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5. 6. 00:11ㆍ신학자료/1.신학자료
대부분의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동방정교회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도 그럴것이 정교회와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련하면, 붉은 공산주의 이미지가 있어서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의 문화와 역사, 그들의 종교에 대하여 호의적인 태도로 알아보려는 사람들이 아주 적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많이 달라질 것이다. 세월이 갈수록 러시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유고, 체코,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의 동유럽 국가들과 관계가 더욱 깊어질 것이며, 여러 가지 측면에서 교류와 협력을 필요로 할 것이다.
보다 효과적이고 바람직한 교류와 협력을 위해서는 상호이해를 요청한다. 동유럽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교회이해가 필수적이다. 정교회가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민족, 국가, 문화의 발전에 근간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불가리아,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동유럽의 여러 수도를 방문하면, 곳곳에 양파모양의 돔으로 건축된 수 십개, 수 백개의 정교회 성당과 수도원을 보게된다.
정교회는 정통교회의 줄임말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 Church)이다. 이탈리아 로마를 중심으로 하여 지리적으로 동쪽에 있다하여 동방(東方)정교회라 부르기도 하고, 미사예전과 주요 교리서적들이 희랍어로 되어 있다하여 희랍정교회라고도 부른다.
이들은 하나의 기독교회가 1054년 동, 서방교회로 나뉘어지기 이전의 교회전통, 즉 325년 니케야 공의회로부터 789년 제2차 니케야 공의회까지의 7개 고대 에큐메니칼공의회 결정사항과 교회전통을 원형 그대로 보존해온 유일한 교회임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정통교회, 혹은 정교회(正敎會)라고 부른다. 이렇듯 정교회라는 명칭 속에서 정교회가 그 나름대로 역사적 전통과 자부심을 강하게 지니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동방정교회는 로마카톨릭교회 못지 않게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다. 오랜 세월 그리스,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러시아 등지에서 남다른 만남과 역사적 고난과 시련을 겪었다. 동방정교회의 본산지인 콘스탄티노플로부터 9세기 중엽에 예술적 소양이 뛰어난 슬라브민족들에 의하여 수용된 정교회는 이후 이란, 아라크지역의 모슬렘으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았으며, 13-14세기에는 몽고군대로부터, 19세기, 20세기 초에는 프랑스(나폴레옹), 독일(히틀러) 등지로부터 카톨릭, 기독교의 위협을 받았으며, 20세기 초에는 공산주의 통치 하에서 수많은 고난을 당하였다.
이러한 만남과 시련을 겪어온 동방정교회는 로마카톨릭이나 기독교회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발전해왔다. 최근에는 70여년 동안의 공산주의 포로상태에서 벗어나 정교회 부흥을 통한 민족부흥을 도모하려는 움직임이 동유럽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앞으로 우리는 이 지면을 통하여 약 30회에 걸쳐서 동방정교회세계의 여러 가지 측면을 하나하나 자세히 재미있게 살펴보려고 한다. 동방정교회이야기/ (2)정교회 건물과 미사분위기 이러한 특징은 모두 비잔틴 기독교(330∼1453)의 영향 때문이다. 비잔틴 기독교란, 330년 콘스탄틴 황제가 로마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옮긴 이후 1453년 오스만 터어키 군대에 의하여 멸망할 때까지의 희랍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1천1백여 년의 기독교를 말한다.
지붕이 둥근 양파모양을 한 이유는 건축학상으로는 희랍의 바실리카 건축양식을 이어받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신학적으로는 교회는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왕궁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동방정교회당은 가능한 왕궁처럼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으려고 애쓴다.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을 초라하게 지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건물 내부 공간은 십자가형태로 되었는데, 머리부분에서 성직자가 문을 열고 회중 앞으로 나온다. 신자들은 입구가 있는 발부분을 지나 왼쪽 방으로 간다. 거기에 수없이 많은 이콘들 중에서 자기 세례명에 해당하는 이콘 앞에 가서 기도로 준비한다. 이콘은 기도를 돕는 보조수단이다. 이콘 앞에 가서 초를 켜고, 그 이콘을 보면서 기도를 드린다. 중앙으로 이동하여 성직자의 축복을 받는다. 다음 오른쪽 방으로 이동하여 성찬을 받는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정교회 신자들이 경건하게 미사드리는 모습이다.
성당 안에는 3가지가 없다. 의자가 없고, 바지입은 여성이 없고, 악기가 없다. 노약자를 위한 의자가 구석에 있는 경우도 있지만, 원칙적으로는 모두 서서 미사를 드린다.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 앞에서 경배하는데, 앉아서 드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은 모두 면사포 같은 것을 머리에 쓰고서 치마를 입고 미사를 드린다.
정교회는 여자 성직자를 허락하지 않는다. 12사도 가운데 여자가 없었기 때문이며,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가를 부를 때,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목소리가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통 성당 2층 뒷자리에 4∼5명, 혹은 8∼12명 정도의 남녀성가대원이 아카펠라로 노래하는데, 매우 아름답다.
정교회당의 내부 분위기는 약간 어둡고 신비로우며 경건하다. 사람의 목소리는 성무일과표를 낭송하는 성직자의 구성진 목소리와 성가대 이외에 거의 들리지 않는다. 정교회 신자들은 모두 위엄과 권위를 가진 왕을 경배하듯이, 조용조용 숨을 죽이며 성호를 긋고, 손을 모아 기도를 드린다. 초가 타는 냄새와 향이 교회당을 가득 채우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벽과 천장에 있는 수많은 성화들 속에서 성인들이 걸어나와서 거기에 서있는 정교회 신자들을 인도하여 그리스도가 달리신 골고다 언덕을 지나 영원한 낙원으로 인도하는 듯한 느낌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정교회당 분위기는 신앙적 감성을 자극하여 거룩한 느낌과 직관을 살아있게 하고, 신비의 하나님을 경험케 하려는 의도로 구성되어 있다. 동방정교회이야기/ (3)“동방정교회는 정통이다"① 현재 지구상의 인구 약 62억 가운데서 기독교인구는 20억 5천여만 명으로 추정한다. 전세계인구의 33.1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신봉하고 있다.
교인 2억1천만여 명 이들을 크게 세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보면 로마가톨릭교회 종교개혁교회 그리고 동방정교회 등 세 개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서 동방정교회 인구가 2억1천7백만 명, 로마가톨릭이 10억8천만여 명 그리고 기독교(종교개혁교회)가 약 8억4천여만 명으로 추산된다.(IBMR, 2002년 1월)
그러나 처음 기독교회가 시작될 때 정확히 말해서 주후 29년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기독교회 창립멤버는 1백20명에 불과했다. 당시 이스라엘을 포함한 지중해 연안 세계를 지배하던 나라는 로마제국이었으며 당시 세계인구는 1억을 넘지 않았다.
이미 로마제국 안에는 수 만, 수 십 만의 신자를 확보한 수많은 종교들이 있었다.
주후 1세기와 2세기에 기독교 선교의 상황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다.
로마제국의 속국 그것도 아주 작은 나라 유대나라에서 고집스러운 유대교의 한 분파처럼 보이는 신흥종교 기독교에 대하여 호의적인 관심을 가지는 로마시민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기독교는 로마세계의 극악범들을 처형하는 사형틀 십자가를 항상 앞세우고 그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영 꺼림칙하였다.
그리고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눈다고 하는 성찬식은 마치 카니발리즘(인육제사)을 연상케 하였고, 모든 로마제국 시민들이 다 하는 황제숭배를 거부하자 로마제국은 초대 기독교인들에게 엄청난 박해를 가하였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른 종교가 줄 수 없는 사죄의 확신과 부활신앙에 근거한 소망과 위로를 주었으며 초대 기독교인들의 순결한 도덕생활과 겸손과 형제우애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충성심으로 인하여 3백여 년이 지났을 때 로마제국 전역에 기독교신앙이 전파되었다. 로마제국의 왕족과 귀족 군인들 가운데에도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4세기 초 콘스탄틴 황제가 드디어 기독교를 공인하고 기독교가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자 기독교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동안 지하종교로 숨을 죽이며 숨어 지내던 기독교인들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황제들의 동상들이 파괴되고 제거되고 법령이 개정되었으며, 동시에 교회조직을 로마제국의 행정조직에 맞추어 체계화하였다.
읍 군 시 대도시 수도… 등 행정조직을 고려하여 교구제도(parish)를 도입하고 성직자들의 질서(계급)를 만들어갔다.
이러한 조직화 작업은 1백 년 이상 계속되다가 서기 325년 니케야 공의회가 열릴 즈음에는 5대 총대주교구가 확립되었다.
로마제국의 가장 대표적인 대도시이자 기독교의 역사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로마(이탈리아) 콘스탄티노플(터어키) 알렉산드리아(이집트) 안디옥(시리아) 예루살렘(이스라엘) 총대주교구가 5대관구로 정하여졌다.
'총대주교구 갈등'이 원인 이 다섯 개 총대주교구는 부모 자식처럼 상하의 관계가 아니라 형제들과 같은 동등한 관계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로마가 아버지 노릇을 하며 최상위권(Superemacy)을 주장하면서 5명의 총대주교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결국 로마 총대주교구는 1054년 분리되어 나가버렸다.
