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이냐시오의 성서묵상(聖書默想)

2007. 12. 13. 00:16목양자료/4.기도자료

성 이냐시오의 성서묵상(聖書默想)


1. 기도준비

기도 준비는 약 15분 정도 한다. 이 준비시기 동안에 기도할 장소, 기도하는 자세, 기도를 언제 얼마나 할 것인가 하는것 그리고 기도의 주제 (3개 정도의 요점)를 결정하는 것이다. 보통 이것은 성서 구절 가운데 하나이거나 특별한 주간에는 '영신수련'에서 제안되는 내용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회헌이나 예수회의 문헌들로부터 적당한 내용들로 바꾸어도 좋다 (지정해 주는 독서물들). 아침 묵상일 경우에는 잠자기 전에 다음날 일어날 시간과 아침에 할 묵상에 대하여 기도 준비를 한다. 잠이 깨면 즉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여유를 주지 말고, 마음을 전날 밤에 정한 첫째 묵상제목에로 돌리고, 나의 그처럼 많은 죄악에 대하여 황송한 마음을 일으키기 위하여 상상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크게 상해드린 죄 때문에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면서 서있는 것처럼 생각할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이나 또 묵상자료에 따라 좀 다른 생각을 하면서 옷을 입을 것이다.

2. 기도자세

묵상을 시작할 때는 무릎을 꿇거나 땅에 엎드려서 할 수도 있고, 혹은 누워서 혹은 앉아서, 혹은 서서도 할 수 있겠지만 항상 내가 원하는 것을 쉽게 얻을 수 있는 몸가짐을 취할 것이다. 그러나 다음의 두가지만은 부탁하여 둔다. 첫째, 만일 장궤를 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되면 다른 자세를 취할 생각을 하지 말고, 또 만일 땅에 엎드려서 하는 것이 나으면 그렇게 할 것이다. 둘째, 만일 묵상을 하다가 내가 원하는 것을 발견할 때에는 앞으로 더 나아가려고 하지 말고, 내가 충분히 만족할 때까지 거기 머물러 있을 것이다.

3. 준비기도

기도 준비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는 존경이다. 즉 묵상할 장소에서 한 두 걸음 앞에서서 주의 기도 한번 외울 만한 시간동안 (30초 정도) 마음을 높은 곳으로 향하여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나를 내려다 보시는지 생각한 다음, 겸허한 자세로 존경과 겸손의 표시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모든 의향과 행동과 노력이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과 그에게 봉사함을 위하여서만 마련되도록 하느님께 은총을 구할 것이다.

4. 묵상 : 두개의 길잡이, 세개의 요점 및 한개의 담화

첫째 길잡이 - 장소를 묘사해 보는 것으로 내가 관상하고자 하는 대상이 있는 구체적 장소를 상상의 눈으로 보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 말하는 구체적 장소란, 관상하고자 하는데에 따라서 보게 될 예수님 또는 성모님이 계시는 성전이나 산같은 것을 말함이다.

둘째 길잡이 - 우리 주 그리스도께 나의 소원을 간구함이다. 이 간구는 묵상 제목에 맞추어서 할 것이니, 즉 부활에 대해서 관상할 때는 즐거워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즐거워함을 구할 것이요, 예수 고난을 관상할 때는 고통을 받으신 그리스도께 동정하기 위하여 아픔과 눈물과 고통을 구할 것이다.

세개의 요점 - 기억력을 활용하여 역사를 생각해 볼 것이요, 다음에는 이해력을 활용하여 원인을 생각해 볼 것이요, 셋째로는 의욕력을 활용하여 그 모두를 잘 기억하고 알아듣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지혜로써, 더욱 상세하게 연구하고, 뒤이어 의욕을 가지고 거기에 대하여 더욱 나의 감동을 일으키는 것을 말함이다.

담화 - 십자가에 못박히신 우리 주 그리스도를 눈 앞에 모시고 그와 서로 이야기할 것이다. 즉 주님은 창조주이시면서 어떻게 내 죄를 위하여 사람이 되셔서 영원한 생명에서 현세의 죽음을 당하시게까지 되셨는지 생각할 것이다. 그 다음엔 다시 내 자신에 눈을 돌려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또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를 생각하고, 그리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에 떠오르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고 감동할 것이다. 담화란 근본적으로 말하면,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또는 종이 자기 상전에게 말씀드리는 것처럼, 어떤 때는 무슨 은혜를 간청하고, 어떤 때는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꾸짖어 말하며 또 어떤 때는 자기 사정을 이야기하고 거기에 대하여 의견을 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의 기도 한번을 외울 것이다.

