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신약교회사관에 의한 새교회사1

2010. 1. 3. 23:31교회사자료/1.기독교회사

신약교회사관에 의한 새교회사

정수영 목사

제3장 교회의 시작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직접 세우신 기관이 둘이 있다. 하나는 가정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주신 최대의 축복이다.

1. 교회는 어느 때 시작되었는가?

교회의 시작을 어느 때로 보아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견해는 여러 가지로 다양하다. 어떤 이는 교회의 정신적 기원을 추리하여 에덴동산 때부터 있었다고 하고, 또 다른 이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때부터라고 하고, 또 모세의 회막 때부터라고도 하는 이도 있다.

그와 달리 그리스도를 중심한 교회 시작을 주장하여 그리스도 탄생 때부터, 또는 그리스도의 부활 때부터라고 하는 등, 여러 가지 가설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명백한 객관적 근거 위에서 이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① 성경의 말씀에 근거하면,

마 16:18에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I will build my church)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그 이전까지는 교회가 아직 세워지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각종 추리는 모두 공론에 불과하다.

그 다음에 엡 1:22에서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He gave him)고 하셨다. 여기에 보면 그가 이미 교회를 주셨던 것으로 말씀되고 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16장의 사건(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신앙고백 사건)이후 사도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에베소를 쓰기 이전 사이에 교회가 탄생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가 어느 때일까?

② 하나님의 전체 인류 섭리 역사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시고 역사를 이끌어가신 성부시대가 구약시대였다면 그의 아들이신 성자께서 친히 복음을 가르치시고 전파하신 복음서 시대가 성자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성자께서 자기 대신 다른 보혜사(요 14:16)를 보내셔서 성령이 지배하는 성령의 은혜시대가 있다.

이 성자시대와 성령시대를 딱 잘라서 구분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듯이 성부시대와 성자시대를 구분하는 데도 어려운 점이 있다. 왜냐하면 모든 시대에는 성부, 성자, 성령 모두가 함께 하는 시대였지 이들 중 어느 분만 따로 역사한 시대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경에는 그 시기가 분명하게 구분되고 있다.

즉, 요 7:39에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제자들과 성도들)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한 말씀은 성자시대에 아직도 보편적 성령은 없는 것으로 말씀되었다.

또 요 20:22에서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행 1:5)하고 행 1:8에서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행 2:1-4에는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며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하는 기록이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사도행전 1장과 2장 이후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절 이후가 신약 교회의 탄생으로 믿어진다.

③ 성령의 사역에 있어서도 오순절이 기점이 된다.

우리가 아는 바에 의하면 구약시대 천지창조 때(창 1:26), 인간 창조 때(창 1:26)에도 성령은 역사하셨다.

그런데 구약시대의 성령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특수한 사명자에게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왕(삼상 16:14), 제사장(삼하 12:7), 선지자(삿 6:12 이하, 삼하 12장), 예언자(미 3:8)등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전혀 다르다.

즉, 행 2:17-18 말씀대로 모든 육체, 즉 자녀, 젊은이, 늙은이, 남종, 여종 등 구분하지 않고 다 주어진다.

또 구약 때 성령은 한 번 주어졌다가 그가 범죄하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그 성령은 곧 떠나고 말았다. 그 예로 사울왕도 성령으로 예언을 하였다(삼상 10:10, 19:20 참조). 그러나 그 사울왕이 악신이 작용하여(삼상 19:19) 평생동안 다윗을 추격하다 죽게 된다.

또 다윗은 그가 범죄한 후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라고 기도하여 성신이 소멸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신약 때는 전혀 다르다.

사도행전 2:38에는 모든 이에게 주시는 성령은 계속하여 충만해서(행 4:8) 끝까지 충성하는 사람들이 된다. 베드로가 그러하였고, 바울도 그러하였고, 모든 사도와 초대교회 성도들이 다 그러하였다.

이렇게 사도행전 2장을 기점으로 해서 앞과 뒤가 전혀 다르게 된다. 따라서 오늘날의 신약교회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날을 시발로 하여 성령의 내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2. 신약교회의 공통점은 어떤 점이 있는가?

신약교회의 모델을 살펴보자.

