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영성신학의 현상과 문제점

2007. 12. 12. 21:35참고자료/5,영성 자료

현대 영성신학의 현상과 문제점

김재성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서론 : 영성신학에의 이의제기

최근에 영성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참신하게 보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려와 걱정을 하게 된다. 세상이 모두 물질위주로 흘러가고 있는데 영적이요 신령한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흐름이 있다는 것은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영성에 대한 뜨거운 관심에 못지않게 잘못된 사조가 첨가되고 있어서 우려와 당혹감을 금할 수 없다. 영성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믿음의 기준으로 제시하는 것들은 이단적이요, 불건전한 유사 종교의 형태들이 많이 들어있다. 그래서 영성운동은 이 시대에 새로운 대안이라기 보다는 풀어야 할 과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21세기 벽두에 즈음하여 세계 신학계는 영성을 주제로 한 다양한 연구를 쏟아 놓고 있어서, 신학을 연구하며, 교회를 섬기는 이들에게 큰 과제로 던져져 있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 안에서 성장해온 필자의 경우, 갑자기 쏟아져 나온 영성에 관한 열의를 보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갑자기 현대 개신교회에서 전에는 사용하지 않던 영성을 말하게 되었을까?
필자가 소박한 마음으로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 공부하는 가운데 더욱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다시 말하면, 공정하게 말해서, 영성 신학에 대한 진지한 연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전세계적으로 인정할 만큼 구체화된 종합 체계를 제시한 신학자는 별로 많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 바로 여기에서 필자는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영성’을 가장 먼저 체계화 한 프랑스 로마 가톨릭 신학자에 의하면, ‘영성신학’이란 ‘교리신학’에 기초를 둔, 혹은 그것과는 대조를 이루는 ‘금욕적 신학’ 혹은 ‘신비신학’을 다루는 과목이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중세 수도원 운동을 현대 영성신학의 근거로 추론하여 강조하는 보이어의 연구서들이 초기 영성 신학자들의 연구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하지만, 교리 신학의 대체개념으로서 영성을 이해하는 보이어나 포우랏에 반대하여, 오히려 영성이 먼저 개인에게 체험적으로 자리잡은 후에 교리적인 신학을 발전시켰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
또한 현대 개신교 영성신학자들은 아직도 각자 자신들의 이론 전개에 힘을 쓰고 있을 뿐, 가톨릭에서 제시된 것과 같은 완성된 체계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마치, 작업 중에 있는 미완성의 그림이나, 건물과 같다. 결국, 필자는 현대 개신교회가 이미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문제점을 파악하고 폐지해버린 낡은 폐허에서 “영성”이라는 개념만을 빌려다가 마치 전혀 새로운 것인양 포장하고 있다는 평가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필자는 이를 반증하기 위해서 본 논문에서 현재 진행 중인 여러 형태의 영성신학을 분석하고, 과연 영성신학과 영성운동이 21세기 한국 개신교회가 활력을 되찾는 유일한 대안이요, 모든 성도들이 지향해 나가야 할 확고한 방향이라고 할 수 있을까를 검토하고자 한다. 특히, 이 논문에서는 지난 20세기 말 세계 여러 나라의 상당수 신학자들이 영성에 관련된 연구를 펴내면서 주장하는 내용들이 과연 무엇인가를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적나라한 문제점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한국 기독교 교회가 서구 여러 교회들이 추구해 내려온 시행착오를 새로운 것이라 하여 그대로 적용하므로 얻을 수 있는 유익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이미 필자는 영성 신학의 특징과 영성운동의 역사를 두 편의 논문에서 정리한 바 있으며, 현대 한국교회의 가장 확고한 대안인가를 해부하여 보았으며,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들 가운데 무엇이 문제인가를 살펴본 바 있다. ) 이 논문에서는 최근의 영성신학 논의를 살펴보고, 어떻게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하고자 한다.

1. 현대 영성 신학의 기본적인 맥락

1.1. 세계 신학의 발전과정과 흐름을 돌아볼 때에, 현대 영성 신학의 태동기는 1960년와 1970년대이며, 자유주의 신학의 몰락과 함께 등장한 과격한 신학 (radicalism)에 대한 타개책으로 서양신학자들과 성도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특히 유럽에서는 실존주의 영향으로 ‘사신신학’(the Death of God-Theology)이 광범위하게 유행하고, 회의주의 (scepticism)이 널리 퍼져나갔으며, 세혹화 신학이 봇물을 이루었다. 세속화에 대한 반성으로 물질적이요, 현세적인 것을 떠나서 보다 영적인 것을 절대 가치로 회복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1960년대 영국에서는 존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라는 책으로 인해서 급진적인 세속화 신학이 범람하였다. 기독교의 초자연주의를 배격하고, 초월적인 하나님을 믿는 것을 거절하고, 교회와 세속과의 구별을 철폐하고자 했다. 기도를 거부하는 이들에 대해 무엇이라고 답변할 것인가를 모색하던 일부 성공회 신학자들이 영성신학으로 응수한 것이다.
이 시대에 방황하는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개혁주의 문화신학자 프란시스 쉐퍼 박사는 ‘이성에서의 도피’등을 해답으로 던져주었고, 스위스에서 라브리 운동을 전개하여 큰 영향을 끼친바 있다. 세계 교회를 돌아 볼 때에, 오순절 운동에 영향을 입은 세대가 나타나면서 이론이나 논리적인 사변신학 보다는 역사 속에서 체험을 강조하는 쪽으로 교회와 신학의 관심이 기울어지기도 했었다.
세속화의 범람에 대처하기 위하여 영성 신학에 대한 연구가 서양신학의 방향전환을 가져왔다고 자평하는 획기적인 새 전환점은 그 출발의 동기면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만하다. 특히, 1967년 8월 영국 덜햄에서 모인 ‘오늘을 위한 영성’이라는 주제를 내걸고 신학회가 개최되었는데,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신학의 세속화에 대한 염려에서 나온 방향모색이었다. 하지만, 이 모임에 대해서, 필자는 서양 신학의 전체 방향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식의 과대포장이나 확대해석하지 말도록 경계하고 싶다. 다만, 이 세미나는 이후 서양 신학자들이 영성이라는 낯선 주제에 대해서 더욱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 이 날 발표자들과 참석자들은 주로 영국 성공회 신학자들이었지만, 실제로 가장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신학자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에 있는 성공회 신학대학원의 코번 (J. B. Coburn)교수였다. 초월적인 영성의 기쁨을 회복하려면, 정화의 단계, 조명의 단계, 연합의 단계로 현대인들이 훈련할 것을 주장하였다. )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동서 냉전의 기류를 벗어나려는 사회적 요구가 대두 되었고, 해방신학, 여성신학, 흑인신학 등 다른 지역에서 새로운 현장신학이 논의되자, 서양신학자들은 크게 자극을 받게 되었다. ) 서양 주요 기독교 교파에서는 기존 교단의 전통적 안목을 벗어나서 각자의 환경과 요구에 대한 새로운 주제발견과 이에 상응하는 연구 방법론이 쏟아져 나왔다.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인들의 시각에서 복음을 해석하는 인종과 지역에 기초한 접근이 시도된 것이다.
서양 신학자들을 비롯하여, 여러 지역에서 개발되어온 영성신학은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광범위한 연구진이 등장하게 되었고, 전통을 갱신하고자 좀더 다른 차원의 신학주제들을 찾으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

