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신약교회사관에 의한 새교회사2

2010. 1. 3. 23:31교회사자료/1.기독교회사

⑺ 핍박받는 신약교회

신약교회 성도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한결같이 핍박을 당한다. 우선 예수님 자신도 핍박을 받으셨다.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으셨다. 사두개인들이 부활이 없다 하여 예수를 핍박하였고(마 22:23 참조), 바리새인들에게는 율법의 파괴자라 하여 핍박을 받으셨다 (요 5:18).

예수님은 또 로마정부와 관리들로부터 핍박을 받았고(요 19:16), 형제들과(요 7:3-5) 이방인들로부터도 핍박을 받으셨다. 이같은 핍박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야고보 사도는 AD44년경 순교를 당했으며(행 12:1-2참조), 빌립(요 12:20-22, 행 1:13)도 순교를 당했을 가능성이 많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도 순교(AD67년경), 안드레는 에렛사에서, 바돌로매는 인도에서, 마태는 이집트에서, 맛디아나 유다 역시 모두 순교당했다는 전설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 요한도 Domitian황제 때 밧모섬으로 유배당하는 핍박을 당하였다(계 1:9). 또 바울 사도 역시 수많은 핍박 속에서 험난한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산 사람이었다 (고후 11:23-27 참조).

신약성경 전체를 펼쳐볼 때 고난당하지 않은 성도가 없으며, 핍박당하지 않은 제자가 없다.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하셨다. 오늘날도 예수를 따르려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십자가의 고난이 동반되어야 한다.

현대교회 중 기독교 신앙에서 십자가의 고난과 제자들의 핍박의 길을 빼버리고 번영과 축복만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의 심각한 변질화이다. 신약교회를 정상적으로 아는 이는 핍박받는 교회상을 반드시 고수해야 할 것이다.

신약교회는 역사 속에서 각기 다른 양상으로 핍박을 받아왔다. AD63-313년까지는 세속 정치인 로마 정부의 관권으로부터 핍박을 받아왔고, AD313-1500년대까지는 교권 정치인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수많은 핍박과 죽음을 당했다.

그 후 1600년대는 앵글리칸 교회가 한동안 핍박을 가했고, 근대에 와서는 자유주의 신학사상이 순수교회를 핍박하였고, 현대에는 사회복음과 신학이 복합된 단체들,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을 빼버린 번영 신학자들, 또 편파적 성령운동가들이 순수교회들을 핍박하고 있다. 신약교회는 옛날이나 지금도 여전히 핍박을 받고 있다.

⑻ 선교와 복음이 팽창되는 교회

신약교회는 사도행전 2장에서 시작되었다. 이때 저들의 모인 숫자는 120명정도 되었다 (행 1:14).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후 숫자는 3천명으로 늘어난다(행 2:41). 그 다음에는 예루살렘 교회가 계속 성장하여 남자만 5천명이 된다(행 4:4).

이때쯤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여자는 계수하지 않고 남자만 계산한 게 5천명이니까 모르긴 해도 남녀 합치면 1만명이 넘을 것이다.

그 다음에 예루살렘 교회 때에는 사람 숫자가 너무 많아서 수를 헤아리지 않고 그냥 '큰 무리'(행 5:14)라고만 한다.

이렇게 번져가는 무리들은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행 8장), 그리고 '안디옥'(행 11장), '빌립보'(행 16장), '데살로니가'(행 17장), '베뢰아'(행 17장), '아덴'(행 17장), '고린도'(행 18장), '에베소'(행 19장), '로마'(행 28장), '서반아'(롬 15:18) 등 계속 복음이 팽창되어졌다.

신약교회는 복음이 파급되는 영역에 있어서도 전 세계적이었고(롬 1:8), 또 저들이 미치는 곳에 모여진 사람 수도 엄청난 수였다. 이로 보면 신약교회는 수많은 핍박과 순교가 계속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와 복음은 더욱 더 팽창되었다. 아울러 오늘날에도 순수한 신약교회를 표방하는 교회들은 반드시 지역적으로, 수적으로 팽창되어져야 한다.

복음의 진수인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만 한다.

⑼ 중생한 자로 회원이 구성되는 신약교회

오늘날 대부분의 많은 교회들에서 교회 회원으로 가입되는 절차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대부분의 많은 교회들은 교회 출석 몇 주일 한 다음에 등록카드에 신청서를 써 냄으로써 교회 회원이 되게 하는 교회가 있다. 그리고 더러는 교회 출석을 잘 하고 헌금을 잘 하거나, 타 교회에 다녔던 전력만 가지고 곧바로 교회 회원이 되는 경우도 있다. 아주 심한 곳은 처음 출석한 날 곧바로 회원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정당한 방법일까?

