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철학사상

2008. 10. 15. 15:29교회사자료/10.세계사

중세 철학사상

 

차 례 I. 서 론 II. 본 론 1. 중세 사상 즉 중세 철학에서의 학자들 2. 보에시우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 3. 카롤링거 르네상스와 라바누스 마우루스 4. 요한네스 스코투스 에리우제나 5. 성 안셀무스와 아벨라르두스 6. 스콜라 철학 7. 13세기의 철학자들 8. 중세 후기의 철학자 9. 소수에 의한 철학 III.결 론 Reference

 

I. 서론

고대의 문화적 유산이 보존되어 오늘날에까지 전달된 것은 상당한 정도까지 중세의 지적인 관심, 특히 카롤링거의 문화적 관심 덕분이다. 더욱이 사회와 국가의 정돈, 신학과 철학, 교회법과 민법, 문화와 예술에 있어서의 중세의 독창적인 업적은 유럽 국가의 근대적인 발전전체의 기반이 되었다.

서양의 통일성 개념 뿐 만 아니라 개개 국가 발전의 다양성 역시 중세의 생활 형태에 기초하고 있다. 중세인들은 그리스-로마 시대의 풍부한 정신적 유산으로부터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었지만, 그 중에는 '진보'라고 부르기에는 그 정도가 지나친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고 인류발전에 기여한 중세의 독창적이고 심오한 사상을 부정해서는 않된다.

예를 들어 프랑스인 제르베르(Gerbert:13세기 삐까르디 지방 출신의 작가), 이탈리아인 토마스 아퀴나스, 영국인 로저 베이컨, 카탈로니아인 룰레 (13세기의 시인, 신학자, 철찰자), 독일인 알베르투스 마그투스 같은 중세인들은 중세에 진리의 빛을 밝혔던 위대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사실은 위에서 언급한 위인들조차- 당시 대부분의 철학자, 학자, 성직자, 유럽의 민중들은 아퀴나스 같은 신학자들의 저서를 통해 세계를 인식했다. 고전 시대 말기에 수용되어 중세기에 선택된 세계관과 자연관을 검증도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철학은 800년이 지난 중세기에 뒤늦게 수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한때는 중세철학이 신학과 사실상 구별될 수 없을 만큼 신학에 종속되어 있어서 신학과 구별될 수 없는 한, 그것은 실속 없는 억지 이론이나 말장난에 불과한 것으로 당연히 생각되었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서구 철학에는 당연히 두 개의 주요한 시대 (고대철학, 근대철학)밖에 없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었다. 즉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의미하는 고대와 교회의 권위가 최고의 세력을 떨치고 인간 이성은 무거운 족쇄로 속박되어 쓸모 없는 환상적인 신학 연구에 틀어박힐 수밖에 없었던 중세의 어두운 밤을 거친 뒤, 사변 이성이 다시 자유를 누리기 시작하여 드디어 데카르트와 같은 사상가가 이 족쇄를 풀어 이성을 자유롭게 했던 근대이다.

그리고 중세에 있어서의 철학은 노예였던 반면에 고대와 근대에 있어서의 철학은 자유인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중세 사상가들에 대한 경멸을 초래한 일부 요인은 확실히 베이컨이나 데카르트와 같은 사람들이 스콜라주의에 관해서 사용했던 말투였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비판의 관점으로 플라톤주의자를 평가하기가 일쑤이듯이, 베이컨이나 데카르트에 의해서 분명하게 시작된 운동은 찬미하는 자들은 중세 철학을 이들 철학자의 눈으로 보기가 일쑤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프란시스 베이컨이 스콜라 학자들에 대해서 알아야 했던 것 가운데 많은 것은 정신을 희생시키고 문자를 존중했던 후기의 '쇠퇴한' 스콜라 학자들에게는 적용될지 모르나, 중세의 위대한 사상가들에게는 적용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을 그들은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처음부터 이러한 관점에서 중세 철학을 본다면 역사가들이 중세 철학에 대해서 치밀하고 직접적인 지식을 얻기란 거의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중세 사상이 지니고 있는 풍요한 다양성과 그 심오함을 알지도 못한 채 그들을 보지고 듣지고 아니하고 중세 철학을 비난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중세 철학은 무엇이든 천편일률적이며 무미 건조한 말장난이고, 또 신학자들에게 노예처럼 종속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비록 중세 철학자들이 신학이라는 외적인 요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근대의 철학자들도 역시 신학과는 다른 요인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외적인 요인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깨닫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충분히 비판적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영국과 같은 국가들 대부분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상당수의 중세제도를 보존해왔다. 20세기의 다른 대륙(아프리카와 아시아)으로 확대되고 있는 근대 서양문화가 중세의 그 기원에 관련해서만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사실이다. 스위스의 문화사학자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말을 빌리면, 서양의 모든 기반과 시초는 중세에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고대 알기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의 발전은 자연, 즉 비 영적인 실체가 영적인 수준으로까지 고양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풍크 Ph.Funk). 오늘날 부당하게도 광범위하게 중세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어 있는데 이것은 위기에 대한 경고 신호이다. 왜냐하면 그 같은 관심의 결여는 유럽의 문화사회의 기원과 발전에서 소외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서구 유럽의 역사의식은, 올바른 방향 설정에 대한 견고한 척도를 획득하기 위해, 중세 사상의 방법과의 창조적인 만남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서 우리는 중세 사상에 대하여 더 알아보기로 하자.

II. 본론

1.중세 사상 즉 중세 철학에서의 학자들

중세철학은 중세 즉 4-5세기 로마 제국의 몰락부터 15세기 르네상스 시대까지를 의미한다. 그리스 철학이 플로티누스 이후로 그 창조력을 상실하게 되지 뒤이어 새로운 생명력을 가진 철학적 사색이 중세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흔히들 중세철학이라고 하면 앞서 서론에서도 밝혔듯이 9세기부터 14세기에 걸쳐 발전했던 스콜라철학을 연상하게 되지만, 포괄적으로 구분하여 르네상스까지로 그 시기로 확대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구분하든 이 시대적인 한정이 상당히 인위적이라는 컷을 확실하다.

왜냐하면 중세사상이라는 것을 그 전후시대를 고려하지 않고 단지 중세시대만으로 결론지어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것에 앞선 시대, 즉 초대 그리스도교 시기로부터 보에티우스나 이시도루스가 활동하던 교부시대에 있어서 그리스도교 사상은 교리의 정의에 주력했던 시기였다.

예컨대 중세 철학의 영향에 이름을 빠뜨릴 수 없는 사람인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있어서 비록 아직 체계적인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교리에 대한 설명이 이미 신앙 안에 깊이 침투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은 철학적 사변의 장래에 대해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에 따라서 중세철학을 논하려면 앞서의 시대에 대한 철학자들에 대한 고찰도 필요로 하고 있다. 그에 따라 나는 본론에서는 중세 사상의 예비적인 단계 즉 보에이시우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 등과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거쳐 9세기 프랑크 왕국의 분열 당시 요한네스 스코투스 에리우제나, 11세기의 안셀무스, 12세기의 스콜라철학, 그리고 중세철학의 절정기인 13세기 당시의 보나벤투라,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토마스 아퀴나스를 다루겠다.

마지막으로 아라비아 철학과 유태 철학을 약간 언급하겠다. 왜냐하면 이 글에서 취급하는 것은 이 철학들 자체보다는 아라비아인들과 유태인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가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에 충분히 알려지게 된 하나의 경로이기 때문이다.