남은 4개의 총대주교구들은 이른바 동방정교회라고 불리우고 분리되어 나간 로마는 로마가톨릭 혹은 서방교회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남 정 우/ 前 러시아선교사·서울여대 교회 목사 동방정교회이야기/ (4)"동방정교회는 정통이다" 2 "동등한 형제" 논란 그리고 회의 결과를 자기 총대주교구에 알려서 공동 결의안을 가르치고 함께 지켜나가도록 하였다. 이러한 풍습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공의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아름다운 전통이었다. 이러한 전통을 마치 5형제가 함께 모여 의논하는 모습과 같다하여 협의회적 사귐(Conciliar Fellowship)이라고 하는데, 동방정교회는 이 전통을 매우 소중하게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러한 전통 가운데서 니케야공의회 칼세돈공의회 등이 열렸고 그러한 공의회의 결정으로 인하여 기독교는 교리적으로 선교적으로 보다 분명하고 일치된 입장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총대주교구 서열과 관련하여 논란이 있었다. 그것은 누구를 맨처음에 두느냐의 문제로, 5명의 총대주교들 간의 관계성에 대한 논란이었다. 이 문제는 451년 칼케돈공의회에서 확정되었다. 총대주교들은 모두 동등하며 로마 총대주교구가 단지 대표성을 지니는 것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로마 총대교구는 베드로 수위성(首位性)을 내세워 아버지를 대신하는 맏형 노릇을 하려고 할 뿐 아니라 감독권까지 행사하려고 하였다.
다른 총대주교들은 인정할 수 없었다. 우리는 동등한 형제들이며 아버지의 뜻을 잘 분별하여 함께 받드는 것이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이며, 예우 상 로마가 대표성을 지닌 것으로 못박았다(primus inter pares).
그러나 로마는 끊임없이 최상권(Superemacy)를 주장하였다. 최초의 갈등은 381년 니케야 콘스탄티노플에서 결의한 내용 가운데 성령의 출처에 관한 표현을 마음대로 로마가 바꾸어버린 일이었다. 공의회 결정문에 없는 "필리오케(그리고 아들로부터)"라는 라틴어 단어를 마음대로 삽입하여 로마 총대주교 관할 교회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약속 위반이었으며, 로마의 횡포였다. 신학적으로 다른 이견이 있거나 수정할 부분이 있다면, 다음 공의회에서 함께 토론하여 결정하는 것이 옳은 자세였다. 로마는 이후 군사력 경제력 정치력이 증가함에 따라서 점점 교만해졌으며 공의회의 결정을 무시하는 일들을 자주 행하였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터어키 군대에 포위를 당하여 악전고투하고 있을 때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로마총대주교청에 사신을 보내어 형제 총대교구를 군사적으로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로마는 추기경을 보내어 로마의 단순한 대표성이 아니라 최상권을 인정해 주면 지원을 고려할 수 있겠노라는 교만한 자세를 고집하였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며,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거절당한 콘스탄티노플은 1100년의 기독교 영광을 오스만 터어키 모슬렘에게 내어주었다. 지금 이스탄불에는 기독교의 모습이 거의 사라지고 마치 거세당한 모습으로 초라하게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4세기부터 확립된 '협의회적 사귐'의 전통을 소중하게 여기며, 자랑스럽게 여긴다. 어려운 문제나 중요한 문제가 있으면 효성이 지극하고 의좋은 형제들처럼 함께 모여 기도하고 의논하여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최선의 길을 찾는 협의회적 전통을 간직한 교회라고 자부한다. 정교회의 이러한 전통이 최근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소중한 것으로 평가되어 여러 측면에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민주성·구심점 모두 확보 로마가톨릭은 로마 교황청을 단일 꼭지점으로 하는 계층적 질서를 고집하고, 기독교(개신교)는 성경을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의 유일한 진리로 여긴다. 따라서 가톨릭은 민주성이 약하고 기독교는 성경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조정하고 지도할 구심력이 약하다. 동방정교회 전통은 그러한 약점들을 모두 보완해 주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21세기 세계 교회는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이루는데, 동방정교회의 회의방식과 협의방식이 가장 효과적이며 민주적이며 동시에 교회사적인 근거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정교회의 협의회적 전승이 재발견되고 있다. 동방정교회이야기/ (5)성화상(이콘)이야기 '이콘의 제작과 사용이 우상숭배가 아니냐'는 질문이 오래 전부터 교회 안에서 제기되었다. 그러나 주후 787년 제7차 고대 에큐메니칼공의회에서 이콘 제작, 사용은 합법적이라고 결의하였다. 그 신학적인 주요 근거는 "하나님의 성육신으로서의 그리스도 이콘" 신앙고백이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형상(이콘)으로 나타나셨는데,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 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교회도 이콘을 제작하여 존숭(尊崇)하는 것은 합당하고 판단을 한 것이다.
이런 판결이 내려지기까지는 수 백년 동안 이콘 반대주의자들(iconoclasts)의 거센 항의가 있어왔다. 그러나 제7차 공의회에서 결국 이콘숭배자들(iconophiles)의 입장이 옳다고 판결을 내림으로써, 이콘 숭배가 교회법적으로 합법적인 행위가 되었다.
동방정교회는 이 판결이 "이교도를 이긴 정교회 신앙의 승리"라고 해석하고, 매년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을 축일로 기념해 오고 있다. 매년 이 날이 되면 옛날 신앙의 선배들이 성상파괴주의자들과 이교도들과 이단들의 공격에 용감하게 대항하여 순교의 피를 흘리며 싸워 이겨서 이런 승리를 얻게 되었으며 정교회 신앙을 지켰다고 가르친다.
전설에 의하면 최초의 이콘 화가는 누가였다고 한다. 오늘날 러시아 불가리아 그리이스에는 정교회 신학교 안에 이콘학과가 따로 있다. 거기서 이콘의 신학과 이콘의 역사, 이콘 그리는 기술 등을 배운다.
이콘의 종류는 수 천 가지가 넘는다. 그러나 이콘의 주된 내용은 주로 △그리스도 이콘 △성모 마리아 이콘 △성인들의 이콘 △천사들의 이콘이다. 대체로 정교회 성당 정면 중앙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콘이 있고 그 좌우에는 세례 요한과 성모 마리아의 이콘이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아담으로부터 모세 선지자들의 이콘이 위로부터 아래로 층층이 있고 예수 이콘 아래에는 사도와 속사도 교부들 성인들의 순서로 이콘이 위치한다. 그 외에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이야기들 성인들의 전설과 행적을 그림으로 묘사한 이콘들이 벽 천장에 붙어있다.
역사적으로 주후 1, 2세기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등지의 교회 유적에서는 이콘이 나타나지 않는다. 십자가 물고기 형태 등의 단순한 기독교 상징물들만 나타난다. 4∼6세기에 비잔틴 황제들이 세운 교회유적들 가운데 모자이크 형태의 이콘들이 발견된다. 모자이크 이콘은 고대 그리스의 대리석 건축 예술문화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문화이다.
그러나 726년에 시작된 우상타파 시대에 하기야소피아를 비롯한 제국 내 모든 교회의 성화 모자이크들이 파괴되고 대신에 단순한 십자가 형상이 그려졌다. 843년에 우상타파의 시대가 끝나고 종교적인 성화들이 다시 그려지게 되었고, 하기야소피아 대성당 내부는 황제의 명령에 의해 프레스코화(벽화)와 모자이크 이콘으로 다시 장식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보는 이콘, 오래된 나무판 위에 그려진 성모 마리아 이콘 같은 것은 9세기 불가리아에서 그리고 11세기 이후 러시아에서 발전한 것이다. 벽에다 그리는 프레스코화나 모자이크와는 달리 나무판에다 이콘을 그리기 시작한 이유는 전쟁이나 화재와 같은 재난이 발생했을 경우 쉽게 옮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콘은 초대기독교의 전승이 아니라 동로마제국의 문화적 영향을 받은 동방정교회의 독특한 기독교문화이다. 동방정교회이야기/ (6) 성화상(이콘)이야기 2 이콘은 정교회 신자들의 경배의 대상이며 예배의식 가운데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이콘은 정교회 신앙을 표현하는 주요 매체이다. 이콘은 성경의 가르침에 부응하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서 만들어져서 교회전승 가운데서 보존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보이는 말씀'
그래서 교회 안에는 두 종류의 말씀이 있는데 들리는 말씀과 보이는 말씀이 있다고 본다. 들리는 말씀은 성경을 읽는 소리에 의하여, 보이는 말씀은 말없이 말씀하시는 이콘에 의하여 교회 안에 충만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정교회는 아주 작은 규모의 예배의식 가운데에서도 이콘을 사용한다. 정교회 공동체 활동에서 이콘이 빠지는 경우는 없다. 이콘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느끼는 통로인 동시에 예배의식을 구성하는 주요 부분이며 정교회 신앙고백의 내용이 내포된 거룩한 이미지이다. 그러므로 이콘의 의미 내용은 정교회 안에서 정교회 신자들의 삶 속에서 그 깊은 의미가 드러난다.
정교회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콘의 역할은 주로 기도를 돕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는 인간적인 흥분 감정이 없어야 하고 외적인 세상 일들에 대하여서는 귀먹은 상태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룩한 것을 거룩한 스타일로 생각해야 한다. 현란하고 감정적이고 색으로 충만한 저속적인 방식으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인간의 오감에 기초한 현란하고 무질서한 이미지들을 사용하면 그것을 보는 사람의 순수한 마음도 무질서해지고 현란해질 것이다. 그래서 정교회 신자들은 이콘을 보며 기도를 드린다. 참다운 기도 영적인 기도를 하도록 가이드 역할을 해주는 역할을 이콘이 한다고 생각한다.
일반 신도들의 경우 부모님 기일이나 아들의 입대 자녀의 출산 등을 앞두고 기도할 일이 있으면 성당을 찾아가서 교회 입구에 마련된 상점에서 초를 구입한다. 정교회 예배시간에 헌금시간이 따로 없다. 십일조 드리는 사람도 거의 없다. 대신 초를 구입하는 것이 그 교회 헌금의 일부가 된다. 그런데 간절히 기도할 것 같으면 굵은 초를 여러 개 구입한다.