1.2. 20세기 후반의 신학운동의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에큐메니칼 운동이었다. 그들이 내건 집약적인 과제는 모든 전제를 뛰어넘어서 종교간의 화해와 일치였다. 주제와 대명제로 내건 대화는 과거와 다른 신학운동을 일으켰다. 에큐메니칼 신학자들은 “영성”을 그들의 토론과 회합의 핵심주제의 하나로 표방하여, 가장 대화하기 힘들었던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회, 특히 성공회가 서로 공통분모를 만들어 보자고 노력하였다.
우리는 교회가 외형적으로 내적으로 모두 다 하나되는 연합운동을 부정하거나 평가절하 하는 것이 아니다. 16세기 유럽 종교개혁시대에도 화해의 신학자들이 많았다. 스트라스부르의 개혁자 마틴 부써와 필립 멜랑톤이 주도하고, 요한 칼빈도 참여하였던 보름스 (1540)와 레겐스부르그(1541) 종교화의를 들 수 있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과 독일 루터파, 스위스 개혁파 사이에 종교간의 평화를 시도하던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루터파와 쯔빙글리파가 성찬론에서 일치를 도모하고자 서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노력했던 일은 매우 의미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은, 무조건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 순수함에서 볼 때에, 상당부분은 정치적이요, 외교적인 인사들이 주도하던 측면이 많아서 신학의 혼란과 혼합을 피할 수 없는 형편이다. 다시 말하면, 현대 에큐메니칼 신학자들은 서로간에 만남 자체에 의미를 갖고 기본적으로 내재해 있는 현격한 교리적 차이를 뛰어넘어서 상호 대화를 가능케하는 공통분모를 찾고자 하여, “기독교적 영성”이라는 영역을 연구대상으로 정하고 주력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의 하나로, 기도의 체험을 공동으로 공유하고, 더 나아가서 첨예하게 나누어진 성례의 일치를 도모하는 방안들이 모색되고 있다. ) 에큐메니칼 영성은 신학적인 차이점은 서로간에 전혀 말하지 않고 화해의 기쁨을 위하여 일치점과 공통점을 강조하는데 전념하고 있으나, 완전한 합의에 도달하지는 못하고 있다. )
다시 말하면, 현대 영성신학자들은 기독교계의 에큐메니칼 운동이라는 동기에서 추진되어 오므로서, 그 출발점이 모호하게 되고 말았다. 에큐메니칼이 지향하는 신학적 혼란의 문제점은 이미 여러 차례 그들이 모인 국제회의를 통해서 드러낸 바 있으며, 1967년 신앙고백서 (미국 연합장로교회, PCUSA)에도 담겨있다. 최근, 영성신학을 가장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영국 성공회와 로마 가톨릭의 일부 학자들임을 생각할 때에, 그들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폭넓은 신학을 추구하는 그룹들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에 개혁주의 교회 가운데는 미국 연합장로교회 총회와 그 교단 신학교인 프린스턴 신학교, 샌프란시스코 신학교 교수들이 참여하고 있다.

1.3. 현대 영성신학은 큰 틀에서 볼 때에 체험주의, 경험주의적 방법론을 채택하고 있다. ) 신앙적인 체험과 경험은 소중한 것이요, 성경적으로 증거되는 체험들은 사람의 인위적인 행위나 조작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섭리하심이다. 그러나 현대 영성 신학자들이 집중하고 있는 체험적 신학은 하나님 주권적인 역사하심에 대한 해석과 수용이라기 보다는 초자연적 결과를 놓고서 하나님을 인정하려는 귀납법적 접근방식 (inductive method) 에서나온 것이다. 더욱이, 인간의 사고와 판단을 근거로해서 신학을 정립하는 환원주의적 방법론 (reductive method)에 따르게 되면서, 영성을 인간존재의 일부로 보며, 자연적이면서도 신적인 실재로 인식하고, 학문적인 훈련으로 도달하고자 한다. ) 즉,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쉴라이어막허에게 영향을 입은 상당수의 현대 신학자들 거의 대부분이 전통적인 스콜라주의 신학과 칸트의 영향을 입은 사변주의 신학을 거부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1.4. 영성신학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으면서 크게 전개되고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의 한 형태임을 직시해야 한다. 20세기 중엽 영국 영성신학자들이 세속적을 것을 타파하고 거룩한 것에 대한 열망으로 시작하였으나, 최첨단의 신학적 경향이 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의 구분된 영역을 없애버리는 신학적 태도를 갖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신학자들에게 있어서는 영성이란 더 이상 기독교적 영성만이 유일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 그러나, 종교 다원주의 (religious pluralism)와 주관주의(subjectivism)가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너무나 제나름대로 기술되고 있어서 혼란을 피할 수 없는 용어가 되어 버렸다. ) 서양 교회들이 아시아의 비기독교 국가들이 가진 문화적 수준을 과소평가하는 편견을 벗어버리는 것은 얼마든지 환영할 일이다. 어떤 문화체계가 다른 문화 체계 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은 버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는 복음은 아시아 지역에 널리 퍼져있는 여러 종교들의 영성과는 근본적으로 같을 수 없는 것이다. 종교간의 차이를 훨씬 뛰어넘어서 영성을 교류시키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실례가 미국 예일대학교, 버클리 신학부에 있는 ‘영적 성장을 위한 아난드 센터’ (the Annand Center)의 교수진에는 자유주의적인 신학자들, 가톨릭, 힌두교 영적 지도자, 성공회 은사파 신부 등이 총망라되어 있다.