2. 보에시우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

① 보에시우스

고대 세계의 철학이 중세에 전해진 하나의 경로가 위디오니시우스(500년경)의 저작이라고 한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보완적이기는 하지만 또 하나의 경로는 보에시우스(Anicius Manlius Severinus Boethius, 480-524년 또는 525년)의 저작이다.

그는 로마의 그리스도교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487년 동고트족 테오도리쿠스 대제의 집정관이 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귀족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의 집에서 자랐으며 훗날 그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는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에서 수학하면서 문학, 철학, 산술학, 기하학, 음악, 천문학 등 다방면의 학문을 공부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학식과 인품이 테오도리쿠스 대제의 인정을 받아 510년경에는 집정관이 되었고 520년에는 최고 행정 사법관이 되었으나 끝내는 반역죄의 협의로 처형되었다.

그에 의한 고대로부터의 경로가 보완적인 것은 위디오니시우스가 중세 초기의 철학, 특히 요한네스 스코투스 에리우제나의 철학의 신플라톤적인 사색에서 취한 요소들을 심어 주는데 도움이 되었던 반면에, 보에시우스는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지식을 중세 초기의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그의 저서에서는 여러 가지의 분명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학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중세 초기의 사상가들은 보편의 문제에 관한 논쟁에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출발점으로서 그들은 포르피리오스와 보에시우스의 어떤 원전들을 채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보에시우스의 저작 가운데서 볼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학설에는 거의 주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중세 최초로 위대한 사변적인 사상가 요한네스 스코투스 에이우제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보다도 오히려 위디오니시우스나 신플라톤주의에 의거하는 저작들에게 힘입은 바가 많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요한 학설이 보에시우스의 저작에 편입되어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외에도 그의 신학에 대한 철학적인 범주의 적용은 신학적인 학문의 발전을 도왔던 것 외에 그의 철학적인 용어의 사용이나 정의는 신학과 철학 그 양자에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썼던 주석이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그가 썼던 종류의 저술은 중세인들이 주석을 저술하는 경우에 아주 좋아했던 하나의 방법이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독창적이고 독자적인 철학자로서 특히 뛰어나지는 않았을지라도 보에시우스는 하나의 전달자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고, 또 비단 신플라톤 주의자들로부터 만이 아니라 중세의 위대한 철학적인 종합에 지배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되는 사상을 지닌 철학자로부터 채용한 용어들로 그리스 도교의 교의를 나타내려고 시도했던 하나의 철학자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② 성 아우구스티누스

누미디아(북아프리카) 타가스테(지금의 수크아라스로 당시 로마의 속지) 출생하였다. 그의 생애는 주요저서라고 할 수 있는 <고백록Confessions>에 기술되어 있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이교도의 하급관리였고 어머니인 모니카는 열성적인 그리스도교도였다. 카르타고 등지로 유학하고 수사학 등을 공부하여, 당시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로마제국 말기청년시절을 보내며 한때 타락생활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19세 때 키케로의 <철학의 권유 Hortensius>를 읽고 지적 탐구에 강렬한 관심이 쏠려 마침내 선악이원론과, 체계화하기 시작한 우주론을 주장하는 마니교로 기울어졌다.

그 후 그는 회의기를 보내며 신플라톤주의에서 그리스도교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편력을 하였다. 그의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384년에 만난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39?-397)였다.

미시대의 철학은 플로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이러한 영향은 어거스틴의 철학 방법과 이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어거스틴은 감각 세계 너머에 진리의 영원한 정신적 영역이 있으며, 이 영역은 인간정신의 대상이고 인간의 모든 노력의 목표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이 진리를 그리스도교의 신과 동일시했다.

인간은 감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정신의 내부로 향하고 이 정신을 뛰어넘어 진리를 보여주는 지성의 빛으로 나아감으로써 진리(신적이 계시)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인간이 두 실체, 즉 육체와 영혼의 복합체이며, 그 중 영혼이 훨씬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본성에서 육체를 배제해서는 안 되며 죽은 뒤 육체의 부활은 신앙 안에서 보증을 받는다고 판단하였다. 어거스틴의 (고백록 Confessions) (400년경)과 (삼위일체론) (400-416)에는 인식, 지각, 기억, 사랑 등에 대한 날카로운 심리학적 분석이 가득 차 있다. (신국론) (413~426)에서 인간 역사의 전체 이야기는 인류가 신의 구원을 받아 결국 창조주 안에서 안식하는 진보적 움직임으로 나타나있다.

<자유의지론>에서는 섭리와 자유의지 문제 악의 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신은 우리 영혼에 내재하는 진리의 근원이므로, 신을 찾고자 한다면 굳이 외계로 눈을 돌리려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영혼 속으로 통찰의 눈을 돌려야 한다.

윤리에서는 모든 인간행위의 원동력이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은 결코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존재이며, 윤리적인 선악은 그 사랑이 무엇으로 향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하였고, 마땅히 사랑해야 할 신을 사랑하는 자가 의인이고, 신을 미워하면서까지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악인이라고 하였다.

3. 카를링거 르네상스와 라바누스 마우루스

① 카롤링거 르네상스

771년 카를로왕이 죽음으로써 카를루스는 프랑크 영토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었다. 이어서 그의 롬바르드 왕국의 파괴와 그의 일반적인 정책에 의하여, 그는 그 세기가 끝날 무렵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에 있어서 최고의 통치가 되었다.

800년 12뭘 25일 교황에 의해 거행된 그의 황제로서의 대관식은 바로 그의 제국 정치의 성공과 프랑크 왕권의 절정으로 상징하고있었다. 프랑크 제국은 그 후 붕괴되어 제관은 독일로 옮겨지게 되나 얼마 동안 카를루스는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당당한 지배자였으며 메로빙거 왕조에서 절박하게 요구되었던 재건과 개혁에 착수할 수 있었다.

카를루스 황제는 결코 단순한 군인이 아니었고 또한 단순히 군인과 정치적인 통솔자의 자질을 겸비하고 있는 것만도 아니었다. 그는 교육의 보급과 개선에 의한 신하들의 문화적인 수준의 향상 작업도 마음 속 깊이 계획하고 있었다. 이 계획의 실천을 위해서 그는 학자들과 교육상의 지도자들을 필요로 했으나 프랑크 왕국 내에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으므로 그는 그들은 외국에서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시 어떤 학교에서든지 종교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것 외에는 읽기와 쓰기, 그리고 초보적인 라틴어 밖에 가르치지 않았다. 카를루스가 아탈리아 사람인 피사의 베드로와 바울로 디야코누스와 같은 외국의 학자들을 기용했던 것은 학문이나 교육의 이러한 상태를 구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러한 학자들보다도 잉글랜드의 학자 요크의 앨퀸 (Alcuin, 730~804년경)의 업적은 당연히 무시할 수 없는 큰 것이었다. 781년 로마의 파르마에서 카를루스와의 앨퀸의 만남은 본격적인 궁정학교 교육의 시작이 되었다.

