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와 로마카톨릭교회

2010. 6. 20. 23:26교회사자료/1.기독교회사

교황와 로마카톨릭교회

 

정병식



목차


1. 교황제와 로마 카톨릭교회
a. 교황제의 역사적 배경과 레오 1세
b. 교황제의 창시자: 그레고리 1세
c. 그레고리 이후의 동.서방의 관계
2. 또 한번의 지각변동 - 이슬람의 발흥

 


1. 교황제와 로마 카톨릭교회

476년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에 의해 사라졌다. 동로마는 아직 건재했지만, 장구한 세월동안 지중해 일대를 지배해 온 로마의 소멸, 이것은 커다란 역사적인 지각변동의 예고였다. 법률과 행정의 표본이던 로마의 소멸은 곧 모든 통치체제의 소멸이었다. 제도와 문화는 신속히 야만적인 것으로 대체되어 갔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한가지가 있다. 사람들은 그대로 남는다는 사실이다. 망한 나라의 백성들, 비록 이들은 나라없는 처지로 불행의 질곡을 걷게 되지만, 로마인으로서 그대로 남게 된다. 교황제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로마인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깊은 의미를 갖는다.



a. 교황제의 역사적 배경과 레오 1세



교황(Pope)이란 '아버지'란 의미이다. 초기에는 존경받는 감독에게 사용했다. 콘스탄틴에 의해 수도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가면서 그곳은 자연스럽게 동방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기존 수도였던 로마(Rom)는 로마의 감독이 그 직능을 대신하며 내적으로 질서유지에 힘썼고, 때때로 발생하는 이민족의 침략 앞에서 주민들의 영적 정신적 지주역할을 했다. 처음 로마 본토로 침략해 들어온 이민족은 흉노족이었다. 452년도의 일이다. 그러나 서로마는 대처할 능력이 없는 상태였고, 게르만족 출신 장군들의 권력섭렵과 왕위다툼은 흉노족 앞에서 방어의무력함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 때 로마를 구하자는 일념으로 노략자들 앞에 나선 것은 바로 교회의 감독들이었다. 그 첫 번째 사례가 대 레오(Leo)의 경우이다. 내우외환이 겹친 이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의 채찍'이라고 불리운 흉노족의 지도자 아틸라(Attila)와 담판을 벌였고, 성공했다. 전쟁과 약탈의 폐허 앞에서 로마를 살려냈다. 455년에는 반달족이 로마를 침입해왔다. 아직 레오가 감독으로 있을 때였다. 침략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로마가 방화되는 것만은 막아야만 했고, 이번에도 레오는 반달족의 진세릭(Genseric)과 협상을 주도한다. 이러한 일들은 로마의 감독이 갖는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레오의 적극적인 이러한 활동은 로마 감독직에 대한 그의 신학적 입장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로마의 감독을 교회의 수장이라고 생각했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을 교회의 기초로 삼았기 때문에 베드로의 직계 선상에 있는 로마 감독이 교회의 머리요, 따라서 발생하는 모든 영.속의 문제에 관여하고 해결해야 할 권리와 의무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확신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예가 바로 두차례의 에큐메니칼 회의이다(431년 에베소 회의와 451년 칼케톤회의). 431년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인 디오크루소가 독자적으로 회의를 소집해 단성론을 면죄시키려 하자, 교리문제를 다룰 때에 로마감독의 허락을 받을 것을 명령하기도 했고, 451년 칼케톤에서는 레오의 편지로 인해 정통신앙(양성론)이 확립되었다. 461년 죽은 그에 대해 역사는 교황제의 기초를 놓은 감독으로서 현대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교황에 해당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b. 교황제의 창시자: 그레고리 1세



