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대학의 성립과 발전

2008. 10. 15. 15:28교회사자료/10.세계사

중세 대학의 성립과 발전

 

I. 들어가는 말 II. 대학의 유래 1. 대학의 어원과 기원 2. 중세이전의 고등교육기관 III. 중세대학의 성립과 발전 1. 최초의 대학들 2. 대학의 성립과정 (1) 교회권력과의 대결 (2) 세속권력과의 대결 3. 이후의 발전 (1) 교과과정과 시험제도 (2) 대학의 분위기 (3) 도구로서의 책 IV. 현재까지의 추이

 

I. 들어가는 말

대학이라는 용어는 동양과 한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쓰여왔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몸담고있는 대학은 universitas라는 라틴어로 불리워 졌던 서양 중세의 교육 연구기관이 발전해 온 것이다. 글을 쓰거나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지식인들은 도시의 발전과 더불어 노동의 분화가 이루어지는 곳에서 비로소 도시에 정착하는 전문 직업인으로 등장한다.

이와 같이 서양의 역사에서 대학의 성립과 발전은 단독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조합의 결성에 따른 도시의 역사와 맞물려 나타나고 있으며 여러 파급효과를 낳았다. 따라서 현재 쓰이고 있는 대학이란 용어의 유래와 함께 중세대학의 성립과 발전과정을 살펴봄으로서 중세시대의 문화와 더불어 현재 우리의 지식문화의 근원을 고찰해볼 수 있을 것이다.

II. 대학의 유래

1.대학의 어원과 기원

흔히 대학이라고 하면 university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것의 근원이 되는 것은 universitas라는 라틴어이다. Universitas라는 용어는 중세의 문헌에서 많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오늘날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나타내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여러 직종의 사람들을 표현하는 단어의 소유격과 함께 기록되고 있으므로, 본래의 의미는 글자의 구성대로 하나의(unum) 방향을 지향하는 조직(verto-versitas) 즉 조합에 해당된다. 따라서 상인과 수공업자들의 조직인 길드를 나타내는 말이고, 그러한 점에서 동료집단이라는 의미를 지닌 collegium등과 완전히 같은 알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현재에 이르러 대학이란 의미를 지니게 되었을까?

대학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된 원래의 단어는 studium generate이다. 이 라틴어 숙어에서 studium은 현대 영어의 studio나 study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연구가 수행되는 공간으로서의 연구소를 의미한다. 또한 generate는 형용사로서 genus(종족-인간이라는 종족-인류)에서 유래하는 말이므로 하나의 민족에 한정되지 않고 널리 인류에 속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단적으로 말하자면 국제적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studium generate을 직역하자면 국제 연구소쯤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 학교들은 민족과 국가를 초월하여 유럽의 모든 학생들에게 개방된 보편적이고 국제적인 학문장소로 널리 인식되었다. 최초의 스투디움은 성직자와 수도사를 대성당 및 수도원의 학교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교육시키고자 하는데서 생겨났다. 스투디움과 그 시조였던 다른 학교들 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외국에서 온 학자가 있나 없나 였다.

서적이 귀했던 중세에 학생들이 지식의 원천으로 삼았던 것은 학식 있는 사람들의 강의였다. 그래서 학생들은 유명 교수를 찾아 몰려 다녔다. 집에서 가르치다가 학생수가 늘어나게 되자 큰 건물을 빌려서 하게 되었다. 결국 유영한 교수들이 학생들의 교통의 편리를 위하여 가까운 곳에 서로 모이게 된 것이 종합대학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고 한다.

초기 대학들은 본질 또는 보편법칙을 연구하는 기관으로서 학생과 교사 법인이었으며 교황과 황제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11세기말 볼로냐에 최초의 대학이 설립되었으며, 12세기말경에는 이곳에 학자들을 위한 4개의 '대학'이 생겨났다. 이들 대학은 롬바르디아, 토스카나, 로마, 교황지상주의 국가 (프랑스, 독일, 영국 및 다른 나라들의 연합) 등 4개의 출신지별 학생단체에 상응하는 것으로 처음에는 구성원 개개인의 이해관계로 모인 사적 단체에 불과했다.

볼로냐가 최초의 스투디움 제네날레 (Studium Generale)가 된 이유는 그곳에 로마법의 최고 권위자 이르네리우스(Irnerius)와 교회법으로 유명한 그라티아누스(Gratianus)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정 형태를 갖춘 대학조직이 있기 이전의 초기 단계에서도 파리나 볼로냐에 있던 학자들은 개인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았다. 예를 들면 파리에서는 성직자로 분류되어 성직자재판소에서 재판권을 부여받았다. 1158년 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는 볼로냐의 학자들에게 부당한 체포로부터의 보호권, 동료들 앞에서 심판 받을 권리 같은 특권들을 부여했다.