여기에 대해 신약교회에서는 교회 회원이 되려고 하면 반드시 사도행전 2장 41절 말씀의 원리를 따라야 했다. 즉, 사도들이 가르치고 전하는 말씀을 받았고, 침례를 순종한 자들에게 제자들 수에 가입시켜 주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 회원이 되는 최소한의 기본 요건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임으로 반드시 거듭나는 체험을 한 자들이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앞서 '세례'가 아닌 '침례'가 성서적이라고 했다. 그런데 침례는 단지 주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일 뿐이고 구원을 얻는 데는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침례를 받지 않은 강도(눅 23:43), 니고데모(요 19:3), 아리마대 요셉(마 27:57-61, 눅 23:50-56, 요 19:38-42) 등은 침례를 받지 않았어도 구원을 얻은 백성으로 짐작된다.

그렇지만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전혀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이제 신약성경에 나오는 몇 사람들을 예로 들면서 거듭난다고 하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1) 니고데모의 경우(요 3:1-11)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인가?

이 사람은 바리새인이었고(요 3:1), 유대의 관원이며(요 3:1, 7:50 참조), 백성의 선생 즉 랍비였다 (요 3:10).

바리새인이라면 율법 준수에 최대의 모범을 보이는 특수 열심파였고, 관원이라면 70인 공회, 즉 산헤드린의 회원을 뜻한다(요 7:50-52). 그리고 백성들로부터는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할 줄 아는 랍비로 존경을 받는 자였다.

니고데모가 이같은 행운의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사람이었다면 나이도 상당히 많이 든 원숙한 인품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니고데모가 그토록 성경을 잘 알고, 남을 가르칠 줄 아는 지성인데다가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이었으나 그가 아직 거듭나지 않았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메시아 왕국을 대망하는 전 국민적 소망을 소유한 채 살아가는 교양이 있고 사려깊은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었다.

예수께서는 그가 아무리 지위가 높고 성경을 잘 알고 교회생활을 평생동안 잘 했다 할지라고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을 오늘 우리들 현실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오래 다니고 성경을 잘 알고 직분도 높고 교회생활 풍습에 익숙해서 고도의 전문인이 되어 있으면 그 사람은 모두가 다 구원을 얻는 것으로 치부하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은 그가 제 아무리 종교생활에 전문가라고 할지라도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크게 깨닫고 반성해야 될 점은 구원은 오랜 세월의 경륜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으로만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2) 가룟 유다의 경우

유다는 예수님의 12제자 중 하나였다. 그가 3년 동안을 예수님을 따라다니다가 마지막에 배신을 하였다. 이 유다가 예수님이 제자였었으니까 그가 이미 구원을 받았던 사람이 아니겠느냐고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구원을 받은 사람도 나중에는 타락이 가능하느냐 하는 질문도 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분명하게 유다가 12사도 중 하나이긴 했으나 저가 구원받은 사람은 아니었다는 확신을 갖게 해 준다.

마 26:14-16에는 제자인 유다가 예수를 배신할 기회를 노린다.

눅 22:3-6에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 사단의 지배를 받는다.

요 6:70에는 유다를 마귀라 했다(요 13:2, 26-27).

요 12:4-6에는 유다를 도적이라고 했다.

이상에서 보면 유다가 예수님 12제자 중 하나로 활약은 하면서도 사도다운 인정을 받기 보다는 같은 다른 동료 사도들에게서 백안시 당하는 존재였다. 이것은 그가 제자들과 함께 다니면서도 이미 그는 전혀 구원받지 못한 죄인으로 계속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유다는 3년 동안 제자의 생활 자체가 구원받지 못한 자의 생활을 하다가 종래에는 사탄의 도구로 예수를 팔고 그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행 1:18) 그는 처음부터 구원받지 못한 자였다.

우리는 유다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였으니까 그가 구원받은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상상은 순전히 인간적인 착각이다. 유다는 물론이고, 80평생을 목사로 주의 일을 한 사람일지라도 그가 거듭나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한 채 죽은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3) 베드로의 경우

베드로도 예수님의 제자였다. 그런데 이 베드로도 엄청난 실수를 함으로 많은 오해가 따른다. 베드로의 실 수는 예수께서 위험한 순간에 있을 때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일이었다 (마 26:69-75, 막 14:66-72, 눅 22:55-62, 요 18:16-18, 25-27).

