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0. 15. 15:26ㆍ교회사자료/10.세계사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 (동유럽과 서유럽의 차이)
1. 들어가며 2. 본론 2.1. 15세기이전 서유럽의 사회경제적 변화 2.2. 15-17세기 유럽경제의 변화 2.3. 동유럽의 변화 3. 결론
1. 들어가며
유럽세계는 14-17세기에 걸쳐 대변혁을 경험하였다. 14-17세기의 변화가 없었다면 18세기말에서 19세기에 걸친 산업혁명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시기의 변혁을 간단히 요약하면 '봉건제에서 자본주의적 이행'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이행문제는 오랫동안 Brentano의 상업화론이 통념처럼 받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1946년 Mourice Dobb 'Study of the Development in Capitalism' 이란 저서에서 상업이 주요원천이 아니라 생산력의 문제가 이행의 주요한 원천이라고 주장한 뒤로 많은 학자들의 관심사가 되어 왔다. 또한 70년대 말에는 소위 'Brener Debate'라 불리우는 농업자본주의의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행이란 무엇인가? 한 생산양식이 다른 생산양식으로 교체되는 것이다. 이미 유럽세계는 한 차례 이행을 경험한 바 있다. 고대세계의 노예제가 붕괴하고 새롭게 등장한 것이 장원제도에 입각한 봉건제 생산양식이었던 것이다 .
그러나, 고대세계의 혼란을 수습차고 새로운 발전을 이룩 했던 봉건적 생산양식도 14-17세기에 걸쳐 서서히 붕괴하였으며, 새로운 생산양식 즉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 넘어갔다. 이 시기에 이르러 봉건적 생산양식은 그 생산성에서 한계를 드러내었고, 귀족과 농민간의 계급투쟁도 본격화된 시점이었다.
대체로 중세사회를 특징짓는 장원제도는 붕괴하고 고대세계의 도시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도시가 발달하였으며, 신항로의 발견이후 상업 또한 크게 발전하였다. 사회의 계급구조에 있어서도 기존의 '귀족-농민'이라는 두 계급 사이에 'bourgeosies(gentry)'라는 새로운 계급이 끼어들게 되었다. 영국의 경우 지주층는 변혁이전이나 이후에나 같은 지주계급이었으나, 이행이전에는 전통적인 귀족이었던 반면 이후에는 새로이 성장한 grntry로 될 정도로 이행의 영향은 커다란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지역마다 똑같지 않으며, 특히 서유럽과 동유럽의 차이는 주목할만하다. (물론 같은 서유럽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변화를 겪은 것은 아니다.) 서유럽 중세사회가 자본주의시대로 넘어가던 같은 시기에 동유럽에서는 오히려 농노제가 강화되어가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나. 프러시아의 경우 Junker에 의한 Gutherrschaft 경영의 형태를 띠게 된다. 이 Gutsherrschaft는 상업적 곡물농업의 성격을 띠지만, 그것은 자본주의의 자연스런 변화가 아닌 폭력과 강제에 의한 봉건시대의 농노제가 더 강화되어 성립된 것이었다.
이러한 동서유럽의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왜 서유럽에서 자본주의로 이행이 천천히 일어날 때에 동유럽에서 반동적인 개혁으로 농노제는 강화되었는가? 본 레포트에서 두 지역의 발전경로의 차이를 살괴보고자 한다.
3. 본론
2.1. 15세기이전 서유럽의 사회경제적 변화1)
장원의 구조는 농경지와 목초지로 크게 구분할 수 있으며, 농경지는 영주직영지와 농민보유지로 구분된다. 영주직영지는 농민보유지의 보유자의 부역노동으로 경작되고 있었다. 농민의 지위는 고대의 노예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우선 그들은 개인재산을 가질 수 있었다. 농기구와 가축을 개인적으로 소유하며 모든 생산조건의 소유자였으며, 영주직영지의 생산물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노동에 의한 생산물의 수취자였다.
장원은 실질적으로 소농경영체제를 이루고 있었으며, 농민들은 자신의 의지로 생산의욕을 고취하여 생산성을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8-9세기 봉건제 성립시기에는 이러한 점에도 불구하고 저생산성을 면치 못하고있었다. 가장 큰 원인은 노동력의 부족과 농업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성립초기에 삼포윤작제 등의 새로운 농법이 발명되었으나, 그것이 널리 퍼지지 못한 탓에 높은 생산성은 바랄 수 없었다. 전반적으로 부족한 노동력에 비해 광대한 토지, 부족한 노동력을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농업기술의 미발달은 저생산성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영주층은 이러한 저생산성을 경제외적인 방법으로 농민들을 속박하여 가혹한 수탈을 함으로써 보완하고자 하였다. 전반적인 봉건적 부과조나 십분의 일세 등은 영주와 농노간에 예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확인시켜 주는 수단이었다.
