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2. 13. 00:12ㆍ목양자료/4.기도자료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1. 기도는 주문적(呪文的)이며 자기만족적 차원을 넘어선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극히 제한적이고 한계성이 분명한 존재로 지으심으로 당신을 향하여 기도하는 존재로 인간을 부르셨다. 누구도 기도의 삶을 거절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기도는 무엇인가 성취하고자 하는 내면의 욕구로부터 비롯된다. 성취되어져야 할 대상이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능력의 한계를 넘어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때 기도는 더욱 강렬해진다. 기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내면의 갈망이 어떤 식으로든지 식지 않아야 한다.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져야 한다. 샤머니즘의 기도이든지 기독교의 기도이든지 이러한 믿음이 없이는 기도를 지속할 수 없다. 그 믿음의 근거는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기도의 효험에 대한 경험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간접적인 효험이란 지속적으로 기도를 하는 동안 내면의 평안을 느끼고, 마음의 확신을 얻는 것이요, 직접적인 경험이란 그 기도로 말미암아 욕구와 결과가 일치되는 때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샤머니즘적 기도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어떤 전통의 기도든지 기도에는 주문적(呪文的) 특성이 있다. 거듭 거듭 기도가 드려짐으로서 하나님은 우리의 정성을 보시고 우리의 소원에 응답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단순히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기도를 통해서 삶의 주인이신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와 대화를 시도한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의 기도가 인격적인 대화와 교제의 차원이 결여된 오직 주문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다면 샤머니즘적 기도와 차이를 두기가 어렵다. 보통 주문적인 차원의 기도는 자기 감정에 충실하거나 공적주의적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한 기도자들은 기도를 하는 동안 자기의 심리적인 만족을 기도의 가장 우선순위로 둔다. 그 정도에 따라서 기도의 진행을 가늠한다.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바알 및 아세라 선지자들 850명이 함께 기도로 대결하는 장면을 눈여겨 보자. 먼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의 기도의 모습이 어떠했는가? 그들은 제단 주위를 돌면서 뛰놀았다. 큰 소리로 부르고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들의 몸을 상하기까지 하였다. 부르짖고 부르짖었다. 결과는 무응답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들의 기도가 아무 응답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욕구로부터 결코 자유함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증거를 자기감정에 두려 하였다. 그래서 자기의 몸을 상하기까지 자기 감정에 몰입했다. 반면에 엘리야의 기도는 전혀 달랐다. 그는 단 앞에 나아가 이렇게 아뢰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왕상 18: 36). 그는 자기의 감정에 의존하지 않았다. 오직 조상들과 교제했던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신뢰하면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시도하였다. 이 기도는 결과를 철저히 하나님께 내맡기는 자유로운 교제의 기도였으며 그 분의 처분에 결과를 내맡기는 기다림의 기도였다. 조급하거나 서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의 만족과는 관계없이 믿음으로 내맡기는 기도였다.
우리는 때때로 기도의 형식에 대하여 논란을 벌인다. 통성기도에 익숙한 사람으로 하여금 침묵기도를 요구한다면 머지않아 기도의 흥미를 잃어버리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 이유는 침묵기도를 하노라면 통성기도에서 얻은 능력과 만족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 능력과 만족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본질적인 것이라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침묵기도보다는 통성기도를 선호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은 형식에 관한한 양면성을 띠고 있다. '부르짖으라 내가 응답하겠고 네게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것을 보이리라'고 말한다(렘 33: 10). 반면에 예수님은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마 6: 6)고 하신다. 그래서 침묵기도로부터 만족감과 능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본질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적응의 문제요 심리적인 문제이다. 청중들이 함께 모여 기도할 때는 부르짖는 통성기도가 더 적합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기도는 같은 주제를 두고 여러 마음들이 한 마음 한 뜻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기도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홀로 있을 때 내면을 깊이 성찰하면서, 마음 깊은 곳으로 임하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원한다면 때때로 깊은 침묵(내면)의 기도가 필요하다. 시편기자는 '너희는 잠잠하라 그러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46: 10)라고 했다.
