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케돈 범종교회의

2010. 6. 20. 23:58교회사자료/1.기독교회사

기독론과 관련된 신학논쟁 ‘칼케돈 범종교회의’

 

  • 유티케스의 모습
  • ▲유티케스의 모습



 유티케스

유티케스(약 378~454)는 콘스탄티노플의 수도사로서 성육신 이후 그리스도께서 오직 한 본성만 지니셨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이단성 있는 견해를 가리켜 ‘유티키안주의’(Eutychianism)라 부릅니다. 유티케스는 신ㆍ인성이 혼합되어서 구별할 수 없다고 억지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단일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모두 부정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체가 인성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신성화되었다고 가정했습니다. 이런 견해로 인해 유티케스는 448년 콘스탄티노플의 지역 종교회의에서 정죄 받았습니다.

알렉산드리아 감독 시릴에 이어 감독직에 오른 디오스쿠루스는 유티케스의 정죄를 철회하기 원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동방교회의 지도력을 과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디오스쿠루스의 기독론 역시 아폴리나리스처럼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연합을 강조하였기에 유티케스를 지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티케스가 콘스탄티노플 감독 플라비안에 의해 정죄를 받게 되자 디오스쿠루스는 로마교회가 이 정죄를 전복시키기를 원했습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 반대하여 알렉산드리아는 로마와 늘 뜻을 같이하여왔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로마교회가 알렉산드리아에 등을 지고 콘스탄티노플과 뜻을 같이 했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교회 역시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물리치고 콘스탄티노플 교회와 함께 그 영향력을 높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디오스쿠루스는 449년 에베소 종교회의에 운명을 걸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종교회의는 플라비안 견해를 정죄하고 유티케스를 정통으로 선포했습니다. 며칠 후 플라비안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이유는 종교회의에서 받았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폭력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로마 감독 레오 1세는 플라비안을 지지하고 양성론적 기독론을 지지하는 서신을 그 종교회의에 보냈지만 읽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레오 1세는 그 종교회의를 ‘강도회의’(robber’s synod)라고 명했습니다.
유티케스(약 378~454)는 콘스탄티노플 장로며 수도원장이었습니다. 3차 범종교회의에서 시릴을 후원했던 자였죠. 그렇다면 당연히 네스토리안들을 반대한 자이기도 하죠. 그들에 반대하여 유티케스는 신ㆍ인성의 연합 후 그리스도께서 하나의 본성만 있게 되었다고 확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즉 성육신하신 말씀만 있다는 것이죠. 그분의 인간 육체는 본질적으로 다른 인간 육체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시릴과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견해를 벗어나게 되고 말았습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었거나 변질되었다고까지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448년 콘스탄티노플 감독 플라비안이 주제하는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말았습니다. 만족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그를 파직시키고 출교시켰습니다. 다음 해 449년 알렉산드리아 감독 디오스쿠루스가 이끄는 에베소 종교회의에서 유티케스를 복직시키고 448년 종교회의를 주재했던 플라비안을 도리어 파직시켰습니다. 그리고 한 본성이라는 교리를 알렉산드리아 교리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결정은 로마 감독 레오 1세를 분노시켰습니다. 그는 켈레스틴을 이어 로마 감독이 된 자인데 플라비안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자로서 두 본성과 한 인격을 주장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로마제국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가 죽고 그의 누나 풀체리아가 다시 남편 마르키안과 더불어 정권을 장악하면서 단성론을 반대하는 종교회의, 즉 451년 칼케돈 범종교회의를 개최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449년에 개최된 에베소 종교회의를 ‘강도회의’라 칭하면서 그곳에서의 모든 결정을 무효화시켰습니다. 그에 따라 유티케스는 추방당해 죽게 되었습니다. 그가 죽자 그를 평소에 지지하던 황후 유독시아의 후원 아래 그의 사상은 시리아로 퍼져나갔습니다. 6세기에 이르러 그를 따르는 자를 유티키안들 또는 단성론자들이라 부르고 그들이 세운 교회를 ‘야코바이트 교회’라 부르게 됩니다.

 

 로마 감독 레오 1세
로마 감독 레오 1(440~461)세는 대단한 인물입니다. 스스로 ‘교황’이라고 자청하면서 로마 감독의 권한을 다른 교회들보다 우위에 두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교황제’의 시작을 레오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당시가 게르만의 대이동이 계속되는 상황이었고 410년 서로마제국이 서고트족의 왕 알라릭에 의해 몰락 당하자 스스로 교구를 확장하고 지켜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레오 1세는 모든 권력을 이용하여 로마 감독직을 지킬 뿐만 아니라 지상권으로 나아가는 발판을 맞이했습니다. 더욱이 레오 1세와 훈족의 왕 아틸라의 이야기는 그가 과연 어떤 자였는지를 잘 말해줍니다.

