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사 연대표

2011. 3. 18. 22:33교회사자료/1.기독교회사

■ 세계교회사 연대표년       사건29  오순절과 교회의 탄생, 스데반의 순교  36  바울의 회심  39  이방인을 향한 베드로의 설교   44  요한의 형제 야고보 순교, 베드로 투옥   47  바울의 1차 전도여행   49  예루살렘에서의 최초의 교회 협의회   50  바울의 2차 전도여행   53  바울의 3차 전도여행   54  네로 로마황제 즉위   58  바울체포   62  바울의 로마 도착, 주의 형제 야고보 순교   63  바울의 석방   64  로마 대화재, 네로의 핍박(첫번째 핍박)   67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   70  예루살렘의 멸망   81  -96년 도미티안 황제(두번째 핍박)   150  순교자 저스틴(Justine Martyr 100-165)이 로마에 [예수제자훈련학교]설립(Disciple-School)  156  폴리갑의 순교   170  콥틱(Coptic)어로 쪽복음 번역   180  인도에서의 판테누스(Pantaenus) 설교   197  터둘리안(Turtullian 160-222)의 세계선교운동 촉구   203  퍼피튜아의 순교   206  에뎃사이(Edessa) 아브갈 4세의 회심   220  오리겐(Origen 185-254)의 세계선교운동 촉구   249  로마의 고넬료가(Conelius)가 골(Gaul)종족에게 7인 선교사 파송   287  그레고리(Gregory 240-332)에 의한 알메니안인들의 집단적 개종으로 야만인의 왕 티리바테       스 2세(Tiribater II)의 폭력적 박해가 시작되었으나 마침내 왕도 개종하여 세례를 받고 기       독교를 국교로 선포함.   303  디오클레시안 황제 박해시작 - 최후, 최악의 박해   313  콘스탄틴 황제의 회심과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   313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의 합법화   325  니케아 회의 : 교회융합→제국통합  328  프루멘티우스(Frumentius), 이디오피아에 복음전파   340  울필라스, 고트족에서 선교시작   360  투어스의 마틴(Martin of Tours)이, 선교사역개시   400  에집트의 수도사들이 에티오피아어로 성경번역   420  아스페벧 족장(Sheikh Aspebet) 치하에서 아라비아의 아랍족속이 기독교로 개종   430  반달(Vandal)족의 북아프리카 점령   432  패트릭(Patrick)의 아일랜드 회개운동 시작   450  왕들의 주도아래 지역단위로 기독교 개종   496  프랑크족(Franks)의 왕 클로비스(Clovis) 개종  498 기독교 복음이 중앙아시아 전역에 전파되기 시작, 네스토리안(Nestorians) 선교사들이 1350      까지 터키스탄(Turkestan)에서 활약   520 시리아인 전도자(Nestorians)들에 의해 세일론섬(island of Ceylon)에서, 페르시안 주교 산      의 말라바(Malabar)에서, 간지즈강 유역에서ㅡ훈족(Huns), 터크족(Turis), 위거족(Uighurs),      중에서, 그리고 티벧(Tibet)과 수마트라(Sumatra)등지에서 수 많은 기독교 개종자 속출   523 유대인 아랍왕 두누와스의 박해로 아라비아의 나란(Najran)과 힘마(Himyar)지역에서 14,000      명의 아랍 크리스챤들이 학살(Duh-Nuwas)   537  성소피아 성당 완공   540 저스티니안 황제(Emperor Justinian)의 명령으로 비잔틴제국 주변의 모든 야만족이 기독교로      개종, 소아시아의 7만명에게 강제로 세례   549 네스토리안 대주교가 중국 만리장성 북방 헤프탈릴(Hephthalites)지경의 백인 훈족에게           (White Huns) 주교를 파송   563  콜룸바(Columba)가 스코트랜드에 복음전도   570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 메카에서 출생 590  교황권 확립(그레고리 1세)   596  그레고리대제(Gregory the Great)가 영국에 어거스틴(Augustine) 주교를 파송   597  켄트(Kent)족의 왕 에텔버트(King Ethelbert) 세례   622  헤지라(메카→메디나, 이슬람 원년)   626  동로마 성상숭배 금지   627  노텀부리아(Norbhumbria)족의 왕 에드윈(King Edwin) 세례   631  동 앵글(East Angles)족의 개종   635  네스토리아 선교회(Nestorian Mission) 중국 도착   637  롬바르드(Lombards)족의 개종   638  이슬람의 예루살렘 점령   640  북아프리카 650만 베르베르(Berbers)족의 80%가 기독교로 개종, 그러나 950년까지 전부 이       슬람으로 다시 개종   685  윌 프리드(Wifrid) 영국의 기독교 개종을 완성   716  보니페이스(Boniface)의 장기선교역사 시작   723  도르(Thor)의 참나무가 쓰러짐   730 베데(Bede)의 『영구 교회사(Church History of the English People)』, 편찬, 앵글로 쌕슨       족(Anglo-Saxon race)의 개종을 서술   732  마르텔장군 뚜르 쁘와디아 전쟁에서 승리(이슬람군 격파)   780 촬레마그네(Charlemagne)가 쌕슨(Saxon)족에게 강제로 세례, 그리고 세례거부자는 하루에 4       천 5백명을 처형하고 수천명을 유형지로 추방   826  덴마크(Denmark)의 왕 하랄드(King Harald) 세례   827  안스갈(Ansgar)의 덴마크 복음화운동 전개   831  안스갈(Ansgar)의 스웨덴 복음화운동 시작   862  시릴(Cyril)과 메토디우스(Methodius)가 모라비아(Moravia)에 파송   864  불가리아(Bulgaria)의 왕자 보리스(Boris) 개종   900  마그야르스(Magyars, 현재의 헝가리)에 복음전파   949  이슬람세력이 모리타니아(Mauritania)의 유목민 베르베르(Berber)족을 포함한 기독교 세계       의 50%를 점령   954  러시아(Russia)의 공주 올가(Princess Olga) 세례   962  신성로마제국 탄생(오토 10세)   987  러시아의 왕자 블라디미르(Prince Vladimir) 세례   1000  fp이프(Lief the Lucky)의 그린랜드(Greenland) 복음선교   1009 네스토리안 선교사들이 북몽고(North Mongolia)의 수도 가라코룸(Karakorum)에서 터키족인       20만명의 케라이트(Keraits)족을 개종, 나미안족(Namians)과 메르키트족(Merkites)을 세례  1054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완전분열   1077  카놋사의 굴욕(헨리4세 vs 그레고리7세)   1122  보름스협약 (성직임명권 협약)   1124 키프차크 터키족(Kipchak Turks)의 쿠만인(Cumans) 몇 명이 헝가리의 스테판 2세(Stephen        Ⅱ)를 통해 기독교에 접촉하여 복음을 영접   1150 중앙아시아 옹구트족(Onguts)의 개종   1200 웬드족(Wends), 프러시안족(Prussians), 리츄아니안족(Lithuanians)과 기타 발틱해안의 종       족들을 제외한 유럽 전반에 걸쳐 기독교화   1219  프랜시스코 수도사들(Franciscan Friars)의 북아프리카 파송전도   1250 중앙아시아 위커족(Uighurs), 케라이트족(Keraitits), 몽골족(Mongols) 그리고 모든 주요종       족들이 부분적으로 기독교화   1291  십자군 악코에서 철수(십자군전쟁 종료)   1295  몬테코르비노(Montecorvino)의 요한(John)이 중국 북경에 도착   1303  아나그니 굴욕(교황 보니페이스 vs 프랑스필립왕)   1309  바빌론의 유수(∼70년간)   1347  유럽, 페스트로 인구 1/3 감소(∼1351)   1365  페름(Perm)의 주교 스테반(Steaphan 1335-1396)이 러시아의 콤미-페름(Komi-Perm)종족을         복음화   1368  중국 명조(Ming Dynasty)에 의해 기독교 폐지   1450  트리포(Trifo)와 테오도릿(Theodorit)이 콜라라프족을 복음화   1453  동로마 멸망(by 이슬람)   1493  캐톨릭 선교사들의 신세계 도착   1498  바스코 다 가마(Vasoc da Gama)와 캐톨릭 선교사들의 인도선교   1500  새로 조직된 개신교 교회들이 거의 150-200년 동안 복음을 받지 못한 종족들에게 접촉하기        이해 노력을 경주   1503  황금해안(Gold Coast)의 추장 에후투(Efutu)와 1300명 원주민의 세례   1517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95개 조항의 선포   1529 루이스 볼라노스가 아르헨티나의 투구만 2만명을 개종시켰는데 현재도 OFM이 이들을 위해         사역   1530 마틴 루터를 포함한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은 1세기의 사도들에게 주어        졌을 뿐이요 사도들의 죽음과 함께 끊어졌다고 가르치다   1534  칼티엘(Cartier)이 선교사들과 함께 캐나다에 도착  1536  포르투갈인(Portuguese)들이 코로만달(Cormandal)해안의 힘센 어부 바라타(Bharatha)족 1        만명을 한꺼번에 세례   1540  예수회(Society of Jesus) 선교활동 개시   1542  프란시스 자비엘(Francis Xavier)의 선교활동 개시   1544  프란시스 자비엘이 트라반코(Travancore)에서 선교활동 시작. 1개월만에 1만명의 무쿠바         족(Mukuvas)을 세례   1555  칼빈(Calvin)이 위그노교도(Huguenots)를 브라질에 파송   1556  세일론(Ceylon) 콜롬보(Colombo)부근 카레아스(Careas) 해안의 어부 7만명을 천주교로 개         종, 1583년까지 마나르(Marar)섬에서 파라바족(Paravas)과 카레아족 등 지주조개 잡이 어         부들 가운데 4만 3천명의 기독교인   1564  어거스틴교단(Augustineians)의 필리핀 도착   1580  페루의 제수잇(Jesuit)교파 신학자 호세 드 아코스타(Jose-de Acosta 1539-1600)가 <미개        인 복음전파>(On the Preaching of 징 Gospel Among the Savages)에 대한 기록을 통해 아        메르 인디안(Amerindian)종족 전도의 문제점을 제시   1583  마테오 릿치(Matteo  챠)dml 중국 도착   1588  영국교회(Anglican) 교구목사 하드리안 사라비아(Hadrina Saravia)가 최초로 개신교 세계        선교 운동의 중요성을 역설   1593  프란시스코 교단(Franciscans) 일본 도착   1602  네덜란드 정부가 동인도제도의 말레이족(Malays)을 개종하기 위한 선교사 파송   1606  로버트 드 노빌리(Robert de Nobili)의 마두라(Madura) 도착   1614  일본에 반기독교 교서 공포   1622  교황 그레고리 15세(Gregory ⅩⅤ 1554-1623)가 「신앙전파를 위한 신성회중」(Cacred            Congregation for the Propagation of the Faith)을 설립   1629  마태복음이 말레이어(Malay)로 번역, 이는 비서구어로 번역된 최초의 사건   1649  「뉴잉글랜드 복음전도회」(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New England)        가 설립되어, 아멜인디언(Amerindian) 선교를 위해 죤 엘리옷(John Eliot)을 최초의 선교        사로 파송   1650  러시아 정교회가 버링 스트레잇종족(Bering Strait) 선교를 위해 시베리아(Siberia)를 횡        단  1663  져스티니안 폰 벨츠(Justinian Van Weltz 1621-1668)가 독일교회와 학생들의 세계선교에대        한 각성을 촉구   1664  폰 벨츠(Von Weltz) 문제가 선교의 필요를 언급하다   1667 영국 시인 죤 밀턴(John Milton 1608-1674)이 저서 「실락원」에 [만민에게 복음을!]