중요한 교회 절기 때나 전몰자 추모일이 같은 민족적인 기일이 있는 날에 정교회 성당 안에 들어가 보면 수많은 초가 타는 냄새로 가득하여 질식할 것 같다. 어떤 경우에는 촛대가 넘어져서 화재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성당을 출입한 신자들은 그 냄새가 거룩하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아니지만 신도들은 초가 불타고 있는 동안 자신의 기도가 하늘로 올라간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세례명에 해당되는 이콘을 찾아서 그 앞에 초를 밝히고 성호를 긋고 이콘을 조용히 오래 보고 있으면 현란하고 감정적인 인간의 마음, 세상적인 마음이 사라지고 영원하고 거룩한 영적인 세계로 마음이 인도된다. 이때 자신의 소원을 빈다.
'보이는 기도'
이렇게 이콘은 메타노이아(회개-마음을 돌이킴, 세속적인 것에서 거룩하고 영적인 세계로)를 이루도록 도와주는 주요 매체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콘은 기독교 신앙생활의 하나의 수단이요 따라야 할 하나의 모범적인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콘은 하나의 보이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이콘의 본래적인 목적은 인간의 자연적인 감성을 자극하거나 영광스럽게 하는데 있지 않다. 이콘은 인간의 감성적인 감동을 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반대로 우리의 지·정·의를 변모시키는데 그 주요 의도가 있다. 그래서 이콘에 그려진 사람들의 얼굴표정과 피부색깔 자연의 색과 주변 배경 등이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현실의 색깔과 모습과는 다르다. 그것은 이콘은 종말에 죄를 벗어버리고 예수 재림 시 영화롭게 변모된 거룩하신 성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그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동방정교회이야기/ (7)성화상(이콘)이야기 ③ 실제로 기독교 신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하고 다양한 표현들을 통하여 신앙을 전승시켜 왔다. 그런데 신앙을 표현하고 전승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시대와 장소 그리고 민족적인 특성에 의하여 그 선호하는 표현이 달랐다. 다르게 표현되고 다르게 전승되어온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육체 가운데 거하는 우리의 영혼은 자칫 잘못하면 기도를 하면서도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경우가 허다히 많으며 어떤 경우에는 올바르게 기도하는 것 조차도 모르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이콘은 기도의 가이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콘을 대하는 동방정교회 성도들의 태도는 각별하다. 동방정교회 성도들은 주로 이콘을 통하여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고, 신앙을 전승해 왔다. 이콘을 대하는 정교회 신자들의 태도는 거의 숭배수준이다. 현실적으로 적절한 성경교육을 받지 않은 정교회 신자들 사이에서 이콘은 단순히 기도를 돕는 하나의 거룩한 매체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많은 경우 이콘이 부적이나 집안 가보처럼 여겨지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 신자들의 경우 이콘을 집 안에 둘 경우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 창문가에 둔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그 이콘을 바라보며 성호를 긋고 입을 맞추기도 한다. 그 앞에 촛불을 켜서 마치 제단같이 꾸미기도 한다. 멀리 여행을 떠나거나 전쟁터에 나갈 때 혹은 환자를 위문할 때에도 작은 이콘을 가지고 간다.
성경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콘에 대한 경의는 우상숭배에 빠질 위험성을 다분히 지니고 있다. 그리고 민족 시대 화가에 따라서 이콘의 모양과 색깔과 스타일이 천차만별이며, 그 중에는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는 이콘도 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콘 숭배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대하였다(기독교강요 1권 11장).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어떠한 회화적 표현도(every pictorical representation)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 주된 이유는 그것은 인간이 자기 멋대로 하나님에 대해 꾸며대는 것이기 때문이며, 두 번째로는 그 어떤 형상을 사용하든 곧바로 우상숭배로 빠지게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인간 예술의 기능과 한계를 알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콘은 정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설교가 강조되고 18세기 이후 계몽주의 과학주의의 세상을 경험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신비적인 측면과 거룩성과 영원성이 많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 세계는 거룩한 상징과 거룩한 이미지들을 필요로 하고 있고 찾고 있다. 이와 맞물려 이콘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 한 예로 헨리 나우웬이 쓴 이콘과 더불어 기도하기라는 부제를 지닌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우러러'라는 책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남 정 우前러시아선교사·서울여대교회 목사 동방정교회이야기/ (8)성화상(이콘)이야기 4 이 성화상은 안드레이 루블료프(1430년 사망 추정)가 그린 것이다. 안드레이는 러시아가 몽고의 지배를 받고있던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 많은 기도와 고행으로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당시 모스크바 근교에서 엄격한 수도생활을 하고 있던 세르기이 라도니쉬끼이의 정신적인 감화를 많이 받았다. 사실 삼위일체 성화상을 그리게 된 주요 동기도 세르기이를 존경하는 마음과 당시 여러 귀족들에 의하여 분열되어 있던 러시아의 단합과 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대표적 삼위일체 이콘 개신교 신자의 입장에서는 성화상에 대하여 신학적인 문제는 차지하고서라도 우선 정서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점들이 많이 있다. 특별히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일에 대하여서는 처음부터 거부반응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화상을 그리는 화가들 사이에서는 비잔틴제국 시대부터 창세기 18∼19장에 나와있는 바, 세 천사 모습으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모습을 소재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동방정교회 이콘화가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주제로 한 수많은 성화를 그렸다. 이런 성화를 구약성경 창세기를 소재로 그렸다하여 흔히 `구약의 삼위일체'라고 흔히 말한다. 수많은 삼위일체 성화들 중에서 러시아의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그린 삼위일체 성화상이 예술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가장 훌륭한 삼위일체 성화상으로 간주된다.
이 성화상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1960년 유네스코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 있다. 유네스코는 1960년도를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해'로 전세계에 공표하였다. 그러자 당시 소련의 서기장이던 스탈린은 세계 여론을 의식하여 공산혁명 이후 국가에 몰수되어 감옥 및 기숙사로 사용되고 있던 모스크바의 안드레이 수도원을 급하게 수리하여 안드레이 박물관으로 만들어서 외국 관광객들을 유치하였는데, 최근에는 다시 수도원으로 복원되었다.
이 성화상의 내용을 보면, 왼쪽에 성부 하나님이 있고 그의 머리 위에는 건축물이 있다. 그것은 창조주의 사역을 뜻한다. 중앙에는 성자 하나님이 있고 그의 머리 위에는 소나무 같은 나무가 있다. 그것은 생명과 나무 십자가를 뜻한다. 오른쪽에는 성령 하나님이 있고 그의 머리 위에는 가파른 산이 있다. 그것은 영적인 생활을 의미한다.
구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여러 개의 역삼각형 구도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이 성화상의 주제가 `화합과 통일'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성화상은 다양성과 통일성의 모델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실제로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이 성화상의 정신을 따라서 당시 몽고의 지배 밑에서도 여러갈래로 분열되어 있던 러시아의 상황을 안타까이 여긴 나머지, 러시아 민족이 다양성 통한 통일성과 조화를 이루어 평화를 이룩하자는 메세지를 전할 마음을 가지고 이 성화상을 그렸다고 한다.
'삼위일체론적 삶’ 강조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과 예배를 강조해 오고 있는 개신교회는 최근에 들어와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신학과 예배를 강조하는 움직임으로 변하고 있다(참고:몰트만). 동방 정교회와 로마카톨릭교회와 개신교회 간의 조화와 일치, 자연과 인간과 하나님과의 조화, 그리고 백인과 황인과 흑인 간 인종적 조화와 일치와 사랑을 추구하는 인류 공동의 과제에 대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학이 제시하는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의미가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절대적이고 완전한 사랑(아가페) 안에서 하나를 이루고 있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목표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코이노니아적인 삶 속에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죽기까지 절대 복종하시는 성자 예수,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성부 여호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과 복종을 증거하시는 성령…. 모두가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타자를 위하여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삶 안에서 하나를 이루고 계시는 하나님의 삶이 곧 삼위일체론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입력 : 2002년 05월 25일 00:00:00
이러한 전설이 러시아에서는 다음과 같이 구전되었다. 예수님이 답신과 함께 자신의 얼굴을 닦은 수건을 함께 보내었는데, 그 수건에 예수님의 얼굴형태가 나타났다. 그 천을 아브가르가 만지는 순간 병이 나았다.
이후 왕은 그 수건을 성문 벽 위에 걸어두었다가 밤에는 깊은 구덩이에 넣어두었다. 구덩이에 있는 동안 수건 옆에 있던 기왓장에 예수님의 얼굴이 복사되었다. 구덩이를 열어보았을 때 사람들은 이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제는 두 개의 예수님의 얼굴 초상화가 생겼다.
이 초상화는 에데사에서 944년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 사람들은 그 초상화를 여러가지 모양으로 복사하여 비잔틴 제국과 러시아 전역에 퍼뜨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단순한 형태의 예수님 초상화는 점차로 복잡한 형태를 띄게 되었다. 처음에는 평평한 표면 위에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러다가 14세기에는 주름진 형태의 수건 위에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 후에는 상반신의 형태로 대천사장 미가일과 가브리엘이 수건의 위 양귀퉁이를 쥐고 있는 그림이 추가되었다. 그러다가 16, 17세기에는 상반신의 두 천사의 모습이 전신 모습으로 변했다.
이 성화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보호자, 승리를 가져다주는 성화-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모스크바 귀족 드미트리 둔스코바가 몽고군대를 물리칠 때, 이 성화를 앞세워 전쟁에 나가서 승리를 했다. 이후 러시아 군대 군종예식 시간에 이 성화가 종종 사용되어왔고, 대수도원이나 교회의 중심 건물 출입구 위에 이 성화를 그려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불가리아에서는 군기로 사용되었다.
이 이콘을 보면 목과 어깨가 그려지지 않은 한 남자의 얼굴만 있다. 가리마가 있는 긴 머리는 양 측면으로 타래모양으로 늘어져 있고 턱수염은 삼각형으로 가지런히 늘어져 있다(그러나 때로는 턱수염의 끝 부분이 두 가닥으로 갈라져 있기도 하다). 얼굴은 매우 곧고 긴 코와 활처럼 굽은 양 눈썹, 그리고 조용히 다문 입과 정면을 응시하는 눈으로 묘사되어 있다.
