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아이슬레벤, 아이제나흐, 바르트부르크성

2011. 3. 10. 02:41운영자자료/종교개혁지 순례

아이슬레벤 루터 생가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만스펠트로 이주하여 광부로 일하다가 광산업을 경영, 성공하여 중세 말에 한창 득세하던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다. 그는 엄격한 가톨릭신앙의 소유자였고 자식의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마르틴은 1501년 에르푸르트대학교에 입학, 1505년 일반 교양과정을 마치고 법률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자신의 삶과 구원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무렵 도보여행 중 낙뢰(落雷)를 만났을 때 함께 가던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그 해 7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업을 중단,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수도회에 들어갔다. 계율에 따라 수도생활을 하며 1507년 사제(司祭)가 되고, 오컴주의 신학교육을 받아 수도회와 대학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다. 1511년 비텐베르크대학교로 옮겨, 1512년 신학박사가 되고 15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시작하였다. 루터가 1483년에 태어나 1546년에 생애를 마감한 것은 아이슬레벤이었으나, 그가 활동한 중심 지역은 비텐베르크였다.  마르틴 루터는 때때로 태어난 고향을 방문할 때가 있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생가는 1689년에 화재로 거의 전소되어 1693년에 재건되었다. 생가가 재건될 때, 위층은 안뜰 쪽으로 아케이드만큼 불거져 나왔으나, 후기 고딕 양식의 중심 부분은 보존되었다. 의자가 딸린 현관, 입구의 각진 곳을 깎아 낸 평평한 천장, 1층의 아래쪽 계단 등 이전 건물의 요소가 새로운 건물에 도입되었다.

 

아이슬레벤 루터 생가    

 

아이슬레벤 거리의 루터 동상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아이슬레벤 거리의 루터 동상

     

 루터의 생가 아이슬레벤

 

루터의 생가 

 

루터의 생가 

 

아이슬레벤 루터 생가  

 

아이슬레벤 루터 생가  지역 모형    (출처- 정해은 목사)

 

루터의 생가

 

루터의 생가   

 

루터 부모            (출처- 정해은 목사)

 

루터 부모

 

루터 아버지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루터 어머니 

 

루터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  

 

 1525년 6월13일 루터는 비텐베르크 시민들의 축복을 받으며 카타리나와 결혼했다. 이때 루터의 나이는 42세, 신부는 26세였다. 후일 루터는 자신의 결혼에 관해 이렇게 술회했다. “내가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 주님은 갑자기 나를 결혼으로 몰아넣으셨다.” 오늘날도 루터의 결혼기념일이 돌아오면 비텐베르크 도시 전체는 축제분위기가 되고 루터의 결혼식을 재현하는 잔치가 벌어진다.  루터는 교황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인에게만은 달랐던 것 같다. 결혼 초기 루터의 글을 보면 카타리나를 ‘나의 아내’라는 뜻의 라틴어 ‘도미나’(Domina)라고 불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호칭은 ‘나의 주인’이라는 뜻을 가진 ‘도미누스’(Dominus)로 바뀌었다. 또한 부인의 이름이 카타리나였으므로 애칭으로 ‘캐티’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애칭도 점차 ‘케테’로 변했다. 케테란 독일어로 ‘묶는 사슬’이라는 뜻이다. 루터는 가정살림에는 전혀 무관심했고, 살림을 꾸려가는 것은 전적으로 카타리나의 몫이었다. 결혼 후 10여년간 루터 부부는 경제적으로 무척 쪼들렸다. 루터의 명성은 높았지만 당시 대학교수의 봉급은 턱없이 부족했다. 우선 루터의 집안은 대식구였다. 자신의 자녀 6명과 많은 조카들, 병으로 죽은 친구의 자녀들까지 돌봐야 했다. 루터를 찾아오는 방문객들은 끊이지 않았고 여행이 쉽지 않은 시대였음으로 손님들은 금방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유 없는 살림에 식솔은 많고 식사 준비, 빨래 등 뒤치다꺼리는 끊이지 않았다. 틈을 내어 닭과 돼지도 치고 채소도 심어 가계에 보탬을 줘야 했다. 그러나 카타리나는 불평하지 않고 억척스럽게 모든 일을 감당해나갔다.  그러나 그런 카타리나에게도 걱정거리가 있었다. 루터의 건강문제였다. 건장해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루터는 지병이 많았다. 특히 담석증은 루터를 계속 괴롭혔다. 루터의 건강을 돌보는 일도 카타리나의 중요한 몫이었다. 루터는 집안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글 쓰는 일에 집중할 때는 서재에서 식사도 거른 채 며칠씩 두문불출했다. 남편의 건강을 걱정하는 아내로서 마음 편한 일이 아니었다. 루터 집안의 식탁은 언제나 공동식사였다. 학생 방문객 동료교수들로 식탁은 언제나 붐볐고 활발한 대화가 이루어졌다. 식탁에서 오가는 대화를 기록한 것이 유명한 루터의 ‘식탁대담’(Tischreden)이다. 그에 따르면 카타리나는 단순히 식사시중을 드는 주부만이 아니었다. 그는 신학적인 대화에도 적극 참여했다. 성경을 많이 읽어서 루터로부터 “당신은 로마 교황청의 누구보다도 성경을 많이 알고 있구려”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였다. 루터와 카타리나는 3남3녀를 두었다. 그 가운데 두 딸을 잃는 슬픔도 경험했다. 루터는 父情만은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1000년 동안 어느 주교에게도 허락지 않으셨던 크나큰 축복을 내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내 자녀들은 독일과 보헤미아 전체를 합친 것보다도 내게는 소중하고 귀합니다.” 루터는 아내에 대한 사랑을 쉽게 표현하지 않는 과묵한 독일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아내 카타리나에 대한 아름답고 따뜻한 사랑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았다. “만일 내가 아내를 잃는다면 비록 여왕이라 할지라도 나는 다른 여자와 다시 결혼하지 않으리라.” 1546년 1월 말에 3명의 아이를 데리고 돌아온 것이 그 마지막인데, 그것은 만스펠트의 백작들 사이의 다툼을 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1546년 2월 18일 죽기 사흘 전, 그는 아이슬레벤의 안드레아스 성당에서 다시 한번 설교단에 올랐으나, 약해진 육체는 마지막 설교를 마치지 못하게 했다

