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동방 서방 교회의 분열

2011. 5. 6. 01:00신학자료/1.신학자료

계산을 잘 못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정확히 2009년이고 천주교의 역사는 1300년입니다 

기독교(개신교)나 천주교나 예수님에게서 나온 종교가 맞습니다 예수님이 뿌리입니다 그런데 처음에 돋아난 기독교 줄기가 700년경에 교황제도가 생기면서 천주교라는 인간중심의 종교로 변질되고 전락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먼저 돋아나게한 기독교의 줄기가 변질되고 병든 줄기가 되어 버리니까 1500년대에 루터나 칼빈이나 존낙스나 즈윙글리와 같은 종교개혁가들을 일으키셔서 개신교라고 하는 새줄기를 탄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신교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는 회귀운동의 결과로 나온  종교이므로 개신교의 역사가 2009년이고 천주교의 역사는 교황제도가 생기면서 인간중심의 종교로 변질된 700년대 부터 생긴 종교로서 그 역사는 1300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화는 성경책과 고대 교회사 역사책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동방정교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독교세계의 현재의 분단을 야기한 분열들은 대략 500년 간격으로 세가지 주된 단계들 속에서 일어났다. 분열에 있어서 첫번째 단계는 오늘날 오리엔트 동방정교회들(the Oriental Orthodox Churches)로 알려진 교회들이 기독교의 주된 몸으로부터 나누어졌을때인 5, 6세기에 일어났다. 이 교회들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즉 동방교회(the Church of the East:주로 오늘날 이란과 이라크에 있고, 종종 '앗시리안', '네스토리안', '칼디안(Chaldean)', '동방 시리안' 교회로 불린다)와 5 개의 비칼세도니안 교회들(자주 '단성론자'라 불린다: 안디옥의 시리아 교회(소위 야곱교회), 인도의 시리아 교회, 이집트의 콥틱교회, 아르메니아와 에디오피아교회) 오늘날 동방교회는(The Church of the East) 비록 한때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550,000만명 정도이다.

 

동방과 서방 기독교세계의 불화

콘스탄티노플의 성스런 지혜의 교회(the Church of the Holy Wisdom)에서 예배가 막 시작되고 있던, 1054년 어느 여름 오후, 추기경 훔베르트와 교황의 두명의 다른 대리인들은 건물안으로 들어가 성소에까지 나아갔다. 그들은 기도하기 위해 오지 않았다. 그들은 출교 교서를 제단위에 올려놓고 한 번 더 행진해 나아갔다. 그가 서쪽문을 통과 했을때, 추기경은 다음과 같은 말과 더불어 그의 발의 먼지를 털었다. '하나님이 보시고 심판하시리라' 한 집사가 큰걱정 속에서 그를 뒤따라 나갔고, 그에게 교서를 가져가도록 간청하였다. 훔베르트는 거절하였다. 그리고 교서는 길거리에 떨어졌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동방 정교회와 서방 라틴교회의 대분열의 시작을 묘사하기 위하여 취해지는 사건이다. 그러나 역사가들이 지금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것처럼, 분열은 사실 그 시작이 정확히 날짜로 정해질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11세기 이전에 시작하여 그후 약간의 시간이 지나도 완성되지 않은, 점차적이며 오래고 복잡한 과정의 결과로써 일어난 사건이엇다.

 

이 오래고 복잡한 과정속에서 많은 다양한 영향들이 작용하였다. 분열은 문화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요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분열의 근본적 원인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것이다. 최종적으로 동방과 서방이 싸운것은 교리의 문제들이었다.-특별히 두가지 문제, 즉 교황의 주장들(Papal Claims)과 필리오케(Filioque)문제들-. 그러나 우리가 이 두가지 주요한 차이들을 좀더 세밀하게 보기 전에, 그리고 우리가 분열의 실제적 과정을 살펴보기 전에, 광범위한 배경에 관하여 이야기 해야한다. 동방과 서방사이에 첫번째 형식적인 분열이 있기 오래 전에, 양측은 서로 서로에게 이방인이 되어 있었다. 기독교 세계의 교제가 어떻게, 왜 깨어졌는가를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는 이러한 점증하는 소외의 사실과 더불어 시작해야만 한다.

