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론과 관련된 신학논쟁 ‘콘스탄티노플 범종교회’

2010. 6. 21. 00:09교회사자료/1.기독교회사

삼위일체론과 관련된 신학논쟁 ‘콘스탄티노플 범종교회’

 

1.1. 삼위일체론
1.1.1.콘스탄티노플 범종교회의

“1차 범종교회의와 2차 범종교회의 간에 있었던 삼위일체론 논쟁에서 영웅이었던 아타나시우스 외에도 정통신앙을 고수하는데 활약했던 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로 인해 지금의 삼위일체 정통신앙이 확립되어졌습니다. 그들은 바실(330~379), 바실의 남동생 닛사의 그레고리(약 386년 사망), 그리고 바실의 친구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약 390년 사망) 등입니다. 조금 후에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381년 당시의 콘스탄티노플 전경
“아타나시우스가 6차 추방을 당하였던 시기에 서로마제국 황제 발렌티니안은 375년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리안 지지자였죠. 그런데 그의 후계자 그라티안은 정통 지지자였다. 그 이유는 그가 키프리안과 암브로스(339~397)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는 동로마제국 황제로 데오도시우스(치리: 379~395)를 등극케 했습니다. 이것이 결국 정통신앙에 승리를 안겨주게 되었습니다. 데오도시우스는 황제에 오른 후, 그러니까 380년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국가종교로 기독교를 인정하는 법령을 발표했습니다. 381년 로마제국 도시들에서 이단적 예배를 금지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그는 2차 범종교회의를 개최하게 된 것입니다.”

“이리하여 381년 5월~7월에 개최된 범종교회의의 중대한 의의는 동방교회의 기독교가 50년 만에 아리안들의 이단성을 포기하고 니케아 정통신앙으로 되돌아왔다는데 있습니다.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의 이슈는 별다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삼위일체론 이슈였습니다. 콘스탄티노플 범종교회의에 약 186명의 감독들이 참석했습니다. 대부분의 감독들은 동방교회에서 참여했고, 트레이스와 아시아에서 몇 명의 감독들이 참석했습니다. 서방교회에서는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안디옥의 감독 멜리테우스가 이 종교회의를 사회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범종교회의가 개최됐던 하이예 에이린 교회의 전경
하지만 이에 대한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반대는 안디옥 교회의 바울리누스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동방교회는 세 명의 캅파도키안들, 바실, 닛사의 그레고리, 그리고 나지안주즈의 그레고리를 철저하게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자 멜리티우스가 종교회의가 지속되는 가운데 세상을 떠나자 그를 이어 나지안주즈의 그레고리가 사회자로 선출되었고, 이어서 낙타리우스가 사회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레고리의 사회자 자격에 대한 논쟁이 있었죠. 로마와 알렉산드리아는 바울리누스가 안디옥의 감독이며 사회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분파적 경향을 띄었습니다. 대부분의 감독들은 이들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아타나시우스의 후계자인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은 부제들과 함께 이 회의 상에서 사회자를 반대하는 같은 지역의 사람들에게 맹공을 퍼부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서 콘스탄티노플 범종교회의는 381년 7월 9일에 폐회했습니다. 36명의 아리안 감독들이 참석했지만 사회자 선출에 대해 불평을 나타내면서 회의석상을 모두 떠났습니다. 한결같이 그들은 니케아 신조를 부인했습니다. 회의의 관심은 세미 아리안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성령의 신성을 거부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남아있는 150명의 감독들은 니케아 신조를 확언했습니다. 아무 것도 이에 첨부하지 않았습니다.”

“이 회의에서 결정된 첫 번째 사항은 니케아 범종교회의에서 결정했던 ‘동일본질’을 확언했고, 아리안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했다는 것입니다. 감독들은 이어서 성삼위일체의 세 위격들이 구별되며 또 제 2위격의 성육신에서 신적 로고스가 성부와 동일본질이심에 대한 자세한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범종교회의 모습
다른 사항은 아리안주의와 관련있는 마케도니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정죄하면서 성령이 실제로 하나님이심을 확정했습니다. 라오디게아 감독 아폴리나리스도 정죄했습니다. 그는 성육신 하신 로고스의 신적 로고스는 인간 영혼을 대신하여 활동했고, 참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실제로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억지 주장은 앞으로 70년 간 ‘단성론’ 논쟁이라는 미명 아래 교회를 혼란시키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3~4차 범종교회의와 관련을 맺는 기독론 논쟁의 주제가 됩니다.”

