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정교회이야기

2011. 5. 6. 00:11신학자료/1.신학자료

동방정교회이야기/ (1)정교회도 기독교인가요?

 

남정우 [조회수 : 2]

 


1991년 소련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와 개방 이후 우리에게 본격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동방정교회세계에 대하여 알아본다. 필자가 모스크바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을 때, 한국에서 오신 교회지도자들로부터 "정교회도 기독교입니까?"라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대부분의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동방정교회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도 그럴것이 정교회와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련하면, 붉은 공산주의 이미지가 있어서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의 문화와 역사, 그들의 종교에 대하여 호의적인 태도로 알아보려는 사람들이 아주 적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많이 달라질 것이다. 세월이 갈수록 러시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유고, 체코,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의 동유럽 국가들과 관계가 더욱 깊어질 것이며, 여러 가지 측면에서 교류와 협력을 필요로 할 것이다.

보다 효과적이고 바람직한 교류와 협력을 위해서는 상호이해를 요청한다. 동유럽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교회이해가 필수적이다. 정교회가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민족, 국가, 문화의 발전에 근간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불가리아,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동유럽의 여러 수도를 방문하면, 곳곳에 양파모양의 돔으로 건축된 수 십개, 수 백개의 정교회 성당과 수도원을 보게된다.

정교회는 정통교회의 줄임말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 Church)이다. 이탈리아 로마를 중심으로 하여 지리적으로 동쪽에 있다하여 동방(東方)정교회라 부르기도 하고, 미사예전과 주요 교리서적들이 희랍어로 되어 있다하여 희랍정교회라고도 부른다.

이들은 하나의 기독교회가 1054년 동, 서방교회로 나뉘어지기 이전의 교회전통, 즉 325년 니케야 공의회로부터 789년 제2차 니케야 공의회까지의 7개 고대 에큐메니칼공의회 결정사항과 교회전통을 원형 그대로 보존해온 유일한 교회임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정통교회, 혹은 정교회(正敎會)라고 부른다. 이렇듯 정교회라는 명칭 속에서 정교회가 그 나름대로 역사적 전통과 자부심을 강하게 지니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동방정교회는 로마카톨릭교회 못지 않게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다. 오랜 세월 그리스,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러시아 등지에서 남다른 만남과 역사적 고난과 시련을 겪었다. 동방정교회의 본산지인 콘스탄티노플로부터 9세기 중엽에 예술적 소양이 뛰어난 슬라브민족들에 의하여 수용된 정교회는 이후 이란, 아라크지역의 모슬렘으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았으며, 13-14세기에는 몽고군대로부터, 19세기, 20세기 초에는 프랑스(나폴레옹), 독일(히틀러) 등지로부터 카톨릭, 기독교의 위협을 받았으며, 20세기 초에는 공산주의 통치 하에서 수많은 고난을 당하였다.

이러한 만남과 시련을 겪어온 동방정교회는 로마카톨릭이나 기독교회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발전해왔다. 최근에는 70여년 동안의 공산주의 포로상태에서 벗어나 정교회 부흥을 통한 민족부흥을 도모하려는 움직임이 동유럽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앞으로 우리는 이 지면을 통하여 약 30회에 걸쳐서 동방정교회세계의 여러 가지 측면을 하나하나 자세히 재미있게 살펴보려고 한다.

남정우/ 전 러시아선교사, 서울여대교회 목사

 

입력 : 2002년 04월 06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 (2)정교회 건물과 미사분위기

 

남정우 [조회수 : 1]

 


정교회 건물은 크게 세가지의 뚜렷한 특징을 보인다. 건물 내부가 십자가 모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과 외부 지붕이 둥근 양파모양으로 되었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벽에 프레스코화와 이콘이 수없이 많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은 모두 비잔틴 기독교(330∼1453)의 영향 때문이다. 비잔틴 기독교란, 330년 콘스탄틴 황제가 로마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옮긴 이후 1453년 오스만 터어키 군대에 의하여 멸망할 때까지의 희랍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1천1백여 년의 기독교를 말한다.

지붕이 둥근 양파모양을 한 이유는 건축학상으로는 희랍의 바실리카 건축양식을 이어받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신학적으로는 교회는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왕궁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동방정교회당은 가능한 왕궁처럼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으려고 애쓴다.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을 초라하게 지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건물 내부 공간은 십자가형태로 되었는데, 머리부분에서 성직자가 문을 열고 회중 앞으로 나온다. 신자들은 입구가 있는 발부분을 지나 왼쪽 방으로 간다. 거기에 수없이 많은 이콘들 중에서 자기 세례명에 해당하는 이콘 앞에 가서 기도로 준비한다. 이콘은 기도를 돕는 보조수단이다. 이콘 앞에 가서 초를 켜고, 그 이콘을 보면서 기도를 드린다. 중앙으로 이동하여 성직자의 축복을 받는다. 다음 오른쪽 방으로 이동하여 성찬을 받는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정교회 신자들이 경건하게 미사드리는 모습이다.

성당 안에는 3가지가 없다. 의자가 없고, 바지입은 여성이 없고, 악기가 없다. 노약자를 위한 의자가 구석에 있는 경우도 있지만, 원칙적으로는 모두 서서 미사를 드린다.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 앞에서 경배하는데, 앉아서 드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은 모두 면사포 같은 것을 머리에 쓰고서 치마를 입고 미사를 드린다.

정교회는 여자 성직자를 허락하지 않는다. 12사도 가운데 여자가 없었기 때문이며,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가를 부를 때,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목소리가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통 성당 2층 뒷자리에 4∼5명, 혹은 8∼12명 정도의 남녀성가대원이 아카펠라로 노래하는데, 매우 아름답다.

정교회당의 내부 분위기는 약간 어둡고 신비로우며 경건하다. 사람의 목소리는 성무일과표를 낭송하는 성직자의 구성진 목소리와 성가대 이외에 거의 들리지 않는다. 정교회 신자들은 모두 위엄과 권위를 가진 왕을 경배하듯이, 조용조용 숨을 죽이며 성호를 긋고, 손을 모아 기도를 드린다. 초가 타는 냄새와 향이 교회당을 가득 채우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벽과 천장에 있는 수많은 성화들 속에서 성인들이 걸어나와서 거기에 서있는 정교회 신자들을 인도하여 그리스도가 달리신 골고다 언덕을 지나 영원한 낙원으로 인도하는 듯한 느낌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정교회당 분위기는 신앙적 감성을 자극하여 거룩한 느낌과 직관을 살아있게 하고, 신비의 하나님을 경험케 하려는 의도로 구성되어 있다.

남정우/ 전 러시아선교사

 

입력 : 2002년 04월 13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 (3)“동방정교회는 정통이다"①

 

남정우 [조회수 : 1]

 


동방정교회가 스스로 정통교회라고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 중에 하나는 동방정교회가 기독교가 1054년 분열되기 이전의 기독교 전통을 가장 온전하게 보존해왔다는 점이다.

현재 지구상의 인구 약 62억 가운데서 기독교인구는 20억 5천여만 명으로 추정한다. 전세계인구의 33.1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신봉하고 있다.

교인 2억1천만여 명 이들을 크게 세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보면 로마가톨릭교회 종교개혁교회 그리고 동방정교회 등 세 개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서 동방정교회 인구가 2억1천7백만 명, 로마가톨릭이 10억8천만여 명 그리고 기독교(종교개혁교회)가 약 8억4천여만 명으로 추산된다.(IBMR, 2002년 1월)

그러나 처음 기독교회가 시작될 때 정확히 말해서 주후 29년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기독교회 창립멤버는 1백20명에 불과했다. 당시 이스라엘을 포함한 지중해 연안 세계를 지배하던 나라는 로마제국이었으며 당시 세계인구는 1억을 넘지 않았다.

이미 로마제국 안에는 수 만, 수 십 만의 신자를 확보한 수많은 종교들이 있었다.

주후 1세기와 2세기에 기독교 선교의 상황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다.

로마제국의 속국 그것도 아주 작은 나라 유대나라에서 고집스러운 유대교의 한 분파처럼 보이는 신흥종교 기독교에 대하여 호의적인 관심을 가지는 로마시민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기독교는 로마세계의 극악범들을 처형하는 사형틀 십자가를 항상 앞세우고 그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영 꺼림칙하였다.

그리고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눈다고 하는 성찬식은 마치 카니발리즘(인육제사)을 연상케 하였고, 모든 로마제국 시민들이 다 하는 황제숭배를 거부하자 로마제국은 초대 기독교인들에게 엄청난 박해를 가하였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른 종교가 줄 수 없는 사죄의 확신과 부활신앙에 근거한 소망과 위로를 주었으며 초대 기독교인들의 순결한 도덕생활과 겸손과 형제우애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충성심으로 인하여 3백여 년이 지났을 때 로마제국 전역에 기독교신앙이 전파되었다. 로마제국의 왕족과 귀족 군인들 가운데에도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4세기 초 콘스탄틴 황제가 드디어 기독교를 공인하고 기독교가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자 기독교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동안 지하종교로 숨을 죽이며 숨어 지내던 기독교인들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황제들의 동상들이 파괴되고 제거되고 법령이 개정되었으며, 동시에 교회조직을 로마제국의 행정조직에 맞추어 체계화하였다.

읍 군 시 대도시 수도… 등 행정조직을 고려하여 교구제도(parish)를 도입하고 성직자들의 질서(계급)를 만들어갔다.

이러한 조직화 작업은 1백 년 이상 계속되다가 서기 325년 니케야 공의회가 열릴 즈음에는 5대 총대주교구가 확립되었다.

로마제국의 가장 대표적인 대도시이자 기독교의 역사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로마(이탈리아) 콘스탄티노플(터어키) 알렉산드리아(이집트) 안디옥(시리아) 예루살렘(이스라엘) 총대주교구가 5대관구로 정하여졌다.

'총대주교구 갈등'이 원인 이 다섯 개 총대주교구는 부모 자식처럼 상하의 관계가 아니라 형제들과 같은 동등한 관계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로마가 아버지 노릇을 하며 최상위권(Superemacy)을 주장하면서 5명의 총대주교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결국 로마 총대주교구는 1054년 분리되어 나가버렸다.

남은 4개의 총대주교구들은 이른바 동방정교회라고 불리우고 분리되어 나간 로마는 로마가톨릭 혹은 서방교회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남 정 우/ 前 러시아선교사·서울여대 교회 목사

 

입력 : 2002년 04월 20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 (4)"동방정교회는 정통이다" 2

 

남정우 [조회수 : 2]

 


3백여 년의 고난과 핍박을 성공적으로 인내해 온 기독교는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 이후, 로마 제국의 행정조직에 따라서 제도화되고 교구별로 조직화돼, 1054년 대분열 이전까지 5개의 총대주교구로 조직되었다. 기독교의 교리문제나 선교문제에 중요한 의논이 필요하거나 협력이 필요한 경우에 의제와 일정과 장소를 정하여 공의회를 소집하였고, 5개의 총대주교구에서는 공의회에 참석할 대표자들을 선임하여 파송하고 함께 기도하고 의논하고 결정하도록 하였다.

"동등한 형제" 논란 그리고 회의 결과를 자기 총대주교구에 알려서 공동 결의안을 가르치고 함께 지켜나가도록 하였다. 이러한 풍습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공의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아름다운 전통이었다. 이러한 전통을 마치 5형제가 함께 모여 의논하는 모습과 같다하여 협의회적 사귐(Conciliar Fellowship)이라고 하는데, 동방정교회는 이 전통을 매우 소중하게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러한 전통 가운데서 니케야공의회 칼세돈공의회 등이 열렸고 그러한 공의회의 결정으로 인하여 기독교는 교리적으로 선교적으로 보다 분명하고 일치된 입장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총대주교구 서열과 관련하여 논란이 있었다. 그것은 누구를 맨처음에 두느냐의 문제로, 5명의 총대주교들 간의 관계성에 대한 논란이었다. 이 문제는 451년 칼케돈공의회에서 확정되었다. 총대주교들은 모두 동등하며 로마 총대주교구가 단지 대표성을 지니는 것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로마 총대교구는 베드로 수위성(首位性)을 내세워 아버지를 대신하는 맏형 노릇을 하려고 할 뿐 아니라 감독권까지 행사하려고 하였다.

다른 총대주교들은 인정할 수 없었다. 우리는 동등한 형제들이며 아버지의 뜻을 잘 분별하여 함께 받드는 것이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이며, 예우 상 로마가 대표성을 지닌 것으로 못박았다(primus inter pares).

그러나 로마는 끊임없이 최상권(Superemacy)를 주장하였다. 최초의 갈등은 381년 니케야 콘스탄티노플에서 결의한 내용 가운데 성령의 출처에 관한 표현을 마음대로 로마가 바꾸어버린 일이었다. 공의회 결정문에 없는 "필리오케(그리고 아들로부터)"라는 라틴어 단어를 마음대로 삽입하여 로마 총대주교 관할 교회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약속 위반이었으며, 로마의 횡포였다. 신학적으로 다른 이견이 있거나 수정할 부분이 있다면, 다음 공의회에서 함께 토론하여 결정하는 것이 옳은 자세였다. 로마는 이후 군사력 경제력 정치력이 증가함에 따라서 점점 교만해졌으며 공의회의 결정을 무시하는 일들을 자주 행하였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터어키 군대에 포위를 당하여 악전고투하고 있을 때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로마총대주교청에 사신을 보내어 형제 총대교구를 군사적으로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로마는 추기경을 보내어 로마의 단순한 대표성이 아니라 최상권을 인정해 주면 지원을 고려할 수 있겠노라는 교만한 자세를 고집하였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며,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거절당한 콘스탄티노플은 1100년의 기독교 영광을 오스만 터어키 모슬렘에게 내어주었다. 지금 이스탄불에는 기독교의 모습이 거의 사라지고 마치 거세당한 모습으로 초라하게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4세기부터 확립된 '협의회적 사귐'의 전통을 소중하게 여기며, 자랑스럽게 여긴다. 어려운 문제나 중요한 문제가 있으면 효성이 지극하고 의좋은 형제들처럼 함께 모여 기도하고 의논하여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최선의 길을 찾는 협의회적 전통을 간직한 교회라고 자부한다. 정교회의 이러한 전통이 최근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소중한 것으로 평가되어 여러 측면에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민주성·구심점 모두 확보 로마가톨릭은 로마 교황청을 단일 꼭지점으로 하는 계층적 질서를 고집하고, 기독교(개신교)는 성경을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의 유일한 진리로 여긴다. 따라서 가톨릭은 민주성이 약하고 기독교는 성경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조정하고 지도할 구심력이 약하다. 동방정교회 전통은 그러한 약점들을 모두 보완해 주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21세기 세계 교회는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이루는데, 동방정교회의 회의방식과 협의방식이 가장 효과적이며 민주적이며 동시에 교회사적인 근거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정교회의 협의회적 전승이 재발견되고 있다.

남정우/ 전 러시아선교사/ 목사서울여대 교회·

 

입력 : 2002년 04월 27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 (5)성화상(이콘)이야기

 

남정우 [조회수 : 1]

 


정교회당 안에 들어가 보면 벽에 수많은 이콘(Icon)이 그려져 있거나 붙어있다. 정교회 수도원이나 신실한 정교회 신자의 집에도 이콘이 있다. 이콘은 정교회의 신앙생활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콘은 성화상(聖畵像)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정교회는 마리아상(像), 베드로상(像)과 같은 조각품도 아울러 사용하는 천주교와는 달리 이콘만 사용한다. 입체로 된 조각품은 우상으로 간주하여 금하고, 벽이나 나무판이나 동판에 평면으로 그린 성화는 신앙생활에 사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콘의 제작과 사용이 우상숭배가 아니냐'는 질문이 오래 전부터 교회 안에서 제기되었다. 그러나 주후 787년 제7차 고대 에큐메니칼공의회에서 이콘 제작, 사용은 합법적이라고 결의하였다. 그 신학적인 주요 근거는 "하나님의 성육신으로서의 그리스도 이콘" 신앙고백이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형상(이콘)으로 나타나셨는데,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 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교회도 이콘을 제작하여 존숭(尊崇)하는 것은 합당하고 판단을 한 것이다.

이런 판결이 내려지기까지는 수 백년 동안 이콘 반대주의자들(iconoclasts)의 거센 항의가 있어왔다. 그러나 제7차 공의회에서 결국 이콘숭배자들(iconophiles)의 입장이 옳다고 판결을 내림으로써, 이콘 숭배가 교회법적으로 합법적인 행위가 되었다.

동방정교회는 이 판결이 "이교도를 이긴 정교회 신앙의 승리"라고 해석하고, 매년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을 축일로 기념해 오고 있다. 매년 이 날이 되면 옛날 신앙의 선배들이 성상파괴주의자들과 이교도들과 이단들의 공격에 용감하게 대항하여 순교의 피를 흘리며 싸워 이겨서 이런 승리를 얻게 되었으며 정교회 신앙을 지켰다고 가르친다.

전설에 의하면 최초의 이콘 화가는 누가였다고 한다. 오늘날 러시아 불가리아 그리이스에는 정교회 신학교 안에 이콘학과가 따로 있다. 거기서 이콘의 신학과 이콘의 역사, 이콘 그리는 기술 등을 배운다.

이콘의 종류는 수 천 가지가 넘는다. 그러나 이콘의 주된 내용은 주로 △그리스도 이콘 △성모 마리아 이콘 △성인들의 이콘 △천사들의 이콘이다. 대체로 정교회 성당 정면 중앙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콘이 있고 그 좌우에는 세례 요한과 성모 마리아의 이콘이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아담으로부터 모세 선지자들의 이콘이 위로부터 아래로 층층이 있고 예수 이콘 아래에는 사도와 속사도 교부들 성인들의 순서로 이콘이 위치한다. 그 외에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이야기들 성인들의 전설과 행적을 그림으로 묘사한 이콘들이 벽 천장에 붙어있다.

역사적으로 주후 1, 2세기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등지의 교회 유적에서는 이콘이 나타나지 않는다. 십자가 물고기 형태 등의 단순한 기독교 상징물들만 나타난다. 4∼6세기에 비잔틴 황제들이 세운 교회유적들 가운데 모자이크 형태의 이콘들이 발견된다. 모자이크 이콘은 고대 그리스의 대리석 건축 예술문화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문화이다.

그러나 726년에 시작된 우상타파 시대에 하기야소피아를 비롯한 제국 내 모든 교회의 성화 모자이크들이 파괴되고 대신에 단순한 십자가 형상이 그려졌다. 843년에 우상타파의 시대가 끝나고 종교적인 성화들이 다시 그려지게 되었고, 하기야소피아 대성당 내부는 황제의 명령에 의해 프레스코화(벽화)와 모자이크 이콘으로 다시 장식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보는 이콘, 오래된 나무판 위에 그려진 성모 마리아 이콘 같은 것은 9세기 불가리아에서 그리고 11세기 이후 러시아에서 발전한 것이다. 벽에다 그리는 프레스코화나 모자이크와는 달리 나무판에다 이콘을 그리기 시작한 이유는 전쟁이나 화재와 같은 재난이 발생했을 경우 쉽게 옮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콘은 초대기독교의 전승이 아니라 동로마제국의 문화적 영향을 받은 동방정교회의 독특한 기독교문화이다.