 

바울과 다른 사도들이 지중해 세계를 두루 여행했을때, 그들은 밀접한 정치적, 문화적 통일성(로마 제국)속에서 이동하였다. 제국은 종종 그들 자신의 언어와 방언을 가진 많은 다양한 민족적 집단들을 포함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집단들은 동일한 황제에 의해 통치되었다. 제국 전역에 걸쳐 교육받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광범위한 그레코-로마 문명이 있었다. 그리스어와 라틴어는 제국의 거의 모든 장소에서 이해되었고, 다수의 사람들이 이 두언어를 말할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기독교의 선교 사역에 있어서 초대교회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다음 세기들 속에서, 지중해 세계의 통일성은 점차 사라졌다. 정치적 통일이 먼저 사라졌다. 이론적으로는 아직 하나였던 3세기 말부터 제국은 일반적으로 동방과 서방이라는 두부분으로 나뉘였고, 각각 자신들의 황제 아래 있었다. 콘스탄틴은 이태리에 있는 옛로마와 나란히, 동방에 제2의 제국 수도를 세움으로 분열의 과정을 촉진시켰다.

 

그후 5세기 초에 야만인들의 침입이 있었다. 이태리를 제외하고 오래전부터 제국안에 많은 야만인들이 거주하였다. 서방은 야만인 추장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비잔틴인들은 아우구스투스와 트랴얀의 통치 아래있는 로마에 대한 생각들을 결코 잊을수가 없었고, 비잔틴인들은 아직도 그들의 제국을 이론상 우주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저스티니안은 이론과 현실 사이의 간격을 메우고자 진지하게 시도했던 마지막 황제였다. 그리고 서방에서 그의 정복지는 곧 버려졌다. 동방 그리스와 서방 라틴의 정치적 통일은 야만인들의 침입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영구적으로 회복되지 않았다.
6세기 후반과 7세기중에, 동방과 서방은 발칸반도에 있던 아바르족(the Avar)과 슬라브족(the Slav)의 침입으로 서로 더욱더 고립되었다. 하나의 다리로써 이용된 일리리쿰(Illyricum)은 동일한 방식으로 동방과 서방사이의 하나의 장벽이 되었다. 이 단절은 이슬람의 등장에 의해 한 단계 더 높아졌다. 로마인들이 한때 '우리의 바다(mare nostrum)'라 부른 지중해는 이제 대부분 아랍의 지배아래 넘어갔다. 동방과 서방 지중해의 문화적 경제적 접촉은 결코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접촉은 훨씬 더 어렵게 되었다.

 
성상파괴논쟁은 비잔티움과 서방의 분열에 더욱 더 기여하였다. 교황들은 성상옹호론자들의 입장을 지원하였고, 그래서 수십년동안 그들은 성상파괴론자인 황제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와의 교제가 단절되었음을 발견하였다.

 

비잔티움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도움의 요청되는 상황 속에서 교황 스테판은 754년 북쪽으로 관심을 돌려 프랑크족의 통치자인 페핀을 방문하였다. 이것은 교황이 관계된 가장 결정적인 방향 전환에 있어서 첫번째 발걸음을 나타낸다. 지금까지 로마는 다양한 방식으로 비잔틴세계의 일부가 되어왔다. 그러나 이 방향전환의 결과들이 11세기 중반에서야 충분히 나타났지만, 이제 로마는 점차 프랑크족의 영향 아래로 들어갔다.


교황 스테판의 페핀 방문은 반세기후에 보다 극적인 사건으로 이어진다. 800년 성탄절에 교황 레오 3세는 프랑크족의 왕 찰스 대제를 황제로 대관하였다. 샤를마뉴는 비잔틴에 있는 통치자로 부터 인정을 받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아직도 제국 통일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비잔틴인들은 샤를마뉴를 침입자로, 교황의 대관을 제국 분열의 행위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유럽을 가까이 끌어 당기는 대신에, 서방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탄생은 이전보다 더욱더 동방과 서방을 소원하게 만들었다.