“2차 범종교회의, 즉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에서는 4가지 교회법을 작성했습니다.”

교회법 1은 니케아의 공적을 갱생하고 다양한 이단들을 정죄했다. 교회법 2는 어느 감독이라도 다른 교구나 다른 교구의 감독 행정을 간섭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알렉산드리아 감독은 이집트에 제한되었고, 동방교회의 감독들은 동방교회에서만 활동하도록 했다. 모든 감독들은 니케아 규율을 반드시 이행토록 했다. 교회법 3은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은 로마감독 이후 가장 영예로운 직위를 갖게 된다. 그 이유는 콘스탄티노플이 새 예루살렘이기 때문이다. 교회법 4는 나지안주의 그레고리가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으로 초청되었음을 확언했고, 알렉산드리아인 막시무스가 감독이 아니며 그의 감독직의 무효성을 확언했다.

“이리하여 오랫동안 격론을 겪어오던 정통 신앙의 내용이 담겨있는 니케아 신조는 확언되었던 것입니다. 정말 정통 삼위일체론을 확립하는데 수십년의 세월과 정통 교부들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3명의 캅파도키안들’

 

1.1. 삼위일체론

1.1.1. 3명의 캅파도키안들

“3명의 캅파도키안들은 바실과 두 명의 그레고리입니다. 그들을 가리켜 각각 ‘대 바실(330~379)’, 그의 동생 ‘닛사의 그레고리’(약 386년경 사망), 그리고 바실의 평생 친구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약 390년경 사망)라고 부릅니다. 먼저 바실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1.1.1. 바실

▲대 바실의 모습
“바실은 동방교회의 수도원 운동의 규율을 정한 분으로, 그의 누님인 마크리나의 신앙의 도움으로 탁월한 신학자로서 정통 신앙을 지켰고 신실한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329년 터키 지역의 카이사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바실은 조모 마크리나, 부친 바실, 모친 엠멜리아, 남동생 닛사의 그레고리, 세바스테의 피터, 그리고 나우크라티우스, 그리고 누님 마크리나로 구성된 정말 환상적인 가족을 지닌 자입니다.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수사학을 배웠고, 카이사리아에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를 만났고, 그리고 아테네로 건너가서 앞으로 황제가 될 율리안을 사귀기도 했습니다. 다시금 카이사리아로 되돌아온 바실은 수 년에 걸쳐 그동안 배웠던 수사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인생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누님 마크리나의 신앙의 모범과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는 그녀의 권면을 받아들여 수도원적이고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마크리나에 관해서는 ‘3명의 캅파도키안들’에 이어서 자세히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수도사들의 기본적 삶을 위해 55개항의 ‘대규율’과 313개항의 ‘소규율’을 만들었습니다.”

“동시에 그에 대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정통 삼위일체론과 성육신 신앙을 고수했고 우리들에게 전수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저술활동에 정성을 쏟았습니다. 또 서방교회의 수도원 운동을 시작한 베네딕트에게 큰 영향을 끼칩니다.”

“370년 그는 카이사리아 감독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부인하는 아리안 이단은 교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황제 발렌스 역시 아리안을 지지하고 정통 니케안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리하여 바실은 자신의 최우선 임무는 정통 니케아 신앙을 고수하는 일이라 여겼습니다. 그의 타협하지 않는 완고한 자세는 동방의 장관 모데스투스와 황제 발렌스에게 위협적일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와 자신의 교구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고, 모데스투스는 바실에게 공갈협박하며 뜻을 굽히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그는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관련된 내용을 그의 남동생인 닛사의 그레고리가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내용을 두 분이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마치 연극 대사를 읽는 것처럼 말입니다.”

“너의 주권자의 종교를 존경하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그것에 굴복하고 순종하겠느냐?”