여기서 신약교회의 모델이라 함은 신약성서 전체에 흐르고 있는 공통점을 말한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그것은 오늘날 신약교회 이후에 생겨진 역사적 산물로서의 교회들은 모두가 왜곡되고 굴절되었기 때문이다.

로마 카톨릭이 아무리 자기들이 모 교회의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해도 신약교회 모습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 또 종교개혁 이후 수많은 개혁교회들이 자기들이 가장 원시적 교회의 이상을 접근했다고 주장해도 그들 역시 신약교회와는 거리가 멀다. 더구나 오늘날의 수많은 현실 교회들은 더욱 그러하다.

이같은 전제하에서 영원히 변할 수 없는 대 원칙에 바로 서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신약교회의 틀을 살펴보도록 하자. 나는 여기서 신약교회의 모델로 12가지를 제시한다. 미리 말하고 싶은 것은 과연 신약교회가 오늘날도 필요하냐 하는 문제와 또 오늘날에도 신약교회가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대하여 나는 분명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신약교회의 정신대로 사는 교회라야만이 주님의 사랑을 받고, 주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⑴ 성경만을 최고의 권위로 삼는 교회

이렇게 말하면 이 지상에서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삼지 않는 교회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의 실상을 살펴보자.

1) 로마 카톨릭교회

이들은 신앙과 행위의 근거 규범으로 세 가지 근거를 갖고 있다. 저들은 성경도 믿고 전통 (Isdorian 교령집에 비롯된 각종 교회의 회의 결정, 교황들의 지시문서, 성자들의 가르침)을 믿는다. 또한 아울러 그리스도 대리자인 교황의 지시를 성경과 동등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일 수 없다. 어떤 면에서는 성경은 전체 신앙 중 30% 정도의 영향력을 끼칠 뿐이다.

2) 개혁교회들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기타 모든 교회들을 보라. 저들은 성경만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경에 없는 신조, 신앙고백, 그리고 또한 총회정관, 규약, 회칙, 헌법 등 성경에 의한 정신을 반영하려고 했다기 보다는 다수가 모인 인간들의 편리에 근거하여 관할하고 통솔을 위한 행동지침에 의해 움직여가고 있다.

이같은 규약이나 회칙들이 다양한 의견들의 난립을 억제하고 질서유지상 현실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간사한 인간들의 심성은 현실적 필요 이상으로 자기를 유리하게 하고 상대방을 공격하려고 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같은 현실적 필요성 인식보다는 근본적으로 신약교회처럼 모든 것을 믿음과 사랑 안에서 은혜롭게 처리하던 그 관행이 다시금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신약교회가 성경만을 최고의 권위로 삼았던 실례를 보자.

행 13:1-3의 안디옥 교회의 회무처리

행 15:6-29의 예루살렘 교회의 안건처리

마 19:15-17의 교회에서의 문제처리

요 8:3-11의 간음한 여인을 처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사실 오늘날 모든 것을 상부에서 지시를 하는 조직체계는 로마 카톨릭교회가 세계를 장악하려고 음흉한 저의를 갖고 조직과 지시계통을 만들어 논 것을 그대로 따르게 되는 관습적 사고방식의 추종일 뿐이다. 그러나 신약교회는 그같은 회칙 및 규정의 맹종자들이 아니라 서로가 성경의 정신에 피차를 존중하는 양보 중심의 세계였다. 오늘날도 상대방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정신만 지켜진다면 회칙이 무슨 소용있겠는가?

⑵ 믿는 자의 만인제사장권의 보장

이것은 종교개혁자 Martin Luther가 내세운 주장처럼 오해하고 있으나 사실은 성서 안에 이미 이 사실이 밝히 제시되고 있다.

마 23:8-10에는 '형제라고 하라'고 했고,

벧전 2:9에는 '왕같은 제사장인 성도들은 왕이며 또 제사장'이라고 했고,

히 13: 11-15에는 '찬미의 제사로 우리도 제사를 드릴 수 있다'고 했다.

이같은 성서적 근거 위에서 믿는 성도가 다같은 평등의 제사장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숙지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현실은 다 평등하지가 않다.

카톨릭:사제는 신부(fathers)라고 해서 신과 인간과의 중간존재로 서열이 정해져 있다. 또 미사 때마다 신자에게 배찬은 금지하고 있으며 고해 때 사죄를 선언하고 교황은 살아있는 그리스도로 간주하고 있다.