문화적 통일은 간신히 연명되었으나, 대부분 약한 형태였다. 동방과 서방에서 학식있는 사람들은 교회가 물려받아 자신의 것으로 만든 고전적 전통안에서 아직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은 점차 다양한 방법으로 이 전통을 방해하기 시작하였다. 상황이 언어의 문제에 의해 더욱 어렵게 되었다. 교육받은 사람들이 2개 국어를 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450년경 서부유럽에서 그리스어를 읽을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600년이후 비잔티움이 아직 로마제국이라 불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의 언어인 라틴어를 말하는 비잔틴인은 드물었다. 9세기 콘스탄티노플의 가장 위대한 학자인 포티우스(Photius)는 라틴어를 읽을수 없었다.

 

그리고 864년 비잔티움에 있는 '로마' 황제 미카엘 3세는 바질이 한때 '야만인 그리고 스키틱(Scythic) 혀'라고 기록한 언어를 부르기 까지 했다. 만약 그리스인들이 라틴어 작품 혹은 vice versa을 읽기 원하거나 라틴인들이 그리스어 작품을 읽기 원한다면, 그들은 단지 번역으로만 읽을수 있었고, 그들은 그렇게 하는데에 어려움이 없었다. 11세기 저명한 그리스 학자인 셀루스(Psellus)는 라틴 문학에 대한 지식이 너무나 개략적이어서 그는 시쎄로(Cicero)와 시이저(Caesar)를 혼돈하였다. 그들은 더이상 동일한 자료들을 사용하지도 동일한 책들을 읽지도 않았기 때문에, 동방 그리스와 서방 라틴은 더욱 더 분리되어 표류하였다.

샤를마뉴 궁정에서의 문화적 부흥이 초기에 강력한 反-그리스적 편견에 의해 특징지어져야 했던것은 불길하지만 의미있는 전례이다. 4세기에 유럽에는 하나의 기독교 문명이 있었다. 13세기에 유럽은 두개의 기독교 문명이 되었다.

 

아마도 문명의 분열이 처음으로 분명히 나타난것은 샤를마뉴의 통치기간이다. 그들 자신을 위하여 비잔틴인들은 그들 자신의 세계라는 사상으로 뭉쳤고, 반쪽인 서방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9세기와 그 다음 세기들에 있어서, 그들은 일반적으로 서방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진지하게 배우는데 실패하였다. 그들은 모든 프랑크족들을 야만인이나 그보다 더 못한 존재로 대충 생각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문화적 요소들은 교회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을수 없었고, 종교적 일치를 유지하는데 어렵게 만들었다. 문화적 정치적 소외는 샤를마뉴의 경우에서 볼수있는 것처럼, 너무 쉽게 교회적 논쟁으로 인도 되었다. 비잔틴 황제에 의해 정치적 영역에서 인정을 받지못함으로, 샤를마뉴는 재빨리 비잔틴 교회를 이단으로 고소함으로 보복하였다. 그는 희랍인들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Creed)(우리가 잠시 좀더 이야기 할)안에 필리오케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그는 제 7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결정들을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샤를마뉴는 단지 그것의 참된 의미를 심하게 왜곡한 잘못된 번역을 통하여 이 결정들을 알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 半-성상파괴론자였던 것처럼 보인다.

    동방과 서방에서 다양한 정치적 상황들이 교회로 하여금 다양한 외적 형태들을 취하도록 하였고, 그결과 사람들은 전투적 방식속에서 교회의 직제(order)를 생각하였다. 처음부터 동방과 서방 사이에 강조점의 차이가 있었다. 동방에서는 그 기초가 사도들에게 기원하는 많은 교회들이 있었다. 동방에는 모든 감독들의 동등성, 교회의 집단적이고 협의회적(Collegial and conciliar) 본질에 대한 강력한 의미가 있었다.

 

동방은 교황을 교회안의 첫번째 감독으로 인정하였으나, 그를 동등한자 가운데 첫 번째(the first among equals)로 보았다. 한편 서방에서는 사도적 근거를 주장하는 유일한 하나의 위대한 교구(로마)만이 있었다. 그 결과 로마는 사도적 교구로써 간주되어졌다.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결정들을 받아들였으나, 서방은 스스로 공의회들에서 매우 활동적인 역할을 수행하지는 않았다. 교회는 대학이라기보다 군주제-교황의 군주권-처럼 보였다.