이란         구절을 사용   1668  스페인의 괌(Guam)에 군사기지와 캐톨릭 선교회를 설립   1670  다카(Dacca)에서 2만명의 나마수들아 벵가릴(Na masudra Bengalis)들이 힌두교에서 카톨릭        으로 개종   1673  러시아에서 칼믹(Kalmyks)족 최초로 동방정교회로 개종   1698 『기독교 증진회』(Society for the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 창설   1701 러시아이 중부 볼가(Middle Volga) 지방에서 1705년까지 3.638명의 야만인 케레미스              (Cheremis)인들이 세례   1701  복음전파회(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해외부서 창설   1702  토볼스크(Tobolsk)의 주교 흴로훼이(Filofey)가 1721년까지 160개 교회로 성장시키고, 4         만명의  오스트족(Ostyaks), 보컬(Voguls)족, 시리안족(zyrians), 야쿠족(Yakuts)을 세례   1705  「화란-할레 선교회」(Danish-Halle Mission) 창설   1710  칼 폰 칸스테안(Karl Von Canstein) 백작이 동독의 할레(Halle)에 최초로 칸스테인 하우         스(Canstein House) 인쇄소를 설립하여 80년동안 300만권의 성서를 출판   1722  진젠돌프(Zinzendorf)가 독일에 헤른후트(Herrnhut) 설립   1732  모라비안 교도(Moravians)의 첫 선교사 파송   1736  모라비안 선교사들의 알창겔스크 사모에드 족을(Samoyeds of Archangsk) 위한 선교사역         1736 중공의 반기독교 칙령 발포   1740  러시아 스비자스크(Svijazks)에 「새 세례자를 위한 기관」(Office for Newly-Baptized)         을 설립하여 1741년부터 1762까지 43만 550명의 볼가(Volga) 야만인들을 세례         1743 요셉 초툰세비스키(Josef Chotunceviski)를 중심으로 캄차카(Kamchatcha)를 위한 복        음화 운동개시   1747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의 <세계 복음화 기도운동> 제창   1751  오스트야크(Ostyaks)가 오브도르스크(Obdorsk) 지역의 북극 연안까지 복음을 전파   1759  제수잇파(Jesuits)가 브라질에서추방   1773  예수회(Society ofJesus) 탄압   1784  아승훈이 중국에서 천주교를 조선에 전래   1787 「모라비안교파 해외선교 기관인 이교도를 위한 복음 전도회」(Society for Propagating           the Gospel Among the Heathen) 창설   1792 러시아 정교(껸냐무 Orthodox)의 수도사 출신 8명의 선교사들이 알라스카의 코디아크            (Kodiak)섬에 도착하여 2천 500명의 에스키모 정령숭배자들을 세례. 1795년까지 1만명 세        례  1792  영국의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 1761-1834)가 「침례교선교사협회」   1793  윌리엄 캐리가 최초로 「세계 기독교선교현황」을 조사  1795  「런던 선교사협회」(London Missionary Society) 창설   1796 「스코틀랜드 선교사협회」(Scottish Missionary Society) 창설   1796 「글라스고우 선교사협회」(Glasgow Missionary Society) 창설   1797  「네덜란드 선교사협회」(Netherlands Missionary Society) 창설   1797 「런던 선교사협회」(LMS)가 최초로 선교사들을 타히티(Tahiti)에 파송   1799  「교회 선교사협회」(Church Missionary Society) 창설   1799  학생운동(Student Movement) 폭발   1799 「전도지 선교회」(Religious Tract Society) 창설   1802  미국에서 「메싸추세스 침례교 선교회」(Massachusetts Baptist Missionary Society)가           [개척지 복음전파]를 위해 창립   1804  「영국과 해외 성서공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yt) 창설   1806 「해이스택 기도회」(Haystack Prayer Meeting)로 말미암아 학생선교운동 개시   1807  로버트 모리선(Robert Morrison) 중국 도착   1810  「미국 해외선교 위원회」(American Board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가 창설   1812  최초로 미국 선교사들이 인도를 향해 항해   1814  예수회(Society for Jesus) 복귀   1815  「바셀 선교사협회」(Basel Missionary Socieyt) 창설   1816  「미국 성서 공회」(American Bible Socieyt) 창설   1817  로버트 모회트(Robert Moffat)의 아프리카 도착   1819  「런던 사무원협회」(London Secretarise' Association) 창설   1822  「파리 복음선교회」(Paris Evangelical Missionary Society) 창설   1825  「미국 전도 소책자 선교회」(American Tract Society) 창설   1826  「미국 가정 선교협회」(American Home Missionary Society) 창설   1826   볼가(Volga)지역에서 러시아 정교회(Russian Orthodox)로부터 집단적 이탈   1828  「라인 선교사협회」(Rhenish Missionary Society, RMS)가 창설되어 보르네(Borneo)의 대         야크족(Dayaks)을 위한 선교를 시작. 1839년에 대야크인의 첫 세례자 탄생   1840  영국의 리빙스톤(David Livingstone) 아프리카에 도착   1842  남경조약(Treaty of Nanking)으로 중국 개방   1846  런던의 「복음주의 동맹」(Evangelical Alliance) 창설         1847 동방정교의 시베리아 이디드이르(Anadyr) 지방의 코리아크(Korik)와 척치(Chukch)인        들을 위한 선교사역   1849  모라비안 교파가 니카라과의 미스키토(Miskitos)을 위한 선교사역   1852  「성서와 의료선교사협회」(Bilble and Medical Missionary Fellowship) 창설   1854  「런던 선교대회」(London Missionary Conference)   1858  「뉴욕 선교대회」(New York Missionary Conference) 1858  미국에서 1858-1859 대각성운동과 「훌턴스트릿 기도회」(Fulton Street Prayer Meeting)  1859  개신교 선교사들의 일본 도착   1860  「리버풀 선교대회」(Liverpool Missionary Society) 창설   1861  「스코트랜드 국립 성서공회」(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 창설   1862  동방정교 선교회가 시베리아 아부르(Amur) 강주변의 골드(Gold)와 길야크(Gilyak)족을 위        한 선교사역   1865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에 의해 「중국 내지선교회」(C.I.M-China Inland Mission)        창설   1867 「성서 유니온」(Scripture Union) 창설   1870 남인도의 집중적 선교운동으로 1백만의 텔루구(Tellugu)반민들이 30년간 침례교, 루터교,         감리교로 개종   1875 「프린스톤 해외선교협회」(Princeton Foreign Mission Society)에 의해 프린스톤에 부흥         운동   1878 로얄 윌더(Royal Wilder)에 의해 「세계선교사 회보」(Missionary Review of World) 출간   1880 뉴저지 32개신학교 250명 신학생들에 의해 「신학교 선교동맹」(Interseminary Missionary        Alliance) 결성   1881 「기독교 열성 청년회」(Young People's Socieyt of Christian Endeavor) 결성   1884  미국의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한국 도착   1885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러(Appenzeller) 한국 도착   1885 「켐부릿지 7인」(Cambridge Seven) 선교사들이 중국 내지 선교회(CIM)를 통해 중국 파송  1886 「대학생 자원 해외선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결성   1887 심슨(A. B. Simpson)에 의해 「기독교 선교연맹」(C&MA-Christiam and Missionary                Alliance) 결성   1888 「성서 기증 선교회」(Scripture Gift Mission) 창설   1890  10년간 믿음선교(Faith Mission) 현상   1891 「대학생자원 해외선교운동」 제1회 전국대회   1892 「북미주 해외선교대회」(Foreign Mission Conference of North America) 개최   1897  런던 남부에서 제4회 「람베스선교대회」(4th Lambeth Conference) 개최. 194명의 영국교        회 주교들 참석   1898 「런던 에큐메니칼 선교대회」(Ecumenical Missionary Conference) 개최   1900 「뉴욕 에큐메니칼 선교대회」 개최   1900  의화단사건(Boxer Rebellion)으로 중국선교 혼란   1903  독일 프란시스코 교도들을 통해 브라질 문두루쿠 인디안(Munduruccu Indians) 복음화   1905  「인도 전국선교사 협회(National Missionary Society for India) 결성   1906  평신도 선교운동 개시   1910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World Missionary Conference, Edinburgh)   1912  「국제 선교회보(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s) 발간   1912  영국 선교사회 대회(Conference of British Missionary Societies) 결성   1913  영국의 스터드(C.T.Studd 1862-1931)가 전세계복음화 십자군(World-Wide Evangelization          Crusade) 창설   1916  영국 정치가 출신 선교사그러브(K.G. Grubb 1900-1980)에 의해 「세계 정복 운동」(World         Dominion Movement)이 결성되어 세계선교지 종족 언어에 대한 구체적 조사   1917  「초교파 해외 선교협회」(Interdenominational Foreign Mission Association) 결정   1920  필리핀에서 캐톨릭 교황 파이우스 10세(Pius Ⅹ)의 의교리분답서(Catechism)를 20만명의          모슬렘을 위해 졸로-모로(Jolo-Moro)어로 번역   1921  레이크 모홍크(Lake Mohonk)에서 「국제선교협회」(International Mission Council) 결성  1921  「노르웨이 선교협회」(Norweigian Mission Council) 결성   1922  카메룬 타우센드(Wm. Cameron Towsen)와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이SVM에 동        참  1926 미국에서 「보르네오 비복음화 종적선교회」(Unevangelized Tribes Mission of         Borneo) 창설   1926  제수잇파(Jesuits) 선교사들이 브라질의 일본인들을 위해 사역, 1978년까지 1백만명의 일        본인중 63만명이 천주교로 개종   1927  「근동 기독교 협의회」(Near East Chirstian Council) 결성   1928  「국제선교사 협의회 예루살렘 대회」        (Jerusalem Conference of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개최          1929 CIM대표 호스테(D.E. Hoste, 1861-1946)가 유럽과 미국에서 중국을 위한 200명의          선교사 모집 공고   1930  일본에서 전도자 도요히코 카가와(Toyohiko Kagawa, 1888-1960)를 중심으로 「하나님의왕        국운동」(Kingdom of God Movement)을 시작, 1백만 이상에게 복음을 전파   1931  영국 런던에서 「비복음화지역 선교회」(Unevangelized Fields Mission) 창설   1931  에쿠아도르의 HCJB 방송국에서 방송개시   1935  타운센트(Townsend)에 의해 클리프 성경번역 선교회(Wycliffe Bible Translator) 창설   1936  「대학생 해외선교협회」(Student Foreign Missions Fellowship) 결성   1936  WEC선교사 브리에르레이(L.G. Brierley)가 처음으로 「비복음화 종족」(Hidden People)          연구 조사   1938  「영국교회 협의회」(British Council of Churches) 형성   1941  제2차세계대전시 1천 1백만 미국인들의 선교의식 각성   1942  「IMC 마드리스 대회」 개최   1945  복음주의 해외선교 협의회(Evangelical Foreign Mission Association) 결성   1946  ICVF/SFMF 대학생 선교대회 토론토에서 개최   1946  교회 세계 봉사회(Church World Service) 창설 1947  루터교 세계연맹(Lutheran World Ferderation) 조직   1947  복음주의 대학생 국제협의회(International Fellowship of Evangelical Students) 결성   1947  IMC 휘트비 대회(Whitby Conference of IMC) 개최   1948  세계선교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결성   1950  아프리카 대륙에 4천 4백만 기독교인 달성, 500종족들 가운데 년당 180만명이 증가하고          아프리카 토착교회(AICs)는 1천 700개의 교단으로 성장   1951  세계 복음주의 협의회(World Evangelical Fellowship) 결성   1951  대학생 선교회(Campus Crusade for Christ) 창설   1951  개신교 선교사들의 중국 철퇴 개시   1952  IMC 월링겐대회(Willingen Conference of IMC) 개최   1955 미국인 선교학자 맥가브란(D.A. McGavarn)이 The Bridges of God를 발행. 