등이다.3. 신 학파 장로교회의 분리 : 1850년 총회에서 노예소유자를 용납한 렉싱톤 노회(Lexington         Presbytery)를 징계한 것이 발단이 되어, 남부 “장로교 연합 대회”(United Synods of the         Presbyterian Church)가 1857년에 구성되었다.Ⅱ-69. 신 구학파 장로교회의 연합에 대해서 설명하라.  (The Reunion of 1869)1. 남북 전쟁후 사회전반에 걸쳐 화해 작업이 일어나자, 1869년 신 구 양파가 합동하였다.  근거는    성경과 훼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인정하고, 서로 양편을 “건전하고 정통적” (Sound and        orthodox)이라고 인정하였다.2. 화해할 수 있었던 역사적, 교리적 근거를 1729년의 채택령의 정신과 1837년의 “오우번 선언분”    의 정통성에 두었다.  이것이 북장로교회의 성립이 된다.                           Ⅲ . 현대  (1865 - 1960)Ⅲ-70. 남북전쟁 이후 현재까지의 중요한 교회사적 문제들은 무엇인가 ? 1. 과학과 기술의 발전 (a) 진화론과 성경의 권위 문제(b)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대립2. 도시화(Urbanixation)와 사회문제(a) "원주민 보호주의“ (Nativism)와 로마. 카토릭 이민(b) 산업 사회의 제문제(c) “사회 복음” (Social Gospel)3. 교회 성장(a) 국내 전도(1865년의 기독교인 20%-1880년대 55%) : 무디의 전도 운동(b) 해외 선교(c) 에큐메니칼 운동                                         <  인  본  주  의  >Ⅳ-71. 19세기 뉴 잉글랜드의 초월주의 (Transcendentalism)에 대하여 설명하라.1. 19세기초 뉴 잉글랜드의 초월주의는 잘못된 독일 관념론(카라일과 콜릿지를 통해서 수입)+ 뉴    잉글랜드 일위론이 합하여 만들어진 사상이다. 대표자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Emerson          1800-32)은 이단적인 일위파 신학에 혐오를 느끼고 거기서 더 발전된 초월주의를 발전시켰다.  그는 (a) 물질에 초월하는 정신의 우위성, (b) 인간의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관여             (Immediacy of God)를 주장하였다.  데오도르 파커(Theodore Parker, 1810-30)는 하나님은 인    격적도 아니고 비인격적도 아니며 우주 영(Universal Mind or Spirit)이 모든 창조의 질서의 근    거라 하였다.  신은 현상계에 초월하지만, 내재적으로 전 우주에 활력을 준다고 하였다.  특히     인간의 영혼에 활력을 주며, 1830년경 에머슨도 “신은 모든 영혼의 基本(Substratum)" 라 하였    다. 이 때문에 자연히 自然과 초자연의 구별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초자연적 행위 곧 기적이란    있을 수 없으며 다만 하나님이 우주 안에서 일할 뿐이라 하였다.  인간론에서 인간 직관의 무오성을(Infallibility of human intuition)주장하였으며 : 모든 외적 권    위 즉 성경. 교회. 예수를 모두 부정하였다.  2. 이것은 뉴 잉글랜드 자유신학의 당연한 귀결이다.  결국 범신론(Pan-theism)으로 귀착되었다.Ⅲ-72. 19세기 말 종교적 과격파의 등장에 대하여 설명하라. 1. 남북 전쟁이 끝난 후에 종교적 과격파가 등장하였다.  이것은 뉴 잉글랜드 초월주의에서 한 걸    음 더 발전한 것으로, 그 구체적 표현으로 1837년 뉴욕에서 “자유 종교 협회”(Free religious      Association)가 조직되었고,  (1) 순수 종교적 이익  (2) 과학적 방법으로 신학 연구,  (3) “인류    의 종교”를 구상하고  (4) 종교를 정의하여 “人間의 自己完成의 노력 " (the effort of man to     perfect himself)이라 하였다.2. 이것이 발전하여 1933년 유명한 “ 人本主義 선언 ” (A Humanist Manifesto)이 발표되었다.  과학시대에 종교란 “ 자연주의적 인본주의 ” (naturalistic humanism)일 뿐이라고 선언 하였      다.  유명한 교육학자 존 듀이 (John Dewey, 1859-1952)도 여기에 서명하였다.  일반에게는 하나의    “새로운 종교” (a new religion)의 등장으로 간주되었는데, 그 주요한 15개조 신조중에서 중요한     것을 뽑으면 다음과 같다.         “人本主義 종교 ” 는        (1) 우주는 자존이다.        (2) 영, 육 이원성을 부정 유기적 일월성 주장        (3) 문화 발전         (4) 절대가치 부정 다만 과학적 방법으로 추구할 뿐임        (5) 성.속(聖俗)의 구별을 철폐        (6) 인간성 개발        (7) 기도 대신 인간의 협동노력 강조        (8) 교육의 필요성        (9) 삶의 쾌락추구         (10) 적극주의  (a) 생의 긍정  (b) 생의 가능성 개발  (c) 만인의 만족한 삶의 조건을              형성한다.                                   (이단의  발생)Ⅲ-73.  “ 기독교 과학 ” (Christian Science, 1875) 종파의 설립에 대해서1. 1875년 마사추셋츠주에서 에디부인에 의해서 시작하였다.   1878년에 “ 그리스도의 교회 (과학주의) ” (The Church of Christ Seientist) " 란 정식 명칭으     로 등록되었고 지금까지 봐스턴에 본부를 두고 있다ㅓ.2. 설립자 에디 부인(Mary Baker Eddy) 1821-1910)은 1875년 “ 과학과 건강 ” (Science and         Health)을 저술하였느데, 주요 사상은 (1) 마음이 물질을 지배한다  (2) 행복과 건강을 도모할     수 있는 형이상학의 정립이다.  “신성한 생명의 법칙” (divine law of Life)을 발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에디 부인의 기독교     과학주의는 ① 뉴 잉글랜드 초월주의 + ② 과학주의+ ③킴비(Phineas P . Quimby)의 영향이     합세한 것이다.  3, 구체적인 사상을 보면,  ① 하나님은 전  이며, 만유에 내재하며: 또 신은                            바로 마음(Mind)이며, 영(Spirrt)이다.                          2. 물질은 잘못된 본체이며, 죄, 악, 병은 실체가 아니다. 3, 병은 잘못된 믿음(false belief)이며,  고통이란 죽은 마음의 소산이며,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것이다.  병은 잠재한 두려움이 몸의 병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이 두려움은 무의식중에     생겨나는 것이다.  “두려움(fear)아,    너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할 권리가 없다“ 라고 믿으면, 즉시 물러간다고 하였다.Ⅲㅡ 74. 19세기 초 “밀려파” (Millerites movement) 운동에 대해서1. 이 운동은 예수 재림 운동이다.   뉴 잉글랜드 농부 출신의 부흥사 월리엄 밀려(William Miller 1782ㅡ1849)가 다니엘서와 계시록    을 연구하여 예수님 재림날짜를 1848년 3월21일로 정하였다.  1831년부터 이날을 위해서 크게     전도하였다.  이때에 “시대의 징조” (The Signe of the Times)등 재림 잡지들이 나타나기 시작    하였고: 흥분과 기대로 예정일을 맞이 하였으나, 계산 착오로 실패하였다.            2. 1860년에 화이트 부인(Ellen G. White 1827-1915)에 의하여,   ① 밀러파+ ② “하늘 지성소”를 주장한 에드슨(Hiram Edson) + ③ 요셉 베이츠 (Joseph Bates)    의 안식일파 가합세하여 “제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 (the Seventh-day Adventists)가 창설되    었다.  여기에 통합되지 않은 여러 개의 소집단들이 있다.Ⅲㅡ 75. “여호와의 증인” (Jehovah's Witnesses)의 출현에 대하여1. 1872년 찰스 럿셀(Charles Taze Russell 1852-1916)에 의해서 창설된 이단종파이다.  이의 발생은 19세기 말 수많은 예언 성취에 관한 연합집회(Prophetic Conference)등으로 세기말    현상의 열기 속에서 이루어졌다.2. 주장의 요점(a)1874년에 예수님 초림 ㅡ>1914년 재림하여 이방인의 때가 온다함.(b)삼위일체 부정 ㅡ>예수님의 신성 부정(c)"여호와의 왕국“ (Kingdom) ㅡ> 1914년 예수께서 영적으로 재림하시었고, 이방인들의 핍박이                                     일어나고, 이기간 끝에 여호와의 왕국이 도래하며, 여호와의                                     증인 14만 4천만 그때에 왕이 되어 영원한 지상 천국에서                                      살게 되며 나머지는 일꾼으로 산다고 하였다.3. 현존하는 사회제도에 대한 비판,  여기에서 극단적인 분리운동이 일어나서,  현실 정부의 집총     거부를 하고있다.                                  ( 그리스도 중심 自由主義  神學 )Ⅲㅡ75. 제19세기 그리스도 중심 자유주의 신학(Christocentric Biberalism)의 발생에 대해            서......1. 뉴 잉글랜드의 초월주의와 과격한 인본주의 신학의 발생에 자극을 받아,  항상 중도ㅡ복음주의     노선을 취하여 온 예일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自由主義가 일어 났다.2. 이 신학의 특색 : (a)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 : 그리스도를 성경해석과 신학의 중심으로 삶음.     그리스도를 생에 대한 해석의 표준으로 삼았다.  특히 “인본적” 그리스도를 중시하였다. (b) 현대 과학을 인정하였다.  특히 유기적 진화론(Organic evoluthon)을 따르고, 성경의 역사적       비판적 해석방법을 채용하고 심리학과 사회학의 응용, 이상주의 철학을 원용하려 하였다.(c) 복음의 사회성 강조3. 대표적 학자들(a) 호레이스 부슈넬(Horace Bushmell, 1802-78)......예일 출신의 회중교회 목사이며,  뉴 잉글랜       드 자유주의(Liberalism)의 대표자이다.     그리스도의 대표적 사역은 “人間性의 회복(To renovate men's character)과 하나님과의 교       제 회복이라 하였다.  그리스도의 대리 대속교리를 부정하고 도덕적 영향설을 주장하였다.     기본적인 정통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전체적으로 뉴잉글랜드의 정신적 풍토       에 적합하게 수정하였다.  대표적 저작 : 기독교 양육(Christian Nurture, 1847),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God in Christ, 1849),  "그리스도의 신학” (Christ in Theology, 1861)이       있다.(b) 멕기퍼트(Arthur C. McGiffert, 1861-1933)    유니온 신학교의 역사학 교수이었으며, 독일 자유주의 총수 하르낙(Harnack)의 영향으로 평생      릿출의 신학 사상을 가졌다.  릿출의 “하나님의 나라” 사상을 미국에 소개하였다.  저서 : 사      도 시대 기독교회사(History of Christianity in the Apostolic Age, 1897) , 기독교 사상사         (The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2권,  1932-33).(c)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 1878-  )......    뉴욕 리버사이드 침례교회 목사이며,  유명한 “현대주의”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처음에는 정통교리에 대하여 부정적이었으나 반면에 긍정적인 면을 찾으려 하였다.  저서 :       “주님의 人間性” (Manhood of the Master, 1913) "어려운 시대을 견딜 신앙“ (A Faith for         Tough Times, 1952)                 4. 신학의 구체적 발전 (a) 신론: 삼위일체를 믿으나,  하나남의 속성 즉 아버지의 속성을 강조함.  내재성 강조, 여기서            유기적 진화론을 주장함(b) 인간론: 인간은 순수한 자연의 산물이 아니며, 하나님의 특수한 창조적 역사(진화도 하나님의              창조 수단으로 보았음)의 산물이라 함.인간의 권위와 가치인정 특히 인격경외(reverence for personality)를 표어로 삼음.원죄를 인정하나 생물학적 유전보다 사회적 요인을 더 중시함.(c) 구속론 :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가 대속적이며, 도덕적 영향력을 가르친다.(d) 종말론 : “하나님의 나라” 는 구속받은 성도들의 사회를 의미하며,  이 나라는 현세적이며, 역사의 최종 목표이며,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이것은 19세기말, 20세기초의 낙관주의를 표명한 것이다. 개량된 사회의 도래를 의미하였다.                                   ( 근본주의의 반격 ) Ⅲ-77. 19세기 후반. 20세기초 미국의 부흥운동의 특색에 대해서 설명하라.1. 19세기 초반 찰스 피니의부흥운동 이후로,  미국에는 계속하여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나 시대의     변화와 함께 그 성질이 이전과 달랐다.   특히 개인 부흥사의 활역이 크게 나타났다. 역대의 부흥사들     무  디(Dwight L. Moody 1887-99)     존  스(Samuel Jones 1847-1906)     토레이(R.A. Torroy, 1853-1928)     센데이(Billy Sunday, 1863-1935)2. 부흥운동의 특색(a) 도시 전도,  (b) "연합 성회“ , (c) 고도의 조직과 선전,  (d) 수백 또는 수천의 결신자(e) 성경 연구 대회(Bible Conference) (f) 성경 대학(Bible Institute)3. 결 과(a) 성결운동(Holiness movement) : 예컨데,  영국의 케스윅 운동(Keswick movement)은 완전줘      의 운동이었다.  이때에 “하나님의 성회” (Assembly of God)의 모임도 시작됨.(b) 묵시파 운동...... 소위 “예언 대회” (Prophecy Confarence)가 1878년에 열렸으며,  전천년설이       강력히 주장되었다.(c) 성경 대학의 설립운동 : 예컨데, 1886년 무디 성경 대학(Noody Bible Institute)1907년 로스엔       젤스 성경 대학등(d) 근본주의 운동이 일어남Ⅲ-73. 무디 부흥운동의 특색에 대해서......1. 산업 사회의 위기에 일어난 부흥운동이다.  본래 특별한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평신도이었으나    시카고 빈민가에서 주일학교를 시작하여 주님의 일에 종사하였고 사업에 성공할 수 있었음에도    포기하고 전도에 나서 성공하였다.  1873-75 영국 전도   1875-81 미국 각지의 대도시 전도2. 전도 방법 : (a) 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              (b) 성경의 문자적 신앙  (c) 신앙의 기본 교리를 되풀이함               (d) 회개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라 함Ⅲ-79. 장로교회의 성경 무오 교리의 재확인에 대하여 1. 다윈의 진화론이 1870년, 80년대에 미국을 휩쓸게 되자, 프린스톤의 찰스 핫지는 1874년 “무엇    이 다윈주의인가?” 라는 논문으로 다윈주의를 반박하였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변증하였다.2. 에이. 에이. 핫지(A.A. Hodge,  1823-1886)와 와필드(B.B. Warfield, 1851-1921)는 성경원본       (autograph manuscripts of the Bible)의 무오설(Inerrancy)를 주장하였다.3. 1892년 장로교회 총회에서 공식적으로 성경 무오설을 확인하였다. 이 총회에서 성경 무오 부정,    이적을 부정하는 찰스 브릭스(Charles Briggs, 1841-1918)을 면적시켰다. 그는 유니온 신학교 에    옮겨가서 “성경신학”교수가 되었다.4. 1910년 장로교회 총회는 교회와 사회내의 자유주의의 발호에 대처하여,  신학적 정통의 기준을    세웠다.  목사 후보생 고시에 “근본적이며 필요한 교리” (the essential and necessary articles)  5個案를 인정하게 하였다.  (a) 성경무오,  (b) 동정녀 탄생,  (c) 대리 대속(Substitutionary       atonement),  (d) 예수님의 육체 부활,  (e) 이적Ⅲ-80. 20세기초 미국 장로교회내 자유파가 발표한 “오우번 확인문” (Auburn Affirmation, 1924)의 의미에 대해서....1. 1922년 미국 장로교회에는 에머슨 포스딕(Emerson Fosdic  )의 문제가 일어났다.  그는 뉴욕     제일 장로교회에서 “근본주의자들이 이길 것인가” 라는 설교에서 근본주의 입장을 공격하였다.    장로교 총회에서 그에게 장로교 목사가 되기를 강요하였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받     아 드리도록 압력을 가하자 거부하고 뉴욕의 작은 침례교 목사로 전임하였다. 2. 1923년 총회가 1910년의 5개조 “근본적이며 필수적 교리”를 재확인하자, 자유주의 경향을 가진    장로교 목사들 1274명이 “오우번 확인문”에 서명하여 자유주의 노선을 취하였다.  그 내용은 :(a) 교회 행정면에서,  1910년 총회에서 5개조 근본 교리를 결정한 것은 위험이라 함.(b) 1910년 5개조 근본교리는 하나의 신학적 학설이라 함.(c)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성경 예수 그리스도 하여, 신앙 고백서의 신앙과 생활의 표준적 권      위를 인정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3. 이것은 미국장로교회(북장로교회)내에 두 개의 큰 조류가 있어 서로 상치함을 의미한다.Ⅲ-81. 20세기초 근본주의 운동(Fundamentalist Movement)이란 무엇인가?1. 무디와 같은 부흥사들이 부흥운동과정에 단순한 기독교의 근본교리를 가르쳤다.  초교파적으로 공통되는 이 근본교리는,  발호하는 자유주의와 인본주의에 대항하는 기독교 신앙    의 대표와 상징이 되었다.  그러므로 근본주의 운동은, 기독교회의 자체방어운동이며,  적극적인    공격 운동이 되기도 하였다.2. 1910년 소책자,  “근본 교리들 : 진리의 증언 ”(Fundamentals : A Tostimeny to the Truth)이    근본교리를 대중화 시켰으며,  정통과 비정통을 가리는 잣대가 되었다.  “5대 근본교리” 란  (a) 처녀 탄생(Virgin Birth)  (b) 대속(Substitutiondry atonement)  (c) 임박한 그리스도의 육체    적 재림(Imminent,  physical second coming of Chrint)이다.3. 이 근본주의 운동은 1920년에 최고조에 도달하였으며,  특히 장로교와 침례교내에 큰 논쟁이     일어났다.  그 외도 감리교와 “제자” 교회에서도 논쟁이 일어나서, 남북전쟁이후로 또 하나의     큰 사회적 잇슈로까지 번졌다.  종교적,  사회적 보수 세력들(특히 남부의 침례교인들)은 이 근    본주의 운동에 동조하였다.  이런 차제에 프린스톤의 메이천(J.Gresham Machen, 1881-1937)이    근본주의 기독교(Fujndamental Christianity)의 신학적 변증가로 등장하였다. 그의 저작,  특히     1923년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 " 1921년  ”바울 종교의 기원“  (The     Origin of paul's  Religion),  1930년 “동정녀 탄생” (Virgin Birth)을 통하여,  학적으로 유능하게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변증하였다.  그는 휼륭한 신약학자로서 역사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역과 그 역    사적 증거를 유능하게 변증하였다.  결코 속칭 반 지식주의를 고찰하는 “근본주의자”  는 아니    다 기독신앙의 변증가이었다.Ⅲ-82.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설립과 정통 장로교회 설립의 경위에 대해서.......1. 1929년 필라델피아에서 메이천이 50여명의 학생을 데리고 새로운 신학교를 시작하였다.  설립 동기는 프린스톤 신학교가 자유화하자,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으로 재 정비하려는 노력에    가담하였다가 실패하자,  “옛 프린스톤” (Old Princeton)의 전통을 이으려고 웨스트민스터를 설    립하게 된 것이다.2. 정통 장로교회(Orthdox presbyterian Church)는 메이천이 미국 장로교회의 해외선교부가 자유    주의자를 선교사로 보내자,  독립으로 “장로교회 독립 해외 선교부” (the Independent Board of    presbyterian Foreign Missions)을 구성하였다.  이것이 “분파” 운동(Schismatic)이라고 총회 재판에 회부되어 신생 선교부에서 탈퇴하라는 명령    을 받았으나 거절하자 면직되었다.  메이천은 1926년 즉시 분립된 “미국 장로교회”를 조직하고    첫 총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교회내의 반응이 크지 못하여, 작은 교회로 남게 되었으며,  1939    년 법원의 명령으로 개명하여 “정통 장로교회”  라 부르게 되었다.Ⅲ-83. 근본주의 논의와 미국 중부 루터파 “미주리 대회”  (Lutheran Church,  Missouri             Synod)의 입장에 대하여 설명하라.1. 20세기 초기에 중부의 중심적인 종교적, 문화적 세력은 “미주리 대회” 파 루터교회이었다. 1889    년 독일 색슨주에서 루터교회 합리주의화 경향에 반발하여 미국으로 이민 온 후에 미국식 민주    적 교회 정치 체제를 갖추고(개 교회의 자치권 인정) 전통적인 루터파 교리를 보수하였다.  이들은 1980년대까지 독일어를 사용하였으며,  민족적,  문화적 특색을 보유하고 있었다.  자연    히 루터파의 특색 그대로 미국 정부에 충성하고,  모든 정부시책에 순응하였다.   그러므로 “사회 복음”이나 “자유주의”에 대하여는, 근본적으로 칼빈주의가 내포한 취약점의 당    연한 결과라고 생각하고,  보수적 입장을 겸지하였다. 이것이 사회정으로,  종교적으로 미국 중    부를 보수적 보루가 되게 하였다.Ⅲ-84. 남 침례교회의 입장에 대해서...... 1. 1845년 남 침례교 연맹(Southern Baptist Convention)의 결성이후,  침례교회는 남부의 중심세    력으로 등장하였다.  (신앙과 생활의 중심)2. 따라서 북부의 자유주의 사상이 침투하지 못하게 방어하였다.  1925년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 ”에서 침례교회 연맹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 교리”를 재 확인    하고,  “진화론”을 정죄하였다.  뫄든 산하 교육 기관에서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였다.    침례교회가 이러한 교리문제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개 교회적 독립의 원칙을 무시하고 개 교회    에 교리적 승인을 요구하였다.Ⅲ-85. “원숭이 재판”  (“Monkey"  Trial)이란 무엇을 말하는가?1. 1925년 스코우프스(John T. Scopes)란 선생이 테네씨 주의회가 통과시킨 “진화론 반대” 법을      어기고,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친 협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것을 “스코우프스 재판” (Scopes Trial)이라고 한다.  (일명 : 원숭이 재판)2. 이 재판은 유명한 인사들, 즉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과 데로우(Clarence Darrow)의    변론으로 세계적인 사건이 되었다.  장로교회의 장로요 유명한 정치가인 브라이언은 진화론이 전통적 기독교와 가치관을 파괴하는    사상으로 간주하고 투쟁하여 이 재판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데로우는 시종 브라이언을 놀    림감으로 만들려 하였다.  이 싸움후 한 주간후에 브라이언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브리이언    은 포스딕을 축출하는 데에도 공헌하였다. )                                 ( 사 회 문 제 )Ⅲ-86. “사회 복음” (Social Gospel)이란 무엇인가?1. 1880년대 이후부터 일차대전까지,  급격한 도시화, 산업화로 인여 큰 사회문제, 노동문제가      발생하였다.2. 특히 1880-1910까지 남 구라파의 로마 카토릭 교도들이 대거 이민해 옴으로 도시 문제가 일어    나게 되었다. (예 : 1880-1910년 사이에 5백만명의 카토릭이 이민해 옴으로 카토릭 인구가 천6    백만명에 달했다고 함)3. 이리하여 1877,  1886,  1892, 1894년에 곳곳에 노등쟁의가 일어고, 1877년에 사회 민주당 창    당,  1889년에 기독교 사회주의자 협회의 창설 등, 사회주의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4. 여기에 대처하여 미국 자유주의자들(특히 Christocentrie liberalism)이  “하나님의 나라”를 사회     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사회구제에 힘을 기울이었다.  