5. 기도 (3개의 요점)

기도에서 두가지 일이 일어난다. 즉 내가 하는것과 하느님이 나에게 하시는 것이 있다. 말하자면 나의 통제하에 있는 것과 나의 통제 밖에 있는 것이 있는 것이다. 내가 기도할 때 통제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다. 나는 성서를 읽을 것이고 예수의 말씀을 듣고, 계시 진리를 알고, 믿음, 희망, 사랑, 청원, 감사, 찬미의 행동을 한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들을 것이다. 나는 찬미가를 노래하고, 시편을 읊고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거나 혹은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성 이냐시오가 우리를 묵상과 관상으로 초대하는 것에 응할 수 있다. 기도의 두번째 양상은 내가 기도할 때 나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성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을 할 동안에 창조주는 성실한 영혼에게 개인적으로 통교할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과 찬미로 불타오르게 하고, 미래에 하느님께 보다 더 잘 봉사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배치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성 이냐시오는 우리가 영들의 여러가지 움직임을 식별하기 위하여 기도의 체험들을 성찰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즉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이끌려지는 은총(恩寵)의 움직임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악신(惡神)의 움직임이다. 영신수련의 묵상과 관상들은 항상 은총과 주님과 함께 하는 대화로 향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감각에서 은총은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을 갖는 것이 아니고,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내 스스로 은총을 야기시키지 못한다. 나는 은총을 청할 수 있고 은총을 기다릴 수 있고, 은총을 받아 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다. 성 이냐시오가 우리에게 요구하도록 명령하는 은총들은 사물들을 느끼고 체험하게 되는 모든 감각적인 은총들이다. 영신수련의 각 기도에서 우리는 이러한 선물을 달라고 하느님께 계속적으로 간청하는 것이다. 대화는 피정자와 아버지 하느님 혹은 예수님 혹은 성모 마리아 사이의 인격적 관계를 설립하고 확정하는데 목적이 있다. 우리는 그 관계로부터 기도해야만 한다. 대화가 기도의 시기에 온전히 침투하면 할수록 더욱더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자라나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하는 것을 우리는 더욱 더 받고 싶게 된다. 기도에 대한 여러가지 요점과 생각들은 주님과 사랑스런 관계로 들어갈 수 있는 내적 태도를 발전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성 이냐시오는 묵상이 길건 짧건 상관없이 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도중에 인내하도록 우리를 격려한다. 메마른 시기에 있을 때 기도에 충실한 것은 자주 갑작스런 은총으로 축복해 주신다. 또한 성 이냐시오는 공식기도를 주의 기도나 다른 친밀한 공동 기도로 암송함으로써 끝마치도록 말하고 있다.

6. 묵상성찰

묵상을 한 후에 성찰을 할 때는 자세와 장소를 변경하는 것이 때때로 도움을 준다. 기도는 내가 한 것과 나의 통제 밖에서 나에게 주어진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내 자신 안에서 이러한 움직임들을 잡고 그것들을 적어두려고 성찰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 성찰에 도움이 되는 질문들이 있다. 전날 밤(혹은 기도 전에 기도준비 15분)에 준비는 착실히 했는가? 하느님의 현존(준비기도때)에서 묵상을 시작했으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했는가? 기도하는 중에 잠심(하느님의 말을 듣기 위한 잠심)하려고 노력했는가?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한 것 같은가? 나에게 무엇이 일어 났는가? 특별히 나를 자극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기도할 때 나는 어떻게 느꼈는가? 묵상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어떠했나? 분위기가 어떻게 변화했는가? 주님이 이 모든 것에서 나에게 말하려고 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다시 기도할 때 되돌아갈 어떤 요점이 있는가?

기도하는 동안 아무런 위안도, 고독도 느끼지 못했을 때라도 묵상성찰을 해보면서 위와 같이 성찰해 볼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공식기도가 끝난후 지나간 시간동안 일어났던 것을 다시 살펴보되 내가 가졌던 생각들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위안, 고독, 두려움, 성냄, 권태 등등과 분심 특히 그것들이 깊었는지 혹은 방해를 하였는지에 대한 것들의 움직임들을 살피는 것이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기도시간에 내 자신이 소홀히 한 것에 용서를 청한다. 때때로 묵상했던 곳으로부터 장소나 위치를 바꿈으로써 묵상성찰의 두드러진 차이가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한 성찰을 15분쯤 하는 것이다. 기도 시작부터 끝까지 진행되어 온것을 지도자와 더 쉽게 토론하기 위하여 나에게 느낌이 왔던 여러가지 성찰들을 대강 적어 두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7. 이냐시오적인 기도방식