 

  

 

 

 

 

 

마틴 루터

 

멜랑흐톤 

 

멜랑흐톤


루터의 평생 동역자였던 멜랑흐톤이다. 그는 21세의 젊은 나이에 비텐베르크대학의 그리스어 주임교수로 부임했던 천재적인 학자였다. 그는 본래 신학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비텐베르크대학에 와서 루터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영향으로 종교개혁운동에서 충실한 루터의 동지가 되었다. 대석학이었던 멜랑흐톤은 루터가 그의 신학을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됐고,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위로하고 격려해주었다.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할 때, 어학 대가였던 멜랑흐톤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루터성경’을 오늘날까지 독일 사람들의 사랑 받는 번역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루터가 이끈 종교개혁이 성공한 것은, 루터 곁에 충성스런 동역자 멜랑흐톤이 있었다. 오늘날 비텐베르크시 광장에는 루터의 동상과 멜랑흐톤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어, 종교개혁이 두 사람이 함께 이룬 대업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루터의 유물             (출처- 정해은 목사)

 

루터의 유물

 

루터의 유물  

 

루터의 유물

 

루터의 유물 

 

 

<아이슬레벤 루터 임종의 집>

 

 아이슬레벤 루터가 임종한 집

 

루터가 임종한 집은 별 흠집 없이 보존되고 있다. 이곳에는 루터의 초상화와 오리지널 편지, 복제 데스 마스크가 있다. 용골 모양 아치로 테를 두른 의자가 딸린 현관이 파사드를 장식한다. 특히 임종의 방을 포함한 각 방은 역사적인 고증을 거친 치밀한 복원 작업을 통해 추억의 장소답게 꾸며져 있다.  

 

아이슬레벤 루터가 임종한 집

 

루터가 임종한 방

 

데스 마스크가 있는 루터의 임종의 방.  루터가 마지막 설교를 한 안드레아스 성당에서 가까운 장소에 있다.

 

마틴 루터, 크라나흐 작, 1543 

 

루터의 친필

 

루터의 친필          (출처- 정해은 목사)

 

 

<아이제나흐 루터하우스 박물관>

 

아이제나흐 루터가 청소년기를 지낸 곳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독일의 중부 알프스라 할 수 있는 튀링겐 숲속에 자리잡고 있는 아니제나흐 시, 루터와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다섯번의 체류를 통하여 깊은 인연을 갖게되는데, 이는 루터 어머니의 고향이라서 친척들이 많이 있음에 연유한다고 볼 수있다. 루터가 15세이던 1498년부터 1501년까지 교구학교인 St George School을 다니며, 루터의 학교생활은 근면 건실하여 선생들로 부터는 물론 학우들로 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다. 특히, 음악에 조예가 깊어 작곡은 비평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작곡을 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마르틴 루터는 종종 이 도시를 회상하며 ‘오 나의 사랑스런 도시여!’ 하곤 했다. 1521년에는 보름스의 제정국회 청문회 증인으로 소환되어 가는 길과 돌아오는 길에 죠지 교회 (Georgenkirche)에서 설교를 한다. 그리고 위장납치되어 은둔하고 있는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그는 신약성경을 헬라어 원전에서 독일어로 번역하는 역작을 남긴다. 1529년에는 마르부르크에서의 종교논쟁에 참여키 위해 가는 길에, 그리고 노년인 1540년 지방감독이었던 J. Menius의 집에 3주간 머무르며 교제를 나눈다. 이러한 루터 기념관들은 잘 관리되고 있으며, 그중에도 루터의 청소년 시절을 보냈던 Luther House는 독일의 전통 가옥으로서 문화재로 보전이 되고 있으며, 또한 유물 및 기념품들이 안에 전시되어 볼수있다. 예를 들어, Lutherstube(공부방)에서는 루터의 학창시절을 볼수있고, 2층으로 올라가면 개신교 목사관의 역사를 볼 수있다. 카알 광장(Karlplatz)에는 루터 생전의 모습 실제 크기로 성경을 손에 들고있는 동상을 볼수 있으며, 동상의 받침대에는 루터가 아이제나흐에 체류한 기간들이 부조되어있다.