이들의 방안은 그들이 비록 “즉시 사회     재생”(Immediate Social renewal)을 부르짖었어도,  근본적으로 “개혁” 방안이었자 사회구조적     변혁(“혁명”) 은 아니었다. “사회 복음” 이란 단어는 19세기말,  20세기초에 처음 사용되었으나     1910년에는 공용어가 되었다.  사회 복음의 목표는 : (a) 저 소득층의 생활 개선 (b) 공정 임금(Just wages)(c) 노동자에게 이익분배(Frofit sharing) (d) 자유방임 지양,  무한 경쟁 지양(e) 기독교 사회내부에서 점진적 개혁5. 지도자: 라우센부쉬(Rauschenbush,  1861-1981)......  뉴욕시 빈민가(Hell's Kitchen)에서 목회하            면서  “사회 복음” 사상에 착안함. 대표적 신학자로 등장하였다.6. 사회 구제를 위하여 범 기독교 협의회가 탄생하였다. (1908) 즉 기독교 연방 협의회   (Federal Council of Churches of Christ in America = F. C. C. C. )의 발촉이다.Ⅲ-87. 연방 교회 협의회(F. C. C. C.)의 “사회 신조”(Social Creed of the Churches)의 내용         이 무엇인가?1. 1908년 창립 총회시 채택한 사회 구제행동강령은 다음과 같다.(a) 평등권  (b) 노동자 자율권  (c) 노동쟁의 화해 원칙  (d) 산업재해로부터 노동자 보호 (e) 유년 노동금지  (f) 여성 노동 조건개선  (g) “Sweating system " 금지  (h) 노동시간 합리   적 조정  (i) 최저 생활 임금  (j) 생산품 공정 분배  (k) 노동자 노후 대책  (ㅣ) 가난 퇴치 등이   다.Ⅲ-88. 보수주의 사회운동에 대해서......1. 보수주의 자들은 도시ㅏ의 발전과 로마 카토릭의 유입(이민)에 대하여 불안함을 금치 못하고,  소위 “원주민 보호주의 ”(Nativism)를 발전시며 반 카토릭 소요를 일으키고,  앵글로 색슨의 사    회적 우위성과 개신교 신앙을 사회의 기본질서로 보수하려하였다.2. 자연히 사회활동이 소극적이 되었다.  (a) 금주 운동(Temperance movement)...... 1920년 금주령("Prohibition") 이 발효하였다.  이겅ㅅ        은 그 이전의 수많은 절제 협회,  술집 퇴치 연맹(Anti-saloon League),  여성 기독교 절제        협회(National Women's Christian Tomperance Union, 1874)등 강력한 활동의 결과이다. 그        러나 금주령은 일차 대전후 1933년에 철회되었다.    (b) 주일 성수 운동: 소위 “청색 법”  (Blue Laws)라고 하여 주일에는 모든 장사를 금하고 “일       요판 신문”,  전차까지 운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주마다 다르지만) “대륙식 주일”               (Continental Sunday)이 유행하므로 종교와 도덕의 타락을 가져올까 두려워하였다.  (대체로       후착한 카토릭은 주일에 술먹고 노름하였다.3. 이들은 “ 개인 주의적”  사회 윤리를 가지고 있었다.Ⅲ-89. 일차세계대전 (1941-1918)이 미국 교회에 미친 영향?1. 성결 교파들의 부흥 ㅡ 구제사업의 결실2. 미국적 낭관주의와 사회 복음주의의 퇴조3. 신 정통주의(Neo ㅡ orthodoxy)의 등장Ⅲ-90.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의 “기독교 실재주의 ” (Christian               realism)에 대해서 설명하라.1. 일차 대전후에 미국 자유주의 (신학)는 근본주의와의 마찰에서 일단 발전이 멈추었으며,  칼 발    트의 “위기 신학” (Crisis theology)이 1928년 미국에 상륙함과 동시에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    다.  발트의 “신 정통주의” 는 자유주의 사상의 근거를 무너뜨리는 것이 었다.2. 1932년 라인폴드 니버가 디트로이드(Detrpot)에서 목회하면서 자유주의가 현대기술 ㅡ산업사회  (a technological and industrial suciety)의 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비현실적임을 예리하게 통찰    하고, 명저 “부도덕사회와 도덕적 인간”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1922)을 저술하였다.  이 책이 일격에 자유주의를 무너뜨리고, 하나의 옛 사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현실 내재한 악과 인간성에 내재한 악을 정면으로 대결하여 해결하려 하였다.  디트로이트의 사    회문제, 제이차 대전 전쟁문제,  냉전기의 공산주의 문제에 대한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항거(대    항)로서 현실적 해결을 모색하였다.3. 실재주의의 신학적 근거: 니버는 기독교의 신앙에 새로운 의미와 해석을 찾았다.  창조와 타락,    그리스도 구속과 하나님의 나라 등의 기본 교리들이, 하나의 현실에 대한 상징으로서, 그 상징    의 배후에는 인간 관계의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의” 의 문제를 심각히 다루    었다.  특히 “人間의 운명과 성품”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1941-43)과,  “역사와 신    앙(faith and History, 1948)에 잘 나타나 있다.                         ( 교 회 의   성 장 )Ⅲ-91. 일차 대전후의 오순절 교회의 성장에 대해서...... 1. 1914년 “하나님의 성회” 창립(the AsSemblies of God).   1907년의 “하나님의 교회” (The Church of God0, 1907년  “나사렛 교회” (the Church of the     Nazadrene)들은 1920년대 1930년대에 장족의 발전을 보았다.  강한 보수 경향과 강력한 종교     적 경험의 강조 등이 사회의 저변 층에 호소력을 갖고 있었다.Ⅲ-92. 19세기말 20세기초 해외 선교 활동에 대해서......1. “해외선교 학생 자원 운동”  (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1886)은 무디    의 영향하에 모트(Raleigh Mott, 1865-)와 와일더(R. P. Wilder 1863-1938)등이 여러 대학교에서    전도하고, 특히 와일더가 1886년 여름 학생수양회 (Summer student conference)에서 조직하여,  “우리 세대에 세계 복음화”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란 목표로 많은 학    생들이 해외 전도에 나가게 되었다. 2. 1892의 스페인과 미국전쟁이후로 해외 선교열이 더욱 고조되었다.  필리핀에 개신교가 들어가    게 되었다.3. 1914년에 중국에 있는 전체 개신교 선교사의 과반수 이상이 미국에서 왔으며 특히 중국 내지     선교회(China Inlnd Mission, 1865년 허드슨 데일러 창설)는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Ⅲ-93. 교회 연합 운동에 대해서 설명하라.1. 연합장로교회의 설립......1953년에 설립됨.  A.  미국장로교회(     )=미국장로교회+컴벌랜드 장로교회  B. 북미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 in N, A, 1858) = 준 개혁 노회 (The             Associate Reformed Synod)  C.  미국 연합장로교회(The Rnited Prosbytorian church in U. S. A. 1958) = A + B2. "연합 교회“ (The United Church of Christ, 1961)......  A.  회중- 기독교회(The Congregational Christian churoh 1931) = 회중교회와 크리스찬 교회일        부  B.  복음- 개혁교회(The Evangelical and Reformed church 1934) = 미국개혁교회(R.C. in U.S,        1792)+북미 복음교회(the Evangelical oh. of N.A 1849)  C.  연합교회(U.C.C) = A+B     연합교회의 연합 원칙은 (a) 성경과 공동신앙고백서(구체적으로 웨스트민스터 고백서를 언급       하지 않음)   (b) 정치는 기본 단위를 개교회로 하고, 상회에 협의회(Association) 대회(Conference)총회(General Synod)를 둔다. 그러나 각 개체는 자율권을 가진다 하였음.3. 1939년 감리교회(The Methodist Church)탄생=3개의 단체가 연합함.4. 1918년 연합루터교회성립(세 대회의 연합),  1930년 미국 루터교회성립(다른 3대회연합)Ⅲ-94.세계교회협의회 (W.C.C)의 성립과 미국 교회협의회(N.C.C)의 성립에 대해서 설명하라.1. 세계 교회 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1948)......   협의회의 기본정신= “우리 주 예스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주로 용납하는 교회간의 교제” 라     하였다.  결성 시에 42개국 147개 교단이 구성원으로 협의회가 이루어졌다.  1961년에는 국제     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과 연합 함.2. 미국 교회 협의회(National Council of Churches 1950)=8개의 개신교 초교파 단체가 연합하였     다.  모체는 미 연방 교회 협의회(F.C.C.C. 1908)+북미 해외선교대회(1911)+북미 국내 전도협의    회(1908)+국제종교교육협회(1922)+개신고등교육의회(1911)+교회세계구제협회(Church              Wutherans)들은 가입하지 않고 있다.  협의회의 조직과 운영......(a) 기독교 교육국  (b) 기독교 생활과 선교국  (c) 해외 봉사국  (d)기                              독교 일치국의 4국이 있고,  각 국과 기관은 독자적인 재정관리를                              하는 이사회를 가지고 있다.  대체적으로 자유주의 원리로 활동한다. 이 협의회에 대립되는 연합 단체로서 “복음주의자 연합    회”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 소위 N.A.E 1942)이 였으며,  여기에 속한 세계 구제    위원회(World Relief Commission)가 사회 구제 기관으로 세계적으로 크게 일하고 있으며 활동    원리는 성경적 원리를 취하려 노력하고 있다.Ⅲ-95. 당면한 미국 교회의 제문제들은 ?1. 사신 신학이후의 혁명신학(Theology of Revolution) 문제2. 여성의 권리문제 : 자유주의 교회의 여자목사문제와 보수주의 교단 교단의 여집사(doacon)문제3. 인권문제 : 특수 그룹4. 교회 연합문제5. 거짓된 신령주의(Spiritualism)와 “오순절”운동6. 세속화 문제(Secularism)등이다.

■ 現代 敎會史(1) 상식 문제집< 0. 서  론 >0-1. 현대 교회사(the Modern Age)의 시대적 구분에 대하여 말하라.  현대 교회사는 1648년 웨스트팔리아 宗敎平和(the Peace of Westphalia)이후 지금까지의 기독교    회의 역사를 말한다.  편의상 다음과 같이 세분할 수 있다.    (1) 1648 - 1789 웨스트팔리아 평화에서 불란서 혁명까지    (2) 1789 - 1870 혁명이후 19세기 전반    (3) 1870 - 1914 제19세기 말에서 제1차 세계대전까지    (4) 1914 - 19.... 1차대전에서 세기말까지     ( * 본 강의에서는 제17, 18세기만 다루고, 지난 학기에 이어서 영국 종교개혁과 그 영향이        어떻게 제17, 18세기로 이어지는 것을 배우고자 한다.)0-2. 현대 교회사의 시대적 특성은 무엇인가 ?    (1) 脫敎會的 世俗國家의 形成    (2) 世俗文化의 發達    (3) 市民 社會 形成      (4)機械文明의 發達0-3. 현대 교회의 특성은 무엇인가 ?   (1) “西歐의 世俗化” (the Secularization of the West)에 따라 敎會專制의 活動을 지양하고,        獨立된 종교적 영역을 찾아 독립교회(Free Churches)로 존재하고, 개인의 경건생활에       힘쓰며, 신자들만으로 구성된 독립기관(Voluntary associations)을 창설하여 종교운동을       하게 되었다.   (2) 이 時期에 로마 카토릭교회는 중남미(中南美)지역과 아세아로 세계 선교를 하였으나 종교         적 세력이 미약하고, 그 대신 개신교회(protestant Churccches)는 먼저 미국의 건국과 더불         어 신 세계의 북음화에 이어,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 각지로 선교활동을 벌려 소위          “개신교 시대” (the Protastant Era)를 이루게 되었다.    (3) 現代 敎會는 문화적으로 정치적 민주주의(political democracy), 박애주의(humanitarianism),        현대기술(modern technclogy), 자본주의 경제체제(capitalism)등 현대사회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4) 교파주의(denominationalism)의 발생        전통적 로마 카토릭 교회관은 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한다는 교황중심의 唯一교          회(the Church)와 이에 반대하는 “이단 종파” (sects / sectaries)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현대교회의 특색은, 로마 카토릭 교회까지도 기독교회의 일개 敎団       (a denomination)으로 간주하며, 群小 교회들도 기독교의 한교단으로 용납한다.       이것은 제17세기 영국과 화란의 칼빈주의자들의 독립교회(the Free Churches)운동의 결과       이며,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견지하고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삼은 여러 가지 교단의 병         존이 가능하게 되었다.        Roma 교회는 교회의 傳統을 권위로 보고 성경도 전통으로 본다.   (5) 敎理史的으로 볼 때 淸敎主義에서 正統主義와 敬虔主義로 거기서 복음주의로 이행하고 있         다.  또한 合理主義 영향으로 합리주의 신앙사상이 교회에 침투하고 있다. (자유주의)      < 1. 英國 宗敎改革(제16, 17세기 ) >1-4. 영국 종교개혁의 意義를 말하라.제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의 마지막 활동이 영국에서 일어나고 개신교의 한 형태인 영국 국교회(the Anglican Church)의 성립으로 세계 교회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  영국이 개신교 신앙의 수호국이 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발달과 함께 대영제국을 이루게 됨으로, 마치 초대교회를 로마 사람들이 중세교회를 독일인들이 주도한 것처럼, 현대교회는 영국사람들이 주도하게 되었다.1-5. 영국 종교개혁의 예비적 단계에 대해서 말하라.(1) 종교개혁의 불씨가 오래 전부터 계승되어 왔다.  제10세개 던스탄(Dunstan 908-988)의 수도      원 개혁운동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 철학에 반기를 든 던스 스코투스(Duns Scotus       C. 1264-1308)와 윌리암 오캄(William of Occam C. 1300- 1340) 의 신 스콜라 신학의 발달,      그리고 위대한 종교개혁의 선구자 요한 위클리프(John Wycliff c. 1320-84)와 그의 “롤라드       운동(Lollards)들이 벅써 제14세기에 개인적 신앙, 절대적 권위를 가진 성경관, 하나님의 선택      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지고, 로마 교황과 신부들의 종교행사가 비성경적음을 가려내어 공격      하였다.     한동안 폅박을 받았으나 제15세에 이르러 큰 사회적, 동교적 세력이 되었다. 제16세기 초에는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이 나타나서 종교개혁의 길을 열게 되었다.  (2) 1531년 토마스 빌네이(Thomas Bilney C.1495-1531)는 루터의 종교개혁사상에 힘입어 개혁을     주장하다가 순교하였다. 루터의 저작이 케임브릿지와 옥스퍼드 대학에서 읽혀졌고, 에라스무스     의 희랍어 성경과 라틴어 역본이 옃향을 미쳤다.  휴 라티머(Hugh Latimer C. 1485-1555)는      빌네이의 감화를 받아 영국 종교개혁 은동의 지도자가 되었다.(3) 1536년에는 유명한 성경 번역가인 위리암 틴테일(William Tyndale C. 1494-1536)이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대룩에 건너가서 신 . 구약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였느데 (첫 출판은      1525년 콜론느와 보름스에서 함) 신약은 에러스무스의 라틴역, 루터역, 벌게트역을 참고로 하      고, 구약은 70인역과 루터역을 참고하여, 원어에서 직선적이고 생동감이 넘치는 영어로 번역하     였다. 이것이 나중에 흠정역 성경(the Authorized Version)의 기초가 되었다. 루터의 이신득의     교리와 성경의 최고 권위성을 가르쳣으며, 성찬론은 쯔윙글리의 주장을 따랐다.1-6. 영국 종교개혁 당시의 류더 王家의 계보를 약술하라.  英國 宗敎改革에 류더王家(the House of Tudor 1485-1603)의 역할이 컸다.  (1) 헨리 7세(Henry Ⅶ, 1485-1509)  (2) 헨리 8세(Henry Ⅷ, 1509-1547) : 종교개혁을 주도한 왕이며 6명의 왕비를 차례로 맞았다.  (3) 에드워드 6세(Edward Ⅵ, 1547-1553) : 왕비 진세무어(Jane Seymour)의 아들로 개신교인이                                             다.   (4) 메리女王(Queen Elizabeth 1558-1603) : 둘째 왕비 안 볼레인의 소생으로 개신교도이며, 영                                              국 국교회를 확립하였다.1-7. 핸리 8세의 종교개혁과 영국 국교회의 독립에 대해서 말하라,(1) 영국 종교개혁의 제일 중요한 특성은 국가교회가 한 단위가 되어 로마 카토릭교회로 부터         독립한 것이다,  따라서 루터나 칼빈의 개혁운동이 민중에서 시발이 되었음에 반하여, 영국       의 개혁운동은 교회와 정치의 首長인 王으로부터 시발되었다.  타락한 로마 카토릭  교회를       대신하여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계승하며, 교리와 교회 제도를 성경의 규       범에 따라 새롭게 하려 하였다.    (2) 성립과정: 국왕 헨리 8세의 정치적 야망과 개인적 경건이 크게 작용하였다.  본래 성직자가       되려고 옥스퍼드에서 신학공부를 하였으나, 형 아서의 죽음으로 1509년에 왕위에 오르게 되       었다.     아버지 헨리 7세의 정력으로 교황의 제가를 얻어 형수 케더린과 결혼하였다.  캐더린은 신성       로마제국 황제로 선임된 (1591년) 찰스 5세의 고모로서 강력한 카토릭 세력을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  영국의 독립을 열망하는 헨리 8세는 스페인 세력의 견제를 위하여, 아들을 못낳는       다는 구실로 캐더린 왕비와 이혼을 원하였다.  당시 신성 로마제국 황제의 영향햐에 있던 교       황 클레멘트 6세가 이혼 허가를 보류하자, 헨리 8세는 토마스 크렌머(Thomas Cranmer           1498-1556)를 기용하여 英國 교회 獨自的으로 캐더린과의 결혼이 무호임을 선언하고, 교화의       권위를 부정하고 영국 교회의 首長은 왕 자신이며, 국교회의 독립을 이루었다.  1530년에 켄       터베리 대회(the Convocation)를 열고 국왕의 최고권위(the Royal Supremacy)를 선언하고,        1532년에는 의회가 로마 교황청에 납부하는 성직 수입세(the annates)를 폐지하고, 1532년에       크렌머가 켄터베리 대주교가 되자, 1533년에 헨리 8세는 총회 안 볼레인과 정식 결혼하였다.       이때 교황은 캐더린의 결혼이 유효함을 선언하고 헨 리를 파문시켰다.  1534년에 의회는 피       텅說를 페지하고 국화을 “교회의 최고 首長” (the Supreme head of the Church)임을 공포하       였다.(3) 로체스터의 감독 존 피셔(John Fisher)와 토마스 모아(Thomas More)가 끝까지 국왕의 교회       수장권에 반대하다가 처형당하였다.  1-8. 헨리 8세의 개혁 내용은 어떠하였는가 ?    (1) 왕권 대리자(Vicegerent)인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은 1540년까지  모든 수도원         을 폐쇠하고 순례 행위를 금지할 목적으로 더함의 쿠트버트(Cuthbert at Durham) 와 켄터         베리의 성 베케트의 무덤을 헐어버렸다. 수도원 제산을 대학교육, 새교구 설립, 수도사와          수녀의 재활기금으로 사용하고, 또 한편 귀족들과 국왕의 수입으로 삼았다.      영국 교회의 오랜 전통이며 사회구조의 중요한 제도이었던 수도원의 붕괴와 더불어 회의발전이 급속히 이루어지게 되었다. 종교생활은 교구(Parish) 中心이 되고, 수도원의 경제활동은 시민의 수중으로, 교육 및 사회구제 활동은 국가의 활동으로 이관되었다.(2) 헨리 8세 시대의 종교 개혁중 교리적인 문제를 루터교리가 절충적인 성격을 띄게 되었다.     1536년 10個信條(Ten Articles)에는 성례의 종류를 성찬, 세례, 참회(Penance)등 세 가지로 정하고, 믿음과 행위로 義롭게 된다고 하였다.  1539년에 공포한 6個信條에서는 화체설을 다시 주장하였다.(3) 이 시대에 카버데일譯 성경이 출간되고(소위 Coverdale Version), 매류설을 개역한 大 聖經(the Great Bible)이 교회의 공식 성경으로 비치되고 사용되었다.1-9. 에드워드 6세의 종교개혀에 대해서 말하라.(1) 1547년 9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하였으나 개신교도인 외삼촌 소머셋 공작(Duke of Somerset)의 섭정으로 영국 종교개혁 운동이 실질적으로 결실하게 되었다.    6개신집를 철회하고, 우상제거, 평신도에게도 두가지(떡과 포도주)성찬을 주고, 신부들의 결혼을 허용하였다. 대륙에서 피터 마터(Peter Martyr), 오키노(Ochino), 마틴부서(Martin Bucer)등의 개혁파 신학자를 초청하여 개혁신앙을 교회의 신학으로 받아드렸다.      지금까지 영국교회의 신학은 개혁신앙(Reformed faith)이 基調를 이루고 있다. (2) 에드워드 6세의 “제일 기도서” (the Book of Common Prayer, 1549)를 작성하여 의회의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으로 모든 교회에서 사용하게 하였다.  1552년의 개정판    제2 기도서에서 “제단” (altar)이란 말대신에 “상(table)" "신부”(priest)란 말대신에 “성직자 또는 목사”(minister)등으로 고쳐 쓰고, 통일령으로 평신도의 주일성수를 명령하고 어길때에 엄벌하였다.      크렌머는 1553년에 42개信條(the Forty-two Articles of Reoigion)를 작성하고 王命으로 공포하여 그 당시 영국 국교회의 공식 신조가 되었다.      에드워드 6세의 종교개혁은 개혁파 노선을 따랐으며 독특한 영국적 성격이 가미되었다.1-10. 메리 여왕(女王)(Queen Mary 1553-1558)의 반동졍책에 대해서 설명하라.       에드워드 6세가 재위 6년만에 죽자 캐더린의 소생인 메리가 여왕이 되었다.      이에 카톨릭 세력의 복귀로 신교도들은 대륙르로 피난가서 쭈리히, 스트라스부르그, 바    젤, 네바, 하이델베르그 등지에서 신교 “종교교육”의 수련을 쌓게 되었다.      피난을 가지 않은 신교도들이 유명한 라티머(Latimer), 리들리(Ridley), 크렌머           (Cranmer)등과 함께 순교하였다.         이 大 박해 때에 라티머는 리들리에게 “리들리 先生, 위로를 받아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우리가 영국에 아무도 끌 수 없는 촛불을 켜게 되었도” 하며 순교하였고, 크렌머는 1556년에 화형을 받을 때에, 만인이 보는 앞에서 7번이나 개혁신앙을 저 버리는 문서에 서명한 자기 오른손을 타오르는 불길 속에 던져 넣어 태우면서 불신을 회개하였다고 한다.     멜리 여왕은 궁중에 다시 로마 카톨릭 예배의식을 회복시키고, 감독들을 복권시켰으며, 의회는 몰수한 재산은 변상하지 않았으나, 여왕의 뜻대로 통일령의 철폐, 공동기도서의 사용금지, 신부의 결혼 금지 등 카톨릭 종교법을 재활용하였다.  그러자 교황청은 영국교회를 세계의 카톨릭교회로 복귀시킨다는 칙령을 발표하였다.1-11. 엘리자벳 女王(Queen Elizabeth 1558-1603)의 종교정책에 대해서 말하라.(1) 메리 여왕의 병사후, 엘리자벳이 계승하여 이후 반 세기간의 집정으로 영국 국교회는 다시 개신교회로 확립되고, 종교 문제의 안정과 함께 국력이 신장되고 문화가 발달하여 그의 치세기는 영국, 역사상 황금기를 이루었다.(2) 종교정책은 개혁신앙을 기초로 하되 국내의 카돌릭적 요소와 신교적 요소를 조화시켜 가장 현실적으로 유용한 형태인 영국 국교회를 제도적오로 확립시키었다.  아버지 헨리 8세의 정치적 종교적 이상을 구체화시킨 “아들보다 귀한 딸” 이었음을 증명하였다,    1559년에 首長令(the Act of Supremacy)을 선포하고 교황의 권위를 인정치 않고 교황청에 대한 세금과 고소를 금하였으며, 다시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을 내려 개정판 공동기도서 사용과 주일성수, 성직매매 금지, 성상 성화 파괴, 신부 결혼을 명령하였다.(3) 영국 국교회는 처음으로 교화의 임명대신, 주교(감독)들이모여 파커(Mathew Farger)를 켄터베리 대주교로 성별시키고 사도적 계승에 따른 영국 국교회의 대감독으로 임직케 하였다.  