남정우/ 전러시아선교사, 서울여대교회 목사

 

입력 : 2002년 05월 04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 (6) 성화상(이콘)이야기 2

 

남정우 [조회수 : 3]

 


성화상(聖畵像)이라고 번역되는 정교회의 이콘은 단순한 기독교 이미지가 아니다. 교회 장식 미술품도, 성경을 설명하는 삽화도 아니다. 약간의 그런 의미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콘은 그 보다 더 크고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콘은 정교회 신자들의 경배의 대상이며 예배의식 가운데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이콘은 정교회 신앙을 표현하는 주요 매체이다. 이콘은 성경의 가르침에 부응하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서 만들어져서 교회전승 가운데서 보존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보이는 말씀'

그래서 교회 안에는 두 종류의 말씀이 있는데 들리는 말씀과 보이는 말씀이 있다고 본다. 들리는 말씀은 성경을 읽는 소리에 의하여, 보이는 말씀은 말없이 말씀하시는 이콘에 의하여 교회 안에 충만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정교회는 아주 작은 규모의 예배의식 가운데에서도 이콘을 사용한다. 정교회 공동체 활동에서 이콘이 빠지는 경우는 없다. 이콘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느끼는 통로인 동시에 예배의식을 구성하는 주요 부분이며 정교회 신앙고백의 내용이 내포된 거룩한 이미지이다. 그러므로 이콘의 의미 내용은 정교회 안에서 정교회 신자들의 삶 속에서 그 깊은 의미가 드러난다.

정교회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콘의 역할은 주로 기도를 돕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는 인간적인 흥분 감정이 없어야 하고 외적인 세상 일들에 대하여서는 귀먹은 상태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룩한 것을 거룩한 스타일로 생각해야 한다. 현란하고 감정적이고 색으로 충만한 저속적인 방식으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인간의 오감에 기초한 현란하고 무질서한 이미지들을 사용하면 그것을 보는 사람의 순수한 마음도 무질서해지고 현란해질 것이다. 그래서 정교회 신자들은 이콘을 보며 기도를 드린다. 참다운 기도 영적인 기도를 하도록 가이드 역할을 해주는 역할을 이콘이 한다고 생각한다.

일반 신도들의 경우 부모님 기일이나 아들의 입대 자녀의 출산 등을 앞두고 기도할 일이 있으면 성당을 찾아가서 교회 입구에 마련된 상점에서 초를 구입한다. 정교회 예배시간에 헌금시간이 따로 없다. 십일조 드리는 사람도 거의 없다. 대신 초를 구입하는 것이 그 교회 헌금의 일부가 된다. 그런데 간절히 기도할 것 같으면 굵은 초를 여러 개 구입한다.

중요한 교회 절기 때나 전몰자 추모일이 같은 민족적인 기일이 있는 날에 정교회 성당 안에 들어가 보면 수많은 초가 타는 냄새로 가득하여 질식할 것 같다. 어떤 경우에는 촛대가 넘어져서 화재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성당을 출입한 신자들은 그 냄새가 거룩하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아니지만 신도들은 초가 불타고 있는 동안 자신의 기도가 하늘로 올라간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세례명에 해당되는 이콘을 찾아서 그 앞에 초를 밝히고 성호를 긋고 이콘을 조용히 오래 보고 있으면 현란하고 감정적인 인간의 마음, 세상적인 마음이 사라지고 영원하고 거룩한 영적인 세계로 마음이 인도된다. 이때 자신의 소원을 빈다.

'보이는 기도'

이렇게 이콘은 메타노이아(회개-마음을 돌이킴, 세속적인 것에서 거룩하고 영적인 세계로)를 이루도록 도와주는 주요 매체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콘은 기독교 신앙생활의 하나의 수단이요 따라야 할 하나의 모범적인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콘은 하나의 보이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이콘의 본래적인 목적은 인간의 자연적인 감성을 자극하거나 영광스럽게 하는데 있지 않다. 이콘은 인간의 감성적인 감동을 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반대로 우리의 지·정·의를 변모시키는데 그 주요 의도가 있다. 그래서 이콘에 그려진 사람들의 얼굴표정과 피부색깔 자연의 색과 주변 배경 등이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현실의 색깔과 모습과는 다르다. 그것은 이콘은 종말에 죄를 벗어버리고 예수 재림 시 영화롭게 변모된 거룩하신 성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그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남정우/ 전러시아선교사·서울여대교회 목사

 

입력 : 2002년 05월 11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 (7)성화상(이콘)이야기 ③

 

남정우 [조회수 : 3]

 


기독교 신앙의 실재를 표현하는 방식은 여러가지이다. 그것이 설교일 수도 혹은 미술 작품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음악일 수도 있다.

실제로 기독교 신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하고 다양한 표현들을 통하여 신앙을 전승시켜 왔다. 그런데 신앙을 표현하고 전승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시대와 장소 그리고 민족적인 특성에 의하여 그 선호하는 표현이 달랐다. 다르게 표현되고 다르게 전승되어온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상숭배 우려"
정교회 신자들은 이콘 앞에서 항상 기도한다. 기도생활에 이콘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콘은 정교회 신자들로 하여금 바르게 기도하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콘 없이도 기도할 수 있고 어디서나(이콘 있는 곳이나 없는 곳이나)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육체 가운데 거하는 우리의 영혼은 자칫 잘못하면 기도를 하면서도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경우가 허다히 많으며 어떤 경우에는 올바르게 기도하는 것 조차도 모르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이콘은 기도의 가이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콘을 대하는 동방정교회 성도들의 태도는 각별하다. 동방정교회 성도들은 주로 이콘을 통하여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고, 신앙을 전승해 왔다. 이콘을 대하는 정교회 신자들의 태도는 거의 숭배수준이다. 현실적으로 적절한 성경교육을 받지 않은 정교회 신자들 사이에서 이콘은 단순히 기도를 돕는 하나의 거룩한 매체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많은 경우 이콘이 부적이나 집안 가보처럼 여겨지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 신자들의 경우 이콘을 집 안에 둘 경우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 창문가에 둔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그 이콘을 바라보며 성호를 긋고 입을 맞추기도 한다. 그 앞에 촛불을 켜서 마치 제단같이 꾸미기도 한다. 멀리 여행을 떠나거나 전쟁터에 나갈 때 혹은 환자를 위문할 때에도 작은 이콘을 가지고 간다.

성경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콘에 대한 경의는 우상숭배에 빠질 위험성을 다분히 지니고 있다. 그리고 민족 시대 화가에 따라서 이콘의 모양과 색깔과 스타일이 천차만별이며, 그 중에는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는 이콘도 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콘 숭배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대하였다(기독교강요 1권 11장).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어떠한 회화적 표현도(every pictorical representation)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 주된 이유는 그것은 인간이 자기 멋대로 하나님에 대해 꾸며대는 것이기 때문이며, 두 번째로는 그 어떤 형상을 사용하든 곧바로 우상숭배로 빠지게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인간 예술의 기능과 한계를 알았기 때문이다.
현대사회 관심 증가
예술의 재능은 하나님의 축복이며 은사이다. 올바로 이용하면 인간의 행복과 하나님의 영광에 증진시킬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묘사하는데 사용하면 문제가 된다고 보았다. 그 이유는 다소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지 않고서는 그러한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술의 한계성 때문이다.

오늘날 이콘은 정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설교가 강조되고 18세기 이후 계몽주의 과학주의의 세상을 경험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신비적인 측면과 거룩성과 영원성이 많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 세계는 거룩한 상징과 거룩한 이미지들을 필요로 하고 있고 찾고 있다. 이와 맞물려 이콘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 한 예로 헨리 나우웬이 쓴 이콘과 더불어 기도하기라는 부제를 지닌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우러러'라는 책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남 정 우前러시아선교사·서울여대교회 목사

 

입력 : 2002년 05월 18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 (8)성화상(이콘)이야기 4

 

기독공보 [조회수 : 3]

 


테이블 한가운데 잔을 두고 세분의 천사가 엄숙하게 앉아있는 모습으로 표현된 이 `삼위일체 성화상(聖畵像)'은 러시아 정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이 성화상은 안드레이 루블료프(1430년 사망 추정)가 그린 것이다. 안드레이는 러시아가 몽고의 지배를 받고있던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 많은 기도와 고행으로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당시 모스크바 근교에서 엄격한 수도생활을 하고 있던 세르기이 라도니쉬끼이의 정신적인 감화를 많이 받았다. 사실 삼위일체 성화상을 그리게 된 주요 동기도 세르기이를 존경하는 마음과 당시 여러 귀족들에 의하여 분열되어 있던 러시아의 단합과 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대표적 삼위일체 이콘 개신교 신자의 입장에서는 성화상에 대하여 신학적인 문제는 차지하고서라도 우선 정서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점들이 많이 있다. 특별히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일에 대하여서는 처음부터 거부반응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화상을 그리는 화가들 사이에서는 비잔틴제국 시대부터 창세기 18∼19장에 나와있는 바, 세 천사 모습으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모습을 소재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동방정교회 이콘화가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주제로 한 수많은 성화를 그렸다. 이런 성화를 구약성경 창세기를 소재로 그렸다하여 흔히 `구약의 삼위일체'라고 흔히 말한다. 수많은 삼위일체 성화들 중에서 러시아의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그린 삼위일체 성화상이 예술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가장 훌륭한 삼위일체 성화상으로 간주된다.

이 성화상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1960년 유네스코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 있다. 유네스코는 1960년도를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해'로 전세계에 공표하였다. 그러자 당시 소련의 서기장이던 스탈린은 세계 여론을 의식하여 공산혁명 이후 국가에 몰수되어 감옥 및 기숙사로 사용되고 있던 모스크바의 안드레이 수도원을 급하게 수리하여 안드레이 박물관으로 만들어서 외국 관광객들을 유치하였는데, 최근에는 다시 수도원으로 복원되었다.

이 성화상의 내용을 보면, 왼쪽에 성부 하나님이 있고 그의 머리 위에는 건축물이 있다. 그것은 창조주의 사역을 뜻한다. 중앙에는 성자 하나님이 있고 그의 머리 위에는 소나무 같은 나무가 있다. 그것은 생명과 나무 십자가를 뜻한다. 오른쪽에는 성령 하나님이 있고 그의 머리 위에는 가파른 산이 있다. 그것은 영적인 생활을 의미한다.

구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여러 개의 역삼각형 구도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이 성화상의 주제가 `화합과 통일'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성화상은 다양성과 통일성의 모델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실제로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이 성화상의 정신을 따라서 당시 몽고의 지배 밑에서도 여러갈래로 분열되어 있던 러시아의 상황을 안타까이 여긴 나머지, 러시아 민족이 다양성 통한 통일성과 조화를 이루어 평화를 이룩하자는 메세지를 전할 마음을 가지고 이 성화상을 그렸다고 한다.

'삼위일체론적 삶’ 강조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과 예배를 강조해 오고 있는 개신교회는 최근에 들어와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신학과 예배를 강조하는 움직임으로 변하고 있다(참고:몰트만). 동방 정교회와 로마카톨릭교회와 개신교회 간의 조화와 일치, 자연과 인간과 하나님과의 조화, 그리고 백인과 황인과 흑인 간 인종적 조화와 일치와 사랑을 추구하는 인류 공동의 과제에 대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학이 제시하는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의미가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절대적이고 완전한 사랑(아가페) 안에서 하나를 이루고 있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목표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코이노니아적인 삶 속에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죽기까지 절대 복종하시는 성자 예수,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성부 여호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과 복종을 증거하시는 성령…. 모두가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타자를 위하여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삶 안에서 하나를 이루고 계시는 하나님의 삶이 곧 삼위일체론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입력 : 2002년 05월 25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 (9)聖畵像(이콘)이야기⑤

 

남정우 [조회수 : 3]

 


그리스도의 얼굴, 만딜리온


일반적으로 정교회 대수도원이나 교회의 중앙건물 출입구 위에 그려져 있는 이 성화는 몸 전체를 그리는 일반적인 성화형태와는 달리 예수님의 얼굴만을 묘사하고 있다. 마치 무엇을 호령하는 듯하고, 무엇을 노려보는 듯하고, 심판하는 듯하기도 한 예수님의 얼굴 표정이 헝겊 위에 그려져 있다.이것을 러시아어로 '녜루카뜨보르늬이'라고 한다. 그리스어 '아케이로포이에토스(acheiropoietos)'라는 말에서 번역된 말인데, '사람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라는 뜻을 지닌다.


北시리아 '왕 이야기
이 '만딜리온' 이콘의 전설은 북시리아 에데사의 아브가르왕의 이야기에서 기인한다. 유세비우스(Eusebius) 교회사 1권 13장에 의하면 "아브가르왕은 치유될 수 없는 육체적 질병으로 인해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끊임없이 입에 담으며 그분의 기적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 것을 듣고 시종을 시켜 겸손히 편지를 보내 자신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청했다. 예수께서 그의 요청에 답신을 보냈고, 후에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을 보내 그의 병을 치유하고 그와 그의 친척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셨고 또 실제로 이루어졌다"고 전한다.

이러한 전설이 러시아에서는 다음과 같이 구전되었다. 예수님이 답신과 함께 자신의 얼굴을 닦은 수건을 함께 보내었는데, 그 수건에 예수님의 얼굴형태가 나타났다. 그 천을 아브가르가 만지는 순간 병이 나았다.

이후 왕은 그 수건을 성문 벽 위에 걸어두었다가 밤에는 깊은 구덩이에 넣어두었다. 구덩이에 있는 동안 수건 옆에 있던 기왓장에 예수님의 얼굴이 복사되었다. 구덩이를 열어보았을 때 사람들은 이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제는 두 개의 예수님의 얼굴 초상화가 생겼다.

이 초상화는 에데사에서 944년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 사람들은 그 초상화를 여러가지 모양으로 복사하여 비잔틴 제국과 러시아 전역에 퍼뜨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단순한 형태의 예수님 초상화는 점차로 복잡한 형태를 띄게 되었다. 처음에는 평평한 표면 위에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러다가 14세기에는 주름진 형태의 수건 위에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 후에는 상반신의 형태로 대천사장 미가일과 가브리엘이 수건의 위 양귀퉁이를 쥐고 있는 그림이 추가되었다. 그러다가 16, 17세기에는 상반신의 두 천사의 모습이 전신 모습으로 변했다.

이 성화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보호자, 승리를 가져다주는 성화-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모스크바 귀족 드미트리 둔스코바가 몽고군대를 물리칠 때, 이 성화를 앞세워 전쟁에 나가서 승리를 했다. 이후 러시아 군대 군종예식 시간에 이 성화가 종종 사용되어왔고, 대수도원이나 교회의 중심 건물 출입구 위에 이 성화를 그려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불가리아에서는 군기로 사용되었다.

이 이콘을 보면 목과 어깨가 그려지지 않은 한 남자의 얼굴만 있다. 가리마가 있는 긴 머리는 양 측면으로 타래모양으로 늘어져 있고 턱수염은 삼각형으로 가지런히 늘어져 있다(그러나 때로는 턱수염의 끝 부분이 두 가닥으로 갈라져 있기도 하다). 얼굴은 매우 곧고 긴 코와 활처럼 굽은 양 눈썹, 그리고 조용히 다문 입과 정면을 응시하는 눈으로 묘사되어 있다.


예수 행적 '口傳'
얼굴은 균형 잡힌 용모로서 매우 조용하며 마치 야자나무를 상기시키는 코와 눈썹 그리고 육감적인 면을 조금도 볼 수 없는 입술의 선과 고요히 먼 곳을 응시하는 눈들은 '시간을 초월한' 그리스도 얼굴의 표현이다. 아픔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고요하고 확신이 서린 인상을 풍긴다.

남 정 우 / 전 러시아선교사·서울여대교회 목사

 

입력 : 2002년 06월 01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 (10)하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

 

남정우 [조회수 : 3]

 


동방정교회의 구원론은 '신성화(Deification Theosis)'로 요약될 수 있다.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구원의 긴 과정에서 시작단계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한다. 구원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과 성자들의 모범을 따라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다.

정교회의 독특한 교회생활과 수도원생활 개인적인 신앙생활과 정교회 문화 모두가 이 '신성화' 개념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서구 기독교 안에도 이와 비슷한 개념이 있기는 하지만, 동방정교회 안에서 이 개념은 훨씬 더 깊고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쳐왔다.

정교회에서 신화는 하나님의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인간 실존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믿는다. 반면 서방교회의 구원론은 바울과 어거스틴에게로 소급되는 칭의론으로 특징지워진다. 바울과 어거스틴에게로 소급되는 서방의 칭의론은 법정적(法定的) 개념이 우세하다.

정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신구약 성서는 신화에 대해서 광범위하게 증거하고 있다. 가장 직접적으로 신화를 나타내는 구절은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라고 한 베드로후서 1장4절과 시편 82편 6절(이것은 요한복음 10장 34∼35절에서 예수님에 의해 인용된 구절이기도 하다)이라고 흔히 이야기된다. 그리고 요한복음 문서가 전체적으로 신화를 특별히 풍부하게 증거한다(요 3:8, 14:21∼23, 15:4∼8, 17:21∼23, 요일3:2, 4:12).

신학자들 중에서 신화(神化)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이레나이우스(Irenaeus)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에서 나타났다. "만일 말씀이 인간이 되었다면, 그것은 곧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리우스주의를 물리치고 니케야 신조작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아타나시우스는 4세기에 이레나이우스의 이 표현을 거의 비슷하게 반복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고 하였다.

갑바도기아 교부들도 모두 이 주제를 계속 탐구했다. 바실은 "인간은 신이 되라는 명령을 받은 피조물 외에 다름 아니다" 했고, 니사의 그레고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의 본성에 연합시키셨는데, 이는 우리의 본성이 하나님과 연합함으로 인해 신화(神化)되게 하기 위함이다"고 하는 등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인간이 신이 되게 하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는 이레나이우스, 아타나시우스의 경구가 모든 시대의 교부들과 신학자들에 의해 반향되었다. 이런 성서적 증거와 교부들의 전통을 통해 신화의 교리적 타당성을 정교회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지켜오고 있다.

이러한 정교회의 구원론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기독론), 인간에 대한 이해(인간론), 인간 타락에 대한 이해(죄론), 인간과 역사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이해(종말론) 등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정교회의 구원론으로 인하여 중세시대 정교회의 신비주의 사상 '헤즈키즘'이 나오고, 아토스 산의 주상성자들(돌기둥 꼭대기 위에 앉아서 명상과 기도에 전념하는 수도사들), 도시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에 들어가서 혼자서 금욕적인 수도생활을 하는 성인들의 이야기가 널리 회자되는 이유도 알고 보면, 정교회의 구원론과 깊은 관련성이 있다.