묵상은 영혼의 세가지 기능 즉 기억, 지성과 의지를 활용하는 추론적인 기도이다. 묵상의 주제는 추상적인 진실이 아니고 믿음의 구체적인 실제성이다. 묵상에서 지성적으로 이러한 실제성을 간단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그것들을 맛들이는 것이다. 기도의 이러한 방식의 움직임은 하느님의 사랑과 담화에서 표현된 친근한 사랑을 향한 것이다. 성 이냐시오는 자주 관상과 묵상을 똑같게 사용하지만 관상은 보통 영혼의 집중이 복음의 일화 내용에서 느낌이 오는 것에 멈추고, 곰곰히 생각하고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성 이냐시오는 강생 묵상에서 관상의 구체적인 예를 우리에게 준다(영신수련 n.110-117). 모든 이냐시오적 관상에서와 같이 여기서 우리는 복음 내용의 사람들, 그들의 말들과 행동에 대해서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셨으며 교회안에서 아직 살아계신 주 그리스도의 신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은 그 신비적 마음과 영혼에 들어간다. 정말 그것은 주님의 지혜의 일원으로서 우리 안에 완성하게 된다.

기도함에 있어서 되풀이와 오관 묵상은 이냐시오적 방법의 특징들이다. 이냐시오는 보통 5번을 묵상하도록 한다. 첫째, 둘째 묵상은 피정자가 노력을 해야만 하는 새로운 문제를 제공하고, 세번째 묵상은 첫째, 둘째 묵상을 되풀이 하고, 네번째 묵상은 세번째 묵상을 되풀이 하고, 다섯째 묵상은 이것을 오관으로 묵상하는 것이다. (영신수련 n.45-72) 이 다섯개 묵상에서의 움직임은 나에게 원기를 주는 매우 행동적인 기도로부터,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평화롭게 받아 들일 수 있는 수용적인 기도까지 있다. 묵상을 함에 있어 생각에 대한 새로운 주제를 택하기 보다는 첫째, 둘째 묵상에서 나에게 강하게 느낌을 주는 생각이나 감정들로 되돌린다. 커다란 위안이나 고독 또는 일반적으로 더 큰 영신적 맛을 느끼는 것에 더 머무르는 것이다. 되풀이의 목적은 이미 묵상한 주제를 가지고 하느님의 움직임을 내마음 안으로 더 깊게 가라 앉히는 것이다. 네번째 묵상은 때때로 요약으로 불리워지는 되풀이를 말한다. 다섯번째 묵상은 오관묵상으로 오관묵상은 내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고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에 내 자신을 몰입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새로운 사상을 생각하거나 혹은 신비속에 들어가는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는 문제도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기도의 부분이었던 모든 체험들을 증진하는 것이다. 즉 묵상에서 나의 감각으로 주의 집중하여 보고, 냄새 맡고, 느끼는 것을 받아들이는 자동적이고 수동적인 방법에 가깝다. 어떤 방법이든지 간에 가장 생생하게 나의 것이 되어 소화될 수 있도록 그리스도 생애의 특별한 신비에 온전히 감동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냐시오 관상에서의 상상력 사용]

목차
I. 서론
II. 이냐시오적 관상과 그에 대한 반론들
III. 이냐시오적 관상에서의 상상력 사용
IV. 결론



I. 서론

필자가 끊임없이 품어온 가장 심각한 질문의 하나는 기도할 때에 상상력을 사용하는 것이 좋은지의 여부다. 필자가 예수회에서 배운 "이냐시오적 기도"는 영신 수련에서 소개하는 바와 같은 상상적 관상의 형태를 의미한다.

이냐시오는 상상력을 통해서 한 인간이 하느님과의 사랑에 끌리도록 해야 한다는 점에 특별히 마음을 쓴다. 그러나 필자는 [명상의 씨]와 같은 토마스 머튼의 책들과 불교 도교 등의 동아시아 종교전통에도 감명받은 바가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상상력 사용을 반대하는 입장에 있는 것들이다. 이런 상황으로 말미암아 필자는 상상력 사용이 더 좋은지 나쁜지의 질문에 대해 답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국의 예수회원들이나 수녀들, 피정 중에 만난 평신도들도 상당수가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해 갈등과 혼란을 느끼고 무언가 답이 있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종교간의 대화 이전에 상상적 관상과 비상상적 기도 사이에 먼저 대화할 필요마저 느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어떤 형태의 기도가 더 좋은가 하는 질문은 이들 두 형태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하는 게 바람직한가 하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먼저 각 형태의 기도가 어떤 사항을 핵심으로 하는지를 살펴 볼 것이고 그런 다음에 두 형태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서 제안을 해 볼 생각이다. 특히 우리의 상황이란 것이 세속적인 문화는 상상적인 반면에 종교적인 영성은 비상상적인 사실을 감안할 때에 상상적 관상의 의의와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상상력을 사용하는 이냐시오적 관상은 "무지의 구름"에서 경험하는 것과 같은 하느님과 세속 문화 사이를 잇는 다리로서의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그 세속적 문화를 정화할 수도 있을까?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기도를 할 때에 상상력을 사용할까? 마지막으로 나는 이러한 가능성들을 검토해 볼 것이다.