▲말을 타고 공격하는 아틸라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이었던, 그러니까 현재 몽골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훈족은 이렇다 하는 결집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아틸라의 지도력으로 거대한 민족으로 통합되었습니다. 그런 후 4세기에 이르러 유럽으로 진격해 나갔습니다. 그러자 고트족들은 로마제국 영내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골 지방을 점령한 아틸라는 이태리로 진격했습니다. 동로마제국은 그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고 오히려 공납하여 달랠 정도였습니다. 이태리로 공격해오는 아틸라를 막은 사람은 다름 아닌 로마 감독 레오 1세였습니다.

▲레오 1세와 아틸라

과격한 아틸라는 잔인하고 난폭한 자로서 점령지를 약탈하고 포로들을 겁탈하거나 고문하는 것은 예사였습니다. 그는 파비아와 밀라노를 전멸시키고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로마로 진격하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452년이었는데 흰 머리카락을 날리던 나이 많은 로마 감독 레오 1세는 로마의 총독 트리게티우스와 집정관 아비에누스와 함께 포와 민치오 강 근처에서 대담을 나눴습니다. 아틸라를 만난 레오 1세는 정중히 말했습니다. ‘과거에 세계를 호령하던 로마와 로마인들은 이제 당신 앞에서 굴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신의 자비와 긍휼을 바랍니다. 당신은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이 일에 대해 로마인들은 진심으로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아틸라는 레오 1세를 경멸하지 않고 높이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아틸라는 로마를 공격하지 않고 되돌아갔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대단한 레오 1세가 아닙니까?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몇 년 후, 455년 반달족 왕 겐세릭이 군사들을 데리고 아프리카에서 올라와 로마시를 에워쌌습니다. 이때에도 레오는 침입자들을 물리쳤습니다. 10일 동안 약탈을 자행하던 반달족은 물러갔습니다. 레오는 이제 침입들로 인해 파괴된 도시와 건물들을 회복하는 데 힘썼습니다. 또 아프리카에 이태리계 제사장들을 보내고 그 교회들의 회복을 위해 힘썼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그가 감독직에 있는 21년 동안 그의 지위는 매우 상승했습니다. 그는 461년 11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를 가리켜 ‘대’라는 칭호를 붙여 ‘대 레오’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레오 1세는 로마 감독 켈레스틴 1세와 식스투스 3세의 부제로 지내면서 자신의 역랑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리고 세미 펠라기안 카시안과 동조하고 알렉산드리아 감독 시릴과 협조하여 단성론자 네스토리우스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는 이단들이 여기저기에 퍼져 있을 때 탁월한 정치력과 높은 도덕성으로 이들의 문제를 잘 헤쳐 나갔습니다. 예화를 하나 들겠습니다. 439년 야만족 반달족을 피해 북아프리카에 있던 많은 마니교도들이 로마에 정착하여 살게 되면서 거짓 신앙을 전파하였습니다. 이런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레오 1세는 443년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성직자들과 평신도들 가운데 사교에 영향을 받거나 비도덕적으로 살고 있는 자들을 공적으로 회개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불응할 시에는 로마에서 추방시켰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사에 크게 공헌한 것은 단성론에 반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단성론자 유티케스에 반대하는 콘스탄티노플감독 플라비안을 정죄한 449년 종교회의에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자 ‘토메’(Tome, 서신 또는 로마 카톨릭 신앙고백서)를 보냈지만 그 종교회의는 로마 감독의 사절단을 감금시켰습니다. 교황이 이러한 소식들을 전해 듣자마자 그는 그 결정이 무효하고 무익한 것이라고 선포하며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에게 강력한 서신을 보냈습니다.

