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신약교회사관에 의한 새교회사5

2010. 1. 3. 23:32교회사자료/1.기독교회사

제11장 신약교회 사상 고수주의자들

1. 신약교회가 타락하게 되는 원인

나는 이 대목에 와서 진지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기록된 대개의 많은 교회사가들은 신약교회가 타락했거나 변질되었다고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개의 많은 교회사 기록에 의하면 교회는 역사적 발전의 법칙에 의하여 자연적으로 변화하며 자연스럽게 발전해 왔다고 본다.

그렇지만 나는 신약교회는 속 사도들과 교부들에 의해 약간씩 변질이 되고 그 변질은 훗날 큰 타락으로 연결되었다고 믿는 바이다.

그러면 신약교회가 왜 타락하게 되었는가? 이하에서 내 나름대로 몇 가지 원인들을 지적하고자 한다.

(1) 혹독한 박해 때문이었다.

AD64년경 네로황제가 로마시 화재의 원인을 기독교도들에게 전가시키면서 가혹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 이후 90년경 도미티안 황제도 요한을 유배시키는 등 갖가지 박해가 계속되었고, 130년경 하드리안 황제 때는 많은 순교자가 생겼다.

200년경 세베리우스 황제나 250년경의 데키우스, 300년경의 디오클레티안 등 멈추지 않는 박해는 계속되었다. 이렇게 계속되는 박해는 기독교의 순수한 신앙 내용을 그 당시 상황에 맞추는 현실 강조로 교회의 순수성을 모호하게 유도하였다.

신약교회 성도들은 현실보다는 신앙적 이상이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그 이상을 지키고 따르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많은 저항이 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대로 다 당하였다. 그러나 교부들은 자기들이 당면한 현실 타개가 이상보다 더한 급선무였다. 이같이 박해 때문에 어쩔수없는 교회의 변질을 가져왔다.

(2) 이교사상과 철학의 영향이 컸다.

기독교는 처음 수세기 동안을 이교도들을 개종시켜야만 하였다. 유대교, 헬라의 철학, 동양의 각종 종교, 헬라, 로마에 뿌리를 둔 이방 종교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켜야만 하였다. 그렇지만 이방 종교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기독교는 타 종교에서 시행하고 있는 타 종교의식과 비슷한 것처럼 혼용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침례는 동방종교에서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오해되기도 하였고, 헬라의 각종 신들의 예배가 카톨릭에서는 각종 천사들의 숭배로 발전되기도 하였고, 또 페르시아나 가나안에 있었던 여성신 사상은 성모 마리아 사상으로 대치되기도 하였다.

기독교는 타 종교로부터 영향을 받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들에게 영향을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지 않는 요소가 있었다. 이 같은 점들이 기독교를 부패하게 만들었다.

(3) 의식의 남용이 교회를 부패시켰다.

신약교회 당시 의식은 한낮 의식일 뿐이었다. 그러나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부터는 이교도에서 개종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기독교적인 것과 이교적인 것을 혼합시켜 놓았다. 그중에 몇 가지 실례를 들면 '침례'가 마술적인 것처럼 남용되게 된다.

즉, 저스틴(Justin)은 말하기를 침례가 구원을 가능케 한다는 침례 중생설(Baptism by Regeneration)을 말한 것이나 이레니우스(Irenaeus)가 침례로 신생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침례시 그 물이 신비한 효력이 있는 것처럼 오도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떡과 포도주가 영혼의 자양분을 준다고 할 때 그 말이 다음에는 화체설로 발전한다. 이렇게 전에는 평범한 '의식'(Ordination)이었던 것이 차츰 발전을 거듭해서 '성례'(Sacrament)가 된다.

이렇게 하여 성례전 의식은 가지수가 늘어나서 중세 때에 카톨릭은 30여가지까지 제정되었다가 현재는 7가지로 한정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성례들이 바로 교회를 타락시켰다. 왜냐하면 성례전은 곧바로 돈과 물질과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4) 교회 행정상의 난맥이 교회를 부패시켰다.