종족단위 복음화        개념을 천명   1956  에쿠아도르의 아우카 인디안(Auca Indians)에게 5명의 개신교 선교사들의 정글에서 살해   1957  신학교육 기금(Theological Education Fund) 설치   1958  IMC 가나대회(Ghana Conference of IMC) 개최   1958  영국에서 복음주의 선교사 동맹(Evangelical Missionary Alliance) 결성   1959  아시아 기독교대회 발족대회(Inaugural Assembly of Asia Christian Conference) 개최   1960  연장신학교육(Theological Education by Extension) 실시   1960  니카라과의 심층전도(Evangelism-in-depth) 실시   1961  IMC와 WCC의 병합   1961  한국에서 UBF 선교회 발족   1963  DWME의 멕시코 집회   1964  계간 복음선교(Evagelical Mission Quarterly) 발간 개시   1965 카메룬의 야운데(Yaounde)에서 [현대 서부 아프리카 복음화]에 대한 DWME회의에서 라우선         (J.S.Lawson), 바레트(D.S. Barrett), 아얌(B. B. Ayam)이 132 아프리카 종족복음화 단계        연구   1965  훌러 세계 선교대학(Fuller School of World Mission) 설립   1966  MARC가 창설되어 교회의 세계선교를 위한 신학과 연구자료를 공급하며 세계복음화를 한         베를린회의(Berlin Congression World Evangelization)와 연결되기 시작. 종족그룹에 대한        근대적 아이디어 탄생   1966 아프리카와 마다가스카르 복음주의자협회(Association of Evangelicals of Africa and            Madagascar) 창설   1966  미얀마에서 선교사 축출   1966  홍위병들이 중국교회 파괴   1966  태평양 교회 대회(Pacific Conference of Churches) 결성   1966  베를린 전도대회(Berlin congress on Evangelism) 개최   1967  종족복음화를 위한 신성회중(Sacred Congregation for the Evangelization of Peoples)이        9천 900여개 언어종족과 1만 5천 종족그룹을 위한 사역   1968  국제선교 협력기구(K.I.M-Korea International Mission) 창립   1969  아프리카 토착 교회가 300개의 다른 종족으로 집합된 1,700만명과 5,800개 교단으로 증           가 매년 96만명 성장   1970  복음화를 위한 필리핀 전국총회(All Philippine Congress on Evangelization) 결성   1970  대만에서 중국 전도대회(Chinese Congress on Evangelism)   1970 「연합성서공회」가 세계인구에 97%를 위한 구약 249개 언어, 신학 578언어, 쪽복음 1천           431언어로 출판, 년 성경반포수는 1966년에 8천만권, 1970년에 1억 7천 300만권, 1985년         에 5억 4천 900만권   1860  「리버풀 선교대회」(Liverpool Missionary Society) 창설   1861  「스코트랜드 국립 성서공회」(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 창설   1862  동방정교 선교회가 시베리아 아부르(Amur) 강주변의 골드(Gold)와 길야크(Gilyak)족을 위        한 선교사역   1865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에 의해 「중국 내지선교회」(C.I.M-China Inland Mission)         창설   1867 「성서 유니온」(Scripture Union) 창설   1870  남인도의 집중적 선교운동으로 1백만의 텔루구(Tellugu)반민들이 30년간 침례교, 루터교,        감리교로 개종   1875 「프린스톤 해외선교협회」(Princeton Foreign Mission Society)에 의해 프린스톤에 부흥         운동   1878 로얄 윌더(Royal Wilder)에 의해 「세계선교사 회보」(Missionary Review of World) 출간   1880 뉴저지 32개신학교 250명 신학생들에 의해 「신학교 선교동맹」(Interseminary Missionary        Alliance) 결성   1881 「기독교 열성 청년회」(Young People's Socieyt of Christian Endeavor) 결성   1884  미국의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한국 도착   1885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러(Appenzeller) 한국 도착   1885 「켐부릿지 7인」(Cambridge Seven) 선교사들이 중국 내지 선교회(CIM)를 통해 중국 파송 1886 「대학생 자원 해외선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결성   1887 심슨(A. B. Simpson)에 의해 「기독교 선교연맹」(C&MA-Christiam and Missionary                Alliance) 결성   1888 「성서 기증 선교회」(Scripture Gift Mission) 창설   1890  10년간 믿음선교(Faith Mission) 현상   1891 「대학생자원 해외선교운동」 제1회 전국대회   1892 「북미주 해외선교대회」(Foreign Mission Conference of North America) 개최   1897 런던 남부에서 제4회 「람베스선교대회」(4th Lambeth Conference) 개최. 194명의 영국교회       주교들 참석   1898 「런던 에큐메니칼 선교대회」(Ecumenical Missionary Conference) 개최   1900 「뉴욕 에큐메니칼 선교대회」 개최   1900  의화단사건(Boxer Rebellion)으로 중국선교 혼란   1903  독일 프란시스코 교도들을 통해 브라질 문두루쿠 인디안(Munduruccu Indians) 복음화   1905  「인도 전국선교사 협회(National Missionary Society for India) 결성   1906  평신도 선교운동 개시   1910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World Missionary Conference, Edinburgh)   1912  「국제 선교회보(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s) 발간   1912  영국 선교사회 대회(Conference of British Missionary Societies) 결성   1913 영국의 스터드(C.T.Studd 1862-1931)가 전세계복음화 십자군(World-Wide Evangelization          Crusade) 창설   1916 영국 정치가 출신 선교사그러브(K.G. Grubb 1900-1980)에 의해 「세계 정복 운동」(World         Dominion Movement)이 결성되어 세계선교지 종족 언어에 대한 구체적 조사   1917  「초교파 해외 선교협회」(Interdenominational Foreign Mission Association) 결정   1920  필리핀에서 캐톨릭 교황 파이우스 10세(Pius Ⅹ)의 의교리분답서(Catechism)를 20만명의          모슬렘을 위해 졸로-모로(Jolo-Moro)어로 번역   1921  레이크 모홍크(Lake Mohonk)에서 「국제선교협회」(International Mission Council) 결성  1921  「노르웨이 선교협회」(Norweigian Mission Council) 결성   1922  카메룬 타우센드(Wm. Cameron Towsen)와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이SVM에 동        참  1926 미국에서 「보르네오 비복음화 종적선교회」(Unevangelized Tribes Mission of Borneo) 창        설   1926  제수잇파(Jesuits) 선교사들이 브라질의 일본인들을 위해 사역, 1978년까지 1백만명의 일        본인중 63만명이 천주교로 개종   1927 「근동 기독교 협의회」(Near East Chirstian Council) 결성   1928 「국제선교사 협의회 예루살렘 대회」(Jerusalem Conference of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개최   1929  CIM대표 호스테(D.E. Hoste, 1861-1946)가 유럽과 미국에서 중국을 위한 200명의 선교사         모집 공고   1930  일본에서 전도자 도요히코 카가와(Toyohiko Kagawa, 1888-1960)를 중심으로 「하나님의왕        국운동」(Kingdom of God Movement)을 시작, 1백만 이상에게 복음을 전파   1931  영국 런던에서 「비복음화지역 선교회」(Unevangelized Fields Mission) 창설   1931  에쿠아도르의 HCJB 방송국에서 방송개시   1935  타운센트(Townsend)에 의해 클리프 성경번역 선교회(Wycliffe Bible Translator) 창설   1936  「대학생 해외선교협회」(Student Foreign Missions Fellowship) 결성   1936  WEC선교사 브리에르레이(L.G. Brierley)가 처음으로 「비복음화 종족」(Hidden People) 연        구 조사   1938  「영국교회 협의회」(British Council of Churches) 형성   1941  제2차세계대전시 1천 1백만 미국인들의 선교의식 각성   1942  「IMC 마드리스 대회」 개최   1945  복음주의 해외선교 협의회(Evangelical Foreign Mission Association) 결성   1946  ICVF/SFMF 대학생 선교대회 토론토에서 개최   1946  교회 세계 봉사회(Church World Service) 창설 1947  루터교 세계연맹(Lutheran World Ferderation) 조직   1947  복음주의 대학생 국제협의회(International Fellowship of Evangelical Students) 결성   1947  IMC 휘트비 대회(Whitby Conference of IMC) 개최   1948  세계선교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결성   1950 아프리카 대륙에 4천 4백만 기독교인 달성, 500종족들 가운데 년당 180만명이 증가하고 아        프리카 토착교회(AICs)는 1천 700개의 교단으로 성장   1951  세계 복음주의 협의회(World Evangelical Fellowship) 결성   1951  대학생 선교회(Campus Crusade for Christ) 창설   1951  개신교 선교사들의 중국 철퇴 개시   1952  IMC 월링겐대회(Willingen Conference of IMC) 개최   1955 미국인 선교학자 맥가브란(D.A. McGavarn)이 The Bridges of God를 발행. 종족단위 복음화       개념을 천명   1956  에쿠아도르의 아우카 인디안(Auca Indians)에게 5명의 개신교 선교사들의 정글에서 살해   1957  신학교육 기금(Theological Education Fund) 설치   1958  IMC 가나대회(Ghana Conference of IMC) 개최   1958 영국에서 복음주의 선교사 동맹(Evangelical Missionary Alliance) 결성   1959  아시아 기독교대회 발족대회(Inaugural Assembly of Asia Christian Conference) 개최   1960  연장신학교육(Theological Education by Extension) 실시   1960  니카라과의 심층전도(Evangelism-in-depth) 실시   1961  IMC와 WCC의 병합   1961  한국에서 UBF 선교회 발족   1963  DWME의 멕시코 집회   1964  계간 복음선교(Evagelical Mission Quarterly) 발간 개시   1965 카메룬의 야운데(Yaounde)에서 [현대 서부 아프리카 복음화]에 대한 DWME회의에서 라우선         (J.S.Lawson), 바레트(D.S. Barrett), 아얌(B. B. Ayam)이 132 아프리카 종족복음화 단계        연구   1965  훌러 세계 선교대학(Fuller School of World Mission) 설립   1966  MARC가 창설되어 교회의 세계선교를 위한 신학과 연구자료를 공급하며 세계복음화를 위          한 베를린회의(Berlin Congression World Evangelization)와 연결되기 시작. 