“그것은 나의 진짜 주권자의 뜻이 아닙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고 하나님께 보잘 것 없는 자인 나 역시 어떤 피조물에게도 경배를 드릴 수 없는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너 보기에 내가 어떤 존재냐? 이런 명령을 내리는 우리가 네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느냐? 너의 친구보다도 못한 자로 보이느냐?”

“당신이 장관이고 존경받는 자임을 부인하지 않지만 하나님과는 비교될 수 없는 자입니다. 당신과 사귀는 것이 중요한 일이기는 합니다. 그 이유는 당신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친구로 사귈 수 있다는 것뿐입니다. 믿음은 개인적이기 이전에 기독교의 독특한 표시입니다.”

이 말은 들은 장관은 매우 분개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쓴 말을 내뱉는다. “네가 나의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

“두려워한다니요? 당신의 말대로 무엇이 저를 두렵게 할 수 있을까요? 재산 몰수, 추방, 고문, 죽음이 나를 두렵게 할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그러면 이런 것들이 두렵지 않단 말이냐?”

“물론 그렇습니다. 재산 몰수라 하셨는데,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사람은 빼앗길 것이 없으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에게 있는 것이란 다 떨어진 누더기 옷과 몇 권의 책뿐입니다. 추방이라고 하셨는데, 갈 곳도 없고 거할 곳도 없는 나에게 추방이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나그네로 지금까지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고문이라 하셨는데, 곧 땅에 묻힐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죽음이라고 하셨는데, 죽음은 저의 은인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으로 인해 저는 하나님께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분을 위해 살고 그분을 위해 존재하고, 그리고 그분에게 되돌아 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에 놀란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담대하게 자신의 신앙에 관해 말한 사람을 만난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당신은 제대로 살아가는 감독을 만나지 못한 셈입니다. 언행심사가 일치되는 감독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정통 니케아 신앙을 지키는 일에 있어 결코 타협하지 않은 바실은 자신의 교구를 자주 방문하여 올바른 신앙을 가지도록 가르쳤습니다. 어떤 때는 설교로, 어떤 때는 글을 써서 자신의 사상을 알렸습니다. 단호한 마음을 가졌다고 해서 마음이 굳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행동가로서 학교, 병원, 그리고 자선 단체들을 설립하고 운영했습니다. 특별히 캅바도키아에 있는 수많은 문둥병자들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가리켜 ‘대(大)’ 바실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의 생전에 로마제국 황제 발렌스의 죽음을 보았는데 이것은 곧 아리안 핍박의 종결을 의미했습니다. 379년 1월 1일 49세의 나이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1.1. 삼위일체론
1.1.1. 3명의 캅파도키안들

1.1.1.1.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Albright-Knox Art Gallery’에 그려져 있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의 모습
“‘대 바실’의 평생 친구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약 390 사망)는 신학자, 서방교회 4명의 박사들 중 한 사람입니다. ‘서방교회 4명의 박사들’이란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게 될 인물들인데요, 밀라노의 암브로스, 히포의 어거스틴, 스트리도의 제롬, 그리고 대 그레고리 등입니다.”

“교수님께서 ‘서방교회 4명의 박사들’을 언급하신 것을 보면, 제 생각에 ‘동방교회 4명의 박사들’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예리한 통찰력을 갖고 있으십니다. 전우섭 씨! 그렇습니다. ‘동방교회 4명의 박사들’이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 아타나시우스, 황금의 입술을 가진 안디옥과 콘스탄티노플의 존 크리소스톰, 방금 다뤘던 대 바실, 그리고 지금 다루게 되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등입니다. 계속 진행합시다. 여기서 지체했다가는 또 다른 예리한 질문을 제가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 허허허.”

