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원정 (농촌사회, 상업, 여성, 유대인을 중심으로)

2008. 10. 15. 15:25교회사자료/10.세계사

십자군 원정 (농촌사회, 상업, 여성, 유대인을 중심으로)

 

1. 머리말 2. 농촌사회와 십자군 3. 십자군원정과 상업 -상인과 십자군 전쟁 -상업과 화폐 4. 중세 여성 5. 유대인과 십자군 -유대인의 유입 -봉건제도내의 유대인 -로마교회와 유대인 -유대인과 세속당국 6. 맺음말 /참고문헌

 

머 리 말

중세 유럽에서 11-13세기는 내적인 안정과 외적인 팽창, 즉 정치 ·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변화와 발전이 일어나는 시기이다. 이 시기를 '유럽의 팽창' 혹은 '12세기의 개화'라는 표현으로 많은 중세 관련 서적들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프리드리히 헤르는 그의 저서 『중세의 세계』(제5장 12세기의 개화)에서 '12세기는 서유럽 전역에서 사람들의 마음과 지성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새로운 다채로움, 세계의 방대함, 세계의 위험, 세계의 아름다움에 눈뜨고 있었다'라는 말로써 12세기를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기에 십자군 (전쟁·원정 등 여러 가지 용어가 사용되고 있지만 그 의미는 논외로 하고, 『서양 중세사』의 표현에 따라 십자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하겠다)이 미친 영향 혹은 팽창과 개화의 시기가 십자군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라는 커다란 물음을 제기하고, 이제까지 이어져 오던 '배경·원인·경과·결과' 식의 시각을 개론적 시각을 조금 탈피해서 농촌사회, 상업과 상인, 여성, 유대인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고 이들 용어들과 십자군 원정의 관련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농촌 사회와 십자군

농업 생산력과 농촌사회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본 바가 있다. 11-13세기 농업 생산력의 증가와 장원 구조의 변화가 십자군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아니면 십자군원정이 농촌사회의 변화에 미친 영향을 없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여러 책들을 살펴보았지만 그 속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대답은 '농업혁명'으로 까지 불리는 이 시기의 농업 생산력 증가와 인구의 증가(어떤 것이 먼저 인지는 알 수 없지만)가 내적 팽창과 안정을 제공했고, 이를 바탕으로 외적 팽창인 십자군 원정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정도였다.

그렇다면 이 시기 농민들의 십자군 참여와 특히 빈농들의 참여는 어떠한 계기로 이루어지게 되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대부분의 기사들이 그러했듯이 표면적으로는 종교적 열정이었을 것이고 그 이면을 살펴보면 땅을 찾아서 혹은 십자군에 참전한 농노들에게 자유를 보장한다는 교황의 약속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다음에도 보다 많은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자위인지, 아니면 한계인지 모르겠지만 자료를 찾는데 실패함으로써 단편적이고 추상적으로, 또한 책에 있는 한 줄을 글을 바탕으로 유추하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이다.

십자군 원정과 상업

상업의 부활

상업의 부활에 대해서는 다음 단원에서 진지하게 다루어지겠지만 여기서는 십자군 원정과 상업 즉 상인과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기 이전에 잠시 상업의 부활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11세기 이전의 경제는 근본적으로 장원을 중심으로 한 자급 자족적 농촌경제체제였고 상업은 전반적으로 저조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중세의 상업이 침체의 늪을 벗어나 농촌적인 중세의 경제와 사회에 환기와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은 인구와 생산이 획기적으로 증가하는 11세기부터였다. '상업의 부활'이라고도 불리는 11세기이후의 상업발전은 그 이전시대와 비교할 때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11세기 이후 원격지 상업은 농촌경제의 성장에 힘입은 서부 유럽 경제의 발전과 귀족계급의 사치품에 대한 수요 증대 그리고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을 배경으로 하여 지중해권과 북유럽권에서 크게 발달했다. 지중해 지역의 원격지 상업은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이 주도했다. 그 중에서도 베네치아와 피사가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일찍이 베네치아는 고대부터 발달된 무역과 도시의 활기가 유지되고 있던 콘스탄티노플에 식량을 조달하고 이슬람 지배하의 시리아와 아프리카에 노예 ·철 ·목재 등을 수출하여, 동부 지중해의 교역 중심지적 역할을 담당했다. 베네치아 인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11세기에는 아드리아 해의 해적을 소탕했고, 아드리아 해와 이에 접한 지중해를 장악했으며, 비잔틴 제국 내 여러 곳에 사법적 특권이 부여된 식민지를 건설하여 아시아와의 수송을 사실상 독점했다.