종족그룹에          대한 근대적 아이디어 탄생   1966 아프리카와 마다가스카르 복음주의자협회(Association of Evangelicals of Africa and             Madagascar) 창설   1966  미얀마에서 선교사 축출   1966  홍위병들이 중국교회 파괴   1966  태평양 교회 대회(Pacific Conference of Churches) 결성   1966  베를린 전도대회(Berlin congress on Evangelism) 개최   1967 종족복음화를 위한 신성회중(Sacred Congregation for the Evangelization of Peoples)이 9       천 900여개 언어종족과 1만 5천 종족그룹을 위한 사역   1968  국제선교 협력기구(K.I.M-Korea International Mission) 창립   1969 아프리카 토착 교회가 300개의 다른 종족으로 집합된 1,700만명과 5,800개 교단으로 증가.       매년 96만명 성장   1970  복음화를 위한 필리핀 전국총회(All Philippine Congress on Evangelization) 결성   1970  대만에서 중국 전도대회(Chinese Congress on Evangelism)   1970 「연합성서공회」가 세계인구에 97%를 위한 구약 249개 언어, 신학 578언어, 쪽복음 1천          431언어로 출판, 년 성경반포수는 1966년에 8천만권, 1970년에 1억 7천 300만권, 1985년          에 5억 4천 900만권   1971  일본 해외 선교협회(Japan Overseas Mission Association) 결성   1972  아프리카 복음화를 위한 개척지 상황(Frontier Situations for Evangelization)이 바레트         (D.B. Barrett), 호로네크(M.L. Hronek), 맘보(G.K. Mambo), 브비티(J.S. Mbiti), 맥베이         그(M.J. McVeigh)에 의해 발간   1972  미국선교학회(American Society Missiology) 창설   1972  시카고에서 복음과 개척지 종족을 위한 협의회(Consultation on The Gospel and Frontier        Peoples) 개최   1972  국제 선교학 논평지(Missiology, An International Review) 발간   1973  방콕에서 DWME 집회   1973  미국선교학회(American Society of Missionary Convention) 개최   1973  필리핀에서 전 아시아 학생선교대회(All-Asia Student Missionary Convention) 개최   1973  서울에서 전 아시아 선교협의회(All-Asia Missionary Convention) 창설   1973  교회선교위원회 협의회(Association of Church Mission Committees) 창설  1973  아시아 선교회(Asia Mission Association) 창설   1973  얼바나 전도(Urbana Reversal) : 1970년에 8%, 1976년에 28%에 학생들이 헌신서약 종족 복        음화 선교전략 대확장   1974 로잔에서 세계복음화 국제대회(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 in              Lausanne)   1974  일본 전도대회(Japan Congress on Evangelism) 개최   1974  CCC 한국 대회(Explo '74) 개최   1974  최초의 하기 국제 연구소(First Summer Institute of International Congress)   1974  1980년 세계 선교대회(World Missionary Conference)를 위한 공식적 회집   1975  나이로비에 레나나에서 케냐 비복음화 종족 대회(Unreached Peoples Conference)   1975 동서선교 정보수집과 전략개발센터(East-West Center for Mission Research and                   Development)가 서울에 설립   1975  아시아 선교협회(Asia Mission Association) 설립   1976  세계 복음화 중국대회(Chinese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 개최(홍콩)   1976  캔사스에서(IFMA/EFMA연합 실행 위원수련회) 개최   1976  미국 해외선교센터(United States Center for the World Mission) 창설   1976  얼바나 선교대회(Urbana '76)에서 50% 학생헌신   1976  이슬람 세계대회(Islamic World Congress)가 기독교 선교사의 철수   1976  선교사들이 성경이 없는 5천 2백억 언어 그룹중 300 언어로 성서번역 500언어로 성경 개편        과 새로 번역   1977  전인도 선교 및 복음화 대회(All-India Congress on Mission And Evangelization)   1977  인도 선교 협회(IMA) 조직   1977  미국 세계선교센터 국제연구소(ISS)에서 최초로 선교전망 'Perspectives'코스 제공   1978  모슬람권 복음화를 위한 북미대회   1978  ISI가 레이톤 친(Leiton Chin)으로 WCFM책임자 임명   1979  중국교회 재 개방   1979  서독의 바드 리벤젤(Bad Liebenzell)에서 세계복음협회 주최로 비복음화 종족대회 개최   1979  비복음화 종족을 위한 EFMA 실행위원 수련회, 1990년까지 5천 208종족 복음전파 계획   1979  맥가브런(McGavran), 빌리스(Bliss), 질(Gill)의 [2천년까지 모든 종족에 교회 개척] 주장  1979  얼바나(Urbana)대회에서 75%학생들 헌신   1980  제자화를 위한 필리핀 전국대회(Philippine Congress on Discipling a Nation)   1980  멜보우르네 DWME 선교대회(DWME Conference Melbourne)   1980  태국에 파타야(Pattaya)에서 LCWE 대회 개최   1980 에덴버그(Edinburgh)에서 개척지 선교 세계협의회(World consultation on Frontier               Missions)개최   1980 개척지 선교를 위한 국제학생 협의회(International consutation on frontier missions)개       최   1981 개척자협회(.Frontier Fellowship)창설과 [Global Prayer Digest" 발간   1981 IFMA 개척자 위원회 (IFMA Frontier peoples)   1981 얼바나(Urbana)대회에서 90% 학생들 헌신   1981 숨은 종족 (Hidden People)을 주제로 독일복음선교협회(German Association of                         Evangelical Mission)회의   1981 영국하드포드(Hertford)의 하이레리그(High Leigh)에서 복음선교동맹(Evangelical              Missionary Alliance) 주체로 비복음화 종족 전도(Reaching Unreached Peoples)를 위한 대       회   1982  그랜드 래피드(Grand Rapids)에서 복음전파와 사회적 의무에 대한 협의   1982  3년마다 서울에서 열리는 아시아 선교협의회 대회        (Asia Mission Association Consultation) 개최   1983 암스테르담에서 83만 5천명 순회 전도자들의 전도 연구   1983 세계 복음주의 협회 (World Evangelical Fellowship)에서 위튼 83(Wheaton '83)개최   1983 IFMA 와 EFMA 실행위원수련회에서 각각 미해결 과제(Unfinished Task)에 대해 강조   1984 USCWM에서 IFMA/EFMA/AEPM 수련회를 통해 개척선교에 대한 사명의 재확인   1984 호놀룰루에서 중국민족 세계복음화대회 (Ethnic Chiness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   1984 세계복음화 기도동맹(WEPA - World Evangelization prayer Alliance)결정   1985 남아프리카에서 최초로 국내단위 선교대회 개최   1985 CCC 엑스폴로 '85(Explo '85) 개최   1985 맥가브런이 선교학자 회의를 열어 2천년 세계선교의 대전진(Gaint Step)에 대한 연구   1985 미국 휴스턴에서 소수민족 복음화를 위한 국내 대회(National Convocation on                         Evangelizing Ethnic) 개최   1985 자이레 국내복음화 대회(Zaire National Congress on Evangelism)에서 64교단 지도자들이         1990년까지 1만 교회를 복음화되지 않은 지역에 설립할 것을 계획   1985 나이제리아 복음주의 선교회(Nigeria Evangelical Mission Association)가 나이제리아 비        복음화 종족 연구   1985 선교 2천년(Mission 2000) 계획을 선교 학자 맥가브란(D.A.McGavran)이 제안, 유럽의 10만        교회의 선교회가 세계의 비복음화 종족에 2천년까지 교회 개척 계획   1986  미국 남침례 해외 선교부에서 비거주 선교 분과 신설   1986  인도 선교협회(India Mission Association)가 인도의 숨은 종족 연구를 대규모로 개시   1986  맨데이트 '86 선교대회 개최   1986  갈렙 프로젝트(Caleb Peoject)가 선교기관들과 협력 1만 3천 대학생들에게 영향력 발휘   1986  휠트 윌쓰(Fort Worth)에서 미국 교회사 협회(American Society of church History) 주최        로 1986년 축제   1986 암스텔담 '86(Amsterdam '86)에서 8천명의 목사와 전도자들에게 도전   1986 콜로라드 스프링(Colorodo Springs)에서 개척지 선교학 협회(Society for Frontier               Missiology)창설   1986 아시아 선교협회(Asia Mission Association)국제대회 미국에서 개최   1987 콤미밤 '87(COMIBAM '87)최초의 남아프리카 선교대회(Latin American Congress on                 Mission) 개최   1987 제3세계 선교협회(Association of Third World Mission) 최초의 국제대회   1987  제8차 아시아 신학 협의회   1988 개척지 선교를 위한 국제 학생협의회 (International Student consultation on Frontier         Mission) 결성   1988 개척지선교 세계 협의체(World consultation on Frontier Missoin)결성   1988 리더쉽 '88(Ledership '88) 기독교 젊은 지도자를 위한 로잔대회   1988 제1회 개척지 선교를 위한 신학생 국제대회(First International Meeting of Theological        Students for Frontier Mission) 개최   1988 제1차 한인세계선교대회(Korean World Missions '88) 한국기독교 100년사에 최초로 시카고       휫튼대학 빌리그램 센타에서 1988년 7월 25-30일 열림   1989 GCOWE '89(Global Consultation for World Evangelization by AD 2000 &Beyond)싱가폴에        서 1989년 1월5-8일 50개국대표 314명이 참가한 2000년대 세계복음화 전략회의   1989 로쟌II 마닐라 세계복음화 국제대회(International Congress for World Evangelization in        Manila. Lausanne II) 1989년 7월 11-20일 마닐라에서 개최   1992 제2차 한인세계선교대회(Korean World Missions '92) 7월27-8월1일 시카고 휫튼대학 빌리        그래함센터에서 개최   1995 GCOWE '95 제2차 세계복음화 전략회의, 17-25일 한국 서울 횃불선교센터 214개국 4662명         참가   1996 제3차 한인세계선교대회(KWM' 96) 선교사 384명 2,300명이 모여 시카고 윗튼칼리지에서 개       최 1997 GCOWE '97 남아공에서 아프리카 지도자들로 미전도종족에 초점을 맞추게 함   1999 10월 일본 교토에서 제3세계선교협의회(TWMA) 창립 10주년 기념 선교대회가 개최   2000 제4차 한인세계선교대회(KWMC 2000) 7월 24-28 윗튼대학에서 열림   2000 2000년 세계선교대회 8.14-19 서울, 잠실체육관, 사랑의교회, 명성교회, 소망교회, 영락교       회에서 개최   2000 암스텔담 2000 선교대회 7.29-8.6 빌리그램함 전도협회 주최로 암스텔담에서 개최   2000 어바나 2000 선교대회 12.27-31 개최   2000 메시야 2000 예루살렘선교대회 12.27-2001.1.2 개최  