“약 329년에 태어나 약 390년에 세상을 떠난 그레고리는 캅파도키아의 카이사리아 감독으로 유명합니다. 흔히들 그를 가리켜 ‘신학자 그레고리’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325년 1차 범종교회의 니케아 신앙을 철저하게 고수했기 때문입니다. 아리안들에 반대하여 성자는 성부와 ‘동일 본질’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는 캅파도키아 아리안주스 근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나지안주스의 감독이었습니다. 바실처럼 그도 훌륭한 교육을 받기 위해 카이사리아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바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은 함께 아테네로 건너가서 수사학에 전념했습니다. 그런 후 그들 두 사람은 터기 지역의 폰투스에서 수도원적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헬라어 성경 겉표지
“그레고리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에 즐거움을 가졌습니다. 그러던 361년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부친의 강요로 사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부담스러워 수 개월 후 폰투스로 되돌아갔습니다. 부친의 강요로 또 다시 나지안주스로 되돌아와서 부친의 사역을 도왔습니다. 게다가 친구인 바실이 그를 사시마 감독으로 억지로 임명하므로 관계가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그레고리는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나지안주스 감독직을 수행했습니다. 일 년 후 그레고리는 나지안주스 감독직을 사임하고 몸도 약하였기 때문에 수도원적 삶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실이 379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누군가 아리안들에 반대하여 맞서서 싸워야만 했습니다.”

“이 때가 로마제국 황제 발렌스가 치리하던 때였기에 아리안들의 세력은 막강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정통 니케안들은 수적으로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발렌스가 갑자기 사망하고 데오도시우스가 황제직에 오르므로 상황은 역전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레고리는 참 좋은 기회라고 여겨 수도원적 삶으로 되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황제 데오도시우스는 그를 콘스탄티노플 감독으로 선출하여 정통 니케아 신앙을 고수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당시에 그레고리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작은 교회를 맡아 열심히 정통 신앙을 지키면서 대중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는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데오도시우스는 그에게 감독직을 맡길 뿐만 아니라 381년에 있는 2차 범종교회의 사회까지 맡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한 사람이 두 곳의 감독직을 맡을 수 없다고 하여 사임하고 나지안주스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이 있을 때까지 조용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레고리는 모두 45편의 ‘연설’(Oration)을 남겼습니다. 이 가운데 부친과 바실을 위한 송덕문은 읽는 자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게 합니다. 또 아타나시우스를 기리는 그의 연설도 정말 감동적입니다. 연설들 가운데 세 편은 아리안들에 반대하여 쓴 글로, 그의 신학적 입장을 우리들에게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그레고리는 수백 통의 서신을, 또 수백 편의 시들을 남겼습니다. 그리하여 그에게 ‘신학자’라는 칭호를 붙이게 된 것입니다. 다음의 내용은 『연설 12』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그 내용은 나지안주스 교회를 맡아달라고 말하는 부친에 대한 글입니다. 김기태 씨가 우리를 위해 감정을 넣어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입을 열어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청합니다. 나의 양손, 마음, 그리고 입술이 올바르게 또 주님의 뜻에 따라 인도를 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령께서 나의 언행심사를 주장하시기를 원합니다.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의 도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제 내 안에서의 그분의 사역은 고요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상했습니다. 그분이 나의 마음을 지배하시도록 말입니다. 나는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침묵을 지키실 때는 나도 그분의 침묵을 따라 침묵하기를 원합니다. 무슨 말이든 말하기를 원할 때 나는 나의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이신 그분의 마음, 말씀,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요청합니다.

“어떻습니까?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닛사의 그레고리’

  • 그레고리와 그의 아내 데오세비아의 모습
  • ▲그레고리와 그의 아내 데오세비아의 모습

1.1. 삼위일체론
1.1.1. 3명의 캅파도키안들

1.1.1.1. 닛사의 그레고리

“정확하게 언제 태어났는지는 모르나 385년이나 386년에 세상을 떠난 닛사의 그레고리는 대 바실의 남동생으로서 경건한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고리는 바실에게서 교육을 받았지만 인문주의를 선호했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제국 황제 율리안의 치리 시기였기 때문에 비기독교적 작품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교부들의 작품들을 접하면서 기독교 경건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후 아내 데오세비아와 함께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를 여행하면서 여러 수도원들과 은자 공동체를 방문하였습니다.”

“아리안 반대에 힘을 쏟던 바실은 동생 그레고리를 닛사의 감독직을 맡게 했습니다. 그레고리가 탁월한 설교자와 지도자이기는 틀림없었지만 행정가는 아니었습니다. 바실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하고 375년에 아리안들에게 추방을 받았습니다. 다음 해 376년 아리안들은 추방당한 그레고리가 재정을 횡령했다고 하며 고소하였습니다. 검거된 그레고리는 모반을 참다 못하여 378년 그곳을 탈출하여 아라비아 교회들을 방문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닛사의 감독직에서 파직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황제 발렌스가 죽고 그라티안이 황제직에 오르자 아리안들의 세력은 약화되고 다시금 그레고리는 감독으로 복직했습니다.”