II. 이냐시오 관상과 그 반대편들

이냐시오 기도는 특히 상상적 관상이다. 이냐시오 관상이 여타의 형태의 관상과 구별되는 것은 그것이 상상력을 폭넓게 활용한다는 점이다. 그 일차적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현장에 있도록 하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은총을 얻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Copeland 25).

예수님 탄생을 관상할 때에 이냐시오는 우리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 예수를 보고 관상하라고 권한다. 예컨대, 마치 우리가 거기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살펴 돌봐주는 것을 상상해 보라는 것이다(Exx114).

이냐시오는 또, 우리의 창조적 상상력의 활용을 뜻하는 오관의 활용이라는 것을 통해서, 그들이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말할지도 모르는' 것까지도 상상의 귀로 들어보라고 제안한다(Exx 123). 영신 수련 전과정을 통해서 이냐시오가 피정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결국 상상력의 연습이다. 둘째 세째 네째 주간에 그리스도의 삶에 관해 묵상할 때에, 피정자에게 시각적 상상력의 연습을 격려하는 것은 참으로 주목할 만한 것이다 (Byrne 5). 둘째 주간의 시작부분에서, 피정자는 예수의 삶과 봉사의 복음 장면을 관상함으로써 예수와 더욱 찐한 관계가 되도록 초대받는다.

이냐시오는 '오관의 활용'에 의해서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보고 맡고 맛보고 느끼고 듣는 것을 만족시키는 식의 관상을 하라고 권한다. 그는 세상의 감각과 영상을 버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정자가 성서 장면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를 현존케 하는 한 방법으로서 상상력을 활용하라고 격려한다 (Sachs 79f.).

이것은 부정의 길 부류의 관상이 아니라 긍정의 길 부류의 관상이다 (Ibid 76). 긍정의 길 전통은 빛의 전통이다. 그것은 긍정을 통해서 하느님 이해에 도달한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가 피조물 안에서 발견하는 모든 탁월성을 가장 완전한 경지로 소유하심을 긍정함으로써 하느님을 알게 된다.

관상적 체험에 대한 긍정의 길은 하느님의 실재를 서술하기 위해서 피조물로부터 도출된 상징들을 활용하는 것이다. 유한한 것들의 좋음과 아름다움은 무한한 분의 좋음과 아름다움을 긍정=확인하는 데에 일조한다.

긍정의 길 신학은 유비라는 방식에 의해 전개된다. 인간적 맥락에서 부성, 모성, 정의, 자비 등의 경험은 피조물의 세계를 통해 하느님의 실재를 향해 바라보는 창문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러한 경험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뭔가를 유비적으로 알게 하는 데에 활용되는 것들이다 (Shannon 9, Kaisch 219).

한편, 부정의 길은 어둠과 부정의 전통이다. 그것은 어떠한 인간적 개념도 하느님을 담거나 이해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하느님은 그러므로 우리에게 계시로써 은총을 주시고자 함을 제외하고는
본질적으로 알수 없는 분이다. 따라서, 오관 묵상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감각을 통해 하느님께 도달하려는 어떤 시도도 오직 부분적으로만 성공적일 뿐이 될 것이다 (Kaisch219).

부정의 길 지지자들은 부정의 길이 참으로 관상적인 체험에 있어서 본질적인 단계라고 믿는다. 그 이유는 관상을 할 때에 개념과 이미지라는 게
더이상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지점이 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든 피조물 안에 하느님이 각인되어 있음이 사실일지라도,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의 무한한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Shannon 10). 하느님의 현존은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뚜렷한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무지의' 상태로서인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수동적이고 수용적인 마음의 상태를 추구하며,
조심스레 무지의 어둠으로 들어간다 (Shannon 10, Kaisch 219).

부정의 길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전통에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닛싸의 그레고리오, 위 디오니시오, 무지의 구름의 저자, 마이스터 에카르트, 십자가의 요한, 그리고 토마스 머튼과 같은 사람들의 길이다 (Shannon 9f., Egan 69, Kaisch 219f.). 비록 부정의 길 전통이 오래되고, 존경할 만한고 지속적이지만, 동시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의심어린 눈으로 보면서 심지어는 '동방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반면에 이 전통의 수행자들은 이미지를 사용하는 기도를 진지한 묵상의 작은 기슭과 같이 보면서 산을 올라 가면 뒤에 남겨 두게 될 것쯤으로 생각한다 (Egan 69).