정교회의 구원론이 서방교회 전통에서 성장해온 사람들에게는 다소 생소하게 보인다. 그러나 정교회의 구원론을 자세히 들어보면, 상호 양립할 수 없는 모순적인 것이 아니라 강조점의 차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모두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남 정 우전 러시아선교사 / 서울여대교회 목사

 

동방정교회이야기/ (12)구원론-3 신비주의, 헤즈키즘

 

남정우 [조회수 : 2]

 


어느 종교, 어느 교파의 특색은 항상 구원론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어떻게 구원받느냐'에 대한 질문과 대답은 '왜 그런 구원이 필요한가'에 대한 인간과 인간현실에 대한 이해와 맞물려 있고, 구원을 얻기(이루기) 위한 신앙생활의 모습(예배, 기도, 윤리)을 방향짓는다.

정교회의 구원론은 신성화(Deification)이다. 신성화의 저변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는 본질적 요소가 인간 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건너갈 수 없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a totally qualitatively difference) 가르치는 개혁교회 신학과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영적인 평화·기쁨

정교회의 이러한 독특한 구원론으로 인하여 정교회 경건생활 가운데 독특한 용어가 등장하는데 '헤즈키즘(Hesychism, 정적주의, 정교회 신비주의)'이라는 것이다. 그리스어 헤즈키아(Hesychia)에서 나온 말인데, 고요함 침묵 영적인 평화와 기쁨을 의미한다. 지성이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이 지성을 다스릴 때, 도달하게 되는 하나님의 평화(apatheia)의 다른 표현이다.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에 대한 깊은 명상을 강조하는 그리스인들의 가르침은 팔복선언 가운데,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말씀과 연관되어, 정교회 안에서 명상의 관한 교리들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신성화(하나님을 닮아감)에 대한 정교회의 가르침은 베드로후서 2장 4절에 기초하여 계속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정교회의 경건한 수도사들은 헤즈키즘을 통한 높은 구원의 경지에 올라가는 것이 가장 경건한 소원으로 생각하였다. 헤즈키즘을 얻기 위해서 정교회 수도원은 몇가지 규율을 정하고 거기에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수도사가 하나님의 임재에 마음의 초점을 모으기 위하여 주기도문을 반복하도록 한다(나중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말로 바뀌었다).

숨을 멈추고 배꼽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고 혼 속에 영을 불어넣으면 변화산(다볼산)에서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그 빛에 휩싸이게 된다고 가르쳤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오랜 시간 동안 이렇게 노력하면, 하나님의 빛을 받아 모세의 얼굴이 빛난 것처럼(출 34:30) 신비스럽고 거룩한 형상을 지니게 된다고 믿었다.

14세기에 이러한 헤즈키즘에 대하여 논란이 생겼다. 이태리 출신의 발람(Barlaam)이라는 신학자는 헤즈키스트들의 경험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며,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잘못된 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고 비판하였다. 헤즈키스트들의 황홀경적 경험은 계시가 아니라 환영(illusion)일 수도 있다고 하였다. 육체의 고통을 가하는 기도의 자세도 비판을 하였다.

'변화산의 빛' 논쟁

이런 공격에 대항하여 데살로니가의 대주교 그레고리 팔라마스(G. Palamas)가 헤즈키스트들을 옹호하였다. 결국 논쟁이 격화되고 두 진영의 의견 차이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난 사건(눅 9:29)'을 두고 그 광채가 일반적인 반사광선(피조된 빛)이냐 혹은 창조되지 않은 빛(Uncreated Light)이냐에 대한 논쟁으로 압축되어 1341년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결과 '창조되지 않은 빛(Uncreated Light)'에 관한 교리를 정통교리로 확정지었고, 아토스 산의 수도사들을 옹호하고, 정교회의 신비주의를 합법화하였다.

이후 정교회 성인들과 수도사들을 묘사한 성화들 가운데에는 머리 뒤에 원광(圓光)을 그려넣는 일이 일반화 되었고, 정교회의 경건은 더욱 더 명상적이고 신비적이고 비활동적인 내향적인 삶을 지향함으로 사회 개혁적인 삶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져갔다.

남 정 우전 러시아선교사·서울여대교회 목사

 

입력 : 2002년 06월 29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 (13)삼위일체론 '페리코레시스'

 

남정우 [조회수 : 3]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의 특징적인 요소는 '페리코레시스(순환)'를 강조하는 측면과 '필리오케(그리고 아들로부터)를 반대'하는 측면에서 잘 나타난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핵심교리이다. 삼위일체론으로 인하여 기독교는 유대교, 회교와 구별되고, 고대 헬라 종교처럼 여러 신들을 섬기는 다신론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그런데 셋이면서 하나이며, 하나이면서 셋이라는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이 삼위일체론의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대체로 부정적인 용어로, 일반적인 상식과 경험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애매한 용어로 설명된다.

삼위일체론을 설명할 때 자칫 잘못하면 군주신론(君主神論, 사벨리안주의)이나 양태론 혹은 단일신론으로 빠져버린다.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대체로 양태론적 경향을 띄고 있었다. '하나의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로 삼위일체론을 묘사한 아타나시우스 신조(420~∼450년)이래로 아퀴나스, 20세기에는 칼 바르트와 칼 라너라는 신구교의 신학의 거장들이 양태론적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성경적 삼위일체론과는 다른 오류에 빠져있었다.

'삼위' 보다는 '일체'를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러한 모든 오류의 배후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어야 한다는 성경의 계시와는 관계없는 철학적인 대전제가 깔려 있었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일체' 보다는 '삼위'를 좀 더 강조하는 인상을 주는데, 사실은 모두를 균형있게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페리코레시스 개념을 통해서이다.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8세기 다마스커스(Damascus)의 요한이 사용한 이후 동서교회 양쪽에 걸쳐 삼위 하나님의 일체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사용되었다(De Fide Orthodoxa).

이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마치 우리 몸의 피가 각 기관을 순환하듯이, 상호침투를 통한 내주와 순환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여호와 하나님, 예수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각각 독립된 인격의 신들이지만 하나가 되는 것은 이 영원한 신적인 삶의 순환(페리코레시스) 때문이다. '신적인 삶의 순환'이란 '신적인 사랑의 순환' 혹은 '신적인 사랑의 뜨거운 피의 교환'같은 것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한 몸 속에 심장, 간, 폐가 각각 다른 기관이지만 뜨거운 피의 순환으로 서로 의존되어 있고, 하나의 삶을 이루듯이 삼위일체가 그와 같다는 것이다.

이 용어는 사도 요한이 설명하고 있는 성부가 성자 안에 침투해서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침투해서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양태에 대한 성서적 표현(요 14:10∼11, 요 17:20∼23)에 상응하는 용어이다.

이러한 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이 다시 크게 빛을 보게 된 것은 몰트만 덕분이다(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그는 페리코레시스 개념에 기초한 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이 성경적으로 부합한다는 사실을 확언하고 과거 일신론적 경향을 깔고 있는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한편 성경적 삼위일체론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실천적 의미를 설파하였다.

즉 독재적이고 군주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라 삼위이면서 일체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적 코이노니아 개념을 이해하고 배워서 그것을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남 정 우前러시아선교사 / 서울여대교회 목사 <13〉 삼위일체론① '페리코레시스'

'三位'와 '一體' 균형있게 강조

"한 몸 속에 심장과 간, 폐 등이 각각 다른 기관이지만 뜨거운 피의 순환으로 서로 의존되어 있듯이 하나의 삶을 이루는 것"

<사진설명〉 15세기 러시아 이콘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 작품. 창세기 18장에 아브라함을 찾아온 세 천사의 이야기를 근거로 삽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형상화하여 그렸다고 하여 구약의 삼위일체라고 부른다. (http://www.orthodox.or.kr/)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의 특징적인 요소는 '페리코레시스(순환)'를 강조하는 측면과 '필리오케(그리고 아들로부터)를 반대'하는 측면에서 잘 나타난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핵심교리이다. 삼위일체론으로 인하여 기독교는 유대교, 회교와 구별되고, 고대 헬라 종교처럼 여러 신들을 섬기는 다신론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기독교 핵심 교리

그런데 셋이면서 하나이며, 하나이면서 셋이라는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이 삼위일체론의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대체로 부정적인 용어로, 일반적인 상식과 경험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애매한 용어로 설명된다. 삼위일체론을 설명할 때 자칫 잘못하면 군주신론(君主神論, 사벨리안주의)이나 양태론 혹은 단일신론으로 빠져버린다.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대체로 양태론적 경향을 띄고 있었다. '하나의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로 삼위일체론을 묘사한 아타나시우스 신조(420~∼450년)이래로 아퀴나스, 20세기에는 칼 바르트와 칼 라너라는 신구교의 신학의 거장들이 양태론적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성경적 삼위일체론과는 다른 오류에 빠져있었다. '삼위' 보다는 '일체'를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러한 모든 오류의 배후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어야 한다는 성경의 계시와는 관계없는 철학적인 대전제가 깔려 있었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일체' 보다는 '삼위'를 좀 더 강조하는 인상을 주는데, 사실은 모두를 균형있게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페리코레시스 개념을 통해서이다.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8세기 다마스커스(Damascus)의 요한이 사용한 이후 동서교회 양쪽에 걸쳐 삼위 하나님의 일체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사용되었다(De Fide Orthodoxa).

이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마치 우리 몸의 피가 각 기관을 순환하듯이, 상호침투를 통한 내주와 순환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여호와 하나님, 예수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각각 독립된 인격의 신들이지만 하나가 되는 것은 이 영원한 신적인 삶의 순환(페리코레시스) 때문이다. '신적인 삶의 순환'이란 '신적인 사랑의 순환' 혹은 '신적인 사랑의 뜨거운 피의 교환'같은 것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한 몸 속에 심장, 간, 폐가 각각 다른 기관이지만 뜨거운 피의 순환으로 서로 의존되어 있고, 하나의 삶을 이루듯이 삼위일체가 그와 같다는 것이다.

이 용어는 사도 요한이 설명하고 있는 성부가 성자 안에 침투해서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침투해서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양태에 대한 성서적 표현(요 14:10∼11, 요 17:20∼23)에 상응하는 용어이다.

몰트만 "성경에 부합"

이러한 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이 다시 크게 빛을 보게 된 것은 몰트만 덕분이다(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그는 페리코레시스 개념에 기초한 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이 성경적으로 부합한다는 사실을 확언하고 과거 일신론적 경향을 깔고 있는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한편 성경적 삼위일체론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실천적 의미를 설파하였다.

즉 독재적이고 군주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라 삼위이면서 일체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적 코이노니아 개념을 이해하고 배워서 그것을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남 정 우/ 前러시아선교사, 서울여대교회 목사

 

입력 : 2002년 07월 06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14) 삼위일체론 2)'필리오케'논쟁

 

남정우 [조회수 : 4]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의 두 번째 특징은 '필리오케'를 반대하는 입장 가운데 잘 나타난다. 381년 당시 전세계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여서 함께 만든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는 "성령님은 주님이시고,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분임을 믿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서방 교회가 스페인에 가서는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아들로부터 나오시는"이라고 임의로 "그리고 아들로 부터(filioque)"라는 문구를 삽입하여 신조를 약간 바꾸어버렸다.

"신조 '變改' 안될 말" 이후 9세기 카알 대제, 11세기 초교황 베네딕트 8세에 의하여 계속 필리오케라는 문구를 삽입하여 신앙고백을 하였다. 이에 동방정교회는 계속 항의하였다. 전세계 기독교 지도자들이 기도하고 합의하여 공동으로 만들어 지키기로 한 약속을 임의로 변개하여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그러나 서방교회는 이런 항의를 묵살하였다. 1054년 동,서방교회는 분열하고 말았다.

그러면, 동방정교회가 필리오케를 강하게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요한복음 15장 26절에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나온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영원히 성령을 "내쉰다". '성령은 아들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필리오케를 첨가하면 성령이 아버지로부터도 나오고, 아들로부터도 나온다는 말이 되어 혼돈을 초래한다'는 것이 정교회의 주장이다. 삼위(三位)가 페리코레시스(순환)에 의하여 하나를 이루고 있지만 삼위는 각각 개별적이고 독특한 위치와 사역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성부 하나님은 누구인가? 성자 하나님을 세상에 보내신 분이며 성령을 내쉬는 분이시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다. 성자 역시 성령이 아니다. 성자는 성령을 내쉬지 않는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이시지, 성부 하나님이 아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에 오신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이시지, 성자 하나님이 아니다. 보내신 하나님(성부)과 보냄을 받은 하나님(성자)(요 16:27∼28) 그리고 증거하시고 진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성령)(요 16:4∼14)은 각각 고유한 인격을 가지고 있으며 결코 혼동될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런데 필리오케를 삽입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증거를 혼란에 빠뜨린다고 생각하여 정교회는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면 성령과 성자 예수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성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성자가 성령을 내쉬지는 않는다. 오직 성부만이 성령을 내쉬신다. 그러면 성령과 성자의 관계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관계가 있다. 있다면 과연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부 하나님만이 성령을 직접 내쉬지만 성부 하나님은 또한 성자 하나님의 아버지이시다. 성자 하나님의 아버지!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 성령을 내쉴 때 항상 그 곁에서 함께 하신다. 이런 식으로 정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일체성 보다는 삼위 하나님의 고유성과 개별성을 혼동하지 않도록 하는데 많은 강조점을 두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 (1870) 이후 '필리오케'에 관한 동,서방교회의 논의는 다시 적극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 중에서 1874∼1875년 초대 가톨릭교회(1871년 제1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하여 분리된 천주교회) 신학자들이 독일 본(Bonn)에서 일부 성공회 신학자들, 개신교 신학자들이 동참한 가운데 그동안 서방교회가 필리오케를 삽입해 온 것은 잘못된 일이었으며 삭제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동·서 공동신앙 확인 최근 에큐메니칼 차원에서는 '신앙과 직제 위원회'가 니케야 콘스탄티노플 신조야말로 사도적 신앙의 내용에 대한 성실성과 충성심의 사인이요 표준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필리오케 문제를 두고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1978년 10월과 79년 5월에 두 차례의 신학협의회를 가진 결과 동,서방교회 모두가 'filioque'없이 니케야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다시 고백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1년 제네바에서 개최된 니케야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 1600주년 기념예배에서 니케야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에큐메니칼 공동신앙 혹은 공동의 사도적 신앙의 표현으로써 확정지었다.

남 정 우前러시아선교사 / 서울여대 대학교회 목사

 

입력 : 2002년 07월 13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 (15) 삼위일체론-3 협의회적 사귐

 

남정우 [조회수 : 4]

 


삼위(三位)이면서 뜨거운 사랑의 순환(페리코레시스)으로 하나(一體)를 이루고 있는 하나님의 삼위일체론적 삶에 대한 정교회의 증거는 실천적인 차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별히 교회론 부분에서 정교회는 '협의회적 사귐(concilliar fellowship)의 전통'을 통하여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를 성취해 나가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론적 삶의 양식에 그 신학적인 기초를 두고 있다. 즉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삼위이면서 사랑의 순환 안에서 하나를 이루듯이, 이 땅의 교회들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의 양식을 본받아 일치를 이루어 나가야 하는데, 그것이 곧 협의회적 사귐이라고 정교회는 말한다.

로마가톨릭 교회는 교황을 꼭지점으로 교회와 직제의 단일성을 고집해 왔다. 그러나 동방 정교회는 처음부터 각 교회들의 협의회적 사귐을 통하여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교회의 사명과 과제를 성취해 나온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으로 인하여 동방정교회는 누구보다도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현대 세계교회일치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그 중에 뚜렷한 공헌 세 가지를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1919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미국 윌슨 대통령이 국제연맹을 구성하자는 제안을 언급하며, 그에 맞먹는 국제적인 교회연맹(League of Churches)을 구성하자고 세계 여러 교회에 제안하였다. 파시스트들이 국제적으로 연맹을 만들어 전쟁을 일으키고, 그에 대응하기 위하여 세속 국가들이 국제적인 연맹을 만들어 연합과 협력을 도모하는 상황을 보면서, 세계 기독교회가 기독교적인 사랑을 가지고 더 열심히 주도적으로 연합하며 협력하는 일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는데, 이것이 이후 세계교회협의회(WCC)를 형성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세계 교회일치에 공헌 두 번째는 WCC 헌장을 기독론적 고백에서 삼위일체론적으로 바꾸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1948년 암스테르담 WCC의 교리헌장의 첫 문장은 "세계교회협의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교회들의 공동체이다"라고 되어 있었는데, 1961년 뉴델리 WCC는 동방정교회의 제안(삼위일체 하나님)과 성공회의 제안(성서의 가르침을 따라서)을 받아들여 다음과 같이 보완하였다. 즉 "세계교회협의회는 성서의 가르침을 따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고백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한 분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함께 부름받은 사명을 공동으로 완수하려는 교회들의 공동체이다"라고.

세 번째는 협의회적 사귐의 전통을 세계교회 일치의 모델로서 제시하고 있으며, WCC는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예로 스페인 살라망카(Salamanca)에서 모인 '신앙과 직제위원회'에서는 '세계 교회의 하나됨의 개념과 하나됨의 모델'에 관하여 신중하게 토론한 결과, '협의회적 교제'를 가시화 시켜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이 '협의회적 교제'의 신학적인 뿌리는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 속에서 발견되며, 역사적인 뿌리는 정교회의 전통(325-787년) 가운데서 발견되는 것이다.

에큐메니칼 시각 재해석 최근에 와서 이러한 동방정교회의 '협의회적 친교와 사귐'의 전통과 경험을 현대 에큐메니칼적 시각에서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세례와 성찬식을 협의회적 사귐의 기초로 삼으며, 일치의 모델로서 협의회적 사귐을 제시하는 동시에 세계교회일치 운동의 방향이 에큐메니칼적 사귐에서 협의회적 사귐으로(from Ecumenical Fellowship to Conciliar Fellowship)되어야 한다는 정교회의 주장이 더욱 더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성 그리고 세례식과 성찬식을 협의회적 사귐의 기초로 삼고, 지역교회들과 다른 교파 교회들과의 사귐을 통하여 형성해 나가야 할 목표로서 협의회적 사귐을 제시해 온 동방정교회의 제안은 신앙과 삶 그리고 증거적 차원에서의 코이노니아를 통한 교회일치를 추구하는 WCC 회원교회들과 우리 개혁교회의 일치운동을 위하여서도 계속 훌륭한 가이드 역할을 할 것이다. 남 정 우 전러시아선교사

 

입력 : 2002년 07월 20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 (16)개혁교회의 대화

 

남정우 [조회수 : 3]

 


20세기 기독교회의 일치와 협력 및 공동의 증거를 위한 노력이 날이 갈수록 더욱 가시화되고 구체화되고 있는 가운데 동방정교회와 개혁교회(WARC)의 대화도 발전하고 있다. 오늘날 에큐메니칼 세계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신앙고백을 기독교회 일치를 위한 핵심 진리로 생각한다.