2. 영성신학의 교파별 특징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종교개혁이 있기 전까지 영적인 생활에 관련된 여러 형태의 노력들이 있었다. 대체로 인간의 완전주의를 최선으로 바라보고 성례, 집단적인 헌신자의 삶, 금욕주의, 순교자적 삶, 가난이나 독신에의 서약, 수도원에로의 귀의, 신비주의의 동경 등을 추구하였다. 이런 요소들에다가, 영성 신학을 체계화 하여온 각 교파마다 자신들의 교단이 견지해온 신학을 토대로 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영성신학이라고 하더라도 완전히 새로운 내용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부터 내려온 각 교단과 교파의 강조점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기존의 신학입장을 분류하고 분석하듯이, 역시 영성신학도 로마 가톨릭, 잉글랜드 성공회, 헬라 정교회, 독립적인 수도원파, 그리고 개신교의 여러 교단들로는 루터파의 영성을 필두로 하여, 감리교회, 오순절파, 침례교회, 희랍정교회, 개혁주의 장로교회 등으로 대별하여 볼 수 있다. 따라서 영성의 내용이 각 교파별로, 신학자에 따라서 너무나 차이가 많다.

2.1. 로마 가톨릭의 영성 연구는 역사와 전통 위에서 강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먼저 주목할 부분은, 수도원운동의 전통에서 나온 독신주의가 영성의 기본이라는 점이다. 특히 신부나 수녀야말로 가장 탁월한 영성을 가진다는 대전제가 가장 두드러지게 돋보인다. ) 인간의 외로움이라는 것이 극복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인생을 올바로 걸어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중세신학자들은 어거스틴의 원죄론을 지나치게 집착하여 은총의 영역보다는 원죄의 유전에 대해 민감하게 대처하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가톨릭 영성신학자들 가운데는 중세 신비주의가 현대 영성신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 또한 성모 마리아의 헌신과 경건함이 신비적인 영성의 전형이며, 현대인들은 마리아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본다. )
전체적으로 로마 가톨릭 교리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부분이 역시 영성에서도 강조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다시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중세 시대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세상을 다스리려고 시도하였다가 세상을 닮아가고 말았다. 성직자 독신주의는 오히려 은밀한 축첩제도의 형태로 그 도덕성을 잃어버렸다. 중세 시대의 수도원들은 겉에서 보는 것처럼 순수한 곳이 아니었다. 심각하게 부패하였고, 도덕적으로 부패한 그들은 재산을 크게 불렸던 것이다. 앗시시의 프란체스코는 겸허한 가난으로 많은 추종자들이 모여들었으나, 그가 죽은 뒤 후계자들에 이르면 그를 기념하는 교회당을 세우면서 많은 헌금을 받고 부패하기 시작하였다. 과연 5백 여 명의 수사들과 음유시인들이 모여든다면 구걸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던 프란체스코처럼 살수는 없는 것이다. 스페인 귀족 출신의 성 도미니쿠스는 주교들이 호화로운 치장을 한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을 보고 가난을 이상으로 삼는 수도회를 창시하였으나, 역시 한 두 사람의 성인이 남긴 모범으로 세상을 다 변화시킬 수 없었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상인들을 물욕에 눈이 어두워서 더러운 때가 묻은 자들이라고 불신하면서도, 교회에 기부금을 냄으로써 그 탐욕을 속죄하라고 권장하였다. 중세교회는 그 부요한 재물을 고딕식 건물을 세우는 일에 몰두하였고, 거대한 사채기관이 되고 말았다.
중세는 이른 바 암흑시대라고 불리우는 바, 고상한 이상은 그 어느 수도원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클루니 수도회의 경우, 막대한 재산을 기부받게 되자 늘어난 재물로 인해서 수사들이 감당하던 노동은 모두 하인들에게 떠넘기고 말았다. 이들을 갱신하겠다고 출발한 시토회(Cistercians)도 부자들에게 선물을 받거나, 개간된 땅이나, 하인들을 받지 않겠다고 했으나, 그들이 받은 목초지에서 자란 양들이 생산해 내는 모피가 수입원이 되면서, ‘황금들판’을 소유한 수사들은 결국 두 세기 안에 권징과 금욕과 노동과는 멀어져서 다른 수도원과 다를 바 없었다. 가난이나, 탁발 방식의 금욕주의나, 독신주의가 미덕이나 구원의 방식이 될 수 없음을 이미 역사적으로 교훈하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16세기 종교개혁의 시대에 개신교 도시들은 수도원과 수녀원을 폐지하였고, 구걸하면서 돌아다니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였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수도원주의나 독신주의나 광야생활은 본질적으로 기독교 신자의 삶에 바른 지침이 되지 못한다. 최초 설립자나 초창기의 검소함과 부지런함은 후세에까지 유지될 수 없었다. (이것은 비단 수도원운동의 교훈만은 아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후세대는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다. 속사도들 이후의 초대교회에서도, 종교개혁의 2세대에도, 청교도 운동의 2세대들도, 부흥운동의 다음 세대들도 모두 다 동일한 패턴을 반복했다.) 수사들은 세상을 등지고 가난을 서약하여 수도원에 들어가 살지만, 완전히 일상적인 사회관계를 포기하지 못하여 폐단이 빚어지게 되는 것이다. 수도원 운동이 남긴 약간의 공로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금욕주의적 기독교 신앙의 건설은 인간이 지닌 근본적인 많은 해악들을 완전히 벗겨버리는 대안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들에게서 영성의 근원을 찾아 본질적인 선함과 거룩함의 방법론을 창출하려는 것은 헛된 꿈일 뿐이다. 개신교회에서는 로마 교회 영성의 문제점으로 신비주의, 7 성례 중심의 신앙생활, 성직자 중심의 엘리트주의를 지적하고 있다. 로마 교회측에서는 공동체 영성이라고 옹호하고 있다. )