로마 교회는 1896년에야 영국 국교회제도를 불법이라 정죄하였다.(4) 信條로서 39個信條(the Thirty-nine Articles)를 영국 교회의 신조로 공포하였다.(5) 리챠드 후커(Richard Hooker c.1554-1600)등은 감독제도(Episcopalism, / Anglicanism)릎 찬성하였으나 아직 소수이긴하나 청교도들(puritans)과 독립교회 교인들(Incependents)은 엘리자벳의 국교주의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다수의 국민은 종교적 안정을 원하였으며, 다른 서구 제국에 비하여 안정세격을 빨리 구축하여 근대국가로 발전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1-12. 리차드 후커의 감독제도 옹호론에 대해서 설명하라.(1) 1559년 엘리자벳 여왕의 종교문제 확정을 계기로 영국교회의 감독제도는 확립되었으나, 로마(Rome)와 제네바(Geneva)의 반발을 받게 되었다. 이때에 리차드 후커등은 소위    “中道論”(Via Media /the Middis Way)을 펴 감독교회의 입장을 밝히게 되었다.  특히 청교도들은 감독교회정치(감독주의, Episcopalism)가 완전한 개혁에 미치지 못하는 미완성이라고 비난을 가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감독주의 변증가들은 성경, 교부들의 저작, 전승(tradition),역사 인간의 이성에 근거하여 타당성을 변호하였다.  (2) 후커의 선배, 존 주월(John Jewel 1522-1571)은 “영국교회 변증” (Apologia Ecclesia Anglicane, 1562)을 써서 일반적 종교개혁의 필요성과, 교부들에 근거하여 감독제도의 합법성을 변증하였다.  여기에 힘입어 후커는 “교회정치법에 관한 논설”(Treatise on the Laws of Ecclesiastical Polity, 1594-1662)을 통하여 감독정치를 옹홍하였다.  여기에 깊은 철학적 신학이 전개되고 있다.  (a) 청교도들의 성경주의에 반하여, 자연법, 즉 하나님의 이성에 근거하고 세계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이 법칙이 최고의 권위이며 여기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교회의 형태와 제도는 불변의 것이 아니며 역사적 형편에 따라 변화한다.     교회도 사회와 같이 시대적 형편에 따라 교회법을 제정할 수가 있으며, 가장 합리적 형태를 취할 수 있다.  비록 영국교회가 개혁은 되어도, 중세교회와 기본적인 연속성은 있다고 하였다.   (b) 청교도들이 장노정치(Presbyterianism)가 성경적 원리이며 교회형태의 규범임을 주장함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후커는 감독임직(episcopal ordination)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등 감독주의의 절대성을 주장하지 않았으며, 다만 역사적 편의와 개체교회의 교회실증법 제정 권리를 주장하였다.1-13. 엘리자벳基의 청교도들의 성격에 대해서 설명하라. (1) 발생: 메리 여왕의 박해서, 대륙으로 피난갔다가 돌아 온이들이 엘리자벳여왕의 종교문제       해결에 불만을 표시하고, 제네바개혁의 모형대고 영국 국교회를 완전히 정화(purify)       하여 모든 비성경적 요소를 배제하고자 하였다.(2) 종류 : 청교도들은 특정한 조직을 갖추지 않았으며, 국교회 내부에서 철저한 개혁을 시도        하였다.    (a) 성복논쟁(Vestiarian controversy)을 통하여, 신앙양심에 어긋나는 성복 착용을 간제합     에 반대하는 청교도들이 있었다. 이것은 만인제사장 원리에 어긋난다고 하였다.    (b) 성찬을 받을 때 무릎을 꿇게 하는(kneeling)예배의식에 대하여 반대하는 무리들이 있      었으며    (c) 마지막으로 장노 정치제도가 성경적이라 하여 감독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교인들의 목사 선출권을 주장하고 감독, 신부, 목사의 직분의 동등성을 주장하였다.(3) 신학 : 철저한 성경주의를 취하고 문자적, 일상적 해석을 하였다.    신학체계는 칼빈주의이며 점차 계약신학파(covenant theology / 또는 Federal Theology)경향을 취하게 되었다. 은혜계약과 행위계약을 구분하였으며,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의무”(duty)를 항상 강조하였다.  거기에 따라 인간상호간의 계약과 의무이행, 국민과 국가간의 계약관계까지 생각하였다.  실천을 강조한 신학이며, 생의 전영역에 미치는 “ 신앙생활”을 강조하였다.(* ⓐ후기에는 엄격한 칼빈주의보다 중도적 칼빈주의로, 그 다음에는 알미니안적 신학을 받아   드리는 이들이 많아졌다   ⓑ 행위를 강조하다가 교리를 소홀히 해서 알미니안주의가 일어났다. )(4) 초기의 청교도들:(a) 토마스 카트라이트(tomas Cartright 1535-1603):     16세기 청교도들중에 가장 유능한 인물이었다.  켐브리지의 신학교수로 있으면서 엘리자벳의 감독주의를 비판하고 의회에 대하여 장노체재를 택할 것을 건의하였다.(1572)  추방,투옥등 수많은 고난을 당하였으나 에리자벳 사후(死後) 제임스 1세의 왕위 계승시 천인청원(the millenary petition 1602)을 작성 하였다(b) 왈터 트레브스(Walter Travers):    켐브리지 교수였으며, 대륙에서 베자와 교유한 후 귀국하여 영국교회의 개혁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39個信條를 승인하지 않으므로 설교권을 얻지 못하고 대륙에 가서 화란 영국교회 담임모교사가 되었다. 그의 주저(主著) “교회 권징”은   장로제를 변증한 청교도들의 지침서이었다(c) 윌리암 퍼킨스(?-1602):    켐브리지의 교수, 영국 청교도의 사도.Ⅰ-14  초기의 독립파에 대해서 설명하라    청교도들이 교회내의 정화운동을 펴 나가려함에 대하여, 독립파(Independents) 또는 분리주의자(Separatists)들은 “믿는 이들” 만으로 구성된 독립교회를 주장하였다    교회관에 있어서 한 개의 단위교회의 독립을 주장하고 교인간의 약속과 그리스도의 성약(holy covenant)에만 근거하여 모이고, 그 중에서 철저한 민주적 방식으로 목사와 직분들을 선출하였으며 , 개교회는 타 교회에 대하여 간섭하지 않으려했다.  이들이 나중에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es)의 시초가 되었다.     초기의 분리주의자로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e ?-1633)이 있다. 브라운파라고 불리워 졌다Ⅰ-15 , 제 17세기 영국 왕실의 형편과 교회사의 의의를 설명하라.  제17세기에 들어서자, 스투아트 왕가의 치세가 시작되며, 스투아트 왕가의 왕권신수(divine right)과 청교도들의 신앙의 마찰로 청교도혁명(puritan Revolution 1642-1649)이 일어나며, 그후에 왕정복고(the Restoration, 1660)그리고 명예혁명(the Glorious Revolution, 1688)등의 사건이 연속되고 영국에 개신교가 완전히 정착하며 다른 교파들도 종교자유를 허용받게 된다.       <스투아트 왕가의 연보> (the House of Stuart, 1603-1714)    (1) 1603-1625 : 제임스 일세(James 1 )     (2) 1625-1649 : 찰스 일세(Charles 1 )      *  1649-1660 : 공화정(Republic)    (3) 1660-1685 : 찰스 이세(Charles Ⅱ )    (4) 1685-1688 : 제임스 이세(James Ⅱ )     (5) 1689-1702 : 윌리암과 메리(William Ⅲ and Queen Mary, 제임스 이세의 딸)    (6) 1702-1714 : 앤 여왕(제임스 이세의 딸)1-16. 제임스 일세의 종교정책은 어떠하였는가 ?   (1) 보래 장노교회에서 교육을 받아 제임스 6세로서 스콧트란드의 왕이 되었으나 1603-1625   까지 영국 왕을 겸하게 되자 수많은 청교도들의 기대와는 달리, 영국  곡교회의 감독주   의 노선을 취하여 “감독없이는 국왕도 없다” (No bishop no king)는 원리를 따랐다.  (2) 로마 카퇵측에서 왕과 왕자를 폭살시키려는 “폭약음모” (Gunpowder plot)가 있는 이후,   국민 감정이 반 카노릭으로 점차 굳어지므로 정책적으로 카토릭에 보인 호의를 포기하   고 1640년 신부를 추방하였다.  (3) 청교도들이 점차 세력이 커지게 되고, 국왕이 1618년 유희서(the Book of Sports)를 발   표하여 주일에 춤추고 경기하며 민속놀이를 권장하자 국왕의 비성경적 문화정책에 반대   하였다,  청교도들은 “일요오후 강의” (Lecturships for Sunday afternoons)를 통하여 주   일 성수, 성경 읽기, 가정예배 깨끗한 도덕생활을 가르치고, 시편찬송가를 애창하게 하였   다.1-17. 흠정역 성경이란 무엇인가 ?  (1) 흠정역 성경(the Authorized Version)또는 제임스 국왕역(King James Version)성경은    1604년 청교도들과 감독들이 헴턴궁에(Hampton Court)모여 새왕의 취임과 교회 정화를   의논하던 중에 공동 성경번역에 합의하게 되었다.  (2) 국왕 제임스 일세가 54명의 성경학자를 임명하고 6대로 나누어 번역하게 하고 최종적으   로 14명의 위원이 검토하여 출간하게 하였다.  번역은 1607년에 시작하여 1611년에 출판   되었다.  루터설과 달리 어느 한 사람의 번역이 아니고, 54명의 학자들이 한 마음이 되   어 번역한 것이며, 기존의 감독성경(Bishop's Bible)제네바 성경(Geneva Bible), 루터역   등 수 많은 번역본을 참고하고, 새 시대를 위한 참신한 성경을 원어에서 번역해 내었다.      문체는 장중하고 음율적이며, 그 당시로서는 현대적이며 일상적 언어로 역출되었다.    그 후에 개역이 있었으나, 영국교회의 표준성경이 되었다.  기독교회의 보물이 되었다.1-18. 침례교회(Baptist Churches)의 설립에 대해서 설명하라.  (1) 제임스 일세 치하에 1612년 처음으로 침례교회가 섰다.    먼저 화란 암스텔담에 영국인 존 스미스(John Smyth ? -1612)가 처음 침례교회를 세웠는데, 그는 회중교회에 속한 분리주의자로서, 회중교회가 엄격한 칼빈주의 노선을 따르고 유아세례를 실시하자 거기서 분리하여 알미니안 교리를 따르며 성인세례를 주장하는 독립교회를 세우게 된 것이다.  1612년 그가 죽자 일부는 화란의 메노파와 합하고, 일부가 토마스 헬위스(Thomas Helwys)의 지도로 영국에 돌아와 런던에 교회를 세웠다.    (2) 알미니안 교리를 가진 침례교인들을 “보편” 침례교인(“General" Baptist)이라 부르며, 이와 별도로 영국 내에서 회중파 교회에서 분립하여 계속 칼빈주의 교리를 따라 특별 선택을 주장하는 ”특별“ 침례교인(”Particular" Baptists)들의 교회가 생겨났다. 그러나 모두 성인 세례와 독립교회(free churches)를 주장하는 점은 같다.1-19. 찰스 일세와 영국교회의 고교회(高敎會, the High Church)화에 대해서 설명하라.  (1) 찰스 일세(1625-1649)때에는 벌써 청교도들의 세력이 커졌으며 정치적 경제적 활동이     컸다.  이들의 여망을 무시하고 고교회 정책을 썼다.  국교회의 교리와 제도를 로마 카    토릭쪽으로 선회시키는 정책이었다.  켄터베리의 대 감독 윌리암 라드(William Laud,     1573-1645)는 송교재판소(the High Commissnters)를 강제로 고교회 교리와 제도를 따    르게 하였다.  (2) 특  성 :     (a) 신학적으로 알미니안 교리와 로마교회의 교리를 따름    (b) 소위 아름다운 예배를 중시하며, 정교한 의식을 개발하려함.    (c) 감독 직의 중시    (d) 다시 교회용어 가운데 “성찬대(상)”를 “제단” 이라 성직자를 “신부”라 고쳐 부름    (e) 왕권신수설을 옹호하고 정치적으로 왕당파에 속함.  (3) 이러한 정책의 결과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청교도들과 크게 마찰이 생기게 되었다.     라드 대감독은 “일요오후 강의”를 폐지시키기까지 하였던 것이다.1-20. 청교도 혁명에 대해서 설명하라.  (1) 청교도 혁명(Puritan Revolution 1642-1649)의 발단 :    (a) 역국내부에는 종교개혁이후 두 개의 사상이 발달하였는데, 하나는 영국 국교회의 감독    주의를 따르고 국왕의 절대권(Absolutism / 또는 Divine Right)주장에 동정적인 보수적    사상과 : 하나는 주로 청교도들과 독립파들의 사상으로 정치 및 종교적으로 공화적 민    주제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영국은 불란서와 달리 온전한 절대군주 사상과 함께 전통    적으로 계약에 의한 통치라는 계약사상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평화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찰스일세가 고교회 정책과 절대권(Absolutism)를 강력히 행사하여 다시 로마     카토릭 교회제도와 절대 군주국으로 영국을 이끌어 가려 하자, 이미 의회내에 다수 세    력을 차지한 청교도들과 둑립교인들이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다.        (b)또 한편 137년 찰스 일세가 스콧트란드(Scotland)에 감독제도와 공동기도서를 사용하도    록 강요하도록 강요하자 스콧트 인들이 국민계약(the National Covenant, 1638)을 맺고    찰스 일세에 대한 무력 한쟁을 벌려 이것이 내란(civil war)으로 변하였다.  (c) 찰스 일세는 영국 의회를 불신하여 1629년에서 1640까지 의회를 소집하지 않다가 스 콧    트란드 반란을 진압할 목적으로 소위 “단기의회(the Short parliament, 1640)를 소집하    였다가 해산하고, 다시 소집된 ” 장기의회“ (the Long parliament 1640-1653)는 오히려    국왕의 정책에 반대하고 나중에는 혁명을 주도하였다. 1640-1653년 기간동안은 의회의    최고 통치자이며 행정수반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장기의회는 1642년에 올리버 크롬웰의 시민군을 조직하여 국왕과 대항하게 하고, 1643    년에 스콧트란드의 “신성동맹” (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 조약을 받아드리    고, 올리버 크롬웰은 스콧트군대와 함께 찰스 일세의 군대를 격파하여 (1645-1646) 청    교도 혁명을 성공시켰다. 찰스王은 나중 1649년에 처형되었다.(2) 결과: 장노제가 승리하고, 감독제도와 공동기도서 사용금지, 올리버 크롬웰의 공화정치 시대가 되었다. 교회적으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 소 요리문답서 및 정치조례가 체택 되고, 종교적 자유가 선포되었다.1-21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대해서 설명하라.  (1) 웨스트민스터 총회(Westminster Assembly, 1643)는 장기의회가 영국교회 rour을 위하    여 수집하도록 명한 종교회의이었다.  30명의 평신도와 121명의 목사들이 모이도록 되    었는데, 목사들 중에는 장로교인이 다수이고, 국교회 목사들은 소수 이였으며, 그 외 소    수의 독립교회의 목사들이 있었다.  1643년 7월1일 회의가 개최되었을 때에는 국교회     목사들은 찰스 왕에 대한 충성 때문에 참석을 거부하였다.  늦게 스코틀란드에서 8명의    위원들이 참석하였다.  1643년에서 1649년까지 계속되었는데 무려 1163회의 회의를 하    였으며, 그 후에도 간혹 교회 재판을 열기도 하다가 공식적인 폐회 없이 끝났다.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The Westminster Confession, 1646) : "신성 동맹“ 의 조건에    따라 영국 스톳트란드 아일란드 삼국에 맞는 공동 신앙 고백서를 제정할 필요를 느껴    1643에서 1646에 이르기까지 27개월간에 작성된 신앙고백서이다.  전문 36장으로 되었    으며 칼빈주의 신학이 기초가 되고 있다.  선택교리와 계약교리, 그리고 교회론이 특출    하고, 신앙행위로는 주일성수와 휴식이 강조되고 있다.  영국 의회는 1648년에, 스콧트    란드 장노교회 총회는 1647년에 공식교리로 인정하였다.    (3) 웨스트민스터 대 . 소 요리문답(Westminster Catechisms, 1647) : 주로 웨스트민스터 신   앙고백서의 내용을 간결한 문답 형식으로 작성하여 기독교 교육에 사용하였다.      대 요리문답(Larger Catechism)보다 소 요리문답(Shorter Catechism)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소요리 문답 제일 문이 훼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전 장노교인들의 신앙생활의   특색을 잘 나타내는 名句이다.      (4) 웨스트민스터 공중 예배서(Westminster Directory for the Public Worship of God,      1645) : 영국 국교회의 예배서인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대치하여   장노교 원칙에 따른 예배서를 작성하였다.  일반적 원칙만 설명하고 정해진 형식이나 의   식을 강요하지 않는다.  예배는 기도로 시작하여, 두 번의 교훈(또는 공부), 시편노래, 설   교 순으로 하며, 오전 예배 후에 성찬을 필요에 따라 행하도록 하였다.  그 외에 세례,    환자 방문, 그리고 결혼 예식에 관한 지시을 하며, 장례는 의식 없이 행하도록 하였다.     주일 외에는 다른 종교절기를 다 폐하고 지키지 못하게 하였다.1-22. 크롬웰 공화정치와 영국교회의 형편에 대해서 설명하라.   (1)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 :     지방귀족 출신(토마스 크롬웰의 후손)으로 어릴 때부터 청교도 교육을 받고 1628년에는 광신에 가까울 정도의 격열한 경건 생활을 하였다.  1628 하원의원이 되었으며, 1642 시민군의 총수가 되었다.  스스로 기독 시민군을 정병화하여 내전에서 승리하고 이어 군대의 힘으로 혼란기를 수습하였으며, 의회가 강력한 행정력을 행사하기 힘든 차제에 독립군의 지지로 1653년 장기의회를 해산시키고 호민관(護民官 Lord Protector)이 되었다.  (2) 크롬웰은 엄격한 장노주의 보다 열열한 독립교회를 좋아하였으며, 1653년에 장노주의자들이 다스를 차지한 장기의회를 해산시키고, 독립파(Independents)의 경건한 사람들(수위“saints" )을 국회희원으로 임명하였다.  크롬웰의 정치에 ”아멘“ 으로 협조하였다 하여 ”성자 의회“ (Parliament of saints)또는 ”마른 뼉다기 의회“ (Barebone Psrliement, 1653)라 불렀다.  (참고의원중 한 사람의 이름이 Praise-God Barebone이었다 함)    크롬웰은 전노주의자들의 불관용성과 국교적 태도(state-church mentality)를 싫어하고, 종교의 개인적 성격과 개신교 교단간의 융화를 강주하엿다.  그 결과 영국에는 종교적 관용주의(Tolersnce)와 교단 주의(denominationolism)가 확립되었다.  장노교, 침례교, 회중교회가 인정되었다.  그러나 천주교, 영국 국교 및 광신적인 신교종파에 대하여서는 제제를 가하였다.  (3) 크롬웰의 공화정치는 그 자신의 개인적 신앙양심과 경건에 따른 사실상의 일인 독제정치이었다.  개인의 종교적 신념(즉 하나님의 뜻)과 국가적 이익이라는 목적이 독제정치의 근거이었다.  이것은 찰스 일세의 왕권신수설을 신념으로한 전제와 큰 차이가있다.    그러나 영국국민들은 권력이 한 개인과 그의 양심에 집중되는 것을 불안스럽게 생각하였다.  크롬웰은 한개 국가적 차원에서 “柛政” (Theocracy)을 시도하였다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4) 공화정 시기에 영국은 대륙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크롬웰은 모든 면에서 온건한 개혁을 주장하였다.  국민 도덕의 향상을 위하여 음란한 유희를 금하고, 주일성수, 예배참석을 법으로 명영하였다.  사회개혁도 급진적 개혁을 반대하고 점진적인 생활향상을 도모하였다.  (5) 크롬웰읁 대외적으로 강력한 신교보호자가 되었다.1-23. 크몸웰 시대에 발생한 신교과격파들에 대해서 설명하라.    크롬웰의 혁명성공과 함께 개신교내의 과격한 종교사상이 혁명의 열풍과 함께 대두하였다.  이것은 신비적이고, 열광적(enthusiastic)이고 재세레파(anabaptistic)적 성격을 띄었다.  크롬웰은 이들을 정치, 사회적으로 불안한 요소로 보고 강력히 단속하였다.  (1) 평등주의자(the Levellers) : 런던의 소상인들이 존 릴번(John Lilburne)의 지도로, 주권재민(主權在民)과 만인평등(萬人平等)사상을 가졌다.  의회는 계급과 재산여하에 상관없이 모든 국민중에서 그 의원을 선출하라하고, 연임을 금하고, 의회의 기능은 행정과 경찰력 행사 뿐이라 하였다.  (2) 제 5王國主義者(the Fifth Monarchy men) : 다니엘서의 예언을 따라 그리스도의 왕국이 임하여 천년간 계속될 것이라하여, 무력으로 왈국건설을 주장하였다.     그 중에 일부는 자연걱 도래를 기다렸다.  (3) 퀘이커 교도(Quakers) : 정식 이름은 형제회(Society or Friends)로서 1650-1690년에 영국에서 일어난 신비적 경향을 띤 종교운동이다.  지금도 성하고 있다.      (a)창시자 조지 팍스(George Fox 1624-1691)는 청교도들의 영향으로 자랐으나 이미        후기의 청교주의가 침체에 빠져 가르침과 행함이 일치하지 않음을 느끼고 19세에        구도의 길에 나섰다고 한다.  1647년 어느 날 “自己 現  ” (his condition)에 찾아         오신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영적 경지에 들어갔다.  자기 속에 있는 “肉的 光明”         (the Inner Light)을 통하여 하나님께 직접 접근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 빛의 인도를      받으면 모든 악을 이길 수 있고, 能力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b)퀘이커의 주요한 주장들 : 절대 평등의 민주 정치, 호칭의 단일화(“thou") 종교자유,      전쟁반대, 검소한 의복과 생활, 정직한 언어, 여자의 설교 허용, 맹세를 금함 등이다.       이러한 주장 때문에 팍스와 제자들은 수없이 투옥되고 추방되며 순교하였다.       공화정시기의 제일 열렬한 운동이었다.          (c)제 이 지도자로 윌리엄 펜(William Penn, 1644-1718)은 미국 펜실바니아 주를 창설하     고 핍박받는 퀘이커 교도들을 이주시키고, 대륙의 개신교도들과 나중에는 스콧트란드     장노교인들까지 대거이주 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식민지 안에서는 유일신을 믿는 한      누구에게나 종교자유를 허락하였다.  그는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 대속 교리, 칼빈주     의가 설명하는 의인교리등을 반대하다가 수 차례 투옥되었다.       로버트 바클레이(Robert Barclay, 1648-1690)은 퀘이커 신학자로 “내적 광명” 은 굳 “     內在하는 그리스도” 리도 하였으며, 성도들은 설교가 필요없으며 내적 광명과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성에 대하여 무관심하여 성례에 무     관심, 역사적 예수 교리와 신앙고백서의 필요성을 부인하였다.1-24. 크롬웰 공화정시기의 대표적 청교도들을 열거하라     (1) 존 오웬(John Owen, 1616-83) : 청교도 목사(Puritan divine)로서 후기의 청교도들이 엄격한 칼빈주의 노선을 버리고 점차 알미니안적 경향으로 나아감에 반하여, 가장 공정하고 관용적 입장에서 알미니안주의와 대결하여 정통교리를 보수하였다.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교회적으로는 독립교회에 속하였다.  크롬웰 정부에 협조하였다. 의ㅚ에서 여러번 설교도 하고, 크롬웰의 군목으로서 고문(adviser)으로 일하였으나 크롬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에 반대하다가 그와 멀어졌다.     그는 리처드 맥스터(Richard Baxter, 1615-1691) : 유명한 청교도 목사이자, 비국교도(Dissenter)이었다.   (2)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 : 유명한 청교도 목회자로서 1641-1660동안     약20년간 키더민스터(Kidder minster)에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였다.  장노교, 국교회, 독립교회 사이의 중요하지 않는 차이점들은 극복하면서 목회의 협동을 도모하였다.    백스터의 신앙과 생활은 “온건” (Moderation)이 중심적 태도이었다.  과격한 장노주의와 크롬웰의 종교적 견해에 반대하였고,  왕정 복구 후에 국교회 감독직을 거부하여 목회지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그의 신학은 엄격한 칼빈주의를 떠나 “온건” 한 알미니안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백스터에게 기독교신안은 실천적 종교이었다.  교구내의 도덕을 향상시키고, 교인들의 생활을 성경말씀의 원리대로 지도하였으며, 경건생활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a) "성도의 영원한 안식“ (Saints' Everlasting Rest) : 신앙서적    (b) “개혁교회 목사론” (Reformed Pastor)     (c) 기독교인 지침(Christian Directories)등 수많은 저작을 남겼다.  (3)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 : "천로역정“ 의 저자는 청교도 혁명 때 의회군으로 참하였다.(1544-1646), 가난하고 무식한 어린 시절을 보내었으나 성경과 신앙서적을 탐독하여 훌륭한 베드포드 독립교회 설교자가 되었다(1657). 