■ 한국교회사 연대표1627.  네덜란드 벨트브레(Jan T. Weltvree) 일본으로 교역차향해중 제주 앞바다에 표류    1653.  하멜(Hendrik Hamel) 일본으로가던중 제주에표류 36명 제주감영에 압송    1816.  맥스윌과 홀 군함을 이끌고 군산부근정박, 조대복에게 한문성경 전함.    1832. 7.  귀츨라프(네덜란드선교회), 충청도 고대에서 전도문서와 성경을 전함.    1874.10.  로스선교사 첫번째 고려문 여행에서 상인 백홍준 부친에게 한문신약전서를 전함    1866. 9. 2  토마스선교사 대동강에서 성경을 가지고 들어오다 순교함    1880.  백홍준, 기독교서적 휴대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됨    1882.10. 6  서상륜, 영국성서공회의 한국최초의 권서로 한국으로 파송받음    1883.10.  로스선교사 요한복음, 누가복음, 사도행전 출간    1884. 9.20  의료선교사 알렌(H.N. Allen) 미국공사관의 공의로 한국에 입국함    1884.11.  로스, 윕스터와 서간도 한인촌을 방문 12월 한국인 75명에게 세례를 줌    1885. 1.21  스크랜톤(Dr.W.B.Scranton)선교사(의사) 한국을 향해 뉴욕을 출발    1885. 4. 5  미국 장로교선교사 언더우드와 미국 감리교선교사 아펜젤러 한국 인천에 입국함    1885. 4. 5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 창립    1885. 4.10  알렌에의해 광혜원 설립(국립병원으로 설립, 후에 제중원으로 개칭함)    1885.10.11  알렌 선교사 집에서 외국인 12명이 한국 최초의 성찬식 거행    1886. 5.31  이화여학교 설립.(서울 정동에서 미감리회 여선교사 스크랜톤 부인에 의해 설립)    1886. 6. 8  배재학당 개교함    1886. 7.  노춘경, 국내에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세례를 받음    1887. 1.  서경조, 최명오, 정공빈 언더우드선교사에게 세례받음    1887. 9.27  새문안교회, 로스와 한국인 신자14명이 참석하여 언더우드에 의해 설립    1888. 4.28  금교령 법령.(천주교에 전교를 금지한다는 법령)    1889.  토론토대학 YMCA파송한 게일, 독립선교사 팬윅(Malcom. C. Fenwick) 내한    1889. 10.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에서 데이비스(j. h. dAVIES)목사 부부와 메리(Mary) 파송    1890. 4.  데이비스 전도하며 부산으로가던중 과로와 천연두, 폐렴으로 한국땅에서 순교    1895. 7. 3  한국 최초 교회인 소래교회가 한국인에 의해 설립    1897. 5.  예수병원 설립.남장로회 한국 여선교사인 의사 잉골드에 의해서 설립 개원됨.    1897. 5. 2  고양읍교회 설립. 미국 남감리회 초대선교사 리드박사가 설립의 동기임.    1898. 9.  캐나다장로교회 그리어슨(R. G. Grierson), 푸트, 맥레선교사 파송    1900. 9. 9  정동제일교회에서 <신약젼서> 출판기념예배 드림    1901. 5.14  한국 최초의 목사 안수(김창식, 김기범)    1902. 6.  아펜젤러, 목포의 번역자회의 참석차 여행중 선박충돌사고로 순교함    1903.10.28  기독교청년회 창설(상류 지식층 지도자들과 청년 전도목적)    1906.  현 기독교한국침례회 교단창립총회(대화회), 교단명을 대한기독교회로 정함    1907. 5.30  김상준 정빈 양씨가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설립하다.    1907. 6.  감리교 협성신학교 개교    1907. 9.17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창설, 선교사 33명모임 (한국최초의 목사 7명을 장립)    1908. 3. 1  한국인 목사 길선주 주례로 최초의 세례식 거행    1908.10. 8  구세군 한국본영 창설    1909. 7. 1  구세공보 창간. 처음에는 구세신문이라는 제호로 발간되었다.    1910. 2.15  구세군사관학교 개교(한국에 개전된지 17개월만에 사관학교 개교)    1911. 3.13  경성성서학원(서울신학대학교 전신) 설립하다.    1911. 9.  대구 남문교회에서 열린 제5회 조선노회에서 7개노회 조직 결의    1911.12. 4  경기충청노회 성립.경성부 새문안교회에서 성립되었음.    1912. 2. 1  한국교회 주일학교 위원회 설립    1912. 9. 1  대한예수교장로회 창립총회    1914. 1.19  한국 최초의 유치원 이화유치원 개원    1915.12. 7  기독신보 발행. 일제치하 교회신문 1937년까지 속간됨.    1916. 9. 2  경북노회 분립. 제12회 경상노회에서 경북, 경남노회를 분립할 것을 허락받음.    1919. 2.26  한국기독교 연합공의회 조직    1919. 3. 1  삼일독립운동이 전국전국으로 전개됨    1919. 3. 1  금주동맹회 절제운동.1930년 YMCA를 중심으로 절제운동이 일어남.    1919. 4.15  수원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 발생    1922.11.20  기독교양재여숙 창립(경성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가 설립한 사회교육기관)    1922.11.25  기성 교단기관지 "활천" 창간호 발행    1923. 8.18  한국 YWCA연합회 결성    1924. 9.13  경기노회 충청노회와 분립    1925.10. 1  한국 최초의 신학박사 남궁혁, 평양신학교 부임    1926.11.14  서울에서 토마스목사 순교 60주년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 설립    1926. 2.18  기독교연구회(한국YMCA) 창립(서울교회 중진들이 민족운동 목적)    1928. 7.24  청년 면려회 제3회 하계대회 및 정기총회(연세대학교)    1929. 2.27  성결교회 제1회 연회가 소집되고 교회법을 제정하다.    1931. 9.11  금강산 기독교 수양관 봉헌(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추진)    1931. 5.29  기독교증험론 발행(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발행함)    1931. 6.14  한국에서 최초의 여자목사 안수(기감 여선교사들)    1933. 1.20  기독교세계 창간(기독교감리회의 교회기관지)    1934. 6.14  한국감리교선교 선교50주년기념식(배재학교)    1935.12.22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창립(최태용목사 중심으로 한국인들에 의해 조직된 교단)    1936. 5.25  천주교에서 신사참배 성명서 발표    1936. 7.19  기독교보 발행(주간으로 1936.1.14 창간된 <종교시보>를 개제하여 발행함)    1937. 4. 1  그리스도교 한국선교회 설립(내한한 존 체이스 선교사에 의하여 설립)    1938. 2. 8  주기철목사 평양감옥에 구금됨    1938. 2.12  장로교 평양신학교 학생들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1938. 9.10  일제 총독부가 장로교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도록 강요함    1938.10.  YMCA, YWCA를 해산시키고 일본기독교청년회에 종속시킴    1938. 8.16  기독신문 발행(1942년 4월 23일까지 발행된 개신교 각교파의 연합신문)    1939.11.15  기독교문답 발행(이동욱지음. 기독교조선감리회 총리원 교육국 발행)    1941.12.31  기독교대한감리회청년연합회 창립    1942. 4.29  기독교신문발행(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합동기관지)    1943. 9.  일제 주일밤예배, 삼일기도회 금지령    1944. 4.21  주기철목사 순교    1946. 4.  기독교조선성결교회 제1회 총회    1945. 8.15  일제하에서 해방됨    1945. 9. 1  출옥성도들 교회재건운동 시작, 북한장로교회 재건    1946. 1.17  기독공보 발행(기독교공보의 후신으로 1951년 부산 피난시절 복간됨).    1947. 5. 1  기독교신문 발행(초교파 주간신문 순복음을 주장)    1948. 4.20  기독교박물관설립(한국기독교박물관은 김양선목사가 교회사자료를 수집 개관)    1948. 5.31  대한민국 국회 첫 개회를 기도로 시작함    1948. 6  서울에서 장로회신학교 개교    1951. 1. 9  기독교연합전시비상대책위원회 창립(6.25사변 중에 조직된 국내기독교 연합기관)    1951. 9.18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 개교    1952.12.15  세계적인 전도자 빌리그래함목사 부산과 서울에서 전도집회    1953. 4.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순복음) 창립총회    1953. 5.  한국선명회 창립과 함께 구호사업 개시    1953. 7.28  기독교문화사 설립(기독교 출판기관. 김성준목사)    1953.11.13  기독교어린이문화관 창립(초교파 어린이 문화사업 및 출판 사업기관)    1954.12.15  기독교방송(CBS) 한국 최초의 민간방송으로 방송 개시    1956. 9.15  한국기독교해방10년사 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발행    1956.12.23  극동방송 개국(복음주의 연맹선교회에 의해 개국)    1956. 3.15  기독교문화 발행(기독교 계간잡지)    1957.11. 1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창립    1958. 5.10  한국예수교오순절교회 창립    1958. 9. 1  국방부 군종과 발족    1958. 4.19  그리스도신학대학교 설립(그리스도교회무악기 선교사 체셔를 중심)    1959. 9.24  제44회 장로회총회에서 통합측과 합동측으로 분리됨    1960. 5. 20  기도 발행(세계문서선교회의 한국지부인 한국가정문서선교회의 기관지)    1961. 9. 1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광주시 대신동 이사무엘선교사와 Sarah Barrry선교사 설립    1962. 8.31  기독교근로전도회, 한국 설립(불우한 근로자와 불우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함)    1963. 4.28  금주의 설교 발행(기독교명설교집편찬회에서 편집. 발행)    1963. 4.23  기독교구국연합전도회 창립(기독교연합기구)    1963. 6. 3  기독교오순절협동교회연합회 창립(국내 오순절교단으로 박덕종목사에 의해 창립됨)    1964. 1.21  기독교인권옹호상담소 창립    1965. 1. 4  기독신보 발행(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교단 기관지)    1966. 3. 1  기독교사회윤리위원회 창립(부산기독복음병원 원장 장기려 박사를 중심으로 설립)    1967.  개편찬송가 간행    1968. 2.24  예수교 한국독립교회 연합회 총회 창립    1969. 1.10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회 창립(기독교단체.기독의료인,기독실업인,교역자 주축)    1972. 5.29  군복음화후원회 설립(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영락교회에서 설립)    1975. 8.31  기독교선교에 관한 서울선언 창립    1978. 2.16  기독교서점협의회, 전국 창립(한국기독교서점 연합기구)    1979. 9.15  기성 교단창립 70주년 기념회관인 "성결회관" 준공    1981. 1.29  100주년 기념사업회 규약확정 20개 교단과 연합기관 참가    1981. 4. 9  한국찬송가공회 창립. 한국 개신교 통일찬송가 사업을 위한 교파연합기관.    1983.10.  한국찬송가공회에서 개신교가 함께 사용하는 558곡의 찬송가 발행    1984. 8.15  한국 개신교 백주년 선교대회(여의도 광장에서 예배 드림)    1984. 8.31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 개관    1986.12.10  한국컴퓨터선교회(KCM) 창립    1987. 9.28  제77차 침례교 연차 총회에서 기독교한국침례회 해외선교회 발족    1988. 9. 9  제1회 한국디아스포라 세계대회(서울영락교회)    1988.12.10  국민일보 창간(1일 16면 발행)    1989. 4.28.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설립(원로목사 10여명의 제창으로 창설됨)    1989.10. 8  제1차 의료선교대회(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회) 개최    1991.11.5-8  2000년대를 향한 민족과 세계복음화 회의 개최    1992. 2. 4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 창립    1992. 8.15  92세계성령화대성회 여의도광장에서 개최    1995. 5.15-17  제2차 민족과 세계복음화 회의 개최    1995. 5.17-25  95세계선교대회(GCOWE'95) 기독교21세기운동본부 주최로 서울에서 열림    1996. 8. 5-10  선교한국 '96(한양대학교) 1998.8.3-8 '98(부천 실내체육관)    1997. 5.30  기성 교단창립 90주년기념대회 중앙교회에서 개최하다.    1987. 8.10-13 제1회 기독교사대회를 개최(기독교사단체연합 강원대에서)    1998.12.15  기독교방송 표준 FM 개국(주파수 98.1MHz, 출력 10KW), 21일 대전방송 개국    1999. 5. 5  침례교선교 110주년 축하집회(잠실 올림픽 주 경기장)    1999.10.12  기독교대책위원회 단군상건립 중단요구    1999.11.30  대한성서공회 무역의 날 '수출의 탑'수상(105개언어로 전세계 성경의 20%공급)    1999.12.23-25  영적 각성과 세계선교를 위한 '한국교회비전 큰잔치'(성탄절 기념행사로 열림)    2000. 8.14-18  2000년 세계선교대회 (KWMA주최 서울에서 개최)

 

