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론 `페리코레시스`

2011. 5. 6. 00:56신학자료/1.신학자료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론 '페리코레시스'

 

 

남정우 (전 러시아 선교사)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의 특징적인 요소는 '페리코레시스(순환)'를 강조하는 측면과 '필리오케(그리고 아들로부터)를 반대'하는 측면에서 잘 나타난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핵심교리이다. 삼위일체론으로 인하여 기독교는 유대교, 회교와 구별되고, 고대 헬라 종교처럼 여러 신들을 섬기는 다신론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그런데 셋이면서 하나이며, 하나이면서 셋이라는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이 삼위일체론의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대체로 부정적인 용어로, 일반적인 상식과 경험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애매한 용어로 설명된다.

삼위일체론을 설명할 때 자칫 잘못하면 군주신론(君主神論, 사벨리안주의)이나 양태론 혹은 단일신론으로 빠져버린다.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대체로 양태론적 경향을 띄고 있었다. '하나의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로 삼위일체론을 묘사한 아타나시우스 신조(420~∼450년)이래로 아퀴나스, 20세기에는 칼 바르트와 칼 라너라는 신구교의 신학의 거장들이 양태론적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성경적 삼위일체론과는 다른 오류에 빠져있었다.

'삼위' 보다는 '일체'를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러한 모든 오류의 배후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어야 한다는 성경의 계시와는 관계없는 철학적인 대전제가 깔려 있었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일체' 보다는 '삼위'를 좀 더 강조하는 인상을 주는데, 사실은 모두를 균형있게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페리코레시스 개념을 통해서이다.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8세기 다마스커스(Damascus)의 요한이 사용한 이후 동서교회 양쪽에 걸쳐 삼위 하나님의 일체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사용되었다(De Fide Orthodoxa).

이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마치 우리 몸의 피가 각 기관을 순환하듯이, 상호침투를 통한 내주와 순환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여호와 하나님, 예수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각각 독립된 인격의 신들이지만 하나가 되는 것은 이 영원한 신적인 삶의 순환(페리코레시스) 때문이다. '신적인 삶의 순환'이란 '신적인 사랑의 순환' 혹은 '신적인 사랑의 뜨거운 피의 교환'같은 것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한 몸 속에 심장, 간, 폐가 각각 다른 기관이지만 뜨거운 피의 순환으로 서로 의존되어 있고, 하나의 삶을 이루듯이 삼위일체가 그와 같다는 것이다.

이 용어는 사도 요한이 설명하고 있는 성부가 성자 안에 침투해서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침투해서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양태에 대한 성서적 표현(요 14:10∼11, 요 17:20∼23)에 상응하는 용어이다.

이러한 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이 다시 크게 빛을 보게 된 것은 몰트만 덕분이다(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그는 페리코레시스 개념에 기초한 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이 성경적으로 부합한다는 사실을 확언하고 과거 일신론적 경향을 깔고 있는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한편 성경적 삼위일체론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실천적 의미를 설파하였다.

즉 독재적이고 군주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라 삼위이면서 일체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적 코이노니아 개념을 이해하고 배워서 그것을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남 정 우前러시아선교사 / 서울여대교회 목사 <13〉 삼위일체론① '페리코레시스'

'三位'와 '一體' 균형있게 강조

"한 몸 속에 심장과 간, 폐 등이 각각 다른 기관이지만 뜨거운 피의 순환으로 서로 의존되어 있듯이 하나의 삶을 이루는 것"


<사진설명〉 15세기 러시아 이콘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 작품. 창세기 18장에 아브라함을 찾아온 세 천사의 이야기를 근거로 삽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형상화하여 그렸다고 하여 구약의 삼위일체라고 부른다. (http://www.orthodox.or.kr/)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의 특징적인 요소는 '페리코레시스(순환)'를 강조하는 측면과 '필리오케(그리고 아들로부터)를 반대'하는 측면에서 잘 나타난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핵심교리이다. 삼위일체론으로 인하여 기독교는 유대교, 회교와 구별되고, 고대 헬라 종교처럼 여러 신들을 섬기는 다신론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기독교 핵심 교리

그런데 셋이면서 하나이며, 하나이면서 셋이라는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이 삼위일체론의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대체로 부정적인 용어로, 일반적인 상식과 경험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애매한 용어로 설명된다. 삼위일체론을 설명할 때 자칫 잘못하면 군주신론(君主神論, 사벨리안주의)이나 양태론 혹은 단일신론으로 빠져버린다.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대체로 양태론적 경향을 띄고 있었다. '하나의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로 삼위일체론을 묘사한 아타나시우스 신조(420~∼450년)이래로 아퀴나스, 20세기에는 칼 바르트와 칼 라너라는 신구교의 신학의 거장들이 양태론적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성경적 삼위일체론과는 다른 오류에 빠져있었다. '삼위' 보다는 '일체'를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러한 모든 오류의 배후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어야 한다는 성경의 계시와는 관계없는 철학적인 대전제가 깔려 있었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일체' 보다는 '삼위'를 좀 더 강조하는 인상을 주는데, 사실은 모두를 균형있게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페리코레시스 개념을 통해서이다.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8세기 다마스커스(Damascus)의 요한이 사용한 이후 동서교회 양쪽에 걸쳐 삼위 하나님의 일체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사용되었다(De Fide Orthodoxa).