카를루스 황제는 교육에 대한 끊임없는 배려가 않은 왕이었다 그의 아래에서 발전하기 이전에는 왕실학교는 왕실의 왕자들이나 고위 귀족의 자제들이 기사도의 생활방법을 몸에 익히기 위해서 훈련하는 목적으로 존속해 왔던 것으로 보이나 황제가 지적인 훈련을 강조하여 개혁한 결과 학생들은 궁정 이외의 넓은 범위에서 모여들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프랑스의 학자들은 보통 이 궁정학교가 파리 대학의 기원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후에 샤를(Charles the Bald, 877년 사망)에 의해서 그 황제의 궁정이 파리로 옮겨진 것으로 생각되고는 있지만 본래는 파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헨 또는 엑스 라 샤펠에 있었음을 유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파리대학은 결국 파리의 여러 학교가 합병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 궁정 학교는 관계가 다소 희박하기는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파리 대학의 먼 기원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카를루스의 궁정 학교의 계통을 세움에 있어서 유력한 조력자는 앨퀸이었으며 그의 저작에서 교과 과정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앨퀸은 확실히 독창적인 사상가는 아니었으며 그의 대화형식으로 씌어진 교육상의 저작은 대부분 그 이전의 저작가들에 의존하고 있다. 예컨대 <수사학>은 다른 저작가들에 더하여 치체로를 이용하고 있는 반면에 그 밖에 논문에서는 도나투스, 프리스키아누스, 가시오도루스, 보에시우스, 이시도루스, 비드 등에 의거하고 있다.

앨퀸은 저작가로서는 독창적이지 않고 평범하여 철학자라고 일컬을 수 없으나 교사로서는 뛰어났으며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카를링거 왕조 르네상스의 가장 잘 알려서 있는 몇 사람의 인물, 예컨대 라바누스 마우루스는 그의 제자였다.

② 라바누스 마우루스

카롤링거 왕조 르네상스와의 관계에서 독일에 있어서의 교육에 대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이유에서 라바누스 마우루스(Rhabanus Maurus)의 이름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는 776년경에 태어나서 앨퀸의 제자가 된 뒤에 풀다의 수도원에서 가르쳤다. 그리고 822년에 그 수도원의 원장이 되고 847년에는 마인츠의 대주교로 임명받아 856년에 그가 죽기까지 그 지위에 머물고 있었다.

라바누스는 성직자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목적으로 3권으로 된 <성직자의 교육>3권을 서술했다. 이 책은 교회의 여러 위계, 전례, 성직자의 훈련 등을 다루고 있는 것 이외에 7개의 인문학과도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라바누스는 이시도루스의 저서에서 대부분 발췌한 하나의 백과 전서인 이 책에서는 그의 <사물의 본질>에서와 마찬가지도 독창성이 결여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그는 거의 대부분 이시도루스,데드,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이전의 저작가들에게 의거하고 있다. 성서 주석에 있어서 그는 신비적, 우화적인 해석을 좋아했다. 달리 말하면 <게르마니아의 교사>는 카롤링거 왕조 르네상스가 낳은 하나의 성실한 인물이며 학문에 대한 진정한 열의와 성직자의 지적인 교육에 대한 강렬한 열성을 지닌 학자였으나 사상에 있어서 두드러진 독창성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4. 요한네스 스코투스 에리우제나

9세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은 요한네스 스코투스 에리우제나(Johannes Scotus Eriugena, 810-890년경)이다. 보에시우스 이후 서양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달성한 철학자인 그는 아일랜드 태생으로 40세 무렵에 대륙으로 건너와 프랑스의 대머리 황제인 샤를 1세의 궁정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810년경에 아일랜드에서 태어나서 아일랜드의 한 수도원에서 공부했다.

그는 신플라톤 주의자들의 글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그리스 철학자였다. 자신의 사상 체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가운데 그는 포르피리우스의 나무로 표현된 개념들과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에 나오는 것으로 추정되는 글들에서 기술된 존재의 위계를 매우 정교하게 결합시켰다.

철학자로서의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신플라톤 주의자들의 학설과 그리스도교를 결합하고자 한 시도이다. 그는 주로 니사의 성 그레고리우스와 같이 자기를 앞선 사람들의 사색, 특히 위디오니시우스의 저작에 의존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고 이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자연구분론>을 읽는다연 우리는 그를 앞선 저작가들이 그가 연구할 자료로서 그에게 넘겨준 사상이나 관념이 지니는 범주와 양식과 더불어 중세 최초의 위대한 체계를 수립했던 것이다. 이것은 종교와 철학이 각각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에게 속한다는 그의 믿음과도 조화를 이룬다.

이러한 연유에서 그는 '철학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는 진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자연구분론>은 대체로 862년에서 866년에 걸쳐 씌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책은 다섯 권으로 이루어져 있고 대화의 형식으로 씌어져 있다. 대화의 형식은 그 당시에 보급되어 앨퀸과 그 외의 사람들에 의해서 많이 이용되었던 저술 형식이다.

이 저서를 해석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위디오니시우스와 신플라톤주의의 철학에 의해서 시사된 노선을 따라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설을 표현하려는 요한네스 스코투스의 시도는 그가 정통적인 그리스도인이었는지 또는 전적으로 벙신론자는 아니라 해도 그것에 매우 가까운 것은 아닌지 어떤지를 논할 여지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스코투스가 정통적인 사고 방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는 '모든 점에서 성서의 권위를 따르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명제를 내세울 수 있다. 한편 스코투스는 신학에 대해서 철학이 우선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헤겔의 이성주의를 앞질러 말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는 예컨대 '참다운 이성에 의해서 확증되지 않는 모든 권위(예컨대 교부들의 권위)는 무력하게 생각되지만 참다운 이성은 어떠한 권위의 뒷받침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는 명제를 내세울 수 있다.

그러나 <자연구분론>의 바른 해석에 관한 논쟁이 있다는 것을 지적해 두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자연구분론>의 학설이 밝혀지지 않는 한에서는 이 해석의 문제를 유효하게 논의할 수 없다.

5. 성 안셀무스와 아벨라르두스

1. 성 안셀무스

성 안셀무스(Amselmus Cantaberiensis,1033-1109)는 1033년에 피에몬테의 아오스타에서 태어났다. 부르고뉴의 아브랑슈와? 베크에서 초보적인 공부를 한 후에, 베네딕토 수도회에 들어가서 그 후 베크수도원의 부원장이 되고(1063년)이어서 원장이 되었다. (1078년) 1093년에 그는 앞서 자신의 스승이면서 동료이고 수도회의 장상인 란프란쿠스의 뒤를 이어서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어 죽기까지 그곳에 있었다. (1109년)

그는 신학자이자 철학자였지만 주로 종교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철학 자체가 궁극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교회의 가르침을 지지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도구로서 생각하였다. 일반적으로 성 안셀무스의 사상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에 속해 있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프리카의 그 위대한 박사와 마찬가지로 그는 주로 그리스도교의 교의를 이해하는 데 자신의 지적 노력을 바쳤으며 <프로슬로기움>에서 볼 수 있는 그의 태도는 틀림없는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정신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주여 나는 당신의 오묘함을 통찰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래도 나의 지성은 그것을 알기에는 불충분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마음으로부터 믿고 사랑하고 있는 당신의 진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기 바랄 뿐입니다. 인기 위해서 알려고 하지 않고 알기 위해서 나는 믿기 때문입니다 나는 또 믿지 않는다면 알 수도 없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는 이 태도는 아우구스티누스나 안셀무스에 있어서 공통적이다. 안셀무스는 <왜 하느님은 인간이 되었는가>에서 우리가 믿는 바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태만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 경우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물론 실제에 있어서 이것은 안셀무스의 경우 신앙의 교의에서 오묘한 뜻을 제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 정신에서 가능한 한에서 이를 규명하고 전개하여 그 교의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변증론이나 추론을 신앙의 교의에 적용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과정의 결과, 예컨대 그리스도의 갱생과 구속에 관한 저서 <왜 하느님은 인간이 되었는가>에 의해서 그는 신학적 발전과 사색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② 아벨라르두스

페트루스 아벨라르두스(Petrus Abaelardus, 1079-l142)는 르 팔레, 즉 낭트에 가까운 팔레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셀리누스와 기욤으로부터 변증론을 배운 후에 자기 자신의 학교를 최초에는 믈랑에, 다음으로는 코르베이유에, 그리고는 파리에 개설했다.