■ 한국 장로교의 역사박 광 현 목사 한국 장로교회의 시작은 곧 한국 개신교회의 시작과 다름이 없다고 할 것이다. 한국 최초의 장로교인인 서상륜 등은 비록 국외에서이긴 하지만 선교사가 입국을 하기 전에 먼저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쪽복음(한 개의 복음서 내용만 담은 성경책자)을 가지고 복음의 씨를 뿌려 교회의 터전을 닦았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 나라 최초의 장로교인들에 의해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이자 개신교회는 소래(송천・松川)교회가 황해도(1884년)에 세워지게 되었다. 현재 총신대학 양지 캠퍼스에는 소래교회를 복원하여 옛 선조들의 신앙을 본받고 느끼도록 하고 있다. 1884. 9. 22 미국 북장로교에서 의료 선교사 알렌(H.N.Alen)이 입국하여 의료 봉사로 복음 전도의 길을 열고 선교 활동을 한 이후, 1885. 4. 5 부활절에 마침내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H.G.Underwood)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부임 이후 얼마 안되어서 압록강에서 32명에게 세례를 베풀기도 했는데, 이는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이미 이 땅에 신앙을 고백하는 장로교인이 많이 존재했었음을 말해 준다. 초기에 설립된 장로교회들을 보면 소래교회, 서울의 새문안교회, 연동교회, 승동교회, 안동교회, 평양의 장대현교회 등이다. 이후 이들 교회는 크게 부흥하여 인근 지역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1889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소속인 선교사들이 들어와 경남 일대에서 선교 활동을 폈으며, 1892년에는 미국 남장로교 소속의 선교사들이 들어와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했고, 1893년에는 선교사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교회 설립이 본격화되고 교세가 증가하자 모든 장로교 선교사들이 <장로회 선교 공의회-Presbyterian Mission Council>를 조직하여 선교 정책과 활동 방향을 의논하게 되었다. 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교 소속의 선교사들이 들어와 함경도와 간도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폈다. 1901년에 조선인 장로들도 참여하여 <조선 예수교장로회 공의회>로 재조직하였다. 1901. 5. 15에는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설립 개교하였다. 이렇듯 제각기 진출한 4개의 장로교 선교회는 한국 장로교회의 창설을 위해 서로 긴밀한 협력을 위하는 한편, 신학 교육, 문서 사업 등에서 연합을 도모하기로 했다. 이들은 장로교 공의회(Presbyterian Council)를 조직하여 협력 방안을 구체화하다가 마침내 4개의 장로교회가 협동으로 연합 장로교신학교(평양 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장로교회는 초창기로부터 보수주의 신학의 든든한 기초 위에서 성장해 왔다. 유일한 장로교 신학교였던 평양 신학교의 성격은 설립자인 마포 삼열(Marfet Samuel) 박사의 희년 기념 연설 가운데 "나는 사도 바울이 결심하였던 바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이외는 다른 것은 전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는 말속에 잘 드러나고 있다. 1903년부터 일기 시작한 부흥의 기운은 1907년에 그 절정에 달하였는데, 이 놀라운 대부흥의 역사는 장로교회가 그 중심이었다. 그 후 장로교회는 신앙뿐만 아니라 그 세력에 있어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가져오게 된다. 1907. 9. 17에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당시 교세가 노회를 조직할 정도에 이르렀기 때문에 노회를 조직하고 독립된 노회라는 의미에서 <미국 장로회 조선 독노회(獨老會)>라고 불리우게 되었으니 당시 4개의 각기 다른 장로교파가 분할 선교한 조선 장로교회가 하나의 교회로 성립되었던 것이다. 교세는 예배처 984개처, 세례교인 17,890명, 원입교인 21,482명이고 선교사를 포함한 목사 47명, 장로 53명(어떤 자료에는 33명의 각파 장로교 선교사와 36명의 한국인 장로) 이였다. 제1회 창립 노회에서는 서상륜의 동생인 서경조, 한석진, 이기풍, 송린서, 방기창, 길선주, 양전백 등 평양 신학교 제1회 졸업생 7명에게 목사 안수를 하여 최초의 조선인 목사 7명을 배출했는데 그 중 이기풍을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여 조선인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 장로교회를 비롯한 교회들이 탄압을 받았다. 1911년 제 5회 노회에서 총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노회 산하의 각 대리회(시찰회?)를 노회로 조직 편성하기 시작했다. 1911년 10월 8일부터 1912년 2월 15일 사이에 전라노회, 경기 충청노회, 황해노회, 함경노회, 경상노회, 남평안노회, 북평안노회 등 7개 노회가 조직되었다. 7개 중 4개가 북반도 지역에 있으며 특히 평안도에 2개 노회가 조직되었다는 사실은 북장로교가 먼저 들어와 열심히 선교활동을 한 결과이며, 그 중에도 평양 신학교를 중심으로한 평안도의 장로교 교세가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당시에 평양은 조선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 울 정도였다. 한국 기독교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초대 교회 사역자들의 열심, 그리고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과 국가 사회적 배경이 조화를 이루어 급속히 성장한 결과 독노회를 조직 한지 5년만인 1912년에 감격적인 총회의 조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912년 9년 1일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에 전국 7개 노회 총대 목사 96(선교사 44, 한국인 목사 52), 장로 125 계 221명이 모여 <조선 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조직하고 초대 총회장 으로 언더우드 목사를 선출했다. 당시 교세는 교회수 2,054교회, 목사 128명, 장로 225명, 세레교인 53,008명, 교인 총수 127,228명이었다. 첫 총회는 중국 산동성에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등 3명을 선교사로 파송하기도 하였다. 1919년 특별히 억압받는 민족의 고통 속에서 교회의 민족적 의지를 고창한 3.1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장로 교회는 더욱 극심한 박해를 받았으나 이 운동이 있은 뒤에 조선인들이 기독교를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기독교는 더 이상 외래 종교가 아니라 가장 애국적이요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종교로 이해되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1920년대와 30년대는 사경회와 부흥의 물결이 다시 일었다. 요한계시록 강해로 유명한 길선주 목사와 신유의 기사를 행사하며 전국을 순회한 김익두 목사가 이 시기에 활약하였고 해외 선교와 국내 전도활동, 농촌운동 등을 통해 지속적인 성장을 해 왔다. 1924년에는 남선교회 전국 연합회와 청년회 전국 연합회의 전신인 <기독 청년 면려회 조선연합회 >가 창립되었고, 1928년에는 <조선 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신학적인 갈등이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1932년부터 일기 시작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기독교 학교가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한국 장로교회는 처음부터 보수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자라 왔으나, 점차 외국의 새로운 신학 사상과 방법론에 눈뜨고 귀국한 신진 신학자들에 의해 도전 받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하여 평양 신학교의 박형룡 박사는 당시의 교계의 형편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한국 장로교회는 초기 50년 동안 정통 신학교의 고수에 성공하였으나 그 말단에 가서는 자유주의의 잠행적 운동의 침입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다른 교파에서 공공연하게 진행되는 자유신학 운동에 발맞추어 암암리에 정통신학 반대의 행동을 취하는 인사들이 장로교회 안에 생겼던 것이다. 당시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고등비평과 성경의 유오(有誤)를 주장하며,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신성, 십자가 대속, 재림 등을 부인하는 것이다." 1934년에는 조선 예수교장로회 선교 50주년 희년 축하 예배를 거행하였다. 한편에서는 교회 안에서 여러 분파 운동이 나타났다. 이단 사이비도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신학 노선의 갈등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1938. 9. 10 제27회 총회는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여 신사참배하기로 가결하니 진리를 수호하는 주의 신실한 종들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고 평양 장로회 신학교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문을 닫았다. 주기철, 한상동, 주남선 목사 등은 검속되어 평양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다가 주기철목사 등 많은 분들이 순교하였으며 한상동, 주남선목사와 손명복, 조수옥전도사 등은 평양 형무소에서, 손양원목사는 청주 감옥에서 옥고를 치뤘다. 1940. 4. 19 이러한 도전은 총회적으로는 신학적인 대립을 가져오게 되었고 여러 요소들과 함께 교회의 평화를 위협했다. 그 무렵 일제(日帝)의 신사참배 강요로 한국교회는 함께 어려운 시련에 부딪치게 되었는데, 이 문제에 있어서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은 서로 다른 것이었다. 