개혁교회:목회자는 성직자이며 목회만이 성직으로 고집하는 것도 과거 교권주의 또는 교회주의의 유물이다.

그러나 신약교회는 어떤 이가 지도자이고 또 다른 이는 교사로 일하였으되 그들이 모두가 한 형제자매의 원리에서 유지되었다. 오늘날 교직계급이 많고 다양하기 때문에 목회자와 일반 신도를 구분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반 신도들 사이에도 완전하게 계급과 같은 것이 존재하고 있다.

신약교회는 목사이든 신자이든 모두가 다 동일한 평등성을 실천하였다. 이 분야에 대해서는 따로 중점적으로 다뤄야 할 사항으로 본다.

⑶ 독립 개교회 중심의 행정정치

신약교회는 예루살렘교회(행 2장), 사마리아교회(행 8장), 안디옥교회(행 13장), 빌립보교회 (행 16장), 데살로니가교회(행 17장), 고린도교회(행 18장), 에베소교회(행 19장)가 있다.

기타 모든 교회들은 개 교회가 독립해서 자치적으로 행정을 해나가는 독립교회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교회가 사마리아교회 일에 협조는 하나 간섭은 하지 않았고, 안디옥교회가 모 교회가 되어서 다른 교회들을 다스리지 않았다.

오늘날 카톨릭을 비롯한 모든 개혁교회들은 총회, 노회, 시찰회 등으로 각종 제도적 간섭 기관들이 있다. 저들이 상회가 되어서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한은 독립교회라고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지방회, 총회도 협력기구 이상이어서는 안 된다.

⑷ 두 가지(목사와 집사)만의 직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와 검토가 필요하다. 현재 거의 모든 교회들은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권찰, 전도사, 강도사, 준목, 감독 등 다양한 직분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신약교회에서는 목사(감독)와 집사만의 두 직분을 갖고 있었다고 할 때 오늘날의 현실 교회들이 모두가 반발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같은 원칙이 옳은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검토가 선행된 다음에 적용하는 현실에 있어서는 그것을 다시금 고려해 볼 문제이다. 오늘날의 현실이 다양한 직분을 소유하고 있으니까 이것이 옳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신약교회의 원형은 어떠했었는데 오늘날의 현실은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1) 감독(목사)직

현재 오늘 우리가 '목사'라고 부르는 호칭이 크게 일반화 되기 시작한 것은 종교개혁 이후부터이다. 성경에 보면 목사란 관용어는 단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엡 4:11). 그러면 목사, 또는 감독, 또는 장로라는 호칭이 언제부터 비롯되었는가? 여기에 대한 직분의 어원과 역사적 발전과정을 바로 알아야 한다.

우선 구약성경에 보면 여러 가지 직분명이 많이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고찰할 여유가 없고 오늘 우리의 관심의 대상인 목사의 원형은 무엇이었던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구약에는 모세가 활약하기 이전에 애굽 땅에 장로들이 있었다(창 50:7). 모세는 애굽에 있었던 장로제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장로제도로 옮겨진 것을 보게 된다(출 3:16,18).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삼아 모세를 돕는 조력자를 삼는다(출 18:21).

모세는 그 뒤로 백성의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의 일을 의논한다(출 19:7, 레 4:15, 신 5:23, 21:2, 22:15-18, 25:7-9, 29:10, 31:28). 모세 후에 여호수아 때도 장로들이 지도자 노릇을 한다(수 8:33, 9:11, 23:2).

이스라엘 장로들은 다윗왕 때도(삼상 30:26), 아합왕 때도(왕상 20:7), 예레미야 때도(렘 26:17), 에스겔 때도(겔 8:1, 11-12) 계속하여 지도자 노릇을 행사한다.

이같은 장로들은 신약에도 그대로 계승한다. 그런데 신약에서의 장로들은 분명하게 두 가지로 달리 표현되고 있다.

첫째는, 과거 구약시대와 같은 맥락에서의 장로가 존속한다. 신약에서는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13장까지에는 분명히 구약적인 장로들이 그대로 존속된다. 이무렵의 장로들은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과 합세하여 예수를 박해하고 죽이려는 일에 열심한 장로들이었다.

