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틴제국 (Byzantine Empire)]

2008. 10. 15. 15:36교회사자료/10.세계사

[비잔틴제국 (Byzantine Empire)]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 약 1,000년 동안 존속했던 동로마 제국,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 뒤 동·서로 분열한 중세 로마제국 중 동방제국(330~1453)

 

[개요]


비잔틴 제국이라는 이름은 유스티니아누스 왕조가 지중해 탈환을 위해 벌였던 게르만족 세력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610년 이후부터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팔라이올로구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가 퇴위한 1453년까지를 일컫는 중세 그리스의 동로마 문화권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로마인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신의 은총과 영원한 로마의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그리스도교 국가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어서 스스로를 계속해서 '로마인'이라 불렀다.


비잔티움은 원래 고대 그리스가 세운 식민지였다. 이 지역은 유럽과 소아시아의 경계선에 있었고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324~337 재위)가 330년에 이곳을 '새로운 로마'로 정하고 이를 콘스탄티노플이라 명명한 후 수도를 옮겨온 뒤부터 동로마라는 새로운 영역의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을 때(395) 제국을 양분하여 동로마를 큰아들 아르카디우스, 서로마를 작은 아들 호노리우스로 하여금 각각 통치하게 함으로써 동서 로마의 분리는 결정적인 사실이 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제도 일반에서는 로마적이지만 주민·언어·문화면에서는 그리스적이었고 콘스탄티노플은 일찍이 로마 제국이 완수한 적이 없었던 전략상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리스를 중심으로 소아시아와 이탈리아 해안의 여러 섬들을 포함하여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조직을 갖추고 그리스도교와 동방적 색채를 포함한 군주국가로서 완전히 성립된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의 과도기를 거쳐 헤라클리우스 황제(610~641 재위) 때였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은 행정과 학문에서 새로운 중심이 되었고 제국의 문화는 고전적 전통 및 중세 가톨릭 유럽과 소아시아의 이교문화의 교차 지점으로서의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비잔틴과 게르만족의 관계는 반드시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야만족에 대해서는 세례만 인정하면 개방했고, 비잔틴 역시 문화의 기원이 다른 문화들인 슬라브·아랍·셈·투르크 등의 문화와 끊임없이 접촉했다.


그러므로 비잔틴 사회는 초기부터 사회적·문화적으로 유동성과 수용력이 대단히 큰 제국이었음이 분명하다. 비잔틴의 사회 구조는 서유럽과는 극히 다른 유형에 속하며, 이는 역사가들의 흥미를 끌어왔다. 또 12세기까지 지중해 교역의 중심세력으로서 아랍인과 경쟁을 벌인 역사 역시 중세 서유럽 상업을 부활시킨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


12세기까지 비잔틴 제국은 중세의 국제정치무대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이었고 지중해 경제와 신앙·학문·문화의 중심지였으나 이후부터는 지나치게 광범위한 정복지의 영역이 오히려 새로운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여러 종족간의 갈등, 종교적인 분열, 변방의 잦은 침입, 끊임없는 정복전쟁 등은 제국의 재정과 인력에 심각한 부담이 되었다. 결국 행정적 구조가 더이상 정복지에서의 통제력을 확보하지 못하게 되어 제국은 마침내 붕괴 위기를 맞게 되었다.


 

[로마적·그리스도교적 배경]


로마적 전통은 비잔틴에게 커다란 유산을 남겨주었다. 라틴어, 화폐제도, 로마군의 국제적 성격, 도시의 수송로, 법률, 지혜로운 인간으로서의 황제의 인간상, 시민적 문화 등이 그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아우구스투스 이래 지중해 세계의 통일과 번영을 가져다준 원천이었다.


이 전통은 물론 끊임없이 다른 도전을 받곤 했는데, 정복사업은 로마의 막강한 지배하에서도 다양한 배경을 가진 영역들, 지방적 관습과 관행, 이교도 사원, 유대인 장로회,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교도와 부딪혔고 자급자족적인 영지나 속주 등의 경제적 단위 등은 제국 내의 통일성보다는 원심적 다양성을 추구하며 황제의 통제력을 벗어나려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혁]


이 두 황제는 후기 제국을 보다 통일적으로 재조직하기 위해 세습적 황제계승권의 원칙을 세우고 행정을 정규화하기 위해 제국을 4개의 대관구로 나누고 그 하위의 작은 도시에 이르기까지 행정적 관료제 질서를 확립하는 대개혁을 시도했다. 군사와 민간행정을 엄격히 분리해 정치적 내란을 막으면서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를 공인된 신앙으로 허용해 이교도를 통합했다.