파리에서 그는 이전의 스승과 논쟁을 했다. 그 후로 그는 신학에 눈을 돌려 라옹의 안셀무스에게 배우고 나서는 1113년부터는 파리에서 스스로 신학을 가르쳤다. 제자 엘로이즈와의 연애 에피소드 때문에 아벨라르두스는 성 디오니시우스 수도원으로 물러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1121년 그의 <하느님의 유일성과 삼위 일체성>은 스와송에서 이단시되었으며 노장 쉬르 세느 가까이에 르 파라클레의 학교를 설립했으나 브리타니의 성 질다 수도원장이 되기 위해서 1125년에는 그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1129년 그 수도원에서 물러났다. 어쨌든 1136년에서 1149년까지 그는 파리의 생 져느비에브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솔즈베리의 요안네스는 여기서 배웠던 그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성 베르나르두스는 그를 이단으로 비난하였고 1141년 그는 상스 공의회에서 단죄되었다. 그가 교황 인노센트 2세에 호소한 사실로, 그는 한층 더한 인단 선고와 강의 금지의 명령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그는 클뤼니로 은퇴하여 죽을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아벨라르두스가 논쟁을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자이며 자신의 반대자를 용서하지 않는 성질의 사람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철학과 신학의 스승인 기욤 드 샹포와 라은의 안셀무스를 명시했다. 그는 또 어느 정도 다정 다감하기는 하지만 이기적이어서 화합하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다른 수도자들과 잘 사귀지 못하여 여러 수도원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이며 탁월한 변증론자이고, 이점에서 그는 기욤 드 샹포를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는 결코 무시할 수 있는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뛰어난 재기와 변증론의 치밀함, 그리고 확실히 다른 스승들에 대한 그의 공격이 수많은 청강자들을 얻게 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신학의 문제에 개입했다는 것은 그것도 특히 평판이 높고 훌륭한 재능의 사람일 경우에, 변증론과 지성의 교묘한 솜씨에 대해서 본래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위험한 사상가고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아벨라르두스는 특히 철학자를 악마의 대리인으로 간주한 것으로 생각되는 성 베르나르두스의 끈질긴 반감에 시달렸던 것이다.

여러 가지 비난가운데서도 성 베르나르두스는 아벨라르두스를 특히 삼위 일체에 대해서 이단적인 설을 주장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아벨라르두스는 이 비난의 진실성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는 변증론을 신학에 적용함에 있어서 그의 실제 의도는 아니었지만 정통 신학에 위배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신학의 진보를 가능하게 하고 13세기의 스콜라 철학을 쉽게 체계화할 수 있게 했던 것은 바로 변증론을 신학에 적용한 일이었다.

6 스콜라철학

중세학문을 대표하는 신학적 철학체계라고 할 스콜라철학은 주교성당이나 수도원의 부속학교인 스콜라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우며, 그 기반은 로마시대의 교부철학이었다. 11-12세기에 걸쳐 이슬람세계로부터 소개된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한 고대철학은 스콜라철학자들에게 새로운 문제를 제시하였고, 그것을 계기로 스콜라철학은 발전하고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아랍어를 라틴어로 번역한 책 가운데에는 아비세나(980-1037)의 글도 있었다.

그는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이슬람철학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을 존재로서의 존재에 관한 학문으로 보았다는 해석, '존재' '본질 ' '실존' 등 많은 형이상학 용어에 대한 분석, 신 존재에 대한 증명 등은 그리스도교 집단들도 찬성하건 반대하건 자주 인용했다.

아랍 철학자 아베로이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관해 주석한 글도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그리스도교 교사들은 흔히 아베로이스를 그리스도교의 최대의 적으로 여기고 공격했다. 왜냐하면 그는 우주가 영원하고 모든 인간이 똑같은 지성을 공유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교리는 개체의 불멸을 주장하는 그리스도교 교리와 모순되었기 때문이다.

스콜라 철학에 영향을 끼친 또 하나의 사상은 중세 유대교 사상이었다. 스페인계 유대인 이븐 가비롱은 생명의 샘(1050경)에서 신의 단일성과 단순성을 강조했다. 모든 창조물은 형상과 질료로 구성되어 있다. 이때 질료는 감각세계의 거친 물질적 질료일 수도 있고, 천사와 인간 영혼의 정신적 질료일 수도 있다.

모제스 벤 마이몬이라고 불린 마이모니데스는 ( 혼란에 빠진 자들을 위한 길잡이) (1190경)에서 이성과 신앙은 모두 신에게서 나오므로 둘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도 없으며, 겉으로 보이는 모순은 성서나 철학자들 중 어느 한쪽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서양 학자들이 이 새로운 사상 학파들을 융합하고 있는 동안 스콜라 철학의 중심이 된 대학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파리대학교(1150-70 창설)와 옥스퍼드대학교(1168 창설)이다. 스콜라 철학이란 이 대학교수들의 신학적· 철학적 가르침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단일한 하나의 스콜라 철학 교리란 없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각각 아기 나름의 교리를 전개했으며 이 교리는 종종 동료 교수의 교리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콜라철학의 새로운 논거들은 非그리스도교적인 출처에서 나왔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이슬람을 출처로 했다는 것이다. 이슬람철학자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에 대한 번역서 들은 주해서들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세계에 이슬람 철학자들에 대한 참신하고 보다 적합한 이해를 가져다주었다. 이슬람교도들이 펴낸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한 해설서는 코란의 가르침을 지지하기 위해 원용된 것인데, 이것은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가 교회의 교리와 조화를 이룰 수 가능성을 제시 해주었다.

스콜라철학자들의 당면한 문제는 스콜라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 신앙과 이성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점이었다. 이 점은 중세 철학가들의 중요한 논쟁거리였던 '보편논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보편논쟁이란 보편적 관념의 실재 여부에 관한 대립된 주장으로서, 실재론과 유명론이었다.

실재론자들은 플라톤의 주장에 따라 보편적인 관념(idea)은 우리의 감각세계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이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이어 받은 유명론자들은 보편적인 관념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단순한 명칭에 불과하며 실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자들의 대립된 견해는 13세기의 '신학대전'을 저술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여 마침내 종합되었다. 온건한 실재론에 입각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의한 카틀릭 교리의 종합적 체계화를 완성하여 중세 스콜라철학을 대성하였다. 아퀴나스는 철학을 완전 독립된 학문이라고 보며 신학과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였으므로 단순히 스콜라철학을 '신학의 시녀 '로만 인식하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

7. 13세기의 철학자들

①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 1206-1280)는 1206년 슈바벤 지방의 라루잉겐에서 태어났으나 학예를 연마하기 위해서 독일을 떠나 파두아로 갔으며 거기서 1223년 도미니코회에 입회했다. 쾰른과 그 밖에 여러 곳에서 신학을 강의한 후에 그는 1245년 파리에서 박사학위를 획득했다. 1245년에서 1248년까지의 그의 제자들 가운데에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었다. 1248년 그는 도미니코회의 연구 기관을 설립하기 위해서 토마스와 함께 쾰른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순수 학문적인 일은 그에게 부과되어 있었던 행정상의 일로 말미암아 중단되었다. 그는 1254년에서 1257년까지 독일의 관구장이었고, 1260년에서 1262년까지는 레겐스부르크의 주교였다. 거기다 로마를 방문하고 보헤미아의 십자군에게 설교하는 일로 많은 시간이 소비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거주지를 쾰른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학설을 옹호하기 위해서 파리로 출발했던 곳이 쾰른이었고 1280년11뭘 15일에 그가 사망한 곳도 쾰른이었다.

