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비텐베르그 교회, 에르푸르트 수도원

2011. 3. 10. 02:43운영자자료/종교개혁지 순례

비텐베르그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비텐베르그 광장

 

비텐베르그 대학

 

비텐베르그 루터의 집

 

비텐베르그 루터 상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비텐베르그 성당 루터 상 

 

비텐베르그 루터 상

 

비텐베르크의 마르크트 광장으로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맨 앞)과 필리프 멜랑히톤 (안쪽)의 기념비가 서 있어, 엘베 강가의 이 도시에서 일찍이 세계사가 기록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비텐베르그 교회      (출처- http://blog.daum.net/eudaemon )

 

비텐베르그 교회

 

 비텐베르그 교회 

 

비텐베르그 교회 

 

 

비텐베르그 교회 

 

비텐베르그 교회  

 

비텐베르그 교회 내부 

 

 비텐베르그 교회 내부

 

 비텐베르그 교회 내부

  

 비텐베르그 교회 내부

 

 비텐베르그 교회 내부  

 

 

 

 

 

 

 

 

 

 

 

 

 

 (출처- 정해은 목사)

 

 

 

 

 

 

 

바울과 베드로                    (출처- 정해은 목사)

 

루터의 묘, 비텐베르그성당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성당 안에 있는 제단 근처에는 루터와 그의 절친한 동지 필리프 멜랑히톤이 함께 안장되어 있다.

 

비텐베르그 루터의 묘 

 

비텐베르그 멜랑히톤의 묘  

 

 비텐베르그 교회 95개조 조항 동문

 

비텐베르그 교회 95개조 조항 동문

 

비텐베르그 교회 95개조 조항 동문          (출처- 정해은 목사)

 

성당의 현관문은 전통적으로 ‘칠판’으로 되어 있어, 대학에서 일반인에게 전하는 사항을 적는데 사용되었다. 신학 교수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의 판매에 항의한, 95개조의 유명한 반박문을 이 곳에 공표하였다.

 

루터의 95개 조항      (출처- http://blog.daum.net/eudaemon )

 

루터 홀 (종교개혁사 박물관)

 

루터 홀

 

종교 개혁사 박물관의 루터의 작은 방이다.  1535년 또는 1538년에 조성된 가족실은 원래의 상태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소나무 판자를 붙인 벽, 조립식 의자, 풍부하게 짜 넣은 격자 천장은 당시 시민층의 취미를 반영한 것이다. ‘4복음서 기자’, ‘수난’의 장면, ‘7 자유 학예’의 상이 그려진 자기로 장식된 난로는 1602년에 설치된 것이다. 

 

루터의 독일어 번역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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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활자         (출처- 정해은 목사)

 

마틴 루터, 크라나흐 작, 1543

 

면죄부 판매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면죄부 (INDULGENCE)


죄를 면하였다는 표로, 속죄부(贖罪符) ·속유장(贖宥狀) 등으로 번역한다. 가톨릭에서는 죄를 완전히 참회하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을 결심으로 고백할 때, 죄를 용서받는다고 가르치면서도 죄의 벌은 남게 되므로 그것을 기도나 선업(善業)으로써 갚을 것을 권하였다.중세 말기 성당 건설과 포교를 위하여 많은 돈이 필요해지자 헌금을 권하면서 속죄증명서, 즉 면죄부 발행을 남용하여 많은 폐해를 가져왔다. 1517년 성베드로 대성당을 건립할 때는 M.루터가 면죄부 발행에 반대하여, 그 폐단을 지적하는 등 <95개조 항의문>을 내붙이고 공개토론을 주장한 것이 종교개혁의 실마리가 되었다. 그 후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는 면죄부의 남용을 규제하였으며, 차차 면죄부가 사라졌다.

 

 에르푸르트 수도원

 

정확한 이름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가 에르푸르트에 세운 복음교회 겸 수도원’(Evangelical Church and Monastery of St.Augustine in Erfurt)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이나 어거스티니안 수도원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수도원은 루터가 부모가 기대했던 법학 공부를 포기하고 들어가서 수도했던 수도원이다. 이곳에서 성직을 받아다고 한다.

 

 에르푸르트 수도원 

 

 에르푸르트 수도원

 

 에르푸르트 수도원 

 

 에르푸르트 수도원

 

 

비텐베르크 소재 루터 기념관 ( Luther Memorials in Eisleben and Wittenberg )