2.2. 헬라 정교회의 영성
수도원 주의는 헬라 정교회의 핵심적인 제도이자 영성을 대변하는 교리적 요체가 결집된 제도다. 이단과 세속주의에 맞서서 싸우는데 있어서 훌륭한 전통을 지켜오고 있음을 자랑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과는 달리, 헬레니즘을 반영하는 교회가 출범한 것은 콘스탄틴 황제의 회심사건이었다. 정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 마음 속에 내적으로 머물러 있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세상 가운데서 경험되고 체험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살아있는 순교자적 생활이요, 참된 기독교적 생활양식은 세상을 부정하고 저항하고 싸우며 살고있는 수도사들에 의해서 지켜져 오고 있다고 본다.
헬라 정교회 수도원제도의 기초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역할을 구분해야 한다는데서 찾고 있다. ) 마리아의 편을 선택한 사람들의 생활을 가장 철저하게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획득하기 위한 기도의 방법 (the Hesychest method) 통해서, 침착한 판단과 축복을 얻고자 한다.
따라서, 가장 이상적인 헬라정교회의 영성은 ‘사막과 광야의 영성’을 추구하고 있다. 금욕주의에 뿌리를 둔 수도원주의가 제일 먼저 발생한 곳은 이집트였는데, 일찍부터 세속적인 유혹에 맞서서 은둔자의 삶을 살았다. 특히 동방지역에서 오랫동안 이러한 운동이 지속되었다.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 그리스도가 광야의 험난한 생활 속에서 보다 진실한 신앙을 찾은 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리아에서도, 그리고 갑바도기아 지방에서도 여전히 많은 수도원들이 남아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은둔처를 건설한 것은 주후 약 3세기 경에서 7세기 사이에 약 일백여 수도원이 곳곳에 설립되었고, 사바스 (Sabas)가 사망하던 주후 532년 무렵에는 100여명의 수도원에 10000여명의 수도사들이 거주하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대표자의 통솔하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270년 로마 가톨릭의 십자군 원정 때에 대부분 파괴당하고 말았다. ) 따라서 지금 남아있는 헬라정교회는 로마 가톨릭에 대해서 전투적이며 경쟁적인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2.3. 영국 성공회 신학자들이 영성연구에 앞장서고 있는 바, 종래 국교회의 교리적 입장은 39개 조항에 담겨있었다. 영국이라는 국가중심의 교회체제이기 때문에 기독신자의 의무룰 강조하는 기도서에 (Book of Common Prayer, 1549) 기본적인 이념이 담겨있다. 이들의 세 가지 목표는 “더 거룩하게, 의롭게, 그리고 깨어서 살아가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교회공동체의 체험, 건전한 학문과 이성의 비평적 지도력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성공회는 엄격한 성 베네딕트의 규칙과 유사한 조항을 준수하도록 지도하고 있으며, 개인신자들의 점진적 신앙훈련 속에서 그 핵심을 이루어가려고 한다.
6세기 유럽 종교개혁 시대에 교회제도나 성만찬 등 첨예하게 맞서있던 쟁점들에 대해서는 로마 가톨릭과 칼빈주의 사이에서 중도노선을 택한 매우 포괄적이요 절충적인 조항들이다. 장로파, 독립파, 침례파, 퀘이커파, 유니테리언파 등이 난립하던 영국에서 국교회가 가졌던 영성은 관용과 중용이라고 알려져있으며,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큰 영향을 발휘한 리챠드 후커(1554-1600)의 조화주의에서 그 훌륭한 전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후커는 옥스퍼드 대학의 신학교수로서 당대에 큰 영향을 끼친 지도자였는데, 성경과 전통, 신앙과 이성, 개인의 책임과 교회의 권위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 정치와 종교간에 타협점을 합의하여 ‘중요의 길’ (middle way, via media)이라고 불리어지는 온건한 개혁의 기조가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영국 국교회가 체제 유지를 위해서 범했던 시행착오와 오류들을 생각할 때에 전세계 기독교 신자들이 찾는 영성을 제시할만한 것이 무엇일까? 절충과 타협은 다른 한편에서 볼 때에는 혼합이기 때문이다. 영국 성공회가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하고 로마 교황제 반대라는 입장에 서서 개신교의 여러 그룹에 대해서 관용정신을 일관되게 옹호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윌리엄 로드 대주교가 1633년 취임하여 비국교도들에게 저지른 만행은 치욕적인 것이었다. 정치조직과 의식을 통일하고, 각 절기에 따라 규정된 성직의복을 입어야하고, 강단 앞에 성찬상을 치워야 하며,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 먹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빵으로 먹는 의식에 치중하는 것을 따르도록 강요당했다. 이에 불응하는 사람들은 채찍질을 당하고, 귀가 절단되고, 코가 찢기고, 이마에 낙인이 찍히고, 벌금형과 투옥을 당해야 했다.
이러한 종교적 의식에의 열정, 혹은 열광적인 국가적 체제강요, 그리고 시민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강요에 대한 복종이 건전하고 온전한 영혼의 길이 될 수 있을까?