사실 두 전통은 카톨릭 그리스도교 역사안에서 모두 잘 표현되어 있다.
둘의 차이점은 일부 기질상의 차이로, 문화적 축적, 개인사 등의 차이로 설명될 수 있다. 두 형태의 관상은 모두 유태교, 불교, 그리고 힌두교의 역사안에서도 기술되고 있다. 우리는 의심과 배척을 넘어서서 이들 대조적인 수행들을 모두 포용할만큼 충분히 큰 개념들로 발전시켜 갈 필요가 있다 (Ibid. 70).

일반적으로, 카톨릭은 카톨릭이라는 말 자체가 의미하듯이, 모든 진리와 가치에 대한 도저한 개방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카톨릭은 풍부하고 다양한 그리스도적 체험과 전통의 전부를 모두 다 끌어 안는다. 그것은 본성과 은총에 대해서, 상상력과 비상상력에 대해서, "이것 아니면 저것" 식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모두" 식의 양자 포용의 접근법을 특징으로 한다 (McBrien 1190). 이런 이유로 카톨릭은 늘 '부정의 길'에 속하는, '우상파괴적인', 또는 '변증법적인' 상상력의 결과물들을 위한 여지, 달리 말해서 침묵과 고독, 초탈을 위한 자리를 제공해 왔다 (Egan70).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톨릭안에는 전체로서의 그리스도교 전통을 분별하는 데 있어서 규범적인 특성을 지니는 가치들의 형태가 있다. 이러한 가치들 중에는 첫째, 카톨릭의 성사에 대한 감각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며,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것 안에 계심)을 비롯해서, 둘째, 매개의 원리 (신성한 것이 일상사를 통해 변화시키는 힘으로서 우리에게 활용가능함) 세째, 합리성과 비판적 실재론을 향한 움직임, 네째, 역사에 대한 온당한 존중, 다섯째, 유비적 상상력(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은 서로 다른 것이라기보다는 서로 비슷한 것임)등이 포함된다 (McBrien. 1199f.).
모든 큰 종교들중에서도 카톨릭은 매개의 진실성, 궁극적 의미의 담지자로서의 육체성, 상징 등에 대해서 가장 크게 강조한다. 이런 까닭에 카톨릭적 그리스도교는 늘 말씀으로, 신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의 인간에 대한 긍정으로, 성사적 감수성으로, 강생하신(육화한) 말씀에 대한 신앙으로 복귀한다.

그러나, 실재에 대한 성사적 시각(비젼)에는 그 자체 위험이 배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말할지도 모르는 것들을 들음'(Exx 123)은
창조적 상상력의 세계 전체를 열어 보일 수 있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역사에는 거짓된 신비가들, 무의식적인 사기꾼들, 자기 기만과 신경증적 히스테리라고 하는 것들의 희생자들로 가득차 있다. 진정한 신비 체험의 전수자들인 성인들과 교회는 늘 이러한 환상의 가능성에 대해 알고 있었다 (Hewett 11f.).

이런 이유에서 영신 수련은 '둘째 주간에 더 적합한' 영의 식별을 위한 규칙들을 강조하는 것이다 (Hewett 12, Lonsdale 81, Exx 139).

상상적인 관상에는 위험만이 아니라 한계도 있다. 토마스 머튼이 [새 명상의 씨]라는 책에서 말하고 있듯이, 관상은 늘 우리 자신의 지식 너머에, 우리 자신의 빛 너머에, 그리고 설명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다 (Merton 2). (참고: 토마스 머튼의 이 책에서 소위 향심 기도centering prayer의 발상이 발원되었음) 마찬가지로 우리는 관상이란
우리 자신의 상상력을 초월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머튼이 말하는 것처럼, 관상은 모든 형태의 직관과 경험을 벗어나 있다. 그것이 예술에서건 철학에서건 전례에서건 또는 일상적 차원의 사랑이나 신녕에서건 상관하지 않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관상이란 이 모든 것들의 가장 높은 완성이기에 이 모든 것들과 양립 가능한 것이며 또 그래야 한다고 덧붙여 말한다(Ibid).