우리가 앞서 신약교회 모델을 살필 때에 신약교회의 직분에 관해 살펴보았다. 그런데 2세기로 옮겨지면서 감독직이 다른 직보다 더 크게 부상한다. 키프리안(Cyprian) 같은 이는 교회는 감독에 의해 세워짐으로 감독이 없이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성례전의 효과도 감독의 집행으로 발생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감독직이 장로직보다 우위에 오르기 시작했다. 초대교회는 감독이나 장로가 다 똑 같은 직분이었다. 그런데 장로들 중에서 보다 뛰어나고 강력한 지도자에게 교회 운영관리를 맡기며 그를 '목자장'(벧전5:4)으로 전문적 행정사인 감독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머지 비전문적인 장로들을 감독과 분리하여 그냥 '장로'라고 불렀다.

이 같은 분류는 3세기에 와서 더 분명하게 구분되어진다. 로마시 안에는 40여개의 교회가 있었다. 이 40여개의 각 교회들 안에는 자기 교회를 관리하는 장로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로마시 전체를 관장하는 행정은 한 사람의 감독이 그 임무를 맡았다.

이렇게 하여 3세기 이후부터는 감독이란 하나의 지역적인 책임자로 부상했고, 개교회 지도자는 그냥 장로라고 했다.

이렇게 발전하여 4세기 때 세 곳(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은 대교구 감독이 되었고, 나머지는 각 지방 도시의 소감독이 되었다. 이 같은 발전이 드디어 전체 교회의 감독자인 교황제도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교회에 많은 직분이 있는 것이 좋은 일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성경에 없는 교회 행정제도는 자동적으로 교회의 부패를 가져온다. 오늘날도 교회에서 성경에 없는 행정 직분의 남발은 반드시 교회의 부패를 가져올 확률이 크다, 우리는 이 같은 과거를 경험삼아 미래를 잘 설계해야 할 것이다.

(5) 교회와 국가의 연합이 부패를 가져왔다.

신약성경에서 예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마22:21)라고 하셨던 말씀에 의하면 국가와 교회와의 구분이 분명하였고 신약교회에서도 그랬다고 본다. 그런데 콘스탄틴 황제 이후 국가와 교회는 연합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황제들이 친히 교회를 소집했고, 교회의 결정을 황제가 인정하느냐 부정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 교회의 향방이 달라졌다.

교회 지도자들도 영적 힘으로 지도자 역할을 다하려 하지 않고 정치권력자들과 결탁하여 가지 세력 진출을 기도하였다. 이렇게 되자 현명하고 영력있는 지도자의 도움을 얻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생겨진 것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서 전체 회의에서 결정된 것을 권위로 인정하는 관행이 생겼다. 그런데 다수가 모인 회의에는 재능있고 재치있는 자가 회의를 유리하게 이끌어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교회의 힘은 다수가 결정하는 전체 회의에서 생기는 것이 아닌데 교회 회의를 통한 결정이 곧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갖게 되면서 교회의 부패는 점점 더 커진다. 교회 회의주의는 교권의 경쟁, 비진리가 정치적으로 승리하는 결과들을 가져오게 된다.

이 외에도 기독교인의 예배와 생활을 변화시키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계속 작용한다. 즉, 극단적인 금욕생활로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을 증명하려고 한다든가, 모든 성도가 다 같은 형제요 자매라는 일체감을 빼버리고 성직자(Clergy)와 평신도의 사이가 점점 넓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대세의 물결에 아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그냥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같은 대세 속에서도 무언가 저항을 하고 반대운동을 하는 소수의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을 이름하여 '분파주의자'들이라고 한다.

이들 '분파주의자'들은 왜 대세의 물결 속에서 반항을 하고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는가? 그들에 대한 후세들의 평가는 이단자, 또는 분파주의자라고 낙인찍었다. 그런데 그들이 과연 신앙이 없고 이교도들과 다름없는 이단들이었을까? 나는 그들이 이단이냐 아니냐를 논하려고 하지 않겠다. 다만 그들의 주장이 어떤 것이었길래 그 같은 평을 받게 됐는가? 그 사실을 있는 대로 규명하려고 한다.