이런 특권은 교사와 학생 개인에게만 한정되어 있었고 스투디움은 그런 면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초기의 단체들은 무신론이나 異敎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학생과 교사들은 그들의 학장을 함께 선출했다. 그러나 독자적 운영을 하는 대신재정은 자체조달을 해야 했다. 따라서 교사들은 생계를 위해서 수업료를 받아야 했고 학생들의 기대수준을 충족시켜주어야 했다

각지에서 모인 학생들은 점차 그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조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학생들이 몰려들자 학교 주변의 시민들은 방세를 대폭적으로 올리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학생들은 신변의 안전에도 위험을 느끼게 되었다. 11세기 이후 교황과 황제 사이의 이념 투쟁으로 인해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거의 무정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학생들은 조합을 결성하였고 그것을 universitas라 불렀다. 그런데 당시 교수들은 조합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학생들과 달리 그들은 도시 당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3세기에 이르러 학자들의 몇몇 '대학'도 명확한 행정 기능을 갖춘 법인체로 발전하여 우니베르시타스 스투디이(universitas studii)로 알려지게 되었다. 14세기 후반에 와서 대학이라는 용어는 시민이나 교회당국에 의해 인정되는 교사와 학자들의 공동체를 지칭하게되었다. 이러한 초기 대학들은 일정한 건물이나 법인재산도 거의 갖고 있지 않았고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학생들을 잃기 일쑤였다. 그들은 다른 도시로 이주해서 새로운 학문 장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역사는 윽스퍼드 대학교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한 않은 학생들이 옮겨갔던 1209년에 시작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교육과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진리를 탐구하던 원래의 연구소는 그 안에 모여든 위에서 본 것처럼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확장되어 나갔고, 점차 그에 따라 자체의 일상생활과 재판상의 권리를 확보할 필요를 자각했다.

대학은 교회, 국가, 도시의 중세의 3대 세력들과는 목표를 달리하여 학문연구를 목적으로 형성되었으므로 실제상의 眞書 확보를 중요시하는 세력들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었고, 또한 그러한 세력들이 자신들의 기반을 확장시키기 위해 대학을 그 지배하에 놓고자 했으므로 대학에게는 경제적 대책의 마련과 함께 자치권의 획득이 강하게 요구되었다.

이를 위해 교사(magister 또는 professor)와 학생(scholarious)들은 대학이란 이름 아래 하나의 조합(universitas)으로 단결하여 점차 자유와 특권을 하나씩 획득하여 나간다. 그것이 universitas가 스투디움 제네날레를 대신하는 대학으로 규정되게 된 이유였다.

* 이와는 별도로 학생조합의 Universitas가 종합대학의 유니버시티(University)의 어원이 되었고, 교수조합의 콜레지아(Collegia)가 단과대학의 칼리지(College)의 어원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

2.중세 이전의 고등교육기관

수준이 매우 높은 교육이나 연구를 담당했던 사회적 제도나 기관은 물론 중세 이전에도 있었다. 고전 그리스 시대에 있어 BC 387년경에 플라톤이 아테네에 설립한 이래 1000년 가까이 지속해 온 아카데미아나 그만큼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동물원까지 갖추고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류궤이온과 같은 학원이 있었고 그와 함께 스토아나 에피쿠로스 등의 학파도 그에 비견되는 설비나 서적을 소유하고 있었다.

기독교시대에는 오리케네스가 활약했던 알렉산드리아나 카롤링 왕조 이후 각지에서 번영했던 스콜라(schola)등 이러한 기관들은 실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또한 적어도 헬레니즘 시대 이후의 아카데미아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studium generale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반드시 그리스나 그 속령의 자제들만을 학생으로 받아들인 것만이 아니라, 키케로와 같은 로마인도 그 곳에서 공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곳에서는 진리탐구의 자유를 추구하는 교사와 학생간의 정신적, 법률적 단결체로서의 universitas는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거장의 시대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이러한 곳에서 주로 수행된 것은 진리의 탐구보다는 주로 구체적인 작업기능의 습득이었다.