종교개혁교회와 동방정교회 간에 신학적인 만남의 역사는 1573년부터 1581년 사이에 독일 튀빙겐 대학교 루터신학부 교수들과 콘스탄티노플의 에큐메니칼 총대주교 예레미야스 간에 있었던 서신교환에서 비롯된다. 반면에 칼빈주의자들과 정교회 간의 만남과 대화는 17세기 에큐메니칼 총대주교 키릴 루카리스(Cyril Loukaris, 1620-38)가 만든 신앙고백서가 정교회 내에 일으킨 커다란 소용돌이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루카리스는 실제로 제네바에 가서 칼빈의 가르침을 깊이 공부하였으며, 결과 루카리스가 쓴 조직신학과 그가 만든 신앙고백문이 다분히 칼빈주의적이었는데, 정교회는 그의 신학사상과 신앙고백문을 "숨어들어온 칼빈주의적 이단"이라고 정죄하였다. 루카리스가 만든 신앙고백문 '기독교 신앙의 동방교회적 고백(Eastern Confession of the Christian Faith)' 원본은 제네바 도서관에 보관 중이며, 그 신앙고백문으로 야기된 여러가지 신학논쟁과 비극적 사건들에 관한 기록들도 제네바 도서관에 풍부하게 보관되어 있다. 루카리스는 이 신앙고백문을 만든 일로 인하여 그의 목숨을 잃었다. 결과 17세기 초에 개혁교회와 정교회 간의 일치을 위한 그의 개척자적인 노력은 열매없이 일단 끝나고 말았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세계 제1, 2차 대전을 겪으면서 UN이 창설되는 국제적 상황의 변화에 발맞추어 세계 기독교회의 일치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맥락 속에서 개혁교회와 정교회 간의 만남도 다시 시작되었다.

20세기에 양자 간의 최초 만남은 1920년대 초에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에서(Romania Transylvania) 만난 정교회와 개혁교회 신학토론을 위한 만남이었다. 이후 1950년대에는 독일에서, 1968∼75년에는 북미에서, 1970년대에는 헝가리 데브레첸에서(Hungary Debrecen) 그리고 1981년 이후에는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토론의 장이 열렸다.

이와 같은 여러 번의 만남을 통하여 다양한 신학적 주제들이 다루어졌는데 기독론, 성찬론, 신앙고백과 고백문의 역할,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성화와 구원의 활동하심, 교회 예식들, 하나님의 계시와 역사, 역사적 상대주의와 기독교 교리에 있어서 권위, 교회의 사회적 책임, 창조와 자연보호, 결혼과 타종교인을 개종시키는 일 등과 관련된 목회적인 이슈들도 다루어졌다

이러한 대화 가운데서 각 교파는 자기의 전통을 충실하게 해석하였고 동시에 양자 간에 공통점이 많이 있음을 서로 확인하였다. 정교회는 1054년 동·서방 교회가 서로 나뉘어지기 전에 가졌던 교회 공의회의 결정 사항들에 호소하며 교회일치를 주장하였다. 반면에 개혁교회 측은 성서의 가르침과 초대교회의 가르침을 교회일치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양자는 대화를 통하여 각자가 지닌 은사적 특징들을 상실함이 없이 상대방의 전승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서로를 더욱 발전시키며 기독교의 진리를 더욱 풍요롭게 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남 정 우 /전러시아선교사, 서울여대 교회 목사

 

입력 : 2002년 07월 27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 / (17)개혁교회의 대화 ②

 

남정우 [조회수 : 4]

 


에큐메니칼 대화의 차원에서 신학적인 대화를 추구해온 개혁교회와 정교회는 무엇보다도 삼위일체 교리를 가지고 토론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1979년 이스탄불(Istanbul)에서 열린 개혁교회와 정교회 간의 신학적 대화를 위한 만남에서 재확인했다.

그리하여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양자 간에 일치점이 더욱 풍요로와졌으며 공식적인 만남의 비전이 아주 밝아졌다. 에큐메니칼 총대주교는 자치권을 가진 모든 정교회들에게 개혁교회와의 만남을 위한 대표자들의 명단을 보내달라고 하였는데, 그 대답이 모두 긍정적이었다. 개혁교회연맹(WARC)에서도 15명의 신학자 대표단을 임명하였다. 1988년에서 1990년 1992년을 거쳐 1994년까지 매 2년마다 만남과 대화를 가졌다. 양자 간의 주된 대화의 주제를 설정한 것은 1986년 예비적 만남에서 이루어졌고, 양자 간의 승인 하에 마련되었다.

니케야신조부터 출발 대화는 두 교파의 공동기반인 니케야신조로부터 시작되었다. 논쟁의 여지가 많은 구원론이나 교회론에 대하여 언급하는 대신 기독교의 기본적이고도 공통적인 이해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렇게 근본적인 교리들에 대하여 서로 의견을 교환함으로 개혁교회뿐 아니라 정교회도 전체 에큐메니칼 운동에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처음 두 회기는 삼위일체론을 취급하는데 사용되었고, 세 번째, 네 번째 회기는 성육신론을 토론하는데 집중되었다. 그 결과 참석위원들은 공동성명서에 동의할 수 있게 되었다. 참석위원들은 그 성명서를 여러가지 잡지에 다양한 언어로 번역하였다. 처음 두 회기 동안 다루어진 삼위일체론에 대한 문서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개혁교회와 정교회와의 에큐메니칼 신학 대화의 중요한 열매는 성삼위일체론에 대한 일치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다. 이 성명서는 양자(동방정교회와 개혁교회)가 삼위일체에 대하여 신앙을 고백하고 고백하는 바의 일치됨을 공표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됨을 재확인하여 형제애를 공고히 함과 아울러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복음의 소명을 다하기 위한 거룩한 노력이라고 풀이된다.

그러나 삼위일체에 대한 이 일치성명의 근거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정확한 분석에 기초한 지식의 일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주(主)시고 사도들에 의하여 선포되고 교회가 전수해 온 계시에 따른 성부 성자 성령의 한 하나님 됨을 신앙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고백하는 일치 즉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고백의 일치에 그 근거를 두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일치성명의 전문을 인용해 보면 "우리는 가톨릭 교회의 복음적이고 고대적인 신앙을 따라서 창조되지 아니하고 동질성을 가지며 영원한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을 함께 고백한다. 이 신앙은 325년 니케야공의회, 381년 니케야-콘스탄티노플공의회에서 공표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 세례의 신앙인 바, 우리로 하여금 성부 성자 성령을 믿도록 가르친다. 삼위일체론에 대한 이와 같은 일치성명의 근거는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있으며 성경적인 근거로서 에베소서 2장 18절, 마태복음 28장 19절, 그리고 세례예식문으로 고린도후서 12장 14절, 축도문으로는 마태복음 11장27절, 누가복음 10장 22절 등 그리스도의 말씀에 있음을 제시하였다.

그러면 왜 굳이 성부 성자 성령의 순서로 언급하는가(the Order of Divine Persons in the Trinity). 이것은 동등성의 차이성 때문이 아니라 초대교회 세례 예식문에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 전승을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의 순서로 언급하는 것이지, 권위와 능력, 영광의 차이성 때문이 아니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JPIC의 전제조건 형성 삼위일체에 대한 사도적 신앙의 공유와 이 사도적 신앙에 대한 해석의 합의부분은 교회의 삶의 차원에서, 그리고 증거의 차원에서의 진정한 기독교적 코이노니아를 위한 기초를 형성해 주었다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평가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의 교회적 공동생활과 증거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기초로 한 말씀선포와 성례전의 베풂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의 일치와 일치에 대한 상호 확인의 과정은 대화에 참여하는 개혁교회와 동방정교회의 자기 정체성의 근거를 제공하는 동시에 세례와 성만찬 그리고 직제 중심의 교회적 삶의 코이노니아를 위한 전제 조건이요, 현대 세계 속에서 `정의·평화·창조의 보존(JPIC)'을 위한 공동의 증거 활동에 있어서의 코이노니아를 위한 전제 조건을 형성해 준다.

남 정 우 / 전 러시아선교사·서울여대교회 목사

 

입력 : 2002년 08월 10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 (18) 정교회-개혁교회의 대화-3

 

남정우 [조회수 : 4]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지만, 20세기 에큐메니칼 차원에서 이루어진 정교회와 개혁교회의 대화의 열매와 그 의의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토론의 주제와 합의사항들을 살펴보면, 정교회와 개혁교회가 신학적 대화를 준비하고 진행함에 있어서 가장 크게 거론된 주제는 다섯 가지이다. 그 첫번째는 '구원론'과 '신론' '성화론'이며 두번째는 '사도적 연속성의 본질'과 '성경과 전승', ''고대 공의회들' 그리고 세번째는 '성찬공동체로서의 교회'이다. 네번째는 '인정미가 넘치는 사회와 세계평화를 위한 투쟁에 있어서의 기독교인의 책임성'이며 마지막으로 '교파들 간의 관계성' 등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이러한 주제들을 가지고 신학적 대화를 진행하는 가운데 암시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합의된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①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서 상호 수용함. ②타 교회에 대한 지식과 인식의 기회를 넓히며 타 교회의 예배와 삶의 경험들을 나누고, 정보를 교환함. ③오해와 편견들을 줄임 ④공통성 내지는 동일한 신앙의 재발견에 대한 공동확인 등 네 가지다.

특별히 삼위일체 신앙과 계시의 전승(구원의 근원(source))은 오직 하나, 즉 예수그리스도의 계시이다. 그리고 이 계시는 사도들을 통하여 구전(口傳)과 기록으로 우리에게 전승되었다는 이해에 있어서 상호 간의 이해가 같음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 계시와 전승의 주된 내용인 바, 구원과 화해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즉 하나님과의 화해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온전하신 희생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의 행위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성례전들에 관한 대화에 있어서도 양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물로 준 세례라면 다른 교회의 세례라도 그 타당성을 상호 인정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세상을 위한 교회에 있어서도 근본적으로 이해를 같이 함이 나타났다. 즉 교회는 교회 자체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 하고 있으며, 현 시대 인류를 위협하는 공동의 문제에 대하여 대처하기 위한 JPIC(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존)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함에 대하여서도 인식을 같이하였다.

정교회와 개혁교회들과의 대화의 의의를 다음 네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상호간의 신뢰회복이다. 처음 네 번의 회기를 통하여 양자 간에 놀라울 정도의 상호 신뢰감을 이루는데 성공하였다. 대화를 통하여 곧 정교회는 종교개혁과 개혁교회들에 대한 그들의 진부한 고정관념이 현실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정교회 대표자들은 개혁교회가 '그들의 주제들'에 대하여 함께 토론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꼈다. 분명히 아주 미묘한 주제들 중에 많은 부분이 특별히 교회론에 관해서는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먼저 양자 간의 공동지반(共同地盤)에 대하여 관심을 집중케 한 것은 지혜로운 일이었다. 대화 가운데 발전된 공동의 언어는 다른 영역에서도 상호간의 이해를 더욱 증진시켜줄 것이다.

둘째, 새로운 관계성 형성이다. 공식적인 대화를 개최하기로 한 결정은 동방정교회 쪽에서 제안한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 간의 대화는 신학적 발견을 초월하는 상관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 결과를 공동선언문의 유용성에 의하여 평가할 것이 아니라 대화가 진행되고 있음, 그 자체가 정교회에 새로운 관계성의 성격을 의미한다는데 의의를 두어야 할 것이다.

친교·결속력 강화

셋째, 친교와 결속력 강화이다. 양자 간의 대화는 유럽에서 거대한 변화(동구권의 변화)가 일어나기 직전 1988년에 시작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 가운데서 동유럽과 서유럽 간의 건설적인 관계를 형성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새로운 형태의 소외가 쉽게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정교회들이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으며 내부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정교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런데 정교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하여 성장하고 있는 친교를 균열시킬 수도 있는 서방교회의 개종작업을 경험하고 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양자 간의 대화는 상호간의 친교와 결속에 도움을 줄 것이다.

넷째, 상호 간의 이해증진이다. 정교회는 개혁교회에 대하여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 대화를 통하여 양자는 서로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게될 것이다.

남 정 우

전 러시아선교사·서울여대교회 목사


 

입력 : 2002년 08월 17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 (19) 선교모형 '키릴과 메소디우스'

 

남정우 [조회수 : 1]

 


천주교의 세계선교 모형을 7세기 그레고리 교황과 그의 파송을 받아 영국 캔터베리에서 사역한 어거스틴에게서 찾는다. 또한 기독교는 18세기 인도에서 사역한 윌리암 캐리에게서 기독교 선교의 모형을 찾을 수 있듯이 동방정교회의 세계선교 모형은 9세기 모라비아와 러시아에서 사역한 키릴과 메소디우스에게서 찾는다.

비잔틴정교회 선교사 비잔틴정교회의 가장 유명한 선교사는 키릴(Cyril, 826∼869)과 메소디우스(Methodius, 815∼885)이다. 이 두 사람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형제로서 862년 모라비아 지역의 슬라브인 선교사역에 착수하기 전에는 비잔틴제국의 고급 관료였다. 그들은 데살로니카에서 성장하였으며,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주민들 속에서 지냈다. 뛰어난 지능과 재능을 지닌 이들은 비잔틴제국 아카데미에서 철학교수로 봉직하기도 하였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축복을 받고서 모라비아(오늘날 체코 슬로바키아 지역)에 사는 슬라브인들에게 선교하기 위하여 파송을 받았다. 그들은 선교지로 떠나기 전에, 키릴이 슬라브어 문자를 고안하여 성경을 슬라브어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이것은 슬라브 민족의 정신문화사에 커다란 선물이었다. 덕분에 오늘날까지 슬라브 문자 알파벳을 키릴 문자라고 부른다. 그들이 모라비아에 도착하여 현지인들의 언어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선교모습은 정교회 선교정책의 기본 특징을 이루는 것이 된다. 모라비아에 거주하는 슬라브인들은 라틴어만을 고집하는 로마교회 선교사들의 선교사역 보다 키릴과 메소디우스의 선교방식을 선호하였다. 키릴과 메소디우스, 그리고 제자들까지 합세하여 슬라브족 선교가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당시 모라비아 지역은 로마교황청 관할 하에 있었기 때문에 키릴과 메소디우스가 로마교회 프랑크족 선교사들과 많은 충돌과 갈등이 있었으며, 감옥에 2년 동안 갇혀 있기도 하였다. 결국 로마교회의 시기 질투심으로 메소디우스와 그의 제자들은 추방당하였고, 모라비아에서의 정교회 선교는 중단되고 말았다.

모라비아에서 쫓겨난 메소디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불가리아로 가서 슬라브족 선교를 계속하였다. 그곳에서도 성경번역과 전도사업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도 같은 성격의 선교사업을 계속하였다. 성경과 미사예전을 러시아어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이 러시아의 기독교화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키릴과 메소디우스의 선교활동은 그들의 사후에도 제자들과 추종자들에 의하여 수백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래서 이 두 선교사는 '사도들의 선교활동에 버금가는 슬라브족의 전도자'로 추앙받고 있다. 이후 슬라브 언어는 남슬라브, 서슬라브, 동슬라브 계통으로 약간씩 다르게 발전하였지만, 그 뿌리는 모두 키릴 알파벳에 두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슬라브족 선교사역의 몇가지 특징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동방정교회 선교활동의 핵심요소로서 항상 언급되는 요소들이다.

첫번째는 예배드리는데 선교 현지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복음은 현지어로 선포되어야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데에도 현지어가 사용되어야 한다고 정교회 선교사들은 생각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오순절 사건에 대한 정교회의 독특한 견해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이 인류심판으로서 바벨탑에서 인류의 언어를 혼잡케 하신 것처럼, 오순절에 방언의 기적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표시라는 것이다. 혼잡하게 되고 흩어진 여러 민족들을 구속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뜻이 오순절 방언사건으로 나타난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오순절 사건으로 각 민족의 방언들이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각 민족의 방언도 하나님을 찬미하고, 축복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정교회는 믿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성서해석에서 선교현지어 적극수용정책이 나온 것이다.

세가지 선교정책 슬라브족 선교의 두 번째 특징은 현지인 성직자를 세우는 정책이다. 정교회 선교사들은 가능한 빨리 개종자들을 훈련시켜 안수하여 성직자로 세웠다. 일반적으로는 외국선교사가 다시 본국으로 철수할 즈음에서야 선교현지인을 안수하여 성직자로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정교회 선교정책은 현지인을 가능한 빨리 교회지도자로 세우는 정책을 수행하였다.

세 번째 특징은 토착화에 대한 강조였다. 다시 말하면 선교지의 교회가 자립성을 가지도록 도우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정교회선교사들이 선교현지에서 이러한 노력을 기울일 때, 모(母)교회로부터 오해도 많았다. 또 성공적으로 선교지 교회가 자립, 자치의 수준을 갖추었다해도 선교지 젊은 교회와 모교회 사이에 갈등이 계속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모교회와 신생교회가 협의회적 사귐을 통하여 다양성과 일치성을 균형있게 발전시켜 나왔다. 현재 정교회는 전세계에 9개의 총대주교구와 8개 자치교구로 조직화 되어있다.

남 정 우 전 러시아 선교사·서울여대교회 목사

 

입력 : 2002년 08월 24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 (20)러시아정교회도 선교하는가?

 

남정우 [조회수 : 1]

 


정교회도 선교하는가?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 정교회가 과거에 얼마나 열심히 선교하였는지, 역사를 몰라서 하는 질문일 것이다. 러시아정교회는 극동지방으로 선교하였다. 18세기에는 시베리아 캄차카 알래스카 중국 일본을 선교하였으며, 러시아 영토 안에 사는 여러 소수 부족들을 선교하였다. 러시아 정교회는 대단한 선교 역사를 지닌 교회이다. 중국의 경우에는 북경에 1715년 중국 선교회가 설립되었으며, 1914년 경에는 5천 명의 정교회 신자가 있었다. 일본에서는 1868년 러시아 정교회 신부가 처음으로 일본인에게 세례를 주었다. 1960년대에는 40여 개의 교구와 3만 6천의 신도를 가졌다.


1897년 한국선교
한국에서는 1897년 제정 러시아 교무원 소속인 러시아 정교회 암브로시우스 신부가 내한, 정동 러시아 공사관 내에 임시성당을 설치함으로 시작되었다. 1900년 2월 7일 성. 니콜라이 성당으로 명명하였고, 1912년에는 러시아 교무원의 후원으로 성당부설 보정(普正)학교를 건립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끊임없이 지리적으로 비기독교민족들과 접촉하며 갈등 속에서 지내온 유일한 나라이다. 따라서 러시아의 교회는 이러한 접촉의 기회를 선교의 기회를 만드는 일에 열심을 가져왔다. 러시아의 영토가 북쪽으로 동쪽으로 확대되면서 러시아정교회의 선교도 북쪽으로 극동 쪽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988년 러시아제국이 정교회를 받아들인 이후 2백-3백년 동안은 요즘 흔히 표현하는 대로 당시 러시아 교회를 묘사하자면 '어린 교회(younger church)'였다. 그러나 바로 이때부터 이미 러시아에서는 선교사들의 활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정교회가 국교로 선포되었지만 여러 도시에서는 여전히 이교도의 관습이 남아있었는데, 신실한 수도사들과 성직자들에 의하여 우상을 없애고 기도와 가르침과 모범적인 삶을 통하여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를 쟁취해 나갔다.