▲높이 750m나 되는 바티칸에 있는 레오의 제단

"믿음을 변호하려는 자유를 감독들에게 돌려주기를 바란다. 세속적 권력이든 공포든 믿음을 전멸시키지 못할 것이다. 교회를 보호하고 교회 평화를 보존하도록 힘쓰기 바란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국을 보호하실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449년 10월 그는 로마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강도회의’의 무효성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던 와중 450년 갑작스럽게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가 죽으면서 동방교회와 동로마제국의 상황이 급변하게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감독으로 아나톨리우스가 임명되면서 레오와 뜻을 같이하게 되었고 그는 레오 1세의 ‘토메’를 사람들에게 인식시켜 나갔습니다. 동시에 로마 감독직과 콘스탄티노플 감독직의 동등성을 서로 인정했습니다.
451년 데오도시우스 2세의 누나 풀체리아의 남편인 마르키안이 새로이 황제직에 오르면서 그는 다시금 소아시아 칼케돈에서 범종교회의를 개최했습니다. 6백 명의 감독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이 범종교회의에 레오는 세 명의 사절단을 보냈습니다. 파직과 추방을 당했던 플라비안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에 대한 변호도 이뤄졌습니다. ‘강도회의’에서는 레오의 서신들이 의도적으로 읽혀지지 않고 파문을 당했지만 다시금 그의 서신들은 범종교회의에서 읽혀졌습니다. 이 안에서 레오는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한 가톨릭 교리를 간략하게 변호했습니다. 한 편으로는 네스토리안주의와 다른 한 편으로 유티키안주의의 함정을 피했던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모인 감독들은 외치기를, ‘베드로가 레오의 입을 통해 말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한 설명은 후대에 교회의 공식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칼케돈 범종교회의 신학적 배경
4차 범종교회의, 즉 칼케돈 범종교회의는 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아시다시피 프로테스탄트들은 1~4차까지의 범종교회의를 인정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삼위일체론을 마무리하는 종교회의이기도 합니다. 여러 모양으로 논의돼 왔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이 정리됐고 여기까지의 결정을 우리는 정통으로 인정합니다. 지금까지 있었던 다양한 이단들과의 투쟁에서 이성적이고 추상적인 방법으로 기독교 신학의 많은 관점이 연구되고 점검됐습니다. 그 가운데서 칼케돈은 처음부터 모든 부분들을 재점검하는 회의였다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하겠습니다.
신학적으로 볼 때 기독론 논쟁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 간에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각자는 다른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신∙인성을 이해했습니다. 먼저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아타나시우스 견해를 따르고 아폴리나리스 견해를 확장시키는 듯 했습니다. 아폴리나리스가 비록 이단자로 정죄를 받았지만 알렉산드리아인들에게 끼친 영향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타나시우스의 견해는 인간을 위한 구세주는 반드시 하나님이셔야만 한다는 것이고, 그분은 또 죽음에서 생명으로 사람을 부활시킬 수 있는 신성을 소유하셔야만 한다는 것이었고, 지상의 어떤 인간도 그러한 위업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위격의 신성을 보호하고 주장하는 데에 모든 대가를 치렀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한 것은 아닙니다.
아폴리나리스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신성이 본질적이라고 하면서 인성이 신성으로 대치됐다고 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성육신하신 후 한 본성만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신성만 남아있다는 것이죠. 마치 파이프처럼, 육체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의 의지와 영을 부인하는 것으로 이것이 구세주의 청렴결백한 신성에 손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에 반해 안디옥 학파는 다소의 디오도레와 몹수에스티아의 데오도레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데오도레는 그리스도 안에 완전한 인간의 의지와 영(이성)을 부인하는 알렉산드리아인들에 동의하지 않았기에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구원의 능력을 완전하게 무효화시켰다고 여겼습니다. 참된 인성이 없는 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에 알렉산드리아인들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성이 그리스도에게 너무 강조되면 신성으로부터 구별할 수 없다고 그들은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데오도레는 이런 주장이 인간 의지를 포기한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께서 오직 인간 육체만 소유하고 인간의 마음을 소유하지 않았다면,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 사역은 인간의 육체일 뿐이고 온전하게 인류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게 됩니다. 그래서 안디옥 학파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구별할 수 있다고 했으며 두 본성이 연합된 후 그리스도는 두 본성이 한 분으로 합해졌으며 그 분 안에는 구별되고 분리되는 두 본성을 소유하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구세주 인격의 연합이 상실될 우려가 있다고 하여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제 안디옥 학파의 견해의 대표가 된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께서 두 본성만 아니라 두 인격, 즉 두 위격을 지녔다고 주장했죠. 그러자 알렉산드리아인들은 안디옥인들이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나눴다고 비난했죠. 이런 비난과 주장 이면에 있는 동기들을 이해하기 위해 마리아를 하나님의 모친으로 보느냐 아니면 그리스도의 모친으로 보느냐라는 이슈가 등장하면서 위의 상이한 견해는 논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강도회의