11세기 이후 중세유럽은 생산력 면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다. 부분적인 농업기술의 발전이 있었지만, 중요한 요인은 중세 초에 발명된 농기구와 농사기술의 보급, 급격한 인구증가, 그리고 경작지의 계속적인 확대에 기인한 것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 이르러 기존의 부역노동은 점차 납부하기 쉬운 현물지대와 화폐지대로 바뀌었는데, 귀족의 사치품에 대한 수요증가고 부역노동보다 품을 살 수 있는 돈을 만들 수 있는 현물지대나 화폐지대를 더 원하게 된 것이다.
또한 도시와 新개간지의 유혹도 귀족으로 하여금 부역노동을 경감시키지 않을 수 없게되었다. 점점 영주직영지는 사라져 갔으며, 농민의 보유지는 늘어 만 갔다.
고대세계의 몰락과 더불어 사라졌던 상업 역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중세 초기에는 상당히 침체되어 있었으나, 11세기 이후 다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기 시작했다. 봉건세가 안정되자 다시 상업이 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의 무역은 주로 원격지무역을 중심으로 북부 이탈리아, 한자동맹 등 도시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해상무역이 그 중심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상업은 전근대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첫째, 취급상품 다수가 장원농민들의 생산물지대나 부역노동의 수확물, 또는 수공업자길드의 제품이라 산업발전의 역동격이 아닌 봉건제 생산양식에 기생한다는 점,
둘째,사회적 분업과 시장이 미발달한 상태에서 상품을 부등가로 교환하여 이윤을 취하는 것,
셋째, 상권의 확대와 상업활동의 확대는 권력자와 정경유착으로 이룩되었다는 점이다.
2.2. 15-17세기의 유럽경제의 변화
11-13세기에 걸쳐 발전적인 모습을 보여주던 유럽세졔는 14-15세기에 심각한 위기국면을 맞이한다. 14세기에 들어 인구에 비해 토지부족은 다시 심각해졌으며, 도지의 생산성도 다시 낮아졌다. 그러나, 영주의 지출은 수입을 초과하는 재정위기 (이러한 재정위기는 사치품의 구입과 군수물자구입에 의해 가중되었다.)를 겪고 있던 시기였다.
이시기에 이르러 발전하던 모습을 보여주던 봉건적 생산양식의 생산력이 드디어 그 한계점을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위기는 단 한 차례의 흉작도 심각한 위기를 가져올 수 있었다. 실제로 14세기에 들어오면 농민봉기의 형식을 띤 계급투쟁이 활발해졌다.14세기에 발생한 흑사병은 이러한 위기를 더욱 심각한 국면을 만들고 있었다. 흑사병은 당시 유럽인구의 3/1을 감소시켰는데, 영국남부지방 같은 경우는 인구의 절반이 까라졌다. 2)
인구의 감소는 곧 노동력의 감소를 의미했다. 이것은 농업기술이 미발달한 채 노동력에 많은 의존을 하고 있던 당시 농업에는 치명적인 결과이다. 살아남은 농민들은 자신들의 보유지를 경작하기 바빠졌으며, 空閑地는 늘어갔다. 영주들은 자신들의 직열지를 더 이상 직접 경작할 수가 없게 되었다. 경작자를 찾기가 힘들어 진 것이다. 이에 따라 노동임금은 상승하였으며, 인구감소에 따라 식량수요 감소는 곡가의 하락을 초래하였다.
영주들은 이러한 노동력부족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서 강제로 임금을 흑사병 발생 이전으로 동길하고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이동을 금지하였다. 정부는 이것을 또한 법률로서 됫받침하였다. 이것은 농민과 수공업자의 커다란 반발을 불러왔으며, 이러한 반발은 농민봉기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프랑스의 자크리의 난 같은 경우 농민들만이 아니라 도시민들도 봉기에 가담하고 있었다. 이들 농민봉기는 비록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러나 이 때를 분수령으로 서유럽에서 농노세는 사라져갔다. 그러나 봉건제 붕괴이후 각국의 변화 양상은 약간씩 다르다.