2. 기도는 춤이요 충만한 교제이다
기독교 기도의 독특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심리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심리적인 자기 만족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반응에 귀를 기울이는 기도가 필요하다. 기도는 마치 침묵 가운데 이루어지는 춤과 같다. 춤은 춤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 있고, 이끌림을 받는 사람이 있다. 기도에 있어서 춤을 이끌어 가는 분은 성령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이끌림을 받는 대상이다. 그러므로 기도에는 리듬이 있다. 주님이 스텝을 빨리 이끌어 가시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이면서 따라가야 한다. 어떤 때는 스텝이 느리게 진행되거나 멈추기도 한다. 이 때 우리는 인내하면서 천천히 따라가거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이러한 기도의 리듬을 잘 감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 후에 반드시 기도의 진행 상태를 반추할 필요가 있다. 거듭되는 반추를 통하여 기도의 흐름을 파악한다면 우리는 성령님의 이끄심을 감지할 수 있다. 혹은 이끌림을 받는 자세를 점검함으로서 더 능숙한 춤꾼, 즉 더 성숙한 기도자가 되어 간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심리적인 만족을 인위적으로 얻으려 하기보다는 성령님께 내어 맡기는 기도이다. 성령님께서는 때로 기도자를 사막에 버려두는 듯한 깊은 메마름과 고독 속에 빠지게 할 수 있다. 그럴 때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갖가지 수단에 의존하여 심리적인 만족을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곧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기도 모습과 비슷하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의 기도가 주님과의 교제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심리적으로 고독하고 메마를지라도 그 분의 반응을 주시하면서, 인내로 기다리는 자세가 곧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의 특성이다.
그리고 그 기도의 결과가 자기 욕구와의 일치 정도에 따라서 기도의 효험성이나 능력을 평가한다면 그것도 역시 샤머니즘의 기도와 차이가 없다.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의 효험을 말하고자 할 때 그것은 다차원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기도의 다차원적인 특성을 말하면 청원적 성격,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성격 그리고 자기변화적 성격을 지닌다. 실용적 성격으로서의 기도를 생각하자면 무엇보다도 거룩한 것이든 세속적인 것이든지간에 자기의 내면의 욕구를 성취하는 수단으로서 기도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결과가 자신의 청원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할 때 기도의 효용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샤머니즘적 기도라면 더 이상 그 기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란 그 청원목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더 나아갈 또 다른 목적이 있다.
청원적 기도를 할 때 왜 동일한 내용을 거듭거듭 올려야 하는가? 몇 마디로는 우리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인가? 만약 그것이 샤머니즘적 기도의 차원이라면 주문을 외우듯 공을 들이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마침내 신을 감동시켜 움직여 보자는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서 통한다. 그런데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반복적인 기도 역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한 내용을 가지고 매일 매일 반복적으로 기도를 하는 것은 결코 공을 들이거나 하나님을 감동시키기 위한 행위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의 기도는 그 자체에 어떤 공로적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된다. 거듭되는 기도는 하나님께 어떤 정보를 제공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향하여 굳게 닫혀진 자신을 개방하려는 것이며, 자신이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화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이 자유로운 개방 속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많이 왜곡되고, 닫혀져 있어서 거듭되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 마음이 관대해지고 부드러워져서 개방적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기도의 결과가 자기의 욕구와 일직선상에 놓여있지 않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다른 차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3. 기도는 자기를 변화시킨다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굴복시키려는 하나님이 주신 은총의 행위이다. 샤머니즘적 기도는 결코 기도의 대상을 향하여 자신을 굴복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기도는 자기를 강하게 세워가는 수단이다. 만약 기도의 결과가 자신의 욕구와 일직선상에 놓여있기를 고집한다면 그 기도는 청원적 성격 이상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구하든지간에 그 결과에 대해서 개방적인 자세를 취한다면 마침내 그 기도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보게 된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기도의 방법}이라는 그의 역작에서 "기도란 하나님을 움직이거나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움직이게 하고 우리 자신을 강요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기도란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다 더 잘 이해하는 데에 그 일차적인 중요성이 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초월하여 자기 자신을 관조(觀照)할 수 있는 영성적인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이 기도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서 실현된다.