레오가 죽은지 정확히 15년후인 476년 서로마는 오도바케르에게 완전히 멸망한다. 그가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퇴위시켰기 때문이다. 이제 서로마는 무정부 상태로 돌입했으나, 오도바케르가 동로마의 황제(유스티니안)와 맺은 정치적인 관계로 인해 서로마는 동로마 치하에 있게 되었다. 동로마제국에서는 당연히 감독이 황제에게 예속된 상태였지만, 로마만은 그 반대였던 것이다. 야만족의 침입은 오히려 감독의 권위를 강화시켜준 계기가 되었다. 그 이유는 문명의 유산을 야만족 앞에서 보호하는 역할을 교회가 담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568년 랑고바르덴족이 로마를 침공했을 때 로마는 스스로 방어해야한 했다. 감독 베네딕트 1세(Benedict I, 575-579)는 이때 사망하며, 그의 후임은 펠라기우스 2세(Pelagius II)는 이들에게 풍부한 물질을 선물로 공세하여 일시적이나마 도시를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때마침 창궐한 페스트에 의해 펠라기우스 2세가 죽자, 공석인 교황좌에 오른 사람이 그레고리 I세(Gregory, 540-604, 590년에 교황좌에 오름)였다. 역사상 가장 유능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그는 레오가 가진 교황제의 이상을 실현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540년경 원로원에 속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부터 그는 로마와 고트족과의 싸움터인 로마에서 생활했다. 568년 랑고바르덴족이 로마를 침범하여 571년에는 포계곡을 점령하고, 이듬해에 베네벤토와 스폴레토를 점령(참고 Atlas 119 아래그림과 내용)했을 당시 그는 28세로 로마의 행정담당 관료(로마시장)였다. 573년에는 로마시 자체도 위험 반경에 들어갔다. 전쟁으로 얼룩진 현실을 피해 574년 관직을 벗고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감독인 베네딕트 1세(Benedict I, 575-579)의 명령으로 다시나왔고, 579년 감독 펠라기우스 2세의 대사로서 콘스탄티노플에 파견되었다. 랑고바르덴족의 약탈로 위기에 빠진 로마를 돕도록 외교활동을 펴 황제를 움직이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러나 원조를 위한 그의 외교활동은 큰 성공은 얻을 수가 없었다. 586년 로마로 복귀한 그는 감독을 보좌하는 행정(집사)을 맡아보았다. 계속된 전쟁과 뺏고 빼앗기는 싸움의 와중에서 로마 시민들의 정서는 말이 아니었다. 혼란과 무질서는 극에 달했다. 파괴되어버린 성벽을 수선키 위해 값비싼 기념물과 건축물들을 유실시켰다. 무너진 것을 세우자는 명목하에 또 다른 것을 무너뜨렸다. 상하수도는 파괴되어 전염병이 번졌고, 질병이 창궐하였다. 이 때의 전염병(페스트)로 인해 590년 2월 교황 펠라기우스 2세가 사망했다.



로마의 성직자들과 시민들은 공석인 교황좌에 그레고리를 즉각 임명했다. 그가 완벽한 교황이 되기 위해서는 물론 동방에 있는 황제의 추인을 필요로 했다. 그해 가을 황제의 추인은 도착했고, 9월 3일 그레고리는 정식으로 전염병으로 죽은 펠라기우스의 후임 교황이 되었다. 홍수와 기아와 전염병과 각종 병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 앞에 내던져진 로마인들에게 그레고리는 희망을 주었다. 각종 부대시설을 고치고, 질서를 새로 잡고, 시민들에게 양식을 배급했다. 위생의 중요성을 고취시키고, 성벽을 수축하며 군율도 바로 잡았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위협이었던 랑고바르덴족의 계속적인 이태리 잠입으로 로마가 큰 위기에 놓였을 때 그는 협상을 벌였고, 로마시 부근의 평화를 보장받았다.



