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 범종교회의

2010. 6. 21. 00:14교회사자료/1.기독교회사

에베소 범종교회의 ‘존 크리소스톰’ (1)

 

6.2.2. 에베소 범종교회의

“복잡한 3차 범종교회의를 간략하게 말씀드린다면, 네스토리우스가 430년 8월 11일 로마 종교회의에서 정죄를 받았고 그는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로부터 범종교회의에 참석하라는 소환을 받습니다.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는 공동 황제 발렌티니안 3세와 로마감독 켈레스틴과 더불어 범종교회의를 소집합니다. 430년 11월 19일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는 서신을 보내어 431년 6월 7일 오순절 에베소에서 범종교회의가 있을 것을 공포합니다.”

“6월 22일 로마 사절단과 안디옥의 존이 이끄는 동방교회 감독들이 참석하기 전에, 알렉산드리아 감독 시릴은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네스토리우스는 3차례나 참석할 것을 종용받았으나 응하지 않았습니다. 197명의 감독들은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점검하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안디옥의 존과 동방교회 감독들이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시릴이 개최한 종교회의를 인정하지 않고 따로 종교회의를 개최했습니다. 로마 사절단도 도착하였지만 그들은 시릴과 뜻을 같이하여 네스토리우스에 반대하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7월 17일에 있었던 5차 회기에서 다른 종교회의를 개최한 존과 그의 감독들을 출교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시릴이 이끈 종교회의가 범종교회의로 인준되었습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범종교회의 사회자를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대신 넥타리우스를 세웠다는 말씀을 드린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넥타리우스는 그레고리를 대신하여 16년 동안 동방교회에서 지도력을 발휘했습니다. 탁월한 행정술과 차분한 성품으로 업무를 훌륭하게 잘 이행했습니다. 397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누가 동방교회를 이끌 것인가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를 이어 동방교회 지도자로 부상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알렉산드리아 감독 데오필루스였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로마제국 황제인 아르카디우스는 ‘황금의 입술’을 가진 존 크리소스톰을 선호했습니다.”

6.2.2.1. 존 크리소스톰

▲존 크리소스톰의 모습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황금의 입술’이라는 뜻입니다. 존(347~407)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동방교회 박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태어난 정확한 일자를 알 수 없지만 344~354년 사이에 안디옥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측됩니다. 어릴 때부터 모친 안투사로부터 철저한 신앙훈련을 받았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훌륭한 모친을 둔 분들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어거스틴, 콘스탄틴, 존 크리소스톰, 그리고 바실과 그레고리 등입니다. 정말 여성들의 역할이 큽니다. 모친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존 크리소스톰은 여성들의 지도력을 인정하여 성직을 맡기곤 했습니다. 그래서 여성신학자들이 늘 참고하는 교부로서 존을 빼놓질 않습니다.”

“법률과 수사학을 배운 그는 다소의 디오도레에게서 신학을 배웠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에서 성구를 낭송하는 자로 봉사했습니다. 모친이 세상을 떠난 후 그는 복잡한 도시를 피하여 안디옥 남부의 산악지방으로 들어가 수도원적 삶을 살았습니다. 그 곳에서 그는 신학적 연구, 거룩한 묵상, 그리고 기도하는 데 행복한 6년을 보냈습니다. 수도원 제도를 통해 존은 교회의 위대한 교사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381년 부제로, 386년 사제로 수임을 받았습니다. 그 후 12년 동안 안디옥 강단에서 존은 감동적이고 웅변적인 설교를 행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황금의 입술’이라는 별명을 받게 된 것입니다.”

