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뇽 교황청

2011. 3. 10. 02:47운영자자료/종교개혁지 순례

아비뇽 역사지구           (이하 출처-http://kr.blog.yahoo.com/lee1004gg)


1995년 지정된 프랑스의 세계유산이다. 이 유적은 프랑스 남부도시로 14세기에는 교황의 거처였으며 시몬 마르티니와 마테오 지오바네티가 호화롭게 실내장식을 한 교황청이 엄숙한 모습으로 잘 남아 있으며, 광장에는 뛰어난 고딕 건축의 모범인 쁘띠뜨 팔래와 노트르담 로마네스크 성당이 세워져 있어 아비뇽의 14세기 유럽 지역 그리스도교 전파의 중요한 역할 수행 사실을 잘 웅변해 주고 있다. 이 유적의 핵심은 교황청이다. 프랑스의 민요 '아비뇽의 다리 위에서'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프로방스의 고도 아비뇽은 1309년부터 68년 동안 로마에서 옮겨 온 교황청의 소재지였다. 12세기에 생베네제 다리가 건설되자, 아비뇽은 이탈리아에서 에스파냐에 이르는 교통의 요지로서 상업 도시가 되었다. 론 강변의 이 도시는 일개 상업 도시에서 정치적, 종교적으로 중요한 도시로 탈바꿈하여, 교황청 궁전 건설을 중심으로 호화로운  예술 활동이 전개되었다.  (글 출처- 블로그 >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유럽)

 

아비뇽 역사지구 

 

야경

 

아비뇽 역사지구 

 

야경 

 

아비뇽 다리, 생베네제 다리 (Pont d'Avignon), 론강 위에 반쯤 끊겨진 채로 있다.  

 

아비뇽의 주민들이 도시의 상징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교황청 궁전이 아니라, 프랑스 민요 '아비뇽의 다리 위에서'로 알려진 생베네제 다리이다. 12세기에 창건되었을 때, 21개의 교각을 사이에 두고 22개의 장대한 아치가 걸쳐진 총길이 900m의 돌다리였다. 이 다리는 그 뛰어난 수준의 토목기술 덕분에 중세 건축물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14세기에는 이 다리의 청건에 이바지한 성직자 베네제를 기리는 생니콜라 예배당이 다리 위의 북쪽에 세워졌다. 민중 신앙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이 예배당에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선박의 뱃머리 같은 모양을 한 내진이 꾸며져 있다. 창건되었을 때의 다리는 1660년의 대홍수로 유실되고, 현재는 4개의 교각과 그 사이를 연결하는 부분이 남아 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화재와 홍수 때문에 상당한 손상을 입어 이 다리의 보존 상태는 별로 좋지 않다. 아비뇽에서는 1947년에 장 비라르가 창시한 아비뇽 연극제가 해마다 열리고 있다. 연극제가 열리면 유럽 전역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옛 시가지의 교황청 궁전과 프티팔레를 비롯한 문화 사적을 배경으로 연극이 상연되며, 도시 전체가 무용, 음악, 영화 등의 갖가지 공연이 펼쳐지는 무대가 된다    (글 출처- 블로그 >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유럽)  

 

아비뇽 다리

 

아비뇽 다리

 

아비뇽 다리 

 

교황청 소재지의 도시 변천


아비뇽에는 교황이 사는데 필요한 준비가 갖추어 있지 않았다. 클레멘스 5세는 도미니크회의 수도원에, 또한 요한네스 22세(1316~1334)는 40년간이나 사용하지 않았던 추기경 아르노 드 비아의 저택을 구입해 거주했다. 현재 프티팔레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저택은, 그 뒤 궁전이 여러 차례 포위될 때마다 손상을 입어 15세기 말에는 개보수가 필요하게 되었다. 개보수를 지휘한 사람은 나중에 교황 율리우스 2세(1503~1513)가 된 델라 로베르 추기경이었다. 르네상스 양식에 따라 개조된 이 소궁전에는 체자레 보르자와, 프랑수아 1세를 비롯한 여러 귀빈들이 묵고 갔다. 교황의 예배당으로는 근처에 있던 생테티엔 성당이 사용되었다. 10세기에 창건된 이 성당은 나중에 교황 특사의 숙소가 되었는데, 1392년에 소실되어 현재는 네 벽만 남아 있다. 또한 아비뇽의 대성당 노트르담 데 동도 교황을 맞이하기에는 충분한 격식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12세기 중반에 세워진 이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은, 단랑식의 소박한 성당이었다. 아비뇽의 교황과 나중의 주교들은 측면의 예배실과 다른 건축 부분을 부설하여 확장했다. 요하네스 22세의 유해는 이들 예배실 중의 한 곳에 안치되어 있다. 17세기에 성당 내부를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으나 그것은 지극히 빗나간 생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바로크의 지나친 현란함과 계단 위의 회랑은 대성당의 소박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못했고, 이로 인해 대성당 안으로 빛이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비뇽의 성벽은 14세기에 교황들이 축성한 것이다. 이것은 총길이가 4.3km에 달하며, 유럽에서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성벽 가운데 하나이다. 클레멘스 5세가 이 도시에 처음 찾아왔을 때 주목한 것은, 무방비 상태인 도시의 모습이었다. 인노켄티우스 6세는 이른바 '대군'으로 불리는 당시 최대의 재앙이라 할 수 있는 도둑들의 습격을 앞두고, 성벽을 둘러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수롭지 않게 침략과 약탈을 일삼는 용병들이 떼를 지어 벌이는 군사 행동은, 성벽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교황청 당국은 그들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상당한 지출을 해야 했다.  (글 출처- 블로그 >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유럽)