2. 분파주의자

여기서 대전제로 확실히 알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그것은 분파주의자들의 오류를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우리의 완성된 신앙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기독교 2천년 역사 속에는 수많은 세월동안 많은 우여곡절과 변화를 거듭해서 오늘날의 교회가 있게 되었다. 따라서 분파주의자들도 그들이 활동했던 그 시대의 상황에 비춰봐서 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1) 몬타니스트(Montanists)

몬타니스트에 관한 연구문헌은 꽤 많은 편이다.

교문사 발행 「기독교 대백과사전」6권 p.361-391을 비롯하여 Newman의 책 1권 p.202-207, Schaff의 책 II권 p.78-79등에 소개되고 있다.

1) 몬타너스의 기원

몬타너스(Montanus)는 그가 본래 소아시아의 브루기아(Phyrigia)지방의 작은 마을인 아르타바우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원래 시벨레(Cybele)에 있는 이교사원의 사제였었다. 그가 156년경 기독교로 개종하여 사제나 주교의 직위까지 오르지 않았나 하는 추정을 한다.

몬타너스는 기독교로 개종한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자기 스스로 성령의 대변자(요14:16,26)로 자처하였다. 몬타너스는 예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가 자기에게 임해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를 보혜사 성령께서 사용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자처하였다. 성령께서는 자기를 황홀한 지경에 사로잡히게 한 다음에 말씀을 주시는데, 그때의 자기 말은 개인의 말이 아니라 보혜사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몬타너스는 보혜사의 활동사업과 자기 자신을 보혜사로 동일시하는 주장을 하였다. 이때 소아시아의 여선지자들로 자처하는 '프리스길라'(Priscilla)와 '막시밀라'(Maximilla)가 몬타너스와 합세하였다.

이 두 여인은 이상한 황홀경에 빠진 상태에서 자신들의 의식을 잊어버리고 예언을 하였다. 이들 두 여인의 예언적 활동은 몬타너스 교회 내에서 동정녀 지위로 존경을 받게 되었다(그러나 이들은 이미 다 결혼했던 여자들임).

이 같은 두 여자들의 예언활동과 몬타너스의 성령의 활동은 소아시아를 중심한 여러 교회는 물론 서방교회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되자 이들을 마귀의 집단으로 거부하는 층과 또 하나님이 보낸 시대적 개혁운동으로 보려는 상반된 반응이 일어났다.

이에 브루기아 지방의 주교들이 172년경에 회의를 열고 저들을 유죄로 판결하고 교회에서 금지하기로 결정한다. 이 회의는 사도들의 회의(행15장) 이후 최초로 모인 공식회의가 된다.

몬타너스는 자기가 동방교회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사탄적 결정이라고 보고 서방교회에 자기들의 입장을 호소한다. 그러나 서방교회의 '이레니우스'(Irenaeus)는 동서방교회의 화평을 생각하여 몬타너스의 호소를 묵살한다.

이렇게 되자 몬타너스는 모든 교회로부터 완전 분리하여 독립교회를 형성한다. 몬타너스의 후계자는 '데오토투스'는 보다 철저한 조직을 강화한다. 그리고 자기 종파에 속한 이는 '프뉴마티코이'(영적인 자들)라고 하고, 일반교회 추종자로 성령을 이해못한 이들은 '프쉬키코이'(육적인 자들)라고 부르면서 자기들 스스로 우월감을 갖는다.

2) 몬타너스파의 주장

① 몬타너스주의자들은 정통 기독교의 가르침과 사도들 신앙의 근본진리에 대하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믿었다. 그런데 교회가 사람들이 모여 제정한 교리나 계율 등은 믿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리나 계율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로 성도가 구원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② 신앙생활의 근본이 무엇인가?

경건한 신앙에 대해 말할 때 교회주의자들은 교회의 제도나 교리에 익숙한 것을 말하나 몬타너스주의자들은 경건한 삶이 곧 신앙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육체의 정욕을 극복하기 위해 금식을 많이 해야 하고 결혼은 일생에 한 번으로 족하며 재혼을 금하였다.