머튼은 하느님을 관상할 때에 초월성을 강조하는 한편, 신적 내재성을 관상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는 마지못해 동의하는 데에 그쳤다. 그가 생각하기로 낮은 수준의 관상, 즉 긍정의 길은, 더 높은 차원, 즉 부정의 길을 향해 다시 태어 나기 위해 "죽어야" 하는 것이다 (Ibid.).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가 역설적 일치를 이룬다고 할 수 있지만, 단순화의 위험을 안고 말한다면, 긍정의 길은 예수의 탄생에서부터 수난과 죽음 까지의 예수에 상응하고, 부정의 길은 예수 부활 이후의 그리스도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이렇게 볼 때에 머튼의 부정의 길은 궁극적 혹은 이상적 목적지이다. 이 이상적 상태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가리킬 수 있을 따름이다. 긍정의 길 전통이 부정의 길과의 대화를 통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제한되고 불완전하며 위험하기도 한, 모든 종류의 "예스"에 대해서 "노"라고 말하는 것이며 (Egan 70)
궁극적 목적지를 향해 끊임 없이 지금 이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III. 이냐시오 관상에서의 상상력 활용

우리는 죽은 다음에 물질적 차원보다 더 높은 존재의 차원으로 다시 태어나기 이전에 우선 물질적 육신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 우리는 낮은 차원에서 높은 차원으로 긍정의 길에 의한 관상을 해야 한다.

에간(Egan)이 말했듯이, 긍정의 길은 부정의 길이 지닌 가치를 존중하고 포용하는 것으로서, '신학적 인간학'과 그리스도론의 측면에서 중요하고
또한 카톨릭 신앙에 있어서 신비적 차원을 예언자적 또는 사도적 차원과
통합시킨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cf. Egan 65).

특히, 긍정의 길은 우리 문화를 위해서도 중요하니, 이는 상상력이 바로 우리 문화를 형성하는 까닭이다 (Ibid, Lifton 74).

지난 두 세기에 걸쳐서 넓혀진 문화 안에서 갖게 된 이미지나 상징에 대한 태도들은 다대한 변화를 몰고 왔다. 수많은 예술가들, 철학자들, 심리학자들은 상상력을 그들 작업의 중심축으로 삼았다. 역사학자, 물리학자, 경제학자들마저도 때때로 자기 학문세계에서 차지하는 상상력의 역할을 인정한다.

우리의 문화는 때때로 '포스트모던'이라고 서술된다 (Egan 66). 이 포스트모던 문화는 이전의 문화보다 더 상상력에 의존하는 바, 그 영성 안에서 이미지의 사용을 요구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세속적인 상상력 활용에 대해 응답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포스트 모던 문화 안에서 세속적인 이미지 사용은 수많은 문제를 노출시킨다. 자살의 환상들, 격분과 분노에 대한 열광적인 이미지들, 이른바 죽음의 문화가 기승을 부릴 위험성들, 소비주의 문화 안에서의 불건강한 이미지 조작 등이 그 예이다.

세속적 상상력은 비판과 참회에 이은 진작을 요청하고 있다. 이냐시오 관상은 상상력의 이 뜻한 바 있는 활용의 과정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Egan 66f.).

그것은 상상력을 환영하는 세속적 문화와 상상을 배제하는 종교적 영성 사이를 이분법적으로 가르는 저 낡은 분리의 간극을 좁히는 데에도 일조할 수 있다. 이냐시오 관상은 그러한 역할들을 해낼 수 있다. 그것은 현실적 감각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이상적 가치를 음미할 줄도 아는 비판적 실재론의 길이기 때문이다 (McBrien 1192-1196).

이냐시오는 스스로 개인의 관상에 있어서 스타일상의 발달 과정이 있음을 인식하였다. 영신수련은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를 향해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일종의 영적 순례로 사용될 수 있다.

물론, 사람들은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하며 서로 다른 경로로 여행한다.
일부는 '밝고 경이로운 세상 아래서' 하느님을 친절하시고 사랑하시고 창조하시는 현존으로 이해하도록 자랄만큼 행운아들이다. 그들에게 관상적으로 됨이란 더 분명히 하느님을 보고 음미하는 일이며, 하느님께 대한 신뢰감으로 그분을 깊은 힘의 원천으로 삼게 된다.

또 다른 일부는 할 일이 더 많이 있다. 하느님이 세상 안에서 현존하고 활동하심은 그들에게 더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강력하지만 제멋대로인 분, 요구하고 억압하고 신뢰할 만하지 못한 분으로 알고 있다. 그들에게 관상적이 됨이란 흔히 하느님에 대한 그들 자신의 이미지들을 갖고 자꾸 씨름하는 것, 그리고 하느님을 발견하고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긴 과정을 함축하고 있다.

기도에 대한 인격적 체험을 할 때의 변화와 발전은 삶의 다른 영역에서의 성장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특히 기도할 때의 변화는 우리가 때때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저변에 깔린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에 체험하는 것은 삶의 나머지 부분을 다스리는 태도의 표현이자 척도이기도 한 것이다 (Lonsdale 83).