 

아비뇽 교황청


교황이 유폐된 도시로 유명한 아비뇽은 14세기에 만든 성벽안에 무수한 역사의 보물들을 간직하고 있다. 이곳은 1309년부터 로마에서 추방된 일곱명의 교황이 머물었던 도시로 알려져있다. 5명의 교황이 과거에는 화려한 요새 역활도 했던 교황청(Palais des Papes)에 살면서 100년동안 아비뇽을 다스렸다고 한다. 아비뇽의 교황청은 프랑스 혁명기간 동안에 귀중품을 모두 약탈 당했기 때문에 호화로웠던 과거의 모습은 없다. 근처의 프티팔레(Petit Palais)미술관에는 1318년에 지은것으로  지금은 13~16세기 아비뇽과 이탈리아 화가 작품을 풍성하게 전시하고 있다.  암석 위에 세워진 교황청은 지금도 그 당시의 위엄을 드러내고 있다.

 

아비뇽과 교황청 유배역사

 

1309년 로마 교황 클레멘스 5세(1305~1314)와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옮겨졌다. 이 일은 서임권 투쟁으로 촉발되어 갖가지 사건을 겪어 온 교황권과 세속권의 대립을 새롭게 부각시켰다.   1302년에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1294~1303)는 유명한 대칙서 '우남상탐'을 발하고, 그 안에서 지극히 급진적인 형태로 보편적인 교황의 권리를 밝혔다. 그것은 '구원을 위하여 교황에 대한 복종은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선언하고 언명하고 정의한다'라는 것이었다. 이 대칙서를 받아 본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이를 불복종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로마 근교의 아나니에서 교황을 습격해 감금했다. 그러나 아나니 주민들의 반격으로 보니파키우스 8세는 얼마 뒤 플려났는데, 교황은 이 굴욕을 견디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로마 교황청에게 이 것은 대단히 중대한 사건이었다. 당파간의 대립때문에 분단된 로마 교황청은 정치적으로도 약해졌으며, 특히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선출된 베네딕투스 11세(1303~1304)는 교황의 지위에 오른 지 불과 1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1305년에는 리옹에서 필리프 4세의 엄중한 감시 아래 새로운 콩클라브(교황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이는 필리프 4세가 대단한 정치 수완을 발휘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새로 선출된 아비뇽 시대의 최초의 교황은 클레멘스 5세로서 가스코뉴 출신의 레몽 베르트랑 드 고 였다. 필리프 4세는 그를 혼쾌히 받아 들여 리옹에서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클레멘스 5세는 교황권을 거의 필리프 4세에게 의존하여 한번도 로마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교황청이 브네생 백작령의 카르팡트라에 설치되었으나, 1309년에 아비뇽으로 옮겨졌다. 이리하여 이른바 '교황의 아비뇽 유수'가 시작된 것이다.

 

교회의 대분열


아비뇽이 교황청의 도시가 된 뒤부터, 모든 면에서 부패가 생기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권력이나 부귀영화가 무력이나 빈곤과 동거하듯이, 타락한 도시로 �노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물 쓰듯 돈을 낭비하고 능력 이상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처럼 사치가 도를 넘어섰기 때문에 뒤를 이은 교황 베네딕투스 12세(1334~1342), 인노켄티우스 6세(1352~1362), 그리고 우르바누스 5세(1362~1370)는 질서를 회복하고 부패를 일소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1348년에 클레멘스 6세(1342~1352)는 아비뇽 땅을 사들여 교황청으로 삼았다. 이는 교황의 유수를 항구화하는 것이었다. 우르바누스 5세는 1367년에 로마 귀환을 시도했으나 바티칸이 무정부 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3년 후인 1370년에 아비뇽으로 되돌아 오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7년 후, 후계자인 그레고리우스 11세(1370~1378)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유수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39년을 끌였던 교회 대분열은 막을 내리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로마에서 교황이 선출될 때마다 아비뇽의 교황청을 지지하는 세력이 아비뇽에서도 이에 맞서는 대립 교황을 즉위시켰다. 결국 1409년에는 3명의 교황을 옹립하는 사태를 맞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패권을 둘러싼 전쟁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주교들이 개입했기 때문이었다. 1417년에 콘스탄츠 종교 회의에서 마르티누스 5세(1417~1431)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교회 대분열이 종말을 고하기까지 아비뇽은 반교황파의 거점이 되었다. 카톨릭 교회는 이와 같은 위기에서 벗어나는데 거의 100년이 걸린 것이다.