2.3. 루터교회에서는 원래 로마 가톨릭의 어거스틴파 수도원에서 요한 스타우핏츠에게 영향을 깊이 받은 바 있으며, 그의 초기 수도사의 시대는 경건의 노력과 신비적인 연합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종교개혁의 지도자로 나선 이후 ‘믿음’을 제일 전면에 내세우는 가운데 하나님과 새롭고 생명력있는 관계를 내세웠다.
루터파는 하나의 몸된 교회를 강조하는 통일성과 획일성을 탈피하고 신앙적 고백을 새로 세웠으므로, 자유하는 영성을 강조한다. 교회의 전통이나 제도적 일체감 보다는 하나님 중심의 신학적 기초를 갖고 있다. 죄와 은총의 역설적 관계에 기초한 신학적 인간학을 세우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경과 설교중심의 영성을 세우고자 한다. )

2.4. 웨슬레안파 (감리교단과 일부 성결교단) 는 구원받은 인간의 완전한 성화를 매우 강조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먼저 영적인 훈련과 노력을 통해서 완전한 성화를 이룩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특히 일부 완전주의만을 고집하는 이단집단과는 달리 요한 웨슬레가 추구했던 영성을 개인주의적이며, 편협하고, 경건주의적이며, 반지성주의가 아님을 역설하고 있다. 감리교회의 영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서 생활하면서 교제를 중요시하는 것이지 개인주의적인 성결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
여기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개혁신학과 긴장을 일으킨다. 하나님의 은총을 근본핵심을 강조하면서도 여전히 베네딕트 수도회와 같은 인간의 성화에 연결지어서 생각한다. )
하나님이 자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위해서 속죄의 보혈을 흘리심으로 이룩된 구원이므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행동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속죄의 은택을 나누어주시는 하나님 자신의 방법이다. 따라서 인간이 반응을 나타내는 순간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그 중요성을 비교하자면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이는 중생이든지, 성화든지, 회심이든지 절대로 불가능함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다 (고전 12:3).

2.6. 케직파의 영성
스튜어트 홀덴이 주도하여 1920년대에 영국 성공회의 갱신에 크게 공헌한 케직파의 활약을 본받으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들은 대규모 케직사경회 (convention)을 통해서 이러한 운동을 파급시키고 있는데, 스크로지의 방법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 철저한 체험을 하도록 강조하므로서 복음주의 확산에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다. 침례교회에서도 이러한 운동과 연관을 지어서 성도들의 영성회복을 도모하고 있다. )

2.7. 개혁파 영성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영성을 신학의 과목이나 연구과제로 다루지 않았었다. 영성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대해왔다. 이런 인식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포괄적인 개혁주의 입장에서 영성을 처음으로 종합한 샌프란시스코 신학교 하워드 라이스 교수가 시도하였다. 그는 경건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칼빈주의자들과 개혁교회 성도들은 치유, 꿈을 통한 황홀한 경험, 환상 또는 다른 경험들을 무시하여 왔다고 진단한다. 그는 “경건이나 영성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개혁주의 영성이 가져다주는 도전은 순종적인 제자도의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기에” 영성과 경건을 함께 소유하고 발전시키라고 주장한다. 현대 미국 개신교가 칼빈과 그 후계자들이 정립한 율법주의적 엄격성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좋은 것을 즐기지 않는 것은 왜곡된 형태의 경건이라고 비판한다. 개혁주의가 영성에 대해서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여 오면서, 경건만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신비적 경험이나, 갑작스러운 종교적 통찰력이나, 자각의 순간을 이제부터는 받아들이고 매우 중요하게 신학적인 설명을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
개혁주의 신학자, 보다 정확히 말하면 17세기 영국 청교도 신학자였던 존 오웬은 기독신자의 삶을 강조하고, 성령론을 매우 실제적으로 중요시하였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오웬의 영성이 탁월했다고 주장한다: “개혁주의 청교도들은 이념적으로, 관념적으로 치우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인 감흥과 정서를 중요시했다”고 추앙하는 것이다. 청교도의 신학을 바르게 해석하고 계승해야 할 후대의 신학자들이 청교도들이 가졌던 감정과 정서를 무시하고 계몽주의자들처럼 개념적으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오웬은 기독신자의 신앙생활에서 경험을 강조했으며, 그리하여 확신과 안정감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오웬은 당시 신비주의자들이 종교적 황홀감을 맛보기 위해서 그리스도에게 집착하는 문제에 대해서 지적한 바 있고, 합당하게 필요한 감정적 차원을 설명한 바 있다. )
개신교회는 성화와 거룩한 생활을 영성의 대안으로 강조하는가 하면, 기타 여러 종파들은 제도와 규정과 신비를 동시에 복합적으로 주장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 영성은 실종된 듯한 느낌이다. )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며, 일상적인 믿음 생활을 성실하게 지속해가면서 방종하지 않고 이기적인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 개혁주의 신앙인의 삶에 대한 태도라고 한다면, 이를 도달하는 길은 개인적인 헌신과 감정을 강조하는 영성신학이 회복해 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성령의 강력한 도우심과 역사하심 가운데서 날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다스리시도록 겸손하게 의존하는 노력을 지속하면 되는 것이다. 일부 칼빈주의자들이 감정이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격이 결여되었다면, 이는 영성으로 회복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변화를 받아야만 마땅할 것이다.