남 정 우 / 전 러시아선교사·서울여대교회 목사
정교회의 독특한 교회생활과 수도원생활 개인적인 신앙생활과 정교회 문화 모두가 이 '신성화' 개념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서구 기독교 안에도 이와 비슷한 개념이 있기는 하지만, 동방정교회 안에서 이 개념은 훨씬 더 깊고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쳐왔다.
정교회에서 신화는 하나님의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인간 실존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믿는다. 반면 서방교회의 구원론은 바울과 어거스틴에게로 소급되는 칭의론으로 특징지워진다. 바울과 어거스틴에게로 소급되는 서방의 칭의론은 법정적(法定的) 개념이 우세하다.
정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신구약 성서는 신화에 대해서 광범위하게 증거하고 있다. 가장 직접적으로 신화를 나타내는 구절은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라고 한 베드로후서 1장4절과 시편 82편 6절(이것은 요한복음 10장 34∼35절에서 예수님에 의해 인용된 구절이기도 하다)이라고 흔히 이야기된다. 그리고 요한복음 문서가 전체적으로 신화를 특별히 풍부하게 증거한다(요 3:8, 14:21∼23, 15:4∼8, 17:21∼23, 요일3:2, 4:12).
신학자들 중에서 신화(神化)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이레나이우스(Irenaeus)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에서 나타났다. "만일 말씀이 인간이 되었다면, 그것은 곧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리우스주의를 물리치고 니케야 신조작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아타나시우스는 4세기에 이레나이우스의 이 표현을 거의 비슷하게 반복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고 하였다.
갑바도기아 교부들도 모두 이 주제를 계속 탐구했다. 바실은 "인간은 신이 되라는 명령을 받은 피조물 외에 다름 아니다" 했고, 니사의 그레고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의 본성에 연합시키셨는데, 이는 우리의 본성이 하나님과 연합함으로 인해 신화(神化)되게 하기 위함이다"고 하는 등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인간이 신이 되게 하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는 이레나이우스, 아타나시우스의 경구가 모든 시대의 교부들과 신학자들에 의해 반향되었다. 이런 성서적 증거와 교부들의 전통을 통해 신화의 교리적 타당성을 정교회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지켜오고 있다.
이러한 정교회의 구원론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기독론), 인간에 대한 이해(인간론), 인간 타락에 대한 이해(죄론), 인간과 역사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이해(종말론) 등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정교회의 구원론으로 인하여 중세시대 정교회의 신비주의 사상 '헤즈키즘'이 나오고, 아토스 산의 주상성자들(돌기둥 꼭대기 위에 앉아서 명상과 기도에 전념하는 수도사들), 도시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에 들어가서 혼자서 금욕적인 수도생활을 하는 성인들의 이야기가 널리 회자되는 이유도 알고 보면, 정교회의 구원론과 깊은 관련성이 있다.
정교회의 구원론이 서방교회 전통에서 성장해온 사람들에게는 다소 생소하게 보인다. 그러나 정교회의 구원론을 자세히 들어보면, 상호 양립할 수 없는 모순적인 것이 아니라 강조점의 차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모두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남 정 우전 러시아선교사 / 서울여대교회 목사 동방정교회이야기/ (12)구원론-3 신비주의, 헤즈키즘 정교회의 구원론은 신성화(Deification)이다. 신성화의 저변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는 본질적 요소가 인간 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건너갈 수 없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a totally qualitatively difference) 가르치는 개혁교회 신학과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영적인 평화·기쁨
정교회의 이러한 독특한 구원론으로 인하여 정교회 경건생활 가운데 독특한 용어가 등장하는데 '헤즈키즘(Hesychism, 정적주의, 정교회 신비주의)'이라는 것이다. 그리스어 헤즈키아(Hesychia)에서 나온 말인데, 고요함 침묵 영적인 평화와 기쁨을 의미한다. 지성이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이 지성을 다스릴 때, 도달하게 되는 하나님의 평화(apatheia)의 다른 표현이다.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에 대한 깊은 명상을 강조하는 그리스인들의 가르침은 팔복선언 가운데,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말씀과 연관되어, 정교회 안에서 명상의 관한 교리들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신성화(하나님을 닮아감)에 대한 정교회의 가르침은 베드로후서 2장 4절에 기초하여 계속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정교회의 경건한 수도사들은 헤즈키즘을 통한 높은 구원의 경지에 올라가는 것이 가장 경건한 소원으로 생각하였다. 헤즈키즘을 얻기 위해서 정교회 수도원은 몇가지 규율을 정하고 거기에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수도사가 하나님의 임재에 마음의 초점을 모으기 위하여 주기도문을 반복하도록 한다(나중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말로 바뀌었다).
숨을 멈추고 배꼽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고 혼 속에 영을 불어넣으면 변화산(다볼산)에서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그 빛에 휩싸이게 된다고 가르쳤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오랜 시간 동안 이렇게 노력하면, 하나님의 빛을 받아 모세의 얼굴이 빛난 것처럼(출 34:30) 신비스럽고 거룩한 형상을 지니게 된다고 믿었다.
14세기에 이러한 헤즈키즘에 대하여 논란이 생겼다. 이태리 출신의 발람(Barlaam)이라는 신학자는 헤즈키스트들의 경험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며,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잘못된 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고 비판하였다. 헤즈키스트들의 황홀경적 경험은 계시가 아니라 환영(illusion)일 수도 있다고 하였다. 육체의 고통을 가하는 기도의 자세도 비판을 하였다.
'변화산의 빛' 논쟁
이런 공격에 대항하여 데살로니가의 대주교 그레고리 팔라마스(G. Palamas)가 헤즈키스트들을 옹호하였다. 결국 논쟁이 격화되고 두 진영의 의견 차이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난 사건(눅 9:29)'을 두고 그 광채가 일반적인 반사광선(피조된 빛)이냐 혹은 창조되지 않은 빛(Uncreated Light)이냐에 대한 논쟁으로 압축되어 1341년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결과 '창조되지 않은 빛(Uncreated Light)'에 관한 교리를 정통교리로 확정지었고, 아토스 산의 수도사들을 옹호하고, 정교회의 신비주의를 합법화하였다.
이후 정교회 성인들과 수도사들을 묘사한 성화들 가운데에는 머리 뒤에 원광(圓光)을 그려넣는 일이 일반화 되었고, 정교회의 경건은 더욱 더 명상적이고 신비적이고 비활동적인 내향적인 삶을 지향함으로 사회 개혁적인 삶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져갔다.
남 정 우전 러시아선교사·서울여대교회 목사 동방정교회이야기/ (13)삼위일체론 '페리코레시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핵심교리이다. 삼위일체론으로 인하여 기독교는 유대교, 회교와 구별되고, 고대 헬라 종교처럼 여러 신들을 섬기는 다신론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그런데 셋이면서 하나이며, 하나이면서 셋이라는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이 삼위일체론의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대체로 부정적인 용어로, 일반적인 상식과 경험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애매한 용어로 설명된다.
삼위일체론을 설명할 때 자칫 잘못하면 군주신론(君主神論, 사벨리안주의)이나 양태론 혹은 단일신론으로 빠져버린다.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대체로 양태론적 경향을 띄고 있었다. '하나의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로 삼위일체론을 묘사한 아타나시우스 신조(420~∼450년)이래로 아퀴나스, 20세기에는 칼 바르트와 칼 라너라는 신구교의 신학의 거장들이 양태론적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성경적 삼위일체론과는 다른 오류에 빠져있었다.
'삼위' 보다는 '일체'를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러한 모든 오류의 배후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어야 한다는 성경의 계시와는 관계없는 철학적인 대전제가 깔려 있었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일체' 보다는 '삼위'를 좀 더 강조하는 인상을 주는데, 사실은 모두를 균형있게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페리코레시스 개념을 통해서이다.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8세기 다마스커스(Damascus)의 요한이 사용한 이후 동서교회 양쪽에 걸쳐 삼위 하나님의 일체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사용되었다(De Fide Orthodoxa).
이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마치 우리 몸의 피가 각 기관을 순환하듯이, 상호침투를 통한 내주와 순환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여호와 하나님, 예수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각각 독립된 인격의 신들이지만 하나가 되는 것은 이 영원한 신적인 삶의 순환(페리코레시스) 때문이다. '신적인 삶의 순환'이란 '신적인 사랑의 순환' 혹은 '신적인 사랑의 뜨거운 피의 교환'같은 것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한 몸 속에 심장, 간, 폐가 각각 다른 기관이지만 뜨거운 피의 순환으로 서로 의존되어 있고, 하나의 삶을 이루듯이 삼위일체가 그와 같다는 것이다.
이 용어는 사도 요한이 설명하고 있는 성부가 성자 안에 침투해서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침투해서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양태에 대한 성서적 표현(요 14:10∼11, 요 17:20∼23)에 상응하는 용어이다.
이러한 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이 다시 크게 빛을 보게 된 것은 몰트만 덕분이다(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그는 페리코레시스 개념에 기초한 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이 성경적으로 부합한다는 사실을 확언하고 과거 일신론적 경향을 깔고 있는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한편 성경적 삼위일체론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실천적 의미를 설파하였다.