▲황후 유독시아를 꾸짖는 존 크리소스톰
“397년 콘스탄티노플 감독 넥타리우스가 죽자, 존은 자신의 의사와는 관련 없이 그곳의 감독으로 선출된 것을 통보받고, 멀리 도주했으나 붙잡혀 왔습니다. 다음 해 398년 알렉산드리아 감독과의 갈등 속에서 콘스탄티노플 감독이 되었습니다. 웅변적인 설교로 인해 존은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을뿐 아니라 자신의 목회 영역을 고트족에게까지 확대시켰고, 성경을 그들의 언어로 번역하여 통역자를 대동해서라도 그들에게 설교했습니다. 다뉴브 강에 살고 있는 고트족과 스킨디안족에게 선교사들을 보냈습니다. 심지어 추방을 당한 가운데서도 선교의 일에 관심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성직자들과 귀족들의 거짓되고 사악한 삶들을 개혁함으로 많은 적들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요즘도 그렇지 않습니까?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죠. 그는 성전에 있는 값비싼 물건들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을 위해 병원을 지었습니다. 스스로는 엄격한 금욕적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에게는 매우 엄격했고 타인에게는 항상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는 담대했고 헐벗고 힘이 없는 자들에게는 늘 동정을 베푸는 자였습니다. 그 어떤 잔치에도, 저녁 만찬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성경말씀대로 마음은 늘 초상집에 있었습니다. 늘 독방에서 기도하며 극단적인 단순한 삶을 살았습니다. 먹고 입는 데 사치스러운 삶을 포기하고 거리의 가난한 자들과 함께 있기를 선호했습니다. 간악한 성직자들을 훈련시켰고, 부도덕한 사제들을 올바로 살아가도록 이끌어 갔습니다.”


…친구를 갖는 것은 또 다른 자아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일치고 조화이다. 어떤 것도 동등한 것은 없다. 일치 안에서 한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동등하다. 두 사람이거나 열 사람이라도 더 이상 하나이지 못하다. 하지만 그들 각자는 열 사람의 능력과 가치를 지닌다. 너는 열 사람 속에서 한 사람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 속에서 열 사람을 발견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적을 맞이한다면, 그 적은 한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열 사람을 공격하는 격이 될 것이기 때문에 패배하고 말 것이다. 공격을 받아도 한 사람에게서 공격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열 사람에게서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결핍을 경험해보았는가? 그럴지라도 결코 황량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분야, 즉 남은 아홉 사람들에게서 채워질 것이기 때문에 부족한 분야가 보호받을 것이다. 작은 부분이 채워질 것이다. 그들 각자는 20개의 손들을, 20개의 눈들을, 그리고 20개의 발들을 소유하는 셈이다. 그래서 자신의 눈으로만 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눈들을 통해 볼 수 있다. 자신이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나머지 아홉 영혼들이 그를 보호하고 있다. 그들이 백 사람이라면, 동일한 일이 일어날 것이고 그것에 알맞은 능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존 크리소스톰’ (2)

 

▲추방당하는 존 크리소스톰

“타협하지 않고 곧은 성품을 가진 존 크리소스톰은 결국 주위에 적들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들 중에 황후 유독시아가 있었습니다. 남편 아르카디우스보다 인기를 독차지하는 존을 시기한 그녀는 그를 없애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대단하지요. 교회사에서 무섭고 대단한 여성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유독시아였습니다. 황후 유독시아는 사치스러운 궁궐생활만 아니라 사치스러운 자들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존은 거침없이 비판했습니다. 유독시아의 음모가 이뤄지는 401년 1월이었습니다. 에베소 성직자들과 근교 감독들의 요청을 받아 방문한 존은 지역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성직매매를 일삼는 6명의 감독들을 파직하였습니다. 그리고 존이 출타하는 동안 콘스탄티노플 감독직을 신임하여 맡긴 카발라 감독 세베리안은 황후와 함께 존에 대한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를 몰아내겠다는 심산이었죠. 그러다가 403년 알렉산드리아 감독 데오필로스가 출교시킨 몇 명의 경건한 수도사들을 위해 존이 피난처를 마련해 주자 원한은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반죄라는 혐의를 받고 존은 파직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존은 주위에 시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기에 그를 위해 시민들이 일어나자 하는 수 없이 추방 대신에 복직을 시켰습니다. 그런 후 존은 자신을 공격했던 자들의 세속적인 행사를 금했습니다.”

“존은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아내인 황후 유독시아의 동상 제막식에 열광하는 청중들을 비난하는 설교를 아낌없이 가했습니다. 그의 적들은 그의 설교들을 과장하여 황후에게 고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콘스탄티노플로부터 황후에 의해 영속적으로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수치스러운 추방이지만 이것으로도 존이 성찬식에 참여하는 못하거나 그의 귀중한 글들을 못 쓰도록 하진 못했습니다. 추방당한 가운데 407년 흑해 근교에 있는 폰투스에서 외롭게 죽었습니다.”