피정자는 묵상할 장면을 설정함과 동시에 관찰한다. 그것(장면)은 (피정자 마음의) 외부로부터 온 것이지만, (마음) 내면으로 온 어떤 것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 장면을 재생(재현)하지만, 상상력은 그 자체가 세부를, 새로운 가능성을, 그리고 뜻밖의 결과들을 산출해 내게 되어 있으며, 그리하여 피정자의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는 무언가에 대해서 드러내어 비추어 주는 것이다 (Egan 67).

활동적인 삶의 한 가운데에서 관상적인 삶이 점증하게 되는 사람에게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공통되는 지표의 하나는 기도가 더 단순해지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한때 관상이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거기에 반응하느라고 상상력을 바쁘게 사용하는 식이었던 데에 반해, 이제 어떤 이미지를 단순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주의력을 유지시키고 감정을 개입시키며 깊은 태도를 촉발할 수 있게 된다 (Lonsdale 83).

영신 수련에서 이냐시오는 기도가 단순해지리라는 것과 영신수련하는 이가 점차 물질적인 것을 덜 필요로 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다. 그가 '오관의 활용'이라고 부르는 방법은(Exx 121-126) 단순화에 의한 발전과정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이냐시오 관상은 초심자용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기도에 있어서 여러가지 발전 단계들을 포괄하고 있다 (Lonsdale 79).

따라서 그것은 부정의 길에서 제시하는 이상에 접근하고 있으며
그 이상과 양립할 수 있기도 하다.

성장함을 알려주는 또다른 지표들이 있다. 그것은 기도와 일상 생활의 상호 작용과 관련되어 있다. 활동 한가운데서 점차 관상적이 되어 가노라면, 기도시에 일어난 일이 여타의 일상 생활에도 역동적이고도 구체적인 영향을 미친다. 특히, 개인이 어떤 선택을 할 때에 그렇다.
삶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러한 변화는 이미 일상생활의 일부가 된 사람들과 사건들에 대한 반응의 질에 있어서 가장 뚜렷이 나타난다.

이냐시오 관상에서 성장이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은 하느님의 세상 안의 현존과 활동에 대한 감수성 향상이다. 이 향상된 하느님 알아차리기(awareness)는 일상적 경험 안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신문에서, 하느님의 신호(signs)를 찾으려는 의식적 노력으로서 흔히 시작되며,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행하려는
간단 없는 투신과 함께 진행된다.

이와 더불어 하느님과 맞서고 거스르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남의 고통과 세상의 고통에 대해서 그에 상응하는 감수성의 성장을 보게 된다.

자못 역설적인 것은 일상 생활의 한가운데서 진실로 관상적인 사람들이
불의에 대한 이러한 감수성을 그대로 지니면서도 깊은 고요와 내적 평화도 함께 펼쳐나간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이냐시오 관상은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물러난다거나, 불행하지만 불가피한 현 상태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기 보다는, 사람들로 하여금 변화를 위해 일하고 기도하라고 격려한다. 현존하되 숨겨진 하느님의 영광과 나라를 더 분명히 볼 수 있도록 말이다.

따라서 이냐시오 관상은 관상과 활동 사이를 가르는 기존의 전통적 이분법을 극복하기 시작한다 (Sachs 79).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의 피정자들이 지닌 이냐시오적 상상력의 감각이
너무나 딸린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알아차리기가 부족하여서 영신수련의 창조적 과정으로 진입하는 것조차도 어려움을 겪는다 (Hewett 11). 아씨에골리는 더 강력하게 말한다. "이미지의 촉발과 창출이라는 바로 그 의미에서, 상상력이란 의식적인 측명에서건 무의식적인 차원에서건,
인간 영혼의 가장 중요하면서도 활기차게 자발적인 기능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상상력은 다스려져야 할 것이니, 지나치면 줄이고, 빈약하면 단련하고, 그 위대한 역량에 상응하게 활용되어야 한다”( Assiegoli 143).

특히, "빈약하면 단련하고"는 아마도 오늘날의 피정 지도자와 피정자에게 더 중요한 조언일 것이다. 우리의 시각에 대한 폭격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상상력은 사소화 경향을 보인다. 많은 사람들은 상상력을 단순히
만족감을 주는 환상의 창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피정지도자는 피정자가 환상이 상상력의 진정한 의미라고 하면서 자기는 그러한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불평하면 그 피정자를 달래주면서 타협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 있다 (Hewett 4). 그러한 개념이 이냐시오의 상상력에 대한 풍부한 이해와는 얼마나 거리가 먼 얘기인지 일별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저 이냐시오가 '오관의 활용'이라고 통상 부르는 되풀이의 둘째 요점을 간단히 상기하기만 해도 된다. "다섯째 관상은 첫째와 둘째 관상에다 나의 오관을 활용함이다. ... 둘째 요점은 그들(그리스도와 성모 등)이 말하거나 말할지도 모르는 것을 (상상의) 귀로 듣고 반성함으로써 영신적 이익을 거둔다(Exx 121-23)”.