즉 독재적이고 군주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라 삼위이면서 일체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적 코이노니아 개념을 이해하고 배워서 그것을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남 정 우前러시아선교사 / 서울여대교회 목사 <13〉 삼위일체론① '페리코레시스'
'三位'와 '一體' 균형있게 강조
"한 몸 속에 심장과 간, 폐 등이 각각 다른 기관이지만 뜨거운 피의 순환으로 서로 의존되어 있듯이 하나의 삶을 이루는 것"
<사진설명〉 15세기 러시아 이콘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 작품. 창세기 18장에 아브라함을 찾아온 세 천사의 이야기를 근거로 삽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형상화하여 그렸다고 하여 구약의 삼위일체라고 부른다. (http://www.orthodox.or.kr/)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의 특징적인 요소는 '페리코레시스(순환)'를 강조하는 측면과 '필리오케(그리고 아들로부터)를 반대'하는 측면에서 잘 나타난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핵심교리이다. 삼위일체론으로 인하여 기독교는 유대교, 회교와 구별되고, 고대 헬라 종교처럼 여러 신들을 섬기는 다신론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기독교 핵심 교리
그런데 셋이면서 하나이며, 하나이면서 셋이라는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이 삼위일체론의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대체로 부정적인 용어로, 일반적인 상식과 경험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애매한 용어로 설명된다. 삼위일체론을 설명할 때 자칫 잘못하면 군주신론(君主神論, 사벨리안주의)이나 양태론 혹은 단일신론으로 빠져버린다.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대체로 양태론적 경향을 띄고 있었다. '하나의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로 삼위일체론을 묘사한 아타나시우스 신조(420~∼450년)이래로 아퀴나스, 20세기에는 칼 바르트와 칼 라너라는 신구교의 신학의 거장들이 양태론적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성경적 삼위일체론과는 다른 오류에 빠져있었다. '삼위' 보다는 '일체'를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러한 모든 오류의 배후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어야 한다는 성경의 계시와는 관계없는 철학적인 대전제가 깔려 있었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일체' 보다는 '삼위'를 좀 더 강조하는 인상을 주는데, 사실은 모두를 균형있게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페리코레시스 개념을 통해서이다.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8세기 다마스커스(Damascus)의 요한이 사용한 이후 동서교회 양쪽에 걸쳐 삼위 하나님의 일체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사용되었다(De Fide Orthodoxa).
이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마치 우리 몸의 피가 각 기관을 순환하듯이, 상호침투를 통한 내주와 순환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여호와 하나님, 예수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각각 독립된 인격의 신들이지만 하나가 되는 것은 이 영원한 신적인 삶의 순환(페리코레시스) 때문이다. '신적인 삶의 순환'이란 '신적인 사랑의 순환' 혹은 '신적인 사랑의 뜨거운 피의 교환'같은 것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한 몸 속에 심장, 간, 폐가 각각 다른 기관이지만 뜨거운 피의 순환으로 서로 의존되어 있고, 하나의 삶을 이루듯이 삼위일체가 그와 같다는 것이다.
이 용어는 사도 요한이 설명하고 있는 성부가 성자 안에 침투해서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침투해서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양태에 대한 성서적 표현(요 14:10∼11, 요 17:20∼23)에 상응하는 용어이다.
몰트만 "성경에 부합"
이러한 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이 다시 크게 빛을 보게 된 것은 몰트만 덕분이다(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그는 페리코레시스 개념에 기초한 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이 성경적으로 부합한다는 사실을 확언하고 과거 일신론적 경향을 깔고 있는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한편 성경적 삼위일체론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실천적 의미를 설파하였다.
즉 독재적이고 군주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라 삼위이면서 일체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적 코이노니아 개념을 이해하고 배워서 그것을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남 정 우/ 前러시아선교사, 서울여대교회 목사 동방정교회이야기(14) 삼위일체론 2)'필리오케'논쟁 "신조 '變改' 안될 말" 이후 9세기 카알 대제, 11세기 초교황 베네딕트 8세에 의하여 계속 필리오케라는 문구를 삽입하여 신앙고백을 하였다. 이에 동방정교회는 계속 항의하였다. 전세계 기독교 지도자들이 기도하고 합의하여 공동으로 만들어 지키기로 한 약속을 임의로 변개하여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그러나 서방교회는 이런 항의를 묵살하였다. 1054년 동,서방교회는 분열하고 말았다.
그러면, 동방정교회가 필리오케를 강하게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요한복음 15장 26절에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나온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영원히 성령을 "내쉰다". '성령은 아들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필리오케를 첨가하면 성령이 아버지로부터도 나오고, 아들로부터도 나온다는 말이 되어 혼돈을 초래한다'는 것이 정교회의 주장이다. 삼위(三位)가 페리코레시스(순환)에 의하여 하나를 이루고 있지만 삼위는 각각 개별적이고 독특한 위치와 사역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성부 하나님은 누구인가? 성자 하나님을 세상에 보내신 분이며 성령을 내쉬는 분이시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다. 성자 역시 성령이 아니다. 성자는 성령을 내쉬지 않는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이시지, 성부 하나님이 아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에 오신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이시지, 성자 하나님이 아니다. 보내신 하나님(성부)과 보냄을 받은 하나님(성자)(요 16:27∼28) 그리고 증거하시고 진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성령)(요 16:4∼14)은 각각 고유한 인격을 가지고 있으며 결코 혼동될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런데 필리오케를 삽입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증거를 혼란에 빠뜨린다고 생각하여 정교회는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면 성령과 성자 예수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성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성자가 성령을 내쉬지는 않는다. 오직 성부만이 성령을 내쉬신다. 그러면 성령과 성자의 관계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관계가 있다. 있다면 과연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부 하나님만이 성령을 직접 내쉬지만 성부 하나님은 또한 성자 하나님의 아버지이시다. 성자 하나님의 아버지!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 성령을 내쉴 때 항상 그 곁에서 함께 하신다. 이런 식으로 정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일체성 보다는 삼위 하나님의 고유성과 개별성을 혼동하지 않도록 하는데 많은 강조점을 두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 (1870) 이후 '필리오케'에 관한 동,서방교회의 논의는 다시 적극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 중에서 1874∼1875년 초대 가톨릭교회(1871년 제1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하여 분리된 천주교회) 신학자들이 독일 본(Bonn)에서 일부 성공회 신학자들, 개신교 신학자들이 동참한 가운데 그동안 서방교회가 필리오케를 삽입해 온 것은 잘못된 일이었으며 삭제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동·서 공동신앙 확인 최근 에큐메니칼 차원에서는 '신앙과 직제 위원회'가 니케야 콘스탄티노플 신조야말로 사도적 신앙의 내용에 대한 성실성과 충성심의 사인이요 표준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필리오케 문제를 두고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1978년 10월과 79년 5월에 두 차례의 신학협의회를 가진 결과 동,서방교회 모두가 'filioque'없이 니케야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다시 고백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1년 제네바에서 개최된 니케야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 1600주년 기념예배에서 니케야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에큐메니칼 공동신앙 혹은 공동의 사도적 신앙의 표현으로써 확정지었다.
남 정 우前러시아선교사 / 서울여대 대학교회 목사 동방정교회이야기/ (15) 삼위일체론-3 협의회적 사귐 특별히 교회론 부분에서 정교회는 '협의회적 사귐(concilliar fellowship)의 전통'을 통하여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를 성취해 나가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론적 삶의 양식에 그 신학적인 기초를 두고 있다. 즉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삼위이면서 사랑의 순환 안에서 하나를 이루듯이, 이 땅의 교회들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의 양식을 본받아 일치를 이루어 나가야 하는데, 그것이 곧 협의회적 사귐이라고 정교회는 말한다.
로마가톨릭 교회는 교황을 꼭지점으로 교회와 직제의 단일성을 고집해 왔다. 그러나 동방 정교회는 처음부터 각 교회들의 협의회적 사귐을 통하여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교회의 사명과 과제를 성취해 나온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으로 인하여 동방정교회는 누구보다도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현대 세계교회일치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그 중에 뚜렷한 공헌 세 가지를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1919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미국 윌슨 대통령이 국제연맹을 구성하자는 제안을 언급하며, 그에 맞먹는 국제적인 교회연맹(League of Churches)을 구성하자고 세계 여러 교회에 제안하였다. 파시스트들이 국제적으로 연맹을 만들어 전쟁을 일으키고, 그에 대응하기 위하여 세속 국가들이 국제적인 연맹을 만들어 연합과 협력을 도모하는 상황을 보면서, 세계 기독교회가 기독교적인 사랑을 가지고 더 열심히 주도적으로 연합하며 협력하는 일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는데, 이것이 이후 세계교회협의회(WCC)를 형성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세계 교회일치에 공헌 두 번째는 WCC 헌장을 기독론적 고백에서 삼위일체론적으로 바꾸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1948년 암스테르담 WCC의 교리헌장의 첫 문장은 "세계교회협의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교회들의 공동체이다"라고 되어 있었는데, 1961년 뉴델리 WCC는 동방정교회의 제안(삼위일체 하나님)과 성공회의 제안(성서의 가르침을 따라서)을 받아들여 다음과 같이 보완하였다. 즉 "세계교회협의회는 성서의 가르침을 따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고백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한 분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함께 부름받은 사명을 공동으로 완수하려는 교회들의 공동체이다"라고.
세 번째는 협의회적 사귐의 전통을 세계교회 일치의 모델로서 제시하고 있으며, WCC는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예로 스페인 살라망카(Salamanca)에서 모인 '신앙과 직제위원회'에서는 '세계 교회의 하나됨의 개념과 하나됨의 모델'에 관하여 신중하게 토론한 결과, '협의회적 교제'를 가시화 시켜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이 '협의회적 교제'의 신학적인 뿌리는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 속에서 발견되며, 역사적인 뿌리는 정교회의 전통(325-787년) 가운데서 발견되는 것이다.