다음 성경들을 참조해 보라.

마 26:3, 57에는 장로들이 대제사장 가야바와 함께 예수 죽이기를 모의함.

마 27:1, 3, 12, 20, 41에는 장로들이 군중들을 선동함.

막 14:53, 15:1, 눅 22:52, 행 6:12등 참조

이 모든 성경을 종합해보면 예수님 생애에 있어서나 초대교회 시작 때에나 사도들이 활약하던 때의 장로들은 예수를 원수같이 여기던 사람들이었다.

둘째는, 사도행전 14장 23절 이후에 나타나는 장로들은 전혀 다르다. 행 15:2, 16:4, 20:17, 21:18 등에는 장로들이 사도들과 동역하는 장로들로 설명되고, 행 23:14에는 과거 구약적 장로도 그대로 존속해 오는 것을 볼 수 있다(행 24:1, 25:15 등에도 구약의 장로가 존속함).

그런데 사도들은 과거 구약의 장로 제도를 사도들이 전혀 새롭게 적용하는 것이 서신서들에 나타나고 있다. 다음 성경을 차례로 읽어보자.

행 20:17절과 28절에는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감독자'라고 한다.

바울 사도는 딤전 5:17에서 '잘 다스리는 장로'를 말한다. 그는 누구인가? 그들은 가르치는 일과 다스리는 일을 함께 하는 감독을 뜻한다.

베드로 사도는 약 5:14에서 '나는 함께 장로된 자'라고 한다.

야고보 사도도 약 5:14에서 '장로'가 병문안 때 청할 자라 한다.

요한 사도도 요이 1:1과 요삼 1:1에서 자기 자신을 장로라 한다.

또 계시록 24장로(계 4:4)는 5:5, 8, 11:16, 19:4, 12지파와 12사도(계 21:12-14)인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 행 14장 이후의 '장로'들은 과거 구약의 장로가 아니다. 이들은 곧 사도들 자신이었고, 사도들이 주님의 사역을 위탁하도록 맡긴 사람들을 장로라고 했다.

아울러 이들 장로들은 다른 이름이 '감독'이었다.

장로와 감독이 같은 사람이었다는 증거는 다음 성경이 증명한다.

행 20:17절과 28절에는 장로와 감독이 다같은 사람들이었다.

딛 1:5절과 7절에는 장로와 감독이 나오는데 이 경우도 다같은 사람을 다르게 부르고 있다.

딤전 3:1-7에는 감독의 자격을 말하고 있다.

빌 1:1에 감독과 집사와 성도들이 교회의 구성원임을 말하고 있다.

벧전 2:25에 감독직을 말한다.

여기에 보면 장로와 감독은 다같은 한 직분으로 설명되었다. 그리고 목사란 말은 단 한 번(엡 4:11)밖에 언급된 게 없다. 그렇다면 이 용어들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a. '장로'란 호칭은 옛날 구약시대 때부터 전승되어 오던 직분이기는 하나 사도들은 과거의 좋지 못한 개념을 사도들이 자신들과 복음전하는 자의 의미로 그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 고로 장로는 어디까지나 구약적 전승을 살린 새 개념이다.

b. 감독은 유대인이 헬라문화권에 젖어살면서 헬라문명의 개념에서 다스리고 관장하는 개념으로 감독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c. 목사란 영적 개념으로 어디까지나 섬기고 봉사하는 목자의 정신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아울러 신약성서에서의 '장로' '감독' '목사'는 한 사람이 갖는 직분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2세기 때 조금 달라지고 3세기 때 조금 더 달라진다. 그러다가 16세기에 와서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러므로 신약교회의 정신을 따르려면 16세기에 와서 목사와 장로를 따로 구분한 장로교 창시자 Calvin의 해석과 제도를 따르지 않아야 할 것이다. Calvin 자신은 옛날 구약에 있었던 장로제도를 복원해야 한다고 하면서 신약의 개념이 아닌 구약의 제도로 후퇴시켜 놓았다. 그러므로 장로제도는 신약정신이 아닌 구약의 계승인 것이다.