동방교회 내 두 학파가 위와 같이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신학에 서로 반대하면서 양극화 현상을 겪은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여기에는 감정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449년에 있었던 소위 에베소 ‘강도회의’에서 비롯됐습니다.
콘스탄티노플 감독 플라비안은 지역 종교회의에서 단성론을 주장하는 수도사 유티케스를 출교시켰습니다. 그는 성자 하나님이 인간적 의지를 가지지 않았고 오직 신성만 갖고 있었다고 가르쳤던 극단적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견해를 공개 포럼을 통해 들은 후 플라비안은 그를 출교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일로 유티케스는 알렉산드리아 감독 시릴의 후계자인 디오스코루스, 로마 감독 레오 1세, 그리고 동로마제국의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에게 청원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관심을 가져온 데오도시우스 2세는 449년 8월 1일 에베소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했습니다. 그 종교회의의 유일한 목적은 유티케스를 복직시키고 그를 반대했던 모든 자들을, 즉 플라비안을 파직하고 로마 감독을 출교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조그마한 에베소 종교회의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양극화 현상을 빚고 있던 두 학파는 첨예한 대립 관계에 놓이게 됐습니다.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종교회의를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안디옥 학파들은 격렬하게 그 종교회의를 반대했고, 로마 감독 레오1세는 그 종교회의를 ‘강도회의’(Latricinium)라 불렀습니다. 플라비안과 안디옥 학파 대표자인 데오도레는 또 다른 종교회의의 필요성에 대해 레오 1세와 뜻을 같이 했습니다. 레오 1세는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 그의 누이 풀체리아, 그리고 플라비안의 지지자들에게 서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는 에베소 종교회의의 결정을 유지하고자 했기 때문에 또 다른 종교회의를 원치 않았습니다. 다음은 레오 1세가 풀체리아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입니다.

 

우리 성직자들의 손으로 급히 보내야 했던 믿음에 관한 서신을 읽는 동안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믿음에 반대하여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을 주셨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또는 성직자들은 당신은 결코 실망시킨 적이 없었음을 알고 있다. 믿음을 지키는 일에 참여하려고 갔던 자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가운데서 당신의 온정을 받지 못하고 우리에게 도피해 왔다. 이 일로 우리는 다시금 당신에게 서신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고, 우리의 기도가 더욱 필요한 때라고 믿는다. 당신의 온정을 받지 못했던 바로 그 문서의 복사판을 함께 보낸다. 당신이 따랐던 귀중한 신앙에 반대해 일어난 여러 범죄들보다도 더 큰 영예가 당신에게 넘치기를 바란다. 이 신앙은 당신의 보호 아래 잘 지켜져 왔으나 지금은 그리스도의 신앙의 순결성이 사람의 음모로 인해 모독되고 있다. 이에 에베소에서 종교회의를 다시금 열어 올바른 기독교 신앙을 회복해야 할 줄로 믿는다.

그런데 450년 낙마로 인해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누이 풀체리아가 동방제국의 정권을 갖게 됐습니다. 그녀는 단성론을 반대하고 안디옥 학파를 지지했습니다. 단성론자들은 이제 역풍을 맞이하게 됐죠. 에베소 종교회의에서, 즉 강도회의에서 정죄를 받은 감독들은 복직되었고, 유티케스는 콘스탄티노플 근교에 있는 어느 수도원으로 보내졌습니다. 풀체리아의 남편이고 동방제국의 새로운 황제가 된 마르키온은 다음 해 451년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해 공식적으로 에베소 종교회의에서 정죄된 사람들을 복직시켰고, 플라비안에게 보낸 레오 1세의 서신에, 즉 ‘토메’에 나타난 교리를 공식적으로 채택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콘스탄티노플 감독 플라비안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의 교리적 서신에 서명하게 해야지 새로운 논쟁을 피할 수 있다고 레오는 주장했었습니다.
그런데 서로마제국은 훈족의 지도자 아틸라의 침입으로 인해 초토화가 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레오의 서신이 도착하기도 전에 황제 마르키안은 451년 5월 17일 칙령을 내고 9월 1일 범종교회의를 개최했던 것입니다. 로마 감독 레오 1세는 이 종교회의로 인해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과 분파자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회의가 연기되기를 원했습니다.”