피사 인들은 11세기에 티레니아 해와 시칠리아 섬 주변 해역에서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었다. 1096년에 시작된 십자군 원정에서 제노바, 피사, 베네치아 등의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은 군대와 군수품 수송을 독점했고, 레반트와 예루살렘 지역에 상업거점을 확보하여 교역했다.

그리하여 11세기 이후 전 지중해로부터 이슬람과 비잔틴제국의 세력이 물러나고 서부 유럽 상인들이 지중해에서 동방과 유럽 사이의 무역을 장악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십자군 원정이 상업에 미친 영향일 것이다.

상인과 십자군 전쟁

10세기에 봉건제가 정비되고 12세기에 이르러 농업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서유럽의 봉건 사회는 안정을 구가하고 힘을 축적하게 된다 서유럽은 이를 기반으로 11세기말부터 대외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의 이러한 대외 팽창은 1096년부터 시작된 십자군 원정에서 절정에 달했다.

십자군 전쟁이전에도 성지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은 매우 컸다. 그리고 그러한 관심은 대부분 종교적 열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유럽인들은 성지를 회복하고자 열망했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지지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고, 여러 번에 걸쳐 진행되는 동안 전쟁의 추진력은 처음과는 다른 곳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특정 집단이 차지하게 될 이익을 기반으로 했다.

교회와 귀족, 기사뿐만 아니라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 이탈리아 상업도시들의 이익 또한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도시들은 지중해를 이용한 동방교역로의 가장 이상적인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서유럽이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분리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하여 소아시아의 여러 지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 지역에는 이슬람교도들이 살고 있었지만 이탈리아 상인들이 동방의 향료, 모포, 약제, 카페트 등을 서유럽으로 반입하며 중계무역의 이익을 누리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오히려 콘스탄티노플이 지중해에서 가장 큰 도시로 성장하면서 이탈리아 상인들의 이익도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멈추려 하지 않는 데에 있었다. 이탈리아 상인들은 더 큰 이익을 원했다.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려면 이슬람으로부터 지중해의 해상권을 획득하여 동로마 상업권을 지배하는 동시에 지중해 동부연안의 무역권을 획득해야만 했다.

십자군 전쟁은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좋은 기회였다. 사실 3차나 4차의 십자군 전쟁은 정확히 이탈리아 도시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타락한 싸움이었다. 이노센트 3세의 제창으로 실현된 제4차 십자군 전쟁(I202-1204)은 베네치아의 상업적 경쟁자인 기독교도시 자라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라틴 제국을 건설(1204-1261)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십자군 전쟁은 I291년에 이슬람 세력이 팔레스타인 지역의 해안 도시 아크레를 탈환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던 이 전쟁은 이슬람교도가 예루살렘을 되차지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었다 하지만 교역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 의미가 매우 달랐다.

전쟁에서 돌아오는 십자군들이 가지고 돌아왔던 새로운 동방의 산물은 이제까지 장원에서 생산되는 것에 만족하면서 지내고 있던 봉건영주들에게 새로운 욕망을 불러 일으켰다. 더구나 10세기 이후 인구가 급증하고 이 증가된 인구는 생환 필수품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켰다. 새로운 물건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은 그러한 상품에 대한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냈으며, 상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이제 동서 교역의 중요한 통로가 되어 왔던 지중해 연안의 해상로가 다시금 활기를 띠었다.

또 십자군 전쟁은 유럽인들에게 세계에 대한 보다 넓은 인식의 기회를 제공했다. 십자군 전쟁은 유럽 대륙 전역에 걸쳐서 성직자, 기사들과 농노들 그리고 성장해가던 상이 계층을 확산시킴으로써 서유럽을 기나긴 봉건적인 잠으로부터 깨어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교역로 확대는 폐쇄된 농업경제에 강한 충격을 가했고, 높은 수준의 이슬람 문화는 도그마에 찌든 로마 카톨릭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상업과 화폐

이시기 사람들은 어떠한 화폐를 사용했으며, 각 나라마다 화폐의 가치가 서로 다른데 어떻게 무역이 가능했는가? 라는 질문이 제기 되었다. 수업을 할 당시에는 그에 대한 조사가 미흡하여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하였다. 수업을 마친 후 책을 찾아보았다.