그의 저서와 활동을 볼 때 알베르투스 마그누스가 폭넓은 학문적 관심과 공감을 지닌 사람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사상상의 새로운 경향으로 말미암아 야기되었던 분쟁을 잘 알고 있었던 그가 파리 대학의 인문학부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논었다는것을 모르고 있었으리라고는 거의 생각할 수 없다.

개방적인 정신과 민첩한 지적 감수성의소유자인 그가 이 새로운 운동에 대해서 비타협적인 적대적 태도를 취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그는 신플라톤주의자와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전통에 대해 강한 공감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요소를 수용하여 그것을 자기의 철학 속에 구체화시키면서 동시에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전통과 非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전통을 상당히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철학은 그의 위대한 제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충분하게 수용하기까지의 과도기적인 단계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나아가서 알베르투스는 우선 신학자였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그리스도교의 교의와 충돌하는 중요한 점에 대해서는 민감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인문학부의 일부에서 유행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무비판적인 수용은 그에게 있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사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적, 자연학적 (예컨대 <자연학>과 <천체 우주론>에 대해서), 형이상학적, 윤리학적인 저작 (<니코마코스 윤리학1과 <정치학>)의 주석을 저술했지만 아리스토텍레스가 범한 오류를 지적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으며 또 아베로에스에 반대하여 <지성의 단일성에 대해서>를 저술했다는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는 그가 주석을 저술하는 의도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라틴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 논고 또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데 불과하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에도 높은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리고 로저 베이컨(Roger Bacon)은 그의 열광적인 찬미자는 아니었는데도 '아리스토텔레스, 아비세나, 아베로이스가 스콜라학파에서 인용되고 있듯이, 그 또한 인용되고 있다. '고 말하고 있다.

이는 살아 있는 저자를 언급하는 경우에는 이름을 들지 않는다는 당시의 관습에 어긋나는 것으로서 알베르투스가 받고 있었던 존경에 대한 증거가 된다. 틀림없이 이러한 명성은 주로 신학자, 철학자, 과학자, 주석자로서의 그 성인의 박학과 다방면의 관심이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히브리와 아라비아의 철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졌으며 때때로 다른 저자들의 의견을 인용하고있었다.

따라서 그의 사상과 표현에 흔히 보이는 애매함과 역사적 사실에 관한 과오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작은 그가 광범위하게 책을 읽고 다방면의 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박식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요한 공적은 약간의 역사가들이 말하고 있듯이 그리스도교 서구 세계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와 아라비아 철학자의 저작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가를 그가 알았다는 데 있다.

즉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해서 명확한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과 이 철학을 간단하게 무시하는 것은 손실이며 불행이기조차 하다는 올바른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그는 어떤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라비아인은 교의와 일치하지 않는 학설을 주장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이것이 부분적으로 거부해야 할 이유는 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라틴 사람들에게 이해시켜 그들에 그 가치를 보여주려고 노력함과 동시에 그 오류도 지적했다. 이러한 일 등으로 그는 생전과 현재에도 중요성이 인정이 되고 있는 것이다.

② 성 보나벤투라

성 보나벤투라 (St. Bonaventura, 1221-1274)로 알려진 조반느 피단자 (Giovanne Fidanza)는 1221년에 토스카나의 바뇨레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병을 얻어 그의 어머니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 기도를 바친 결과 회복되었다. 그는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했으나 입회의 연월일은 정화하게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1240년 전후일 것이다.

어쨌든 보나벤투라는 그때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었음에 틀림없으며 1245년에 사망한 알렉산더 할레시우스에게 파리대학에서 배웠고 그곳에서 인문과학의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성 보나벤투라는 성 토마스와 마찬가지로 수도 사제와 세속 사제간의 다툼에 말려들어 1255년에 대학으로부터 추방되었다. 즉 그는 박사 자격과 대학 교수단 일원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했다. 1256년에 그를 다시 인정했을지도 모르나 어쨌든 그는 아퀴나스와 함께 1257년 10월에 교황의 조정에 의해서 승인을 받았다.

승인을 받았다는 점에서 그는 대학의 신학 교수였으며 그는 틀림없이 교수직을 계속 수행했을 것이다. 1265년 보나벤투라는 교황을 설득하여 요크 대교구로의 임명을 철회하는 데 성공했으나 1273년에는 알바노의 주교 및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1274년에 그는 리용 공의회에 출석하여 동방 교회와 로마 교회와의 재 일치를 역설했으나 공의화가 끝날 무렵에 그는 세상을 떠나서(1274년 7월 15일)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가 참석한 가운데 리옹에 묻혔다.

그의 시대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가 라틴말로 옮겨지고 아라비아의 주석서들이 유입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는 토마스와 달리 독자적인 노선으로 이를 종합하려 했다. 그에게 철학은 탐구의 대상을 연구하는 것으로 진리에 이르는 것이며, 신학은 믿음의 대상으로 진리에 이르는 것이라 보았다. 그는 이성의 세계가 있고, 신앙의 세계가 있다고 보았다.

이성은 탐구하고 조사하며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라 보았다. 이성은 대상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신마저도 탐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성은 그 한계가 있으며 이는 종교적인 진리까지 회의하게 한다. 그리고 이성은 자신의 능력을 절대시할 위험이 있다. 이성이 무엇이든지 탐구하는 것이나 그가 신앙이 아닌 독자적인 것으로 종교적인 것을 결론할 때 이는 위험성과 비극성을 가진다. 이것이 이성에 의한 철학의 한계이다.

신학은 믿어야할 것을 다룸으로 진리에 이르는 것이다. 이는 이성적으로 추론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신학은 교리와 계시를 연구하는데 이성을 필요로 한다. 이성도 신앙도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것을 선호한다. 그것은 그가 몸담은 수도원의 영향이기도 하겠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여러 면에서 성서와 조화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진정한 신학자나 형이상학자가 아니라 그저 자연학자라 보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플라톤을 선호한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상의 것을 탐구하는 자연학자이지만 플라톤은 천상의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도 신앙의 빛을 가지지 않았기에 한계를 가진다. 그는 이성이 신앙의 도움으로 천상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는 하느님에게 나아가기 위해 몇 가지 단계를 이야기한다 우선 물질계를 보고 그로부터 하느님의 흔적을 찾는다. 그리고 물질계 안에 신의 본질과 힘을 고찰한다. 이로서 물질계 내부에도 신의 발자취가 있음을 느낀다. 다음으로 영혼의 정신적인 능력을 고찰함으로 신의 모상임을 알고 나서 영혼의 내면에 대한 반성하고 존재의 이념에 도달하여 모든 사물이 왜 있는지 그 근거를 발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느님과 합일한다는 것이다. 이는 철학과 신학의 관계를 신을 향한 위계 속에서 다루려는 것이다. 즉 물질계에서 천상계로 나아가는 것으로 이는 이성의 도움으로 신앙이 하느님에게로 나아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③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일반적으로 가장 위대한 스콜라철학자로 간주되는 이로 비교적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그 이후 세대의 사고에 그의 저작이 미친 영향은 결코 과소평가 될 수 없다. 가톨릭 철학자들 중에서 그의 저작은 가장 높이 평가되어 왔고 일반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비가틀릭 철학자들 가운데서도 서양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의 부류에 들어간다.