에큐메니칼 시각 재해석 최근에 와서 이러한 동방정교회의 '협의회적 친교와 사귐'의 전통과 경험을 현대 에큐메니칼적 시각에서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세례와 성찬식을 협의회적 사귐의 기초로 삼으며, 일치의 모델로서 협의회적 사귐을 제시하는 동시에 세계교회일치 운동의 방향이 에큐메니칼적 사귐에서 협의회적 사귐으로(from Ecumenical Fellowship to Conciliar Fellowship)되어야 한다는 정교회의 주장이 더욱 더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성 그리고 세례식과 성찬식을 협의회적 사귐의 기초로 삼고, 지역교회들과 다른 교파 교회들과의 사귐을 통하여 형성해 나가야 할 목표로서 협의회적 사귐을 제시해 온 동방정교회의 제안은 신앙과 삶 그리고 증거적 차원에서의 코이노니아를 통한 교회일치를 추구하는 WCC 회원교회들과 우리 개혁교회의 일치운동을 위하여서도 계속 훌륭한 가이드 역할을 할 것이다. 남 정 우 전러시아선교사 동방정교회이야기/ (16)개혁교회의 대화 종교개혁교회와 동방정교회 간에 신학적인 만남의 역사는 1573년부터 1581년 사이에 독일 튀빙겐 대학교 루터신학부 교수들과 콘스탄티노플의 에큐메니칼 총대주교 예레미야스 간에 있었던 서신교환에서 비롯된다. 반면에 칼빈주의자들과 정교회 간의 만남과 대화는 17세기 에큐메니칼 총대주교 키릴 루카리스(Cyril Loukaris, 1620-38)가 만든 신앙고백서가 정교회 내에 일으킨 커다란 소용돌이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루카리스는 실제로 제네바에 가서 칼빈의 가르침을 깊이 공부하였으며, 결과 루카리스가 쓴 조직신학과 그가 만든 신앙고백문이 다분히 칼빈주의적이었는데, 정교회는 그의 신학사상과 신앙고백문을 "숨어들어온 칼빈주의적 이단"이라고 정죄하였다. 루카리스가 만든 신앙고백문 '기독교 신앙의 동방교회적 고백(Eastern Confession of the Christian Faith)' 원본은 제네바 도서관에 보관 중이며, 그 신앙고백문으로 야기된 여러가지 신학논쟁과 비극적 사건들에 관한 기록들도 제네바 도서관에 풍부하게 보관되어 있다. 루카리스는 이 신앙고백문을 만든 일로 인하여 그의 목숨을 잃었다. 결과 17세기 초에 개혁교회와 정교회 간의 일치을 위한 그의 개척자적인 노력은 열매없이 일단 끝나고 말았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세계 제1, 2차 대전을 겪으면서 UN이 창설되는 국제적 상황의 변화에 발맞추어 세계 기독교회의 일치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맥락 속에서 개혁교회와 정교회 간의 만남도 다시 시작되었다.
20세기에 양자 간의 최초 만남은 1920년대 초에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에서(Romania Transylvania) 만난 정교회와 개혁교회 신학토론을 위한 만남이었다. 이후 1950년대에는 독일에서, 1968∼75년에는 북미에서, 1970년대에는 헝가리 데브레첸에서(Hungary Debrecen) 그리고 1981년 이후에는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토론의 장이 열렸다.
이와 같은 여러 번의 만남을 통하여 다양한 신학적 주제들이 다루어졌는데 기독론, 성찬론, 신앙고백과 고백문의 역할,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성화와 구원의 활동하심, 교회 예식들, 하나님의 계시와 역사, 역사적 상대주의와 기독교 교리에 있어서 권위, 교회의 사회적 책임, 창조와 자연보호, 결혼과 타종교인을 개종시키는 일 등과 관련된 목회적인 이슈들도 다루어졌다
이러한 대화 가운데서 각 교파는 자기의 전통을 충실하게 해석하였고 동시에 양자 간에 공통점이 많이 있음을 서로 확인하였다. 정교회는 1054년 동·서방 교회가 서로 나뉘어지기 전에 가졌던 교회 공의회의 결정 사항들에 호소하며 교회일치를 주장하였다. 반면에 개혁교회 측은 성서의 가르침과 초대교회의 가르침을 교회일치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양자는 대화를 통하여 각자가 지닌 은사적 특징들을 상실함이 없이 상대방의 전승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서로를 더욱 발전시키며 기독교의 진리를 더욱 풍요롭게 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남 정 우 /전러시아선교사, 서울여대 교회 목사 동방정교회이야기 / (17)개혁교회의 대화 ② 그리하여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양자 간에 일치점이 더욱 풍요로와졌으며 공식적인 만남의 비전이 아주 밝아졌다. 에큐메니칼 총대주교는 자치권을 가진 모든 정교회들에게 개혁교회와의 만남을 위한 대표자들의 명단을 보내달라고 하였는데, 그 대답이 모두 긍정적이었다. 개혁교회연맹(WARC)에서도 15명의 신학자 대표단을 임명하였다. 1988년에서 1990년 1992년을 거쳐 1994년까지 매 2년마다 만남과 대화를 가졌다. 양자 간의 주된 대화의 주제를 설정한 것은 1986년 예비적 만남에서 이루어졌고, 양자 간의 승인 하에 마련되었다.
니케야신조부터 출발 대화는 두 교파의 공동기반인 니케야신조로부터 시작되었다. 논쟁의 여지가 많은 구원론이나 교회론에 대하여 언급하는 대신 기독교의 기본적이고도 공통적인 이해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렇게 근본적인 교리들에 대하여 서로 의견을 교환함으로 개혁교회뿐 아니라 정교회도 전체 에큐메니칼 운동에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처음 두 회기는 삼위일체론을 취급하는데 사용되었고, 세 번째, 네 번째 회기는 성육신론을 토론하는데 집중되었다. 그 결과 참석위원들은 공동성명서에 동의할 수 있게 되었다. 참석위원들은 그 성명서를 여러가지 잡지에 다양한 언어로 번역하였다. 처음 두 회기 동안 다루어진 삼위일체론에 대한 문서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개혁교회와 정교회와의 에큐메니칼 신학 대화의 중요한 열매는 성삼위일체론에 대한 일치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다. 이 성명서는 양자(동방정교회와 개혁교회)가 삼위일체에 대하여 신앙을 고백하고 고백하는 바의 일치됨을 공표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됨을 재확인하여 형제애를 공고히 함과 아울러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복음의 소명을 다하기 위한 거룩한 노력이라고 풀이된다.
그러나 삼위일체에 대한 이 일치성명의 근거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정확한 분석에 기초한 지식의 일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주(主)시고 사도들에 의하여 선포되고 교회가 전수해 온 계시에 따른 성부 성자 성령의 한 하나님 됨을 신앙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고백하는 일치 즉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고백의 일치에 그 근거를 두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일치성명의 전문을 인용해 보면 "우리는 가톨릭 교회의 복음적이고 고대적인 신앙을 따라서 창조되지 아니하고 동질성을 가지며 영원한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을 함께 고백한다. 이 신앙은 325년 니케야공의회, 381년 니케야-콘스탄티노플공의회에서 공표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 세례의 신앙인 바, 우리로 하여금 성부 성자 성령을 믿도록 가르친다. 삼위일체론에 대한 이와 같은 일치성명의 근거는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있으며 성경적인 근거로서 에베소서 2장 18절, 마태복음 28장 19절, 그리고 세례예식문으로 고린도후서 12장 14절, 축도문으로는 마태복음 11장27절, 누가복음 10장 22절 등 그리스도의 말씀에 있음을 제시하였다.
그러면 왜 굳이 성부 성자 성령의 순서로 언급하는가(the Order of Divine Persons in the Trinity). 이것은 동등성의 차이성 때문이 아니라 초대교회 세례 예식문에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 전승을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의 순서로 언급하는 것이지, 권위와 능력, 영광의 차이성 때문이 아니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JPIC의 전제조건 형성 삼위일체에 대한 사도적 신앙의 공유와 이 사도적 신앙에 대한 해석의 합의부분은 교회의 삶의 차원에서, 그리고 증거의 차원에서의 진정한 기독교적 코이노니아를 위한 기초를 형성해 주었다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평가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의 교회적 공동생활과 증거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기초로 한 말씀선포와 성례전의 베풂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의 일치와 일치에 대한 상호 확인의 과정은 대화에 참여하는 개혁교회와 동방정교회의 자기 정체성의 근거를 제공하는 동시에 세례와 성만찬 그리고 직제 중심의 교회적 삶의 코이노니아를 위한 전제 조건이요, 현대 세계 속에서 `정의·평화·창조의 보존(JPIC)'을 위한 공동의 증거 활동에 있어서의 코이노니아를 위한 전제 조건을 형성해 준다.
남 정 우 / 전 러시아선교사·서울여대교회 목사 동방정교회이야기/ (18) 정교회-개혁교회의 대화-3 먼저 토론의 주제와 합의사항들을 살펴보면, 정교회와 개혁교회가 신학적 대화를 준비하고 진행함에 있어서 가장 크게 거론된 주제는 다섯 가지이다. 그 첫번째는 '구원론'과 '신론' '성화론'이며 두번째는 '사도적 연속성의 본질'과 '성경과 전승', ''고대 공의회들' 그리고 세번째는 '성찬공동체로서의 교회'이다. 네번째는 '인정미가 넘치는 사회와 세계평화를 위한 투쟁에 있어서의 기독교인의 책임성'이며 마지막으로 '교파들 간의 관계성' 등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이러한 주제들을 가지고 신학적 대화를 진행하는 가운데 암시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합의된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①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서 상호 수용함. ②타 교회에 대한 지식과 인식의 기회를 넓히며 타 교회의 예배와 삶의 경험들을 나누고, 정보를 교환함. ③오해와 편견들을 줄임 ④공통성 내지는 동일한 신앙의 재발견에 대한 공동확인 등 네 가지다.