▲하이예 소피아 벽에 그려져 있는 시편 98:1~5와 함께 있는 존 크리소스톰

“존이 남긴 귀중한 서신들과 짧은 글들이 현존하지 못하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현존하는 몇 편의 그의 글들을 통해서라도 그의 웅변적이고 청렴한 자세와 기독교 사상에 끼친 위대한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150cm도 되지 않는 작은 체구의 존은 하나님만 두려워하면서 그 앞에서 세속적 부귀와 편의주의에 결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407년 9월 14일 추방 생활하는 가운데 세상을 떠난 존 코리소스톰은 콘스탄티니폴을 사악한 방법으로 주도하는 황후 유독시아의 음모로 인해 정죄를 받은 적이 있었지만 그의 마지막 말씀은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있기를!’이었습니다. 그의 유골은 438년 유독시아의 아들 동로마제국의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408~450)에 의해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습니다.”

“다음은 존의 모친인 안투사가 아들에게 주는 ‘이상적인 친구에 대하여’라는 글의 일부입니다. 매우 감동적입니다.”

진정한 친구는 시간과 장소에서 그를 기억한다. 광택을 가진 물체가 인접한 장소에까지 광채를 발하는 것처럼 친구들은 그들이 있는 장소에서 은혜를 서로 나눈다. 가끔 친구가 없이 혼자 있을 때는 함께 있었던 것을 떠올리며 슬픔에 빠지기도 하고 울먹이기도 한다. 친구와 함께 있음으로 얻는 기쁨을 어떻게 형언할 수 있을까? 단지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의심을 가지지 않고 호의를 부탁하면 호의를 받을 것이다. 문의를 하면, 친절하게 응답할 것이다. 부탁을 들어주는 데 망설이면 왠지 모르게 섭섭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그들의 것이 아닌 것들이 없다. 모든 세상의 일들을 싫어할지라도 친구들로 인해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빛보다도 더 우리에게 필요한 분들이다. 그렇다! 친구는 빛 자체보다도 우리에게 더 중요하다(내가 말하는 친구는 진정한 친구를 말하는 것이다). 친구보다도 태양이 우리들에게 더 중요할 수 있기 때문에 나의 표현에 불평하지 않기를 바란다. 친구가 없는 것보다 어두움에 사는 것이 더 좋다는 말이다. 내 의도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태양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어두움에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로 인해 부유한 사람들은 결코 환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우정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없는 영적 친구에 대해 나는 말하고 있다. 바울과 같은 친구이다. 부탁을 받지 않아도 그는 자신의 영혼을 친구를 위해 기꺼이 드릴 수 있었다. 형제를 위해 지옥이라도 기꺼이 떨어질 수 있었던 분이었다(로마서 9:3). 애정을 불태우는 것은 사랑에 합당한 것이다. 이것을 우정의 예로서 택해 보라. 친구들은 부친들과 아들들 보다 훨씬 중요하다…….

 

 


‘정치적 배경’

 

  • 에베소 범종교회의가 개최되었던 곳의 현재 모습.
  • ▲에베소 범종교회의가 개최되었던 곳의 현재 모습.

6.2.2. 에베소 범종교회의

6.2.2.2. 정치적 배경

“아시다시피 당시에는 지도력을 가진 교회가 5교회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로마였습니다. 이곳에 있는 감독들은 대주교라 불렸죠. 그 수하에 여러 대감독들과 감독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알렉산드리아 감독은 막강한 지도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클레멘트, 오리겐, 아리우스, 알렉산더, 아타나시우스 등 무수한 지도자들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지요.

알렉산드리아 감독 아래는 100여명의 감독들이 일사불란하게 행동했습니다. 감독들만 아니라 수도사들도 알렉산드리아 감독의 명령에 복종했습니다. 그는 부귀명예와 권력을 소유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감독이 세력을 얻기 전까지 알렉산드리아 감독은 막강한 힘을 소유했습니다. 이러한 권위는 아타나시우스로부터 주어지기 시작했지만 데오필루스는 그에게 미칠 만한 지도자는 아니었습니다.”