2) 집사직

성경에 '집사'란 말이 나온 곳은 다음뿐이다(롬 16:1, 빌1:1, 딤전 3:8, 10, 12, 13).

여기서 말하는 집사들은 전부가 남자들만이냐? 여자들도 포함되느냐? 여기에 관해도 다수의 견해는 남자들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롬 16:1에는 '교회 집사(우리말 성경은 '일꾼'으로 번역됨)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라는 말씀을 따라 여집사 인정론을 주장하는 소수의 견해도 있다.

우리는 신약교회가 두 가지(목사 곧 감독과 집사)만의 직분을 가졌었다는 데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와 장로를 갈라논 현행제도는 누가 만들었는가? 그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1541년 11월 20일 장로교 창시자 John Calvin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여기에 대한 근거는 종교개혁 역사에서 증명되고 있다.

이제 4 ~ 500년의 전통을 세운 Calvin의 해석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2000년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으며 기록한 사도들의 전통을 따를 것인가? 그에 대한 결단은 각자 믿음의 분량대로 결정할 문제인 것 같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약교회에서의 장로와 감독과 목사는 하나였다. 이제 이와 같은 성경적 사실과 역사적 사실 앞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이같은 사실을 예전에 미처 몰랐던 사람은 이제부터는 과거와 달리 겸손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사실을 알면서도 타협한 이들은 회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려워도 잘 견딘 사람들은 계속하여 용기와 긍지를 갖고 신실한 말씀의 수호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⑸ 두 가지(침례와 주의만찬)만의 의식

오늘날 지상의 교회들이 시행하고 있는 교회 의식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로마 카톨릭교회:영세(세례라고도 함), 견진, 고해, 미사, 결혼, 도유, 서품 등 7가지 의식

。루터교회:세례, 성찬식, 고해

。개혁교회:세례, 성찬식

그런데 어떤 것이 과연 성서적인가?

여기에 관해 신약성서에는 침례와 주의만찬뿐이었다는 게 사실이다. 지금 침례냐 세례냐 하는 문제가 가끔 대두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점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자.

1) 세례와 침례의 구분

a. 먼저, 신약성경 중에서 침례받으신 예수님과 제자들이 다른 이들에게 침례준 사실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마 3:16에는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에 보면 세례는 방 안에서 가능하므로 물을 뿌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물에서 올라오신 것은 물 속에 잠겼다가 다시 올라오셨음을 뜻한다.

또 행 8:38-39에 보면 빌립이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에게 물 속에서 침례를 주었다. 요 3:23에는 애논에서 침례를 주는데 그 이유는 물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행 19:5에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침례를 주었다.

신약성경의 의식은 분명히 침례였다. 다음 성경을 참조하라.

마 21:35, 막 10:38, 눅 12:50, 행 1:21, 13:24, 골 2:12, 마 3:11(요 1:26, 31, 33), 행 1:5, 10:47, 11:16, 행 10:48, 16:15, 고전 10:2, 12:13, 갈 3:27

b. 침례의 정신과 의식이 성경에 선명하다.

롬 6:1-11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물 속에 잠그는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내는 것의 상징이고, 잠겼던 몸을 다시 일으켜세우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다(롬 6:8).

오늘날의 세례는 물로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뜻하는 게 아니다 (갈 2:20참조). 고로 성경의 의식은 침례가 맞다.

c. 침례의 어원을 추적할 때 침례가 성서적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세례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영어 성경은 'Baptism'이라고 되어 있고, 일어 성경도 '밥티스마'라고 되어 있다.

영어나 일어는 헬라어 원문 '밥티스마'로 그대로 음역한 것이다. 이 말은 '밥티조'(동사형), 명사형으로는 '밥티스마' 또는 '밥토'에서 왔다.

모든 고전 헬라어 사전에 보면 '잠그다'(immersion)라고 설명되어 있다. '밥티스마'를 '씻는다' (Wash)거나 '뿌린다'(Sprinkle)로 설명한 사전은 한 곳도 없다.

그런데 '침례'(immersion)가 핍박 때문에 기피현상이 생길 때(고전 15:29-34 참조) 그 다음으로 변형된 것이 '관수'(灌水)법이다. 관수(affusion)란 수세자를 물 가운데 세워두고 시세자가 그릇으로 물을 수제자의 머리 위에 세번 붓는 방법이다.