특별히 삼위일체 신앙과 계시의 전승(구원의 근원(source))은 오직 하나, 즉 예수그리스도의 계시이다. 그리고 이 계시는 사도들을 통하여 구전(口傳)과 기록으로 우리에게 전승되었다는 이해에 있어서 상호 간의 이해가 같음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 계시와 전승의 주된 내용인 바, 구원과 화해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즉 하나님과의 화해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온전하신 희생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의 행위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성례전들에 관한 대화에 있어서도 양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물로 준 세례라면 다른 교회의 세례라도 그 타당성을 상호 인정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세상을 위한 교회에 있어서도 근본적으로 이해를 같이 함이 나타났다. 즉 교회는 교회 자체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 하고 있으며, 현 시대 인류를 위협하는 공동의 문제에 대하여 대처하기 위한 JPIC(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존)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함에 대하여서도 인식을 같이하였다.
정교회와 개혁교회들과의 대화의 의의를 다음 네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상호간의 신뢰회복이다. 처음 네 번의 회기를 통하여 양자 간에 놀라울 정도의 상호 신뢰감을 이루는데 성공하였다. 대화를 통하여 곧 정교회는 종교개혁과 개혁교회들에 대한 그들의 진부한 고정관념이 현실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정교회 대표자들은 개혁교회가 '그들의 주제들'에 대하여 함께 토론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꼈다. 분명히 아주 미묘한 주제들 중에 많은 부분이 특별히 교회론에 관해서는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먼저 양자 간의 공동지반(共同地盤)에 대하여 관심을 집중케 한 것은 지혜로운 일이었다. 대화 가운데 발전된 공동의 언어는 다른 영역에서도 상호간의 이해를 더욱 증진시켜줄 것이다.
둘째, 새로운 관계성 형성이다. 공식적인 대화를 개최하기로 한 결정은 동방정교회 쪽에서 제안한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 간의 대화는 신학적 발견을 초월하는 상관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 결과를 공동선언문의 유용성에 의하여 평가할 것이 아니라 대화가 진행되고 있음, 그 자체가 정교회에 새로운 관계성의 성격을 의미한다는데 의의를 두어야 할 것이다.
친교·결속력 강화
셋째, 친교와 결속력 강화이다. 양자 간의 대화는 유럽에서 거대한 변화(동구권의 변화)가 일어나기 직전 1988년에 시작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 가운데서 동유럽과 서유럽 간의 건설적인 관계를 형성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새로운 형태의 소외가 쉽게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정교회들이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으며 내부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정교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런데 정교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하여 성장하고 있는 친교를 균열시킬 수도 있는 서방교회의 개종작업을 경험하고 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양자 간의 대화는 상호간의 친교와 결속에 도움을 줄 것이다.
넷째, 상호 간의 이해증진이다. 정교회는 개혁교회에 대하여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 대화를 통하여 양자는 서로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게될 것이다.
남 정 우
전 러시아선교사·서울여대교회 목사
동방정교회이야기/ (19) 선교모형 '키릴과 메소디우스' 비잔틴정교회 선교사 비잔틴정교회의 가장 유명한 선교사는 키릴(Cyril, 826∼869)과 메소디우스(Methodius, 815∼885)이다. 이 두 사람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형제로서 862년 모라비아 지역의 슬라브인 선교사역에 착수하기 전에는 비잔틴제국의 고급 관료였다. 그들은 데살로니카에서 성장하였으며,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주민들 속에서 지냈다. 뛰어난 지능과 재능을 지닌 이들은 비잔틴제국 아카데미에서 철학교수로 봉직하기도 하였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축복을 받고서 모라비아(오늘날 체코 슬로바키아 지역)에 사는 슬라브인들에게 선교하기 위하여 파송을 받았다. 그들은 선교지로 떠나기 전에, 키릴이 슬라브어 문자를 고안하여 성경을 슬라브어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이것은 슬라브 민족의 정신문화사에 커다란 선물이었다. 덕분에 오늘날까지 슬라브 문자 알파벳을 키릴 문자라고 부른다. 그들이 모라비아에 도착하여 현지인들의 언어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선교모습은 정교회 선교정책의 기본 특징을 이루는 것이 된다. 모라비아에 거주하는 슬라브인들은 라틴어만을 고집하는 로마교회 선교사들의 선교사역 보다 키릴과 메소디우스의 선교방식을 선호하였다. 키릴과 메소디우스, 그리고 제자들까지 합세하여 슬라브족 선교가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당시 모라비아 지역은 로마교황청 관할 하에 있었기 때문에 키릴과 메소디우스가 로마교회 프랑크족 선교사들과 많은 충돌과 갈등이 있었으며, 감옥에 2년 동안 갇혀 있기도 하였다. 결국 로마교회의 시기 질투심으로 메소디우스와 그의 제자들은 추방당하였고, 모라비아에서의 정교회 선교는 중단되고 말았다.
모라비아에서 쫓겨난 메소디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불가리아로 가서 슬라브족 선교를 계속하였다. 그곳에서도 성경번역과 전도사업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도 같은 성격의 선교사업을 계속하였다. 성경과 미사예전을 러시아어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이 러시아의 기독교화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키릴과 메소디우스의 선교활동은 그들의 사후에도 제자들과 추종자들에 의하여 수백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래서 이 두 선교사는 '사도들의 선교활동에 버금가는 슬라브족의 전도자'로 추앙받고 있다. 이후 슬라브 언어는 남슬라브, 서슬라브, 동슬라브 계통으로 약간씩 다르게 발전하였지만, 그 뿌리는 모두 키릴 알파벳에 두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슬라브족 선교사역의 몇가지 특징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동방정교회 선교활동의 핵심요소로서 항상 언급되는 요소들이다.
첫번째는 예배드리는데 선교 현지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복음은 현지어로 선포되어야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데에도 현지어가 사용되어야 한다고 정교회 선교사들은 생각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오순절 사건에 대한 정교회의 독특한 견해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이 인류심판으로서 바벨탑에서 인류의 언어를 혼잡케 하신 것처럼, 오순절에 방언의 기적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표시라는 것이다. 혼잡하게 되고 흩어진 여러 민족들을 구속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뜻이 오순절 방언사건으로 나타난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오순절 사건으로 각 민족의 방언들이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각 민족의 방언도 하나님을 찬미하고, 축복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정교회는 믿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성서해석에서 선교현지어 적극수용정책이 나온 것이다.
세가지 선교정책 슬라브족 선교의 두 번째 특징은 현지인 성직자를 세우는 정책이다. 정교회 선교사들은 가능한 빨리 개종자들을 훈련시켜 안수하여 성직자로 세웠다. 일반적으로는 외국선교사가 다시 본국으로 철수할 즈음에서야 선교현지인을 안수하여 성직자로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정교회 선교정책은 현지인을 가능한 빨리 교회지도자로 세우는 정책을 수행하였다.
세 번째 특징은 토착화에 대한 강조였다. 다시 말하면 선교지의 교회가 자립성을 가지도록 도우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정교회선교사들이 선교현지에서 이러한 노력을 기울일 때, 모(母)교회로부터 오해도 많았다. 또 성공적으로 선교지 교회가 자립, 자치의 수준을 갖추었다해도 선교지 젊은 교회와 모교회 사이에 갈등이 계속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모교회와 신생교회가 협의회적 사귐을 통하여 다양성과 일치성을 균형있게 발전시켜 나왔다. 현재 정교회는 전세계에 9개의 총대주교구와 8개 자치교구로 조직화 되어있다.
남 정 우 전 러시아 선교사·서울여대교회 목사 동방정교회이야기/ (20)러시아정교회도 선교하는가? 러시아는 끊임없이 지리적으로 비기독교민족들과 접촉하며 갈등 속에서 지내온 유일한 나라이다. 따라서 러시아의 교회는 이러한 접촉의 기회를 선교의 기회를 만드는 일에 열심을 가져왔다. 러시아의 영토가 북쪽으로 동쪽으로 확대되면서 러시아정교회의 선교도 북쪽으로 극동 쪽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988년 러시아제국이 정교회를 받아들인 이후 2백-3백년 동안은 요즘 흔히 표현하는 대로 당시 러시아 교회를 묘사하자면 '어린 교회(younger church)'였다. 그러나 바로 이때부터 이미 러시아에서는 선교사들의 활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정교회가 국교로 선포되었지만 여러 도시에서는 여전히 이교도의 관습이 남아있었는데, 신실한 수도사들과 성직자들에 의하여 우상을 없애고 기도와 가르침과 모범적인 삶을 통하여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를 쟁취해 나갔다.
러시아정교회 선교는 대부분 수도사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수도사들은 정교회가 가르치는 구원, 즉 신성화(神聖化)에 도달하기 위하여 항상 수도와 명상하기에 적합한 은둔지 숲 속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이 살지 않는 북쪽 숲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그들의 삶의 모습은 고대교회 사막의 수도사들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어느 곳이든 사람이 살지 않은 곳은 없었다. 수도사들의 육체노동과 가르침은 숲 속 주민들에게 감명을 주었고, 그로 인하여 주변사람들과 유목민들에게 기독교가 전하여지게 되었다.
수도사들의 활동은 복음의 전달뿐만이 아니라, 문명의 전달자 역할도 하였다. 그들이 은둔하며 거하던 곳에 수도원이 서게 되었고, 수도원 주변에는 마을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복음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러시아국가의 시민생활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소수 부족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면서 수도사들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러시아문화를 가르쳤으며, 점차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러시아화시켜 나갔다. 이러한 러시아 정교회 수도사들의 선교활동에 대하여 메옌도르프는 이렇게 평가한다.
"기독교 수도생활은 종말론적 현상이다. 이미 존재하는 마을과 거주지를 떠나서 하나님 나라의 법에 따라서 새로운 기독교공동체를 건설하는 행위 … 그러한 그들의 활동은 예언적인 사역이며, 그 자체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의 파루시아(Parousia)를 선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내재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수도사들의 선교활동은 그 본질상 사도들의 사역과 비슷한 것이다. 사도들과 수도사들은 모두 역사와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성을 증거하였기 때문이다".