“3차 범종교회의는 어떻게 보면 알렉산드리아 감독과 콘스탄티노플 감독 간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콘스탄티노플 감독이 된 존 크리소스톰은 수 년 동안 자신의 교구를 책임성 있게 목회하는 자였습니다. 열정을 가졌기에 많은 친구들을 가진 만큼 적들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감독과의 첫번째 충돌은 알렉산드리아 감독 데오필루스의 가혹한 통치에 희생을 당한 사람들을 존이 환영했다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물론 감정적 대립이었습니다. 존에게 도피한 자들 가운데 이단혐의가 있는 자들이 있다고 하며 데오필루스는 29명의 감독들과 함께 존을 정죄하고 파직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존은 알렉산드리아 교구를 벗어나 있는 곳의 교구까지 권력을 나타내려는 것은 다른 교구의 일을 간섭하는 것이라 하여 데오필루스가 주도하는 ‘오크 종교회의’(Synod of the Oak)를 거부하고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존을 정죄하고 파직하였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존은 제국 먼 곳으로 추방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추방 생활에 지친 존은 407년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데오필루스는 존에 반대한 운동이 승리를 거두자 환희에 넘쳤습니다. 하지만 미처 그는 잠재하고 있는 내분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존에 대한 처사에 대해 불만을 표출한 자는 서방교회에 있는 로마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데오필루스에 반대하여 콘스탄티노플 감독으로 존을 인준하였습다. 게다가 존을 대신하여 아티쿠스를 인준할 것을 요청했을 때 로마감독 켈레스틴(Celestine I, 422~431)은 그를 인정했던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과의 관계를 끊을지라도 인준하지 않았습니다. 데오필루스가 412년 죽자 그의 조카 시릴이 감독직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시릴은 데오필스와는 다른 입장을 가진 자로서 오랫동안 추방생활을 한 자였습니다. 또 존을 추방시켰던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범죄를 용서해달라는 의미에서 그의 시신을 콘스탄티노플로 운송하면서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는 그의 관 앞에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추면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더욱이 424년 콘스탄티노플 감독 아티쿠스가 세상을 떠나자 네스토리우스가 428년 후계자로 임명되었습니다.”

 

‘범종교회의 행보’

 

  • 431년 에베소 범종교회의
  • ▲431년 에베소 범종교회의

6.2.2. 에베소 범종교회의

6.2.2.3. 범종교회의 행보

“3차 범종교회의는 결국 콘스탄티노플 감독 네스토리우스와 알렉산드리아 감독 시릴 간의 논쟁으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네스토리우스는 로마 감독 켈레스틴에게 자신이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이단자들을 척결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다는 서신을 보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신앙의 의미를 혼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라는 위대한 신비를 혼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성도 신성인 것처럼 말하며, 태어나신 하나님, 장사되신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고 했습니다. 또 동정녀 마리아가 ‘하나님의 모친’(theotokos) 또는 ‘하나님을 낳은 자’로 받아들였는데 그녀가 ‘그리스도의 모친’ 즉 ‘그리스도를 낳은 자’(Christotokos)라고 불려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네스토리우스는 동정녀를 ‘크리스토토코스’로 불러야지 ‘데오토코스’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무지한 성직자들을 바로잡으려는 자신의 설교를 거부하는 것, ‘데오토코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개혁에 불복종하는 것에 대해 네스토리우스는 형벌을 주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콘스탄티노플에 큰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바다를 건너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수도사들에 대한 그의 학대 소문은 수도원 운동이 일어난 중심지, 즉 이집트까지 퍼져나갔습니다. 이집트 수도사들은 감독 시릴에게 신학적 문제를 청원했습니다. 마치 신학적인 문제로 바꾸어서 자신들의 일을 성취시키려는 것입니다. 마치 색깔논쟁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시릴은 자신의 수도사들을 위해 네스토리우스를 거부하며 전통 신앙을 고수하는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풀체리아가 새겨진 동전
“430년 시릴은 직접 네스토리우스에게 서신을 써서 신실한 자들에게 많은 혼동을 주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릴은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 황후 유독시아, 그리고 황제의 누님 풀체리아에게도 서신을 띄웠습니다. 적극적으로 교회의 일에 간섭하라는 것이었습니다. 430년 부활절 후 이집트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시릴은 동방교회 모든 감독들이 네스토리우스의 오류들을 방어하기 위해 연합되었다고 말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의 상황을 로마 감독 켈레스틴에게 알렸습니다.”