러시아정교회 선교는 대부분 수도사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수도사들은 정교회가 가르치는 구원, 즉 신성화(神聖化)에 도달하기 위하여 항상 수도와 명상하기에 적합한 은둔지 숲 속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이 살지 않는 북쪽 숲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그들의 삶의 모습은 고대교회 사막의 수도사들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어느 곳이든 사람이 살지 않은 곳은 없었다. 수도사들의 육체노동과 가르침은 숲 속 주민들에게 감명을 주었고, 그로 인하여 주변사람들과 유목민들에게 기독교가 전하여지게 되었다.

수도사들의 활동은 복음의 전달뿐만이 아니라, 문명의 전달자 역할도 하였다. 그들이 은둔하며 거하던 곳에 수도원이 서게 되었고, 수도원 주변에는 마을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복음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러시아국가의 시민생활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소수 부족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면서 수도사들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러시아문화를 가르쳤으며, 점차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러시아화시켜 나갔다. 이러한 러시아 정교회 수도사들의 선교활동에 대하여 메옌도르프는 이렇게 평가한다.

"기독교 수도생활은 종말론적 현상이다. 이미 존재하는 마을과 거주지를 떠나서 하나님 나라의 법에 따라서 새로운 기독교공동체를 건설하는 행위 … 그러한 그들의 활동은 예언적인 사역이며, 그 자체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의 파루시아(Parousia)를 선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내재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수도사들의 선교활동은 그 본질상 사도들의 사역과 비슷한 것이다. 사도들과 수도사들은 모두 역사와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성을 증거하였기 때문이다".

수도생활을 통한 러시아정교회의 선교를 '러시아의 케노시스'라고 부른다. 세상을 버린 수도사들의 삶이 역설적으로 그리스도의 주권성을 가장 잘 증거하는 삶의 모습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기를 비움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그리스도의 자기비하(케노시스)의 모습과 비슷하다.


중국·일본등 극동에 치중
러시아 선교는 무슨 중앙조직체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가끔은 국가에 의하여 통제를 받은 적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무슨 지원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 정교회는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수도단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역사는 단순히 그들 자신의 신앙 양심이 말하는 바에 따라서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고 특별한 준비나 훈련없이 여러 민족들을 전도하기 시작한 몇몇 특출한 사람들에 의하여 특징지워진다. 예를 들면 우랄산맥에 위치한 페름이라는 도시를 선교한 스테판(Stephen of Perm,1340-1396), 시베리아 알타이 지역을 선교한 마카리우스(Macarius Glukharev, 1792-1847), 알래스카와 동부 시베리아를 선교한 베니아미노프(John Veniaminov, 1797-1879), 일본 동경에 들어가서 선교한 니콜라스(Nicholas Kassatkin, 1836-1912)가 있다.

19세기 말엽에는 카잔신학교에서 탁월한 수많은 선교사들, 선교전문가들을 양성하였다. 한국어 번역가 사블루코프, 불교문제에 있어서 전문가 보브로프니코프, 모슬렘교도 전도 및 타타르족 전도전문가 일민스키 등 선교전문가들이 활동하였다.

남 정 우 /전 러시아선교사·서울여대교회 목사

 

입력 : 2002년 08월 31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 (21)교회중심적 선교이해

 

남정우 [조회수 : 1]

 


동방정교회의 선교는 철저히 교회 중심적이다. 정교회는 교회에 대하여 남다른 의의를 부여한다. 교회 자체가 선교의 목표이자, 복음의 성취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선교란 당연히 교회가 하는 것이며, 또 다른 교회를 세우는 것이 선교이다. 정교회 선교 역사에서는 교회가 아닌 개인이나 선교회(Society)가 선교를 주도하는 일이 없다.

선교는 곧 일치운동 분열을 일으키는 선교는 복음의 선교, 기독교회의 선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선교와 일치는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경쟁적인 선교는 비판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일치는 가시적인 일치로 나타나야 하며, 함께 하는 공간 가운데서 가시적인 일치를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의 배후에는 정교회야말로 정통교회이며, 참 교회이며, 분열되기 이전의 정통 기독교회의 전승과 진리를 가장 온전하게 보존해 오는 교회라고 생각하는 자부심이 깔려있다.

예전의 실천이 선교의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개신교는 성경을 번역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말로서 선포하고 설교하는 것을 선교의 주요 실천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정교회는 성례전의 집행이 선교 사역의 표현이며 실천이 된다고 믿는다. 성례전을 집례하는 가운데, 예전을 통하여 발산되는 천상의 빛이 아직도 어둠 속에서 살고있는 자들에게 비추이며, 이 빛의 매력으로 인하여 이방인들이 빛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러시아 역사를 보면, 10세기에 러시아가 국가종교를 선택하기 위하여 고민하다가, 비잔틴 정교회를 러시아 종교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유대교나 모슬렘, 천주교가 아니라 동방정교회를 러시아 종교로 채택한 주요 이유가 '정교회 교회당과 예전의 아름다움'때문이었다. 예전의 아름다움과 매력이 이방인들을 주님에게로 인도하는 능력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정교회는 예전 자체가 선교적 의미를 갖고 있으며, 영광송(정교회는 악기를 사용하지 않고 은은한 성가를 미사 시간 전체에 걸쳐 계속 부른다)과 예전을 통하여 복음이 선포된다고 생각한다.

禮典이 성육신 제시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신 성찬식을 반복 실천하는 가운데, 선교사 자신을 나누어주는 정신을 배우며, 세례(침례)를 통하여 자기를 비우는 법을 반복하여 배운다. 그리고 어려운 현실문제에 직면하여 회피하고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성찬식의 정신을 실천하려고 힘쓴다.

선교의 기초 하나님의 사랑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선교의 기초로 삼는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곧 자기 비움(케노시스)이며, 자기를 내어줌이다. 성부 하나님이 독생 성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내보내시고,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와 권리를 다 버리시고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제물로 내어주신 행동이 곧 기독교 선교의 기초이며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정교회의 신학은 놀라울 정도로 요한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개신교는 바울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믿음'을 신앙생활의 핵심개념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반하여, 정교회는 요한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사랑'을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의 주요 개념으로 생각한다. 개신교는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을 말하고 인간의 전적인 타락설을 가르치는 반면에, 정교회는 구원은 곧 '하나님을 닮아감(Deification)'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을 닮아감의 기초와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은 참 인간인 동시에 참 하나님이셨으며, 종말에 인간이 변화되고 닮아갈 모델이라는 것이다.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교회와 성례전을 통하여 복음을 전파하여 예수님 닮은 인간들을 많이 만드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이다. 이런 주장은 로마서 8장 28절 이하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 보면, 우리 인간을 하나님이 택하시고 구원하시는 목적이 나오는데, 그 목적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맏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남 정 우전 러시아선교사·서울여대교회 목사

 

입력 : 2002년 09월 07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22>/서울 선교부 설립배경과 과정

 

남정우 [조회수 : 1]

 


 요즘 서울에 체류하는 러시아인들은 주일이면 마포구 아현동에 소재한 한국 정교회 성 니콜라스(니콜라이) 교회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상호 동포애를 확인하고 한국생활에서의 고락을 나눈다. 물론 정교신앙을 믿고 있는 러시아인들은 오늘날의 한국 정교회가 터키의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에 소재한 세계 총대주교청의 관할 하에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한국정교회는 1897년 러시아 신부 암브로시우스가 서울에 도착하여 서울선교부(Seoul Mission)가 조직됨으로 시작되어 1997년에 한국 정교회 1백주년을 맞이하였다.
 임영상 교수는 러시아 정교회 서울 선교부의 역사를 ① 1897-1904년 ② 1906-1917년 ③ 1917년 이후의 세 시기로 구분하여 말한다. 이렇게 구분되는 주된 이유는 1904~1905년간의 노일 전쟁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이 선교부의 활동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러시아제국 정부와 러시아정교회 본부가 한국 땅에 본격적으로 정교회 선교활동을 해야 하겠다는 인식을 갖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다. 첫째는 꾸준히 남하하여 한반도에 부동항(不凍港)을 구축하려는 러시아가 1884년 6월 25일 한러조약 및 통상협정을 맺은 사실, 둘째는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이루어짐으로 러시아에 대한 한국의 의존도가 높아진 사실, 그러나 결정적인 배경은 1889년 러시아 공사관 서기 니콜라이 슈이스키(Nikolain Shuiskii)가 외무대신의 위탁을 받아 1889년 4월 1일에 작성한 '상황 보고서'에서 비롯되었다. 그 일부를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굨
 "한국의 지리적 위치와 정치적 상황은 러시아 국가의 이해관계와 관련이 깊다. 우리와 인접해 있는 아시아 강국인 중국과 일본 두 나라의 힘이 의심할 여지없이 가까운 장래에 강화되리라는 점을 감안할 때 한국의 중요성은 더욱 증대될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한국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꼭 필요한 문화적인 영향력을 얻기 위한 방안을 강구해야만 하게 되었다. 정치적인 영향력은…굨 정교회의 선교활동 무대에서 얻을 수 있다. 우리 국민성을 대변하는 정교회가 국가와 사회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바로 이 선교활동을 통하여 한국의 토착민들을 러시아로 끌어들일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필수적인 요소로는 <중략> 한국에서 다른 종교, 즉 천주교와 개신교의 전도사업을 막는 일이다 <중략> 최초의 선교지로 택할 장소로는 우리 러시아와 육로 무역을 하고 있는 지방 한 곳과 한국의 수도가 무엇보다도 편리할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해 한국에서 우리 정부의 사절단들은 실제적 협력을 펼쳐 나가게 될 것이다."(러시아 고문서 보관소에서 박종효 박사 번역)
 이러한 상황보고와 제안을 받은 러시아 외무부가 재무부와 협의하여 "서울 선교부의 건축에 들어가는 2만 5천 루블과 교회 유지 및 근무자 봉급으로 연 5천 루블씩 지출된다"는 내용을 황제에게 보고, 윤허를 받았다.
그리고 러시아 정교회 본부장 보좌관인 사블레르(V. K. Sabler)에게 "우리가 이웃인 한반도의 주민들 사이에 정교를 전파시킴으로써 조선에서 러시아의 문화적인 영향을 강화시키는 데 일조를 하게 되리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라고 쓴 편지를 보내어 당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일이 러시아에서 진행되고 있을 때, 1897년 1월 3일,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 폴랴놉스키(Z. M. Polyanovskii)가 서울에 정교회를 세우는 일이 시급하다고 요청하였다. 그는 현재 서울에 공관원 외에 1백 50여 명의 정교도인이 있는데, 교회도 없고, 사제도 없기 때문에 장례식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하소연을 하였다. 이렇게 하여 1897년 10월에 수사 신부 암브로시우스 구드코(Amvrosii Gudko)가 수사 대신부(arkhimandrit)로 승진되어 한국 정교회 최초의 성직자로 임명, 파송되었다. 암브로시우스가 한국에 온 지 얼마되지 않은 1898년 1월 고종 황제가 러시아정교회당 건축을 위하여 러시아공사관과 인접해 있는 약 1천2백50평방미터의 부지를 선물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것은 1897년 2월 20일에 만 1년 동안의 러시아 공사관 생활을 청산한 고종 황제가 자신의 신변을 지켜 주었던 러시아 측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던 것이다.
출처: http://www.orthodox.or.kr/
원자료: 한국에서의 러시아정교회선교역사(모스크바:블라지미르 형제단 출판사, 1999), p.373
남 정 우 / 전 러시아선교사ㆍ서울여대교회 목사

 

입력 : 2002년 09월 14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23)러시아정교회의한국선교(2)

 

남정우 [조회수 : 1]

 


 고종황제의 특별한 호의로 러시아정교회당 건축부지가 주어졌지만, 건축은 순조롭지 않았다.
 그동안 반외세 운동을 펼쳐왔던 독립협회(獨立協會)가 1898년 2월 하순 이후 본격적으로 반(反)러시아 운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3월 10일 독립협회 지도부는 3월 10일 종로에서 고종에게 러시아의 철수를 요구하라는 여론에 박차를 가하기 위하여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였다. 이와 같은 한국 내의 반러시아 움직임에 따라 러시아 정교회 서울 선교부의 서울 도착과 선교활동이 상당기간 지연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899년 9월 16일, 암브로시우스의 후임으로 수사 신부 흐리산프 쉐트콥스키(Khrisanf Shchetkovskii)가 수사 대신부로 승진되어 서울 선교부의 책임자로 임명 파송되었다.
 흐리산프는 당시 최고의 선교사 양성기관인 카잔 신학아카데미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유능한 인물이었으며, 흐리산프를 도울 시낭송자는 이미 5년 동안 남부 러시아 돈 지방의 칼뮈크인들 사이에서 선교활동에 참여한 바 있는 흐리산프의 친구인 요나 레브첸코(Iona Levtsenko)로 결정되었다. 따라서 이미 서울에 도착하였던 니콜라이 알렉세에프를 포함하여 서울 선교부의 선교사 일행은 상당히 능력을 갖춘 인물들이었다. 신임 수사 대신부와 시낭송자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1900년 2월이었으며, 곧 서울 선교부의 설립을 위한 제반 준비가 시작되었다.
 이 때 대한제국 황성신문은 조선신보를 인용하여 '俄人宣敎(아인선교)'라는 제하에, "俄國은 한국에 포교할 차(次)로 하리데산브씨로 선교사장을 삼고 수 명 선교사를 부(附)하야 경성(京城)에 파원(派遠)키로 결(決)하얏더라(1900년 3월 12일자)"라는 기사를 실었다.
 러시아정교회 한국선교역사에 있어서 1900년 2월 17일 주일(主日)은 역사적인 날이었다. 한국 땅에서 러시아 정교회 최초의 성찬식 예배가 드려진 날이기 때문이다. 신심이 깊은 러시아 공사가 공사관 건물 내에 50명에서 6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방을 미사용 공간으로 제공하였다.
 이로써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선교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서울 선교부의 책임자로 온 흐리산프 수사 대신부가 주재한 성찬식식에는 특별히 해군 함대 '용맹호'의 병사들이 제물포로부터 도착하여 성가를 불렀으며, 파블로프 공사와 한국 내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 외에 대한제국의 황실사절과, 외교사절단 대표, 언론인들과 그 밖의 인사들이 참석하였다.
 러시아 정교회의 전도가 시작되자 많은 한국 사람들이 정교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1900년~1904년 사이에 수사 대신부 흐리산프가 세례를 행한 교인은 전체 14명(남자 10명, 여자 4명)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흐리산프 신부가 보기에 세례를 받고자 하는 한국인들이 사실은 영혼 구원에는 관심이 없으며 선교사를 자기들과 가까운 사람들 혹은 관리들과의 관계에서 자기들의 불법적인 행위를 막아주는 보호자로 삼는 데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대한제국 시대 천주교 기독교 선교과정에서 나타난 양대인화(羊大人化ㆍ서양사람과 문물을 위대하게 생각하는 경향) 현상이 러시아정교회 선교과정에서도 나타났던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비친 정교회는 신앙 자체보다는 '러시아'라는 막강한 나라에 대한 기대의 대상으로 비쳤던 모양이다. 러시아 정교회의 포교 실적은 다른 기독교 선교단체에 비하여 뒤지지 않는 놀라운 실적이었다. 당시 한국인구는 1천7백61만9천5백40명이었으며, 기독교인구는 34만7천1백55명이었다. 1884년 한국 선교활동을 시작한 장로교는 1천8백여 명의 선교사들에 의해 약 22만여 명의 신자를 확보했고, 감리교는 7백50여 명의 선교사들에 의해 4만6천여 명의 한국인 신자들 얻었다.

남 정 우
전 러시아 선교사
서울여대교회 목사


 

입력 : 2002년 09월 21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 (24)러시아정교회의 한국선교 (3)

 

남정우 [조회수 : 4]

 


 서울선교부 책임자로 부임한 흐리산토스 수사 대신부가 꾸준히 선교활동을 전개한 결과 신자들이 상당히 증가했다.
 그는 새신자들을 위한 교리 학습을 시작했다. 교재는 당시 중국 북경에 있던 러시아 정교회 북경 선교 책임자인 이노켄티 피그로프스키 수사 대신부에게 요청하여 중국어판 정교회 서적 일체를 입수한 후, 국내에서 러시아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사람들의 도움으로 한글판 예식서와 니케아 신조, 십계명 등의 교리들을 번역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새로운 신자들의 수는 점차 증가했고, 이에 따라 공사관에 마련했던 임시 성당으로는 장소가 협소하여 고종 황제가 기증한 부지(현 정동 22번지) 위에 소규모의 새로운 성당을 신축하여 1903년 4월 17일 헌당식을 했다.
 성 니콜라이 성당이라 명명된 이 성당은 모스크바에서 제작된 여섯 개의 크고 작은 종에서 울려 퍼지는 특이한 종소리는 서울 장안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러나 1904년의 러ㆍ일전쟁과 1917년 예기치 않은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으로 인하여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활동은 중단되고 말았다.
 1906년 러일전쟁이 끝난 후 다시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들이 들어왔으나 일본의 간섭과 감독으로 선교의 열매는 미미했다. 1910년 한일합방, 1917년 볼세비키 혁명으로 러시아정교회의 선교활동은 극도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러시아 선교사들의 인내와 헌신적인 노력으로 1912년 요한 강 탁 신부가 동경 세르게이 대주교로부터 사제로 서품됐다. 그 후 1945년 해방되기까지 루가 김희준 신부, 알렉세이 김의한 보제신부가 서품을 받았다.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시작된 한국 정교회는 처음에 1897년부터 1908년까지는 페테르부르그 대주교구에 속해 있다가 1908년부터 1923년까지는 블라디보스톡 대주교구에, 그리고 1923년이후 일본 대주교구에 소속됐다. 이 때문에 해방 후 한국정교회 재산은 수립된 한국 정부로부터 일본 법인 소유의 적성 재산으로 취급받게 됐고 국가 재산으로 귀속되고 말았다.
 1945년 해방 이후 국내에서의 마지막 러시아 선교사였던 폴리카르포스 신부가 떠나고 난 뒤에 일제 시대 동안 위축됐던 교회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세 번째 한국 신부이고 당시 유일한 사제였던 알렉세이 김의한 신부는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7월 공산군에 의해 납치 당했고, 당시 정교회와 관련된 사람들은 소련 공산당에 연루됐다는 누명으로 감옥에 투옥 당했다.
 6.25전쟁 중 그리스 종군 사제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안드레아스 신부가 중심이 되어 전쟁 중에 흩어졌던 한국인 신자들을 다시 모으고 성당을 재건하여 전쟁이 끝난 후 1953년 11월 29일 성당 복구 미사를 가졌다. 1954년 안드레아스 신부는 귀국에 앞서 일본 동경 대주교에게 한국 신도들이 천거한 보리스 문이춘 신부의 사제 서품을 요청하여 납치당한 알렉세이 김의한 신부의 뒤를 이어 사목하도록 했다.
 한국정교회는 한국전쟁의 상처를 벗어나자마자 선교의 재개뿐만 아니라 해방 후 적성 재산으로 분류되어 국가재산으로 귀속 처리됐던 교회의 대지와 건물의 소유권을 회복해야 하는 문제가 긴급히 해결해야 할 교회의 당면 과제였다. 1959년부터 7년동안 법정투쟁을 통하여 1965년 교회의 승소판결로 끝나 한국정교회는 잃었던 재산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기간의 재판으로 교회의 기본 재산은 소유권이 회복됐지만 교회 재정이 없어서 부득이 1966년 성 니콜라스 성당의 정동 부지를 문화방송국에 매각하고 현재의 위치(마포구 아현동 424-1)로 이전했다.
 그 후 교회는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관구로 관할 소속을 이전하기로 하고 탄원서를 올린 결과 한국 정교회의 관할 소속이 러시아 정교회 소속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관구에 속해 있는 미국 대주교구 소속을 거쳐 1970년 이후부터는 뉴질랜드 대주교구 소속으로 이전됐다. 1975년 보리스 문이춘 대신부가 은퇴하고 그리스 정교회 소속의 트람바스 수사 대신부가 한국 선교 책임자 및 성 니콜라스 성당의 주임사제로 부임되어 왔다.
 트람바스 신부는 1980년부터 본격적인 선교사업을 전개한 결과 부산, 인천, 전주, 양구, 일산에 순차적으로 성당이 건립됐고, 청평, 가평에는 수도원 및 수녀원을 세웠으며 정교회 성직자와 선교사 양성을 위한 신학원이 설립됐다. 1995년 5월 8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큐메니칼 총대주교)가 직접 아현동 성당을 방문하기도 했다.