상업의 불활 이면에는 화폐제도에 있어서 비상한 발전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화폐주조 활동이 향상되었고, 소액은화인 데나르(denar)가 원거리 교역의 화폐로 사용된 후 보다 가치 있는 화폐가 창출되었으며 마침내는 금화의 주조와 신규발행이 이루어졌다.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경제활동의 진보성이 환전업자들의 활동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또한 상파뉴 견본시에서 이루어지는 교역은 새로운 보조수단으로서 환거래를 탄생시켰다. 비단이나 향료를 구입하기 위하여 거주하는 도시에서 각기 제노바, 피렌체, 밀라노의 통화로 화폐를 창출한 이탈리아의 상인들은 프로뱅이나 트르와예에서 그들의 물건을 구매하고 난 후에 그곳의 통화로 그들이 지불을 위하여 사용하길 원했던 대차계정을 이용하였다. 그것은 지역만큼 다양한 통화의 다양성으로 특징지어졌던 어음증서로 나타났다.

중세 여성

이제까지 한번도 언급이 되지 않았던 중세 여성 특히 십자군 원정과 여성의 지위변화에 대해 관심을 가져 보고자 한다. 어떻게 보면 이 주제는 일종의 모험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에 대한 참고자료를 찾기가 힘이 들고 특히 십자군 원정과 관련 있는 부분을 찾는 것은 더더욱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름대로 찾아내는 재미 또한 있을 것이다.

중세 여성의 지위는 규정하기 어렵고 계급에 따라 다르고 장소와 시간에 따라 상당히 달랐다. '여성의 소리가 공중 가운데서 들리지 말아야 한다' 성 바울의 이 말은 여성에게 교회에서 침묵을 지키라고 나무랐다.

여성이 가정 내에서 열등한 존재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중세에 여성은 이브와 같이 악의 씨앗을 항상 지니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악마적 유혹의 모든 형태 중에서 여자는 악의 가장 사악한 화신이라는 원죄가 여성에게 항상 붙어 다니는 꼬리표가 되었다. 성 바울은 '남편은 아내의 주인이다. '라고 말했는데, 기독교는 이 말에 따라서 그것을 믿고 가르쳤다.

따라서 기독교는 여성의 물질적 ·도덕적 지위를 향상시키는데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I2~13세기에 유행했던 동정녀 숭배가 기독교 정신에서 하나의 전환점, 즉 죄지은 여성을 새로운 이브인 마리아가 구원해 준다는 것을 강조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하지만 기독교 사회가 여성의 지위상승을 동의했을 때 그것은 사회 속에서 여성의 지위가 이미 향상되었던 시기의 초기가 아니라 말기였다.

중세의 이단운동에서 여성들이 담당했던 역할은 그들에게 주어졌던 지위에 대한 불만족의 표현이었다. 중세 사회에서 여성은 이러한 모멸적인 대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차원에서는 남성보다는 아니지만, 무시 못 할 역할을 담당했다. 농민층의 여성은 남자와 거의 비슷한 노동을 했으며, 마찬가지로 상류 계급의 여성들 역시 경제적으로 중요한 활동을 하였다.

그녀들은 규방의 주인이었으며, 그곳에서 사치품을 만드는 노동을 통해 영주와 그의 종사들의 옷감의 대부분을 제공했다. 여기서 우리는 여성을 서양에 홀로 남겨두었던 십자군 원정이 그들의 힘과 권리의 향상을 초래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해볼 수 있다.

실제로 I2세기와 13세기에 일부 왕실 여성들은 남편이나 아들이 사망하거나 통치할 수 없었던 여러 경우에 처하면 국가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을 행사했다. 예를 들면 헨리 2세의 아내 엘레노어는 아들인 리처드 1세가 1190년에서 1194년까지 십자군에 참전했을 때, 이미 70세를 넘긴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를 통치했다. 프랑스의 블랑쉬는 아들인 루이 9세가 십자군에 참전한 동안에 프랑스를 매우 훌륭하게 다스렸다.

위와 같은 여성들이 있는가 하면, 정조대의 개념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많은 여성들은 남편들이 십자군에 나가 있는 동안 오히려 더 억압된 생황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 보면 정조대가 나오게 된 것은 이미 많은 귀족 여성들이 남편이 십자군에 나가있는 동안에 바람은 피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도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귀족 여성들이 장인으로부터 받은 봉토와 관련된 경제적 의미도 크다고 할 수 있다.