약한 상상력을 훈련하는 문제 이외에도, 건강한 상상력을 사용하여야 한다는 과제도 있다. 상상하는 행위는 모두 놀이의 요소, 자유와 쇄신의 표현, 현존하는 자원(이미지와 언어 등)의 창조적 사용 등을 포함한다. 이미지와 언어가 의식에 대해서 너무 경직된 강요를 하면, 그 결과는 문자의존적 사고 형성, 상투적 인습주의, 그리고 심한 경우, 일종의 '신경증' 등에 빠지는 것이다.

반면에, 내적 충동과 욕구가 활용 가능한 언어와 이미지의 자원들을 압도할 경우에는, 그 결과는 특이 성향, 사실무근의 환상, 그리고 일종의 '자아도취' 등에 빠지는 것이다. 건강한 상상력은 사실과 욕망 사이의 중간 지대로 이동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Egan 67).

IV. 결론

우리의 논의는 "기도할 때에 상상력을 사용하는 것이 좋은가?" 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었다.

필자를 포함하여 많은 한국인들은 상상력을 세속 문화에서만 다루고
관상에서는 배제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물론 상상력 사용에는 신중해야 하며 부정의 길 전통이 '상상력을 넘어서'에 대해 말하는 바를
경청해야 하는 면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상상력 사용과 불용에 대해서 '이것 아니면 저것'하는 식의 양자 택일의 접근마저도 넘어서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의 길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긍정의 길의 관점에서 '이것도 저것도' 하는 식의 양자 포용의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

우리는 왜 긍정의 길로부터 출발해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이유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것은 신학적 인간학, 그리스도론, 그리고 관상과 활동의 통합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문화적 상황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것이었다.

상상력의 문제는 세속 문화의 영역에만 일임하여 방치해서는 안되며 복음의 빛에 비추어 정화되고 완성되어야 할 내면의 선교지로서 아주 중요하고 보배로운 가치를 지닌 것이다. 그리하여 이냐시오 관상은 왜 그리고 어떻게 점진적으로 성장시키는 방식으로 "이것과 함께 저것도" 시도하는 양자 포용의 접근 가능성을 열어 주는지에 대해 고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빈약한 상상력을 단련시키면서 건강한 상상력을 배워나갈 것을 강조하였다.

에간(Egan)이 말하듯이, 바로 상상력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마음의 상태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우리 마음밭을 교육시킴으로써 이 마음밭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의 움직임에 합당하게 더 온전히 우리 자신을 조율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Egan 67).

이처럼 상상력을 활용하는 궁극적 목적은 우리 주 하느님을 찬미 공경하고 그분께 봉사함, 그리고 이를 통해서 우리들 자신의 영혼을 구함에 있다 (Exx. 23).

우리의 상상력은 자기 이익과 자기 의지와 자기 사랑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Exx 189). 그래서 이냐시오도 준비기도를 하면서 우리의 모든 지향과 행동과 상상력이 오직 하느님을 찬미하고 섬기는 방향으로만 움직일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라고 권하시는 것이다 (Exx 46).

우리가 만일 늘 순수한 지향의 중요성을 명심한다면, 기도할 때의 상상력 사용이 아주 유익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상상력 훈련에 실패한다면 우리는 온전히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길 수 없고 그분과 일치를 이룰 수도 없다.

내면의 이미지들의 흐름은 우리의 외향적 관심(at-tension)과 내향적 의도(in-tension)를 조직하고, 우리의 행동을 구성하며, 우리의 마음밭을 드러내면서 영혼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뭔가를 비추어 준다 (Egan 67). 관상할 때에 상상력을 사용하는 법을 훈련하는 일은 이냐시오 관상의 '봉사의 신비주의'를 위해서뿐 아니라, 부정의 길이 강조하는 사랑, 그 '정배의 신비주의'를 위해서도 중요한 것이다 (cf. Sachs 77f.).



[참고 문헌]

Assiegoli R., Psychosynthesis, (Wellingborough, Northanpton,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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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nns, G.E., (translated and commented), The Spiritual Exercises of Saint Ignatius, (St. Louis, Missouri: The Institute of Jesuit Sources, 1992)

Hewett W., “The Exercises: A Creative Process,” The Way Supplement, Vol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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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ton R.J., The life of the self: toward a new psychology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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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Brien R.P., Catholicism, (New York: HarperCollins,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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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chs J.R., “Ignatian Mysticism,” The Way Supplement, Vol 82

Shannon W.H., Thomas Merton’s Dark Path, (Toronto: McGraw-Hill Ryerson, 19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