“379년 형 바실이 세상을 떠나고 형을 대신하여 정통 니케아 신앙을 변호하는 대변자의 일을 맡았습니다. 황제 데오도시우스는 그를 동방제국의 정신적 지도자로 인정해 380년 세바스테 감독직을 맡게 했습니다. 다음해 381년 콘스탄티노플 범종교회의에 참석하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와 함께 정통 니케아 신앙을 고수했습니다. 385년 황제 데오도시우스 1세의 누이 풀체리아의 장례식에서 연설을 하게 된 이후 그레고리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아라비아로 여행을 떠났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레고리는 두 가지 면에서 정통 니케아 신앙 발전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하나는 삼위일체입니다. 다른 하나는 수도원 운동입니다. 전자에 관해서는 인물들에 관한 내용을 마무리 한 후에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후자의 경우에 대해 간략하게 여기서 말씀드리도록 하죠. 닛사의 그레고리를 가리켜 ‘수도원 운동의 아버지’라 부릅니다. 그 이유는 각 개인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다고 강조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각 사람은 영적 순례를 행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런 영적 순례를 사람들은 세 가지 여행으로 보았습니다. 서방교회에서는 정화, 조명, 그리고 연합으로 보았고, 동방교회에서는 덕행을 실행하는 회개, 자연에 관한 묵상, 그리고 하나님에 관한 관상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레고리는 단순하게 빛, 구름, 그리고 어두움이라고 했습니다.”

“첫번째 빛의 여행은 하나님께로 영혼이 되돌아올 것을 결심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먼저 하나님께로 향하는 걸음이 있어야 하고, 그 이후 세상적인 것을 뒤에 둬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것들을 포기하는 단계라 여겨도 좋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번째 여행은 구름, 즉 자신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지식을 알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혜를 깨닫게 되고, 영혼 깊은 곳에 하나님의 지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영적인 감각을 갖게 되어 하나님의 존전 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 단계에서는 세상에 속한 재물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인 줄 알고 맡기고 살아갑니다. 끝으로 영혼이 이르는 곳은 어두움입니다.”

“이것은 마치 모세가 시내 산에 이르는 것이라 여겨도 좋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을 뚜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실체에 관한 지식을 이해하도록 합니다. 그 지식을 알게 되면 될수록 자신이 얼마나 무능하고 무지한 자임을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참된 지식과 참된 비전은 더 이상 없는 것 같이 여겨집니다. 이러한 불가해한 어두움을 통해 마침내 우리의 모든 이면에 있는 하나님을 인식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겸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사람들은 세상은 간 곳 없고 하나님만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초월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언제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됩니다. 만족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고 찾습니다. 어때요? 수도원적 삶으로 초청하는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하지만 유의하셔야 합니다. 수도원 운동은 ‘영지주의’ 영향을 받은 것임을 말입니다.”

 
‘단성론-아폴리나리스’

1.1. 기독론
1.1.1. 단성론

“기독론 논쟁은 흔히들 ‘단성론’ 논쟁이라고도 부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지니신 신성과 인성 간의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을 하나로 보고자 하는 것과 둘로 보고자 하는 양성론이 등장합니다. 묻겠는데요. 단성론과 양성론 중 어느 것이 정통일까요?”