귀족 여성들과는 달리 일반적인 여성들, 즉 경제력을 가지지 못했던 많은 여성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었을까? 그들의 지위는 향상되었을까? 아마도 경제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현대의 많은 여성들도 그러하지만 중세 여성들에게서도 가장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아마도 매춘일 것이다.

따라서 중세의 많은 여성들은 이 시기에 오히려 경제적 측면에서는 그 위치가 하락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법률은 남성의 법률이었고, 남성은 가정과 사화와 국가에서 유일한 권위자였다. 종종 영웅의 칭호를 받는 여성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봉건제도도 기독교도 여성의 지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히려 여성을 가정 안으로 가두었으며, 사회의 대부분의 영역에서 여성들을 몰아냈다. 오히려 다른 신앙집단과 이단 집단은 여성에게 훨씬 많은 자유와 넓은 활동무대를 제공했다. 교회는 언제나 이단이 아닌가 의심하면서, 영적으로 불안한 여성들을 계속 불신했다. 많은 여성들이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철저히 남성적인 사회에서 여성들은 언제나 표류하면서, 남성적인 신학과 남성을 위하여 남성이 만든 도덕에 지배되는 남성사회의 닫힌 벽을 만나야만 했다

유대인과 십자군

십자군 원정 시기에 들어서면 눈에 띄는 중요한 부분이 유대인 박해에 관한 부분이다. 유대인은 서유럽 사회에 어떻게 유입되었으며, 봉건제도 안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었고, 기독교 세계에서 비기독교도인 그들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며, 어떤 이유로 십자군 원정이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로 이어지게 되었는가? 등의 의문이 생기게 된다.

유대인의 유입

유대인의 유입을 국가별로 살펴보면 이탈리아에서는 데오도릭 대제(454-5B6)는 로마, 나폴리, 베니스, 밀라노와 새 수도인 라벤나에 유대인을 불러 정착하도록 했다. 이 유대인은 상인, 은행가, 법률가, 농부, 보석상, 예술가 등이었다. 유대인의 이주는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같은 경로를 밟았다.

샤를마뉴 대제는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을 그의 제국으로 불러 들였다. 특히 그는 유대인들이 도시에 정착하여 산업을 일으키고 상업지역을 확대시키기를 원했고 그래서 유대인에게 자치 윤허장을 주었다. 이 같은 특별배려는 간단한 이유에서였다. 봉건제도는 3가지 계층-싸우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일하는 사람-만을 제공했고 상인계층은 여기에 없었다. 이 계층은 유대인들에게 개방된 영역이었다.

봉건제도내의 유대인

유대인은 중세 기독교와 봉건제의 어느 부분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들이었으며 왕과 교황은 이러한 이교도인 유대인들을 보호하는 정책까지 펴게 된다. 그 예로 피핀과 샤를마뉴는 유대인에게 토지소유를 허락하였고, 기독교도 노동자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이들은 유대인을 개척민과 군인으로 활용하고, 유대인들의 상업활동을 장려했다. 프랑스의 경건왕 루이도 유대인들의 상업활동을 장려하고, 새로운 유대인 회당 건립을 허용했다. 아울러 유대 상인들의 보호를 위한 특허장을 발행하고, 유대 안식일을 휴무일로 정했다.

반면에 538년 오를레앙 공의회에서는 유대인의 포교활동을 제한하는 법이 선포되었다. 이 공의회는 기독교도와 유대인의 통혼을 비난하고, 기독교도가 유대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금했으며, 기독교도에게 유대의 안식일을 거행하지 말 것과 일요일에 일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유대인과 기독교도가 성주간에 함께 어울리는 것을 금했다. 이후 일련의 공의회에서 이러한 규제들이 거듭 확인된 것은 유대인이 기독교도를 유대교로 개종시킬지 모른다는 기독교 성직자들의 우려를 말해준다.

9세기말 프랑크 왕국에서 열린 공의회에서도 이와 유사한 목적을 지닌 법령들이 제정되었는데, 이 법령들에는 유대인 회당 신축 금지, 기독교도를 관장하는 고위직에서의 유대인 축출, 유대인의 기독교도 노예 소유 금지, 유대교 포교활동 금지 등이 포함되어 있다 유대인과 함께 식사하거나 지나치게 가깝게 지내는 기독교도에게는 처벌이 내려졌고, 유대인과의 통혼이 금지되었다. 실제로 유대인과의 통혼은 간통으로 간주되었다.