“당시 켈레스틴은 네스토리우스와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교회에서 정죄 받아 추방당한 펠라기안들을 친절하게 네스토리우스가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켈레스틴은 이것을 다시 감독들이 모인 자리에 알렸습니다. 로마 감독 켈레스틴(422~432)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일어난 일에 관한 보다 많은 정보를 알렉산드리아 감독인 시릴에게 서신을 써서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시릴은 이 논쟁에 주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마치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의 관계와 같았죠.”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의 동상
“요청에 따라 시릴은 부제인 포시도니우스와 함께 로마에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430년 봄 로마에 도착한 보고서에 대해 로마 감독은 시릴에게 답장을 보내면서 네스토리우스의 견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또 네스토리우스가 자신의 견해를 철회해야 하고, 그가 믿는 것이 로마교회, 알렉산드리아교회, 그리고 보편교회에 일치한다고 알렸습니다. 그래서 서방교회 감독들은 로마에서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점검한 후 이단성이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로마 감독은 이 사실을 시릴에게 보내면서 하는 말이 자신들의 결정을 네스토리우스가 들은 후 10일 이내에 승복하지 않는다면 네스토리우스를 파직하라고 권했습니다. 만일 네스토리우스가 승복하지 않는다면 교회에서 추방시켜야 한다고까지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어디로 추방시킬 것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또 안디옥, 예루살렘, 데살로니가, 그리고 빌립보 감독들에게 로마 감독은 시릴에게 보냈던 답장과 동일한 것을 보냈습니다. 또 네스토리우스에게 서신을 보내어 신성모독적인 표현들이 가득찼다고 했습니다. 당시의 운송 상황으로 12월 7일이 되어 서신이 시릴에게 도착했습니다.”

“증거들을 모으고 있던 시릴은 알렉산드리아로 동방교회 감독들을 모아서 네스토리우스의 정확한 오류를 조사하고자 했습니다. 시릴은 네스토리우스를 파문시키지 않으면 어려움을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동방교회에서는 아리안 논쟁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이단에 대하여 늘 긴장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방교회 감독들은 430년 11월 3일에 함께 모여 시릴이 작성한 12개 항목의 ‘아나테마타’(Anathemata)와 함께 한 서신을 작성했습니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오류들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것들에 서명하지 않으면 파직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네스토리우스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은 이것들을 완강히 거부했고 오히려 시릴에 대하여 이단자라고 맞고소 했습니다. 그 이유는 네스토리우스가 여러 지지자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범종교회의 진행 (1)

 

  • 켈레스틴 1세
  • ▲켈레스틴 1세

6.2.2. 에베소 범종교회의

6.2.2.4. 범종교회의 진행

“당시에 동로마제국 황제는 데오도시우스 2세였고, 서로마제국 황제는 발렌티니안 3세였습니다.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는 종교적 문제를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로마 감독 켈레스틴과 알렉산드리아 감독 시릴이 범종교회의를 요청하지 않았어도 황제에 의해 네스토리우스는 범종교회의로 소환되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는 범종교회의를 431년 오순절 주일, 에베소에서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430년 11월 19일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는 범종교회의를 개최하여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 간의 갈등을 해소하려고 했었지만 여의치 않아 마침내 431년 오순절, 즉 6월 7일에 에베소에서 범종교회의를 개최한 것입니다.”

“431년 5월 7일 서신에서 로마 감독 켈레스틴은 자신이 에베소로 여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이집트 감독들로 하여금 자신이 원하는 대로 네스토리우스를 반대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세 명의 사절단을 — 감독 아르카디우스(Arcadius), 프로젝투스(Projectus), 그리고 사제 필립(Philip)을 — 자신의 사절단으로 보냈습니다. 이들은 시릴과 뜻을 확고하게 같이했습니다. 그들은 논쟁자로 온 것이 아니라 재판자들로 참석했습니다. 로마 감독은 네스토리우스에 관한 가르침과 그것에 관한 질문을 준비했습니다. 반달족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에 아프리카에서는 겨우 한 명의 부제만 참석했습니다.”