“‘양성론’입니다. 허허허. 저도 처음 질문을 받았을 때 단성론이 무엇인지 양성론이 무엇인지 모르는 가운데 무엇이 정통임을 말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라 여겨집니다. 단성론 논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성과 관련을 맺으면서 그분의 성육신과 관련을 맺습니다. 결국 거룩하게 살고 싶어하는 욕망에서 나온 논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1.1.1. 아폴리나리스

“삼위일체론에서는 성자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기독론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신성과 인성 중 어느 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이단으로 규정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라오디게아 감독 아폴리나리스(약 390 사망)는 부친과 같은 이름을 가진 자로서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면서 라오디게아의 감독이었습니다. 경건하고 고전문학, 학문적 소질, 그리고 정통 니케아 신앙을 고수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17에도 있듯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는 것처럼 경건에 관한 열심히 결국 그리스도의 인성을 격하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렇다고 인성을 강조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동일본질’, 즉 ‘호모오우시오스’를 강조하면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 즉 성육신에 관심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육체가 되신 그리스도에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인성은 신성에 포함된 것으로 여겼습니다. 구별되는 신ㆍ인성이 아니라 하나의 본성, 즉 신성만 결국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육체 역시 신성화된 육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인간의 지성이나 누스(nous)가 아니라 ‘로고스’라고 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이성이나 지성을 갖고 있지만 예수님은 로고스를 지니고 있다고 하면서 격상된 육체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의혹이 들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과 인간의 중간 상태로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보다 신성한 육체를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견해입니다. ‘40일 기도를 해서 세상의 욕망이 사라졌다’ ‘도를 닦은 사람들이다’ 등등의 유혹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단성론적인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아폴리나리스처럼 니케아 정통신앙을 지니고 있다지만 신성화된 삶을 원하는 사람들은 단성론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후에 수도사들이 대체적으로 단성론자들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성화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우선순위에 둡니다.”

“362년 알렉산드리아 지역 종교회의에서 아폴리나리스 견해를 정죄했습니다. 375년까지 아폴리나리스는 자신의 견해를 포기하지 않고 추종자들을 만들어갔습니다. 377년과 378년 로마의 지역 종교회의에서와 381년 2차 범종교회의에서 아폴리나리안들, 즉 아폴리나리스를 추종하는 자들을 정죄했습니다. 388년, 397년, 그리고 428년 그들을 검거하라는 황제의 칙령이 내려졌습니다. 이런 칙령이 내려지기 전, 390년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잘못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르쳤지만 완전한 인성을 부인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정통 니케아 신앙에서 아리안 신앙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본 것입니다. 완전한 인성을 부인한 셈이죠.”

“이에 대하여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던 두 명의 그레고리, 즉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와 바실의 남동생 닛사의 그레고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ㆍ인성의 본성적 연합을 강조했습니다. 두 본성의 단일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인간 예수님이 경험하신 것은 성자 하나님도 역시 경험하셨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를 가리켜 ‘하나님을 낳은 자’(theotokos [데오토코스])라고 하므로 문제의 씨앗을 갖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되심은 곧 인간이 하나님 되심도 가능하다는 문을 열어놓았다는 것입니다.”

 
‘단성론-네스토리우스’

국제신대 라은성 교수의 재미있게 배우는 교회사학교 43 [2006-11-15 07:32]

1.1. 기독론
1.1.1. 단성론

1.1.1.1. 네스토리우스

“단성론 논쟁은 아폴리나리스에게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지만 이것이 논쟁이 되어 431년 3차 범종교회의까지 이르게 된 것은 안디옥의 수도사를 거쳐 콘스탄티노플 대주교가 된 네스토리우스(약386~451) 때문입니다. 흔히 중국에까지 기독교를 전파시킨 ‘경교’라는 종교를 알 것입니다. 그 경교가 바로 네스토리우스파입니다. 그러면 조금 친근감을 가질 수 있겠죠?”

“‘네스토리우스’라는 이름은 기독론 논쟁의 대명사로 들려집니다. 그는 428년 콘스탄티노플 대감독직에 오른 후 과격하게 이단자들에 반대하는 행동을 수행했습니다. 예를 들면, 아리안들, 노바티안들, 그리고 마케도니안들 등등입니다.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에게 이단자들에 반대하는 칙령을 발표하라고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던 펠라기안들(Pelagians)에 관해서 관용을 그는 베풀었습니다. 펠라기우스에 관해서는 에베소 범종교회의 설명 후에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 범종교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만 아니라 펠라기우스도 역시 이단으로 정죄를 받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너무 한꺼번에 다 집어넣다보면 파편으로 남을 뿐입니다. 하나씩 접어 들어가도록 합시다. 긴장을 풀면서 말입니다. 허허허.”