3. 영성에 대한 현대적 접근들

오늘날 영성신학이나 영성운동은 매우 다양하다. 영성신학은 너무나 다양하여서 일일이 열거하여 설명하기조차 힘들 정도가 되었다. 다양성은 자유함의 표현이요, 획일성에 피할 수 있는 성도들의 특권이기도 하다. 신학에서도 역시 그러한 ‘허용된 자유’가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신학연구는 실험정신으로 시행착오를 거듭해서는 안되는 엄청난 책임을 동반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성도들을 혼란하게 만들고, 심각한 피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영성신학은 다른 신학의 주제와는 달리, 기본적인 일치점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각기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연구되고, 추진되고 있다. 현대 신학자들의 영성 신학을 연구하는 경우와 처지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며, 아직까지도 정립의 초보 단계에서 각자 실험실적인 습작에 몰두하고 있는 형편이다.
영성이라는 말을 성경적으로 정립하는데 있어서도, 말씀의 권위와 강조를 위주로 하던 전통적인 고전적 해석을 벗어나서 현대 해석학의 혼돈이 초래되고 있으며, 인종에 따라, 지역에 기준을 두고 연구되는 추세에 있다. 다시 말하면, 영성 신학의 방법론이 이미 고전적인 시대와는 전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현대 신학자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당대의 주요 문제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세대의 문제를 다루어 나간다. 환경문제와 생명윤리, 통일신학과 경제정의 실천 등이다. 이러한 방법을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문제가 되는 것은 영성신학의 필요성을 현대 신학자들이나 성도들이 자기 나름대로 정립하고, 각자 자신들의 전통과 교리적 맥락에서 연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성신학을 정립하면서 어떤 기독교 공동체라도 수용할만한 객관적이요, 공정하며, 성경적인 연구는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3.3.1. 명상을 강조하는 영성신학
수도원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명상으로, 미래의 세계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보다 원활하게 맺어준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따라서 도시 내에 있는 수도원들도 이러한 명상을 통해서 영성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용한 명상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주장하는 영성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임재에 사로잡히는 감정을 갖는 방법으로 침묵하며 묵상하는 것이 가장 최상의 영성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명상적 생활은 토착민들이나 원주민들처럼 삶을 유지해야 도달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 일부에서는 이런 명상적 영성이 신비주의적인 퓨리탄들이 갖었던 것이라고 한다.
로마 가톨릭의 수도원제도에서 명상을 자기 고백적인 요소로 규정해버린 오류를 피하기만 한다면, 개신교가 잃어버린 영성의 차원을 회복하는 길은 오직 명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세속적인 성공과 물질적인 부요함을 추구하는 세상에 정면으로 맞서서 강력하게 추구해야할 개혁교회의 모습이란 명상적 기도에 전념하면서 인생의 궁극적 신비에 대해서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
그런가 하면 명상은 오직 성경에 나오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동양종교에서 장점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옛날 바빌로니아 종교들이 유대 히브리적인 전통과 접촉을 이루었듯이, 힌두교, 불교, 요가의 명상을 배워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 기독교 신학의 영성이 이러한 혼합적인 형태로 발전되고 있음에 대해서 필자는 동의할 수 없다.
더구나 영성을 수동적인 영성과 능동적 영성으로 대별하고, 헬라 정교회가 추구하는 영성은 교구 성직자적인 사역보다는 수도사적인 명상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현대 목회 사역자들의 임무를 약화시키게 된다. )

3.3.2. 기도와 영성
현대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영성을 강조하는 주된 내용은 기도에 관한 것들이다. 영성이 충만한 기도는 생활로 연결되어서 능력을 발휘하는 체험을 가져다 준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기도에 영성이 첨가되는 것은 하나님은 기도 가운데서 인간 존재의 깊숙한 내면과 대화하기를 원하시며, 이런 기도의 가능성을 영성에서 찾는 것이다. 그리고 영성기도의 구체적 방법론이 제시되고 있는 형편이다. 기도의 깊은 경지에 도달하는 영성기도법이 제시되고 있기도 하다. 그리스도와 함께 기도하는 것은 그가 소유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라고 격려하고 있다. )
현대 로마 가톨릭의 대표적인 신학자 칼 라너에게 있어서 영성의 근본은 자신이 하나님과 만난 체험에 기초하고 있다. 또한 라너는 예수회 창시자 이그나시우스 로욜라의 영성을 근간으로 하여, 기도와 명상과 신비주의에서 영성의 기본 개념을 추론하고 있다. ) 라너는 하나님을 거룩한 신비로서 이해하고, 가슴의 지배자가 되셔서 매일의 생활 가운데 믿음과 기도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신비주의를 주장한다. 따라서 신학은 먼저 신비적인 교통을 성취하는 영성의 발전 이후에 오는 두 번째 단계로 해석한다. 기독교인의 영성이란 교회적인 차원과 개인적인 차원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3.3.3. 독신주의자들의 영성
영성이란 과연 개인의 결혼에도 관계되며, 육체적 성과도 상호 관계를 맺는 것인가? 독신 생활이란 인격의 성숙과 영적인 발전에 있어서 가장 유익한 수단이 된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 유대 기독교적 전통에서 성적인 것 (sexuality)은 영적인 것 (spirituality)에 대립되는 이원론적 개념으로 정립되어 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수도사나 수녀들은 전혀 성적으로 기능할 수 없는 사람들로 무시하는 것은 편견이며 오해이고, 독신이야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궁극적 목표에 도달하는 가장 고상한 수단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
필자는 이러한 독신주의를 고집하는 여성신학자들이 가장 훌륭한 영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결혼생활을 하지 않는 몸을 유지해야만 영적인 조건이 바로 구성된다는 것은 성경적인 균형을 깨트리는 관점이라고 본다.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성경에서 가르쳐주시는 결혼과 관련된 인간의 생활에 관한 교훈들이다. 예수님의 첫 이적은 혼인잔치에서 일어났으며, 결혼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마 19:11). 바울 사도의 견해도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혼란없이 그 중심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러한 은사를 받은 사람임을, 다시 말하면 독신주의란 엄격하게 적용해야 될 것임을 가르쳤다 (고전 7:25-40) ).

3.3.4. 호모섹스와 동성연애자들의 영성
‘영성’이라는 주제는 기독교 신앙인들의 독점물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입장에서 영성을 연구하는 세속적인 영성은 아주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고 있다. 의미심장한 개념으로서 영적인 의미들을 발견하는 것들을 영성의 재인식으로, 혹은 선불교와 마약에서 느끼는 인간의 감각을 영성이라고 하며, 마술적이요 신비로운 것들과 관계된 사항들을 영성이라고 한다. ) 이러한 영성들은 전혀 기독교적인 영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유사성을 찾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영성이란 육체적 성을 통해서 추구된다는 주장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현대 영성주의자들 가운데 여러 편의 논문에서는, 전체 숫자가 극히 일부이지만 확대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며, 영성을 말하면서도 전혀 기독교 신앙과 상관없는 동성연애 영성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은 인간의 육체적 성은 인격의 본질적인 부분이요, 결정짓는 요소임을 강조한다. 그런데, 호모 섹스를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바른 인격적 교제를 할 수 있으며, 다른 성에 대해서 열리지 않고 닫혀있는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 이런 영성은 마틴 부버처럼, 현대 종교는 기독교 교회 내에서만 거론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소외된 계층을 포함하여야 한다는 세속화를 부르짖으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