“마침내 431년 범종교회의는 개최가 공포되자, 시릴은 예상보다 며칠 먼저 에베소에 50여명의 감독들과 함께 도착했습니다. 오순절 후 반 네스토리우스파 예루살렘 감독이 15명과 함께 왔습니다. 대부분의 감독들은 소아시아 출신이었고, 나머지는 아시아와 폰투스 교구에 있는 지역 등지에서 모여들었습니다. 네스토리우스는 16명의 감독들과 함께 참석했는데 불의의 사고를 예상하여 무장한 경비원을 대동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감독 멤논은 약 40명의 부감독과 함께 참석했습니다. 대체적으로 159명의 감독들이 모였지만 마지막으로 정죄하는 문서에 서명한 사람은 198명이었습니다. 백작 칸디디안(Candidian)은 황제를 대표하여 참여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네스토리우스에 반대하였습니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네스토리우스 소수파들은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도착한 시릴은 네스토리우스를 만나기를 거절했습니다. 서로를 반목하며 질시하면서 사악한 이단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감독은 네스토리우스에게 거할 교회를 허락하지 않았지만 시릴에게는 활동의 자유를 제공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정해진 날이 되었지만 로마감독 사절단들이 교통편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도착하지 못하고 안디옥 감독 존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존의 경우는 조금 다르게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그는 네스토리우스의 친구였기에 의도적으로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는 일에 동참하기를 원치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6월 21일 기나긴 시간을 기다린 후 시릴은 참지 못하고 세인트 마가 교회에서 범종교회의를 개최시키고 개회를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네스토리우스는 아직도 참석할 사람들이 오지 않았기에 불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다음 날 6월 22일, 즉 오순절 이후 16일이 지난 날에 시릴은 범종교회의를 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감독직은 동방교회에서 최고의 명예를 갖고 있었기에 시릴은 황제의 참석을 감독들이 거부하도록 했고, 서기는 네스토리우스에 반대하는 글들을, 즉 시릴과 켈레스틴의 글들을 간략하게 읽도록 했습니다. 동시에 네스토리우스는 공식적으로 세 번이나 소환명령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초기 교부들의 저서들로부터 여러 인용들도 읽혔습니다. 이제 니케아 신조를 읽었고,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낸 시릴의 서신도 읽혔습니다. 시릴이 일어나서 서신에 기록된 자신의 신학이 니케아 신조와 일치하는지 감독들에게 물었습니다. 125명의 감독들은 각자가 니케아 신앙을 고백하면서 시릴의 견해가 그 신조와 일치함을 지지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감독들은 만장일치로 외쳤습니다.”

네스토리우스를 파문내리지 않는 자마다 파문을 받게 될 것이다. 참된 신앙을 가진 자는 그를 파문한다. 거룩한 종교회의는 그를 파문한다. 네스토리우스와 교제하는 자에게 파문이 내려질 것이다. 우리 모두는 네스토리우스의 서신과 교리들을 파문내린다. 우리 모두는 네스토리우스와 그를 추종하는 자들을, 그리고 그의 불경건한 신앙과 불경건한 교리를 파문한다. 우리 모두는 네스토리우스에게 파문을 내린다.

에베소 범종교회의 진행 (2)

 

  • 에베소 범종교회의 콥트어로 된 법령 8세기 복사본
  • ▲에베소 범종교회의 콥트어로 된 법령 8세기 복사본

6.2.2. 에베소 범종교회의

6.2.2.4. 범종교회의 진행

“이어서 네스토리우스의 답변을 공적으로 정죄했고,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는 자에게 파문이 내려질 것이라고 공포했습니다. 게다가 예루살렘 감독은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낸 로마 감독의 서신을 읽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서신의 내용은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고, 네스토리우스를 콘스탄티노플 감독직에서 파직시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에베소 범종교회의는 안디옥인들과 로마 감독의 사절단이 도착하기 전에 업무를 처리했습니다. 네스토리우스가 정통신앙이었다고 주장하는 감독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에베소 시민들은 이런 결정을 매우 환영했습니다. 그들은 온 도시를 횃불로 밝히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와 그의 모친에 관한 영예를 다시 한 번 확언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논쟁은 이렇게 끝나질 않았습니다. 범종교회의가 네스토리우스에 반대하여 선언을 한 다음날 콘스탄티노플 사제들에게 자신들의 감독이 파직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네스토리우스는 새로운 유다가 되었습니다. 매우 화가 난 그는 황제에게 서신을 띄웠습니다. 그러자 황제의 대표자 칸디디안은 모든 결정을 무효화한다고 했습니다.”