이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마치 우리 몸의 피가 각 기관을 순환하듯이, 상호침투를 통한 내주와 순환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여호와 하나님, 예수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각각 독립된 인격의 신들이지만 하나가 되는 것은 이 영원한 신적인 삶의 순환(페리코레시스) 때문이다. '신적인 삶의 순환'이란 '신적인 사랑의 순환' 혹은 '신적인 사랑의 뜨거운 피의 교환'같은 것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한 몸 속에 심장, 간, 폐가 각각 다른 기관이지만 뜨거운 피의 순환으로 서로 의존되어 있고, 하나의 삶을 이루듯이 삼위일체가 그와 같다는 것이다.

이 용어는 사도 요한이 설명하고 있는 성부가 성자 안에 침투해서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침투해서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양태에 대한 성서적 표현(요 14:10∼11, 요 17:20∼23)에 상응하는 용어이다.

몰트만 "성경에 부합"

이러한 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이 다시 크게 빛을 보게 된 것은 몰트만 덕분이다(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그는 페리코레시스 개념에 기초한 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이 성경적으로 부합한다는 사실을 확언하고 과거 일신론적 경향을 깔고 있는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한편 성경적 삼위일체론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실천적 의미를 설파하였다.

즉 독재적이고 군주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라 삼위이면서 일체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적 코이노니아 개념을 이해하고 배워서 그것을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남 정 우/ 前러시아선교사, 서울여대교회 목사

동방정교회이야기(14) 삼위일체론 2)'필리오케'논쟁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의 두 번째 특징은 '필리오케'를 반대하는 입장 가운데 잘 나타난다. 381년 당시 전세계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여서 함께 만든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는 "성령님은 주님이시고,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분임을 믿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서방 교회가 스페인에 가서는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아들로부터 나오시는"이라고 임의로 "그리고 아들로 부터(filioque)"라는 문구를 삽입하여 신조를 약간 바꾸어버렸다.
"신조 '變改' 안될 말" 이후 9세기 카알 대제, 11세기 초교황 베네딕트 8세에 의하여 계속 필리오케라는 문구를 삽입하여 신앙고백을 하였다. 이에 동방정교회는 계속 항의하였다. 전세계 기독교 지도자들이 기도하고 합의하여 공동으로 만들어 지키기로 한 약속을 임의로 변개하여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그러나 서방교회는 이런 항의를 묵살하였다. 1054년 동,서방교회는 분열하고 말았다.

그러면, 동방정교회가 필리오케를 강하게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요한복음 15장 26절에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나온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영원히 성령을 "내쉰다". '성령은 아들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필리오케를 첨가하면 성령이 아버지로부터도 나오고, 아들로부터도 나온다는 말이 되어 혼돈을 초래한다'는 것이 정교회의 주장이다. 삼위(三位)가 페리코레시스(순환)에 의하여 하나를 이루고 있지만 삼위는 각각 개별적이고 독특한 위치와 사역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성부 하나님은 누구인가? 성자 하나님을 세상에 보내신 분이며 성령을 내쉬는 분이시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다. 성자 역시 성령이 아니다. 성자는 성령을 내쉬지 않는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이시지, 성부 하나님이 아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에 오신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이시지, 성자 하나님이 아니다. 보내신 하나님(성부)과 보냄을 받은 하나님(성자)(요 16:27∼28) 그리고 증거하시고 진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성령)(요 16:4∼14)은 각각 고유한 인격을 가지고 있으며 결코 혼동될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런데 필리오케를 삽입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증거를 혼란에 빠뜨린다고 생각하여 정교회는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면 성령과 성자 예수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성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성자가 성령을 내쉬지는 않는다. 오직 성부만이 성령을 내쉬신다. 그러면 성령과 성자의 관계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관계가 있다. 있다면 과연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부 하나님만이 성령을 직접 내쉬지만 성부 하나님은 또한 성자 하나님의 아버지이시다. 성자 하나님의 아버지!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 성령을 내쉴 때 항상 그 곁에서 함께 하신다. 이런 식으로 정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일체성 보다는 삼위 하나님의 고유성과 개별성을 혼동하지 않도록 하는데 많은 강조점을 두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 (1870) 이후 '필리오케'에 관한 동,서방교회의 논의는 다시 적극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 중에서 1874∼1875년 초대 가톨릭교회(1871년 제1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하여 분리된 천주교회) 신학자들이 독일 본(Bonn)에서 일부 성공회 신학자들, 개신교 신학자들이 동참한 가운데 그동안 서방교회가 필리오케를 삽입해 온 것은 잘못된 일이었으며 삭제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동·서 공동신앙 확인 최근 에큐메니칼 차원에서는 '신앙과 직제 위원회'가 니케야 콘스탄티노플 신조야말로 사도적 신앙의 내용에 대한 성실성과 충성심의 사인이요 표준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필리오케 문제를 두고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1978년 10월과 79년 5월에 두 차례의 신학협의회를 가진 결과 동,서방교회 모두가 'filioque'없이 니케야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다시 고백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1년 제네바에서 개최된 니케야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 1600주년 기념예배에서 니케야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에큐메니칼 공동신앙 혹은 공동의 사도적 신앙의 표현으로써 확정지었다.