1996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이다.  세계 정치, 종교사상 대사건중의 하나인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상징해주는 독특한 증거이다.  마르틴 루터와 16세기, ‘세계사적 동인’이 인물과 시대를 이것만큼 상징적으로 결합시키고 있는 것은 이 밖에 거의 유례를 찾을 수 없다. 루터와 종교 개혁은 그리스도교 세계를 변혁시켰을 뿐만 아니라, 독일 그 자체를 밑바닥에서부터 변화시켰다. 종교 개혁자에게 인간과 신의 관계라는 문제에 답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베텐베르크 성의 북쪽에는 성부속 성당(대학 부속 성당)의 탑이 우뚝 솟아 있다. 성당의 현관문은 전통적으로 ‘칠판’으로 되어 있어, 대학에서 일반인에게 전하는 사항을 적는데 사용되었다. 신학 교수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의 판매에 항의한, 95개조의 유명한 반박문을 이 곳에 공표하였다. 성당 안에 있는 제단 근처에는 루터와 그의 절친한 동지 필리프 멜랑히톤이 함께 안장되어 있다. 1500년쯤에 콘라트 프류가의 설계에 따라 건축된 후기 고딕 양식의 홀식 성당은 종교 개혁의 중심적인 기념비가 되었다. 그러나 성부속 성당은 7년 전쟁 때 희생물이 되었다. 해방 전쟁 후, 복구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계획의 일부만 실현되었을 뿐이었다. 입구는 위쪽 팀파눔(tympanum)의 벽화가 보수되고, 또한 1858년에는 루터의 반박문을 라틴어로 새긴 브론즈의 현관 장식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복구 작업은 비스마르크 시대가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그 이후 성부속 성당의 내부는 빌헬름 시대의 네오고딕 양식으로 장식되었다. 비텐베르크의 성마리아 성당의 후기 고딕 양식 삼랑식 외진의 홀은 1514년 이후 루터의 공식 설교 성당이 되었다. 다리로 연결된 쌍탑은 비텐베르크의 마르크트 광장 위에 솟아 있다. 광장의 시청사 앞에는 요한 고트프리트 샤도우가 1821년에 제작한 루터 기념비, 요한 프리드리히 드라케가 그로부터 몇 년 후에 제작한 멜란히톤 기념비가 서 있다. 성마리아 성당의 내부에는 미술사상 가치가 있는 묘비명 외에 팔각형의 세례반이 특히 눈길을 끈다. 그것은 15세기에 활약한 독일의 조각가 헤르만 피셔가 1457년에 브론즈로 제작한 것이며, 장식 선반을 곁들이고 있다. 그 곳에는 크라나흐 부자가 그린 유명한 종교 개혁 제단화가 있다. 아버지 루카스 크라나흐가 루터를 젊은 예수로 그린 ‘만찬’ 장면을 중심으로, 아들 루카스 크라나흐가 1547년쯤에 ‘세례’와 ‘참회’ 장면을 양쪽에 덧붙였다.  세례는 아버지 크라나흐를 개재시켜 멜란히톤이 집행하고, 참회는 루터의 시종자 요하네스 브겐하겐이 듣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또한 이 양쪽 제단대의 다리 뒷면에 사자의 부활을 그리고, 전면에는 중심에 십자가 위의 예수, 오른쪽에 설교하는 루터, 왼쪽에 신자들, 이들 맨 앞 아래쪽에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보라와 아들 한스를 그렸다. 1505년에 완성된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사회 수도원이 문을 닫았을 때, 선제후 요한은 이 건물을 부원장이었던 루터와 그의 자손에게 기증했다. 새로운 소유자는 이 큰 건물을 거처로 사용했는데, 루터의 사후에는 비텐베르크 대학이 이를 사용했다. 1883년 이후에 이전의 수도원이 이를 인수해서 루터 홀이라는 이름을 붙여 종교 개혁사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몇 세기가 지나는 가운데 원래의 수도원 건물 가운데 대부분이 사라졌다. 1540년에 만들어진 호화롭게 장식된 카타리나 문은 루터의 시대 그대로 남아 있다. 루터는 아내의 생일에 이 문을 선물했다고 한다. 문 좌우에 설치된 석조 천개의 안쪽에는 각각 가장 오래된 루터의 상 하나와, 가족의 문장이라는 ‘루터의 장미’ 릴리프가 있다.  또한 반원을 이루며 튀어나온 1504년의 나선형 돌, 1566년 다각형으로 잘라 만든 돌이 원래의 건축 모습을 상기시킨다.  여러 개의 방 가운데 루터의 작은 방이 관광객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끈다. 1535년 또는 1538년에 조성된 가족실은 원래의 상태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소나무 판자를 붙인 벽, 조립식 의자, 풍부하게 짜 넣은 격자 천장은 당시 시민층의 취미를 반영한 것이다. ‘4복음서 기자’, ‘수난’의 장면, ‘7 자유 학예’의 상이 그려진 자기로 장식된 난로는 1602년에 설치된 것이다. 루터 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필리프 멜란히톤의 집이 있다. 그 곳에는 유명하고 위대한 인문주의자의 생애와 저술 콜렉션이 있으며, 멜란히톤 하우스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1536년에 세워진 르네상스 양식의 이 건물 현관은 좌우에 의자용 돌이 있고, 위쪽을 교차하는 선으로 장식한 반원 아치로 테가 둘러져 있다. 또한 파사드 위쪽은 덧댄 기둥으로지탱된 반원 아치 모양을 나열한 계단 모양의 박공으로 장식되어 있다. 멜란히톤이 생활하다 임종한 방의 인테리어는 1897년에 역사적인 스타일로 복원되었는데, 작업이 신중하게 진행되어 가구류는 원래의 상태 그대로 잘 살려 냈다. 3층에는 학자의 방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는데, 학생들의 바펜으로 꾸며져 있다. 이렇게 루터와 관련된 두 도시에 있는 기념 장소들은 오늘날까지 종교 개혁사의 살아 있는 증인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