왕정 복구후에 투옥되어(1660-1672까지) 옥중에서 천로역정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주요저작 : (a)천로역정(Pilgrim's Progress, 1678)                 (b)거룩한 전쟁(Holy War, 1682),                 (c)“넘치는 은혜”(Grace Abounding to the Chief of Senners, 1666)등이 있                  다.  (4) 존 밀턴 (John Milton, 1608-1672) : 올리버 크롬웰정부의 라틴어 비서로 공화정의 대변인이 되었다.  혁명이전부터 시적 재능이 나타났으며, 혁명 기간중에는 주로 영국 국교회의 감독주의에 대한 反論과 장노체제를 찬성하는 글을 쓰거나, “이혼론(Docrine and     Discipline of Divorce)“출판 자유론”(Areopagitica, 1644)등을 저술하였다.  왕정 복구 후에 일시 투옥되었으나 풀려 나온 다음에 1658-1665에 걸쳐 “실락원” (Paradise Lost, 1667)을 쓰고 이어서 1671년 “복락원(Paradise Regained)", 그리고 ”투사 삼손(Samson Agonistes)"를 저작하였다.    밀턴은 처음 장노교 사상을 가졌으나 나중에 독립교회로 기울어지고, 신학적으로는 점차 알미니안적 요소를 가지게 되었다.  인간의 자유와 독립의 옹호자이었으나 질서와 조화를 모색하였다.1-25. 독립교회의 성립에 대해서 설명하라.    독립교회(lndependents)는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ircjes)라고도 불리어지는데, 교회정치형태상으로 개 지방교회(each local churoh)의 자율과 독립을 주장한다.  교회정치원리는 민주정치를 원리로 하고, 그리스도를 유일한 그리스도 교회의 首長으로 삼는다.    분리주의자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e)이 개 교회가 국가로부터 독립하고, 자율적 행정을 해야한다고 주장한 이후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뒤에 크롬웰 시대에 와서 교회들은 숫자적으로 증가하고 중요한 종교세력이 되었다.    1658년 120처의 개 교회들이 사보이 긍(Palace of Savoy)에 모여 온건한 형태의 회중교회 교리와 정치원리를 선언하였다.  이것이 “사보이 선언문” (The Savoy    Declaration,1658)이며 회중교회의 기본문서이다.  여기에 교리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일부 수정하여 받아드리고, 그들의 정치조례를 첨가하였다.  선언문에는 개혁고회의 제 분파가 획일적인 로마 카토릭에 비하여 활기 있는 교회생활을 할 수 있다는 변증을 하면서 회중교회 형태를 장노교회 형태와 같이 공인해 달라고 하였다.    이후에 수많은 교인들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뉴 잉글란드지방은 회중교회의 영역이 되었으며, 영국에 남은 교리들은 18세개 차츰 지방 법의회(Associations)를 남들고 1832년에는 “영국과 웨일스의 회중교회 연합회”(The Congre gational Union of England and Wales)를 창설하였다.  이것은 입법기구는 아니고 교회간의 연락 조정협력기구이며 첫 사업으로 “신앙과 예배 선언”(A Declaration of Faith and Order)를 작성 공포하였다.  1-26. 왕정복구(the Restoration)와 감독주의의 부활에 대해서 말하라.  (1) 크롬웰의 사후(1658), 그의 아들 리차드가 호민관직을 승계하였으나 군대를 통활하지 못하여, 군대의 요구로 사임하고 자유선거를 통하여 구성된 양 의횡에서 폴란드에 머물고     있던 찰스 이세를 불러 왕으로 모시었다.(1660년).   (2) 의회가 감독제도를 부활시키고, 종교 집회령(the Conventicle Act, 1664)을 내려 공동 기도서를 사용하지 않는 5인 이상의 집회를 금지하고, 1665년에는 “5마일 령” (the Five Mile Act)을 내려, 비국교회 목사가 정부와 교회전복을 꾀하지 않는다는 서약이 없이는 어떤 마을(town)이나 도시(city)에 5마일 이내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1670년에 “제 이 집회령” 1673년 “시험령(Test Act)” 를 내려 일반시민에게 관리가 될려면 국왕에게 선서하게 하고 국교회 의식을 따라 헝찬을 받게 하였다.  (3) 왕정 복구로 말미암아 수많은 청교도들과 독립파들이 해외로 이주하였다.    이 무렵 윌리엄 젠이 펜실바니아에 퀘이커 교도를 이주시켰다.1-27. 명예 혁명(the Glodrious Revolution, 1688)의 교회사적 의의를 말하라.  (1) 로마 카토릭 정치세력의 최종적 저지가 이루어졌다.  불란서왕 루이14세가 대륙내의 신교세력을 파하고 (독일 팔라티네트를 로마세력권에 넣고, 스위스 왈도파 교인을 박해하고, 1685년에 낭뜨칙령을 철회하여 불란서 개혁교도를 추방시키었음)    영국의 제임스이세를 통하여 커토릭 세력을 확장허려 하였다. 그러나 장노교인인 화란의 윌리암삼세와 메리가 개신교의 종교적, 정치적, 세력의 회복을 위하여 영국 희회의 간청을 수락하고 영국에 진주하여 왕위에 올랐다.  제임스이세는 불란서로 도피하였다가 나중에 아일란드에 건너가서 아일란드의 왕이 되려하다가 1690년 보인(Boyne)에서 패하고 재차 불란서로 도망하여 일생을 마쳤다.  그는 찰스일세의 아들로서 영국을 재차 로마교회로 이끌어 가려하다가 명예혁명(1688)으로 왕위에서 축출당하였다.  (2) 1689년 종교 관용령(The Tolerance Act)을 발표하고 비국교도(Non-conformista / 또는      Dissenters)들에게 법적보호를 보장하였다.  국교회는 형식적으로 제국교회이나 실제적으로는 대교단으로서, 비 국교도들의 교회와 동등 지위에 있게 되었다.  국가는 종교문제와 신앙양심의 문제에 대해서는 중립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이 관용령으로 인하여 종교적자유사상이 대두하고, 더욱 검열제도가 폐지되자 자유로운 문화활동이 전개되었다.  (3) 윌리암과 메리(The Presbyterian Kirk of Scotland), 1707년에는 영국과 스콧트란드가 연합하여 대영제국이 되었다.  따라서 한 영국왕이 스콧트란드에서는 장로교인이 되고, 영국에서는 수장이 되는 전통을 세우게 되었다.1-28. 비 국교도(Non-conformists)들의 영국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말하라.  (1) 비 국교도 또는 국교 반대자(Dissentera)들은 예민한 신앙양심을 통하여, 도덕율에 근거한 시민사회 형성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들이 “양심”을 하나의 정치. 사회세력으로 등장시켰으며, 이것이 영 . 미 정치의 도덕적 성격을(Polftical moralism)형성하게 하였다.    양심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개인의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고, 강한 준법정신으로 근대 시민사회의 정신적 기반을 굳게 하였다.  따라서 비 국교도의 정신적 유산은 정치적 민주주의이며, 미국 독립운동(1774)의 강격한 근거가 되었다.  (2) “비 국교도 양심” 은 경제생활에도 영향을 미쳐 근대 자본주의 발달과 근대 기업정신과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근면, 정직, 정확, 적당한 이윤, 실용주의, 개척정신 등). 그들의 교리 중“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예정” 교리는 신앙양심에 위배되지 않는 한 그 들의 기업 활동에 자신과 확신을 주었다.    비 국교도에게 관계 진출의 길이 막히고 국교회 성직자의 진로가 없으므로, 자연 상업과 산업에 종사하게 되었으며, 이 직업을 심각한 삶의 현실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 결과 영국, 하란, 미국등지의 이들 칼빈주의자들은 17,18세기에 걸쳐 상업과 기술을 독점하다시피 하게 되었다.   (3) 비 국교들은 관학(官學)보다 실용학문을 강조하여 런던 대학등 실용학문, 즉 자연과학, 수학, 각종 전문학과(법율, 의학)를 가르치는 대학을 세우게 되었으며, 또한 “국교 반대자 학원”(Dissenting Academy)을 세워서 목회자를 양성하고 또한 보다 실제적인 교육을 시켰다.              < Ⅱ   스콧트란드  종교  개혁 >Ⅱ-29. 스콧트란드의 역사적, 지리적 배경에 대해서 말하라.   (1)스콧트란드는 영국 북쪽의 소국으로 아일란드에서 건너간 스콧트족과 원주민 픽트(Picts)족이 살고 있었으며, 처음으로 성니니안(St . Ninian)이 4세기 전도하고, 563년에는 성 콜롬바(St . Colunmba 521-597)가 아이오나(Iona)섬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전도를 하였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중심이 되어 영국의 세력에서 독립을 유지해 왔다.    종교개혁이전에 성 안드류스 대학(St . Andrews, 1411), 글라스고 대학(Glasgow1450-1), 에버딘 대학(Aberdeen, 1494)이 설립되고 : 1472년에는 세인 안드류스가, 1492년에는 글라스고가 대 감독교구가 되었다.  그러나 개혁 전에는 교회가 힘을 잃었다.  (2) 지리적으로 좋지않는 환경에 놓여있으며 북쪽은 고지대(High Land)이며, 남쪽에 수도인 에딘버러, 새인 앤드류스, 글라스고 등의 도시들이 있다. 민족적으로 스콧트인들(Scote)은 독립심이 강하고, 근면하며, 인색할만큼 근검절약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씨족 관념이(Clan)이 강하여 각 씨족벼로 특이한 색깔과 옷을 착용하였으며(옛날에) , 씨족간에 분쟁도 많았다고 한다.   (3) 1707년 스콧트란드가 영극과 연합(Union) 하기 이전 왕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a)  1513-1542 : 제임스 5세     (b)  1542-1567 : 메리 스트아트(Mary Stuart 1542-1567) *소위 “Queen Scots"     (c)  1567-1625 : 제임스 6세. (1603에는 영국왕을 겸하게 되어, 제임스 일세라는 옹칭을 가지게 됨. 이 이후로 1707년까지 영국왕은 자동적으로 스콧트란드 왕이 되었음)Ⅱ-30 스콧트란드  종교개혁의 예비단계에 대해서 말하라.   (1) 위크리프의 설교자들(Lallards)이 스콧트란드에도 일어 났으며, 레스비(Resby, 1406)와     크라와(Crawar, 1433)가 순교하였다.    (2) 독일에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자 루터의 저작이 밀수입되고, 패트릭 해밀턴(Patreck       Hamilton)이 루터의 저작에 감명을 받고 독일에 건너가서 개혁자들을 만나 개혁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귀국하여, 진리를 전하다가 1528년에 스콧트란드 장노교회의 첫  순교   자가 되었다.  (3) 영국의 종교개혁운동이 영향을 미쳤으나, 반영감정(反英感情) 때문에 스콧트인들은 제네바의 개혁안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존 낙스(John knox, 1513-1672)가 순교자 위시아트 (G. Wishart)를 이어 개혁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Ⅱ-31. 존 낙스에 대해서 설명하라.  (1) 존 낙스는 스콧트란드 해 딩턴(Haddington)출신이며, 그도 처음 신부가 되었으나, 고향에서 법률가로 일을 하는 등 불안정한 생활을 하다가 위시아트의 영향으로 개혁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1547년에 확신을 가지고 체인 안드류스에서 진리를 전파하다가, 불란서 함대가 성을 점령할 때 붙잡혀 19개월간 노예선에서 포로생활을 하였다.  1549년 방면된 후에 영국 에드워드6세 궁실의 목사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메리 여왕의 집권 후에 제네바로 피신하여 칼빈을 만결정적인 스콧트란드 교회개혁의 방향을 잡았다.  거기서 결혼도 하고...... .  (2) 1555-1556, 귀국하여 설교와 저각에 힘을 다하였으며, 그의 영향을 받은 반불파(反佛派)    귀족들과 “가장 복스러운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교회”를 설립하기로 계약(Covenant / 또는 (Covenanting)을 1557년에 맺게 되었다.  이 귀족들이 나중에 “회중(교회)의 존귀한 者” 로서 개혁운동의 정치적지지 자가된다.  (3) 1560 영국의 도움으로 불란서 군대가 물러가고, 스코트란드 의회는 낙스의 신앙고백서(Scottish Confession, 1560)을 체택하였고, 스콧트란드 교회는 개혁교회가 되었다.    교황의 법적 권위를 무효화하고, 로마 카토릭 미사를 금지시켰다.     같은 해에 제일 권징서(the First Book of Discipline, 1560)를 저작하여 장노교회정치 원리를 확정하였다.  이 치리서는 의회의 인준을 받지 않고 교회의 총회(the General Assembly)에서 인준하여 교회의 독립을 확정시켰다.(그후 1564에 총회는 낙스가 지은 the Book of Common Order를 채택하였다.)  (4) 1560년에 섭정이었던 기즈家의 마리아가 죽은 뒤에, “스콧트인들의 여왕”이라 불리워지는 메리 여왕이 1561년 불란서에서 귀국한 이후로 1567년 그의 아들 제임스6세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까지, 낙수는 에딘버러 성 질스(St . Giles)강단에서, 메리 여왕은 왕좌에서 서로 불호령으로 공박하였다고 한다. 낙스는 생전에 개혁교회의 승리를 보지 못하고 1572년 11월 24일에 죽었으나, 개신교도로 양육 받은 제임스 왕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고 안심하였다 한다.  (5) 그의 성품은 편협한 점도 있고, 과격하고 거침없이 말을 함으로 적을 많이 만들었으나, 대담하고 직선적이어서 굉장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왕실에 틀고 앉은 “마녀들에 대한 선전나팔”(the First Blast of the Trumpet against the Monstrous Regiment of Women, 1558)이란 소책자의 표제가 나타내 보이는것 같이 선동적이고 열열한 개혁운동가였다.    그의 신념은 “예정론 연구” (Treatise on Predestination, 1560, 제네바에서 출간)에서 보이는 엄격한 칼빈주의 신학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은 “스콧트란드 종교개혁사”(1587, 1644완간)로 사후에 출판되었다.Ⅱ-32. 낙스의 후계자 멜빌에 대해서...... .  (1) 안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2-1622)은 낙스의 후계자로서 스콧트란드 교회를 장노교회로 조직하였다.  1577년 촐회에서 제 이 권징서(Second Book of Discioline, 1577)을 체택하고 목사, 감독, 성직자(minister)는 같은 말로 썼으며 시찰장(Super-intendents)의 임무를 노회(Presby tery)로 이관하고, 감독직은 교회재판(ecclesiastical courts)에서 담당하였다.   (2) 그는 베자의 친구이었으며, 학자요 스콧트란드대학교육 개혁가이기도 하였다.    글라스고대학장으로서 어학, 과학, 철학, 신학등의 새로운 교과과정을 도입하였다.    제임스 왕의 정책에 반대하다가 수 차례 교수직을 잃었으며, 국교회 예배의식을 풍자하는 시를 써 런던탑에 수금되기도 하였다.Ⅱ-33. 스콧트란드 장노교회의 특색에 대해서 말하라.   (1) 교리는 개혁신앙(Reformed faith),정치는 장노주의(Presby-terian system)를 취한다.     스콧트란드의 국교로 확정된 것은 1690년이나, 그때까지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2) 제임스6세기 영국왕이 된이후로 영국왕들들이 스콧트란드에 감독제를 강요하였다. 단일   군주, 단일교회정책을 취한 것이다.  스콧트인들은 정치적, 종교적자립을 원하여 1538년   국민계약(National Covenant)을 맺어 장노제를 유지하기로 맹약하고, 영국왕 찰스일세에   반란을 일으켰고, 1643년에는 청교도들이 우세한 영국의회와 “신성동맹 및 계약”(The     Solemn Leagus and Covenant)을 맺고 국왕과 싸우게 되었다.     1647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소요리문답, 예배서를 교회의 규범서로 받아들였으   며, 명예 혁명 후에 정식으로 스콧트란드 영역에는 장노교회가 국교로 선포되었다.  (3)예배는 질서와 위엄(order and dignity)이 있으며 단순하다 .고교회파(High Presbyterisns)는 예배의식에 예식서를 사용하나, 대부분 정한 예배 의식서를 사용하지 않고, 예배의 중심을 설교에 둔다. 사도적 신앙과 보편 교회적 예배에 충실하려 한다.    성찬은 번번하지 않고 장노들이 수종한다.  권징을 실시한다.Ⅱ-34. 계약파(Covenanters)란 무엇인가 ?   (1) 16세기, 17세기 스콧트란드 장노교인들로서 종교적, 정치적 맹세로 결속하여 그들의 종교적이상을 성취하려하였다    1556에서 1562사이에 수많은 계약이 이루어지고, 1638년 찰스일세에 대항하여 맺은 국민계약(the National Covenant), 1643년 신성동맹 및 계약(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을 정점으로 계약을 종교 및 정치투쟁의 방법으로 사용하였으나, 그 이후에는 계약파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1661-1688년사이에 또 다시 장노교회가 핍박을 받을 때 새로운 계약이 생겨 났고, 명예혁명으로 장노주의의 승리로 계약목적이 이루어졌다.  (2) 그 이후에 일부의 과격파는 1690년의 장노교회설립에 불만을 가지고 “개혁 증노교회 교인” (Reformed Preabyterians)이 되었으며, 계속 “계약파” 전통을 이어왔다.  그후에 스콧트란드 장노교회에서 분리한 “자유교회” (Free Church, 1876)에 합세하였다.   (3) 리차드 카메룬(Rechard Cameron, ?-d. 1680)은 과격파의 대표이며, 1661-1688년 왕성복구시대에 찰스이세에 대한 무력항쟁을 펴고, 국교회에 동조하는 동족에 대해서도 공격을 엄추지 않았다.  그는 열혈설교가이며 스콧트란드교회와 국가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가 1680년에 국와의 군대와 교전중 전사하였다.  그를 따르는 과격한 계약파를 “카메루니안”(Cameronians)라 부른다. 지금도 미국에 개혁 장노파가 있다.                          <Ⅲ.  제 17세기  대륙의  교회들 >   A .  독일 교회Ⅲ-35. 웨스트팔리아 평화(1648)이후 독일교회는 어떻게 발전되었는가 ?  (1) 정통주의시대(the Age of Lutheran Orthodoxy) : 17세기 전반에 걸침.  (2) 독일 경건주의(German Pietism) : 보편적운동은 아니나1690-1730대까지 전성기를 이루    었다.  (3) 독일 계몽신학(German Rationalism) : 1730-1750대의 신학문(Neology)의 발달.Ⅲ-36. 독일 정통주의 신학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라.     (1) 협정신조(the Formula of Concord, 1577)이후, 30년 종교전쟁(1618-48)을 거쳐, 웨스트팔리아 종교형화로, 로마교회와 개혁교회(칼빈주의)가 루터파 교회와 대등한 위치에 셔ㅓ게 되자, 루터교회는 (1) 자파의 정통성에 대한 변증과 (2) 정통신학의 정립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후 17세기 전반에 걸쳐 정통신학시대가 전개된다.    (2) “순수 교리” (reinen Lehre, l pure doctrine)의 수호와 “조직신학의 체계화”를 기치로 추구된 정통신학은, 루터의 교리를 스클라 철학의 방법으로 체계화시키는 것이었다    루터+아리스토텔레스). 방법론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따라 경직된 형식주의를 취하고, 전통적교리를 준거로 하는 엄격한 보수주의 태도를 취하였다.    (3) 성경을 교리의 법전으로 삼아, 특정교리를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페단도 있었다.  축자 영감설(Plenary lnspiarition of the original texts)을 믿었다.    이로 인하여 기독교의 기본교리가 체계화 되었다.  그러나 반면에, 경험적이고 실제적인 신앙생활에 유익을 끼치지 못한 점도 있어 나중에 경건주의가 일어나 그 결점을 보충하려 하였다.  (4) 이 시대에 훌륭한 정통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a)켐니츠(Martin Chemnitz-d. 1586) : 신학 논제(Loci Theologici)와 트렌트 공회 비판                                        등의 저자이며, 정통주의의 원조이다.     (b)게르하르트(Johann Gerhard ?-d. 1637)예나 대학교수로 루터정통파 신학의 대표적 신                                        학서인 신학존제(Loci Theologici)저술.     (c)칼로프(Abraham calov -1686) : 루터파 변증 신학자.Ⅲ-37. 조정주의자에 대하여 설명하라.  (1) 조정주의자 또는 화평주의자(Ireniker)는 정통적 루터파와 개혁파 사이에 조정 역할을 하였다.  특별히 개혁파 쪽에서 이러한 노력이 현저하였다.    특히 하이델베르그 신학교수 유니어스(Franciscus Junius)와 파로이스(David pareus)는 신앙고백의 자유를 위해 조정 역할을 하였다.  영국인 존 듀리(John Durie 1596-1680)는 대륙의 루터파와 칼빈파의 연합을 주장하였다.    (2) 17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조정주의자는 게올그 칼릭스토스(Georg Calixtus, 1586-1656)이다.  헬름슈테트 대학 신학교수로 재직하면서 루터파의 엄격한 고백주의를 버리고 혼합주의 신학노선을 걷게 되었다.  자신은 정통교리를 가지지만, 각 교파간에 가장 공통성인 범 基督敎的 교리를 찾아내서 교파간의 화해를 도모하고 자 하였다 루터파 개혁파 심지어 로마 카토릭까지 연합 할 수 있는 근거로 (a) 성경 (b) 사도신경 (c)빈센트율(vincentian canon, 보편성, 역사성, 만인의 동의)에 근거한 초대교회 5세기 까지의 신학을 들었다.  1646년에 혼합주의 논쟁이 크게 일어났고 칼로프는 칼릭스터스를 공격하였다.    (3) 루터파와 개혁파의 화해 노력은 계속 되었으며 베를린 종교회의 (1662-63)는 그 한 예이다. 이러한 노력은 프러시아에서 연합교회의 설립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4) 요한 안드레(Johnann Andreae, 1586-1654)는 기독교 이상사회(Christianopolis)를 통해서, 그로티우스는 “교회 평화안”을 통하여, 각기 교회의 연합을 모색하였고, 심지어 로마 카토릭 측에서는 노이슈타트의 주교 스피놀라를 통하여 개신교와 연합 가능성을 찾기도 하였다.  또한 라이프니츠(G . W . Leibnitz, 1646-1716)는 프러시아의 연합교회 성립에 공헌을 하였을 뿐만아니라, 불란서 카톨릭 감독인 보수에(J . B . Bossnet, 1627-1704)와 교회 연합가능성을 논의하였다.  서구의 방향은 점차 교파간의 차이를 조정하려는 목표로 움직이게 되었다.Ⅲ-38. 엄격한 정통주의에 대한 또 다른 반발에 대하여 설명하라.  (1) 극단적 신비주의가 발생하였다.  야곱 뵈머(Jacob Bohme ? -1624)는 환상적이며 신비    한 神知學(Theosophy)의 체계를 세웠다.  1612년 예명(Aurord ......)이란 저작을 출판하    였다.  또한 신비주의자들의 비밀결사인 장미 십자단(Rosicrucians)이 생겨났다.    (2) 경건 문학이 나타났다.  요한 안드레와, “진정한 기독교”전 사권을 저작한 요한 아른트   (Johann Arndt -1621)는 기독교인 생활을 강조하여 신비주의자로 물렸으나 나중에 18세   기 경건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B . 제 17세기  서구  개혁파  교회Ⅲ-39. 개혁파 정통주의(Reformed Orthodoxy)에 대하여 설명하라.  (1) 개혁파 정통주의는 노르트 공회(Dordt Synod, 1618-1619)이후 알미니안 주의를 배격하고 푸티어스(G . Voetius-1676)고마러스(Francis Gomarus, 1563-1641)등의 억격한 칼빈주의가 정통으로 득세하였다.    신학적인 방법은 루터파 정통신학과 같이 스콜라 신학적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신학체계 정립에 힘을 썻다.    (2) 화란 개혁교회는 교리적으로는 억격한 칼빈주의를 취하였으나 정부는 여러 가지 자유사   상을 허락하였다.  그 결과 도덕적 엄격주의는 퇴조하고 소수의 무리에 국한되었다.   (3) 정통적 칼빈주의에 대한 하나의 교정적 신학 방법으로 칵시어스(Cocceius 1603-1699)의 “계약 신학” (Covenant theology 또는 Federal theology)이 각광을 받았다.     순수한 성경 신학(Biblical theology)임을 표방하고 아섰다. 그의 주저는 1648년 출간된“계약 교리론”이다(Summa doctrinae de Foedere et Testa mento Dei)영국 청교도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나, 정통파에게서는 비 정통이라고 비난을 받았다.Ⅲ-40. 알미니안 주의의 영향에 대해서 말하라.  (1) 1609년 알미니우스의 사후, 에피스코푸스(Simon Episcopius, 1583-1643)와 그로타우스    (H. Grotius)등이 이 파를 지도하였으며, 1618-1619년 도르트 공회 직후에 국외로 추방   되었다가 1630년 종교관용령에 따라 제한적 자유를 허용받았으며, 1795년 완전한 법적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2) 그러나 알미니안 주의의 영향은컸다.  