통화제의 개혁으로 가격·임금을 통제하고, 보다 안전한 방어조건을 갖춘 동방으로 수도를 옮겼다. 동방은 로마와 달리 집중된 토지, 즉 라티푼디움의 수가 적어서 자영소농(自營小農)이나 도시 납세자가 많았기 때문에 도시 성장이나 원로원들의 군사적·재정적 봉사 능력에 유리했다. 3세기말부터 후기 로마인들의 사회적 유동성은 두드러지게 줄어서 동방에서는 상업경제적으로 활력이 넘쳤다.


로마 제국 말기의 동서 로마의 차이점 중 또다른 중요한 요소는 이민족과의 관계였다. 동·서고트족이 훈족의 추격을 피해 갑자기 4세기 후반에 도나우 강을 넘어왔을 때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변경지(feoderati)를 하사해 융화정책을 쓰려 했다. 이들은 프랑크족·롬바르드족과는 달리 아리우스파로 개종했고 매우 호전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의 원로원 귀족제도에 호의를 느끼지 않았다. 그결과 동로마에서 고트족은 대규모나 조직적인 방법으로 정착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제국군대조직 속에 충원되는 경향을 띠었다.


 

[종교적 논쟁]


6세기부터 동로마 제국에는 종교적인 논쟁이 제국의 통합을 위협할 정도로 가열되었다. 아리우스파의 이단 선언 이래로 2번째의 중요한 이단설은 단성론(Monophysite)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 등의 신학자들은 성자(聖子) 예수의 신성(神性)만을 강조하고 인성(人性)을 부정했다. 이에 반해 안티오크의 네스토리우스파들은 2가지 특성이 분리 병존하는 것으로 보고 오히려 인성을 강조했다.


오랜 논쟁 속에서 콘스탄티노플은 세력이 컸던 단성론을 배척하고 칼케돈 공의회(451)에서 택한 양성론을 지지했다. 단성론자들의 탄핵과 그에 뒤이은 갈등은 정치적·군사적으로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단성론은 이집트· 시리아에서 계속 인기가 있었고, 중앙의 지배에 저항했기 때문에 7세기 이슬람의 침입 때까지 황제는 이 지역의 분리주의적 전통과 싸워야 했다. 결국 황제는 서유럽에서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동방의 단성론을 소외시키지 않으면서도 서유럽의 정통설을 만족시키는 교회를 형성해야 하는 난관에 봉착했다.


 

[동로마 제국에서 비잔틴 제국으로 (518~717)]


동로마 제국의 동쪽 경계에서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다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아르메니아의 그리스도교 개종은 조로아스터교의 페르시아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고, 이것은 자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활력적인 군사적 팽창을 자극시켰다. 황제는 라지카에서 아라비아 사막까지, 북으로는 크림 반도의 훈족에게 군대를 파견해 승리를 거두었고 도나우 강을 국경으로 삼았다.


그는 다시 서방으로 관심을 돌려 로마와 화해하고 이탈리아를 게르만인 왕보다도 그리스도교 황제의 통치하에 두고자 했다. 또 황제는 콘스탄티노플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완성하고 군주권을 중앙집권화하기 위한 기초를 다지고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건설을 완성시켰다. 533년에는 북아프리카의 반달족을 공격하여 카르타고의 가톨릭교도를 보호했다. 그후 시칠리아의 고트족을 정벌하고 라벤나에 비잔틴의 총독부를 설치했다.


페르시아와 제국의 경쟁관계에서 중요한 요소는 '비단길'의 확보에 관한 문제였다. 중국에서 페르시아를 거치거나 인도양을 거쳐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는 페르시아의 독점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비잔틴 황제들은 남쪽 에티오피아의 상인들의 교역료를 이용하거나 북쪽 카프카스 흑해 상인들의 교역료를 이용했다. 제국의 활력에 때맞추어 발칸 북방에 새로운 이민족인 남슬라브인·아바르인들이 남하하여 제국으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얻고자 했다.