평양 신학교는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자진해서 무기 휴교에 들어간 반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신사참배 문제와 상관없이 서울 승동교회 안에 '조선 신학원'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조선 신학교는 해방 전후로 독무대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일제 말엽에 신사참배를 반대해서 옥에 갇혔던 목사들과 망명 중이던 교회 지도자들은 뜻을 같이하여 보수신학의 보루였던 평양 신학교의 전통을 이어서 보수 신학교를 새로 세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943년에는 성경에서 구약과 요한계시록이 삭제되고 찬송가가 개편되었다. 그 해에 일제의 강압으로 교단명을 <일본 기독교 조선 장로교단>으로 개편되었다. 1945년 7월에는 감리교회를 비롯한 여러 교회와 함께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 으로 통합되었다. 1945. 8. 15 해방을 맞아 출옥하였다.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투옥되었던 한상동 목사를 선두로 하는 경남 지역 인사들이 출옥한 후 신사참배를 한 인사들을 정죄하게 되었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부산을 중심으로 한 인사들이 교단을 분리하여 순수한 개혁주의 보수신학교를 세우기로 하였다. 1946년 고려 신학교가 태동하였다. 1947년 조선 신학교 학생 51명이 김재준 교수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립을 얻은 이후에 장로교 총회를 재건하였으나 해방 이후 한반도는 38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38선 이북의 장로교회들은 공산당의 지배 하에서 박해를 받았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으며 6・25 전쟁으로 월남하는 기독교인들이 늘어났다. 이 때 이북에 있던 적지 않은 교회와 노회도 월남해 왔다. 이를 계기로 오늘날까지 이북 노회라 불리우는 피난한 노회가 존속되고 있다. 1948년 옥중 성도들이 부산의 '고려 신학교'를 중심으로 정식 교단을 창립하였으니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신 총회>가 되었다. 그 후 '고려 신학교'의 교장으로 있던 박형룡 박사는 자유주의의 신학적 도전을 효과적으로 대처하며, 정통 신학을 보수하기 위하여 서울로 상경하여 남산에 '장로회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조선 신학교(1940. 4. 19 개교)가 정규대학으로 인가를 받았다. 1949. 1월에 합동 찬송가를 발행하였다. 1949. 4. 19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모인 제35회 총회에서는 장로회 신학교를 총회 직영 신학교로 인준하였다. 이것은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보수신학의 승리였다. 이처럼 교리적 순수성을 지킨 총회는 WCC(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협의회)와의 유대 관계에 대한 찬반양론으로 다시 한번 분립의 진통을 겪게 된다. 1951. 4. 조선신학교를 한국 신학대학으로 명칭 변경하였다. 1952. 9월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고 있던 때에 <대한 예수교장로회 총노회>를 조직, 분립하여 오늘의 예장 고신측이 되었다. 1953. 6. 10 다시 교파 분열이 시작되어 김재준목사를 비롯한 함경도 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된 조선신학교(한신대학)의 신신학이 문제가 되어 <대한 예수교장로회 호헌총회>를 조직, 분립하였으며 1954년 6월 제 39회 총회에서 <한국 기독교 장로회>가 분립하였다.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열린 WCC대회에 대한 상이한 견해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여기에 속한 선교사들에 대한 수용 찬반의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1959년 전쟁이 끝난 뒤 제44회 총회에서 WCC가 신학적으로 자유주의화 되었기 때문에 탈퇴를 해야 한다는 입장과 그렇지 않다는 상반된 입장이 점점 가시화되면서 총회는 결국 WCC를 지지하는 총회와 반대하는 총회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WCC를 지지하는 자들은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속개하여 ‘통합총회'를 이룩했고, 통합측을 추종하는 교수와 학생들은 신학교를 분립하기에 이르렀다. 1960. 12. 13 신학교 문제와 WCC 반대하는 자들은 승동교회에서 교단의 합동을 위하여 NAE(National Association Evangelism)와의 관련을 끊고 먼저 고신측 교단과 합동(合同)하여 <대한 예수교장로회(합동) 제45회 총회>로 하였다. 기념 사업으로 고신측에서 편집하여 온 새찬송가를 생명의 말씀사에서 발행하여 함께 사용하였다. 1961년 평양신학교의 전신을 지키던 장로회 신학교 교수와 학생들은 총회의 결의에 의하여 고려신학교와 합동하였다. 1961. 6. 21 대한예수교 성경장로회(현 대신측) 창립총회 개최. (발기인 김치선박사, 마두원선교사) 초대 총회장에 김치선 박사 피선. 1963. 9. 17 고신측 7개노회(부산, 경남, 경북, 전라, 진주, 경동) 교회수 445, 목사 116명이 재 분립하여 나가서 제13회 고신총회를 회집하였다. 1965년 지금의 사당동(서울특별시 관악구 사당동 산 31-3번지)에 총회 직영 신학교를 신축하여 이전하게 되었으며, 1967년에는 1959년 통합측의 이탈로 인하여 문교부로부터 학교법인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신학교'(1975년 '총신대학'으로 1995년에는 '총신대학교'로 개명)로 설립인가를 받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장족의 발전을 하여 소위 장자적 총회로서의 명분을 유지하였다. 1975년 총회 내에 교권주의자들의 횡포와 신학적 좌경화(모세모경의 편집설등)의 분위기가 싹트기 시작하였고 이영수목사를 비롯한 몇몇에 의한 교단이 사조직화 되고 교단 신학교는 사유화되어 가는 문제가 확산되자 이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가 일기 시작하였다. 1979년 9월 제45회 총회(대구 동신교회당)는 시작 전부터 총신대학교의 신학적 좌경화와 교권주의의 횡포에 대한 지적이 있어 왔기 때문에 이를 예감한 교권주의자들의 사전 소집과 교회당 정문 및 출입문 완전 봉쇄로 입장하지 못한 채 자파 세력만으로 총회를 진행하여 임원 선거가 끝났다. 이렇게 해서 입장하지 못한 총대들이 개혁의 기치를 들고 <대한 예수교 장로회(보수) 총회>가 탄생하고 방배동에서 총회 신학교를 별도로 운영하게 되었다. 1981년 박윤선박사와 뜻을 같이하는 인사들이 끝까지 합동측에 남아서 개혁운동을 펼쳤으나 교권주의자들의 횡포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분립하여 나와서 합동신학교를 설립하고 <대한 예수교 장로회(개혁) 총회>를 구성하였다. 1983년 대한 예수교 장로회(보수) 총회와 대한 예수교 장로회(개혁) 총회는 신학과 신앙의 동질성을 인정하고 연합하여 새롭게 <대한 예수교 장로회(개혁) 총회>를 구성하였다.

 

 

 

 

 

 

■ 한국교회사 교단분열● 파벌이 교단 분열 초래한국 교회만큼 분열을 계속한 교회는  아마 세계 어느 곳에도  없을 것이다. 최근 문화부가  집계한 바에 의하면, '기독교'의 간판을 내건 교단이 무려 1백 개가 넘는다고 한다. 세계의 교회들이 분열의 시대를 끝내고 연합과 일치를 위해 노력하면서 여러 가지 가시적인 연합의 실례를 이끌어낸 것에 비하면 한국 교회의 이 같은 '분열증후군'은 이제 어떤 방법으로든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와있다.분열은 파벌에서 온다. 한국 교회가 1백년 남짓한 역사 속에서 그토록 많은 분열을 기록했다는 것은 곧 그만큼 많은 수의 파벌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교단 내부에도 여러 갈래의 파벌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 파벌들 사이에 교권과 이권을 둘러싼 갈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갈등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한국 교회 분열의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한국 교회에 파벌이 생겨나고, 이에  따른 분열현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크게 네 가지로 분석해 볼 수 있다.첫째, 선교 초기에 있었던 지역별 분할선교 정책 등으로 인해 노정 된 지방색, 둘째 성장 과정에서 나타나는 교권을 둘러싼 갈등, 셋째 잘못 이식된 근본주의 신학, 넷째 일제  식민치하에서의 상처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역사적 오류 등이 그것이다. 물론  편을 가를  때마다'신학적인 견해차'를 내세우긴 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동안 한국 교회가 거쳐 왔던  분열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이 같은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장로교단에서 가장 먼저 갈라져 나간 교단은 해방 직후 분열된 '고려파'였다. 대부분의 교회가 신사참배를 용인하는 동안 여기에 끝까지 반대해 옥고를 치렀던 부산 경남지역의 교회들이 한상동 송상석 목사를 주축으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교단을 형성 한 것이다.그 이후에는 이른바 '신신학' 논쟁으로 인해 김재준 목사가 중심이 된 '기장측'이 분리돼 또 하나의 장로교단이 탄생한다. 이때 기장의 주축을 이룬 세력들은 대부분 함경도 지역과 호남 지역 출신들로, 신학논쟁의 이면에는 분할선교 정책으로 인한 지역색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예장 기장 고려파의 세 교단  체제가 약 10년 동안 계속된 후, 예장은 또 한번 분열의 홍역을 치르게 된다.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8회 총회는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문제로 논란 끝에 비상정회 한 후, 둘로 갈려 양측이 연동교회와 승동교회에서 따로 총회를 속회함으로써 완전히 두 교단으로  갈라진 것이다. 이때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한 그룹은 한경직 목사를 주축으로 '장로교는 통합해야 한다'는 슬로건을 내세웠다고 해서 '통합측'이라고불리게 됐다. 또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한 그룹은 이전에  갈라진 고려파와 다시 합동했다고 해서 '합동측'이라고 일컬어지게 됐다.예장의 일부와 고려파가 연합해 구성된 합동측은 이후 교권과 지색을 둘러싼 분열을 계속한다. 먼저 갈라져  나갔다가 돌아온 고려파가 고려신학교의 인정문제를 놓고 다시 교단을 이탈,  본래의 고려파로 환원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고신측'이 됐으며, 고신측을 '환원파'라고부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고려신학교 문제 이면에는 고려파의 거두인 한상동 목사가 3년 연속 총회장을  맡는 문제, 다시 말해서 교권문제가 깊이 자리잡고있었다.고려파가 환원한 후 합동측의 교권은 주로 황해도와 평안도 출신과 호남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이 그룹의 거두는 정규오 목사였다. 이 그룹은 고려파 환원 이후 12년 동안 합동측을 지배해 왔다.이 과정에서 소외됐던 중부 영남 출신들은 절치부심 끝에 이영수목사를 중심으로 뭉쳐 드디어 교권 장악에 성공, 무려 17년 동안 합동측의 교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두 그룹의 교권 다툼으로 인해 야기된 사건이 이른바 1979년 64회  총회에서 발생한 합동측  주류 비주류의 분열사건이다.당시 이영수 목사 계열, 즉 중부 영남 세력에 의해 철저하게 교권에서 소외돼 있던 비주류측(황해 평안 호남 계열)은 64회 총회에서 교단탈퇴를 선언하고 정규오 목사를 중심으로 '합동보수'라는 교단을 세운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후 이 '합동보수'는 호남세를 중심으로 한 '개혁측'과 이북 출신과 호남측 일부로 구성된 '합동보수측(현재 홍은동 소재 총회)'으로 양분된다.