많은 철학자 그리하듯이 그도 생년일에 대한 그리고 출생장소에 대한 확실한 자료를 구하기는 어려운 사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적하여 볼 수 있다. 그는 1225년 록은1226년 아퀴노의 백작 아들로 태어났으며, 수 많은 중세 근대 철학자들과 같이 그도 수도원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5살에 몬테카지노의 베네딕트 수도회에서 공부하였고, 1239년부터 1243년까지 나폴리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이 때 그는 그리스철학을 공부할 기회를 가지는 데그 것은 히베르니아의 페트루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해를 쓰기도 한 이를 스승으로 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도미니코회에 입회한다. 그러나 고위성직자의 길을 포기한 그를 그의 집안에서는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가 고위성직자가 들 수 있는 몬테카지노수도회에 입회하기를 바랬다 그리고 그것이 뜻 대로 되지 않자 토마스를 납치하여 성에 강금하고 많은 유혹으로 유입하려하나 그는 결국 도미니코회에 입회한다. 1245년에서 1248년 그는 파리에서 공부를 하였고 그의 위대한 스승인 알베르투스를 만난다.

그에 의하여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의 연결에 도움을 받았으리라. 그는 1252년에서 1255년 파리대학에서 성서학과 명제집을 강의하였다. 그 당시 그곳에는 보나벤트라도 강의를 하였다. 그는 1259년 파리를 떠나고 1268년 교황청 소속 학원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리고 교황청에서 당시 위대한 번역가인 뫼르베궤의 월헴을 만나고 그로 인해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어 원전을 라틴어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프로클로스 그리고 아르키메데스 또한 여러 주석서도 알게 되었다.

1269년에서 1272년까지 그는 다시 파리로 돌아간다. 그리고 아베로에스파와 논쟁을 벌린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받아들인다. 1272년 수도원 학교와 나폴리대학에서 강의를 한다 그리고 리옹 공의회에 가던 도중 죽음을 맞이한다. 그날이 1274년 3월 7일이다.

그는 보편적 박사라 불리게 되었고 천사적 박사라 불리게도 되었다. 그리고 1323년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1879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하여 가톨릭 교회의 공식 철학이 되었다. 그는 성서주해를 비롯하여 신학대전 그리고 철학대전이라 불리는 반이교도 대전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주해 등을 남겼다.

토마스에 이르러 이슬람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유럽에 전하여 지고 금서로 지정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에 대한 연구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성을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신앙을 희생시킬 위기에 놓이게 되었고 토마스는 이러한 대립의 상황에서 이를 조화로이 발전시킨다.

마그누스의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는 스승과 마찬가지로 고대 철학자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최근의 아랍과 유대 사상가들을 높이 평가했다. 그에 따르면 이성과 신앙은 똑같은 신적 원천에서 나온 것이므로 서로 모순될 수 없다. 당시 보수적인 신학자와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의심하고 있었다 아퀴나스는 그들이 의심하는 까닭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아랍인 주석가들에 의해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그리스도교 신학에 대해 가치있음을 당시 사람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주석서들을 썼다. 아퀴나스의 철학 견해는 그의 신학저작들, 특히 <신학 대전) (1265/66-73)· (이교도에 대한 반론>(1258-64) 속에 매우 잘 나타나 있다.

이 저작들 속에서 그는 철학과 신학의 영역과 방법을 구분했다. 철학자는 감각이 제공한 자료를 가지고 시작하여 사물의 제일원인을 찾는다. 신학자의 탐구주제는 신성한 성서 속에 계시되는 있는 신이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이보다는 못하지만 플라톤주의가 그리스도교를 위해 유용한 도구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이 사상들로부터 빌려온 모든 것을 변형하고 심화시켰다. 예를 들어 그는 부동의 동자가 존재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증명을 받아들였으나, 그가 도달한 제일 원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것과 매우 달랐다. 그 원동자는 사실상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신이었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당시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조화시킴으로써 그 교리의 명예를 떨어뜨린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그리스도교의 믿음과 충돌할 때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수정하고 교정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그리스도교를 억지로 조화시키지 않고 철학원리, 특히 존재개념을 새롭게 이해함으로써 둘 사이의 조화를 이룩했다.

그는 존재를 현실태로 생각했다. 그에게 신은 순수존재 또는 현실태이다. 창조물은 그 본질에 따라 존재에 관여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이나 본질이 허용하는 정도로만 존재 또는 현실태에 관여한다. 신과 창조물 사이의 기본적 차이는 창조물이 본질과 실존의 실제적 혼합에 의해 구성되지만 신의 본질은 바로 신의 실존이라는 점이다.

8. 중세 후기의 철학자

중세 후기에도 이전의 철학하는 방식들이 계속되었고 특정의 사상학파들로 형성되었다. 도미니코스 수도회에서는 토마스주의(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과 철학)를 항상 엄격하게 신봉하지는 않았지만 토마스주의가 공식 가르침이 되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중세 후기 내내 토마스주의와 경쟁한 새로운 양식의 신학과 철학을 개발했다.

① 둔스 스코투스

둔스 스코투스 (Duns Scotus, Johannes, 1266~1308)는 스코틀랜드의 록스버러 지방의 막스톤에서 태어났다. 그의 성 둔스는 버위크의 한 지방으로부터 유래한다. 그가 스코틀랜드인이었다는 것은 오늘날 확실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이유는 그의 시대에 이미 스코틀랜드인과 아일랜드인은 구별없이 '스코티 '라고 불리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만이 아니라 신빙성에 있어서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련의 기록을 발견함으로써 증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출생지는 확실하지만 생년월일은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그는 1265년 또는 1266년에 태어나서 1278년 프란치스코회에 들어가서는 1280년에 수련기를 마치고 1291년에 사제로 서품된 것이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308년 11월 8일에 사망한 컷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쾰른에서 사망하여 이 도시에 있는 프란치스코회의 교회에 안장되었다.

프란체스코회의 전통적인 아우구스티누스주의를 대표하여 토마스 학파와 대립하였다. 성찬론에서는 철저히 화체설을 주장했는데, 그의 사상은 프란체스코회를 중심으로 한 사상가들에게 스코투스주의로 이어졌다.

스코투스주의는 사물의 전체성을 직관으로 파악하며, 따라서 사유, 즉 이성에 대한 의지의 우위를 주장한다. 또 모든 것은 신의 자유이며 한없는 사랑의 발로로서, 신이 바라는 것은 모두가 선이라고 설명한다. 그의 면밀한 사변 때문에' 정묘한 박사' 로 불릴 정도로 오해를 받은 적도 있으나, 그의 비판적 역사 전승적 연구결과가 정당한 평가를 낳았다. 저서에 <옥스포드강화집>등이 있다.