제국의 사방 변경을 수비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포섭·융화해 수비대로 복무시키는 정책을 썼지만 잡다한 이들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서로마와는 달리 비잔틴은 외교적인 방법으로 이들을 제도적·문화적으로 포섭하는 기술을 발휘했다. 이에 그리스 정교회의 신앙과 정통 황제의 관료적 권한은 좋은 방편이었다.


6세기 비잔틴 세계에서는 그리스도교의 민중문화가 더욱 발달하고 있었다. 개종을 위한 세례관행 이외에도 각종 미사, 연도 성사(聖事), 신앙고백, 성서 이외의 전설·기적, 종교적인 음악·미술, 수도원 성직자들의 생활이나 생애기록 등이 소아시아 지역에서 점차 확산되어 유대교나 동방 이교를 밀어내고 있었다.


또 제국의 대주교들은 제국 내의 행정·군사·사법·외교·상업·복지사업의 기능까지 행함으로써 민중의 일상생활에 깊숙이 침투했다. 단성론과 칼케돈의 정통 교리 사이의 갈등이 해소되지 못한 와중에도 성상(Icon)은 널리 보급되어 민중적 그리스도교 문화의 활력을 나타냈다.


성상은 예수나 성모·성인들의 추상적이고도 단순화된 이미지를 나타낸 것으로 일반대중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신플라톤주의 철학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에 의하면 눈으로 볼 수 있는 예수의 이미지를 묵상함으로써 눈으로 볼 수 없는 예수의 본질에 대한 묵상을 불러일으킨다는 가르침이었다.


헤라클리우스의 통치시대에는 다시 시련이 닥쳐왔다. 수도 내에서의 왕조간의 암투와 종교적 분리주의 경향의 강화 속에서 영토가 줄어들고 상업과 도시의 활동이 위축되었다. 그러나 이 시련 속에서도 왕조는 내부적으로 견고한 지방행정상의 개혁을 실시하고 용병제보다는 농민 보병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이들에게 군사 보유지를 할당해서 소토지소유자 계층을 증가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무렵 동방의 적 페르시아와 아바르족 이외에도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마호메트가 메디나로 피신해 이슬람 공동체를 설립한 뒤 그의 후계자 칼리프들은 632년부터 대규모의 정복·개종사업을 벌여 페르시아를 격퇴하고 키프로스·로도스·크레타·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다.


페르시아와 비잔틴이 그처럼 쉽게 굴복한 것은 첫째, 오랜 전쟁으로 힘이 고갈되어 있었고, 둘째, 아랍 변경지대의 군소 국가에 대한 원조를 소홀히 했으며, 셋째, 비잔틴의 경우는 종교적·왕조적 내분으로 충성심과 통합성이 매우 약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승승장구한 이슬람 세력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특히 우세한 해상 능력을 이용해 지중해 연안 국가들을 먼저 침공했다.


비잔틴은 이때 도나우 강을 넘어오는 북방의 불가리아인과 서유럽 영역에 대한 통제로 힘이 분산되어 아랍인의 진출을 막아낼 수 없었다. 드디어 698년 이슬람 세력은 아프리카의 총독부를 공략하고 아르메니아와 소아시아를 포위해 제국의 양면을 조여들어갔다.

 


 

[성상파괴운동 (717~867)]


이사우리아 왕조(717~820)와 아모리아 왕조(820~867) 사이의 약 150년간 비잔틴은 역대 황제들의 성상파괴운동으로 최대의 종교적 내분을 겪었다. 서유럽에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세속 권위보다 우월한 권위를 행사했지만 비잔틴 제국에서는 황제가 정치적 목적으로 교회를 복종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성상파괴 분쟁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명백한 경계를 그으려는 노력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성상숭배의 관행은 692년 퀴니섹스트 공의회 이래로 더욱 강화되어왔으나 이에 대한 반대이론은 730년 레오 3세(717~741 재위)의 성상파괴칙령에 의해 불붙게 되었다. 성상숭배론자나 성상파괴론자들은 다같이 그리스도교도가 성상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갖지 않으면 번영할 수 없으리라는 신념을 지녔지만 8세기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네스는 신플라톤주의에 입각해서 성상은 신의 상징적 이미지에 지나지 않으며 신은 육화(肉化)를 통해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이미지 창조는 정당하다고 보았다.