그같은 축소된 의식이 그 다음에는 '살수'(撒水)법으로 발전한다. '살수'(Sprinkling or Aspersion)란 시세자가 물을 찍어가지고 수세자의 머리, 또는 이마에 뿌리는 것을 뜻한다.

d. 침례와 세례가 어떻게 다른가 비교해 보자.

성경말씀

세례의식

침례의식

마3:16 "요단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니"

세례는 전혀 물에 들어가지 않음
 

반드시 물 안으로 가야 함
 

요3:23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물이 많이 필요치 않음 

많은 물이 필요함

행8:36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물을 특정 장소로 운반해야 한다

물 있는 곳으로 가야 함

행8:38 "둘 다 물에 내려가"

물로 내려가지 않는다

물로 내려가야만 한다

행8:39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결코 물에서 올라오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물 밖으로 올라와야 한다

골2:12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그 안에서 함깨 일
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세례는 장사지냄의 상징도 다시 부활되는 상징도 전혀 없다
 

침례는 물 속에 장사지냄과 물 밖의 부활의 뜻이 있다.
 

갈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세례는 머리 부분만 전달되고 몸 전체 옷을 입었다는 상징이 없다
 

침례는 전신이 새 옷을 입는다는 상징이 있다.
 

벧전3:20-21 "물로 생명이 구원을 받았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세례의식은 무덤 저편에 있는 부활을 보장하는 상징적 의미가 없다. 단지 죄를 씻는다는 뜻만 있다.
 

침례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과 영생의 상징이 있다.
 

마28:19에 "너희는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여기 그리스도의 명령과 약속이 있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최대 명령을 100%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변형시킨 것이라 기쁨이 없다.

 

침례는 100% 순종이란 긍지가 있다.


 

이상 여러 가지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오늘의 세례는 신약교회의 의식이 아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세례는 신약교회에서 타락한 카톨릭교회가 변형시킨 것이고, 개혁자들도 이 점에서는 개혁을 못하고 그대로 따르고 말았다. 그러나 개혁자 자신들(Calvin이나 Wesley 등)은 '침례'가 성서적이라는 확신은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과감하게 시정을 못한 채 그대로 전승되어 오고 있다. 이제 신약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려워도 성서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2) 주의 만찬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이 '주의 만찬'이라고 하지 않고 '성만찬'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주의 만찬이라고 했다(고전 11:20). 그런데 성만찬(Sacrament)이라고 하는 것은 카톨릭교회의 산물이다. 저들은 무엇이든지 신령한 의미를 부여해서 그것으로 큰 권위의 근거를 만들려는 교권주의적 산물로 '성만찬'이라고 하였다.

주의 만찬에 관한 각 교파의 견해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a. 로마 카톨릭교회:화체설(Transubstaintiation)

카톨릭에서는 "이것은 내 몽이니"(고전 11:24)라는 말씀을 근거로 하여 떡과 포도주는 성령께 부르짖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b. 루터교회:동체설(Consubstantiation)

동체설은 떡과 포도주를 믿음으로 받을 때 그때 그 물질은 곧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는 것이다.

c. Calvinism:영적 현현설

칼빈은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여기 나타나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d. Zwinglian:상징설

쯔빙글리는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e. Anabaptists:기념설

재침례교도들은 주의 만찬은 주님의 살도, 피도 아니고 다만 그의 죽으심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기념하는 의식일 뿐이라고 하였다. 이같은 다양한 주장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성서적인 견해일까? 내가 믿기에는 고전 11:24에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기념설'이 가장 성서적이라고 본다.

⑹ 믿는 자(영접한 자)에게만 실시하는 침례의식

무슨 말이냐 하면 부모의 신앙을 보고 세례를 준다든가, 또는 본인의 의사나 본인의 신앙고백이 없다면 어떤 다른 목적 때문에, 그것이 아무리 좋은 동기라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대표적으로 지적할 수 있는 잘못은 '유아세례'(Infant Baptism)이다. 유아세례는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으나 3세기에 북아프리카 구브로인이 최초로 시작했고, 5세기 때 Augustine에 의해 카톨릭의 의전으로 실천된다.

이제 우리는 신약성서의 기록을 살펴보자.