외관상 이러한 초기의 이탈은 정치적 발전들에 의해 더욱 분명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볼때, 서방에서 야만인들의 침입과 그 결과로 일어난 제국의 붕괴는 서방교회의 자치적 구조를 상당히 강화시켰다. 동방에는 시민질서를 지탱하고, 법률을 집행하는 강력한 세속적 우두머리인 황제가 있었다. 야만인들의 칩입이후, 서방에는 모두 약간은 찬탈자들인 다수의 전사 제후들만이 있었다. 대부분 서유럽의 영적 정치적 삶에 있어서 연속성과 안정성의 요소로써, 일치의 구심점으로써, 행동할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교황권 이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교황은 그의 교회적 추종자들과 더우기 세속통치자들에게 명령을 함으로써 그리스의 총대주교가 할수 없었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서방교회는 점차 동방의 4개의 총대주교좌(아마도 이집트를 제외하고)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은 지위를 얻었다. 서방에서는 군주제(Monarchy), 동방에서는 집단지도체제(Collegiality).

이것은 야만인들의 침입이 교회의 삶에 가져온 유일한 결과는 아니다. 비잔티움에는 신학에 활발한 관심을 갖는 다수의 교육받은 평신도들이 있었다. 평신도 신학자들은 항상 동방정교회에서 받아들여진 인물이 되었다. 몇몇의 가장 박식한 비잔틴 총대주교들은- 예를들면 포티우스- 그들이 총대주교에 임명되기 전에 평신도였다. 그러나 서방에서 암흑기를 통하여 살아남은 유일한 효과적인 교육은 교회에 의해 성직자들에게 제공된 것이다.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글을 읽을수 없었고, 더군다나 신학 논의의 전문용어들을 이해할수 없었기 때문에, 신학은 사제들의 영역이 되었다. 감독들에게 특별한 가르침의 지위를 제공하는 동안, 동방정교회는 중세 서방에서 일어난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이 날카로운 구별을 알지 못하였다.

동방과 서방 기독교 세계 사이의 관계는 또한 공통된 언어의 결핍으로 더 어렵게 되었다. 양측은 더 이상 서로 쉽게 교제할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각자가 더 이상 상대방이 기록한 것을 읽을수 없었기 때문에, 오해는 보다 쉽게 일어났다. 공유할수 있는 논쟁의 영역은 점차적으로 사라졌다.

동방과 서방은 서로에게 이방인이 되어갔고, 양측은 이것을 쉽게 경험하게 되었다.

 

초대교회에서는 신앙안에서 일치와 신학적 학파의 다양성이 있었다. 처음에 그리스인들과 라틴인들은 그들 자신의 방식속에서 각자 기독교적 신비에 접근하였었다. 약간의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릎쓰면, 라틴적 접근은 조금 더 실천적이었고 그리스는 조금 더 사변적이라고 이야기 할수 있다. 라틴적 사고는 법적 사상들, 로마법의 개념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한편 그리스인들은 신학을 예배의 맥락과 거룩한 성만찬의 빛(the light of the Holy Liturgy) 속에서 이해 하였다.

 

삼위일체에 관하여 생각할때, 라틴인들은 신성(Godhead)의 통일성을 가지고 시작하였고, 그리스인들은 위격의 삼위성을 가지고 시작하였다. 십자가 달린 예수에 관하여 생각할때, 라틴인들은 그리스도를 기본적으로 희생자로, 그리스인들은 그리스도를 승리자로 생각하였다. 라틴인들은 구속을,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더 생각하였다. 동방에서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마찬가지로, 이 두 뚜렷한 접근방법들(역자주:동방과 서방)은 스스로 모순되지 않았다. 각자는 서로를 보충하였고, 충만한 가톨릭 전통(the Fulliness of Catholic tradition)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지녔다. 그러나 이제 양측은 서로에게 이방인이 되어갔다. 정치적 통일성은 없었고, 문화적 유대는 적었으며, 공통의 언어를 가지지 못하였다. 양측이 다른 견해속에 있는 가치를 잊어 버리고 고립속에서 자신의 접근방법을 ?아, 끝까지 그것을 고수한 것은 하나의 위험이었다.