이에 반해 파괴론자들은 일부 이슬람교와 단성론자들의 영향을 받아 일체의 종교적 우상을 거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했다. 이들이 보기에 예수의 육체적 이미지는 신성모독이었다. 이와 동시에 콘스탄티누스 5세는 754년에 광신적 수도원의 박해를 결정하고 성상을 황제 초상화로 대체하려 했다. 그는 수도원과 교회의 권위가 황제와 세속 학문의 세계를 경멸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또한 황제권의 휘하에 봉사하던 온건파 성직자들 역시 수도원의 광신파에게 대립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세속적 봉사와 교육에 의한 훈련을 중시했던 것이다. 이들 군사 및 관료귀족층은 성직귀족층과 대등한 권위를 누리고 싶어했다. 그러나 성상파괴운동은 비잔틴 사회의 인종적·사회적 이면에 보다 더 깊은 종교적 분열을 하나 더 보태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성상파괴운동은 비잔틴과 로마 가톨릭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는 레오 3세의 이 박해운동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게다가 롬바르드족이 점령한 라벤나와 일리리쿰 지역의 교회재판권을 비잔티움 대주교에게 넘기게 됨으로써 양쪽의 관계는 서먹해졌다. 게다가 교황 스테파누스 2세가 피핀을 서로마 황제로 대관한 일은 '하나의 제국, 하나의 황제' 사상과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9세기 후반에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경쟁을 부추기는 더욱 심각한 사태가 일어났는데, 그것은 중부 유럽의 슬라브인과 발칸의 불가리아인·러시아인의 개종과 교회 사법권을 둘러싼 문제였다. 포티우스 대주교는 외교수완을 발휘해 비잔틴의 영향력을 넓혔지만 이는 경쟁관계로 치닫던 동·서 교회의 대분열의 조짐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마케도니아 왕조와 비잔틴의 최전성기 (867~1025)]


2세기에 걸친 마케도니아 왕조 치세에 제국은 군사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했다. 제국 전역에 걸쳐 군관구제(軍官區制)가 실시되었고 군대와 민간 사이의 관계는 원활했으며 동방의 속주에서는 산업·상업이 크게 발달했다. 도시 내에서도 역시 길드 조직이 발달했고 무역로로 비단길을 확보했다. 입법적으로도 법률체계를 집대성·발표했으며 법률의 절차를 간소화했다.


그러나 물질적 번영과 함께 전쟁 계획도 끊임없이 진전되었다. 사실 수도원이나 지방 귀족의 대영지의 성장은 중소농의 희생을 가져왔고 이것은 징집에 큰 위협이었으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새로운 영토 획득을 위한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마케도니아 시대에 슬라브인과 러시아인들은 그리스 정교회로 개종했으며 비잔틴 교회는 이들에게 뒷날 슬라브인의 문자가 되는 키릴 문자(원래는 글라골 문자라고 불렀음)를 고안해주어 성서 해독, 연도(連禱), 교회관행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이는 슬라브인들의 문화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준 대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사이 비잔틴은 소아시아에서 아랍인을 밀어내고 소아시아·시리아·성지 예루살렘 재탈환에 몰두했다. 975년 비잔틴은 안티오크와 동방 남부의 상당부분을 빼앗았다. 그러나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는 여전히 이슬람의 세력하에 묶여 있었다. 불가리아인과 러시아인은 개종 이후 처음에는 비잔틴에 대등한 외교관계를 요구했으나 불가리아의 군주 시메온 이후부터는 차츰 평화적 관계로 회복되었다.


그 대신 비잔틴은 동북부의 최변경인 중앙아시아의 유목민과 직접 맞서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동·서 양면의 군사적 부담을 지는 것은 또다시 과중한 국세와 중·소농의 징집 부담이 커짐을 뜻했다. 이슬람 세력을 견제한 후 비잔틴은 이 권위를 장차 서유럽과 이탈리아의 재탈환에 이용하려 했으나 그당시 독일에서 출현한 신성 로마 제국의 팽창정책은 새로운 경쟁을 불러일으켰고 양자의 충돌은 동·서 관계를 더욱 미묘하게 만들었다.