바티칸에 그려져 있는 ‘테오토코스’
“그런데 그는 마리아를 ‘하나님을 낳은 자’라고 하는 말을 싫어했습니다. 이것이 반대자들의 마음을 하나되게 하여 결국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을 보존하기 위해 ‘하나님을 낳은 자’(데오토코스)라는 용어 대신 ‘그리스도를 낳은 자’(Christotokos [크리스토토코스]를 선호했습니다. ‘데오토코스’라는 용어가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채택된 ‘데오토코스’가 점점 마리아의 영예를 높이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마리아론’ 또는 ‘마리아 숭배론’(Mariology)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것은 ‘원죄 없는 잉태설’(Immaculate Conception)로 또 ‘성모몽소승천’(Assumption)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결과입니다.”

“단성론 논쟁, 즉 기독론 논쟁이 ‘하나님의 낳은 자’, 즉 ‘데오토코스’라는 말은 마리아로부터 영원한 신성이 인성과 연합되었다는 것, 즉 성육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ㆍ인성의 연합이라고 했습니다. 인성이 마리아로부터 취해져서 그녀의 자궁에서 그리스도의 신ㆍ인성이 연합되었다는 것이죠. 로고스가 마리아의 자궁에서 육체와 연합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았다고 하는 것은 네스토리우스가 볼 때에 미친 짓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네스토리우스와 그의 친구 아나스타시우스는 ‘데오토코스’ 사용에 반대 입장을 표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낳은 자, 즉 ‘크리스토토코스’를 사용할 것을 제안했던 것이죠. 이에 대해 네스토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설교했습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모친이라 불리든지 말든지 하나님의 모친이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이교도들이 자신의 신들에게 모친이 있다고 주장할 때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바울이 말하기를,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 7:3)의 말씀을 어떻게 보는가? 마리아는 하나님을 낳지 않았습니다. 피조물들은 결코 창조되지 않은 창조주를 임신할 수 없습니다. 신격의 도구인 사람을 낳았을 뿐입니다. 성령은 결코 로고스를 잉태하지 않았고 단지 거할 수 있는 성전을 동정녀로부터 잉태했습니다(요한복음 2:21).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죽지 않습니다. 하지만 육체가 되신 그분을 소생시켰습니다. 마리아 자궁에서 형성된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그분을 [인성을 입으신 그분을] 가정하셨고 그 가정으로 인해 그분을 하나님이라 불렀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듯합니다. 신ㆍ인 대신에 육체가 신성을 지녔다는 것이죠. 그래서 나사렛 예수님은 로고스가 거하는 성전이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두 본성은 인격적 연합이 아니라 도덕적 연합, 즉 친밀한 교제 또는 결합이라는 것이죠. 서로서로 기계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로고스는 사람을 단순히 신적인 도구로 사용했을 뿐이라고 여깁니다. 그리하여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격의 이중성(duality)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던 것이죠. 마리아는 단순히 인간 예수님의 어머니일 뿐 ‘데오토코스’라는 용어는 당치도 않는 소리가 되는 셈이죠. 마치 물이 관을 통과하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마리아를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것이죠.”

“다시 말씀드리면, ‘데오토코스’라는 용어 대신에 ‘크리스토토코스’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저해했다는 것이고 마리아에게 영예를 돌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수도사들을 비롯한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은 반발하고 나선 것입니다. 거리에서나 강단에서 그를 비난했습니다. 신성을 모독한다고 말입니다. 그리하여 429년 지역 종교회의에서 정죄를 받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완고한 네스토리우스는 자신의 견해를 확고하게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교회의 회원들을 출교했습니다. 그러니 오히려 적을 만드는 결과를 빚었습니다. 사람은 너무 완고하거나 강하면 적들이 만들지는 것 같습니다. 강한 것은 부서지지만 부드러운 금과 은은 보화로 여겨지지 않습니까?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지요. 융통성이 없으면 적들이 많이 생기는 듯합니다. 물론 완고한 사람이 일을 해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를 반대하는 자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진 자가 바로 알렉산드리아의 시릴이었습니다. 게다가 어떤 이들은 황제에게 이 일을 청원하고 로마감독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마침내 431년 에베소 범종교회의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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