1) 우선 유아세례를 실시했다는 주장들을 내세우는 근거들을 점검해보자.

주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기사들을 예로 든다면,

a. 행 10:44-48에는 가이사랴의 '고넬료'라는 이탈리아 사람으로 군대의 백부장이었다. 베드로가 이 집에 초청을 받았으나 이방인이여서 거북하게 여기다가 환상을 보고 그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 그런데 베드로가 설교 중에 성령이 임해오고 방언이 터졌다. 그래서 베드로는 고넬료 가족에게 침례를 준다.

여기서 유아세례를 주장하는 이들은 고넬료의 가족에는 어린 아이들도 끼어있었을 것이 아니겠느냐는 상상론을 펼친다. 그런데 성경은 저들이 침례받기 전에 설교를 들었다는 사실은 갓난 어린애는 설교를 들을 수도 없거니와 저들은 성령의 체험도 없었고, 또 성경은 어린 아이의 침례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b. 행 16::31-34에는 빌립보 감옥의 옥사장이 회개하여 그와 온 집안이 다 침례받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특히 33절에 '권속'(all his house)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을 근거해서 그 집안에는 어린 아이들도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여기에 대해 성경은 바울이 그 가족에게 침례를 실시하기 전에 32절에는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고 하였다. 고로 침례 이전에 주의 말씀을 전할 때 그 말씀을 믿을만한 성인들이라야 하고, 그 가운데 영아나 유아가 끼었을 것이라는 것은 하나의 상상일 뿐이다.

c. 행 18:8에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회당장 '그리스보' 가정 식구들에게 침례를 준 기록이 있다.

여기서도 '온 집'(all his house)이라고 했으니까 어린 아이도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본문도 그렇다(행 18:8).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침례를 받더라고 했다.

이 말씀들을 보면, 먼저 듣고 그 다음에 믿으니까 침례를 주었다. 복음을 들을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는 영아나 유아는 해당되지 않는다.

2) 유아세례 반대론자들의 주장

a.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어린 아이들에게도 침례를 베푸신 일이 없다(막10:13-16, 요4:2). 그리스도께서는 침례받기 전에 교훈을 명하셨고(마 28:19-20), 또 사람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다 (막 16:16). 그리스도는 그의 명령을 변경시키거나 다른 것으로 바꾸는 일은 불순종의 행위라고 말씀하셨다(요14:15).

b. 침례 요한은 어떤 어린이도 침례를 준 일이 없었다. 그는 침례에 앞서 죄의 자백과 회개할 것을 주장했다(마 3:6,8).

c. 제자들은 어떤 어린이에게도 침례를 베푼 일이 없다(행 2:41). 신약에서 침례 받은 자는 침례 전에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d. 유아세례는 어린 아이가 성장하여 개인적으로 침례의 뜻깊은 것을 받아들이고, 믿고, 이해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특권을 미리 박탈하는 행위이다(행 2:41).

e. 유아세례는 성서적 근거도 없이 중생을 약속하는 우행을 하며, 중생되지도 않은 자에게 중생의 거짓 약속으로 훗날 본인 자신이 회개의 필요성을 망각하게 만든다.

f. 유아세례는 순수한 성서적 의식을 의식중심주의로 오도하는 나쁜 관행을 만든다.

g. 유아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한 순수한 믿음의 본을 따르지 않고 인간의 손으로 된 의식을 믿음으로 사람을 믿도록 오도한다.

h. 유아세례는 중생의 체험 대신에 형식적인 신앙고백으로서 교회 회원이 되므로 실상은 불신자 회원으로 교회 회원을 구성하게 되며, 궁극적으로 교회 회원의 저하를 가져온다(엡 4:12).

i. 유아세례를 실시할 때 후견인들에게 대하여 성취불가능한 비성서적 서약을 하게 된다. 신약성서는 결코 대부(代父)나 대모(代母), 그리고 세례명 등이 없다.

이상과 같은 이유들로 인하여 유아세례를 반대한다. 그래서 신약교회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리고 자의식에 의한 신앙고백을 하는 자에게만 침례를 베풀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도 이같은 관행은 다시 되찾아야 할 것이다.

 

출처 : 행복충전소†대명교회(김종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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