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사에 나타난 유세비우스들

2008. 12. 27. 12:50교회사자료/1.기독교회사

 

초기 기독교사에 나타난 유세비우스들

카이사레아 유세비우스(그리스도교 주교, 역사가)

[Eusebius of Caesarea] Eusebius Pamphili라고도 함.  ?~?

4세기에 팔레스타인 카이사레아 지방에서 활동한 주교, 해석가, 변증가, 역사가이다. 그의 〈교회사 Ecclesiastical History〉에 실려 있는 그리스도교의 처음 몇 세기에 관한 기록은 그리스도교 역사기록의 이정표이다. 카이사레아에서 세례와 성직임명을 받은 뒤 학자이자 장로인 팜필리우스에게 배웠는데, 이 스승에게서 유세비우스 팜필리('팜필리우스의 아들 혹은 종'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받았다. 스승 팜필리우스는 로마의 박해 기간 동안 신앙을 포기하지 않아 박해를 당한 뒤 310년에 순교했다. 유세비우스도 카이사레아와 후에는 이집트에서 로마의 권력자들에게 체포당해 투옥되는 일을 겪었던 것 같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그는 신앙을 포기한 대가로 풀려났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 당시 그런 비판은 흔한 것이었고, 또한 유세비우스가 의도적으로 배교했다면 박해가 끝나자마자 그렇게 빨리 카이사리아의 주교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카이사리아의 그리스도교 학파에 속한 학자들은 그리스도교에 관련된 모든 분야에 걸쳐서 집필 활동을 했는데, 유세비우스 자신은 신 플라톤 철학자 포르피리우스가 그리스도교를 비판한 내용을 반박하는 장문의 논박서를 썼고(271 이후), 아울러 유력한 관리이자 박해자인 비티니아의 총독 히에로클레스를 반박하는 글도 썼다.

 전 생애를 통해 복음서에서 병행을 이루는 본문들과 서로 어긋나는 본문들에 대한 해설서와 성서 주석서를 썼다. 그의 주석 방법(해석 비평)은 될 수 있는 대로 메시아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부분적으로는 문자적이고 부분적으로는 우의적이었다.

그 뒤 여러 세기 동안 그가 명성을 얻은 이유는 〈교회사〉때문이었다(이 책은 로마의 박해기간 중 쓰기 시작한 듯하며, 312~324년에 여러 번 개정되었음). 이 책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충분한 사료를 참조한 역사책이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면 사료들에서 추려낸 내용을 짜맞춰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의 역사를 개관한 〈연대기 Chronicle〉(후에 히에로니무스가 개정·보완했음)를 편찬한 바 있는 그는 그때 사용한 분석 방법을 그대로 사용했으나, 이야기 중간 중간에 4개 대교구(알렉산드리아·안티오크·예루살렘·로마)의 주교들과 로마 황제들의 즉위를 삽입하는 방법으로 〈敎會史〉를 썼고, 개정판에서는 내용을 확대하여 니케아 공의회가 열리기 1년 전인 324년까지 일어난 사건들을 다루었다. 그러나 유세비우스는 대 역사가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역사가로서는 부적절한 태도로 이단을 다루었고, 서방교회 이외의 사실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사실상 그의 역사 저서들은 교회가 이단설과 이단자들에 맞서 어떻게 스스로를 옹호했는가를 史實에 입각해서 제시하는 변증적 성격을 지닌다. 그 가운데서도 더욱 변증적 성격을 띠는 저서는 〈예비 Praeparatio〉·〈복음의 실증 Demonstratio evangelica〉 같은 대작들이다. 〈예비〉에서 유세비우스는 이교 신화·신탁·점성술을 비판했고, 유대교 경전들을 해석했으며, 그리스의 가장 훌륭한 사상은 모두 유대교 사상과 일치하거나 유대교 사상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책을 쓰면서 유세비우스는 플라톤의 글을 250회 이상 인용했고, 몇몇 신플라톤주의 저서를 사용했다. 〈복음의 실증〉은 히브리 성서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예언해놓은 것이 성취되었다는 주제를 다루었다. 유세비우스는 313년경 팔레스타인 수도대주교가 되었다. 그 직위는 그에게 부담스러웠음에 틀림없으며, 집필 활동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더욱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후임 황제들의 박해가 끝난 313년 이후의 시기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시 입회하기를 바라던 재건의 시기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가 성자가 성부에게 종속된다고 가르쳐서 그의 신학사상이 쟁점이 되었을 때(318경) 유세비우스도 곧 이 논쟁에 참여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복음의 실증〉등의 책을 통해 쟁점이 된 이 주제들을 논했기 때문이다. 이단 혐의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된 아리우스는 카이사레아에서 있으면서 동정을 얻어냈다. 이것은 사실상 아리우스가 유세비우스를 주요지지자로 선포한 것을 뜻한다. 유세비우스는 아리우스를 전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으나, 사벨리우스주의(하나님이 점진적으로 진화하는 양식들로 나타난다고 가르친 이단설)로 치우친 듯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데르(313~328 재위)도 지지하지 않았다. 그는 알렉산데르에게 편지하여 아리우스가 오해를 당하고 있다고 주장했고, 아리우스에게도 직속 주교인 알렉산데르와 화해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사건은 너무 빨리 진행되어 325년 1월경 안티오크에서 열린 강력한 反 아리우스주의성향의 교회회의에서 유세비우스와 동료 2명(라오디케아의 테오도투스 및 킬리키아 네로니아스의 나르키수스)은 아리우스의 사상에 찬동했다는 이유로 잠정적인 파문을 당했다. 그해 하반기에 콘스탄티누스의 소집으로 니케아 공의회가 열렸을 때 유세비우스는 자기변호를 했고, 황제의 명확한 승인을 받음으로써 혐의를 벗게 되었다.