그레고리로 인하여 기독교권 내에서 로마 교회의 위치는 절대적 자리에까지 부상했다. 공의와 질서를 사랑하며 청렴한 그의 활동으로 ㉮이전에는 세속정부가 담당했던 일들을 교회가 수행하기 시작했다. ㉯교황청산하의 재산과 로마교구의 총 자산이 효율적으로 관리되었다. ㉰서방교회들은 이전보다 더 강하게 로마교회와 결속되었다. ㉱전통에 대한 인식도 동방보다는 훨씬 강했다. ㉲595년 랑고바르덴족의 아길루프와 평화협정을 체결했고, 이후로 황제나 총독보다는 교황이 랑고바르덴 족에 대한 정책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는 강력한 정치적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지도자였다. 그에 의하면 로마교구는 '모든 교회들의 으뜸이요, 그 주교는 모든 교회를 책임지는 인물이었다'. 그는 교회내의 잘못과 오류들을 교정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었다. 종교회의들의 결정도 로마교구의 인정과 권위가 없이는 효력이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계속했고, 예배의식을 간소화시켜 후대의 카톨릭 미사의 기초가 되었다. 음악을 포함한 교회의 공적 예배를 가장 우선시했다. 미사형식에도 변화를 주어 성가를 직접 지어 불렀다. 그레고리안 성가는 그로 인해 온 것이다. 영국에 선교사 어거스틴을 파송했고, 로마감독이 모든 교회의 통치자임을 인정케하여 지중해 세계의 다른 교회들을 로마교회에 예속시켰다. 이것은 그의 교황제의 발효였다. 참으로 그는 중세의 전반적인 기초를 제공했다. 그의 초인적인 노력은 로마교회(교황권)를 중세 1000년간 유럽의 영권과 속권을 동시에 지배하는 위치로 격상시켰다.



그의 신학은 어거스틴적인 노선에 있었다. 그러나 때로는 어거스틴 보다도 더 앞서 나가는 무모함도 보여주었다. 가령, 어거스틴은 연옥 교리를 추정만 했으나, 그레고리는 그것을 확신했고, 카톨릭의 연옥교리를 확정시킨 인물이 되었다. 구원론에 관한 한, 어거스틴은 예정과 은총을 강조했으나, 그레고리는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에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하나님의 처벌을 상쇄시키는 방법으로 그는 참회를 생각했다. 참회는 네가지 방법으로 구성되었다. 진정한 회개(Contritio cordis), 고해(Cofessio oris), 용서(Absolutio), 보속의 행위(Satisfactio)이다. 이것으로 하나님이 만족하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최종 구원을 얻기 위해 인간은 연옥에 가게 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과 같이 그리스도는 신약과 구약의 중심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구약은 신약의 예언이며, 신약은 구약의 해설이다. 성자와 성모 예배를 주장했고, 성만찬은 희생의 반복이며 산자, 죽은자 모두에게 효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의 저서는 상당수가 평범한 신앙서적이다. 도덕, 에스겔서 강해, 용기가 주는 교훈, 대화, 서신, 그리고 목회학 등이다.



c. 그레고리 이후의 동.서방의 관계



그레고리는 로마를 침범한 랑고바르덴족과 직접 협상에 나서 타개하는 전략을 추진했다. 그것은 565년 유스티니안 황제가 사망한 후 동로마인 비잔틴 제국의 힘도 현격히 약화되어서 더 이상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원조를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로마를 지키고 회복하는 일에 그레고리와 교회가 적극적으로 임하자, 로마교회와 감독의 지위는 영적 본성을 지닌 세속적 통치자의 위치로 부상되었다. 로마의 감독은 곧 중부 이태리의 세속적 군주였다. 이러한 로마감독인 그레고리의 입지는 후임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8세기 중반 랑고바르덴족이 다시 위협을 가해왔을 때 로마교황은 동로마가 아닌 프랑크 왕국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이것으로 동로마와의 관계는 완전히 종식되었으며, 서유럽과의 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것은 앞으로 로마와 서유럽의 불가분의 관계를 예시하는 예표이기도 했다.