본래 화란의 에라스무적 종교관 및 신학방법의 전통이 있었으므로, 알미니안 주의는 그러한 전통에 영합하여 자유로운 성경해석과 본문에 대한 비평을 하였다. 이것이 18세기의 계몽신학의 시발이 되었다.  과격한 알미니안들은 소시니인파와 합세하여 일위론자(Unitarian)로 전신하게 되었다.Ⅲ-41. 아미로 주의란 무엇인가 ?  (1) 모이즈 아미로(Mouse Amyrault)는 17세기 불란서 유그노 신학교인 소무르(Saumur)신  학교의 교수로서 선택교리의 설명에서 후속설(後贖設 Post-redemptionism)또는 가정적만인구원설(Hypothetical Universalism)을주장하였다. 이 학설은 특별 구원설((particularism)과 보편구원설(Universalism)의 조화책으로, 하나님께서 만민의 구원을 가정하시고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도 설정하셨으나, 실제로 그 공로를 힘입어 구원함을 받을 사람은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으나, 예정된 사람들만 믿게 되며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에 역사하시어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2) 이 학설에 대하여 스위스 제네바의 마지막 정통신학자 투레틴(Turretin)과 츄리히의 하이덱거(Heidegger)가 헬베틱 협정신조(Formula concensus Helvetica, 1675)를 작성하여 정통적 구속도리와 예정론을 수호하였다.               C. 제 17세기  불란서  카토릭  교회Ⅲ-42. 루이 14세의 절대군주권(Absolutism)과 불란서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라.  (1) 루이 14세(Louis XIV, 1643-1715, 1661이후는 독제)는 절대권의 신봉자이며, 교회를 그    의 지배하에 두었다.     1685년 낭트 칙령을 철회하고(Hevocation of the Edict of Nantes,1685)위그노를 국외로   추방시키고 개혁교회는 불법 단체로서 1789년 불란서 혁명시 까지 지하교회가 되었다.    (2) 그의 독재는 불란서 카톨릭 교회에도 철저하게 미쳐, 1682년 불란서 공의회(National Curncil0를 열고 “불란서 성직자의 四個집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a) 통치자는 교권에 대하여 독립한다.  (b)영적 문제에 대한 교황의 권한도 공의회에 의하여 제한된다.    (c)교황권은 불란서 관습과 법에 의하여 제헌된다.     (d)교회가 확정하지 않는 한 영적 문제에 대한 교황의 판단도 틀릴 수 있다.        1693년에 왕은 교황과 합의한 후 四個安를 철회하고, 왕은 공석중인 주고 임명권과 수입을 취하였다. 불란서 교회는 영국처럼 독립한“불란서 교회”(Gallican Church / Gallicanism)를 성립시키지 못하고, 다만 루이 14세가 교황청을 견제하는 방편으로 이용하였다.Ⅲ-43. 잔센파(Jansenists)의 사상과 활동에 대해서 말하시오.  (1) 잔센(Cornelius Jansen, 1585-1638)은 로마 카톨릭교도로, 이쁘르의 감독(Bishop of Ypres)이였다.  쌍 시랑(St Cyran)의 영향으로 어거스틴을 연구허여 “아우구스티누스”란 연구서(사후 1640에 출판됨)를 저작하였다.  그의 주장은 칼빈의 은혜론과 흡사하였다.  즉    (a) 하나님의 특별은혜가 없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     (b)은혜의 역사는 불가항력이다.(2) 잔센의 후계자인 상 시랑이 뽀르로얄(Port-Royal)수녀원을 중심으로 잔센파의 가르침과 행위를 힘썼다.  그는 사랑에 동기를 둔 진정한 회개와 사죄를 강조하였다.  이것이 형식주의적인 예수회와 마찰하여, 그는 투옥되기도 하였다.    상 시랑 다음에 아르노(Anton Arnauld)가 후계자가 되어 예수회의 도덕신학인 개연주의(Probabilism)에 반대하고 : 도덕적 엄격함과 권징과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였다.(3) 잔센주의는 17세기 카톨릭 교회의 일종의 개혁운동이었으며, 깊은 종교성과 심각한 도덕관념으로 중산층, 시골신부, 지성인, 하급귀족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쳐 회개하고 참된 신앙생활에 힘쓰는 이들이 많이 생겼다.  교황과 예수회(the Jesuits)는 1653, 1656에 이들을 정죄하고, 루이 14세는 1709년 뽀르 로얄수녀원을 훼파하고 죽은 이들의 무덤을 파헤치고, 마지막으로 1713년 교황은 칙서“우니게네투스”(Unigenitus)를 발표하여 정죄하였다.    이후 잔센파는 화란으로 피난하여 우트레히트에서 로마 교회와 분리하여 1723년“화란 고 카톨릭교회”(the Old Roman Catholic Church of Netherland)를 세우고 19세기에는 교황 무오설에 반대하는 카톨릭 교도와 합하여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Ⅲ-44. 빠스칼의 생애와 신학에 대하여 설명하라.(1) 빠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은 유명한 불란서 신학자, 수학자, 철인이다.    1646년 자센파와 접촉이 되어 첫 개심을 하였다.  1651년 부친의 사망으로 누이동생 자크린이 뽀르 로얄 수녀원에 입소하였고 그는 계속 파리에서 과학과 수학연구에 물두하다가 1654년 완전히 개심하고 뽀로 로얄에 가서 신앙생활에 전념하며 남은 8년의 여생을 살았다.    (2) 1656년 소르본느 신학자들이 잔센의 가르침을 이단으로 정죄하자, 빠스칼은 익명으로        “프로방스 서간집” (Lettres prbvinciales, 1656-1667)을 써서 로마 카토릭교회(특히 예수         회)의 은혜론과 도덕신학을 비판하였다.  문화적으로도 불란서 고전시대의 명문으로 간주        되고 있다.  이 서한에서 초대교회의 근엄한 생활과 행위를 모본으로 한 잔센파의 엄격한       신앙생활을 변호하였다.   그의 사후에 정리되어 출간된 “명상록(pensees)"은 위대한 기독       교 신앙 변증서이다.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 종교적 세계는 믿음으로 알 수 있을 뿐이며,       이 세계에 대해서는 ”기하학적 정신“ 으로 오직 추론할 뿐이며,  이 세계를 마음(Coeur)으       로 느낄 뿐이라 하였다.  그는 유명한 ”노름 원리“ (Wager theory)로 신앙에는 하나님을        따르든지 않든지 의지적 결단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에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과학자와 철학자 하나님”은 아니었다.  위대성과 비극성의 틈바구니에 낀 인간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성을 초월한 신앙의 실제적 경험적 세계를 변증하였다.Ⅲ-45. 정숙주의(Quietism)에 대하여 설명하라 .    정숙주의는 17세개 불란서 카토릭 교회 내부에서 일어난 불건전한 신비주의로서 특히 물리노(M . de Molinos C . 1640-1697)와 귀용(Mme Guyon), 페느롱 감독(Archbishop Fenelon)등이 보편화 시켰다.      근본 원리는 인간의 노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완전에 이르려면 완전한 수동적 태도와 자의지(字意志)의 소멸, 심지어 자기의 구원까지도 포기할 수 있는 정도로 전적 하나님의 의지에 순복해야한다.  그리하여 기도에 들어가면, 예수님의 사랑, 덕성, 삼위일체에 대한 흠모와 같은 것 조차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순수한 신앙” 으로 하나님 안에서 휴식하게 된다.  이런 완전에 이르면, 자연히 외부로 도덕적인 행동애 흘러나온다고 하였다.    이것은 “완전주의” 이다.  완전한, 신비적 상태에 이르면 죄를 지을 수도 없고, 생각하고 행하는 것마다 하나님의 일이 된다고 한다,    자의지가 하나님 앞에서 파쇄 되었으므로 마귀의 유혹을 받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죄가 되는 행위도 완전 상태에서는 죄가 되지 않는다.  조심할 것은 산심(散心)으로 “정숙”을 깨뜨리는 일이다.    정숙주의의 도덕적 결과는 거의 범신론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1687년 교황 인노선트 11세의 정죄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신비주의 겨향은 대륙 각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경견주의와 관계가 맺어 지기도 하였다.                 <Ⅳ . 제 18세기>Ⅳ-46. 제 18세기의 교회사적 특성은 무엇인가 ?   (1) 영국에 휠리암과 메리의 등극으로 종교자유(Tolerance)가 허용되고, 종교와 정치의 투쟁    은 일단락이 된다.  개신교 신앙영역과 구교의 영역이 확정되고, 교파주의가 확립이 되    었다.  (2) 제 17세개의 종교 전쟁이 끝나고 정통주의(Confessionalism)가 퇴조하자, 즉시 인간사에    서 이성의 활용으로 합리성을 추구하게 되고, 또 한편 인간의 경험을 중심으로한 주관    적이며, 개인적인 내면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일어났다.  정치적으로는 절대군주권이 약    화되고 시민사회의 형성, 경제적으로는 근대산업사회와 초기 자분주의의 발달, 사상적    으로는 계몽철학이 나타났다.  (3) 신학적으로는 정통시대-알미니안주의-계몽신학(Enlighten ment theology)으로 진전하였    다.  합리적 경향은 합리주의 신학을 낳고 극단적으로는 이신론(자연신론Deism), 무신    론에 이르고, 경험적 경향은 좋은 면에서 경건주의와 웨슬레의 때 부흥운동(Evangelical    movement)을 낳게 하였다.             A . 독일 경건주의(German Pietism)Ⅳ-47. 제 18세기 초 독일 경건주의 성격에 대하여 설명하라.  (1) 경건주의 운동은 제 17세기 정통주의 신학과 종교생활에 대한 반동이다.      (a)독일 지방교회의 속파,    (b)형식적인 신앙생활,    (c)교리적 경화에 대한 반발이다.        그러므로 경건주의 운동의 기본 요강은    (a)경건 생활(praxis pietatis)    (b)종교적 개인주의(personal religion)로서 개인의 종교적 경험을 심화시키려 하였다.    (2) 실제 행동 목표로서 세상과 세상의 오락(춤, 카드놀이, 극장, 세속서적)을 멀리하는 실제 적 금욕주의(practical asceticism)를 실천하며, 경건 생활을 힘쓰고 주의 재림을 기다려 절제생활을 하도록 하였다.    (3) 특히 독일 경건주의는 하나의 교파를 형성하지 않고, 루터파 교회 내에서 정통신앙을 유지하면서 하나의 신앙운동으로 그치게 되었다.  형식적인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소집회(召集會, Conventicle), "중생“의 경험을 가진 신자들만의 모임을 가졌다.     (예컨데, 구역예배, 경건회, 성경연구회, 특별집회등)Ⅳ-48. 스페너(philip Jaclb Spener, 1635-1706)의 경건주의 강령에 대해서 설명하라.  (1)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시발자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목회하는 중에 교회개혁에 힘을 기울이고, 그 방안으로 진실한 교인들로 구성된 “경건회” (Collegia pistatis)를 열어 말씀을 가르치고 실제적 신앙 생활을 지도하였다.  최후에는 베를린에서 감독목사(provost) 로서 일하였다.  (2) 그는 독일의 화평주의자 아른트(Arndt)의 “진정한 기독교” (Ture Christianfty, 1605-1609)를 읽고 감명을 받았으며 : 영국 청교도들의 저작중에서 루이스 베일리(Lewis      Bayly ?-1631)의 “경건 연숩”(practice of pietie, 제3판, 1613)백스터의 “자기부정론”    (Trestise on Self-denial, 1659)등을 읽고 영향을 많이 받았다.      1675년에 경건주의 운동을 일으키게 되는 획기적 소 논문 : “경건한 열망(pia desideria /   pious Longings)을 출판하여 독일교회의 조용한 개혁을 주도하였다.  (3) “경건한 열망”에서 제창한 6個 항목은 다음과 같다.     (a)하나님의 말씀 연구와 해석, 공중예배도 말씀중심으로 하고, 개인적으로 가정단위로 성     경을 많이 읽게 할 것.    (b)만인의 영적 제사장 직분의 활용.       평신도 각자의 신앙생활을 강조하고 , “상호 영적 치료”(mutual cure of souls)를 실행     하도록 할 것     (c)기독교는 실천의 종교(특히 이웃에 대한 사랑)라는 것을 끊임없이 가르칠 것.    (d)종교적 분쟁을 하지 말 것. 어쩔수 없을 경우에는 사랑으로만 할 것.    (e)목회자 야성방법을 개혁하며, 교리를 가르칠 뿐만 아니라, 진리가 영혼속에 베어 들게     할 것.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타올러의 저작들과 “독일신학”등의 경건서     적을 읽게 할 것.    (f)설교는 학식자랑과 웅변보다 교훈적일 것.Ⅳ-49. 독일 경건주의의 세 파는 무엇 무엇인가 ?     (a)할례 경건파(Halle Pietism) : 독일 할례 대학을 중심으로 일어난 경건운동인데 그 특    색은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과 그 구체적인 표현으로 복지 기관설치에 있다.(학교, 고    아원, 보건소, 선교회등), 그 대표자는 아우그스트 프랑케(August H . Francke           1663-1727)이다.        (b)뷰르템베르그 경건파(Wurtemberg Pietism) : 남부 독일에서 일어난 경건 운동으로 자     유주의적 색체를 띄었다.  엄격한 회개보다 절제 생활과 자기 성찰을 강조하였다.       특히 일기의 활용을 권하였다.       요한 벵겔(Jonann Albert Bengel, 1687-1752)은 이 운동의 대표자이며, 유명한 주석가     요 성경학자이었다.  성경을 학적으로 연구하는 전틍을 세웠으며, 나중에 이 계통에서     고등비평가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제믈러(Semler - 1793)가 배출되었다.         (c)헤른후트 경건파(Herrnhut Pietism / 또는 진젠도르프파) : 감정적이며, 신비주의 경     향이 있는 파로서 대표적 지도자는 진젠도르프 백작(Count Zinzendorf 1700-1760)이      다.Ⅳ-50. 프랑케의 경건주의 운동에 대해서 설명하라.   (1) 프링케(1663-1727)는 스페너를 만나서 이전에 독자적인 개심의 경험을 하였고(1689),      라이쁘찌히 대학에서 “성경 애호회” (Collegia philobiblica, 성경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스페너의 도움으로 할레대학의 교수가 되어, 거기서 여러 가지 사회복지 기관들을 세     우며 능력있는 일을 하였다.     (2) 독일은 30년 전쟁후에 그 여파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피폐한 상태이었으며 선진 열     국의 해회 식민지 활동에 가담하지 못하였으므로 여러 가지 면에서 낙후하였다.  할레     대학 주위에 “버려진 군중” 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을 모아서 성경을     가르치고 “영 육의 양식”을 주어, “살아 계시고 능력 많으신, 사랑하시고 참되신 하나     님의 은혜로운 발자취”를 따르려 하였다.           (3) 프랑케는 목회자를 양성하는 외에도 다음과 같은 방대한 사업을 하였다.      (a)불우 학생을 위한 학교 설립. (큰 아이가 작은아이를 가르치게 함.)      (b)고아원(1696)      (c)기숙학교 설립, (철저한 교육과 생활 지도, 자비와 장학금)      (d)김나지움(1697, 특수교육기관)      (e)페다고지움(pasdaggium, 사립학교 : 부자들의 자제교육)      (f)모자원 설립(House of Widows, 1698) : 디모데 전서 5 : 3-16을 모델로, 국가와 교       회를 위해 기도를 전문적으로 하였으며, 전속 관리인, 목사, 의사, 가정부가 있음.      (g)김나세움(Gymnaeceum) : 미혼 처녀들이 자비로 교육받음.      (h)교사 양성소(Teachers training institute, 1704) : 교리를 가르칠 수 있도록 교사 양성      (i)보건소 설치 : 할레 신학생들에게 의학 지식 보급.      (j)책방      (k)성경 출판사 설립 : 경건 서적 출판         이 모든 기관들은 순전히 프랑케의 기도로 이루어 졌다고 한다.         그의 저서가 영국에 소개되고 온 구라파에 소개되었으며, 특히 영국에서 18세기 후        반에 부흥운동이 일어나자, 프랑케의 사회기관들이 영국에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1) 프랑케의 지도로 할레 신학생이 텐마크 왕 프레데릭 4세의 요청으로 인도 크란크바알     (Tranquebar)선교사가 되었다. (1705)Ⅳ-51. 진젠도르프 백작(1700-1760)에 관해서 말하시오.   (1) 헤른훗트 경건파의 지도자이다.  그는 할레 페다고지움에서 공부할 때 프랑케의 경건즈    의 사상을 배웠다.  14세 되던 해에 친구들과 한 모임을 창설하여 “전인류를 사랑한다”    고 삶의 목표를 정하였다고 한다.  갈 곳을 잃은 후스파 피난민들을 규합하여 헤른후트    형제회(Herrnhut society of friends)를 창설하고(일명 the Moravian Church, 모라비아교    회)세계 선교를 도모하였다.      (2) 그의 사상은 “성령안에 있는 하나님의 참된 교회”를 주장하며 교회의 연합을 추구하였    다.  원시 기독교 풍습을 좇아 발을 씻기고 애찬을 실시하고 화평의 입맞춤, 제비를 뽑아    결정하는등 실제적 생활을 강조하고, 또한 믿는 이들의 공동생활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진젠도르프의 사상은 그외 신비적이고, 고도의 감정적인 예배와 신학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에 대한 성애적인 흠모와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찬하는 신학을 발전시켰다.  주    의 피, 땀 상처, 고통을 실감 나게 묘사하는 찬송시를 지어 불렀다.  한때 그는 성부 성    모 성자를 삼위로 보는 잘못을 범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모든 과격한 사상을 회    개하였고, 그의 후계자인 슈광겐베르그(August Gottlieb Spangenberg)는 모라비아 교회    의 신학을 재정비하여 정통노선에 세웠다.     (3) 진젠도르프는 미국, 영국, 화란, 발틱해 연안 등지에 모라비아 교도들의 공동체를 세웠으    며,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에 새로운 감정적 요소를 도입하므로 공헌한 바도 크다.      슐라아어막허(Schleiermacher)는 그의 영향을 입었다.  또 한편 요한 웨슬레도 모라비아    교도들의 열열한 신앙과 전도열에 큰 감명을 받아 부흥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Ⅳ-52. 청교도(Puritan)와 경건주의자(Pietist)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    청교도들은 신앙과 생활의 기본 입장이 칼빈주의이고 : 경건주의자들은 루터파 신학의 산물이다.  청교주의(Puritanism) - 경건주의(Pietism) - 복음주의(Evangelicalism)로 시대적 이행과 각기 특성의 공동점과 차이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B . 계몽주의(the Enlightenment)Ⅳ-53. 계몽주의의 특색이 무엇인가 ?   (1) 교회의 권위에서 벗어난 인간 이성과 경험에 근거한 자율적 세계관과 인생관의 정립과     추구이다.  인간이 가치 측정의 표준을 자기에 두었다.  자율(自律 Autonomy)의 주장이     모든 사상과 활동의 특색이다.      (2) 르네상스 이후 “自我의 발견” 은 이런 방향으로 계속되였으나 종교계혁, 정통주의, 종교    전쟁 등으로 각광을 받지 못한 채 저류를 이루어 오다가. 신학적으로 암미니안 주의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나타나다가(제 17세기), 30년 종교 전쟁이 끝나고 상업경제의 발달과    함께 하나의 사상적 체계를 세우고 등장하여 제 18세기는 계몽주의 시대가 되고 말았다.      (3) 이 계몽주의 운동은 나라마다 그 특색이 다르다.  종교개혁과 같은 단일성을 이루지 못하였다.  (a)영국의 경험론  (b)독일의 합리주의 -나중에 이상주의(ldealismus)            (c)불란서의 자연주의이다.   그러나 다같이 이성을 최고의 규범(Norm)으로 삼고,       모든 인문과학을 자연적 체계로 정비하여, 종교, 도덕, 헌법, 시민법, 경제질서의 근거를 이성 또는 자연법에 두려 하였다.Ⅳ-54.화란의 계몽주의에 대해서 말하라.   (1) 화란에서 계몽주의는 시발되었다.      1630년 종교관용(Tolerance)정책과 상업경제 발달과 시민계급의 형성등으로 문화가 발    달하였다.  알미니안이었던 그로티우스의 자연법사상, 성경주석, 자연신학적 경향은 벌    써 자유로운 학문 활동이 있었음을 알수 있다.  데까르뜨, 스피노자, 베일 등이 일찍 활    동하여 계몽주의의 기초를 쌓았다.      (2) 데까르뜨(1596- 1650) : 데까르뜨 학파를 세웠다.     “의심” 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존재의 근원을 밝히려 하였다.  최후로 남아서 의심할려해   야 할 수 없는 “의심하는 자기” (그의명제 :Cogito, ergo sum)의 존재를 발견하게 되었   다.  이것이 서양 철학과 신학에 큰 영향을 미친 자율(human autonomy)의 발견이다.     이성이 현실의 전부와 과학적 방법문제를 해결한다는 합리주의를 낳게 되었다.     데까르뜨의 신의 존재에대한 논의는 결국 인간의 인식의 확실성을 증명하는데 이용되었   다.  존재론적 증명(Ontological argument)으로 완전한 존재는 “존재” 까지 포함한다.     인간의 분명하고 똑똑한 관념들이 타당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 : 완전한 신이 사람을    “속일” 리가 없기 때무에, 인간의 분명하고 똑똑한 제 관면들이 오류를 범하도록 허락하   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므로 논리적 연역(logical deduction)은 타당할 수밖에 없다. 그   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아니하였으나 철저한 “세상” 中心의 사상가였다.      (3)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 1632 - 1677) :그는 스페인에서 피난은 유대인 가정    에서 자랐으나  자유사상 때문에 출교 당하였다.  그의 철학은 합리주의적 범신론(rational pan-theism)이다.    그는 교회와는 관련이 없는 철학자이었으나 후세에 기독교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며 지금까지 그 영향은 생생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는 자연신학의 아버지요, 자연주의의 사상적 원천이요, 계시종교의 파괴자이다.    그는 “신학적-정치적 논문” (Tractatus Theologico-politious 1670)과 윤리학(Ethica, 1677)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혁명적 형이상학을 전개하였다 : 실체(Substance)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며, 그 자신을 통하여 인식되어 진다” 고 하였다.  다시말하면 그 자체에 대한 관념의 구성은 그 자체의 (外)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실체는 “ 신 또는 자연” (deus sive natura)이며, 다만 신은 자기원인(causa sui / 생산하는자연 Natura naturans)이며, 자연은 그의 나타난 것(Natura naturata)이다. 이 실체는 무한하며 수많은 속성중에 생각(cogitatio)과 연장(extension)만 사람에게ㅡ 알려져 있는데, 모든 개체들은 이 두 속성의 양태(modes)들이라 한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이란 필연에 따라 움직이는 비인격적인 신의 지능(Intellect)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인격의 영원성이나 영혼 불멸도 부정한다.    최고의 인간활동이란 사랑하는 마음으로 신의 필연성을 정관(靜觀 conremplation)하는 것인데, 이는 겸손과 참회를 통하여 인간의 격정을 완전히 정복한 다음에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의 영향 : 스피노자가 이와 같이 단일 영적 실재(a single speritual reality)라는 기본사상을 가지고 데까르뜨의 영과 육의 분리, 하나님과 세계의 분리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버리므로, 후에 독일 이상주의(German Idealism)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슐라이어막허(Schleiermacher)쉘링(F . W .  J Schelling), 헤겔(G . W . F Hegel)에 영향을 주었다.  