영국의 경우, 영주들은 곡가하락, 지대하락, 임금상승, 농민들의 반발에 따른 노동력 확보불능 등으로 현금지대를 받고 직영지를 임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4세기말부터 시작된 이러한 경향은 I5세기에 이르러 거의 완성되었다. 영국의 영주들은 관습보유지를 주인이 없는 틈을 타 자신의 직영지에 보태어 차지농에게 임대하고 다시 차지농은 임금노동자를 고용하여 경작하는 형식으로 되었다. 영국에서는 이 시기에 농민사회 내에 급격한 사회분화가 일어나, 앞서 말한 차지농이 genrty와 Yoeman의 중간계급과 숱한 임금노동자가 생긴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도 초기붕괴과정엔 영국과 다를 바가 없어, 프랑스의 귀족들도 영국과 비슷한 농업경영합리화를 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귀족을 약화시키고 절대권력을 확립해 가던 절대왕권과 농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성공하지 못하였고 농민들은 국가권력에 힘입어 토지보유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농민의 토지보유권 확보에 도움을 주었던 절대권력은 오히려 농업발전에 저해요소로 작용하였다. 16세기이후 잦은 전쟁과 과중한 조세 등이 늘어나는 인구와 합께 농민을 오히려 피폐시켰던 것이다. 프랑스의 농업경영은 자본주의체제와는 거리가 있는 소농경영체제로 굳어지게 되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역사적 전재는 생산자가 생산수단에서 분리되고 분리된 생산자가 임금노동자로 전환하는 과정, 바로 '시초축적'이다. 생산자와 생산수단이 분리되는 과정은 앞서 자세히 언급하였으나, 거기에 한마디 덧붙인다면, '울타리치기운동'이다.
모직물공업이 번창하자, 수익 좋은 양모산업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토지에 울타리를 치는 것이다. 이때 결정적으로 농민들은 토지에서 강제로 분리되었으며, 토지를 떠나아 했던 것이다. 이로써 결국 농촌은 빈농과 중농, 부농(차지농)으로 급격한 분화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농업부문의 새로운 계급구조는 지주와 차지농의 공생관계를 그 특징으로 한다.
지주는 종래와 달리 차지농이 생산을 더 많이 하면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으므로 더욱 더 잘해주었으며, 차지농은 차지농대로 많은 수확을 거두면 거둘수록 자신에게 많은 이윤이 남으므로 더욱 사실상 이들 차지농에게 유리한 처지였던 것이다.
이밖에 프롤레타리아가 형성되는 또 다른 측면은 소생산자 내에서 경제적 분화이다. 특히 상품생산 및 사회적 분업이 발전하고 소생산자 상호간의 경쟁이 치열해 질수록 이 같은 분화는 더욱 촉진되었던 것이다.3)
이행기에 유럽에서 중요한 것은 농촌공업의 발전이다. 중세사회에서 수공업생산은 도시에서만 이루어졌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오면서 배타적으로 변한 장인들은 더 이상 장인의 수를 늘리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직인출신 장인들(small master)들은 좀 더 자유로운 농촌으로 향했고, 때마침 농촌의 자영농민층 중에서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있던 농촌부업으로서 수공업이 결합함으로써 농촌공업이 광범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초기에는 농촌공업은 가내공업으로 운영되었으나, 점차 '선대제(putting-out system)공업이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대체로 도시직물업자들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농촌수공업자 자신의 경영확대에서도 전개될 수 있었다. 농촌매뉴팩처였지만 그들은 임금노동자를 고용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대체로 농촌메뉴팩처는 일부 공정을 집중했지만 그 밖의 다른 공정에서는 주변의 가내수공업자들과 선대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농촌공업중에서 성장한 메뉴팩쳐 또한 작업장의 집중과 선대제적 분산의 두 경영방식을 채택한 셈이다. 중요할 것은 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선대제 방식이건 집중적인 작업장이건 다 같이 생산과정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한층 더 분명하게 창출했다는 것이다.
2.3. 동유럽의 변화
동유럽사의 특징 중에 서유럽과 대비되는 뚜렷한 점은 고대 로마나 그리스 같은 노예제가 없었다는 점이다. 서유럽처럼 Elbe강 이동지역에서는 게르만족의 전통과 라틴족의 전통이 융합한 적이 없었다. 15세기 이전까지도 Elbe강 동쪽지역에서는 서유럽 같은 봉건제는 성립되지 않았다. 로마적 전통을 이은 제도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동유럽 위기의 진정한 원인은 독일인들의 식민지로 유입이 급격하게 줄었다는 것이다. 독일은 12세기에서 14세기까지 약 2OO년 동안 동쪽으로 팽창하고 있었고 많은 독일농민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켰다. 서유럽 봉건제가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동유럽에서도 차츰 불길한 징조가 나타났다. 주요 원인은 우선 토지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토지가 항상 남아돌았기 때문에 그들은 이동이 습관화되어 다른 곳으로 얼마든지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인들의 동방유입이 줄어든 까닭은 흑사병 때문이었다. 이 흑사병의 영향을 동유럽이 받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14-15세기에 들어 프로이센 지역에만 11차례 엄습하였다. 서유럽에서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감소는 다른 측면에서 심각한 위기국면을 동유럽에 가지고 왔다. 식량수요의 감소로 곡가가 하락하자 주로 곡물을 서유립에 수출해오고 있던 동유럽에 막대한 타격을 입힌 것이다. 동유럽은 더 이상 남아도는 곡물을 수출할 수 없어졌고, 그에 따른 영주들의 피해도 막심했다. 또한 흑사병으로 인해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점차 농민들은 기사들에게 속박되기 시작하였다.