3.3.5. 라틴 히스페닉계의 영성
서구 열강의 시대에 유럽의 식민지 점령에 일환으로 로마 가톨릭이 일찍부터 선교지역으로 삼았던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그들 지역의 사회적-역사적 환경에 상응하는 영성을 주장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인간의 삶에 모형이 된다면,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포기하므로 승리자가 된 하나님이 그들의 모형이 된다는 것이다. )

3.3.6. 은사주의자들의 영성
일부 은사주의자들은 현저히 반성과 경계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원래 은사주의 운동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회복하고, 선교적 사명을 다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중상류층을 바라보면서 어떤 노력을 쌓으려는 세속적 은사주의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 따라서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는 새로운 가능성은 내적인 영성의 회복이라고 주장한다.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구약을 강의하는 골딩게이 교수는 은사주의자들은 모든 병을 고치는 것이 습관적으로 매일 반복되어지는 기계적인 사건이 아님을 상기시키면서, 때로는 질병과 고난을 견디게 하시므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음을 받아들여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입장에 따라서, 카리스마 운동 영성의 주제들을 몇 가지로 제시하였는데, 영성의 기초가 되는 여러 가지 요소들 중에서, 성도들은 사탄이 지배할 수 없음을 확실히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
특히 영성을 매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확고한 관계를 맺도록 해 주는데 있어서 아주 적절한 개념이며, 호평을 받고 있는 용어라고 하면서, 설교자는 이러한 연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과 설교자와 청중과 예식이 모두 하나로 통합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성경을 해석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3.3.7. 유대주의 영성
유대교는 토라의 내용을 실천함에 있어서 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왔다. 유대주자들은 영성을 인간의 가능성으로 규정하고, 원리주의자들과 같은 광신주의와 맹신에 빠져서 다른 종교를 핍박하거나 살인하는 것을 극복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극렬한 유대주의는 자신을 해치면서까지 남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이므로 결국 금욕주의의 육체부정과 다를 바 없으며, 이는 우상숭배와 연관되어 있음을 유념하자는 것이다. 종교에 있어서 온건함과 부드러움이 주변국들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유대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영성이다. )

3.3.8. 평신도 영성
성직자 중심의 영성에 대칭되는 개념으로 강조되는 평신도 영성은 기독신자의 거룩함을 공통의 뿌리라고 간주하면서, 상호 보충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대 평신도 영성의 핵심은 일상생활에서 체험하고 느끼는 신비적 요소들이다. 그리고 교회 생활에서 질서있는 생활을 바르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며, 사회적인 의식과 함께 선교적 자극을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 )

3.3.9. 아프리카인 흑인들의 영성
흑인들의 영성은 그들의 문화와 삶 속에서 느끼는 것들과 무관하지 않는데, 특히 춤을 추는 것, 서로 손을 만지거나 신체를 접촉하는 것, 찬양하는 것, 기도와 황홀경 등을 체험한다고 주장한다. ) 설교 중에 있는 찬송이나, 그 적용에 있어서나 신앙의 언어적 표현이 강렬하게 일어나는 점이 흑인들의 영성이라고 한다. )

4. 영성신학의 문제점

4.1. 첫째로, 영성신학은 혼돈을 피할 수 없는 모호한 개념이고,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혼합된 개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무작정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영성이란 과연 무엇인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각 교단과 교파마다 전혀 추구하는 방법과 근거가 다르고, 현대인들의 번잡한 시도로 인해서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단어가 되고 말았다.
고든 웨이크필드가 영성신학 사전에서 말한 바를 다시금 옮겨보면, “이것은 사람들의 삶을 활기 있게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초감각적인 실제들을 향해서 성장해 나가도록 도와주는 삶의 태도, 신념, 그리고 행동들을 묘사하기 위해서 널리 유행하게 된 단어”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웨이크필드는 기독교영성이란, 각각의 전통과 입장을 고려하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거하시는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거하는 것이 수단이자 목적이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용어로 영성의 개념이나, 뜻과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 다른 논문에서 웨이크필드는 몇 사람을 영성의 모델로 제시하였는데, 어거스틴의 고백, 이그나시우 로욜라의 영적인 훈련방법, 성지순례, 웨슬레의 찬양 등이다. ) 이런 구체적인 사례들도 역시 위에서 구별한 바와 같이, 영성을 사용하는 혼돈만 지속되고 있을 뿐이다. 현대의 영성신학은 혼합된 신학이라서, 영성을 설명한다고 하면서 육신이 느끼는 감각적인 것들이 추구하는 아이러니가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좀더 분명하게 영성이라는 말을 통해서, 기독교의 어떤 것을 강조하고, 무엇을 유익하게 하려는 것인가를 드러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 한국 개신교계에서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하려면, 이 용어를 분명하게, 명확하게 규정을 내려야 한다. 자신이 사용하는 단어가 이토록 모호하고도 혼돈스러운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지식인으로 현대인으로 자처하면서 사용하는 것은 복음과 상관없는 ‘미신과 허탄한 신화’를 말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4.2. 둘째로, 현대영성 신학에서 거론되고 있는 핵심 본질들은 인간 중심적 신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영성이 너무나 기교위주로 추구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영성신학의 방법론은 너무나 천차만별이다.
가. 진리의 기준으로 인간이 어떻게 느끼느냐,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를 내세우고 있다.
나. 사악한 자아 도취와 영웅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
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명령에 대해서 소홀히 할 염려와 우려가 크다

4.3. 셋째로, 기독신자들은 신앙의 핵심에서 벗어나서 지엽적인 것에 빠져서는 안된다. ) 현대 신학에서 다루고 있는 영성신학은 기독교의 신앙의 핵심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가 실종되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성자들이나, 다른 여러 방법들에 치우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닮아가면서 인격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기독교가 추구하는 참된 신앙의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교회가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할 다른 모법이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영성신학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된 생활과 가르침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 예수 없는 영성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한국 교회는 과연 예수 없는 영성충만을 어떻게 이루고자하는가?