유세비우스와 콘스탄티누스는 2번 만났던 것 같다. 첫 번째 만남은 325년 니케아에서 있었고, 2번째 만남은 10년 뒤 콘스탄티누스의 '트리케날리아'(즉위 30주년 기념식)에서 있었던 것 같다. 니케아 공의회가 끝나고 몇 년이 지난 뒤 황제는 연합 쪽으로 기울었고, 니케아 공의회의 진정한 지지자들은 곧 異見派로 전락했다. 유세비우스는 안티오크의 유스타티우스(337경),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335), 앙키라의 마르켈루스(336경)를 추방하는 데 가담했으나, 콘스탄티누스가 그의 공로를 배려하여 제의한 안티오크 주교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타나시우스를 단죄한(물론 교리 때문에 그를 단죄한 것은 아니었음) 335년의 티레 공의회에 참석하여 아마도 그 회의를 주재한 듯하다. 아타나시우스가 황제에게 항소했을 때, 유세비우스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플로 소환 당했으나, 여전히 황제의 총애를 잃지 않았으며, 그의 '트리케날리아'에서 기념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 새 시대의 변화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그리스도교적 帝國論을 내세웠다. 하나님·황제·교회의 관계에 대한 그의 사상은 황제가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어 다스리고 있으므로 과거의 신격화된 황제들과 비슷하다는 견해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황제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337~361 재위) 때 황제와 대다수 교회가 대립하자 그 사상은 무너지게 되었다. 콘스탄티우스가 죽은 뒤(337)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Life of Constantine〉를 써서 그를 칭송했다. 이 찬사는 1차 사료를 주로 사용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유세비우스는 아첨가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황제의 의붓누이 콘스탄티아가 그리스도의 초상화로 알려진 그림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을 질책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정치적 영향력이 없었다. 336년경 니케아 공의회의 주요지지자였던 앙키라의 마르켈루스는 사벨리우스주의자라는 혐의를 받고 유배당했다. 마르켈루스와 오랫동안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던 유세비우스는 〈마르켈루스를 반박함 Against Marcellus〉·〈교회의 신학에 대해서 on the Theology of the Church〉를 써서 마르켈루스를 공격하고 여러 동료들을 옹호했다. 이 저술들은 그가 여전히 니케아 교리의 옹호자가 아니지만 전보다 그 입장에 더 가까워졌음을 보여준다.