비잔틴은 유럽과 달리 더욱 독자적으로 새로운 법전·중앙집권제·관료제·황제우월사상 등을 강화했고 그리스의 고전문화를 발굴해 세속학문의 중심내용으로 삼았다. 변경에는 30여 개의 속주령을 설치해 군인 귀족계급을 발령함으로써 민간·군사행정을 통합하고 효율적으로 통치했다. 육군·해군 병사들은 대부분 속주령 영지 내에서 세습 토지를 하사받은 농민 병사 계급에서 충원되었다.


최변경지대의 군사는 외국 용병대에 의해 충원되었다. 동방·소아시아 변경지대를 재정복함으로써 비잔틴에는 새로운 귀족계급이 생겨났다. 이들의 부와 권력은 토지소유와 고위 군사 직위에 기반을 두었으나 점차 이들은 자유농민병사의 토지를 매입해 농민을 예속상태로 빠뜨렸고 빈부의 격차는 심해졌다. 이에 따라 발칸 지대와 아나톨리아에서 사회구조는 크게 변하게 되었다.


996년 바실리우스 황제는 농민들로부터 이양된 토지의 반환을 명령하는 징계법을 발표하고 교회나 귀족층에게 집단적 납세의무를 부과하는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다시 일어난 비잔틴의 팽창 욕구와 광범위한 제국영토 유지를 위한 군사적 효율성 때문에 농민의 예속화 현상은 지속되었다.


 

[비잔틴의 쇠퇴 (1025~1260)]


11세기 비잔틴 제국이 취약하게 된 근본 원인은 3세기의 로마 제국과 유사했다. 오랜 안정과 번영 속의 사회에 잠재되어 있던 긴장, 변경과 수도의 긴장, 군·민간 관료 사이의 갈등, 변경 너머의 새로운 이민족의 침입과 그로 인한 경제적 교역로의 두절 등이 원인이었다. 변경지대의 군사귀족과 속주민들은 중앙의 지시를 무시하고 영지를 넓히고 있었다.


제국 군대는 겉으로는 막강하나 내적으로는 농민의 병역 의무를 현금으로 대신하는 관행이 생겨났고 동시에 중간 징세 청부업이 등장했다. 11세기에 새로운 적으로 부상한 셀주크 투르크족은 1055년에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뒤 술탄의 칭호를 보유하고 이슬람의 보호자로 등장했다. 이들은 곧 이집트·안티오크의 지배권을 탈취하고 아르메니아를 요구했다. 1071년 이들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너무나 쉽게 비잔틴의 군사귀족을 굴복시켰다.


이때 수도는 권력 암투로 내란에 빠져 있었다. 북방의 불가리아인은 유목민인 페체네그족의 침입에 방패 세력이 될 수 없을 만큼 약화되어 있었고 오히려 그들 내부의 이단파였던 보고밀파의 선동으로 비잔틴의 통제력에 도전하고 있었다. 서유럽에서는 새로 등장한 노르만족이 남부 이탈리아를 정복한 후 아드리아 해를 건너 달마치야·바리에까지 밀려들어왔고 비잔틴은 양면 전쟁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비잔틴이 이탈리아에 있던 최후 근거지를 잃음으로써 동방 그리스와 서방 로마의 사이는 완전히 분열되었다. 1054년 동·서 교회의 최종적 분열은 종교면·정치면에서 비잔틴에게는 일대 전환기를 의미했다. 이 분열 이후 서방 로마는 비잔틴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로마 가톨릭은 11세기에 개혁을 단행해 교황청의 보편적 역할을 내세우면서 교리면·예식면에서 동로마 교회와 도저히 양립할 수 없음을 선언하고 황제권보다 교황우월사상을 세속정치에 펴나가기 시작했다.