지금도 폴틸리히(Paul Tillich)같은 이가 하나님을 초월자로 생각하지 않고 “모든 자연 개물의 창조적 근거” (the Creative ground of all natural objects)라 생각하는 것은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4) 삐에르 베일(Pierre Bayle, 1647-1706) : 계뭉철학의 화약고라고 불리워 지는 “역사적 및 비평적 사전”(Dictionaire histirique et Critique, 1695-1697)을 저각하였다.  성경에 대한 합리적 연구를 주장하고 모든 이적을 부인하였다.Ⅳ-55. 영국 이신론(理神論 Deism)의 발달에 대하여 말하시오.   (1) 1688년 명예혁명, 1689년 관용령, 1694년 출판 자유등 일련의 자유화 기운이 일자, 화란에서 알미니안 주의와 스피노자의 철학등에 영향을 입은 영국인들이 속속 귀국하여 계몽사상이 퍼지게 되었고, 그 결과로 영국 내에 이신론(Deism)이 득세하였다.  이신론은 독특한 영국적 계몽주의 종교 사상으로 벌써부터 허버트 경에 의하여 주장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상도 1750년에는 벌써 세력을 잃게 되고 영국은 웨슬레의 대 부흥운동의 종교적 역기에 휩쓸리게 된다.  (2) 이신론의 내용은 허버트 경(Lord Herbert of Cherbury 1581-1648)이 저작한 “지리론”(De veritate, 1620)과 “만민의 종교" (De religione gentilium ...... 1645)에서 모든 종교에 공통되는 5개의 진리를 말하고 있다.      (a) 유일신  (b) 예배  (c) 도덕과 경건생활  (d) 인간의 의무는 회개와 악을 멀리함    (e) 현세와 내세의 보상이다.  기독교도 근본적으로 동일한 관념에서 출발하였으나 타락하여 비 합리적 제도와 교리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존 록크(John Locke, 1632-1704)는 비록 자신은 이신론자가 아니라고 부정하였으나 기독교는 가장 합리적 종교임을 “기독교의 합리성”(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 1675)이란 저술에서 변증하고 있다.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성경에 기록된 이적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고 하였다.  그러나 항상 이성으로 미신과 신비주의를 가려내고, 이성으로 계시를 평가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경험론적 인식론은 모든 선험적 지식을 부정하고 다만 경험에 의하여 지식이 발생한다.  즉 감각과 회상을 통하여 이성작용으로 지식이 생겨난 뿐이며, 본래 인간의 마음은 백지(tabularasa)와 같을 뿐이라 하였다.  이렇게 감각과 이성 작용으로 얻은 지식이 자연계시(Natural revelation)라고 하였다.  이런 사상의 결과는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계시 종교가 자연 종교에게 밀려나게 된 것이다.    롤크 이후, 본격적인 이신론자들이 나타났다.  18세개 이신론자들은 대담하게    (a) 계시종교를 부정하고 기독교를 자연종교로 격하시키었고,    (b) 하나님, 영혼불멸, 윤리등 합리적 요소만 기독교신앙에서 수용하고, 비합리적이라 생각    하는 삼위일체 교리와 성육신 교리를 부정하였다.   (c) 하나님의 세밀한 섭리를 부정하고 우주의 기계적 운행과 진행을 믿었다.  그 대표자는    톨란드(John Toland, 1670-1722), 클린스(Collins 1676-1729), 틴달(Tindal, 1656-1733)등    이다.  톨란드의 저서 “신비하지 않은 기독교” (Christiamity Not Mysterious, 1736)는    자연종교가 기독교의 원형이며 : 유대교, 희랍 밀교, 플라톤 철학의 악 영향으로 타락하    였다고 지적한다.  탄달의 저서 “창조만큼이나 오래된 기독교” (Christianity as old as    the Creation, 1730)에서도 自然宗敎가 모든 종교의 근본이라 하고 있다.     (3) 1750년대에 오면 이신론은 그 세력을 별써 잃어 버리게된다.  대비드흄(David Hume,     1711-1776)에 의하여 이신론의 근거가 무너지고, 조셉 버틀러(Joseph Butler,            1692-1752)의 기독교 측 반격으로 영국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불란서 자연주의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Ⅳ-56. 흄의 회의론(Scepticirm)이 기독교 사상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말하라.   (1)록크(Locke)의 경험론은 아직도 이신론자들 가운데 합리적 초자연주의(rational           Supernaturalism)를 가능하게 하였다.  계시와 이성을 조화시키려 하였기 때문이다.        많은 이신론자들이 구약예언의 성취로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증거 하려 하였다.     (2) 흄은 그의 회의론(Scepticism)으로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인식가능성을 부정하였다.       “이적론(Essays on Miracles, 1748)이란 저서에서, 철저한 경험론의 입장에서 이적을 부   인하였다.  그의 논리는 이러하다 : 죽은 자의 부활을 회의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경험상, ” 인간의 증언이 잘못되었을 경우가 많은 것은 경험에 배치되지 아니하나, 이적   이  참되다는 것은 경험에 부합하지 않는다.“     인간의 인식 능력은 경험의 한계를 절대로 넘어 설 수 없다고 하여, 하나님의 존재, 영   혼불멸, 보편 타당한 진리는 알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흄에 이르러 합리적 기독교(이   신론)과 합리주의 자체까지도 파국에 빠져버렸다.  이성이란 경험의 소산일 뿐이며, 심   지어 자아도 지각의 묶음(다발)에 지나지 아니하며, 모든 지각은 경험이 얻은 인상들이 아니면 인상의 모조품인 관념일 뿐이다.  따라서 관념관( 觀念間)의 관계는 확실히 알 수 있으나, 실재의 사실들은 그러리라하는 개연성이상 더 증명할 수 없다.     인과율도 논리의 개념이 아니며, 인간의 구상력에 인상지어진 습관과 연상의 결과일 뿐이다.  그는 여기에서 형이상학의 가능성도 부정하였다.  물론 하나님의 존재뿐만 아니라 가견적 우주에 대한 신념도 부정하고, 도덕생활도 사실은 의지와 행동을 결정하는 결정에 따라 지배될 뿐이다.    (3) 이러한 철저한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은 흄이후 새로운 시대 곧 낭만주의, 자연주의, 유물주의 시대를 도래하게 하였고 :독일의 라아다러스(Reimarus)에게 영향을 주고 그리도 칸트로 하여금 시천 이성의 비판을 낳게 하여 자유주의의 근거를 쌓게 하였다.    종교적으로는 철저한 인본주의에 빠져 기독교 신앙의 침체를 가져오게 허였고 그 기에 대항 반동(反動)으로 급선회하여 “대복음 운동”을 낳게 하였다.Ⅳ-57. 버틀러의 “종교 유추” (Analogy of Religion, 1752)에 관하여 설명하라.(1) 조셉 버틀러(Joseph Butler, 1692-1752)는 장노교 가정에서 자랐으나 영국 국교회로 전향   하여 나중에 더함의 감독(Bishop of Durham)이 되었다.     “종교유추”는 그 원명이 “自然의 구조와 진행에 대비한 자연 종교 및 계시종교”     (Analogy of Religion, Natural and Revealed, to the Constitution and Course of         Nature, 1734)로 버틀러의 대 저작이며,  기독교 변증서로서 이신론자들에게 계시종ㅇ교   의 합리성을 변증하고 또 한편 회의주의자에게 계시종교와 그 개인성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2) 첫 부분은 자연계시로서 영혼 불멸성, 상벌,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moral government of the world)를 변증하였으며, 둘째 부분에서는 특별계시의 필요성을 논한 다음에 이성으로서 계시의 의미와 도덕성과 그 증거를 판단해야 하며, 양심은 신의 선물로서 성경 말씀 중 어느 한 부분이 자기 양심에 거슬릴 수 없어야 된다.    예수님의 대속 교리를 설명하면서 기독교의 진리는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개연성(Probability)이 인생의 인도자가 되니, 이렇게 개연성이 높은 계시도리야말로 믿을 만한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다.   (3) “종교유추” 는 이신론과 회의론에 대한 답으로서 널리 인정되었고, 이것으로 일단 기독교의 변증은, 적어도 영국시민들에게는, 성공적이었다고 보았다.  엄밀히 말하면, 버틀러의 변증방법은 알미니안 적이며, 즉 인간의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 기독교의 변증이었다.  그 근저에 있는 전네는 중생 되지 않은 自然人이 이성을 합리적으로 사용하면 자연 진행과 구조를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거기에 유추하여 그리스도의 대속과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게 되고 믿음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변증태도는 지금도 소위 “복음주의” (Evangelical)라고 하는 감리교의 변증방법이며 영국 국교회의 태도이다.Ⅳ-58. 불란서 계몽운동과 기독교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  (1)불란서의 계몽사상은 영국에서 건너왔다.  볼테에르(Voltaire, 1694-1778)는 영국 이신론         을 받아드렸으며 계몽사상을 보편화시켰다.  그러나 불란서 계몽운동은 그 공격 목표가 교       회와 성부의 불관용 정책이었기 때문에 반 기독교적 색체가 농후하였다.  볼테에르도 나중       에는 신의 필요성을 실제적 생활면에서 찾았고 영혼불멸을 믿지 않고 점차 물질주의에 빠       졌다.            그러므로 불란서 계몽주의는 (a) 자연주의  (b) 물질주의  (c) 반기독교(무신론을 포함)를       낳았다.    (2) 룻소(Jean-Jacques Rousseau, 1712-78) : 흄이 룻소를 영국으로 데리고 간 일이 있다.    그는 흄과 교유를 통하여 벌써 이신론의 단계를 넘어서서 자연주의 또는 낭만주의에 넘어      가고 있다.  그는 감정과 자연을 찬양하는 열혈 선지자이었다.    자연상태가 행복과 평등의 상태이며 自然에 접근하여 국가생활(정치), 교육 종교생활을 하      는 것이 이상적이라 하였다.  그의 종교는 “自然”이었다.  여기에서 사회계약론(1762), 에밀      (1760)등의 저작이 나왔다.  기독교에 대하여는 신 . 자유 . 영혼불멸을 믿었으나 이신론자      의 신앙정도를 넘지 못하였다.  하나님은 이성으로 증명학 수 없고 종교는 다만 종교감정에      근거하며 순수한 마음의 자연스러운 느낌에서 생긴다고 하였다.   (3) 디드로(Diderot, 1713-84) : 백과사전 편찬자로서 계몽사상을 보편화 시켰다.  사전에는  룻       소, 볼테에르, 돌바크(D' Holbach)등이 기고하였으며 종교관용(자유)와 민주사상을 전개하       였기 때문에 1759년 판금되었으나 1772년까지 비밀히 전 28권이 출판되었다.  디드로는 개       인적으로 기계적 유물론을 가지고 있었다.  불란서 계몽사상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큰 영       향을 미쳐 1789년 불란서 대 혁명을 낳게 하였다.Ⅳ-59. 독일 합리주의 발생에 대하여 설명하라.   (1) 독일 합리주의는 라이쁘니츠(Leibuitz, 1646-1716)와 그의 사상을 대중학시킨 크리스찬         볼프(Christian Wolff, 179-1754)의 계몽사상이다.      라이쁘니츠는 만능의 천재로, 정치가, 외교가, 수학자(미적분 발견)기호 논리학을 연구한        사람이요, 발명가(계산기)이었으며, 프러시아 한림원 창설자이다.      (2) 영국 이신론자들처럼 기계적 우주론을 중심사상으로 가지고 있다.  이것이 그의 유명한        “단자론” (簞子論 Monadology 1714-1720)으로 결실되었다.  우주는 무한한 단자(monad)        들 의 체계인데 이 단자들은 자체의 힘을 지닌 불멸의 본체(즉 쪼갤 수 없으며, 언제나         활성을 지님)로서 완전한 상승 연속법칙에 따라 하급 형태의 물질에서 영 . 천사 . 최고        로 신의 형태에까지 이르고 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 자체는 본체의 무한성을 가        질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를 반영하고 있다.      라이쁘니츠는 신의 존재를 설명할 때에 최고의 단자형태로 표현하기도 하고, 모든 단자를        창조하거나 유출하여 발생케 한 “원형적이며 단순한 본체 ”(the original simple                substance)라 하기도 하였다.  영혼불멸은 영의 본체적 성격이라 하였다.      우주는 완전한 기계적 기능을 가지므로 죄는 자연질서와 사물의 기계적 구조자체의 성격에        따라 형벌이 있으며, 마찬가지로 의로운 행위도 보상에 있다고 하였다.      그는 낙관론자로서 이 세상은 “가능한 세계 중에서 가장 좋은 것” 이라 하였다.     (3) 라이쁘니츠의 합리주의는 하나의 잉신론의 형태로서, 록크 처럼 자연 종교와 계시를 조화       시키려 하였으며, 1730년대 독일대학을 매료시켰다.Ⅳ-60. 독일 신학에 있어서 신학문(Neology)의 발생에 대해서 설명하라.   (!) 독일 합리주의는 1740-1750에 극성기에 이르렀고 그 영향은 독일 신학계에 소위“신학문”      (新學問, Neology)과 합리주의신학(rational theology)를 낳게 하였다.   (2) 특히 교회사와 성경주석에 신학문이 발다라였으며 뷰르텔베르의 경건즈의 성경학자인 제        물러(J . S . Semler, 1725-91)는 그 대표자이다.  그는 획심적인 문제를 제기하였다.      역사와 합리적 비판에 근거를 둔 성경연구를 하였다.  종교(하나님에 대한 믿음)와 신학을        구분하였으며, 신학을 “학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자유를 주장하였다.  그는 실제로 교회        사를 “역사적”으로 비판하고, 성경론에 대한 “역사적 비평적” 방법을 사용하였다(소위            historisch-Kritisch).      1771-1775년에 출간한 “정경의 자유비판 논문”에서 정통적인 영감설을 부정하고, 정경이 점        진적으로 발전하였으며 그 가치도 동일하지 않다고 하였다.  도덕적 성격은 하나님에게서         근원하였기 때문이며, 실제로 성경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당시 시대적 특수형편에 “적용”        (accimodation)하여 썼을 뿐이며, (보편적 도덕적 가치 외에는)현재 우리들에게는 의미가 없        는(역사적)문서라는 것이다.      그의 에르네스티(Ernesti), 미카일레스(Michaelis)등은 영감론은 유지하나, 문학적(문법)-역        사적 비판을 시도하였다.   (3) 라이마러스(Samuel Reimarus, 1694-1768)는 렛씽이 익명으로 출판한 라이나러스의 비밀         저작“볼멘빗텔러 단편” (die Wolfenbutteler Fragments, 1774-1778)에서, 독일서는 최초로         자연종교에 근거하여 계시종교를 부정하여 세상을 몰라게 하였다.      (4) 그 결과 : 1770년대에 독일 교회에서 설교가 도덕설교에 그치고 말았으며, 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따라서 18세기말에 독일 교회는 (a) 칸트에 근거한 자유주의 (도덕주의)를 따라        기독교의 활로를 찾거나 (b)슐라이어막허(Schleiermacher)의 자유주의(종교적 감정주의)를        따라서 활로를 개척해야만 되었다.  한편 경건주의자들은 이러한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고        특히 할레대학이 이 물결에 휩쓸렸으나, 일부는 그들이 “마음의 종교”                         (Herzensfrommigkeit)라는 원리를 붙들고 경건으로서 정통교리를 고수하려 하였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2세는 볼너 칙령을 내려(Wollnerscher Religionsedickt, 1788) 설교가        들이 정통교리에 위배되는 가르침을 못하게 하였다.  여기에 제물러는 순복하였으나 일반        에게는 별 효과가 없었다.     C . 제 18세개 영국 복음주의 운동(The Evangelical Movement)Ⅳ-61. 제 18세기 영국의 종교적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라.    (1) 알미니안 주의의 영향으로 광교주의(Latitudinarianism)이 성행하였다.  그 대표자는 변증        가 버틀러(Butler)와 설교가 틸룻슨(Tillotson)이다.  이들은 이신론과 흡브스(Hobbes)의         무신론에 대항하여 합리적 신학을 안출하고 교리보다 성경에 근거하여 합리적 도덕생활        을 강조하는 한편 : 엄격한 칼빈주의를 알미니안 주의로 완화시켰다.  따라서 이들의 주        장은 혼합주의 또는 절충주의로서 계시와 이성의 조화를 모색하였으며, 의지의 자유화 보        편 구원설에 동조하였다.      그 결과는 버틀러 감독에게 1747년 켄터베리 대감독의 지위를 줄려하였을 때 “무너지는        교회를 뒷받침하기에는 너무 늦엇다” 고 말하면서 사양할 정도로 기독교회는 침체와 퇴        락의 길로 내닫고 있었다.      이신론, 무신론, 합리론은 전체가 기독교인으로 간주되는 영국 국민들 마음에 깊이 뿌리        를 내리고 있었다.     (2) 과격한 알미니안들은 일위파 교회(Unitarian Church)를 조직하여 수많은 교인이 여기에        가담하였다.  요셉 프리슬리(Joseph Priestly)는 그 대표자이다. 이 운동은 나중 19세기 더       욱 크게 성장하고, 미국 회중교회를 거의 전멸시키게 된다.     이들은 삼위일체를 부인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일위(Unipersonality of God)이심을 주장하       여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한다.  그들은 무 신조 주의이다. (No Creed).  처음에는 성경에       근거하였으나 19세기 이르러는 이성과 양심을 신앙과 생활의 기준으로 삼았다.     (3) 기독교의 합리화 경향에 대한 반동으로 신비주의와 밀교가 일어났다.  “자유 석수단”     (自由石手団, Freemasonry)같은 비밀 결사와, 1788년 이후에는 스웨덴보르그(Swedenborg,       1688-1772)교회가 섰다.  스웨덴보르그는 스웨덴 출신의 과학자요 신비 사상가로서 과학적       분석으로 우주가 근본적으로 영적 구조(Spiritual structure)를 가지고 있는 것을 증명하려       하였다.     1743-5사이에 갑자기 영적 실체들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로 꿈과 환상을 통하여,       그리고 생시에도, 영계와 영물과 접촉하였다고 하며 주님의 지시로 새 교회를 세우려고 노       력하였다.     그는 조직교회를 원하지 아니 하였으나 1787년에 웨슬레파의 설교가들이 “새 예루살렘 교       회”(the New Jerusalem Clrurch )를 설립하였다.     그의 가르침에는 삼위일체 부정, 영계와 물질계의 대칭, 일반적으로 범신론적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다.Ⅳ-62. 제 18세기 영국 북음운동(Evangelical Movement)의 선구자들에 관하여 설명하라.(1) 다른 여러 가지의 신앙운동처럼 훼슬레와 휫필드의 대 부흥운동이 있기 이전에 그 길을 열      어 놓은 선구자들이 있다.    필립 두드릿지(Philip Doddridgs, 1702-51), 토마스 보스턴(Thomas Boston), 어스킨 형제들      (Ebenezer Erskine, 1680-1754 그리고 Ralph Erskine)들은 모두 칼빈주의자들로서 특별히       회개화 전도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정통주의 칼빈파의 엄격한 노선과 큰 마찰을 일으켰다.      특별히 1717년에 익명의 저작인 “현대신학의 골수”(The Marrow of Modern Oivinity, 1645)      가 재간되자 “골수 논쟁”(the Marrow controversy)이 스콧트란드 장노교회내에서 일어났으      며 서로 “반 율법주의” (Antinomianism)이다,  “신 율법주의”(Neonomianism)이다 하며 싸      웠다.    보스턴은 이 논쟁의 주역이었으며 단순한 칼빈주의 교리를 증거하고, 인간의 네 가지 상태      를 논한 “인성의 네 상태” (Human Neture in Its Fourfold State)를 저술하여 회개와 새생      활을 강조하였다.  어스킨 형제들은 스콧트란드 장노교회와 투쟁하면서 전도설교를 하였다.     이들은 알미니안 주의가 교회를 망하게 하며 도덕을 타락시킨다고 생각하고, 예정과 선택을     그들의 설교에서 강조하였다.  (2) 복음운동은 특별히 1730년대에 미국, 스콧트란드, 웨일스 그리고 영국에 널리 퍼졌다.  처음     미국에서 일어난 운동은 화란 개혁파 목사 트렐링하이젠(T . J . Frelinghuysen)이 회개와      새 생활을 외치고(1719)이어서 테난트(Gilbert Tennent)가 합세하여 펜실바니아주에 살고 있     던 장노교인들에게 부흥의 불길을 일으킴으로 시작되었고, 이 불길이 1735년 조나단 에드워     드(Jonathan Edwards 1703-1758)의 교회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이 미국의 대부흥운동이다.   그 다음으로 1735년에 하우월 헤리스(Howel Harris)가 웨일스 지방에서 성례를 베풀다가 복     음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남을 느꼈다.  그는 생전에 300교회를 세웠으며 순회목사로 지방     마다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핍박도 많이 받았다.  휫필드와 협조하며 나중에 웨일스 칼빈주     의 메소디스교회(the Welsh Calvinistic Methodists)를 세우게 되었다. (나중에 웰쉬 장노교     회라 불리워짐)  (3) 이러한 부훙운동의 성격은 종교개혁과 같이 교회의 개혁에 그 목적이 있지 않고, 개혁파 교     회의 신앙과 생활의 침체상태에서 재기하여 북음의 능력을 힘입게 함에 있었다. 그러므로 주     목표는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강력하게 전하고 회개와 새 생활을 촉구한     것이다.Ⅳ-63. 조지 휫필드의 칼빈주의 북음운동(Calvinistic Evangelicalism)에 대해서 설명하라.  (1) 휫필드는 1741년 웨슬레와 신학문제로 서로 길을 달리하게되었다.  그는 복음운동에 항상       따르기 마련인 알미니안 주의 위험을 간파하고 선택과 예정교리에 근거한 칼빈주의 신학       을 고수하였다.  그리고 끝까지 전도자로 일생을 마치고, 어떤 조직을 만들지 않았다.  교      회를 새롭게 하였고, 개인의 생활을 개선시켰고, 또한 그의 교역의 결과는 미국의 독립운동      이란 큰 혁명의 밑거름이 되기고 하였다.    (2) 휫필드는 1714년 영국 글루스터에서 태어나 영국 국교회 목사가 되었다.  1735년에 오랜      영혼의 고민과 육체의 교통을 거쳐 갑자기 죄 용서함과 구원의 확신을 느끼게 되고 소위       “개심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특히 웨슬레 형제들이 주도하는 “옥스포드 학생회”에서 찰      스 췌슬레의 도움으로 헨리 스쿠결(Hener Scougal)의 “인간의 영혼에 내재한 하나님의         삶”(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 1677)이란 책을 읽고 이러한 놀라운 경험을 하였      다고 한다.  그는 웨슬레 형제들과 미국 조지아에 가서 선교를 하였으며, 거기에 고아원을      설립하고, 그 기금을 모으려고 영국 각지에서 설교하였다.  그의 설교는 야외에서 하였는데,      스콧트란드에서는 한번에 2만명이 들었다고 한다.  명설교가요, 부흥운동과 새 생활운동의      주축이었다.  그는 일곱 차례나     미국을 방문하여 전도하였고, 학교와 고아원 등 여러 기관들을 창설하였다.Ⅳ-64. 웨슬레의 부흥운동에 대해서 설명하라.  (1)요한 웨슬레(John Wesley, 1703-91)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레(Charles Wesley, 1707-1788)      은 옥스퍼드  대학 재학시 혹스포드 학생회(Oxford club, 1729)를 조직하고 20여명의 학생      들이 이를 “성결 클럽” (Holy Club)이라 불렀다. 이 클럽의 특색이 생활의 질서와 규율이었      으므로 “메스다스트” (Methodists)란 벌명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윌리암 로(William Law)의 지도를 받았다. 로는 1729년에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심각하게 촉구함” (Serious Call to a Holy and Devout Life)이란 책을 저술하여, 경건생활      을 강조하였다.  