“며칠 후, 그러니까 6월 26일이나 27일 안디옥의 감독 존이 마침내 42명의 감독들과 함께 도착하여 칸디디안과 함께 시릴이 개최한 범종교회의에 반대하는 종교회의, 즉 ‘반역회의’(rebel council)를 개최했습니다. 여기서 안디옥의 존은 시릴과 에베소의 감독 멤논(Memnon)이 아리우스와 아폴리나리스의 이단성을 지적하고 이에 순응하는 자들을 출교시킨다고 했습니다. 이런 결정을 황제에게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7월 10일에 로마감독 켈레스틴이 보낸 사절단이 도착했습니다. 그리하여 6월 22일의 범종교회의에 참석한 감독들과 시릴은 다시 한 번 세인트 마가교회에 모여 안디옥인들의 결정을 부정하고 종교회의는 켈레스틴과 시릴을 새로운 바울이며 믿음의 보호자임을 천명했습니다. 네스토리우스에 반대하는 성명서가 다시 한 번 읽히고, 이런 결정이 황제에게 보고됐습니다. 안디옥인들은 종교회의 앞에 3차례 소환되었고 7월 17일 모두 출교 당했습니다.”

“7월 10일~8월 31일에 6번의 회기가 있었습니다. 이런 회기들은 시릴과 멤논에 반대하여 내린 법령들은 무효하다고 결정했습니다. 안디옥의 존과 그의 단체는 이런 결정을 거절했고 범종교회의 후에도 문제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많은 법령들이 발표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서방교회를 어지럽혔던 펠라기우스 이단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일에는 어거스틴의 역할이 무엇보도다 컸습니다. 에베소 범종교회의에 어거스틴은 참석하여 이 문제를 푸는 데 노력했습니다. 또 다른 법령은 니케아 신조를 그대로 수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네스토리우스 오류를 정죄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마무리되자 공식적으로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는 431년 10월 말에 범종교회의가 끝났다고 공포했습니다. 이상한 것은 그가 시릴의 정죄와 네스토리우스의 정죄를 한꺼번에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후에 시릴은 황제의 인준을 회복했고, 431년 10월에 황제는 시릴에게 이집트로 되돌아가 알렉산드리아 감독직을 이행토록 했습니다. 하지만 황제는 네스토리우스 정죄를 바꾸질 않았습니다. 네스토리우스에 반대하여 니케아 신조를 확언했고 감독들로 하여금 자신의 교구로 되돌아갈 것을 명했습니다. 그리하여 감독들은 모두 자신의 교구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각 편에서 8명씩 보내어 칼케돈에 있는 궁정으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9월 4일 이 모임이 시작되었지만 어떤 기록도 우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황제는 이 모임에서 시릴이 작성한 12항목의 파문 내용을 정죄하지 않고, 안디옥인들에 대한 정책을 수용하지도 않았습니다. 니케아 신조를 되풀이했고, 시릴과 멤논은 자신의 교구로 복직되었습니다. 마침내 범종교회의는 종결되었습니다.”

 

에베소 범종교회의 진행 (3)

6.1.1.1. 요약

“381년 콘스탄티노플 범종교회의로 인해 삼위일체 논쟁은 안정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질문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간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이 이슈는 수년 간 논의되어 마침내 451년 칼케돈 범종교회의에서 마무리 됩니다.”