그후 이 합동 비주류계열은 계속해서 분열을 거듭해 오늘날 80개가 넘는 수많은 장로교단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합동 비주류 계열의 분열은 철저하게 지방색과 교권을 둘러싼 다툼으로 인해 분열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합동측은 1979년 9월 대구에서 열린 제64회 총회에서 정규오 목사를 주축으로 했던 비주류계열측과 분열 이후, 주류계열을 형성했던 이영수 목사가 교단을 이끌어 왔다. 이목사의 독주는 85년 70회 총회까지 계속된다.그러나 17년간 교권을 손에 넣고 교단을 좌지우지했던 이목사는 이 총회에서 모든 공직에서  해임된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 총회였다.이 총회에서는 그동안의 재산유용문제, 총신대 불법운용문제, 지도자 비리문제 등이 긴급동의, 이 동의안 제출로 이영수 목사의 모든 공직 해임과 기독신보의 배태준 사장 해임을 결의했다.이후 합동측은 87년 제72회 총회를 계기로 '교단 정화'의 기치를 내걸고 이영수 목사를  무너뜨리고 교권을 장악한 김현중 목사를 주축으로 한 강경파가 비주류계열인 개혁파에 의해 또다시 무너지면서 극심한 파벌간의 다툼현상을 보여주었다.이렇듯 주류와 비주류로 갈라진 총회는 해마다 서로 교권을 장악하기 위해 총회장을 비롯해 전 임원 선거에 막대한 소모전을 전개한다.비근한 예로 지난 88년 대구서문교회당에서 열린 제73회 총회는, 그 전해에 열린 72회 총회보다도 더 극심하게 개혁파와 강경파간의 주도권 싸움으로 점철됐다. 당시 개혁파의 경우에는 이성헌 목사와 이봉학목사, 한명수 목사와 김동권 목사, 김인득 장로가 주축이 돼 72회 총회에서 장악하지 못한 기독신보사 이사진 개편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켰다. 또 강경파의 경우에는 김현중 목사와 임태덕  목사, 김만규 목사와 서기행 목사, 윤재동 장로 등이 중심이  되어 지난 총회에서 실패한 임원진 구성에 총력을 다했다.73회 총회에서 개혁파가 교단을 장악한 이후 합동총회는 평온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정책교단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교단의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다.● 교권 위한 싸움만 계속한편 원래의 교단으로 환원한 고신측에는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한 부산측과 송상석 목사를 중심으로 한 마산측이 서로 갈등관계에 있었다. 한목사는 명실공히 고려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데에 반해 법리해석과 행정절차에 밝았던 송상석 목사는 교단의 행정적 지도자였으며, 두 사람 휘하에는 제각기 빼어난 후배와 제자들이 포진하고 있었다.이 두 그룹의 갈등이 교단의 분열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한목사 후예들은 '돼지파'로  그리고 송목사 후배들은 '부곡사단'으로 아직까지 교단을 양분하고 있다. 두 그룹이 이 같은 명칭을 갖게 된 데에도 재미있는 뒷 얘기가 있다.한편 두 그룹의 갈등으로 인해 교단의 일부가 송상석 목사를 고소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때 경기노회를 주축으로 한 일부 세력과 이전에 고려파를 탈퇴한 바 있는 이기진 목사 등이 이 고소에 반대하면서, 교단을 탈퇴해 새 교단을 세웠다.이때 탈퇴한 그룹의 우두머리가 바로 석원태  목사였으며, 이 그룹이 오늘날의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측으로 발전했다. 이 교단을 '반고소고려측'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이 같은 '파벌'과 '파벌로 인한 분열'이 장로교단, 혹은 보수를 표방하는 집단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감리교와 성결교, 그리고 침례교 등에도 파벌로 인한 갈등과 진통이 역시 도사리고 있다.이상에서 볼 때 한국 교회 교세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장로교단의 행태는 한국 교회 전체를 좌우했다고 보아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장로교단과  함께 한국 교회 3대 교단 중의  하나인 감리교와 성결교는 어떤가.감리교도 여느 교단과 마찬가지로 미국 감리교에 의해  선교가 시작되었다. 한국 선교 당시 미감리교회는 현재와 같은 하나의 교단이 아니라 남북으로 갈라져 있고 한국 선교도 따로 하게 되었다. 먼저 들어온 북감리교회는 서울을 비롯한 경기 충청지역 등 남쪽에서, 좀 늦게 들어온 남감리교회는 평양 개성 철원 등을 중심해 북쪽으로 선교지역을 나누어 가지고 선교에 임했다. 그러나 1930년 남북 감리교회가 한국 땅에서 역사적으로 합동해 '미국연합감리교회'란 하나 된 교단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이때 미국 연회에 속해 있던 한국감리교회도 미국 교회로부터 독립하여, 조선기독교감리회로 출발하게 되었고 초대 총리사(현재의 감독)로 남감리회에 속해 있던 양주삼 목사가 뽑혔다. 그러니까 세가 단연컸던 북감리교회측인 서울세가 약세였던 남감리교회측 평양세에게  패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에 따라 평양세와 서울세가 그의 재임 8년동안 대립하는 양상에 빠졌으나, 드디어 1939년에는 북감리교회측 이김종우 목사를 앞세워 양주삼 목사를 밀어내고 대권을 잡게 됐다.이렇게 되자 남감리교회측은 평양에 성화신학교를 세우고 힘을 양성하게 됐고 이때부터 감리교의 파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양측은 대단한 대립을 보여왔으나 일제에 의해 국내의 전교파가 해산되고 일제의 작품인 조선기독교회로 단일화되면서 친일과 비친일로 서로다투던 양상은 다른 교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감리교가 파벌싸움으로 유명해지게 된 것은 해방 이후 부흥파와 재건파로 갈라져 싸움을 벌인 데서 비롯한다.부흥파는 일제하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형성된 것으로 선교 초기로 돌아가야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후에 성화파의 모체가 됨). 또 재건파는 해방 직전의 양태를  고수하려는 사람들이 주축이 된 것으로 후에 호헌파의 모체가 되었다.● 계파간 선거전 치열이들 두 파의 싸움은 일제치하에서 입은 피해를 염두에 두고 벌인 싸움인 탓으로 매우 치열했다. 그러다가 6 ,25전쟁이 일어나고 북에서 많은 사람이 월남하면서 부흥파로 집결되어 성화파가 탄생됐다.주로 조선기독교회에서 활동했던 이들로 구성된 재건파가 피난중 충청도세와 천안에서 호헌파를 형성해, 이후로 양파는 피나는 싸움을 벌였고, 이로 인해 교단은 50년부터 58년까지 분열된 상태로 보내다가 다시 합동이 되었다. 비록 합동은 되었으나 양 계파의 골이 얼마나 깊었던지 당시의 감독 선출을 위한 투표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김종필감독이 약 80번, 이환신 감독이 1백14번, 윤창덕 감독이 27번의 투표 끝에 뽑힌 기록을 남겼다.이 같은 양 계파의 싸움과 횡포 속에 소외됐던 이들이 정동파를, 정동파에 대전출신들을 규합하여, 복음동지회를 조직하게 되었고 이 계파는 한때 기세 등등해 감독까지 배출했으나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는 미약한 상태이다.호헌파는 70년대 약관의 김창희 목사가 교단의 상징적 인물인 원로 홍현설 목사를 물리치고 감독에 당선됨으로써 교단이 다시 분열, 합동하는 과정에서 신구계열로 갈라졌다.그 원인은 김창희 목사의 당선에 반발한 마경일 목사 등이 교단갱신의 기치를 내걸고 중앙연회(일명 갱신총회)를 따로 조직해 3년을 보내다가 호헌의 일부와 합의해 교단이 다시 하나가 된 데 있다. 이 와중에서 성화는 쇠퇴일로를 걷다가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다. 또 성화쪽의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었던 갱신도 오래가지 못하고 지금은 사라졌으나 현직 감독 7명 중에 3명 정도가 이 계파  출신이지만 이는 엄격히 말해 학연이 낳은 결과이다.그러면 이 교단의 최근 정치판도를 살펴보면 앞서 언급한 대로 현존하는 계파는 소위  박라인으로 불리우는 호헌 구파와 김 또는 K라인으로 불리우는 호헌 신파가 교단정치의 정상을 놓고 다툼을 벌이고 있는중이다. 복음동지회가 이 틈바구니에 간간이 끼어 드나 명분뿐이고 별영향력은 미치지 못해 한계에 달했다는 여론이다.그러나 최근들어 이들 계파 외에 서울 감신 출신과 대전 목원 출신을 중심으로 한 학연이 급속히  머리를 들고 기세가 확대되는 과정에 있어 앞으로 교단정치의 판도에 커다란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이것은지금의 감독수가 잘 말해주고 있다.한국 땅에서 자생했다고 주장하는 성결교는 60년대 교리해석 문제와 현실참여 문제 등으로 교권싸움을 벌이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와 예수교대한성결교회로 양분되었다.예성은 다시 연합측으로 분열되었으나 지금은 다시 합해져 하나가됐다. 예성은 지금 교단이 별 잡음 없이 조용한 편이고 기성은 원로와 부흥사들로 선이 그어져 있는 상태이지만 심각한 편은 아니다. 다만 지나친 원로정치에 반발하는 유인물이 작년 총회 때  나오기도 해 교단의 정치판도에 변화가 오리라고 조심스럽게 예상하는 사람들도 있다.통합측은 합동측과 분열된 후로 획을 그어 말할 수 있는 확고한 계파는 없다. 다만 영남과 호남, 이북, 서울세로 암암리에  나누어져 교권을 향해 쟁탈전을 전개해 오면서 어느 지역이 어느 지역과 손을 잡느냐가 그때 그때  교권 행방을 결정하곤 했다. 그나마 지금은 4개 지역 5윤번제에 의한 부총회장 선출 방식이 도입돼 지역 내에서만 학연 또는 인맥이 작용하는  정도이며 교단 내 진보 보수 세력이나 젊은층 등은 목소리만 있는 압력단체일 뿐이다.기독교한국침례회의 경우 크게 '대전침신출신'과 '수도침신출신'의 양대 세력들이 제각기 파벌을 형성하여, 갈등을 빚기도 한다. 특히 수도침신 출신들은 교단의 신학교육 정책과 권력배분에서 항상 소외돼왔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으며, 이것이 총회 때마다 논란이 되기도 했다.수도침신파들에 대한 대전침신파의 공격으로 인한 사건 중 가장 커다란 사건은 아마도 '귀신론'으로 이단시비를 일으켰던 김기동 목사의교단 탈퇴 사건이었다.수도침신 출신의 김기동 목사는 침례교에 입성한 뒤 문제의 '귀신론'을 통해 교단 최대의 교회 목회자로 급성장했고, 이에 따라 그에 대한 '이단 시비'도 강화돼 급기야 교단을 떠나 '기독교남침례회'라는새 교단을 세운 것이다.이번 총회를 앞두고 발생한 이른바 '괴문서사건'도 교단  내의 파벌의식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다. '괴문서'를 통해 공격의 대상이 되고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수도침신 출신들이며, 더구나 그들의 명단을 다른 문서에서 떼어내  괴문서에 첨부시켰다는 사실이 조사 과정에서 밝혀졌기 때문이다.기독교운동권 내부에도 파벌은 존재한다. 특히 운동노선이나 이념을 둘러싼 이견이 파벌로 연결되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이것은 80년대 있었던 '운동권의 좌절'과 지난번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운동권의 분열'을 통해 더욱 심화됐다. 특히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두 명의야당 후보를 놓고 겪어야 했던 운동권의 분열은 기독교운동권에도 큰 상처를 남겼으며,  그 상처는 아직까지도 치유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어느 사회든지 견해의 차이와 그 차이로 인한 집단화, 즉 파벌형성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문제는 파벌간의 긴장관계가 건전한 경쟁을 통해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계의 파벌은 그렇지 못하다는 데 있다.따지고 보면 한국 기독교의 파벌 자체가 교회의 갱신과 선교사명 완수라는 발전적인 명제로 인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한국 교회는 파벌간의 교권 다툼과 그로 인한 분열의 악순환을 계속해 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답답한 상황을 어떻게 고쳐 나갈 것인가?중요한 것은 목회자들이 파벌 싸움을 하는 동안 등이 터지는 괴로움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은 일반 교인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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