카이사리아에서 유세비우스에게 배우고 또 그를 계승한 아카키우스는 유세비우스의 전기를 썼으나 이 책은 현존하지 않는다. 만일 아카키우스와 또 다른 제자인 에메사의 유세비우스가 스승의 신학을 대표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半아리우스주의 형태의 신학이었을 것이다. 후세대들은 유세비우스가 그리스도교 학문에 기여한 내용이 아리우스의 사상을 연상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혼동을 겪었다. 그를 전적으로 지지한 사람은 교회사가인 소크라테스(380~445경)밖에 없다. 결국 니케아에서 열린 제7차 에큐메니칼 공의회(787)는 유세비우스가 모든 면에서 이중성과 비일관성을 보여준 사실을 지적하고 그를 단죄했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동방교회 주교) [Eusebius of Nicomedia]

? 시리아(?)~342경. 4세기 동방교회의 중요한 주교.

아리우스주의(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똑같은 본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교리)의 핵심적인 지지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결국 유세비우스파라 불리는 아리우스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유세비우스는 안티오크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사제이며 아리우스주의의 창시자인 아리우스를 만나 순교자 성 루키아누스의 지도 아래 동문수학했다. 유세비우스는 그 후 베리투스의 주교가 되었으며, 318년경에는 니코메디아의 주교가 되었다. 323년 8월 아리우스는 자신의 가르침을 주교 알렉산데르가 조사하자 유세비우스에게 편지를 써 도움을 청했다. 아리우스를 돕기 위해 유세비우스는 다른 주교들에게 호소했다. 아리우스가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323. 9)에서 유죄판결을 받자, 유세비우스는 그를 변호하며 비티니아 교회회의(323. 10)를 후원했는데, 이 교회회의는 아리우스에 대한 파문을 무효화했다. 유세비우스는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본질'(homoousion)을 가진 존재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325년 니케아에서 제1차 에큐메니컬 공의회가 열렸을 때 그는 동일본질파(Homoousians)에 대항하는 반대파를 이끌었고, 공의회가 마침내 그들이 내세운 조항을 받아들였을 때에야 그 신조에 서명했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자들을 정죄한 파문서에는 서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리우스가 정말 파문서의 내용대로 주장했는지' 의심했기 때문이다. 공의회 직후 그는 아리우스와 다시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유세비우스가 328년 신앙고백서를 제출할 때까지 갈리아로 추방했다.

황제의 누이동생인 콘스탄티아와 맺은 친교 덕택에 유세비우스는 황제의 말년에 아리우스주의가 강력한 반발을 할 수 있도록 큰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콘스탄티누스가 동일본질파 지도자들을 무자비하게 괴롭힌 끝에 335년 티레의 교회회의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위대한 주교 성 아타나시우스를 면직·유배하고 그 대신 같은 해 예루살렘 교회회의에서 아리우스를 복권시켰다.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의 권력이 아리우스주의를 옹호하는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계승된 덕을 톡톡히 보았으며, 339년 콘스탄티노플 주교가 되어 341년 안티오크 교회회의를 주재했다. 이 회의에서는 '동일본질' 조항을 생략한 신조가 채택되었다. 그는 이 교회회의 직후 죽은 것 같다.


도릴라이움의 유세비우스 [Eusebius of Dorylaeum]

?~? 5세기에 활동한 도릴라이움의 주교.

네스토리우스교에 반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칼케돈 공의회(451)에서 교리를 작성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평신도 시절에 콘스탄티노플 전역에 자신의 유명한 저서 〈논쟁 Contestatio〉을 보급하고 신자들에게 네스토리우스에 반대해야 한다고 호소함으로써 최초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공식적으로 비판했다(429). 그의 행위는 에페소스 공의회(431)에서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448년 도릴라이움의 주교였던 유세비우스는 친구이자 콘스탄티노플의 대수도원장이었던 유티케스를 훗날 단성론(예수 그리스도가 하나의 본성을 지녔다고 주장한 이단)으로 알려지게 된 교리를 주장한 이단자로 고소했다. 단성론을 최초로 반대한 유세비우스의 고소로 인해 결국 유티케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플라비아누스가 소집한 교회회의에서 면직 당했고, 교황 레오 1세에게 파문당했다. 그 뒤 449년 에페소스에서 열린 공의회(에페소스의 강도회의로 알려짐)의 조치로 직위를 되찾았으며, 유세비우스는 이 사건에서 맡은 역할 때문에 면직 당했다. 그 뒤 즉시 레오에게 호소하고 로마로 망명했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 의해 복직되었고, 이 공의회를 위해 그리스도의 위격과 본성에 관한 고전적 정의들을 작성하는 일을 도왔으며, 이 정의들에 따라 유티케스는 추방되었다.