이들이 1736년 미국 조지아 주에 선교사로 가 있는 동안 모라비아 교도들      과 그들의 지도자 스팡겐베르그를 만나 구원의 확신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당황하였으며, 그      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요한 웨슬레는 조지아 선교 실패 후 영국으로 돌아와서, 1738      년 5월 24일 알더스게이트(Aldersgate)소집회에서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에 기록된 루터      의 개심기를 읽을     때에 갑자기 마음이 더워지고, 구원을 얻으려면 그리스도 한 분만 의지하며, 주께서 자기       죄를 제거하시고 죄와 사망에서 자기를 건져 주셨다는 확신이 생겼다고 한다.  (2) 개심 이후 사랑과 열심으로, 훈련과 노역으로 “만인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생활이 시작되고, 증진되고, 보존되게 하여, 실제적인 종교를 실천하도록” 힘을 썼다.   그는 “세계를 교구” 로 전도에 온 힘을 기울이었다.  단순한 북음과 지옥의 무서움과 회개의     필요성을 설교하여 큰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다.   국교회 목사들이 웨슬레의 부흥집회를 방해하기 때문에 노천설교를 하였으며 1739년에는 평     신도들을 설교자(lay preachers)로 양성하여 설교하게 하였고, 새로운 결신자를 얻으면 작은     그룹(bands)로, 속회(classes)로 무리를 지어 주고, 새로 얻은 신앙을 서로 격려하며 계속하     도록 하였다.  이들은 초대 교회와 같이 “상호교육”(mutual edification)과 “형제적 교           정”(fraternal correction)에 힘을 썼다.  사람들이 많아지자 같은 해에(1739)집회소를 마련하     였다.  (3) 1741년에 교리 문제로 휫필드와 웨슬레의 분열에 있었으며, 1742년 웨슬레는 단독으로 영국     곳곳으로 전도하였으며 매년 8,000마일을 말을 타고 다니며 순회 전도하였다고 한다.  그리     하여 그가 죽을 때에는 294명의 설교자, 영국에만 71,668명의 교인, 19명의 선교사와 5,300명     의 외방신도, 그리소 미국에 198명의 성교자와 43,265명의 교인이 있었다고 한다.  (4) 웨슬레는 영국 국교회예 남아서 전도하기를 원하였으나 1768년 미국 선교를 위해서 토마스     콕(Thomas Coke)에게 안수하였고, 그에게 부탁하여 에슈베리(Ashbury)를 안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744년에 모인 설교자들의 연회가 차츰 교회구실을 하게 되어 1784년에는 자기 사     후에도 계속하여 복음전도를 하도록 “100인회”에 소유권과 전도운동의 방향에 대하여 일임     시켰으며 1791년 그가 죽자 정식으로 웨슬레 메소디스트 교회(the Wesleyan Methodist         Churen)가 설립되었다.  (5) 웨슬레의 신학은 청교도들의 신앙전통을 가졌으나 백스터와 같은 알미니안 주의 경향이 농     후하였다.  엄격한 예정과 선택을 부정하고, 알미니우스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반응에     역점을 둔 인본주의적 사상을  가졌다.  그러나 윤리적인 면에서는 훈련과 시간 생활, 경제     적 책임, 오락금지등 청교도들과 같은 경건 생활을 주장하였다.Ⅳ-65. 영국 국교회내의 “복음주의자” (Evangelicals)에 대하여 말하라.  (1) 대 복음 운동으로 인하여 국교회 내부의 신교적 요소가 강화되었다.  그들의 신학은 칼빈       주의이고, 개인의 회개와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믿음으로 구원받음을 강조하였다.  휫필       드의 노선을 따르며, 국교회 내부에 남아서 복음운동을 하려 하였다.  그 대표자로서는 헨       리 벤(Henry Venn, 1725-95), 과 선교회 창설자중 하나인 존 벤(John Venn,1759-1813), 그       리고 한 때 노예선 선장으로 일하다가 회개하고 목사가 된 존 뉴톤(John Nawton,              1725-1807), 캠브릿지 대학을 지금까지 복음주의의 온상이 되게 한 아이삭 밀너(Issac          Milner, 1751-1820)등이다.     이들은 숫 적으로 소수이었으나 국교회와 영국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다.  (2) 부유한 복음주의자들로서 평신도들이 클랩팝지역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클랩팜                파”(Clapham Sect)라 불리워졌는데, 이들은 기존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각자 자기 지위와 신분에서 차할려고 노력하였다.  그 중에 유명한 윌리암       위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은 국교회의 복음주의 목사들과 교류한 끝에 개       심하고, 노예제도 폐지 운동을 일으켜 1833년 제국내에 노예매매제도가 폐지되게 하였고,       1787년에는 부도덕 퇴치 협회조직, 1810년에 기독교 신문 창설, 1804년 대영 성서공회와        해외 성서공회 창설, 그리고 각종의 학교, 주일학교, 감옥개선 등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이 그룹의 회원 중 한 사람인 그랜빌 샤프(Granville Sharp)는 1787년 해방된 노예를 위해       서 시에라 레오니(Sierra Leone)국을 창설하는 데 큰 역활을 하였다.  (3) 그리고 영국 국교회의 평신도인 로버트 래이크스(Robert Raikes 1735-1811)는 1780년 글루      스터(Gloucester)시에 처음으로 주일학교(Sunday School)을 시작하였다.    존 하워드(John Howard 1726-1790)은 비국교도로서 감옥개선에 공헌을 하였다.  (4) 1796년에 교회 선교회를 국교회 평신도들이 창설하였다.    이때에는 각 파에서 선교열이 대단하여 초교파적인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1795)가 생기고, 1796에 스콧트란드 선교회가 생겼으며, 1793년에는 침례교 선교회      에서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를 인도 선교사로 파송하여 칼컷타 근처 세라포레            (Serampore)에서 선교하였다.  그 이후로 런던 선교회는 남아시아, 중국에까지 선교사를 파      송하여 큰 전도 운동이 일어났다.  (5) 이러한 국교회 복음주의 자들의 활동은 영국사회에 큰 활력을 주었고, 기독교 신앙도 새로      운 힘을 찾게 되었다.

 

 

 

■ 교회사와 세상사 - 김반석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태초부터 지금까지 많은 시간과 사건들이 역사가 되고 지금 우리는 현재라는 역사 속에서 살고 있다.이 역사들이 현재에 사는 우리들에게 둘로 나타나 보이게 되는데 하나는 보이는 면만을 나타내고 있고하나는 보이지 않는 이면의 역사까지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보이는 면만 나타낸 것이 세상사요.보이는 면과 보이지 않는 면, 이 두 면을 동시에 나타내 보이는 것은 교회사이다.그러므로 세상사는 불신자인 세상 사람들의 육안으로 보는 것이요교회사는 우리 기독자들의 영안(靈眼)으로 보는 것이다.세상 사람들은 영이 죽어 있기 때문에 영적인 면은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지만 기독자들은 영이 중생 되었기 때문에 영적인 면을 볼 수도 있고 알 수도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알 수 없고 볼 수도 없으나기독자들은 영안이 열려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알 수 있다.그러므로 같은 사건을 두 종류의 역사관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세상 사람들의 역사관은 그들 조상의 행적이라 말하며 거기에서 삶의  지혜를 얻는다 하나 그 결과는 어리석은 멸망의 역사이요,기독자들의 역사관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 대한 그리스도적 역사임으로 그 결과는 구원의 역사인 것이다.예를 든다면 구약 성경의 출애굽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요. 그 중심은 선민 된 이스라엘 백성 곧 교회사인 것이다.그러나 애굽나라의 세상사는 출애굽 때 사건들의 역사를 자연의 재앙으로 기록하였을 것이다.사건적 역사가 하나, 하나 전개될 때에 그것을 세상 사람들이 보는시각과 평가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기독자의 구원을 위하여 주시는 역사로 깨달아야 할 것이다.그러므로 앞으로 누군가 교회사를 연구한다면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역사를 세상 역사에는 어떻게 기록되었나 하는 것과 세상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에서 어떻게 기록되었는가 하는 것을 대비표(對比標)로 만들어 오늘날 만나는 현실을 우리의 교회사로 바로 볼 수 있도록 공식(公式)을 세운다면 말세의 어두운 시대에서 지혜로운 눈이 생겨 구원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그러므로 인하여 현실의 중심은 우리 기독자를 위하여 섭리하시는 전적 하나님의 역사임을 깨닫게 될 때에 어떤 현실도 두려움 없이 감사하며 구원으로 통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초대교회사의 영지주의서   론초대 교회는 크게 두 측면에서의 공격에 대처해야 했다. 외부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켜야 했으며, 내부적으로는 이단 사상들로부터 기독교 복음의 진리를 지켜 내야만 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교회는 313년 밀란 칙령으로 박해가 공식적으로 종식되기까지 약 300년간에 걸친 박해를 거치면서 신앙의 순수성을 더 확실히 하고,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그 믿음을 지키는 모습을 통하여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어 이후 복음이 좀더 용이하게  확산되게 하였다. 또 이단 사상들의 공격에 대처하며 기독교 성장에 수반될 수밖에 없었던 다른 종교, 철학 사상들과의 혼합적 경향을 극복하고 참다운 복음의 진리를 지켜 냈다.초대 교회가 겪었던 이런 두 측면의 공격은 교회사 전체를 통하여 교회의 순수성과 진리를 지키는데 있어서 항상 있어 왔던 두 가지 측면의 시험대였다. 교회는 외부의 위협과 내부의 끊임없는 이단 사상들의 공격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왔고 이것이 교회라는 이름 속에 함께 있어 온 잘못된 요소들을 정화시키는 하나의 시험대로서 작용했다고 여겨진다. 특히 이단적 사상의 내적인 공격은 그 성격이 보다 점진적이고, 지속적이어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교회사 전체에 있어 가장 중대한 도전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초대 교회 시대에 있었던 영지주의 이단의 성격과 그 영향을 고찰해 보고, 이에 슬기롭게 대처했던 믿음의 선조들의 모습들을 살펴보는 것은, 이단들의 은밀한 공격과 끊임없는 혼합주의적 요소의 침투로부터 예외가 아닌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을 살피고 정화하는데 도움을 얻는 작업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초대 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위협이었던 말시온주의 이단 사상과 그에 대처한 교회의 응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말시온주의는 기독교적 영지주의의 배경 아래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말시온주의는 그 성격이 다른 영지주의 사상과는 달리 더욱 기독교적인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 도전이 심각했다. 그리고 이에 대처한 교회의 응전의 모습이 다른 응전의 모습과는 달리 교회의 성립에 확실한 영향을 미쳤다. 이 글에서는 말시온주의 이단 사상의 가장 심각한 도전이었다고 생각되는 정경 확립 문제에 중점을 두고 정경을 확립시킴으로써 말시온주의의 공격에 대처한 교회의 응전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그 교회의 응전에 관련한 의문점, 과연 말시온주의가 정경 형성에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께서 이단들과의 싸움을 이끌어 가시고 자신이 원하시는 교회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 주도권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영지주의 - 말시온주의의 배경① 영지주의의 생성 배경1세기에서 2세기의 헬레니즘에서 로마 시대로 이어지는 경제적, 사회적 혼란기에 지중해, 중동 사람들은 개인들의 영향력 상실 속에서 소외감을 느끼며 개인의 구원과 현실도피를 추구하고 있었다.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개인 구원에 강조점을 두는 영지주의는 광범위한 인기를 얻게 되었다. 영지주의의 기원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성경에서 이미 영지주의에 대한 경고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기독교가 정립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대부분의 영지주의적 문헌들은 소실되었고, 따라서 대부분의 자료는 영지주의에 대한 교부들의 반박들에 나타난 영지주의에 대한 설명들로부터 얻어졌다. 이런 자료에 의해 생각해 볼 때, 영지주의는 어떤 특정한 사람에 의해 정립된 사상이나 독립된 사상적 경향이었다기보다는 그 당시 사람들이 대게 추종하던 다분히 종교적인 사상적 경향이라고 여겨진다. 영지주의는 모든 유용하다고 여겨지는 사상들을 적당히 섞어 놓은 혼합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영지주의는 유대교와 헬라 철학 동양 철학, 기독교 사상의 혼합이었다. 그 중에서 특히 두드러진 혼합의 양상은 기독교 사상과 헬라 철학, 특히 신플라톤주의적 사상의 혼합이다. 영지주의가 기독교 사상을 혼합시킨 것은 당시 가장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있던 기독교 사상과의 접목을 통하여 보편 종교화하려는 의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② 영지주의의 사상영지주의는 혼합주의적 사상이었고 그 주장되는 범위가 광범위했기 때문에 어떤 통일된 사상적 움직임으로 나타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대표적인 영지주의자들의 사상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부분들을 통해 영지주의의 세계관을 살펴볼 수가 있다. 첫 번째로 영지주의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상은 철저한 이원론이다. 영지주의자들은 대게 플라톤주의적 영향 아래 물질과 영혼의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고 물질은 악한 것이며 영혼은 선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런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기독교를 이해할 때, '두 가지 신(Two Gods)' 사상이 대두되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악한 물질 세계를 창조한 구약의 하나님을 선하고 완전한 신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창조주인 구약의 하나님을 플라톤의 {티마이우스}(Timaeus)에 나오는 데미우르게(Demiurge)라고 생각했고, 이 데미우르게와는 달리 물질 세계에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신 더 높고 위대한 지존의 하나님(The Highest God)이 있다고 생각했다. '두 가지 신' 이론의 배경에는 복잡하고 신화적인 우주 창조에 관련한 영지주의적 이해가 있다. 유출설로 정의해 볼 수 있는 이 복잡한 우주 창조의 이론은 지존의 신, 알려지지 않은 신과 그 여성적인 파트너로부터 에온(Eon)이 파생되었다는 영지주의 특유의 파생적 이원론과 유출이 계보학적 순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숫자풀이식 이해로 구성되어 있다.두 번째로 이원론적 형이상학을 바탕으로 영지주의의 구원론과 기독론이 나타난다. 영지주의에서의 구원은 우주 생성의 질서인 충만으로의 복귀이며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천상에 대한 지식인 영적인 지식(      )이다. 진정한 자아를 망각하고 육체 속에 갇혀 버린 인간이 구원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전해 주는 영적인 지식을 들음으로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는 충만으로부터 유래한 하나의 에온으로서 초월적인 영적 세계에서 우리에게 해방의 계시를 전해 줄 사자(使者)이다. 영적인 본질인 그리스도께서 해방의 대상인 물질의 몸을 입고 오셨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던 영지주의자들은 공통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가현설(Docetism)을 주장했다. 그리고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을 천상의 지식을 받아들인 영적 능력 구비자인 영적인 자(Pnuematics)와 물질주의자로 구분하고 그 사이에 기독교도들이 포함되는 영매(Psychics)가 이미 예정되어(predestinated)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천상의 지식, 영적인 지식은 성경에 나타난 계시와는 별도로 구전(Oral Tradition)을 통하여 은밀히 자기들에게만 전해진 예수의 가상적 교훈이었다.영지주의의 세 번째 특징은 유사한 우주관과 구원관에도 불구하고 교리의 실제적인 적용에 있어 각 분파별로 극단적인 차이가 나타났다는 점이다. 천상에 지식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의 구원론은 동일했으나 각 분파들은 자신들만이 신비의 계시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다른 분파의 구원을 부정했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종교적 신비 의식을 발전시켰다. 또한 영지주의자들의 윤리는 물질 세계를 부정하는 두 가지 극단적인 경향의 차이 때문에 금욕주의와 자유방임주의의 극단적인 모습을 띠었다. 엔크라티데스(Encratites)라고 불리는 다수의 영지주의자들은 물질 세계를 부정하고 결혼과 여성을 천시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추구했는가 하면, 카포크라테스(Carpocrates)라 불리는 소수의 영지주의자들은 도리어 가치 없는 물질 세계 속에서의 자유로움을 추구하여 자유방임적인 윤리관을 지니고 있었다. 영지주의는 2세기 초반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으나 각 분파의 주장이 너무 달라자 각각 자신들의 전승과 의식의 비밀을 강조하며 대적했기 때문에 조직된 공동체의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고 뚜렷한 성장을 이룩하지 못한 체 사라지고 말았다.말시온주의의 위협① 말시온과 영지주의의 연속성과 불연속성말시온은 흑해의 남쪽 해안에 위치한 폰투스(Pontus;성경에는 본도로 표시됨)출신으로 138년경 상당한 부를 소유한 체로 로마에 왔다. 로마의 교회에 소속되어 나름대로의 교리를 전파하던 말시온은 교회 안에 다수의 추종자들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 사상이 세르돈(Cerdon)이라는 영지주의자의 영향을 받아 잘못된 것이었기 때문에 144년 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정죄를 받았다.말시온의 사상은 많은 부분에서 영지주의의 영향을 내포하고 있지만 몇 가지 점에서는 일반적인 영지주의와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을 보여준다.말시온은 영지주의자들의 이원론을 답습했지만 그들의 이원론과는 다른 양상으로 자신의 이원론을 정립했다. 말시온은 영지주의에서 주장하는 '두 가지 신'의 견해를 수용하여 악한 유대인의 신(Malign God of the Jews)과 궁극적인 선한 하나님(Good Ultimate Father)을 날카롭게 구분했다. 그러나 말시온은 두 하나님 이론을 물질과 영혼의 이분법을 바탕으로 한 영지주의적 견해와는 달리 율법과 복음의 구분을 강조하기 위하여 제시되었다. 따라서 그의 이원론에는 영지주의와 같은 궁극적인 천상계로의 귀화를 위한 신비적 지식이 나타나지 않는다. 두 번째로 말시온은 영지주의와 같이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고 영지주의와 같은 가현설적 주장을 폈지만 영지주의자들과는 그리스도를 단지 천상 지식의 전달자로 여기지는 않았다. 말시온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구속적 의미를 부인하지 않았다.세 번째로 말시온 역시 영지주의와 같이 육체적 부활을 부정하고 영혼만의 구원을 주장하는 면에는 동일했으나 영지주의에서처럼 영혼과 육체가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구분되어 영혼이 육체로부터 이탈하여 충만에 이르는 것을 구원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말시온은 인간에게 있어 육체와 영혼이 모두 본래적으로 악했으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음으로 인간이 구원을 얻게 되며, 이 때 불완전한 육체는 소멸되고 영혼만 구원을 얻는 것으로 생각했다.이처럼 말시온이 상당한 부분에서 영지주의와 동일한 사상을 가지고 있지만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독창적으로 이것을 수용했기 때문에 말시온을 영지주의의 한 분파로 볼 것인지 아니면 기독교에서 출발한 독창적인 사상 체계로 볼 것인 지에는 의견이 차이가 있다. ② 말시온의 이단성말시온의 이단성은 정통의 교회에서 인정할 수 없는 영지주의적 신론을 주장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말시온은 다른 영지주의와 마찬가지로 '두 가지 신, 두 하나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에게서 두드러지는 것은 물질과 영혼의 대립 선상에서의 두 하나님이 아니라 율법과 복음의 대립 선상에서의 두 하나님이었다. 율법과 복음의 대립 선상에서 구분된 하나님은 구약과 신약의 구분이라는 교리적 특징으로 나타났으며 이 것은 다른 영지주의자들보다 확연히 이단적인 주장이었다.또한 말시온은 기독론은 영지주의자들의 복잡한 에온(Eon)으로부터의 유출 이론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가현설(Docetism)적이었다. 말시온이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시고 육신으로 죽임을 당하고 부활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 역시 일반적인 헬라 사상의 물질, 육체 거부 사상 때문만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의 분리라는 새로운 국면의 필요성이 전제된 것이었다. 따라서 말시온의 삼위일체론은 이후 이단들의 전형(箭形)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육체적 고난을 거부하는 말시온의 입장은 이후 성부고난설을 주장한 사벨리우스나 단일신론 이단들의 주장과 유사하다.마지막으로 말시온은 재림을 부정했다. 말시온은 육체의 구원이나 부활을 부정했기 때문에 인간이 죽은 뒤에 그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해방되어 구원에 이르는 것으로 충분하게 여겨졌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신약이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나 승천과 더불어 몸이 다시 사는 심판이 있어질 재림 역시 그에게는 잘못된 '복음'의 왜곡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그러나 말시온의 이단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그의 성경 축소 편집이다. 말시온은 앞서 살펴본 율법과 복음의 구분이라는 단순한 원칙을 고수하려고 했기 때문에 성경의 다양한 국면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으며 자신의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성경을 편집할 수밖에  없었다. 말시온의 이단이 나름대로의 조직을 형성하고 다른 영지주의 분파들과는 달리 치명적인 이단으로 초대 교회를 위협할 수 있었던 것도 편집되어 규정된 정경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③ 말시온의 성경 이해 - 축소를 위한 편집말시온이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 중시했던 것은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은밀한 지식의 획득이 아니라 '그가 복음이라고 불렀던 것'에 대한 단순한 신앙이었다. 