우선 주인이 없는 틈을 타 공휴지를 자신의 소유지로 바꾸고 농민을 예속화하였다. (그래도 인격적 자유는 유지되었다). 농민들은 처음에는 자기 땅과 자기처분의 자유를 가지고 곡물생산과 판매에 종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방 곡물시장의 곡가가 하락하자 점차 하나로 집중할 필요가 생겼고 생산비를 줄이고 판매구조를 집중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대토지의 기사령과 대지주가 경쟁력을 가지게 되고 자유농민들은 이들에게 땅을 팔고 예속적인 신분이 되어가기도 했다.
동유럽에서 농촌의 침체는 또 다른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발트해연안이나 폴란드, 러시아 등의 교역 도시들은 서유럽의 도지들처럼 역사가 오래되지 못하였고 튼튼하지도 못했던 까닭에 배후지 농촌이 갑작스럽게 몰락하자 서유럽 도시들처럼 그 능력이 현저하게 위축되었다.
14세기에는 사실 북 이탈리아의 도시들과 맞먹는 교역량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15세기에 들어와서는 네덜란드의 도전까지 겹쳐 엘베강 이동지역에서 상업지 활력이 사라져갔다. 동유럽의 귀족들을 덕분에 기존의 모든 농민적 권리를 무시하고 파괴하면서 차지농들을 대규모 영주직영지에서 일하는 농노의 상태로 바꾸는 반동적 개혁을 일으킨 것이다.
앞서 언급한 사례도 있지만, 이 시기에 일어난 동유럽의 계급투쟁을 고려하면 이 경우가 더 압도적이었던 듯 하다. 사실 동유럽에는 광대한 토지에 비해 노동인구가 압도적으로 모자라기 때문에 농민의 도주는 영주에게는 절박한 문제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지역 영주들에게 영국처럼 노동력이 덜 필요한 산업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도 아니었다.
이미 동유럽에서는 토지와 노동력자의 비율 그 자체가 강력한 요인으로 작용하여 귀족계급으로 하여금 농민들의 이동권리를 강제로 제한하고 대규모의 장원적 영지를 형성케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농민들의 지위를 끊임없이 몰락시켜갔던 것이다.
동유럽지역에서는 왕권이 미약한 편이었다. 국왕이 재대로 된 권력을 행사한 것은 17세기이후 절대왕정이 들어서면서부터이다. 폴란드는 이 무렵엔 강했다가 18세기로 접어들면서 악화된 경우이다. 프랑스처럼 왕권이 강하여 농민을 보호해준 것도 아니었으며, 영국처럼 귀족세력을 견제할 많큼 중산층이 성장한 것도 아닌 동유럽에서는 귀족세력을 제어할만한 존재가 없었던 것이다. 귀족세력은 따라서 마음대로 농민을 예속화 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서유럽이 농노제적 발전으로부터 벗어나던 바로 그 때에 동유럽은 아직도 오히려 농노제가 강화되었다. 서유럽보다 대략 200년-300년 정도 더 늦어진 것이다.
동,서유럽에서 전개된 계급투쟁은 양 지역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서유럽에서는 농노제가 쇠퇴해갔지만, 동유럽에서는 오히려 '재판농노제'라 하여 농노제가 더욱 강화되고 만 것이다. 이는 양지역에서 전개된 계급투쟁이 촌락공동체를 통한 농민들의 단결력, 도시와 상업의 발달, 국가와 영주계급 사이의 세력관계에 따라 서로 다른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서유럽에서는 이행기에 농노제가 사라지고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중간계급 (gentry)들과 토지를 갖지 못하고 이들 중간계급들에게 고용되어 일하는 임노동자가 생겨,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 넘어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반면 동유럽에서는 거꾸로 농노제가 강화되고 자본주의적 생산이지만 봉건적 생산양식을 가진 체제가 등장한 것이다. 서유럽과 동유럽의 이러한 차이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참고문헌>
배영수, 서양사강의, 한울, 1992
정해본, 독일근대사회경제사, 지식산업사, 1991
M.Dobb, 이선근역, 자본주의의 발전연구, 동녘,1986
각주
1) 봉건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우선 언급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봉건제적 생산양식은 9-11세기에 확립된 고전적 장원제이다. 본 리포트에서 주목할 분야는 상부구조보다는 하부구조인 생산관계, 영주와 농민과의 관계 및 생산성부분이다.
2) 격감한 인구는 16세기말이나 17세기에 이르러서야 겨우 회복될 수 있었다.
3) 이러한 변화가 일반적인 경향이었지만, 이분화가 곧장 자본-임금노동 관계로 전환된 것은 아니었다.
출처 :행복충전소♥대명 원문보기 글쓴이 : 익명회원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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