 

  • 4차 칼케돈 범종교회의
  • ▲4차 칼케돈 범종교회의

 칼케돈 범종교회의

범종교회의는 니케아에서 소집됐으나 후에 칼케돈으로 옮겨져 451년 10월 8일에 다시 시작됐습니다. 이 장소는 콘스탄티노플과 황제와 보다 가까운 곳이었죠. 레오 1세의 결석을 고려해 그의 사절단 파스카시누스, 감독 루첸티우스, 그리고 사제 보니파세로 하여금 사회를 보도록 했습니다. 1차 회기에서 플라비안이 복직됐고, 3차 회기, 즉 마지막 회기에서 디오스코루스는 파직됐습니다. 유티케스의 정죄는 10월 10일에 감행돼 그는 아프리카 사막으로 추방됐습니다.
그리고 강도회의와 연관된 여러 견해들이 토론에 붙여졌습니다. 황제 마르키온은 모든 교회들이 기독론 이슈를 분명히 할 수 있는 새로운 신조를 공식화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종교회의 참여자 감독 23명의 노력으로 ‘믿음의 정의’(Definition of the Faith)가 5차 회기에서 통과됐고 황제와 제국 권위자들이 참여했던 6차 회기에서 엄숙하게 선포됐답니다. 법령에 표현된 형식(formula)은 그리스도께서는 두 본성을 가지신 한 분이시라는 것이죠. 이것은 콘스탄티노플 감독 플라비안과 레오 1세의 합일점이기도 했습니다. 흔히 ‘칼케돈 신조’라 불리는 ‘믿음의 정의’의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거룩한 교부들을 따라 우리는 한 분이시요 동일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모두가 일치해 가르치는 바는 그 동일하신 분은 신성에 있어서 완전하시며 인성에 있어서 완전하시며, 참으로 하나님이시며 참으로 사람이시며, 동일하신 분이 이성 있는 영혼과 육신으로 되시느니라.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며 인성에 있어서 우리와 동일본질이시니 죄 이외에는 모든 점에 있어서 우리와 같으시니라. 신성에 있어서 만세 전에 아버지에게 나시었으며 그 동일하신 분이 이 마지막 날에 우리를 위하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사 인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모친’(데오토코스, Theotokos)이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었느니라.

한 분이시요 동일하신 그리스도, 아들, 주, 독생자는 두 성품에 있어서 인식되나 혼합됨이 없으시며 변화됨이 없으시며 분리됨이 없으시며, 분할됨이 없으시며 ― 이 연합으로 인하여 양성의 차이가 결코 제거되지 아니하며, 오히려 각 성의 특성이 그대로 보존돼 있어 한 품격 한 개체에 있어서 결합돼 있다. 그리하여 두 품격으로 분할되거나 분리되거나 하지 않으며 한 분이시오, 동일하신 아들, 독생하신 하나님,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이는 옛적에 선지자들이 가르친 바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에 대하여 가르치신 바이며 교부들이 신조로서 우리에게 전하여 준 바와 같으니라.


 칼케돈 이후

칼케돈 범종교회의 후 긴장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두 학파간의 갈등을 칼케돈 신조가 해소하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기독론 논쟁을 해결하려는 황제 마르키온의 바람은 다시금 역풍을 만나게 됩니다. 안디옥과 콘스탄티노플은 대체적으로 결과에 만족했으나 알렉산드리아 학파, 특별히 이집트인들은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폭력으로 대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케돈 범종교회의는 그리스도 위격에 관한 정통신학을 확립했습니다.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에서 사용된 불명확한 용어 사용은 칼케돈으로 인해 확연해졌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최고 절정에 이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정통 니케아 신앙, 즉 삼위일체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칼케돈에서 마무리된 기독론의 정통 신앙입니다. 즉 ‘두 본성과 한 위격’이라는 것입니다.  헤롤드 브라운 교수의 평가를 들었으면 합니다.

만일 자유주의 기독교가 양자론과 같은 것으로 되돌아가려 했다면, 현대 보수 기독교인들은 - 복음주의자들, 근본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전통주의적 로마 가톨릭주의자들을 포함한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은 -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신성만을 중요시하고 성경과 역사적 정통이 그렇게 강력히 주장했던 인성을 심각하게 취하지 않는 유티케스나 단성론자들과 같은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그래서 칼케돈은 당대에도 중요했지만, 그것을 멈추려는 분위기가 있는 현재에도 매우 중요하다.

신조는 기독교인들에게 “한 분이시고 동일하신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가르치라고 명한다:

두 본성 안에는 분리도 나눔도 없이 오직 한 분이시고 동일하신 성자, 하나님,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계신다. 이것은 프로그램이 아니고 제한이다. 프로그램이란 말은 두 본성 안에서 한 분이시고 동일하신 성자를 가르치라고 하고, 제한이란 말은 그렇게 하면서 동시에 혼돈, 혼합, 또는 분리가 없다는 것을 더해야 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칼케돈의 배경이 아니라 미래를 일컫는다.


마지막 말이 참 인상적이죠. ‘제한이다’ ‘미래를 일컫는다’는 것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론의 울타리를 정하는 것이죠. 이 이상을 넘어가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은 당시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아니 다가올 후손들에게도 영속적으로 신앙의 울타리를 제공한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