남 정 우
전 러시아 선교사ㆍ서울여대교회 목사

 

입력 : 2002년 09월 28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25) 중국정교회 3백년 역사

 

남정우 [조회수 : 1]

 


 중국 정교회의 역사는 약 3백 년이나 된다. 최초의 정교회는 중국 북경에서 1685년에 시작됐다. 이것은 중국과 러시아 정치 외교차원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19세기 말엽까지 중국의 북경 정교회는 선교활동은 하지 못했다. 19세기 말엽 북경에 러시아 해외선교부가 세워진 이후에야 비로소 선교활동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46년까지 중국에 1백 6개의 정교회당이 세워졌다. 대부분 신자들은 러시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중국인 신자는 1만 명 정도였다. 그러나 중국에서 공산혁명이 터지자, 러시아 이주민들은 다른 피난처를 찾아 중국을 떠났다. 이렇게 되자 중국에서 태어나서 사제가 되려는 신학생들을 교육하는 것이 문제가 됐다. 중국 공산혁명이 일어나던 해 수많은 중국인들이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고민하던 중국인 정교회 성직자들은 1957년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독립된 '자율적인 중국 정교회'를 선언했다. 북경 주교 바실(Basil, Shuan)이 중국 정교회 수장이 됐다. 시메온 주교(Simeon, Du)는 상하이 교구 수장이 됐다.

 얼마 후 중국 전역을 휩쓴 '문화혁명'이 일어나자 얼마되지 않은 중국 정교회를 거의 전멸시켜 버렸다. 몇몇 성직자들이 심한 핍박을 받았고, 유배됐으며, 심한 고문을 받았다. 교회당 문을 닫아버렸고, 교회 재산은 전부 몰수됐다. 종교 활동은 모두 금지됐다.

 중국 정교회가 다시 부흥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였다. 하얼삔에서 성모 마리아의 보호하심을 기념하는 교회가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1986년 러시아에서 온 피난민들과 중국인 정교회 신자들이 거기서 기도하는 것을 허락했다. 지금 현재 중국에서 정교회 미사가 드려지는 유일한 장소가 이 곳이다. 그레고리 신부가 본당 주임 신부로 수고하고 있다. 미사는 모두 교회 슬라브어로 집례되고 있다. 문화혁명 때 교회 기도서와 성례전 집례서들이 모두 몰수된 이후 지금까지 반환되지 않고 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 알렉세이 2세가 교회 성례전 집례서들을 돌려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으나, 아직까지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 중국에 다른 정교회당이 문을 열었다. 하얼빈에서 25킬로미터 떨어진 공동묘지 지역 나이예(Naiee)라는 곳인데, 그곳은 주로 정교회 신자들이 안장되는 장소이다. 헤이룽 성 관리들이 정교회당 재건축을 위해 8만 평의 땅을 허락했다. 1995년 8월 교회당 복구 공사가 완료됐고, 하얼빈에서 신부가 와서 죽은 자들을 추모하는 기념일에 미사를 드렸다. 1997년 9월에는 하얼빈 관청 관료들이 성 소피아 성당을 재건해 박물관으로 개관했다.

 1993년에는 러시아 정교회 대표단들과 함께 스몰렌스크-칼리닌그라드 대주교 키릴이 중국을 방문했다. 이어서 그레고리 신부가 모스크바와 하바롭스크를 방문했다. 그 이후 러시아 정교회 신부들이 중국을 자주 방문하고 있다. 현재 하얼빈에 있는 성모 마리아 보호 기념 교회는 거의 문을 닫을 지경에 처해 있다. 노쇠한 주임 신부가 1백 50여 명 되는 신자들을 위해 미사를 규칙적으로 집례할 수 없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러시아 정교회는 부활절에 신부를 파송해 이 공동체를 지원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인 청년들이 러시아 정교회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재정적으로 행정적으로 지원할 준비도 하고 있다.

 힌쟝(Xinjiang) 지역 정교회 신자들의 숫자가 약 3천 5백 명이다. 이 지역 신자들은 1986년에 우룸키(Urumqi)에 교회당을 재건할 수 있다는 허가를 받았다. 1990년에 재건축 공사가 완료됐다. 하지만 미사는 드리지 못하고 있다. 미사를 집례할 신부가 없기 때문이다. 30년 동안 이 지역 정교회 신자들은 신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매 주일 신자들은 기도 모임으로 모이고 있다. 지금은 이 지역 행정관청에서도 성탄절에는 정교회 신자들의 휴무일로 선포했으며, 부활절에는 정교회 신자들을 위해 별도의 파티를 열어 주고 있다. 우룸키 교회당에서는 신부님을 보내달라고 러시아 정교회에 재차 청원서를 보내고 있다. 중국의 법에 따르면, 지방 행정부의 초청이 있고, 정부의 허가가 있으면 외국인 성직자가 와서 미사를 집례할 수 있다. 문제는 중국 정부가 그것을 허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하일 리 신부, 에방겔 루 장사제, 그리고 약 30여 명의 신자들이 상하이에 살고 있다. 그러나 상하이 행정부는 정교회의 요구 사항을 한번도 고려하지 않았다. 상하이 시내에 정교회당이 두 곳 보존돼 있지만, 모두 건축 기념물로 지정되어 오다가 최근에는 레스토랑으로 용도를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2백 50명 이상의 러시아인 피난민들의 후손들이 북경과 인근 지역에서 살고 있다. 알렉산더 디(Alexander De) 신부가 그들을 영적으로 지도하고 있다. 이들은 그 해당 지역 행정관청에 찾아가서 자신들의 공동체 등록을 받아주고, 미사드리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청원하고 있다. 그러나 부정적인 대답만 듣고 있다. 알렉산더 디신부는 총대주교 알렉세이 2세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고, 1998년 10월 25일 중국을 방문했을 때에는 그에게 큰 상을 주었다.

 1997년 2월 17일 중국 자립 정교회 창립 40주년 기념일을 맞이해서 러시아 정교회는 중국에 있는 정교회 신자들을 돌보는 데 더욱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총대주교도 이 결정을 받아들여 중국 해외 선교부가 조직될 때까지 중국의 정교회 신자들을 돌보는 데 책임을 다하겠다고 공표했다.

 

입력 : 2002년 10월 05일 00:00:00

 

동방정교회 이야기/ (26) 바르톨로메오

 

남정우 [조회수 : 6]

 


 정교회 주요 지도자 인물 스케치
 
 ① 콘스탄티노플 에큐메니칼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
 
 오늘날 전세계 로마가톨릭 세계의 수장(首長)이 교황 요한-바오로 2세라면, 전세계 약 3억의 신도를 가진 동방정교회 세계의 수장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총대주교청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Patriarch Bartholomew)이다.

 그는 1940년 2월 29일생 터어키 에게해안에 위치한 임브로스 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발사였으며 커피가게를 운영했다. 소년기에 임브로스, 콘스탄티노플 등지에서 공부하고, 이스탄불 근처 섬에 위치한 정교회 할키 신학교에 들어갔으며 1961년 우수한 성적을 받아 장학생으로 졸업했다. 졸업 직후 임브로스 대성당에서 신부로 서품을 받았고, 나중에는 임브로스 대주교, 엘리오폴리스, 칼세돈, 멜리톤 등지의 대주교직을 역임했다. 그때 바르톨로메오라는 이름을 얻었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터어키 육군예비군장교로서 국방의 의무를 다했다. 1963년부터 68년까지 에큐메니칼 총대주교청의 장학금으로 로마에 있는 고레고리 대학교 교황청소속 동방연구소에서 박사과정의 공부를 했다. 그의 박사논문제목은 '정교회 안에서 성경의 성문화 과정과 교회법제정에 관하여'였다.

 1968년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을 때, 그는 할키 신학교 부학장으로 임명됐으며, 1969년 10월 19일 학장이 됐다굨 6개월 뒤 당시 총대주교였던 아데나고라스가 바르톨로메오를 성 안드레 총대주교 대성당의 신부로 임명했다. 나중에 스위스 보세이 에큐메니칼 연구소에 가서 교회법에 대하여 더 많은 연구를 했다. 그는 그리스어, 영어, 터키어, 이태리어,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7개 언어를 유창하게 말한다. 수많은 연구논문들을 출판했으며, '동방교회 정의(正義)를 위한 협의' 창립 멤버이며, 이 단체의 부회장직을 역임했다.

 1972년 드미트리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선출되자, 총대주교청 사무청을 개설하고 바르톨로메오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1973년 콘스탄티노플 주교가 된 바르톨로메오는 이후 18년 동안 드미트리의 가장 친밀한 보좌관으로 봉사했다. 1975년 이후로 그는 WCC '신앙과 직제 위원회' 회원직을 수행하고 있으며, 8년 동안 부회장직을 수행하기도 한 바르톨로메오는 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열린 제 7차 WCC대회에 정교회 대표단을 인솔하여 참석했다.
 1991년 10월 2일 드미트리가 별세하자, 10월 22일 만장일치로 바르톨로메오가 2백 70번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직에 선출되어 11월 2일 총대주교좌에 앉았다. 그는 총대주교직 취임연설에서 그의 비전은 정교회의 영적인 부흥, 정교회의 일치, 기독교인들의 화해, 타종교인들 간의 관용과 공존, 환경보존, 정의 평화운동에 앞장서는 것이라고 했다. 특별히 그의 국가적 종교적 교육적 배경으로 인해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화와 화해, WCC를 중심으로 한 세계기독교회 일치와 화해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상당한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터키 시민이기도 한 바르톨로메오는 터키 정부로부터 많은 제약을 받고 있다. 이슬람 국가인 터어키 정부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터키 시민으로서 터키 종교연맹법을 준수해야 하며, 총대주교청은 터키 안에 존재하는 소수종교공동체 희랍정교회의 한 건물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필자가 금년 2월 총대주교청을 방문했을 때 받은 인상은 총대주교청의 세계적인 명성에 비하여 그 건물과 내부시설이 슬플 정도로 초라했다는 사실이다. 로마의 바티칸 교황에 필적하는 동방정교회 세계의 수장이 거한다는 총대주교청이 우리 교단 1백주년 기념관 보다 적었으며, 안내하는 신부님이 정교회의 우월성과 영광을 자랑하기 보다는 터키 정부의 관용과 혜택을 선전하는 말들을 더 많이 하는 것을 들으면서 슬픈 생각이 들었다.

 1971년 터키 정부는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1백 27년 간 존속하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의 성직자들을 양성해 온 할키 정교회 신학교를 폐쇄했다. 이 때문에 총대주교는 할키 신학교의 부활을 위해 전세계 기독교인들의 도움과 기도를 호소하고 있다. 할키 신학교 도서관에는 고대기독교의 희귀 도서들이 다량 보관돼 있다.

 

입력 : 2002년 10월 19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 알렉세이 2세

 

남정우 [조회수 : 2]

 


정교회 주요 지도자 인물 스케치 ②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 알렉세이2세

 1990년 3월 3일, 소련 말기 19년 동안 러시아정교회 총대주교직을 수행했던 피멘(Pimen)이 79세의 나이로 죽었다. 러시아정교회는 6월 7일 모스크바 근교에 위치한 세르게이 라도니쉬키 수도원에서 3백 명 이상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총회를 열고 레닌그라드 대주교 알렉세이 2세를 제15대 러시아총대주교(Patriarch)로 선출했다.
선거일 하루 전에 약 90명의 주교(Bishop)들이 회의 끝에 3명의 후보자를 내세웠는데, 총회에서 레닌그라드의 알렉세이가 로스토프의 블라지미르, 키예프의 필라렛을 제치고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당선된 것. 러시아 총대주교좌는 1589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의 허락을 받아 독립적으로 시작됐다. 현재 러시아전역에 있는 정교회당은 적어도 7천 개 이상, 모스크바 시내에 있는 성당만 해도 3백 개가 넘는다. 러시아총대주교는 러시아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에스토니아, 일본, 중국, 동유럽 일부 등을 관할하고 있으며, 정교회가 가장 활기차게 부흥되고 있는 지역이다.

 알렉세이 2세(Aleksey Mihailovich Radiger)는 1929년 2월 23일 에스토니아의 탈린(Tallin)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법률가 집안이었는데, 조상적부터 레닌그라드에서 살아오다가 1917년 혁명으로 인해 그의 아버지 미하일가 에스토니아로 이민을 갔다. 1926년 엘레나에게 청혼해 결혼하였으며 3년 후 알렉세이를 낳았다. 그의 아버지 는 성직자가 되고 싶었으나, 근처 신학교가 없어서 기다리다가 1938년 탈린에 러시아어로 강의하는 신학교가 개설되자마자 입학해 1940년도에 이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졸업 직후 안수를 받아 보제(deakon)가 됐다가 2년 후 정교회 대처승 신부가 됐다. 이후 그의 아버지는 탈린의 칸잔스키 성당에서 오랫동안 봉직했다.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 하에서 알렉세이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 봉사(촛불켜기, 시편낭송, 주임신부 보좌 등)를 하며 성장했다. 어릴적부터 성직자가 돼서 교회봉사하는 일을 꿈꾸다가 1946년 레닌그라드 신학원에 입학을 시도했으나 허락을 받지못해 학부 3학년에 편입해 과정을 끝낸 후에 신학원(Akademia)에 입학했다. 신학교 졸업 이후 1961년까지 탈린의 주교로서 일했다. 결혼해 부인을 둔 그가 1961년 3월 3일 세르게이 라도니쉬끼 수도원에서 평생 수도사생활을 서약했다. 부인은 모스크바 어느 수도원에서 은밀하게 독신생활을 하고 있다.

 당시 그는 일반적으로 민족주의자들의 이슈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예컨데 에스토니아인과 러시아인들 사이에 우호증진에 기여한 일로 유명해졌다. 그는 에스토니아에서는 에스토니아 언어로 정교회 미사를 드릴 것을 촉구하였고, 결과 지금 에스토니아의 대부분 교회는 자국어로 미사를 드린다. 그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적극적이다굨 그는 1961년부터 1968년까지 WCC중앙위원으로 봉사했으며, 1987년 이래로 유럽교회대회(Conference of European Churches)의 의장직을 맡아오고 있다.

 여러 측면에서 알렉세이의 이력서에 관한 논란이 있다. 예컨데 1970년대에 만들어진 공산당 중앙위원 리스트 속에 총대주교 피멘의 이름과 나란히 대주교 알렉세이의 이름이 적혀있으며, 1970년대 중반에 왕성한 활동을 행한 공산당 산하 '종교업무부 발행 홍보문(Council for Religious Affairs Communique)'에 공산당에 충성을 맹세한 일군의 주교단의 이름들과 더불어 그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사실이다.

 1977년 어느 인터뷰에서 "모든 시민은 종교에 대한 자유를 지닌다. 어는 특정 종교를 가졌다고 해서 고용, 승진, 직장활동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 나라의 법은 종교적인 이유로 시민이 박해받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종교인들이 자신의 종교적인 견해를 밝히는 일과 관련해 비난받는 일이 생겨서는 안된다"고 했다. 같은 해 알렉세이는 소련의 헌법을 개정한 브레즈네프를 찬양했다. 그것은 그 헌법이 시민의 참된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1980년 후반에 알렉세이는 소련 내에서는 어떤 국민도 종교적이거나 이념적인 확신으로 인해 체포되는 일이 없다고 힘주어 강조했다.

 그러나 고르바쵸프 시대에 알렉세이의 목소리는 다소 달라졌다. 총대주교로 선출된 지 불과 10일 지났을 때, 일간신문 '이즈베스치야'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결코 교회를 배신한 적이 없다. 우리가 알기로는 우리 교회가 소련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킬 것이다. 가끔 우리는(종교인들) 2등 국민으로 분류되곤 한다...... 혹독했던 혁명시대와 스탈린 시대 동안 조국을 떠나 외국에서 안전하게 지낸 러시아 정교회 지도자들이 우리를 비난하는 일은 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면초가에서도 종교예식을 집전할 수가 있었다........ 세례식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원래 세례식에는 그 부모의 동의와 서명과 함께함이 필수적이었으나, 그러나 이러한 정보는 곧바로 소비에트 행정국으로 전해지곤 했다"고 말했다.

 정교회 신부 야쿠닌(Gleb Yakynin, 전 러시아 국회의원)은 1990년 8월 "총대주교 알렉세이는 지금도 활동중인 KGB의 끄나풀"이라고 비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교회의 역사는 한때 세속정치와 밀접한 관련을 가졌던 종교지도자들로 가득차 있으며, 지금도 상당한 위엄과 권위를 가지고 활동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가 총대주교로 선출된 직후 프레스 센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려는 법(Law on Freedom of Conscience,1990) 이 종교교육을 위해 어린이 학교를 설립하려는 교회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 기자회견의 여파로 소련국회는 종교양심에 관한 법률안을 재검토했다.
 중요한 것은 현재이다. 알렉세이 2세는 과거의 일로 평가되기 보다는 현재 그가 하고 있는 일들로 평가돼야 할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일정한 기간이 지난 이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현재 그는 모스크바 시내에 위치한 다닐로프 수도원에 집무실을 가지고 있다. 그는 1953년 레닌그라드 신학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교회역사와 기타 주제로 2백여 편의 크고 작은 논문들을 발표한 학자이기도 하다.