단적으로 스콜라의 경우, 궁정의 유능한 관리나 교구의 유능한 사제, 수도원의 후계자를 양성한다는 실제적 목적을 우위에 두고 있어서 진리를 자유롭게 탐구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학교 가운데서 뒤의 대학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III. 중세대학의 성립과 발전

1. 최초의 대학들

최초의 대학은 대개 12세기에 설립되었다고 본다. 이탈리아의 살레르노대학 (1080, 의학)과 볼로냐대학 (Bologna, 1186-35, 법학), 프랑스의 파리대학 (Paris, 1150-70 신학) 그리고 영국의 옥스퍼드대학(Oxford, 1167-90), 케임브리지대학(1209)등이 그것이다.

살레르노 대학의 설립시기가 먼저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스투디움이지 제네날레였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볼로냐 대학이 세계 최초로 간주되기도 한다. 영국에서 옥스퍼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은 오랫동안 귀족계급을 중심으로 인격교육을 존중하는 학풍을 가짐으로써 신사도의 함양과 지도자의 양성 등의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그 역사와 전통이 전해져 오고 있다.

2.대학의 성립 과정

(1)교회 권력과의 대결

대학인들의 신분은 이전까지의 전통으로 인해 성직자(Clerus)로 남아 있었다. 해당 지역의 주교는 그들이 자신의 수하에 있다고 주장했다. 주교는 학교들의 우두머리로서 오래 전부터 그 방면의 권력을 12세기 당시에는 대학감독(chancilier)이라 불리우던 자신의 하급자에게 위임해왔으며, 그는 이러한 독점 기능을 포기하는데 반발했다.

또한 강력한 교육 기관을 담당하는 수도원들도 대학 조합들의 다른 적수가 되었다. 끝으로 주교가 교양이란 신앙의 문제이라며 그에 대한 통제권을 견지하기를 요구한다. 파리의 경우 대학감독은 1213년에 가르칠 허가(licentia docendi)를 부여할 권리를 잃으며, 1301년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학교들의 공식적 우두머리가 아니게 되었다. 1229-1231년간의 강의정지(cessatio)와 해산(dispersio)이라는 비상수단을 사용한 대파업으로 대학은 주교의 사법권으로부터 면제되었다.

옥스퍼드에서는 대학으로부터 120마일 떨어진 링컨의 주교가 대학 감독의 중재를 통해 공식적으로 대학을 주재해왔으나, 그는 대학에 곧 흡수되어 대학에 의해 선출되게 되었기 때문에 주교의 직원이라기 보다는 대학의 직원이 되었다.

(2)세속 권력과의 대결

13세기에 중앙집권적 군주제가 발전하면서부터 군주들은 차츰 자신의 백성에게 행사하기 시작한 권위를 도시의 대학인들에게도 행사하려 하였다. 그들의 왕국에 부와 위세를 가져다주고, 그들의 관료 양성소가 되어 주는 대학조합들을 수중에 넣으려 한 것이다.

파리대학은 1229년 시작한 대파업 이후로 1231년 성왕 루이와 카스티아의 블랑슈로부터 1200년 필리프 2세가 인정했던 특권들을 재인정받고 확대해 나갔다. 옥스퍼드에서는 존이 파문 당하고 권력이 약해졌기 때문에 1214년 최초의 자유를 얻었고, 그 이후의 칼등들도 헨리 3세의 승복으로 마무리되었다.

한편 Commun 코뮌의 권력에 맞선 싸움들도 있었다. 코뮌의 부르주아들은 대학인들이 자신들의 사법권에서 벗어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일부 학생들의 소란과 약탈과 범죄에 불안해하며, 교사들과 학생들의 집세에 세금을 물리고 물가 상한을 정하고 상업적 거래에서 정의를 존중케 함으로서 그들의 경제적 권력을 제한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파리에서는 1229년 학생과 부르주아간의 다툼에 왕의 경찰이 난폭하게 개입하였으며, 옥스퍼드에서는 1209년에 일어난 한 여인의 살해사건에 동요한 부르주아들이 두 명의 학생을 임의로 교수형에 처한 뒤, 1214년부터 대학의 독립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볼로냐에서는 1158년 프리드리히가 교사들과 학생들에게 특권을 인정한 바 있지만, 황제의 종주권은 직접 미치지 않으며1278년까지는 사실상 코뮌이 독점적으로 도시를 다스렸기 때문에 부르주아와의 갈등이 한층 심했다. 하지만 1321년 마지막 싸움을 계기로 대학들은 코뮌의 간섭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싸움들에서 대학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확고한 의지와 단결력을 바탕으로 강의 중단이라는 소극적 수단과 집단 이주와 같은 물리적 수단의 우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공권력과 교회 권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경제적 고객이자 관리들의 유일한 양성소이며 위세의 원천인 대학인들의 존재에서 이득을 많이 얻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방어수단이 더욱 효과가 있었다고 하겠다.