남이탈리아에서 노르만족의 침입을 비잔틴 대신 물리친 베네치아는 지중해 교역상의 특권을 요구했다. 그 사이 수세에 몰린 비잔틴은 셀주크 투르크의 위협으로부터 수도를 지키고 아나톨리아를 탈환하기 위해 유럽에 도움을 청했다. 이에 관해 서유럽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십자군 원정의 목적은 종교적 열정뿐만이 아니라 단순한 모험심, 전리품, 영토 팽창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십자군 원정으로 비잔틴은 이득보다도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사건이었다. 니케아·안티오크는 탈환되었으나 유럽인은 이곳에 라틴 왕국을 세우고 정착해 통제권을 행사하려 했다. 어쩔 수 없이 황제는 베네피키움(은대지) 수여 형식으로 영지를 할애했으나 이것은 제국 분할을 조장하는 계기가 되었고 군사적 토지귀족의 득세를 돕는 결과가 되었다.


12세기부터 제국의 상업로는 동방에만 국한되어 있다가 유럽의 상업이 부활됨에 따라 다시 자극을 받았으나 베네치아가 독점권을 행사하려 들었고 헝가리와 노르만족의 개입으로 비잔틴의 행동은 더욱 더 큰 제약을 받게 되었다. 결국 12세기부터 비잔틴은 서유럽에서는 근거지를 잃고 겨우 발칸 반도에서만 통제권을 유지하게 되었다.


셀주크 투르크족과의 전쟁에서 독일 제국은 교황청과 베네치아 사이의 복잡한 적대관계 때문에 비잔틴을 배신했다. 게다가 서유럽은 십자군 전쟁으로 콘스탄티노플 자체를 정복하거나 유럽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해줄 뿐만 아니라 교역·교회·십자군의 미래에도 이익이 된다는 생각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비잔틴 국민들은 서유럽인의 이같은 야심에 적개심을 느꼈고 콤네누스 왕조(1081~1185) 때에는 십자군 원정 정책을 거부했다. 1204년 십자군은 퇴각길에 부유한 콘스탄티노플에 난입해 약탈을 자행했고 라틴인은 트라키아·테살로니케·아테네·모레아 등에 봉건국가를 설립했다. 이에 비잔틴 사람들은 에피루스·니케아에서 각기 독자적인 황제를 옹립해 라틴 왕국에 저항하기도 했다.


로마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신생 라틴 국가를 이용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려는 욕망을 품었지만 그리스인들은 라틴인에게 극도의 적개심을 보였다. 십자군전쟁 이후 이들 봉건국가는 비잔틴 성직자들의 지지로 다시 부활된 니케아 제국과 투르크족의 습격으로 차츰 쇠퇴하게 되었다.

 

 

[팔라이올로구스 왕조와 제국의 몰락 (1261~1453)]


1260년의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 콘스탄티노플은 옛날의 위용을 상실했고 더이상 회복하지 못했다. 제국의 사방은 트레비존드(트라브존) 독립왕국, 봉건왕국으로 분할되었고, 그리스 북부와 서부는 불가리아·세르비아·이탈리아·프랑스의 속령, 식민지로 점령되었다. 비잔틴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만이 하나의 거대한 성벽도시국가로 남아 있었다.


제국은 흔히 서유럽의 재정복 위협에 대해 교황청에 도움을 청했고 그때마다 콘스탄티노플을 로마의 감독교구하에 두는 문제가 거론되었다. 그러나 동·서 교회를 다시 화합시키려는 황제의 노력은 외교적 공작으로 보여졌고 이는 비잔틴인의 반발만을 샀다. 교황청으로부터의 구원이 용이하지 않은 것은 크게 보아 3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14~15세기에 걸쳐 교황 자신의 권위가 실추되었고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일치 정신이 쇠퇴했다. 둘째, 서유럽 자체 내에서 여러 국가간의 경쟁과 갈등이 존재했으며, 셋째, 이탈리아 연안의 도시국가인 제노바·베네치아의 야욕 때문이었다. 베네치아는 비잔틴과의 관계에서 오직 상업적 이익 관계만을 고려했고 이에 어긋날 때는 서슴지 않고 비잔틴 선박을 침몰시키곤 했다.