남 정 우前러시아선교사 / 서울여대 대학교회 목사

동방정교회이야기/ (15) 삼위일체론-3 협의회적 사귐

삼위(三位)이면서 뜨거운 사랑의 순환(페리코레시스)으로 하나(一體)를 이루고 있는 하나님의 삼위일체론적 삶에 대한 정교회의 증거는 실천적인 차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별히 교회론 부분에서 정교회는 '협의회적 사귐(concilliar fellowship)의 전통'을 통하여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를 성취해 나가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론적 삶의 양식에 그 신학적인 기초를 두고 있다. 즉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삼위이면서 사랑의 순환 안에서 하나를 이루듯이, 이 땅의 교회들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의 양식을 본받아 일치를 이루어 나가야 하는데, 그것이 곧 협의회적 사귐이라고 정교회는 말한다.

로마가톨릭 교회는 교황을 꼭지점으로 교회와 직제의 단일성을 고집해 왔다. 그러나 동방 정교회는 처음부터 각 교회들의 협의회적 사귐을 통하여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교회의 사명과 과제를 성취해 나온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으로 인하여 동방정교회는 누구보다도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현대 세계교회일치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그 중에 뚜렷한 공헌 세 가지를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1919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미국 윌슨 대통령이 국제연맹을 구성하자는 제안을 언급하며, 그에 맞먹는 국제적인 교회연맹(League of Churches)을 구성하자고 세계 여러 교회에 제안하였다. 파시스트들이 국제적으로 연맹을 만들어 전쟁을 일으키고, 그에 대응하기 위하여 세속 국가들이 국제적인 연맹을 만들어 연합과 협력을 도모하는 상황을 보면서, 세계 기독교회가 기독교적인 사랑을 가지고 더 열심히 주도적으로 연합하며 협력하는 일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는데, 이것이 이후 세계교회협의회(WCC)를 형성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세계 교회일치에 공헌 두 번째는 WCC 헌장을 기독론적 고백에서 삼위일체론적으로 바꾸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1948년 암스테르담 WCC의 교리헌장의 첫 문장은 "세계교회협의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교회들의 공동체이다"라고 되어 있었는데, 1961년 뉴델리 WCC는 동방정교회의 제안(삼위일체 하나님)과 성공회의 제안(성서의 가르침을 따라서)을 받아들여 다음과 같이 보완하였다. 즉 "세계교회협의회는 성서의 가르침을 따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고백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한 분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함께 부름받은 사명을 공동으로 완수하려는 교회들의 공동체이다"라고.

세 번째는 협의회적 사귐의 전통을 세계교회 일치의 모델로서 제시하고 있으며, WCC는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예로 스페인 살라망카(Salamanca)에서 모인 '신앙과 직제위원회'에서는 '세계 교회의 하나됨의 개념과 하나됨의 모델'에 관하여 신중하게 토론한 결과, '협의회적 교제'를 가시화 시켜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이 '협의회적 교제'의 신학적인 뿌리는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 속에서 발견되며, 역사적인 뿌리는 정교회의 전통(325-787년) 가운데서 발견되는 것이다.

에큐메니칼 시각 재해석 최근에 와서 이러한 동방정교회의 '협의회적 친교와 사귐'의 전통과 경험을 현대 에큐메니칼적 시각에서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세례와 성찬식을 협의회적 사귐의 기초로 삼으며, 일치의 모델로서 협의회적 사귐을 제시하는 동시에 세계교회일치 운동의 방향이 에큐메니칼적 사귐에서 협의회적 사귐으로(from Ecumenical Fellowship to Conciliar Fellowship)되어야 한다는 정교회의 주장이 더욱 더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성 그리고 세례식과 성찬식을 협의회적 사귐의 기초로 삼고, 지역교회들과 다른 교파 교회들과의 사귐을 통하여 형성해 나가야 할 목표로서 협의회적 사귐을 제시해 온 동방정교회의 제안은 신앙과 삶 그리고 증거적 차원에서의 코이노니아를 통한 교회일치를 추구하는 WCC 회원교회들과 우리 개혁교회의 일치운동을 위하여서도 계속 훌륭한 가이드 역할을 할 것이다.

출처 : 행복충전소 †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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