또한 대학인들은 그들을 교회 사법권 하에 두고자 한 교황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시세의 역류를 감소해가며 특권의 인정 등 막강한 협력을 받았다. 파리에서는 1194년 켈레스티누스 3세 이후 1231년 그레고리우스 9세의 유명한 칙서로 인해 독립을 쟁취했고, 옥스퍼드에서는 인노켄티우스 3세의 도움 아래, 볼로냐에서는 호노리우스 3세 이후 각각 국왕과 코뮌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어냈다.

이처럼 대학들은 그들만의 무기를 잘 활용하고 기존 세력들간의 경쟁 상태를 이용함으로서 자신들의 특권을 하나씩 정립해 나갈 수 있었다. 14세기말까지 거둔 Oxford의 특권을 한 예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면제의 특권(공공 노역, 군사 의무, 세속 재판권 등) ② 경제적 수혜(조세 감면, 주택.식료비경감) ③ 학문의 자유 (강의 중단의 자유, 연구.발표의 자유) ④ 대학의 자치권 (교회 재판의대행, 학위수여권, 학원 불가침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방대한 특권을 생각할 때 중세 대학은 한때 '국가 속의 국가'란 말을 실감케 한다. 그러나 교황권의 개입은 때로 더 폭군적인 지역세력들로부터 독립을 유도하고 그리스도 세계 전역으로 영향을 미치는 광범위한 권력에 대학을 예속시키기도 했지만 그로 인해 서양 지식인들은 얼마간 교황의 일꾼으로 남아있어야만 했다.

3. 이후의 발전

(1) 교과과정과 시험제도

13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많은 대학이 설립되었고 이들은 18세기말까지 교회나 국가에서 일하도록 젊은이들을 교육시키는 일을 위주로 했다. 교육과정은 일정하게 짜여져 있었다. 일반적으로 학생들은 문법·논리학·수사학을 먼저 공부했다. 문법은 주로 라틴 문법이었고, 논리학은 삼단논법에 관한 것이었으며, 수사학은 전통적 주제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나서 주로 법학·의학·신학 중에서 전공과목을 선택했다. 대학들은 응용이 아니라 원리적 연구만을 수행했으므로 신학, 철학(인문학과 이학을 포함), 법학,의학의 4 학부만 갖추고 있는 것이 원형이었다. 최종 시험과 학위 취득에도 나름대로의 규정이 있었다. 볼로냐의 경우에는 두 단계의 시험과 학위 인증 과정을 거쳐야 했다. 먼저 고유한 의미에서의 시험인 개별 시험(examen privatum)이 있었는데 후보생은 박사들로 구성된 심의회 앞에서 한 가지 주제에 대해 발표하고 그들의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합격여부는 심의회 구성원들의 투표로 결정됐다. 그러나 만일 합격한다 해도 공개 시험(Conventus)을 거쳐야 했는데 실제 교사로서 가르칠 수 있었다. 이번에는 학생들 앞에서 자신의 논문을 읽으며 공격해오는 학생들에 맞서 자신의 논지를 변호하고, 그럼으로서 대학 토론에서 교사의 역할을 처음으로 수행하기 시작했다.

후자는 일종의 학위 수여식에 가까웠다고 한다. 파리에서는 結審(determinat)이라 불리는 첫 번 째 시험 전에 두 차례의 예비시험이 더 있었다. 이러한 최종시험들은 무척 엄했으며 대부분의 학생들이 낙제하였고 한다.

(2) 대학의 분위기

중세대학의 학생은 일단 승직에 속하고 성직자 같이 삭발하였으나 그 언동은 반드시 경건한 것만은 아니었다. 학생신분을 얻기도 쉬웠고, 범죄인이 학생신분을 가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특히 세금·군역 및 시민재판을 면제받았던 초기 대학생들은 생활이 자유분방했다. 지나친 음주, 고의적인 상해, 도시 사람들과의 말다툼 등으로 유명해질 정도였다. 이렇게 난폭한 학생들을 규제하기 위해 기숙사가 지어졌으며 학생들은 엄격한 규율 밑에서 대학 안에서만 지내야 했다.

볼로냐의 경우 처음에 조합을 결성한 학생들은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다른 도시로 가겠다는 위렵을 하면서 먼저 방세 인하를 요구했다. 교회나 공공 건물을 이동하연서 강의가 행해진 당시 상항에서 그것의 위력은 대단했기 때문에 결국 방세는 인하되었다.