요한네스 둔스 스코투스는 철학이 인간의 지식욕을 채우기에 충분하고 적합하다는 이성주의자의 주장에 반대했다. 둔스 스코투스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순수 철학자는 인간의 타락과 은총· 구원의 필요성을 모르기 때문에 인간의 조건을 진정하게 이해할 수 없다. 둔스 스코투스가 보기에 우주의 제일 원동자로서 신이 존재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증명은 그의 철학의 뚜렷한 한계였다.

둔스 스코투스에게는 제일 원동자나 존재 자체라는 개념보다 무한한 존재라는 개념이 신에 대한 인간의 가장 완전한 개념이었다. 스코투스의 철학은 성 보나벤투라, 특히 성 토마스의 철학이 그 증거가 되는 세기 즉 13세기에 속하지만, 비판적인 측면과 主意주의적인 요소에서-主意주의적인 요소는 아우구스티누스적인 프란치스코 외적 전통과 결합해 있기는 하지만-볼 때의 스코투스 철학은 14세기를 예시하고 있다.

변증론적인 솜씨와 신중하고 끈기 있는 사색의 대가인 스코투스 철학은 비록 전통이 침투되어 있지만 설득력 있고 박력있는 독창적인 사상가, 즉 현실적으로는 '교조주의적 철학'의 종말기에 속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운동의 선구자였다.

2. 월리엄 오캄 (William Ockham)

철학적 학설로서의 유명론은 로스켈리누스에 의하여 일찍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입장은 실념론만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일치한다고 믿는 교회의 지도자들에 의하여 비난과 거부를 받았다. 의지의 우위를 강조했던 둔스 스코투스에 뒤이어 유명론은 월리엄 오컴 (William Ockham, 1280-1349년경)에 의하여 부활되고 더욱 완전한 발전을 보았다. 젊어서는 프란체스코회 수도사가 되고, 옥스퍼드에서 배운 뒤, 그 곳과 파리에서 강의를 하였으나, 이단이라는 혐의를 받고, 몇 가지 명제는 유죄 선고를 받아, 교황 요하네스 2세와 알력이 있었다.

그는 논리학과 인식론에서 뛰어나며, 후세에 끼친 영향도 크다. 그의 입장은 유명론으로서, 중세의 사변신학 붕괴기에 근세의 경험론적 사상을 준비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식의 원천은 개체에 관한 직관표상으로, 개체가 실재이고, 보편자는 실재가 아니며, 또한 개체에 내재하는 실재물도 아니다.

보편자는 정신의 구성물이며, 정신 속에서의 개념으로서, 또는 말로서만 존재하고, 정신 속에서의 보편자의 존재는, 정신에 의하여 사고되는 것으로서의 존재이다. 보편자가 다수의 개에 관하여 술어가 되는 것은, 보편자가 다수의 개의 기호로서 이들을 대표하는 것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었는데, 이와 같은 생각은 근세의 영국 경험론자가 답습하였다.

14세기 후반에는 토마스주의와 스코투스주의를 '낡은 방식 '의 철학이라고 불렀고, 반면 오캄 등이 시작한 철학을 '현대 방식 '이라 여겼다. 오캄은 그리스-철학의 숙명론에 맞서 신이 자유롭고 전능하며 창조물은 우연적이라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방어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신의 자유는 창조의 긍정적 모형으로서 신의 이데아가 있다는 점과 양립할 수 없었다.

그는 둔스 스코투스와 반대로 신은 창조할 때 미리 생각해둔 이데아를 사용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우주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창조물들은 공통적인 본성이나 본질이 없다. 실재는 없고 개별 사물만 논을 뿐이다. 오캄은 신의 절대적 자유를 철학적· 신학적 설명의 원리로 자주 사용했다. 자연의 질서는 신이 자유롭게 창조했기 때문에 지금과 다른 것이 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지금 불은 열을 내지만 차가운 것이 될 수도 있었다. 또 도덕 질서도 다른 것이 될 수 있었다. 신은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 인간에 대한 미움을 가치는는 것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진리에 이르는 데 인간 이성의 힘을 지나치게 신뢰하지 않는 것이 오캄의 특징이었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 신의 존재를 확립할 때처럼 개연적 논증으로 만족해야 할 때가 자주 있다. 신앙만이 이 문제와 그 밖의 중요한 문제에 확실성을 제공한다. 오캄이 내놓은 또 하나의 원리는 가설의 수를 불필요하게 늘려서는 안 된다는 원리이다. 이 사유의 경제성 원리는 '오캄의 면도날(Ockham's razor)'이라 불린다.

9. 소수에 의한 철학

중세 유럽에 살았던 유태인들과 이교도들은 사회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집단이었다. 유럽사회에 동화되기 어려웠던 유태인들은 중세 유럽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들은 도시로부터 추방되거나 학살되기도 하였다 받아들여지지 못한 이들의 철학은 과연 중세유럽 철학과의 연관관계가 있을까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의 글을 보면 잠깐 언급하고 지나온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라비아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서구로 완전하게 도입되었던 주요한 경로 가운데 하나였다 그에 반하여 유태 철학은 확실히 그 기원을다른 민족과의 문화 교섭에 두고 있다. 이들 두 철학은 서양 중세의 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① 아라비아 철학

모하메드가 622년에 메카를 떠날 때부터 그의 지도력 아래서 시작되어 그 이후 남유럽 대부분에 걸쳐 퍼져 나갔던 거대한 모하메드의 왕국은 주요한 철학 활동들이 펼쳐질 학문의중심지를 세워야 할 책임을 안고 있었다. 이 중심지 중의 하나는 페르시아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스페인에 위치해 있었다. 연구는 과학의 다양한 분야들에서 이루어졌고 그리스 철학에 대한 그들의 지식은 특정한 분야에서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습득한 것보다 상당히 앞서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에 대한 역서들은 이슬람 신앙과 관계된 그들의 철학에 대한 주석서들과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스콜라철학의 발전에 중대한 관계를 가진다. 이슬람 철학은 그리스도교 세계의 철학과 관련되어 있지만 최초로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른 고대 철학자들을 아라비아어로 번역한 것은 시리아의 그리스도교인이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 이슬람 철학은 그 기원에 있어서도 그리스도교와 관련을 지니고 있다.

이슬람 철학은 동방과 서방의 두 그룹으로 분류되는데 동방의 그룹에서 대표적 인물은 아비세나이고 서방의 그룹에서 대표적 인물은 아베로에스이다.

1. 아비세나

스콜라철학 체계의 참다운 창조자는 아비세나 즉 이븐 시나 (Ibn Sina, 980-1037년)일 것이다. 그는 부하라 근교에서 태어난 페르시아인으로서 아라비아어로 교육을 받았고, 따라서 그의 방대한 저작의 대부분은 아라비아어로 저술되었다. 조숙한 소년이었던 그는 코란, 아라비아 문학, 기하학, 법률학, 그리고 논리학을 잇달아 배웠다. 그는 스승을 앞질러서 스스로 신학, 자연학, 수학, 의학을 연구하여 17세에 이미 의사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그는 여러 회교국 군주의 고관을 지내고 의사로서 활동하면서 많이 분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철학자로서 연구하고 저술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아비세나의 사상에 있어서 두드러진 특징은 넓은 의미에서의 철학을 위한 예비학인 논리학, 사변철학 (자연학, 수학, 신학), 실천 철학 (윤리학, 경제학, 정치학)으로 분류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학을 제 1신학 (존재론과 자연신학에 상응한다)과 제 2신학 (이슬람교의 주제를 포함한다)으로 구분하고 이슬람 신학을 그리스 신학으로부터 구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의 형이상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주의를 차용하고 있으면서도 독자적인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이 특색은 아비세나가 이전의 철학자들로부터 아무리 많은 것을 빌었을지라도 자기 자신의 체계를 신중하게, 또 자주적으로 생각해 내어 독자적인 특징을 지닌 체계로 이루어 내었음을 밝혀 주고 있다.