우리는 동방과 서방에 있어서의 다양한 교리적 접근들에 관하여 말하였다. 그러나 양측이 더이상 서로 보충하지 못하고, 직접적 투쟁으로 들어간 두가지 교리적 관점-교황의 주장들과 필리오케-이 있었다. 우리가 이전 장에서 언급했던 이 요소들은 그 자체로 기독교 세계의 통일성 위에 심각한 흠집을 내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것 때문에 통일성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이두가지 관점은 어려움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그것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불일치의 충만한 정도가 처음으로 적절하게 공개 된것은 9세기 중반이었으며, 이 두차이는 상당히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방과 서방의 다양한 정치적 상황들을 말할때, 우리는 이미 교황권에 대하여 언급하였다.그리고 우리는 서방교회의 중앙집권화되고 군주적 구조가 야만인들의 침입에 의해 어떻게 강화되었는지 보았다.  교황이 서방에서 유일한 절대적 권력을 주장하는 한, 비잔티움은 반대를 하지 않았다. 교황이 동방에서 방해하지 않는 한, 비잔틴인들은 서방교회가 중앙집권화되든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은 그의 사법관할권에 대한 직접적 권력을 서방 뿐만 아니라 동방에까지 확대할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동방 총대주교좌내에 이 주장을 실행하고자 하자, 싸움이 일어났다. 그리스인들은 교황에게 명예에 있어서 우선권을 인정하였으나, 교황이 그의 직무로써 생각한 보편적 수위권(the unversal supremacy)은 인정하지 않았다. 교황은 무오류성을 그 자신의 특권으로써 보았다. 그리스인들은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최종적 결정은 교황에게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모든 감독들을 대표하는 공의회에 의존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시적 교회 조직의 두가지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


교황권에 대한 동방정교회의 태도는 20세기의 저술가이며 니코메디아의 대주교,니케타스(Nicetas)에 의해 경이롭게 표현되었다.

 

 나의 친애하는 형제여! 우리는 로마교회를 다섯개의 자매 총대주교좌들 가운데 최고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 가장 영예로운 자리에 대한 그녀의 권리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녀가 자랑을 통하여 그녀의 지위에 속하지 않는 군주권을 취하였을때, 그녀는 그녀 자신의 행동에 의해 우리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였다. ..... 우리와 논의하지 않고 심지어 우리의 승인없이 그녀로부터 문서화된 교령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수 있겠는가? 만약 그의 높은 영광의 보좌위에 앉은 로마의 제사장이 우리를 호통치고자 한다면, 소위 높은곳에서 우리에게 그의 명령을 던진다면, 그리고 만약 그가 우리와 대화하지 않고 그 자신의 자의적 즐거움으로 우리를 심판하고 심지어 우리와 우리의 교회를 다스리고자 한다면, 어떤 종류의 형제애, 혹은 어떤 종류의 부성애가 이와 같겠는가? 우리는 이러한 교회의 아들의 아니라 노예가 되어야하고, 로마 교구는 아들의 경건한 어머니가 아니라, 노예의 거칠고 오만한 여주인이다.

 

모든 문제가 개방되어지자, 문제는 동방정교회인들이 12세기에 어떻게 느끼는가였다. 초기의 세기들 속에서 교황권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태도는 아직 논쟁으로 첨예화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동일하였다. 850년까지 로마와 동방은  교황의 주장들에 대하여 개방된 투쟁을 피하였다. 그러나 관점들의 차이는 부분적으로 감추어진것에 대하여 심각하였다.