학생들은 다음으로 교수들에게 마음대로 휴강하지 말고, 강의 시간을 정확히 지키고 그리고 폭넓은 강의를 할 것 등을 요구했다. 그와 같은 요구가 거부될 경우 학생들은 수업이나 등교를 거부했는데 당시 학교는 대체로 수업료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그것의 힘은 대단했다.

마침내 대학의 운영까지 학생이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1252년에 교황이 승인한 학생의 대학 운영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모든 학생들이 모여야 되는 학생 총회는 너무 규모가 커서 학생 대표의 임기나 학칙을 시기 적절하게 조절. 결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볼로냐의 운영권은 14세기에 교수들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교황으로부터 인가 받은 대학의 특권들은 남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1499년에 금지되기에 이르렀고 이후 대학의 자치권은 기본적으로는 학부인사의 자치와 학위수여의 자치 정도로 남았다.

(3) 도구로서의 책

대학에서의 책은 고.중세의 책과는 전혀 다른 물건이다 교사 및 학생들은 교과과정에 지정된 책을 읽어야 했을 뿐 아니라 학생들은 교수들의 강의도 필기해야 했다. 또한 시험 때 참고하기 위해 여러 部數가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 筆寫자들이 생겨났고 결과적으로 책의 소비가 늘었다.

대학인들이 책을 널리 사용함에 따라 일련의 결과들이 생겨났다. 우선 양피지 제조기술이 발달하여 옛날보다 더 얇고 더 부드럽고 덜 누런 종이들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책의 형태도 바뀌었다. 전에는 거의 오늘날의 2절판과 같은 형태로 수도원들에서 쓰여져 그곳에 보관되기에나 적합한 크기였는데 자주 펼쳐지고 자주 옮겨지는 물건으로 되면서 더 작고 다루기 쉬운 형태로 변화했다.

빨리 쓸 수 있는 흘림체로 글쓰기의 모습도 변화함으로서 개인 및 집단의 삶에 그것이 필수불가결해진 문명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그 이외에도 책의 장식은 줄었으며 필사자들이 부유한 고객으로부터 좀더 돈을 벌어들이기 위한 수단으로서 여백에 넣는 장식문자들과 삽화를 발전시켰다.

이와 같이 지적 산업의 발전은 쉽게 다룰 수 있는 소책자의 시대를 가져왔고 이로 인해 문자문화 및 그 전파의 속도가 빨라졌다. 책은 더 이상 사치품이 아니라 도구가 되었고 산업적 산물이자 상업적 대상이 되었다. 대학의 그늘에서 필사자들과 서적상들이 그러한 것을 다루는 새로운 일꾼들로 등장하였다. 어찌되었건 13세기 이후 중세문화의 발전은 대학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하겠다.

IV. 현재까지의 추이

대학의 구조면에서의 중요한 발전은 단과대학의 출현이다. 소르본 대학, 머튼대학, 멀리올대학 등이 가장 오래되었다. 대부분의 대학에서 필수 교과과정은 점차 자유선택제로 바뀌었다. 그리고 지식의 양적 팽창과 복잡해진 사회의 요구로 교과과정이 많이 증대되었고 바뀌었다.

1960년대에는 학생들이 교육권 외에 정치권도 가진 성인으로 대해 달라고 요구하면서 대학운영에도 참여하겠다는 주장을 해 거의 모든 대학들이 혼란에 빠졌다. 대학 안팎에서 민족주의·제국주의·식민주의 및 남녀불평등에 대한 시위가 일어났다. 그들은 대학이 사회정의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각 대학에서는 교육과정을 자유롭게 하고 교수행정 위원회에 많은 학생들을 참가시켰으며 학생들 스스로가 고안해낸 실험연구를 실행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다.

그 결과 사회 및 전문학과에 봉사과정과 현장실습을 포함시켜 지역사회의 요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키고 학생들 자신이 선택한 전문직업에 자신의 각오를 테스트해 볼 수 있게 했다. 대학원생과 학부생을 위한 기관으로서 최초의 근대 대학교는 17세기말 독일의 Halle에 설립되었다(1694).

18-19세기 민족국가의 출현은 대학 발전에 새로운 양상을 띠게 하였다. 그 후 런던대학(1836)을 비롯하여 새로운 대학이 설립됨으로써 대학은 평민화되었고, 교육의 내용과 방법에서도 새로운 변혁이 일어났다. 현대에 와서 대학은 대개 문리과대학·대학원·전문대학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러 학문 분야에서 학위를 수여할 수 있는 권위를 갖고 있는 고등교육기관을 의미한다.

<참고자료>

· 서양사의 기초지식 (김 태승)

· 중세의 지식인들 (자크 르 고프)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 야후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