그런데 베드로는 실수한 후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을 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그의 서신에서 보면 '생각'이란 말이 많이 나온다(벧후 1:12-13, 15 등).

그러면 베드로도 가룟 유다처럼 큰 실수를 했으니까 저도 구원을 받지 못한 자인가?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가룟 유다는 그가 제자가 된 후에도 여전히 죄악된 생활을 게속했고, 드디어는 사탄의 이용물이 되고 끝내 자살을 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의 생활에 굴곡이 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의 보편적 삶을 살아갔다. 그리고 실수한 후에 다시 뉘우쳐서 새 생활을 하게 된다.

우리는 베드로가 구원을 받았다가 잃어버렸다가 다시 또 찾는 그런 것이 아니라 베드로는 구원을 받았으나(마 16:16-19 참조) 그의 삶 속에서 수많은 성화의 과정을 거쳐가는 여러 단면들이 어떤 것은 실수로 보이고, 어떤 것은 뉘우침으로 보인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하고 넘어갈 문제는 신약교회 안에도 실수가 많고 또 단점이 많은 인물들이 있다. 저들에게 여러 가지로 다양한 약점들은 있으나 그러나 저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다같았던 점은 교회 회원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아울러 오늘날의 현대교회들도 각 교회의 교회 회원이 되는 기준이 과연 성서적 기준과 같은가를 점검해봐야 할 것이다.

⑽ 형재애로 다져지는 신약교회

신약교회 전체의 특징을 말한다면 그 어느 교회든지 사랑이 넘치는 뜨거운 교회였다.

초대교회인 예루살렘교회를 보라(행 2:43-47 참조).

저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하였다. 인류가 생긴 최초의 지상교회인 예루살렘교회는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다.

다음으로 사마리아교회도 빌립의 전도를 받고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는 교회 모습으로 나타남을 본다(행 8:8). 그 다음 안디옥교회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듣고 "기쁨과 찬송과 믿음" (행 13:48)이 충만하였다.

빌립보교회도(행 16:11-40) 고난 중에서 개척되었으나 그 교회의 성격을 보면 기쁨이 넘치는 교회였다(빌 1:25, 2:17-19, 28-29, 4:1, 4, 10, 18 등).

데살로니가교회도 큰 기쁨의 좋은 소문이 각처로 퍼져나간 교회였다(살전 1:8). 에베소교회 역시 바울 사도가 꺼리지 않고 복음을 전한 곳이었다(행 20:27).

신약교회 중에서 가장 문제가 많고 분쟁이 심한 고린도교회 역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교회"(고전 1:2)라고 하였다.

신약교회는 그 어느 교회든지간에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다. 우리가 잘 아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는(계 1:11) 2천여년간 지속되는 교회시대의 각 교회들의 특징을 예언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일곱 개의 교회들이 다 주님으로부터 책망과 경고를 받지만 몇 교회가 예외인 교회가 있다. 그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계 3:7-13)이다.

빌라델비아란 그 말의 뜻이 '형제의 사랑'(Brotherly love)이란 뜻이다. 왜 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책망을 받지 않았는가? 그 간단한 대답은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2천년 교회 역사에 보면, 교권수호에 정열을 쏟거나 교리나 신학을 위해 투쟁하거나 교파나 자기 계보를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교파나 신학, 그리고 교리를 뛰어 넘어서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크게 사용하셨다.

오늘날도 각 종파마다 각기 다른 교리, 그리고 각 신학교마다 각기 서로 다른 신학의 주장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메말라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을 때 그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예수님의 모습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의 모습이었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모습'이었다(요 1:14, 17).

그런데 오늘날 보수 교회들 속에는 '진리'는 있을지 모르나 '은혜'가 약하고, 자유론 교회들 속에는 '진리'도 '은혜'도 약하다. 이제 새로운 신약교회 모습을 되찾으려면 진리만 아닌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은혜운동을 회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⑾ 제자가 양육되는 신약교회

신약성경 안에 '제자'라는 단어가 무려 250여회 반복되고 있다. 성경에 많이 쓰였으니까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신약교회는 예수님께서 12제자를 양육하여 그 제자들이 초대교회를 이룩하였다(행 1:26).

그런데 12제자는 또다시 계속하여 더 많은 제자들을 양육한다. 모르긴 해도 12제자가 핵심이 되어 120명(행 1:15)의 열심 당원을 만들었고, 이들의 영향으로 500여 형제(고전 15:6)로 번져갔고, 그 다음에는 3,000명으로 늘어났다(행 2:41). 그리고 이 숫자는 계속 남자만 5,000명으로 늘어난다(행 4:4).