수도생활을 통한 러시아정교회의 선교를 '러시아의 케노시스'라고 부른다. 세상을 버린 수도사들의 삶이 역설적으로 그리스도의 주권성을 가장 잘 증거하는 삶의 모습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기를 비움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그리스도의 자기비하(케노시스)의 모습과 비슷하다.
19세기 말엽에는 카잔신학교에서 탁월한 수많은 선교사들, 선교전문가들을 양성하였다. 한국어 번역가 사블루코프, 불교문제에 있어서 전문가 보브로프니코프, 모슬렘교도 전도 및 타타르족 전도전문가 일민스키 등 선교전문가들이 활동하였다.
남 정 우 /전 러시아선교사·서울여대교회 목사 동방정교회이야기/ (21)교회중심적 선교이해 선교는 곧 일치운동 분열을 일으키는 선교는 복음의 선교, 기독교회의 선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선교와 일치는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경쟁적인 선교는 비판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일치는 가시적인 일치로 나타나야 하며, 함께 하는 공간 가운데서 가시적인 일치를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의 배후에는 정교회야말로 정통교회이며, 참 교회이며, 분열되기 이전의 정통 기독교회의 전승과 진리를 가장 온전하게 보존해 오는 교회라고 생각하는 자부심이 깔려있다.
예전의 실천이 선교의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개신교는 성경을 번역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말로서 선포하고 설교하는 것을 선교의 주요 실천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정교회는 성례전의 집행이 선교 사역의 표현이며 실천이 된다고 믿는다. 성례전을 집례하는 가운데, 예전을 통하여 발산되는 천상의 빛이 아직도 어둠 속에서 살고있는 자들에게 비추이며, 이 빛의 매력으로 인하여 이방인들이 빛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러시아 역사를 보면, 10세기에 러시아가 국가종교를 선택하기 위하여 고민하다가, 비잔틴 정교회를 러시아 종교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유대교나 모슬렘, 천주교가 아니라 동방정교회를 러시아 종교로 채택한 주요 이유가 '정교회 교회당과 예전의 아름다움'때문이었다. 예전의 아름다움과 매력이 이방인들을 주님에게로 인도하는 능력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정교회는 예전 자체가 선교적 의미를 갖고 있으며, 영광송(정교회는 악기를 사용하지 않고 은은한 성가를 미사 시간 전체에 걸쳐 계속 부른다)과 예전을 통하여 복음이 선포된다고 생각한다.
禮典이 성육신 제시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신 성찬식을 반복 실천하는 가운데, 선교사 자신을 나누어주는 정신을 배우며, 세례(침례)를 통하여 자기를 비우는 법을 반복하여 배운다. 그리고 어려운 현실문제에 직면하여 회피하고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성찬식의 정신을 실천하려고 힘쓴다.
선교의 기초 하나님의 사랑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선교의 기초로 삼는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곧 자기 비움(케노시스)이며, 자기를 내어줌이다. 성부 하나님이 독생 성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내보내시고,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와 권리를 다 버리시고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제물로 내어주신 행동이 곧 기독교 선교의 기초이며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정교회의 신학은 놀라울 정도로 요한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개신교는 바울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믿음'을 신앙생활의 핵심개념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반하여, 정교회는 요한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사랑'을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의 주요 개념으로 생각한다. 개신교는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을 말하고 인간의 전적인 타락설을 가르치는 반면에, 정교회는 구원은 곧 '하나님을 닮아감(Deification)'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을 닮아감의 기초와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은 참 인간인 동시에 참 하나님이셨으며, 종말에 인간이 변화되고 닮아갈 모델이라는 것이다.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교회와 성례전을 통하여 복음을 전파하여 예수님 닮은 인간들을 많이 만드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이다. 이런 주장은 로마서 8장 28절 이하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 보면, 우리 인간을 하나님이 택하시고 구원하시는 목적이 나오는데, 그 목적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맏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남 정 우전 러시아선교사·서울여대교회 목사 동방정교회이야기<22>/서울 선교부 설립배경과 과정 동방정교회이야기/(23)러시아정교회의한국선교(2) 동방정교회이야기/ (24)러시아정교회의 한국선교 (3) 동방정교회이야기/(25) 중국정교회 3백년 역사 동방정교회 이야기/ (26) 바르톨로메오 동방정교회이야기/ 알렉세이 2세 동방정교회이야기/ (28) 키릴 대주교 동방정교회이야기/ (29) 키릴 루카리스 동방정교회이야기/ (30)알렉산드르 멘(Alexander MEN) 동방정교회이야기/ (32) '쌀 그리스도인' 논쟁 동방정교회이야기/(33) 복음 기다리는 영혼들 동방정교회이야기<34>/특별한 환경 특별한 선교 동방정교회이야기/(35) 동토 녹이는 성탄 분위기
동방정교회이야기/ (完) 이해와 수용, 선교의 지름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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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정교회와 개신교는 무엇을 '개종화(proselytism)'라고 하는가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일에 많은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다. 이 문제의 본질은 '믿는다는 것'과 '누구를 신자라고 규정하느냐' 하는 질문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개신교 지도자들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로 고백하고 예배를 드리며 기독교적인 삶을 살 때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교회는 어떤 러시아인이 유아세례를 받았다면, 그가 믿든 안 믿든 정교회 신자라고 생각한다. 정교회는 러시아에서 개신교의 선교활동은 개종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정교회는 동유럽은 모두 자기네 땅이라고 생각한다. 러시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그리고 시베리아는 역사적 전통적으로 정교회가 지배적인 지역이었으며, 수 백 년 동안 교회 지도자들은 슬라브 민족의 신앙과 문화와 역사와 전통과 땅을 보호하는 책임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이런 생각 때문에 개신교 전도자들이 비기독교 신자들을 전도하는 것도 개종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정교회 신자들이 많다. 그러므로 "나는 정교회 신자다"라고 응답한 러시아인들 중에 상당수는 "나는 러시아인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서구인들이 보기에는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러시아에서는 '내가 러시아인이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나는 정교회 신자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고 여기고 있다. 정교회 신앙과 민족적 정체성이 구분되지 않고 오랫동안 통용돼 온 것이다. 물론 개종화 작업과 합법적인 복음전파 활동을 구분하는 하는 기준에 대해서는 동유럽에서 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마틴 마티와 프레드릭 그린스판이 편집한 책 '신앙의 강요: 현대 다원주의 사회 안에서의 개종화 작업과 시민의 자유' 안에 잘 다뤄지고 있다. 이 책은 개종화 작업뿐만이 아니라 복음전도활동에 대해서도 비난하는 에세이들로 가득차 있는데 결론 부분에서 마티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기고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해 논리적인 결론을 내린다면, 교회 담장 밖에서는 개인의 신앙적인 확신이나 경험을 말하는 것은 모두 불법이 될 것이다굨 오늘날 서구 기독교인들은 정치적으로는 정당할는 지 모르나 모두 다 '관용'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다. 개인의 신앙고백조차도 무례한 행동이라고 간주하려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다. 개인의 확신과 신앙적 확신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 미덕으로 간주되는 사회는 겉으로는 평화스러운 사회가 되겠지만, 속으로는 약 먹은 병아리 모양으로 무기력증에 빠질 것이다" 소련 시대 국가 정책의 영향도 있겠지만 러시아에서 정교회의 지배력은 문화, 종교 영역에서 계속 남아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런 사실을 수용하지 않겠지만, 정교회에 불만을 가진 개신교 신자들은 러시아가 정교회를 보다 순수하게 개혁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최근에 와서는 정교회 고위성직자들이 구 소련 시대 정부와 긴밀하게 관련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러시아인들을 구원할 참다운 신앙은 오직 개신교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동시에 많은 지성인들 중에서 개신교 신앙생활이 보다 개방적이고 개혁적이라는 사실에 매력을 느끼고 개신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종교개혁 운동이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 자극을 주어 가톨릭교회를 보다 순수하게 만든 것처럼, 타락하고 무기력해진 정교회가 보다 순수하고 생명이 살아있는 정교회가 되도록 돕는 자극제 역할을 러시아에서 개신교회가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마틴 마티의 말에 따르면, 기존 사회에 도전자들은 크게 두 가지 일을 하는데, 기존의 사회공동체를 자극해 자기 자신을 지키려는 움직임을 자극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체됐던 사회분위기를 활성화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질문은 오늘날 러시아 사회가, 특별히 러시아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정교회가 종교적인 다양성을 수용할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오히려 외국선교사들의 활동이 정교회를 더욱 보수적으로 만들어서 독점은 아니라 할 지라도 정부의 도움을 구해 자신을 지키려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다. 그렇게 되면, 개신교 선교활동 뿐만 아니라 정교회 자신에게도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세속적인 권력을 의지하는 교회는 서구역사에서 이미 잘 보여졌듯이, 그 영성과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개방과 더불어 희망에 부풀었던 러시아 사회는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면서 일종의 무감각, 무의욕 상태에 접어들고 있다. 러시아는 어느 곳에서도 옛 기운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의 징조를 찾을 수 없다. 사회적인 무질서와 정신ㆍ도덕ㆍ영적인 무질서 가운데서 방황하고 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정교회와 개신교 지도자들이 서로 비난하고 헐뜯으면서 시간을 낭비해 버린다면 이 얼마나 슬픈 비극이 될 것인가! 개신교와 정교회는 구 소련의 현실을 직시하고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상처 입은 양들을 치료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협력해야 할 것이다. 국가정부를 의지하던 그 습관은 벗어버리고 정교회 스스로 서는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새로워질 수 있다. 개신교 지도자들은 구 소련 지역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고, 파송하는 선교사들이 정교회를 비롯한 구 소련 지역의 주민들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한 시가 급하다. 서로 마귀라고 비난하고 상처낼 여유가 없다. 서로 존중하고 자비를 베풀며 겸손하게 행하는 것, 이것이 최선의 지혜로운 해결책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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