 구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의 개방개혁정책이 추진되면서 알렉세이 2세만큼 격세지감을 체감하는 인물도 없을 것이다. 91년 개방전에는 중령만 찾아와도 일어나서 맞이했다. 지금은 국방부장관이 와도 앉아서 인사를 받는다. 대통령과 나란히 러시아 국민의 정신적 종교적 지도자로서 그 위상이 급부상하고 있다.

남 정 우
전 러시아 선교사
서울여대교회 목사

 

입력 : 2002년 10월 26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 (28) 키릴 대주교

 

남정우 [조회수 : 1]

 


 키릴 대주교는 현재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청 외무성 책임자이며, 제네바 WCC 중앙위원회 회원인 동시에 러시아정교회 총회 5명의 상임임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러시아 정교회와 관련된 대외관계 문제에 있어서 최고 실무자이자, 러시아정교회 개혁과 부흥을 주도하는 신진 지도자이다. 일반적으로 수동적인 체질을 지닌 다른 정교회 지도자들과는 달리 키릴은 비범한 재능과 식견, 정력적인 활동과 독립적인 견해로 인해 대내외 지도자들로부터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키릴은 1990년 제15대 러시아정교회 총대주교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비범한 지도력을 지닌 인물이었으나, 당시 그의 연소함으로 인해 후보자 명단에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릴은 차기 총대주교로 주목되는 인물이다.

 그는 1946년 11월 20일 레닌그라드 대처승 신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블라지미르 미하일로비치 군다예프(Vladimir Mikhailovich Gundyaev)였다. 1970년 레닌그라드 신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교회의 계층질서 그리고 은혜에 관한 정교회의 교리 형성과 발전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를 얻었다.

 1963년 삭발식을 하고 흑승 수도사(독신 서원을 한 수도사)의 길을 걷겠다고 서원했다. 1970년 대주교 니코짐의 개인비서로 임명됐다. 대주교의 비서로서, 그리고 신학대학원의 교수로서, 그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대외협력문제와 관련된 여러 회의에 참석할 기회를 얻었다. 1971년에는 러시아 정교회 신학교 연합회장으로 선출됐다. 동시에 러시아총대주교청 대변인으로 WCC에 참석했으며, 그 다음해에 WCC 산하 '인도차이나 반도의 화해와 재건을 위한 위원회' 회원으로 선출됐다. 1974년에는 약관 28세의 나이로 레닌그라드 신학대학원 학장으로 임명됐다.

 키릴 대주교는 러시아 정교회의 에큐메니칼 사역에 적극적으로 헌신하고 있다. 1975년 WCC 제5차 나이로비 총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됐으며, 1976년에는 '신앙과 직제 위원회' 회원으로 선임됐다. 그러나 1978년 니코딤 대주교가 죽자 그는 스몰렌스크 주교로 좌천됐다. 만일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개방정책)'가 추진되지 않았더라면, 그는 영영 지방도시에 묻힐 뻔했다.

 키릴은 구소련 공산체제와 러시아정교회의 나약성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용감하게 말했다. 1989년 10월 주교단 총회에서 "이 나라의 시민들은 오랫동안 교회의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라는 요지의 연설을 했고, 1990년 5월 17일 어느 회견에서는 "경제체제는 시민들의 재능을 보다 효율적으로 발휘할 수 있고 자유롭게 생산활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체제로 변화될 필요가 있다"고 했다.

 1989년 필라렛 대주교의 죽음으로 주교 총회에서 그를 총대주교청 외무성 책임자로 선출했다. 1991년 레닌그라드 신학대학원과 부다페스트 개혁신학대학원에서 그에게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구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가 자유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한 이후 키릴은 러시아 공영방송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정교회 지도자가 됐다. 비교적 때가 덜 묻은 참신한 성직자로, 박학다식하며 러시아정교회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자부심을 지닌 사람으로, 성경과 신학적인 문제에 대한 해설자로 매력적인 외모와 목소리를 가지고 일요일 아침마다 TV에 나와서 강론을 한다.
 그러나 한국 선교사들에게는 대단히 위협적인 인물이다.

 97년 6월 러시아정교회의 적극적인 요청으로 15년 미만의 역사를 지닌 새로운 종교단체와 선교단체의 활동을 제한하는 종교법안이 러시아 의회에서 통과됐지만, 7월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반대와 소수 종교단체들의 반발로 옐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자, 키릴 대주교는 클리턴 대통령을 비난했다. 외국선교사들이 러시아에 들어와서 활동하는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는 키릴은 미국의 압력와 개입을 즉각 중단할 것을 요청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외국선교사들은 한 해 1억 5천만 달러의 돈을 러시아에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러시아정교회 전체 예산의 다섯 배가 넘는 엄청난 돈이다.

 이 돈으로 선교사들은 신문기자들, 방송기자들, TV의 황금시간대를 사서 아직 비판능력도 갖추지 못한 러시아 국민들에게 무차별 공격을 가하고 있다. 새로운 종교법은 순진한 러시아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역설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정교회 신자를 가지고 있는 러시아 정교회는 키릴 대주교를 통해 러시아정교회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며, 종교, 정치, 외교문제에 있어서 정교회의 견해와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입력 : 2002년 11월 02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 (29) 키릴 루카리스

 

남정우 [조회수 : 2]

 


 루카리스는 교회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전세계 정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그가 어떻게 정교회 전통을 비판하고 칼빈주의적 가르침을 지지하고 나섰을까? 개혁교회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참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려했던 성직자였으며, 용기있는 개혁자였다.

 그리스 크레테 섬에서 출생한 루카리스는 이태리 베니스와 파두아에서 공부했으며, 짧은 기간이나마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칼빈주의적인 가르침을 직접 배우기도 했다.

 공부를 마친 그는 1602년부터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1620년부터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역임했다. 유럽에서 파송한 콘스탄티노플 주재 개신교 신자 대사들과 교제하는 가운데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알게 됐다. 외국 대사들을 통해 루카리스는 유럽의 종교개혁에 관한 많은 지식을 얻게 됐다.

 그 결과 그는 로마 가톨릭을 매우 싫어하게 됐으며, 칼빈주의의 가르침을 따라 정교회를 개혁하려는 의지를 가지게 됐다.
 루카리스의 이러한 의지는 1629년 제네바에서 라틴어로 출판된 소책자 '신앙고백서' 안에 잘 나타나있다.

 제 1장과 4장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기술했고, 제 2장에서는 성경의 권위, 성경말씀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는데, 놀라운 것은 정교회 전통과는 달리 성경의 권위를 교회 위에 두었다는 사실이다.

 제 3장에서는 인간의 행위 이전에 하나님의 예정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으며, 제 9장, 13장에서는 인간의 수고나 공로로는 의롭다함도 구원도 받을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앙고백서였다.

 루카리스는 성경을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알기 쉬운 당시 현대 그리스어로 번역했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정교회 전통이 소중하게 여겨온 교부들의 가르침과 이콘 숭배, 외경 등을 재해석하기 원했다.

 그동안 무비판적으로 정교회 안에서 숭배돼 온 전통들을 교육과 성경읽기를 통한 새로운 지식의 관점에서 개혁하기를 원했다. 그는 에베소서 5장 10절을 자주 인용하면서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했다.

 신앙고백문을 출판한 이후 수많은 젊은 정교회 신부들을 유럽에 공부하러 보냈다. 또한 그는 영국성공회, 루터란교회 지도자들과 서신을 교환했으며, 영국왕 찰스 1세에게 알렉산드리아 성경사본을 보내기도 했다.
 당시 현대 그리스어로 번역된 루카리스의 신약성경은 정교회 신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에베소의 대주교 판토갈로(Pantogalos)는 루카리스의 개혁노선을 적극 지지했다.

 루카리스는 판토갈로스를 여러 지방 도시에 순회선교사로, 순회 설교전도자로 파송했다.
 그는 성경에 기초해 유창한 설교를 했으며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다. 두 번째 루카리스의 추종자는 나다니엘 코노피우스(Nathaniel Conopius)였다.

 그는 옥스퍼드와 라이든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현대 그리스어로 번역했다. 이외에도 루카리스의 개혁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추종한 정교회 성직자, 신학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루카리스의 그러한 개혁운동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특별히 정교회 고위성직자들의 반발이 심했다.
 여러번 음모를 꾸며 그를 제거하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결국 1638년 반(反) 터키운동 음모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술탄 무라드 4세가 감옥에 있는 루카리스를 목졸라 죽이고, 그 시체는 보스포러스 바다에 수장하도록 명령했다.

 34년 후인 1672년 정교회는 공의회를 개최해 루카리스의 서적들과 가르침을 정죄하고, 반개신교, 반 가톨릭 노선을 재확인했다.
 공의회는 "성경은 교회에 속한 것임으로 개인이 읽고 해석해서는 안되며, 오직 교회 안에서 읽혀져야 하고, 교회에 의해 해석된 가르침을 따라서 믿고 순종해야 한다"고 공표했다.

 루카리스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왜 동방정교회 세계에서는 서유럽과 같은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역사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정치적, 사회적, 학문적 그리고 종교적 개혁운동이 함께 맞물려 돌아가야 성공할 수 있는데, 동방정교회 세계에서는 4가지 중에서 3가지가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입력 : 2002년 11월 09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 (30)알렉산드르 멘(Alexander MEN)

 

남정우 [조회수 : 1]

 


 1990년 9월 9일 주일 아침 모스크바 북쪽에 위치한 자고르스크 어느 성당 옆에서 러시아정교회 신부 한 사람이 도끼로 무참히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러시아 전체는 큰 슬픔에 잠기는 동시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금세기 러시아 정교회 안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유능한 설교자, 성경주석가, 러시아 어린이와 지성인들로부터 가장 높은 사랑과 신뢰를 받아오던 알렉산드르 멘 신부가 그렇게 살해당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대통령이었던 고르바초프도 그의 죽음에 애도의 뜻을 표했고, 국회에서 보리스 옐친은 국회의장에게 그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며 몇 분간의 침묵시간을 함께 가질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멘은 1935년 1월 22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는 소련공산당의 권력이 최고조에 도달해 있던 스탈린 시대였다. 종교핍박이 극에 달했다. 당시 '군사적 무신론자 동맹'은 3천만 명의 회원을 자랑하고 있었다. 러시아 역사에 있어서 최고의 카타콤 시대였다.

 멘의 아버지는 희미한 신앙을 가진 유대인이었으나, 그의 어머니 엘레나(Maria Elena)는 카타콤(지하) 정교회 신앙을 지닌 유대인으로서, 알렉산드르를 유년시절부터 철저하게 신앙적으로 양육했다. 결혼해 모스크바에 정착하게 된 알렉산드르의 부모는 친척들을 통해 비밀리에 알게 된 정교회 친구들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기회를 많이 가지게 됐다. 카타콤(지하) 교회는 교회와 신자들을 무력으로 핍박하던 무신론 정부에 협조하는 것을 거절하고 은밀하게 신앙활동을 해오던 평신도와 신부들의 비밀공동체였다. 이 때에 멘은 카타콤 신부와 평신도 지성인들의 도움으로 미래 사역을 위한 수많은 책들을 두루 섭렵했다.

 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하고 독학으로 신학공부를 한 그는 1960년 신부가 됐다. 이후 약 20년 동안 모스크바 북쪽에 있는 '노바야 제레브냐'라는 마을 성당 주임신부로 섬겼다. 멘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얻는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러시아의 수많은 지성인들을 교회로 인도했다.

 알렉산드르 신부는 "나의 꿈은 교구를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 서로 돕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함께 성경을 공부하는 한편, 함께 성찬을 받는 그런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무신론적 전체주의적 사회 안에서 실현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KGB로부터 끊임없이 감시와 압력을 받았다. 그는 기독교의 다른 교파들에 대해, 그리고 타 종교에 대해서도 매우 개방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가톨릭과 개신교에 대한 그의 입장을 묻는 질문에 대해, "우리가 스스로 만든 담들은 하나님을 가리울 만큼 그리 높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알렉산드르는 수많은 책을 저술했다. 첫 번째로 쓴 책이 '사람의 아들'인데, 지성인들을 위해 신약성경의 핵심들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마지막 일곱 번째로 쓴 책 '길과 진리와 생명을 찾아서'는 세계종교들에 대한 연구를 포함해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시간이 인류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이며, 세계고등종교들의 질문들에 대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기술하고 있다. 그는 러시아 정교회 전통 안에서 찾아보기 힘든 성경주석가, 성경 해설가였다.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정책으로 그에게 많은 자유가 주어지자, 자신의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느꼈다. 그의 생애 마지막 2년(1988-1990) 동안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공개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할 수만 있으면 대학교, 지성인 클럽, 중ㆍ고등학교 등 군중들 앞에서 많은 설교와 강연을 했다. 그의 강연과 설교를 듣기 위해 수많은 청중들이 모여들었다.

 2000년, 그의 죽음 10주년을 맞이하면서 러시아 경찰은 수사가 완결되지 않았음에도 그의 살해사건에 대한 조사를 종결한다고 발표했다.

 반유대주의자가 죽였다는 소문이 있지만,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KGB가 범인이라고 생각한다. 멘 신부가 살해당한 직후 그와 가장 친밀했던 신부 두 사람도 살해당했고, 그의 살해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나선 다른 친구들과 동료 신부들도 의문사했다.
 1990년 알렉산드르 멘은 살해당하기 전날 밤에 행한 그의 강연에서 자신의 삶의 목표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삶'이라고 했다. 그는 '구주로 고백한다'라는 이 말의 본래적인 뜻에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그는 두려움에 잘 길여들여진 당시 사회 속에서 '두려움 없는 삶을 산 대표적인 신앙인'이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는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항상 그의 청중들에게 귀가 울리도록 "하나님은 당신 삶의 첫 번째가 되어야 하는 동시에 삶의 전부가 되어야 한다"고 외쳤다.

 

입력 : 2002년 11월 16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 (32) '쌀 그리스도인' 논쟁

 

남정우 [조회수 : 1]

 


 러시아 내에서는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을 두고 상반된 평가와 견해가 있다.  첫 번째는 부정적인 시각과 평가이다.  1944년 헐리우드가 제작한 '천국의 열쇠'라는 영화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천주교 사제 선교사가 중국에서 선교하며 생기는 일화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레고리 펙이 주연을 맡았는데, 그가 중국 선교지에 도착해 보니, 쌀과 뇌물에 이끌려 천주교인이 된 가짜 기독교인들만 가득 있었다.  이후로 '쌀 기독교인'이라는 표현이 등장했고, 이 문제가 오늘날까지 선교현장에서 문제시되고 있다.  특별히 러시아 정교회의 주장에 따르면, 천주교와 개신교와 수많은 군소교단들이 구소련지역에서 '쌀 기독교인들(Rice Christians)'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어떤 이는 선교현장에서의 이러한 행위는 '복음적 배임행위'이며, 심각하게 재고돼야 한다고 말한다. 캐스톤 연구소 소장인 로렌스 우젤도 말하길 "선교사가 돈으로 회심자들을 유혹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시골에 사는 러시아인들에게 성경책을 공짜로 주는 행위는 알게 모르게 미국 돈 50달러를 주는 것이 된다. 그리고 선교사가 주재하는 모임에 나오면 미국 여행을 시켜준다든가, 다른 종류의 유익을 약속하는 행위는 돈으로 신자를 사는 행위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복음 전파와 모순되는 행위이다"라고 평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기독교 선교 활동 현장에서 가난한 자, 궁핍한 자, 고난받는 자들에게 말로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공허한 것이 아닌가? 2천년 기독교 선교역사 가운데 구체적인 도움 없이 그냥 말로만 복음전파가 이루어진 예가 있더냐?"라고 반박하는 이도 있다.  어떤 선교사는 이렇게 말한다. "구소련지역은 심각한 경제적 고난을 겪고 있다. 이러한 지역에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도움을 줄 준비 없이 그냥 입만 가지고 들어가서 선교하는 것은 죄책감이 든다”  선교사들의 동기가 어떠하든지 간에,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들은 서구선교사들의 입국과 선교활동을 개종화 작업이라고 비판한다.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대외관계부에서 일하는 알렉산드르 드보르킨은 구소련 지역에서 서구 선교사들이 여러 가지 선교활동을 전개하는 현실에 대해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인도주의적 구제활동, 영어 교육, TV를 비롯한 다양한 대중매체를 이용해 선교하는 행위들을 악평한다.  스몰렌스크와 칼리닌그라드 대주교인 끼릴도 1996년 브라질에서 열린 WCC 선교와 전도 분과위원회 모임에서 "달러를 들고 외국에서 들어온 외국 선교사들이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이용해 전도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람들을 돈으로 사려는 행위이며, 러시아를 겨냥한 십자군들이다. 이것은 즉시 중단돼야 한다. 이러한 행위는 영적인 식민주의를 만드는 행위이다"라고 비난했다.  총대주교 알렉세이 2세도 1990년대에 여러 차례 걸쳐 "대단한 조직력과 자금력을 갖춘 서구 선교사들의 유입은 새로운 시장을 노리는 열심당원들이다"라고 했다.  1980년대 후반 소련과 중동부 유럽에서 정치적인 장애물이 갑자기 없어짐에 따라 구 소련 지역에서 사역하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했다. 1982년 1백50명, 1981년에는 3백11명, 그리고 1991년에는 6백91명, 1997년에는 구 소련 지역에서 대략 5백61개 선교단체, 5천6백6명의 선교사들이 사역을 했다(이후 감소추세에 있다).  만일 해체되기 전 15개국을 소련이라고 하는 하나의 나라로 간주한다면, 이것은 단일 국가로서는 선교사가 가장 많이 파송된 나라이다.  소련 국민 2억8천7백만 명을 백분율로 나누어 본다면, 소련은 개신교 선교활동의 최대 사역지 중의 하나가 됐으며, 약 10여 년간 사역의 결과로 많은 장로교회, 감리교회, 개혁교회들이 세워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신교의 성장과 함께 러시아정교회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데, 2000년 1월 현재 약 9천5백여 개의 교회당이 러시아전역에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러시아 선교 현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우리는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의 정교회 지역을 계속 선교해야 하는가? 아니면 선교를 중단해야 하는가?  또 계속 선교를 해야한다면 어떠한 전략을 가져야 하는가?

 

입력 : 2002년 11월 23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33) 복음 기다리는 영혼들

 

남정우 [조회수 : 1]

 


동방 정교회 지역 선교전략 ②

 1991년 구소련 붕괴 이후 서구에서 들어간 5천명 이상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주로 하는 일이 무엇인가?

 기독교 선교사들의 가장 뚜렷한 사역은 세계 28개 교단, 선교회, 성서공회들이 참여한 성경 배포 및 기독교출판물 배포 사업이다.
 1987년 이래로 구소련 지역에서 4백4십6만2천5백7십6권의 성경책이 출판됐다. 신학교 교육을 위한 지원사업도 있었다.