이렇게 많은 숫자가 전부 훈련받은 제자들인가? 여기에 대해 네비게이토의 창시자인 Dawson Trotman은 예수님의 초기 관심을 대중이었으나 대중을 지속적으로 부흥하게 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일이 필요했었다고 했다. 따라서 수많은 군중의 숫자는 제자들을 양육한 현상적 결과라는 것이다.

제자로 양육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고 또 함께 생활하면서 많은 투자를 해야 하는 희생이 따라야만 한다. 그래서 성급한 사람은 하기 어렵고 또 희생을 즐거운 마음으로 헌신하는 사람이 아니면 성취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가장 좋은 성공의 모범을 보게 된다. 예수님은 그의 평생에 예배당을 짓는 일도 없고, 학교를 세운 일도 없었다. 그리고 그가 써놓은 책 한 권도 없다.

그가 3년 동안에 하신 일이 있다면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시면서 제자들을 훈련시키신 일 뿐이다. 그런데 그 제자들이 전 세계를 뒤집어 놓고 말았다.

예수님의 본을 따른 그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수 사도 역할을 한 베드로는 그의 제자가 마가였다(벧전 5:13). 이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로(골 4:10) 한때는 바울과도 함께 선교여행을 다녔던 사람이다(행 15:36-41).

베드로의 영향도 많이 받고, 바울의 영향도 많이 받은 마가 요한은 그 후에 마가복음서를 썼다고 믿는다. 역시 베드로의 제자다운 열매였다.

또 바울 사도도 마찬가지다. 바울의 제자 중 대표자는 디모데이다(딤전 1:2). 바울은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부른다(딤전 1:18, 6:20, 딤후 1:2, 몬 1). 바울이 수많은 제자들을 양육했을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제자라는 기록은 없어도 빌레몬, 에바브라디도, 오네시모 등 많은 제자들이 바울의 영향을 받은 자라고 본다.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캅(Polycarp)은 서머나교회의 감독으로 지내다 순교를 하였고 폴리캅의 제자인 '이그나투스'(Ignatius)는 안디옥 교회의 감독으로 지내다 순교당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된 '제자양육'의 길은 농도와 형태가 다를 뿐 기독교 2천년사에 계속되어 왔다. 이제 현대교회가 너무 수적인 물량주의적 사고방식 때문에 더디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제자양육의 모범을 기피하려고 하면 이 교회는 주인의식이 없는 구경꾼들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현대교회들이 제자훈련의 의미를 알고 각 교회마다 다양한 제자양육을 시도하나, 제자양육은 어떤 프로그램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있을 때 다른 사람도 예수님의 제자로 만드는 일이라 믿는다.

⑿ 종교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신약교회

기독교가 세계에 번져있는 여러 종교들 중에 하나이냐? 하는 문제는 많은 신학적 검토가 있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바 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 당시 종교인 유대교도들과 강한 반발을 계속한 사실을 알게 된다.

즉, 유대교도들은 종교라고 하면 당연히 상식적인 관행을 따를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들이 믿는 바 율법의 기준과 그 율법을 해석하여 전해준 장로들의 유전에 따라 남의 신앙을 판단하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자구나 조문보다는 율법의 정신과 율법을 주신 분의 의지를 살리는 데 그의 관심을 모았다. 그랬기 때문에 기존 종교의 틀을 고집하는 이들에게는 여러가지로 많은 부닥침이 있었다.

오늘날도 자기들이 만들어논 신학과 교리, 또는 견해를 가지고 상대방을 비난하고 평가하는 종교주의자들이 있다. 이들 종교주의자들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왜 행해지는가에 대한 성서적, 역사적 검증을 도외시한다. 예컨대 오늘날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나 순서나 내용이나 방법들이 과연 성서적인 것인가?

여기에 대한 검증은 해 보려고도 하지 않고 단지 전통적으로 해 내려온 그것 자체에 큰 의미를 주려고 한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종교심리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기존 종교형식에 얽매이지 않으셨다. 그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시느냐 라는 신앙 대상에 깊은 내면적 문제에 항상 관심을 가지셨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이 세상 속에 있지만 결코 이 세상 속에 머물러 있는 그런 교회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분명히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 시절에 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는 분명한 기준이 있었다(마 22:21).