“먼저, 우리가 기억할 것은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 범종교회의는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동일본질’, 즉 호모오우시오스(homoousios)라고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이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여전히 인간이십니다. 사람의 구원을 위해 반드시 그분은 성육신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불멸하고, 완전하고, 전능하셔야 하는데 그분이 인간이 되시거나 완전한 인간이 되시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혼돈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신성 또는 인성을 강조하는 견해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인성을 무시하는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켜 ‘알렉산드리아 학파’ 흔히 ‘알렉산드리아인들’이라고 부릅니다. 이와는 반대로 그분의 인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신성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신성과 인성 간의 구별을 분명히 하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안디옥 학파’ 또는 ‘안디옥인들’이라 부릅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께서 니케아 신조에 따라서 완전한 신성을 지니셨을 뿐만 아니라 그 신성이 무한하시고 인성도 그러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인성과 그리스도의 신성 간에 구별을 짓기 어렵다고 주장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문제에는 신학적 논쟁과 아울러 정치적 관심이 일어났습니다. 순수한 신학적 논쟁이 있으면 건전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정치적으로 확산시켜 신학적 논쟁에서 승리하려고 하면 문제가 늘 일어납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3차 범종교회의에서 일어납니다.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 감독들 간에 알력이 있었습니다.”

“381년에 이르러 알렉산드리아 감독은 동방교회에서 큰 권력과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었지만 그의 지상권은 콘스탄티노플 감독의 권위로 인해 위축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많은 학자들이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동기를 가지고 신학논쟁에 임했습니다. 특별히 민족주의를 내세우거나 아니면 성장하는 콘스탄티노플의 정부의 간섭이 싫어서 논쟁에 가담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상황도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청빙건이 있게 되면 후보 목사님이 누구든지, 아니면 장로나 안수집사 투표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그 당사자에 관해 잘 알지 못하면서도 반대하는 자들이 반대하기 때문에 괜히 반대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그래서 청빙건이나 투표가 어려워지는 경우가 있죠.”

“431년 3차 범종교회의는 네스토리안 논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미 설명했다시피 네스토리우스는 428년 콘스탄티노플 감독이 되었습니다. 그는 몹수에스티아의 데오도레의 신학을 지니고 있는 자였습니다. 그는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은 자’ 또는 ‘하나님의 모친’이라는 ‘데오토코스’라는 용어 사용을 반대하는 자였습니다. 이처럼 네스토리우스도 그 용어 사용을 싫어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어떤 시작이 있었거나 고통이나 죽음을 당하셨다는 사상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신ㆍ인 대신에 그는 로고스와 가정된 인간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리아의 역할을 단순히 ‘그리스도를 낳은 자’ 또는 ‘크리토토코스’라고 하거나 그리스도가 두 본성을 지니신 것처럼 마리아도 ‘하나님을 낳은 자’와 ‘사람을 낳은 자’라는 말을 동시에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이중인격을 가르친다고 하여 그는 고소를 당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두 본성과 두 인격을 가르친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러한 고소를 네스토리우스는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만 네스토리안주의라는 말은 두 본성과 두 인격을 주장하는 것으로 지금도 인식되고 있습니다.”

“네스토리우스는 안디옥 학파로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의 구별을 강조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마리아를 데오토코스라 불러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그녀가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측면의 모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2)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강력한 혐의는 그가 ‘두 아들’을 가르친다는 것과 볼 수 없는 분을 나눈다는 것입니다.
3) 이런 혐의를 그가 부인했지만 네스토리안주의는 위의 사상을 항상 가르칩니다.


“여기에 정치적 영향력이 가미됩니다. 당시 로마제국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408~450)는 431년 에베소 범종교회의를 개최합니다. 그 종교회의 진행을 간략히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시릴은 문제를 신학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수도사들과 정치인들도 관여하도록 했습니다.
2) 시릴은 자신의 교리를 관철시키기 위해 동방교회인들이 도착하기 전에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동방교회인들은 분개하여 반역회의를 개최하여 시릴을 정죄했습니다.
3) 감독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결코 분리할 수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4) 네스토리우스는 결국 파직되고 추방당했습니다.
5) 네스토리안들은 핍박을 받아 페르시아로 도주했습니다. 동방교회는 그들을 영접했습니다.
6) 결국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승리라 볼 수 있습니다.
7)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는 네스토리우스를 후원했지만 쉽게 관철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조금이라도 정리가 되는지 궁금합니다. 복잡하게 설명하고 자세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이러한 역사를 우리가 반복하고 있음을 배우기 위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