③ 주의 영인 성령을 믿은 자는 다 똑 같은 제사장이다.

교회의 결정은 다수의 주교들에 의해 이루어져서는 안 되고, 오히려 신령한 성령의 사람들이 다 동일한 제사장적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활동을 일정한 형식 안에서만 활동하는 것처럼 제한시켜서는 안 된다.

④ 사죄의 권한은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 있다.

본래 사죄권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었다(막2:7, 시32:5, 43:25). 그런데 성부 하나님은 그 사죄권을 성자에게 주셨다(마9:6, 15:22,24). 성자는 그 사죄권을 성령받은 사도들에게 주셨다(요20:23). 따라서 성부, 성자의 사죄권은 성령을 통해 실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사죄의 권한은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 있다.

⑤ 이들은 임박한 주의 재림을 믿었다.

3) 몬타너스파의 영향

이들의 운동은 교회가 무미건조한 의식주의로 흘러가는 데 반항하여 엄격하고 청순한 신앙운동을 회복하려던 청교도적 개혁운동이었다. 그래서 교부들 중 박학다능한 터툴리안(Tertullian)도 그의 마지막에는 이 운동에 가담했으므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들은 2세기 후반기에 시작하여 소아시아는 물론이고 동·서방까지 영향이 확대된 채 6세기까지 지속된다. 그런데 몬타너스파의 강한 주장 중 하나가 기성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는데 그것 때문에 정치적 박해까지 받는다. 그리하여 콘스탄틴 황제 때는 예배 장소를 박탈당한다. 또 550년경에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멸절상태에 있는 몬타너스파를 이단들과 함께 집 안에다 가두고 불질러 소멸시키기도 했다.

이 몬타너스파에 대한 운동을 두 가지 측면에서 보고 있다.

① 비판적인 시각

a. 사도의 계시가 자기들에게도 계속 주어진다고 한 것은 특수계시와 일반계시를 구분하지 못한 주장이다.

b. 참된 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성령의 무리들만이라고 강조함으로 스스로 영적 엘리트 의식에 도취되었다.

c. 성도가 박해 때는 순교로, 평화 때는 금욕적 생활로 성도의 미덕을 보여야 한다고 해서 자세한 생활수칙을 만들어 준수토록 함으로 금욕주의적 신앙으로 기울어졌다.

d. 지나친 말세사상 강조로 현세의 의미와 사명을 강조하는 데 소홀하였다.

이 같은 비판은 물론 타당한 말이다.

② 긍정적 시각

a. 몬타너스 운동은 이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기독교 안에서 교회의 개혁과 성도의 경건생활을 찾으려는 운동이었다. 이 같은 교회 내 갱신운동을 같은 교회의 직분을 가진 자들이 저들을 정죄하고 파문한 것은 지나친 감이 많다.

b. 오늘날도 개 교회마다 보면 성령에 사로잡힌 능력을 구하기보다는 제도와 조직의 힘 안에서 그 능력을 의지하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 몬타너스파는 최초의 의로운 길을 찾으려고 한 성도들이었다.

c. 따라서 오늘날 몬타너스파의 부분적 요소만 가지고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다. 우리는 양면을 다 보면서 이들의 잘못된 주장이 그 시대의 상황을 고려할 줄 아는 겸손함이 필요하다고 본다.

(2) 노바티안파(Novatians)

노바티안에 관해 기록한 문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Eusebius의 책이나 Schaff의 책 2권(p.196)과 기독교대백과사전(3권 p.570-576)에 수록되어 있다.

1) 노바티안의 기원

노바티아누스(Nopvatianus) 역시 소아시아 브루기아 출생으로 전해진다. 그가 개종하기 전에는 철학자였다. 그러나 그가 개종한 후 회개의 삶은 현저한 모범이 되었다. 그래서 로마교회 감독인 파비아누스(Fabianus)는 노바티아누스를 로마교회의 대집사(Archdeacon)로 임명하였다.