 

아이제나흐 루터하우스 박물관

 

아이제나흐 루터하우스 박물관

 

아이제나흐 루터하우스 박물관

 

아이제나흐 루터하우스 박물관 

 

<아이제나흐 죠지 교회>

 

죠지 교회               (출처- 정해은 목사)

 

아이제나흐 광장 옆 루터가 설교하였던 George교회는 연중 무휴 관람할 수 있다. 이 교회는 루터가 1521년에는 보름스의 제정국회 청문회 증인으로 소환되어 가는 길과 돌아오는 길에 죠지 교회 (Georgenkirche)에서 설교를 한다. 그리고 위장 납치되어 은둔하고 있는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그는 신약성경을 헬라어 원전에서 독일어로 번역하는 역작을 남긴다.

 

설교단 

 

죠지 교회

 

죠지 교회 

 

죠지 교회

 

마그데부르크, 루터가 공부한 도시  

 

 

<벼락이 떨어진 곳과 회심 서약을 한 교회>

 

벼락이 떨어진 곳과 회심 서약을 한 곳

 

벼락이 떨어진 곳과 회심 서약을 한 교회 (공사중)              (출처- 정해은 목사)

 

 벼락이 떨어진 곳과 회심 서약을 한 교회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벼락이 떨어진 곳과 회심 서약을 한 교회 

 

벼락이 떨어진 곳과 회심 서약을 한 교회

 

마틴 루터

 

마틴 루터  

 

벼락이 떨어진 곳과 회심 서약을 한 구 교회

 

벼락이 떨어진 곳과 회심 서약을 한 교회 제단

 

<바르트부르크성>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바르트부르크 성

 

루터의 일기 "독일어 신약성경을 번역하기위해 머물렀다는 일기"               (출처- 정해은 목사)

 

바르트부르크성  (출처- http://blog.naver.com/hmlee6542)

 

보름스 종교재판에서 촬스5세 황제는 1521년 5월 26일 교황과 마찬가지로 루터를 파문했다. 마틴 루터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정원에 받아들이지도 말고 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지 말 것이며, 그를 숨기지 말고, 은밀하게 공공연하게 말로나 행위로써 그에게 도움을 베풀거나 추종하거나 지지하거나 혹은 원조하지 말 것이다. 그를 잡을 수있는 곳에서는, 그를 붙잡아 제어하고 생포하여 단단히 결박한 다음 우리에게 압송해야 한다. 이때 작센주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납치극’을 벌여 루터를 그의 영지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채로 피신시켰다. 루터는 이 성채에서 가명을 쓰고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길러 변장을 한 채 10개월 동안 도피생활을 했다. 이 기간은 루터에게는 시련의 시간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신약 성경 전체를 헬라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하는데 성공했고 곧 이어 구약 번역도 시작되었다. 경이롭게도 총 12년이나 걸려 1534년 9월 최초의 완역본인 비텐베르그 성경이 출판되었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썼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의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성서 신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들과는 분명한 구분을 지었다. 그 뒤 만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와 종교개혁 좌파 사이에서 이들과 논쟁 ·대결하면서, 성서강의·설교·저작·성서번역 등에 헌신함으로써 종교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는데, 영주(領主)들간의 분쟁 조정을 위하여 고향인 아이슬레벤에 갔다가, 병을 얻어 그곳에서 죽었다.

 

프레데릭 공, 바르트부르크성으로 루터를 피신케 하고 돌보아주었다. 

 

바르트부르크성    (출처- http://cafe.naver.com/stronghold)

 

바르트부르크성

 

 바르트부르크성

 

복도

 

예배실

 

예배실

 

강단보 

 

 

 

 

 

독일어 성경 번역 방            (출처- 정해은 목사)

 

독일어 성경 번역 방  

 

 바르트부르크성 루터가 성경을 번역한 방 

 

전시실

 

전시실

 

루터의 번역성경                 (출처- 정해은 목사)

 

루터의 번역성경   

 

루터 번역성경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마틴 루터

 

 

마틴 루터

 

 

마틴 루터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  

 

루터 아버지

 

루터 어머니  

 

루터의 동역자 멜링흐톤  

 

루터 데스마스크                   (출처- 정해은 목사)

 

루터의 유물, 칼과 동전

 

루터의 유물, 여행용 스푼

 

루터의 유물, 반지

 

루터의 유물

 

루터의 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