서고트족 치하의 스페인에서는 유대인을 척결하기 위한 매우 잔인한 법들이 제정되었는데 '하느님의 신의를 저버린 사람들에 대한 기도교도의 증오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유럽 대부분의 게르만 왕국에서 유대인은 상인이며, 의사며 외교관이며 군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많은 게르만 왕들은 유대인을 자신들의 왕국을 구성하는 다양한 종족 중에서 자신들의 법률을 받는 한 종족으로 대우했던 것 같다. 이와 같이 유대인은 중세 초부터 자신들의 법의 지배하에 살면서 점차 번성하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유대인에 대한 태도의 변화는 11세기에 일어났다. 유대인의 사주를 받아 사라센들이 성묘를 파헤치고 예루살렘 대주교를 참수했다는 소문이 1010년 무렵 서유럽에 떠돌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서유럽 여러 지역에서 유대인이 대량 학살되었다. 반유대 감정이 반이슬람 감정이 형성되는 것과 같은 시기에 형성되었다.

천년이 지나감에 따라서, 기독교 세계는 팽창국면에 돌입했고, 새로운 종교적 열정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내적으로는 개혁과 외적으로는 십자군 성전을 통해 세계를 기독친화 하려는 노력이 이루어 졌다.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B세가 십자군 성전을 선포한 후, 종교적 발작 분위기가 유랑 설교가들에 의해 조장되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유대인 대량학살이 자행되었다.

'1차 십자군 이래로 반유대적 박해는 위험스런 전염병과 같은 전파력을 발휘하였던 바, 이것이 극도의 정서적 긴장기에는 민족적 경계를 초월한 대중적 정신병으로 변질되었다. '이처럼 중세 민중들의 반유대적 폭력의 파도가 밀어닥치고 있을 때 교회와 세속당국의 반응은 대개의 경우 유대인을 돕는 것이었다. Speyer 대주교는 자신의 성채를 유대인의 피신처로 제공하고 유대인을 공격한 혐의가 있는 자를 처벌하였다.시민들도 주교를 지지했는데, 그 이유는 유대인이 정착하여 시가 부유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관계당국에 유대인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강제로 세례 받은 자신들의 신앙으로 복귀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잉글랜드의 월리엄 2세도 같은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십자군 설교를 할 때마다 유대인 대량학살이 재현되었다 일부 수도사들은 십자군을 설파하면서 이슬람교도에게로 진군하기에 앞서 예수그리스도를 살해한 자들에게 복수할 것을 청중에게 촉구했다. 이처럼 대대적인 십자군 운동기는 중세의 나머지 시기의 모형이 되었다. 기독교적 열정에는 반유대적 폭력이 수반되었다.

이러한 사태로 인하여 유대인에게는 장기적인 의미를 지닌 세 가지 결과가 초래되었다. 유대인은 이동의 제약을 받고, 보호를 구실로 유대인 강제 거주구역에 거주해야 하였으며, 상업활동에서 점차 대금업으로 직업을 전환하여 자본을 대금업에 투입하였다.

로마 교회와 유대인

유대인에 로마 교회의 입장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에서 유대인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이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유대인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완강하게 거부했으므로 제국 법전의 정식 조치에 따라 그들은 제재를 받았다. 오랫동안 유대인에 대한 교황의 입장은, 한편으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지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인의 자유에 대해 법률적으로 제재를 하는 것이었다.

유대인은 포교활동, 비유대인과의 통혼, 기독교도 노예소유, 관직보유, 새로운 교회당 건축 등을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의 종교로 인하여 박해받지도 않았고, 그들의 회당이 파괴되거나 약탈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노켄티우스 3세에 이르러 유대인의 위상이 크게 약화되었다. 1215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유대인이 기독교와 구별하여 격리될 수 있도록 유대인 차별 배지를 도입하도록 한 것도 이노켄티우스였다. 그는 교황청과 유대인간의 관계에 계약적 요소를 도입하였는데, 유대인이 계약을 위반할 때는 추방될 수도 있다는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유대인에 대한 교황청의 태도는 점차 유대교를 이단과 동일시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lI~12세기에 십자군 열기가 달아올라 성지를 '불신자'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이단을 근절하는 소명을 교회가 떠맡게 되었을 때, 유대인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불가피하였다. 광적인 십자군 병사들은 동방으로 진군하기 앞서 서유럽에서 '그리스도의 적들'을 제거하려 했다.