4.4. 넷째로, 영성을 주장하려면 분명하게 성경에 입각하여 주장하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에 대한 절대 확신과 믿음에서 출발해야한다. 모든 신학의 존폐는 얼마나 그 내용이 진리에 입각해 있느냐에 달려있다. 영성을 연구하고 정립하려는 마음을 가진다면, 우선 성경으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영성신학자들은 성경적인 개념보다는 사람이나, 자연이나, 환경이나, 인위적인 방법에 몰두하고 있다.
복음주의 신약학자로 카나다 뱅쿠버의 리젠트 대학의 교수인 고든 피 박사는 기쁨과 기도와 눈물과 찬양이 함께하는 생동감이 넘치는 영성을 정립하려면, 먼저 성경해석의 기본 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
가. 우리는 먼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철저한 절대적 확신을 가지고 성경을 대해야 한다; 나. 성경을 우리 자신의 개념으로 해석하려 하지말고, 그 시대의 언어로서 이해하고 받아야 한다; 다. 우리의 성경해석은 오직 믿음의 공동체라는 기본적인 맥락에서만 수행되어져야 한다.
성경적으로 영성정립을 시도한 영국 덜햄 대학교의 스테판 발톤 (Stephen C. Barton)교수는 복음서 저자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러나, 사복음서 기록자들이 각각 다른 영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들이 일치하여 그려낸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에 대한 분명한 자료와 지침은 제시하지 않고 있다. ) 성경적 영성신학의 정립이 없는 한, 영성신학의 혼돈은 피할 수 없다.

4.5. 다섯째로, 현대 세계 교회의 영성 운동이 일시적인 유행을 받아들이는 패션(?)과 같은 일과성 행사로 끝마칠 위험이 크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세속적으로 유행하는 것들은 한 시대는 가고 다른 세대가 오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즉흥적이며, 외향적인 행사중심의 신앙생활은 말씀에 기초한 장기적인 훈련과 제자로서의 교육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4.6. 여섯째로, 칼빈과 개혁주의자들은 전혀 영성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성령의 신학자’ 요한 칼빈은, 로마 교회가 일곱가지 성례를 통해서 지배하던 구원을 믿음을 주시는 성령님의 적용사역으로 풀이하였다. 따라서 칼빈은 중세말기에 자주 거론되던 영성이라는 말을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 )
칼빈은 16세기 종교개혁을 정립한 신학자로서, 세상을 긍정하는 그 시대의 세속화된 신학을 철저히 거부하였다. 대신에 세상에서 성도는 “경건한 삶”이라는 분명한 성경적 용어를 표어로 삼아서 거룩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그토록 강조했고, 종교개혁자들이 추구했던 “경건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었다(마 16:24).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서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서 고난을 견디면서 재림과 부활의 소망을 갖고 살아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이성이나, 우리의 의지대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죽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 세속적인 비전은 이와 정반대이다. 아무리 이 세상이 하나님의 훌륭한 창조물로서 그분의 능력과 신성을 보여주는 극장이지만, 이 세상에다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것은 세상을 긍정하고 추종하는 사고를 갖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순수한 기독교 문화 건설의 원동력으로서 교회는 경건의 의무를 잘 준수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대로 예배하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딤전 5:6∼7)

결론과 남은 과제들

마지막으로 현대 영성신학자들의 여러 가지 주장들을 종합해 볼때에 영성신학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한다. ‘해 아래 새것은 없다’(전도서 1:)는 교훈을 기억해 한다. 영성신학이 21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것이요 전무후무할만한 유일의 소망이요, 신앙의 진보를 도모하는 결정적인 대안이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영성운동은 이미 오래 전에 있었던 것이요, 다시금 조명을 받고 있을 뿐이요, 앞으로 그 성취여부는 미지수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성장하기를 권하고 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벧후 3:18) 현대 영성신학이나 영성운동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이해하고 따르는 복음적이며, 분명한 목표를 제시하는 신학인가?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으시는 신학인가? 영성을 이룬 사람이 영광을 받고, 사람의 이름을 높이려는 신학인가? 사람도 신학도 모두 지나가는 것이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남는 것이다. 덧없이 인간이 이루고자하는 세속화된 기독교의 운동이 아닌가를 유심히 반문하자 않을 수 없다.
영성이라는 용어가 꼭 필요하다면, 그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분명하게 성경적으로 정립하고 사용해야 할 것이다. 기도나, 훈련이나, 명상이나, 인간의 종교적 절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개념이라는 점을 입증하고 사용하기를 바란다.
예컨대, 개혁주의 구약신학자 브루스 워키 교수는 영성이라는 말을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 중심의 생활” (God-Centered Life), “하나님 나라 중심의 생활” (A Kingdom-Centered Life), “영적인 생활의 역동성” (The Dynamics of a Spirituality)이 필요하다고 설명한 바 있다. )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사탄의 왕국과의 싸움에서 철저히 율법과 계명을 준수하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서 살아가야 하며, 성례의 합당한 회복이 필수 과제라고 지적하였다.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마땅히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절대 계명인 사랑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하는 것은, 굳이 영성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가 이미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쉬운 말로 더 잘 설명하고 있지 않는가?
필자는 이 논문에서 한국 교회의 영성신학을 다루지 않았다. 그것은 본 논문의 범위를 일차적으로 최근 영성신학의 첨단을 걷고 있는 주도자들로 한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교회에서는 세계 신학계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주고 받고 있으므로 영성 신학의 혼란상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무분별한 사용을 억제해야 한다. 심지어 ‘영성영어강좌’가 기독교 일간신문의 광고란에 등장하고 있는데, 과연 타당한 언어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한국 신학자들의 영성논의를 일별하는 지속적인 과제가 남아있다고 본다.
다만 영성을 거론하는 모든 사람들이 “성령을 좇아 행하며” (갈5:16), 죄로 인하여 부패한 영혼이었음을 회개함으로써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날로 자라나서 그리스도의 날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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