그 후 노바티아누스는 장로가 되어 로마 교구의 주교가 공석일 때는 주교를 보좌하는 일을 할 정도로 신망을 얻었다. 그런데 노바티아누스가 이처럼 승진과 신망을 얻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노바티아누스의 적인 '코넬리우스'(Cornelius)가 있었다. 코넬리우스는 차기 로마교회의 주교를 바라고 있었다.

이 무렵 데키우스 황제(AD150-251)의 심한 박해로 인해 많은 순교자들과 변절자들이 생겼다. 이 박해로 인해 로마 감독인 파비아누스가 순교당한다(250년 1월). 그리고 14개월 동안 공석이 된다. 이때 기회를 노리던 코넬리우스는 변절자로 소문난 '제프리누스'(Zephyrinus)의 도움으로 주교에 취임한다.

그런데 문제는 과거의 박해 때 변절했던 자들이 다시 교회로 들어오려고 할 때 그를 용납해야 하느냐, 아니면 벌을 내려야 하는 문제로 심각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코넬리우스는 관용론의 입장이었고, 노바티아누스는 책벌론자였다, 그러다가 코넬리우스가 로마 감독이 되자 노바티아누스는 이 일을 그대로 묵과할 수가 없었다.

여기에 노바티아누스 입장을 옹호하는 아프리카의 칼타고 '노바투스'(Novatus)가 이탈리아 교회의 새 감독의 추천으로 또다른 로마교회 감독으로 노바티아누스를 세운다. 이렇게 되자 로마 감독이 둘이 되었다. 이 무렵 노바티아누스는 스스로 교회 정화를 표방하고 과거에 변절한 자들이 다시 교회에 들어오려면 재 침례를 받아야 했다.

여기에 맞선 코넬리우스는 60여명의 주교들 회의를 열고(251년) 노바티아누스를 정식으로 정죄하였다. 그러자 노바티아누스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 중심으로 새로운 반대 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이들 노바티안들은 몬타너스 운동과 합세하여 7세기까지 존재하다가 사라진다.

2) 노바티안의 주장

표면적으로 노바티안 운동의 시작은 로마교회 감독직을 놓고 서로 경쟁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운동의 기원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두 사람들의 주장을 한 번 비교해보자.

① 코넬리우스의 주장

a. 교회는 교회가 필요한 관례를 제정할 수 있다(마18:18 참조).

b.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는 모든 이를 교회 안으로 소속시켜야 한다.

c. 교회는 믿음으로만 아닌 '랩시'(Lapsi : 죄를 용서한다는 대속의 속전)에 의해서라도 잃은 자를 되찾아 놓아야 할 책임이 있다.

② 노바티아누스의 주장

a. 교회는 성도들이 교제하는 곳이다.

b. 교회회의는 참작할 필요는 있으나 교회회의가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질 수는 없다. 참된 권위는 성령의 지도에만 따라야 한다.

c. 사람이 지은 죄가 '랩시'에 의해 도움이 된다고 하면 그것은 물질로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우상숭배와 같은 사상이다.

이와 같은 서로의 입장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들이 징계에 관한 문제를 놓고 교회들 간에도 견해를 달리하는 분쟁으로 치달았다. 노바티안의 강경론이 안디옥교회에서는 환영을 받았고, 서방교회와 특히, 아프리카 칼타고의 키프리안은 노바티안의 주장을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면 노바티안은 왜 그렇게 하였을까?

그의 입장에서는 교회가 배교한 자와 같이 더럽혀진 자들을 아무 조건없이 다시 받아들임으로 합법적인 성직의 수임기구를 타락하게 하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거룩한 그리스도와의 연속성을 때묻히는 잘못의 선례가 된다고 보았다.

또 교회는 죄를 해결하도록 위임받은 기관인데 죄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무조건 용납하는 것은 저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죄를 나누어 갖게 된다고 보았다.