두번째 커다란어려움은 성령의 출원문제(Filioque) 였다. 그 논쟁은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신조내에서 성령에 관한 언어들을 포함하였다. 근본적으로 그신조는 '나는 성부로부터 나시고 성부와 함께 그리고 성자와 더불어 예배를 받고 함께 영광스럽게 되신 생명의 시여자시며, 주님이신 성령을 믿습니다'고 기록되었다. 이 기본적 형식은 오늘날까지 동방에 의해 변함없이 인용된다. 그러나 서방은 외부적인 절인 '그리고 아들로부터'(라틴어로 Filioque)를 삽입하였다. 그 결과 니케ㅇ-콘스탄티노플신조는 이제 '성부와 성자로부터 출원하신 분'이라고 읽는다.  이 추가가 처음 만들어졌을때와 장소에서는 분명치 않으나, 그것은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한 하나의 안전판으로 스페인에서 기원한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그 이전이 아니라면, 스페인교회는 제3차 톨레도 공의회에서 필리오케를 삽입하였다. 스페인에서부터 그 추가는 프랑스로 퍼졌고, 그이후에는 샤를마뉴에 의해 환영되고 半성상파괴 프랑크푸르트 공의회(794)에서 독일로 퍼졌다. 샤를마뉴의 궁정에서 그리스인들이 원래의 형태대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신조를 재인용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면서,처음으로 필리오케를 논쟁점으로 만든 사람들은 샤를마뉴의 궁정에 있는 작가들이였다. 그러나 전형적인 보수주의와 더불어 로마는 11세기의 초기까지 필리오케 없이 계속적으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사용하였다. 808년 교황 레오 3세는 그 자신이 필리오케는 교리적으로 건전하다고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는 그 신조의 원문을 함부로 고친 것은 실수로 생각한다는 편지를 샤를마뉴에게 보냈다. 레오는 사려깊게 필리오케 없이, 은으로 장식된 판에 새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가졌으며, 성베드로 성당안에 세웠다. 당분간 로마는 프랑크족과 비잔티움의 중재자로 행동하였다.

850년에야 비로소 그리스인들은 필리오케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일단 그들이 그렇게 하자, 그들의 반작용은 매우 비평적이었다. 동방정교회는 두가지 이유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신조에 대한 이러한 추가를 반대하였다.(그리고 지금도 반대한다.) 우선, 그 신조는 전체교회의 공통의 소유이다. 그리고 만약 어떠한 변화든지 그 신조 속에서 이루어 진다면, 이것은 단지 에큐메니칼 공의회에 의해서 이루질수 있다. 동방과 협의없이 신조를 바꿈으로, 서방은 (콤미아코프가 표현한것처럼) 형제살해죄와 교회일치를 반대하는 죄를 범한것이다. 두번째로, 대부분의 동방정교회는 필리오케가 신학적으로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성령은 성부에게서만 출원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성령이 성자에게서도 출원한다고 말하는것을 이단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필리오케는 본질적으로 이단적이지는 않고, 만약 그것이 적절히 이해된다면, 하나의 교리가 아니라 하나의 신학적 견해로  허용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몇몇의 동방정교회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들마저도 필리오케를 아직 권위를 가지지 못한 추가로 생각하였다.

교황권과 필리오케라는 두가지 주요한 문제들 이외에, 동방과 서방사이에 투쟁을 야기하는 교회의 예배와 훈련이라는 보다 낮은 차원의 문제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결혼한 성직자를 인정하였으나, 라틴인들은 제사장적 독신을 주장하였다. 양측은 금식에 대하여 다른 규칙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성만찬에서 발효한 빵을 사용하였고, 라틴인들은 발효하지 않은 빵 혹은 무교병(azymes:유대인들이 유월절에 쓰는 빵)을 사용하였다.

850년경까지 동방과 서방은 아직 서로 충분한 교제가운데 있었고, 하나의 교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문화적이고 정치적 분열들은 점증하는 소외와 결합되었으나, 아직 대분열을 야기하지는 않았다. 양측은 교황권에 대한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형태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인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아직 충분히 분열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1190년 안디옥의 총주교이며교회법의 권위자인 테오도르 발자몬(THeodore Balsamon)이 매우 어렵게 문제들을 바라보았다.

 

여러해동안(그는 얼마나 되었는가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서방교회는 다른 4개의 총주교관구와 영적 교제에 있어서 나누어져 있었고 동방정교회와 소외되어있었다....... 그래서 라틴교회는 자신을 우리로부터 분리하는 교리들과 관습들을 삼가하고, 동방정교회와의 교제속에서 교회법에 따를것을 먼저 선포하지 않는한, 교제는 이루어질수 없다.

발자몬의 눈으로볼때, 교제는 깨어졌다. 동방과 서방사이에 끝없는 분열이 존재하였다. 둘은 더이상 하나의 가시적 교회를 형성할 수 없었다.