말시온은 성경의 단순한 복음이 비유적인 해석이 아닌 액면 그대로 성경을 봄으로써 얻어진다고 생각했다. 또 기독교를 단지 교훈적이고 도덕적인 교리에 국한시키려는 율법주의적 경향을 단호히 배제할 때에만 복음의 진리가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말시온은 복음과 율법의 대립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성경 전체를 이해하고자 하였으며, 이 유일한 성경 해석의 법칙에 어긋나는 부분들이 보여지는 것은 성경의 목록 속에서 제외시키는 극단적인 방법을 취했다. 그는 교회에 전해 내려오는 성경이 구약을 인용하고 율법과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것이 율법주의적 성향을 가진 후대 교회에 의해서 변질되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근원 자료의 재검토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신 원시적 복음(the primitive Gospel)으로 복귀하여야 한다고 교회에 주장했다. 말시온은 그리스도께서 전한 원시적 복음이 구약의 율법을 완전히 폐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구약의 율법은 구속사적인 성취를 위한 예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보내신 선한 하나님과는 다른 원래 변덕이 심하고 잔인하며 무지한 구약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해 준 것이기 때문이다. 말시온의 '두 하나님'의 견해는 영지주의와 마찬가지로 가현설(Docetism)로 이어졌다. 말시온에게 성자는 육신이 아닌 '구원의 영(the Spirit of the Salvation)이었다. 물질을 창조한 악한 신에게서 나지 않은 그리스도가 육신의 몸으로 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나는 예수의 탄생과 어린 시절은 후대 교회에 의해 날조된 것일 수밖에 없다. 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 역시 인정될 수 없는 것이었다. 말시온이 보기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드러나는 성경의 부분 역시 후대의 날조에 의한 왜곡이었다. 율법적 요소의 극단적 거부와 성경이 왜곡되었다는 말시온의 견해는 필연적으로 복음의 원래적 모습을 회복하기 위한 성경 편집으로 이어졌다. 말시온이 편집한 성경에서는 구약은 당연히 제외되었고 유대주의자들의 날조로 인해 율법과의 연속성을 나타내는 구절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 개의 복음서와 공동서신들이 제거되었다. 말시온에게는 율법과 복음의 구분이 바울에 의해서 가장 명백히 드러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바울의 10가지 서신과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제외) 바울의 사상이 가장 잘 담겨진 복음서인 누가복음도 역시 잘못된 내용의 수정이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말시온의 성경은 크게 두 가지 부분, 수정된 누가복음서만 포함하는 복음서와 수정된 바울의 처음 10개의 서신으로 구성되는 서신서로만 국한되었다.  말시온의 성경 편집은 교회사에 있어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말시온은 우의적 해석이 주류를 이루던 초기 교회에서 문자적인 해석을 강조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리고 유대주의적 요소로 인하여 교회가 어려움이 있던 시기에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을 부각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또 정경 형성의 역사에 있어서는 말시온이 최초로 정경의 목록을 규정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말시온이 서방 교회에서 여전히 율법이 중시되는 경향을 경계하고자 그리스도를 믿음의 복음을 강조하였다고 하더라도 그의 성경 이해는 성경의 다양한 면모를 복음과 율법의 분리라는 한가지 법칙으로 단순화하여 성경을 자의적으로 삭제하고자 한 것은 명백히 이단적인 행위였다. 말시온의 사상은 다른 영지주의자들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기타 영지주의적 이단들이 비밀스러운 의식과 교리를 강조한 나머지 조직적인 성격의 운동으로 전개되지 못한 반면, 말시온의 추종자들은 자기들만의 교단을 교회 내부에서부터 조직하였고, 그 교리의 영향력을 조직적으로 확대하며 2세기 중반에는 정통 교회를 위협할 만큼 크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큰 위협으로 등장한 말시온의 이단성을 규명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한 교부들의 노력은 3세기에 들어 말시온주의 운동이 자취를 감추게 하는데 성공했다. 3세기 이후 말시온주의는 마니교 사상에 융합되어 독립성을 상실하였으며 이후에는 역사 속에서 사라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교회의 응전영지주의에 대한 반박 및 비판은 이미 신약 성경에서 발견되어지고 있다. 골로새서 1:16-28에서는 당시 초대 교회에 침투한 영지주의의 신비적 지식 및 제의를 좇지 말것이 경고되어 있고, 요한은 자신이 서신 전반에 걸쳐 말씀이 육신이 되었음을 강조하며 영지주의적 이원론을 배격하고 있다. 이후 교부들에 의해 이루어진 영지주의, 특히 가시화된 말시온주의의 위협에 대응한 응전은 크게 세 가지로 양상으로 나타났다. 그 각각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① 사도권 계승 옹호를 통한 감독 제도의 발전첫째로 나타난 교회의 응전은 사도권 계승을 주장함으로써 교회의 정통성을 변호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계시의 내용을 가감하는 영지주의와 말시온주의의 성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이단을 분별하여 교회의 순수성을 보존할 권위를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권위를 획득하는데 핵심이 된 개념은 "사도적 계승권(Apostolic Succession)"이었다. 일찍이 속사도인 이그나티우스는 감독들의 권위가 사도들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권위를 계승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단을 반박함(Against Heresies)'라는 저서를 통해 영지주의를 정면으로 반박했던 교부 이레니우스 역시 사도들이 당시의 감독들을 자신들의 계승자로 임명했기 때문에 예수께서 사도단에게 맡기신 모든 것이 1세대 감독들을 거쳐 당시의 감독들에게 인계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로부터 계시된 모든 것이 사도들에게 계시되었기 때문에 만약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기록되어지지 않은 천상의 지식이 있다면 감독들이 그것들을 전수할 수 있는 유일한 계승자들인데 당시의 감독들이 결코 영지주의적 지식을 주장하지 않고 있다고 영지주의의 신비적 지식 주장을 논박하였다. 이레니우스는 이에 덧붙여 바울과 베드로의 사도권이 공히 계승된 로마 감독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다른 교구보다 우월하다고 보았다. 교부들에 의해 옹호된 감독직의 강조는 이후 군주적 감독 제도 개념이 덧붙여지면서 카톨릭 교회의 조직화된 행정조직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행정 조직화된 감독 제도는 상급 성직자와 세분화된 하급 성직자간의 계급적인 구조로 발전하였고, 평신도와 성직자간의 차이가 크게 부각되는 등 점점 본래의 동기들이 상충하게 되어 이후에는 도리어 분열을 조장하는 결과를 빚게 되었다. ② 신경의 정립이단들의 이론에 대응했던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은 사도들의 정통성을 계승한 감독들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이 교회 안에서 확인되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런 필요성에서 요청되어 발전한 것이 간단히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 정통적인 신앙의 고백이 담겨진 신경(Creed)의 정립이다. 주후 107년경에 나타난 이그나티우스의 신앙고백을 필두로 속사도들과 초기 교부들의 것으로 보이는 신경들이 등장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이며 집약적인 신경은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문답 형식에서 오늘날의 형식으로 4세기경 체계화된 사도신경이다. 사도신경의 내용은 당시 교회를 위협했던 이단들의 사상들을 이해함으로써 더욱 명확하게 이해될 수 있다. 사도신경 서두에 등장하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주 하나님의 동일성을 고백함으로써 영지주의의 보편적인 두 하나님 사상을 명시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이어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성육신의 고백 역시 결혼을 부정한 것으로 여긴 말시온의 윤리적 견해나 물질적인 것을 악하다고 여김으로 나타난 영지주의적 가현설의 입장을 거부하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의 성도들의 육체적인 부활의 고백 역시 영지주의적 이원론을 거부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초대 교회에서 신경이 강조된 것은 그것이 이단적인 사상들을 공격하고 서로의 신앙을 확인하는 데 가장 확실하고 유용한 방법이었다는 점에 있었다. 이레니우스는 신경과 신앙률이 감독들에 의해 전수된 것이기에 사도적 전승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터툴리안은 신경이 보다 함축적 직접적이기 때문에 이단들을 논박하는 데는 성경 자체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평가했다. 이후 신경들의 발전을 터툴리안의 지적처럼 함축적이고 체계적인 모습으로 발전했다.. ③ 정경의 확립이단들의 공격이 있기 이전 교회는 공식적인 기록된 정경 목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구전들이 사도들과 그 계승자들을 통하여 여전히 효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단들이 공격에 직면하여 교회는 정경을 규정하고 그 권위를 확립할 필요를 느꼈다. 말시온은 기독교 문서를 윤곽이 뚜렷하게 수집한 최초의 인물이었으므로 교부들이 정경을 확립하는데 가장 염두에 둔 이단은 말시온주의였다. 말시온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성경은 앞서 살핀  말시온의 율법과 복음의 분리라는 기준에 의해 자의적으로 편집된 것이었다. 교부들은 말시온의 단순한 기준보다 권위 있는 기준을 세웠는데 그것은 사도적 권위였다. 그래서 교회에서 읽혀지고 예배에 쓰여지는 책들 중에서 사도 또는 사도들의 친구들의 저술 여부가 정경을 인정하는 표면적인 기준으로 여겨졌다. 주후 367년 아다나시우스의 편지에 나타난 정경 목록은 이러한 기준이 적용된 대표적인 정경 목록 기록이다. 구약에 대한 정경 인정은 이미 유대인들이 인정한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 있었다. 교부들 역시 말시온이 폐기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겼던 구약 율법을 구원사적인 측면에서 이해함으로써 교회의 정경으로 계속 인정하였다. 이레니우스는 율법을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외형적 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이해했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율법의 폐기가 아니라 성경이 증거하듯이 본래적인 율법의 완성을 위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율법을 전해 주고 있는 구약은 교회의 정경으로 인정되었다.신약 성경의 정경의 확립은 점진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이루어졌다. 4복음서 중에서 요한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보다 늦게 정경으로 인정되었다. 몇몇 교부들의 목록 중에서는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요한 2,3서 등의 서신이 누락된 것도 발견된다. 반면에 지금은 성경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디다케", "헐마스의 목자", "베드로 묵시록", "클레멘트의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 "바나바 서신" 등은 목록에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복음서 문집(Gospel Collection)이 이미 2세기초에 존재하고 있었고, 285년 기록된 클레멘트의 서신에서 바울 서신이 보관되고 있음이 인용되는 것으로 보아 정경 형성은 이미 2세기초에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사도적 계승의 확립을 통한 감독 제도 중심의 교회 조직화와 신경의 정립, 정경의 확립은 모두 초대 교회가 이단의 위협에 대응하는 데 상호 보완적으로 쓰여진 중요한 수단이었다. 결국 교부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이 곧 구원의 하나님이시라는 진리와 인간의 죄는 육체의 불완전함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진리였다. 이렇게 죄를 지어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은 육체의 몸으로 오셔야 했으며 그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영생은 육체의 부활을 포함하는 것이다. 정경 형성 관련한 몇 가지 문제점들영지주의의 이단 사상, 특히 직접적으로 성경을 편집함으로써 교회의 가시적이고 조직적인 위협이 되었던 최초의 이단인 말시온의 사상에 대응한 교회의 응전은 올바른 성경관의 확립으로 집중되었다. 사도적 권위를 통한 교회의 정통성 주장 역시 어떤 조직의 정통성 주장에서 보다는 그 조직에서 권위있기 정경을 규정할 수 있게끔 하려는데 주안점이 있을 때 효과적이었다. 신경 역시 교회가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인정한 정경의 내용을 이단의 잘못된 사상의 대립점을 부각시키는 데 사용하기 위하여 성경의 내용들을 정리한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제기되는 의문이 있다. 그것은 정경 형성이 이단들의 공격에 응전하기 위하여 몇몇 교부들에 의하여 주장되었다면, 이전에는 성경이란 것이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가 말시온에 대응하기 위하여 후에 사도적 권위를 획득한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이 의미하는 바는 오늘날 우리가 신앙의 절대적 표준으로 삼고 있는 성경이 2세기와 4세기에 교회가 만들어낸 산물이라면, 우리가 그 시대나 이후의 다른 기독교 문헌들보다 신약 성경에 더 권위를 실어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결론적으로 말시온의 위협은 초대 교회가 정경을 인정하는데 있어 하나의 자극이 되기는 했지만 그 때문에 성경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첫째로, 말시온의 공격에 직면하여 교회가 행한 것은 쓰여지고 있던 성경의 권위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권위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 있던 책들의 목록을 작성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성경 계시의 인정과 정경(Canon) 목록의 인정을 구별하여 생각해야 한다. 특이한 사항은 초대 교회에서는 어떤 것이 계시된 책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도나 사도와 함께한 가까운 사람들이 기록한 책이 성경으로 인정되어 사용되어진 데는 아무런 의심이 없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기록된 말씀에 기록된 계시의 자증성을 신뢰했고, 예수님의 사역을 친히 목격한 사람들의 구전역시 확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것과 일치했던 기록된 성경의 계시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 기록들은 사도들의 설교와 교훈들을 서면으로 옮겨놓은 것으로서 이에 따라 주님 자신의 특별한 권위를 영속화 시킨 형태로 의심업이 받아들여졌다. 마르시온 역시 비유적 해석을 거부하고 문자적으로 검토해 본 결과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은 기록된 말씀이 있었기에 편집을 가할 수 있었다. 이 점은 말시온 역시 당시에 사용되고 있던 성경을 인정하고 그것을 공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두 번째로 말시온의 공격이 있기 이전에 이미 정경을 확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점이다. 기록에 의하면 1세기말에 이미 바울 서신을 수집하여 정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앞서 인용한 클레멘트의 서신에서 로마 책장에서 바울 서신을 보관하고 있다는 기록이 발견되며, 이미 클레멘트가 바울 서신의 일부 사본을 소유하고 있었거나, 적어도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증거된다. 클레멘트 이후의 교회의 바울 서신 수집 노력은 성실히 수행되어서 1세기 말 경에는 적어도 열 개의 책이 포함된 바울 문집(Corpus Paulinum)을 교회가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4복음서 역시 1세기 말엽부터 수집되어 2세기경에는 함께 묶여 사용되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말시온주의의 성경에 대한 공격이 교회로 하여금 정경을 확정하게끔 강요하였다기보다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던 정경 형성을 가속화시키고 정확성을 기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세 번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정경의 형성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지역적으로 로마에서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이 이르는 다양한 교회의 지역적, 신학적 특징들이 심화되는 시기에 27권에 이르는 적지 않은 책들이 정경으로 인정되는 데 1세기가 소요되지 않았다. 따라서 신약 성경의 형성이 2세기 중반 말시온주의의 공격으로부터 시작하여 4세기 아다나시우스에 의해 종교 회의에서 인정되었다는 하르낙을 포함한 진보적인 입장에서의 이해는 설득력이 없다. 아다나시우스에 의해 확립된 교부들의 정경 목록 확립의 노력은 당시 쓰여지던 책들에다가 계시로서의 권위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이미 권위를 가지고 쓰여지던 책들이 무엇인가를 정리하여 이단들의 잘못된 성경관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경의 확립은 정경이 어떤 것인가를 확인한 공식 선언이었을 뿐이다.결    론영지주의는 기독교회가 최초로 대적해야 했던 이단 사상이었다. 영지주의의 공격은 확산되고 있던 기독교 사상을 자신들의 교리에 혼합시키려는 혼합주의의 공격이었다. 그들은 구원에 이르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내용 이외에 자신들만이 알고 있는 천상의 지식을 소유하여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영지주의적 세계관이 교회 내에 침투해 기독교 본래의 진리를 왜곡하고 성경과 교회 조직을 잠식함으로써 본격적인 이단 활동을 전개한 사람이 바로 말시온이다. 그의 사상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위해서 명백히 인정되고 있던 성경의 내용을 단순화하려 한 이단 사상이었다. 이렇게 일반적인 영지주의자들은 성경 이외의 다른 계시를 첨가하고자 하였고, 말시온은 자신이 교리를 위하여 성경을 삭제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초의 이단들을 바로 성경의 유일성에 대해서 공격을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의 응전은 성경 계시의 유일성을 확인하고 올바른 정경의 목록을 제시하는 데 초점을 두어 진행되었다. 오늘날 성경의 유일성을 공격하고자 하는 자유주의자들의 공격도 최초의 이단 사상과 그 근본에 있어 일맥상통한다고 생각된다. 계시의 비신화화를 주장한 불트만(Rudolf Bultmann)은 말시온의 축소주의(Minimalism)의 계승이라고 볼 수 있다. 불트만의 뒤를 이은 자유주의자들의 성경 해석은 단순한 율법과 복음의 대립이라는 하나의 원리로 성경을 축소시킨 말시온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축소되고 남은 내용마저 자의적인 해석으로 왜곡시키고 있는 셈이다. 불트만과 같은 학문적인 도전뿐 아니라 우리의 신앙 생활 속에서도 성경의 계시를 유일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자 하는 유혹들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몇 가지 원칙들로 성경의 다양한 국면을 재단하여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고자 하는 말시온적인 성경 편집 성향도 항존하고 있는 신앙의 위협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잘못된 사고들을 대처할 때, 지금도 성경 계시에 대한 공격을 방어했던 초대 교회의 방법은 유효하다. 성경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성경이 유일하고 무오한 하나님의 계시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성경을 변호함으로 이루어진다다.초기 이단들의 공격은 이후 교회가 세계 교회로 성장해 나가는 기틀이 마련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교회는 이단들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조직화되었으며 정리되어 있지 않은 정경 인정 작업도 조속히 마무리될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정경의 형성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않고 마치 후대 교회가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성경을 취사선택했다고 보는 것은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도리어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이렇게 자의적인 관점에서 성경이 취사 선택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정경을 확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볼 때, 단순히 일어나는 현상에 머무르지 말고 그 속에서 역사(役事)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초대 교회 시대에 영지주의나 말시온주의의 공격에 대항해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을 지는 몰라도, 어려워 보였을 지는 몰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몸된 교회를 외적 박해와 더불어 내적인 어려움을 통하여 더 순수하고 발전되게끔 역사하셨다. 오늘날 교회 내에 침투한 잘못된 사상들을 대적함에 있어서도 역사를 통해 나타난 명백한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에 대한 믿음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비록 이 싸움이 힘들고 어렵게 여겨지더라고 이 일을 통하여 자신의 교회를 바르게 세워 나가실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을 때, 우리의 노력이 단순한 학문적 논쟁에 그치지 않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귀한 헌신이 될 것이며 이 내적인 싸움의 최후의 승리를 확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참 고 서 적Brown, Harold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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