3) 노바티안의 영향

이들 노바티안은 신앙의 정절을 대단히 중요시하였다. 그래서 자기들 주장과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이들과는 교제를 멀리했다. 이 같은 이들의 진의는 다른 이들에게 이해되지를 못하였다. 카톨릭교회는 이들을 자기 세력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강요하였으나 끝내 고집하면서 독자적인 신앙노선을 펼쳐나갔다.

이들은 6세기 또는 7세기까지 유지되다가 자체 내 몰락으로 사라지고 만다. 이들이 역사 속에 남긴 공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저들이 그토록 많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왜 그토록 어려운 신앙생활을 하였을까? 이것을 단지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이해의 눈길로 봐야 할 것이다.

(3) 도나티스트파(Donatists)

도나티스트에 관한 문헌은 많이 있다. Schaff의 책 2권(p.197), Newman 책 1권(p.208-210)의 책과 또 기독교대백과사전 4권(p.289-305)에도 기록되어 있다.

1) 도나티스트의 기원

도나티스트파는 '디오클레티안'의 박해가 끝날 무렵에 시작된다. 교회는 극심한 박해가 있을 때마다 많은 변절자들이 생겼다. 변절자들은 비단 신자들뿐만 아니라 감독들 중에도 있었다. 그 중에 '펠릭스'(Felix)라는 북아프리카 주교가 있었다. 펠릭스는 박해 때 성경을 버리고 성물들을 부숴버림으로 노골적인 변절자로 알려졌다.

박해가 끝났을 때 감독 중 중요한 자리인 칼타고 감독이었던 '멘수리우스'(Mensurius)가 죽자(311년) 그 후임으로 '카에킬리아누스'(Caecilianus)를 선정한다. 그런데 이 카에킬리아누스를 감독으로 안수한 안수위원 중에 하나가 변절자로 소문난 '펠릭스'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엄격파들은 '카에킬리아누스'의 임직이 무효라고 선언하고 '마조리누스'(Majorinus)를 따로 선출하였다. 그런데 마조리누스가 선출된 후 곧 사망하자 그의 후임으로 '도나투스'(Donatus)가 선출되었다.

이렇게 되자 칼타고교회 안에 카에킬리아누스와 도나투스라는 두 감독이 존재하였다. 이때 다른 교회들은 누구를 감독으로 인정하느냐 하는 어려움이 생겼다. 그런데 로마교회 감독은 카에킬리아누스를 지지하였다.

여기에 콘스탄틴 황제까지도 합세하였다. 즉, 제국의 통일을 위해 교회의 통일을 바랐던 콘스탄틴 황제는 다수 감독의 의견을 따라 카에킬리아누스 감독에게 특혜(면세조치)를 허락했다. 이렇게 되자 카에킬리안들은 황제의 정책을 따랐고, 도나티스트들은 "황제가 교회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항하고 나섰다. 그리고 저들은 '세상이 군주와 간음을 범한 교회' 또는 '황제의 조직망 확대에 가련하게 고용된 고위 성직자'라고 비난하고 교회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렇게 되자 콘스탄틴 황제로서는 무력으로 진압하기 어려웠다. 그러자 330년경에는 270명의 주교들이 따로 모임을 갖는 등 계속 세력이 확장되었다.

2) 도나티스트의 주장

도나티스트 분파운동이 겉으로 볼 때에는 칼타고 감독 자리를 놓고 서로가 경쟁하며 싸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간과할 수 없는 깊은 신학적 문제가 내재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몇 가지를 살펴보겠다.

① 성례전의 효과문제

이 문제는 도나티스트와 카톨릭 주교인 '오프타투스'사이의 논쟁을 통하여 가장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 오프타투스 : 침례는 장소나 사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침례의 권위는 사람이 아닌 성 삼위의 이름으로 주기 때문이다.