또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책임에 주목하였고, 점차 유대인과 이단자는 하나로 싸잡혔다. 중세 교황당국은 공식적으로는 늘 유대인 보호를 외쳐댔지만, 당국은 '구약의 담당자'라는 아우구스티누스적 개념에 순응하는 유대인만을 보호했으며, 그나마 보호라는 것도 점차 실현되지 않았다. 탁발 수도사들은 점점 더 고조되는 반유대적인 민중 여론에 편승했고, 이들의 민중 선동적 설교는 유대인에 대한 민중의 변화를 수반하였으며, 그리하여 유대인에 대한 폭력은 증가했다.

유대인과 세속당국

중세 중기에 유대인들이 주로 정착했던 곳은 스폐인, 프랑스, 라인란트였다. 그러나 11세기말에 시작된 잔인한 유대인 학살처럼 유대인이 공격을 받게 되자 I2세기에는 유대인이 기독교 통치자에 '소속한다'는 새로운 개념이 발전하였다. 국왕과 백작 그리고 주교들이 유대인의 권리와 역할을 규정하고 이들에게 보호를 보장하는 특허장을 발부했다. 유대인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대가를 지불했으며, 세속당국의 조치를 지배한 주요한 동기 중의 하나는 유대인의 부를 얻어내려는 욕구였음이 분명하다.

잉글랜드에서 국왕은 모든 유대인을 '소유했다', 프랑스에서는 왕령지에 있는 유대인만을 '소유했다', 독일 황제는 제국 내에 거주하는 유대인에 대한 최종적 재판귄을 주장했지만, 황제는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타인에게 재판권을 양도하곤 했다. 그리하여 유대인은 다른 재산처럼 사고 팔고 저당잡히고 교환하고 할 수 있었다. 역설적인 것은 유대인이 이러한 처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대인들이 자치도시에서 자유 시민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비록 유대인은 유대인마을의 자치를 누렸지만, 시의 관직에 취임할 수 없었으며 유대인 특별세를 납부해야만 했다. 그들은 중세 사회의 조합적 구조 내에 있는 수많은 조합체와 유사했다. 그렇지만 법률적 지위는 그들에 대한 편견이 증가함에 따라서 모든 지방에서 점차 악화되었다.

중세 대부분 동안 유대인들과 그들의 부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세속당국이 유대인을 애초에는 교회 법정으로부터, 나중에는 종교 재판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강제 세례로부터 보호해주는 일을 신뢰감 있게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I5세기말에 이르면 유대인의 재정적 가차가 계속되는 학살이며 추방을 통해 크게 떨어졌다. 더욱이 풍문이며 중상 비방이며 풍자 등에 의해 쌓여진 반유대적 감정이 고조됨으로써 유대인을 정치적으로 보호하는 일은 위험 천만한 것이 되어 버렸다.

유대인은 중세의 여러 위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양을 찾아야만 했고, 그것은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우리가 이 시기를 유대인의 핍박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이는 열성적인 기독교도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막간극으로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이 중세사회에 끼친 영향은 여성들이 중세 사회에 미친 영향과 마찬가지로 간과하기 쉬운 부분임에는 틀림이 없다. 상업에서, 번역일에서, 문화적인 면에서 유대인은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흑인구타 및 흑인탄압이 국가의 공식적인 정책이 아니듯이 교회의 공식적인 정책은 아니었다.

맺음말

위의 주제들을 처음 선택했을 때 마치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찾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책을 찾고, 읽으면서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막막하기만 하던 화두들이 책을 읽으면서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오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는 사실 상당한 자신감이 있었지만 막상 수업에서 질문을 풀어나가는 과정 속에 아직 많은 점이 부족하고 간과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성의 지위에 대한 경제적 측면에서 결혼제도와 관련된 부분, 상업에서 화폐의 유통을 간과한 부분 등에서 간과한 것들이 있었고, 아직까지 이러한 수업에 익숙하지 않은 이제까지의 생활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쳐봤지만 모자라는 점들이 많았다. 하지만 수업을 마치고 그에 대한 자료들을 다시 한번 찾아보고 하는 과정에서 여러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여성과 유대인은 중세라는 시기에 소외 집단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들이 소외되었을까? 현대 소외 집단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우리 학과에서는 소외된 학생들이 없는가? 현대의 소외집단은 자본주의 경제와 관련에서 경제력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 학과에서의 소외집단은 경제적인 면보다는 오히려 교우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과연 소외집단일까?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자기의 할 일을 간과하고 있는 맡은 학생들이 바로 소외된 집단이라는 생각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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