또 예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고 하면서도 예수께서는 "내가 왕이니라"(요 18:37)고 하신다.

예수님은 로마제국의 식민지하에 살고 있던 유대 사람이었으나 유대 사람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유대나 로마를 초월한 우주의 왕으로 자기를 드러내셨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 안에서 활동하셨지만 그러나 이 세상 속에 파묻혀서 예속당하지 않으셨다.

이같은 삶의 자세는 제자들도 다 마찬가지이다. 베드로를 보면 대제사장들과 관원과 장로들이 다 모여서 "너희가 무슨 권세로 이같은 일을 하느냐"(행 4:7)고 위협하고, 더 이상 이런 일을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린다.

이때 베드로는 저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적 권위나 관원들이 행사할 수 있는 세상 정치적 위협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9-20)고 항변한다 (행 5:29 참조).

바울도 마찬가지이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 6:14-16).

여기에 보면 우리 주님을 영접한 자들은 세상에 믿지 않는 이와 구분해야 할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신약교회는 유대교나 기타의 종교와 같은 형식적인 종교형태에 얽매이지 않는 교회였다. 또 신약교회는 세상과 분리되어 세상을 초월하되 세상에 영향을 주는 교회였다.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가 너무 타 종교화의 대화라는 명분으로 종교화 되어가는 것은 신약교회의 변질을 의미한다. 오히려 신약교회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향한 관심에 대해 그 진의를 찾으려고 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제사 형식, 또는 순서, 내용이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유대인들과 유대교는 율법의 조문과 장로들의 전통을 존중한 나머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심중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형식이나 외형보다는 율법의 정신을 소중히 여기셨다.

그리고 신약교회는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영향을 받기 보다는 저들이 가는 곳마다 세상에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예루살렘 전 시민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안디옥교회에는 너무 그리스도를 많이 닮은 '그리스도쟁이'(크리스천이란 말은 그리스도쟁이란 뜻이었다)가 생기게 되었다(행 11:26).

에베소교회에는 복음으로 인해 우상 장사업이 문을 닫는 역사가 일어났다(행 19:27).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의 복음으로 온 성에 소동이 일어나는 역사가 나타났고(행 17:5), 또 바울이 로마에 갔을 때는 로마 군인들이 복음을 듣고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다(행 28:16, 24).

신약교회는 종교성도 탈피하고 세상으로부터서도 분리되는 교회였다. 이 원리가 오늘날도 지켜질 때 교회는 살아있는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3. 교회의 의미는 무엇인가?

신약 안에는 '교회'에 해당되는 말이 114회나 나온다. 그 중 90%가 바울서신과 사도행전, 그리고 계시록에 나온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Church'란 말은 '큐리아콘'으로 그 뜻은 '주께 속한 자'라는 뜻이다.

우리가 잘 아는 에클레시아란 말은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불림을 받은 사람들의 집회'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존재 들이다.

그런데 이같은 내용을 닮은 표현이면서도 성경 안에는 여러 가지로 다양한 갖가지 표현들이 있다. 그 표현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뜻으로 우리에게 함축된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이제 그 용어들 중 가장 많이 쓰는 10개의 용어를 살펴보자.

① 성도(성화된 자들) - 롬 15:16-31, 고전 1:2, 14:33, 고후 1:1, 엡 2:19, 히 13:12, 벧전 2:5, 계 20:19, 여기서 말하는 성도란 윤리적 개념이 아닌 성별의 개념이다.

② 신자들(신앙 응답에 따라 나선 자들) - 마 28:19, 요 10:4, 행 11:26, 14:22, 28, 18:23, 계 14:4

③ 종(주의 종, 의의 종) - 롬 1:1, 6:17-22, 빌 1:1, 약 1:1, 벧후 1:1, 계 1:1

④ 하나님의 백성 - 고후 6:16, 벧전 2:9, 계 21:3

⑤ 하나님의 성전 - 고전 3:16, 19, 고후 6:16, 계 17:15

⑥ 하나님 집의 가족 - 마 21:13, 요 2:16-17, 히 8:9-10, 벧전 2:5

⑦ 그리스도 안에 한 몸 - 고전 6:15, 12:4-11

⑧ 포도원과 양떼 - 막 12:1-12, 마 20:1-16, 요 15:1-6

⑨ 새 출애굽 - 약 1:1, 벧전 1:1, 계 16:12, 18:24

⑩ 새 피조물 - 고후 5:17

이렇게 다양한 푷녀들이 있으나 그 모든 뜻에는 역시 '에클레시아'란 말이 모든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약간씩 새로운 뉘앙스를 풍기는 다른 용어들이 표현하려고 하는 함축된 뜻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이지 고정된 물체가 아니가 때문이다.

a. 다음으로 중세 카톨릭 교회에서는 '교회'를 어떻게 보았는가?