. 파르메니아누스(도나티스의 후임자) : 아무것도 줄 것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성삼위의 무엇을 줄 수가 있겠는가? 그 안에 어떠한 선도 지니고 있지 않은 죄인이 어떻게 하여 주님이 주신 귀한 축복을 줄 수 있겠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두 사이에 서로 팽팽한 대립을 하였다. 도나티스트들은 자격이 없는 감독에 의해 실시된 안수나 성직 임명은 효력이 없다고 주장했고, 성례전의 효과는 그것을 시행하는 감독의 자격과 가치에 달려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카에킬리안은, 성례전이나 이에 준하는 행위들은 그것을 실시하는 인간의 자격과 가치여부에 좌우될 수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모든 기독교 신자들이 성례전을 집전하는 목회자의 영적 상태를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침례나 성찬 때마다 계속 회의와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침례의 효과 문제는 주는 이보다 받는 이의 자세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성경에 보면 가나안 여인의 경우(마15:21-28)나 또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마9:20-22)의 경우를 통해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받는 사람의 믿음이다. 그러므로 침례의 효과 문제는 성삼위의 이름 안에서 해결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할지라도 계속해서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지 않는 지도자는 성례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믿음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②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

. 오프타투스 : 교회는 두말할 것 없이 국가의 지도를 따라야 한다.

. 파르메니아누스 : 교회와 국가는 서로 분리되어야 한다.

여기에 관해 성경에서는 원칙적으로 분리되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마22:21, 롬13:7, 고후6:15-16). 그렇지만 분리를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데 있어서는 보다 성경적인 태도를 지켜야 할 것이다.

그런데 도나티스트들은 자기들의 순수성만을 주장하고 남들과의 대화를 거부한 채 독선적인 길을 걸어갔다. 그래서 정부로부터 간섭받는 것도 싫어하고, 정부의 지시에도 거절하는 일을 큰 영예처럼 여겼다.

이 같은 결과로 국가에서는 계속 강경한 압력을 가했다. 373년에 '발렌티아누스'황제는 칙령으로 재 침례를 받은 성직자는 파면하도록 했고, 375년과 377년에 '그라티아누스'황제 칙령은 도나티스트파가 사용하는 교회는 몰수하고 그들을 위한 선전물도 몰수했다.

이렇게 국가로부터 탄압을 받으면서도 자체내의 파벌 싸움으로 스스로 세력의 약화를 가져오고 결국에는 역사 속에 사라지고 있다.

③ 신자의 생활에 관한 문제

. 엄격한 교회 훈련에 의한 신앙생활

. 개인 신앙 양심의 보장

. 회중정치의 교회

. 유아세례 반대

. 선교하는 교회 등을 강조하였다.

이들의 주장과 신앙은 성경에 있는 주장들이었다. 이들의 삶 역시 특색있는 삶을 살아갔다. 그러나 저들의 단점은 자기들과 맞지 않으면 상대방을 공격하고 그리고 분리하는 분파적 기질이 강했던 점이다. 이 같은 분파적 기질은 현대교회들 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3) 도나티스트의 영향

이들이 처음 출발할 땐 배교했던 주교의 안수는 효력이 없다라는 교회의 규율 문제로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자기들에게 불리하게 편을 드는 국가와 황제에 대해 거부하며 싸우는 것으로 확대된다. 이들이 처음에는 국가의 반대를 피하다가 나중에는 반 정부운동으로 과격하게 확산된다.

그리하여 황제가 앞장서서 핍박함은 물론이고, 이들을 반대하는 세력도 함께 가세하여 괴롭히게 된다. 이들은 자기들만이 참 교회라는 영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살다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력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당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성례전의 유효성 문제에 관한 너무 지나친 주장은 또다른 반대 주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즉, 도나티스트와 논쟁을 한 어거스틴은, 성레전은 예전을 베푸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과는 무관하다고 하였다. 심지어 어거스틴은, 마귀의 편에 선 사람이 실시하는 성례전도 거룩하다고까지 하였다.

이 같은 주장이 다음에 오는 맹목적인 성례전주의로 카톨릭교회로 하여금 의식을 더 중요시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성례전을 그렇게 하는 것이 타당할는지 모르나 예전의 유효성(efficacy)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 어거스틴의 약점이었다

 
출처 : 행복충전소†대명교회(김종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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