2. 아베로에스

아베로에스, 즉 이븐 루슈드(Ibn Rusd, l126-l198)는 1126년에 스페인 고르도바에서 법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학, 법률학, 의학, 수학, 철학을 배운 그는 처음에는 세빌랴에서 다음에는 고르도바에서 법관을 지내고 1182년에는 칼리프의 시의가 되었다. 그 후 그는 제2대 칼리프 만수르의 냉대를 받고 궁정에서 추방되었으나 후에 모로코로 건너가서 1198년에 거기서 죽었다.

아비세나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수학, 의학, 법학 및 신학 분야에 정통한 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 철학의 학자였다. 그 또한 아라비아어로 저술하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상이 알고 있는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고 생각하였으며 가능한 한 그의 사상을 널리 알리는 것이 그의 포부였다. 이러한 목표들을 향하여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번역하고 그 저작들에 대한 많은 주석서들을 서술하여 때로 주석가로 불리었다.

아베로에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이슬람의 교리와 조화를 이룬다고 주장하였다. 아베로에스는 신 존재에 대해서 아비세나와 생각을 달리하였다. 그는 아비세나의 영원한 창조라는 생각을 부인하였다. 실제로 그는 어떠한 종류의 창조에 대해서도 그것을 믿는 것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찾아내지 못하엿다. 신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아직 창조되지 않았으며 우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였다.

'이중진리설(Double Trouth)'라고 알려진 그의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코란의 가르침을 만족하게 답하지 못하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결코 틀린 것이 아니다. 반대로 코란의 가르침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상반되어도 코란이 틀 린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베로에스에게서 신학과 철학의 진리는 양립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② 유태철학

유태철학은 고대에는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그리고 중세에는 아라비아 철학의 영향을 받음으로서 성장하였다. 유태철학은 사실 유태지방이 아닌 디아스포라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언어에 있어서도 영향에 따라 고대에는 그리스어 그리고 중세에는 아라비아어로 저술되었고 1200년에 이르러 비로소 히브리어로 저술되었다.

* 마이모니데스

중세의 유태 철학자들 가운데서 가장 흥미를 끄는 사람은 모세르 마이모니데스 (Moses Maimonides, l135-1204)는 아베로에스와 동시대 사람으로 역시 코르도바 태생이다. 그는 1204년에 카이로에서 죽었는데 무어 사람들이 지배하는 스페인은 이미 철학자들에게 적합한 곳이 못 되었으므로 그는 그 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철학에 대한 그의 지식은 주로 아라비아 철학자들로부터 획득된 것이다 그는 유태교적 배경으로 인해 그리스도교들과 마찬가지로 구약성서의 기록들을 높이 평가하였다. <길 잃은 자를 위한 지침>이라는 제목으로 그가 저술한 책은 유태교를 통상의 방법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까다로운 명백한 모순 점들에 대하여 합리적인 설명을 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그는 이러한 난점들이 언어가 사용되어온 방식을 올바로 이해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의 생각에 철학은 성서에 담긴 진리를 파악하는데 거침돌이 아닌 보조자이다. 그러나 그는 성서가 철학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더욱 풍부하게 해 준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철학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의미한다. 예언자를 제외하고 그가 인가 지력의 최고 모범으로 존경했던 사람도 아리스토텔레스였다. 마이모니데스는 알파라비와 아비세나의 자연 신학에 어느 정도 의거하여 여러 가지의 방법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고 피조물로부터 제1원인으로서의 하느님을 논증했다.

그는 이들 논증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과 <형이상학> 가운데 있는 알에 의해서 입증했다. 그러나 비록 마이모니데스가 후에 성 토마스에 의해서 주어진 증명 형식 가운데 대부분을 앞질러 말하고 있었을지라도, 그는 성 토마스보다도 하느님에게는 적극적인 술어를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더욱 강하게 주장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 적합한 어떠한 적극적 관념도 형성할 수 없다.

물론 성 토마스도 이를 인정했겠지만 마이모니데스는 오히려 <부정적인 길>을 더욱더 역설했다. 모세즈 마이모니데스는 그리스 철학과 유태 정통 신앙을 조화시키는 점에서 아비세브보다는 성공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의 영향이 아비세브의 철학에서보다도 마이모디네스의 철학에서 더 현저하다는 것을 주목할 만하다.

III. 결론

중세철학이 무엇일까? 그것은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중세기의 철학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그러한 답을 요구하는 그런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 보다 더 높은 차원의 것이다.

중세철학은 교부철학과 스콜라철학으로 구분한다. 하지만 엄밀하게 진정한 중세철학은 스콜라철학이며, 그것의 준비기간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교부철학이다. 교부철학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대표로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시대에도 신학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이 있었다.

그것은 신플라톤주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참으로 그것이 활발했던 알렉산드리아는 또한 신플라톤주의의 고향이기도하다. 신플라톤주의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여 새롭게 된다. 즉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화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 말고도 다른 이들도 신플라톤주의로 그리스도교의 계시신학을 체계화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흐름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가장 두드러졌다.

그는 그것으로 자신의 저서인 '삼위일체론'의 기본을 이룬다 이 당시 떼르툴리아누스는 철학을 반대하고 신앙만을 고집하기도 한다. 이러한 흐름은 중세기에 이르면서 더욱 활발해지고 그것은 신앙과 철학의 조화를 추구하는 흐름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스콜라철학이다.

그들은 신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 체계화한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마디인 제일 원동자를 신이라고 정의하는 것도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이 이성으로만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신비를 이야기하게 된다. 그리하여 토마스는 자신의 저서 '신학대전'에서 신은 무엇이라 할 수도 그리고 무엇이 아닌지도 모른다고 한다.

즉 그들은 이성을 인정하며 신앙을 인구축한 것이다. 이성으로 신의 지식에 이르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무의미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앙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등장하며. 신앙의 진리에 모순되는 것이 아닌 것으로 등장하게 된다. 즉 철학은 신학을 체계화하는 하나의 수단이 들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한 그들의 움직임은 그들이 수행한 활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해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도 신비주의로 이어진다. 마이스터 엑하르트와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중세기 마지막 철학자 니콜라우스 쿠사누스는 신플라톤주의의 부활을 계획한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은 르네상스철학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간단히 살펴본 중세철학의 일반적인 흐름이다.

여기에서 사용되어진 많은 철학의 용어는 아직도 우리들에게 사용되어지며, 그들의 저술을 연구되고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우리 역사는 중세철학을 중요시 하지 않고 신학의 시녀라는 말을 쓰며 등한시 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중세 천년의 우여곡절을 이해하는 일은 당연히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며 중세의 쇠퇴기 이후, 과학혁명 이후 인류가 진보에 대한 맹목적 신앙으로 인해 중세 철학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과거를 회상할 때 지금에 와서 중세철학에 대해 돌아본다는 것은 먼지나는 버스를 힘들게 쫓아가서 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렇지만 이러한 중세철학을 되돌아 되돌아봄으로서 근세로 이어져 현재에 이어진 사상을 더욱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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