소원에서부터 분열로의 변천속에서, 4개의 사건들이 특별히 중요하다. 포티우스와 교황 니콜라스 1세 사이의 싸움(일반적으로 포티우스주의자들의 분열로 알려졌다.:동방은 그것을 니콜라스의 분열로 부르기를 좋아한다), 1009년 Diptychs의 사건, 1053-4년 화해의 시도와 그것의 비참한 결과, 십자군.

 

소원으로부터 분열까지:858-1204

테오도라 아래 성상주의자들의 승리한 후 15년이 지난 858년, 콘스탄티노플의 새로운 총대주교는 동방정교회에 위대한 성 포티우스로 알려진 포티우스가 임명되었다. 그는 '가장 뛰어난 사상가, 가장  두드러진 정치가, 그리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써 직무를 맡는데 가장 노련한 외교가'로 불려진다.

그의 즉위후 곧 그는 교황 니콜라스 1세와 논쟁에 휘말리게 되었다(858-67). 그 이전의 총대주교인 성 이그나티우스는  황제에 의해 추방되었고 추방기간중 강압아래 사임하였다. 이사임을 유효한것으로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이그나티우스의 지지자들은 포티우스를 찬탈자로 생각하였다.포티우스가 교황에게 그의 즉위를 선언하는 편지를 보냈을때, 니콜라스는 포티우스를 인정하기전에 새로운 총대주교와 이그나티우스파 사이의 투쟁을 좀더 조사할것을 결심하였다. 따라서 861년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사절단을 보냈다.

포티우스는 교황과 논쟁을 할 마음이 없었다. 그는 사절단을 커다란 경의를 가지고 대하였고, 이그나티우스와 자신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열린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그들이 사회를 보도록 초청하였다. 사절단들은 동의하였고, 그들은 자신들이 포티우스가 합법적인 총대주교라고 결정한 공의회의 나머지를 함께 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절단이 로마에 돌아왔을때, 니콜라스는 그들이 그들의 권한을 벗어났다고 선언하고, 그들의 결정을 부인하였다. 그후 그는 로마에서 그사건을 스스로 재심리하였다. 863년 그의 주재아래 열린 공의회는 이그나티우스를 총대주교로 인정하였고, 포티우스는 모든 사제적 권위로부터 퇴위된다고 선포하였다. 비잔틴인들은 이 선고에 주목하지 않았고, 교황의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개방된 골이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교회들사이에 존재하였다. 

 
이 논쟁은 명백히 교황의 주장들(Papal Claims)을 수반하였다. 니콜라스는 그의 교구의 특권이라는 고상한 생각을 가진 위대한 개혁적인 교황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미 서방에서 모든 감독들위에 절대적인 권력을 확립하기 위해 많은것을 행하였다.그러나 그는 이 절대적 권력을 동방에까지 확장할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865년의 편지에서 그것을 주장한 것처럼, 그는 '모든 지상 즉 모든 교회 위에' 권위를 부여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정확하게 비잔틴인들이 허락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이었다. 포티우스와 이그나티우스사이의 논쟁을 대면한 니콜라스는 그가 보편적 사법관할권에 대한 그의 주장을 강화할 황금의 기회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양쪽 모두 그의 중재에 복종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포티우스가 교황의 사절단에 의한 조사에 자발적으로 복종하였고, 그의 행동이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인정으로 여겨질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이(다른 이유들 가운데) 니콜라스가 그의 사절단의 결정들을 취소한 이유이다. 그들 자신을 위해서 비잔틴인들은 기꺼이 로마에 호소하기를 허락했으나, 사르디카 공의회(the Coucil of Sardica)의 교회법 3장이라는 특별한 조건들 아래에서만 항복하였다.이 교회법은 만약 유죄 선고 아래 있다면, 그는 로마에 호소할수 있고, 교황은 원인을 살펴보고 재심을 명할수 있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재심은 로마에서 교황자신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유죄 선고 받은 감독의 교구와 인접한 지역의 감독들에 의해 행해진다. 그래서 비잔티움인들은 그의 사절단의 결정들을 바꾸고 로마 자체에서 재심을 주장하는 니콜라스가 이 교회법의 규정을 넘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출처 : josunwha
글쓴이 : paste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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