우리의 욕구가 기도 생활의 원천적인 동기가 되는 것은 사실이나, 집요하게 그 욕구에 대한 만족감과 안위함만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맹목적인 욕구가 된다. 맹목적인 욕구란 비인격적인 간구를 의미한다. 맹목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기도 속에는 어떤 인격적인 관계도 추구하지 않는다. 그런데 청원적 목적을 뛰어넘어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향하여 개방되어 있는 기도를 하노라면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연약함을 절감하며 동시에 그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절대적인 신뢰와 순종을 보내게 됨으로서 역설적인 강함을 체험한다. 만약 신뢰와 순종이 없는 자기 욕구에 집착한 기도는 자기 암시적인 효과를 주기 때문에, 그 욕구와 안정을 보장해주는 왜곡된 하나님의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며, 그 투사된 이미지 안에서 부정적인 개인의 인격이 형성될 수도 있다.
기도는 분명히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청원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결코 변덕스러운 신이 아니며, 기도는 하나님께 소원목록을 상정하는 것 이상이다. 기도는 우리의 눈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비젼과 그 목적을 보게 하는 길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로,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운동, 즉 만남의 행위이다. 이 만남이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이루어지면 그것이 참 기도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건강한 기도는 맹목적인 욕구로부터 벗어나 통찰력과 하나님과의 관계형성과 그리고 적어도 어렴풋하나마 하나님이 우리 안에 두신 소원을 이루어 가기 위한 몸짓이 기도이다. 예를 들어 "내가 무엇을 원합니다," "내가 만족과 기쁨을 얻기를 원합니다" 등의 욕구가 동기가 되어 기도를 시작했을지라도, 이 기도가 다른 사람들을 포함하고, 나아가서 하나님 자신에게 이르다면 자기의 기도가 자신의 욕구와 일직선상에 있든지 없든지간에 이미 기도의 응답은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욕구는 기도의 동기부여를 해주기는 하나 욕구의 실현여부가 기도의 응답여부를 가늠하는 유일한 기준은 될 수 없다. 오히려 그 욕구로부터 출발된 기도자의 마음이 그 욕구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때 비로소 그 기도가 살아나기 시작했으며 응답이 시작되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야 한다.
기도는 춤이요 충만한 교제이다
기독교 기도의 독특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심리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심리적인 자기 만족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반응에 귀를 기울이는 기도가 필요하다. 기도는 마치 침묵 가운데 이루어지는 춤과 같다.
춤은 춤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 있고, 이끌림을 받는 사람이 있다. 기도에 있어서 춤을 이끌어 가는 분은 성령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이끌림을 받는 대상이다. 그러므로 기도에는 리듬이 있다. 주님이 스텝을 빨리 이끌어 가시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이면서 따라가야 한다. 어떤 때는 스텝이 느리게 진행되거나 멈추기도 한다. 이 때 우리는 인내하면서 천천히 따라가거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이러한 기도의 리듬을 잘 감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 후에 반드시 기도의 진행 상태를 반추할 필요가 있다. 거듭되는 반추를 통하여 기도의 흐름을 파악한다면 우리는 성령님의 이끄심을 감지할 수 있다. 혹은 이끌림을 받는 자세를 점검함으로서 더 능숙한 춤꾼, 즉 더 성숙한 기도자가 되어 간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심리적인 만족을 인위적으로 얻으려 하기보다는 성령님께 내어 맡기는 기도이다. 성령님께서는 때로 기도자를 사막에 버려두는 듯한 깊은 메마름과 고독 속에 빠지게 할 수 있다. 그럴 때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갖가지 수단에 의존하여 심리적인 만족을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곧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기도 모습과 비슷하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의 기도가 주님과의 교제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심리적으로 고독하고 메마를지라도 그 분의 반응을 주시하면서, 인내로 기다리는 자세가 곧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의 특성이다.
그리고 그 기도의 결과가 자기 욕구와의 일치 정도에 따라서 기도의 효험성이나 능력을 평가한다면 그것도 역시 샤머니즘의 기도와 차이가 없다.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의 효험을 말하고자 할 때 그것은 다차원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기도의 다차원적인 특성을 말하면 청원적 성격,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성격 그리고 자기변화적 성격을 지닌다.