2. 또 한번의 지각변동 - 이슬람의 발흥



로마가 해체된 후 새롭게 판이 짜인 지중해권 질서에 뛰어든 가장 위협적인 세력은 아랍세력이었다. 5세기에 게르만에 의해 서로마가 멸망했듯이(476년), 7세기에는 이슬람세력이 동로마 제국과 아프리카를 공략했고 이어 8세기에는 스페인까지 침공함으로 유럽대륙에까지 위협이 미쳤다.



이렇게 확장된 이슬람 세력은 동로마가 가지고 있던 그리스 사상과 학문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의 학문까지 수용함으로 당대 세계 최고의 학문적 업적을 이룩했다. 철학과 사상을 포함하여 수학과 천문학 그리고 화학과 기계등 전반적인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룩했다. 이들이 만들어낸 사상과 문화가 바로 서구 중세 사상의 실질적인 기초가 되었다. 신학적으로 볼 때 아랍인들이 수용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스콜라 신학이 재수용 했다.



이슬람 땅인 아랍은 지리적으로 볼 때 페르시아 제국과 비잔틴 제국(동로마제국)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페르시아나 비잔틴 양쪽 다 아랍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민족의식이 전무했던 그들은 통일된 질서 체계가 없었기에 유목생활을 했고, 시리아와 극동지역에서 중개상을 하는 소규모의 상인들만이 나름대로 도시를 이루었다. 원시종교가 지배적인 종교였다.



이들을 하나로 통일하여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하여 위협적인 세력이 되게 한 사람은 예언자 모하메드(Mohammed, 570-632)였다. 그는 중부도시인 메카(Mecca)태생으로 40세경 알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 그는 알라는 유일신이며, 모세나 예수도 그의 선지자에 불과하다고 가르쳤다. 자신도 역시 선지자이지만, 다른 선지자와는 달리 완전하며, 알라의 가르침을 가장 완벽하게 전달해주는 마지막 선지자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의 의무는 알라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다. 의무를 다하는 자만이 예비된 천국에 이를수 있고, 그렇지 못하는 경우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게 된다.



모하메드는 이러한 교리를 아랍인들에게 전했지만, 메카 상류층의 반대로 배척을 받아 622년 추방당했다. 그는 메카와 적대관계에 있는 도시로 가서 도움을 받고, 강력한 이슬람 세력의 기틀을 마련한다. 그는 도시 전체를 개종시켰고, 630년에는 자기를 추방했던 도시 메카도 개종시켜 버렸다.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이슬람은 유럽으로 영토확장을 펴서 629년에는 동로마의 황제인 헤라클리우스와 싸워 대승을 했고, 모하메드가 죽은 후인 634년에는 시리아를, 641년에는 이집트를, 그리고 650년에는 페르시아를 정복했다. 동로마와 싸워 이겼다 할지라도 동로마는 여전히 건재했다. 718년 레오 3세가 이들을 최종적으로 물리칠때까지 동로마는 계속적으로 이들의 공격대상이었다. 711년에는 아프리카에서 스페인으로 방향을 틀어 공격하기 시작했고, 당시 스페인에 진치고 있던 서고트족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슬람세력은 그 여세를 몰라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로방스 지역까지 점령했다.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한 유럽을 구한 것은 프랑크 왕국의 실세였던 칼 마르텔(Karl Martell)이었다. 그는 732년 투르(Tour)에서 이슬람세력을 물리쳤고, 이어서 잃었던 갈리아 지방과 스페인을 회복했다. 이슬람과의 전쟁승리는 서유럽의 지속적인 존속과 칼 마르텔의 위상을 높여 주었고, 결국 그의 아들 난쟁이 피핀 III세가 왕권을 빼았아 메로빙거 왕조가 막을 내리고 카롤링거 왕조가 시작되는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또한 이러한 왕위 찬탈에 교황이 동조를 함으로 교황과 프랑크 왕조와의 협력관계가 싹트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