사모사타의 유세비우스 [Eusebius of Samosata]

?~379경 소아시아 지역(?) 돌리카. 그리스도교 순교자.

아리우스주의에 대해 반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361년 고대 시리아 도시인 사모사타의 주교가 되었다. 그전에는 안티오크의 주교 멜레티우스의 주교선출 과정을 공식 기록하는 책임을 맡기도 했는데(360), 아리우스파 주교들은 멜레티우스가 자기들의 입장에 설 것이라고 잘못 판단하여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멜레티우스가 정통신앙을 진술하자 아리우스파 주교들은 확고한 아리우스주의자인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유세비우스로부터 그 기록을 빼앗아 없애버리라고 설득했다. 361년 콘스탄티우스는 유세비우스가 기록을 내놓지 않는다면 그의 오른손을 자르겠다고 위협했지만, 그가 양손을 자르도록 내놓자 더 이상 위협하지 않았다. 동로마의 황제 발렌스(역시 아리우스주의자) 통치하에서 정통파 그리스도교가 박해를 당하고 있는 동안 유세비우스는 신분을 감춘 채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여행하면서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면직당한 정통파 주교들과 사제들을 격려했다. 374년 발렌스에 의해 발칸 반도에 있는 트라케로 추방당했으나, 378년 황제가 죽은 뒤 사모사타 주교직을 되찾았다. 어떤 주교를 축성하기 위해서 돌리카에 있는 동안 아리우스파 여인에게 살해당했다


베르첼리의 유세비우스 [Eusebius of Vercelli, Saint]

4세기초 사르데냐~370/371. 8. 1 이탈리아 베르첼리.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의 유명한 지지자, 니케아 신조의 회복자. 니케아 신조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가 채택한 정통교리로서, 삼위일체의 각 위격이 동등하다고 공포했다. 345년 베르첼리의 초대 주교가 되었고 그 자신이 이끄는 사제들과 공동생활을 했으며, 수도원생활을 목회와 연결시킨 서방교회 최초의 주교였다. 밀라노 공의회(355)에 교황 리베리우스의 사절로 참석하여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주의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단죄당하는 문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아타나시우스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유세비우스는 동방으로 추방당했다. 로마의 황제 배교자 율리아누스에게 사면을 받은 뒤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362)에 참석하여 니케아 신조에 대한 법령들을 공포함으로써 제국 전역에서 정통신앙과 통일을 회복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뒤 프랑스 푸아티에의 주교 힐라리우스와 함께 아리우스주의를 배척했다.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쓴 편지 3통이 현존하며, 오랫동안 아타나시우스나 타프수스의 주교 비길리우스의 저서로 인정되어온 〈삼위일체에 관하여 De Trinitate〉 가운데 처음 7권은 오늘날 유세비우스의 저서로 간주되고 있다.


에메사의 유세비우스 [Eusebius of Emesa]

300경 마케도니아(지금의 그리스) 에데사~359경 시리아 안티오크(지금의 터키 안타키야). 에메사의 주교. 半아리우스주의의 주요교리를 저술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이다.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와 친해 페르시아 원정 때 자주 황제를 따라갔고, 339년경 에메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비정통성 때문에 에메사 주민들에게 추방되었고, 4세기 아리우스주의 논쟁의 주요인물인 라오디게아의 주교 게오르기오스와 함께 도피한 뒤 복직되었다. 게오르기오스가 쓴 유세비우스 전기는 5세기에 활약한 교회사가 소크라테스와 소조멘의 기록에 일부가 남아 있고 전하는 작품으로는 설교 29편이 있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유세비우스를 가리켜 '아리우스 분파의 제일가는 대표자'라고 했고 그의 글은 수사학적인 자기 과시가 많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