 

 아비뇽 교황청  지도      (출처-  http://blog.naver.com/sang1nz/90027859305)

 

 아비뇽 교황청 입구 문

 

성벽 

 

교황청 성당 

 

교황청

 

아비뇽 교황청

 

아비뇽 교황청

 

아비뇽 교황청

 

아비뇽 교황청

 

아비뇽 교황청

 

아비뇽 교황청

 

아비뇽 교황청 내부

 

 

 

 

 

 

내부               (출처-  http://blog.naver.com/sang1nz/90027859305)

 

내부

 

내부

 

아비뇽 교황청 성당

 

아비뇽 교황청 성당

 

아비뇽 교황청 성당

 

성당 십자가 조각상      (블로그명 : narcisse78님의 블로그)

 

아비뇽 교황청 광장

 

아비뇽 교황청 광장

 

아비뇽 교황청 광장     ( 블로그명 : 1979년 10월의 가을)

 

아비뇽 교황청 광장

 

 

<프티팔레 미술관 (Musée du Petit Palais)>

 

프티팔레 미술관 (Musée du Petit Palais)

 

교황청 궁전은 팔레 광장과 접한 거대한 건물로, 650년 전부터 아비뇽의 중심이 되어 왔다. 넓이가 15,000km2나 되고, 요새처럼 견고한 이 궁전은 최후의 대립 교황이 마지 못해 버리고 떠난 후에는 폐허로 방치되었다. 몇 차례의 화재를 입고 프랑스 혁명기에 우상 파괴자들의 손에 파괴될 뻔했으나, 그들이 설치한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바람에 무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광신적인 혁명가들이 내부를 엉망으로 망가뜨린 흔적은 지금도 생생히 남아 있다. 최초의 단계에서는 일부의 성벽 외에는 손대지 않았지만, 그 뒤에 자행된 약탈로 성상 등이 흔적도 없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19세기가 되자 궁전은 감옥으로 사용되었고, 나중에는 군대의 병영으로 이용되었다. 교황청 궁전의 복구 작업은 오랫동안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황이 화려하게 치장하고 생활했던 넓은 거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다. 요새의 구조를 곁들인 베네딕투스 12세의 옛 궁전과, 나중에 증설된 클레멘스 6세 및 인노켄티우스 6세의 새 궁전을 판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교황청 궁전은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룬 건축 복합체이기 때문인데, 이 사실은 증설을 담당한 건축가가 결과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시토회 수도원 출신인 베네딕투스 12세의 건축가 피에르 푸아송은 1334~1342년에 옛 궁전을 지었다. 이 궁전은 바깥쪽과 구석에 천사의 탑과 성요한의 탑, 망루의 탑 등이 있고, 베네딕투스 12세의 예배당 외에 추기경의 회의장과 수도회 및 교황청 직원을 위한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클레멘스 6세의 건축가 쟝 드 루비에르는 옛 궁전의 남쪽에 넓은 안뜰을 둘러싸는 새 궁전을 건축했다. 고딕의 영향이 확실히 보이는 부분은 교차 리브를 걸쳐 놓은 길이 52m의 이랑식 대알현실이다. 법정으로도 이용된 이 방의 계단 위에는 교황 예배당이 있다.   현재 교황 집무실과 침실에는 중요한 벽화가 몇 점 남아 있다. 그것을 그린 화가는 이탈리아의 시모네 마르티니와 마테오 디 조바네티이며 또한 그들에게 협력한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화가들이다. 아비뇽은 이탈리아의 토레첸토 미술이 프랑스에 도달한 경로 가운데 하나이며, 이 시대 유럽의 일대 문화센터 가운데 하나였다. 인노켄티우스 6세는 탑을 몇 기 세우고, 두 건물을 잇는 회랑을 만들어 교황 예배당의 성기실과 거실을 연결했다. 옛 궁전의 안뜰은 이 건물의 주인 베네딕투스 12세가 엄격한 시토회 수도원 출신임을 엿 볼 수 있다. 새 궁전 2층에 있는 교황 예배당에는 교황의 제단과 교황 및 측근의 묘비석 복원품이 놓여 있다. 아비뇽파가 담당한 새 궁전의 실내 장식은 시에나와의 연관성을 보여주며 새 궁전의 의상실 벽은 수렵과 궁정 생활을 그린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 또한 옛 궁전의 응접실 벽에는 18세기에 제작한 고블랭 직 태피스트리가 2점 걸려 있다

 

 프티팔레 미술관 (Musée du Petit Palais)

 

Madonna 

 

Madonna nursing Charles Grodin.(Petit Palais, Avignon)

 

Madonna 

 

Les Demoiselles d'Avignon  

 

Picasso's Les Demoiselles d'Avign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