 현재 구 소련 지역에 존재하는 1백20여 개 개신교 신학교들을 돕기 위해 신학교육 해외지원협회, 맥클랠란 재단, 그리고 러시아 교역자회가 연합해 러시아어로 된 신학책 5천 권을 마련하고 개신교 신학 연구발전 기금을 모았다.

 이 연합기관이 공동으로 80권의 신학 책을 복사, 30만권으로 만들어서 3천여 명의 신학생들이 강의시간에 사용하도록 도왔다.
 그리고 구 소련 지역 공립학교에서 기독교 윤리를 가르치고 전도활동을 하는 일에 85개의 선교 기관들이 협력했다.
 알바니아 난민들을 돕는 일에는 65개 선교단체가 협력했고, 교회개척을 위해서 수많은 교역자들이 합력했다.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서 1991년 러시아인 피터 데이네카(Peter Deyneka)가 '러시아인 사역자들'이란 단체를 설립해 슬라브어권 선교사역의 동역자들을 서로 연결해주는 일에 자문역할을 했다. 결과 2백70여 교회에게 도움을 줬고, 수많은 교회적 공동체들이 구 소련 지역에서 선교사역을 수행했다.

 두 번째 주요사역은 교회개척이다. 2000년도 모스크바에서 출판된 '러시아 통계자료'에 의하면, 감리교회가 67곳, 장로교회가 1백85곳이 등록했다.

 이외에도 서구 선교사역자들의 상당히 많은 숫자가 구 소련 지역의 여러 지역 주민들을 선교하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기고 있는데, 특별히 그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분야로서 (1) 라디오 방송, 출판, 영화 비디오 제작 및 배포를 통한 사역활동 (2) 주일학교, 신학교, 평신도 교육 등을 지원하기 위해 토착 지역교회들과 협력하는 사업 (3) 결혼생활, 가족생활, 청년활동, 감옥선교, 알콜 중독자 상담, 마약 문제 상담 등을 위해 전문적인 경험과 지식을 함께 나누는 사역 (4) 스포츠, 수련회, 드라마 공연 등 서구 개신교 신앙활동의 다양한 모습들을 소개하는 활동 등을 통해 그리스도를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개신교 복음전도자들의 구체적인 노력들의 실례들을 언급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모스크바에 본부를 둔 '코 크리에이션'이라는 단체는 '러시아 어린이 선교 프로젝트'에 따라서 20만 명 이상의 러시아 고아들과 러시아 교육부 관할 하에 있는 1천 개의 고아원에 기독교 서적들을 제공하고 있다. 청각장애인들을 전도하기 위한 한 단체는 청각 장애인들을 위한 성경공부 모임을 조직하고 청각 장애인들을 위한 학교를 개설해 기독교 윤리와 다른 교육 커리큘럼을 가르치고 있다.

 구세군은 거리와 극장에서 복음을 전하고, 감옥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동시에 수 톤의 옷가지류를 러시아인들과 구 소련 지역 국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있다.

 이러한 서구 선교사들의 다양하고 열성적인 선교사역에 대해 러시아인들은 어떠한 해석과 평가를 내리는가? 침례교회와 오순절교회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 토착교회의 해석과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구 소련 시대 복음주의 침례교 연맹 회장직을 역임했던 그리고리 코멘단트(Grigori Komendant)와 같은 종교 지도자들을 포함해 수많은 러시아 정부지도자들이 서구 선교사들의 활동과 도움에 대해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한다.

 "하나님을 찬양하라. 우리를 찾아온 외국인 선교사들을 인해 주님을 찬양하라. 미국에서의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러시아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는 미국인 선교사들을 본 수많은 청년들이 깊은 감동을 받고서 용기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응답하기로 결심하는 역사가 있었다굨”

 서구 선교사들이 보내 준 성경, 기독교 방송, 기타 수많은 도움들에 대해 감사편지가 많았는 데 그 중에 어느 러시아 여성이 보낸 편지의 한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당신을 인해 주님께 감사한다. 당신의 설교와 구원의 메시지를 인해 감사한다. 나에게 하나님에게 다가가는 길을 가르쳐 준 당신께 감사하며, 하나님이 내 인생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 알게 해 준 당신께 감사한다. 나는 매주일 토요일과 주일에 당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다린다. 나는 주님을 아는 즐거움을 간증했는 데 내 간증을 들은 이웃과 나의 직장 동료들도 당신의 프로그램을 듣고자 시간이 되면 라디오에 귀를 기울인다. 나는 당신이 보내준 소책자들도 잘 읽고 주변 사람들과 함께 돌려보았다굨" 과거 70년 간 복음에 굶주린 러시아 영혼들은 선교사들의 가르침과 사역을 기뻐하고 환영한다.


 

입력 : 2002년 11월 30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34>/특별한 환경 특별한 선교

 

남정우 [조회수 : 1]

 


 1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의 개혁ㆍ개방정책으로 점증하던 서구 선교사들의 숫자가 1991년 이후에는 급격하게 증가했다. 물밀듯이 구소련지역으로 밀려오는 서구 선교사들과 이들의 왕성한 사역들에 대해 환영하던 러시아인들의 태도가 이제는 차츰 부정적인 시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1993년 구 소련 10개 공화국 민족 기독교 지도자들로 구성된 개신교 연합회에서 서구 선교사 연합회 앞으로 보낸 공개 서한에서 지난 10년 동안 서구 선교사들의 수고와 지원과 사랑에 감사한다는 메시지를 전함과 동시에 편지 후반부에서는 서구선교사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1993년은 서구선교사들의 교회가 구 소련 지역 토착민 교회의 수자를 압도적으로 능가하기 시작하던 때이다).

 "모스크바에만 등록된 서구선교사 단체들의 수자가 1백 개를 넘어섰다. 그리고 각각의 선교단체들은 자신의 선교 프로그램을 가지고 토착교회 회원들을 고용해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나는 토착민 교회 교역자로서 서구 선교사들과 경쟁할만한 능력이 없다. 내가 돌보던 교회의 우수한 교인들도 이제는 선교사들과 함께 다니며, 그들과 함께 사역하는 것을 더 기뻐한다. 그들은 선교사들로부터 일정한 보수도 받는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토착민 교회 교역자들은 이제 외국 선교사들을 경계하게 됐고, 자신의 양떼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일회성 쇼맨십 같은 서구 선교사들의 전도 캠페인으로 인해 러시아인들은 개신교에 대해 저항감을 가지게 됐고, 서구 문화의 침투에 대항해 우리의 문화와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점차로 고조되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의 평가는 시종일관 부정적이었다.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되자 마자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 알렉세이가 서구 선교사들의 활동을 비난하는 글을 발표했다.
 "중동부 유럽이 선교사들의 공공연한 활동과 전도활동을 허락하자, 천 년 동안 정교회 신앙에 뿌리를 박고 살아온 정교회 신자들이 개종화의 대상이 됐다. 우리가 보기에 마치 장사꾼들과 같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외부에서 들어온 선교사들과 전도자들이라고 불렀다.……물론 우리 정교회 신자들은 이러한 침략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것이다. 이보다 더한 무신론자들의 혹독한 핍박 가운데서도 살아남은 우리들이 이런 고난쯤이야 문제없이 극복할 것이다."

 에모리 대학의 법학자인 존 위테(J. Witte)에 따르면 "모스크바 총대주교 알렉세이 2세는 물질로 러시아인들을 끌어들이려는 선교사들의 활동뿐만 아니라, 선교사가 러시아에 들어오는 것 자체를 반대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동유럽에 천주교, 개신교 선교사들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불법적인 일(improper)'이라고 규정한다. 1992년 3월 알렉세이 2세를 비롯한 동유럽 대주교 12명이 이스탄불에 모여서 동유럽에서 새로운 가톨릭이나 개신교가 주도권을 쥐는 일이 없도록 아예 처음부터 싹을 자르자는 제안에 모두 동의했다. 거기에 모인 주교들은 가톨릭과 개신교가 러시아와 동유럽지역을 선교지(terra missionis)로 여기는 사실에 대해 놀라움과 분노를 표시했다. '복음이 수 백 년 동안 이미 전파된 이 지역을 어떻게 선교지로 여길 수 있느냐?'는게 그들의 공통된 불만이었다.

 서구 선교사들을 반대하는 정교회의 행동은 가끔 공공연하게 이뤄졌다. 1997년 2월 3일 두 명의 러시아정교회 사제가 약 2백 권의 러시아어 어린이 성경이 불타는 현장을 감독했다. 그 성경은 1991년 이래로 기독교 서적과 대략 3억 1천만 달러가 넘는 구호품을 보내고 있는 미국의 기독자선단체 조시 맥도웰 협회(Josh McDowell Ministries)에서 보낸 것이었다. 이 협회 자원봉사자들이 모스크바 북쪽 50 마일 떨어진 셈크호즈(Semkhoz) 마을 23번 학교에 도착했을 때 두 명의 사제와 무장한 정교회 신자들 24명이 길을 가로막았다. 그 중에 한 명인 사제 블라지미르가 이렇게 말했다.

 "만일 미국인들이 무신론의 터널을 지나온 러시아인들을 돕고 싶다면 우리의 교회와 수도원을 복구하는데 먼저 협조하라. 우리의 인쇄공장을 복구해 우리 손으로 전도책자를 만들어 배포하게 하라. 선물을 준다고 하면서 다른 신앙을 전하는 일을 이제 그만둬라굨"
 동유럽과 구소련지역은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특수한 선교지역이다. 유사기독교 이단이라 할 수 있는 공산주의 이념에 감염됐던 지역이며, 기독교의 한 갈래인 정교회의 전통과 문화를 지닌 지역이다. 방사능에 오염된 지역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구원하고 도시를 재건하는 일을 위해서는 특별한 준비와 장비가 필요하듯이 공산주의 이념의 지배를 받던 정교회지역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선교전략과 다른 전략을 필요로 한다.

남 정 우
전 러시아 선교사
서울여대교회 목사

 

입력 : 2002년 12월 14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35) 동토 녹이는 성탄 분위기

 

남정우 [조회수 : 1]

 



 12월 25일은 추정상의 예수 탄생일이지 확실한 날짜가 아니다. 처음에 몇몇 신학자들이 누가복음 1장에 기록된 대제사장 사가랴가 성전에 들어가서 직무를 보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6개월 후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한 때를 추정하고, 거기에 9개월을 첨가해 성탄일의 날짜를 밝혀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확실한 결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날짜를 12월 25일로 정한 최초의 인물은 3세기 초 히폴리투스로 추정한다.
 그는 수태로부터 십자가형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생애는 정확하게 33년이며, 그 두 사건은 모두 3월 25일에 발생했다고 확신했다. 그는 수태로부터 9개월을 계산해 12월 25일이 예수의 생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생각과 주장은 객관적인 신빙성을 얻지 못했다.

 초대교회는 성탄절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절기로 지키지도 않았다. 게다가 성탄절의 시기에 대한 교부들의 생각은 제각기 달랐다. 클레멘스는 5월 20일을, 다른 사람들은 4월 18일, 4월 19일 등을 주장했다. 동방정교회는 1월 6일을 예수의 수세일로 지키는 동시에 그 날을 영적인 출생일 혹은 주현절(30년 동안 개인으로서 지내시던 예수가 공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타나신 때)을 성탄절의 의미로 지키게 되었다. 그때가 3세기 중엽이었다.

 플라톤 사상과 신플라톤 철학사상이 지배적이던 알렉산드리아 대교구의 교회 교부 클레멘스와 그의 영향을 받은 바실리우스, 그리고 이들의 영향을 받은 동방정교회는 예수가 육신적으로 태어난 날은 별로 의미가 없고, 중요한 날은 예수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신 그날(주현절, Epipany)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이러한 전승이 4~5세기에 교회교부들은 예수가 그날에 동정녀에게서 태어났 던지, 세례를 받아서 영적으로 태어났던 지 1월 6일이 예수의 탄생일이라고 선포했다.
 이후 로마제국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지고 8∼9세기 이후에 동방정교회 전통이 확립되면서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키는 풍습이 굳어지게 됐다.

 1993년 12월 말 모스크바 밤거리는 몇 개의 가로등 이외에는 불이 켜져있지 않았고 캐롤도 들을 수 없었다. 백화점에서도 크리스마스 선물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과거 수 백 년 동안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킨 예가 없었기 때문이다굨 또 한 가지 이유를 말한다면, 소련의 붕괴 이후에 전력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성탄절 트리를 만들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됐다. 대신에 양력 1월 1일이 되면, 새해가 시작됐다고 크게 기뻐하며, 이웃을 만나면 "즈 노바밤 고다! Happy New Year!" 서로 반갑게 인사한다. 보통 2∼3일을 공휴일로 보내면서 온 도시와 아파트가 축제 분위기를 가진다. 반면에 러시아 정교회가 성탄절로 지키는 1월 6일에는 몇몇 정교회 성당에서만 주현절을 기념하는 미사가 드려지고 별다른 축제나 행사없이 그냥 지나간다.

 그러나 러시아 모스크바는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다굨 필자가 1997년 12월 성탄절에 모스크바를 떠나올 때 모스크바의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장식물들이 나타났다.
 백화점에서는 성탄절 기념 선물들이 진열됐고, 외국인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에서는 성탄절 기념 선물을 준비해 가난한 노약자들과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했다.

 모스크바에서 12월 25일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성탄절 축제 분위기를 자아내기에 적합한 환경이다굨 최근 모스크바에서는 12월 25일 성탄절 풍속이 모스크바 시민들 가운데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있다.

 물론 러시아 정교회가 그 것은 로마제국의 농신제에서 비롯된 이교도 풍속이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국제도시인 모스크바는 경건한 종교심에서 보다는 시민생활 풍속의 측면에서 점차로 수용되고 있다. 이제 12월 중순이 되면 간판 여기저기에 '라쥐제스트보, Merry Christmas' 라는 글씨의 네온사인이 나타난다.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를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함께 축하하는 국제적인 분위기가 러시아에서도 점점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입력 : 2002년 12월 21일 00:00:00

 

동방정교회이야기/ (完) 이해와 수용, 선교의 지름길

 

남정우 [조회수 : 4]

 


 지금 정교회와 개신교는 무엇을 '개종화(proselytism)'라고 하는가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일에 많은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다.  이 문제의 본질은 '믿는다는 것'과 '누구를 신자라고 규정하느냐' 하는 질문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개신교 지도자들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로 고백하고 예배를 드리며 기독교적인 삶을 살 때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교회는 어떤 러시아인이 유아세례를 받았다면, 그가 믿든 안 믿든 정교회 신자라고 생각한다.

 정교회는 러시아에서 개신교의 선교활동은 개종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정교회는 동유럽은 모두 자기네 땅이라고 생각한다. 러시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그리고 시베리아는 역사적 전통적으로 정교회가 지배적인 지역이었으며, 수 백 년 동안 교회 지도자들은 슬라브 민족의 신앙과 문화와 역사와 전통과 땅을 보호하는 책임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이런 생각 때문에 개신교 전도자들이 비기독교 신자들을 전도하는 것도 개종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정교회 신자들이 많다. 그러므로 "나는 정교회 신자다"라고 응답한 러시아인들 중에 상당수는 "나는 러시아인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서구인들이 보기에는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러시아에서는 '내가 러시아인이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나는 정교회 신자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고 여기고 있다. 정교회 신앙과 민족적 정체성이 구분되지 않고 오랫동안 통용돼 온 것이다.

 물론 개종화 작업과 합법적인 복음전파 활동을 구분하는 하는 기준에 대해서는 동유럽에서 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마틴 마티와 프레드릭 그린스판이 편집한 책 '신앙의 강요: 현대 다원주의 사회 안에서의 개종화 작업과 시민의 자유' 안에 잘 다뤄지고 있다. 이 책은 개종화 작업뿐만이 아니라 복음전도활동에 대해서도 비난하는 에세이들로 가득차 있는데 결론 부분에서 마티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기고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해 논리적인 결론을 내린다면, 교회 담장 밖에서는 개인의 신앙적인 확신이나 경험을 말하는 것은 모두 불법이 될 것이다굨 오늘날 서구 기독교인들은 정치적으로는 정당할는 지 모르나 모두 다 '관용'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다. 개인의 신앙고백조차도 무례한 행동이라고 간주하려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다. 개인의 확신과 신앙적 확신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 미덕으로 간주되는 사회는 겉으로는 평화스러운 사회가 되겠지만, 속으로는 약 먹은 병아리 모양으로 무기력증에 빠질 것이다"

 소련 시대 국가 정책의 영향도 있겠지만 러시아에서 정교회의 지배력은 문화, 종교 영역에서 계속 남아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런 사실을 수용하지 않겠지만, 정교회에 불만을 가진 개신교 신자들은 러시아가 정교회를 보다 순수하게 개혁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최근에 와서는 정교회 고위성직자들이 구 소련 시대 정부와 긴밀하게 관련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러시아인들을 구원할 참다운 신앙은 오직 개신교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동시에 많은 지성인들 중에서 개신교 신앙생활이 보다 개방적이고 개혁적이라는 사실에 매력을 느끼고 개신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종교개혁 운동이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 자극을 주어 가톨릭교회를 보다 순수하게 만든 것처럼, 타락하고 무기력해진 정교회가 보다 순수하고 생명이 살아있는 정교회가 되도록 돕는 자극제 역할을 러시아에서 개신교회가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마틴 마티의 말에 따르면, 기존 사회에 도전자들은 크게 두 가지 일을 하는데, 기존의 사회공동체를 자극해 자기 자신을 지키려는 움직임을 자극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체됐던 사회분위기를 활성화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질문은 오늘날 러시아 사회가, 특별히 러시아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정교회가 종교적인 다양성을 수용할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오히려 외국선교사들의 활동이 정교회를 더욱 보수적으로 만들어서 독점은 아니라 할 지라도 정부의 도움을 구해 자신을 지키려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다.

 그렇게 되면, 개신교 선교활동 뿐만 아니라 정교회 자신에게도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세속적인 권력을 의지하는 교회는 서구역사에서 이미 잘 보여졌듯이, 그 영성과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개방과 더불어 희망에 부풀었던 러시아 사회는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면서 일종의 무감각, 무의욕 상태에 접어들고 있다. 러시아는 어느 곳에서도 옛 기운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의 징조를 찾을 수 없다. 사회적인 무질서와 정신ㆍ도덕ㆍ영적인 무질서 가운데서 방황하고 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정교회와 개신교 지도자들이 서로 비난하고 헐뜯으면서 시간을 낭비해 버린다면 이 얼마나 슬픈 비극이 될 것인가! 개신교와 정교회는 구 소련의 현실을 직시하고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상처 입은 양들을 치료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협력해야 할 것이다. 국가정부를 의지하던 그 습관은 벗어버리고 정교회 스스로 서는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새로워질 수 있다. 개신교 지도자들은 구 소련 지역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고, 파송하는 선교사들이 정교회를 비롯한 구 소련 지역의 주민들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한 시가 급하다. 서로 마귀라고 비난하고 상처낼 여유가 없다. 서로 존중하고 자비를 베풀며 겸손하게 행하는 것, 이것이 최선의 지혜로운 해결책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