카톨릭이란 말의 뜻도 '보편성'이란 뜻으로 교회는 보편성을 가진 진리의 보존자로서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믿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카톨릭은 외적 존재형태의 통일성을 중요시한다. 그들은 교회의 통일성은 세 가지 기본적인 것으로 판단한다.

즉 신조(일정한 신앙조문), 직제, 경전 등이다.

카톨릭이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내적 신앙도 인정하지만 그러나 보다 중요시하는 것은 이상 세 가지의 기본요소가 갖춰졌느냐에 따라서 교회가 인정되기도 하고 인정되지 않기도 한다.

카톨릭이 말하는 직제란 주교직의 연속성이 베드로까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말한다. 이같은 주교직에 입각한 교회조직이 곧 교황 정치제도이고,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교회 위에 있는 존재이다.

b. 중세기 카톨릭에 반기를 든 종교개혁자들은 '교회관'이 무엇인가?

M. Luther는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으로 파악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는 숨어있는 동시에 또한 지상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은 역사성을 지닐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했다. 여기서 소위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란 말이 나온다.

쯔빙글리는 교회의 보편성(카톨릭성)과 교회의 영성을 동일시하였고, 진정한 교회는 '선택된 무리' '예정된 무리'라고 하였다. 쯔빙글리는 주로 '에클레시아'라는 개념에 역점을 주었다.

칼빈 역시 '선택된 무리'가 곧 교회이며,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가 그의 지도자인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칼빈에게 있어서는 교회란 곧 그리스도와 공동체적 의식을 갖는 무리라고 보았다. 그래서 교회는 공동체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목사, 교사, 장로, 집사와 같은 제직이 필요하고 교회의 효율적인 기능 수행상 필요한 것들을 제안하였다.

c. 현대에 와서는 교회관이 혼란스러워졌다.

특히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큰 부흥을 가져온 R. Schuller는 말하기를 '교회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혀 몰라 길을 잃어 방황했던 이웃 영혼들에게 저들의 거룩한 믿음을 기꺼이 나누어주는 희락에 가득찬 크리스천들의 모임'이라고 했다.

슐러 목사는 교회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알게 해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같은 교회관은 전통이나 기존 관습에 전혀 구애받지 않으려고 한다.

또 현대 '교회성장학'의 창시자인 McGavran은 교회에는 이중구조가 있다고 했다.

즉, 형태(교파, 조직, 단체 등)로 구성한 Modality교회가 있고, 형태는 없으나 선교운동으로 교회 기능을 감당하는 Sodality가 있다. 이 Sodality를 Para-Church(준교회)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라고 하면 그 뜻이 다 동일하지 않다.

앞서 살펴본 대로 카톨릭이나 개혁교회나 현대교회들이 각기 다르다. 이들 다른 교회관들 속에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교회의 개념들 중에서 특수한 어느 한 가지를 용어를 바꿔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본다. 따라서 성경 개념 중 어느 한 가지만 강조하기 보다는 성경 전체가 표현하고 있는 종합적 개념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각 종파와 각 교파와 각 신학자들이 서로 제각기 다른 교회론을 주장함에 따른 부작용이 심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교회 건물을 교회로 본다든가, 또는 사람들로 구성되고 조직된 외적 형태를 교회로 여긴다든가, 또는 특수한 장소나 무리를 교회로 보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교회는 건물도 아니고, 조직도 아니고, 교파도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려고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생명체이다. 이같은 생명체는 건물이나 조직이나 교파에 매이지 않고 계속적으로 성장하며 영향력을 드러내는 존재이다.

고로 교회를 공간개념으로 볼 때에 어떤 외형적 건물이나 제도적인 조직의 틀 속에서 보려는 것은 카톨릭적 사고이고, 또 교회는 어떤 직분에 의해서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집행되는 곳만이 교회라는 것은 칼빈적 사고방식이다.

성경은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생명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유기체라고 말씀하셨다 (골 2:16). 교회의 본거지는 하늘에 있고, 땅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모든 이는 다함께 하늘을 소망으로 삼고 자라가는 생명체들이다. 고로 교회는 계속 자라고 다른 이에게 영향을 주는 산 무리들이어야 한다.

출처 : 행복충전소†대명교회(김종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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