비잔틴의 부활이 장차 투르크의 위협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이들에게 너무 늦게 떠올랐다. 13세기에 들어서면서 소아시아 지역은 다시 아시아의 새로운 이민족인 몽골족의 침입을 1세기 가량 받게 되었다. 흔히 지방귀족들은 수도의 황제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몽골족과 협력하기도 했다. 비잔틴은 고질적인 양면 전쟁 때문에 용병을 고용했고 그 유지에 막대한 세입을 지출해야 했다.


몽골족의 점령이 누그러지자마자 다시 오스만 투르크의 공격을 받은 아나톨리아의 주민들은 대량으로 콘스탄티노플과 해안 서쪽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비잔틴의 화폐 평가절하 정책에도 재정 궁핍은 끝내 나아지지 않았으며 백성들은 높은 세금과 물가고 및 기근에 시달렸다. 유민이 속출하는 동안 1331년 아나톨리아는 투르크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했다.


1337년에는 니코메디아를 잃어 발칸의 1/3 크기로 축소된 비잔틴은 오스만 투르크와 협약을 맺는 것이 오히려 서유럽의 야욕 위협을 막는 데에 유리하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1340~50년 각 도시에는 반란과 흑사병이 퍼져 중앙정치는 외국 세력의 경쟁의 희생물로 전락했다. 1354년 투르크 용병대는 해협을 건너 갈리폴리를 차지했다.


일단 유럽 땅을 확보하자 투르크족에게 콘스탄티노플의 정복 가능성은 눈앞에 다가온 셈이었고 종전의 우호조약은 이름뿐이었다. 교황청의 한계와 서유럽 국가들의 냉담 속에서 발칸의 북부 마케도니아 왕국, 세르비아, 불가리아가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투르크의 봉신국가로 전락했다. 헝가리가 한때 구원군을 파견했으나 1396년 니코폴리스에서 투르크의 우세한 군사력에 패했다.


비잔틴 황제 마누엘 2세(1391~1425 재위)는 유럽을 순회하면서 그리스를 보호해달라고 호소했으나 교황청의 원조모금운동은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 사이 미스트라 시는 일시적으로 비잔틴 학자와 예술가들의 피난지가 되어 그리스 문화·교회의 마지막 재생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헬레니즘의 부활의 꿈은 점점 사라져가는 석양에 지나지 않았다.


1439년에 피렌체에서 동·서 화합을 위한 공의회가 개회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은 마침내 로마의 감독교구에 종속할 것을 동의했다. 이 재결합은 폴란드·헝가리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로부터 환영을 받아서 십자군 모집의 새 움직임이 일어났으나 1444년 바르나전투에서 그리스도교 국가 연합군은 투르크에 마지막으로 패배했다. 하기아소피아 성당에서 교회연합의 최후 순간에 시민은 격렬히 저항했으나 결국 비잔틴은 신앙을 희생시켰음에도 자신들의 자유를 되찾지 못했다.


1453년 1월 콘스탄티노플 성벽은 7주간의 항전 끝에 투르크 포위에 함락되었다. 투르크의 술탄은 수도의 약탈을 3일로 제한하고 신앙에 관용을 베풀 것을 약속했다. 수도에 이어 아테네·모레아·트레비존드가 굴복했고 1,000년 동안 찬란한 그리스도교 문화와 그리스 문화를 융화시켰던 비잔틴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제국은 오스만투르크군에게 점령되었지만 그리스정교회만은 오스만투르크의 종교적 유화정책에 따라 존속이 허용되었다. 성화(聖畵), 교회음악과 교회건축으로 대표되는 종교예술은 그리스정교회와 함께 오늘날까지 비잔틴문화의 계승자로 남아 있다.


비잔틴제국의 정치·법률·문화를 수용하고 그리스정교를 국교로 한 슬라브의 여러 국가, 특히 불가리아·세르비아·루마니아·키예프·러시아(나중의 모스크바대공국)에는 제국 멸망 후에도 여러 방면에서 그 영향이 계속되었다. 그 중에서도 모스크바대공국의 이반 3세는 비잔틴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재위 1449∼53)의 조카 소피아와 결혼하였다. 그는 비잔틴황제의 즉위식을 본보기로 대관식을 거행하고 스스로를 비잔틴제국의 후계자로 자처하였다. 또한 모스크바를 <제2의 로마(콘스탄티노플)>에 다음가는 <제3의 로마>라고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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