실용적 성격으로서의 기도를 생각하자면 무엇보다도 거룩한 것이든 세속적인 것이든지간에 자기의 내면의 욕구를 성취하는 수단으로서 기도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결과가 자신의 청원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할 때 기도의 효용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샤머니즘적 기도라면 더 이상 그 기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란 그 청원목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더 나아갈 또 다른 목적이 있다.
청원적 기도를 할 때 왜 동일한 내용을 거듭거듭 올려야 하는가? 몇 마디로는 우리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인가? 만약 그것이 샤머니즘적 기도의 차원이라면 주문을 외우듯 공을 들이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마침내 신을 감동시켜 움직여 보자는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서 통한다. 그런데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반복적인 기도 역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한 내용을 가지고 매일 매일 반복적으로 기도를 하는 것은 결코 공을 들이거나 하나님을 감동시키기 위한 행위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의 기도는 그 자체에 어떤 공로적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된다.
거듭되는 기도는 하나님께 어떤 정보를 제공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향하여 굳게 닫혀진 자신을 개방하려는 것이며, 자신이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화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이 자유로운 개방 속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많이 왜곡되고, 닫혀져 있어서 거듭되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 마음이 관대해지고 부드러워져서 개방적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기도의 결과가 자기의 욕구와 일직선상에 놓여있지 않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다른 차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기도는 자기를 변화시킨다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굴복시키려는 하나님이 주신 은총의 행위이다. 샤머니즘적 기도는 결코 기도의 대상을 향하여 자신을 굴복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기도는 자기를 강하게 세워가는 수단이다. 만약 기도의 결과가 자신의 욕구와 일직선상에 놓여있기를 고집한다면 그 기도는 청원적 성격 이상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구하든지간에 그 결과에 대해서 개방적인 자세를 취한다면 마침내 그 기도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보게 된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기도의 방법}이라는 그의 역작에서 "기도란 하나님을 움직이거나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움직이게 하고 우리 자신을 강요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기도란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다 더 잘 이해하는 데에 그 일차적인 중요성이 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초월하여 자기 자신을 관조(觀照)할 수 있는 영성적인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이 기도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서 실현된다.
우리의 욕구가 기도 생활의 원천적인 동기가 되는 것은 사실이나, 집요하게 그 욕구에 대한 만족감과 안위함만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맹목적인 욕구가 된다. 맹목적인 욕구란 비인격적인 간구를 의미한다. 맹목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기도 속에는 어떤 인격적인 관계도 추구하지 않는다. 그런데 청원적 목적을 뛰어넘어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향하여 개방되어 있는 기도를 하노라면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연약함을 절감하며 동시에 그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절대적인 신뢰와 순종을 보내게 됨으로서 역설적인 강함을 체험한다. 만약 신뢰와 순종이 없는 자기 욕구에 집착한 기도는 자기 암시적인 효과를 주기 때문에, 그 욕구와 안정을 보장해주는 왜곡된 하나님의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며, 그 투사된 이미지 안에서 부정적인 개인의 인격이 형성될 수도 있다.
기도는 분명히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청원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결코 변덕스러운 신이 아니며, 기도는 하나님께 소원목록을 상정하는 것 이상이다. 기도는 우리의 눈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비젼과 그 목적을 보게 하는 길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로,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운동, 즉 만남의 행위이다. 이 만남이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이루어지면 그것이 참 기도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건강한 기도는 맹목적인 욕구로부터 벗어나 통찰력과 하나님과의 관계형성과 그리고 적어도 어렴풋하나마 하나님이 우리 안에 두신 소원을 이루어 가기 위한 몸짓이 기도이다.
예를 들어 "내가 무엇을 원합니다," "내가 만족과 기쁨을 얻기를 원합니다" 등의 욕구가 동기가 되어 기도를 시작했을지라도, 이 기도가 다른 사람들을 포함하고, 나아가서 하나님 자신에게 이르다면 자기의 기도가 자신의 욕구와 일직선상에 있든지 없든지간에 이미 기도의 응답은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욕구는 기도의 동기부여를 해주기는 하나 욕구의 실현여부가 기도의 응답여부를 가늠하는 유일한 기준은 될 수 없다. 오히려 그 욕구로부터 출발된 기도자의 마음이 그 욕구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때 비로소 그 기도가 살아나기 시작했으며 응답이 시작되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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